오피니언 분수대

[분수대] 귤을 팔았나 음악을 팔았나

중앙일보

입력 2015.12.15 01:05

수정 2015.12.15 01:13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안혜리
뉴디지털실장

“한정판 단독 판매, 이 조건 단 한 번 ….”

 홈쇼핑 방송을 틀어놓으면 무한 반복해 보고 듣게 되는 낯익은 광고 문구들이다. 속옷이든, 간장게장이든, 가구든 이런 문구가 적힌 푯말을 들고 홈쇼핑 쇼호스트가 소개하기만 하면 어쩜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심지어 재미까지 있어 그냥 넋 놓고 볼 때도 있다. 한참을 보고 난 뒤에야 파는 물건이 이거였구나 하고 깨달을 만큼 말이다. 주위에 이런 사람이 적지 않은 걸 보면 판매를 위해 방송한다기보다 방송을 위해 상품을 공급한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귤이 빛나는 밤에’라는 이름이 붙은 지난 11일 새벽 2시의 한 홈쇼핑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였다.

 가수 루시드 폴은 이날 자신이 제주 농장에서 직접 키웠다는 귤 한 상자와 함께 15일 발매하는 새 앨범을 2만9900원에 판매해 1000세트를 방송 9분 만에 완판했다. 매진을 자축하는 만세삼창을 하고 난 다음 40분짜리 생방송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라이브 노래와 토크 등이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매진될 때까지 노래는커녕 간단한 상품(앨범) 소개도 미처 하지 못한 상태였다.

 예능 프로그램의 경지까지 진화했다는 점에서 홈쇼핑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거나 가뜩이나 어려운 음반 판매의 새 판로를 개척했다는 등 방송 후 쏟아진 긍정적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기발하다고 칭찬만 하기엔 뭔가 꺼림칙하다. 이날 판 건 귤인가 음반인가. 아니면 그저 홈쇼핑 방송이 야심 차게 만든 예능 프로그램 한 편을 본 것인가. 아마 나뿐 아니라 그날 직접 주문전화를 건 ‘고객’도 적잖이 헷갈렸을 것이다. 방송 중 “귤만 따로 팔 수는 없느냐”거나 “귤에 음악을 끼워 파는 것이냐 아니면 음악에 귤을 끼워 파는 것이냐”는 전화 문의가 이어졌던 걸 보면 말이다. 누가 어떻게 팔아주느냐가 오로지 소비자의 지갑을 열고 닫고를 좌우하는, 다시 말해 파는 상품의 본질보다 파는 통로만이 중요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던 지난 주말 밤. 드라마가 끝나기 무섭게 포털이 줄거리를 요약한 한 언론매체의 기사를 올렸고, 순식간에 기사와는 무관한 감상평 수천 개가 댓글로 달렸다. 콘텐트의 질이나 내용과 무관하게 포털의 운용 전략에 따라 기사가 배치되는 건 이미 오래전 얘기고, 이젠 포털의 댓글 모으는 창구로까지 전락한 셈이다. 귤을 파는지, 음악을 파는지도 모른 채 여전히 포털에만 목을 매고 있는 현실이 새삼 부끄러웠다.

안혜리 뉴디지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