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같은 체제는 망해야 마땅하고 그 마지막이 머지않았다는 북한붕괴론을 우리는 꽤 오랫동안 들어왔다. 그런데 근래 들어서는 스테판 해거드 교수의 칼럼 제목처럼 ‘북한은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입장도 자주 접하고 있다. 그것은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체제가 시도하고 있는 인민 중시와 청년 중시라는 과감한 체제 변화의 실험이 생존에 보탬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평양의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경제활동 통제를 점진적으로 풀어 가며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강조하는 북한판 포퓰리즘이라 할 수 있는 이 실험은 장마당의 활성화로 북한 전역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국제기구의 파견원을 포함한 많은 북한 방문객이 전해주고 있다. 인민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최고지도자가 되겠다는 것이 김정은의 꿈이라는 추측도 가능한 대목이다.
우리는 북한의 변화 과정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통일로의 급진이나 과속은 철저히 자제하는 인내력을 견지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재정이 갑작스러운 통일의 충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김병연 교수 등 여러 경제학자의 경고를 가볍게 흘려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재정 파탄이나 급격한 증세, 외국 자본의 대거 이탈 등을 감내할 자신이나 각오 없이 무작정 빠른 통일만을 주장하는 것은 자제해야 마땅하다. 통일 이후 북한 주민의 선거 참여, 남쪽으로의 통행 및 이주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제 등은 생각만 해도 신중과 서행이 통일 과정에서는 중요한 덕목임을 재확인하게 된다.
통일정책의 전개 과정에서 평화를 강조하며 신중성을 요구하는 것이 결코 확실한 전략과 적극적 추진 자세의 중요성을 가볍게 보자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 아시아 나아가 지구촌 차원에서 전쟁, 폭력 그리고 테러에 강력히 반대하는 평화정책을 한국 외교와 통일전략의 일관된 원칙으로 견지해야 한다. 북한 변화에 대한 기대도 바로 그러한 평화 원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평화전략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를 뒷받침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 국민적 합의와 안정된 민주정치의 운영 과정이 필수 요건임을 재삼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달 초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의 부음에 접하며 독일 지도자들이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이란 양대 정당의 협력적 여야 관계를 이끌어나갔던 업적에 새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협력 관계가 없었다면 과연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을까. 여야 정당의 지도자들이 국가 통일과 같은 역사적 과제에 진지한 고민을 함께하며 입장을 조율하고 전략을 가다듬을 능력이 없다면 그러한 체제의 미래가 어디로 흐를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이치 아니겠는가. 북한 변화에 대한 평가와 통일전략의 결정 과정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그러한 체제 능력의 시험이라 하겠다. 조용히 상의하고 확실한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정치체제와 지도자들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성공적 통일전략의 수립과 추진을 위해서는 실시간 보도 경쟁보다는 오히려 조용히 상황의 진전을 지켜보며 도와주는 언론의 새로운 관행도 기다려진다.
이홍구 본사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