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세 살 부터 여든까지 쓰는 평생의자 … 그게 바로 디자인 혁신”

중앙일보

입력 2015.11.21 00:28

수정 2015.11.2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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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의자 디자이너 피터 옵스빅이 나무를 닮은 의자 ‘글로브 가든’에 앉았다. 의자에 앉아 항상 다리를 구부리고 시야도 좁아진 현대인에게 “원시시대 나무에서의 삶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의자다. 왼쪽 작은 사진은 등받이 대신 정강이 받침대가 있는 흔들의자 ‘베리어블 밸런스’.


몸에 가장 자주 닿는 가구, 건축·디자인·기술이 융합된 예술, 개인의 안목과 취향을 드러내는 기호품…. 의자에 붙는 수식어들이다.

 노르웨이의 산업디자인 거장 피터 옵스빅(76)은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해 줄 가구’.

[사람 속으로] 노르웨이 산업디자인 거장 옵스빅
의자는 인간과 가장 밀착된 가구
앉는 동시에 쉽게 움직일 수 있어야

지난 4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널찍한 작업실엔 그가 지난 50년간 빚어낸 의자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나무 모양 의자(글로브 가든), 나선형 철재 의자(파이톤), 정강이 받침대가 있는 흔들의자(밸런스), 하이체어(트립트랩·노미)…. 그의 의자들을 쭈욱 좇아가다 보니 피아노·콘트라베이스·색소폰이 보인다. 그는 매년 재즈페스티벌에 나가 연주하는 재즈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자, 어느 의자부터 앉아 볼까요?” 편지지에 꾹꾹 눌러 쓴 글씨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옵스빅은 스타급 가구 디자이너가 넘치는 북유럽에서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디자이너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디자인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앉아 있으면서도 몸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인체공학적인 의자를 추구한다. 등허리 대신 정강이를 받쳐 주는 ‘베리어블 밸런스’가 대표적이다. 옵스빅은 “등받이 대신 정강이나 가슴을 받쳐 주는 의자에서 몸이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사각형 모양의 등받이와 좌판에서 모서리를 잘라내 십자(十)형으로 만든 ‘카피스코’나 거대한 나무 모양의 ‘글로브 가든’도 비슷한 의도가 담겨 있다. 그는 “우리 선조들은 나무에서 살았고 침팬지는 지금도 나무를 올라타며 온몸을 자유자재로 쓴다”며 “우리 몸을 더 자유롭게 쓰게 해 줄 의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972년 피터 옵스빅과 스토케의 협업으로 세상에 나온 의자 ‘트립트랩’은 키에 상관없이 항상 팔꿈치는 탁자 위에, 발은 발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디자인됐다. 몸이 자라면 의자도 함께 자란다.


그는 이 마음으로 어린이 의자도 디자인했다. 1972년 가구업체 스토케와 협업으로 시장에 내놓은 하이체어(높은 의자) ‘트립트랩’이다. 성장 단계에 따라 높낮이를 14단계로 조절할 수 있다. 유아 때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평생 동안 앉을 수 있는 의자로 유명하다. 트립트랩의 누적 판매량은 1000만 개. 핀란드 디자이너 알바 알토(1898~1976)가 1932년 내놓은 후 80년 이상 인기를 유지하는 의자 ‘스툴’(800만 개) 이상이다.

피터 옵스빅은 “일반적인 성인용 의자에서 아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에서 시작했다”며 “두 살짜리 아들 토르가 허공에서 발을 휘저으며 대롱거리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아들은 식탁 위에 겨우 목을 걸치고 앉아 팔을 허둥댔다. 밥을 혼자 먹을 수도, 가족들과 눈을 맞출 수도 없었다. 어린이가 어른 옷을 뒤집어쓴 듯한 불편함이 역력했다. 옵스빅은 “트립트랩은 발판과 좌판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으니 키가 작든 크든 항상 발을 발판 위에 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아이의 의자 높이를 맞추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컴퓨터와 커피, 스마트폰을 놓고 일할 수 있는 의자 ‘글로브 콘셉트’. 두 개의 테이블은 안 쓸땐 접어놓을 수 있다.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북유럽 사람들에게 식탁은 집 안의 아레나(arena·무대)다. 공간을 공유하는 가족 공동체에게 역동적이면서 따뜻한 기억이 시작되는 곳이다. 식탁에서 얘기하고 의논하고, 밥을 먹거나 숙제를 한다. 노트북을 펴고 식탁에서 일할 때도 있다. 등을 뒤로 대고 퍼져 앉는 소파와는 다르다. 식탁 앞에선 몸을 앞으로 당겨 앉게 된다.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은 나이나 몸집에 관계없이 평평하고 동등한 관계를 맺는 데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부모와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다.”

- 가구 중에서도 왜 의자를 만드나.

“의자는 인간의 몸과 가장 밀착된 가구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역사적으로는 의자의 기원을 두 가지로 꼽는다. 하나는 말 타는 기수, 또 하나는 밤새 책상 앞에 앉아서 경전을 필사했던 수도승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의자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준 쪽은 기수다. 끊임없이 위아래로 몸이 흔들리는 기수처럼 인간은 의자에서도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의자는 인간의 몸을 지탱해 주는 동시에 (디자인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몸을 더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가구라는 점에서 내겐 디자인으로 도전해 볼 만한 세계다. 개인적으로는 가구 디자이너였던 부모님의 영향도 있다.”

- 대부분의 사람은 식탁보다는 사무실 책상에 더 오래 앉아 있다.

“그래서 오피스 공간을 주목한다. 현대인에게 ‘의자에 앉는 행위는 또 다른 흡연’이다. 의자에 걸터앉아 반쯤 서서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의자나 등받이를 가슴에 받치고 일할 수도 있는 의자가 필요하다. 사람보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의 스크린과 더 자주 상호작용하는 현대인에게 의자는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 오래 사랑받는 의자들은 어떤 점이 특별한가.

“무엇보다 기능이 좋아야 한다. 의자는 기능적이지 않으면 오래 쓸 수 없다. 둘째는 스타일이 다르다. 지나치게 유행을 타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너무 화려한 디자인은 1년만 지나도 촌스러워 보인다. 수십 년 전에 나온 올드(old)한 제품이지만, 결코 올드패션(old-fashioned·구식)이지 않은, 적정선의 스타일이 중요하다. 셋째는 역시 품질이다.”

- 스칸디나비안 스타일이 인기다.

“음…. 스칸디나비안에선 지나치게 과시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소탈하다. 이유가 있다. 석유 유전이 발견(1969년)되기 전까지만 해도 노르웨이는 가난한 나라였다. 게다가 춥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제한된 자원으로 단순하게 풀어낼 줄 알아야 했다. 오랫동안 풍족하고 화려했던 남유럽, 가령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과는 처지가 달랐다. 부유층이 많은 이탈리아에선 화려한 가구나 예술품을 사들이고 소비할 사람이 많았다. 돈이 넘치니 일상생활의 문제를 간결한 방식으로 해결하거나 기능적인 제품을 만드는 데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을 것이다. 지금은 노르웨이가 더 잘사는 나라가 돼 격세지감이지만(웃음).”

(※노르웨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15년 국제통화기금 기준 8만749달러로 세계 4위다. 한국(2만8739달러)의 2.8배다.)

트립트랩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아이에겐 좋은 의자 같은 것보다 깨끗한 물, 음식, 그리고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아버지에서 세 손자의 할아버지가 된 그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디자인을 강조했다.

- 좋은 디자인이란 뭘까.

“쓰는 사람과 사회에 이로운 가치를 주는 디자인이다. 또 투입되는 자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사회가, 지구가 지속가능하려면 우리는 가구를 만들 때도 투입되는 자원량을 기존의 10분의 1로 줄여야 한다. 북유럽에선 주변에 좋은 나무가 많아서 목재 가구를 즐겨 썼지만 이제는 이유가 더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서다. 한번 만들어 100년 이상 대를 물려 쓸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이 필요하다.”

피터 옵스빅과 그의 가족은 지난 2000년 ‘거대한 도전을 위한 작은 재단(The Minor Foundation for Major Challenges)’을 설립했다. 유럽·남미·중국 등에서 전개되는 기후변화 예방 캠페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통념에 도전해 온 옵스빅은 의자 외에도 짐수레로 변신하는 스쿠터, 의자로 변하는 장식품 등도 디자인한다. 그는 “이노베이션(혁신)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새롭고 실험적이라고 해서 구현되는 게 아니다. 혁신이 거기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쓰는 사람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디자인이라면 혁신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오슬로=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

[S BOX] 간결·실용 … 인기 끄는 스칸디나비안 스타일

최근 수년간 국내 가구·인테리어·디자인 업계는 ‘노르딕 앓이’를 하고 있다. 북유럽의 라이프 스타일을 주제로 한 전시회들도 심심찮게 열린다. 스칸디나비안 감성이란 뭘까.

 스칸디나비아는 북해와 발트해로 둘러싸인 산악지대 반도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여기에 있다. 같은 노르딕 인종인 인근 핀란드·덴마크까지 합쳐 ‘북유럽 4개국’으로 통한다. 흐리고 추운 겨울밤이 긴 이들 지역에선 가족과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남들 눈에는 안 띄지만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가구·그릇 같은 생활 공예가 발달했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은 주방 조리도구부터 가구, 패브릭, 전자제품 등 다수 브랜드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싫증 내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비결이다. 또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으로 화려함보다는 누구나 쓸 수 있는 디자인과 기능을 중시한다. 예를 들어 텍스타일 브랜드인 ‘마리메꼬’는 안내원 유니폼에서 출발했다.

 이런 가치를 대표하는 브랜드로는 이케아(가구)를 비롯한 이딸라·로스트란트·톤피스크(식기)나 피스카스(원예)·뱅앤올룹슨(음향기기)·아르텍(가구·조명)·일렉트로룩스(생활가전) 등이 있다. 디자인 전문가 안애경씨는 저서 『북유럽 디자인』에서 “북유럽 디자인은 대물림이 가능하도록 끝맺음이 완벽하고 솔직하다”며 “변함없는 솔직함이 주목받는 비결”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