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패션 인생 50년을 기리는 전시회 ‘앤솔로지(ANTHOLOGY: Jinteok, Creation of 50 Years)’가 지난 8일 서울 동대문 디자인프라자(DDP)에서 막을 내렸다. 전시된 작품 80여 점은 디자이너 진태옥 개인의 역사이자 한국 패션사의 한 장(章)의 기록이다. 진태옥 디자이너의 패션 세계를 들여다봤다. ‘집념’이란 단어를 빼놓고는 그를 설명할 수 없었다.
패션 인생 50년, 진태옥 디자이너
전시회에서 만난 진태옥 디자이너는 올 블랙 차림이었다. 슬림한 상의, 통이 넉넉한 바지는 요즘 유행하는 ‘꾸미지 않은 듯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놈코어’ 스타일이었다. 그는 쏟아지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과 사진 촬영을 매끄럽게 소화해 낼 정도로 기운이 왕성했다. 그 에너지의 원천은 웬만한 젊은이도 흉내내기 어려운 운동량과 끊임없는 호기심에서 오는 듯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신문 두 개를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샅샅이 읽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가 참 재미있어요. 운동은 일주일에 2~3번 하는데, 한 번에 3시간씩 해요. 스트레칭 20분, 근육 운동 30분 한 뒤 1시간 동안 3.5㎞를 걸어요. 수영도 하는데, 한 번 입수하면 1000m를 오갑니다.”
날씬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평생 노력하다 보니 놀라울만한 운동량이 습관으로 굳어졌다. 그는 매일 서울 청담동에 있는 작업실로 출근한다. 디자인 스케치를 하고, 패턴·샘플·가봉도 직접 한다. 가봉·샘플·품질 검사 등 단계마다 옷을 직접 입어본다.
“피팅 모델을 쓸 수도 있지만 그러면 옷의 진짜 느낌을 알 수가 없어요. 여유분도 디자인인데, 얼마나 편한지는 입어봐야 알거든요. 옷 한 벌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4차례 입어보는데, 모두 내가 직접 합니다. 평생 저녁밥을 두 숟가락 이상 먹지 않았어요. 대신 아침은 과일·채소·유제품을 골고루 먹고, 점심은 잘 챙겨 먹지요.”
운명처럼 디자이너가 되다
“무언가에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노라 노(87) 선생님이 긴 속눈썹에 화려한 매니큐어를 한 채 긴 담뱃대를 물고 앉아 있었는데,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는 거에요. 이 길을 가리라 결심한 순간이었죠.”
패션 디자인 학원을 찾아가 바느질부터 배웠다. 미8군이나 일본에서 패션 잡지를 구해다 보면서 감각을 키웠다. 한 의상실에 들어가 요즘으로 치면 무보수 인턴, ‘열정 페이’를 받고 일했다. 제일 먼저 출근해 청소하고, 원단과 주문서를 순서에 맞춰 쌓아놓고, 핀 쿠션에 핀을 촘촘히 꽂아 놓고 ‘디자이너 선생님’을 기다렸다. 가끔 디자이너가 없을 때 치수를 재거나 가봉을 하러 오는 손님들이 있었다. 디자이너 몰래 손님 치수도 재고 스타일도 잡아줬다. 몇 차례 호되게 혼이 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러 그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 서울 컬렉션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일화가 재미있다. 파리·밀라노 같은 패션 도시들은 해마다 봄·가을로 패션위크를 열어 자국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무대에 선보일 수 있게 했다. 한국 디자이너들도 작품을 뽐낼 무대가 있어야 패션이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패션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문제는 그때까지 제대로 된 패션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패션쇼 입장권을 구할 길이 없어서 일단은 도쿄에 있는 이세이 미야케 매장에 갔습니다. 지금 돈으로 수천만원어치 옷을 산 뒤 ‘패션쇼 티켓을 구해주지 않으면 모두 환불하겠다’며 떼를 썼어요. 점원이 난감해 하면서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더니 파리에서 열리는 이세이 미야케 쇼 티켓 한 장을 구해줬어요. 박윤수·설윤형씨 등 동료 디자이너 7명과 파리로 갔습니다.”
입장권은 한 장인데요.
지금 한국 패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화이트 셔츠와 절제의 미학
그는 1993년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패션쇼)에 진출했다. 그때의 충격은 이후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기자회견에서 프랑스 기자가 ‘진태옥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했어요.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평생 받아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거든요. 너무 당황해서 엉뚱한 말을 했어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웃음)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진태옥의 옷은 어떤가요.
화이트 셔츠는 진태옥 디자이너의 상징과도 같다. 셔츠의 길이와 품, 목선과 앞선, 깃 등을 자유자재로 변주해 중성적인 느낌이면서도 여성미를 드러내는 마법을 부린다. 빳빳한 하얀 무명천, 하늘거리는 쉬폰, 촘촘한 레이스가 그의 손을 거치며 여성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내는 옷으로 태어난다.
최근 한 패션 잡지가 10대와 20대 여배우에게 진태옥 디자이너의 옷을 입힌 화보를 찍었다. 팔순이 넘은 디자이너가 만든 옷은 앳된 여배우들을 더 싱그럽게 보이게 했다. 칼 라거펠트(82) 샤넬 수석 디자이너의 옷이 16세인 모델 릴리 로즈 뎁에게 더 없이 잘 어울리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젊은 감성을 유지하는 비결은 뭔가요.
글=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