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 장비만 다른 게 아니다. 인터넷 초강대국에서 온 관광객답게 어디서든 와이파이를 찾았다. 나부터도 보라카이의 아름다운 해변을 만났을 때보다, 즉석에서 보낸 사진에 ‘열폭’하는 친구들 카톡을 보고서야 여행 온 실감이 났다. 호텔과 식당은 물론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에 나가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을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토속 음식점들 사이로 어울리지 않게 서 있는 스타벅스와 맥도날드는 그래서 늘, 에어컨과 무선인터넷을 찾아온 한국인들로 붐빈다. ‘한국인’ 티를 내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조급함이었다. 현지인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면전에서 한국말로 짜증을 내곤 한다. “조금만 기다려”라고 하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웬(When)? 웬?”을 외치기 일쑤란다.
우리의 ‘빨리빨리’ 습성은 필리핀에서 돌아올 때 정점을 찍는다. “돈 줘~ 줄 설게.” 카티클란공항 주변에서 한국인들만 골라 은밀히 제안하는 현지 심부름꾼들. 이들에게 여행객 한 명당 8000원 정도만 주면 출국 절차를 대신해준다. 짐 검사, 화물 수속부터 티켓 발급까지 풀 코스다. 우리의 급한 성격이 만든 웃지 못할 이 서비스에 어느새 현지 공항과 항공사까지 결탁했다. 심부름꾼 고용 없이는 공항에 일찍 들어갈 수 없게 막아놓고, 항공사는 심부름꾼 전용 창구를 운영한다.
해외 휴양지에서 즐겁게 추억을 만들었으면 그만 아니냐고? 아쉽지만 여행에서 얻은 그 행복도 오래 못 가 ‘빨리빨리’ 사라진다. 미국 갤럽이 올 초 휴가를 떠난 143개 국가의 1000명씩을 대상으로 전날의 경험을 물어봤다. 어제 편히 쉬었나요? 존중을 받았나요? 많이 웃었나요? 즐거운 일이 많았나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토대로 만든 ‘긍정적 경험 지수’에서 한국인은 118위를 차지했다. 필리핀은 5위였다. 행복은 결코 페소(필리핀 화폐) 순이 아니었다. 휴양하러 떠난 여행길에 피곤함만 묻어왔다.
손광균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