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 세계화란 흐름 속에서 민주화는 점차 역사의 주류가 돼 왔다. 영국의 의회제도, 미국의 독립과 헌법 및 권리장전, 프랑스대혁명과 인권선언,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등이 상징하듯 마그나 카르타가 제시한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의와 협약에 근거한 법치주의는 오늘의 지구촌 대부분의 사회가 그 타당성을 부인하지 못하는 보편적 규범이 되었다. 우리의 3·1독립선언서나 대한민국 헌법도 바로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에 적극 동조한 본보기라고 하겠다.
동양 특히 한국에서 서양과 같은 자연법사상이나 사회계약론이 대두됐었는지 여부는 단정적 설명보다 임의적 추론에 맡겨야 할 것이다. 공자를 비롯한 고전적 유교 대가들의 훈화적 가르침을 넘어 자연과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와 사회 및 정치 규범과 제도의 처방을 새롭게 시도한 것은 송(宋)의 주자였다고 생각된다. 마그나 카르타가 발효된 1215년은 고려시대의 고종 2년으로 귀족 통치 시기를 지나 최충헌으로 대표되는 무신정권 시기였다. 그 이후 고려 후기로 가면서 문신 등용과 신흥 사대부의 역할이 현저해지면서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성리학적 추세가 상승했다. 이러한 주자학적 경향이 조선조 양반관료 사회의 제도화에 공헌했고 농민의 지위 상승과 천민의 양민화 등 국민국가적 규범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선조 후기의 실학파 학자들이 사회계약을 강조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국민의 복지와 직결된 실용적 과제들에 관심을 쏟는 민본사상에 투철했고, 특히 천주교인이 된 경우에는 서양적 민주이념이나 인권론을 포용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19세기 말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입헌정치로의 개혁을 주장하다 투옥됐던 이승만이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도 결코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다. 2대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110년의 한국사는 반제국주의 식민지 투쟁인 독립운동과, 경제적 빈곤과 종속으로부터 탈피하려는 근대화 및 산업화 노력, 그리고 권위주의적 정치폭력에 항거하는 민주화 투쟁으로 점철됐다. 한마디로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국민의 손으로 제정된 헌법과 법질서로 운영되는 민주국가를 지향하는 끈질긴 범국민적 노력이었다. 28년 전, 권위주의 시대를 넘어서는 민주화의 성공은 마치 한국적 마그나 카르타를 선포하는 듯싶은 감격의 순간이었다.
불과 2년 후면 30년 동안 여섯 대통령에 걸친 민주국가 운영의 실험이 첫 세대를 마감하게 된다. 87년 체제로 불리는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과연 제도화와 국가 운영의 효율성 차원에서 성공했는가. 헌법정치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철저했는가. 국민의 의사와 선택을 충실히 대표하는 대의제도가 확립됐는가. 불평등과 빈곤을 계속 축소시켜 가는 사회정의의 실현이 궤도에 오르고 있는가. 이런 일련의 테스트는 오늘의 한국이 피해 갈 수 없는 국가적 시험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마그나 카르타와 민주적 리더십’이란 주제로 ‘에든버러대학 해위 윤보선 기념 심포지엄’이 다음주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하겠다. 해위 선생이 겪었던 민주화의 진통도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된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