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역주의 구도가 달라지고 있다. 지역주의란 특정 지역공동체에 대한 일체감을 뜻하는 말. 정치적으로는 영호남 간 지역감정이 한국의 지역주의를 상징해 왔다. 그러나 영호남에서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고 있다. 영호남간 지역감정은 지역의 실리를 우선시하는 수도권-비수도권의 구도로 옮겨가는 모양새다. 여기에 세대간 차이가 두드러지면서 출신 지역에 상관 없이 노장년층은 여당을, 청년층은 야당을 지지하는 ‘여노야소(與老野少)’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서울 집중에 대한 박탈감이 큰 영향
호남소외론에서 지방소외론으로
젊은 층에선 ‘고향’ 의식 미미
정치권 지역감정 조장 위험 여전
눈에 띄는 변화는 소득수준에 따른 투표행태다. 최근 한국정치학회보에 실린 논문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계층균열 구조의 등장』(이용마 서울대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호남 지역의 경우 2012년 대선에서 가계소득이 평균의 150% 이상에 속하는 ‘상층’ 유권자의 박근혜 후보 지지도는 18.2%로 전체 평균 지지율(12.7%)보다 높았다. 영남에서도 문재인 후보가 화이트 칼라인 ‘신 중산층’(TK 27.8%·PK 60%)의 지지를 상대적으로 더 받았다. 1997년 대선에서 호남의 상층 유권자로부터 100% 지지를 받았던 김대중 후보가 영남의 신중산층에서 18.5%의 낮은 지지를 받았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지역주의의 인력(引力)보다 강력한 계층의식이 점점 고개를 들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추세는 2002년 대선 때부터 나타났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호남에서 상층 지지율(14.3%)이 가장 높았고, 노무현 후보는 영남에서 다른 계층에 비해 신중산층의 지지를 가장 많이(57.7%) 받았다. 이 연구원은 “상층과 신중산층이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 성향에 따라 지역성향과 다른 차별적인 투표 행태를 일관되게 보이고 있다”며 “강력한 지역 균열 아래서도 계층간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현상은 종전의 ‘호남소외론’이 경제·문화의 수도권 쏠림 현상 탓에 ‘지방소외론’으로 변형되고 있기 때문(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으로 풀이됐다. “모든 이익의 창출과 혜택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소득 격차나 상대적 박탈감 정도가 정당 지지를 결정짓는 계급투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란 분석이다.
또 젊은 세대는 과거처럼 지역주의의 영향권에 묶여 있지 않다. 최근 국민대통합위원회 갈등관리포럼에서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발표한 『청년세대 이념갈등의 현실과 전망』에 따르면, 지역을 상징하는 ‘고향’은 5060세대의 이념 성향에 영향을 미쳤지만 2030세대에는 영향을 주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청년층은 출신지역과 관계없이 상대적으로 진보 성향의 야당에 대한 지지율이 더 높다는 것이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2~24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새누리당은 2030세대(19~23%)보다 5060세대(56~71%)의 지지율이 높았고, 새정치연합은 5060세대(9~17%)에서 크게 뒤진 반면 2030세대(24~40%)에서 우세했다.
문제는 지역주의가 약해졌다곤 해도, 정치적으로 조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병근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민주화 이후, 특히 김대중 정부 시절 급격히 약화됐지만 아직도 이념적인 조작에 의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했다. 또 윤성이 교수는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이나 지역 갈등은 정당정치의 영향을 받고 있다”며 “정당정치의 패턴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