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링페이는 스스로를 ‘문화공작인’이라고 소개했다. 젊은 시절 미술 잡지에서 일한 것을 시작으로 영화, 미술, 문예 분야에서 활동해 왔다. 일본 유학과 대만 생활을 거쳐 1999년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영화 ‘루쉰’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몇 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12년 루쉰기금회를 창설했는데 문화계에 쌓아둔 인맥이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를 만난 건 지난 18일 상하이 사범대학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관련 강연회에서였다. 루쉰기금회가 이 강연회를 공동주최했다.
저우링페이 루쉰기금회 비서장
할아버지 빼닮은 외모 눈길
위안부 할머니 강연 주선도
- 루쉰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일본인 친구도 많았는데….
“그렇다. 1936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본인 친구가 많았고 마지막으로 자리를 지킨 의사도 일본인이었다. 나도 80년대 일본으로 유학가 일본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중·일 우호 관계를 갈망한다. 그런데 아베 신조(安倍晉三) 정부 출범 이후 양국 관계가 이렇게 악화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 루쉰 선생이 살아계신다면 일본인 친구에게 뭐라고 할까.
“역사를 똑바로 보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거를 외면하면 미래를 볼 수 없다. 댜오위다오(釣魚島) 문제를 일으키고 안보법제 등을 모두 뜯어고친 것은 역사를 바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행위다. ”
- 한국과의 교류는 없나.
“개인적으로 한국에도 많은 친구가 있다. 예전에 한국의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아 참석한 적도 있다. 루쉰기금회가 활동 영역을 넓혀 가는 과정에 루쉰의 독자가 많은 한국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근래 한국에서의 루쉰 연구 수준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는 일본에서의 루쉰 연구가 왕성했다. 루쉰이 젊은 시절 일본에서의 유학 경험을 통해 중국의 현실에 눈을 뜬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요즘은 한국에서 풍부한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 외세의 침략을 받은 비슷한 역사적 경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국제루쉰연구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데 그 모임 회장은 한국외국어대학의 박재우 교수가 맡고 있다. 이 때문에 자주 만나고 함께 회의를 개최하는 등 한국과의 교류가 많다.”
상하이=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