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사살범 “난 폭발 기다린 화약통 … 조승희에게서 영감”

중앙일보

입력 2015.08.28 00:56

수정 2015.08.28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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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중 피살 사건이 벌어진 미국 버지니아주 하디에서 26일(현지시간) 주민들이 하트 모양 촛불을 밝히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범인 베스터 리 플래내건이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올린 살해 당시 영상(오른쪽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하디 AP=뉴시스]

범인 플래내건
기자 2명이 피살되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된 ‘살해 생방송’으로 미국 사회가 충격에 휩싸였다. 생방송 도중 피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데다 범인이 살인 장면을 촬영해 트위터 등에 올려 방송과 SNS가 생명을 앗아가는 순간을 전하는 수단으로 악용됐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가슴이 찢어진다”며 한탄했다.

 자살한 범인 베스터 리 플래내건(41)은 범행 2시간 후 ABC 방송에 보낸 ‘자살 노트’라는 제목의 문건에서 스스로를 “폭발을 기다리는 화약통”이라고 지칭해 분노가 총격 살인의 동기임을 알렸다. 그는 문건에서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건 교회 총격 사건”이라며 지난 6월 찰스턴 흑인 교회 사건을 범행 동기로 들었다. 그는 당시 총기 난사를 자행한 백인 청년 딜런 루프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인종 전쟁을 원한다고? 그럼 해보자”라고 썼다. 또 2007년 버지니아공대에서 총기를 난사했던 조승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자살 전 방송국에 ‘인종전쟁’ 문건
인종 차별 심한 곳서 유년시절
화 잘 내 1년 못 가 방송국서 해고
“불화를 흑인·게이 차별로 인식”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인종 전쟁’을 거론한 플래내건은 백인 거주 지역인 캘리포니아주 이스트 오클랜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플래내건의 부친은 샌프란시스코대학의 학장을 지냈고 모친은 교사였다. 당시 이웃이던 흑인 록산 바커는 “플래내건 가족은 그 동네에 들어온 세 번째 흑인 가구였다”며 “당시 인종 차별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플래내건이 생방송 살인극을 자행한 직접적인 계기는 직장에 적응하지 못한 채 외톨이로 지낸 데 따른 분노로 보인다고 미국 언론들은 분석했다. 플래내건은 2012년 버지니아의 WDBJ 방송국에 입사한 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해고됐다. 제프 마크스 WDBJ 국장은 “화를 잘 내 직원들이 그와 함께 일하기를 피했다”고 말했다. WDBJ가 플래내건을 해고할 때도 그가 문을 거세게 닫아 놀란 직원들이 사무실로 들어가 숨어 경찰을 불렀을 정도였다. 앞서 플로리다주의 한 방송사에서 일했을 때도 플래너건은 동료들을 주먹으로 위협해 해고됐다.

 반면 플래너건은 동료들과의 불화를 흑인이자 게이인 자신에 대한 차별로 받아들였다. WDBJ에서 해고된 뒤 그는 이 방송사를 인종 차별로 고소했지만 기각됐다. 그는 트위터에 자신이 살해한 WDBJ의 여기자 앨리슨 파커(24)와 카메라 기자 애덤 워드(27)가 자신을 차별했다고 주장했다. 파커는 인종차별적인 말을 했고, 워드는 회사 인사부에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래너건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WDBJ 측은 조작됐다고 일축했다.


 미국 사회를 경악하게 한 생방송 살인극에 오바마 대통령은 “이 나라에선 총기 관련 사건으로 숨진 사람이 테러로 죽은 사람보다 더 많다”며 의회에 총기 규제를 강화할 것을 촉구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트위터를 통해 “가슴이 찢어지고 분노가 치민다”며 “이제는 총기 폭력을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의회엔 지난 3월 총기 구매자의 신원 확인을 강화하는 총기규제법안이 재발의됐지만 미국총기협회(NRA) 등의 로비로 법안 심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