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 닷새 뒤인 지난 20일 밤, 나는 김 위원장이 ‘완전무장 전시체제’를 공표하는 것을 보며 한반도의 총성은 잠시 멈춘 것일 뿐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소중한 금수강산이 전쟁터로 변하고 꿈이 사치가 되는 일이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는 걸 재차 확인했습니다.
레마르크의 소설 제목과 달리 한반도의 서부전선은 현재 일촉즉발입니다. 21일 조선중앙TV에선 분홍빛 저고리를 입은 여성 아나운서가 “군사적 망동” “도발 광기” 등 폭력적 언어를 쏟아낸 직후 선전 가요인 ‘우리의 총대는 용서치 않으리’를 내보냈지요. 화면 가득 잡히는 전쟁 무기는 섬뜩했습니다. 북한 군인의 눈빛은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적의로 똘똘 뭉쳐 보였습니다.
북한의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이 49일 앞으로 다가왔지요. 김 위원장은 화려하게 기념하고 싶을 겁니다. 여러 ‘이벤트’를 계획 중이겠죠. 그 도발의 강도에 따라 평화와 통일 두 단어는 더 멀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북측에서 자꾸 핵무기를 언급할 때마다 나는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폭 투하를 앞두고 히로시마(廣島)·나가사키(長崎) 주민들에게 뿌렸다는 삐라에 적힌 글이 떠오릅니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죄 없는 민간인은 피하라.”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죄 없는 민간인들’이었습니다.
일본 TBS 방송이 지난 8일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어느 미국인 노병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폭 투하는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주만을 잊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도발의 악순환은 무고한 민간인의 꿈뿐 아니라 목숨까지 앗아갑니다.
서울의 출근길에서 만난 20대 여성 직장인은 애인과 “내일 우리 어떤 영화 볼까”라며 해맑게 웃고 있었습니다. 오늘 평양 시내 냉면 전문점 ‘해당화’에도 연인들이 넘친다고 하더군요. 이들의 꿈을 빼앗을 자격이 김 위원장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서부전선엔 이상이 없어야 합니다. 아니, ‘서부전선’ 자체가 한반도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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