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준비위원회 민간부위원장
전 주중대사·서울대 교수
많은 사람이 그리는 통일은 지도 속에 존재한다. 단절된 국토가 다시 하나로 이어지고 갈라진 민족이 다시 합쳐 단일민족국가를 형성하는 통일이다. 그러나 이런 통일은 분단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는 복고적 통일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영혼이 빠진 육신적 통일이다. 그림으로 치면 정물화에 가깝다. 한때 통일부가 국토통일원이라 불렸던 시절 정부가 추구하던 통일과 비슷하다.
릴레이 기고 ⑦ 정종욱
통일준비위원회 민간부위원장
전 주중대사·서울대 교수
장장 1400㎞에 걸친 평화 오디세이의 길을 따라가면서 목격한 중국의 동북지방에는 국토 개조공사가 한창이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해 490㎞를 달려온 두만강은 동해를 15㎞ 남긴 팡촨(防川)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렇게 바다로 나갈 길이 막혀 버린 중국의 선택은 우회 전략이었다. 나진과 선봉을 통해 동해로 나가기 위해 훈춘(琿春)과 그 배후지역인 창춘(長春)과 옌지(延吉), 투먼(圖們)을 고속도로로 연결시키는 게 그 전략의 1단계였다. 시진핑(習近平) 정부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서편제인 셈인데 일대일로의 동편제라 할 수 있는 서역 실크로드 건설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서편제와 동편제가 완성되면 일대일로의 꿈이 양 날개를 펼쳐 우리의 머리 위로 훨훨 날아가게 될 것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산에서 멀지 않는 포시에트와 나선과 훈춘을 잇는 작은 삼각 네트워크를 잡아당기면 중국의 지린(吉林)과 북한의 청진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대형 삼각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이 삼각 네트워크를 좀 더 확장하면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의 동북 3성 대부분을 품은 거대한 신천지가 나타난다.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하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큰 경제협력의 대형 무대가 된다. 이 신천지가 올 9월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이 직접 주재할 동방경제포럼을 통해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에 한국의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 시진핑이 꿈꾸는 위대한 중국의 부흥과 푸틴이 전력투구하고 있는 동방 부활의 꿈이 서로 만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네트워크 통일 한국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두만강이 끝나는 지점인 중국의 서쪽 땅끝 마을 팡촨에는 “한눈에 세 나라가 보인다(一眼望三國)”는 중국말 표지가 서 있었다. 15년 전 처음 왔을 때는 잡초뿐이었던 군사지역이 이제는 관광지로 단장하고 있었지만 멀리 보이는 북·러 국경 철교는 낡은 옛 모습 그대로 하산과 나선을 힘들게 이어 주고 있었다. 북한의 나선시를 떠난 기차는 이 철교를 지나 러시아의 하산과 블라디보스토크로 연결되면서 시베리아횡단철도(TSR)가 돼 유럽의 심장부로 들어간다.
서울에서 독일의 베를린까지 1만4400㎞로 세계에서 가장 긴 이 철도는 냉전시대의 종착역이자 우리의 네트워크 통일을 향한 대장정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철원의 백마고지에서 북한의 평강까지 불과 25.3㎞의 끊어진 경원선이 복원되면 한반도종단철도가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된다. 이 철도를 따라 부산과 목포에서 출발해 신의주와 원산을 지나 중국의 동북지방과 러시아의 연해주에 이르는 방대한 공간에서 주변 국가들과 함께 경제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 나가는 게 우리가 준비해야 할 통일 한국의 미래상이다. 그것이 대륙 안에 존재하면서도 대륙으로 연결되지 못한 우리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부단한 몸짓의 기록이었던 지난 70년의 분단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진정한 평화통일 한국의 새 역사를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종욱 통일준비위원회 민간부위원장·전 주중대사·서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