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시진핑 주석이 만난 조선족

중앙일보

입력 2015.07.2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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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대사관에 근무할 때 가장 출장을 자주 간 곳은 조선족 동포가 많이 사는 연길(옌지 延吉)이였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주도(州都)인 연길에는 ‘좋은 일이 길게 이어 진다’는 뜻이 있지만 옛날에는 이곳이 연초(煙草)의 집산지로 ‘연집(옌지 煙集)’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초 이름을 미화하여 같은 현지(중국)발음의 ‘옌지’가 되었다. 지금도 연길의 담배공장에서 생산하는 ‘장백산’은, ‘중난하이(中南海)’ ‘홍타산(紅塔山)’과 함께 중국 최고급 담배의 하나로 유명하다.
연길에 가면 인근의 용정(룽징 龍井)을 가보게 된다. 용정에는 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고 그가 공부한 대성학원이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따라 흐르는 해란강(하이란장 海蘭江)은 백두산에서 흘러나와 화룡(허룽 和龍)시와 용정시를 거쳐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용정의 비암산(琵岩山) 고개 마루에는 옛날부터 정자 모양의 큰 소나무(一松亭)가 한 그루 있었다. 일본강점시대 굽이굽이 흐르는 해란강을 바라보면서 독립투사들이 쉬어 가는 곳이라 하여 일본군이 사격 연습하듯 총을 쏴 수백년 된 소나무를 죽였다고 한다. 1991년 이 곳에 진짜 정자를 세우고 소나무를 다시 심어 지금의 일송정이 되었다. 일송정과 해란강을 보면 우리 민족 누구나 같이 부르는 노래가 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얼마 전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취임 후 처음으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방문하였다. 그는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족 박물관을 먼저 찾아 조선족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화룡시 조선족 마을에서 ‘붉은 태양이 변강을 비추네(紅太陽照邊疆)’라는 노래에 맞추어 박수를 치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산시(陝西)성 출신으로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시골에서 당서기를 한 시진핑 주석은 젊은 시절 즐겨 듣던 이 노래의 해란강이 있는 화룡시에 한번은 꼭 와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청산녹수에 무지개 비끼고
백두산(장백산)기슭에 과수나무 숲을 이루어
해란강변의 벼꽃(稻花) 향기 그윽하구나


시진핑 주석이 벼꽃 향기의 해란강변에 온 감회를 털어 놓으면서 전통의상을 한 조선족과 함께 온돌방에서 양반다리(盤腿而坐)를 하고 즐겁게 담소하였다. 중국의 연해지역에 비해 경제가 낙후된 데다가 최근 북중(北中)관계의 경색으로 지역경제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조선족 자치주에 대해 국가 지도자로서 친민(親民)활동인지 모른다.
중국은 ‘단 하나의 중국(只有一個中國)’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한족(漢族)이 92% 차지하고 나머지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소수민족은 전체 인구의 8%밖에 안 되지만 거주지역은 중국 전체의 63.7%를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우리 동포인 조선족(朝鮮族 Korean)은 192만 명으로 55개 소수 민족 중 14번째이다. 조선족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와 가까운 동북 3성에 집중되어 있다. 가장 많은 곳이 지린(吉林)성으로 122만 정도가 살고 있고, 헤이룽장(黑龍江)성에 45만, 랴오닝(遼寧)성에 25만 정도의 통계가 있다. 지린성 내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80만이 집중되어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관계의 급속 발전에는 한국어와 중국어(雙語 bi-lingual)에 능통한 조선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 진출 한국 기업이 짧은 기간에 언어와 문화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이 도왔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이 부러워했던 것도 조선족의 존재였다. 사실 한국기업이 활동하는 베이징 텐진 상하이와 산둥성에 많은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역사는 오래된다. 임진왜란 때 명군을 끌고 원정에 나선 이여송 장군의 아버지 이성량은 자신이 조선족 후예임을 밝힌 적이 있다. 누루하치가 후금(청)을 건국할 때에도 포로로 납치했거나 현지에 살던 많은 조선족을 영입하여 팔기군(八旗軍)의 군사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청군에 편입된 조선족이 명군과의 주요 전투에 무공을 세워 청군의 중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군이 산해관(山海關)을 넘어 명을 멸망시켰지만 불과 수백만의 만주족으로서는 광활한 중국을 다스릴 수 없었다. 모든 만주족을 동원하고서도 모자라 청에 우호적인 한족(漢族)을 등용하여야 했다.
만주족이 새로운 대제국 건설을 위해 베이징 등 중국 본토로 떠나버리자 그들이 살던 지역은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발생하였다. 청조는 만주지역을 성역화하고 한족(漢族)의 이주를 금했다. 그러나 강폭이 좁은 두만강을 사이에 둔 한(韓)민족의 이주는 막을 방법은 없었다. 1869년 전후하여 한반도 북부에 대흉년이 들자 조선의 농촌에서 남부여대하여 두만강을 건너 만주지역(간도)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조가 쇠퇴하고 이 지역에 러시아인의 진출이 늘어나자 청조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책으로 1885년부터 한족의 이민금지를 철폐한다. 마침 산둥성에 대가뭄으로 흉년(기근)이 들어 이곳 사람들이 대거 바다를 건너고 요동반도를 거쳐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를 ‘틈관동(추앙관둥 闖關東 산해관 동쪽으로 진출하다)’이라고 불렀다. 한반도의 조선인도 청의 이민해제로 두만강 건너 간도에 이어 압록강 건너 서간도에 자리를 잡은 조선인이 늘어났다.
20세기 초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점되기 전에 10만정도의 조선인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면서 만주지역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국을 건국한 일본은 인구 밀도가 낮은 이 지역에 식민의 필요성을 느끼고 일본의 가난한 농민과 함께 한반도의 조선인도 이주를 권장했다. 당시 일제에 의해 농토를 탈취당한 농민들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만주지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두만강 건너 간도 지역(吉林省)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어, 경상도 사람은 주로 헤이룽장성에, 전라도 사람은 주로 랴오닝성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한반도 지도를 거꾸로 부쳐 놓은 것처럼 한반도의 북쪽 사람이 만주지역의 남쪽에, 한반도의 남쪽 사람이 만주지역의 북쪽에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60만 정도의 조선인이 만주지역에 이주하였다고 한다.
춥고 황량한 만주벌판에 근면한 조선인은 물을 끌어 와 벼농사를 지었고 제철소 탄광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다. 한편 조선인의 이동에 맞추어 항일 독립투사들의 무대도 이 지역으로 옮겨 역사에 빛나는 항일 투쟁사가 여기서 일어난다.
예로부터 만주지역에 사는 조선인은 1) 강한 민족의식 2) 씨족의 연대감 3) 내향적 흡인력 4) 역경에 저항 심리가 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 와서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 중 가장 교육열이 높은 민족이 조선족이라고 한다. 언어 면에서 보면 조선어와 중국어의 2중 언어는 당연하고 조선어와 문법 체계가 유사한 일본어 숙달자도 많아 3개의 언어 구사자도 많다.
1945년 한반도는 해방과 함께 일본이 물러가고 만주지역의 조선인이 돌아왔지만 국내 기반이 없는 조선인은 중국 현지에 계속 살게 되었다. 중국도 한동안 국민당과의 내전상태로 조선족에 대한 정책을 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4년의 내전 끝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1949년 10월1일 신 중국이 건국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날을 기해 그 이전부터 거주한 조선인에게 중국 국적을 부여하여 조선족으로 편입하고, 그 이후부터 거주한 자는 당시 신중국과 수교한 북한의 교민(朝僑)으로 인정하여 북한의 국적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 후 1952년 8월8일 ‘소수민족구역 자치 실시요강’이 통과되고 9월3일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되면서 조선족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산해관을 기점으로 그 이북에 거주하면 조선족으로 인정하고 그 이남에 거주하면 거류증을 발급, 조교(朝僑)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연길에서는 매년 조선족 자치주가 성립된 날인 구삼절(9.3절)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하는데 금년은 63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심각한 인구 감소로 사라질지 모르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자치주 지정기준은 소수민족의 인구비율이 30%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연변의 조선족은 한국을 비롯하여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로 떠나 연변 자치주에는 전체 인구 227만의 35% 수준인 80만에 불과하며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번의 시진핑 주석의 연변 자치주 방문 목적이 ‘조사연구와 고찰(調硏考察)’이므로 이에 대한 해결 방안도 찾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