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미료 시장은 화학조미료, 멸치와 다시마 등으로 만든 종합조미료 시대를 거쳐 현재 천연조미료까지 발전해왔다. 그리고 요즘 들어 부쩍 영역을 확장하는 조미료가 있다. 조미료 시장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액상 조미료다.
액상 조미료 시장을 처음 개척한 기업가로 한라식품의 이재한(40) 대표가 꼽힌다. 이 대표는 액상조미료란 단어조차 낯설던 1999년 참치액을 만들었고, 지난해엔 4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며 액상조미료 시장에서 점유율 1위(65%)를 기록하고 있다. 올 초 탤런트 차승원씨가 한 케이블TV에서 참치액으로 요리를 하면서 조명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참치액은 요리사들 사이에서 ‘비장의 무기’로 통한다.
<16> 액상조미료 시장 1위 … 이재한 한라식품 대표
한라식품은 상호대로 제주도에서 태어난 기업이다. 시조 시인이자 제주도 문예협회장까지 지낸 부친(이용상)이 1970년 설립했다. 이 대표의 형님이 물려받아 94년 상주로 이전했는데, 훈연참치를 만드는 데 상주산 참나무가 유명했기 때문이다. 가다랑어포를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다 98년 외환위기 때 대기업과 함께 도산했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대학(제주대)까지 제주에서 지낸 이 대표가 육군 제대 후 곧바로 뛰어든 일은 친인척이 꿔준 4억5000만원으로 상주공장을 경매에서 되찾는 일이었다. 이후 액상조미료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이 대표가 참치액 개발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했다.
이 대표가 처음 참치액을 들고 시장에 나갔을 때 “참치액이요? 참치로 만든 젓갈인가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처음 시장뚫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 대표는 1999년 제품개발에 성공한 참치액을 들고 무작정 서울 강남의 삼풍아파트 단지를 찾아갔다. 제품을 알리려면 직접 먹어보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대표는 당시 영업을 책임지던 직원만을 데리고 아파트 단지의 부녀회장을 만나기 위해 하루 온 나절을 밖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낯선 젊은이들이 부녀회장을 만나기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더운 여름날, 그는 경비아저씨에게 담배를 사주며 부녀회장의 집을 묻고는 무작정 기다렸다. 오후 8시쯤 됐을까. 아파트 관리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부녀회장의 남편이었다. 그는 “젊은 친구들을 밖에 하루 종일 세워두었다”고 부인을 나무라며, 부녀회 알뜰 장에서 제품을 팔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날이 계기가 됐다. 이 대표는 직접 참치액으로 만들 수 있는 메밀국수와 우동을 만들어 주부들이 직접 맛보고 살 수 있도록 1대 1 판촉에 나섰다. 제품의 품질, 즉 맛은 자신 있었기에 가능했다. 참치액을 한번 맛본 사람들은 스스로 영업사원이 됐고,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입소문은 다시 요리사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현재 내로라하는 요리사 수십 명이 ‘참치액 홍보대사’를 자처한다.
또 하나의 계기는 서울 하나로마트 양재점 진출이었다. 당시 이 점포는 단일 규모로 국내 매출 1·2위를 다툴 만큼 큰 점포였다. 이 대표는 이곳에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또 한 달 넘게 공을 들였다. 하지만 무명의 중소기업 제품을, 그것도 달랑 제품이라곤 하나뿐인 회사를 받아줄 바이어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트 책임자가 ‘참치 액 하나로 100인분을 뚝딱 만들 수 있다’고 공언했던 이 대표에게 메밀국수 50인분, 우동 50인분을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직원 투표에 붙일 기회를 줬다. 이 대표는 즉시 100인분을 만들었고, 직원들의 반응도 좋았다. 이 대표에겐 3개월간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대표와 직원들은 매일 시식행사를 했고, 시식요원들이 업무가 끝나거나 쉬는 시간이면 이 대표가 직접 시식요원이 됐다. 관심을 보이는 주부들이 있으면 놓치지 않았다. 주부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조리 방법을 설명했다. 이렇게 판매 첫날 130병을 팔았다. 그날 하나로마트에서 단일품목으로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이후 현대백화점·이마트·킴스클럽·하나로마트·롯데마트 등 대형유통매장에 속속 진입했다. 가격을 1만1000원대로 올렸는데도 인기는 계속돼 한라식품 매출은 매년 두자릿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참치액으로 ‘작은 성공’을 이룬 후에도 이 대표의 도전은 계속됐다. 처음엔 참치액 하나뿐이었지만 지금은 ‘프리미엄 참치액’, ‘고추랑 참치액’ 등으로 제품 수를 늘렸다. 프리미엄 참치액은 훈연참치향이 낯선 소비자를 위해 인삼과 표고버섯을 추가하고, 더 맑은 빛깔을 띄게 했다. 이후 매운 음식에 잘 어울리도록 매콤한 맛을 집어넣어 개발한 고추랑 참치액도 좋은 반응을 얻고있다.
2005년 태국에 공장을 세울 때도 주변의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국내로 들어오는 가다랑어의 어획량이 줄고 가격이 올라, 상대적으로 품질 좋은 가다랑어가 잘 잡히는 태국 현지의 공장 설립은 불가피했다.
태국공장 준공은 한라식품에 또 하나의 도전과제를 안겼다. 바로 ‘모링가 인디아 티’라는 건강 차 시장 진출이다. 혈당을 조절해주고, 피로회복과 노폐물 배출을 돕고, 모유 수유를 도와주는 등 다양한 효능을 가진 모링가는 동남아에서 잘 알려진 식물이다. 특히 인도에서 나는 sk1 종자가 가장 효능이 좋은데, 이 대표는 태국에서 이 종자의 발아부터 공을 들였다. 보통 100개 중 5개 정도만 발아에 성공했다. 처음 태국에 이 종자로 모링가 밭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시도를 거쳐 지금은 5000분의 모링가 나무를 가꾸는 데 성공해 모링가 인디아 티를 국내에 선보일 수 있었다. 모링가 나무의 여린 잎만 골라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따고 덖는 과정은 기존 생산공정보다 몇 배나 많은 노동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지만 또 다른 도전이기에 이 대표의 얼굴에 미소가 넘친다.
상주=심재우 기자 jwsh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