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글로벌 아이]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2015.06.30 00:03

수정 2015.06.3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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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도쿄 특파원
“올해 들어서도 벌써 두 분의 피해 할머니들이 평생 가슴에 맺힌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생존해 계신 쉰세 분의 할머니들 평균연령이 90세에 가까워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릴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위안부 해결책을 시급히 내놓으라고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인권문제가 한·일 양국이 미래로 함께 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풀고 가야 할 역사적 과제라는 이유에서다.

 그로부터 넉 달이 흘렀다. 지난 11일에는 김달선(91) 할머니가 경북 포항에서, 김외한(81) 할머니는 경기도 광주에서 30분 간격으로 별세했다. 앞서 지난달 27일엔 이효순(91) 할머니가 경남 창원에서 숨을 거뒀다. 결국 일본의 공식 사죄를 받지 못한 채 한 맺힌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3·1절 이후 달라진 건 아직 아무것도 없다.

 지난 22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함께 열어요. 새로운 미래를’이란 수교 50주년 표어를 외쳤다. ‘과거’는 없고 ‘미래’만 강조했다. 박 대통령도 서울에서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의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을 뿐이다. 3·1절 기념사의 강경한 태도는 한풀 꺾였다. 더 이상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양국 정부의 벼랑 끝 위기의식 때문인지 위안부 문제는 뒷전으로 밀린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24일 밤 김연희(83) 할머니가 경기도 수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국민학교 5학년 어린 나이에 일본 도야마(富山)현 항공기 부속 공장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이후 아오모리(靑森)현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김 할머니가 22일 ‘화해와 상생’을 말한 박 대통령과 ‘새로운 미래’를 강조한 아베 총리의 연설을 들었다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눈을 제대로 감으셨을지, 안타깝고 또 답답하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과 21일 도쿄 첫 회담을 마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위안부 협상은 큰 틀에서 말하면 상당히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일 한국 특파원들에게 설명했다.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사죄, 피해자 지원 방식이 여전히 쟁점이지만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언제쯤 협상이 마무리될지 묻자 입을 굳게 닫았다. 정부 관계자는 “위안부 협상이 원하는 100%를 끌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며 “국민의 기대 수준이 너무 높으면 몇 년의 노력이 자칫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좀 더 기다리란 주문이다.

 위안부 협상은 물론 쉽지 않다. 한·일 양국의 국내 정치와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그런데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38명 중 생존자는 49명에 불과하다. 무덤에 꽃을 바치는 것보다 살아생전 한을 풀어드리는 게 급선무다. 더 서둘러야 한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