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일(李榮一·76·서울대 정치학과 58학번) 전 의원=“63년 11월 5일 동숭동 문리대 8강의실에 학생들이 1000명쯤 몰려들었다. 혁명 2인자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5·16의 정당성을 설명하면서 ‘민족적 민주주의’ ‘조국 근대화’라는 표현을 썼는데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 운동권 리더였던 김중태(75·정치학과 61학번)는 “워커힐을 만들어 더러운 양키즘을 한강에 둥둥 떠다니게 해놓고 민족적 민주주의란 말이 나오느냐”고 공격했다. JP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렇게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보다 큰 한·미 관계를 위해서 여러 가지 각도로 생각해 결정한 것이다”고 넘어갔다. 학생들은 대체로 JP의 젊음과 여유, 능변(能辯)에서 매력을 느꼈다.”
◆서진영(徐鎭英·73·고려대 정외과 61학번) 고려대 명예교수=“JP가 고려대에 두 번 왔던 걸로 기억한다.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 한·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의 열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일 회담이 진행되면서 과거사 문제를 충분히 사과받지 않고, 적은 액수로 청구권 자금을 타결하는 등 지나친 양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6·3사태는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 온 두 주역, 즉 민주화·근대화 세력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