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이 모든 것이 그냥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아무리 일정이 많아도 시간표시만 해두고 따로 내용을 적어두지 않아도 별 탈 없이 늘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최근 들어 믿었던 머리에게 자꾸만 배신당하는 느낌이 든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는가 보다. 그래서 방송 중에 ‘건망증’ 얘기를 한번 해보았다. 그랬더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청취자들로부터 격하게 공감하는 사연이 쏟아졌다.
불현듯 찾아온 건망증
알고보니 모두들 비슷한 경험
웃음 주니 즐겁지 아니한가
이렇게 재밌고도 아찔한 일화가 넘쳐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모두에게 웃음을 전해주었다. 황당하면 황당할수록 웃음의 농도는 더욱 진해졌고, 그 유쾌함으로 인해 더불어 행복해졌다. 문제가 생겼을 당시 본인은 정말 속이 탔겠지만, 지나놓고 보니 그때의 당혹스러움이 오히려 더 짜릿한 여운을 남겼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시간도 제법 흘렀고, 당시의 상황을 바라보는 이 또한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교훈처럼, 더러는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이렇게 쉽게 편안해지는 법인가보다.
어쩌면 평소 너무 열심히 살다가 생긴 실수여서 더 그런 지도 모르겠다. “행복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어깨에 내려앉는 나비와 같다”고 한 미국작가 나대니얼 호손의 말처럼, 행복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인생의 부산물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어떨 땐 작은 실수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것 같다. 행복을 위해 살고자 하면 행복과 멀어지지만, 하루하루 충실히 살다 보면 어설픈 실수가 도리어 행복이 되어 찾아오기도 하니까. 그러니 행복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져 스트레스 받을 일은 아니다. 행복과 불행에 너무 개의치 말고 그냥 뚝심 있게 살아가면 그뿐이지 싶다.
그나저나 앞으론 메모하는 습관을 좀 더 길러야겠다. 머리를 믿을 수도 없을 뿐더러, 세월을 이길 수는 더더욱 없을 테니 말이다. 『중용』에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 했던가. 나이 들수록 하루하루 정성스레 살아가는 것 말곤 길이 없나보다. 가끔은 황당한 실수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