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없는 돈을 위해 살아 숨 쉬는 생명을 버린 것이 세월호 비극의 본질이다. 이러고도 우리가 문명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계절이 한 바퀴를 순환하는 동안에도 진상은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시신이라도 찾아 실종자 가족이 아닌 유가족이 되고 싶다”는 이승에서 가장 슬픈 소원은 외면당했다. 정부는 여론에 떠밀려 선체 인양을 결정했지만 망각을 강요했던 비정(非情)의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가 생명의 가치를 마음껏 모욕하는 동안 성완종 리스트는 연일 정치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리스트가 사실이라면, 그래서 이완구 총리를 포함한 이 나라의 실세가 너도나도 돈다발을 덥석덥석 받고, 그 돈으로 정권을 만들었다면, 정치는 스스로에게 파산을 선고해야 할 것이다.
현대차, SK, LG, 삼성….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2002년 말 대선 때 대기업들로부터 차떼기로 돈을 받았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 궤멸 위기에 몰리던 2004년 3월에는 천막 당사를 만들어 걸어 들어갔다. ‘천막 정신’으로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해 표를 받았고, 두 차례나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당내 경선과 대선을 앞두고 건설업자의 돈을 받았다면 다시 ‘차떼기당’으로 돌아간 것 아닌가. 이렇게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면 정권을 도로 내놓아야 할 일이다.
이렇게 세월호와 성완종, 이완구의 충격이 한꺼번에 공동체를 흔들고 있어서인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고해성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는 원내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스스로를 향해 물었다.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가 이분들의 눈물을 닦아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비로소 부끄러움을 아는 보수가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꿈꾸는 보수를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을 지며,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보수”라고 정리했다. 경쟁할 땐 하더라도 당신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든 구해주겠다는 관용과 연대의 진정성이 흘러 넘친다. 야당 대변인은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 명연설”이라고 논평했다. 진영을 넘어선 여야 합의 정치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승민의 정신적 멘토는 보수주의의 원조인 18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다. 그는 “이회창 후보의 참모로 치렀던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한림대 겸임교수로 있으면서 버크의 저서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을 읽고 보수의 진정한 길을 고민했다”고 했다. 버크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소용돌이를 목격하면서 보수의 선제적이고 과감한 혁신만이 혼란을 막을 것이라고 확신한 사람이다. 영국 보수당이 300년 넘게 존속한 것은 버크와 디즈레일리를 포함한 용기 있는 개혁적 보수주의자들의 공이다.
이들은 산업혁명 이후 전면에 등장한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귀족과 지주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했다. 고통스러웠지만 공동체를 존속시키기 위해 변화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유승민이 꺼낸 새로운 보수 노선을 불온시 하는 세력도 있다. 하지만 혁명적 수준의 쇄신이 아니면 분노한 민심을 달랠 수 없다. 버크는 “과거로써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고 했다. 집권세력이 ‘세월호’와 ‘성완종 리스트’가 버티고 있는 절망의 아포리아를 벗어나려면 어두운 과거와 결별하고 유승민의 건강한 보수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하경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