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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 양당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싸움을 멈춘 적이 없었다. 놀던 동네가 비슷하고, 북벌과 항일전쟁을 위해 두 차례 연합을 하다 보니 뒷구멍으로는 연락이 그치지 않았다. 국민당 고관들 중에는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등과 몰래 서신을 주고 받는 일이 허다했다. 공산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월 덕에 밝혀진 것도 많다. 묻혀진 것은 더 많다. 워낙 비밀이 많고, 겉과 속이 같으면 3류 취급하는 민족이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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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하이난다오(海南島) 후근(後勤) 사령관을 끝으로 국민당 군복을 벗은 저우요는 홍콩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황푸 동기생 사오쩡이(蕭正儀·소정의)가 건네준 편지를 읽고 경악했다. 영락 없는 린뱌오의 필적이었다. 수신인과 발신인도 남들은 알 리가 없는 황푸시절의 호칭이었다. 티에는 저우요의 별명이었고, 원쭤는 사오쩡이의 별칭이었다. 린뱌오의 자(字)가 요우용(尤勇·우용)인 것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鑄는 중공 중앙정치극 상무위원과 부총리를 겸한 중앙문혁 소조 고문 타오주가 분명했다.
저우요는 진위를 의심치 않았다. 국민당원인 아들에게 부탁했다. “타이완에 다녀와라. 이 편지를 국방정보국 주임 장스치(張式琦·장식기)에게 전해라.” 바다에 어선을 풀어놓고 정보를 수집하던 장스치는 대륙 정보에 정통했다. “역시 린뱌오답다”며 편지 내용에 만족했다.
장스치의 보고를 받은 국방부장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신중했다. “연구해 보자”며 말을 아꼈다. 황푸에서 린뱌오와 침상을 나란히 했던 육군 총사령관 가오퀘이위안(高魁元·고괴원)도 린뱌오의 필적을 한눈에 알아봤다. 가오퀘이위안은 마음이 급했던지 장제스에게 직접 보고했다.
훗날 장스치는 미국에서 구술을 남겼다. “최고 통수권자가 내게 지시했다. 나는 인편에 홍콩의 저우요에게 편지를 보냈다. 두 사람과의 연락은 축하할 일이다. 우선 지위를 공고히 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전해라. 우리는 무슨 지원이건 마다치 않겠다. 진일보된 소식을 기다리겠다.” 타이완 측의 회답을 받은 사오쩡이는 대륙으로 돌아왔다.
상하이에 도착한 사오쩡이는 도처에 나붙은 “타오주 타도” 벽보를 보고 저우요에게 편지를 보냈다. “두 사람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며칠 후 사오쩡이는 실종됐다. 홍콩의 저우요도 목욕탕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오쩡이의 체포는 극비였다. 상황을 파악한 마오쩌둥은 내색을 안했다. 타오주 휘하에 있던 광둥 군구의 지휘관들부터 한 명씩 갈아치웠다. 감옥에 갇힌 타오주는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로 끌려갔다. 옥중에서 암으로 숨을 거뒀다. 시신도 남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군을 장악한 린뱌오의 위세를 이용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추종자들을 완전히 제거했다.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위기를 직감한 린뱌오는 우선 살고 봐야 했다. 늦은 줄 알았지만 마오 충성에 열을 올렸다.
린뱌오도 인간이었다. 비범과 평범함을 넘나들기는 보통사람과 그게 그거였다. 영문도 모르는 측근들만 날벼락을 맞았다.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