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이 청문회를 거부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경찰이 조한경·강진규씨 등 경찰관 2명을 독직폭행치사 혐의로 송치한 뒤 1차 수사(87년 1월 20~24일)를 벌이면서 고문 가담 경찰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한 달여 뒤 조씨 등의 진술을 통해 추가 공범의 존재를 파악했지만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은폐하려 했다는 점이다.
1000쪽 기록·국감 회의록 분석
수사 기록 등에 박 후보자가 1차 수사 당시 고문 가담 경찰을 밝혀내는 데 소홀히 했다는 정황은 나타나지 않는다. 박 후보자가 5월 20일 진행했던 강씨에 대한 피고인 신문(2차 수사 기록 31~32쪽)에서 “가벼운 처벌을 받기 위해 허위로 세 사람이 가담한 것을 진술한 게 아니냐”고 묻자 강씨는 이렇게 답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전에 검사님이 다른 직원들 가담 여부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봤을 때도 저희 두 사람이 했다고 답변을 했다가 그 이후 양심에 비춰 사실대로 말하는 게 죄를 조금이나마 씻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하던 중 검사님들이 의문점에 관한 반박 자료를 제시해 말씀드립니다.”
1차 수사 기록에도 박 후보자가 다른 경찰관들을 상대로 고문 당시 행적과 가담 여부를 추궁하는 대목이 나온다(1차 수사 기록 586~587쪽, 595~597쪽). 박 후보자가 공범을 은폐하려 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천주교 사제단 폭로 전까지 검찰이 공범의 존재를 은폐했다는 의혹과 관련해서도 ‘검사들이 추가 수사를 요청했다’는 증언이 있다. 88년 10월 24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당시 안상수 검사는 “(87년 2월 27일) 다른 경찰관 3명이 주범이란 조씨 말을 듣고 수사계획서를 만들었지만 윗분들 (수사 착수) 지시가 없었다”고 말했다(회의록 11~12쪽).
정구영 당시 서울지검장은 “이 사건의 중요성과 파문을 감안해 신중히 내사한 후 본격 수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단에 주변 정보 입수에 먼저 착수했다”(회의록 82쪽)고 말했다. 서동권 당시 검찰총장도 “사회적 불안이 고조됐을 때라 1차 공판 이전에 추가로 공소 제기할 방침을 세웠던 것이 조금 늦었다”(회의록 35쪽)고 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