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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서는 당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교활하고 야비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린뱌오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소문이 항간에 떠돌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17>
린뱌오는 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기까지 누구도 넘보지 못할 공을 세웠다. 정권수립 후엔 외부와 접촉을 끊었다. 1959년, 수세에 몰린 마오쩌둥의 공격수로 등장해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를 실각시키고 국방부장에 취임한 뒤에도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부름이 없으면 무슨 행사건 참석하지 않았다. 가끔 군 부대 시찰은 나갔다.
뤄룽환(羅榮桓·나영환)만은 예외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 홍군 제4군을 지휘하던 린뱌오는 정치위원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일 처리를 놓고 충돌이 빈번했다. 성격도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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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는 정말 지독한 사람이었다. 정권 수립 후 뤄룽환과도 왕래를 단절해 버렸다. 1963년 12월 16일 오후, 뤄룽환이 세상을 떠났다. 첫 번째 맞는 개국 원수(元帥)의 죽음이다 보니 장례위원의 진용이 굉장했다.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가 위원장을 맡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朱德·주덕), 린뱌오 등 80여 명의 당과 군의 지도자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웬만한 성장(省長)이나 군구(軍區)사령관은 끼어들 엄두도 못 냈다.
두문불출하던 린뱌오는 뤄룽환이 사망한 다음 날 외출을 서둘렀다. 비서가 기록을 남겼다. “그날 따라 대설이 내렸다. 보기 드문 폭설이었다. 베이징 전역이 꽁꽁 얼어 붙었다. 평소 바람과 추위라면 질색이던 린뱌오였지만 그 날은 달랐다. 차량 운행이 불가능하다며 아무리 만류해도 듣지 않았다. 병원은 한적했다. 린뱌오는 단독으로 원수의 시신 앞에서 이별을 나눴다.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렇게 비통해 할 수가 없었다. 즉석에서 휘호도 했다. 나의 좋은 스승이며 유익했던 친구(良師益友), 폐부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린뱌오는 시(詩) 한편을 남겼다. “6억 인의 의기를 일으켜 세운 사람, 그가 있었기에 해와 달이 더욱 빛났다. 장정 시절 임무는 막중하고 갈 길은 멀었다. 수십 년 간 비바람 함께하며 속내를 숨긴 적이 없었다. 하루 아침에 영원한 이별, 실성을 가눌 길 없다.” 전 군(軍)에 지시도 잊지 않았다. “일주일간 무슨 회의를 하건, 시작 전에 뤄룽환 동지의 애도 의식을 거행하라.”
19일 오후에 열린 유체(遺體) 고별식에도 린뱌오는 제일 먼저 도착했다. 입관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날이 어둡자 다시 찾아와 뤄룽환의 관을 어루만졌다. 린뱌오 성격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2일 오전, 1만 명이 참석한 영결식이 거행될 때까지 린뱌오는 류샤오치, 주더,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과 번갈아 가며 뤄룽환의 빈소를 지켰다. 린뱌오의 행동은 특이했다. 미인으로 소문난 뤄룽환의 부인 린웨친(林月琴·임월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1963년 2월, 춘제(春節)가 다가오자 린뱌오는 부인 예췬(葉群·엽군)에게 부탁했다. “뤄룽환 사망 후 첫 번째 설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명절이 되면 옛사람이 그리운 법이다. 린웨친의 마음이 오죽하랴. 집으로 초청해서 한나절 함께해라. 여자들끼리 좋은 음식 먹으며 수다 떨다 보면 잠시라도 상심을 날려 보낼 수 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의사와 간호사들을 초청한 이후 두 번째이자 마지막 점심 초청이었다. 예췬은 남편이 시키는 대로했다.
그날 밤, 린웨친이 즐거워했다는 말을 듣자 린뱌오는 기분이 좋았다. 이어서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예전에 장제스도 설날이 다가오면 그렇게 했다.”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