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오전 1시30분. 경북 포항에서 여자 친구를 승용차로 들이받은 최모(49)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1년간 함께 살았던 여자 친구 김모(31)씨가 결별을 요구하자 김씨가 타고 있던 승용차를 들이받은 혐의(살인미수 등)였다. 김씨가 차를 세워둔 채 문구점 앞에 서 있는 모닝 승용차 뒤에 숨자 최씨는 자신의 오피러스 차량으로 모닝 승용차를 네 차례 들이받았다. 김씨가 다친 것은 물론이고 김씨 뒤편에 있던 문구점의 문과 내부 집기가 부서졌다. 말 그대로 초토화된 상황에서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최씨는 차에서 내려 김씨의 목을 졸랐다. 포항남부경찰서 측은 “김씨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홧김에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분노나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충동조절장애’를 앓는 사람이 늘면서 관련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거나 마음이 불편하면 불을 지르거나 상대를 때리는 방식으로 화를 푸는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검거된 폭력범 36만6527명 중 15만2249명은 우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열 명 중 네 명이 홧김에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경우 많아
환자 4934명 … 5년 새 32% 늘어
“고집 부리면 모두 받아주는 문화
욕구 못 채우면 격렬한 분노 표출
가정·학교서 인성교육 강화해야”
전문가들은 경쟁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와 자기중심적인 성장 환경을 충동조절장애의 원인으로 꼽는다. 사회 곳곳에 쌓여 있는 불만과 좌절감이 충동조절장애로 이어져 ‘묻지마 범죄’를 불러온다는 얘기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제성장이 멈추고 패자부활전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거칠고 위험한 사회로 치닫고 있다”며 “해소되지 않는 불만이나 좌절감이 불안을 키우고 이것이 우발적이고 폭력적인 범죄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범희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높고 삶에 대한 압박이 크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특히 과거 사회에 대한 분노나 불만이 자살로 대변되는 자기 파괴적인 형태로 이어진 데 반해 최근엔 방화나 살인·폭력 같은 범죄로 불거지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유 원장은 “요즘은 고집을 부리면 부모가 다 들어주는 문화”라며 “그 결과 자제력이 부족해지고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격렬한 분노를 드러내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충이나 효,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사라지고 이를 대체할 수 있는 가치가 출현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가정과 학교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인성 교육을 강화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충동조절장애가 범죄로 발현되기 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서울병원 홍진표 교수는 “충동조절장애 환자들은 사소한 일에도 폭력을 사용하려 하거나 자해를 하고 ‘너 죽고 나 죽자’는 등의 말로 신호를 보낸다”며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신호를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치료를 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채윤경 기자
사진 설명
충동조절장애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달 24일 서울 중계동 서 주차 시비 에 야구방망이로 폭행한 사건(사진 1)이, 1일에는 경기도 양주 서 분신 화재(사진 2)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달 31일 경북 포항 선 헤어지자는 여자친구를 차로 들이받는 사건이 있었다. [CCTV 캡처,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