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고향<74> (구)안동김씨

중앙일보

입력 1983.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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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않고「내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다.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내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담할 것이다』
조국독립의 화신 백범 김구. 조국의 독립을 자신의 생명과 가치의 전부로 삼고 그것을 위해 살다 그것때문에 숨진 자랑스러운 한국인. 70여평생을 조국독립의 제단에 몸바쳐온 그는 안동김씨일문 뿐만아니라 한민족의 얼과 기개를 드높인 위대한 혁명가요, 민족주의자였다.
1945년 감격의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독립된 조국의 허리는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때 그의 소원은「민족을 위한 민족의 힘에 의한 민족 스스로의 평화통일 이었다.

때문에 l948년 유엔 소총회가「가능한지역(남한)에 만 국한된 총선거」를 결의했을 때, 그는 울면서 3천만 동포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나의 유일한 염원은 3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홍일된 조국건설을위해 공동투쟁하는 것뿐이다. 조국이 만일 내 육신을 요구한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내몸을 제단에 바치겠다』
이것은 만약「통일된 조국을 세우지 않는다면 분단조국의 슬픈현상은 영구화 될 우려가 있다」는 민족적양심에 호소하는 순수한 통일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바라던 통일의 염원을 실현하지 못한채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졌다.
l949년7월, 74세로 위대한 생애를 마감했다.
조국분단 38년-. 분단의 세윌이 길면 길어질수록 73세 (l948) 외 노구를 이끌고 남북협상을 성공시키기위해 평양으로 가면서『가다가 38선을 베고 죽을지라도 조국의 평화통일은 나의 소원』 이라고했던 「광야의고독한 의병」이 가슴을 친다. 그는 죽어서도 이렇게 민족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안동김씨는 본관은 같으나 시조는 달리하는 세칭「구안동」「신안동」등 두가문이있다. 구안동김씨의 시조는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
그는 경순왕의 4째아들인 반설의 세째 아들이 된다.
신안동김씨의 시조는 고려개국공신태사 김선평으로 조선말기 순조∼철종대에 세도정치로 역사에 명암을 드리웠던 집안이다.
구안동김씨는 고려말엽부터 조선중기(인조조)까지 상당한 세력을 떨쳤던 명문이다.

고려조의 명상이요 명장인 김방경은 가문의 중흥을 가려온 중추적인물. 그는 원종∼충렬왕때에 려-원 연합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 일본본토까지 공력하려다 그때마다 태풍를 만나 실패했다. 우리 역사상 일본본토를 공략한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로 『고려사』 에 찬연한 발자국을 남겼다. 벼슬은 시중을 거쳐 삼중대광첨중질에 이르렀다. 구안동김씨는 김방경의 아들·손자대에서 크게 번성했다.
그의 다섯 아들중 선 (부지밀직사사), 흔 (삼중대광 질성사) , 순 (반삼사사), 론(지밀직사사)등이 벼슬길에 올났다. 또 선의 아들 승용(충숙왕조·대제학), 승택(공민왕조·중서대랑평장사)과 순의 아들 영돈(충목왕조·명장), 영후(충목왕조·우정승)등이 가문을 빚냈다.
김사겸(공민왕조·안겸사), 김사형(조선 태종조·좌의정)등 형제는 고려의 멸망-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김사겸은 고려가 망하자 청주 아산에 은거, 두문불출했으며 한양쪽을 향해 앉은일조차 없었다는 절신. 이성계가 여러 차례 불러 좌사간에 임명했으나 끝까지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아우 사형은 달랐다. 고려말 삼사우사를 지냈던 그는 1392년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됐으며 태종때는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세조때 좌의정 김질, 중종조의 영의정 김수동등은 모두 김사형의 후손들. 김질은 세조때 성삼문등과 함께 단종복위계획에 가담했다가 뒤에 변절한 인물로 역사는 기록했고 있다.
김질은 이무렵 구안동김씨가 배출한 전설적인 효자. 그는 나이 48세때 모친상의 당하자 무덤옆에 여막을 지어놓고 살았는데 하루는 밤새 눈이 퍼부었으나 여막둘레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한다. 또 3년상을 치를때까지 아내마저 멀리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당시 진주성이 적의 대군에 포위되자 3천8백여명의 위병으로 7일밤낮을 버틴끝에 3만명의 왜군을 사살하고 전사한 진주목사김시민(1554∼l592) , 광해군10년 명나라가 후금을 칠때 지원병을 요청하자 도원수 강홍립과 함께 좌영장으로 출정, 후금의 군사와 최후까지 접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김응하등은 구국의 투혼과 장부의 기개로 구만의 기백을 기친 명장들이다.
이들은 사후에 똑같이 「충무」 란 시호를 받았다. 역사상 「충무」 란 시호를 받은 인물은 이순신장군을 필두로 열손가락에 꼽을정도. 그것은 무관에게는 최고의 영예였다. 인조때의 유일한 영의정 김자점은 안동김씨흥망사에 뚜렷이 한획을 긋는 인물.

광해군말년 병조좌랑이였던 그는 당시 집권당인 대북파에 의해 밀려났다가 인조반정에 가담, 정두공신 l등에 서훈됐다.
인조말엽에는 권력의 정상인 영의정에 올랐으며 왕실의 외척 (그외손자 김세용이 인조의 딸인 효명옹주와 결혼)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인조가 죽고 (l649) 효종이 즉위하자 김경여·송준길등으로부터『국정을 농하여 조정을 어지럽힌다』 는 탄액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것이 구안동김씨외 정치적 몰락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구안동김씨는 해방후 사회각계에 발군의 인재들을 냈다.
보사·체신부장관을 역임했던 김태동(경박·작고)김구의 아들 김신(전교통장관·국회의원)전국방장관 김용우(배재대학장) 전 국회의원김명회(경박·청주대해하고 총장·안동김씨대종회장) 6, 7, 8, 9, 10대 국회의원 김재광, 전보사부차관 김학묵, 김사달( 의박·박애의원장) 김재익(경박·청와대경제담당수석비서관) 김재섭(의박·적십자병원부원장) 김태길(철박·서울대교수)씨등이 사회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