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SNS에서 화제가 된 초등학교 시험 문제를 보자. 한 뼘으로 잴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하라는 문제로 답지에는 지우개의 길이, 휴대전화의 길이, 자동차의 길이, 냉장고의 높이, 책상의 길이가 주어졌다. 출제자가 의도한 정답은 책상의 길이지만 다른 답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창의력을 키워야 할 미래세대가 이런 문제를 풀며 상상력을 고갈시키는 현실이 참으로 답답하다.
이번에는 중학교 기술·가정 교과서를 펼쳐봤다. 플라스틱의 종류에는 열가소성과 열경화성이 있고, 열경화성 플라스틱에는 페놀·에폭시·아미노·멜라민 등에서 시작해 그 특성과 용도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런 세세한 사실적 정보는 인터넷에서 바로 검색할 수 있고 설사 머릿속에 집어넣더라도 시간의 흐름 속에 금방 소멸된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무용한(obsolete) 지식(knowledge)을 무용지식(obsoledge)이라고 했다. 플라스틱에 대한 지식 자체는 유용할지 몰라도 방대하게 쏟아지는 정보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처리하고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학생들에게는 무용지식에 가까울 것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수업이 있고 그 성과를 가늠하는 평가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관계가 도치돼 평가가 독립변수이고 수업이 종속변수로 작용하니 교육의 개선을 위해서는 평가의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 프랑스의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에는 ‘현실이 수학적 법칙을 따르는가’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와 같이 묵직한 논제가 출제된다. 이런 바칼로레아가 부럽기는 하지만 당장 벤치마킹하기는 힘들다. 입시제도는 진공에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가치관, 예컨대 채점자의 주관적인 평정에 승복하는 신뢰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창의·융합인재의 양성을 슬로건으로 삼는 교육부가 수능과 EBS 교재의 연계에 집착하는 것은 모순이다. 물론 이런 비정상적인 방안이 나온 배경에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교육 현실이 존재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교육이라는 고열이 끓고 있는 상황에서 공교육 경쟁력 강화와 같이 기초체력을 기르라는 원론적인 처방보다는 EBS라는 해열제를 투여하는 게 급선무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EBS 교재를 요약해 주는 신종 학원이 생기면서 사교육 경감 효과도 미미하고, 교재의 영어 지문을 한글로 번역해 외우는 변종 학습을 가져왔으니 이제 EBS 연계는 출구전략을 모색할 때가 됐다.
평가와 더불어 수업에서 공식적 지위를 점하고 있는 교과서의 변화도 병행돼야 한다. 학생이 숙지해야 할 지식을 완결된 방식으로 나열한 평면적인 교과서가 아니라 학생의 사고와 경험을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소재를 제시하고 사유와 탐구로 이끌어주는 교과서가 돼야 한다. 예를 들어 수치들이 주어졌을 때 그 평균을 구하기보다는 그 수치들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이 평균, 중앙값, 최빈값 중에서 무엇인지 판단하고 정당화하는 게 바람직하다. 정답을 고르기보다 해답을 모색하게 하는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는 창의력을 발현시키는 전제조건이 되니 질 높은 인적 자원으로 버텨온 우리에게는 생존을 위한 필수적 선택이라 하겠다.
박경미 홍익대 교수·수학교육학
◆약력=서울대 수학교육과,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박사.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연구원, 교육부 정책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