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석의 후아유 ⑮ 문제적 남자, 최민수가 사는 세상

중앙일보

입력 2015.01.04 00:05

수정 2015.01.0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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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하다 보니 나도 대중의 관심을 갈망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클라라는 그 ‘관심’을 월급에 비유하기도 했고, 서태지는 ‘관심’에서 멀어지고자 오랫동안 신비주의를 견지하다 최근에야 극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어쨌든 무척이나 어려운 것은 그 ‘관심’을 계속 유지하고 사랑받는 것이다.

[여성중앙] 매스컴에 비친 그의 태도가 불편했다면 이 인터뷰 역시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치대로라면, 보고 싶은 사람은 보고 보기 싫은 사람은 안 보면 된다. 세상은 새로움으로 가득하다. 다만 눈여겨보지 않는 자들에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새로운 그가 보이는가. 보는 것보단 느끼길 권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민수는 특별한 존재다. 톱클래스 영화배우였던 최무룡의 아들인 데다, 본인 또한 ‘사랑이 뭐길래’와 ‘모래시계’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그 후로도 끊임없는 작품 활동을 하며 대중의 ‘관심’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가 특별한 것은 명배우여서가 아니다. 어느덧 최민수만의 스타일이 되어버린 말투, 표정, 그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화법.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현학적이고 만연체 화법은 그에게 ‘생방 불가’라는 타이틀을 붙여줬고 언제부턴가 개그의 소재로 활용됐다.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가죽 바지 입고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록을 하며 칩거와 여행을 반복하는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Q : 드라마 ‘오만과 편견’ 잘 보고 있습니다.

시청률이 나쁘지 않던데요 말 두 번 버벅대는 거 보니까 안 봤네.


Q : (웃음)봤어요. 오랜만에 ‘연기하는 최민수’를 제대로 볼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특히 ‘문희만’이라는 부장검사 캐릭터는 최민수가 아니고서는 대체 불가능한, 그런 느낌이었어요

문희만이라는 인물은 종잡을 수가 없어. 기본 윤리를 지키는 강직한 인물 같지만 출세욕이 넘치고 또 윗선에 줄을 대기도 한다고. 단순하게 말하면 밀당의 고수고, 선악 이분법 구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인 거지. 그래서 끌렸고, 시청자 역시 캐릭터의 현실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봐. 착한 놈도 나쁜 짓을 할 수 있고, 나쁜 놈이 좋은 일을 할 수도 있는 것, 그게 실제 세상 아니겠어?

Q : 작품 고르는 기준이 엄격할 것 같아요

안에 담겨 있는 사람을 봐. 기본적으로 작품 안에서 얘기하는 사람의 호흡이나 어떤 메시지나 스토리가 없으면 재미가 없어. 우리가 글과 글 사이에 행간의 의미를 읽는다고 하잖아. 대본도 마찬가지야. 하나의 작품을 그림으로 유추해서 떠올렸을 때 뭘 얘기하는지 밑그림이 그려지고 메시지를 끄집어낼 수 있으면 오케이.

Q : 막장 드라마는 그런 그림이 안 그려지나요? 한 번도 안 한 것 같아요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인기가 없으니까 그쪽에서 안 쓰는 거지. 그리고 설령 부른다 해도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고. 왜냐, 나는 머리가 나쁘니까. 나는 능력자가 아니라 연기자예요. ‘쪽대본’을 보고 10분, 20분 만에 외워서 대사만 줄줄 읊을 수가 없다고. 연기라는 게 대본 디렉션을 보고 나서 하루나 이틀,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고민하고 파보고, 그다음 대사를 달달 외우고, 상황을 그려보고, 거기서 끄집어내야 할 것이 뭔지 전체적인 그림을 떠올려야 하는데, 어떻게 쪽대본으로 그걸 할 수가 있겠어. 내가 능력자도 아닌데.

Q : 연출은 안해요 연출은 연기를 알아야 하고 음악을 알아야 하고 조명의 각을 알아야 해. 연출은 밑줄 쭉쭉 그어놓고 바스트 샷, 풀 샷 이런 걸 하는 게 아니라고. 또 반대로 연기자는 연출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해. 그게 다 모이면 작가주의적 성향이 있는 배우가 되는 거야.

Q : 작가주의적 성향이 차고 넘쳐서 연출을 하고도 남겠네요(웃음)

난 그런 성향이 있지. 그러니까 연기를 하는 거고.

Q : 절대 다작은 못 하겠네요

그래서 당신처럼 돈을 많이 못 벌지.

Q : 30년 동안 원칙처럼 지켜온 건가요

원칙이 아니라 기본이죠. 이 영혼으로 살고 있는데 동시에 다른 작품을 어떻게 해? 난 당신과 달라서 양다리 못 해.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러고 보니 최민수는 과작이다. 동시에 두 작품을 하지 못한다. 매 작품마다 메소드 연기를 하다 보니 한꺼번에 두 영혼으로 살 수가 없단다. 그래서 그는 요즘 ‘문희만’으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있다.





Q : 기득권의 민낯을 연기하고 표현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나요

바뀌지 않으니까 문제지.

Q :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언젠간 정치권에 나갈 거 같은데요

(반색하며)총 맞았어? 내가 그걸 왜 나가? 머리털 빠지게. 예전에 아버지(최무룡)가 JP(김종필) 쪽에서 나한테 공천을 준다는 거야. 아버지 임기 끝나고 2년 후에. 나도 모르게 JP 앞에서 욕했잖아. 머리털 빠지는 그런 걸 왜 하라는 거냐고.

Q : 제 기억으로는 아버님이 국회의원 마치시고 1994년 한 토크쇼에 나와서 ‘지금이라도 다시 하고 싶은 게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의정 생활’이라고 답하시더라고요. 그때 국회의원이 좋긴 좋은가보다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단 말이야. 사람이 그래요. 볼 게 너무 많으면 진짜 봐야 할 것이 안 보이거든.

Q : ‘36.5도’라는 밴드 활동도 하던데, 추구하는 음악은 뭔가요

한마디로 ‘샤먼록’이라고 표현하고 싶어. 나는 샤머니즘이 강한 사람이야. 어렸을 때부터 자연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었어. 사람은 힘들 때 비로소 하늘을 보거든. 그게 샤먼록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야. 우리가 추구하는 음악의 감성은 시선 끝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이기도 하니까. 나 역시도 다이아몬드로 짓밟힌 들국화나 야생화를 보면 살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Q : 어쨌든 록이네요

근데 록은 외국 거라 그렇게 불리기 싫더라고. 남의 노래를 흉내 내고 싶지 않았어. 그렇다고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진정성이 안 느껴지잖아.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고 솔직히 몇몇 음반 제작자들의 애들 쌈짓돈 뜯어먹는 수작으로밖에 안 느껴지더라고. 감동이 없어. 감흥만 있고.

Q : 곡 작업은 어떻게 하나요

떠오르면 혼자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휴대전화에 녹음하고. 나는 악보를 볼 줄도 쓸 줄도 모르거든. 난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인생 일기를 쓰는 거야. 음률에다가 내가 봤던 사회적인 어떤 것들을 글로 써서 선율로 입히는 거지. 좀 밝은 노래 한 곡 들려줄게. 제목은 ‘말하는 개!’
(노래) 나는 말하는 개~~~~

Q : 소위 음악 노예라고 하던데. 이렇게 소리를 내면 연주하고 악보에 옮기는 사람이요. 보통 그렇게도 작곡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야 살이 붙거든. 서로 얘기하고 맞춰가면서. 왜 대중가요라는 게 인트로, 노래, 간주, 노래, 끝 이거잖아. 내 음악은 전혀 다르다고. 기존 스타일은 짜증 나.

Q : 그럼 대중적인 부분은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고 만든 거예요

이런 게 사실 진짜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노래) 예~ 할리베베~

Q : 보통 한 곡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려요

아까 그 ‘말하는 개’는 10분 만에 만들었고, ‘할리베베’ 같은 경우는 좀 오래 걸렸어. 가사를 영어로 바꾸느라고.

Q : 음악이 삶을 변화시킨 부분이 있을까요

말도 안 되는 게 말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끼고 있어. 사실 돈이 안 되니까 집사람한테 맨날 혼나는 게 일이야. 나도 그렇고 멤버들도 그렇고. 그런데 우리끼리 단단하게 소통하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닥쳐도 재밌더라고. 우리는 서로 다른 인생을 살다가 모인 거라 단시간에 변화를 느낄 수 없어. 그렇게 돼서도 안 되고. 적어도 10~20년은 있어야 진짜가 나오지. 저기서 퉁 치면 사람들이 가슴을 부여잡을 수 있는 그런 ‘진짜’ 말이야. 그 한 번을 위해서라도 살아가볼 만하잖아. 예술은 항상 휙 돌아섰다가도 어느새 가슴에 툭 내려앉아. 그때는 들리지 않았던 게 나중에 들릴 수도 있어. 우리는 그걸 기다리는 거야. 그걸 찾기 위해 음악을 하는 거고.

‘최민수’하면 떠오르는 것은 가죽 점퍼에 두건을 쓰고 할리데이비슨(이하 할리)을 타는 모습이다. 그에게 할리는 어떤 의미일까? 왜 위험을 무릅쓰고 탈까?

Q : 할리는 몇 대 갖고 있나요

한 대. 촬영 있을 때는 전혀 안 타. 사고 나면 안 되니까. 눈 다래끼도 나면 안 되고. 내가 다치면 수십 명의 스태프가 기다려야 하고 캔슬되니까 관리를 할 수밖에 없지.

Q : 할리는 변형해서 타는 건가요

요즘은 기본으로 타. 내가 바이크 탄 지 20년이 넘었는데, 옛날에는 불법 개조를 해서 타고 다니다가 경찰서에 불려갔었어. 참고인으로 조사했는데 나중에 피의자로 돌리더라고. 세상 재밌지?

Q : 개조 자체가 그동안 안 되었죠

차는 안 그러잖아. 이번에 튜닝할 수 있게 해주잖아. 하게 해야 해. 국민들이 힘들잖아. 차 속에서라도 자기 세상을 갖게 해줘야 한다고. 그리고 튜닝 시장이 꽤 커. 한 2조~3조원은 된다고.

Q : 정확히 아네요. 하긴 이쪽에 워낙 관심이 많으니까

나 학교 다닐 때 수학도 찍어서 74점 맞은 적이 있어. 24개 문항 중에서 20개를 맞춘 거지. 엄청난 찍기 신공이지 않아(웃음)? 예비고사 때도 수학, 물리, 화학 이런 과목은 딱 5분 안에 다다다다 찍고 그걸로 대학교 갔어. 81학번이야.

Q : 81학번이면 학력고사 아니에요

나 다음 해까지 예비고사 본고사였어. 하여간 찍는 것도 촉이 있다고. 선생님 머리랑 같이 가야 해. 선생님 성향도 제대로 파악해야 하고. 저 선생님은 무난하고 평범하니까 문제를 내면 답이 2314 순으로 갈 것이다, 저 선생님은 사이코니까 2222 하는 식으로 내 나름대로 판단을 해서 찍는 거지. 문제는 이게 잘 맞으면 좋은데, 안 맞으면 제대로 올킬이라는 거야.

Q : 모 아니면 도네요(웃음). 할리 동호회 활동 같은 건 안 해요

어우 그런 걸 왜해? 딱 싫어. 어미새 쫓아가는 것도 아니고. 주르르르륵. 철새냐고. 바이크 타는 것도 철학이 있어. 빨리 타는 게 아니야. 특히 할리는 속도로 타는 게 아니라 소리로 타야 한다고. 거리에 시를 쓰면서 타야 해.

Q : 이야~ 시를 쓰면서 타야 한다, 멋있는데요

빨리 달리면 앞차 똥구멍만 봐. 천천히 달리면 항상 길이 열린다고. 길이 열린 상태에서 바람을 느끼면서 타야지, 왜 그렇게 빨리 급하게 시끄럽게 달리는지 모르겠어.

Q : 주로 어느 코스를 다니나요

옛날에는 바이크로 혼자 전국투어를 다녔어. 일 년에 두세 번, 15일씩. 근데 산에서 내려온 다음부터는 그렇게 잘 못하겠더라고.

2000년대 들어와 최민수는 자의 반 타의 반 산속에 파묻혀 도인이 된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남자들은 누구나 무겁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가족들도 훌훌 털어버리고 산속에 들어가고 싶은 로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사는 40~50대 중년 남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나는 자연인이다’가 방송되기 한참 전에 최민수는 산속 생활을 하게 된다.

Q : 바이크 투어를 하면 어디서 묵어요

여관, 펜션, 여름에는 텐트.

Q : 전국을 돌면 돈 좀 들겠는데요

오히려 돈을 안 써. 여관에 묵으면 주인 아저씨가 술 사오고 공짜로 묵게 해줄 때도 있어. 또, 뜨거운 동생들이 많거든. 야, 왔다 그러면 형님 오셨어요 그러면서 회포 풀고. 그런 전국 투어를 딱 끊은 게 산에서 내려와서야. 2년을 비운 만큼 2년은 집 밖을 안 나갔어.

Q : 2년 동안 집에만 있었으면… 어휴… 형수님이 무지 힘들었겠는데요

아내보다 내가 더 힘들었어. 2년이 노예 20년 같은 시간이었다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애들 오면 밥해주고, 아내님 퇴근하시면 가방 들어드리고 마사지해드리고.

Q : 마사지도 해줘요? 대단한 걸요

내 몸이 불편하고 힘든 게 내가 살길인 거지.

Q : 그래도 형수님이나 되니까 선배님과 같이 살지, 웬만한 여자들은 케어하기가…(웃음). 결혼 이후 형수님과 제일 좋았던 적은 언제였어요

무덤파라고? 어떻게 과거가 좋을 수 있어?

Q : 그럼 매일매일이 좋은 걸로 할까요

그대라는 이름의 사랑의 그물 속에 갇혀있어도 나는 행복하다네~(웃음).

Q : 20년 동안 한 번도 한눈판 적 없죠

없어. 횟수 상관없이 한 번이라도 한 눈팔면 끝인 거야. 난 영혼을 항상 세우고 다녀. 생물학적으로 아무 데나 뿌리고 다니지 않는다고.

Q : 애들은 몇 살이에요

작은 애가 중학생이고 큰 애는 대학교 들어갔어. 변호사하고 싶대. 근데 연기, 연출에도 관심이 많아서 아직은 몰라. 그래서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은 경험이다. 어떤 것도 다 경험해라. 그리고 네가 선택해라’라고 말하니 혼자 알아서 선택하더라고. 언제 또 바뀔지 모르지만 강요 안 해. 나는 취업이나 진로 상담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

Q : 아내랑 상의하고 결정하려는?

아니. 난 모르니까.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게 더 유치한 것이거든. 나는 내 애가 초등학교 6학년 때쯤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모르는 건 모른다고 대답했어. 그런 아빠를 더 좋아하더라고.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것만큼 갑갑한 게 없어. 모르는데 같이 찾자가 더 멋있는 말이야. 지금도 몰라. 나는 세상을 많이 아는 줄 알았는데 모르는 게 더 많아. 아니, 아는 게 다 헛것이더라고. 사실 아무것도 몰라. 세상을 아는 게 아니라 현상만 본 거야.

Q : 술은 좀 드세요

끊은 지 9년 됐어. 6년 됐을 때까지는 한잔도 안 먹다가… 아 그거 술 끊기 힘들더만.

Q : 전 담배는 끊었는데 술은 마셔요

난 담배 못 끊어. 담배는 끊을 이유가 없더라고. 담배 피는 순간만이 내가 유일하게 호흡하는 순간이니까.

Q : 하루에 얼마나 피우세요

한 갑 정도. 예전엔 하루에 5갑 피웠어. 내 취미가 사색이거든. 뭐 꽂히면 담배가 항상 모자라더라고. 뭐에 대해서 딱 꽂히면 계속 줄담배를 피는 거지. 근데 나는 담배가 체질에 맞더라고. 몸에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조금만 피워도 냄새 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런 게 전혀 없어.

Q : 옆 사람한테 냄새가 배지 않을까요?

하하. 그런데 실제로 담배를 아무리 많이 피워도 냄새 안 배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원래 길바닥에 막 사는 사람들이 위장병 안 걸리잖아. 내가 그래. 하하하하.

남자가 40대에 접어들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산 날보다 살 날이 더 남지 않은 느낌. 얼마쯤 더 살 수 있을까 하는 우려에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나는 담배를, 최민수는 술을 포기했다.

Q : 산에서 한 2년 정도 머물었죠

그렇지. 저기 천마산 지나 있는 축령산에서. 경기도 지나서 강원 철원 쪽이야.

Q : 산에서 뭐 먹어요

먹을 수 있는 건 뭐든 먹었어. 요리도 하고. 근데 제대로 된 건 못해. 기본적인 볶음밥, 김치찌개, 고추장찌개 이런 거 잘해. 야전에서 할 수 있는 것.

Q : 최민수만의 요리 노하우가 있나요

그런 거 없어. 난 면 볶아 먹고 남은 것에 밥 넣어서 또 볶아 먹으니까. 찌개 먹고 남은 것에 라면 끓이고 또 남으면 밥으로. 그렇게 연차적으로 세 끼를 먹지. 찌개를 한 번 끓이면 세 끼를 먹을 수 있어. 그리고 이게 쫄고 쫄고 나면 나중에 볶음밥하기 딱 좋거든. 이렇게 먹은 게 보통 산에 있을 때였어. 산에 음식물 버리면 안 되잖아.





Q : 산속 어디서 지낸 거예요

처음엔 컨테이너에서 지냈는데 언론에 공개되면서 불편하더라고. 그래서 음기가 엄청 센 폐가에서 지냈어. 알고 보니 그 폐가가 무당이 살았던 집이었더라고. 기가 약한 사람들한테는 귀신이 씌인다는 얘기가 있어서 아무도 그 집에 살지 않았다는데, 난 내 집처럼 편하더라고. 원래 땅 주인은 귀신 때문에 이 집은 절대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우겨서 들어가게 된 거였어. 거기서 참 재미난 기이 현상을 많이 봤지.

Q : 제일 기이한 게 뭐였어요

도깨비 귀신 나오는 건 기본이었어. 자고 일어나면 옆에 있고.

Q : 에이~ 무슨 도깨비에요

진짜야. 아는 동생이 법사인데 걔랑 같이 바이크 타고 그 산을 올라가는데 깜짝 놀라는 거야. 왜 그러냐고 하니까 산군 두 분이 나를 지키고 있다는 거야. 산군이 산신령이잖아. 두 분이 내가 올라가면 이렇게 인사를 한다더라고.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진짜 도깨비를 봤어. 새벽에 자다가 눈을 딱 떴는데 무언의 존재가 싸악 느껴지더라고. 깊고 낮은 숨소리가 4분 정도 났는데 얼마 안 있다가 문 열리는 소리도 없이 나갔어. 창문으로 보니까 3미터 정도 되는 크기의 초록색 괴물이었어.

최민수의 도깨비 목격담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도깨비의 모습부터 크기, 그리고 방망이를 들었는지 여부까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말도 안 되게 화자와 청자 모두가 집중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말이 되는 게 요즘 세상이라고 했던 최민수의 말이 새삼 생각난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은 최민수가 도깨비보다 기가 세다는 것이다. 하긴, 웬만한 산마다 한둘 있을 도깨비가 10~20년에 한 명 날까 말까 한 배우를 어찌 이기랴.

Q : 근데 운동을 따로 좀 하나요

하면 안 돼. 온갖 사고로 수술할 때 전신 마취를 14번 했거든. 실제로 3번은 죽었다 깨어났어. 살아도 전신 마비라고 했는데 산 거지. 원래 길바닥 새끼들은 어떻게든 살아. 근데 그 의사가 나중에 그 얘기를 하더라고. 한 2년은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거라고. 지금도 여기에 줄 그어놓고 걸어도 저쪽으로가. 한쪽 신경이 마비돼서. 그래서 그 이후로 검도를 못하고 있어.

Q : 운동을 꾸준히 사람들이 안 하면 살이 찌던데

난 좀 절식하는 편이야. 다이어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몸에 안 좋은 건 절제하는 게 나은거지. 그래서 술도 끊는 거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집착, 탐식 이딴 것들인데. 소유하려고 하면 소유당하더라고. 갖고 있으면 지켜야 하기 때문에 신경 쓰이잖아. 가진 게 많으면 그거 지키다가 죽어. 사람 봐. 돈 많이 벌어도 나중에 그거 다 어디다 주는 줄 알아? 다 병원에 줘. 젊었을 때 여행 가.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은퇴해서 부인 손 잡고. 가긴 가는데 에베레스트 못 올라가. 그건 여행이 아니라 관광이야. 그냥 에베레스트구나 하는 거야. 강원도 오대산도 젊었을 때 가야 해. 나야 뭐 상관없어. 도전과 열정은 또 다른 이름이야. 젊을 때 가야지. 힘 될 때.

Q : 그럼 아들 둘 한테도 남겨주겠다 이런 생각은 없으세요?

뭐가 있어야 남겨주지. 왜 남겨줘야 해? 한 사람이 가지면 그만큼 뺏기는 사람이 있는 건데 내가 강 변호사에게 어울리는 노래 한 곡 해줄게.

(노래)
아마도 넌 아마도 넌 천국에 가지는 못할 거야 고소공포증이 너무나 심해서
아마도 너는 아마도 너는 천국에 가지는 못할거야 내 욕심 주머니가 너무 무거워서
밤새도록 창문 밖에 궂은비 내리는 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기타를 튕기며
한 잔 두 잔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마시다 아침이 되어서야 자빠졌습니다
구비구비 돌아가는 이 길이 더디고 힘들어도 낭만을 벗 삼은 나의 꼬부랑길
욕심 많은 세상에서 이 길이 더디고 힘들어도 자유를 벗 삼은 나의 꼬부랑길
나의 사람아 왜 내 옆에서 겁나게 방귀를 뀌는 거야 저 가을 액션을 그만두길 바라요
잘난 놈은 뭐 하루에 열 끼를 먹는 것도 아닌데 자꾸 또 그러면 나한테 죽습니다
(후렴 반복)

Q : 하하하. 노래 잘 들었습니다. 이제껏 인터뷰 하면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에요. 그런데 여기는 몇 년째 계신 거예요

3년 넘지~. 아지트야. 내가 숨쉬는 곳.

Q :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아지트 공간도 마련해놓고, 좋네요

내가 옛날에는 술에 돈을 많이 썼거든. 나는 누가 내는 거 싫어서. 예전엔 많이 벌었으니까. 게다가 주변에 없는 애들이 너무 많아서 돈 나간 게 엄청나. 전에 심심해서 한번 세어 봤더니 한 40억원을 줬더라고.

Q : 갚은 사람은요

정말로 돌아온 돈이 하나도 없어. 사실 꿔준 게 아니라 그냥 줬지. ‘갚을 수 있냐?’ ‘꼭 갚겠습니다’ ‘아, 안 갚는구나’ 하는 거야. 신기한 건 사람들이 내가 돈이 있을 때를 기가 막히게 알더라고.

Q : 에이. 대충은 다 알죠. 이번에 이거 했으니 얼마나 벌었겠구나 해서 있을 타이밍에 와서 얘기한 거죠

그래서 아는 거였어? 나만 바보였네. 난 그걸 몰랐어. 이게 운명이라고 생각했거든. 이 돈이 얘가 주인이었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아 내가 순진했네. (매니저를 부르며) 물 좀 줘봐! 갑자기 목 탄다. 난 그걸 왜 몰랐지? 아직도 미제의 사건이었는데. 하여간 결혼해서 한 10년은 집사람이 고생 좀 했지. 다 퍼주니까. 산에 있다가 딱 내려올 때 그때 결심한 게 ‘돈 없이 살겠다’였어. 한 번뿐인 인생 바꿔 살아보자는 마음에서. 아내한테 이 얘기를 했더니 그때부터 진짜 딱 30만원 주더라고.

Q : 한 달에요

그럼 하루겠어? 이렇게 지낸 지 8년 됐어. 산에서 내려온 게 8년 이니까. 저기 책상에 있는 돈이 전부야. 근데 돈 없이 사는 게 좋더라고. 건빵 하나도 고맙고.

Q : 작품에서 나오는 돈은 형수님이 가져가고요

두말할 게 뭐가 있어.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을 영화‘노예 12년’에 빗대어 ‘노예 20년’이라 불렀다. 최민수와 그의 아내 강주은의 결혼 생활은 결혼 당시부터 지금까지 늘 화제다. 최민수가 과연 한 여자와 해로할 수 있을까 했던 우려는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그는 집에 돌아오면 순한 양이 되는 공처가, 아니 노예다.

Q : 새삼 ‘노예 20년’이 생각나네요

한마디 하잖아, 딱 한마디. 2년이 힘들었냐고? 힘들었다고. 집사람이 자기는 돈을 안 버니까 ‘너 뼈 사이에서 소리 날 때까지 일해’ 이러니까 나는 ‘네’ 하는 거지.

Q : 뼈 사이에서 소리 날 때까지 일하라는 건, 뭐 죽을 때까지 돈 벌라는 거네요. 하하

근데 우리 집사람이 참 고마운 게, 1번은 내 사랑을 받아줘서이고, 2번은 이런 나를 ‘너는 진짜다’라고 얘기해준다는 거야. ‘넌 아닌 것 앞에서는 ‘빠꾸’한 적 없었다. 넌 진짜다’ 이렇게 얘기해주니까, 또 그런 착각 속에 나를 봐주니까 고마운 거지. 그게 남자래. 그리고 내 길 아니면 옆눈으로도 보지 말고 그냥 가라고 하더라고. 나머지 돈 못 벌고 이런 것은 결혼할 때부터 알았다는 거야. 내가 얼마나 ‘똘아이’냐면 CF가 들어와도 안 찍었어. 한 번은 과자 CF가 들어왔는데 맛이 없는 거야. 내 입에 맛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찍냐고. 하이모 광고도 거절했어. 덕화 형은 원래 없으니 없는 걸로 하고, 난 있는 것으로 해서 찍겠다고 하더라고. 어쨌거나 대머리 광고잖아. 내가 이마가 넓은 거지 대머리는 아니거든?

Q : 그래도 그거 안 하기 쉽지 않은데, 몇 억원을 놓쳤네요

더 황당했던 건, 금강 광고 1년 했었거든. 거의 계약 기간 끝나서 5억원을 받았는데, 재계약할 때쯤 머리가 좀 길었었어. 그걸 보고 광고주가 머리를 자르라는 거야. 그래서 ‘내 머리 내가 알아서 하지 그걸 왜 당신들이 이래라 저래라야’라고 해서 계약 파기됐어. 그렇게 그냥 있으면 되는데, 3일 뒤에 내가 머리를 스포츠머리로 깎았어. 그러니 집사람이 나를 똘아이로 아는 거지.

Q : 형수님이 진짜 섭섭했겠는데요

꽤 오래 가더라고. 그날 이후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얘기해. 반대로 아내가 사고 친 적도 있어. 전에 내가 대부업 광고를 찍었는데, 사실 아내가 계약한 거였어. 외국에서 촬영하고 들어왔는데 아내가 계약을 해버렸더라고. 광고에 부부가 출연하는 거였거든.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어떻게 수를 쓸 틈도 없이 언론에서 엄청 두들겨 때리더라고. 그래서 ‘싫으면 쓰지 마’ 하면서 반대로 갔어. 그랬더니 난 완벽한 무개념이 되고 ‘죄민수’ 캐릭터만 떳어(웃음).

Q : 형수님이 엄청 미안해했겠는데요

(담배를 깊게 들이마시며)나는 우리 쭌이(아내 애칭)를 너무 사랑해. 느낌 오지? 그래 그거야. 밑밥 먼저 깔고 가는 거라고. 아내는 자기가 잘못한 건 절대 얘기 안 해. 솔직히 말해서 내 동의 없이 계약한 거니까 자기가 잘못한 거잖아. 그래서 가끔 나한테 세게 할 때 내가 노래 불러. ‘무이자~무이자~’ 하고.

Q : 하하하. 억울할 만하네요

아쉬운 거지 뭐. 작년에는 아웃도어 광고를 찍었는데 무슨 세트장에서 멋있게 찍자는 거야. 말이 돼? 아웃도어를 입었으면 나가야지 뭐하는 짓이야. 그래서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칼바람 세게 맞고 ‘아우 추워~’ 이걸로 가자고 들이밀었어. 실제로 다들 죽도록 고생했지. 그랬더니 다음에 재계약은 안 하더라고.

Q : 광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요즘 주변에 하고 다니는 말이 있어. 하이모 광고 다시 들어오면 머리 깎고, 과자 광고 들어오면 남이 씹다 버린 것까지 주워 먹을 거라고. 하하하.

Q : 근데 막상 광고 들어오면 안 할 거 같아요

이 성질이 어디 가겠어. 근데 솔직히 난 CF 찍을 때 숨쉬기가 힘들더라고. 내 몸이 상품이 된 거 같아서 숨 막히고 불편해. 연기는 그 순간 그 장면에서 그 인물이 되서 사는 건데, CF는 하루 찍는 것도 못 견디겠더라고.

광고 얘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돈 얘기로 흘렀다. 주변에서 연예인을 많이 보는데 그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그들의 생활이 화려하지는 않은 것 같다. 특히 한 번이라도 톱클래스에 올랐던 연예인과 그렇지 않은 연예인의 차이는 무척 크다. CF를 찍어 본 연예인과 그렇지 않은 연예인의 차이랄까. 보통 사람에 비하면 엄청난 돈을 번 최민수지만, 많이 쓰고 또 많은 기회를 놓쳐 지금은 별로 남은 게 없다고 자조하는 그의 모습에서 중년 남성의 고민이 언뜻 느껴져 반갑다.


Q : 그럼 지금까지 번 돈은 전부 영화와 드라마로 생긴 소득이겠네요

‘모래시계’랑 ‘사랑이 뭐길래’로 먹고살았지. 특히 ‘사랑이 뭐길래’는 중국에서 엄청나게 히트 했어. 한번은 중국에서 관계자들이 나를 찾아와서 이런저런 제안을 하더라고. 영화 2편, 드라마 1편만 해도 평생 편하게 먹고살 수 있다고. 중국에 인구가 어마어마하게 많잖아. 그때가 또 한류 시초여서 기회이기도 했어.

Q : 지금의 김수현이었네요. 근데 왜 안 했어요

‘사랑이 뭐길래’는 한국에서 한국의 정서로 연기한 거잖아. 중국에서 대박 난 건 덤이고. 그리고 그들이 나를 상품 가치 있는 스타로 보는 것도 싫었어. 그래서 거절했어. 지금은 무진장 후회하지. ‘글래디에이터’를 거절한 것도 아깝고.

Q :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어야 하는데

내가 성공했으면 쭌하고 이 가정 없어.

Q : 아무래도 마약, 여자, 도박, 술 등등 세상에 모든 환락이 다 있으니까

아마 난 죽었을 거야, 진짜로. LA 어딘가에서 말리부 해변가로 할리 타고 가다가, 월스트리트에서 대마초 피고, 그러다 여자에 취해 술에 취해 어딘가에서 방황하다가 갱들한테 총 맞아 죽겠지. 내가 그때 그 선택을 했다면 이런 그림이 그려져. 분명히 몇 작품은 성공했을 거야.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개죽음 당하면 끝인데.

Q : 마음 따라 몸 따라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거 같은데, 그럼에도 또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난 하고 싶은 게 더 많은데 이것만 하는 거라고 생각해. 유치하게 돈, 권력 이런 건 누구나 추구하는 거야. 그게 목적인 상태에서 하고 싶은 것이면 그건 하급이지. 길에서 아무도 안 본다고 담배를 버린다고 치자. 솔직히 착한 새끼가 나쁜 일 할 수도 있고, 개새끼가 좋은 일 할 수도 있어. 세상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근데 길에서 아무도 없을 때 담배 버리면 내가 봐.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어? 인간이 그러면 안 돼. 내 자신에게 얘기를 해야 해. 절제가 자유야. 뷔페 식당가서 먹어봐, 질려서 못 먹어. 3일만 굶기면 건빵도 맛있어. 그게 고맙다니까. 인간은 그래야 해. 배에 기름 끼면 그건 실패한 인생이야. 자유는 ‘자기만의 이유’야. 정체성이라는 거지. 자기만의 이유로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고.



Q : 도를 깨친 거 같아요

모르면 모른다고 얘기해야 해. 거기에 모든 진리가 다 들어가 있어. 모른는 것을 아는 척하니까 이따위인 거야.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진실은 건져.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얘기했는데 그게 거짓이겠어? 왜 없는데 있는 척하고, 가졌는데 뺏으려고 하는 거냐고. 왜 모든 것이 한쪽으로 치우쳐지냐고. 왜 우리는 단순하게 태어나서 사랑받다가 학교 다니고 휴학했다가 군대갔다오고 취업하니까 월세서부터 시작해서 눈 맞아서 결혼해서 좀 벌면서 바쁘게 살다가 승진되고 애가 결혼한다고 또 팔고 바쁘게 살다가 이제 은퇴해야겠네. 은퇴? 나 뭐로 산거지? 왜 그게 인생에 전부이냐고. 누가 강요했냐고. 왜 떠날 용기가 없냐고. 떠날 수 있는 것도 얘기해줘야 하잖아.

최민수처럼 사는 사람에게 가족, 특히 자식들은 어떤 의미일까. 자유로운 영혼에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일지, 메마른 영혼을 달래주는 축복일지 호기심이 일었다. 대학생인 큰아들과 중학생인 둘째 아들. 나도 두 아들의 아빠이다 보니 그의 아들 교육이 궁금했다.

Q : 촬영 없을 땐 뭘 하나

거의 작업실에 있어. 아침에 매일 사우나 가고. 난 뼈가 많이 부서지고 수술을 많이 해서 어혈을 풀어야 하거든.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 해.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아는 동생들 만나서 밥 먹고, 여기 와서 4시간 정도 쓰고, 그리고, 만들다 애들 학교 끝날 때쯤 되면 집에 가서 애들하고 같이 놀아줘.

Q :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원래 평범한 게 가장 특별한 거야. 그리고 나이 들면서 좀 변한 부분도 있고. 내가 산에서 내려온 다음 소중한 것을 깨달았어. 2년 동안 집에 있으면서 감사한 경험을 한 거지. 사실 남자가 제일 바쁠 때가 30대 중반에서 50대까지잖아. 그때 번 돈으로 평생 먹고살아야 하는데, 이게 진짜 웃기는 게 오십이 딱 넘으면 남는 게 없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가족이 없어. 정작 중요한 순간에 아이들 곁에 없었거든.

Q : 맞아요. 아이들이 한참 자랄 때, 그때가 제일 중요한데 참…

2년 동안 집에 있으면서 문득 그 생각이 들더라고. 애들이 대학 가면 부모라는 둥지를 떠나게 될 텐데, 평생 부모를 기억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뭐가 있을까 생각해봤어. 내가 바빠서 일하느라 아이들 옆에 없었다면, 아이들은 과연 아빠를 어떻게 기억할까 생각해보니 순간적으로 무섭더라고. 살을 부비고 끌어안고 쪽쪽 빨고 하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만큼 큰 재산이 없는 거야. 그때 ‘나는 정말 축복받은 인생이라는 걸 깨달았어. 보통의 아빠들은 술 먹고 밤늦게 들어와서 아이한테 기껏 한다는 말이 ‘공부 잘했냐? 들어가 쉬어라’, 애들이 뭐 물어보면 ‘엄마한테 물어봐’, 주말에 놀러가자고 하면 ‘아빠 피곤해. 나가서 놀아’ 이러지 않나?

Q : 100이면 100 다 그렇죠

100이면 110은 다 그래.

Q : 나이 들수록 아이들한테 다가가기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죄가 많아서 그래. 그래도 다행인 건,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 자기 치유법을 알게 된다는 거야. 그래서 부모가 늙고 힘이 빠지면 감히 동정이란 걸 하게 되지.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어떻게 부모보다 자식이 속이 더 깊어져야 해? 어떻게 부모가 자식한테 감히 자식을 거둔다고 얘기해? 자식이라는 순수 결정체 덩어리가 부모라는 사람을 친구로 생각해준다는 것 자체를 무궁한 영광이라고 왜 생각을 못 하는 거야? 그거 영광인거야. 어릴 때는 사랑해주다가, 머리가 큰다고 느끼는 때부터는 부모가 아이한테 강요하기 시작해. 진짜 정상적인 부모는 자식 나이 몰라야 해. 학점도 몰라야 하고. 사랑하고 보듬어 주고 있는 시간도 아까워 죽겠는데, 얘가 몇 살인지가 왜 중요해? 매일 보는 내 아이인데 성적이, 등수가 뭐가 중요해. 하나도 안 중요하다고.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Q : 아이들이 생각하는 ‘아버지 최민수’는 어떤 모습일까요

둘째 유진이가 반에서 꼴찌였는데 난 한 번도 공부하라고 말해 본 적이 없어. 근데 어느 날 아내가 나더러 유진이한테 얘기 좀 하라는 거야. 사실 유진이는 평소에 나를 병신으로 알아. 맨날 이러고 사니까. 그래도 정말 고맙고 다행인 건, 내가 해준 말이 유진이가 정말 듣고 싶어한 말이더라고. 그때 유진이가 나한테 ‘아빠가 많이 아는 구나. 나에 대해서 준비된 아빠구나. 근데 나한테 강요는 안 했었구나.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을까’ 하더라고. 그러면서 스스로 굉장히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해주는데 여기(가슴)가 확 뜨거워지더라고.


Q : 자녀 교육관에 대해 많이 듣고 다녔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얘기네요

실패의 조각들이 쌓인 결과야. 첫째 유성이랑 단둘이 진짜 속얘기를 한 적이 있어. 그때 내가 유성이 앞에 좌복 하고 고해성사 하듯이 말했어. ‘아빠가 너를 정말 사랑하지만 너에게 좋은 친구는 아니었어. 나는 분명히 어느 순간에 귀찮아서 짜증을 낸 적이 있을 거고, 네가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었을거야. 너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야. 거기에 대해서 사과할게’ 하고 말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 굉장히 울었어. 정말 미안하다고.

그때 유성이가 ‘아냐. 너는 정말 좋은 아빠였어’ 하면서 안아주더라고. 얘는 나한테 너라고 하거든. 근데 그 순간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거야. 내가 먼저 엎어져야 해. 그래야 세상을 아직 모르는 그 아이의 진실을 볼 수가 있어. 부모라고 자식한테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너 그거 잘못된 거야, 왜 그걸 몰라’ 이러는 거 아니라고. 애한테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거야.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깨닫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결국 진리와 감사와 보물은 이 삶 속에 있더라고 우린 그걸 안 보고 있었던 거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준비된 자가 아니야. 자식이 아버지를 만드는 거야. 부모를 보면 자식이 보인다고 하는데, 아니야. 자식을 보면 부모가 보이는 게 정답이야.

Q : 아버지로서 정말 많이 반성하게 되네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큰 의미를 찾아야 비로소 크게 이루어지고 거기서 더 찾아가야 비로소 하늘에 닿는다? 아니야. 왜 위로만 가? 물은 중력대로 사느라고 밑으로 내려가. 이 어린아이들이 인간의 모든 오욕, 마음의 사계들을 다 끊고 끊고 자꾸 연마시켜서 하나의 작대기를 없애야 비로서 커지는 거야. 더 정진하고. 사람의 손때가 묻고 이게 질감이고 정감이구나 할 때에야 사람이 되는 거라고. 사람을 업신 여기지 말라고. 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태어나서 크게 되려고만 생각해. 이미 다 가졌는데.

Q : 된 사람 난 사람 든 사람 중 어떤 사람이고 싶으세요

난 된 사람이 좋아. 난 사람이 뭐가 좋아. 난 만큼 누구를 밟고 있으니까 높이 커보이는거지. 든 사람이 뭐가 좋아? 아는 만큼 모르는 게 많은데. 아는 게 중요해? 느끼는 게 중요하지. 내가 달을 안 가봤는데 어떻게 알겠어. 난 달을 몰라. 하지만 느껴. 느끼는 게 아는 거야. 내가 이 사람을 알까? 평생 같이 살았는데 느끼지 못하면 몰라. 그러니까 이혼하는 거야. 안다 한들 모르는 거야. 자기 의지, 자기 필터, 자기만의 지식, 자기만의 삶들이 다 농축된 상태에서 그 아젠다로만 사람을 보는 건 아는 게 아니지. 그걸 어떻게 알아. 모르면 모른다고 얘기해야지. 그게 진짜 아는 거야.

Q : 교주님 같아요

가끔 그런 말 들어. 원래 인터뷰 잘 안 하는데 하면 제대로 하니까. 난 인터뷰할 때 머리로 안 해. 그건 정보 교환이지. 그런 시간 낭비를 왜 해. 난 섹스하는 기분으로 인터뷰해. 그래서 상대방 질문을 집중해서 듣고, 허투루 대답하지 않고, 상대방 역시 내 얘기에 집중하게 만들어. 그렇게 한바탕 ‘썰’을 풀고 나면 체력이 고갈돼. 진짜 인터뷰는 섹스야. 그러니까 혼을 불어넣어서 원고 쓰라는 얘기야. 내가 섹스하는 기분으로 인터뷰한 것처럼, 섹스하는 기분으로 원고 쓰라고.

중년에 접어들면 누구나 비슷해진다. 가족, 직업, 삶의 무게에 눌려 꿈을 잃고 살게 된다. 그저 건강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최민수는 좀 다른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틀, 한계, 제약을 떨쳐버린 그의 생각이 툭툭 튀어나올 때 그는 약간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얼핏 4차원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오늘 그와 세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최민수를 다시 보게 됐다. 아니, 좋아하게 되었고 진정한 팬이 됐다. 그는 대한민국 50대 중에 견줄 이를 찾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존재다.

기획=정은혜 여성중앙 기자, 글=강용석, 사진=박지홍(cao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