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위가 검사인데, 와서 한 번 (계약서를) 보라고 해야겠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의 장모가 2011년 1000억 원 대 빌딩 거래를 하며 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왜 거액의 부동산 거래를 하며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이었던 사위를 불렀을까요?
우 수석은 이 거래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검찰이 그 내막을 캐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사 결과와 별개로 ‘내 사위가…’ 발언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무사는 얼어 죽더라도 곁불(돈과 권력)을 쬐지 않는다”
“검사는 서민의 백마 탄 왕자가 되어야 한다”(이명재 전 검찰총장의 2002년 취임ㆍ퇴임사)는 기대와
너무도 거리가 먼 얘기였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검사.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떻게 공부해 검사가 됐고 평소 어떻게 생활할까요?
"극소수의 일탈인데, 억울하게 도매금으로 욕 먹는다"는 검사들의 호소는 정말일까요?
전ㆍ현직 검사와 각계 전문가들을 만나Ⅰ. 유예된 젊음 Ⅱ. 영감님 혹은
‘2016 대한민국 검사의 초상’을 그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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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더 그렇다.
성균관대 출신이 엘리트 코스 밟았다는 건
그만큼 노력하고 인맥도 관리했다는 의미 아니겠나.”
지난 6월 홍만표 변호사가 부정 청탁 등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자 검찰청 주변에선 이런 말이 돌았다. 검찰 내 요직으로 꼽히는 대검찰청 수사기획관까지 지낸 홍 변호사지만 의외로 출신 대학이 약점이었다는 얘기다. 사실일까.
대한민국 현직 검사는 총 2058명이다. 조인스 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DB)와 법률신문 『한국법조인대관』에 올라 있는 이들의 학력을 분석해 보면 실제로 서울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 다음 고려대·연세대 순이다. “서울대는 성골, 연·고대는 진골, 나머지 대학은 6두품”이란 법조계 우스갯소리가 허튼 소리만은 아닌 셈이다.
일부에서는 법조계의 주류를 이루는 외국어고(F) - 서울대(S) 졸업자를 ‘FS마크’ 출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평균 검사’는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한국에서 사회 생활을 하며 같은 대학 동문을 만날 확률은 산술적으로 약 0.2%에 불과하다. 2010년 기준 25세 이상 대졸 경제활동인구(113만 명)를 전국 4년제 대학 숫자(183개)로 나눈 뒤, 전체 경제활동인구와 비교한 값이다(각 대학 정원은 동일하다고 가정).
하지만 현직 검사 2058명의 출신 대학은 단 40개뿐이다. 특히 서울대 출신이 전체의 38.5%로 압도적으로 많다. 고려대와 연세대가 각각 18.9%, 11.6%로 그 다음이다. 세 대학 출신을 합치면 그 비중은 69%에 달한다. 그 외 대학 가운데 한양대(6.2%)·성균관대(5.7%)·이화여대(3.8%)를 제외한 34개 대학은 비중이 1%대거나 1%에도 못 미친다.
이런 경향은 로스쿨제도가 도입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로스쿨 출신 현직 검사 가운데 서울대 학부 졸업자의 비율은 38.7%로, 사법시험 출신 검사 가운데 서울대 졸업자 비율(38.4%)과 거의 같다. 연세대(19.3%)·고려대(13.7%) 출신이 뒤를 잇고 있는 것도 사법시험 출신 검사들(고려대 19.5%, 연세대 10.7%)과 마찬가지다.
검사장급 이상 고위 검사는 명문대 쏠림이 더 심하다. 총 45명(※외부 개방직인 대검찰청 감찰본부장 제외) 가운데 서울대 출신만 62%다. 고려대(28.9%)와 연세대(4.4%) 출신을 합하면 93.3%다. 10명 중 9명 이상이 소위 SKY 대학 출신인 셈이다.
이같은 균질성은 조직과 개인을 동일시하는 검사 조직 문화의 바탕이 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동질성이 높은 집단일수록 내가 곧 조직이요, 조직이 곧 내가 된다"며 "검사는 조직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충성심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균질한 집단일수록 다른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외부에 대한 배타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물론 이에 대해 “통계적 착시현상”이라는 반론도 있다. 검사장급 이상은 대부분 20년 전에 임관했다. 당시에는 검사의 숫자 자체가 현재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에 특정 학교 출신의 비중이 더 높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설사 검사들의 학력 편중이 사실이라 해도 시험이라는 ‘객관적’ 선발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검사가 조사하는 형사 사건 관계자들은 천차만별의 학력·경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검사들이 몇몇 명문대 출신 중심의 균질한 엘리트 집단이라는 사실은 “보통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비판을 낳고 있다.
검사들의 출신 고교도 일부 학교에 집중돼 있다. 특히 특수목적고인 외국어고등학교 출신이 많다. 법률신문 『한국법조인대관』에 올라 있는 현직 검사 2039명 가운데 187명(9.2%)가 외고 출신이다. 대원외고가 가장 많고(62명, 3%), 이어 한영외고(31명, 1.5%)ㆍ명덕외고(27명, 1.3%) 순이다. 반면 고위 검사들은 소위 지역 명문고를 졸업한 경우가 많다. 경북고와 광주제일고·대구고 출신이 각각 6.3%로 가장 많다.
출신고교의 차이는 검사 집단 내 존재하는 세대차를 보여준다. 전체 검사의 평균 나이는 40.3세다. 1970년대 중후반 태어나 90년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80년대 중반 생긴 외고가 '신흥 명문'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다. 반면 고위 검사의 평균 연령은 52.2세다. 1960년대 초반 태어나 70년대 중반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교 평준화 제도가 전국으로 확산되기 전이다. 고위 검사 가운데 지역 명문고 출신이 많은 건 그 때문이다. 평준화가 먼저 시행된 서울 출신의 경우 경기·서울고 등 전통 명문고가 아닌 여의도고·환일고(각각 4.2%)를 졸업한 고위 검사가 더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구난희 한국학중앙연구소 교수는 “고교 평준화 시행 후 학력이 하향 평준화됐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설립된 게 외고 같은 특목고”라고 말했다. 구 교수는 “당시 세계화 흐름을 타며 외고 설립 열풍이 불었다”고 말했다.
외고 출신 검사들이 늘면서 법조계에선 ‘FS마크’란 신조어도 등장했다. 과거 경기고(K)-서울대(S) 출신을 ‘KS마크’라고 불렀듯, 외고(F)-서울대(S) 출신이란 얘기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KS가 명문고-명문대를 상징했지만 교육 제도 변화로 FS가 부상했다”며 “시대 변화가 검사 집단에도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대에 따라 변한 건 검사의 출신고만이 아니다. 검사의 숫자 자체도 크게 달라졌다.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사법시험의 전신) 시절인 1961년만 해도 전국의 검사는 220명 뿐이었다. 63년 치러진 제 1회 사법시험 출신인 이건개(75) 변호사(전 대전고검장)는 “서울지방검찰청에 근무할 당시 검사가 45명에 불과했다”고 회고했다. 현재 서울중앙지검 소속 검사는 220명이다.
검사의 숫자는 그간 꾸준히 늘었다. 1970년엔 300명, 1983년엔 463명, 1990년엔 755명이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매 5년마다 200~300명씩 늘어 2015년 2000명을 넘어섰다. 사회가 민주화ㆍ법치화 되면서 고소ㆍ고발 사건이 느는 등 법률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연 300명 수준이던 사법시험 합격자도 1000명까지 늘어났다. 검사 숫자가 늘며 검사 1인이 담당하는 국민 숫자는 꾸준히 줄었다. 1961년엔 검사 1명 당 국민이 11만3500명에 달했다. 2015년 현재 검사 1인당 국민은 2만5600명 가량이다. 1983년 2000건이 넘던 검사 1인당 처리 피의자 수도 2015년엔 1200명으로 줄었다.
검사 숫자가 늘면서 검사가 누리던 특권 역시 줄었다. 이건개 변호사는 “옛날에는 검사가 임용이 되면 관할 경찰서장이 와서 인사를 했다. 검사가 유치장 감찰을 나가면 경찰서장이 서장실에 대기하다가 브리핑하고, 전화로 지방자치단체에 '이런 점은 고쳐야한다'고 하면 반영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검사 출신인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검사가 적었던 시절엔 검사라는 이유만으로 존경을 받거나 검찰 내에서 큰 사고만 안 치면 검찰총장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검사 숫자가 늘면서 그런 것들이 줄었다”고 말했다. 금 의원은 “열심히 해봤자 큰 보상이 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접대를 받는다거나 전관을 예우해준다거나 하는 식의 부정부패가 늘어났다”고 덧붙였다.
과거에 비해 특권이 줄었다지만 검사는 여전히 '힘 있는' 직업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법으로 보장돼 있는 이런 검사 고유의 권한은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사법개혁비서관을 지낸 김선수 변호사는 “수사권과 기소권 중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엄청난 권력인데, 대한민국 검찰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무소불위의 집단”이라며 “권한은 막강한 데 견제수단이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외국 검사들은 한국 검사만큼 많은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의 검사는 기소권은 독점하고 있지만 수사권은 없다. 특히 재판 과정에서 수사한 경찰을 증인으로 불러야 하는 만큼 검사는 경찰과 긴밀하고 대등한 협조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 수사권은 있지만 검찰 내 수사 인력이 없다. 때문에 검사가 직접 수사를 하려면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예외적인 경우가 일본이다. 일본도 한국처럼 검사가 수사권·기소권을 모두 갖고 기소권을 독점한다. 하지만 일본 검사는 한국과 달리 경찰에 대해 '수사 지휘권'을 갖고 있지 않다. 경찰의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보충 수사를 하긴 하지만 경찰 수사를 직접 지휘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삼수에 대학교 4년,
고시공부한다고 신림동 쪽방에서 4년,
도합 11년을 왜 그 고생하면서 검사 배지 단 줄 알아?”
영화 '검사외전'의 주인공 검사(황정민 역)가 자신이 조사하던 피의자에게 한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사법시험 출신 법조인들에게 ‘신림동’은 ‘공부에 파묻혀 살던 시절’의 동의어다. 피 끓는 젊음과 불분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공존하던 시절을 상징한다. 물론 로스쿨 제도가 시행되면서 신림동 고시촌의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현직 검사의 90%가 사법시험 출신이란 점을 고려하면 검사들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허허벌판이었던 서울 신림동은 1960년대 용산 해방촌, 대방동 등의 철거민들이 이주하면서 삶의 터전으로 변모해갔다. [서울역사박물관]
관악산 자락에 위치한 1972년도 서울대 캠퍼스의 전경. 서울대가 들어서면서 천막촌이었던 신림동에 번듯한 건물이 들어섰다. [국가기록원]
1980년대 신림동의 한 독서실에서 고시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 [중앙포토]
1990년 3월 좁은 고시원 방에서 공부 중인 고시생의 모습 [중앙포토]
2000년대 초 고시학원에서 수업을 수강 중인 고시생들 [중앙포토]
각양각색의 고시원 표지판으로 가득한 신림동 고시촌 거리 모습 [중앙포토]
에어컨 실외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신림동 고시원의 벽면 [서울역사박물관]
'월 13만원 부터' 신림동 거리의 전봇대에 붙어 있는 고시원 광고 전단지 [중앙포토]
빈방이 있음을 알리는 전단지가 빼곡하게 붙어 있는 신림동 주택가의 벽면[서울역사박물관]
고시학원 홍보물 등 각종 전단지가 붙은 벽보를 바라보고 있는 고시생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신림동의 한 고시식당 벽면에 붙어있는 식권들.고시생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월식을 구매하는 일이 많다. [서울역사박물관]
고시원, 하숙집 등이 밀집한 서울 신림동의 가파른 언덕길 [서울역사박물관]
신림동은 1960년대만 해도 철거민 이주지였다. 75년 서울대가 이전해오면서 천막촌이 사라지고 반듯한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울대 학생들을 위한 하숙집이 생겼고 이들을 상대로 한 상권도 발달했다.
신림동이 고시촌으로 변한 건 1990년대 들어서다. 광복 이후 40년간 판례가 쌓이며 사법시험이 어려워졌다. 덩달아 고시생들의 공부량이 늘면서 이들을 겨냥한 학원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신림동에 고시학원이 모여든 건 현직 검사의 40%가 서울대 출신일만큼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서울대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정부가 늘어나는 법률 서비스 수요에 맞추기 위해 사법시험 합격자 숫자를 꾸준히 늘리면서 고시촌은 번성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예비 검사'들은 신림동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전·현직 검사들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을 직접 돌아봤다.
신림동 고시촌이 생기면서 고시생의 생활도 달라졌다. 1960~70년대만 해도 고시 공부는 ‘절간’에서 하는 것이었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월간 『고시계』에 기고한 합격 수기에서 산기슭에 지은 토담집과 ‘장유암’이란 절에서 공부했다고 밝혔다.
절간에서 독학하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고시촌에서 고시 공부를 하려면 적잖은 돈이 든다. 천도정 전북대 교수와 황인태 중앙대 교수 공동 연구팀이 2014년 발표한 ‘법조인 선발제도별 법조계 진입 유인 실증 분석’ 논문에 따르면 고시생들은 연 평균 932만 원을 쓴다. 사법시험 합격 때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4.79년이다. 고시 공부에 총 4500여 만 원이 든다는 얘기다. 아무리 아껴 쓴다 해도 고시원비며, 학원비·식비 같은 기본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월간 『고시계』에 게재된 합격수기를 보면 후배들에게 돈 문제 해결하는 법을 조언하는 합격생들이 많았다.
#. 열풍에 돛을 달고 - 그리고 좌초
외면하려 했으나 자꾸만 들떴고 마침내는 고시사상 최단기 기록을 목표로 하여 무작정 덤볐다. 문제집을 샀다. 1차의 합격은 나의 이러한 만용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젠 문제집마저도 내 나름대로 밑줄을 긋고 그 부분만 골라 읽었다. 8개월 정도의 준비로 2차 시험에 응했다. 시험장에서 고향의 중학교 후배를 만났다. 사법시험 준비는 나보다 훨씬 선배였다. 나의 공부기간을 듣고는 “전 과목 한번 다 보지도 못했겠네요?”했다.
#. 열풍에 돛을 달고 - 그리고 좌초
어리석게도 나는 자신이 무시당하는 기분에 적이 분개하면서 한편 우습게 받아 넘겼다. “두고 보라지.” 정말 하룻강아지 법 무서운 줄을 모르는 막강한 뱃심이었다. 이런 뱃심으로 시험에 응했다. 기막히게 잘 썼다. 내가 아는 건 다 썼고 또 아는 것은 그 뿐이었으며 집에 와서 책을 대조해 보지도 않았으니 기막히게 잘 썼다고 생각할 수 밖에. 점수는 50점 얼마였다. 뒤에 읽어보니 문제집에 밑줄을 그어 두었던 부분이 모두 엉터리였다. 다른 색깔로 새로 밑줄을 고쳐야 할 판이었다.
#. 열풍에 돛을 달고 - 그리고 좌초
제대 후 공부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게 마음을 뺏기기 시작하여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열을 올리게 되고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 시험 직전에야 겨우 처녀의 마음을 함락 시키고는 안도 했는데 이제 그녀가 결혼 적령을 넘었다는 사실과 고시와 연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중론사이에서 그녀와 나는 고민의 연쇄반응을 일으켰고 또 이틀이 멀다하고 만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애정의 열도에 비례하여 공부를 위한 시간에의 집착이 강하여 심리적 갈등이 심했다. 그러다가 9월에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장유암이라는 절에 들어갔다.
#. 열풍에 돛을 달고 - 그리고 좌초
국사의 추가로 부담이 늘었지만 시험이 연기된 것으로 다행으로 여겨 “수석합격”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열심히 공부했다. 73년 1월에는 예년의 시험대신에 그녀와 결혼했고 5월에는 아들도 낳았으나 나는 여전히 절에서 계속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 ! 그런데... 글쎄 정말 이럴 수가! 그렇게 끔찍이도 나를 아껴주시던 자신의 못다한 소망을 나에게 걸어 꿈을 키워 주시던 큰 형님이 5월 14일 교통사고로 저세상으로 떠나 버리셨다. 한줌 잿가루로 화해버린 형님의 유해를 고향에 묻고 절로 올라 올 때는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전혀 공부도 되지 않았다.
#. 열풍에 돛을 달고 - 그리고 좌초
15회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40여일 뿐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책을 읽기만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며 답답해지는 알지 못할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시험을 한 달 앞두고 보따리를 싸들고 집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아직 산고가 풀리지 않아 부자유스러운 아내와 핏덩이 신걸이,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비탄. 공부가 될 리 없으니 병은 점점 더해지고. 수석합격이라는 화려한 표어와는 달리 응시조차 포기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의 시선이 두려워 마지못해 상경하였으나 시험 첫날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에 무엇이 치밀어 올라 우유와 계란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 새로운 좌표 - 직업의식
책을 잡기만 하면 예의 증세가 나를 괴롭혔다. 고시를 그만 둘까도 싶었다. 학교성적이 우수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고시를 해야 할 필연적 이유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도 되었고 법을 공부하면서 차츰 정의의 이념을 배워 가는 동안 “고시=권력=출세”라는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등식이 우스운 것임을 느끼게 될 무렵 형님의 뜻하지 않은 타계는 예시 과목의 철학개론을 공부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해 오던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맹목적 출세주의와 “그 수단으로서의 고시”라는 과거의 생각에 결정적인 쇄기를 박았다.
#. 새로운 좌표 - 직업의식
그러나 상고를 졸업한지 너무 오래되어 새로운 진로를 찾기도 어렵고 하여 고시를 그만 두지는 못했다. 다만 이제는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배수의 진을 거두어 버리고 하나의 직업인이 자기의 직업에 충실히 종사 하듯이 고시공부도 평범한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려했다. “수석합격”이라는 표어 대신에 “天職=召命”이라 써 붙이고 숙소를 마옥당에서 집으로 철수하여 직장에 출퇴근하는 기분으로 낮에는 마옥당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집에 와서 여유가 있을 때만 공부하기로 했다. 아기가 울면 달래기도 하고 기저귀도 갈아 채우고 밤이 늦도록 아내와 정담을 나누며 잠을 덜자면 이튿날 낮잠을 잤다.
#. 새로운 좌표 - 직업의식
16회 시험도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응시한 정도였고 성적은 15회보다 내려 130위 안팎으로 생각되었다. 17회 준비 1년 간은 정말 순조로웠다. 절에 있을 때 만들었던 독서대의 실용신안 특허 출원 관계로 9~10월에 조금 쉰 것 말고는 가끔 아내와의 대판으로 선풍기 목이 부러지거나 문짝이 떨어져 나가 활극이 연출되기도 하는 가운데에도 예전과 같이 재미있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10월 하순부터는 풀었던 긴장을 바짝 조여 이때부터는 아내가 들건너 마옥당까지 점심을 날라다 주었고 잠은 여전히 집에서 잤으나 신걸이가 잠들기 전에는 우리방에 못오게 하고 책을 보았다.
#. 새로운 좌표 - 직업의식
단지 다른 어느 때보다 정리기간이 착실했으니 훨씬 낫겠지...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신문기자들이 수석합격자 인터뷰하러 올테니 당신도 피력할 소감 한마디 준비해 두지 그래”하고 허풍을 쳤다. 건강은 좋았고 시험은 순조로웠다. 집에 와서도 역시 출발 전의 호언장담을 되풀이 했다. 3월 27일 아침 먹고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진작부터 낮잠에 들어갔다. 꿈결에 “무현아! 무현아!”하는 친구의 떨리는 목소리, 그도 뒷말을 잇지 못했고 더 들을 필요도 없이 아내는 내 무릎에 엎드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형님! 지하에서도 신문을 보십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형님 생각에 자꾸만 우십니다.
<2007년 사법시험합격 김재철 변호사>
“지속적인 공부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수험생활이 길어지길 바라는 수험생은 아무도 없다. 또 그러길 예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경쟁 속에 몇 번 실패하다보면 금방 5년, 7년, 10년이 가고 만다. 이 때 계속 도전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사법시험준비의 3대 요소라하면 흔히 지능 , 돈, 건강을 드는데,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라고 본다. 사법시험에 도전할 정도면 지능은 의심할 것이 없고 건강도 돈이 있으면 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라면 최소 2년 이상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돈을 확보한 후에 도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쟁터에서 실탄 없이 빈총으로 이기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나도 2003년 2차 실패 후 새로 바뀐 영어대체시험인 토익을 준비 못한 탓도 있지만 돈도 없어 1년 여간 공백이 있었다.
<2003년 사법시험합격 권영일 변호사>
우선 지방에서 고시를 준비하신 분들은 신림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계실 겁니다. 멋 모르고 고시준비를 결심한 저 조차도 주위에서 고시공부는 신림동에서 해야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신림동에 가서 공부하려고 돈을 모았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느낀 바에 의하면 굳이 신림동에 1차 공부를 하기 위해 올라올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물론 여건이 된다면 신림동에서 공부하는 게 좋기는 하지만, 자기관리만 철저하게 할 수 있다면 지방에서도 1차는 충분히 준비할 수 있습니다. 강의는 테이프든 동영상 강의든 실강의와 다른 것은 없으니까 최근 판례나 법령 같은 것만 챙기신다면 신림동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참고로 저의 1차때 소요 경비를 보면, 한달에 50만원에서 55만원 정도 썼습니다. 고시원비와 밥값이 28만원이었고 나머지 돈으로 수강료, 책값 등에 쓰면 위 금액이면 충분했습니다.
<2004년 사법시험합격 임황순 변호사>
드디어 발표날, 인터넷으로 직접 확인을 했는데 제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슬픈 것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사실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에서 생활비를 타 쓰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 벌어가면서 생활하는 동생들 볼 면목이 없었고,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워주며 뒷바라지 해준 누나, 합격을 기다리는 여자친구. 이들 모두에게 죄인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합격 아니면 불합격 밖에 없는 현실에서 변명의 여지는 없었고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2004년 사법시험합격 서재옥 변호사>
사시 1차마저 두 번 연달아 떨어졌다. 이 시기가 내 고시생활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내 자신에 대한 문제 즉 자신감의 상실, 무력감, 실의와 좌절 등은 차지하고라도 IMF의 여파로 부모님과 형제들로부터 받고 있었던 경제적 도움도 더이상 바랄 수 없게 되었고, 아내가 하던 식당도 적자를 면치 못해 폐업하는 등 외부적인 문제 때문에 내가 더 이상 공부 한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설상가상이랄까? 2003년 7월 26일 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버님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님의 영전 앞에서 통곡하면서 결심했다. “불효자, 반드시 사시에 합격하여 아버님께 용서를 빌겠습니다.” 나는 나의 결심을 아내에게 말하며 한번만 더 기회를 줄 것을 부탁했다. 아내는 언제나처럼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2005년 사법시험합격 최병일 변호사>
1학년 2학기 개강과 함께 사촌형님의 도움으로 과외자리를 소개받아서 많지는 않지만 그 돈으로 학비 용돈에 충당하면서 2학년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다가는 졸업 이후 과연 내가 무엇을 할까라는 불안감, 너무도 막막했죠.
지금은 웃으며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당시 과외를 통해서 번 한달에 40만원의 돈은 등록금과 용돈에 충당하기에도 빠듯했고 아무 비전 없이 하루하루를 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학원을 하나 다니려고 해도 항상 돈 걱정이 먼저였고, 무슨 일이든 하기도 전에 늘 돈이라는 벽이 저를 가로 막아 온 악순환의 반복을 정말 간절하게 끊고 싶었습니다.
<2006년 사법시험합격 오정택 변호사>
수험기간 동안은 모든 정력과 집중을 시험에만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집중뿐 만 아니라, 수험생활도 수험에 맞게 집중적으로 해야 합니다. 즉 공부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수험생들이 많이 고민하는 것이 이성관계인데, 개인적으로는 수험 시작 전에 이성친구가 없었다면, 수험 기간 중에도 이성친구가 없는 것이 바람직하고. 수험 시작 전에 이성 친구가 있었다면, 수험 기간 중에 헤어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즉 수험 기간 동안은 변화가 없어야 합니다. 그 밖에 인간관계, 건강,경제적 문제로 고민이 생기면 이를 먼저 해결하고 집중적인 수험생활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합격하는데 있어서 운동과 스트레스 해소는 필수적입니다.
<1985년 사법시험합격 조두영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체력의 소모를 막고자 새벽에 형을 깨워 형의 자동차로 등교하고, 저녁에도 형이 다시 집에 태워 주었다. 아침을 먹지 못할 만큼 일찍 집에서 나왔으므로 학생식당에서 이른 아침에 파는 컵라면을 먹었고, 낮잠이 없는 체질이라 피곤하긴 했지만 오수를 즐기지 않았다. 또한 친구들과의 잡담도 피하고 도서관 구석에서 식사와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는 책장 넘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보름간의 준비는 계획 이상으로 빨리 진행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다급함을 알다니! 그 기간 중은 식사에도 상당히 신경을 써서 고기가 있는 음식은 피했고 아침식사가 부실했기에 점심을 넉넉히 먹었다.
<2015년 사법시험합격 차진태 연수생>
아침 6시 30분에서 8시 30분 사이에 규칙적으로 매일 기상하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봅니다. 저는 7시 전에는 일어났습니다. 기상시각이 불규칙하거나 9시 이후에 일어나서 공부를 시작하는 유형의 분들 가운데 최종 합격에 이르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로 보입니다.
과격하게 이야기하면, 적어도 저는 지금까지 기상시각이 9시 이후이거나 불규칙한 선배, 동기, 후배 중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아침에 기상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서 1차 시험 3개월 전부터 정인수 선생님의 사시 1차 형법 기상특강 강의를 들었고, 2차 시험 3개월 전에도 정인수 선생님의 사시 2차 형법 기상특강 강의를 들었습니다. 형법 공부에 부담을 덜게 된 점, 아침부터 기를 받는 느낌을 받았던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저의 경우 보건소 가정의학과에서 스털녹스정이라는 수면제를 처방받아 1차 시험 전날에도 한 알을 먹고, 2차 시험 전날에는 매일 한알씩 먹고 4시간 정도 잤습니다. 아무리 평소에 잠을 잘 주무시는 분들이라도 막상 시험 전날이 되면 어떻게 될 지 모르므로 수면제를 구비해 두실 것을 권합니다.
<1997년 사법시험합격 위인규 변호사>
간단하게 제 고시생활을 적어봤습니다. 제게 이렇게 좋은 직장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시집도 안가고 뒷바라지해 준 막내 누나에게 감사드립니다. 시골서 꼬박꼬박 돈 보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시절 제일 도움이 되었던 영승이와 스터디 동료들, 스터디의 실직적인 리더이자 매너 그 자체인 상엽이, 착하고 성실하고 머리도 좋은 인성이, 23살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진무구한 준섭이. 천재라는 말이 결코 어색하지 않은 성훈이, 그리고 법대의 킹카 도현이와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1997년 사법시험합격 이시열 변호사>
하루에 13시간 정도를 공부했다고 기억된다. 고3들을 위한 독서실이라 오전 9시에 문을 열고 밤 1시에 문을 닫는 시스템이었는데, 한달 정도를 하루도 어김없이 문을 열 때 들어와서 문을 닫을 때 나가니까 하루는 독서실 아주머니께서 나를 부르더니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셨다.
사실 아주머니가 아침에 20분 정도 늦게 나오셔서 독서실 앞에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법시험 준비를 한다는 것을 아시고는 아예 독서실 열쇠를 나에게 맡기시면서 아침에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무척 고마웠다.
고시생들이 아껴야 하는 건 돈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적인 감정과 욕망을 억누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월간 『고시계』 합격 수기엔 “이성친구를 사귀지 말라”거나 반대로 “이성친구가 있다면 절대 헤어지지 말라”는 조언이 많다. 양쪽 다 감정 소모가 크다는 이유다. 그 외 “놀 수 있는 환경은 모두 제거하라” 같은 얘기도 있다. 합격자들은 한결같이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 그게 합격의 왕도”라고 강조했다. 검사들은 평균 5년을 이렇게 산 사람들이다.
고시생 경험은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20대 초중반은 다양한 경험과 실패를 통해 성숙하는 시기인데, 고시생 대부분은 공부 외엔 다른 경험을 거의 하지 못했다”며 “사법시험 합격자는 실패를 경험하지 못한 미성숙한 권력자로 자란다”고 말했다.
고시 준비는 고시생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의 희생도 요구했다. 고시생을 둔 집안에선 ‘큰 시험’을 앞둔 자녀 혹은 남편에게 집안 대소사를 잘 알리지 않았다. 나머지 가족들끼리 알아서 집안일을 처리하는 걸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겼다. 합격 수기에 “부모님이 큰 수술을 받았는데 시험을 치르고 그 사실을 알았다”거나 “공부한다고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애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경제적 도움을 준 누나에게 감사한다”는 류의 고백이 등장하는 건 그래서다. 곽금주 교수는 “이런 경험이 권력과 시너지를 일으켜 검사들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강화시킨다”고 말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공부'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치열한 경쟁이 기리고 있었다. 사법연수원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사법시험 합격자가 매년 1000명씩 쏟아지면서 연수원 성적은 더 중요해졌다.
사법연수원생의 과도한 '학구열'은 종종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1년엔 수료를 앞둔 연수원생이 7시간 동안 시험을 치룬 직후 쓰러져 결국 사망했다. 2006년엔 한 사법연수생이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하기도 했다.
사법연수원 시절은 다른 직군의 법조인들과 동료의식을 쌓는 시기이기도 했다. 검사 출신 김기표 변호사는 “일반인들이 몇 년생인지 확인하듯, 법조인끼리는 연수원 몇 기인지를 묻는다”며 “한 기수가 1000명씩 되다 보니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동기라고 하면 반갑다”고 말했다. 박종선 서울중앙지검 검사는 “연수원 생활은 조(組)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조원끼리 맥주도 마시고 운동도 하면서 친해진다”며 “동기가 1000명씩 되다 보니 전체 동기 간 연대감은 느슨해지고 같은 조원끼리는 더 끈끈해졌다”고 했다.
사법연수원생은 '결혼 시장'에서 몸값도 높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현직 검사들 역시 “연수원 시절 소개업체 등으로부터 맞선 제안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장검사는 “동기생 여러 명이 한 명의 여성과 맞선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딸을 둔 고위 검사 혹은 판사들이 사법연수원에서 사윗감을 찾는다’는 식의 풍문도 끊이질 않는다. 때로는 사법연수생들끼리 이런저런 남녀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2013년엔 한 유부남 사법연수원생이 결혼 사실을 숨긴 채 동기생과 연애를 하다가 아내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로스쿨제 시행으로 이런 사법연수원의 풍경도 바뀌게 됐다. 2017년을 끝으로 사법시험이 폐지되면 사법연구원은 지금까지와 달리 법조인 재교육 기능만 담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