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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검사의 초상]고(故) 노무현 대통령 사법시험 합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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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1975년 사법시험 합격) 


Ⅰ. 머리에


지나간 일은 언제나 아름답게만 보인다지요? 산꼭대기에서는 힘겹게 올라온 가파른 산길마저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듯이 말입니다. 또 승자의 과거는 그것이 자서전이든 타인의 작품이든 가끔 신화적으로 수식되어 있음을 봅니다.

사법시험의 합격 이 것이 긴 여정에서 하나의 중간 목적지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성취와 조그마한 승리로 평가될 수도 있기에 막상 합격기라는 것을 쓰려하니 자칫 어떤 승리감에 도취 되거나 과거를 돌아보는 낭만적인 기분에 도취되어 힘겹고 괴로웠던 긴 수험과정의 체험을 스스로 미화시켜 얘기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까 여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졸 합격자라는 다소 특이한 제 입장이 적지 않은 독학도들에게 어떤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둔한 솜씨나마 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억을 더듬고 그 때의 생생한 감정들을 살려서 몇 자 쓰고자 합니다.


Ⅱ. 동기 - 꿈을 키우던 시절


나는 경남 진영이라는 읍에서 약 10리나 떨어진 산골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형님이 두분,  큰 형님은 부산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를 준비 하였으나 본래 가난한 살림에 벅찬 대학공부 때문에 가세는 더욱 기울어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쯤 끝내 응시도 해보지 못한 채 그만 두고 말았다. 당시 나는 형님을 따라 마을 뒤에 있는 봉하사라는 절에 가서 그곳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형님 친구들의 법이론이나 시국에 대한 토론을 자주 듣곤 했으며 또 형님은 자신의 좌절에서 오는 울적한 심경을 털어 놓기를 좋아했던 모양으로 가끔 사뭇 상기된 어조로 나에게 여러 가지 얘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물론 나는 그 때의 얘기들이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았으나 그들의 엄숙한 표정과 격한 어조의 토론은 만만한 젊음의 패기와 이상을 그리고 격렬한 논쟁의 뒤에 주고받는 소탈한 웃음은 사나이들의 인간미와 호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느꼈고, 이것들이 고시학도들의 속성이요 또 그들만이 가지는 특권으로까지 생각했다. 결국 이런 분위기는 나에게 고시를 해보겠다는 막연한 꿈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살림은 더욱 기울어 둘째형은 중학교를 2년에서 중퇴, 부모님의 노동능력은 차츰 줄어 갔고, 내가 중학교 2년이 되는 해에는 마침내 최후의 명줄로 남아있던 조그만 과수원마저 빚에 쪼들려 처분해야만 했다.

나는 3학년이 되면서 일찌감치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5급 공무원 시험을 거쳐 독학으로 고등고시에까지 밀고 나가 보겠다는 결심으로 옛날 형님께서 보시던 누렇게 바랜 “법제대의”와 “헌법의 기초이론(유진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10월에는 일자리를 찾아 나갔던 형님께서 돌아와 내가 하는 꼴을 보고 크게 나무라시면서 진학을 권하셨다. 나도 가정사정을 들어 고집을 부려 보긴 했으나 끝내 강권에 못이겨 부산상고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예순이 넘으신 부모님들의 생활은 아무런 토지의 근거도 없이 자신들의 노동으로 해결하시도록 내버려 둔 채 둘째 형님이 세탁소 직공으로 벌어 내 숙식비를 부담해야 했으니 대학진학은 아예 엄두도 내어 보지도 못하고 취직반에 들어갔다. 그래도 역시 막연하게나마 길러 오던 고시에의 꿈을 버릴 수는 없었던지 3학년 말 농협에 취직시험을 치른 후 발표도 나기 전에 65년도 11월호 “고시계”를 한 권 샀다. 고시의  냄새를 알기 위하여.


Ⅲ. 출범, 그리고 표류


농협에서 낙방에 이어 개인회사에 취직 했으나 생각보다 급료가 박했고, 근무시간이 많았던 것은 고시로 향한 출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야산 돌밭을 개간하여 심은 고구마와 영세민취로 사업장에서 내 주는 밀가루로 연명하시는 부모님들의 실망을 모른 체하고 직장을 그만두었다. 한달 반의 급료 6천원으로 몇 권의 책을 사고 마을 건너 편 산기슭에 토담집을 손수 지어 “마옥당”이라 이름 붙인 후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준비하기 시작 했다.(당시에는 학력 제한이 있었다).

책값을 벌겠다고 울산 한국비료공장 건설 공사장에 막노동을 하러갔다가 이빨이 3개나 부러지고 턱이 찢어지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용케 11월에는 제7회 예시에 합격하였다. 4개월 정도의 준비로 예시에 합격하는 행운과 함께 이제까지의 나의 처절한 투쟁은  막을 내렸다. 나의 예시 합격에 자극받아 큰형님은 67년에, 둘째 형님은 68년에 각각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67년에는 법률서적을 살 형편이 못되어 예비시험과목을 새로 공부하고 있다가 68년에는 군에 입대했다. 군에 있는 동안에도 공부를 해 보려고 애썼으나 영어 단어 하나 암기 못하고 3년을 표류하고 말았다.


Ⅳ. 열풍에 돛을 달고 - 그리고 좌초


71년 제대를 하고 집에 오니 집안 사정은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4월부터 옛날의 “마옥당(磨玉堂)”을 수리하여 공부를 시작, 5월 2일에 3급 1차에 합격, 그리고 사법시험으로 전환,  처음 법률책을 대하니 다소 흥분되기도 했으나 과연 이 어려운 것을 해낼 수 있을지 더럭 겁부터 났다. 그러나 소설을 읽듯이 마구 읽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겉만 슬슬 핥으니 그럴 수밖에. 전과목을 무질서하게 읽었다. 행정법과 상법이 좀 어려운 듯 했다. 민법을 모르니 그럴  수밖에. 4개월에 걸쳐 오리무중을 헤매면서 전과목 3회독을 마쳤다.

고시계를 66년도부터 소급해서 샀다. 그러나 합격기말고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동안의 체험과 고시계 합격기에서 읽은 것을 정리하여 얻은 것은 책을 읽는 순서 정도였다. 이리하여 민법을 먼저 읽고 소송법에 들어간다는 순서를 정하여 9월부터 시작했다. 새로 읽으니 과거의 3회독은 간 곳 없고 전혀 새로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중 10월에 14회 공고가 났다. 외면하려 했으나 자꾸만 들떴고 마침내는 고시사상 최단기 기록을 목표로 하여 무작정 덤볐다. 문제집을 샀다. 1차의 합격은 나의 이러한 만용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젠 문제집마저도 내 나름대로 밑줄을 긋고 그 부분만 골라 읽었다. 8개월 정도의 준비로 2차 시험에 응했다. 시험장에서 고향의 중학교 후배를 만났다. 사법시험 준비는 나보다 훨씬 선배였다. 나의 공부기간을 듣고는 “전 과목 한번 다 보지도 못했겠네요?”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자신이 무시당하는 기분에 적이 분개하면서 한편 우습게 받아 넘겼다. “두고 보라지.” 정말 하룻강아지 법 무서운 줄을 모르는 막강한 뱃심이었다. 이런 뱃심으로 시험에 응했다. 기막히게 잘 썼다. 내가 아는 건 다 썼고 또 아는 것은 그 뿐이었으며 집에 와서 책을 대조해 보지도 않았으니 기막히게 잘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점수는 50점 얼마였다.

뒤에 읽어보니 문제집에 밑줄을 그어 두었던 부분이 모두 엉터리였다. 다른 색깔로 새로 밑줄을 고쳐야 할 판이었다. 이러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응시자들을 젖히고(?) 과락 없이 300명 안에 들어갔으니 다음에는 틀림없을 거라고 또 한번 낙관했다. 그러나 발표 후 5~6개월을 이유없이 허송했다.

제대 후 공부도 시작하기 전부터 마을 처녀에게 마음을 뺏기기 시작하여 상대방의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열을 올리게 되고 8개월에 걸쳐 집요하게 추근거려 1차 시험 직전에야 겨우 처녀의 마음을 함락 시키고는 안도했는데 이제 그녀가 결혼 적령을 넘었다는 사실과 고시와 연애는 양립할 수 없다는 중론사이에서 그녀와 나는 고민의 연쇄반응을 일으켰고 또 이틀이 멀다하고 만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애정의 열도에 비례하여 공부를 위한 시간에의 집착이 강하여 심리적 갈등이 심했다. 그러다가 9월에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장유암이라는 절에 들어갔다. 국사의 추가로 부담이 늘었지만 시험이 연기된 것으로 다행으로 여겨 “수석합격”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열심히 공부했다. 73년 1월에는 예년의 시험대신에 그녀와 결혼했고 5월에는 아들도 낳았으나 나는 여전히 절에서 계속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 ! 그런데...글쎄 정말  이럴 수가! 그렇게  끔찍이도 나를 아껴주시던 자신의 못다한 소망을 나에게 걸어 꿈을 키워 주시던 큰 형님이 5월 14일 교통사고로 저세상으로 떠나 버리셨다. 한줌 잿가루로 화해버린 형님의 유해를 고향에 묻고 절로 올라 올 때는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전혀 공부도 되지 않았다. 단지 타성에 의하여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과 고시와 출세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결론은 하나, 형님의 꿈 그리고 나의 꿈! 어떻든 고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15회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40여일 뿐,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책을 읽기만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며 답답해지는 알지 못할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시험을 한 달 앞두고 보따리를 싸들고 집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아직 산고가 풀리지 않아 부자유스러운 아내와 핏덩이 신걸이, 자식을 잃은 부모님의 비탄. 공부가 될 리 없으니 병은 점점 더해지고. 수석합격이라는 화려한 표어와는 달리 응시조차 포기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의 시선이 두려워 마지못해 상경하였으나 시험 첫날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에 무엇이 치밀어 올라 우유와 계란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래도 기를 쓰고 책을 볼라 치면 몸에서 식은 땀이 배어 나왔다. 고시계의 통계란에 따르면 결과는 90위 정도, 정리만  잘하면...하는 자신을 얻은 셈이었다.


Ⅴ. 새로운 좌표 - 직업의식


그러나 좀 쉬어야 했다. 책을 잡기만 하면 예의 증세가 나를 괴롭혔다. 고시를 그만 둘까도 싶었다. 학교성적이 우수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고시를 해야 할 필연적 이유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도 되었고 법을 공부하면서 차츰 정의의 이념을 배워 가는 동안 “고시 =  권력=출세”라는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등식이 우스운 것임을 느끼게 될 무렵 형님의 뜻하지 않은 타계는 예시 과목의 철학개론을 공부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해 오던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맹목적 출세주의와 “그 수단으로서의 고시”라는 과거의 생각에 결정적인 쇄기를 박았다.

그러나 상고를 졸업한지 너무 오래되어 새로운 진로를 찾기도 어렵고 하여 고시를 그만 두지는 못했다. 다만 이제는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배수의 진을 거두어 버리고 하나의 직업인이 자기의 직업에 충실히 종사 하듯이 고시공부도 평범한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려했다.

“수석합격”이라는 표어 대신에 “天職=召命”이라 써 붙이고 숙소를 마옥당에서 집으로 철수하여 직장에 출퇴근하는 기분으로 낮에는 마옥당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집에 와서 여유가 있을 때만 공부하기로 했다. 아기가 울면 달래기도 하고 기저귀도 갈아 채우고 밤이 늦도록 아내와 정담을 나누며 잠을 덜자면 이튿날 낮잠을 잤다. 그러나 가슴과 목의 증세는 쉽게 낫질 않아 16회 시험까지는 부담없이 쉬었다. 16회 시험도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응시한 정도였고 성적은 15회보다 내려 130위 안팎으로 생각되었다.

17회 준비 1년 간은 정말 순조로웠다. 절에 있을 때 만들었던 독서대의 실용신안 특허 출원 관계로 9~10월에 조금 쉰 것 말고는 가끔 아내와의 대판으로 선풍기 목이 부러지거나 문짝이 떨어져 나가 활극이 연출되기도 하는 가운데에도 예전과 같이 재미있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10월 하순부터는 풀었던 긴장을 바짝 조여 이때부터는 아내가 들건너 마옥당까지 점심을 날라다 주었고 잠은 여전히 집에서 잤으나 신걸이가 잠들기 전에는 우리방에 못오게 하고 책을 보았다. 그러나 제17회 때에도 역시 정리가 다 되지는 않았다. 단지 다른 어느 때보다 정리기간이  착실했으니 훨씬 낫겠지...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신문기자들이 수석합격자 인터뷰하러 올테니 당신도 피력할 소감 한마디 준비해 두지 그래”하고 허풍을 쳤다. 건강은 좋았고 시험은 순조로웠다. 집에 와서도 역시 출발 전의 호언장담을 되풀이 했다.

3월 27일 아침 먹고는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진작부터 낮잠에 들어갔다. 꿈결에 “무현아! 무현아!”하는 친구의 떨리는 목소리, 그도 뒷말을 잇지 못했고 더 들을 필요도 없이 아내는 내 무릎에 엎드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형님! 지하에서도 신문을 보십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형님 생각에 자꾸만 우십니다.


Ⅵ. 더하고 싶은 얘기


공부방법, 책의 선택, 공부장소, 시간, 독서방법 등에 관한 문제는 각자 다를 수 있겠지요. 그래도 일반론이 있다면 이미 많은 선배님들의 합격기가 말한 것과 저의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답안 작성요령, 분량, 글씨 등도 같습니다.

그래서 제 특이한 입장에 관한 것과 또 제가 따로 하고 싶은 얘기만 골라서 제 경험을 예로 들어 쓰렵니다. 다만 개인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얘기하는 것은 객관성을 잃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만 어느 정도 참고는 되리라 믿습니다.

①독학에 대하여
응시자 중에 4년제는 물론 초급대학에도 안간 사람들만을 독학도로 계산해도 그 수는 600명에 거의 육박하는 수임에도 합격자 수는 수 년만에 겨우 하나씩 나올 뿐으로 도저히 비교가 안된다. 이런 점을 보면 대학교에는 꼭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주로 경제사정과 연령이 문제인 것 같으나 경제문제라면 요즘 일부 사립대학에서 고시반을 편성하여 학비는 물론 숙식 일체까지 밀어 준다고 하니 오히려 독학보다 경제적으로 부담이 가벼울 것이다. 연령 문제도  생각 나름이 아닐까?

②그래도 구태여 독학을 하겠다면...
독학도들의 고시 합격률이 지극히 저조한데 반하여 대학 출신자 중에는 법대 출신이 아니고도 고시에 합격하는 사람이 많고 17회에는 수석 합격자가 공대 출신이다. 이러한 결과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연유하는 것이겠으나 나는 이 점을 대학에서 얻게 되는 일반 교양과정의 지식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과거 예비고시에 합격한 후에도 법서를 살 형편이 못되어 군에 입대하기까지 1년간을 예시과목의 책을 그대로 읽었고 이것이 제대 후 법서를 공부할 때 상당한 도움을 준 것 같았다. 이런 점에서 학력제한이 철폐된 오늘의 제도보다 과거의 예비시험 제도가 보다 합리적인 것이 아닐까?

흔히 독학도들은 소위 공부방법이나 수험정보, 고시기술론, 고시 분위기 등에 생소함을 걱정하게 되나 그런 점은 고시잡지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수험 기간 중 많은 사람들과 많은 얘기들을 나누어 보았으나 수험 잡지의 합격기나 좌담회, 통계 기타 안내 편에 나오는 이상의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③병역문제
군에서 공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러나 어차피 가야 한다면 일찍 갔다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현역 복무 중 가는 세월을 한없이 초조하게 생각했으나 마치고 나니 부담이 없어 좋았고 또 졸병생활 그 자체가 하나의 수업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수험과정 중에 필요했던 끈기 있는 자세는 군에서 몸에 익힌 바 큰 것이었다.

④연애와 결혼
처음 8개월에 걸친 일방적 구애작전은 시간과 정력의 손실이 너무 컸다. 그러나 일단 결혼한 후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아내의 세심한 배려는 말할 것도 없고 점심을 가지고 올 때면 언제나 따라오는 개구쟁이 신걸이의 재롱은 식사시간을 즐겁게 해 주었고 붉은 낙조를 바라보며 집에 건너오면 또 반겨주는 신걸이의 고사리 손이 하루의 긴장과 피로를 깨끗이 잊게 해 주어 나는 침체기를 몰랐고 따로 휴식이나 기분전환꺼리가 필요 없었다. 애타는 애인들 있으면 결혼들 합시다.

⑤건강
절대적 조건임은 두말할 것이 없고, 다만 공부로 오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보다 초조, 불안 등의 심리적 파탄에서 오는 손실이 훨씬 더 심각하고 장기적인 것이다. “고시 아니면 파멸”이라는 생각이나 출세에의 지나친 집착, “최단기”  “수석합격” 등의 욕심은 사람을 견딜 수 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하나의 직업인이 성실하게 직장에 임하듯 수험 생활에 임했더니 장기에 걸쳐 장소를 옮기지도 않고 공백기간도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바꾸고도 곧잘 대성 하더라. 일정시까지 안되면 직업을 바꾸면 그만이다.

여하튼 다소간의 긴장은 필요하겠으나 지나친 시간은 아무리 아까워도 깨끗이 잊는 것이 좋다. 장기전에서 며칠의 허송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여하튼 나는 이런 느슨한 자세로 공부했다. 그러나 결코 남보다 노력을 덜하지는 않았다. 보통 10시간은 넘게 공부했고 일단 책상에 앉으면 무서운 집중력을 구사했다. 머리가 혼란해지고 잡념이 생길 때에는 책을 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일단 책을 떠나면 고시는 깨끗이 잊었다. 이런 느슨하면서도 투철한 자세는 확고한 직업관에서 왔다고 생각되지만 또 합격에의 신념으로 보완될 때 더욱 안정적이라 생각된다.

[출처=고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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