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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검사의 초상]안대희 전 대법관 사법시험 합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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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기'

안대희 전 대법관(1975년 사법시험 합격)


1. 탈출기를 쓰면서


합격의 영광을 갖다 준 하늘에 감사드리며 이 글을 쓴다. 어느 교수님 말씀처럼 합격기를 승전기처럼 쓸 생각은 없다. 그리하여 수험기간 중 느꼈던 일체의 감상은 제외하고, 짧은 수험기간에 불구하고 어떤 원인이 합격의 결과를 낳게 했느냐를 수험생 제위의 비판에 맡기면서 공부에 관련된 사실을 숨김없이 종적인 고찰과 횡적인 고찰을 하고자 한다. 특히 우수한 법대 동료들의 빠른 합격을 바라면서 대학생활의 억눌린 점을 토로하고자 한다.

합격이 행운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많은 합격생이 노력을 쌓은 결과 행운이 찾아왔음에도 나도 노력을 하여 결과를 얻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어차피 합격이 운이라면 그러한 운을 수용할 만한 우리의 자세는 각양각색의 방법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이다. 인간이 완전한 것이 아니듯 여기에 정확히 1년 6개월 가량의 인내로 그 자세를 이룬 나는 그 원인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장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지고 구속을 싫어하며, 감수성이 예민한 인간이 그러한 기질과는 먼 법학에 몰두하여 스스로 구속을 가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모순되고 괴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와 상황이 정의를 요구하고, 그것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법학과 관계있는 것이며, 법이 민주사회의 초석이라면 그것은 괴로움과 모순을 없앨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자기 합리화일지는 몰라도 나의 수험자세를 안정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학년 말부터 공부를 시작한 것은 확실히 비극적일지 모른다. 가장 많은 것을 느끼고, 가장 행동적이어야 할 시기에 고시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자신도 없으면서 고시를 의식한다는 것은 속물적인 인간세계의 비극으로 돌려버려야 할까? 확실히 법학은 매력이 있을지 모르나 고시는 괴롭다. 앞으로 시험제도의 개편이 있기를 기대하며, 자유롭고 알찬 분위기에서 법에 매료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원한다.

짧은 수험기간이었지만 남달리 복잡하며 다양한 생활을 겪었고, 인간의 성장과 수험기간이 동시에 있었던 것 같다.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든지, 사회활동에 있어서 인간적인 생활(음악, 연극, 미술, 철학 등)에 물들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탈출구로서 공부를 택했으며, 공부를 택한 결과 고시를 의식했다. 결과적으로 일단 합격을 한 후에 반성해보건대 혼자서 사색과 명상이 많았던 것은 나 자신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고, 반면 이제 청년기를 잃어버린 것 같다. 합격보다는 한 인간의 격변기를 기록하는 것이 올바를 지도 모르지만 가능한 한 짧은 수험기간을 어떤 요령으로 공부했느냐에 관한 것만 적겠다. 그러나 모든 것을 느껴야 하는 시기였기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영향을 미친 모든 사실을 냉정히 기록하여 반성해 보겠다. 그리하여 어떤 도움이 여러분에게 될 것을 기원한다.


2. 종적인 고찰


①준비기
대학 1학년 입학 직후부터 시험을 의식했다. 1학기를 주로 경제원론과 법철학을 읽는 데 소비했고, 헌법책을 처음 읽은 것은 4월달이었다. 이 동안 고시공부다 하고 책을 읽지는 않았고, 재미삼아 기껏해야 하루 2~3시간 그것도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였다. 일종의 교양서적을 읽듯이 나를 의식하는 방편으로서 읽었다. 처음 경험하는 대학생활은 많은 어려움과 당황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에 적응하기에 나의 인간은 너무 작았다. 그리하여 방황하고 회의하는 가운데 외부적인 것과 접해 나갔고, 필연적으로 인간의 초라함과 무지함을 깨달아야만 했다. 그것은 깨우치기 위하여 전전하여야 한다는 대학생활의 기본적 명제는 외부의 유혹과 자신의 강인하지 못함을 깨달았을 때 방향이 우회하여 법서를 선택했다.

생각건대 1학년의 이 선택은 최선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차선의 방법에는 틀림없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한다. 1학기 초의 meeting 친우들과의 토론, 술좌석, 야유회 모든 것이 재미있다고 느껴졌지만 적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비참해졌고, 자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고독감을 느껴야만 했다. 탈출을 위하여 연애를 찾고, 술, 도박, 오락도 찾았지만 인간의 미성숙에서 기인한 감정은 결국 인간의 성숙으로서만 해결된다는 원칙에 의하여 탈출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남은 길이라고는 법대생에게 주어진 환경 밖에 없었다. 이것이 대 사회적인 정의감과 더불어 공부를 일찍 시작한 동기이다.

무엇인가 하여야 한다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함은 법서의 진행과 더불어 극복되어 갔고, 법철학은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 때 책은 주로 속독이었으며, 민총, 형총, 헌법은 속독 1~2회독, 경제원론의 분배론까지, 학교강의와 노트정리, 법철학은 정독 2~3회독 정도였다.

②1차시험기(73.11.1~74.2.20)
한창 사춘기적 첫사랑의 열등감에 빠져 있을 때 1차시험의 공고를 아무런 의식 없이 우연히 보았다. 그 전까지만 해도 시험을 쳐야겠다는 생각은 잘 안 났고, 공부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생 처음 하는 집중적 공부라 배겨내기도 힘들었고, 건강의 손실도 컸다. 11월 한 달은 기본 3법만 속독으로 1~2회독했다. 선배의 지도가 없었기에 공부를 고등학교 때 하는 방식으로 1과목당 1~2시간씩 배정하며, 하루 4~5과목씩 봤다. 영어는 학원을 한 달 다녔고, 채권법도 학원에서 한 달 들었으나 별로 효과는 없었다.

12월달에 들어 하루 7~8시간의 공부도 못 이겨내어 생니가 빠지는 고통도 겪었고, 정신의 방황이 되살아났다. 27일경 도저히 집에서는 못 견디어 성북동 대성암으로 옮겨 혼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절에서 건강은 회복했으나 잠은 늘어 잠 10시간에 공부 7시간 정도로 계속했다. 합격에 대한 회의가 생기고 초조하긴 했지만 1차만 의식한 공부이었기 때문에 무난히 합격했다. 이 당시 나의 기쁨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일찍 공부를 했다는 부끄러움도 생겨 남에게 될 수 있는 한 알리지 않으려 했다.

가끔 우수한 친구들이 1차에서 고배를 드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1차를 너무 의식하지 않았던 것일 것이다. 요사이는 옛날과 달라 경쟁률도 높고 과목이 많으니 아까운 시간이라도 할애를 하는 것이 2차에도 도움이 되고 만일의 경우에 안전책도 될 것이다. 절에서는 반찬을 집에서 날라다 먹었는데, 어머님의 뒷바라지는 싫을 지경으로 과다했다. 정말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오늘이 없었으리라.

③2차시험 준비기(74.2.20~75.2.24)
(1)절에서
1차시험이 끝나고 절에서 계속 머물렀다. 2차공부는 이때 처음 했다 2월달 계획을 세우길 4단계로 나누어 1단계-1학기 말 시험까지 기초완성, 2단계-여름방학동안 체계화와 이해 완결, 3단계-정리와 암기(2학기 동안), 4단계-최종정리(겨울방학 동안)로 했다.

반성해 보건데 굉장히 무리였고, 무지의 소치로 이런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봐서 3단계만 실패했고, 나머지는 그런대로 됐었다. 이왕 탄 기차이고 도중에서 멈추기에는 집안의 기대, 주위의 눈초리가 무서웠다.

그러다보니 3월 개학과 더불어 마음은 공허해졌고, 중순경 공부의 권태와 학교 앞 다방에서 여자한테서의 인격적 모욕은 인생을 회의에 빠지게 하였으며, 술과 음악을 벗 삼아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 당시 공부는 열심히 할 때는 하루 10시간, 안할 때는 도통 안했는데, 그 비율이 1:1가량 됐다. 마지막에는 절 생활과 학교 옆 도서관 생활을 같이 해봤으나 공부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양주 몇 병을 집어 들고 GoGo 미팅을 주선한다고 까불대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2)동숭동 하숙에서(4월 중순~7월말)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거처를 옮겨 학교 옆으로 왔다. 이 당시 오빠라고 불러주던 M.Y는 상당한 정신적 위안이 외었고, 공부에 가일층 신선함을 더하였다. 규칙적 공부는 다시 시작되었고, 하루 7시간은 꼭 확보하였다. 슬럼프도 별로 없었고, 쉬는 날도 없었다. 이때 민소, 상법 등을 처음 읽었으며, 민법은 상당히 진도가 나갔고, 형법각론은 노트정리가 돼 있었다. 건강은 상당히 양호하였고, 인생이 정말 재미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때의 기초완선이 합격의 지름길이 되었던 것 같다.

매일 5시경 일어나 오후 1시까지 공부에 신경을 쏟았고, 오후는 학교에 나가 강의도 듣고 휴식도 취하였으며, 저녁에는 술도 먹고 공부도 1~2시간 하였다. 소설을 읽었고, 음악도 들었다. 단, 공부할 때는 집중적으로 온 신경을 다 쏟았었다. 6월말 쯤 권태가 왔으나 M.P와의 데이트로 권태를 메우고, 7월 중순 다시 본격적으로 공부에 들어갔다.

(3)혜화동에서(8월 중순~10월 초순)
하숙집 사정으로 동숭동을 나와 청평에 휴식 차 공부도 겸하여 어느 분의 별장에 가 있었다. 그러나 캠핑족의 놀이는 마음을 설레게 하여 일주일 만에 서울로 돌아와 혜화동에 하숙하였다. 혜화동에서 한여름을 거의  공부에만 신경을 써 개학쯤에는 모든 과목이 상당한 진도까지 나가 있었다. 이제 암기의 체계화에 들어가려고 계획을 짰었다. 그러나 암기는 도저히 되지를 않아 9월 중순부터 합격에 대한 회의가 되살아났다. 고시병 환자가 될 것 같은 착각이 들고, 주위에서 일찍 공부를 시작한 것의 어리석음을 인식시켜 줄 때의 괴로움은 말할 수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여인에 대한 실망과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 볼려고 삼청공원에서 소주잔을 들이키며 폭음을 했었고, 존경하는 M.K와 미팅 주선을 한 사실이다. 9월 말~10월 초 학교의 낙산제 행사의 전야제가 기억에 새롭고, 가끔 성균관 대학에 강의를 들으러 나갔으며, 권태를 이기려고 책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하루에 한 부분을 했다. 이때의 심정으로 합격은 도저히 기대하지 않았고, 어머님의 채찍이 없었다면 도중하차의 비극을 낳았을 것이다.

(4)집에서 (10월 초순~2월 20일)
다시 집에서 새로운 기분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교과서 중심의 공부로 교과서가 낡은 것은 모두 새 것으로 바꿨다.

민총부터 읽어나갔고, 하루 2과목씩 병독을 했다. 헌법, 국사는 속독만 해오다 이때부터 정복과 정리를 하자니 자신이 없었다. 약한 부분에서 시험이 나오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서 공부가 오히려 안 되었다. 공부가 안될 때는 고시계의 합격기를 읽어가며 마음을 다졌고, 10월 30일 공고가 나자 더욱 의욕은 솟았으나 본증적인 욕망과의 거센 충돌로 심한 방황을 했으며, 그 상황은 1월 초순까지 계속되었다. 이 당시 공부의 능률은 올랐으나 계속적이지 못했고, 하루 생활을 공부와 잡서 읽기에 3:2 가량의 비율로 소비했다. 지금은 읽어라 해도 싫은 주간지, 무협소설, 가끔 성인만화, 소설책 등을 계속 읽었다. 이젠 공부에 대한 도피로서 다른 것을 찾았던 모양이다.

합격기에 의하면 시험 전 3~4개월은 하루 12시간씩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하루 7~8시간 밖에 확보하지 못하였고, 상법의 어음, 수표법과 행정법의 공용수용부분이 4~5회독 밖에 되지 않아 실력이 얕았다.

1월 중순 성라암 절에 4일간 있다 집에 온 후 정신을 차려 잡서를 끊고 본격적 최종정리에 들어갔다. 타이틀을 외워 흐름을 안 뒤 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답안을 자기 나름대로 쓰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민법 자력구제를 완전한 답안 가까이 쓰게 하여 일찍 붙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시험 13일 전에 집안의 과중한 지원에 반발하여 시골로 간다고 집을 나와 시내에서 노닥거린 적이 있었다.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잡념은 없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끼며, 답안작성연습에 몰두하였다. 시험 일주일 전 꿈에 아주 해맑은 푸른 바다를 보고 합격을 확신하며 마지막을 매진했다.

(5)시험장에서
평소에 ‘승패는 순간이 좌우한다’ ‘패배는 죽음이다’라는 필승의 이념을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갈 때 하늘에 합격을 다짐하며, 엄숙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했다.
처음부터 혼자 시작한 공부였고, 시험장에서도 외톨박이로서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마음의 평정이 깨뜨려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헌법과 국사를 생각보다 무난히 치르고(점수는 나빴다), 둘째 날 상법을 고비로 생각했다. 상법 1번 문제는 평소 잘 안 읽던 부분이었고, 예해중심의 공부의 맹점을 찌른 것이어서 무척 당황했다. 그러나 2번 문제가 아는 것이었기에 꾸려나가 보니 합쳐서 5장 밖에 안 되었다. 마지막 날 형소 1번 문제에서도 약간의 실수를 하였으나, 시험을 실력보다 그렇게 못 보지 않은 것을 느꼈고, 합격을 확신했다.


3. 횡적인 고찰


①건강
공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와 건강인 것 같다. 다른 모든 것은 이 두 개만 구비하면 다 극복할 수 있다. 실제로 나는 몸을 위하여 억지로 못 먹는 음식도 먹어봤고, 영양주사를 시험기간 동안 맞았다. 어머님의 배려는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이다.

②운명
운명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은 결과론적인 말일 뿐이다. 숭고한 의미의 운명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의지의 결과이겠지만, 그것을 자기 성공이나 실패의 변명으로 삼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할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시대적 운명이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갈 때 단순한 출세주의자보다는 정의와 신념에 가득한 인간이 힘을 얻을 것을 확신했다. 반성해보건대, 우리 고시수험생들은 얼마나 현실과 타협을 가지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기에 노력하는가? 나 자신부터도

③공부방법
하루 7~8시간, 초기에는 주로 새벽공부, 보통 하루 2과목씩은 기본 과목과 다른 과목을 같이 읽었고, 국사, 헌법은 휴식 시간에 소설책 보듯 속독했다. 정리기간에는 빠뜨리지 않고 과락이 나오지 않게 전 부분을 타이틀이나마 외웠다.

④수험자세
올바른 수험자세는 슬럼프를 극복한다. 라드부르후가 말하는 규범적인 학생이라면 아무 걱정할 것 없으나, 출세주의자나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꼭 채찍질이 필요하리라. 출세의 과감한 의욕이라든지, 남보다 낫고 싶다든지, 수치를 면하려던지, 그것을 정당화시켜 유지시킬 만 한 고시관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별로 자랑할 것 못되는 순진한 생활과 정의감이 항상 뒷받침한 의욕이 기본적인 노선에 변경을 가져오지 않았다. 여기에도 어머님의 채찍질이 굉장한 역할을 했다.

⑤술, 담배, 여자, 잡기
담배는 안 피웠다. 피우지 않은 것이 기억력의 유지에 좋다고 한다. 술은 가끔 즐겼는데 카타르시스의 발산에 좋다지만 될 수 있는 한 안 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여자는 항상 진실을 찾아서 사귀었다. 짝사랑을 느낄 때 혹은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하였을 때는 공부에 굉장한 방해가 된 것 같다. 서로가 마음의 일치를 느끼고, 여자가 밀어줄 때는 공부도 잘 됐던 것 같다. 좌우지간 모든 것을 안 하고 지낼 수 있다면 제일 좋지만, 그렇지 않을 바에야 가장 공부에 손해되지 않는 방법을 자기가 찾아 적응시키는 것이다. 어쨌든 수험기간은 공부가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고, 모든 제반 여건은 합격을 향한 +, -로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4. 맺으면서


건방진 말을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 특히 선배님들 그리고 대성암 절에 있던 이형한테 그러합니다.

“자기 자신의 미를 창조하라. 그것이 어지러운 세상을 사는 비결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고시는 비중이 낮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일단 의식했다면 충실한 것이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일 겁니다. 휴머니티는 잃지 말아야겠지만 너무 잔정에 휩쓸리다 보면 해이해 지는 것도 사실일 겁니다.

반성해 보건데, 나 자신은 고시공부에 성실하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자기 고유의 개성에 따라 열심히 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고시시간을 단련기라 생각합니다. 박력과 패기를 잃지 않을 정도의 단련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늦게 붙으면 비굴해지고, 일찍 붙으면 교만해진다고 합니다. 언제 붙던, 누가 붙던, 비굴과, 교만도 없는 인간이 되어야겠죠? 좌우지간 이러한 모든 것을 해결할 시험제도의 개혁과, 고시만이 아니라도 법학을 마음껏 공부할 수 있기를, 패기에 가득한 법률가가 나오기를 간절히 빕니다. 어차피 60명의 한정된 인원만 뽑는다면 열심히 해서 붙으란 말도 우습습니다. 저는 진실로 사명감에 불타는 후배, 동료들의 많은 합격을 기원하겠습니다.

[출처 = 고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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