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사엔 가라오케방, 여성가무단도…'쉬 황제' 꿈꾼 中부자 몰락 [후후월드]

    본사엔 가라오케방, 여성가무단도…'쉬 황제' 꿈꾼 中부자 몰락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쉬자인 헝다 회장. 로이터=연합뉴스 “쉬 황제의 혈맥으로, 가정이 나라라는 정서, 중국적인 인상에, 탁월하고 비범하며, 한계를 넘어선 성취는, 멀리 나아가며, 웅대한 인생, 큰일 할 사람은 하늘이 만든다(許帝血脉 家國情懷 印象中國 卓爾不凡 越界成就 且行且遠 偉岸人生 大器天成).”   지난 2017년 쉬자인(許家印·65) 헝다(恒大)그룹 회장이 헌사 받았던 한시가 그의 체포와 함께 재조명받고 있다. 첫 구절 ‘쉬 황제(許帝)’뿐만 아니라, 행간의 첫 글자만 이어 읽으면 “쉬자인은 탁월하고 위대하다”라는 정치적 야심을 담은 문장이 숨어 있다. 삼행시처럼 머리글자에뜻을 숨기는 쉬자인의 장두시(藏頭詩)를 지난 1일 중국의 대표 논객 쓰마난(司馬南)이 좌파 토론방에 공개하면서다.   지난 2017년 쉬자인(왼쪽) 헝다그룹 총수가 자신을 찬양하는 장두시 액자를 받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시의 첫 글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 읽으면 “쉬자인 탁월 위대”라는 문장이 숨어 있다. 쿤룬처 사이트 캡처 천문학적인 부채로 중국 경제의 시한폭탄으로 전락한 헝다 사태는 총수 쉬자인 체포로 수습 국면에 접어들었다. 헝다그룹은 지난달 28일 “집행이사 및 이사회 의장인 쉬자인 선생이 위법 범죄 혐의로 법에 의거 강제조치(체포) 당했다”고 공지했다.    체포를 계기로 쉬자인의 과거 치부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지난 1958년 허난성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부동산 그룹 헝다를 일군 쉬자인은 지난 2017년 자산 2900억 위안(약 54조원)을 기록하며 마윈(馬雲)을 제치고 중국판 포브스 후룬이 선정한 부자 순위 1위에 등극했다. 부동산 개발 붐을 타고 폭풍 성장했던 쉬자인은 정치적 야심에 각종 부정 행각을 저지르다 결국 몰락의 길에 빠졌다.    쉬자인 헝다 회장의 베이징 저택(동그라미). 웨이보 캡처  ━  베이징 중난하이 인근 초호화 쓰허위안 보유   쉬자인의 베이징 호화 저택을 찍은 영상이 최근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 퍼졌다. 중국 최고 지도부의 집단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와 이어진 스차하이(什刹海) 옆을 흐르는 위허(玉河)와 인접한 곳에 신축한 전통 주택 쓰허위안(四合院)이다. 전통시대 황제가 배를 타고 지났다는 곳으로 항저우와 이어지는 대운하가 시작되는 곳이다.   저택 시가는 1억 5000만 위안(약 279억원)에 이른다. 지상으로 높이 올리지 못하는 쓰허위안의 특성 때문에 지하 3층으로 지었다고 한다. 현재 쉬자인 저택의 정문은 담으로 봉쇄된 상태다. SNS 영상엔 집안에 심으면 부귀와 영화를 가져다준다는 속설에 궁정에서 주로 심던 한 그루 200만 위안(3억7000만원) 상당의 자미화(紫薇花)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이 보인다. 쉬자인의 저택 바로 옆이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의 저택이라고 설명하는 음성도 담겼다.    쉬자인은 베이징 저택 외에도 홍콩에 총 25억 위안(4600억원) 상당의 주택 세 채를 보유했다. 현재 그중 7억 위안 상당의 저택을 중국 국영기업에 넘겼고 나머지 두 채도 압류된 상태다.   지난 2017년 9월 12일자 헝다그룹 기관지 ‘항대보’ 1면. 쉬자인 헝다 총수가 구이저우를 방문해 당시 쑨즈강 당서기와 천이친 대리성장(현재 국무위원)을 만난 소식을 게재했다. 오른쪽 위에 내부 간행물, 비밀 주의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웨이보 캡처    ━  짝퉁 인민일보에 지방 1·2인자 회견 과시   당을 배경으로 기업을 키운 쉬자인은 정치적 야망도 키웠다. 특히 지난 2017년 19차 당 대회 전후 극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헝다 그룹은 그룹 매체로 ‘항대보(恒大報)’를 발간했는데, 문체와 양식 모두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를 베낀 듯 유사했다. 항대보 2017년 9월 12일 자 1면에는 ‘쉬자인 주석, 2017년 구이저우 투자유치회에서 쑨즈강 구이저우 성 서기, 천이친 대리성장과 회견’, 26일 자에는 ‘쉬자인 주석 장쑤성 고찰서 성위 서기 성장과 회견하고 협력 심화, 투자 확대 의견 일치’라는 제목의 머리기사를 싣었다.    쉬자인은 줄곧 당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지난 2018년 9월 제10회 중화자선상을 받은 쉬자인은 수상 소감으로 “본인과 헝다의 모든 것은 당이 준 것”이라며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관영 매체 인터뷰에서 줄곧 “헝다는 당 위원회를 설치한 광저우시의 첫 번째 민영기업”이라며 “그룹 내에 35개 당 위원회, 1023개 당 지부, 1만 841명의 당원을 보유했다”고 과시했다.     지난 2020년 헝다 민족가무단의 연습 장면. 쉬자인 헝다 회장은 이들 미녀 무용단을 접대에 이용했으며, 중국중앙방송(CC-TV) 설 특집 방송에도 여러차례 출연시켰다. 웨이보 캡처  ━  미녀 가무단 CC-TV 설 특집 프로 출연도   그의 체포를 계기로 광저우 헝다 본사의 비밀 호화 접대시설도 폭로됐다. 지난달 30일 위챗(微信·중국판 카카오스토리)의 공공계정 서우러우추(獸樓處)는 ‘쉬씨의 죄와 벌’이라는 글에서 광저우 헝다 그룹 본사 건물 41층과 42층에 호화 식당과 다실, 헬스 시설과 가라오케가 접대용으로 마련되어 있다고 공개했다. 쉬자인은 이곳에서 루이 13세 코냑, 마오타이 바이주를 즐기며 황제와 같은 호사를 누렸다고 알려졌다.     그룹 차원의 미녀 가무단도 운영했다. 헝다민족가무단이란 명칭의 여성 공연단이 중국중앙방송(CC-TV)의 춘절 특집 방송에 네 차례 출연했다는 글이 웨이보에 속속 올라온다. 여성 단원들은 쉬자인의 접대 로비에도 동원됐다. 그는 정부 관리를 뇌물로 회유해 헐값에 알짜 토지를 확보한 뒤, 다시 토지를 은행 담보에 맡겨 자금을 확보하고, 착공 전부터 사전 분양으로 부동산 투자자의 돈을 유치하는 방식으로 기업 규모를 확장했다. 헝다와 같은 기존 중국 부동산 기업의 비정상적 성장 모델에 대해 싱가포르 연합조보는 3일 “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 위험의 전국민화” 모델이라며 비판했다.    지난 2016년 3월 베이징 인민대회당 양회 기간 쉬자인(단상 왼쪽 두번째) 헝다 회장이 보인다. 쉬 회장 오른쪽으로 최근 은퇴한 이강 인민행장이 기자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신경진 특파원 이번 쉬자인의 체포는 대대적인 반(反)부패 캠페인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다. 쉬자인은 이미 지난달 21일 새벽 자택에서 당국의 체포 시도에 경호원과 함께 격렬하게 반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27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9월 월례 정치국회의를 열고 ‘20기 1차 중앙 순시 보고’를 심의했다. 관영 신화사는 이날 회의에서 국유기업, 금융, 체육 영역에 대한 정치 감독 강화가 논의됐다고 보도했다. 이날 쉬자인의 각종 범죄 행위와 처벌 수위도 결정됐을 가능성이 크다. 쉬자인은 부인과 위장 이혼 방식으로 거액의 외자를 도피한 것으로 전해진다.    28일 당 중앙기율위는 “반부패는 가장 철저한 자아혁명”이라는 제목의 의미심장한 8000자 장문을 발표했다. 기율위는 여기서 “시진핑 총서기는 사상 전례 없는 반부패 투쟁을 직접 지도, 직접 기획, 직접 추진했다”며 “부패는 가장 쉽게 정권을 전복할 수 있는 문제이자, 당의 장기 집권에서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협임을 강조했다”고 부패를 공산당 체제와 연계시켰다. 한때 중국 최대 부호로 ‘황제의 꿈’까지 꾸었던 쉬자인은 끝내 당의 서슬퍼런 칼날에 부패 기업가로 퇴장당했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2023.10.08 05:00

  • 9살부터 美학교 변기 닦았다…바이든 때린 '1조 달러 칩의 왕' [후후월드]

    9살부터 美학교 변기 닦았다…바이든 때린 '1조 달러 칩의 왕' [후후월드]

    “미국이 중국에 첨단 반도체를 팔지 않으면, 미국 빅테크 기업은 대체 불가능한 거대 시장(중국)을 잃고 엄청난 피해를 입겠지만, 중국은 결국 자체적으로 반도체를 만들어 기술 자립을 이룰 것이다.”   젠슨 황(황런쉰·黃仁勳)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5월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반도체 분야 대중(對中) 수출 규제와 투자 제한 등에 대해 “오히려 미국 기업의 손을 등 뒤에서 묶는 격”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엔비디아의 창립자 젠슨 황 대표. AP=연합뉴스   황은 말로만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정부 방침 때문에 엔비디아의 고사양 칩(A100)의 중국 수출길이 막히자, 이를 대체할 저사양 모델(A800)을 개발해 중국에 팔았다. 첨단 산업에서 중국을 고립·배제하겠다는 미 정부 입장과 별개로, 엔비디아는 중국 시장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외신은 이 같은 황의 행보에 대해 “미·중 갈등을 바라보는 ‘미국 재계의 입장’”이라 전했다. 실제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스탠리 회장 등도 연달아 미 정부를 향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문하며 황의 목소리에 힘을 싣는 등 그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엔비디아의 인공지능 아키텍처 암페어(Amper)에 들어가는 A100 GPU. 사진=엔비디아    ━  AI 최대 수혜주, GPU의 창시자   황은 ‘인공지능(AI) 시대, 가장 가치있는 회사’로 꼽히는 엔비디아의 창립자다. 엔비디아는 창업 30주년인 올해 ‘시가총액(시총) 1조 달러 클럽’에 입성했다. 세계 반도체 기업 중 몸값 1조 달러를 넘어선 건 엔비디아가 유일하다.   엔비디아는 전세계 그래픽처리장치(GPU) 시장의 90%를 독점 중이다.1999년 엔비디아가 내놓은 ‘지포스256’이 세계 최초의 GPU다. 단순한 그래픽 카드가 아닌, 중앙처리장치(CPU)와 대등한 역할을 맡는 주요 반도체란 의미로 이름을 GPU라 붙였다.   지난해 말 생성형 AI 열풍이 불면서 GPU 값은 말 그대로 수직 상승했다. 사실상 독점 기업인 엔비디아의 주가는 올해만 300% 가까이 치솟았다. 황의 개인 자산도 엄청나게 불었다. 블룸버그 억만장자 순위 통계에 따르면 황의 순자산은 392억 달러(약 51조원)로, 올 초까지만 해도 세계 70~80위였던 황의 부호 순위는 단숨에 34위로 올랐다. 2018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CES에서 기조 연설을 하고 있는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 로이터=연합뉴스    ━  9살에 美 기숙학교서 모진 인종차별…“그 시절 사랑한다”   엔비디아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창업자인 황에게 옮겨졌다. ‘수조 달러 규모의 칩 회사를 거느린 가죽 재킷의 보스’(로이터), ‘실리콘밸리에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 아이콘’(뉴욕타임스), ‘화장실 청소부에서 1조 달러 칩의 왕이 된 남자’(더 타임스) 등 유수의 매체가 그에 대해 집중 조명했다.   황은 1963년 대만의 타이난에서 태어나 태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다. 과학자인 아버지, 영어 교사인 어머니는 태국에 내전이 발발하자 아홉살 난 황을 한살 터울 형과 함께 사실상 깡촌인 미국 켄터키주(州)의 ‘오네이다 침례교 기숙 학교’에 보낸다.    황은 이곳에서 온갖 차별을 겪는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일을 나눠 맡기는 시스템이었는데, 황은 아시아인이란 이유로 3년 넘게 화장실 변기 닦는 일을 도맡아야 했다. 2012년 NPR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은 모두 주머니칼을 갖고 다녔고, 싸울 때는 예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극심한 학교 폭력에 시달렸다.   모진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황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이를 극복했다. 그는 “이 얘기의 결말은, 내가 그곳에서의 시간을 정말 사랑했다는 것”이라며 “힘든 시간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고 공부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2019년 이 학교에 여학생 기숙사이자 교실 건물 건축비로 200만 달러(약 26억원)를 기부했다. 지난 5월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2023에 참여한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  자기희생 리더십, 지적 정직함 강조   황은 1984년 오리건 주립대에서 전기공학 학사, 1992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엔 애플에서 최초의 맥 컴퓨터가 출시해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막 펼쳐지던 때였다. 전기공학 전공자인 그는 “정말 완벽한 시기에 졸업했다”고 말할 정도로 취업과 창업의 기회가 널려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LSI로직 이사, AMD의 마이크로프로세서 디자이너로 일했다. 황은 자신의 30세 생일인 1993년 2월 17일 실리콘밸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동료 엔지니어 크리스 말라초프스키, 커티스 프림과 의기투합해 그해 4월 그래픽 카드 개발 회사인 엔비디아를 설립했다. 엔비디아 로고가 찍힌 NVIDIA 로고가 표시된 스마트폰이 컴퓨터 마더보드에 올려져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당시 컴퓨터의 영상과 그래픽은 CPU를 통해 처리하는 방식이었는데, 유년시절 컴퓨터 게임광이었던 황은 “게임 산업이 발달할수록 그래픽과 영상만 빠르게 처리하는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커질 것”이라 내다본 것이다.   처음엔 사명조차 없었다. 황은 “당시 모든 파일에 ‘향후 버전(next version)’의 앞 글자를 딴 NV를 붙였는데, 법인 설립할 때 N과 V 두 글자가 들어간 단어를 찾다가 라틴어 ‘Invidia(부러움)’를 발견했다”면서 “그게 지금의 회사명이 됐다”고 설명했다.   창업 이후 황은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해 사업을 확장했다. 시장의 흐름을 읽어 ‘비디오 게임 콘솔용’이었던 그래픽 카드를 ‘PC 게임용’으로 전환했고, GPU 개발까지 이어갔다. 2008년 금융위기 때 회사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삭감하고 인재 영입에 집중해 오히려 기술력을 키우는 ‘자기 희생’의 리더십을 보였다.   황이 강조하는 엔비디아의 기업 문화는 ‘지적 정직함’이다. 그는 “실수에 관대하되, 실수를 감추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경영철학은 지난달 27일 국립대만대학 졸업식 연설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이날 학생들에게 “실패에 맞서고 실수를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면서 강조했다. 세계 최초의 딥 러닝 수퍼컴퓨터라 불리는 엔비디아 DGX-1이 아시아 최대 컴퓨터 전시회인 컴퓨텍스 행사에 전시돼 있다. EPA=연합뉴스    ━  날개 단 ‘검은 재킷의 CEO’…韓 속내 복잡   황은 공식 석상엔 늘 검은색 라이더 재킷을 입고 등장해 ‘검은 가죽 재킷의 CEO’라고 불린다. 실리콘밸리의 이미지 컨설턴트인 조셉 로젠펠드는 황의 가죽 재킷에 대해 “1950년대 할리우드를 상징하며 독립심, 탁 트인 길, 반항심, 성적 매력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단정하게 다듬은 백발머리, 안경 너머의 강인한 눈빛, 엔비디아 주가가 100달러를 돌파했을 때 왼쪽 팔에 새긴 회사 로고 문신 등도 그를 상징하는 스타일이다.  2017년 대만 타이페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행사에 전시된 엔비디아의 GPU. 로이터=연합뉴스   날개를 단 듯한 엔비디아의 성장세를 바라보는 한국의 속내는 복잡하다. 대만계 미국인인 황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회사) 기업인 엔비디아의 GPU 파운드리(위탁생산)를 대만의 TSMC에 주로 맡기고 있다. 최근 미국 기업 인텔이 파운드리에 재진출하자 “인텔과의 협력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말했다. 황은 미 정부의 대중 규제에도 비판적이다. 파운드리 분야에서 TSMC와 경쟁하며, 첨단 분야에서 중국의 추격을 따돌려야 하는 한국이 엔비디아의 ‘압도적 강세’에 고민이 깊은 이유다. 관련기사 '세계2위' 러軍 혼쭐냈다…'금욕주의자' 우크라軍 넘버2의 지략 [후후월드] '굶주린 소녀와 독수리' 참상 주범…수단 혼란 틈타 사라졌다 [후후월드] 반대파에 맞아 얼굴 멍들어도 "놔두죠"…대선 뜬 튀르키예 간디 [후후월드] 부부 재산 알고보니 1조…英 뒤집은 금수저의 '서민 코스프레' [후후월드]박형수 기자 hspark97@joongang.co.kr

    2023.08.06 06:00

  • '시진핑 악수' 서두른 노영민의 팔 잡았다…中늑대외교 선봉장 [후후월드]

    '시진핑 악수' 서두른 노영민의 팔 잡았다…中늑대외교 선봉장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지난 21일(현지시간) 친강 중국 외교부장이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미국 프로농구(NBA) 워싱턴 위저드와 올랜도 매직스 경기장 전광판에 깜짝 등장해 설 인사를 하고 있다. 주미 중국대사관 홈페이지 캡쳐 “중국과 미국 국민 모두 토끼해를 맞아 풍요롭고 밝은 앞날을 기원합니다.” 음력 설을 하루 앞둔 지난 21일(현지시간) 미국 프로농구(NBA) 워싱턴 위저드와 올랜도 매직스 경기장 전광판 영상에 친강(秦剛·57) 중국 외교부장이 등장했다. 친강 부장은 이날 중간 광고를 이용해 온화한 미소와 능숙한 영어로 설 인사를 전했다. 지난 1979년 미·중 수교 직후 중국을 처음 방문했던 NBA 워싱턴 위저드(당시 워싱턴 불릿츠) 경기를 콕 집어 미·중의 오랜 인연을 상기시켰다.   친 부장의 ‘변신’에 미국 언론이 이를 잇따라 보도하며 주목했다. 지난 2019년 NBA 휴스턴 로키츠 단장이 트위터에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중국중앙방송(CC-TV)이 NBA 중계를 중단하고, 중국 스폰서 기업들이 NBA와 협력 관계를 끊었던 3년전의 분위기를 일신한 효과 때문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늑대전사(戰狼·전랑) 외교’에 ‘미소 외교’를 덧입히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왔다.   중국의 12대 외교부장에 오른 친강 부장은 1월 30일로 취임 한 달을 맞았다. 주미 중국 대사로 근무하던 지난해 12월 30일 워싱턴DC에서 외교부장에 취임한 친 부장은 사흘 만에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전화 통화하며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15일 친강(왼쪽) 중국 외교부장이 사메흐 쇼우크리 이집트 외교부장(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다. 30일로 취임 한 달을 맞은 친강 부장은 한 달만에 6개국을 순방하고 10개국 외교부장과 전화통화를 나눴다. AP=연합뉴스 지금까지 친 부장이 전화 통화한 외교장관은 총 10명이다. 미국(2일)→러시아(9일)→파키스탄(9일)→한국(9일)→몽골(17일)→말레이시아(17일)→우즈베키스탄(19일)→이란(19일)→인도네시아(20일)→아프가니스탄(21일) 순이다. 미국과 러시아를 빼면 모두 아시아 인접 국가라는 공통점이 보인다. 한국과는 박진 외교부 장관이 네 번째 통화를 기록했지만 다음 날 입국 방역을 둘러싸고 중국 측이 비자 보복을 단행하면서 빛이 바랬다.   친 부장은 부임 한 달 만에 6개국을 방문했다. 지난 10일 방글라데시를 경유해 에티오피아(11일)→가봉(12일)→앙골라(13일)→베냉(14일)→이집트(16일)까지 아프리카 5개국을 순방했다. 1991년부터 외교부장 새해 첫 순방을 아프리카에서 시작한 중국 외교의 33년 관행을 이어갔다. 이른바 ‘채무외교’라는 딱지를 붙여 중국의 아프리카 장악을 견제하려는 미국에 맞서 집토끼 지키기로 외교부장 업무를 시작한 셈이다.     친 부장의 첫 국장급 인사도 화제였다. 지난 9일 거친 입과 막말로 중국 전랑외교를 상징했던 자오리젠(趙立堅·51) 대변인을 국경 및 해양사무 부국장으로 전보 조처했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도 중국의 공격형 외교가 퇴색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나왔다.   하지만 기대는 곧 깨졌다. 한국과 일본을 꼭 집어 중국발 입국자의 방역 강화를 이유로 비자 발급을 중단하는 보복 조치를 취하면서다. 친 부장 본인이 에티오피아 순방 중 홍콩 매체 기자에게 “한국과 일본이 중국 국민에게 차별적이고 과학적이지 않은 과분한 조치를 취했다”며 “중국은 반응을 취한 이유가 있다”며 이 같은 조치를 두둔했다.   친 부장의 ‘늑대 전사’ 색채는 연설에서도 여전했다. 지난 20일 주러시아·남아공·호주·우크라이나·필리핀·이라크·제네바 등 일부 해외 중국대사관 직원을 화상 연결한 모임에서 친 부장은 “신시대의 외교전사는 투쟁에 과감하고, 희생에 과감하며, 행동에 능해야 한다(敢于鬪爭 敢于奉獻 善于作爲·감우투쟁 감우봉헌 선우작위)”는 12자 지침을 제시했다. 같은 날 주중 외교사절단에게 보낸 화상 설 인사에서도 “개별 국가가 기회를 틈타 대대적으로 패권·패도·왕따 행위를 펼치고, 이데올로기 대립과 진영 대항을 선동하면서 세계가 분열과 충돌의 벼랑을 향하고 있다”며 다소 과격한 발언도 거침없이 내놨다. 지난 11일 친강 중국 외교부장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중국의 지원으로 설립된 아프리카 질병통제 및 예방 센터 개막 연설을 위해 단상에 오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왕이 부장이 11년 걸린 국무위원 석 달 만에 예약   “외교 의전은 정치의 체현이자 나라와 나라 관계의 바로미터”라는 신조로 무장한 친강 부장은 지난 2014년부터 외교부 의전국장[禮賓司長]을 맡아 중국 외교 의전을 개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자금성 ‘황제 외교’도 사실상 그의 작품이다. 지난 2018년 3월 12일 정의용 당시 문재인 대통령 특사의 시진핑 주석 접견장에선 시 주석과 악수를 서두르던 노영민 당시 주중대사의 팔목을 뒤에서 살짝 잡는 모습이 포착됐다. 시 주석 의전에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그의 원칙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지난 2018년 3월 12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푸젠청에서 정의용 대통령 특사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는 사이 앞서 나가는 노영민 당시 주중 대사를 친강 당시 의전국장이 저지하고 있다. 신경진 특파원   의전으로 시진핑 주석의 신뢰를 거머쥔 친 부장은 초고속 국무위원 승진을 예약했다. 지난 15일 폐막한 톈진(天津) 인민대표대회에서 친 부장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로 선출됐다. 일반 국무원 장관급이 옵서버로 전인대에 참석하는 것과 달리 부총리급 국가지도자 의전을 받는 국무위원은 지역에서 선출된 뒤 전인대의 정식 대표로 출석한다. 오는 3월 양회에서 외교부장은 물론 국무위원까지 단번에 임명될 것임을 예고한 대목이다. 장관급 승진 석 달 만에 국무위원 승진은 의외라는 평가다. 시 주석의 신뢰가 두터웠던 전임자 왕이(王毅·70) 정치국 위원조차 11년차에 안착한 코스다. 왕 위원은 지난 2008년 장관급인 국무원 대만판공실 주임에 임명된 이후 2018년에야 푸젠(福建) 전인대 대표로 국무위원에 선출된 바 있다.   국무위원 승진으로 친 부장은 시 주석의 옆자리 배석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지난 9일 열린 시 주석과 밀로스 제만 체코 대통령의 화상 정상회담에서 친 부장은 디귿자 옆 테이블에 배석했다. 정치국 위원인 왕이, 허리펑(何立峰·68)과 달리 시 주석 옆자리에 배석하지 못한 모습이 CC-TV 메인뉴스에 비쳤다.   지난 2017년 11월 8일 도널드 트럼프(왼쪽 두번째) 미국 대통령 부부가 중국 국빈방문 첫날 자금성 태화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날 자금성 황제 의전을 기획한 친강(오른쪽 두번째)은 지난해 12월 30일 중국 12대 외교부장에 임명됐다. [중앙포토]    ━  한때 중공 원로 자제說도…마자오쉬와 쌍두마차 전망   친 부장은 혁명 원로의 자제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유명세도 톡톡히 치렀다. 2021년 8월 주미 대사 발령이 나자 중국 인터넷에는 리톄잉(李鐵映·87) 전 전인대 부위원장의 아들로 리 부위원장의 부인 친신화(秦新華)의 성을 따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리 부위원장은 중국공산당 창당 초기 지도자인 리웨이한(李維漢, 1896~1984)의 아들로 중국 정계의 실력자다. 하지만 리 부위원장의 고향이 후난(湖南) 창사(長沙), 친 부장의 고향은 톈진으로 다른 것이 알려지면서 소문은 낭설로 판명됐다.   친 부장과 동명이인도 있었다. 1930년대 ‘28인의 볼셰비키’의 우두머리로 징강산 소비에트와 대장정 당시 중공을 이끌었던 보구(博古, 1907~1946, 본명 친팡쉬안·秦邦憲)의 아들이 친강 부장과 한자 이름도 같다. 요절한 보구의 큰아들과 작은아들 이름이 모두 친강이었다. 작은 친강(1936~2010)은 하이난성개발건설총공사 총경리를 역임했다.     친 부장의 외교부는 쌍두마차 체제로 굴러갈 전망이다. 당 기관의 일인 체제를 허용하지 않는 중공의 묵계에 따라 20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진입에 좌절한 마자오쉬(馬朝旭·60) 부부장이 외교부 일상업무를 맡게 된다. 마 부부장은 지난 13일 외교부 사이트의 주요 간부 소개 페이지에 ‘정부장급(장관급)’이라는 직책이 이례적으로 표시됐다. 관련기사 한국 장관에 손가락질까지…시진핑 사단 아닌데 총애받는 왕이 [후후월드] "나는 철저한 꼬리였다"…모두 깜짝 놀란 인선, 62세 '사법 차르' [후후월드]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2023.01.31 05:00

  • "단지 혈연관계일 뿐"...대만 정치판 뒤흔든 장제스 증손자 [후후월드]

    "단지 혈연관계일 뿐"...대만 정치판 뒤흔든 장제스 증손자 [후후월드]

    26일 대만 수도 타이베이 시장으로 확정된 국민당 장완안(가운데) 당선인이 지지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대만중앙통신 캡처 26일 대만 지방선거가 국민당의 승리로 끝났다. 6개 직할시 중 4곳, 21개 지방 도시 중 13곳에서 국민당이 이겼다.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곳은 수도 타이베이(臺北) 시장 선거였다. 당선인은 장제스(蔣介石·1887~1975) 전 총통의 증손자, 국민당 장완안(蔣萬安·44) 후보다.    대선 이후 2년 뒤 실시되는 지방선거는 현 총통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을 띠고 있다. 국민당은 2014년 이후 8년 만에 타이베이 시장을 탈환했다. 2024년 치러질 대만 대선에서 국민당이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다.    타이베이 시장을 내준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이날 밤 선거 결과에 모든 책임을 지고 민진당 총재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대만 정치 지형이 요동치는 가운데 그 변화의 한가운데 장완안 타이베이 시장 당선인이 있다.     ━  “후광도 부담도 아니다. 단지 혈연관계일 뿐”   장완안 당선인은 장제스 대만 총통의 증손자다. 좌측 상단부터 장제스-장징궈-장샤오옌-장완안 사진 바이두 캡처 장 당선인은 대만 초대 총통 장제스의 증손이다. 기구한 가족사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장제스는 1945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뒤 1949년 12월 대만으로 옮겨와 26년간 총통을 지냈다.     그의 장남 장징궈(蔣經國·1910~1988)도 아버지 사후 1978~1988년까지 10년간 대만 총통을 지냈다. 정권을 세습했지만 1987년 38년 만에 계엄령을 해제했고, 서구식 대만 경제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비서와의 사이에 쌍둥이 사생아를 낳았다. 그 중 첫째가 장완안의 아버지 장샤오옌(蔣孝嚴·1941~)이었다. 장샤오옌은 대만 외교부장관까지 올랐지만 아버지 생전에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 1988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리덩후이(李登輝ㆍ이등휘) 부총통에 의해 아들임을 확인받았고 2005년에야 비로소 모친의 성에서 장씨 성으로 바꿀 수 있었다.    지난 17일 시장 후보 토론에 참석한 장완안 후보. 사진 장완안 페이스북 캡처 장완안 당선인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1978년 태어났다. 타이베이에서 나고 자란 그는 10살 때까지 장제스 가문의 후손이란 걸 모르고 자랐다. 대만 빈과일보에 따르면 그는 “할아버지란 말보다 장징궈 총통이라고 부르는 게 내겐 더 익숙했다”고 한다.    2005년 아버지와 함께 장씨 성으로 바꿨지만 장씨 가문과의 교류는 드물었다. 장제스의 증손이었지만 그는 2015년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가족은 나에게 부담도 후광도 아니다. 단지 혈연관계일 뿐이며 그 외에는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했다.     ━  정치에 뛰어든 건 “법을 바꿔야 사회가 변한다는 깨달음”   대만 입법회에서 질의를 하고 있는 장완안 의원. 사진 tpewanan.com 캡처 장완안은 대만 국립정치대를 졸업한 뒤 2007년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니아대에서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01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로펌을 설립하고 스타트업 기업에 대한 법률 지원을 했다.    타이베이로 돌아온 건 37살 때인 2015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국민당 소속으로 타이베이시 입법의원 출마를 선언하며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대만 매체 ‘뉴스 렌즈’와의 인터뷰에서 “대만에서 많은 스타트업 기업들과 정부 회의에 참여했는데 법률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산업계와 대만인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6년 타이베이시 제3선거구 입법의원 선거에서 그는 46.8% 득표율로 당선됐다. 당시 민진당의 강세 속 타이베이시에서 당선된 유일한 국민당 입법의원이었다.    이어 4년 뒤인 2020년 51.4%의 득표율로 재선 의원이 됐고, 타이베이 시장 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보건부장관 출신의 민진당 천스중 (陳時中)후보를 꺾고 42.3%의 지지로 타이베이 시장에 올랐다.     ━  “대만 존엄 끝까지 수호할 것”...차기 총통 선거 후보 부상   타이베이 시내에서 유세 중인 장완안 후보. 사진 tpewanan.com 캡처 장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타이베이는 사람들이 떠나는 도시로 변했다. 경쟁력을 잃고 있다”며 “40~50년 된 낡은 건물들을 재개발하는 ‘도시 재생 사업’을 추진하고 지진에 무방비 상태인 노후 건물 안전 조치를 서두르겠다”고 공약했다.    또 “(대만 반도체 기업) TSMC는 정부 관료와 시민 사회의 기술 전문가들이 집단으로 결정한 결과였다”며 “신생 기업의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포스트 팬데믹 시대 대규모 국제 행사를 유치해 도시 부흥을 이끌겠다”고도 했다.    그는 친중노선으로 각인된 국민당보다 중도적인 목소리를 내왔다. 지난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 당시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을 비판하며 “대만 정부는 필요시 홍콩 시민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달 초 후보 토론회에선 양안관계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대만의 존엄을 끝까지 수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진핑 주석이 제안한 ‘일국양제’ 방안에 대해서도 “대만인들은 이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도 했다.  26일 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지방선거 참패 책임을 지고 민진당 총재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사진 대만중앙통신 캡처   대만 통일을 앞세우며 군사 훈련 등 압박 수위를 높이는 중국에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한 셈이다. 다만 차이잉원 총통이 ‘양안은 하나’라는 ‘92년 합의’까지 부정하는 데 반해 장 당선인은 국민당과 동일하게 ‘92년 합의’는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민진당에 비해 반중 강도는 덜하다는 평가다.    대만에선 국민당이 정권을 잡으면 중국과 관계 악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미국과의 협력 강화로 중국의 위협을 막겠다는 민진당에 대한 지지가 엇갈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장 당선인에 대해 “시장으로 성공할 경우 2024년 차기 총통 선거에 국민당 후보로 지명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중국과 긴장 완화를 원하는 국민당에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고 평가했다.  베이징=박성훈 특파원 park.seonghun@joongang.co.kr

    2022.11.27 06:00

  • 한국 장관에 손가락질까지…시진핑 사단 아닌데 총애받는 왕이 [후후월드]

    한국 장관에 손가락질까지…시진핑 사단 아닌데 총애받는 왕이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  시진핑 3기 정치국 해부 ② 왕이 중앙외사위원회판공실 주임     지난 2016년 8월 중국 시사 주간지 『환구인물』 표지 인물에 선정된 왕이 중국 외교부장. “왕이는 왜 이렇게 인기인가”라는 커버스토리 기사가 실렸다. 환구인물 캡처 왕이(王毅·69)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당 중앙정치국 위원 취임 후 처음으로 7800자 장문의 기고문을 8일 인민일보에 게재했다. 중국 외교의 간판으로 실무를 10년간 맡은 뒤 전략가로 변신을 앞두고 향후 5년 이상 펼쳐질 중국 외교 전략을 담았다. 공개 날짜도 미국의 중간선거일에 맞췄다. 왕이 정치국 위원은 내년 3월 양회에서 외교부장 직함을 후임자에게 건넨 뒤 양제츠(楊潔篪·72)의 바통을 이어 정부 직함 없이 당의 중공중앙 외사위원회 판공실 주임만 맡을 전망이다.   8일자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6면에 게재된 왕이 중앙정치국 위원의 기고문 ‘중국 특색 대국외교의 전면 추진’. 향후 5년 이상 중국 외교의 총 방향을 담았다. 인민일보 캡처  ━  시진핑 3기 정치국 세 번째 연장자   왕 위원은 이번 20기 정치국원 24명 가운데 세 번째로 나이가 많다. 1950년 7월생 장유샤(張又俠)와 1953년 6월생인 시진핑(習近平) 다음으로 1953년 10월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68세 이상은 은퇴하는 칠상팔하 잠규칙(潛規則)이 깨진 지난달 20차 당 대회에서 생환은 물론 ‘당과 국가 영도인’으로 불리는 정치국에 오르는 입국(入局)에도 성공했다. 시진핑 주석과 개인적 관계가 없어 시자쥔(習家軍·시진핑 사단)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왕 위원의 입국은 이미 예견됐다. 당 대회 폐막 후 관영 신화사가 수뇌부 인사기준으로 밝힌 ‘과감하게 투쟁하고(敢于鬪爭·감우투쟁), 투쟁을 잘하는(善于鬪爭·선우투쟁)’ 능력을 제시한 만큼 그의 전랑(戰狼·늑대전사) 외교 스타일을 시 주석이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다.   왕 위원은 8일 ‘중국 특색의 분쟁 해결’이라는 레토릭을 말했다. 지난 10년간 공평정의를 촉진했다는 부분에서 “사정 자체의 옳고 그름에 비추어 입장을 결정하고, 중국 특색 분쟁해결의 길(道)을 제출·시행하며, 이란 핵·한반도 핵·아프가니스탄·중동 등 핫이슈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견지했다”고 했다. 미국 등 서방과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중국 방식을 내세워 경합한 것을 ‘중국 특색의 분쟁 해결’로 표현했다.      ━  ‘중국 특색 분쟁해결’ 레토릭 만들어   ‘중국 특색 분쟁해결’은 지난 2015년 전인대 외교부장 기자회견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왕 부장은 “광범하고 심오한 중의학의 도(道)와 같이 핫이슈를 대할 때 우선 맥을 잘 짚고, 한쪽 말만 곧이듣거나 어지럽게 약을 처방하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 바른 약을 처방하고 뿌리에서 흙을 제거, 병이 재발하지 못 하게 한다”고 말했다. 중국 의학을 외교에 접목한 셈이다. 이후 왕 부장은 2017년 국제정세와 중국 외교 세미나 개막식, 지난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도 ‘중국 특색의 분쟁 해결’을 말했다.     ‘중국 특색 대국 외교의 전면 추진’이란 제목의 7800자 기고문에서 왕 위원은 이른바 ‘시진핑 외교 사상’을 전폭 찬양했다. 그는 “선진적인 사상이 비범한 사업을 빛나게 하며, 과학적 이론이 위대한 실천을 인도한다”면서 “당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이자 21세기 마르크스주의의 대외 업무 영역에서 최신 이론적 성과”라며 시진핑 주석의 외교 지침을 칭송했다.     향후 중국의 외교 기획을 총괄하는 왕 위원이 기고문에서 미·중 관계에서 안정을 강조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왕 위원은 “총체적으로 안정된 대국 관계 프레임을 세웠다”며 “미·중 관계는 상호존중, 평화공존, 협력 공영의 정확한 방향을 가리켰다”고 지난 10년간 양국 관계를 평가했다. 전망에 대해 그는 “대국과의 조율과 긍정적 상호 작용을 촉진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총체적으로 안정되고 균형적으로 발전하는 대국 관계 구도의 형성을 추진하겠다”면서 당 대회 보고 중 외교 파트를 거듭 피력했다. 조율과 안정, 균형을 강조하며 미국과 직접적 충돌을 피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8월 24일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열린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식에 왕이(왼쪽) 중국 외교부장과 정재호(오른쪽) 주중대사가 동시에 입장하고 있다. 사진=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  문혁 기간 8년간 헤이룽장서 노동   왕 위원은 학창시절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동자로 지내야 했다. 1969년 중학 졸업 후 지식 청년의 하방으로 헤이룽장(黑龍江) 북부 러시아 접경 헤이허(黑河)지구의 생산건설병단 병사로 보내졌다. 8년간의 노동자 생활을 거친 뒤 1977년 24살에 대학입학 가오카오(高考) 시험이 부활하자 베이징 제2외국어대 아시아·아프리카어과에 일본어 전공으로 합격했다. 당시 대학에는 25세 이상은 입학할 수 없는 규정이 있어 대입 부활이 1년만 늦춰졌다면 대학 문턱을 영원히 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지난 1981년 베이징 제2외국어대학 재학생 시절의 왕이(왼쪽) 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위원 겸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 사진=환구인물 “출발선에 서서 이 순간이 쉽지 않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1978년 초 배낭을 메고 처음 제2외대 정문을 들어섰을 때 사실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날은 나에게, 우리 세대에게 무척 중요하고 너무나 힘든 날이었다.” 지난 2004년 출판된 『제2외대 40년』 회고록에 담긴 왕 위원의 문혁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다.     왕 위원은 문학과 역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헤이룽장의 집단농장인 베이다황(北大荒)에서 일할 당시 문학과 역사책을 섭렵했으며 현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왕 위원은 일본어 전공 논문 2편과 번역 작품 한 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 한 편은 유명 학술 저널 ‘일어 학습과 연구’에 게재됐다. 해당 저널은 전문 학자의 논문 발표 채널로 게재에 성공한 학부생으로는 왕 위원이 유일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현지인 수준의 그의 일본어 실력은 지난 1983년 주일 중국대사관 근무 시절 일본을 방문한 후야오방(胡耀邦) 당시 총서기의 연설문 작성에서 빛났다. 2004~2007년 주일 대사 시절에는 융빙지려(融冰之旅, 얼음을 깨는 여행)로 불린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방일을 수행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도 했다.      ━  저우언라이 총애 비서 사위 ‘금거북족’   왕 위원은 중국 정계에 적지 않은 금거북이 클럽의 대표 주자다. 그의 장인은 중국 초대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총애한 비서 첸자둥(錢嘉東·98)이었다. 상하이 자오퉁(交通)대 출신으로 신중국 초기 제네바 회담과 중국·인도 국경 담판에 참여한 외교관 첸자둥은 1966년 저우언라이 비서로 임명되면서 저우에게 최고의 비서란 평가를 받았다. 저우 총리 사망후에는 제네바 유엔사무소 대표 등을 역임했다. 고위 관리의 사위를 중국에서는 ‘금거북사위(金龜壻, golden son-in-law)’로 부른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시 ‘위유(爲有)’에서 유래됐다.     왕이 정치국위원의 동갑내기 부인인 첸웨이(錢韋·69) 여사가 지난해 12월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열린 자선 바자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중국 외교부 사이트 왕 위원의 동갑내기 부인인 첸웨이(錢韋·69) 여사는 지난해 12월 18일 중국 외교부 주최로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열린 자선 바자인 ‘사랑은 국경을 모른다(大愛無國界, Love knows no borders)’ 행사에 참여해 직접 연설을 하기도 했다.     왕 위원은 한반도와도 관계가 깊다. 외교부 부부장(차관)이던 지난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베이징에서 개최된 1·2·3차 6자회담의 의장국 중국 대표로 활약했다. 이후 우다웨이(武大偉) 부부장에게 대표직을 넘기고 일본대사에 부임했다. 지난 2016년 8월 24일 왕이(王毅·오른쪽) 중국 외교부장이 윤병세 당시 외교장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이날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회담을 마치고 아베 신조(安培晉三) 당시 일본 총리 공관에서 면담을 앞둔 자리에서다. 중앙포토 지난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특사단으로 중국 외교부 청사를 방문한 심재권(사진 왼쪽) 당시 민주당 의원 뒤로 왕이 당시 외교부장이 입장하고 있다. 사진=신경진 특파원   이후 2016년 초 북한의 핵 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으로 한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체계를 배치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과 보복 과정에서 왕 위원은 직설적이고 위협적인 발언으로 한국 국민에게 전형적인 전랑 외교관의 인상을 남겼다. 이제 중국 외교를 막후에서 지휘하는 역할을 맡게 된 왕 위원이 투쟁을 강조하는 시진핑 주석의 외교 노선을 향후 미·중 전략 경쟁과 글로벌 분쟁 해결에서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주목된다. 관련기사 "나는 철저한 꼬리였다"…모두 깜짝 놀란 인선, 62세 '사법 차르' [후후월드]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2022.11.09 05:00

  • "나는 철저한 꼬리였다"…모두 깜짝 놀란 인선, 62세 '사법 차르' [후후월드]

    "나는 철저한 꼬리였다"…모두 깜짝 놀란 인선, 62세 '사법 차르'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  시진핑 3기 정치국 인물 해부① 천원칭 중앙정법위 서기     천원칭(陳文淸·62)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정법위 서기가 지난 25일 20기 정치국 1차 집단학습에 참가했다. 사진 CC-TV 캡쳐 “나는 줄곧 꼬리를 자칭했다. 항상 다리 사이에 꼬리를 끼고 다니듯 낮은 자세로 처신했다. 당 조직의 배려를 깊이 받았기에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내 결점을 찾으려 했다. 모든 검증을 거쳤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사법 계통을 지휘하는 중국공산당 중앙정법위 공식 홈페이지인 중국장안망에 올라온 신임 정법위 지도부. 중국장안망 캡쳐 천원칭(陳文淸·62) 중국공산당(중공) 신임 중앙정법위 서기의 자기 평가다. 중앙정법위 공식 홈페이지인 중국장안망은 지난 28일 지도부를 업데이트하며 20차 당 대회에서 24인의 중앙정치국원에 오른 천원칭 전 국가안전부 부장의 정법위 1인자 취임을 공식화했다. 30일에는 천이신(陳一新·63) 정법위 비서장의 국가안전부 부장 발령 인사를 관영 신화사가 보도했다.     자칭 ‘꼬리론’은 천원칭이 지난 1990년대 쓰촨(四川) 러산(樂山)시 공안 계통에서 일할 때 현지 기자에게 웃으며 한 말이다. 천은 시진핑(習近平·69) 3기 중앙정치국 가운데 최대 다크호스다. 누구도 그의 정치국 입국(入局)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정법위 서기 취임은 더더욱 예상 밖이어서다. 하지만 천은 로우 파일로 나서지 않는 스타일, 당 조직에 대한 충성, 검증에 대한 자신감까지, 모두 시진핑 시대 인사 코드에 적합한 인물이자 시 주석의 복심이었다.     중앙정법위의 일인자인 서기를 해외 언론은 ‘사법 차르’로 부른다. 중국의 공안·경찰·법원·검찰·감옥 등 사법 분야를 총괄해서다. 중국에서는 ‘칼자루[刀把子·다오바쯔]’로 불린다. 한국 언론이 검찰을 잘드는 칼에 비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천원칭(陳文淸·62, 왼쪽 두번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정법위 서기가 과거 문예 행사에 참석해 공연 출연진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명경망 중국의 칼자루는 막강하다. 중앙군사위를 말하는 ‘총자루[槍杆子·촹간쯔]’, 중앙선전부를  말하는 ‘붓자루[筆杆子·비간쯔]’와 함께 3대 권력기구로 분류된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은 집권 1·2기 10년 동안 정법위 ‘칼자루’를 장악하지 못했다. 지난 2012년 3월 저우융캉(周永康) 당시 정법위 서기가 직속 무장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시도했던 사실이 올 초 영문 신간 『중국 대결(China Duel)』을 통해 폭로되기도 했다. 정법위 발 쿠데타는 후진타오(胡錦濤) 군사위 주석의 사전 진압으로 무산됐다.   정법위는 이후에도 장쩌민(江澤民) 계열의 멍젠주(孟建柱)와 궈성쿤(郭聲琨) 공안부장 출신이 서기를 맡아 영향력을 유지했다. 지난 2020년 4월 쑨리쥔(孫立軍) 당시 공안부 부부장이 미스테리한 이유로 낙마하면서 시진핑 사단의 정법위 장악이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대신 누가 정법위 칼자루를 쥘 것인가는 수많은 하마평 속에서도 100% 확답이 나오지 못했다. 예측불가능한 시진핑 시대 인사의 특징이다. 천원칭 인사로 왕샤오훙(王小洪·65) 공안부장은 정치국 진입에 실패했다. 대신 절반의 정치국원으로 불리는 중앙서기처 서기 신분으로 차이치(蔡奇·67) 제1서기와 함께 시진핑 3기 공안정국을 주도할 전망이다.   천원칭(陳文淸·62)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정법위 서기. 사진=둬웨이 천원칭은 경찰 가문 출신이다. 부친은 1951년 경찰에 투신해 쓰촨성 런서우(仁壽)현의 공안국장을 지냈다. 20년 동안 쓰촨성 선진 일꾼으로 연속 선발됐다. 아버지의 영향력 덕으로 천원칭은 대입 당시 칭화대나 베이징대 입학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천은 충칭(重慶)의 서남정법학원(현 서남정법대) 법학과를 선택했다. 서남정법대는 중국 법조계의 ‘황푸(黃埔)군관학교’로 불린다. 지난 18기 중앙·후보·기율위원 중 8명이 서남정법대 출신이었을 정도다. 당시 장관급 법률가 176명 중 32명이 서남정법대 출신이었다.      ━  당 조직부, 陳 대학 졸업후부터 경력 관리   대학 3학년 때 공산당 입당에 성공한 천은 당 조직부가 미리부터 점찍은 인재였다. 중공 조직부의 인재 관리 메커니즘에 ‘선조생(選調生)’이란 용어가 있다. 될성부른 나무를 떡잎부터 관리하는 방식이다. 졸업과 동시에 사회생활을 기층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단련을 시키는 시스템이다. 천원칭이 대학 졸업반이던 1984년 전중국에서 3300여명이 ‘선조생’으로 선발됐다. 천은 쓰촨 러산(樂山)시 공안국에 배정받았다. 파출소 민완 경찰부터 시작했다. 착실히 실력을 검증받으며 사다리를 올랐다. 낙후한 소수민족 이족(彞族) 지역에서 살인과 방화가 난무하던 치안 불안을 바로잡았다. 러산시 공안국 국장, 국가안전부 지방 기구인 쓰촨성 국가안전청의 청장, 쓰촨성 인민검찰원 검찰장까지 쓰촨에서 입지를 차근차근 다졌다.      ━  2006년 시진핑 직계 푸젠방 합류    천은 2006년 부부장(차관)급인 푸젠(福建)성 상무위원 겸 기율위 서기로 인사 발령을 받는다. 푸젠은 시진핑 주석이 과거 17년간 근무한 대표적인 정치적 근거지다. 푸젠 근무로 천도 시진핑의 푸젠방(幇)에 합류했다. 푸젠 관료사회에 정통한 소식통은 중화권 매체 명경망(明鏡網)에 “천원칭은 시진핑의 옛 부하그룹에 직접 속하지는 않지만, 시가 천의 능력과 일처리 스타일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고 밝혔다.    2012년 11월 18차 당 대회로 시진핑 체제가 정식 출범하자 천원칭 역시 푸젠을 떠나 장관급인 중앙기율위 부서기로 승진해 베이징으로 올라온다. 시진핑 1기 부패 호랑이 사냥을 주도했던 왕치산(王岐山·74) 기율위 서기의 조수 역할을 맡았다. 기율위 부서기 중 최연소 1960년대생으로 관영매체와 연쇄 인터뷰로 시진핑 시대의 트레이드 마크인 암행어사와 비슷한 기율위 순시팀과 당과 정부기구에 상설 파견한 기율위 조직 건설을 홍보했다. 시진핑과 왕치산을 보좌해 중국 공직 사회 내부에 완벽한 상호 감시 시스템을 구축한 셈이다.   천원칭의 정치국 진입 배경에는 마젠(馬建) 전 국가안전부 부부장 적폐 세력 청산을 빼놓을 수 없다. 1956년생으로 천원칭과 서남정법대 동창 출신인 마젠은 베일에 쌓인 중국 국가안전부의 실세로 지난 2015년 1월 낙마 전까지 국가안전부 수장 후보로 거론됐던 인물이다.    ━  대학 동창 마젠 안전부 부부장 청산   마젠은 지난 2012년 3월 아들이 페라리 사고로 숨지면서 공산주의청년단 몰락의 방아쇠를 당긴 당시 중공 중앙판공청 주임 링지화(令計劃)와 관계가 밀접했다. 베이징대학이 운영하던 정보통신 기업 팡정(方正)그룹의 리유(李友) 전 이사장, 미국으로 도피한 정취안(政泉) 홀딩스의 소유주 궈원구이(郭文貴) 등의 정경 유착 네트워크인 ‘반고회(盤古會)’에도 마젠은 깊숙히 관여했다. 부패에 취했던 마젠은 6명의 정부(情婦)와 6채의 고급 별장을 전전했다. 부패 혐의로 마젠은 2016년 12월 당직과 공직을 모두 박탈 당하는 쌍개(雙開) 처분을 받았다.   천원칭(陳文淸·62)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정법위 서기. 신화=연합뉴스 천원칭과 마젠은 공직에서 정반대 길을 걸었다. 천과 서남정법대 동기동창이었던 마젠은 졸업 직후 곧바로 국가안전부로 직행했다. 베일 속 정보 계통에서 경력을 쌓아갔다. 하지만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잔뼈가 굵은 천원칭에 의해 청산당했다.     중국 내 간첩 적발과 대내외 정보 활동을 주도하는 중국 국가안전부는 마젠 부부장으로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부패 기관으로 전락했다. 천원칭은 부패 청산의 적임이었다. 과거 2008년 인터뷰에서 천은 ‘예방부패’를 주장했다. 부패 척결을 위해서는 부패 사범에 대한 가차 없는 징벌과 더불어 예방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중앙 정법위 서기에 취임한 천원칭은 취임 일성으로 ‘칼자루’의 충성을 강조했다. 24일 국가안전부 간부회의 겸 전국 국가안전기관 화상회의를 소집한 천은 “국가안전기관은 당의 ‘칼자루[刀把子·다오바쯔]’다”라며 “시진핑 동지의 당 중앙의 핵심, 전당의 핵심 지위와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지도 지위를 굳게 수호하는 ‘두 개의 확립’의 결정적 의의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사법 차르로 등극한 천원칭은 시진핑 주석의 호위 무사로 정법 계통을 재무장할 전망이다.   이번 천원칭 인사를 놓고 미국 인터넷 언론 악시오스(AXIOS)는 “중국이 더 많은 자원을 안보 영역에 투입할 것을 시사한다”며 “안보 관련 행동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 국내 공안과 사법 계통이 공산당의 정권 안보와 시진핑의 권력 수호에 더욱 앞장설 것이라는 분석인 셈이다.  관련기사 中 달탐사 지휘관서 신장 1인자로…美 겨눈 '로켓승진' 마싱루이[후후월드] 14세에 베이징대 합격…시진핑 책사, 총만큼 센 '붓대' 잡았다 [후후월드]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2022.10.31 05:00

  • 시진핑 하방 토굴 '관광지 대박'…리시, 부패청산 칼자루 쥐었다 [후후월드]

    시진핑 하방 토굴 '관광지 대박'…리시, 부패청산 칼자루 쥐었다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  시진핑 3기 정치국 상무위원 6인 분석 ⑥ 리시     지난 5월 22일 중국 국가박물관 공산당 역사 전시관을 방문한 시진핑 주석(오른쪽)과 리시 광둥성 서기(왼쪽에서 셋째). 시 주석과 리 서기가 함께 웃고 있다. 사진 스커신문 캡처   “험지를 돌아 ‘다크호스’로 떠오른 서북 간부.”   20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중 마지막 일곱번째로 자리를 꿰찬 리시(李希·66) 광둥(廣東)성 서기에 대한 홍콩 명보의 평가다. 리시는 중국 최고 국가감시기구인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수장에도 낙점됐다. 감찰은 지도자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하에 맡기는 자리다. 랴오닝(遼寧)성 당서기 시절 부패 청산 능력을 입증했던 그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하방(下放ㆍ지식인을 노동 현장으로 보냄) 생활을 했던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서기를 거치며 시 주석의 눈에 들었다.     ━  30년 험지...中 동서남북 5개 성 돌아 중앙무대 직행   지난 23일 오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내외신 기자 대면식에 참석한 리시 신임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사진 연합뉴스 리시의 이력은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다. 중국의 동서남북을 넘나들며 공직 생활을 했다. 삼국지로 치자면 위ㆍ촉ㆍ오 세 나라에서 모두 고위 관리를 거친 셈이랄까. 그는 1975년 서북부 오지 간쑤성(甘肅) 량당(兩當)현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30년 만인 2004년 산시성 옌안시 서기가 된 그는 7년 뒤인 2011년 동쪽으로 1000여㎞ 떨어진 중국 경제의 심장부 상하이(上海) 당 조직부장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3년 만인 2014년, 이번엔 압록강과 접한 동북 랴오닝성 당서기로 올라갔고 2017년엔 반대로 중국 최남단 공업도시 광둥(廣東)성 서기로 발탁됐다. 간쑤와 산시성에서 기층민에 대한 행정 능력을 닦은 그는 상하이에선 대규모 당 조직을 관리했고 랴오닝에선 낙후한 경제 개발에 투신했다. 이는 광둥성 서기 승진으로 이어졌다. 5개 성(省)을 돌며 능력을 입증한 리시는 시 주석의 지지 속에 중국 반부패 드라이브의 ‘칼’이 됐다.      ━  시중쉰 최측근의 비서로 시 주석과 인연   2017년 11월 14일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세계상인대회에 참석한 리시 광둥성 서기. 사진 중국망 캡처 리시와 시 주석과의 연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시는 중국 간쑤성 량당현 출신이다. 이곳은 1932년 공산당 원로이자 시진핑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이 홍군 유격대 제5부대를 창설한 곳이다. 홍군의 근간이자 주력부대였다. 리시는 1982~1985년 간쑤성 서기 리쯔치(李子奇)의 비서로 들어갔는데 리쯔치가 바로 시중쉰의 오랜 부하이자 최측근이었다. 리쯔치는 시중쉰을 자주 찾았다. 그의 옆에서 동행했던 리시는 자연히 시 주석의 눈에 띄었다. 공직 생활의 초기부터 시 주석과 연을 맺은 건 타고난 행운이었다.     ━  시 주석 하방 '량자허' 개발로 눈도장   지난해 6월 1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969년 7년간 하방으로 노동을 경험했던 산시(陝西)성 량자허(梁家河) 토굴안에 당시 그의 사진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신경진 기자 시 주석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은 건 2007년 8월 산시성 옌안시 당서기 때였다. 당시 옌안일보 보도에 따르면 리시는 당시 상하이 당서기로 있던 시 주석을 찾아가 옌안시 량자허촌 마을위원회가 쓴 편지를 전달했다. 량자허는 1969년 당시 14세였던 시 주석이 7년 동안 하방 생활을 했던 곳이었다. 주민들은 시 주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앞으로 중국을 이끌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을 편지에 담았다. 보도에 따르면 마을 주민들이 리시를 찾아가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다는데 어디서부터 시작된 일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시 주석은 자신의 하방 생활을 기억하고 찾아온 주민들에게 직접 답장을 썼다. “량자허에서 보낸 7년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역 여건에 맞는 사업을 개발해 사회주의 신농촌을 건설해달라”. 시진핑과 함께 하방된 지식청년들이 살았던 토굴. 시진핑 집권 이후인 2014년 산시성 인민정부에 의해 '산시성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됐다.   이때부터 리시는 량자허촌 개발에 전력을 다했다. 시 주석이 하방 생활을 했던 토굴은 관광지로 바뀌었다. 학교와 도로가 들어섰고 농지 개간과 함께 주민들의 소득도 빠르게 늘었다. 시 주석의 역사박물관이 생긴 것도 이때다. 당시 시진핑은 이미 국가 부주석이었다. 전략은 적중했다. 시 주석은 량자허촌 주민들에게 “마을의 변화를 환영하고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세차례 더 감사 편지를 보냈다. 리시가 2013년 시진핑이 당 주석에 취임한 뒤 상하이 당조직부장으로 승진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  랴오닝성 부패 척결...당 간부 500여 명 물갈이   2016년 3월 14일 12기 전인대 4차 회의에서 당시 리시 랴오닝성 당서기는 “부패를 엄중히 처벌하고 깨끗하고 정직한 당 건설을 추진해 시진핑 주석의 법치주의 사상을 구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신랑망 캡처 변곡점은 다시 한번 찾아왔다. 2015년 랴오닝성 당서기로 부임한 리시는 1년 만에 최대 부정부패 사건과 맞닥뜨린다. 중앙기율검사위가 직전 당서기였던 왕민(王珉)의 뇌물 수수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내부 고발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율위는 6개월이 넘는 조사 끝에 2016년 9월 랴오닝성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대표 중 45명이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되고 대표 자격이 박탈됐다. 이듬해 전인대를 앞두고 랴오닝성 인민 대표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랴오닝성 관내 지방 도시 대표 523명도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리시는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면적인 재선거에 돌입했다. 대대적인 물갈이였다.    정관계 결탁 비리로 랴오닝성 경제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도 드러났다. 관내 시와 현 단위 지역에 데이터 조작 행위가 만연했다. 랴오닝성의 2011~2014년 재정 수입 증가폭은 정부가 발표한 23%가 아닌 3.4%에 불과했다. 20% 가까운 정부 재정이 새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재추산한 랴오닝성 경제성장률은 2016년 -2.5%로 전국 최하위였다.     ━  전국 최하위 랴오닝의 부활...왕양,후춘화 이어 광둥성 서기로   지난 27일 산시성 옌안혁명기념관에서 전시를 관람한 시진핑 주석과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시 주석 뒤에 리시 중앙기율위 서기가 함께 나오고 있다. 사진 신화통신 캡처 리시는 그해 랴오닝성 당대회에서 “당내 정치 질서가 파괴되고 적폐가 깊어 돌려세우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도 없다”며 “부패 척결 투쟁과 청렴한 당풍 건설에 전면적으로 나서 정의의 전쟁에서 기필코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곤 부패 재조사를 통한 당 간부 전면 교체와 동북경제진흥정책을 앞세워 경제 살리기에 착수했다. 리시는 3개월간 14개 시를 돌며 12개 중점 사업 시행을 시작했다. 상하이에 있는 기업들을 랴오닝성으로 유치하는 데 성공해 중앙 정부로부터 높은 평가도 받았다.    '부패 무관용'으로 랴오닝성을 제압한 리시는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이어 광둥성 당 서기로 승진했다. 왕양(汪洋)과 후춘화(胡春華)도 광둥성 서기를 거쳐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부총리로 직행했다. 리시의 상무위원 진출은 그냥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리시는 “내 정치의 근본은 당과 총서기에 대한 옹호와 충성”이라며 “시 주석과 그의 사상을 수호하는 것이 가장 큰 정치이자 유일한 정치 규칙”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 주석과 함께 근무한 이력이 한 번도 없었지만 예비된 기율위 서기였다.  베이징=박성훈 특파원 park.seonghun@joongang.co.kr

    2022.10.29 05:00

  • 시진핑 서민 만둣집行, 트럼프 황제의전…이 사람 머리서 나왔다 [후후월드]

    시진핑 서민 만둣집行, 트럼프 황제의전…이 사람 머리서 나왔다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  시진핑 3기 정치국 상무위원 6인 분석 ⑤딩쉐샹   지난달 14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카자흐스탄을 방문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감염을 우려해 중국에만 머무르다 2년 8개월 만에 재개한 해외순방이었다. 그런 시 주석의 곁에서 밀착 수행을 한 인물이 있다. ‘시진핑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딩쉐샹(丁薛祥·60) 중국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이다.    그는 이날 시 주석이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 자리에서 시 주석의 오른편에 앉았다. 지난해 11월 열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 주석의 첫 화상 정상회담 때도 같은 자리를 지켰다.   23일 차기 상무부총리에 내정된 딩쉐샹 현 중국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이 이날 인민대회당 금색대청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외 기자 대면식’에서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딩쉐샹은 23일 열린 공산당 제20기 1차 전체회의(1중 전회)에서 서열 6위의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라섰다. 내년 3월부터 상무부총리로 활동할 전망이다.   딩쉐샹의 상무위원 등극은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평가다. 그가 2017년부터 맡아온 중앙판공청 주임의 위상 때문이다. 이 자리는 국가지도자급으로 올라가기 위한 발판으로 여겨진다. 딩쉐샹 전임자가 리잔수(栗戰書) 전인대 상무위원장이다. 리 위원장 이전 판공청 주임들도 쟁쟁하다.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의 양상쿤(楊尙昆)과 왕둥싱(汪東興)은 각각 국가주석과 상무위원, 장쩌민(江澤民) 시절의 원자바오(溫家寶)와 쩡칭훙(曾慶紅)은 총리와 부주석에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판공청 주임은 한국으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호실장, 부속실장 역할을 모두 합쳐 놓은 자리다.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가 위치한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장한다고 해 중난하이의 ‘대내총관(大內總管)’이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 중국 황제의 대소사를 책임졌던 최고 환관의 직책에 빗댄 것이다.    ━  “5년간 시진핑과 가장 많은 시간 보낸 인물”   시진핑(왼쪽에서 둘째) 중국 국가주석과 딩쉐샹(왼쪽에서 셋째)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이 중국 건국절 전날인 지난달 30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열린 헌화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따라서 중난하이 주인(최고 권력자)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을 '문고리 권력'인 중앙판공청 주임에 임명해 왔다. 시 주석도 마찬가지다. 딩쉐샹이 “시 주석의 비서이자 게이트 키퍼”(로이터통신)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시 주석의 의중이란 얘기다. 닐 토마스 유라시아그룹 중국·동북아시아 수석 애널리스트는 “딩쉐샹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보다) 두드러진 점은 지난 5년 동안 다른 어떤 관리보다 시 주석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라며 “시 주석이 딩쉐샹의 충성심과 능력을 신뢰하고 있기에 가능했다”라고 말했다.    그런 딩쉐샹이지만 사실 시 주석과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다. 시 주석이 2012년 집권하기 전 딩쉐샹과 알고 지낸 기간은 7개월밖에 안 된다. 저장(浙江)성 서기이던 시 주석은 2007년 3월 상하이시 서기로 부임한다. 2006년 실각한 천량위(陳良宇) 서기의 후임이다. 그해 가을에 있을 17차 당 대회를 앞두고 차기 지도자감인지 여부를 검증받는 자리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  7개월 인연이 바꾼 운명   일생일대의 시험을 앞두고 시 주석은 상하이 관가에서 자신을 도울 인재를 물색한다. 그러다 당시 상하이시 당 조직부 부부장 겸 인사국장이던 딩쉐샹을 당 위원회 비서장 겸 판공청 주임으로 발탁했다. 30년 넘게 상하이시에 근무한 딩쉐샹이 상하이 공직자들의 신상 정보를 꿰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2013년 12월, 집권 2년차인 시진핑 국가주석이 베이징의 서민들이 즐겨 찾는 만두집을 방문해 시민들 틈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시 주석 옆에 앉은 이가 당시 중앙판공청 부주임이던 딩쉐샹이다. 중국 신화망 캡처 딩쉐샹은 시 주석의 믿음에 부응한다. ‘속전속결’과 ‘발본색원’이라는 두 개의 행동강령을 시 주석에게 건의해 전임 천량위 서기의 인맥을 신속하게 숙청한다. 부임 반년만에 상하이 정국을 안정화한 공을 인정받은 시 주석은 그해 10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돼 차기 지도자 반열에 오르며 베이징으로 떠난다. 딩쉐샹은 불과 7개월간 시 주석과 손발을 맞춰 일했지만 이 기간 동안 시 주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2012년 최고 권력자가 된 시 주석은 딩쉐샹을 중난하이로 불러들여 공산당 중앙판공청 부주임 자리를 맡긴다.    ━  만두집 민생행보·트럼프 황제의전도 딩쉐샹 작품   지난 2017년 11월 8일 베이징을 국빈방문한 트럼프 대통령 부부가 첫 일정으로 자금성을 방문했다. 태화전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트럼프 부부를 향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중앙포토] 딩쉐샹은 시 주석이 국제사회에 놀라움을 안긴 이벤트와 관련이 깊다. 지난 2013년 12월 집권 만 1년 남짓이 지난 시 주석은 베이징의 서민들이 즐겨 찾는 허름한 만두집을 방문한다. 일반 시민들 틈에 섞여 식사하는 민생 행보를 벌였다. 중국 지도자로서는 유례가 드문 행동을 통해 시 주석은 대중적 인기를 크게 높인다. 당시 시 주석의 바로 왼쪽에 앉았던 딩쉐샹 부주임이 이 이벤트를 기획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17년 11월 중국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위해 시 주석은 파격적인 자금성(紫禁城) ‘황제 의전’을 준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최고 권력자가 자금성에서 국빈을 맞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신(新)중국을 세운 마오쩌둥(毛澤東)조차 자금성 경내에서 외빈을 접대한 적은 없다. 마오 이후 중국 통치자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금기를 깬 이 행사에서도 중앙판공청 주임인 딩쉐샹은 시 주석을 그림자처럼 보좌했다.    ━  공대 출신 정치인…글솜씨도 뛰어나   지난 2017년 11월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응우옌푸쫑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와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모습. 시 주석 오른편에 앉은 인물이 딩쉐샹 중국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이다. AFP=연합뉴스 딩쉐샹은 엔지니어 출신이다. 1962년 장쑤(江蘇)성 난퉁(南通)에서 태어난 그는 1982년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시 동북중형기계학원(현 옌산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상하이 재료연구소 연구원으로 17년간 근무하고 연구소장까지 올랐다. 1999년 상하이 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엔 엔지니어답게 행정에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동료들로부터 받았다. 브루킹스 중국연구소는 “딩쉐샹은 대단한 글솜씨, 뛰어난 기억력, 상관의 뜻을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능력으로 유명하다”고 평가했다.   딩쉐샹은 20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가장 젊다. 3연임을 넘어 4연임 또는 종신집권을 할 확률이 높은 시진핑 체제하에서 상무위원 중 그나마 ‘포스트 시진핑’ 후보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 딩쉐샹인 이유다.    ━  지방 행정 경험 부족이 가장 큰 단점   하지만 차기 대권 주자로선 경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많다. 지방 성·직할시의 책임자를 맡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 지도자에겐 2개 이상 성시(省市)를 다스려본 경력이 필요하다는 불문율이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과 시 주석이 이 같은 조건을 충족했다. 이로 인해 딩쉐샹이 향후 지방 통치 경험 없이 중앙판공청 주임-부총리-총리 코스를 밟은 원자바오 전 총리의 길을 걷게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 외교전문 잡지 포린폴리시(FP)는 "딩쉐샹은 노련한 생존자(skilled survivor)지만, 그가 자신만의 큰 야망을 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시진핑 3기 지도부 분석 더보기 '시진핑 대집사'가 中 넘버2 됐다…최악실수에도 살아남은 리창 [후후월드] '시진핑 부친 묘' 6000평 성역화했다…'칼잡이' 자오러지 생존법 [후후월드] 3대째 '제왕의 스승'…시진핑의 중국몽 만든 현대판 제갈량 [후후월드] '쪽방촌 10만명' 하룻밤새 몰아냈다…그렇게 얻어낸 '시진핑 총애' [후후월드]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2022.10.28 05:00

  • '쪽방촌 10만명' 하룻밤새 몰아냈다…그렇게 얻어낸 '시진핑 총애' [후후월드]

    '쪽방촌 10만명' 하룻밤새 몰아냈다…그렇게 얻어낸 '시진핑 총애'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  시진핑 3기 정치국 상무위원 6인 분석④ 차이치    22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당 대회 폐막식에 참석한 차이치. 로이터=연합뉴스   차이치(蔡奇·67) 신임 정치국 상무위원은 시진핑(習近平) 3기 수뇌부에서 가장 놀라움을 자아낸 인물이다. 천민얼(陳敏爾) 충칭시 당서기 등 상무위원 후보군을 추월해서다.   차이치는 23일 오전 중국공산당 제20기 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중전회)에서 서열 5위인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뽑혔다. 선전·이데올로기를 담당하며 당의 일상 운영을 책임지는 서기처를 총괄하는 막강한 자리다.   차이치가 시진핑 3기 수뇌부에 발탁된 건 ‘숭배’에 가까운 충성심 덕분이다. 미국의 소리(VOA)는 “차이의 시진핑 치켜세우기는 ‘마오쩌둥(毛澤東) 숭배’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차이는 ‘시진핑=인민영수’ 만들기의 기수다. 20차 당 대회 개막 이튿날 베이징 대표단 토론에 참석 “시진핑 총서기는 신시대 전당·전국·각 민족 인민의 길잡이, 우리가 충심으로 추대하는 인민영수”라며 치켜세웠다. SCMP는 "20차 당 대회에서 시 주석 연설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 적은 사람이 차이치였다"고 전했다.     또 다른 석상에서 그는 시진핑이 곧 당의 핵심이라고 강조하며 "당의 핵심은 시대의 호소이며 인민의 소망, 역사의 선택"이라 말했다. 이어 "우리를 과학적으로 이끄는 것은 시진핑 새 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라며 "시진핑 사상은 깃발이자 방향, 신앙"이라고 했다.      ━  "향후 5년 제로 코로나" 발언 뭇매    시진핑의 대표 정책 ‘제로 코로나’의 전도사도 차이치다. 지난 6월 27일 열린 베이징시 당 대회에서 차이치는 향후 5개년 기조를 담은 업무보고에서 “일상화 코로나19 방역을 끊임없이 견지한다”며 “외부 유입을 막고, 내부 발생을 방지하는 총책략과 ‘제로 코로나’ 총방침을 절대 흔들리지 않고 견지한다”고 강조했다.   베이징 시민들은 "5년이나 더 제로 코로나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거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후시진(胡錫進) 전 환구시보 편집장마저 "앞으로 5년간 제로 코로나 정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아무도 기대 않는다"고 비판했다.   베이징일보가 처음에 올린 글에는 '향후 5년'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논란이 불거지자, 글에서 '향후 5년'이라는 표현이 빠지게 된다. 사진 웨이보 캡처 북경일보 사장은 개인 SNS를 통해 “편집자가 잘못해 향후 5년이라고 썼다”며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당 대회 보고 자체가 미래 5년을 규정하는 문건인만큼 말이 안되는 해명이었다. 시진핑 스스로 20차 당 대회 보고에서 “제로 코로나 원칙을 견지했다”며 방역 정책의 불변을 예고했다. 차이치가 시진핑의 의중에 가장 정통한 인물임을 증명한 셈이다.    ━  쪽방촌 10만명 내몰리자…네티즌들 "나도 하층민이다" 분노     19차 당 대회 직후인 2017년 차이는 베이징 외곽의 이주노동자(농민공)들을 강제 퇴거시켜 거센 반발을 불렀다.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대비한 도시 정비 사업의 일환이었다. “기층 민중을 대하는 데는 진짜 총칼을 빼 들고(眞刀眞槍) 칼에 피를 묻히듯(刺刀見紅) 눈에는 눈으로 대응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철거 지침이었다.   차이치의 강공 배경에 시 주석의 질책이 있었다. 2017년 11월 1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중 기간 베이징 외곽 순이(順義)구 리차오(李橋)진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시진핑 비서실은 당시 차이치 서기에게 “대체 누구에게 화재를 보여주려 하나. 당장 대책을 마련하라”고 질책한 것으로 알려진다. 8일 뒤 다시 남부 다싱(大興)구 농민공 밀집 지역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 19명이 사망했다.    화재 예방을 이유로 ‘하층민(低端人口) 정리 작업’이라고 명명한 대규모 빈민촌 철거 작업이 실시됐다. 하루도 안돼 시내 135개 구역에 중장비가 들이닥쳤다. 혹한기를 앞두고 농민공 10만명이 하룻밤새 거리로 내몰리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는 원성이 높아졌다. 중국 네티즌들은 SNS상에 "나도 하층민이다"라는 해시태그(#)를 달며 질타했지만 소용 없었다.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성화가 2021년 10월 18일 그리스 올림피아 유적지에서 채화돼 2021년 10월 20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성화를 들고 있는 차이치 베이징시 당서기. AFP=연합뉴스 쪽방촌 철거 사태, 하층민 논란이 겹쳐 민심은 잃었지만, 그는 '코로나 속에서도 베이징 올림픽을 순탄하게 치러냈다'는 평가와 시 주석의 총애를 얻었다. 장양 아메리칸 대학교 국제학부 조교수는 "차이는 베이징 당서기로는 인기가 없었지만, 시진핑에 대한 충성이 인기보다 먼저였다"고 말했다.     ━  푸젠·저장에서 시진핑과 호흡 맞춰      차이치는 1955년 푸젠(福建) 성에서 태어나 푸젠 사범대학을 다녔다.      1983년 푸젠성 공산당위원회 판공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본격적인 정치의 길을 걸었다. 1999년 저장(浙江)성으로 옮겨 일했는데 푸젠성과 저장성 모두 차이는 시진핑과 공직 경력이 겹쳤다. 차이치(왼쪽 두 번째)는 시진핑(가운데)과 푸젠성과 저장성에서 같이 지내면서 업무경험을 쌓았다. 사진 바이두 캡처 차이는 시진핑 주석이 저장성에서 근무할 때 거느린 옛 부하 '즈장신쥔'(之江新軍)의 대표주자다. 특히 시진핑이 저장성 서기를 지낼 때 차이치는 시진핑이 제시한 '88 전략'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88 전략은 저장성이 갖춘 ‘8대 프리미엄’을 위한 ‘8대 조치’를 줄인 용어다. 시장 시스템, 지리적 위치, 산업 클러스터, 도시·농촌 조화 발전, 생태 환경, 산림과 해양의 조화, 사회 환경, 인문 등 8대 장점에 각각에 맞는 정책으로 88 전략은 지역 맞춤형 정책의 대명사가 됐다. 수 년간 시진핑과 업무로 호흡을 맞춘 경험은 차이치가 중앙 정계로 수직 상승하는 발판이 됐다.        ━  4년간 4차례 초고속 승진     2013년 3월 시진핑은 국가주석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인 2014년 차이는 지방 생활을 청산하고 베이징 중앙국가 안전위원회 판공실 부주임을 맡게 됐다. 중앙국가 안전위원회는 중국의 국가안보 컨트롤 타워로 시 주석이 신설한 기구다.    중앙 정계 진출 2년 만에 베이징 시정이 차이의 손에 넘겨졌다. 차이는 2016년 베이징 시장 권한대행으로 임명됐다. 2017년 5월에는 베이징시 당서기가 됐다. 19차 당 대회에서 중앙정치국 발탁을 위한 시 주석의 사전 포석이었다.   유라시아 그룹 수석 분석가인 닐 토마스는 차이치가 활주로가 필요한 '비행기'가 아닌 '헬리콥터'승진을 거듭했다고 분석했다. 승진이 너무 빨라 그에게 악감정을 가진 관료도 많았다고 한다. 브루킹스연구소 중국 전문가인 리청은 로이터통신에 "차이치가 4년간 4차례나 승진한 것은 시 주석이 그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  인터넷으로 흥한 자, 인터넷 통제 시대를 열다     차이치는 인터넷에도 능하다. 지방 근무 당시 그는 1000만 팔로워를 거느린 SNS ‘인플루언서’였다. 친근하게 대중들과 소통한다 해서 '차이 삼촌'이란 별명도 있었다.   차이치가 썼던 SNS 계정. 팔로워수가 1000만명이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인민망 캡처 처음에 그는 SNS 선용(善用)을 강조했다. 저장성에서 일할 때 그는 공무원들에게 중국판 트위터(웨이보) 사용을 권했다.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일 처리를 하자"면서 계정을 만들어 각종 민원과 사연을 들었다. 그는 웨이보를 현대판 신문고로 활용했다. 3살짜리 아이가 개에 물려 중상을 입은 사연을 SNS에서 접한 뒤 그가 직접 나서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차이는 잘 해결됐다는 결과 보고까지 SNS에 올렸다.     2011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차이는 "중국서 페이스북이 접속되지 않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말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차이치를 "더 젊어 보이려고 굳이 머리를 염색하지 않는 남자,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광팬, 애플 아이폰과 아이패드 사용자"로 소개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시진핑 시대가 열리자 180도 입장을 바꿨다. 2012년 차이는 "당이 권력을 공고히 하려면 인터넷 세상을 전쟁터로 봐야 한다"면서 당에 의한 인터넷 통제를 강조했다.    2014년 국가안전위 판공실 부주임 차이치의 건의로 시 주석은 인터넷안전위를 꾸리고 직접 위원장을 맡는다. 2017년에는 사이버보안법을 시행, 검열과 통제 강화에 기초를 닦았다.       로이터통신은 "베이징에서 근무한 뒤부터 차이는 더 이상 SNS를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시진핑 3기 지도부 분석 더보기 '시진핑 대집사'가 中 넘버2 됐다…최악실수에도 살아남은 리창 [후후월드] '시진핑 부친 묘' 6000평 성역화했다…'칼잡이' 자오러지 생존법 [후후월드] 3대째 '제왕의 스승'…시진핑의 중국몽 만든 현대판 제갈량 [후후월드]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2022.10.27 05:00

  • 3대째 '제왕의 스승'…시진핑의 중국몽 만든 현대판 제갈량 [후후월드]

    3대째 '제왕의 스승'…시진핑의 중국몽 만든 현대판 제갈량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  시진핑 3기 정치국 상무위원 6인 분석 ③ 왕후닝    인도 시사주간지 더위크의 지난 2021년 12월호 표지. “시진핑 주석이 무관의 왕이라면, 왕후닝은 중국 크렘린의 추기경이다.” (인도 시사 주간지 더위크, 2021년 12월) “왕후닝은 많은 이들이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워싱턴포스트, 2021년 12월)   지난 23일 20대 신임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의 내외신 기자 상견례 장의 왕후닝. 신경진 특파원 지난해 말 한 명의 중국공산당(중공) 이론가를 우려하는 글이 서구 유력지에 쏟아졌다. 주인공은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시진핑(習近平)에 걸쳐 3대째 ‘제왕의 스승’으로 불리는 중공 최고 이론가 왕후닝(王滬寧·67)이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 이어 시진핑이 세 번째 역사결의를 통과시킬 무렵 그는 서구의 공공의 적으로 떠올랐다. 왕후닝은 중국에서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이론가 천보다(陳伯達, 1904~1989), 캉성(康生, 1898~1975) 이후 중공 최고 권좌인 정치국 상무위원 직을 두 번째 차지한 이데올로그여서다. 일각에서는 독일의 괴벨스에 비유한다.   천생 책벌레인 왕은 1955년 10월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중학 시절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문혁)을 맞닥뜨렸다. 1972년 여름 단기간의 학도공을 지낸 후 ‘공농병’ 자격으로 상하이사범대학 외국어반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1977년 졸업 후 상하이 신문출판국에 배치받아 1년간 근무했다. 상하이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과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역대 졸업사진. 앞줄 오른쪽 다섯번째가 왕후닝 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상무위원. 신경진 특파원   1978년 대학 입학시험이 부활했다.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한 왕은 푸단(復旦)대 국제정치학과 국제정치전공 연구생(석사)에 합격했다. 17년간 이어질 푸단 생활의 시작이다. 마르크스 『자본론』의 권위자인 스승 천치런(陳其人)을 만난 그는 28세에 푸단대 정치학과 부교수, 33세에 정교수가 됐다. 38세에 과 주임교수가 되어 전국 스타 교수로 이름을 날렸다. 서구의 최신 학술 사조 및 저서를 번역 소개하고 푸단대팀을 이끌고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 대학생 토론대회에 참가해 1위를 거머쥐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5년 전 기자는 19차 당 대회에서 왕후닝이 상무위원에 선출된 직후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과사무실을 찾았다. 1980년대 교수 왕후닝이 졸업생들과 찍은 사진이 보였다. 캠퍼스 인근 중고서점을 찾았다.   왕후닝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의 1989년 편저 『부패와 반부패』 서론. 8번째 줄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체포를 언급했다. 신경진 특파원 서점 주인은 중국 실세가 된 왕의 저서에 웃돈을 요구했다. 세계 반(反)부패 활동을 담은 편저서 『부패와 반부패』에서 “한국 전 대통령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100억원 수뢰로 체포 기소됐다”고 적은 문장을 발견했다. 1994년 한해 동안 그의 일기를 담은 저서 『정치적 인생』은 이미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자취를 감췄다. 소유자들이 매물을 다 거둬들여서다. 책 수집가들에게 왕후닝의 책은 이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희귀서가 됐다.   왕은 마흔이던 1995년 당무를 주관하는 중앙판공청의 쩡칭홍(曾慶紅) 주임의 추천으로 장쩌민의 책사로 선발됐다. 베이징에 올라온 그는 그 해 열린 중공 14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5중전회)에서 개혁과 발전, 안정의 삼각관계를 탄탄한 이론틀로 풀어낸다. ‘국가주석 특별보조(助理)’로 중앙정책연구실을 차지한 왕은 장쩌민의 지도 사상인 삼개대표론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중공을 노동자와 농민뿐만 아니라 자본가까지 포괄하는 당으로 변모시켰다.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가 당 총서기에 오를 때 왕후닝도 200여명에 불과한 중앙위원회 진출에 성공하며 중공 권력의 피라미드 첨탑으로 진입했다. 후진타오 2기가 시작된 2007년 17차 당 대회에서는 중앙서기처에 들어가 그의 최측근이 되어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고심하던 고속 성장의 후유증을 치료하는 처방인 ‘과학발전관’을 입안해 후진타오에게 헌납한다.    시진핑 시대가 시작된 2012년 18차 당 대회에서 왕은 권력서열 25위의 정치국 진입에 성공한다.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이 정치국에 진입하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이때부터 왕은 세 명의 지도자를 보좌한 ‘살아있는 제갈량(諸葛亮)’으로 불린다. 삼국시대 유비를 도와 천하를 위·촉·오로 삼분하는 데 결정적 공울 세웠던 인물이다. 시진핑의 취임 일성인 ‘중국몽’을 만든 왕은 이때부터 이른바 ‘시진핑 사상’ 만들기에 돌입한다.    ━  김일성 사망에 새로운 시기 예감   왕후닝은 1994년 7월 10일 자 일기에 이렇게 썼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세상을 떴다. 새로운 시기의 시작을 의미할 수 있다. 그곳에서 최근 발생한 일련의 문제는 주로 국제사회와 두 개 한국 내부의 일이다. 이번 사건(김일성 사망)이 이들 문제의 발전에 어떤 충격을 줄 것인가 관찰이 필요하다.” 24년이 흐른 뒤인 2018년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변신한 왕후닝은 북한 노동당 담당 업무를 겸임했다. 그해 세 차례 베이징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베이징 역사로 나가 영접하는 등 모든 일정을 밀착 수행했다.   정치학자로 왕의 최대 연구 과제는 중국에서 또 다른 문혁 발생을 막는 일이었다. 그는 1986년 상하이에서 출판된 대표적인 개혁파 신문 ‘세계경제도보’에 기고문을 싣고 안정을 강조했다. “안정된 정치제도를 건립해야만 사회주의의 고도 민주를 실현할 수 있고, 그래야만 문혁의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혁의 재발을 막고자 했던 왕후닝은 아이러니하게 문혁을 주도했던 문혁소조 조장 겸 이론가 천보다에 비유된다.   중공은 22일 폐막한 20차 당 대회에서 ‘중국식 현대화’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서구식 현대화와 다른 ‘중국의 길’을 제시했다. 중공 최고 이론가로 ‘신권위주의’의 대부로 불리는 왕후닝은 이제 21세기 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아직 ‘사상’에 머무는 시진핑의 사회주의 이념을 ‘시진핑 주의’로 격상할 태세다. 왕후닝은 이번 20차 당 대회에서 퇴진이 예상됐다. 시진핑은 반대로 장쩌민의 상하이방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왕을 서열을 한 단계 올리면서 통일전선 업무를 총괄하는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을 맡겼다. 자신의 사상을 한 단계 격상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위아래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은 이념에도 위계(位階)를 만들었다. 가장 상부를 주의(主義)가 차지한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념에 붙는다. 다음이 사상이다. 마오쩌둥이 독점했다. 5년 전 시진핑도 사상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론은 다음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공산당 집권 이념이 이론에 해당한다. 이번 당 대회 업무보고 제2장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시대화의 새로운 경계를 열다’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에 머물렀던 마오쩌둥 사상을 넘어 시진핑 사상을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즉 ‘시진핑 주의’로 격상시키려는 움직임의 시작으로 해석했다. 이른바 북한 ‘김일성 주의’의 중국식 버전 만들기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왕후닝이 어떤 역할을 맡을지 주목된다.    지난 1989년 미셸 옥센버그 미시간대 교수가 왕후닝 당시 상하이 푸단대 교수에게 보낸 편지. 사진 선룽친(沈榮欽) 캐나다 요크대 교수 페이스북  ━  왕, 천안문 사건 당시 중공의 약화 우려   지난 1989년 천안문 사건 당시 왕후닝은 중국의 민주화가 아닌 당의 권위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지난 24일 선룽친(沈榮欽) 캐나다 요크대 교수가 당시 왕후닝과 미셸 옥센버그 미국 미시간대 교수가 주고받은 편지의 일부를 공개했다. 왕후닝은 당시 개혁개방이 촉발한 중공 중앙의 권위 약화를 우려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 카터 행정부가 베이징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하는 정책을 지지했던 옥센버그 교수는 왕후닝의 논문에 중국의 준(準) 연방제 국가로의 변화 가능성을 지적했다. 중국 개혁파 정치가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이 학생 시위를 촉발하자 왕후닝은 옥센버그 교수와 절박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스탈린주의의 낡은 시스템에서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전환은 역사적으로 선례가 없다. 전환은 좌절과 혼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문제의 열쇠는 어떻게 혼란을 통제 가능할 정도로 줄이느냐에 있다. 연구에 큰 주제이지만 흥미롭고, 연구하고 싶은 주제다.” 왕후닝은 옥센버그 교수의 지적에 공감했다.    이론가 왕후닝은 20차 당 대회 보고를 통해 ‘중국식 현대화’를 제창했다. 옥센버그 교수의 질문에 30여년간 실무와 연구를 거듭한 왕후닝의 해답일 수 있다. 성공 여부는 이후 중국의 향후 모습에 달려있다.  관련기사 중국 개혁 막후서 총지휘 … 주석 3명 보좌 '살아있는 제갈량' 중국 주석 3명 보좌 '은둔의 책사' 왕후닝 … 정치 무대 전면에 [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시진핑 주석 핵심 보좌진 [글로벌 아이] 북·중 외교 조타수 왕후닝 살아있는 제갈량의 굴욕…왕후닝, 베이다이허에서 찬밥 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 ‘3대 책사’ 왕후닝의 추락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2022.10.26 05:00

  • '시진핑 부친 묘' 6000평 성역화했다…'칼잡이' 자오러지 생존법 [후후월드]

    '시진핑 부친 묘' 6000평 성역화했다…'칼잡이' 자오러지 생존법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  시진핑 3기 정치국 상무위원 6인 분석 ②자오러지   중국 공산당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등극할 것으로 예상되는 자오러지가 지난 23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AFP=연합뉴스   "시진핑의 가장 충실한 수호자이자 심복(心腹)"     자오러지(趙樂際·65) 중국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기율위)서기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23일 중국 CCTV 등에 따르면 현재 서열 6위인 자오러지는 서열 3위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상무위원장 자리에 오를 전망이다.    실제로도 자오는 중국 공산당 제20기 제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1중전회)에서 선출한 상무위원 7명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과 리창(李强) 상하이 서기(총리 예상)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입장했다. 시진핑 2기 상무위원 중 단 두 명만이 3기에 함께 입장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자오러지다.    ━  시진핑 1기 '인사 설계자'…충성심 과시      한 때 중앙 정계에서 '무명'이던 자오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자리까지 오른 건 시 주석에게 충성심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시진핑 집권 1기 때 자오는 '인사 설계자'로서 맹활약했다. 중앙조직부장을 맡아 정부 부처, 국영기업, 언론, 대학에 이르기까지 4000여명의 인사를 결정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앙조직부장은 그림자처럼 보이지만 강력한 존재"라고 평가했다.  중앙조직부장으로 일하던 시기의 자오러지. 중앙포토 이 과정에서 자오는 후진타오(胡錦濤)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세력을 밀어내고 시 주석의 친위 세력을 곳곳에 등용해 '시진핑 천하'를 설계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보즈웨 XIPU 차세대 발전연구원 부원장은 "자오는 시 주석의 간부 임명에 순응함으로써 충성심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  2기 때는 반부패 사령탑…中초대 인터폴총재도 '아웃'     시진핑 2기 때 자오러지는 반부패 사령탑 자리에 올랐다. 2017년 취임하자마자 그는 서슬 퍼런 사정의 칼날을 휘둘렀다.     자오의 '칼 끝'은 공산당 엘리트와 고위급 인사들로 향했다. 2018년 한 해에만 해외로 도피했던 중국인 1000여 명이 중국에 다시 돌아왔는데 이 중 307명이 공산당 출신이거나 공무원이었다.     시진핑 시기 반부패 사령탑으로 일했던 자오러지(왼쪽)와 왕치산. 왕치산은 시진핑 1기에서 기율위 서기를 맡았다. 자오러지는 왕치산의 후임으로 시진핑 2기에서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됐다. 사진 트위터 캡처 2018~2020년 중국 당국은 반부패 운동의 일환으로 해외 도피자 3848명을 잡아들이고 '불법 자금' 100억 위안(약 1조9800억원)을 환수했다고 주장했다. 더 디플로맷은 "해외 도피자들을 귀국시키는 작전은 범죄자들이 대상이지만 반체제 인사와 정적들을 대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자오러지가 사정 당국에 있던 2018년 9월 멍훙웨이 중국 초대 인터폴 총재가 중국 방문 중에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결국 멍은 2020년 징역 1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일각에서는 자오가 멍을 숙청한 건 '호랑이도 파리도 때려잡는' 시진핑의 반부패 사정의 완성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멍훙웨이가 시진핑 1기 반부패 수사 대상이었던 저우융캉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잔존세력을 완전히 제거했다는 것이다.     ━  대변인 자처…"시진핑 이익이 당의 이익"      자오는 시진핑 주석의 '대변인'을 자처하면서 말과 글을 통해 시 주석을 추켜세웠다. 자오는 공산당 기관지에 시 주석의 지방 감찰단 활동을 지지하는 글을 올리며 중앙 정부의 지방 감찰체제를 적극 옹호했다.      2018년 개헌을 통해 헌법 서언(序言)에 추가된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현재 중국 공산당원이라면 누구나 시진핑 사상 학습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중국 헌법에 지도자 이름이 포함된 사상이 명기된 것은 마오쩌둥 이래 시진핑이 처음이었다.   일각에서는 "자오러지는 시진핑과 함께 하지 않으면 발언하지 않고, 일단 발언했다 하면 시진핑과 관련된 말 외엔 다른 말을 하는 법이 없다"는 평가를 내린다.        중국 지도자 분석에 독보적인 밍징(明境)출판사가 2015년 발간한『시진핑 신군(新軍)』에는 "자오러지는 '시진핑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곧 당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  시진핑 아버지 기념관까지 세우며 '성역화'       자오는 시진핑 개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성역화하면서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애썼다.    자오는 산시성 당서기로 있던 지난 2007년, 시진핑의 아버지이자 공산당 원로였던 시중쉰(習仲勳)과 시진핑 부자(父子)의 고향(푸핑현)에 있던 무덤을 거대한 능묘로 개조했고 기념관도 세웠다.        시중쉰 기념관의 모습. 사진 씨트립 홈페이지 캡처 묘소와 같이 있는 시중쉰 기념관의 면적은 약 7000㎡이며 주변 전용도로와 주차장까지 합치면 2만㎡(약 6050평)가 넘는다. 고대 황제의 무덤과 견줄만한 이 묘소를 시진핑의 어머니인 치신(齊心)이 무척 좋아해 수 차례 방문했다는 후문이다.    자오는 시 주석이 15살 때부터 7년간 지식청년 생활을 한 옌안시 량자허(梁家河)에도 예산을 쏟아부으며 성역화에 나섰다. 출생지는 칭하이(靑海)성이지만 호적은 시 주석과 같은 산시(陝西)성이라는 점도 둘의 '연결고리'다.       ━  가는 곳마다 최연소 '승승장구'...GDP 늘리는 귀재     인구밀도가 낮은 서북 오지인 칭하이성에서 태어난 자오는 17세 때 문화대혁명(문혁)을 겪었다. 칭하이성 구이더(貴德)현에서 하방(下放) 생활을 했다.   1977년 문혁 후 첫 대학생으로 베이징대 철학과에 입학해 1980년 졸업했다. 다시 칭하이로 돌아온 그는 칭하이 상업청 판공실에서 문서수납 겸 연락 담당을 맡았다. 1984년~1986년에는 냉장고, TV 등을 만드는 가전회사에서 일하며 현장 관리직도 겸했다.   그 뒤 승진을 거듭하던 자오는 1997년 칭하이성 성도인 시닝(西寧)시 서기로 승진했다. 2000년 그는 마침내 칭하이성 성장이 된다. 42세로 당시 중국 최연소 성장이기도 했다. 2003년 후진타오 시대로 들어서며 칭하이성 서기가 됐을 때도 최연소 성서기 기록을 세웠다.    자오러지는 시 주석의 장기 목표인 공산당원 기율 강화와 빈곤 탈출이라는 두 가지를 실행하기에 최적화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AP=연합뉴스 자오는 빈부격차 해결을 위해 2000년대 시작된 중국의 서부 대개발 사업에 주목했다. 자오가 경제구 건설에 박차를 가하면서 칭하이성은 빠르게 발전했다. 2000년 263억 위안(약 4조5000억원)이던 칭하이 성의 국내총생산(GDP)은 6년 만에 641억 위안(약 11조원)이 됐다.          그렇다고 경제발전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환경보호에도 적극적이었다. 칭하이성에 있는 3강(장강, 황하, 동남아 메콩강 상류부)의 발원지에 자연보호구를 설치하는 데 관여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 정부 예산도 수십 억 위안 받아냈다.    그의 재임 시절, 인구의 절반이 소수민족인 칭하이성에서 테러 등 심각한 소수민족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도 출세가도에 보탬이 됐다.     2007년 산시성 서기가 된 그는 산시성의 GDP도 2012년 이임 때까지 3배로 늘려놨다. 산시성을 GDP가 1조 위안을 넘는 성급 행정구를 일컫는 '1조 클럽'에도 입성시켰다. 재임 기간 원촨대지진을 겪어 경제가 타격을 입었음에도 거둔 성과다. 자오는 산시성 시안 교통대학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학생 식당은 맘대로 가격을 인상해선 안 된다"고 민생 안정도 챙겼다고 한다.      브루킹스 중국연구소는 "자오는 시 주석의 장기 목표인 공산당원 기율 강화와 빈곤 탈출이라는 두 가지를 실행하기에 최적화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베이징대 재학 당시 그를 아는 동급생들은 자오를 동서고금의 철학책을 닥치는 대로 읽는 독서가로 기억했다. 특히 제왕학과 관련된 중국 고전을 좋아했다 한다. 제왕학에 관심이 많던 그가 시진핑이란 '21세기 제왕'에 꽂힌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2022.10.25 05:00

  • '시진핑 대집사'가 中 넘버2 됐다…최악실수에도 살아남은 리창 [후후월드]

    '시진핑 대집사'가 中 넘버2 됐다…최악실수에도 살아남은 리창 [후후월드]

    「 용어사전 > 후후월드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   시진핑 3기 정치국 상무위원 6인 분석 ① 리창   23일 차기 총리에 내정된 리창 현 상하이 서기가 인민대회당 금색대청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외 기자 대면식'에서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경진 특파원 “시진핑(習根平)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적 혁신은 현실과 역사를 연결하고 이론과 실천을 결합했다. 사회주의 현대화의 웅대한 비전이 실천적으로 창조돼 마르크스주의에 찬란한 빛을 비췄다”   리창(李强·63) 상하이 당서기는 지난 18일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 대표단 토론회에서 앞장서 시진핑 사상을 극찬했다. 지난 4월 상하이 봉쇄로 정치 생명까지 위협받는 듯했던 리 서기는 시 주석에 대한 절대 충성을 맹세하며 23일 중국 권력 2인자 자리를 꿰찼다. 이는 시 주석과 리창의 과거를 돌아보면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  2002년 저장성 부임한 시주석과 첫 인연   2005년 4월 8일 당시 시진핑 저장성 서기가 새로 개설한 중국예술학원 샹산캠퍼스를 시찰했다. 저장성 당 비서장이던 리창이 시 주석에 밀착 동행했다. 사진 저장일보 캡처 리창이 시 주석과 첫 인연을 맺은 건 20년 전인 2002년 푸젠(福建)성 당서기였던 시 주석이 저장(浙江)성 당 부서기로 부임하면서다. 시 주석은 이후 2003~2007년까지 4년간 저장성 당서기를 지냈다. 이 시기 리창이 저장성 당위원회 비서장이었다. 시 주석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자리였다.    대외적인 직무 수행에서 시 주석은 리창을 가장 많이 대동했다. “시 서기는 비서장 리창과 함께 핑양(平陽)을 방문, 사업을 고찰하고 지도”(2005년 5월24일자), “시 서기가 다천섬(大陳島)에 가 조사 연구를 진행했다. 리창이 동행”(2006년 8월 29일자)…당 기관지 저장일보에는 그의 수행 기록이 넘쳐난다. 리창은 이때부터 시 주석의 ‘대집사’로 불렸다.    리창은 노동자 출신이다. 1959년 저장성 루이안(瑞安)현에서 태어나 17살 때 농기계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저장농업대 닝보(寧波)분교를 졸업했다. 이후 24살이던 1984년 루이안현 청년동맹위원장을 거쳐 1989년 저장성 농촌구호과장이 됐다. 그후 10여 년간 저장성 지방 도시를 돌며 행정과 당 경력을 쌓았다. 저장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시 주석에 필요한 정보와 조언을 제공하며 두터운 신임을 쌓았다.     ━  시진핑 '심복'...'저장방' 선두주자 등극   2016년 5월 6일 당시 저장성장이던 리창은 지우얀 테크놀로지를 방문해 "기업가의 사명은 혁신에 있다"고 말했다. 사진 저장일보 캡처 리창을 필두로 시 주석의 이른바 ‘저장방’(浙江幇) 인맥도 이때 완성됐다. 당시 선전부장이던 천민얼(陳敏爾·현 충칭시 당서기), 저장성 항저우시장이었던 차이치(蔡奇·20기 정치국 상무위원·베이징시 당서기), 저장성 자싱(嘉興)시장 황쿤밍(黃坤明·현 중앙선전부장) 등 ‘즈장신쥔’(之江新軍)으로 불리는 이들은 현재 시 주석의 최측근 고위직으로 자리 잡았다.    2013년 시진핑이 국가 주석에 오르자 지지를 등에 업은 리창도 승진 가도를 달렸다. 1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저장성 성장(省長)으로 발탁됐다. 리창은 인사 발표 당일 밤 곧바로 간부 회의를 소집해 “당의 영도를 견지하고, 법에 의한 행정을 근본으로 하며, 감독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저장일보, 2013년 1월 13일)는 ‘법약3장’(法約三章) 원칙을 밝혔다. 시 주석의 ‘의법치국’(법에 의거해 나라를 다스린다) 방침을 철저히 따를 것이란 공개 맹세였다.    이어 “서두르지 않으면 5년은 눈깜빡할 새 지나간다. 분초를 다투고 실무적이고 진취적으로 일해야 한다”며 “성장으로서 나는 성 정부의 사업에 대해 총책임을 지겠다. 간부들이 권한에 따른 책임을 져야 정부의 집행력과 행정 효율이 제고된다”고 행정책임주의를 강조했다.      ━  상하이·저장·장쑤, 장강 이남 3개 성 최고 책임자   2017년 리창은 저장성 성장, 장쑤성 당서기를 거쳐 상하이 서기로 임명됐다. 사진 바이두 캡처 홍콩 명보는 “리창을 접촉한 상공계 인사들은 그가 온건하고 사유가 개방적이라고 칭찬한다”는 세간의 평가를 전했다. 리창은 3년 간 저장성 성장으로 재직했다. 이 시기 저장성 국민총생산(GDP)는 2013년 3조7757억 위안(약 750조)에서 2016년 4조6485억 위안(약 930조)으로 매년 8% 이상 늘었다.    이후 리창은 장쑤(江蘇)성 당서기를 거쳐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한정의 뒤를 이어 상하이 당서기로 영전했다. 5년 새 저장ㆍ장쑤ㆍ상하이까지 중국 경제 발전 핵심으로 등극한 장강(長江) 이남 3개 성의 최고 책임자를 섭렵했다. 특히  2018년 시 주석이 '장강 삼각주(저장성·장쑤성·안후이성·상하이시) 3성1시 통합 개발'을 국가 전략으로 내세웠고 리창은 이를 진두지휘했다.    상하이 당서기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하는 ‘1순위 티켓’이었다. 지난 2006년 비리로 낙마한 천량위(陳良宇·76)를 제외하고 상하이 당서기가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되지 못한 이는 없었다.     ━  상하이 봉쇄로 정치 위기..."재등용은 더 충성하게 만들려는 것"   지난 4월 11일 상하이시 징안구 봉쇄 현장을 찾은 리창 상하이 서기가 주민들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고 있다. 사진 트위터 캡처 순조로운 듯 보였던 리창의 행보는 지난 3~5월 상하이 봉쇄로 위기를 맞았다. 시민들은 현장을 찾은 그에게 “당신은 나라에 죄를 지었다. 부끄럽지도 않냐”며 비난했다. 회복 기미를 보이던 중국 경제는 올 2/4분기 경제성장률 0.4%로 추락했다. 문책론이 비등했지만 시 주석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봉쇄 전까지 리창은 상하이의 방역과 경제 개방을 비교적 균형감있게 관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닐 토마스 유라시아그룹 수석 분석가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관리에 실패한 리창을 승진시킨 것은 오히려 그를 총리로서 시진핑에게 더 충성스럽게 만들 것”이라며 “동시에 코로나 봉쇄 정책을 이견없이 따르라는 무언의 신호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천강(陳剛) 싱가포르국립대 동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리창이 총리가 되면 시주석이 경제·사회 정책 결정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며 “개혁 개방은 계속되겠지만 속도는 느려질 것이며 강력한 방역 정책도 계속 시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이징=박성훈 특파원 park.seonghun@joongang.co.kr

    2022.10.24 05:00

  • "中몰락 볼 것" 친중 재벌 달라졌다, 대만 1331억 기부한 사연 [후후월드]

    "中몰락 볼 것" 친중 재벌 달라졌다, 대만 1331억 기부한 사연 [후후월드]

      ■  「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대만 시민권을 되찾아 매우 흥분됩니다. 용감한 대만인들과 함께 중국의 침략에 맞서겠습니다. 대만을 미국처럼 자유와 용기의 땅으로 만들겠습니다."   대만의 '반도체 대부' 차오싱청 롄화전자 창업자가 지난 1일 대만 수도 타이베이 입법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새로 발급받은 대만 국적의 신분증을 확대한 패널을 들고 웃고 있다. AFP=연합뉴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새 신분증을 커다랗게 확대한 패널을 들어 보이며 한껏 들뜬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만의 ‘반도체 대부’로 불렸던 롄화전자(UMC) 창업자인 차오싱청(曺興誠·75) 전 회장이다. 롄화전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다. 대만 자유시보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차오 전 회장은 지난 1일 오전(현지시간) 대만 수도 타이베이의 입법원에서 ‘국적 회복 기자회견’을 열었다.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이 회견은 주요 TV 채널과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다.     ━  대만 국방에 1331억원 기부…11년 만에 국적 회복     차오 전 회장의 기자회견이 이토록 뜨거웠던 이유는, 그가 지난달 5일 "중국 공산당의 본성은 ‘조폭’"이라면서 "대만 국방 강화를 위해 30억 대만달러(약 1331억원)를 기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대만에 대한 중국의 무력 도발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지난달 초에는 중국이 대만을 포위해 ‘침공 시나리오’ 작전을 펼치는 것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일각에선 싱가포르인인 그가 갑자기 대만 안보에 관심을 갖는 것에 의문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2011년 대만 국적을 버리고 싱가포르에 귀화한 후, 고가의 골동품 수집을 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다. 이에 차오 전 회장은 지난달 25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인터뷰에서 "반공주의자라고 해놓고 혼자 숨으면 안 된다"며 "싱가포르 국적을 포기하고, 대만 국적을 회복해 대만에서 죽기로 결심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공언대로 국적을 회복했고 수 십명의 취재진 앞에서 증명했다.    차오 전 회장의 이 같은 행보에 많은 대만인은 환호하고 있다. 소셜미디어(SNS)에는 ‘이 어려운 시기에 함께 해줘서 감사하다’,‘조국 수호를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하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다’ 등 찬사가 쏟아졌다. 반면 ‘11년 전에는 국적을 포기하더니 왜 이제 와서 이러나’,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 등 달가워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차오 전 회장이 한때 유명한 ‘친중(親中)’ 인사로 꼽혔던 사실도 이 같은 의구심을 더했다.    ━  자산 13조원 ‘반도체 대부’→ 친중 인사로 미운털     대만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롄화전자 실험실 내부 모습. 사진 롄화전자 홈페이지   차오 전 회장은 1947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돌 무렵 그의 부모가 대만 타이중으로 건너왔다. 그는 1969년 최고 명문대인 국립대만대 전기공학과를 나온 후, 1976년 미국에서 반도체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1982년 롄화전자를 세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으로 키웠다. 자산 27억 달러(약 13조6000억원)를 벌어 대만의 부자 50인에 뽑히는 ‘반도체 재벌’이 됐다.    탄탄대로였던 그의 삶은 1990년대 중국에 진출해 본토 기업인 허젠테크놀로지와 손을 잡으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2005년 허젠테크놀로지에 기술을 불법 제공한 혐의 등으로 대만 당국 조사를 받았다. 결국 이 여파로 2006년 초 회장직에서 물러나더니 친중 발언을 쏟아냈다. 2008년 한 신문에 "대만은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해선 안 되고, 통일을 위한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글을 실어 논란이 됐다. 결국 친중 행보 여파로 싱가포르로 귀화했다는 분석이 많다.     ━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보고 ‘반(反)공산당’ 선언     홍콩 경찰이 지난 2019년 7월 몽콕 근처의 관광객이 많이 찾는 나탄 로드에서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랬던 차오 전 회장이 왜 ‘반중(反中)’을 외치게 된 걸까. 대만 유력 시사·경제지 천하잡지에 따르면 차오 전 회장은 2019년 홍콩에 머물면서 민주화 운동을 직접 목격한 후 전향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홍콩 정부가 추진했던 '범죄인 인도 법안'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 100만여명이 거리에 나왔고, 민주화 시위로 확대되면서 20개월간 1만여명이 체포됐다. 차오 전 회장은 "시진핑 집권(2013~) 후 중국 공산당은 감추고 있던 잔혹하고 원시적인 모습을 드러냈다"면서 "법이 지배하는 자유사회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분노가 일었고, 반공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고백했다.    이후 차오 전 회장은 조금씩 반중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9년에는 "대만이 고대부터 중국의 영토였다는 주장은 헛소리"라고 했고, 2020년에는 "다시 돌아간다면 반도체 사업을 하러 중국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지난 3월에는 "대만 국적인 두 아들은 중국 공산당이 쳐들어오면 반드시 싸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  방탄조끼 입고 "모든 대만인, 中에 저항하도록 도울 것"      차오싱청 롄화전자 창업자가 지난 1일 대만 수도 타이베이 입법원에서 열린 국적 회복 관련 기자회견에서을 마치고 방탄조끼를 입고 철모를 쓰고 있다. AFP=연합뉴스   차오 전 회장은 지난 1일 국방 강화를 위해 기부한 30억 대만달러 중 10억 대만달러(444억원) 사용 계획도 공개했다. ‘흑곰부대’를 만들어 3년 안에 각 지역을 방어하는 민간인 용사 300만명과 민간인 사격수 30만명을 양성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대만 인구 약 2390만명 중 13% 정도를 무장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는 "모든 대만 사람들이 중국의 침략에 저항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들고 싶다"고 했다.    차오 전 회장은 지난달부터 방탄조끼를 입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을 향해 과격한 발언을 일삼으면서 언제 어디서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껄껄 웃으면서 "중국 공산당 몰락을 보고 웃으면서 죽든지, 대만이 홍콩처럼 되지 않도록 싸우면서 죽겠다"는 다짐을 보여줬다.      ■  「 ※[후후월드]를 중앙일보 홈페이지(joongang.co.kr)에서 구독하세요. 세계를 움직이는 이슈 속에 주목해야 할 인물을 입체적으로 파헤쳐 드립니다. 」 관련기사 전폭기로 봉쇄 후 가오슝 상륙…중국, 사실상 대만침공 리허설 세계 컨테이너 절반 지나는 곳…中, 그 바다 향해 화염 뿜었다 [지도를 보자] 소박한 모습에 반전 정치…中위협 굴하지 않은 '화끈한 여인' [후후월드]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2022.09.04 05:00

  • 소박한 모습에 반전 정치…中위협 굴하지 않은 '화끈한 여인' [후후월드]

    소박한 모습에 반전 정치…中위협 굴하지 않은 '화끈한 여인' [후후월드]

      ■  「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최근 미국·영국·독일·일본·캐나다의 국회의원들이 줄지어 만나고 싶어하는 지도자가 있다. 대만 최초의 여성 총통 차이잉원(蔡英文·66)이다. 그는 2016년 대만 총통직에 올랐고, 2020년 역대 최다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차이 총통은 "세계 최고의 지정학적 드라마 중 하나(대만)의 주인공"(로이터통신)으로 묘사된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지난 3월 군복을 입은 채 군 부대를 방문했다. 중국은 최근 대만에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지만, 차이 총통은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EPA=연합뉴스 중국과 대만 양안(兩岸) 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차이 총통이 이끄는 대만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 2~3일 미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중국의 반발에도 대만을 방문한 이후 미 여야 상·하원 의원 5명이 지난 14~15일 대만을 찾아 차이 총통을 만났다. 일본 의원들은 오는 22~24일 대만을 찾을 예정이고, 영국·독일·캐나다 의원들도 연내 방문을 예고했다.       ━  "기술이 대만 안보 보장"...코로나19에도 경제 성장      차이 총통은 펠로시의 방문을 앞두고 철저한 보안과 준비로 야당인 국민당에서도 찬사를 받았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반면 이런 행보에 반발한 중국이 군사적 위협 수위를 높이면서 대만의 안보는 위협받고 있다. 중국은 차이 총통을 "비열한 후손"이라고 비난한다.       차이 총통은 펠로시 의장 방문 후 중국이 대만 주변에서 군사 훈련을 하자, "굴복하지 않겠다"고 했다. 18일엔 자신의 페이스북에 중국 군함을 감시하는 대만 군함의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지난 15일 미 의회 대표단이 차이잉원 총통을 만나 기념 촬영을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는 소신있고, 단호한 면모로 '라타이메이(辣台妹·대만의 매운 언니)' '대만판 철의 여인'이란 별명도 얻었다. 미 타임·포브스 등 유력 외신들은 인구 약 2390만 명인 섬나라 지도자인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반도체 수출 강국인 대만은 2020년 경제성장률이 3.36%로 30년 만에 중국을 제쳤고 세계 주요국 1위에 올랐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6.28%로 11년 만에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고 대만 정부는 밝혔다. 차이 총통은 "기술이 대만의 안보를 보장할 것"이라며 기업 친화 정책을 펴고 일자리 창출에 힘썼다.        ━  재력가의 막내 딸이 대만 지도자가 되기까지        차이 총통과 그가 속한 집권당 민진당은 자유민주주의와 대만의 독립 노선을 추구한다. 그의 이런 성향은 혈통에서도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차이 총통은 조상이 수백 년 이상 대만에서 거주한 '대만 토박이'를 뜻하는 본성인(本省人)이다. 그의 조모는 대만 원주민인 파이완(排灣)족이다. 본성인은 대만 인구의 80%를 차지하며 민진당의 지지 기반이기도 하다. 차이 총통이 2019년 5월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차이 총통은 1956년 대만 남부 지역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차이제성(蔡潔生)은 자동차 수리업과 부동산 사업으로 성공한 재력가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은 대만 현지 언론을 인용해 차이 총통의 어머니는 차이제성의 네 번째 부인이라고 전했다.     학업 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아버지의 든든한 지원 속에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대만 최고 명문인 국립 대만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 코넬대와 런던정경대에서 각각 법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만 국립정치대 등에서 법학 교수로 일했다. 차이 총통이 2011년 자신의 어린시절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타이페이타임스 홈페이지 캡처 차이 총통은 교수 신분으로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이 임기 말 설파한 '양국론'(兩國論)의 초안을 작성했다. 양국론이란 중국 본토와 대만이 별개의 나라임을 정립한 이론이다.   그는 2000년 천수이볜(陳水扁) 정부 출범 후엔 양안 정책을 총괄하는 정부 부처인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장관)에 발탁됐다. 이때부터 중국은 그를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눈엣가시로 여겼다.      이후 그는 2004년 민진당 입법위원(국회의원), 2006년 행정원 부원장(행정부 부총리) 등을 역임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 그러던 2008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이 국민당에 참패한 후 민진당 주석을 맡아 당을 성공적으로 재건하며 차세대 지도자로 떠올랐다.       ━  단발머리 수수한 옷차림...주변인들이 말하는 차이는      그는 2012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에게 패배했으나, 2016년 두 번째 도전에서 총통직에 올랐다.     차이 총통은 집권 1기 당시 급진적인 탈원전 정책 등으로 한때 궁지에 몰렸으나 2020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 한궈위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는 홍콩 민주화 시위로 인한 대만 내 반중 여론 확산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국민당은 상대적으로 중국에 우호적인 정당으로 분류된다.   차이 총통이 2020년 1월 11일 재선 승리 후 환하게 웃고 있다. EPA=연합뉴스 차이 총통은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으로 카리스마는 부족한 실무형 정치인이란 평가가 있다. 반면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모습이 오히려 그의 매력이란 시각도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단발머리, 옷차림도 수수한 '모범생 스타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대만 최초의 '미혼 총통'이기도 한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미국 유학 시절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그와 함께 일했던 보좌관과 관료들은 차이 총통에 대해 "정책통" "항상 공부하는 사람" "다양한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며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등의 평가를 내놨다.    미혼인 차이 총통은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트위터 캡처  ━  '방역 모범국'의 뼈아픈 실수...中 위협, 위기이자 기회     다만 일각에선 중국엔 강경하고, 미국에 협조하는 차이 총통의 외교 전략으로 양안 관계가 나빠졌다는 비판도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연임을 확정 지을 오는 10월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를 앞두고 대만에 대한 군사 위협을 지속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중국의 경제 보복이 아직은 미비하지만, 추가 보복 조치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차이 총통(오른쪽)은 지난 3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과 만났다. AP=연합뉴스 또 대만은 코로나19 사태 초기 '방역 모범국'으로 불렸으나 코로나19 백신 확보가 늦은 데다 올 들어 확진자가 급증했다. 이로 인해 차이 총통의 지지율은 지난 6월 36%로 집권 2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다만 집권 2기 초기의 70%대 지지율은 회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펠로시 의장의 방문 후 지지율이 45.7%로 상승했다.      차이 총통이 지난해 12월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반중 정서가 고조되면서 정부와 집권당(민진당)에 대한 지지 여론도 확산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했다.      이지용 계명대 인문국제대학 교수는 중앙일보에 "중국이 위협 수위를 높이면서 대만 국민들은 결집하고 있고 국민 여론은 물론 정치권·학계에도 반중 정서가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의 분위기라면 2024년 총통 선거에서도 민진당에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차이잉원 만큼의 상징적인 지도자가 아직 보이지 않는 점이 과제"라고 짚었다. 대만 총통의 임기는 4년이고, 최대 두 번까지만 재임(在任)이 가능해 차이 총통은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     대만여론재단(TPOF)이 지난 16일 공개한 여론조사(대만 성인 남녀 1035명 대상)에 따르면 대만 국민의 52.9%가 펠로시 의장의 방문 추진을 '잘한 일'이라고 했고, 78.3%가 '중국의 대규모 군사 훈련이 두렵지 않다'고 답했다.      ■  「 ※[후후월드]를 중앙일보 홈페이지(joongang.co.kr)에서 구독하세요. 세계를 움직이는 이슈 속에 주목해야 할 인물을 입체적으로 파헤쳐 드립니다. 」 관련기사 "시진핑 제 무덤 팠다…펠로시 대만행에 역사적 의미 부여" 부부 재산 알고보니 1조…英 뒤집은 금수저의 '서민 코스프레' [후후월드] 자유 지키려 독재하겠다? '아랍의 봄' 튀니지의 로보캅 대통령 [후후월드] 3명째 총리 노리는 탁신 가문…이번엔 36세 막내딸이 도전 [후후월드]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2022.08.21 05:00

  • 14세에 베이징대 합격…시진핑 책사, 총만큼 센 '붓대' 잡았다 [후후월드]

    14세에 베이징대 합격…시진핑 책사, 총만큼 센 '붓대' 잡았다 [후후월드]

      ■  「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리수레이(李書磊·58)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상무부부장이 지난 5일 랴오닝성 선양에서 열린 6·5 중국 생태환경의 날 기념 포럼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중국 생태환경부 웨이신]  ━  [중국 20대 정치국열전② 리수레이]     지난 5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서 열린 6·5 중국 생태환경의 날 기념 포럼에서 눈길을 끈 인물이 있다. 중국공산당(중공)의 요직 중의 요직인 중앙선전부(이하 중선부) 상무부부장 직함으로 참석한 리수레이(李書磊·58) 중앙당교 상무부교장이다. 중앙당교는 중국 유력 정치인의 필수 코스로 알려져 있고 리수레이는 이곳에서만 26년간 잔뼈가 굵었다. 시진핑(習近平·69) 중국 국가주석의 최측근이자 숨은 책사로 알려진 그가 중선부 2인자 직함으로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이다. 지난 4월 22일 전임자 왕샤오후이(王曉暉·60)가 쓰촨 당서기에 임명된 지 한 달 보름여 만이었다.    이번 인사는 의미심장하다. 올 하반기 3연임을 노리는 시진핑 진영과 이를 저지하려는 장쩌민(江澤民·96) 세력의 치열한 다툼 속에서 시진핑이 거둔 첫 승리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중공 20차 전국대표대회(전당대회·20大) 싸움의 핵심은 권력 서열 25위권인 정치국에 자기 진영 사람 심기다. 장관급인 중선부 상무부부장은 전전임과 현임인 류윈산(劉雲山·75)·황쿤밍(黃坤明·66)의 전례에서 보듯 정치국원 당연직인 중선부장으로 가는 필수코스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발언을 신봉하는 중국에서 문화·예술·선전 정책을 총괄하는 붓대(筆杆子·비간쯔)는 총대(槍杆子·촹간쯔)와 대등한 힘을 갖는 핵심 요직이다. 중선부는 문화산업과 관광을 총괄하는 문화관광부, 방송을 감독하는 광전총국, 중국중앙방송(CC-TV) 사장, 국정홍보처 격인 국무원신문판공실 주임, 인터넷 검열과 정책을 책임지는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주임 등 10명의 장관급 부부장을 거느린 메머드 조직이다.   리수레이의 전임 왕샤오후이는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발탁한 왕후닝(王滬寧·67)의 조수로 차기 중선부장 0순위로 꼽혔다. 그 같은 이가 쓰촨으로 빠져나간 자리를 시진핑의 브레인으로 통하는 리가 접수했다. 리를 가리켜 넓적다리·팔뚝과 같은 충신을 뜻하는 고굉지신(股肱之臣)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난해 말 20대 정치국을 처음으로 예약한 마싱루이(馬興瑞·63) 신장(新疆) 당 서기에 이어 두 번째로 리수레이에 주목하는 이유다.   리수레이(李書磊·58·왼쪽 두번째)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상무부부장이 지난 5월 27일 오후 중난하이에서 열린 정치국 집단학습에 참석했다. [중국중앙방송(CC-TV) 캡처]  ━  14세에 명문 베이징대 합격한 ‘신동’   리수레이는 ‘신동(神童)’이다. 1964년 1월 허난(河南)의 위안양(原陽)에서 태어났다. 1978년 문혁(文革)으로 10년간 중단됐던 중국의 대입 시험 가오카오(高考)를 봤다. 열네 살로 중국 최고 명문인 베이징대 도서관학과에 합격했다. 스물한 살에 베이징대 중문학 석사, 스물네 살에 박사 학위를 땄다. 1984년 스무살 나이로 중앙당교 조교로 공직에 발을 디뎠다. 스물다섯에 중앙당교 부교수, 서른두 살에 정교수에 임용됐다.    시진핑 중앙당교 교장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2007년의 일이다. 2008년 6월 교무부 주임(교육 담당 부교장)으로 승진했다. 시진핑 교장이 지휘하는 간부 교육을 도왔다. 중앙당교 교장은 최고 권력자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장관급 육성이 예정된 젊은 간부는 중앙당교 교육이 필수다. 차기 권력자는 당교에서 이들과 사제(師弟) 관계를 맺는다. 전통시대 스승과 제자, 천거한 관리와 추천받은 관리의 끈끈한 관계를 일컫는 문생고리(門生故吏) 관계의 현대적 부활이다. 당교는 황태자와 스킨십과 로열티를 나눈는 장이다.    시진핑은 당교에서 ‘학자형 관리’ 리수레이를 얻었다. 2012년 18대에서 최고 권좌에 오른 시진핑은 리수레이의 경력 관리를 시작했다. 18대 중앙기율위 위원 당선이 시작이었다. 당 중앙위원·후보위원·중앙기율위 위원은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자격증이다. 2014년 리수레이는 푸젠(福建)성 선전부장에 임명된다. 2015년 말 베이징 시 상무위원 겸 기율위 서기, 19대 직전인 2017년 1월 중앙기율위 상무위원 겸 부서기에 오른다. 해외로 도주한 부패 관리를 잡는 판공실 주임도 맡았다. 2018년 신설 국가감찰위원회 부주임을 겸임한다. 2020년 12월 다시 중앙당교의 장관급인 넘버2 상무부교장에 취임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990년 지은 한시 ‘염노교-자오위루를 추모하며’가 지난해 6월 개관한 베이징 중국공산당 역사전람관에 전시되어 있다. 신경진 기자  ━  푸젠에서 시인 시진핑을 알리다   시진핑은 제2의 마오쩌둥을 꿈꾼다. 마오는 정치가이자 시인이다. 시 주석은 시인의 이미지가 필요하다. 리수레이가 이를 알렸다. 2014년 4월 15일 푸젠성 당 기관지 복건일보 1면에 ‘간과 쓸개를 씻듯이(肝膽長如洗·간담장여세)’라는 평론을 썼다. 부제는 ‘시진핑 동지의 염노교-자오위루를 기리며(念奴嬌·追思焦裕祿)를 다시 읽다’.    “‘의연하게 밝은 달은 예전과 같다. 밤마다 그대를 생각하니 간과 쓸개를 물로 깨끗이 씻는 듯하다(依然月明如昔 思君夜夜 肝膽長如洗·의연월명여석 사군야야 간담장여세).’   간과 쓸개를 씻어내듯,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다. 말은 안에서 나온다. 마치 하늘의 소리와 같다. 자오위루를 거울로 삼아 몸과 행동을 바로잡고, 자오위루를 샘물로 삼아 영혼을 정화한다. 작가는 공산당인의 진실된 정신 수련을 경험했다.”   자오위루(焦裕祿, 1922~64)는 시진핑의 1950년대 말 허난성 란카오(蘭考) 현 당 서기로 요절한 기층 지도자의 표상이다. 시 주석이 1990년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서기 시절 그의 헌신적인 태도를 배우자며 한시 ‘염노교-자오위루를 기리며’를 지었다. 100자에 맞춰 짓는 한시 ‘염노교’는 당(唐) 나라의 명창 염노를 기념해 송(宋)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즐겨 지은 한시 장르다. 마오쩌둥도 1935년 장정 막바지 ‘염노교·곤륜(崑崙)’을 지었다.호평이 줄을 이었다. “시진핑 총서기도 시를 짓는구나” “시진핑의 염노교 작품이 좋다. 리수레이의 평론 역시 훌륭하다. 시야를 넓혀주는 글이다.” “시 총서기를 가장 잘 이해하는 베이징대 신동”이란 꼬리표가 리수레이에게 붙었다.     ━  리수레이의 새로운 전략…장쩌민 세력의 영향력 청산   리수레이의 약진에는 시진핑 진영의 큰 그림이 담겼다. 호주로 망명한 민주화 운동가 위안훙빙(袁紅冰·70)은 올 초 인터뷰에서 리수레이가 장쩌민 세력의 영향력을 청산하는 새로운 전략을 시진핑에게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의 실패를 거울로 삼았다. 시진핑 진영은 지난해 제3차 역사결의에 성공하지 못했다. 덩샤오핑 노선과 장쩌민 노선의 동시 청산을 노렸지만 덩샤오핑 옹호 세력의 반대가 발목을 잡았다. 차기 지도부 자리싸움까지 실패하면 안 된다. 리수레이는 전략을 바꿨다. 덩샤오핑과 장쩌민의 유산을 정치적으로 구분했다. 장쩌민에 집중했다. 부패로부터 당을 구하는 ‘구세주’ 시진핑의 이미지를 만든다는 노림수다. 마오쩌둥에 비견되는 장기집권을 따라오게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  ‘학자형 관리’ 리수레이가 꿈꾸는 소프트파워 강국   리수레이는 중앙당교 시절 인기 교수였다. 강좌도 다양하게 개설했다. ‘당대 영화 뉴웨이브 리뷰’ ‘당대 유행 문화 연구’ ‘서방 문화 사조와 문화 클래식 리뷰’ ‘성경에서 프로이트까지’ 등등. ‘현대화 과정에서의 문화 이해’ ‘매스 미디어의 문화적 기능’ 과목은 강의 평가에서 만족도 94%, 97%를 받았다.   관료 능력도 인정받았다. 20대 후반이던 1991년 말부터 1993년 초까지 허베이(河北) 친황다오(秦皇島)시의 칭룽(靑龍)현 부서기로 근무했다. 공업·교통·재무·무역·농촌·기층 조직 건설 등을 맡았다. 평가가 좋았다. 2004년 2월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시 부서기로 근무했다. 이때 시 주석을 처음 만났다는 설도 전해진다.   중앙당교는 중공의 싱크탱크다. 중공은 자문 기구가 풍부하다. 핵심은 당 중앙정책연구실이다. 당 중앙의 문건과 주요 지도자의 연설문을 작성한다. 중앙당교는 사회 관리, 외교를 자문한다. 중앙당교 교수 리수레이는 시진핑 비서실(판공실)의 정치 비서를 맡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리수레이의 취미는 독서와 등산이다. 현대적인 오락과 거리가 멀다. 리수레이의 문장에는 사대부의 향기가 넘친다. 현대판 ‘어용 문인(御用文人)’인 셈이다. 그는 “중국 문화사에서 관리는 종종 문화 영웅이었다”고 적었다. 학자형 관리 리수레이는 소프트웨어 강국 중국을 꿈꾼다. 미·중 패권 경쟁 시대 새로운 중국 특색 소프트파워를 기대한다.       ■ “중국 주류문화는 관리가 창조했다” 「 리수레이는 학자형 관리다. 현대판 사대부(士大夫)로 불린다. 독서광인 그는 지난 2015년 3월 ‘환독인생(宦讀人生)’글에 공직관을 담았다.     “증국번(曾國藩·1811~1872, 청 후기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군인이자 정치가)은 평생 하루를 반으로 나눠 일과 독서를 병행했다. 격렬한 전쟁터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전범으로 삼을 만하다. 증국번의 독서는 치국과 병법에 그치지 않았다. 철학과 사랑을 읊은 시도 가리지 않았다. 증국번은 숨진 동생을 추모하며 대련(對聯)을 지었다.   ‘돌아 오시게, 밤하늘 달빛이 누대의 꽃받침 그림자로 내린다.   가지 마시게, 하늘 가득한 비바람이 마치 자고새 울음 같구나 (歸去來兮 夜月樓台花萼影; 行不得也 滿天風雨鷓鴣聲 ·귀거래혜 야월루대화악영; 행부득야 만천풍우자고성)’.     중국의 고전 문학과 철학을 읽을수록 중국의 주류 문화는 관리들이 창조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관직 생활은 일종의 큰 속됨(大俗·대속)이며, 독서는 일종의 커다란 우아함(大雅·대아)이다. 속된 관리 입장에서 보면 대아는 대속에 대한 구원이다. 우아한 학자 입장에서 보면 대속은 대아에 대한 일종의 성취다.   대형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은 럭셔리하다. 존경심을 품기 어렵다. 책이 없어서다. 아무리 높은 지위의 공직자라도 책을 읽지 않는다면 천박한 관리일 뿐이다. 반대로 책을 읽고 사색하며 지혜의 뿌리를 품으면 관직의 높고 낮음과 있고 없음을 가릴 필요 있겠나.” 」          ■  「 ※[후후월드]를 중앙일보 홈페이지(joongang.co.kr)에서 구독하세요. 세계를 움직이는 이슈 속에 주목해야 할 인물을 입체적으로 파헤쳐 드립니다. 」 관련기사 中 달탐사 지휘관서 신장 1인자로…美 겨눈 '로켓승진' 마싱루이[후후월드]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2022.06.10 05:00

  • 中 달탐사 지휘관서 신장 1인자로…美 겨눈 '로켓승진' 마싱루이[후후월드]

    中 달탐사 지휘관서 신장 1인자로…美 겨눈 '로켓승진' 마싱루이[후후월드]

      ■  「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마싱루이 신임 신장위구르자치구 당서기 [둬웨이 캡처]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위구르족 강제노동 금지법’에 서명하면서 중국 신장(新疆)이 미·중 갈등의 1번지로 떠올랐다. 이 법은 신장 위구르자치구에서 생산된 상품의 수입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다. 중국이 강제노동이 아님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사실로 간주한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신장의 경제를 고사시켜 인권 탄압을 바로잡겠다는 미국 측 최후 통첩이다.   중국은 마싱루이(馬興瑞·62) 광둥(廣東)성장을 신장의 경제 소방대장으로 투입했다. 마싱루이가 지휘한 지난해 광둥성 경제총생산(GDP)은 한국을 추월했다. 지난해 광둥성 GDP는 11조761억 위안(약 2070조원)으로 한국의 2020년 GDP 1조6310억 달러(약 1949조원)를 처음으로 제쳤다. 신장 GDP 1조3798억 위안(약 258조원)은 광둥성의 8분의 1에 불과하다. 닭(신장)과 소(광둥)처럼 덩치 차이가 나지만 소 잡는 칼을 닭에 아끼지 않는 건 그만큼 중국의 각오가 비장하단 의미다.   마싱루이 신임 서기는 부임 직후 신장 중심도시 우루무치의 시장으로 달려갔다. 민생경제부터 챙기겠단 제스처다. 지난달 27일 첫 우루무치시 현장 시찰에서 “산업체인과 공급체인의 현대화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라”고 주문했다. “세금 감면과 경비 절감으로 시장화·법치화·국제화된 양호한 경영 환경을 조성하라. 사람의 흐름과 물자 흐름, 자금 흐름, 정보의 흐름을 편리하게 하라”고도 덧붙였다. 당 중앙이 마 서기에게 지시한 최우선 임무가 신장의 경제 발전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장의 1인자인 당 서기는 베이징·상하이·톈진·충칭 4대 직할시와 광둥성 당 서기와 함께 중앙정치국위원을 겸한다. 이로써 18·19대 중앙위원을 연임한 마싱루이는 내년 가을 중국공산당(중공) 20차 당 대회에서 선출할 25인의 중앙정치국위원에 처음으로 안착했다. 지난 2012년 공업정보화부 부부장(차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지 10년만에 부국급(副國級, 부총리급) 대열로 올라섰다. 기층에서 중앙까지 승진에 30~40년도 다반사인 중공 정계에서 이례적인 ‘로켓 승진’이다. 27일 마싱루이(왼쪽 세번째) 신임 신장위구르자치구 당서기가 우루무치시를 시찰하고 있다. 이날 마 서기는 “산업체인, 공급체인 현대화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라”고 주문했다. [신강일보 캡처]    ━  마싱루이 외에 장칭웨이·위안자쥔 등 우주방 전성시대   중화권 매체는 마 서기의 로켓 승진 배경을 우주 달탐사 지휘관이었던 이력에서 찾는다. 지난 2015년 홍콩 명보는 ‘우주방[航天幫]의 굴기(崛起·우뚝섬)’라는 기사를 싣고 마싱루이를 차세대 다크호스로 지목했다. 우주방이란 중국에서 우주산업 경력을 발판으로 정계 진출한 이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명보는 지연과 후견인 찾기에 몰두하는 파벌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점을 ‘우주방’의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원자탄·수소폭탄·인공위성을 개발해 나라에 보답한다는 ‘양탄일성 정신’도 우주방 굴기의 밑천이다. 마 서기 외에도 최근 후난성 당서기에 부임한 장칭웨이(張慶偉·60), 위안자쥔(袁家軍·59) 저장성 서기 등이 우주방의 주축이다.   지난 2008년 9월 중국 유인우주선 선저우 7호 프로젝트의 마싱루이 부총지휘관이 주취안 우주센터에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중국신문망]  ━  펑리위안 여사와 동향…장쩌민 장남과도 인연   마 서기는 1959년 동북 헤이룽장성 동부 공업 도시 솽야산(雙鴨山)의 광산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조상은 산둥성 허쩌(菏澤)시 윈청(鄆城) 출신이다. 윈청 황투이지(黃堆集)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59) 여사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마싱루이는 1978년 대입시험이 부활하던 해 랴오닝성 서부의 푸신(阜新)광업학원에 입학해 공업 역학을 전공했다. 수학 성적이 우수해 신설 전공에 특채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톈진대에서 역학 전공으로 석사를, 하얼빈공대 비행동력학연구실에서 일반 역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96년까지 줄곧 하얼빈대에서 우주공학과 역학을 가르쳤다.   그해 본격적으로 실무에 뛰어든 마싱루이는 2007년 8월 중국항천과기집단(CASC) 총경리에 취임해 중국의 우주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같은 해 국제우주항행과학원(International Academy of Astronautics, IAA) 원사에도 당선됐다.    그러면서 중국의 첫 달 탐사 프로젝트인 ‘항아공정(姮娥工程)’ 부총지휘관도 맡았다. 이때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장남 장몐헝(江綿恒)도 부총지휘관으로서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항아공정’ 부총지휘관 이력은 이번 신장 서기 부임 이후 수정된 공식 이력에서는 사라졌다. 홍콩 명보는 30일 마 서기가 장쩌민파로 분류되는 오해를 막기 위한 경력 세탁으로 풀이했다.    마싱루이는 2008년 8월 중국 선저우(神舟) 7호 유인 우주선 비행을 성공시키면서 ‘젊은 우주 사령관(航天小帥)’이란 이름표를 달았다. 그의 지휘 아래 선저우 8·9·10호 프로젝트가 연이어 성공했다.   2010년 3월 16일 마싱루이(오른쪽) 당시 중국항천과기집단 총경리(대표이사)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을 안내하고 있다. [사진=중국항천망]  ━  관료 사회 복지부동·부패 척결 전문가   마싱루이는 2012년 18차 당 대회 대표 선출을 계기로 정계 입문한다. 참석한 첫 당 대회를 주석단에서 지켜본 마싱루이는 폐막일 선거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이듬해 3월 공업정보화부 부부장에, 다시 여덟 달 뒤 광둥성 부서기 겸 정법위 서기에 임명됐다. 2015년 3월에는 홍콩과 인접한 대도시 선전(深圳)시 일인자로 올라섰다. 시 살림을 맡게 된 마싱루이는 13명의 시 상무위원 중 5명을 교체했다. 시 정부 살림을 맡고 있던 리핑(李平)시 비서장과 법원 부원장 등을 부패 혐의로 조사했다. 천잉춘(陳應春) 부시장은 이듬해 고층 건물에서 투신자살했다. 또 다른 부시장 뤼루이펑(呂銳鋒)은 2017년 수뢰 혐의로 검찰에 입건돼 지금까지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마싱루이는 중국 관료 사회의 부패와 복지부동 척결이 특기다. 공개장소에서도 하급 간부를 질타하는 장면이 종종 목격됐다고 한다. 일 처리에도 빈틈이 없어 부하직원이 자료를 보고하면 반드시 캐묻는 등 학자형 관료의 면모도 보였다. 명보는 지난 19대 당시 정치국 후보로 마싱루이를 꼽으며 “마싱루이는 내용 없는 말을 싫어하고 진솔해 후춘화(胡春華) 당시 광둥성 당서기조차 그를 기피했다”고 전했다.    ━  고 박원순 전 시장에게 이재명 초상화 전달 해프닝도   지난 2019년 4월 5일 서울시 청사를 방문한 마싱루이(왼쪽) 당시 광둥성장이 고 박원순 서울 시장과 양해비망록에 서명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서울시 홈페이지] 마싱루이 중국 광둥성 성장(당시 직함)이 2019년 내한 당시 고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깜짝 선물한 ‘초상화’. 의뢰한 쪽의 착오로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가 그려진 것이라 중국 측이 다시 가져갔다고 한다. [사진 서울시, 연합뉴스] 마싱루이 서기의 전임 천취안궈(陳全國·66)는 미국 재무부 제재를 받고 있다. 인권을 유린한 외국 정부 관리를 제재할 수 있도록 한 매그니츠키 인권책임법을 적용했다. ‘위구르족 강제노동 금지법’에 맞서 신장 경제를 성장시켜야 할 마 서기도 미국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향후 미국이 마 서기마저 제재 대상에 추가할 지가 미·중 관계의 새로운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다.   마 서기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광둥성장 재임 당시인 지난 2019년 4월 4~5일 내한해 산업통상자원부, 서울시, 경기도 판교 등을 방문했다. 당시 고 박원순 전 서울 시장을 만났을 때 초상화를 선물했는데 ‘깜짝 선물’이라며 현장에서 공개한 초상화가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의 것이라 ‘결례’ 소동이 있었다. 당시 광둥성 당국의 자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상화를 그릴 화가에게 박 전 시장 대신 이 지사의 사진을 잘못 줘서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한다.   ☞정치국=중공의 헌법 격인 당장(黨章)에 따르면 정치국(Politburo)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Plenary) 폐회 기간 당의 최고 영도기구인 전국대표회의(Congress, 당 대회)와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한다. 정치국회의 소집 권한을 가진 총서기(Secretary)가 매달 한 차례꼴로 회의를 주재하며 핵심 국가 정책과 인사를 결정한다. 모두 25명이며 정치국원은 서열 없이 동등하다는 의미에서 이름 호명은 한국의 가나다 격인 획수 순서를 따른다.   ■  「  ※[후후월드]를 중앙일보 홈페이지(joongang.co.kr)에서 구독하세요. 세계를 움직이는 이슈 속에 주목해야 할 인물을 입체적으로 파헤쳐 드립니다.  」 관련기사 팔로워 2422만 '거친 입'...中 빼고 '모두까기' 후시진 역설[후후월드] 17살 아들에 물려줄 준비…'유럽의 북한' 27년 독재 루카셴코 [후후월드] "강간하기에 못생겨" 막말…'브라질 트럼프' 뒤 콘크리트 20%[후후월드] 美대통령 4번 바뀌었다…"남자도 총리 해?" 질문 낳은 '무티' [후후월드] 유리천장 깨부순 파리의 여시장, 佛 첫 여대통령에 도전장 [후후월드]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2022.01.01 05:00

  • 팔로워 2422만 '거친 입'...中 빼고 '모두까기' 후시진 역설[후후월드]

    팔로워 2422만 '거친 입'...中 빼고 '모두까기' 후시진 역설[후후월드]

      ■  「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는 지역 안정을 해치는 악성 종양.” (2017년 9월) “중국 민주주의는 이제 불 붙은 모닥불, 미국 민주주의는 꺼져가는 불씨.” (2021년 12월)    중국이 세계와 싸울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해 온 ‘공산당의 거친 입’이 공식 석상에서 물러났다. 중국의 대표적인 국수주의 매체 환구시보(環球時報)의 후시진(胡錫進·61) 편집인이다. 후시진은 16일 웨이보에 “은퇴 수속을 밟아 더 이상 환구시보의 편집인을 맡지 않는다”고 밝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 14일(현지시간) “중국에서 유일하게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사람”이라며 그를 집중 조명했다.   중국 환구시보 편집장에서 물러나는 후시진(胡錫進). [바이두 갈무리=뉴스1]    ━  펑솨이 실종 사건에 등판   지난달 21일, 후시진이 트위터에 올린 영상에 전세계 이목이 쏠렸다. 중국의 테니스 스타 펑솨이(彭師)가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코치와 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가 공개한 것이다. “펑솨이는 자유롭게 지내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였다.    펑솨이는 앞서 같은 달 2일 웨이보에 장가오리(張高麗) 전 부총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뒤, 2주 넘게 행방이 묘연한 터였다. 중국 당국에 의한 실종설·구금설, 심지어 사망설까지 등장했다. 펑솨이의 신변 안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이어졌다. 그러자 중국 정부도 아닌 관영 매체 인사가 펑솨이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펑솨이 신변을 공개하며 “일부 서방 세력이 펑솨이의 폭로를 중국 체제를 악마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중국만 빼고…‘모두까기’   후시진은 독설로 국제사회에서 주목의 대상이었다. 가디언은 "싱거운 공산당의 공식 성명 속에서 후시진의 끊임없는 독설과 모욕은 돋보인다"고 평했다. 2017년 한국과 사드 배치 갈등을 빚을 당시 그는 사설에서 “한국이 김치만 먹어서 멍청해진 것이 아니냐”고 비방했다. 그의 독설에서 유일한 예외는 중국 정부다. 중국 정부만 아니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퇴임 전날까지 후시진은 트위터에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을 포스팅하며 “미국의 민주주의 정상회의 결과 발표에서 대만 대표 영상이 잘린 건 알고 있느냐”며 저격했다.   그는 베이징 겨울올림픽 전면 보이콧을 주장한 미 상원의원을 향해선 “정치적 쓰레기”(지난달 19일)라고 비난했고, 호주를 향해선 “중국의 신발 밑에 붙은 씹던 껌”(2020년 4월)이라고 조롱했다. 이런 표현을 서슴지 않는 후시진은 웨이보와 트위터에서 각각 2422만 명, 45만 명에 달하는 팔로어를 거느리고 있다. 그의 한계가 없는 독설이 중국 안팎에서 어떤 방식으로건 영향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가디언은 "후시진은 특히 군사 문제에 열정적"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5월 후시진은 “중국의 핵탄두를 1000기로 늘려야 한다”고 공개 주장했다.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중국도 참여하는 (핵)군비 통제협정의 필요성”을 거론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하루 만에 나온 발언이었다.    이 같은 후시진의 폭탄 선언에 외신들이 중국 정부의 입장을 묻자, 화춘잉(華春瑩) 당시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에도 언론의 자유가 있다”며 그의 입장을 두둔하는 듯한 대답을 했다.   지난달 21일, 후시진 편집인은 트위터에 동영상을 올려 중국 공산당 간부 장가오리의 성폭행을 폭로한 뒤 실종설이 불거졌던 중국 테니스 스타 펑솨이가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로이터=연합뉴스]  ━  中 ‘늑대외교’ 방불, 후시진의 입   일부 전문가는 후시진이 “중국의 ‘전랑(戰狼·늑대 전사) 외교관’ 이상의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전랑외교는 중국이 늑대 전사처럼 공격적인 압박 외교를 구사하는 것을 지칭한다. 전랑외교에 관한 저서를 쓴 미 블룸버그 통신의 피터 마틴 국방·안보 담당 기자는 올해 10월 미 아시아정책연구소 대담에서 “2008~2009년 이후 천천히 가속화되던 중국의 전랑외교는 2012~2013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시대에 들어 가속화됐으며, 코로나19 팬데믹 발발 이후 복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랑외교의 타깃이 국제사회가 아닌 국내 청중의 결집에 맞춰지고 있다면서다.   후시진은 그런 면에서 전랑외교의 부상 훨씬 이전부터 환구시보를 통해 중국식 민족주의를 전파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평이다. 샹란신(相蓝欣) 스위스 제네바 대학원 국제정치학 교수는 “환구시보가 매일 들이미는 국수주의 감정은 통제하기가 어렵다”며 “오랫동안 중국 대중을 이끌어 온 점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  중국 민족주의 설파 선봉장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은 그의 거침 없는 발언을 메아리처럼 증폭시켰다. 후시진이 트위터·웨이보를 통해 전달하는 주장이나 환구시보의 논평을 외신이 인용해 보도하고, 이를 통해 해당 국가와 국제 사회에서 반중(反中) 정서가 점화되면 환구시보는 이를 재인용해 반박하며 양국 여론이 충돌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방탄소년단(BTS)의 ‘밴플리트 상’ 수상 일화가 대표적이다. BTS가 수상 소감에서 “한·미 양국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언급한 것을 일부 중국 네티즌이 문제삼자, 환구시보는 이를 받아 “BTS가 전쟁에서 희생된 중국 군인을 존중하지 않고 중국을 모욕하고 있다”는 반응을 그대로 실었다. 이 문제를 놓고 양국 간 여론이 악화하자 외려 중국 외교부가 브리핑을 통해 갈등이 확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진화 메시지를 냈다. 이후 후시진은 “한국 언론이 중국 네티즌의 반응을 선정적으로 보도한 것”이라고 언론에 화살을 돌렸다.   후시진의 이 같은 자신감 넘치는 행보의 배경엔 시 주석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  “시진핑 언론 전략 충실한 인물”   후시진과 환구시보의 입지를 설명하는 일화가 있다. 2016년 시 주석은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베이징 본부를 방문해 수 많은 인민일보 계열사 신문 중 환구시보를 콕 짚었다. “내 사무실에 이 신문이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2019년엔 후시진이 있던 사무실을 직접 찾아 “선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신기술을 수용하고, 당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할 새로운 플랫폼 점유할 것”을 당부했다.   이를 놓고 가디언은 “후시진이 시진핑 집권 초기 내놓은 언론 전략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디언은 "후시진은 환구시보 기자들이 개인 브랜드를 키우도록 장려하고, SNS를 적극 활용하면서 중국 공산당 노선을 안팎으로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고 했다.   소셜미디어와 같은 뉴미디어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중국 공산당은 2010년대 언론 자유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다. 환구시보도 이를 따라갔다. 중국 공산당은 2010년 5월 '인터넷 백서'를 발행해 모든 인터넷 이용자가 중국의 법과 규정을 준수하도록 했다. 이듬해 중국 정부는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를 공항에서 체포하고 81일 동안 투옥하기도 했다. 당시 환구시보는 "아이웨이웨이는 역사에서 씻겨나갈 것"이라고 비난하고, 아이웨이웨이를 옹호하는 기사를 쓴 기자 원타오(文涛)를 해고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그는 2016, 2019년 환구시보를 발행하는 인민일보 본사를 방문했다. [로이터=연합뉴스]    ━  천안문 시위대에서 ‘중국의 입’으로    후시진의 삶은 입지전적이다. 1960년 가난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세에 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군 장교 신분으로 난징국제관계학원·베이징외국어대에서 러시아 문학 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 시절 천안문 사태(1989년 6월)가 일어났을 때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훗날 천안문 시위 참여를 “위험한 어리석음”이었다고 스스로 비판했다. 이후 그는 인민일보에 입사하며 ‘중국의 입’으로 거듭났다.   기자 시절 그는 보스니아 전쟁(1992~1995년) 특파원 경력을 전환점으로 꼽는다. 트위터 프로필 사진이 20년 전 보스니아 전쟁 취재 때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메모하고 있는 사진이라고 한다. 회고록에서 그는 “그곳에서 ‘중국 기자는 왜 각광을 받지 못하는가’라는 생각을 했다”며 “중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무시받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가디언은 이를 놓고 “회고록에는 당시 후시진의 서방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이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평했다.    ━  세르비아 中대사관 폭격 대서특필    가디언에 따르면,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서방 중심의 국제 뉴스에서 중국의 위상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췄다. 그의 전략은 환구시보가 세를 확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9년 5월 7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의 일원으로 미군이 세르비아의 중국 대사관을 폭격, 중국 기자 세 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미측은 “비극적 사고”라고 해명했지만, 환구시보는 이틀 뒤 특별호를 발행해 해당 사건이 고의적 테러일 수 있다는 의혹 제기 기사를 내보냈다.   특별호는 중국 내 반미 정서에 불을 붙였다. 공산당 엘리트들은 물론 중국 대중들까지 호응했다. 리자오싱(李肇星) 전 외무장관이 “저널리즘은 국경이 없지만 기자는 모국어가 있다”며 환구시보를 호평했다.     ━  ‘중국 최고’ 내건 후시진의 역설   하지만 ‘차이나 퍼스트’를 내걸었던 후시진이 이젠 ‘차이나 퍼스트’에 공격을 받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가디언은 “중국 사회에서 민족주의가 강해질수록 후시진의 영역은 쪼그라드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고 짚었다. 지난 5월 후시진은 인도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치솟자 공감을 표했다. 그러자 일부 극단적 성향의 네티즌들이 “중국의 주요 라이벌인 인도를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며 후시진을 공격했다. 여기다 지난해 말 혼외자 의혹이 불거지고, 아들의 캐나다 이민 의혹 등이 더해지며 그 자신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후시진은 지난 16일 웨이보를 통해 환구시보의 '특약 칼럼니스트'로 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식 직함은 내려놓지만, 여전히 그가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환구시보 해직 기자 원타오는 “그는 환구시보의 영혼”이라며 “후시진을 벗어난 글로벌타임스(환구시보의 영자신문)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2021.12.19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