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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피크 차이나’ 다시 불거지나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매사에 음양이 있듯이 중국 경제도 그렇다. 밝고 어두운 면이 혼재한다. 최근 판궁성(潘功勝) 중국인민은행 총재는 올해 “경제성장률 목표 5.0%를 무난하게 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출의 20%가 중국으로 향하는 우리에겐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어두운 이야기도 들린다. 현대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단체관광이 불가하던 2017~19년 유커(游客)의 월평균 한국 방문은 41만6000명. 한데 지난 8월 단체관광을 풀었음에도 올해는 월 14만4000명으로 3분의 1 수준이다. 왜? 중국의 경기 둔화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상하이와 선전엔 도산과 감원, 실업의 세 가지 바람이 분다고 한다. “8000여 곳에 이력서 제출했고 27개 회사 면접을 봤지만 다 떨어졌다”는 절규가 인터넷 공간을 지배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중국인을 짓누른다. 그 결과 해외여행보다는 저축을 늘리고 있다. 중국 경제 불안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28일 상하이 선물거래소를 방문했다. [사진 신화망] 일본 노무라증권은 중국 가계의 초과 저축을 무려 7200억 달러(약 928조5000억원)로 추산한다. 눈여겨볼 건 중국 당국이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말 중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말레이시아 등 6개국에 대해 1년 한시의 비자 면제 조치를 밝혔다. 그도 그럴 게 지난 상반기 중국을 찾은 외국인은 약 50만 명. 2019년 1400만 명보다 96%가 줄었다. 주중 미 대사관에 따르면 현재 중국 유학 중인 미국인은 350명. 2019년 1만1000명보다 97%가 감소했다. 중국 공항이 썰렁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투자사 록펠러 인터내셔널의 루치르 샤르마 회장이 중국의 세계 속 GDP 비중이 2021년 18.4%에서 올해는 17%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해 화제다. 중국은 1990년 1.7%를 바닥으로 지난 30여 년간 그 비중을 계속 확대해 왔다. 2010년 일본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선 이후 미국 추월이 시간문제로 꼽혀왔다. 한데 이제 33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 속 중국 GDP 비중이 줄게 됐다. 연초 유행한 중국의 성장이 한계에 부닥쳤다는 ‘피크 차이나’ 논란이 다시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하락하면 우리는 0.15%포인트 동반 하락한다고 한다. 추운 겨울을 맞은 중국 경제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셈이다. 낙관도 비관도 금물이다. 중국 경제 상황에 대한 더욱 철저한 모니터링이 필요한 연말이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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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영토 넓혀가는 화웨이의 ‘훙멍OS’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에도 천지창조 신화가 있다. 반고(盤古)라는 이름의 신이 하늘을 열고 땅을 펼쳤다. 반고 이전의 시기는 ‘훙멍(鴻蒙)’이라 했다. 원시의 기(氣)가 뭉쳐있는 혼돈의 세계다. 화웨이가 독자 개발한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훙멍’이라고 이름 지은 연유다. ‘훙멍OS 기술자를 찾습니다.’ 징둥·메이퇀·알리바바 등 중국의 전자상거래 플랫폼 기업들이 훙멍 앱 개발자 구하기에 나섰다. 1억 연봉은 기본. 훙멍의 흡입력은 그만큼 크다. 아직 화웨이 스마트폰이 전부다. 다른 브랜드 폰은 여전히 구글 안드로이드, 또는 iOS(애플)를 쓴다. 그런데도 훙멍을 무시할 수 없는 건 국가가 뒤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공업정보화부 산하 조직인 ‘개방 원자 재단(Open Atom Foundation)’이 그 실체다. 화웨이 ‘훙멍OS’가 스마트폰에서 가전·자동차·스마트공장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화웨이는 훙멍 소스를 모두 이 재단에 ‘헌납’했다. 그다음부터는 재단이 나선다. 산업별 적용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조율하고, 해당 소스를 공개한다. 원하는 기업 누구든 가져다 쓸 수 있다. 민간 기술 훙멍은 그렇게 국가 재산이 된다. 바이두의 블록체인 플랫폼인 ‘슈퍼체인’, 텐센트의 저전력 사물인터넷(IOT) 시스템 ‘타이니’ 등도 같은 방식으로 뿌려지고 있다. 중국 특유의 국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화웨이는 훙멍OS를 사용하는 단말기가 모두 7억 개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 세계를 놀라게 한 5G 스마트폰 ‘메이트60 프로’가 핵심축이다. 영토는 이제 스마트폰을 넘는다. 화웨이와 자동차 회사가 함께 만든 ‘즈제(智界)’ ‘아이토(AITO)’ 같은 전기차에도 훙멍OS가 깔렸다. 이들 차량의 내비게이션·에어컨·영상 등은 화웨이폰과 완벽하게 연동된다. 훙멍이 얼마나 빨리 확산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산물이다. 2019년 5월 미국은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압박 강도를 높였다. 안드로이드 생태계에서 몰아내겠다고 별렀다. 이에 화웨이는 훙멍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그해 8월 첫 버전을 내놨다. 현재 중국 시장점유율 16%. 미국이 훙멍의 약진을 도운 꼴이다. 훙멍의 성공 여부는 더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미국의 기술 제재가 중국 스마트 기술의 표준 독립을 앞당기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반도체·전기차·AI 등에서도 목격되는 현상이다. 훙멍이 만든 자기들만의 세상에서는 블록 외부 기업과의 협력 공간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훙멍의 영토 확장을 경계하는 이유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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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대만해협 파고 잦아들까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바이든 대통령을 신뢰하나?” “시진핑 주석을 믿는가?” 지난 15일 미·중 정상에 던져진 기습 질문이다. 시 주석이 미소로 응수한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시 주석을 “독재자”라 부르는 것으로 답했다. 둘 다 상대에 신뢰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만났다. 왜? 국익은 물론 각자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싫어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氣) 싸움만 요란했을 뿐 별 성과는 없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시 주석의 발언 하나는 눈에 띈다. “앞으로 수년간 대만공격 계획은 없다”는 거다. 시 주석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과거 시 주석이 미국에 한 약속을 뒤집고 남중국해 인공섬을 군사기지화 한 전례가 있지 않으냐는 지적이 당장 나온다. 하지만 시 주석이 세계가 지켜보는 회담에서 그저 빈말만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대만이 분열의 길을 가지 않는 한 양안(兩岸) 사이에 ‘제3의 전장’을 만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왼쪽부터 주리룬 국민당 주석, 허우유이 국민당 후보, 마잉주 전 총통, 커원저 민중당 후보. [연합뉴스] 같은 날 대만에선 꽤 의미 있는 일이 벌어졌다. 내년 1월 13일 대만 총통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자 둘이 전격적으로 단일화에 합의했다. 이제까지 판세는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라이칭더(賴淸德) 민진당 후보가 단연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친중 성향의 국민당 허우유이(侯友宜)와 중도인 민중당의 커원저(柯文哲)가 2, 3위를 다투는 상황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라이칭더가 승리하고 양안 간엔 화약 냄새가 진동할 게 뻔하다. 한데 국민당과 민중당이 이날 후보 단일화를 발표했다. 당초 18일엔 여론조사를 토대로 총통과 부총통 후보까지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다소 이견이 발생해 미뤄졌다. 그렇다고 단일화 자체가 물 건너간 건 아니다. 커원저가 “국민당도 밉지만, 민진당을 더욱 원망한다”고 말하고 있어 총통 후보 등록 마감일인 24일까지는 단일화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대선판이 크게 출렁이게 됐다. 앞선 조사에서 국민당과 민중당이 힘을 합칠 경우 어느 후보가 나서든 민진당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야권이 승리할 경우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 집권 때와 같은 양안 밀월기가 오지 않겠냐는 섣부른 전망마저 나온다. 자연히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집권 내내 바람 잘 날 없던 대만해협 파고가 과연 내년부터는 잦아들 수 있을까 비상한 관심을 끈다. 대만에 전쟁이 터지면 ‘제4의 전장’은 한반도가 될 것이란 일각의 예측이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요즘이기 때문이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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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한국 시장은 참 쉽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 웨이하이(威海)에서 물류 회사를 운영하는 가오(高) 사장. 한국 소비자가 주문한 중국 직구 상품을 인천으로 보내는 일을 한다. 직접 인터넷 스토어를 운영하기도 한다. 요즘 사업이 어떠냐는 물음에 엉뚱하게 대답한다. “한국 시장은 참 쉽다.” 한국에서 장사하기 쉽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 그는 ‘비어 있는 시장’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가성비 제품과 경쟁할 만한 한국 상품군이 없다는 얘기였다. 확인을 위해 인터넷 쇼핑 사이트를 뒤졌다. 그랬다. 골대는 비어 있었다. 지난 11일 ‘솽스이’ 특수를 맞아 물품 준비에 분주한 중국의 한 인형회사. [신화통신=연합뉴스] 전기면도기를 보자. 브라운, 필립스, 파나소닉…. 한국에서 인기 있는 제품은 대부분 해외 브랜드다. 이들의 쿠팡 가격은 쓸 만하다 싶으면 6만원이 넘는다. 고급형은 40만, 50만원에 달한다. 한국 기술이 만든 중저가 브랜드는 없다. 중국 구매사이트 알리익스프레스(이하 알리)는 달랐다. 검색창에 ‘전기면도기’를 치니 1만원대 중국 제품이 수두룩하게 떠오른다. 좀 고급스럽다는 ‘샤오미’ 제품도 3만원 선이다. ‘손색없는 품질, 그런데도 터무니없는 가격’. 가오 사장이 말한 비어 있는 시장이다. 거의 ‘폭격’ 수준이다. 우리는 올 1~9월 약 2조2217억원 어치의 중국 상품을 해외 직구로 샀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우리의 최대 해외 직구 대상국은 이제 미국이 아닌 중국이다. 아마존보다 알리를 더 찾은 셈이다. 중국의 ‘솽스이(11월 11일)’ 쇼핑 축제에 한국 소비자들이 열광할 정도다.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품 원가 자체가 경쟁이 안 되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은 거대 대륙 시장이 있기에 더 많이 팔 수 있고, 그만큼 원가를 줄일 수 있다. ‘규모의 경제’다. 국내 기업은 도저히 그 원가를 맞출 수 없으니 시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쉽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중국 의존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핵심 소재를 중국에 의존하고, 중간재 수출도 중국에 기댄다. 이젠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도 중국에 의존해야 할 판이다. 한국 소비시장이 대륙의 ‘규모의 경제’에 편입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극복 방법은 하나, 혁신이다. 기술 혁신, 산업 구조 개혁만이 ‘규모의 경제’를 이길 수 있다. 그게 안 되니 ‘쉬운 한국’이라는 말을 듣는다. 요즘엔 오히려 중국 기업이 더 혁신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 가성비 높은 BYD 전기차를 알리에서 주문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골대가 비어 있으면 골은 먹히기 마련이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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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중국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철판도(鐵板圖)는 뭐고 추배도(推背圖)는 또 뭔가. 최근 여러 중화권 사이트를 살피다 보면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 말들이다. 둘 다 예언서란 공통점이 있다. 2017년 알려진 철판도는 예언이 철판에 못을 박듯 딱딱 들어맞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화제가 된 건 철판도의 마지막 장 그림 때문이다. 네 마리의 검은 새는 날고 있는데 한 마리 흰 깃털의 새(白羽毛鳥)는 산에 부닥쳐 추락한다. 여기서 백(白)과 우(羽)를 더하면 습(習)이 된다. 은연중 중국의 5세대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겨냥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철판도를 봤다는 이의 일방적 주장인 데다 철판도의 존재 자체도 의심을 사 문제다. 한데 근자엔 당대(唐代) 이래 천서(天書)로 중국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란 말을 듣는 추배도 또한 거론된다. 추배도 이름은 왕조의 흥망을 다룬 60장의 그림 중 마지막이 사람의 등을 떠미는 모습에서 나왔다. 당대( 唐代) 제작 된 추배도(推背圖)는 중국판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란 말을 듣는다. [사진 바이두] 추배도는 현재 6종의 판본이 존재하는데 46번째 그림이 문제다. 여기엔 “한 군인이 활을 갖고 나는 백두옹(白頭翁)이라 하니 동쪽 문 안에 금검(金劍)이 숨겨져 있고 용사는 후문에서 황궁으로 들어온다(有一軍人身帶弓 只言我是白頭翁 東邊門裏伏金劍 勇士後門入帝宮)”는 글이 적혔다. 어떤 군인이 황제를 해치려고 활과 칼을 숨겨 뒷문으로 들어온다는 내용이다. 이게 현재 상황을 예언한 거냐 여부로 중화권 뒷골목이 시끌시끌하다. 호사가들은 시 주석이 현재 중국 로켓군 장군들을 비롯해 군부에 대한 반부패 숙청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게 군(軍)에서 나올 자객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란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또 황제를 해할 용사가 누구냐, 중국의 프리고진은 누구인가를 따진다. 황당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예언서들이 횡행하게 된 시대 분위기다. 시진핑의 집권 3기 1년이 이제 막 지났다. 그동안 백지 시위를 야기한 코로나 사태 재폭발, 부동산이 고꾸라지며 벌어진 경기 침체, 역대 최악의 청년 실업률에 이어 여름엔 홍수가 베이징 근교를 집어삼켰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과 리커창 전 총리가 세상을 떴고, 친강 외교부장과 리상푸 국방부장이 혼외 스캔들과 부패 추문 속에 낙마하는 등 우환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시진핑은 새 지도부를 자신의 친위대인 시자쥔(習家軍)으로 꾸렸지만, 누가 활을 든 용사인가 색출에 혈안이 될 정도로 안전에 대한 우려는 오히려 더 커졌다는 말이 나온다. 예언서가 판을 치게 된 배경이겠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차이나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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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자유·국제주의’ 사조의 사망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 국무원(정부) 산하 발전연구중심(DRC)은 대표적인 정부 싱크탱크다. 경제 정책을 기획하고 제시한다. DRC가 세계은행과 함께 ‘차이나 2030’ 보고서를 낸 건 2012년 2월이었다. 중국 경제의 장기 발전 방향을 담았다. 보고서 작성을 기획한 사람이 바로 27일 고인(故人)이 된 당시 국무원 부총리 리커창(李克强)이었다. 핵심 키워드는 두 개, ‘시장’과 ‘글로벌’이었다. 보고서는 모든 경제 정책 결정에서 시장을 중심에 두고, 세계 경제와의 동반 성장 체제를 구축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권력층의 주류 사조였던 자유주의, 국제주의가 반영됐다. 리커창이 꿈꾸던 2030년 중국의 미래 모습이기도 했다. 2016년 10월 한 창업 전시회에서 청년들에게 사인해주는 리커창 전 총리. [사진 중국정부망] 리커창은 보고서 내용을 정책에 반영하려 애썼다. ‘대중창업 시대를 열자, 모든 사람을 혁신에 뛰어들게 하라!’ 그는 총리 2년 차였던 2014년 9월 톈진(天津)에서 열린 하계 다보스포럼에서 이렇게 외쳤다. IT분야 청년들이 환호했다. ‘대중창업, 만중혁신(大衆創業 萬衆創新)’이라는 슬로건은 금방 경제 현장으로 퍼져나갔다. 창업, 혁신 붐이 일었다. 중국은 어느 다른 나라보다 먼저 인터넷 쇼핑을 정착시켰고, ‘인터넷 택시’를 도입했다. ‘베이징에서는 거지도 위챗으로 구걸한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그즈음이다. 마윈(馬云)이 당시 세계 최고가로 알리바바를 뉴욕 증시에 상장한 것도 2014년 9월의 일이다. 인터넷 혁명으로 시장은 활력이 돋고, 기업은 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리커창 경제’는 바로 그 시간 내부 깊은 곳으로부터 도전받고 있었다. 그해 6월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당의 경제 관련 최고 협의기구인 중앙재경영도소조(中央財經領導小組)가 열렸다. 소식을 전한 신화통신 보도에 뭔가 특이사항이 하나 있었다. 관행적으로 총리가 맡아오던 소조 조장에 ‘시진핑(習近平)’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 경제 권력은 빠르게 시진핑 일인(一人)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시진핑 세상’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리커창의 ‘대중 혁신’ 대신 국가가 자원을 집중적으로 동원하는 신형 거국체제가 강조된다. 민영기업보다 국유기업에 돈이 몰리고, 글로벌 협력보다 자력갱생이 중시된다. 당(黨)을 앞세운 시진핑의 10년 통치에 2001년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중국 정계에 자리 잡았던 자유, 국제주의 사조는 명맥이 끊길 처지다. 대신 ‘중화 권위주의’가 그 자리를 채운다. 리커창의 죽음은 그렇게 자유, 국제주의의 사망과 맥을 같이한다. 명복을 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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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애플은 중국에서 안녕한가?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애플 CEO 팀 쿡은 지난주 내내 중국에 있었다. 지난 3월 이후 7개월 만에 또 갔다. 이해가 간다. 신작 ‘아이폰15’의 중국 판매량이 전작(14시리즈)보다 부진했고,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화웨이에 내줘야 했다. 애플의 한 해 중국 판매액은 약 740억 달러(약 100조원, 2022 회계연도). 전체 매출의 약 20% 수준이다. 중국 판매가 주춤하면 애플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 위기감이 쿡을 중국으로 다시 불렀다. “공무원들은 아이폰 갖고 출근하지 마.” 중국 정부의 이 조치에 애플 주가는 출렁였다. 중국의 ‘애플 밀어내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잽 수준의 견제에도 애플은 카운터 펀치급 충격을 받는다. “애플은 과연 중국에서 안녕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애플 CEO 팀 쿡(왼쪽)이 지난 19일 베이징에서 딩쉐샹(丁薛祥) 중국 부총리와 만나고 있다. [신화통신] 삼성도 그랬다. 한때 중국 시장의 20% 이상을 차지했던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는 지금 존재감 제로(0)다. 시작은 2015년 터진 노트7 발화 사건이었다. “중국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집요하게 ‘갤럭시 밀어내기’에 나섰다”고 삼성 관계자들은 회고한다.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당시 삼성 갤럭시는 탈(脫)중국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2008년부터 시작한 베트남 공장 건설이 마무리되면서 이전 작업을 하나하나 진행 중이었다. 삼성은 2018년 톈진(天津)공장, 2019년 후이저우(惠州)공장 문을 닫았다. 현재 삼성 폰 절반 이상이 베트남에서 생산된다. 공장 뺄 때 시장도 모두 반납하고 나와야 했던 셈이다. 기술도 원인이다. 당시 오포·비보·샤오미 등 중국 스마트폰 기술 수준은 삼성을 능가할 만큼 올라와 있었다. ‘시장 줄게, 기술 다오’ 식의 중국 외자 유치 공식은 더는 통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2016년 ‘사드’라는 지정학 위기가 터졌고, 갤럭시는 퇴출 수순을 밟아야 했다. 지금 애플 상황은 삼성 데자뷔다. 애플은 공장 다각화를 추진 중이다. 삼성이 그랬듯, 베트남과 인도로 간다. 기술도 중국 기업을 압도하지 못한다. 최근 발표된 화웨이 5G폰은 7나노 칩을 국내에서 조달하는 등 국산화율 90%를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사드보다 더 큰 지정학적 리스크가 애플을 짓누르고 있다. 미·중 갈등이 어떻게 번지느냐에 따라 중국의 애플 불매 ‘지령’은 공직 사회를 벗어날 수 있다. 시장·공장 모두 중국 의존도가 높은 애플로서는 이래저래 중국 정부의 눈치를 봐야할 처지다. 팀 쿡의 아슬아슬한 ‘100조 줄타기’가 시작됐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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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실크로드 화물 열차’ 공허한 기적 소리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지금 이 시각, 중앙아시아의 어느 초원에는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화물열차가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을 터다. 중국과 유럽의 주요 도시를 잇는 ‘중국-유럽 화물 열차’다. 낙타가 오가던 실크로드를 열차가 달리고 있다. 올 상반기에만 8641회가 오갔다.(중국 국가철도국 발표) 하루 47회꼴이다. 이들이 실어 나른 컨테이너 숫자만도 93만6000개에 달했다. 지난해 대비 약 29% 늘어난 수준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실크로드’는 활기를 띠고 있다. 열차는 유럽 25개 나라, 216개 도시에 뻗친다. 덕택에 중국은 2020년 미국을 제치고 EU(유럽연합)의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유럽 화물열차야말로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정책의 최대 성과’라고 중국 언론은 치켜세운다. 중국 저장성(浙江省) 이우(義烏)에서 스페인 마드리드를 향해 출발하는 ‘중국-유럽 화물열차’. [신화뉴스] 일대일로 10주년이다. 베이징에서는 17일 ‘제3회 일대일로 정상 포럼’이 열린다. 중국의 올해 최고 외교 이벤트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주재한다. 그런데 유럽 대표가 없다. 2019년 제2회 포럼에는 정부 대표단을 파견했던 유럽 각국이 이번에는 발을 빼는 모습이다. G7(서방선진 7개국) 중 유일하게 일대일로에 남았던 이탈리아마저 탈퇴 수순을 밟는다. 열차는 활발하게 오가지만, 정치적 교류는 끊기는 이유가 뭘까. 일대일로에 숨겨진 중국의 의도를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은 미래 문제의 해법을 과거에서 찾곤 한다. 일대일로가 그렇다. 실크로드가 만들어진 건 한나라(漢·BC206~220) 때다. 그 길을 타고 동서양 문물이 가장 왕성하게 오간 건 당(唐·618~907) 시기였다. 한나라는 강국이었고, 당나라는 흥성했다(强漢盛唐). 세계 최강의 그 역사를 오늘 재연하겠다는 게 시진핑 주석이 주창하는 ‘중국몽(中國夢)’이다. 일대일로는 그 실현 방안이었던 셈이다. “중국몽은 글로벌 패권에 대한 도전이다. 일대일로는 이를 위한 ‘차이나 벨트’ 만들기에 불과하다.” 서방 국가의 생각이 그렇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결과적으로 저개발국가의 부채만 늘렸다는 문제도 여러 곳에서 제기됐다. 이번 3회 포럼이 2회 때보다 덜 주목받는 이유다. 10년 전 시 주석은 일대일로를 주창하면서 ‘허쭤공잉(合作共嬴)!’을 강조했다. ‘협력으로 상생하자’는 외침이다. 그러나 지금 일대일로는 “상생은 사라지고 중국의 경제 이익, 지정학적 노림수만 남았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 목소리에 중앙아시아 초원을 가르는 기적 소리마저 공허해지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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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마윈은 왜 아시안 게임에 초대받지 못했을까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 항저우(杭州)는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다. ‘항저우 미인’은 중국에서도 최고 미인으로 꼽힌다. 시내 서호(西湖)는 그 아름답기가 춘추시대 말 미인계로 오(吳)나라를 망하게 한 서시(西施)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동파가 즐겨 먹었다는 둥퍼로우(東坡肉),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룽징차(龍井茶)도 항저우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이런 항저우가 지금은 베이징, 선전(深圳) 등과 어깨를 견주는 ‘디지털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번 아시안 게임이 세계에 보여주려 했던 게 바로 ‘디지털 항저우’였다. 개막식에 여실히 드러났다. 디지털 성화 주자는 가상 현실을 통해 항저우 서호를 건너 주 경기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실제 인간과 디지털 인간이 함께 성화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최고 하이라이트였다. 항저우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서 디지털 성화봉송자가 점화하고 있다. [사진 아시안 게임 조직위] 선진 기술은 경기장 곳곳에서 목격됐다. 로봇 강아지는 육상 멀리 던지기에서 원반을 회수했고, 무인 자율주행차는 경기장을 분주히 오갔다. 2분이면 따끈하게 끓여 내주는 ‘라면 자판기’가 선수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경기 운영도 말끔했다는 평가다. 첨단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종합상황실 덕택이다. 관영 CCTV에 비친 종합상황실은 경기장의 이상 여부를 3D로 실시간 점검하고 있었다. 출입증 발급, 매달·순위 집계, 선수촌 관리, 식단 등 수많은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처리됐다. 알리바바 그룹사인 알리 클라우드의 클라우드 시스템이 한몫했다. 정보 전송 속도가 기존 5G보다 10배나 빠른 화웨이의 5.5G 통신 인프라가 있었기에 운영 가능했다는 게 주최 측 설명이다. ‘미인의 도시’ 항저우를 디지털 도시로 만든 주역은 마윈(馬云)이다. 그는 1995년 항저우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고, 1999년 지금의 알리바바를 설립했다. 2014년에는 회사를 당시 사상 최대 규모로 뉴욕 증시에 상장하기도 했다. 항저우가 중국 인터넷 혁명의 진원지이자 디지털 성지로 급부상한 계기다. ‘마윈이야말로 이번 항저우 아시안 게임을 주목할만한 이벤트로 만든 최고 공로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번쯤 나올 법도 했다. 성화 봉송은 아니더라도 관중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스쳐 비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마윈은 초대받지 못했다. ‘기피 인물’이라도 된 듯했다. 중국 미디어조차 ‘마윈은 왜 없지?’라고 묻는다. 항저우를 중국의 디지털 성지로 만든 최고의 민영기업가 마윈, 그의 부재는 오늘 중국을 읽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됐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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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월드 클래스’ 과학 논문을 가장 많이 발표하는 나라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미국의 과학 저널 네이처가 발표하는 ‘네이처 인덱스’는 국가별, 연구소(대학)별 연구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다. 세계 정상급 82개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분석해 집계한다. 지난해 이변이 일어났다. 중국이 미국을 따돌리고 네이처 인덱스 1위에 올랐던 것. 과학기술 분야 ‘월드 클래스’ 논문을 가장 많이 산출하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뜻이다. 생소한 얘기는 아니다. 중국은 2017년 국제 유력 학술지 논문 수에서 미국을 추월했다.(미국 국립과학재단 발표) 질적으로도 손색없다. 중국은 작년 세계 상위 1% 피인용 과학기술 논문에서 미국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일본과학기술정책연구소) 네이처 집계는 이를 확인했을 뿐이다. 중국 장쑤(江蘇)성 반도체 공장 R&D 센터의 청년 연구원. [신화통신] 결국 돈이다. 중국은 지난해 대략 5260억 달러를 연구 개발(R&D)에 쏟아부었다고 네이처는 분석한다. 미국(6560억 달러)을 따라잡을 기세다. 규모보다 그 쓰임에 더 눈길이 간다. 네이처는 미국 논문의 상당 부분이 ‘뜬구름’ 잡는 데 쏠리고 있지만, 중국 논문은 현실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통계가 말해준다. 2021년 세계 AI 논문의 40%가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미국 스탠퍼드대 ‘AI 인덱스 리포트’) 2위 미국은 10%에 그쳤다. 지금 중국 학계의 관심사는 우주개발, 반도체, 양자 컴퓨터 등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 분야 중국 논문이 급증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미·중 갈등은 양국 R&D 경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8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과학 스파이’를 몰아내겠다며 ‘차이나 이니셔티브’ 정책을 추진했다. 이 조치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던 유력 중국인 과학자들이 대거 귀국길에 올랐다. 2021년에만 2621명이 보따리를 쌌다. 중국 논문이 급증한 것은 이들 ‘물 건너온 거북이(海龜)’의 공이 크다. 중국은 창업자금, 주택, 자녀교육 등의 지원 프로그램을 짜 놓고 ‘바다거북이’를 유인한다. 중국은 청년 과학자에 주목한다. 지난달 과학기술 지원의 45% 이상을 청년 연구원(학자)에게 할당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청년 과학기술 인재 배양 및 활용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덕택에 ‘중국 R&D센터’에서는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다. 국가의 핵심 연구 사업에 참여하는 연구원의 80% 이상이 45세 이하 청년 과학자들이다.(중국 과기부 통계) 이들이 지금 달 탐사를 기획하고, AI를 연구하고, 차세대 반도체를 만들고 있다. R&D 예산 축소로 논란이 일고 있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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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화웨이 ‘메이트 60 프로’의 결정적 ‘하자’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화웨이 5G폰, 드디어 샀어. 그립감 좋고, 대만족~ 근데 하나 문제가 있어. 통화할 때 잡음이 들려. ‘야오야오링씨엔~’이라는 소리가 반복돼….” 화웨이 신제품 ‘메이트 60 프로’의 불량 신고다. 중국 인터넷에는 지금 이 같은 불만이 쏟아진다. “자동차 운전 중 전화를 받았는데 내 폰에서도 ‘야오야오링씨엔’ 잡음이 들려, 불량품인가 봐….” 심지어 X(옛 트위터)에서도 하자 불만이 분출한다. 화웨이폰에서 잡음이 들린다고? 물론 아니다. 언어유희다. 스마트폰 신제품을 설명하는 위청둥 화웨이 소비자 사업군 CEO. [화웨이 영상 캡처] 화웨이 이사회 멤버 중 한 명인 위청둥(余承東)은 소비자 사업군 CEO다. 핸드폰 신제품 발표회 때 꼭 그가 무대에 오른다. ‘화웨이의 스티브 잡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신제품 설명회에서 위청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바로 ‘야오야오링씨엔(遙遙領先)’이다. ‘화웨이 제품이 경쟁 제품을 멀리 따돌리고 앞서간다’라는 뜻이다. ‘메이트 60 프로’에서 ‘야오야오링씨엔’이 잡음처럼 들린다는 건 풍자다. ‘상대를 압도할 만한 품질’이라는 위청둥의 표현을 꼬아 만든 중국 특유의 말장난이다.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들이 ‘하자 놀이’에 동참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제재를 뚫고 이뤄낸 쾌거’를 그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메이트 60 프로’를 얘기할 때 7나노칩에만 관심을 둔다. 중국이 어떻게 미국 제재를 뚫고 기술을 확보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건 중국 자급률이 90%를 넘는다는 점이다. 그러고도 아이폰과 갤럭시를 능가하는 5G 다운로드 속도를 구현하고, 최고 수준의 사진·동영상·3D 인식기술을 갖췄다.(홍콩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실제 측정) 핸드폰에 관한 한 중국은 이제 완결된 자국 내 서플라이 체인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바로 ‘기술 블록(bloc)화’다. 그들만의 표준을 구축하고, 공정 기술을 완성하는 자립 구도다. 화웨이는 스마트폰 운영체제(OS)로 자체 개발한 ‘하모니(鴻蒙)’를 쓴다. 일찌감치 구글 안드로이드를 버렸다. ‘하모니’는 핸드폰뿐 아니라 자동차, 공장기계 등과 연계할 수 있도록 개발되고 있다. ‘메이트 60 프로’가 그렇듯 거대 ‘애국 시장’이 이 블록을 받쳐준다. 우리와 직결된 얘기다. 블록은 외부와의 단절과 배제의 다른 표현이다. 블록이 높아질수록 중국 시장은 우리와 단절될 수밖에 없다. 중간재로 얽힌 중국 기업과의 협력에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잡음 ‘야오야오링씨엔’은 그 흐름을 속삭이듯 말해준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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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두 개의 탄과 하나의 별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양탄일성(兩彈一星). 두 개의 탄(彈)과 하나의 별(星)이라는 뜻이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인공위성을 뜻하는 중국어다. 단어가 만들어진 건 1960년대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은 고립되어 있었다. 미국은 전쟁을 막 끝낸 적(敵)이었고, 소련은 이념분쟁으로 멀어져 있었다. 마오는 미·소 양국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했다. 핵무기가 필요했고, 그래서 시작한 게 핵 개발 프로젝트 ‘양탄일성’이었다. 성공했다. 1964년 원자폭탄, 1967년 수소폭탄, 그리고 1970년에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미국과 소련의 눈을 피해 뒷마당에서 이뤄낸 자력갱생의 결과물이다. 화웨이 5G폰 ‘메이트60 프로’에 쓰인 칩 ‘기린 9000’시리즈.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이 설계했다. [중앙포토] 또다시 양탄일성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일까. 지금 논란이 되는 ‘화웨이 5G폰 사태’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핵심은 어떻게 중국이 미국의 제재를 뚫고 7나노급 칩을 확보했느냐는 것이다. 미국의 눈을 피해 자력으로 말이다. 시진핑(習近平)의 중국은 마오의 국가 비밀주의를 답습한다. 중국은 올 3월 국가 조직을 개편하면서 당 산하에 중앙과학기술위원회를 신설했다. 과학기술에 관한 전략 기획과 정책 수립을 총괄하는 조직이다. 행정부에 있던 기존 국가과학기술영도소조는 폐지됐다. 당이 전면에 나서 미국과의 첨단기술 전쟁을 지휘하겠다는 뜻이다. 중앙과학기술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지난 7월 10일 회의가 한 번 열렸다는 발표만 있었을 뿐이다. 그 회의조차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누가 참석했는지, 어디서 열렸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어떤 기술을 개발하는지 알 수 없다. 군사 분야 전용 여부도 모른다. 그러니 제재를 가할 수도, 방해할 수도 없다. 멍하니 있다가 뒤통수 맞는 모양새다. 화웨이의 이번 ‘5G폰’ 사태가 바로 그 꼴이다. 중국은 ‘자력갱생의 승리’라고 흥분한다. 미국으로서는 에워싸고, 옥죄고 철통같이 막았는데도 뚫렸으니 난감하다. 시진핑은 과학기술 분야 ‘신형거국체제’를 선언했다. 국가가 나서 자원을 총동원하는 마오식 국가 지원 체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장의 수요’를 고려한다는 것뿐이다(‘신형’이란 말을 붙인 이유다). 핵심 기술로 선정한 AI, 양자컴퓨터, 반도체, 첨단장비 제조, 신소재 등이 모두 신형거국체제의 틀 안에서 개발된다. 그들의 뒷마당에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양탄일성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그 결과물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또 튀어나올지 모른다. 알 수 없으니 더 무섭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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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미국은 왜 보잉 격납고에서 기자회견을 했을까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미국 항공사 보잉의 창고에는 비행기 290여 대가 묶여 있다. 고객에 인도되지 않은 신제품이다. 이 중 절반에 가까운 140대가 중국 주문량이다. 중국은 2019년 ‘보잉747맥스’ 기종의 연속 추락 사건을 이유로 보잉기 인도를 전면 중단했다. 마침 불거진 미·중 무역 전쟁으로 인해 ‘재고 사태’는 더 길어지고 있다. 지난주 중국을 방문한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마무리 기자회견장으로 상하이의 보잉 격납고를 선택했다. ‘보잉기 재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다. 그러나 기대했던 보잉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양국 간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난달 30일 상하이의 보잉 격납고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 [AP=연합뉴스] 보잉은 급하다. 지난해 말 현재 보잉이 갖고있는 중국 주문량은 116대. 이에 반해 에어버스는 565대를 쥐고 있다. 에어버스는 지난 4월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140대 주문을 더 받아갔다. 보잉으로서는 2041년까지 약 8485대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는 매머드급 시장을 경쟁사에 다 내줘야 할 판이다. 여기가 끝일까? 아니다. 중국에도 약점은 있다. 중국의 꿈은 세계 항공기 시장을 ‘ABC 구도’로 재편하는 것이다. 에어버스(Airbus)와 보잉(Boeing), 그리고 자국 항공기 제작 회사인 코맥(Comac,中國商飛)이 시장을 나눠 먹는 구도다. 이를 위해 국가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게 바로 코맥의 민간항공기 C919 개발이다. 이미 시험 비행을 끝냈고, 실제 운항을 앞두고 있다. C919는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날지 못한다. 엔진 등 핵심 부품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맥은 C919 엔진을 샤프란이라는 프랑스 회사에서 들여온다. 미국 GE가 기술력을 쥐고 있는 회사다. 이밖에 비행통제시스템, 비행기록장치 등도 미국 기술에 기대야 한다. 보잉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경제위기에 직면한 중국은 수출 감소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미국 시장이 필요하다. 다 만든 비행기를 계속 보잉 창고에 넣어두고는 협상을 기대할 수 없다. “중국의 보잉기 인도는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러몬도 장관은 격납고 기자회견에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미국에도, 중국에도, 그리고 세계에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도 거듭 강조했다. 미·중 간 펼쳐질 신냉전이 ‘너 죽고 나 살기 식’ 미·소 냉전과는 다르게 진행될 것임을 시사한다. 항공기 업계의 미·중 역학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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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철없는 아내’의 자랑질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지난해 7월 일이다. 중국 SNS에 짧은 글이 하나 올랐다. 내용은 이랬다. “우리 남편 올해 29살이야. 그런데 월급 8만2500위안(약 1500만원) 받아. 우리 집 얼마나 부자인지 알겠지?” 자랑질이었다. 그는 소득증명 원본을 찍어 첨부했다. 인터넷이 발칵 뒤집혔다. “그 나이에는 월급 5000위안(약 90만원) 받기도 어려운 게 현실인데, 이게 말이 돼? 도대체 어느 회사, 누구야?” 네티즌들은 소득증명서에 있는 회사 직인을 찾았고, 그의 남편이 투자은행(IB)인 CICC(中金公司) 직원이라는 걸 밝혀냈다. 사정 당국의 강력한 반부패 조사, 임금 삭감 등으로 중국 금융 업계가 뒤숭숭하다. [중앙포토] 1995년 설립된 CICC는 ‘중국의 골드만삭스’로 통하는 최고 수준의 IB다. 차이나텔레콤·알리바바 등 굴지의 기업을 중국 국내외 증시에 상장시키기도 했다. 많이 버니 월급도 많다. 지난해 이 회사 직원의 평균 연봉은 약 115만 위안(약 2억원)에 달한다. 남편의 수입은 연봉으로 환산하면 99만 위안으로 회사 평균보다 적었다.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네티즌의 공격에 시장 논리는 금방 허물어졌다. “시진핑(習近平) 정치의 핵심 가치인 공동부유가 왜 금융업계에서는 통하지 않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CICC는 남편을 해고해야 했다. 임금도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증권사들도 따를 수밖에 없다. 주요 증권사들은 지난해 말 임금을 20~30% 스스로 깎았다. 그 많던 보너스도 사라지고 있다. 업계는 ‘자랑질’ 사건 이후 사정 당국의 금융 분야 반부패 조사가 부쩍 늘었다고 보지만, 사실은 더 큰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중국은 지난 3월 국가조직을 개편하면서 당(공산당) 산하에 중앙금융위원회를 신설했다. 행정부(국무원)가 갖고 있던 금융기관(회사) 통합 관리 기능을 당으로 이관했다. 당이 돈 흐름을 직접 챙기겠다는 뜻이다. 당은 근력을 과시한다. 올 상반기에만 고위 금융계 인사 87명이 불려가 부패 관련 조사를 받았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보도하고 있다. 핵심 중간 관리급 직원들은 베이징으로 가 1주일 동안 ‘사상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육생들은 시진핑 사상을 읽고 감상문을 써야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걸리면 옷 벗어야 한다.’ 업계는 잔뜩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국가의 힘은 점점 시장을 압도한다. IT 플랫폼·부동산 분야의 민영기업을 넘어 ‘자본주의 첨병’이라는 투자금융 회사도 그 힘에 빨려간다. ‘철없는 아내’의 자랑질은 그 흐름을 재촉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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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중국 부동산 시장의 ‘탐욕 카르텔’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건 1978년, 광둥(廣東)성 순더(順德)의 한 시골 청년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온다. 이름은 양궈창(楊國强). 그는 건설 현장을 돌며 벽돌을 쌓고, 타일을 붙였다. 농민공 양궈창이 자기 사업을 시작한 건 1992년. 덩샤오핑이 제2의 개혁개방을 선언했던 바로 그해다. 중국 최대 부동산 개발 회사 비구이위안(碧桂園)은 그렇게 탄생했다. 양궈창의 성공은 ‘345모델’로 상징된다. 공사 시작 3개월 만에 분양을 시작하고, 4개월 만에 분양을 끝내고, 그 돈으로 다시 5개월 안에 다른 땅을 잡아 개발에 나서는 방식이다. 최고의 사업 모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중국 부동산 시장은 부패와 투기의 카르텔 속에서 성장해 왔다. 상하이의 건설 현장. [중앙포토] ‘탐욕의 카르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방 정부는 세수 확보를 위해 가능한 한 많이 토지(사용권)를 팔아야 했다. 부패 관료들은 토지 가격을 깎아주고, 아파트를 챙겼다. 분양이 시작되면 투기꾼은 은행 돈으로 아파트 매집한다. 은행은 집값의 70%, 경우에 따라 90%까지 빌려주기도 한다. 그래도 걱정 없다. 집값은 어차피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시장은 냉각됐다. 2020년 시행된 ‘3개 레드라인(개발사 재무 건전성 지침)’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아파트 불패 신화는 무너졌다. 돈의 흐름이 끊기면서 ‘345모델’은 작동하지 않았고, 거꾸로 회사를 파국으로 내몰았다. 탐욕은 끝없다. 비구이위안 CEO인 양후이옌(楊惠姸, 양궈창의 둘째딸)은 지난 7월 말 계열사인 비구이위안서비스(碧桂園服務)의 보유 주식 20%를 궈창(國强)공익기금회에 기부한다. 시가 64억 위안, 우리 돈 1조원이 넘는 규모다. 궈창공익기금회는 양궈창 일가가 홍콩에서 운영하는 자선기금. 시장에서는 “양가(楊家)가 망해가는 회삿돈을 빼돌려 자금을 세탁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적당히 타협할 생각이 없다. “부패와 투기로부터 시장을 구할 테니 소비자들은 힘들어도 참아라”라는 메시지를 내보냈다. 공동부유의 기치는 더 높게 나부낀다. 비구이위안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2년 전 위기에 빠진 민영기업 헝다를 보자. 버틸 힘을 소진한 헝다는 보유 자산과 개발 프로젝트를 ‘빅 핸드(정부)’에 넘겨야 할 처지다. 국유화는 정해진 수순으로 보인다. “(시장이 위기에 처했으니) 국가가 나서고 민간은 물러나야 한다.” 시진핑의 중국은 국진민퇴(國進民退) 논리로 주요 민영기업을 하나둘 손에 넣고 있다. 비구이위안 사태를 추동하는 또 다른 로직이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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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돌아온 중국 유커 ‘인두세’의 기억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당시 기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달 초 A여행사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의 현지 여행사로부터 20명의 단체 여행객을 받았다. 4박 5일 서울~제주 일정이었다. 여행상품 가격은 900위안, 우리 돈 16만2000원이다. 하얼빈~서울 왕복 비행기 푯값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기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두세(人頭稅) 때문이다. 정상대로라면 A여행사는 하얼빈의 중국 여행사로부터 숙박·식사·교통 등의 관광 비용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거꾸로다. A사는 오히려 유커 1명당 300위안(약 5만4000원)을 중국 여행사에 줘야 했다. 돈을 주고 유커를 사 오는 셈이다. 그다음부터는 뻔한 일, 덤핑관광은 그렇게 시작된다.” 유커가 쏟아져 들어오던 2016년 가을 명동. 중국 관광객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중앙포토] 2016년 3월 16일자 본지 기사다. ‘중국 관광객 한 명당 5만원…. 현대판 인두세’라는 제목이 붙었다. 중국이 한국 단체 관광에 ‘금족령’을 내리기 전의 풍경이다. 당시 유커(遊客)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덤핑 관광이 기승을 부렸다. 가이드는 관광객을 새벽부터 쇼핑센터로 내몰았다. 쇼핑하지 않는 관광객의 짐은 내던져지기 일쑤였다.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라는 엉터리 가이드도 있었다. 구조적인 문제였다. 업계는 어떻게 하면 어설픈 중국 관광객 주머니를 털까만을 생각했다. 국내 여행사들은 중국 여행사 농간에 놀아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덤핑 판매에 나섰다. 시장을 관리해야 할 공무원들은 보고용 관광객 숫자에만 관심을 뒀다. ‘인두세’가 형성된 배경이다. 중국이 6년여 동안 묶었던 한국행 단체관광을 다시 허용키로 했다. 호텔·면세점·백화점·항공 등 관련 업계는 벌써 다가올 특수에 흥분한다. 그러나 우려가 앞선다. 덤핑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인두세’ 망령은 언제든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당국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전담 여행사의 허가 주기를 1년으로 단축하고, 덤핑 여행사 상시 퇴출 제도를 시행하려 했다. 가이드 제도도 손볼 요량이었다. 일부 여행사의 불법 환전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드로 유커가 사라지면서 유야무야 됐을 뿐이다. 당시 대책만이라도 살려야 한다. 덤핑 구조는 한국 관광산업도, 이미지도 실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반중(反中) 정서가 높다. 왜곡된 유커 관광은 내국인과의 마찰로 이어져 불필요한 감정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 ‘인두세’ 형성 구조를 해체하는 것, 그게 유커 맞이의 시작이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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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새장에 갇힌 ‘56789 경제’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상하이에서 IT 관련 회사를 운영하는 중국인 친구가 왔다. 코로나19로 못 만난 지 4년여 만이다. “요즘 비즈니스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100명 넘던 직원을 40명으로 줄였다”고 답했다.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단다. 친구는 “국유기업 쪽만 잘 나가…”라고 덧붙였다. 그의 표정에서 중국 민영기업의 현실을 읽게 된다. 수치가 보여준다. 상반기 중국 국유기업의 고정자산 투자는 8.1% 증가했다. 그런데 민영기업은 오히려 0.2% 줄었다. 민영기업이 새로운 일을 꾸미지 않는다는 얘기다. 중국에 ‘56789 경제’라는 말이 있다. 민영기업이 전체 세수의 50%, GDP의 60%, 혁신 기술의 70%, 도시 고용의 80%, 기업 수의 90% 이상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위축됐는데 경제가 잘 풀릴 리 없다. ‘창업도 당과 함께!’ 광둥성 선전(深圳)의 한 창업센터 로비에 설치된 구조물. [중앙포토] ‘새장 경제(鳥籠經濟)’라는 말도 있다. 새를 새장에 가둬 키우듯, 민영기업은 국가가 설정한 테두리 안에서만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기업관이다. 개혁개방은 새장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덕택에 민영기업은 더 자유롭게 활동했고, ‘56789’를 실현했다. 시진핑(習近平) 시대에는 달랐다. 새장은 오히려 촘촘하고, 좁아졌다. 2017년 이후 중국은 회사 내 당 조직을 빠짐없이 건설하도록 민영기업을 압박했다. 종업원들은 CEO(최고경영자)의 지시도 따라야 하고, 당 지부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2중 명령체계다. 그런가 하면 국가는 소액 지분을 사들여 이사회에 참석하고, 경영에 간섭한다. IT 기업에서 특히 심했다. “중국 금융에는 아예 시스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2020년 11월 말 알리바바 총수 마윈(馬云)은 중국 금융의 취약성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는 새가 새장을 찢고 날아가려는 몸짓으로 해석됐다. 후과는 가혹했다. 세계 최대 규모로 진행되던 마윈의 앤트그룹 상장은 무산됐다. 알리바바·텐센트 등 빅 테크 기업 규제가 표면화한 것도 그때부터다. IT기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일자리는 사라졌고, 청년실업률은 높아졌다. 중국 정부는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을 동등하게 대우하겠다는 등의 민간 부양책을 최근 발표했다. 새장을 넓혀주겠다는 거다. 상하이 친구는 “회복되더라도 이전의 활기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3~4년 이어진 규제로 IT 생태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혁신을 해도 결국 새장일 뿐”이라는 체제의 한계를 실감한 중국의 청년 기업가는 여전히 날개를 접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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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100년 자동차 왕국 깬 중국의 ‘863 계획’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조립 승용차 ‘T모델’을 출시한 건 1908년이다. 그 후 미국은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국 자리를 지켰다. 신화가 깨진 건 2009년. 그해 미국은 ‘100년 자동차 왕국’ 자리를 중국에 내줘야 했다. 지난해 중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약 2700만대. 1000만대를 만든 2위 미국을 큰 차이로 눌렀다. 그렇다고 중국을 자동차 ‘강국(强國)’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기술은 여전히 서구에 뒤진다. 그런데 또다시 반전이 일어났다. 전기차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은 자동차 대국이자 강국으로 등장하고 있다. 전기차 생산 대수, 기술 모두 미국을 압도한다. 전기차 호조 덕택에 중국은 올 1분기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상하이모터쇼에 나온 BYD의 소형 전기자 ‘시걸’. 중국은 올 1분기 세계 최대 자동차 수출국이 됐다. [사진 신화사] 돌아보면 20년 ‘레이스’였다. 중국이 국가 첨단기술 육성 프로그램인 ‘863 계획’에 전기자동차를 포함한 건 2001년이다. ‘가솔린 엔진은 미국에 뒤졌지만, 전기 엔진은 우리가 앞서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판을 바꿔 승부한다’라는 전략이다. ‘863 계획’은 1986년 3월에 발족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가가 전략 기술을 선정하고, 관련 기업이나 연구소(대학) 등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중국 전기차의 대표주자 BYD 역시 2012년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863 계획’은 2016년 기초과학 육성 프로그램인 ‘973 계획’ 등과 함께 ‘국가중점연구개발계획’으로 통합된다. 그러나 골격은 변하지 않았다. 국가가 나서 핵심 전략기술을 선정하고, 자원을 몰아주고, 기업과 연구소를 연결한다. 필요하면 외국 기업을 몰아내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도 한다. 2016년 한국 배터리 회사가 중국에서 퇴출됐던 이유다. 전기차뿐만 아니다. 우주항공·고속철도·5G통신·수퍼컴퓨터 등이 ‘863 플랫폼’을 타고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했다. 육성 대상 기술은 AI(인공지능)·신에너지·신재료·양자컴퓨터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위기 속에서도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전략 기술을 키운다. 헨리 포드의 손자인 빌 포드 현 포드자동차 회장은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늦었다. 그들(중국 전기차)은 곧 미국 땅에 올 것이다. 우리는 대응할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다.” 100년 아성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린다. ‘863 계획’은 살아있다. 지금은 반도체 기술 및 생태계 육성에 필사적이다. 그들은 여전히 반도체 분야 판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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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위험 구간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성장의 한계에 직면한 권위주의 나라 중국은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다. 너무 늦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볼 기회를 잡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마이클 베클리·할 브랜즈 지음)는 이렇게 말한다. 위기에 몰린 중국이 현상 타파를 위해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서슴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상반기 중국 경제 실적이 기대치에 못 미친 것으로 드러나면서 책 제목이 더 눈길을 끈다. 중국의 청년실업률이 높아지고 있다. 상하이 한 전철역의 광고판과 노숙자. [중앙포토] ‘피크(peak) 증세’는 뚜렷하다. 중국 경제의 성장 동력은 민영기업이었다. 민영경제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 GDP의 약 30%를 구성하는 부동산과 경제 혁신을 이끌어온 IT 분야다. 중국은 두 업종을 타격했다.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철학 기반인 공동부유를 해친 ‘혐의’다. 내수 회복이 늦고, 청년 실업이 급증하는 이유다. 또 다른 성장 엔진은 수출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서방 글로벌 공급망에 편승해 경제 규모를 키워왔다. 그러나 미·중 경제전쟁으로 공급망은 단절되고 있다. ‘시진핑의 중국’은 자력갱생을 강조한다. 심지어 반(反)간첩법으로 고립을 자초하기도 한다. 수출이 온전할 리 없다. 그러기에 중국 경제의 난맥상은 경기주기가 아닌 체제의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지적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것 봐, 피크가 맞잖아…” 책 저자들은 인구감소, 자원결핍 등의 요인을 더해 “중국의 30년 호시절은 끝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중국 경제는 어쨌든 5% 이상의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무분별한 성장보다 ‘고품질 발전’을 중시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말도 새겨들어야 한다. 정말 ‘피크’인지는 더 따져볼 일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저자의 대중국 정책 솔루션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불안전한 동맹이라도 규합하라” “핵심기술의 중국 독점을 깨라” “중국의 약점을 선별적으로 공격하라” 등등. 모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중국은 결코 물러설 뜻이 없다. 미국의 약한 부분을 찾아 거침없이 받아진다. 전문가들은 시진핑 집권이 최소 5년, 낮춰 잡아도 10년은 더 이어질 것으로 본다. 미·중 경쟁과 충돌 양상이 앞으로 10년 지속할 거라는 얘기다. 저자는 이 시기를 ‘위험 구간(Danger zone)’이라고 했다. 비행기가 위험구간을 지날 때 승객은 안전벨트를 바짝 조여 매야 한다. 우리의 처지가 그렇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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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시장 아닌 기업을 사라!”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CATL. 이젠 익숙해진 중국 회사 이름이다. 세계 최대 전기자동차 배터리 제조 업체다. 이 회사가 설립된 건 2011년이다. 2013년 2%에 불과했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5년 후인 2018년 20%, 다시 5년이 지난 지금은 36%를 넘어섰다. LG엔솔, SK온, 삼성SDI 등을 위에서 누르고 있다. CATL의 성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이 하나 있다. 바로 일본 전자·화학 부품 회사 TDK다. CATL 설립자 쩡위췬(曾毓群)은 TDK의 홍콩 자회사 직원이었다. 공학도 출신인 그는 기술 흐름에 민감했다. 입사 10년이 지난 1999년, 핸드폰 시장에 주목한 그는 동료 둘과 함께 배터리 회사를 창업한다. 그때 만든 회사가 ATL(Amperex Technology Limited)이었다. CATL 설립자이자 CEO인 쩡위췬(왼쪽)은 상하이교통대학 출신 공학도로 중국 배터리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사진 신화사] TDK가 자사 출신 엔지니어들이 설립한 ATL을 인수한 것은 2005년이다. 1억 달러에 지분 100%를 사들여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TDK의 기술력으로 무장한 ATL은 애플 아이폰과 삼성 갤럭시 등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등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쩡위췬은 배터리 시장의 무게중심이 핸드폰에서 전기자동차로 이동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 흐름을 타고 2011년 다시 만든 회사가 바로 CATL이다. TDK는 이때에도 쩡위췬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CATL의 지분 15%를 투자한 것. 회사 이름도 기존 ATL 앞에 ‘동시대’라는 뜻을 가진 ‘Contemporary’의 ‘C’를 붙여 지었다. 회사 투자설명서에는 두 회사 관계가 끝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업계는 배터리 업체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금지한 중국 정부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숨겨 놨을 뿐, TDK 지분은 여전히 CATL에 살아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TDK는 지금도 CATL로부터 기술 로열티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공동으로 배터리 합작사를 세우기도 했다. 윈윈이다. CATL은 TDK의 원천 기술을 이용하고, TDK는 CATL을 통해 중국 시장을 공략한다. 중·일 지정학 리스크도 피할 수 있다. TDK가 ATL·CATL이라는 ‘달리는 호랑이’의 등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이다. ‘작은 장사꾼이 시장을 사려 애쓸 때 큰 비즈니스맨은 기업을 산다’라는 비즈니스 격언을 실현하고 있다. 많은 우리 기업이 오늘도 중국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기술로 대륙 시장을 잡겠다는 각오다. ‘시장을 사기보다는 기업을 사라!’ TDK 사례는 중국 비즈니스의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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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중국의 ‘희토류 공정’ 30년, 그 뒷이야기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 30년 전, 1992년. 중국은 당시에도 ‘미국 공포’에 시달렸다. 미국은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1989년 6월)에 대한 무력 진압을 이유로 중국을 옥죄고 있었다. 서방의 봉쇄에 개혁개방 열기도 식어갔다. 그해 1월 덩샤오핑(鄧小平)이 갑자기 언론에 등장해 분위기를 바꾼다. 그는 남부 도시를 돌며 개혁개방을 외쳤다. 그중 이런 말이 나온다. ‘중동에 석유가 있다면, 중국에는 희토류가 있다(中東有石油, 中國有希土).’ 그게 신호였다. 중국의 크고 작은 기업들이 대거 희토류 생산에 뛰어들었다. #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2년. 중국 ‘희토류의 아버지’로 통하는 쉬광셴(徐光憲) 박사. 희토류 분리의 기술 자립을 이끌었다. [CCTV 캡처] 미국의 대표적인 희토류 광산인 마운틴 패스(Mountain Pass)가 문을 닫았다. 값싼 중국 제품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염 업종은 중국에 맡기고, 우리는 반도체와 같은 고부가 제품을 만들자’는 논리도 폐광의 이유였다. 당시 서방 희토류 회사의 선택은 두 가지. 파산하거나, 아니면 기술을 싸 들고 중국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중국에 희토류 분리·제련 기술이 쌓이기 시작했다. # 다시 10년이 지난 2012년.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대형 희토류 광산이 발견됐다. 서방 주요 국가들이 달려들었다. 특히 2년 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사건 때 중국의 희토류 공세에 무릎을 꿇었던 일본이 채굴권 확보에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모잠비크의 선택은 중국이었다. 2000년대 초부터 아프리카에 공을 들여온 중국 외교의 승리였다. 중국은 중남미·중앙아시아·호주 등의 희토류 광산에도 손을 뻗쳤다. 심지어 마운틴 패스의 지분 7.7%를 사들이기도 했다. 중국이 글로벌 희토류 공급 사슬을 지배하는 이유다. # 또다시 10년이 지난 2022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월 22일 희토류 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희토류 없이는 미국의 미래도 없다.” 입장은 바뀌었지만, 30년 전 덩샤오핑의 발언과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마운틴 패스의 제련기술 개발에 거금의 예산을 투입하는 등 광산 살리기에 나섰다. 그러나 낙관적이지 않다. 이 광산은 지금도 채굴한 광물 대부분을 중국으로 보내 처리해야 한다. 합금 순도를 높이는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미사일, 레이더, 스텔스 전투기 등에 쓰이는 중(重) 희토류는 채굴 및 처리 과정의 거의 100%를 중국이 독점하다시피 한다. 희토류는 아니지만 중요 광물인 갈륨과 게르마늄에 대한 수출 통제가 ‘맛보기’일 뿐이라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죽은 덩샤오핑이 살아있는 바이든을 잡는 꼴이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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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피크 차이나? 중국은 아직 안 끝났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그동안 중국 경제의 ‘폭망’을 점친 전문가는 많았다. ‘중국의 몰락’ ‘중국발 세계 경제 위기’ 등 외국책이 번역돼 소개되기도 했다. 모두 어긋났다. 중국 경제는 여러 곡절 속에서도 성장을 지속해 세계 2위 반열에 올랐다. 이번엔 ‘피크 차이나(Peak China)’이다. 중국 경제가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주장이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5월 보도한 후 국내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그러면 그렇지, 중국 시대는 이제 끝났어~’라는 유튜버의 말에 클릭이 쏟아진다. 이번에는 맞을까. 인구감소도 중국의 성장 한계를 예견하는 ‘피크 차이나’ 주장의 한 요인이다. 광둥성 광저우의 거리. 김상선 기자 충분히 납득이 가는 논리다. 투자에 의존한 중국의 국가 주도형 발전은 분명 한계에 직면했다. 급증한 지방 정부 부채, 부동산 과잉 투자, 인터넷 규제 강화, 여기에 인구감소까지 겹쳐 성장 동력은 소실되고 있다. ‘공동부유’라는 정치 논리에 밀려 민간의 역동성은 떨어지고 있다. 20%를 웃도는 청년실업은 그 대표적인 징후로 꼽힌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든다. ‘시진핑(習近平)은 왜 안 하지?’라는 것이다. 예전 경우라면 중국 정부는 경제를 성장세로 되돌리기 위해 다시 돈을 풀고, 부동산 규제를 해제해야 했다. 인터넷 플랫폼 업체에 대한 족쇄도 풀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 한다. 오히려 ‘인위적인 부양은 없다’라는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체질 강화를 말한다. 성장이 곧 왜곡을 잉태하는 악순환을 끊어 지속가능한 성장 구조를 짜겠다는 취지다. 그들은 이를 ‘고품질 발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공동부유 논리에서 후퇴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성장의 한계인지, 아니면 고품질 발전을 위한 과정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동안의 ‘왜곡된 성장’ 속에서도 분명 ‘혁신’은 존재했다는 점이다. 2010년 들어 본격화한 인터넷 혁명은 지금 AI(인공지능), 전기 자동차, 신소재 등 차세대 산업으로 확장 중이다. 많은 분야에서 한국을 추월했거나, 위협하고 있다. 중국 경제는 여전히 꿈틀댄다. 신소재, 첨단 장비제조, 신에너지 자동차 등을 ‘8대 전략 신흥 산업’으로 지정하고 국가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 과학기술 자원을 총동원하는 ‘신형 거국체제’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분야도 그 대상 중 하나다. ‘중국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라는 단편적 시각으로는 이 같은 움직임을 간파할 수 없다. 그 흐름을 놓치면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다. ‘피크 차이나’ 논리에 매몰되지 말아야 할 이유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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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한국 브랜드 실종 사건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중국 시장에 한국 브랜드가 없다. 자동차, 핸드폰, TV, 심지어 화장품도 이젠 찾기 힘들다. 거의 실종 수준이다. ‘어쩌다 이리됐지?’ 중견 화장품 회사의 K사장은 사내 중국 팀장을 불러 시장 상황을 묻는다. 팀장의 답은 이랬다. “중국 젊은 소비자들의 ‘애국 소비’ 성향으로 외국 브랜드 입지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마땅한 타개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맞는 얘기인가? 핑계는 아닌가? 글로벌 브랜드 나이키가 중국에서 애국 소비의 늪에 빠졌다. 베이징 중심부에 걸린 나이키 광고판. [사진 셔터스톡] 맞다. 수퍼급 글로벌 브랜드라도 ‘국뽕(애국주의)’의 공격 타깃이 되면 하루아침에 중국에서 쫓겨날 수 있다. 미·중 패권 경쟁에 애국 소비는 더 기승을 부린다. 스포츠업계의 최고 브랜드인 나이키도 당하는 판이다. 이 회사는 2021년 초 중국의 위구르족 강제 노동을 이유로 신장(新疆)산 면화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타도’ 대상이 됐다. 결국 지난해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중국 브랜드 안타(ANTA)에 내줘야 했다. 핑계도 된다. 컨설팅 회사 맥킨지는 “중국의 젊은 소비자들은 외국 브랜드에 쉽게 현혹되지 않는다. 퀄리티와 가격이 더 중요할 뿐이다”라고 분석한다. 애국 소비보다 중국 기업의 제품 혁신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많은 미국 유튜버조차 ‘안타의 농구화 품질이 나이키에 못지않다’고 인정한다. 억울하다. 스마트폰 갤럭시는 현재 세계 시장 점유율 22%로 1위다. 그런데 유독 중국에서는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현대차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런데도 ‘내 탓이오!’, 자책만 하라고?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게 국가의 개입이다. 나이키가 그랬다. 이 회사는 사건 후 중국 관영 언론의 불매 운동 논조에 시달렸다. 외교부 대변인이 나서 ‘나이키는 중국에서 한 푼도 벌지 못할 것’이라며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갤럭시와 현대차가 사드 사태 와중에 급격히 시장을 잃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젊은이들의 애국 소비에는 이같이 중국 기업의 품질 혁신과 당국의 공공연한 개입이 도사리고 있다. 소비자와 기업, 정부가 뭉쳐 거슬리는 외국 브랜드를 몰아내는 꼴이다. 한국 제품 실종 사건의 배경이기도 하다. 화장품 회사 중국 팀장이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되찾아야 할까. 방법은 하나다. 중국 제품을 압도할 수 있도록 품질 혁신을 이루고, 안정적인 한-중 관계 관리로 외풍을 막아야 한다. 전자는 기업의 몫이요, 후자는 정부가 할 일이다. 그게 안 된다면 ‘한국 브랜드 실종’은 해결되지 않는 미제 사건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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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중국 전랑외교의 배경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 세계 곳곳에서 중국의 ‘전랑(戰狼) 외교’가 목격된다. 중국 외교관들의 거친 말이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전랑 외교의 형성 배경은 무엇일까. 1840년 아편전쟁은 터졌고, 중화제국은 서방 함포에 깨졌다. 심지어 일본에도 패했다. 지식인들은 반성했다. “우리도 봉건의 틀을 벗고 ‘덕선생(德先生, democracy)’ ‘새선생(賽先生, science)’을 받아들여야 한다.” 중국에서도 이성과 과학,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계몽주의가 싹트는 듯했다. ‘전랑외교’라는 용어의 출처가 된 중국 영화 ‘전랑’ 포스터. 오래가지 못했다. 계몽 흐름은 “서구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치욕을 갚아야 한다”는 정치 운동에 쉽게 매몰됐다. 중국의 유명 철학자 리쩌호우(李澤厚)는 “망해가는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구망(救亡) 인식이 계몽 사조를 압도한 것”이라고 당시 지식계 흐름을 해석한다. 쑨원(孫文)·장제스(蔣介石)·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鄧小平)…. 그들의 정치 철학은 달랐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 ‘구망’이었다. 쑨원의 삼민주의, 마오의 마르크스주의, 덩샤오핑의 시장경제 등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마오의 서재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아닌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이 꽂혀 있었던 이유다. 1989년 덩샤오핑이 천안문 학생 민주화 시위를 무력 진압한 것 역시 구망이 계몽을 압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시진핑(習近平) 시대 들어 구망은 ‘중국몽(中國夢)’이라는 정치 언어로 표출된다. ‘이제 그 시기가 도래했다. 중화의 영광을 회복하자!’ 시 주석이 내건 중국몽은 결국 ‘민족 부흥의 꿈’이었다. 아편전쟁 때 서구 함포에 당한 수모를 갚아줄 시기가 됐다는 선언이다. 그간 이룬 경제 성과가 힘이다. 세계 제2위의 경제력이 그들 내부에 잠재해 있던 구망 인식을 흔들어 깨웠다. ‘부흥의 열망’은 중국을 관통한다. 시 주석이 주창한 일대일로(一帶一路)에는 고대 실크로드를 되살려 한(漢)·당(唐)시기의 강성함을 회복하겠다는 열망이 담겼다. 학생들은 애국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고, 시장에서는 애국 소비가 대세다. 사회 곳곳에 민족주의, 애국주의가 팽배하다. 그 열망이 외교 일선으로 확장돼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전랑 외교다. 중국 외교관들 역시 지난 150여년 지식계에 면면히 이어온 구망 인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부흥의 열망을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거칠게 반응한다. 그러기에 전랑 외교는 계몽을 압도한 구망의 변주곡처럼 들린다. 한우덕 차이나랩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