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캉유웨이 “혈통 잇게 돼 기뻐” 젖먹이 쿵더청에 축하전문

    캉유웨이 “혈통 잇게 돼 기뻐” 젖먹이 쿵더청에 축하전문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800·끝〉   영화 ‘공자’에서 공자 역을 열연한 저우룬파(周潤發)에게 공부 생활을 설명하는 쿵더청의 누나 쿵더우. [사진 김명호] 청나라 말기 중국의 혁명파들은 무능했다. 열혈청년들 사지(死地)로 떠미는 재능만 탁월했지 통치능력은 없었다. 군을 장악한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공화제 실시를 조건으로 혁명의 열매를 갖다 바쳤다.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는 사회 기풍이 청 말보다 더 손상된 원인 찾기에 골몰했다. 혁명으로 인한 봉건제의 붕궤와 예교(禮敎)의 폐기가 이유라고 단정했다. 공자학설을 통해 국면만회와 질서안정을 모색했다. 최고통치자가 공자 존중과 복고(復古)를 주장하자 공교회(孔敎會), 공도회(孔道會), 세심사(洗心社) 등 존공(尊孔)단체가 성립과 동시에 교육부의 비준을 받았다. 위안은 베이징과 지방에 ‘만세의 사표’ 공자의 제사(祀孔典禮)를 지내라고 명령했다. “지방은 성장이 직접 치제(致祭)해라. 베이징은 대총통이 직접 제를 올린다.” 특별교육지침도 내렸다. “전통을 존중하고 파괴를 금하는 것이 애국이다. 전국의 중학교는 전통을 존중하는 영국을 본받아라. 영어 교육에 힘쓰고 학생들에게 맹자(孟子)를 하루도 빠짐없이 낭송토록 해라. 고등학교는 논어(論語) 교육 철저히 해서 사악한 언사가 폭력임을 학생들이 자각 하도록 해라.” 위안스카이의 복고는 개국황제들이 하늘에 고하던 제천의식으로 극에 달했다.   타오원푸 “내 아들을 네가 봐서 뭐 하나”   1936년 12월 공부에서 열린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의 결혼식. 참석하기로 했던 장제스는 시안(西安)에서 장쉐량(張學良)에게 감금당하는 바람에 불참했다. [사진 김명호]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해외에서 군사교육 받은 젊은 군사가들이 위안스카이 타도 깃발을 날렸다. 일본과 미국 유학생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복고에 대한 반발로 신문화운동을 일으켰다. 과학과 민주와 알기 쉬운 백화문(白話文) 사용을 제창하고 독재타도와 미신타파를 노래했다. 사회주의 전파의 토대도 저절로 마련됐다. 수천 년간 내려온 전통은 모두 파괴 대상이었다. 2000여년간 의식을 강요당한 공자사상이 도마 위에 올랐다. ‘공자를 구도덕의 상징으로 전락시킨 공가점(孔家店)을 타도하고 공부자(孔夫子)를 구출하자’는 구호가 전국의 대도시를 수놓았다.   신문화운동은 청년들의 각성제였다. 1919년 5월 4일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그칠 줄 모르는 신문화운동과 ‘공가점 타도’ 외치는 학생시위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던 연성공(衍聖公) 쿵링이(孔令貽·공령이)는 불안했다. 1919년 11월, 딸만 둘 낳은 측실 왕바오추이(王寶翠·왕보취)가 세 번째 임신 중 베이징의 연성공 관저에서 발병 20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을 앞두고 대필시킨 유서를 대총통 쉬스창(徐世昌·서세창)에게 보냈다. “엎드려 울며 유서를 구술합니다. 우둔하고 어리석은 저는 청 왕조 광서(光緖) 2년에 연성공 작위를 세습했습니다. 민국 성립 후에도 위안 대총통은 저를 연성공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지난 8년간 역대 총통들께 받은 보살핌에 보답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장인의 별세를 조문하러 베이징에 왔습니다. 갑자기 등창이 발생해 치료를 받았으나 일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50이 되도록 아들이 없어 노심초사 하던 중 처첩 왕씨가 임신을 하여 현재 5개월 가량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면 전례대로 공부(孔府)와 공묘(孔廟)의 일이 순조롭게 되도록 하여 주시면 불초소생은 저승에서 감사할 것이며 일족 모두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공부시절의 쿵더청과 두 명의 누나. 오른쪽은 남매의 영어교사. 총통 쉬스창이 내무부를 통해 산둥(山東)성 성장에게 지시했다. “연성공 쿵링이의 측실 왕씨의 임신 여부를 확인해서 보고해라.” 중국 의사와 독일 의사, 저명한 산파들이 왕씨의 임신이 5개월이 지났다는 확인서를 작성했다. 다음 문제는 유복자의 성별이었다. 딸이 태어나면 정실 타오원푸(陶文譜·도문보)와 왕씨 소생 두 딸은 공부를 떠나고 동등한 자격 갖춘 사람이 연성공을 계승하는 것이 상례였다. 타오씨는 온종일 향불 피워 놓고 절하며 매일 두들겨 패기만 하던 왕씨가 아들 낳기만을 빌었다. 중국은 교묘한 수법으로 영아를 바꿔치기하는 흉악한 전통이 있었다. 왕씨의 해산이 임박하자 정부는 군대를 파견했다. 산방을 포위하고 도처에 초소를 설치했다. 장군 한 명이 공부에 진을 치고 산둥성 성장과 안자(顔子), 증자(曾子), 맹자의 종손과 공부의 12촌 내 노부인들이 몰려와 눈에 불을 켰다. 난산 끝에 아들이 태어나자 공부의 하인 700여명이 횃불 들고 거리로 나갔다. 징을 치며 성인 후예의 탄생을 알렸다. 정부도 축포 13발로 유아 쿵더청(孔德成·공덕성)에게 경의를 표했다.   쿵더청, 공부 비극 알고 대륙땅 안 밟아   1935년 7월 8일 쿵더청은 민국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연성공 대신 공자 제사만 모시는 세습특임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特奉祀官)에 취임했다. 공부에 축하전문이 줄을 이었다. 대유(大儒)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가 젖먹이에게 보낸 전문을 소개한다. “소인은 아버님의 서거에 슬픔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귀한 아들이 태어나 성인의 계보와 귀한 혈통 잇게 되었다는 소식에 극심한 슬픔 뒤에 이어지는 기쁜 감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즐겁고 건강한 유년기 보내시며 시와 의례에 많은 공부 쌓으시어 조상들의 영광을 빛내게 하소서. 소인이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공부를 찾아온 캉유웨이는 강보에 쌓인 연성공 쿵링이의 유복자 쿵더청을 품에 안고 통곡과 웃음을 반복했다. 쿵더청은 생후 100일이 되는 날 31대 연성공을 습작했다.   정실 타오원푸는 지독한 여자였다. 쿵더청이 태어나자마자 제 방으로 안고 갔다. 3일 후 탕약 들고 산모 왕바오추이의 방으로 갔다. “잠잘 때 부들부들 떠는 것 보니 내 맘이 편치 않다. 이 약을 먹어라.” 옆에 있던 공씨 일족의 노부인이 훗날 쿵더청의 작은 누나 쿵더우(孔德懋·공덕무)에게 구술을 남겼다. “왕씨는 침대 위에 꿇어앉아 아픈 곳이 없으니 약 먹을 필요가 없다고 애원했다. 타오씨는 말이 없었다. 그냥 마시라고 압박했다. 왕씨가 살아봤자 좋은 날도 없을 터이니 약 먹는 것은 두렵지 않다며 아들만 한번 보게 해 달라고 애걸했다. 타오씨는 내 아들을 네가 봐서 뭐 하느냐며 고개를 돌렸다.” 타오원푸는 한밤중에 왕바오추이의 관을 하인들 시켜 공림(孔林) 구석에 대충 묻어버렸다. 작은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타오씨는 쿵더청을 지극정성으로 키웠다. 국·공전쟁 말기 장제스 부자와 함께 대만으로 나온 쿵더청은 공부의 비극을 알고 있었다. 다시는 대륙땅을 밟지 않았다.     ■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 중앙SUNDAY의 최장기 인기연재물인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가 800회를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2007년 3월 18일 중앙SUNDAY 창간호부터 시작해 16년간 중국 정치인, 학자, 예술가, 문인 등 인물 스토리를 중심으로 파란과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개성 있는 문체로 펼쳐 왔습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2023.12.23 00:01

  • 공자 77대 직계종손 쿵더청의 생모, 포악한 학대 시달려

    공자 77대 직계종손 쿵더청의 생모, 포악한 학대 시달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9〉   공자의 76대 종손, 30대 연성공 쿵링이의 중년시절 모습. 쿵링이에게는 타오원푸 등 4명의 부인이 있었다. [사진 김명호] 2008년 10월 전 고시원장(考試院長) 쿵더청(孔德成·공덕성)이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자(孔子)의 77대 직계종손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31대 ‘연성공(衍聖公)’과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을 역임한 인물의 죽음이었다. 2000여년간 이어온 ‘천하제일 가문’의 살벌하고 비극적인 과거사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의 출생, 독살당한 생모와 누님의 비극, 3공(三孔)이라 일컫던 공부(孔府), 공묘(孔廟), 공림(孔林)의 황당한 규모, 전국에 산재했던 엄청난 토지는 화제가 되고도 남았다.   얘기는 한(漢)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35년 한무제가 “백가를 몰아내고 유술(儒術)만 받들자”는 대유(大儒)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유학(儒學)이 정통 지위를 확보하자 세상 떠난 공자가 344년 만에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유는 복잡하지 않았다. 공자사상이 스스로 성군이라 자임하는 전제군주의 비위에 딱 맞았다. 공자 추앙 운동이 벌어졌다. 역대 제왕들이 각종 시호를 안겨 줬다. 당(唐)대에는 문(文)이 성했다. ‘문성왕(文宣王)’이라는 시호와 함께 성인(聖人)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몽골족 통치시절인 원(元)대에는 문선왕 앞에 ‘지성(至聖)’ 두 자를 첨가했다. 원을 몰아내고 한족 정권을 부활시킨 명(明) 왕조는 ‘대성지성선사’를 더했다. 청(淸) 왕조는 한술 더 떴다. 공자의 5대조까지 왕으로 추서했다.   30대 연성공 쿵링이는 부인 네 명   공부의 마지막 실력자 타오원푸. 서태후는 자신과 용모가 비슷한 타오를 총애했다. [사진 김명호] 제왕들의 공자 후손 지원은 송(宋) 인종(仁宗)때 극에 달했다. 46대 손 공종원(孔宗願)을 초대 연성공에 봉하며 세습을 인정했다. 명·청(明·淸) 양 대에 1품관으로 승격한 연성공은 문신의 으뜸이었다. 황실 어도(御道)에서 황제와 나란히 걷고, 자금성(紫禁城) 안에서 말을 탈 수 있었다. 황제와 함께 국학(國學)의 학무를 시찰하고, 베이징에 올 때는 공묘에 배향된 제현(諸賢)과 맹자, 안자, 증자, 자사의 후예, 세습관직인 5경박사(五經博士)의 자손 120여명이 수행했다.   연성공의 가정집인 공부는 나날이 확장됐다. 대문은 황재 11명의 19차례에 걸친 순행(巡幸)과 공자의 제사 때만 13발의 예포와 함께 열렸다. 면적은 3공 중 가장 좁았다. 쿵더청이 태어난 1920년 2월 무렵 4만4000평 정도였다. 대성전(大聖殿)이 있는 공묘는 6만6000평의 면적에 비석이 숲을 이루고 고목이 하늘을 찔렀다. 공자와 후손들의 묘지인 공림은 중국 최대 규모의 공원묘지였다. 총면적이 66만 평에 달했다. 공묘와 공림의 관리권은 공부에 있었다.   동년시절의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 그는 공자의 77대 직계종손이다. [사진 김명호] 연성공은 베이징에도 황제가 하사한 관저를 가지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없었지만 ‘베이징 주재 성공부(聖孔府)’라고 불렀다. 규모는 왕부(王府)와 비슷했다. 공자 제사에 쓰라고 하사받은 농지도 엄청났다. 청나라가 번성했을 무렵 전국에 약 2억 평, 소작인만 60만 명을 웃돌았다. 황제가 준 땅은 매매가 불가능했다. 매매가 가능한 사전(私田)은 200만 평 정도였다. 공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면세와 감세 혜택을 받은 토지 8000만 평(여의도의 약 130배 정도)도 연성공의 사유지나 다름없었다.   공부는 독단적인 규정이 많았다. 부녀자 속박이 엄중했다. 여자는 사묘(寺廟)에 참배할 수 없고 일부종사와 시궁창 같은 남편도 하늘처럼 받드는 것이 기본이었다. 수많은 비극을 연출했다. 공씨 집안으로 시집오게 된 공자의 수제자 집안 딸이 있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숨소리 한번 나눠 본 적 없는 청년이 세상을 떠나자 17살짜리 여자애도 남편 따라 가겠다며 목을 맸다. 약혼 후 남자가 죽자 위패를 품에 안은 채 꽃가마 타고 신랑 집으로 간 신부도 있었다. 하늘과 땅에 절하고 신방에 들어가 신부복 벗고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죽을 때까지 수절하며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공림은 이런 괴짜들이 생길 때 마다 정절을 기리는 패방(牌坊)을 세웠다.   결혼 전 청년 숨지자 예비신부 목매   공부의 구석에 있던 쿵더청의 생모 왕바오추이의 거처. 희미한 사진이 아직도 걸려 있다. [사진 김명호]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의 생모도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쿵더청의 생부인 30대 연성공 쿵링이(孔令貽·공령이)에게는 4명의 부인이 있었다. 전처 쑨(孫)씨는 병사하고 첩 펑(豊)씨는 애를 낳지 못했다. 다시 들인 후처 타오원푸(陶文譜·도문보)는 아들을 낳았으나 세 살 때 죽었다. 쿵링이는 첩 왕바오추이(王寶翠·왕보취)에게 기대를 걸었다. 빈농의 딸이었던 바오추이는 어릴 때 타오 집안에 하녀로 팔려 갔다. 열일곱 살 때 원푸의 남동생 두 명이 바오추이를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 모친이 친정에 와 있던 원푸에게 바오추이를 공부에 데려가라고 권했다. 원푸는 남편 쿵링이가 바오추이를 첩으로 삼자 원푸의 포악한 학대가 시작됐다. 눈만 뜨면 바오추이를 발가벗겨 놓고 가죽 채찍으로 때렸다. 임신기간에도 채찍질은 그치지 않았다. 딸 두 명이 태어났다.   신문화 운동으로 공자 타도 운동이 맹위를 떨칠 때였다. 연성공을 세습할 아들이 없는 쿵링이는 불안했다. 공자의 후예들 간에 암투가 시작됐다. 바오추이의 태중에 아들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계속〉

    2023.12.16 00:01

  • 계엄령시대 대만 ‘기재’ 리아오, 언론탄압 맹공 곡절 겪어

    계엄령시대 대만 ‘기재’ 리아오, 언론탄압 맹공 곡절 겪어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8〉   하얼빈을 뒤로한 후 베이징에서 한자리에 모인 리아오(앞줄 왼쪽 모친 무릎) 일가. [사진 김명호] 2018년 3월 기재(奇才) 리아오(李敖·이오)가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만은 물론 대륙과 홍콩, 화교사회의 매체들이 요란을 떨었다. 원로 언론인의 추도사 비슷한 글 일부를 소개한다. “고교 시절, 전통 복장에 파카 만년필 꼽은 리아오라는 단정한 대학생이 학계와 사상계의 거목 후스(胡適·호적)와 치고받은 논쟁 내용 읽고 충격이 컸다. 꿈속에 그리던 미래의 영웅이 분명하다고 의심치 않았다.”   이 미래 영웅의 삶은 곡절투성이였다. 위대한 잡지 ‘문성(文星)’을 주관하며 소송이 그치지 않았다. 법정 출석만도 700회 이상을 기록했다. 강호(江湖)에서 퇴출당한 후에도 분주했다. 거리에서 국수 팔고, 전기수리공 하다 비 오는 날 전봇대에서 떨어지고, 사상범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출옥 후 강호에 복귀했다가 또 감옥에 갔다. 친구도 많고, 적도 많고, 여자 친구는 더 많았다. 동거한 여인도 7명이 넘고, 오밤중에 잠옷 바람으로 들이닥친 중화권 최고의 여배우 후인멍(胡茵夢·호인몽)과 결혼 100일 만에 이혼하고, 격조 넘치는 언사로 당권자(黨權者)들과 투쟁하고, 거대한 언론기관을 압도하고도 남을 원고를 생산했다. 소위 명기자라 껍죽대던 사람들을 속으로 주눅 들게 만든, 대만 사회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만약 리아오가 없었다면 계엄령시대의 대만은 너무 적막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동·서양 고전 두루 섭렵   문성서점과 잡지 문성을 창간한 샤오멍넝과 부친 샤오통즈(蕭同玆). [사진 김명호] 리아오는 1935년 하얼빈(哈爾賓)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마적, 경찰, 시골 훈장, 이발사, 목욕탕 주인 등 직업이 다양했다. 부친은 베이징대학을 졸업한 국어교사였다. 1936년 가을 돌쟁이 아들 품에 안고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부친 덕에 베이징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리는 국·공전쟁 막바지였던 1948년 가을 명문 ‘제4중학’에 수석합격했지만 전란을 피해 상하이의 중학으로 전학했다. 상하이의 중학 생활도 짧았다. 4개월 만에 상하이를 떠나 대만에 뿌리를 내렸다.   대만대학 사학과 재학시절의 리아오. [사진 김명호] 리아오는 소학(초등학교) 시절부터 독서가 몸에 뱄다. 사탕보다 책을 좋아했다. 용돈만 생기면 서점으로 갔다. 소학 6학년 때 “나 혼자만의 도서관을 갖고 싶다”고 해 교사들을 놀라게 했다. 교장이 최근에 읽은 책을 물었다. 대답이 거침없었다. “현재 ‘손중산전서(孫中山全書)’와 ‘나의 투쟁’을 읽는 중이다. 잡지는 ‘관찰(觀察)’이 좋고 신문은 ‘신화일보(新華日報)’가 볼 만하니 선생님도 꼭 보도록 해라.” 1949년 4월 대륙을 떠날 때 14세 소년 리아오는 자신의 장서 500여권을 한 권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짐을 줄이라는 가족들의 불만은 귀에 담지도 않았다.   대만 중부도시 타이중에서 중학 생활 시작한 리아오는 살맛이 났다. 도서관에 없는 책이 없었다. 사서를 자청하며 4년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잡지에 ‘존 듀이의 교육사상’을 가명으로 기고했다. 듀이가 제창한 ‘진보적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국민당의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제도에 반감 드러낸 글로 교육계가 발칵 뒤집혔다. 교육부는 기겁했다. 대만 전역의 교사를 상대로 필자 색출에 나섰다. 성공할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흥해도 리아오, 망해도 리아오”   결혼증서 받고 즐거워하는 리아오와 후인멍. [사진 김명호] 고등학교 생활에 염증을 느낀 리아오는 3학년이 되자 결단을 내렸다. 개학 10일 만에 학교를 때려치웠다. 융통성 많은 교장이 한숨 내쉬며 리아오를 격려했다. “훗날, 중국이 배출한 인재를 퇴학처리했다는 오명을 남기고 싶지 않다. 1년간 하고 싶은 일 하다 대학에 진학해라.” 1년 후 리아오는 대만대학 법학과에 합격했다. 다녀보니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술자 양성소와 별 차이 없었다. 학생이건 교수건 실망이 컸다. 걷어치우고 이듬해 가을 중문과에 응시해 합격했다. 다녀 보니 특이한 학과였다. 교수들은 대륙 명문대학 교수 시절과 달랐다. 애주가는 술꾼으로, 미식가는 탐식가로 변해 있었다. 학생들도 여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조교 3명은 빼어난 미인이었다. 담배 물면 교수란 사람이 불 붙여 주고 가관이었다. 미모가 학생 선발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니기 싫었다. 대만대학은 전과제도가 없었다. 자퇴하고 사학과에 들어갔다. 사학과는 체질에 맞았다. 느슨해진 학계의 대가와 국민당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는 문자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한, 성질 급한 청년의 글이다 보니 특징이 있었다. 누구나 읽기 쉬운 평이한 문체로, 있었던 사실을 품위 있고 코믹하게 비판했다. 독자가 솜사탕처럼 불어났다.   1961년 막바지 문성서점(文星書店) 주인 샤오멍넝(蕭孟能·소맹능)과 주완젠(朱婉堅·주완견) 부부가 지지부진하던 잡지 ‘문성(文星)’의 주간으로 리아오를 초빙했다. ‘이겨도 한니발, 져도 한니발’인 것처럼 ‘흥해도 리아오, 망해도 리아오’였다. 후스와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의 영향을 받은 리아오는 전반서화(全般西化)의 신봉자였다. 샤오멍넝, 주완젠과 철의 삼각을 형성하며 국민당의 내로라하는 정론가(政論家)들을 링으로 유인했다. 지저분한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으며 벌린 ‘중서문화논전(中西文化論戰)’을 통해 공개적으로 국민당의 언론탄압을 맹공했다. 논전은 리아오와 문성의 압승이었다. 국민당은 리아오화 문성에 실린 글들이 법통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무기한 정간조치했다. 문성서점도 폐쇄시켰다.   이런저런 죄목으로 철창에서 만난 샤오멍넝과 리아오의 행동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샤오는 억울하다며 울기만 했다. 리아오는 “문성시대는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지난 일은 잊으라”며 이 악물고 웃기를 반복했다. 리아오 관련 서적과 연구논문 쏟아질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2023.11.25 00:01

  • 장제스 “공산 비적 선전술 뛰어나도 이념은 우리가 옳아”

    장제스 “공산 비적 선전술 뛰어나도 이념은 우리가 옳아”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7〉   2·28 사건 후 경총 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한 화가 황융위(黃永玉)가 타이베이의 거리 풍경을 판화로 남겼다. [사진 김명호] 2·28사건과 4·6사건을 경험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대만 통치를 강화하고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국민당 원로와 당 간부, 군 지휘관들에게 절실한 심정을 토로했다. “지구상에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퇴폐적인 정당은 있어 본 적이 없다. 오늘의 국민당처럼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는 정당도 없었다. 혁명정신이 완전히 시들어 버린, 이런 썩어 빠진 정당은 진작 쓸어버렸어야 했다.” 군 지휘관들은 호된 질책을 당했다. “모든 면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장비, 전투능력, 경험에서 공산군은 우리의 비교 대상이 못 됐다. 장교들의 기량과 지식이 부족했다. 세심한 검토와 준비도 철저하지 않았다. 지금 군사령관이나 사단장직에 있는 너희들이 외국에서 자신의 지식과 능력에 의존해야 한다면 연대장이나 대대장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중국이 워낙 낙후되고 인재가 없다 보니 너희 같은 것들에게 중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 반공·국학 서적 출간 열 올려   한 자리에 모인 대만 계엄령 시대의 주역들. 왼쪽부터 총 정치부 주임 장징궈, 총참모총장으로 승진한 펑멍지. 펑후(澎湖)방위사령관 후쭝난(胡宗南), 국방부 부부장 위안서우첸(袁守謙), 경총사령관 황제(黃杰). [사진 김명호] 남이 했으면 백번 죽어도 모자랄, 공산당 칭찬도 했다. “공산 비적들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과 국민당엔 없는 조직, 기율, 도덕성을 갖췄다. 문제를 철저히 연구하고 계획도 완벽히 실행한다.” 후회도 숨기지 않았다. “군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했다. 지휘권 통일을 위해 군대의 모든 단위에 있었던 정치위원 제도를 없앴기 때문이다. 지휘관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불가능했다. 보고의 정확성 여부를 판단할 방법이 없다 보니 부패와 퇴폐가 성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공산 비적들의 조직과 훈련, 선전술이 우리보다 뛰어나도 이념과 사상, 정치노선은 우리가 옳고 민족의 필요성에 더 부합된다.”   1950년 장제스는 국민당 총재 권한으로 ‘국민당 중앙개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장에 충성덩어리 천청(陳誠·진성)을 임명했다. “그간 아는 사람만 요직에 기용한 내 잘못이 크다. 생면부지의 숨어 있는 인재를 발굴해라.” 당내에는 장제스에 반대하는 파벌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은 개혁위원회의 ‘개조운동’을 이용해 반대파들을 철저히 당에서 쓸어 냈다. 군 정치위원 제도도 부활시켰다. ‘총 정치부 주임’에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임명했다. 당시는 계엄령시대 초기였다. 총 정치부 주임이 대만의 모든 정보기관을 총괄했다. 대륙에서 내로라했던 고위 장성과 원로당원들은 부친보다 더 지독한 장징궈의 개성을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온갖 이유 대며 미국이나 일본 여행을 신청했다. 공통점이 있었다. 일단 출국하면 귀국은 거의 없었다.   문성서점 시절의 샤오멍넝과 주완젠 부부. [사진 김명호] 국민당은 중국민족 전통과 문화의 계승자이며 ‘정통(正統)’과 ‘도통(道統)’의 상징을 자임한 지 오래였다. 당 혁신운동 마치자 대만을 공산당이 말살시킨 ‘민족문화 부흥기지’로 설정했다. 당과 군정치부, 정부기관이 운영하는 대형 출판기구와 언론기관들이 반공(反共)과 국학(國學) 관련 서적 출간에 열을 올렸다. 대만 청년들을 중국 고전과 반공서적에 매몰시켰다.   정보기관 총괄 장징궈, 부친보다 지독   잡지 ‘문성’ 주간 리아오는 두 번 감옥 밥을 먹었다. 1980년 대 초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리아오. [사진 김명호] 백색공포가 기승을 부리던 1952년 국민당 중앙상무위원의 아들 샤오멍넝(蕭孟能·소맹능)이 부인 주완젠(朱婉堅·주완견)의 권유로 일을 벌였다. 타이베이 중심가에 서점을 열었다. 대시인이며 대서예가인 감찰원장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의 친필휘호, ‘문성서점(文星書店)’ 4자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문성서점은 서구 유명 학술서적과 문학작품을 영인(影印)하고 번역해서 출시했다.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서점은 문전성시였다. 영어문화권에 갈증을 느낀 대만 청년들은 12시간 자리 지키는 주완젠의 친절에 감복했다. 학창시절 문성서점 단골이었던 노작가가 서점풍경을 구술로 남겼다. “서점에 갈 때마다 친구에게 분명히 있다고 들은 책이 없을까 조마조마했다. 주완젠은 품위 넘치는 이웃집 누님 같았다. 여러 권 들고 온 계산대에서 돈이 모자라 우물쭈물하면 씩 웃으며 책을 포장해 줬다. 같은 경험한 친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 여사는 서점에 만족하지 않았다. 개점 5년이 지나자 남편에게 잡지 출간을 제의했다. 언론계의 대부였다는 시아버지는 물론 남편도 반대하지 않았다. 살벌했던 백색공포시대에 선보인 한 권의 잡지가 대만의 젊은 지식인과 중화권을 들썩거리게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1957년 11월 5일 문성서점이 잡지 ‘문성(文星)’을 선보이자 청년들은 환호했다. 생활, 문학, 예술을 표방하며 경총(경비 총사령부)이나 보안처에 개처럼 끌려가 숨이 간당간당할 때까지 얻어터지거나  행방불명되기 딱 좋은 구호를 내걸었다.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다.” ‘문성’ 사장 샤오멍넝은 사업자금이 풍부하고 백이 좋았다. 정보기관도 샤오 부자(父子)의 성품을 잘 알았다.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뒀다. 예상이 적중했다. ‘문성’은 4년간 48권을 내면서 독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61년 겨울 샤오멍넝은 새로운 주간을 물색했다. 한 편의 글로 대만과 홍콩을 떠들썩하게 만든 31세의 리아오(李敖·이오)를 주간으로 영입했다. ‘문성시대’가 열리고도 남을 징조였다.

    2023.11.18 00:01

  • 백색공포 시대 저물자 “역사 속 위인도 악인도 그놈이 그놈”

    백색공포 시대 저물자 “역사 속 위인도 악인도 그놈이 그놈”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6〉   대만 경비총사령관 황제(黃杰)의 생일에 함께한 백색공포의 주역들. 왼쪽 둘째가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장징궈. 얼굴만 보이는 사람(왼쪽 넷째)이 계엄령 시대의 저승사자 펑멍지(彭孟緝). [사진 김명호] 1987년 여름 대만의 중화민국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단안을 내렸다. 38년간 지속시킨 계엄령 시대를 제 손으로 종식시키고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철혈(鐵血)정치가’의 결자해지와 죽음은 비장미가 넘쳤다. 2·28사건을 시작으로 대만 전역을 휘감았던 백색공포(白色恐怖)시대의 사건들을 희석시키기에 충분했다. 한동안 회자되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역사는 감상용이다. 절대 믿으면 안 된다. 현자(賢者)는 역사를 즐기지 믿지는 않는다.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이나 악인도 깊이 들어가 보면 그놈이 그놈이다.” 지난날에 관심이 덜해도 사실은 어쩔 수 없었다. 안개 속에 있던 일들이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펑밍민, 밀우 리덩후이보다 조건 좋아   말년의 펑밍민(왼쪽)과 리덩후이. [사진 김명호] 계엄령 시대의 사법부는 군인, 경찰, 특무기관의 노예였다. 종사자 대부분이 공통점이 있었다. 얼굴 하나는 두꺼웠다. 계엄 해제 후 불법부(不法府)나 무법부(無法府)였다고 손가락질해도 대부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양심적인, 가벼운 반발도 있었다. “법은 신성하다. 우리는 징치반란조례(懲治叛亂條例)에 따라 조사하고 재판을 거쳐 형을 선고했을 뿐이다. 우리 모르게 처형당했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많다는 것 알아도 군사법정은 우리와 상관없다며 모른 체했다. 우리도 사람이다. 양심이 있고 실수도 범할 수 있다. 사과하면 흐지부지되는 실수가 태반이다. 우리는 경우가 다르다. 인정하면 파장이 크다 보니 철면피가 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들이다.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선배에게 법은 철학이라는 말 듣고 이 길 택한 것이 후회된다. 법은 신성하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우쭐대기 좋아하는 속물이 신성한 것을 다루자니 너무 힘들다. 사죄는 못 해도 돌팔매는 맞겠다.”   통계에 의하면 백색공포 시절 군사법정은 정치적 사건 2만9407건을 판결했다. 무고한 희생자가 14만 명을 웃돌았다. 당시 대만 인구가 400만을 겨우 넘을 때였다. 국민당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대만 전역의 감옥이 만원이었다. 타이베이는 권력의 중심지였다. 수감자들은 타이베이에 와서 조사받고 재판받았다. 지금의 타이베이역 건너편 구 힐튼호텔 자리는 정치범만 재판하던 군법처였다. 명동 격인 시먼딩(西門町)의 스즈린(獅子林) 일대에는 고문으로 유명한 보안처가 있었다. 1952년 군법처에는 재판 대기자가 워낙 많았다. 정치범들을 교외에 있는 전 일본군 장교감옥으로 옮겼다. 유일하게 기록이 남아 있는 1955년 수감자 2411명 중 875명의 죄명이 반란죄였다. 반란범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1970년 1월 대만 탈출 후 스웨덴에 도착한 펑밍민. [사진 김명호] 백색공포 기간 보안처와 군법처를 거친 정치범 중 4만여명이 총살로 목숨을 잃었다. 운 좋은 사람은 12년에서 15년형이 기본이었다.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수용할 감옥이 부족했다. 방은 좁고 수감자는 많았다. 동시 취침이 불가능했다. 교대로 자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반은 자고 반은 앉아 있다. 시내 곳곳, 일본인이 쓰던 건물들을 감옥으로 개조했다. 처형장도 도처에 있었다. 초대 대만행정장관 천이(陳儀·진의)도 온전치 못했다. 1950년 6월 18일 신뎬(新店)의 군인감옥 잔디밭에서 공산당과 내통한 죄로 의연히 총탄세례를 받았다. 자존심 강한 장제스는 천이의 정치적 배신행위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대만인 선무(宣撫)에 이용했다. 무고한 인명이 희생된 2·28 사건의 책임추궁이라고 발표했다.   국민당은 대만독립 주장하는 대독파(臺獨派)를 간첩과 동급으로 취급했다. 대독파의 대부 펑밍민(彭明敏·팽명민)은 예외였다. 대만의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펑은 어릴 때부터 서구문화에 익숙했다. 형이 유학 중인 일본 고등학교 재학 시절 프랑스의 자유주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부친과 형의 반대로 프랑스문학 연구가 좌절되자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44년 일본이 그간 유예시켰던 인문계 학생 징집령을 내렸다. 징집통지서는 염라대왕의 초청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이 있는 나가사키로 피신 가던 도중 미군의 공습으로 왼쪽 팔을 잃었다.   펑, 장징궈 감옥 시찰한 날 석방돼   계엄령 해제 후 장제스를 ‘히틀러 같은 도살자’라고 규탄하는 현수막 걸고 시위하는 피해자 유족들.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후 대만대학은 일본의 제국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의 전학을 허락했다. 펑밍민은 대만대학 정치학과 재학 중 밀우(密友) 리덩후이(李登輝·이등휘)와 함께 국민당의 중점 배양 대상이었다. 조건은 펑밍민이 리덩후이보다 좋았다. 대만대학 졸업 후 캐나다와 프랑스 유학을 마치자 국민당이 34세의 펑에게 입당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유엔대표단 고문’과 ‘대만대학 정치학과 주임’ ‘대만10대걸출청년’ 선전 등 선물보따리를 안겨 줬다. 펑은 “학술에만 전념하겠다”며 권력의 농락을 거절했다.   1964년 초 제자 2명과 대만의 미래를 토론하던 중 대만인민자구운동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내용이 엄청났다. “세계는 한 개의 중국과 한 개의 대만을 인정해라. 대만에서 국민당 정권이 유지되는 이유는 미국의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은 점차 중공 승인으로 기울 것이 확실하다. 국민당이 주장하는 대륙수복은 절대 불가능하다. 국민당 정부는 이미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다. 대만을 대표하는 정부도 아니다. 1947년 선거 2년 후 중국에서 쫓겨나자 패잔병들이 대만을 점거했다. 현재 대만 인구의 85%가 대만인이다. 중앙 입법원의 대표 중 대만인은 3%에 불과하다. 대만인과 대륙인의 합작이라는 국민당의 선전은 갈등을 부추기는 책략이다. 장제스는 이미 황제다. 우리는 사망하기만 기다릴 뿐이다. 절망한 장징궈가 대만을 대륙에 넘겨줄까 우려된다. 청년 시절 장징궈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추종자였다. 아직도 혈액에 공산주의자의 피가 섞여 있다.”   정부가 무고도 상관없다며 고발을 독려하던 시대였다. 선언문 보고 놀란 인쇄소 주인의 밀고로 펑밍민은 구속됐다. 10년형 선고받자 장징궈가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했다. 펑이 수용된 감옥을 시찰 나왔다. 그날 밤 펑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대만의 출입국 관리는 철저했다. 펑은 외부출입 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변장하고 대만 탈출에 성공했다. 변장술이 탁월했던지 그날따라 공항 경비가 허술했는지, 선언문 일부 내용에 공감한 장징궈가 무슨 작용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2023.11.11 00:01

  • 군경, 대만사범대 무자비 진압…38년간 ‘백색공포’ 시달려

    군경, 대만사범대 무자비 진압…38년간 ‘백색공포’ 시달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5〉    ‘4·6사건’ 진압 후 경총 부사령관 펑멍지(가운데)는 선배들을 제치고 군과 외교계 오가며 승승장구했다. 주일대사 시절 전 중국주둔 일본군 사령관(오른쪽)과 교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1949년 5월 18일 ‘중국인민해방군 4야전군’이 대륙의 배꼽 우한(武漢)에 깃발을 꽂았다. 이틀 후 대만성 주석 천청(陳誠·진성)이 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간단한 포고문이 뒤를 이었다. “계엄 기간 파업을 엄금하고 0시부터 5시까지 통금을 실시한다. 위반자는 사형에 처한다. 출입국 관리를 엄격히 강화한다. 벽보와 삐라 살포를 엄금한다. 무기와 탄약의 휴대와 운반을 금지한다. 외출 시 신분증을 지참해라. 위반자는 군법으로 엄격히 다스린다.”   일반적으로 1987년 7월 15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38년간을 ‘백색공포(白色恐怖) 시기’라고 불렀다. 기간을 더 길게 잡는 학자들도 있다. “1949년 4월 6일 대만대학과 대만사범대학 학생사건부터 진정한 언론의 자유가 시작되는 1992년까지를 백색공포(白色恐怖) 시기로 봐야 한다.” 진상이 밝혀질수록 공감하는 사람이 많았다. 계엄령의 도화선을 아직도 2·28 사건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외국의 얼치기 좌파 연구자라면 모를까, 대만과 대륙의 비중 있는 학자 중에는 그런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 2·28사건 이후 대만공산당 지도부는 대륙으로 도망갔지만 좌풍(左風)은 유행했다. 중공과 상관없는, 실의에 빠진 청년들을 좌익사조에 내포된 얄궂은 낭만적 요소가 유혹했기 때문이다.   대만 학생들이 영향받은 난징의 반정부 학생시위. [사진 김명호] 학생들은 사회단체나 학생회 등 자치조직을 통해 시름을 달랬다. 선언문 발표하고, 표어 부치고, 시위하며 국민당의 실정을 비판했다. 극소수의, 공산당이 직장이나 마찬가지였던 학생들은 학원가에 사단이 일어나기를 고대했다. 사소한 사건이라도 일단 터지기만 하면 대형사태로 확대시키기 좋은 환경이었다. 기회가 일찍 왔다. 3월 20일 밤 10시쯤 경찰관이 자전거 1대에 같이 타고 가던 대만대학과 사범대학 학생을 교통위반이라며 제지했다. 말다툼이 주먹질로 비화되자 주변에 있던 경찰관들이 몰려왔다. 실컷 얻어터진 두 명의 학생은 타이베이 경찰국 제4분국으로 끌려갔다. 경찰 중에는 프락치가 있었다. 날이 밝자 두 대학에 소문이 낭자했다. 학생들이 경찰국으로 몰려갔다.   장제스 총애받는 펑멍지 부사령관에 지시   ‘4·6사건’ 후 중공 간첩으로 밝혀진 참모차장 우스(吳石)의 처형 직전 모습. [사진 김명호] 경찰국을 포위한 학생들이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학생 두 명을 석방해라. 폭력 경찰 징계해라. 의료비를 배상해라. 경찰국장이 직접 부하들의 잘못을 사과해라.” 공산당이 고대하던 사건의 막이 올랐다. 이튿날 민간인까지 합세한 시위가 벌어졌다. 군인과 경찰 정보요원들은 대륙의 반기아운동과 반정부운동 때 익히 듣던 구호가 등장하자 긴장했다. 노래도 격렬했던 난징(南京)의 반미시위 때 부르던 것과 같았다. 경찰국장은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줘도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학생과 군경의 대립도 해소는커녕 더 악화됐다. 학생들이 먼저 문제를 일으켰다. 3월 28일 밤 대만대학과 사범대학은 물론 타이베이의 중학교(우리의 고등학교까지 포함) 자치연합회(서클에 해당)까지 연합해 청년절 경축행사를 열었다. 노래하고 춤추고 온갖 구호 외친 후 열린 회의에서 ‘대만성 학생연합회’ 성립을 의결했다. “상황 개선이 시급하다. 우리의 역량을 결집시켜 정부 당국을 압박하자. 승리의 여신은 우리 편이다.”   4월 1일 난징에 출장 중이던 성 주석 천청이 황급히 타이베이로 돌아왔다. 장제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경총(경비 총사령부) 부사령관 펑멍지(彭孟緝·팽맹집)에게 지시했다. “학생들의 행동이 도를 넘어섰다. 공산당의 개입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회 질서에 영향을 끼칠까 두렵다. 엄격히 대처해라.” 기한도 정해 줬다. “주모자 명단 작성해서 4월 5일 일망타진해라.” 당부도 잊지 않았다. “푸대포와 셰둥민(謝東閔·사동민)에게 미리 통보하고 협조를 구해라. 여학생 체포는 신중을 기해라. 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여자다. 잘못했다간 반란 주도자가 훗날 영웅으로 둔갑할 수 있다.” 대포는 큰소리치기로 유명한 대만대학 교장 푸스녠(傅斯年·부사년)의 별명이었다. 푸는 베이징대학 교장을 역임했던 교육계의 원로였다. 학계에 남긴 업적이 전국에 널려 있는 대학 교장들과는 격이 달랐다. 청년 시절도 화려했다. 중국역사에 한 획을 그은 1919년 ‘5·4학생운동’과 ‘신문화운동’의 대장 격이었다. 셰둥민은 대륙에서 교육받은 대만 출신 관료였다.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푸는 비난받고 셰는 추앙받았다.   “총보다 더 무서운 게 여자, 체포 땐 신중”   베이징대학 교장 시절 장제스와 함께한 푸스녠(왼쪽). [사진 김명호] 경총이 파악한 체포대상은 많지 않았다. 대만대학 15명, 사범대학 6명이었다. 4월 5일 밤 무장한 군경이 두 대학에 진입했다. 푸스녠은 공산당이라면 질색이었다. 군경을 기숙사 학생 방까지 안내하며 체포에 협조했다. 사범대학은 학생들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다. 명단에 있던 체포 대상자들은 도망쳤다. 사정 모르는 학생들은 동료 학생 보호에 나섰다. 몽둥이 들고 군경과 대치했다. 난투극도 불사할 기세였다. 경총도 폭력으로 맞섰다. 4월 6일 오전 무장병력 동원해 방어선 치고 학교에 난입했다. 저항하는 학생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했다. 찢어진 치맛자락 움켜쥐고 발 동동 구르는 여학생도 봐주지 않았다. 머리통 깨지고 팔다리 부러진, 기숙사에 있던 학생 300명 전원을 끌고 갔다. 소문이 난무했다. “셰둥민은 진정한 교육자다. 끝까지 군경진입을 거부했다. 푸스녠은 학생을 보호하지 않았다. 교장 자격이 없다.”   푸스녠은 세간의 입놀림 따위는 한 귀로 흘렸다. 성 주석 천청 찾아가 네 가지를 요구했다. “하루빨리 명단에 있던 학생들을 재판에 회부해라. 체포한 학생 중 명단에 없던 학생은 즉시 석방해라. 이후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교내에 진입해 학생을 체포하겠다는 청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학교 측의 체포된 학생 면담을 허용해라.” 푸의 요구는 한 건도 성사되지 못했다. 경총은 체포 당일 학생 7명을 총살시키며 ‘백색공포 시대’를 예고했다.   푸스녠은 충격이 컸다. 매사에 의욕을 잃고 시름시름 앓았다. 1950년 겨울, 성탄절 닷새를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54세, 당시에도 많지 않은 나이였다. 1999년 봄 노년에 들어선 푸의 제자들이 스승을 회상했다. “그 성질에 백색공포 안 보고 세상 하직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2023.11.04 00:01

  • “외성인이 본성인 씨 말려” 대만공산당 폭동에 합세

    “외성인이 본성인 씨 말려” 대만공산당 폭동에 합세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4〉   2·28사건 1주일 후 대만 엘리트 6명을 공개 총살한 장화(彰化)역 광장. [사진 김명호] 일본의 대만 식민통치 기간 노예화 교육의 기초는 언어였다. 중국어와 푸젠(福建)방언 민남어(閩南語) 사용 엄금이 추상같았다. 원주민을 제외한 대만인은 푸젠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집안 일상용어였던 민남어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중국어(국어) 사용은 금기(禁忌)였다. 들키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50년에 걸친 고압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1945년 일본 패망 무렵 대만 신세대 대부분이 중국어를 못했다. 대만인 70% 이상이 일본어를 구사했다. 작가들도 중국어보다 일본어가 편했다. 일단 일본어로 썼다가 낑낑대며 중국어로 바꿔 적었다.   1945년 10월 25일,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 행정장관공서는 국어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대륙에서 국어발음 정확하고 문장력이 빼어난 교사들을 전국적으로 모집해 국어 보급에 나섰다. 평생 일본어만 접한 30세 이하는 대륙인과의 문화 차이가 심각할 정도로 심했다. 단시간 내에 중국문화 흡수가 불가능했다.   대만 접수 국민당, 국어추진위 발족   2·28사건 진압과 대만 엘리트 제거 및 공산당원 적발을 지휘한 펑멍지(彭盟緝·오른쪽). 3군 참모총장과 주일대사를 역임했다. 왼쪽은 장징궈. [사진 김명호] 50년간 일본문화에 흠뻑 젖었어도 대만인들은 국민당 정부의 대만 수복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대륙에서 대거 몰려와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자신을 본성인(本省人), 대륙에서 온 국민정부 관리나 가족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불렀지만 적의가 내포된 구분은 아니었다. 국민당에서 파견한 고위관원들 중에는 민의가 뭔지 모르고, 뱃속 채우는 재능만 탁월한, 엉터리들이 섞여 있었다. 인재 발굴이라는 기본의무를 망각했다. 임인유친(任人唯親), 말 잘 듣고 친한 것이 기용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대만인은 철저히 배제시켰다.   외성인 관원들은 대만사정에 어두웠다. 식민지 시절 대만을 떠나 대륙을 떠돌다 광복 후 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활용했다. 본성인은 이들을 반산(半山)이라 부르며 뒤에서 손가락질했다. 반산은 거의 다 국민당원이었다. 대만 전역 휘젓고 다니며 일본인이 놓고 간 토지와 공장을 몰수하고 재물 긁어모아 저도 먹고 윗사람에게도 갖다 바쳤다. 광복 초기의 환희와 기대가 1년 6개월 만에 절망과 분노로 바뀌었다. 모든 책임을 행정장관 천이(陳儀·진의)에게 돌렸다. 행정장관공서를 ‘천이 주식회사’라 부르며 저주했다.   웅크리고 있던 대만공산당엔 이런 호재가 없었다. 반전제, 반독재, 민주쟁취, 자치요구 등 군중운동 일으킬 조건이 완비됐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인 기회 오기만 기다렸다. 1947년 2월 27일 담배 팔던 여인 구타사건을 계기로 이튿날부터 폭동이 일어나자 기지개를 켰다. 외성인이 본성인의 씨를 말릴 작정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흥분한 군중들이 무기고를 털고 죽창으로 무장했다. 떼 지어 몰려다니며 외성인들을 쏴 죽이고 찔러 죽였다. 대륙의 국민당 중앙은 군대를 파견해 가혹할 정도로 대응했다. 본성인을 자부하는 작가, 언론인, 예술가, 법조인, 의료인들의 씨를 말렸다. 실패를 자인한 대만공산당 지도부는 대만을 탈출했다. 홍콩을 거쳐 대륙으로 들어갔다.   “2·28사건, 본성인의 외성인 배척 탓”   대만공산당에 치명타를 안긴 심리전의 귀재 구정원(谷正文). [사진 김명호] 한동안 2·28 사건의 원인은 외성인들의 대만인 멸시 때문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외성인, 본성인 할 것 없이 너무 많은 사람이 죽다 보니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2006년 3월 초, 70세 생일을 앞둔 린밍주(林明珠·임명주)라는 평범한 여인이 목격자 자격으로 1947년 2월 27에 있었던 일을 공개했다. “국민당 담배 단속원이 권총 손잡이로 머리 후려치자 피 흘리며 쓰러졌다는 담배장수 린장마이(林江邁·임강매)가 내 모친이다. 당시 나는 열 살이었다. 매일 엄마 옆에서 일을 도왔다. 국민당 관원 한 사람이 웃으며 다가왔다. 담배 고르며 묻는 모습이 살 눈치였다. 관원은 완벽한 중국어를 구사했다. 일어와 민남어만 할 줄 알았던 우리 모녀는 당황했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모친의 황급한 도움 요청을 대륙에서 온 국민당 관원이 대만인 모녀를 조롱했다고 오인했다. 떼거지로 몰려들어 멱살 잡고 항의하자 관원이 권총을 빼 들었다. 순전히 언어 문제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그것도 국민당 관원의 무자비한 폭행에 피 흘리며 쓰러졌다고 알려진 사람 딸의 말이다 보니 무게가 있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국민당 책임으로 일관하던 민진당과 대만독립파도 입을 닫았다. 국민당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광복 초기 국민당이 대만인들의 민심확보에 실패한 것은 사실이었다.   대만공산당 지하조직을 지휘한 차이샤오간(蔡孝乾). 구정원에게 당원 명단 넘기고 국민당에 합류했다. [사진 김명호] 홍콩, 대만지구와 해외의 화교 연구단체 2·28사건 발발 원인을 본성인의 외성인 외부인 배척운동으로 단정했다. “폭동을 일으킨 본성인들은 거리를 점거하고 행인들을 불러 세웠다. 민남어로 물어봐서 대답하면 일본어로 물어봤다. 통과하면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불러 보라고 요구했다. 외성인은 일본어와 민남어로 답할 방법이 없었다. 일본여인과 결혼하거나 동거 중인 외성인도 일본국가 부를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재수 좋으면 온갖 모욕 받으며 얻어터지고 끝났다. 명 짧은 사람은 즉석에서 죽창에 선혈을 물들였다.

    2023.10.28 00:01

  • “미, 일본엔 원폭 2개·대만엔 1000개 맞먹는 장제스 투하”

    “미, 일본엔 원폭 2개·대만엔 1000개 맞먹는 장제스 투하”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3〉   직접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천이. 1947년 3월 3일, 타이베이. [사진 김명호] 1935년 5월 일본은 대만통치 40주년 기념을 앞두고 푸젠(福建)성 주석 천이(陳儀·진의)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평소 친일파 소리 듣던 천이는 난징(南京)의 중앙정부에 의견을 구했다. 허락이 떨어졌다. “중앙정부와는 상관없는, 현지 고찰(考察)을 위한 지방성 외교 형식을 취해라.”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친서를 보냈다. “청년시절 친분이 두터웠던 일본의 군·정계 요인들을 두루 만나라. 중·일 관계는 복잡하다. 난제가 한둘이 아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어 실리를 취하는 것이 외교다. 농담 속에 진심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현란한 칼춤을 추고 와라. 부인과 동행 여부는 알아서 결정해라.” 타이베이에서 열린 경축활동에 참석한 천이에게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친일파다. 부인도 일본인이다.” 천이는 누가 뭐라건 끄떡도 안 했다. 모두 사실이었다. 일본 패망 전까지 대만에 부임한 총독 10명이 천의 육군대학 선배나 후배였다.   천이 “국가 부강해지려면 국민 총명해야”   일본 항복 의식을 마친 대만성 행정 장관 천이(앞줄 오른쪽 여덟째). [사진 김명호] 1945년 초, 국민정부는 전쟁 승리를 앞두고 ‘대만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천이를 주임에 임명했다. 천이는 ‘대만 간부훈련반’을 신설하고 대만총독이 보내 준 대만법령휘편(臺灣法令彙編)을 집중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40만 자에 달하는 보고서를 근거로 ‘대만접수관리계획안’을 만들었다.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천이는 가슴을 쳤다. “접수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손을 들었다.” 대만 행정장관에 임명되자 졸업을 4개월 앞둔 훈련반원 120명 이끌고 대만으로 갔다.   10월 25일 ‘타이베이공회당’에서 대만 주둔 일본군의 항복의식이 열렸다.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천이는 자신이 넘쳤다. “대만은 전리품이 아니다. 원래 중국영토다. 나는 일을 하러 온 사람이다. 많은 협조 바란다. 나도 협조를 게을리하지 않겠다.” 천은 생활습관이 검박했다. 총독 관저 입주를 거절했다. “나는 백성의 머리에 올라탄 총독이 아니다, 공복일 뿐이다.” ‘대만전력’이 관리하던 영빈관에 몸을 풀었다. 정부기관에 배치했던 무장 경비원도 철수시켰다. 행정장관공서(公署) 초소도 두 개만 남기고 없애 버렸다. 산책 나왔다가 궁차루(公洽路)란 거리이름 발견하자 버럭 화를 냈다. 당장 보아이루(博愛路)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이유가 있었다. 보아이(박애)는 국부 쑨원(孫文·손문)이 추종자들에게 잘난 척하고 싶을 때 즐겨 써 주던 글귀였다. 궁차는 천이의 자(字)였다.   일본 투항 무렵 대만에는 40만의 무장부대와 30만 정도의 일본교민이 있었다. 일본총독부 관원들이 천이가 파견한 선발대에 건의했다. “일본은 만신창이가 됐다. 파멸 직전이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다. 만주와 대만, 조선, 동남아에 있는 교민들이 본국 일본으로 단시간 내에 몰려오면 실업(失業)문제로 혼란에서 헤어날 방법이 없다. 교사, 의사, 기술자 같은 고급인력이 일본에 돌아가면 실업자로 전락한다. 이들은 전문가들이다. 대만에 잔류시키는 것이 양국에 이익이다. 천이 행정장관에게 건의해 주기 바란다.” 천이는 총독부의 건의를 수용했다. 군인을 제외한 각 분야의 전문 인력 8000명과 가족 3만 명을 원래 자리에 있도록 했다.   2·28사건의 발원지 톈마다방. 지금도 2월 28일만 되면 기념식이 열린다. [사진 김명호] 푸젠성 주석 시절 천이는 교육을 중시했다. “총명이 최대의 힘이다.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국민이 총명해야 한다.” 가는 곳마다 3가지를 강조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행정이 중단되면 안 되고, 공장이 문 닫으면 안 되고, 학업이 중단되면 안 된다.” 대만대학 교원을 확충하고 교원양성을 추진했다. “술이나 퍼마시고, 도박 좋아하고, 교장과 학부모 눈치나 보는 교사들은 모교를 빛낼 졸업생을 배출할 수 없다. 일본인들만 다니던 총독부 부설 고등학교 자리에 대만사범대학을 설립해 우수한 교사들을 양성해라.”   천이의 꿈은 국·공내전으로 좌절됐다. 전쟁으로 인한 대륙의 경제위기가 대만을 덮쳤다. 통화팽창으로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1946년 1월부터 47년 2월 ‘2·28사건’이 일어나기까지 13개월간 쌀값이 4.8배, 밀가루는 5.4배, 소금은 7.1배, 설탕은 22.3배로 폭등했다. 1946년 10월 25일, 대만광복 1주년 기념식에 장제스가 참석했다. 노래하고, 사자춤 추고, 폭죽이 터졌지만 대만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전 총독부 앞에 ‘개 떠난 자리에 살진 돼지가 왔다’는 제목의 풍자만화가 걸리는가 하면 ‘일본이 우리를 버렸다’며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간도 크고, 겁도 없는 대만대학 교수가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미국을 성토했다. “미국인들은 일본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고 중국인들에겐 너무 가혹하다. 일본에는 원자탄 2개가 고작이고 대만에는 원자탄 천 개에 맞먹는 장제스를 투하했다.”   장제스, 2·28사건 폭란 인정·군대 파견   단속이 심할수록 가짜도 범람했다. 담배가 특히 심했다. 2월 27일 오후, 전매국 감시원들이 경양식과 커피로 유명한 ‘톈마(天馬)다방’ 앞에서 가짜 담배 파는 과부를 적발했다. 연행에 불응하며 반항하자 구경꾼들이 주변을 에워쌌다. 겁 많은 감시원이 권총을 빼 들었다. 차마 쏘지는 못하고 손잡이로 과부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피를 본 군중이 분노했다. 감시원들과 충돌했다. 2명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감시원 대장이 실탄을 발사했다. 1명이 스러지자 군중들도 흩어졌다. 그 틈에 감시원들은 공포를 쏘며 도망갔다. 소문이 퍼졌다. “대륙에서 온 외성(外省)인들이 본성(本省)인을 살해했다.” 군중들이 경찰국과 헌병대로 몰려갔다. 범인 처벌을 요구했다.   28일 오전 성안 시민들이 전매국을 포위해서 불 지르고 행정장관공서로 이동했다. 위병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었다. 사망자가 발생하자 무장충돌이 일어났다. 반독재, 반전제, 반폭행, 민주 쟁취, 자치 쟁취 구호가 타이베이 전역에 만연했다. 천이는 타이베이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경의 완전무장을 지시했다. 대만인들은 철시와 등교 거부, 파업으로 맞섰다. 행정장관공서와 경찰국, 방송국, 일인재산처리위원회를 포위하고 파출소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일부는 군용창고에 몰려가 무기를 탈취한 후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석방했다. 방송국도 점령했다. 군·경의 폭행과 궐기를 호소하는 방송이 전파를 탔다. 웅크리고 있던 대만공산당이 기지개를 켰다. 무장세력을 동원해 가오슝(高雄)과 지룽(基隆)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천이가 난징에 급전을 보냈다. “폭란이 발생했다. 신속한 군대 파견을 청한다.” 보고를 받은 장제스도 2·28사건을 폭란으로 인정했다. 상하이에 주둔 중인 21군 선발대를 대만으로 파견했다. 선발대는 국민당군의 최정예였다. 지룽항에 도착하자 선상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상륙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사망자 숫자도 각양각색이다. 타이베이 주재 미국영사관 2만 명 이상이 죽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당시 행정원의 조사 보고가 걸작이었다. “1만8000명에서 2만8000명 정도가 사망했다. 3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은 낭설이다.”

    2023.10.21 00:01

  • "일본군이 모공정 뺏을 수도" 예궁춰, 조카에게 보관 부탁

    "일본군이 모공정 뺏을 수도" 예궁춰, 조카에게 보관 부탁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2〉   이승만 대통령은 동서양의 철학과 문학은 물론 시·서·화에 일가를 이룬 중화민국 외교부장 예궁차오를 좋아했다. 1956년 8월 14일 오후 서울을 방문한 예궁차오와 경무대에서 시담(詩談)을 나눴다. [사진 김명호] 흔히들 말한다. “모공정(毛公鼎)은 비취에 조각한 배추(翠玉白菜), 돌덩어리 비슷한 옥으로 만든 돼지고기(肉形石)와 함께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의 3대 보물이다. 그중 으뜸은 누가 뭐래도 모공정이다. 사연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서주(西周) 말년인 기원전 828년, 즉위를 마친 선왕(宣王)이 숙부 모공에게 국가 대소사를 처리하라고 당부했다. “공의 일족이 금위군(禁衛軍)을 통솔해 왕가(王家)를 보위하고, 주식(酒食)과 이동수단, 의복, 무기의 하사를 관장해라.” 모공은 왕의 엄청난 지시를 자손들이 대대로 향유하기를 갈망했다. 적당한 크기의 정(鼎)을 주조했다. 안쪽에 왕이 한 말을 500자 정도로 새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2000년 하고도 600여년이 흘렀다. 1843년 봄 산시(陝西)성 치산(岐山)현의 둥(董)씨 집성촌, 촌민 둥춘성(董春生·동춘생)이 모공정을 발굴했다. 소문이 퍼지자 베이징의 골동상인 쑤(蘇)씨 형제가 치산으로 달려갔다. 은 300냥으로 둥춘셩을 구워삶았다. 운반 도중 문제가 발생했다. 마을에서 힘깨나 쓰던 둥즈관(董治官·동치관)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둥춘셩의 턱에 주먹 한 방 날리고 쑤씨 형제에게 호통을 쳤다. “둥씨 집안 공동 소유물이다. 돼지 5000마리와 소 200마리 들고 와라. 그때까지 내가 보관하겠다.” 쑤씨 형제는 현청(縣廳)으로 갔다. 거금으로 현의 우두머리 지현(知縣)을 매수했다. 지현은 보물을 사적으로 은닉한 죄로 둥즈관을 하옥시키고 모공정을 압수해서 쑤씨 형제에게 줬다.   영·미 부호들, 모공정 소유하려고 군침   홍콩의 예궁차오와 예충판. 사촌 남매보다 부부가 더 어울리는 사이였다. [사진 김명호] 형제는 모공정 들고 유유히 치산을 떠났다. 시안(西安)에 도착하자 모공정을 은밀한 곳에 숨겨 놓고 현지의 유명 서화가에게 일거리를 줬다. “정과 정 안에 있는 명문(銘文)을 임모(臨摹)해라.” 완성품을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의 명사에게 기증했다.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명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식을 거르며 모공정 연구에 매달렸다. 모공정에 관한 최초의 해석, ‘주모공정고석(周毛公鼎考釋)’을 남기고 비실비실 앓다 세상을 떠났다.   다시 9년이 흘렀다. 1852년 베이징의 대수장가였던 금석학자 천제치(陳介祺·진개기)가 쑤씨 형제에게 은 1000냥을 주고 모공정을 넘겨받았다. 천은 모공정을 애지중지했다. 깊은 밀실에 숨겨 두고 혼자만 봤다. 부인들은 물론 자녀들도 밀실에 뭐가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 타고난 건강체였다. 아들들보다 오래 살았다. 임종 무렵 유일한 손자에게 유언을 남겼다. “천하의 보물이 밀실에 있다. 개인이 끼고 있을 물건이 아니다. 내가 죽으면 국가에 기증해라.” 손자는 조부의 마지막 말을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시신이 식기도 전에 모공정 들고 양강(兩江)총독 돤팡(端方·단방)을 찾아갔다. 호기 있게 만 냥을 불렀다. 리훙장(李鴻章·이홍장) 사후 북양대신 역임하며 청나라의 외교를 전담했던 돤팡은 모공정이 외국인 손에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 철없는 청년을 달랬다. “돈으로 사고팔 물건이 아니다. 내가 보관하겠다”며 보관료로 2만냥을 줬다.   화조화(花鳥畵)의 대가 위중린(喩仲林)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예궁차오(오른쪽). [사진 김명호] 6개월 후, 돤팡은 쓰촨(四川)에서 혁명파들에게 암살당했다. 돤의 아들은 모공정의 가치를 몰랐다. 가세가 몰락하자 텐진(天津)의 러시아 은행에 담보로 거액을 대출받았다. 영국과 미국의 부호들이 돤의 아들 집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대출금 갚아 줄 테니 모공정의 소유권 넘겨 달라며 어르고 달랬다.   명망가들이 모공정의 해외유출 방지에 나섰다. 교통총장과 교육총장을 지낸 대수장가 예궁춰(葉恭綽·엽공작)가 서화전을 열었다. 예궁춰의 글씨와 그림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소장품인 송(宋)대의 문인화까지 몇 점 처분해 돈을 마련했다. 가명으로 구입한 모공정을 한동안 대륙은행 금고에 보관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모공정을 상하이 교외의 농가에 은닉하고 모조품을 한 개 만들었다. 일본군이 상하이를 압박하자 쿤밍(昆明)에 있던 조카 예궁차오(葉公超·엽공초)를 불렀다. “모공정이 내 손에 있다는 것을 아는 일본인과 미국인이 있다. 몇 번 팔라는 간청에 응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상하이에 진입하면 모공정 뺏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충판(崇范)이 있는 홍콩에 가 있겠다. 전쟁이 끝나면 난징(南京)의 중앙박물관에 보내라.” 예궁차오가 숙부를 안심시켰다. “저는 맷집 하나는 타고 났습니다.” 모공정을 안전한 곳에 옮겨 놓고 모조품은 마을 소나무 밑에 묻었다.   예궁춰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누가 집 앞에 버리고 간 갓난 여자애를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가는 곳마다 충판을 안고 다니며 어찌나 예뻐했던지 다들 친딸로 알았다. 예궁차오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사촌 여동생 충판을 유난히 귀여워했다. 충판은 예궁춰의 무남독녀이며 ‘천하의 기재(奇才) 예궁차오’의 여동생이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어딜 가도 당당했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이 오빠를 감옥에 가뒀다는 소식 접하자 홍콩을 떠났다.   명망가들, 모공정 해외유출 방지 나서   대만을 방문한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와 한담을 나누는 예궁차오. 1957년 6월 3일, 중화민국 외교부장 집무실. [사진 김명호] 상하이에 도착한 예충판은 일본 특무기관장을 부친의 그림 한 점으로 매수해 버렸다. 일본은 두드려 패도 꿈쩍 않는 예궁차오를 설득하기 위해 충판을 이용했다. 매일 장시간 면회를 허용했다. 사정을 아는 충판은 모공정의 모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지극 정성으로 옥 뒷바라지만 열심히 했다. 하루는 특무기관장에게 오빠가 나올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기다렸던 대답이 나오자 오빠 설득을 자청했다. “오빠는 변덕이 심하다. 평소 내 말은 잘 들었다. 세 사람이 만날 자리 마련해라. 내가 울면서 설득하겠다.”   특무기관장 집무실에서 예궁차오를 만난 충판은 울면서 하소연했다. “모공정인지 뭔지가 아무리 보물이라도 오빠의 목숨과는 바꿀 수 없다. 중국은 난세다. 굴러다니다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일본이 관리하는 것이 안전하다. 끝까지 거부하다 옥사하면 나도 강물에 뛰어들겠다.” 몇 날 며칠 같은 요구 되풀이하며 훌쩍거리자 예궁차오도 두 손을 들었다. 충판에게 모공정 복제본 있는 곳을 알려줬다.   감옥에서 풀려난 예궁차오는 충판과 함께 홍콩으로 갔다.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말이 사촌일 뿐 피가 섞이지 않은 남남이다. 전형적인 남녀관계다.” 철벽도 종이자락보다 쉽게 뚫는 것이 소문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사촌 남매 사이를 의심치 않았던 예궁차오의 부인은 사실을 확인하자 어이가 없었다. 당시 예충판은 유부녀였다. 동료 교수 앞에서 음식 맛없다며 밥상 뒤엎은 사건은 별것도 아니었다. 예궁차오와 완전히 결별했다.   임종을 앞둔 예궁차오는 마지막 숨 헐떡이며 모공정을 원망했다. “모든 것이 모공정 때문이다.”

    2023.10.07 00:01

  • 예궁차오 숙부 “붓 희롱할 줄 알아야” 조카 엄하게 교육

    예궁차오 숙부 “붓 희롱할 줄 알아야” 조카 엄하게 교육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1〉   소년 시절 친부와 함께한 예궁차오(오른쪽). [사진 김명호] 1981년 10월 중순, 타이베이의 룽민총의원(榮總) 응급실에 80 언저리의 육중하고 초라한 노인이 가슴을 움켜쥐고 나타났다. 숨 헐떡이며 원장을 연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황당해하는 간호사를 발견한 응급실 책임자가 다가왔다. 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급조치 지시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잠시 후 병원장이 내려왔다. 노인을 직접 입원실까지 모시고 갔다.   노인은 다른 환자와 달랐다. 병실이 유난히 처량했다. 돌보는 사람이 없고 문안객도 없었다. 정신이 들면 왕방울 같은 눈이 창 쪽을 향했다. 탁한 숨 내쉬며 한동안 뭐라고 웅얼거리다 다시 눈을 감았다. 관찰력과 호기심을 겸비한 견습간호사가 있었다. 회진하는 의사 따라 왔다가 환자 기록카드도 없고 병실 문에 이름도 붙어 있지 않은 노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노인의 병실을 찾았다. 문 여닫을 때마다 입술 움직이면 귀를 대고 숨을 죽였다. 반복을 거듭하자 해독에 성공했다. 항상 같은 내용이었다. “미국에 있는 내 아내와 두 딸이 보고 싶다. 결혼한 지 50년이 흘렀다.” 말 같지 않은 소리에 짜증이 났지만 정성껏 돌봤다.   대륙에 있는 제자들도 별처럼 화려   부총통 천청(陳誠·앞줄 가운데)과 함께 중앙연구원을 방문한 외교부장 예궁차오(둘째 줄 오른쪽 둘째). [사진 김명호] 11월 20일 오후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 한적하던 병실 주변이 북적거렸다. 중국인뿐만 아니라 기자로 보이는 외국인들도 수첩 들고 분주히 오갔다. 이튿날 조간을 본 간호사는 예궁차오(葉公超·엽공초) 사망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예궁차오라는 사람의 중년 시절 모습을 한눈에 알아봤다. 신문 움켜쥐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의 비극적인 최후를 목도했다 생각하니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주말에 남자친구 바람 놓고 도서관으로 갔다. 인명사전 놓고 옛날 신문을 뒤졌다. 다재다능(多才多能)과 박학다식(博學多識)의 상징인 노인의 본색에 혀를 내둘렀다. 시인, 학자, 예술가, 외교관, 그것도 앞에 큰 대(大)자가 붙을 정도였다. 전직이 베이징대학과 서남연합대학 교수, 외교부장, 주미대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에 이르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륙에 있는 제자들도 밤하늘의 별처럼 화려했다. 문화곤륜(文化崑崙) 첸중수(錢鐘書·전종서), 동방학의 대가 지셴린(季羨林·계선림), 만인의 베개 폭을 적신 서정시인 볜즈린(卞之琳·변지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楊桭寧·양진영) 등 끝이 없었다.   예궁차오는 일본이 밀반출하려는 중국 10대 보물 중 으뜸인 모공정(毛公鼎)을 목숨을 걸고 지킨 공로자였다. 아내 위안융시는 고궁박물원의 모공정 진열실을 자주 갔다. [사진 김명호] 1904년 장시(江西)성에서 태어난 예궁차오는 어린 시절을 베이징에서 보냈다. 20세기 초 베이징은 만주족과 한족의 거주지역이 달랐다. 한족 지식인들은 자녀들의 만주족 지역 출입은 엄격히 단속했다. 어른들이 그러건 말건 애들은 막무가내였다. 떼를 지어 만주족 구역에 가서 놀기를 즐겼다.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선 볼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신기한 물건과 희귀한 장난감, 맛있는 서양사탕이 아동들을 유혹했기 때문이다. 만주족 어른들은 관대했다. 한족 아동들의 웬만한 실수는 모른 척했다. 한족 어른들은 달랐다. 만주족 지역 다녀온 것 알면 몽둥이를 들었다. 예궁차오는 예외였다. 다른 애들과 환경이 달랐다.   연경대 졸업 1년 연상 여성과 결혼   고궁박물원 도록에 실린 모공정. [사진 김명호] 예궁차오는 세 살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계모는 만청(晩淸) 서화가 조지겸(趙之謙)의 유복녀였다. 어린 예궁차오를 방치했다 상황을 안 숙부가 분노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아홉 살 된 조카를 집으로 데려왔다. 숙부는 중국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시서화(詩書畵)의 대가였다. 조카 교육이 엄격하고 혹독했다. 고루하지도 않았다. 몽둥이 들고 영어와 고전 교육을 병행했다. 붓과 먹 다루는 법은 기본이었다. “객지에서 고독을 즐기려면 붓을 희롱할 줄 알아야 한다. 화날 때는 대나무를 그리고 즐거운 날은 난(蘭)을 쳐라.” 조카의 재능에 만족했다. 열여섯 살이 되자 미국으로 등을 떠밀었다.   명문 사립 앰허스트대학에 입학한 예궁차오는 유창한 영어와 품위 있는 문장으로 교수들의 눈을 둥그렇게 만들었다. 대학 졸업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사과정 마치고 프랑스 파리대학에 연구원 하다 보니 6년이 후딱 지나갔다. 22세 때 베이징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베이징대학 역사상 최연소 교수의 등장은 고도(古都)의 화젯거리였다. 교외에 자리한 연경(燕京)대학 여학생들은 베이징대학에 인접한 협화의학원 여학생만 보면 눈을 흘겼다. 예궁차오는 연경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1년 연상의 위안융시(袁永嬉·원영희)에게 마음을 뺏겼다. 다른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예궁차오와 위안융시의 결혼생활은 순조롭지 못했다. 예궁차오는 산만하고 변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자주 했다. 근엄 떨다 갑자기 음담패설 늘어놓으며 깔깔대는 경우가 빈번했다. 술과 풍류도 즐겼다. 위안융시는 격조 넘치는 비범한 과학자였다. 항상 정갈하고 번잡한 것을 싫어했다. 불평도 하는 법이 없었다. 한번은 예궁차오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 손으로 온 교수와 저녁 먹던 중 음식이 맘에 안 들자 위안융시를 불렀다. “돼지나 주라”며 음식을 위안의 얼굴에 던져 버렸다. 위안은 침착했다.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일주일 후 말 한마디 없이 두 딸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30년간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소에 근무하며 예궁차오엔 편지는 물론 전화 한 통도 걸지 않았다. 외교부장인 남편 체면 깎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매년 국경일 행사에는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끝나면 비행장으로 직행, 미국으로 돌아갔다. 예궁차오 사망소식 듣고도 미국을 떠나지 않았다.

    2023.09.23 00:01

  • 왕쩡치, 신혼여행 온 헤밍웨이 못 만나고 학점만 펑크 내

    왕쩡치, 신혼여행 온 헤밍웨이 못 만나고 학점만 펑크 내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90〉   1940년 4월, 부인과 함께 전시수도 충칭의 군 부대를 방문한 헤밍웨이. [사진 김명호] 1960년 9월 ‘대만경비총사령부(경총)’가 자유주의자의 보루 ‘자유중국’을 봉쇄하고 사장 레이전(雷震·뢰진)을 감옥으로 보냈다. ‘자유중국’의 영혼이나 다름없던 총주필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도 온전치 못했다. 대만대학 교수직은 유지하되 교단에는 서지 못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교수 겸직이 불가능한 교육부 한직으로 쫓겨났다. 한직도 보통 한직이 아니었다. 집무실은커녕 책상과 의자도 없었다.   10년간 ‘자유중국’ 문예란 주간 역임하며 문단에 바람을 일으켰던 녜화링(聶華笭·섭화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직자로 전락했다. 천하의 경총도 상상력과 빼어난 문장력은 어쩌지 못했다. 허리춤 불룩한 사람들이 집 주변 어슬렁거리고 가는 곳마다 미행이 붙어도 작가 녜의 명성은 흠집이 나지 않았다. 환자로 변해가는 인하이광 만나거나 레이전 면회 갔다 얼굴도 못 보고 쫓겨나는 날은 실성한 여자 같았다. ‘자유중국’ 초대 발행인 후스(胡適·호적) 원망하며 눈물도 닦지 않았다. 사정 아는 사람들 앞에서 웃음 잃지 않고 자존심 하나로 버티다 보니 성격이 변했다. 오만해지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눈치 있는 친구나 작가들이 안쓰러워하는 줄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설상가상, 1962년 11월, 모친이 평소 하고 싶어도 못 했던 말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너는 결혼생활 14년 중 9년을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도쿄의 스캡(맥아더 사령부)에 간 후로는 단 한 번, 그것도 미국에 간다는 말 하러 온 것 외엔 편지 한 통도 없었다. 나 죽으면 이혼해라. 인하이광에겐 내 죽음 알리지 마라. 병문안 왔을 때 퇴원하면 맛있는 밥 해 주겠다고 했더니 좋아했다. 약속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어린애 같은 희대의 천재에게 혼이 떠난 모습 보여 주기 싫다.” 녜는 모친의 부음 듣고 달려온 인하이광을 모질게 대했다. “부탁이 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너만 보면 자꾸 죽고 싶다.”   녜, 선충원·딩링 등 작가·예술가 초청   남미 작가와 함께 아이오와에 도착, 녜화링을 방문한 왕쩡치(왼쪽). [사진 김명호] 1963년 1월, 미국 시인 폴 앵글이 대만을 방문했다. 미국문화원이 아이오와대학 부설 ‘작가공작방(作家工作坊)’을 운영하는 미국문화계의 실력자를 위해 환영연을 열었다. 초청장 받은 녜화링은 참석을 망설였다. “정부의 백색공포와 모친의 사망, 치료 불가능한 암 덩어리 같은 결혼생활, 어린 두 딸이 없었다면 살 이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친구의 재촉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주최 측이 작가들을 한 사람씩 폴에게 소개했다. 내 앞사람 대하는 폴은 방약무인(傍若無人)이었다.” 녜는 오만함이 꼴 보기 싫었다. 자리를 뜨기로 작심했다. 폴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얘기 나누는 중국 시인 뒤에 서 있던 여인이 몸을 돌리더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통역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미국을 떠나기 전날 페어뱅크가 대만 가면 꼭 만나 보라고 알려 준 이름이었다. 황급히 따라가 손을 내밀었다. 도도함이 다른 참석자들과 달랐다. 딴 약속 있어 미안하다며 고개만 숙일 뿐 악수는 거절했다. 녜화링은 아름다운 자석이었다. 끌려들어 가는 나를 밀쳐 버리고 연회장을 떠났다.”   부인 스쑹칭(施松卿)과 고향을 찾은 만년의 왕쩡치. [사진 김명호] 이튿날 미국문화원장이 녜화링에게 전화했다. “폴은 이틀 후 홍콩으로 떠난다. 약속이 꽉 차 있다. 오늘 만찬모임 취소하고 녜 여사를 만나고 싶어 한다. 장소는 문화원에 우리가 마련하겠다.” 녜를 만난 폴은 말을 더듬거렸다. “아이오와대학에 자리를 마련하겠다. 거절하지 말기를 갈망한다.” 녜가 사정을 설명했다. “몸담았던 ‘자유중국’ 강제폐간으로 반은 연금상태나 다름없다. 출국이 불가능하다.” 그날 밤 폴은 녜화링을 집 앞까지 바래다줬다. 헤어지면서도 했던 말을 반복했다. “꼭 미국에 와라.” 폴의 대만 일정은 엉망이 됐다. 떠나는 날까지 녜화링만 졸졸 따라다녔다. 홍콩, 파리, 런던, 베를린, 가는 곳마다 편지를 보냈다.   폴이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경총이 녜화링의 출국을 허락했다. 딸들을 친척 언니에게 맡기고 미국에 온 녜화링이 폴에게 제안했다. “나라와 인종이 다른 세계 각국의 작가와 예술가를 초청해 쓰고 싶은 글 쓰고, 토론하고, 교유하는 국제적인 기구를 만들자.” 폴은 녜화링의 스케일에 혀를 내둘렀다. 페어뱅크의 주선으로 포드재단이 거금을 지원한 ‘국제 창작계획(International Writing Program)’을 출범시켰다.   왕, 미국 가자 헤밍웨이 출생지 찾아   헤밍웨이의 출생지를 찾아간 왕쩡치. [사진 김명호] 냉전 말엽, 중국 대륙과 서구 세계의 장벽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러시아와 체코, 폴란드 외에 중국 작가들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녜화링은 선충원(沈從文·심종문), 딩링(丁玲·정령), 황융위(黃永玉·황영옥), 우주광(吳祖光·오조광) 등 문혁시절 고초가 극에 달했던 작가와 예술가를 아이오와로 초청했다. 지난 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연결할 수 있는 작가도 물색했다. 전쟁시절 뉴욕타임스 특파원으로 충칭(重慶)에 있었다는 노기자가 정보를 줬다. “3번째 부인과 중국에 신혼여행 온 헤밍웨이가 충칭에 있다는 신문 보고 달려온 서남연합대학 학생이 있었다. 헤밍웨이는 만나지도 못하고 한 학기 학점만 통째로 펑크 냈다. 소식 들은 헤밍웨이도 안타까워했다. 작가로 대성했다고 들었다.”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중국작가협회에 왕쩡치(汪曾祺·왕증기) 초청 서신을 보냈다.   집안에서 요리하고 글 쓰고 몰래 술 마시느라 분주하던 왕쩡치는 작가협회 부주석의 방문에 술친구 왔다며 신이 났다. 잔이 몇 순배 돌자 부주석이 입을 열었다. “혁명이나 개혁을 노래하던 시대는 끝났다. 역시 미국이다. 대문호를 알아보는 눈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와 문화계에 자리 잡은 네 대학동기들이 너를 기다린다.” 외국 나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던 시절이었다. 부주석은 몰래 왕쩡치를 입당시키고 출국절차를 밟았다. 왕은 부인이 사 준 양복 입고 아이오와로 갔다. 첫 번째 간 곳이 헤밍웨이 출생지였다.

    2023.09.16 00:01

  • 왕쩡치의 엄처 “술 없인 아름다운 글 안 나와 계속 마셔라”

    왕쩡치의 엄처 “술 없인 아름다운 글 안 나와 계속 마셔라”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9〉   1960년 ‘자유중국’이 폐간당한 후 녜화링(앞줄 오른쪽 셋째)은 대만을 뒤로했다. 재혼한 미국인 남편이 운영하는 아이오와대학 ‘세계작가 창작계획’에 합류했다. 감옥에 있던 ‘자유중국’ 발행인 레이전(雷震)과 서신 왕래를 그치지 않았고 대학에서 퇴출당한 인하이광(殷海光)에겐 ‘하버드대학 동아세아연구센터’를 통해 생활비를 지원했다. 2018년 참석자들과 단체 기념사진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자신의 재능을 본인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 최후의 사대부’ 왕쩡치(汪曾祺·왕증기)도 그랬다. 태평양전쟁 종결 후 왕은 학창시절 보낸 쿤밍을 떠났다. 하노이와 홍콩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국제도시는 살벌했다. 반기는 곳이 없었다. 베이징에 있는 스승 선충원(沈從文·심종문)에게 유서 비슷한 편지를 보냈다.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 비로소 알았다. 위대한 스승과 친구들 실망시키지 않을 묘안이 떠올랐다. 더는 존재할 의미가 없다.”   선충원의 답장이 왕쩡치를 살렸다. “네게는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강력한 무기, 학문과 지식과 문재(文才)가 있다. 붓을 들어라.” 맞는 말이다. 수재들의 집결지 서남연합대학 재학시절 왕의 학식에 명교수들은 혀를 내둘렀다. 컬럼비아대학이 배출한 전 칭다오(靑島)대학 총장 양전셩(楊振聲·양진성)은 서남연합대학 재직 중 왕이 칠판에 쓴 낙서 보고 감탄했다. 학생들에게 공고했다. “기말시험에 모두 참석해라. 왕쩡치만은 예외다.” 비운의 시인 원이둬(聞一多·문일다)도 왕을 극찬했다. 기말시험 앞두고 서클 활동에 분주한 후배에게 왕이 대리시험을 자청했다. 답안지를 본 원이둬는 감동했다. 학생을 불렀다. “너 같은 제자가 있으니 부러울 것이 없다. 열 번도 더 읽었다. 정말 잘 썼다. 학교신문에 실린 왕쩡치의 글보다 운치가 있다. 답안지에 곁들인 그림도 일품이다.”   백지에 몇 줄 쓰고 삽화까지 그려 건네   1987년 가을,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녜화링 자택에서 경극 한마당을 노래하는 왕쩡치. [사진 김명호] 후배는 왕쩡치가 뭐라고 썼는지 알 길이 없었다. 원이둬의 말이 길어질까 당황했다. 방문객이 찾아오자 벌떡 일어나 인사하고 황급히 나와 버렸다. 그날 밤 쿤밍의 찻집과 술집을 뒤졌다. 친절한 선배 발견하자 숨 헐떡이며 물었다. “내 수준도 생각해야지, 원이둬 선생 입이 벌어졌다.” 왕은 대충 쓰고 나왔다며 후배를 진정시켰다. 백지에 몇 줄 쓰고 삽화까지 그려서 건넸다. “네 이름으로 쓴 글이니 이젠 네 것이다. 내게 다그치지 마라.” 당대(唐代) 시인 이하(李賀) 작품의 특징을 요약한 명문이었다. 훗날 이 후배는 이하 연구자로 대성했다. 왕 사망 후 ‘왕쩡치 문집’ 편찬에 직접 참여했다. 50년 전 왕이 쓴 대리시험 내용을 문집에 포함시키며 반세기 전의 에피소드도 빠뜨리지 않았다. 마지막 한마디로 만인의 갈채를 받았다. “평소 글도둑보다 더한 도둑은 없다는 말 들을 때마다 찔끔했다. 그간 선배의 책이 출간될 때마다 돌려드리려고 했지만 내게 준 것이라며 거절당했다. 나도 선배 있는 곳으로 갈 날이 멀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 했다고 꾸중들을 일 상상만 해도 즐겁다.”   왕쩡치는 서화(書畵)에도 조예가 남달랐다. 원칙이 있었다.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기 위해 쓰고 그렸다. 한 점도 돈 받고 판 적은 없었다. 화상(畵商)들은 불만이 많았다. “왕쩡치의 그림과 글씨는 예쁘고, 까다롭고, 성질 개떡 같은 과부 같다”며 빈정대고 키득거렸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하루는 낯선 사람이 왕의 집을 찾아왔다. 화랑 주인이라며 용건을 말했다. ‘그림과 글씨를 구입하러 왔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화가나 서예가가 아니다. 주기만 했지 상품화한 적은 없다. 필요하면 자오푸추(趙樸初·조박초)나 우관중(吳冠中·오관중)을 소개시켜 주겠다.’ 화랑 주인이 왕 선생 그림 고가로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며 화를 냈다.”   주방에서 손님맞이 음식 준비에 분주한 왕쩡치. [사진 김명호] 왕쩡치는 헤밍웨이의 작품과 대만의 ‘자유중국’ 문예란 주필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의 글을 좋아했다. 마오쩌둥이나 레닌의 글은 돈 주고 산 적도 없고 그냥 받아도 딴사람 줘 버렸다. 1958년 우파로 분류되자 한바탕 웃어댔다. “다행이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인생이 너무 단조로울 뻔했다.” 왕은 4년간 고랭지의 감자연구소에서 감자와 자연을 스케치하며 고난과 화해했다. 연상의 부인 스쑹칭(施松卿·시송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감자연구소에 혼자 있다. 여기는 위대한 영도자도 없고, 회의도 없다. 내가 나를 관리하면 되는 신선과 같은 나날이다. 감자의 품종이 얼마나 다양한지 매일 관찰하며 쓰고 그려도 끝이 없다. 온갖 종류의 감자를 나보다 많이 보고, 그리고, 먹어 본 사람은 전 세계에 없다고 자부한다.” 문혁시절 홍위병들은 왕의 역작인 ‘중국감자도보(中國馬鈴薯圖報)’ 원고를 난로 속에 던져 버렸다. 중국작가협회 주석 톄닝(鐵凝·철응)은 지금도 이 얘기만 나오면 가슴 치며 발을 동동거린다고 한다.   서화 조예 깊은 왕, 돈 받고 판 적 없어   왕쩡치는 낮에는 글 쓰고 해 지면 지인들에게 줄 서화에 몰두했다. [사진 김명호] 스쑹칭은 엄처(嚴妻)였다. 소문난 애주가 왕쩡치에게 금주령 내린 적이 있었다. 스의 말은 왕에겐 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서재에 있던 스가 주방에서 저녁 준비하던 왕을 큰소리로 불렀다. 앞치마 두르고 잘못 들통난 초등학생처럼 서 있는 남편을 다그쳤다. “내가 술 끊으라고 분명히 얘기했다. 최근 오밤중에 훔쳐 마시고 몰래 사다가 숨겨 놓고 마신 것 내가 다 안다. 주방에서 요리할 때 나 들어가서 쉬라고 한 이유도 알면서 모른 체했다. 며칠 전 친구 생일잔치 갔을 때 통음하고 경극 한마당 부른 것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왕이 잡아떼자 보고 있던 ‘문학월간’ 내밀며 웃었다. “방금 네가 발표한 단편소설 읽었다. 술기운 없이 이렇게 아름다운 글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속 마셔라.” 두 사람은 이런 사이였다.   왕쩡치 사후 며느리가 스쑹칭에게 시아버지와 결혼한 이유를 물었다. 스는 주저하지 않았다. “중문과 다니던 쩡치는 불량학생이었다. 나는 물리학과와 생물학과를 거쳐 외국문학과로 전과했다. 외문과 학생들은 중문과 애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쩡치를 택한 이유는 재능,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말이다. 왕쩡치의 재능과 학식은 ‘중국 최후의 사대부’로 손색이 없었다.

    2023.09.09 00:01

  • 왕쩡치 “병태미 풍기는 여자 만나려…” 서남연합대 진학

    왕쩡치 “병태미 풍기는 여자 만나려…” 서남연합대 진학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8〉   신혼 시절 산책 나온 스쑹칭과 왕쩡치. 1947년 겨울 상하이 교외. [사진 김명호] 1997년 5월 16일 밤, 관방 신화통신이 작가 왕쩡치(汪曾祺·왕증기)의 사망을 타전했다. 중화권의 문화부 기자들은 술김에 들은 것 같기는 한 이름에 당황했다. 머리에 든 것은 없어도 손가락은 민첩했다. 여기저기 전화통 들고 들쑤셨다. 왕의 이름 앞에 ‘경파(京派) 작가의 대표 인물, 민간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서정적 인도주의자’ 등 온갖 수식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홍콩 언론이 뉴욕타임스 중국 전문기자의 글을 원용했다. 왕을 ‘중국 최후의 순수 문학자, 중국의 마지막 사대부’라고 정의했다. 원로작가 바진(巴金·파금)이 맞는 말이라며 무릎을 쳤다.   왕쩡치 1997년 숨지자 언론들 떠들썩   서남연합대학 교수 시절의 선충원. [사진 김명호] 시장 상인들 평가는 달랐다. 신문에 난 사진 보고 반응이 비슷했다. “벌레가 건드린 흔적 있는 야채를 선호하던, 식재료 가장 잘 고를 줄 알았던 진짜 미식가를 볼 수 없게 됐다”며 눈을 붉혔다. 식재료뿐만이 아니었다. 왕쩡치의 여성관도 유별났다. 튼튼하고 건강한 여자는 싫어했다. 말로만 듣던 모친처럼 젊되 총명하고 병든 여자를 좋아했다.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여자친구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왕쩡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끼고 살았다. 글솜씨도 뛰어났다. 중학 시절, 네가 쓴 것이 분명하냐고 묻는 교사를 당황케 했다. “고전 많이 읽고 머릿속에 요약해 두면 글은 저절로 됩니다.” 당돌한 질문도 했다. “집안에 병든 따님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연령이나 용모는 상관없습니다.” 교사는 어이가 없었다. 왕의 부친이 어떤 사람인지 탐문했다. 답들이 거의 비슷했다. “박학다식하고 금기서화(琴棋書畵)에 능한 지식인이다. 아들이 세 살 때 상처(喪妻)했다. 행동이 자유자재지만 여자문제는 복잡하지 않다. 부권(父權)의식이 없는 특이한 성격이다. 아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부권이 강하다 보니 자녀들은 부친의 사유물이나 다름없을 때였다. 가가호호(家家戶戶) 말이 좋아 엄부(嚴父)지 폭부(暴父)가 더 많았다. 자녀들은 허구한 날 매를 맞으며 동년(童年)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왕쩡치는 부친 성격 덕에 남 눈치 안 보고 자유를 만끽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도 체질에 맞는 쿤밍(昆明)에 문을 연 서남연합대학을 지원했다.   왕쩡치는 매일 새벽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사진 김명호] 서남연합대학은 전국에서 몰려온 진보적인 학생의 집결지였다. 교수들도 융통성이 많았다. 학술사에 남을 괴짜 몇 명 외에는 고집불통이 없었다. 중문과에 원서를 낸 왕쩡치는 입학시험에서 중졸의 문호 선충원(沈從文·심종문)의 눈에 들었다. 작문시험은 100분이었다. 감독하며 답안지 작성하던 응시자들의 글을 힐끔거리던 선이 제출하고 나가는 왕을 불렀다. “20분 더 줄 테니 쓰고 싶은 대로 더 써라.” 왕은 신이 났다.   개강 첫날 강의를 마친 선충원이 왕쩡치에게 저녁 사 주며 물었다. “베트남 경유해 갖은 고생하며 쿤밍에 왔다고 들었다. 일본군 손 미치지 않는 지역에도 좋은 대학이 많다. 먼 길 온 이유가 궁금하다.” 대답이 의외였다. “예쁜 여학생 많다는 소문 듣고 왔습니다.” 선도 미래의 수제자에게 맞장구를 쳤다. “잘 생각했다. 여기 여학생들은 콧대가 보통 아니다. 조심해서 접근해라.” 경험담 들려주며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초임 교수 시절 내 수업 듣는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어찌나 예쁘던지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한번 만나자는 편지 수십 통 보냈다. 답장은커녕 교장에게 편지 들고 달려가 일러바치는 바람에 망신당할 뻔했다. 당시 교장이 관용덩어리 후스(胡適·호적)가 아니었다면 지금 너와 마주하지도 못했다.” 엄청난 격려도 해 줬다. “작문 답안지 보니 네 글이 나보다 월등하다. 학업보다 하고 싶은 일에 충성해라.” 이쯤 되면 평범한 교수와 학생의 대화가 아니었다.   노벨상 양전닝 등 동기생에 실력 안 밀려   왕쩡치의 서체는 유려했다. 손님 초청하면 식단을 직접 써서 선물했다. [사진 김명호] 물리학과는 15명 중 14명이 남학생이었다. 유일한 여학생 스쑹칭(施松卿·시송경)은 건강이 엉망이었지만 악착같았다. 동기생의 회고를 소개한다. “스쑹칭은 말레이시아 화교의 무남독녀였다. 조국에서 공부하겠다며 단신으로 쿤밍까지 왔다. 셈본실력이 탁월했다. 동기생인 훗날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楊振寧·양진영)이나 ‘중국의 오펜하이머’ 덩자셴(鄧稼先·등가선)에게 거의 밀리지 않았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체력이 받쳐 주지 않았다. 생물학과로 전과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서양문학과로 옮겼다.”   학생 왕쩡치는 제멋대로였다. 기분 좋으면 학교에 가고 아니면 틀어박혀 잠만 잤다. 해가 지면 친구들과 찻집과 술집을 순례했다. 부친이 충분히 보내 준 용돈 덕에 주머니는 항상 두둑했다. 한잔 들어가면 항상 같은 말 하며 불평을 늘어놨다. “이 학교 괜히 왔다. 나는 총명하고 병태미(病態美) 풍기는 여자 만나러 여기까지 왔다.” 친구가 서양문학과에 가 보라고 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일 그러다 보니 좁은 바닥에 소문이 났다. 스쑹칭도 귀가 있었다. 서양문학과 주변에 왕이 얼쩡거리면 친구들과 어울려 피해 버렸다. 왕은 숫기는 없었다. 두 사람은 졸업 후 상하이의 한적한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쭈뼛거리는 왕쩡치에게 스쑹칭이 다가가 아는 체를 했다. 그날따라 날씨가 음산했다.   왕쩡치 사망 후 스쑹칭이 기자에게 반세기 전을 회상했다. “꼴도 보기 싫던 왕쩡치를 보는 순간 인연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3주 후 둘이서 교회 찾아가 결혼식을 올렸다. 첫날 저녁은 국수로 때웠다. 반쯤 먹자 엉뚱한 제안을 했다. ‘반지 대신 국수 바꿔 먹자’며 먹던 국수그릇을 정중히 내게 건넸다. 두 살 어린 천하의 낭만덩어리와 살 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2년 후, 시도 마지막 한숨 내쉬고 눈을 감았다.

    2023.09.02 00:01

  • 쉬푸관 “후스 열등의식 결정체” 인하이광 “그 정도는 아냐”

    쉬푸관 “후스 열등의식 결정체” 인하이광 “그 정도는 아냐”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7〉   쉬푸관(오른쪽 둘째)은 육군소장 시절 장제스의 정보비서를 역임했다. 아이젠하워가 장제스의 후임으로 낙점했다는 소문이 떠돌던 총참모장 쑨리런(孫立人·오른쪽)과 가족 나들이를 즐겼다. [사진 김명호] 1911년 10월 신해혁명 후 선보인 중화민국은 동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이었다. 줄여서 민국(民國)이라 불렀다. ‘민국시기’는 전통적인 농경문화와 서구문명의 충돌이 격렬했다. 국가와 국민을 덮친 재난이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학계와 사상계도 혼란이 극에 달했던 춘추전국(春秋戰國)과 위진(魏晉)시대와 흡사했다.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한 대학자와 사상가들이 줄을 이었다. 백가쟁명(百家爭鳴), 화려하고 섬뜩한 문장과 언사(言辭)로 찬란함 뽐내며 서로를 물어뜯었다.   민국시대의 학자와 사상가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한결같이 학문의 독립과 자유만은 시종일관 견지했다. 자유를 만끽한 지식인들은 세계가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국민정부의 공이 컸다. 형편이 어려워도 교육투자는 아끼지 않았다. 지출이 군비(軍費) 다음이었다. 지식인을 너무 존중했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성격 때문이었다. 공산당 선전과 비호, 반대당 결성이 아니면 건드리지 않았다. 전쟁시절에도 그랬고 대만으로 온 후에도 그랬다.   ‘민국’ 지식인들, 학문 독립·자유 견지   인하이광과 샤쥔루의 결혼축하연에 참석한 녜화링(왼쪽 둘째)과 녜의 모친(왼쪽 넷째). [사진 김명호] 최고 학술기관 중앙연구원 원장 취임식에 장제스가 참석했다. 공개석상에서 늘 하던 말로 끝을 맺었다. “중앙연구원도 정부의 통일대업에 힘써 주기 바란다.” 단상에 오른 원장 후스(胡適·호적)가 총통의 마지막 말에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방금 한 총통의 말은 틀렸다. 중앙연구원은 순수 학술기관이다. 독립과 자유를 견지하지 못하면 존립할 이유가 없다. 통일대업은 정부가 할 일이다. 정부를 위해 복무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장제스는 속이 끓었다. 꾹 참았다.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후스가 무슨 말 하건 내버려 둬라. 나와 정부를 비판해도 맞서지 말고 듣기만 해라. 외부에 보여 줄 언론자유의 상징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항상 존경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작은 부탁은 다 들어줘라.”   1960년 가을, 한때 후스가 사장이었던 ‘자유중국’ 발행인 레이전(雷震·뢰진)의 체포와 ‘자유중국’ 봉쇄도 후가 없는 틈을 이용했다. 최측근인 비서장 장췬(張群·장군)에게 귓속말했다. “뉴욕타임스와 시사주간지 타임이 눈치챘다는 보고를 받았다. 레이 체포를 대서특필하면 미국 출장 중인 후스가 레이 구하겠다며 귀국할 것이 뻔하다. 군사재판에 회부해서 재판을 빨리 끝내라. 미욱한 군 재판부가 사형 선고하지 못하도록 조치해라. 형량은 10년이 적당하다. ‘자유중국’ 주간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은 학술사에 자리가 확고할 사람이다. 건드리지 마라. 대만대학 철학과 강의과목 없애고 월급은 평소처럼 지급해라. 후스가 나 면담 요청하면 시간 끌어라. 레이 얘기 꺼내지 않겠다는 확약 받은 후 수락해라. 그간 후스와는 독대만 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몇 명 배석시켜라.”   1945년 9월 충칭(重慶)에 도착한 중공 부주석 저우언라이(등 보이는 사람)를 영접 나온 레이전(오른쪽).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그래도 추종자들은 달랐다. 대만의 기재(奇才) 리아오(李敖·이오)에게 국민당의 문화특무(文化特務)라고 매도 당한, 중국 신유학(新儒學)의 대가 쉬푸관(徐復觀·서복관)이 후스를 맹폭했다. “후스 선생은 박사학위에 눈이 먼 사람이다. 선생보다 박사를 존칭으로 아는 분이니 그렇게 부르겠다. 후박사의 중앙연구원 원장 취임은 중국인의 치욕이며 동방인의 치욕이다. 내가 그러는 이유는 후박사가 문학, 사학, 철학, 중국을 제대로 모르고, 서구의 과거와 현대는 더 이해 못 하기 때문이 아니다. 후박사는 70년간 어느 학문이건 주변에도 제대로 접근해 본 적이 없다. 서구에 관한 얕은 지식과 영어로 유구한 전통문화에 대한 무지를 덮으려 하는 열등의식의 결정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후박사의 반론을 기대한다.” 후는 병 핑계로 대응을 피했다. 쉬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다. 중국의 완전서구화를 주장하던 전반서화론(全盤西化論)자 인하이광이 쉬와 논쟁을 벌였다. 시작이 심상치 않았다. “언어가 너무 악독하다. 후스 원장이 그 정도는 아니다. 쉬의 편견이 그렇게 심한 줄 몰랐다.” 쉬가 발끈했다.   인, 미국에 있는 녜에게 저작권 선물   1958년 후스(오른쪽)의 중앙연구원 원장 취임식 참석차 연구원을 방문한 장제스. [사진 김명호] 한 시대를 풍미했던 쉬푸관과 인하이광은 적이면서 친구였다. 쉬가 기라성들이 운집한 신유학의 상징이라면 인은 자유주의의 기수였다. 가치관도 달랐다. 쉬는 전형적인 전통주의자, 인은 신문화운동의 세례를 받은 반전통주의자였다. 상대를 용납할 공간이 바늘구멍만큼도 없었다. 둘이 만나면 목청을 높이고 크게 웃기를 반복했다. 인이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의 모친에게 단언한 적이 있었다. “20년간 쉬를 혐오했지만 내가 아는 최상의 인물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을 접은 적이 없다. 내겐 가장 빼어난 감상의 대상이다. 반려자 샤쥔루(夏君璐·하군로)도 쉬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녜의 모친은 감동했다. 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인하이광은 열정과 용기로 충만한 이상주의자다. 원수 사이인 줄 알았던 쉬푸관을 가슴 깊은 곳에 담고 있는 것 보고 놀랐다. 두 사람은 단순한 적대관계가 아니다. 진정한 친구며 적이다. 저토록 미묘한 인간관계는 처음 본다.”   녜화링은 모친 병문안 온 인하이광을 모질게 대했다. 인이 다시 오겠다고 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는 오지 마라. 너와 병상의 모친이 마주한 모습 보면 너무 슬프다. 내 억장이 무너진다.” 인은 알겠다며 등을 돌렸다. 죽음이 임박하자 녜화링 모녀와의 인연을 잊지 않았다. 지혜로운 조강지처 샤쥔루와 주고받은 서신을 제외한 저서의 저작권을 미국에 있는 녜에게 선물했다.

    2023.08.26 00:01

  • 녜화링 모친 "제발 꽃·책 그만 사라" 인하이광에게 잔소리

    녜화링 모친 "제발 꽃·책 그만 사라" 인하이광에게 잔소리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6〉   대만대학 철학과 교수 시절 열강하는 인하이광. 학생들 외에 교수들, 특히 여교수들이 많이 청강했다. [사진 김명호]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은 책과 꽃을 생명처럼 여겼다. 이재에는 숙맥이었다. 대만대학 교수 월급과 원고료도 적지 않았지만 항상 빈털터리였다. 매일 아침 한집에 사는 ‘자유중국(自由中國)’ 동인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의 모친에게 콩국(豆奬) 사 먹을 돈을 빌렸다. “아침 먹을 돈이 없다. 원고료 나오면 갚겠다.” 녜의 모친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하며 돈을 내줬다. “인 선생아, 원고료 받으면 통째로 내게 맡겨라. 제발 꽃과 책은 그만 사라.” 같은 일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녜화링 모친 “인, 복잡하면서도 단순”   레이전 투옥 2년 후 초대 ‘자유중국’ 발행인 후스(왼쪽)는 중앙연구원 원장 재직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김명호] 녜화링에게 소설을 쓰라고 권한 사람도 인하이광이었다. “너는 총명한 여자다. 남이 쓴 소설만 보지 말고 직접 써라.” 2003년 봄, 80세를 앞둔 녜화링이 반세기 전 타이베이의 골목에서 모친과 두 딸 데리고 절세의 자유주의 사상가와 한집에 살던 시절을 회상했다. “당시 나는 너무 가난했다. 만년필 사고 싶어도 돈이 없었다. 먹물과 펜으로 만족했다. 하루는 인하이광이 원고료 탔다며 파카 만년필 사 들고 와서 모친에게 자랑했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인하이광 바라보며 웃기만 하던 모친이 달래듯이 말했다. ‘이 사람아! 쓰던 만년필 두고 새것은 뭐 하러 샀느냐.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옷을 봐라. 진작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 것들이다. 비싼 만년필이 웬 말이냐?’ 인하이광은 줄 사람이 있다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간 사용하던 파카 만년필 들고나와 내게 줬다. ‘오래 썼지만 소설 몇 권은 더 쓸 수 있다.’ 나는 대사상가가 오랫동안 사용하던 만년필을 받고 감동했다.”   ‘자유중국’ 창간 시절의 레이전. [사진 김명호] 이튿날 저녁 인하이광이 녜화링 모녀의 방을 노크했다. 좌불안석, 한동안 어쩔 줄 몰라 쩔쩔매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만년필을 돌려줘도 되겠느냐?” 녜화링은 웃음이 나왔다. “원래 모두 네 만년필이다.” 인하이광은 아니라며 손사레를 쳤다. “네게 줬으니 이젠 네 물건이다. 다시 달라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만년필을 돌려받은 인하이광은 고맙다며 쎼쎼(謝謝)를 연발했다. 이어서 두 손으로 새로 산 만년필을 녜화링에게 선물했다. 옆에서 지켜본 녜화링의 모친은 어이가 없었다.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사람이다. 원래 너 주려고 산 만년필이다. 부담 덜어 주려고 저런 식으로 선물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당시 파카 만년필은 고가였다. 밀가루 15푸대 값과 비슷했다. 녜화링은 인하이광의 귀한 선물로 소설 6권을 썼다.   인 ‘언론자유 인식’ 글 덕에 체포 면해   연금시절의 인하이광. [사진 김명호] 인하이광과 녜화링의 모친은 서로를 아꼈다. 1951년 봄, 공군에 있던 녜화링의 남동생이 항공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녜화링은 모친에게 사실을 숨겼다. 영민한 모친이 아들의 사망을 모를 리 없었다. 인하이광은 졸지에 자식 잃은 여인은 돌아버리기 쉽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매일 황혼 무렵 밖에 나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자유중국’ 사택인근은 사방이 논밭이었다. 함께 산책하며 생사애락(生死哀樂)과 전란과 생활과 종교를 얘기하며 심리적 방어막 만들어 주기에 골몰했다. 6개월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1956년 샤쥔루(夏君璐·하군로)와 결혼한 인하이광은 대만대학 교수 숙소로 이사했다.   1960년 9월 4일 토요일 오전 9시 대만경비총사령부(警總)가 ‘자유중국’ 발행인 레이전(雷震·뢰진)과 직원 3명을 체포했다. 간첩불고지와 내란음모가 이유였다. 녜화링의 집도 압수수색을 피하지 못했다. 모녀는 인하이광의 안위를 우려했다. 신문만 오면 체포자 명단을 꼼꼼히 살폈다. 인하이광이 체포를 면한 이유는 1951년 ‘자유중국’에 발표한 ‘언론자유의 인식과 기본조건’이라는 글 때문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하늘이 부여한 천부(天賦)의 인권이다. 고대의 군주전제와 근대의 극권통치는 천부의 기본권리를 박탈했다. 언론의 자유 요구는 대역부도(大逆不道)나 마찬가지였다. 인간 사회의 수많은 비극은 입과 손끝에서 시작됐다. 언론자유의 본질은 특정된 내용과 목적이 필요 없다. 지금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혼란을 일으키고 종식시킬 수도 있는 도구로 변질된,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방종의 원동력은 지나친 열정과 사욕(私慾)이다. 자유는 다르다. 이성과 책임이 출발점이다. 방종과 혼합이 불가능하다.” 법치(法治)와 법률가의 자격도 한마디로 정의했다. “법은 말이 없다. 다루는 사람이 중요하다. 법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 남발하는 사람은 법을 다룰 자격이 없다. 법을 통치의 도구로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 고지식하고 상식을 존중하는 사람이 적합하다.”   젊은 나이에 10년간 ‘자유중국’ 문예란 담당했던 녜화링은 발행인 레이전과 주필 인하이광에게 받은 영향에서 평생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10년간 ‘자유중국’ 발행한 레이전은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후스(胡適·호적)가 만인에게 건립 제의했던 동상은커녕 10년간 감옥 밥을 먹었다. 인하이광은 대학에서 쫓겨났다. 특무요원과 문화경찰의 감시받으며 연금생활 하다 나이 50에 백발이 된 채 세상을 뒤로했다. 마지막 외출이 녜화링 모친의 병문안이었다.

    2023.08.19 05:16

  • 문단의 총아 녜화링 “후스 싫다” 공항서 헌화 요청 거절

    문단의 총아 녜화링 “후스 싫다” 공항서 헌화 요청 거절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5〉   ‘자유중국’ 문예란을 총괄하던 시절 ‘자유중국’의 여류 작가들과 자리를 함께한 녜화링(가운데). [사진 김명호] 먼 옛날부터 인간은 유희(遊戱)를 좋아했다. 구경은 더 즐겼다. 세월이 흐를수록 정치도 한 편의 유희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치무대에서 명 연기 뽐내는 인물들에게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자유와 민주의 상징이라 추앙하던 후스(胡適·호적)는 명연기자였다. 등 떠밀고 여차하면 뒤로 빠지는 재주에 능했다. 믿고 있다 골탕 먹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1949년 봄 후스는 대륙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상하이에서 미국 갈 기회 엿보던 중 국민당 중앙위원 레이전(雷震·뢰진)의 방문을 받았다. ‘자유와 민주’를 선전하는 간행물을 내자고 하자 입이 벌어졌다. 즉석에서 동의했다. “잡지 이름은 ‘자유중국(自由中國)’으로 하자. 발간사는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작성하겠다.” 대만에 정착한 레이전은 ‘자유중국’을 창간했다. 발행인에 미국에 있는 후스의 이름을 올렸다. 창간호를 받아본 후스는 편집위원의 면면에 깜짝 놀랐다. 국민당 개혁파는 그렇다 치더라도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은 버거웠다.   ‘자유중국’ 3주년 창간 기념식 열어   타이베이 인하이광기념관의 서재 모습. [사진 김명호] ‘자유중국’은 젊은 군인과 지식청년들을 열광시켰다. 독자투고가 줄을 이었다. 국민당 비판으로 통치권력과 충돌 직전까지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창간 2년 후 일이 벌어졌다. 1951년 가을 고리대금업자들의 금융사건이 터졌다. 보안사령부가 함정을 파서 범인들을 체포했다. 인하이광을 위시한 편집위원들은 분노했다. “정부가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도했다”며 정부를 맹폭했다. 보안사령부 부사령관 펑멍지(彭孟輯·팽맹집)는 보안사령부 실세였다. ‘자유중국’ 편집위원 체포를 지시했지만 대만성 주석을 겸한 사령관의 반대로 주저앉았다. 미국에 있던 후스는 불안했다. 레이전에게 묘한 편지를 보냈다. “범죄를 유발토록 한 정부를 비판한 옛 친구들의 글에 감동했다. 경의를 표한다. 군사기관의 언론 자유 간섭에 분노한다. 항의 표시로 발행인 직을 사직하겠다.”   인하이광(오른쪽)과 수제자 린위성(林毓生). 하이에크의 명저 『노예의 길』을 함께 번역했다. [사진 김명호] 당시 대륙과 대만은 해외에 있는 명망가 영입에 열을 올렸다. 전 총통대리 리중런(李宗仁·이종인)과 우주과학자 첸쉐썬(錢學森·전학삼), 전 주미대사 후스의 향방이 주목을 끌었다. 1952년 11월 미국을 출발한 후스의 대만 도착은 국민당 지지를 의미했다. 정부와 척을 진 ‘자유중국’과의 관계 설정에 관심이 집중됐다. 인하이광 등 젊은 편집위원들은 후스를 믿지 않았다. “고통을 삼킬 줄 모르는, 양지만 찾아다닌 사람이다. 전쟁시절 중국에 있어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여자와 명예학위 구걸에만 열중했다. 말로만 민주와 언론의 자유, 관용을 외치며 청년들을 험지로 떠밀었다. 정작 일이 터지면 미꾸라지로 돌변했다. 요리 빠지고 조리 빠졌다. 대만 선택은 우리와 상관없다.” 레이전은 달랐다. 후스의 ‘자유중국’ 지지를 의심치 않았다. “후스는 누가 뭐래도 ‘자유중국’의 사장이다. 창간 3주년에 맞춰 대만으로 왔다. 열렬히 환영해야 한다.” 녜화링(聶華笭·섭화령)에게 권했다. “후스가 여사의 글을 좋아한다. 공항에 나가 환영 화환 주도록 해라.” 녜화링은 후스가 싫었다. 레이전의 책상에 메모를 남겼다. “제게 헌화를 요청하셨습니다. 공항에서 벌어질 아름답고 열광적인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아름다운 여자가 아닙니다. 갈채의 중심에 함께할 자격이 없습니다. 헤아려 주시길 청합니다.”   “모 여인, 후스에게 반해” 소문 돌아   녜화링 모친의 학생시절. 인하이광은 부인 외에는 누구의 말도 안 들었다. 녜화링의 모친만은 예외였다. [사진 김명호] 그날 밤 레이전은 후스와 ‘자유중국’ 동인들을 집으로 초청했다. 후스 만나느니 엄마와 윌리엄 홀든 나오는 영화 보러 가겠다는 녜화링을 인하이광이 달랬다. “후스는 ‘자유중국’의 호신부다. 부적 보러 가는 셈 치고 함께 가자. 헌화 거절은 잘했다. 유명 작가에게 헌화 권한 레이전의 고충을 이해해라.” 모친도 인하이광 편을 들었다. “윌리엄 홀든은 항상 우리 모녀를 기다린다. 다음에 보러 가자.”   후스의 대만 방문은 대형 사건이었다. 레이전의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쳤다. 문단의 총아로 자리 잡은‘자유중국’ 문예란 주임 녜화링이 나타나자 머리 굴리기에 분주했다. 다양한 소문이 퍼졌다. “후스가 대만에 온 이유는 단순하다. 좋아하는 여류작가 만나는 것이 주 목적이다.” 떠도는 말도 부지기수였다. 한 가지만 소개한다. “이름 밝히기 꺼려하는 여인이 후스에게 홀딱 반했다. 가는 곳마다 모습을 드러낸다. 문 밖에서 기다리다 이동하는 곳으로 몇 발짝 뒤에서 따라간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사람이다.” 뜬소문의 피해를 입은 녜화링은 후스가 더 싫어졌다. 위로하는 인하이광에게 너 때문이라고 화를 냈다.   ‘자유중국’이 후스 환영회와 창간 3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사회명사와 국민당 관료 100여명을 초청했다. 후스가 대만 도착 후 첫 번째 마이크를 잡았다. 레이전과 ‘자유중국’ 동인들을 추켜올렸다. “그간 레이 선생과 ‘자유중국’은 민주와 자유를 위해 분투했다. 대만인들은 선생의 동상을 건립해야 한다.” 박수가 요란했다. 이어서 엉뚱한 발언을 했다. “‘자유중국’ 잡지는 발행인에 내 이름을 사용했다. 국민당 원로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발행인을 환영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발행한 적이 없는 발행인이라며 부끄럽다고 했다. 수년간 발행인이라는 허명에 도취했다. 책임 지려해도 질 일이 없어 곤혹스럽다. 이제 허명에서 벗어나려 한다.” 인하이광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따라오는 녜화링에게 한마디 했다. “저거 꼭 저럴 줄 알았다.”   편집동인들은 ‘자유중국’의 진정한 영혼을 찾았다. 인하이광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2023.08.12 00:20

  • 인하이광 “신문화운동 때 청년 들뜨게 한 후스는 죽었다”

    인하이광 “신문화운동 때 청년 들뜨게 한 후스는 죽었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4〉   1956년 3월, 인하이광과 현명한 내조자 샤쥔루의 결혼식. 이날 인하이광은 녜화링의 모친이 장만한 양복을 입었다. [사진 김명호]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은 소녀 시절 글솜씨가 출중했다. 난징(南京)의 국립중앙대학 외국문학과 재학시절 퇴짜 맞을 셈 치고 문학잡지에 가명으로 원고를 보냈다. 결과가 의외였다. 고액의 원고료와 글 청탁이 계속 들어왔다. 하루는 교육부 부부장이 보자고 했다. 만나 보니 순국한 부친 친구였다. 싱거운 말만 주고받았다. “일자리 구한다고 들었다.” “맞다.” “교사를 시켜주마.” “교사는 싫다.” 부부장은 웃기만 했다.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말해라.” “나도 잘 모르겠다.” 런던대학 마치고 여러 대학교수를 역임한 항리우(杭立武·항립무)는 마음이 넓었다. 무례를 나무라지 않았다. 격려해 줬다. “네 글을 봤다. 글에 속기(俗氣)가 없다. 계속 써라. 네 모친은 훌륭한 교사였다. 잘 봉양해라.” 졸졸 따라다니던 대학 동기와 결혼했다. 남편은 결벽증과 의처증이 심했다. 언어폭력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항상 밖으로 떠돌았다. 1년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1949년 중반, 국민당은 내전 패배를 자인했다. 대만 천도 앞두고 순국한 장성 유족들을 챙겼다. 녜화링 가족도 1949년 6월 대만 땅을 밟았다. 당장 먹고살 길이 없었다. 거리에서 만난 대학 친구가 일자리를 소개하며 수다를 떨었다. “국민당 중앙위원 레이전(雷震·뢰진)이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편집위원들의 면면이 교육부장과 대만은행 총재 등 화려하고 다양하다. 대만대학 교장 푸스녠(傅斯年·부사년)이 철학과 교수로 초빙한 자유주의자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도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발행인은 미국에 있는 후스(胡適·호적)지만 실제 업무는 레이전이 총괄한다. 장제스도 자금 지원을 했다고 들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남자보다 문자(文字)와 인연이 많다. 지금 ‘자유중국’은 좋은 필자 구하느라 분주하다. 내가 레이전 부부를 잘 안다. 소개할 테니 함께 가자.”   녜화링 가족, 1949년 대만 땅 밟아   1958년 4월 대만에 정착한 후스(둘째 줄 왼쪽 넷째)는 정부 눈 밖에 난 ‘자유중국’과 선을 그었다. 중앙연구원 원장 취임을 앞두고 ‘자유중국’ 편집위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눴다. 후스 왼쪽이 녜화링과 샤쥔루. 셋째 줄 중앙 장신이 레이전, 레이전 오른쪽 둘째가 인하이광. [사진 김명호] 레이전은 녜화링의 참여를 반겼다. “좋은 글 부탁한다”며 집까지 마련해 줬다. “대만성 주석 우궈전(吳國楨·오국정)이 일본 적산가옥 한 채를 우리에게 내줬다. 방 3개에 거실도 쓸 만한 집에 인하이광 혼자 살고 있다.” 녜화링은 인하이광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었다.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하다. 비사교적이고 오만함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사람이다. 흉측한 집에 귀신과 함께 산다.”   녜화링의 모친(오른쪽)과 두 딸. [사진 김명호] 거처가 마땅치 않았던 녜화링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린 두 딸과 모친 모시고 이사했다. 남루한 복장으로 마당에 서성이던 인하이광은 표정이 없었다. 그날 밤 모친은 괴물 중에 상괴물과 한집에 살게 됐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녜화링도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날이 밝자 상황이 급전했다. 모친이 장미꽃 한 다발 들고 녜화링을 깨웠다. “일어나 보니 방문 앞에 꽃이 놓여 있다. 귀여운 괴짜를 괴물로 오해했다. 꽃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 하류배들의 입소문은 귀에도 담지 말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녜화링의 회고 한 구절을 소개한다. “장미화를 계기로 중국이 자랑하는 자유주의자는 우리 가족에 합류했다. 같이 저녁이라도 하는 날은 밥보다 언어의 성찬이 벌어졌다. 인하이광은 아름다움과 애정, 중국인의 문제점과 미래의 세계, 쿤밍(昆明)의 서남연합대학 시절과 존경하는 스승 진웨린(金岳霖·김악림)과의 인연, 쿤밍의 가을 하늘과 야생화, 러셀, 하이에크, 아인슈타인과 주고받은 편지 얘기하며 모친을 웃기고 울렸다. 애정 표현도 특이했다. 매주 토요일 대만대학 재학 중인 약혼자 샤쥔루(夏君璐·하군로)가 오면 말없이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인하이광의 강연 참관 회상도 빠뜨리지 않았다. “모친이 조르기에 함께 갔다. 인하이광은 젊은 지식인들의 우상이었다. ‘우리의 총통은 위대한 반공주의자다. 그래서 나는 총통을 지지하고 존경했다. 총통이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지지를 철회했다. 총통은 스탈린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전제(專制)는 계승했다. 자유와 인권을 무시하고 좁디좁은 섬에 계엄령이 웬 말이냐’는 말에 환호가 터졌다. 강연 마친 후 우리 모녀 발견하자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모친도 두 손 번쩍 들고 화답했다. 청중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열렬한 박수 보내며 인하이광을 연호했다.”   “꽃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   1952년 대만으로 돌아온 후스와 레이전의 만남에 동석한 녜화링. [사진 김명호] 레이전은 녜화링의 글을 좋아했다. “미국에 있는 후스도 여사 글 보고 칭찬했다. 문예(文藝)란 전담하고 편집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해라.” 녜화링은 자기주장이 강했다. 조건을 달고 수락했다. “순수문학 작가를 발굴하고 반공문학은 배제하겠다.” 당시 국민당은 반공문학이 아니면 문학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작가들은 먹고살기 위해 반공문학에만 전념할 때였다.   그날 밤 인하이광이 모녀의 방을 노크했다. “잠깐 들어가고 싶다.” 맥스웰커피 두 잔 들고 한 개밖에 없는 등나무에 털썩 앉았다. 모녀에게 한 잔씩 주고 후스를 비판했다. “신문화운동시기 청년들을 들뜨게 했던 후스는 이미 죽었다. 정치가도, 학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세계 각국 다니며 명예학위수집가로 전락했다. 34개 명예학위 받은 것 자랑하는 속물로 변했다. 지금 대륙과 대만은 해외에 있는 명망가 영입에 분주하다. 후스가 어린 아들이 있는 대륙을 버리고 대만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천륜을 무시한 사람이다. 지금은 ‘자유중국’의 상징이지만 언제 우리를 버릴지 모른다.” 인하이광의 예측은 적중했다.   녜화링은 칠십 년 전, 인하이광이 타 준 커피 맛을 평생 잊지 못했다. 백 세를 앞둔 지금도 최고의 커피는 맥스웰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2023.07.29 00:20

  • 인하이광 필봉에 반한 장제스, 국민당 기관지 주필 맡겨

    인하이광 필봉에 반한 장제스, 국민당 기관지 주필 맡겨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3〉   샤쥔루의 부친은 ‘큰 사고 칠 놈’ 이라며 인하이광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가출한 샤는 대만행 마지막 배에 올랐다. 대만대학 농학과 졸업 후 인하이광과 결혼했다. [사진 김명호] 1950년대와 60년대, 대만에는 대륙에서 명성을 날리던 지식인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중 가장 저명한 인물 한 명만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후스(胡適·호적)였다. 영향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천하의 후스도 인하이광(殷海光·은해광)엔 미치지 못했다. 자유주의의 상징으로 이름만 나란히 했다.   1949년 말 국민당은 대륙에서 실패했다. 대만천도 후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한쪽은 전제(專制)에 철저하지 못했다며 보다 강력한 1인독재를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정반대였다. “자유와 민주를 너무 억압했다. 말로만 혁명과 진보를 외쳤다. 국민이 우리를 버렸다. 철저한 반성이 먼저다.” 반성을 주장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호응도 기대 이하였다. 반성에 성공한 사람이 인하이광이었다.   인하이광의 제자 한 명이 스승의 성공 원인을 글로 남겼다. “선생의 강의는 문장만 못했다. 문장도 한가하게 차 마시며 나누던 한담 내용만 못했다. 한담도 강연만 못했다. 강연은 재기가 번득거렸다. 감성 색채가 농후한 이성의 설파였다. 흡입력도 대단했다. 우리의 정신적 자석이었다.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원인이 있다. 선생은 매력이 있었다.”   여성들 “그와 살면 죽어도 여한 없겠다”   중년시절의 녜화링. 인하이광은 녜화링의 모친과 샤쥔루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사진 김명호] 1976년, 세계 각국 작가 300여명이 연합으로 일을 벌였다. 미국인 남편과 함께 아이오와대학에 작가습작교실을 설립한 중국 여류작가 녜화링(聶華笭·섭화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녜화링의 작품들이 영어권은 물론 한자문화권을 강타했다. 문학작품보다 단편소설 모음 형식의 회고록이 주목을 끌었다. 황당했던 시절의 중국 명인들, 특히 인하이광의 이야기를 유려한 문체로 접한 독자들의 반응은 긴말이 필요 없었다. “애통하다” 한마디면 충분했다. 여자들이 특히 심했다. 학생, 미혼여성, 유부녀, 노는 여자 할 것 없이 하는 말들이 비슷했다. “인하이광과 몇 년을 한집에서 생활한 녜화링 모녀는 복을 타고났다. 20년을 부부로 함께한 샤쥔루(夏君璐·하군로)는 말할 것도 없다. 부러워 죽겠다. 나라면 몇 달만 같이 살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소년 인하이광은 조숙했다. 중학생 시절 철학자 진웨린(金岳霖·김악림)의 난해한 논리학 서적 읽으며 새벽을 기다렸다. 모르면 읽고 또 읽으면 된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다. 고등학교 마치자 진웨린 만나겠다며 무조건 베이핑(지금의 베이징)으로 갔다. 칭화대학 철학과 교수 진웨린은 타고난 자유주의자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대하고 존중했다. 나이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청년에게 맥스웰 커피 권하며 친절을 베풀었다. 대철학자의 서재를 본 인하이광은 깜짝 놀랐다. 서가에 책이라곤 30여권이 다였다. 용기를 내서 이유를 물었다. 비수 같은 답이 소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학술서적이건 문학작품이건 유행을 탄 책들은 선전문이나 다름없다. 사색의 원천이 될 몇 십 권이면 충분하다. 사색이 없는 사람은 행동이 거칠고 염치를 모른다. 사색은 사고가 한곳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을 진보나 보수라 규정하는 사람들은 변기통에 꿈틀거리는 구더기나 마찬가지다.”   인, 서남연합대 진학 진웨린 지도받아   타이베이 골목의 인하이광이 살던 집. [사진 김명호]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진웨린은 쿤밍(昆明)에 있는 전시 중국의 최고학부 서남연합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하이광은 진웨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서남연합대학에 합격했다. 전국에서 몰려온 준재들과 어울리며 진웨린의 지도를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장제스를 지지하고 숭배했다. 틈만 나면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에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내지는 파시즘 성향이 강한 글을 투고했다. 내용이 격렬하고 흡입력이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우파로 명성을 떨쳤다. 장제스 숭배가 원인이었다.   국민당 지도부가 인하이광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중앙일보에 자리를 마련했다. 필봉이 매서웠다. 장제스도 어떤 청년인지 궁금했다. 관저에서 인하이광과 점심 하며 장시간 얘기를 주고받았다. 서로 실망했다. 장제스는 기대를 접지 않았다. 버르장머리 없는 청년을 중앙일보 주필에 임명했다. ‘민심을 수습하라’는 인하이광의 글 읽고 얼굴을 찌푸렸다. 불쾌한 내용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국·공전쟁 패배를 감지하자 중요 임무를 줬다. “중앙일보를 타이베이로 이전해라.”   서재에서 포즈를 취한 인하이광. [사진 김명호] 인하이광은 싸구려 니켈반지를 사서 곱게 포장했다. 친구 여동생 샤쥔루와 강변을 산책했다. 헤어질 무렵 선물을 줬다. “나는 대만으로 떠난다. 인연이 있으면 대만에서 만나자. 5년이고 10년이고 기다리겠다. 올 때는 이 반지를 끼고 와라. 싫으면 저 강물에 던져버려라. 네가 오면 나는 무조건 네 말만 듣겠다.” 샤쥔루는 나이는 어려도 알 건 다 알았다. 반지를 인하이광에게 돌려주면서 왼손 약지를 내밀었다.   타이베이에 정착한 ‘대만판 중앙일보’ 주필 인하이광은 민주와 인권을 노래하며 언론의 자유를 맘껏 누렸다. 대만대학도 철학과 교수로 초빙했다. 강의실은 연일 인산인해였다. 인하이광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2023.07.22 00:20

  • 다나카 맞은 마오 “회담은 싸움이다, 싸우다 친구 된다”

    다나카 맞은 마오 “회담은 싸움이다, 싸우다 친구 된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2〉   1972년 9월 29일 오전, 연합성명에 서명을 마친 저우언라이와 다나카. [사진 김명호] 1972년 9월 초, 중국은 일본과 관계정상화를 앞두고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를 난도질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다.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일부분이다. 일본과 대만이 체결했던 모든 조약은 불법이며 무효다.” 9월 16일, 일본 자민당 대표단이 베이징에 도착했다. 목적은 총리 다나카의 중국 방문 마지막 준비공작이었다. 공동성명 초안에 합의하기까지 이틀이 걸렸다.   일본 자민당에는 친대만파가 많았다. ‘청풍회(淸風會)’를 중심으로 총리 다나카의 베이징 방문 반대목청이 만만치 않았다. 여론 주도층도 마찬가지였다. 대륙과의 관계정상화만 지지했다. 대만과의 단교는 지지하지 않았다. 다나카도 암살을 당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출국 전날 딸 마키코에게 유언 비슷한 말을 남겼다. “어느 나라를 가건 너를 데리고 다녔다. 중국은 함께 갈 수 없다. 대륙이나 대만의 자객들이 우리를 기다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유일한 자식이다.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업을 계승할 사람이 없다.”   중 “일본 인민도 전쟁 피해자들” 선전   숙소에서 다나카를 영접하는 마오쩌둥. 1972년 9월 27일 밤 중난하이(中南海). [사진 김명호] 외상 오히라에겐 대놓고 불안함을 숨기지 않았다. “골프장에 가자.” 오히라가 반문했다. “내일 우리는 베이징에 가야 한다. 골프가 웬 말이냐?” 다나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마지막 골프가 될지 모른다. 베이징에 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예감이 든다. 사람은 모두 죽기 마련이다. 골프 치며 준비를 하고 싶다. 중국과의 담판에 실패하면 우리의 생명도 끝난다.” 과장이 아니었다. 당일 밤 경시청이 세타가야(世田谷)에서 다나카 암살을 기도하던 우익청년을 체포했다. 오히라와 관방장관 니카이도의 가족들은 매일 밤 협박 전화에 시달렸다.   중국도 다나카 방문이 임박하자 선전활동을 폈다. “일본 군국주의자 일부와 일본 국민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본인민도 중국인민과 매한가지로 지난 전쟁의 피해자들이다.” 9월 25일 오전 베이징공항에서 열린 환영 장면도 닉슨에 비해 거창했다. 닉슨은 의장대 도열이 다였다. 환영 군중이나 헌화도 없었다. 다나카는 달랐다. 3000명이 꽃 수술 흔들고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예젠잉(葉劍英·엽검영)등 지도층의 영접을 받았다. 다나카는 저우와 악수 나누며 자기소개를 했다. “성명은 다나카 가쿠에이, 당년 54세, 현직 일본 총리다. 잘 부탁한다.”   다나카 방문 당시 베이징대학 기숙사 문전. [사진 김명호] 다나카는 평소 중국 음식과 술을 좋아했다. 첫날 오찬 때 식욕 과시하며 마오타이주(茅台酒)를 통음했다. 첫 번째 회담도 마오타이주 칭찬으로 시작했다. “정말 좋은 술이다. 회담 끝나고 또 마시고 싶다.” 저우언라이가 외교부장 지펑페이(姬鵬飛·희붕비)에게 지시했다. “귀국 선물로 마오타이주 48병을 준비해라.” 일본에 마오타이주 선풍이 일었다. 가격이 4배로 급등했다.   인민대회당에서 환영만찬이 열렸다. 다나카의 답사 중 한 구절이 중국 측 참석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지난 수십 년간 양국 관계에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중국 국민들에게 유감을 표한다”를 일본 측 통역이 “폐를 끼쳤다”로 옮겼다. 저우언라이의 영문전담 통역 탕원셩(唐聞生·당문생)이 당시 분위기를 구술로 남겼다. “큰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폐를 끼쳤다’는 한마디로 얼버무리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표현 자제하는 총리도 만면에 불만이 가득했다.” 일본 언론들은 저우가 다나카의 앞 접시에 음식 놔 주는 사진과 화기애애한 만찬분위기를 대서특필했다. 아사히신문은 달랐다. 다나카 총리의 치사는 길었다.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중국 측 참석자들의 박수가 요란했다. 저우언라이가 ‘재난’이라고 했던 전쟁을 다나카 총리가 ‘폐를 끼쳤다’고 하자 장내에 냉기가 돌았다. 박수는커녕 자리를 뜨는 중국인도 있었다. 두 번째 회담에서 저우가 다나카의 발언에 문제를 제기했다. 다나카는 솔직했다. “중국은 선거가 없어서 좋겠다. 우리는 무슨 일이건 선거를 통해 결판이 난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암살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본의 친대만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변명도 곁들였다. “일본에선 ‘폐를 끼쳤다’는 말 속에 사죄의 의미가 있다. 내 생각을 말하겠다. 과거사에 책임을 통감하고 사죄한다.”   마오 “장제스가 이미 배상 요구 안 해”   단교 소식에 대만은 분노했다. 일본상품과 다나카 사진을 불사르는 대만대학 학생들. [사진 김명호] 최종 정리는 마오쩌둥이 했다. 9월 27일 저녁 무렵 외교부 ‘예빈사 사장(의전국장)’ 한쉬(韓敍·한서)가 일본 측에 통보했다. “오늘밤 마오 주석과 귀국 총리의 회견이 있다. 몇 시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8시에서 9시 사이로 알면 된다.” 다나카는 긴장했다. 계속 얼음물만 마셔댔다. 8시 무렵 저우가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 시펑페이와 함께 다나카의 숙소에 나타났다. 다나카는 얼음물을 두 잔 더 마시고 저우의 차량에 탑승했다. 오히라와 니카이도는 시펑페이와 랴오청즈의 차에 동승했다.   마오가 직접 문 앞에서 다나카 일행을 맞이했다. 악수를 나눈 다나카의 첫마디가 모두를 웃겼다. “화장실을 빌리고 싶다. 소변이 급하다.” 마오가 화장실로 안내했다. 볼일 마치고 나온 다나카의 긴장을 풀어 줬다. “혁명시절 길바닥이나 논두렁에서 대소변 보면 정말 시원했다.” 다나카도 “나도 노가다시절 그랬다”며 웃었다.   자리에 앉은 마오쩌둥은 농담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최근 나는 대관료주의자로 변신했다.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습관이 생겼다.” 니카이도에게 랴오청즈를 소개했다. “국민당 원로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 선생과 허샹닝(何香凝·하향응) 동지의 아들이다. 와세다대학 재학시절 야구부였다. 일본 사정에 훤하다.” 니카이도도 동의했다. “일본인 치고 랴오 선생 모르는 사람은 없다. 참의원에 나가도 쉽게 당선된다.” 다나카와 저우에게도 눈길을 줬다. “회담은 싸움이다. 싸우다 보면 저절로 친구가 된다. 평등을 유지하며 열심히 싸워라. 전 세계가 우리의 만남을 놓고 전전긍긍한다. 미국과 소련은 대국이다. 조심해야 한다. 방심은 금물이다.” 배상문제도 거론했다. “장제스가 이미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도 뒤만 보고 살 수 없다. 앞이 중요하다.”   니카이도도는 회고록에서 마오와의 만남을 한마디로 평했다. “회담이 아니었다. 1시간가량 마오쩌둥 혼자서 얘기했다. 우리는 듣기만 했다. 귀국길에 오른 다나카는 딸을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2023.07.15 00:20

  • 저우 “일본에 중국 바람 일으켜라” 상하이발레단 일 공연

    저우 “일본에 중국 바람 일으켜라” 상하이발레단 일 공연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1〉   생면부지의 발레리나들과 함께한 쑨핑화. [사진 김명호] 중공(중국공산당)은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선포 후 소련과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미국 눈치 보며 대만의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중화민국은 일본에 전쟁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중·소관계가 악화되자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았다. 일본도 대륙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그간 외교관계는 없어도 문화교류는 활발했다.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 사무실 도쿄연락처’와 일본이 베이징에 설립한 ‘다카사키 다스노스케(高崎達之助) 사무실 베이징 연락 사무소’라는 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 “몰려오는 대화 불길 맹렬” 메시지   상하이발레단 단장 쑨핑화(가운데)를 직접 만나 중국 방문의사를 밝힌 다나카(오른쪽). 1972년 8월 15일 오후, 도쿄 제국호텔. [사진 김명호] ‘도쿄연락처’와 ‘베이징 연락사무소’는 수교가 없던 양국관계를 민간교류에서 반관반민(半官半民) 단계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중국 대외우호협회’ 회장도 겸한 ‘도쿄연락처’ 수석대표는 아무나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위상이 해외주재 대사 이상이었다.   ‘핑퐁외교’로 시작된 미·중관계의 파빙(破氷)에 일본은 민감하게 대응했다. 일·중관계 회복을 요구하는 정당과 사회단체의 집회와 시위가 줄을 이었다. 사회당과 공명당, 민사당도 중국을 방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자민당과 야당의원 300여명은 ‘일·중수교 촉진 의원연맹’까지 결성했다. 재계와 문화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랴오청즈를 불렀다. “일본에 중국 바람 일으킬 필요가 있다.” 랴오도 동의했다. 전 ‘도쿄연락처’ 수석대표 쑨핑화(孫平化·손평화)에게 지시했다. “일본 언론계 인사들을 접촉해라.” 1972년 7월 10일 밤, 일본의 일·중문화교류협회와 아사이신문(朝日新聞)의 초청에 응한 상하이발레단 208명을 태운 일본 항공기 2대가 하네다 공항에 착륙했다. 야밤에 내리는 보슬비도 일본의 중국 선풍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환영객 2000여명이 몰려와 극성을 떨었다. 7월 12일, 다나카 내각 출범 1주일 후, 아사이신문이 주관한 상하이발레단 환영연도 가관이었다. 전국에서 운집한 각계인사 2000명이 쑨핑화의 입을 주목했다. 쑨도 참석자들의 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가 온 이유는 단순한 문화교류 차원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 회복 원망(願望)하는 양국 국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서다.”                                                             14일 첫 번째 공연에서 관객들은 발레무 ‘백모녀(白毛女)’에 열광했다. 단장 쑨핑화의 기자회견이 주목을 끌었다. “나는 ‘백모녀’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 중국 특유의 발레무에는 백지나 다름없다. 공연에 관한 질문은 삼가해 주기 바란다.” 기자들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느냐”며 어이가 없었다. 미모의 여기자가 온 이유를 물었다. 쑨은 노련했다.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옛 친구들 두루 만나고, 새로운 친구도 만나러 왔다. 1개월간 전국 순회공연하며 새 친구의 연락오기를 기다리겠다.” 쑨이 말한 새 친구는 일본 총리 다나카를 의미했다.   다나카, 저우언라이의 방중 요청 수락   발레외교에 분주한 일본 발레리나와 상하이발레단 단원들. 1972년 7월 23일, 시즈오카. [사진 김명호]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발레단 출발을 앞두고 저우언라이와 랴오청즈는 쑨핑화를 단장에 임명했다. 쑨에게 주지시켰다. “너는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갔다. 우수한 대학 마치고 체류기간도 길었다. 그간 발레는 이해하지 못해도 일본문화를 이해하고 일본인 홀리는 재주가 탁월했다. 일본에 보내는 이유는 다나카의 중국 방문을 앞당기기 위해서다. 일본정부 안에는 우익세력이 만만치 않다. 10년 전 사회당 위원장이 중국과 관계 정상화 촉구하는 연설하다 무대에 뛰어오른 우익분자의 칼에 죽은 일이 있었다. 다나카는 발레단이 보내는 메시지에 무반응으로 일관할지도 모른다. 다나카를 만나겠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라. 침묵을 깨고 나타날 때까지 그치지 마라. 발레외교로 핑퐁외교 못지않은 성과를 기대한다.” 외상 오히라나 총리 다나카 면담에 필요한 정상회담 의제와 마오쩌둥의 생각도 알려줬다. 쑨이 발레에 문외한이라며 반대하는 사람에겐 호통을 쳤다.   1972년 9월 25일 오전 11시 베이징공항에 도착한 다나카 일본 총리(오른쪽). [사진 김명호] 일본 언론이 상하이발레단과 쑨핑화의 동향, 일본인들의 반응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외상 오히라는 쑨이 중국 최고위층의 특사라고 직감했다. 직접 쑨을 만났다. “나와 다나카는 일심동체(一心同體)의 맹우다. 외교 문제는 내게 전권을 부여했다. 양국관계를 정상화시킬 시기가 도래했다.” 쑨도 평소 마오쩌둥의 구상을 전달했다. “상대가 오면 대화를 나누고 싶다. 말로 묵혔던 체증이 풀려도 좋고, 안 풀려도 좋다. 몰려오는 불길이 맹렬하다. 중요한 물건은 빨리 꺼내야 한다. 바람 그치기 기다렸다간 모두 재가 된다. 주석은 다나카 총리와 오히라 외상이 베이징에 와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하기를 희망한다.” 8월 11일, 오히라가 다시 쑨을 접견했다. “발레단 귀국 전 다나카 총리가 직접 쑨 선생에게 중국방문 의사를 전달하고 싶어한다.”   8월 15일, 발레단 귀국 하루 전 다나카가 오히라와 관방장관 니카이도를 대동하고 제국호텔 쑨핑화의 숙소를 방문했다. 쑨에게 정식으로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방문 요청 수락을 전달했다. 쑨이 9월 25일에서 30일까지가 좋다고 하자 그것도 수락했다.   다나카는 저우언라이에게 행동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일본 항공기 타고 귀국하는 상하이발레단은 홍콩을 경유하지 않고 상하이로 직행했다. 저우도 다나카에게 메시지를 잊지 않았다. 홍차오 공항에 3000명을 동원해 발레단의 귀국을 환영했다.

    2023.07.01 00:20

  • 다나카, 야당 ‘가짜특사’ 보내 저우언라이와 회동 성사시켜

    다나카, 야당 ‘가짜특사’ 보내 저우언라이와 회동 성사시켜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0〉   랴오청즈는 일본과 인연이 깊었다. 1962년 11월 중국을 방문한 화려한 경력의 다카사키 다스노스케(高崎達之助)와 양국 무역협정비망록에 서명했다. 민간무역을 랴오와 다카사키의 영문 이름 첫 자에서 따온 ‘L·T무역’이라 불렀다. [사진 김명호] 197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은 미국과 소련 다음이었다. 장족의 발전 이루려면 새로운 시장이 절실했다. 눈길이 30년 전 쫓겨난 중국을 향했다. 1971년 7월 15일, 미국은 ‘1972년 5월 전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에 합의했다는 미·중 공동성명’을 발표 3분 전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에게 통보했다. 미국에 뒤통수를 맞은 사토는 중국에 방문 의사를 타진했다. 저우언라이의 반응은 가혹할 정도였다. “사토는 대표적인 전범 가족의 일원이다. 이런 사람이 이끄는 정부와 양국 관계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도 익살을 떨었다. “중·일관계에서 사토는 하릴없는 무작(無作)이다. 영작(榮作) 되기는 글렀다. 이름이 아깝다.”   다케이리 “그때 생각하면 식은땀”   중국 방문 마친 다나카와 오히라를 전송하는 저우언라이. 1972년 9월 30일 오후, 상하이 홍차오 공항. [사진 김명호] 사토는 잔여 임기 마치지 못하고 총리 관저를 뒤로했다. 근 8년간 총리직 유지하며 경제성장과 오키나와를 반환받은 사토의 후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는 전임 총리들과 달랐다. 명문집안이나 명문대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학을 겨우 마치고 토목기사와 3류 잡지 기자하며 터득한 것이 있었다. “무슨 일이건 시작은 뒷구멍으로 해야 효과가 있다. 공직자들이 썩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절차 밟았다간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중국 접촉도 공식 라인은 배제시켰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중·일관계정상화 실현과 평화조약 체결, 대만문제 처리, 공동성명 발표 등 중국과 협의할 인물을 물색했다. “우리도 미국처럼 키신저 같은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하자”는 여론은 귀에 담지 않았다. 외상 오히라에게 중임이 떨어졌다. 양국 지도자의 신임이 두텁고, 책임감 강하고 입 무거운 사람을 정부 요원이 아닌 야당이나 재야인사 쪽에서 찾았다. 공명당 위원장 다케이리 요시카스(竹入義勝)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다케이리는 1년 전 공명당 대표단 이끌고 베이징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중·일관계 정상화를 위한 5원칙을 제시해 저우언라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일본을 방문한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를 부인과 함께 예방한 다케이리. [사진 김명호] 다케이리가 중임을 수락하자 다나카가 신분을 주지시켰다. “나는 키신저 같은 특사를 파견할 생각은 없다. 개인 자격으로 가서 특사 행세를 해라. 속된 말로 가짜 특사다. 결렬될 경우 나는 특사를 파견한 일이 없다고 잡아떼겠다.” 1997년 봄, 나고야의 공원 찻집에서 다케이리가 25년 전을 회상했다. “1972년의 역사적 사건에 주선자로 참여한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 나는 밀서 한 장 없는 가짜 특사였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난다. 특사 신분 요구했지만 총리는 거절했다. 중국 측에 전달할 일본의 구상을 물어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 담배 피우며 냉수만 들이켰다. 나는 공명당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당적을 버리고 가라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1972년 7월 25일, 다케이리는 일행 2명과 함께 홍콩 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중국과 일본은 직항로가 없었다. 홍콩과 광저우(廣州)를 경유해 베이징에 가려면 3일이 걸렸다. 홍콩에 도착한 가짜 특사는 저우언라이의 배려를 받았다. 전용열차와 전용기로 도교 출발 14시간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저우언라이와 랴오청즈는 인민대회당에서 3일간 10시간 이상 다케이리와 회담했다.   저우도 다나카 성격 등 조사 지시   1972년 11월 도쿄 우에노공원에 모습을 드러낸 중국 팬더 캉캉과 란란. [사진 김명호] 저우와 랴오는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랐다. 제도와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과거보다 미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요구는 복잡하지 않았지만 용어에는 민감했다. 저우언라이는 “다나카 내각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정통정부로 인정한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다케이리가 같은 의미라고 하자 발끈했다. “정통은 계승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전 정권인 중화민국을 계승하지 않았다. 인민의 선택을 받은 합법적인 정부다. 합법의 반대어는 불법이다. 대만은 인민에게 버림받은 불법 정권이다. 불법정권과 체결한 모든 조약을 폐기하기 바란다. 공명당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자민당의 법률 전문가들이 합법과 정통의 차이를 모를 리 없다.” 다케이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귀국하면 다나카를 설득하겠다며 저우를 진정시켰다.   랴오청즈는 혁명기간 감옥을 7번 들락거렸다. 들어갈 때도 웃고 나올 때도 웃는, 역경에 처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낙천가였다. 별명도 많았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붙여준 ‘감옥전문가’를 제일 좋아했다. 이날도 발끈하는 저우언라이와 당황하는 다케이리 바라보며 끼득거리는 바람에 모두를 웃기고 분위기를 풀었다. 배상 등 중요문제도 단숨에 합의를 도출했다.   베이징을 떠난 다케이리는 홍콩의 호텔에서 3일간 두문불출했다. 다나카에게 보고할 비망록 작성하느라 끼니를 거르고 잠도 설쳤다. 귀국 이튿날 오히라와 함께 총리 관저로 갔다. 비망록 보여주며 설명도 곁들였다. 다나카는 흥분했다. “내가 직접 중국에 가겠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말만 반복했다. 비서를 불렀다. “당장 중국인물 평전과 회고록을 수집해라.” 밤마다 중국 연구에 몰두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9월 25일 방중을 중국에 통보했다.   저우언라이도 다나카의 성격과 습관을 물론, 좋아하는 음식과 술, 노래까지 깡그리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실수도 잘하고 사과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안심했다. 사진을 보니 앉는 자세가 쩍벌다리였다. 소파를 한 뼘 낮추라는 지시도 잊지 않았다. 9월 말 도쿄의 집무실 온도도 체크하고 외출에서 돌아오면 얼음물부터 마신다는 정보도 확인했다.   9월 25일 베이징에 도착한 다나카는 숙소의 공기가 쾌적해서 놀랐다. 복무원이 들고 온 얼음물을 두 잔 들이켰다. 소파도 일본의 집무실보다 편했다. 피로가 풀릴 즈음 저우언라이의 방문을 받았다. 방풍코트를 벗자 옆에서 거들었다. 다나카는 사진을 통해 저우의 오른팔이 불편한 것을 알고 있었다. 저우가 만류하자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이 방의 주인은 나다. 총리는 최고의 귀빈이다. 내가 거든 것이 당연하다.” 저우도 웃고 다나카도 웃었다. 회담이 순조로울 징조였다.

    2023.06.24 00:20

  • 저우언라이 “일본문제 연구기관 만들라”…대일공작위 출범

    저우언라이 “일본문제 연구기관 만들라”…대일공작위 출범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9〉   1972년 9월 27일 밤 중난하이(中南海)의 마오쩌둥 서재. 오른쪽부터 랴오청즈, 일본 관방장관 니카이도, 외상 오히라, 다나카 총리,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중국 외교부장 지펑페이(姬鵬飛). [사진 김명호] 6·25전쟁 휴전협상이 지지부진하던 1952년 4월,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가 일본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총통 장제스는 일본관련 정책을 직접 관장했다. 집행은 국책고문 장췬(張群·장군)이 맡았다. 장은 일본 정·관계에 지인들이 많았다. 걸림돌이 없었다. 일본 정계에 친대만파가 득실거렸다. 대륙의 중공정권도 일본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않았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측근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에게 지시했다. “일본문제 연구 기관을 만들어라.”   닉슨 “중 지도자, 오밤중 회의 습관”   마오쩌둥은 다나카에게 주희(朱熹)가 주석(註釋)한 애국시인 굴원(屈原)의 초사집주(楚辭集注)를 선물했다. [사진 김명호] 국민당 좌파의 영수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와 허샹닝(何香凝·하향응)의 아들로 도쿄에서 태어난 랴오청즈는 망명객 쑨원(孫文·손문)의 무릎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교육도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일본에서 받은 일본통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로라하는 혁명가들의 안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보고 들은 것이 많았다. 웬만한 고생은 고생으로 치지도 않는 낙천가였다. 조직력과 수완도 남달랐다. 약관의 나이에 함부르크 부두 노동자 파업을 주도할 정도였다. 대륙은 물론 미국, 홍콩, 일본, 유럽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친인척들이 부지기수였다. 대만의 장징궈(蔣經國·장경국)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청년시절 형 동생 하는 사이였다. 2년 어린 장징궈가 배고파하면 만두 사주고, 넘어지면 달려가 일으켜줬다.   중공은 일본과 외교관계가 없었다. 일본 연구에 투입할 인력은 차고 넘쳤다. 당 중앙에 일본관계만 전담할 외사조(外事組)를 출범시켰다. 조장은 부총리 겸 외교부장 천이(陳毅·진의), 부조장은 랴오청즈가 맡았다. 국무원이 차린 외사판공실(外事辦公室)도 주임은 천이, 부주임은 랴오청즈였다. 랴오의 조직력이 빛을 발했다. 일본 연구와 대일정책 기획 및 집행을 전담할 ‘대일공작위원회’를 만들었다. 주임에 지일파(知日派) 궈뭐뤄(郭沫若·곽말약)를 추대했다. 사회과학원 원장 궈는 유명한 훈수꾼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일본 학계와 문화계에 명성이 자자한 문·사·철의 대가였다. 쓸모가 있었다. 여기서도 랴오는 부주임이었다. 다른 부주임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외교부장 조리(차관보 급), 적십자 회장, 대외무역부 부장, 전국총공회 부주석 등이 영문도 모른 채 이름을 올렸다. 상임부주임 랴오청즈의 권한은 막강했다. 필요 시 당·정부 기관과 언론매체의 간부들을 징발할 수 있었다.   랴오청즈가 이끈 ‘대일공작위원회’는 중·일관계 정상화의 초석을 깔았다. 뒷구멍으로 온갖 공작을폈다. 1953년부터 1975년까지 22년간 일본 각 분야의 대표단을 295차례 중국으로 초청했다. 저우언라이가 직접 만나 악수하고 밥 먹은 일본인이 3000명에 조금 못 미쳤다. 접견대상도 정당대표와 기업인 외에 노동단체, 여성단체, 청년단체 등 각양각색이었다. 통역이 구술을 남겼다. “도로포장 노동자와 청년, 교사로 구성된 대형 단체가 베이징에 온 적이 있었다. 총리는 오랜 시간 대화 나누고 만찬도 함께했다. 총 8시간이 걸렸다. 만찬을 마친 총리는 차에 오르자 고개 뒤로 젖히며 잠시 졸았다. 피곤해하는 모습에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울컥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자 랴오 동지도 눈시울을 붉혔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눈을 번쩍 뜬 저우가 랴오에게 지시했다. “대표단 단장 편에 외상 후쿠다에게 선물을 보내고 싶다. 치궁(啓功·계공)에게 내 말을 전해라.” 후쿠다는 한학(漢學)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평소 치궁의 문장과 글씨를 좋아했다. 저우언라이의 선물인 치궁의 작품 ‘여주재연(如珠在淵)’ 4자를 집무실 벽 정면에 걸어 놓고 즐거워했다. 당시 후쿠다는 자민당의 친대만파 영수였다.   저우, 직접 만난 일본인만 3000명   중·일수교 2년 후 ‘중·일 우호의 배’를 타고 나고야에 도착해 율동을 따라 하는 랴오청즈. 오른쪽은 중공 개국대장 쑤위(粟裕). [사진 김명호]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으로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 친미 일변도였던 사토가 총리직에서 내려왔다. 중국과 수교를 주장하던 다나카의 말에 힘이 실렸다. 후쿠다를 누르고 총리에 취임했다. 중학교를 겨우 마친 토목기사 출신 서민재상, 현대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등장에 일본열도가 환호했다. 다나카는 유능한 건설업자로 입신한 사람다웠다. 언행이 일치하고 민첩했다. 1차 각료회의에서 일·중수교와 대만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갔다. 닉슨에게 양해와 자문을 구했다. 닉슨의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중국 지도자들은 외국인과 오밤중에 회의하는 습관이 있다. 9시 이후에는 취침해야 한다며 미리 양해를 구해라. 저 사람들 하자는 대로 했다간 머리가 산만해져서 냉정함을 유지하기 힘들다.”   7월 16일, 저우언라이도 베이징을 방문한 일본 정치인 편에 답을 보냈다. “현 일본 총리나 대신(大臣)이 관계 회복을 위해 중국에 올 의향이 있으면 언제건 베이징 공항을 개방하겠다.” 수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로 양국을 오갔다. 9월 21일 양국이 동시에 합의사항을 발표했다. “다나카 총리가 저우 총리의 방문요청을 수락했다. 양국의 관계 정상화와 우호를 건립하기 위해 9월 25일부터 30일까지 중국을 방문한다.” 동북아는 물론 세계가 진동할 징조였다.

    2023.06.17 00:20

  • 마오쩌둥 떠난 중공, 새 영웅 ‘원자탄의 아버지’ 찾기 논쟁

    마오쩌둥 떠난 중공, 새 영웅 ‘원자탄의 아버지’ 찾기 논쟁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8〉   중·일전쟁(1937~1945) 시절 베이징(北京), 칭화(淸華), 난카이(南開) 3개 대학이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에 설립한 서남연합대학은 명 교수와 인재의 집결지였다. 평생 핵 연구와 인재 양성에 매진한 왕청수도 남편과 함께 교사 생활을 했다. [사진 김명호] 인간은 공과 허물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묘한 동물이다. 변덕도 특성이라면 특성이다. 1976년 중국에 줄초상이 났다. 1월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세상을 떠났다. 온 중국이 훌쩍거렸다. 이름 앞에 ‘인민의 총리’가 붙기 시작했다. 콧방귀 뀌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빼어난 연기자였다. 인간미라곤 전혀 없었다. 그 인간이 잔재주 부리는 바람에 문혁이 오래가고 린뱌오(林彪·임표)도 억울하게 죽었다.” 7월에 ‘중국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가 눈을 감았다. 절차가 저우에 비해 요란하지 않았다. 내놓고 말은 못 해도 뒤에서 쑥덕거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홍군은 모두 위대했다. 아버지가 따로 없다.” 9월 9일 마오쩌둥이 인간세상을 뒤로했다. 세계가 들썩거렸다. 신(神)의 죽음도 인간의 변덕 앞엔 속수무책이었다. 격하운동이 벌어졌다.   원자·수소폭탄, 인공위성 ‘양탄일성’ 화제   말년의 왕청수. 1993년 봄 베이징. [사진 김명호] 결국은 그놈이 그놈인 줄 알면서도 영웅 없는 세상은 싱거웠다. 중공(중국공산당)은 의도적으로 새로운 영웅을 찾기 시작했다.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에 얽힌 얘기들이 주목을 끌었다. 핵물리학자 첸싼장(錢三强·전삼강)이 ‘중국원자탄의 아버지’라는 말이 입소문을 탔다. 고만고만한 언론매체들이 경쟁적으로 첸에 관한 기사와 방문기를 내보냈다. 관심을 끌자 권위 있는 관방매체가 뒤를 밀어줬다. ‘중공중앙선전부’의 인정을 받은 것과 매한가지였다. 1차 핵실험을 지휘한 장아이핑(張愛萍·장애평)도 생전에 양탄원훈(元勳) 소리 들었지만 금새 흐지부지됐다. 장은 과학자가 아니었다.   1987년 6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소문만 무성하던 1차 핵실험 주역 덩자센(鄧稼先·등가선)의 업적을 살펴봤다. 국방과학위원회 부주임 임명장에 직접 서명했다. 1개월 후 덩자센은 원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년 후 인민일보가 재미(在美) 화교물리학자 양전닝(楊振寧·양진영)의 추모문을 실었다. “우리는 전쟁시절 서남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을 함께 다녔다. 50년간 쌓은 우정으로 가깝기가 형제보다 더했다”며 덩자센을 ‘미국 원자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와 함께 거론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말이다 보니 폭발력이 있었다.   명문 옌칭(燕京)대학 재학시절의 왕청수. [사진 김명호] 한 영국 학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중국원자탄의 진짜 아버지는 네룽전(聶榮臻·섭영진)이라는 주장을 폈다. “중국의 국방과학은 네룽전이 총괄했다. ‘중국원자탄의 아버지’로 손색없다.” 새로운 주장이었지만 파급은 크지 않았다. 네룽전은 신중국 개국원수였다. ‘원자탄의 아버지’와는 급이 달랐다.   2011년 시골학자의 평론 몇 줄이 논쟁에 쐐기를 박았다. “한동안 ‘원자탄의 아버지’ 찾느라 갑론을박으로 시간만 허비했다. 현재 과학은 에디슨이 살던 시대와는 다르다. 원자탄이나 수소폭탄은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1964년 10월 16일 1차 핵실험이 성공하기까지 5058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제 몫을 했다. 뒤에서 무슨 일 하는지 모르고 일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모두 무명의 영웅들이다.”   왕청수 “화장 말고 의학용으로 써라” 유언   정부가 인정한 ‘중국 원자탄의 아버지’ 첸싼장. [사진 김명호] 다시 세월이 흘렀다. 2018년 가을, 경공업 부부장을 역임한 85세의 여성물리학자가 24년 전 세상 떠난 왕청수(王承書·왕승서)를 소환했다. “타고난 복을 누릴 줄 몰랐고, 돈이 있어도 쓸 줄을 몰랐다. 국가가 안겨준 엄청난 권력도 관심이 없었다. 평생 핵 연구와 교육, 인재 양성에만 매진했다. 양전닝과 덩자센 등 세계적인 물리학자도 서남연합대학 시절 왕 선생의 제자였다. 왕 선생이 없었다면 중국의 원자탄은 몇 년 늦었을 가능성이 크다. 1956년 좋은 조건과 환경 뿌리치고 미국 떠날 때 유력한 노벨 물리학상 후보의 귀국을 아쉬워하는 과학자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귀국 후 비밀업무 수행하느라 종적을 감췄다. 30년간 남편도 만나지 못했다. 왕 선생 만나기 전 나는 눈뜬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원자탄은 파괴와 살상을 위한 무기가 아니다.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자위용’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유서도 직접 읽었다. “80 춘추를 헛되게 보냈다. 귀국한 지 36년이 흘렀다. 그간 일에 매달렸지만 객관적 원인이었다는 이유로 귀국 전 하고자 했던 일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했다. 국가와 국민에게 미안할 뿐이다. 죽음은 객관적 규율이다. 새처럼 미지의 세계로 날아갈 날에 대비코자 몇 가지 희망을 남긴다. 어떤 형식의 장례도 바라지 않는다. 화장할 필요 없다. 의학용으로 충분히 사용해라. 개인 서적과 자료는 과학원으로 보내라. 매달 국가로부터 국권(國券)과 현금을 과하게 받았다. 현금 8000위안은 평생 미혼인 언니에게 주고 나머지는 국가에 반납해라. 가내에 있는 물건과 의류는 며느리가 처리해라.” 읽기를 마친 노 물리학자가 통곡했다. “평생을 검소하고 깔끔하게 살았다. 옷도 두 벌이 다였다. 항상 실험복 차림에 손님이 오면 입었다가 깔끔히 빨아서 보관했다.”   왕청수의 행적과 연구가 줄을 이었다.

    2023.06.03 00:20

  • 국·공내전 연전연패 장제스 “공비들보다 우리가 10배 앞서”

    국·공내전 연전연패 장제스 “공비들보다 우리가 10배 앞서”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77〉   항일전쟁시절 중공근거지 옌안 가는 길은 험했다. 웨이리황의 옌안 방문은 마오에게 감동을 주기 충분했다. 임지로 돌아온 웨이리황은 마오를 아낌없이 지원했다. [사진 김명호] 1946년 중반부터 본격화된 국·공내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우세가 중공야전군 쪽으로 기울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화가 치밀었다. 당 고위간부들 모아놓고 질책했다. “세계 역사상 지금의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썩어빠진 혁명정당은 없었다. 얼 빠지고 기율이 엉망이고 옳고 그름의 기준을 상실한 정당으로 전락했다. 진작 쓸어버려야 했다.”   외신기자들의 질문엔 짜증을 냈다. 연전연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면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공산 비적들의 장비, 전투력, 경험은 우리에 비해 보잘것없다. 군사물자 공급과 보급도 우리가 10배는 앞선다.” 군 지휘관들에겐 욕설까지 퍼부으며 분함을 억눌렀다. “너희들은 명색만 군사령관과 군단장이다. 수준이 형편없다. 자신의 지식과 능력에 의존해 외국에서 군 생활 한다면 연대장도 버거울 놈들이다. 낙후되고 인재가 없다 보니 능력이 쥐꼬리만 한 것들에게 중책 맡길 수밖에 없는 내가 한심하다.”   중공(중국공산당)을 부러워하며 칭찬하는 일기도 남겼다. “공비(共匪)들은 내가 갖기를 바라는 것과 우리 당이 갖지 못한 조직과 기율, 도덕성을 완벽히 갖추었다. 무슨 일이건 철저히 연구하고 토론하고 실천에 옮긴다. 우리 기간요원 대부분은 머리 쓰는 것을 싫어하고, 연구할 생각을 안 한다.”   장제스 “미 원조 기대다 중국인 자립성 상실”   항일전쟁시절 중국을 방문한 헤밍웨이도 중공의 통전 대상이었다. [사진 김명호] 미국과의 동맹이 추종자와 군 지휘관들에게 끼친 영향도 아쉬운 점이 많았다. “군대는 미군과 접촉하면서 사치를 즐기고 퇴폐가 만연해졌다. 성병환자도 늘어났다.” 맞는 말이다. 당시 정부군(국민당 군) 장교 반 이상이 매독과 임질로 끙끙댔다. 군의관과 위생병은 돈벌이에 급급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도망갔다. 부상병은 제대로 된 응급치료를 받지 못했다. 웬만한 부상에도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쟁을 오래 한 나라에 불구자가 드문 이유를 장제스가 모를 리 없었다. “미국 원조에 의지하다 보니 중국인들은 전통적인 자립성을 상실했다”며 가슴을 쳤다.   장제스는 거미줄 같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1947년 9월 이런 일기를 남겼다. “저들의 조직, 훈련, 선전술이 우리보다 우수해도 이념, 사상, 정치노선은 우리가 선진적이고 민족의 요구에 더 부응할 수 있다. 연구를 통해 저들의 본질만 터득하면, 소멸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다.” 1949년 8월, 미국이 원조중단을 발표하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국민당의 승리는 물 건너갔다.”   중공은 통전(통일전선)과 무장투쟁으로 성공했다. 2번에 걸친 국·공합작도 통전의 일환이었다. 합작은 동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분열이 당연했다. 군을 장악한 장제스의 칼질에 지하로 들어갔다. 두 차례 무장폭동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패잔병 이끌고 산속에 들어가 근거지 구축하고 소비에트를 설립했다. 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패잔병을 홍군으로 둔갑시켰다. 말이 좋아 홍군이지 비적이나 다름없었다. 장제스가 대군을 동원해 소비에트를 압박했다. 도망에 도망을 거듭한 홍군은 옌안(延安)에 도착해 겨우 다리를 폈다.   대륙으로 돌아온 웨이리 황과 마오쩌둥의 만찬. [사진 김명호] 일본이 중공을 살렸다. 일본관동군의 동북침략으로 입장이 난처해진 동북왕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궁지에 빠진 중공의 통전대상 1호였다. 통전을 지휘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리커농(李克農·이극농)을 통해 장에게 접근했다. 장은 시안(西安)에 온 장제스를 감금했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국·공합작을 촉구했다. 구국과 항일을 능가할 명분은 없었다.   국·공합작으로 중공은 기사회생했다. 홍군도 국민혁명군 8로군으로 정규군에 편입됐다. 통전도 극성을 떨었다. 국민당 좌파와 민주세력, 말 잘하고 아는 것 많고 불평은 더 많은 지식인과 문화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효과가 기대 이상이었다. 홍색 수도 옌안 방문이 줄을 이었다. 지하당원도 괄목할 정도로 늘어났다.   휘하에 115만 대군을 거느린 웨이리황(衛立煌·위립황)은 통전 대상이 아니었다. 제 발로 옌안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은 근거지 설립 후 최대규모의 환영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12㎞ 밖에 환영 현수막 내걸고 중앙위원들이 직접 나가서 맞이해라. 200m 간격으로 현수막 걸고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성(城)입구에서 기다리다 회의실로 안내해라. 나는 회의실 앞에 서 있겠다.”   중공은 국·공합작 등 통전으로 기사회생   철학자 펑유란(馮友蘭)도 통전 대상에서 빠지지 않았다. 학생들과 함께 중공야전군의 베이핑(北平) 입성식 구경 나온 펑. [사진 김명호] 당시 옌안은 무기, 약품. 식량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마오쩌둥에게 웨이리황은 굴러들어온 복덩어리였다. 마오의 지원 요청에 토를 달지 않았다.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주덕), 중공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남방국 서기 저우언라이와 항일군정대학 교장 린뱌오(林彪·임표), 훗날 신중국 개국원수 허룽(賀龍·하룡)과 감동을 주고받았다.   임지로 돌아온 웨이리황은 마오쩌둥과의 약속을 지켰다. 장총, 실탄, 수류탄, 박격포, 의약품, 식량, 애들 과자까지 아낌없이 지원했다. 일본 패망 후 내전이 시작되자 장제스는 웨이와 중공의 관계를 의심했다. 해외시찰 명목으로 외유를 권했다. 동북에서 연전연패하자 귀국시켰다. 보직은 주지 않았다. 마오는 의심 많은 장제스가 웨이를 해치지 않을까 우려했다. 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신화사(新華社)가 발표할 전범자 명단에 웨이리황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마오의 예상은 적중했다. 동북지구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한 웨이리황은 린뱌오의 동북야전군과 충돌을 피했다. 예하 지휘관들의 지원 요청도 거부했다. 동북야전군이 동북을 장악하자 장제스는 웨이를 난징으로 소환해 연금시켰다. 죽음을 기다리던 웨이는 중공지하당원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대륙도 싫고 대만도 싫다며 상하이를 거쳐 홍콩에 정착했다.   1949년 2월, 제2야전군이 웨이리황의 고향 허페이(合肥)를 점령했다. 웨이는 부모의 안위를 걱정했다. 주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모의 안전이 나의 유일한 소원이다.” 마오쩌둥과 주더가 제2야전군 정치위원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에게 긴급 전문을 보냈다. “웨이리황의 부모와 가족들을 극진히 보호해라.”   웨이리황의 홍콩생활은 국민당 특무의 감시로 순탄치 못했다. 저우언라이에게 귀국의사를 밝혔다.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감회에 젖었다. “웨이 장군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집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착하는 날 원수들이 나가서 영접해라.”   1955년 6월 대륙으로 돌아온 웨이리황은 신중국 개국원수 6명의 영접을 받았다.

    2023.05.27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