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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 인터뷰 |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말하는 미·중 경쟁시대 한국 외교의 활로
“탈중국 시대 대비하되 미국에 할 말은 하라” ■ 미국, 자본주의 칼만 빌린 중국의 변화 더 이상 기대치 않아… 그 결과가 대중국 포위망 구축 ■ 韓, 신냉전 격화하면 전략적 모호성 유지 어려워… 한·미·일 협력 대가 미국에 당당히 요구해야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은 미·중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한국 외교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핵심 산업의 길을 열어주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미국은 중국과의 디커플링(decoupling)을 추구하지 않는다. 세계 최대의 두 경제 대국을 디커플링하는 것은 두 나라에 재앙일 것이며, 세계를 불안정하게 할뿐더러 실질적으로 실행될 수도 없는 일임을 안다.” 중국을 방문한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7월 9일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de-risking)을 말했다. 옐런이 “미국은 미국과 동맹국들의 국가 안보 이익을 수호하는 데 필요한, 표적화한 조치들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 말 속에는 반도체와 같은 첨단산업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란 함의가 깔려 있다. 한편에서 옐런은 리창 국무원 총리를 비롯해 허리펑 부총리, 류허 전 부총리, 류쿤 재정부장, 판궁성 중국인민은행 당 서기 등 중국 경제 브레인들과 잇따라 회동했다. 미국의 ‘달러 패권’을 지키기 위한 차원에서 옐런은 중국의 미 국채 매입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일본 다음으로 미국 국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긴장 관계이지만, 현실에서 양국의 무역 규모는 역대 최대(2022년 6906억 달러, 미 상무부 발표)인 것이 미·중 관계의 현실이다. 이렇듯 중층적인 미·중 관계 속에서 한국은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 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 협상과 세계무역기구(WTO) 통신 협상의 한국 대표를 맡았으며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을 역임한 최병일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은 “예전부터 말해왔지만, 안미경중(安美經中, 안보는 미국·경제는 중국)의 시대는 끝났다”고 단언했다. 한국도 새로운 외교 전략으로 글로벌 새 판짜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 美의 대중국 압박은 中 변화 오판한 반성에서 출발 미·중 패권경쟁에 임하는 미국 바이든 정부의 진의가 궁금하다. 정말 중국이 다시는 못 일어서게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2024년 미국 대선을 염두에 둔 제스처일까? “미국의 중국 포용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신저가 역할을 해서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는 전환기적 사건이 있었다. 냉전 체제에서 미국은 소련에 압도적 우위를 갖지 못하자 이이제이(以夷制夷) 차원에서 중국을 끌어들였다. 이후 마오쩌둥이라는 절대 권력자가 사라지자 중국의 실용주의자 덩샤오핑은 ‘인민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면 공산당 권력은 없다’며 개혁·개방 노선을 걷는다. 이때 ‘중국식 자본주의’, ‘흑묘백묘론’ 등이 나왔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다. 덩샤오핑은 ‘나를 주자파(走資派, 중국 공산당 내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파)라고 하는 비판이 있는데, 나는 공산주의자다. 동지들을 위해 당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러니까 공산당의 존립 기반인 민생 자체가 흔들리니까 자본주의라는 칼을 빌렸을 뿐이라는 의미다.” 중국은 애초부터 변할 생각이 없었는데 미국 등 서구가 착각했다는 것인가? “그들은 중국이 자본주의를 빌리는 순간, 밑으로부터의 압박 때문에 공산당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온건하게 봐도 싱가포르 스타일의 온건한 전제주의로 변할 것이라고 봤다. 이런 ‘확신’이 21세기 초반까지 약 25년을 관통했다.” 뒤집어 보자면 중국 정부는 어떻게 변화의 물결을 통제했을까? “중국이 경제성장을 할수록 불평등 해결, 자유를 향한 요구가 커졌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는 탱크를 동원했다. 이것이 (1989년 6월 4일의) ‘톈안먼 모멘트’다. 이후 다수의 서구 지식인들은 ‘세컨드 모멘트’가 오면 중국 공산당은 못 버틸 것이라며 변화 임박을 관측했다. 사실 ‘G2’라는 프레임도 미국에서 만든 것이다. 중국이 글로벌 시스템에서 과실만 취하지 말고, 책임 있는 역할을 하라는 의도였다. 하지만 중국은 ‘너희들과 체제가 다른 우리가 잘살게 되는 것은 위협이 아니라 윈윈’이라는 레토릭으로 응수했다.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바꿀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불문하고 ‘미국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중국이라면 용납할 수 없다’고 태세를 전환한 분기점이 트럼프와 힐러리가 대결한 2016년 대선이었던 듯하다. “당시 힐러리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중국을 거세게 몰아붙였을 것이다. 미국은 서독·일본 등 역사상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가 나타나면, 미국이 저항할 수 없는 지점까지 그 나라들이 도달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왔다. ‘Japan as number one’으로 불렸던 일본 경제를 무너뜨린 것도 플라자 합의(1985년)였다. 이후 일본은 20년 이상의 장기불황에 빠졌다.” 이 와중에 중국에서 시진핑이 장기 집권하니 갈등의 파고가 더 높아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브레인들이 ‘우리는 오만했으며 중국 공산당의 본질에 무지했다’고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중국의 궁극적 목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빼내려는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이 시기에 등장한 시진핑은 ‘굴욕의 100년을 돌려주겠다’는 내러티브로 굴기(屈起)를 꺼냈다. 시진핑은 5년 임기를 두 번밖에 할 수 없다는 중국 공산당의 집단 지도체제를 사실상 없앴다. 동시에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발언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 대표적 사례가 2013년 LA에서 오바마와 회담할 때, 시진핑이 꺼낸 ‘태평양은 너무 넓으니 우리 두 슈퍼 파워가 나누어 가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 갈등해도 교류는 지속하는 신냉전 시대 윤석열(왼쪽) 대통령 시대를 맞아 한·중 관계는 ‘리셋’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중 마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한국 외교의 숙제이기도 하다. / 사진:연합뉴스 그전부터 미·중 균열의 조짐은 있지 않았나? “중국이 우격다짐으로 남중국해 영유권을 관철하자 오바마 정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시진핑은 ‘인공섬을 군사기지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과적으로 거짓이었다. 미국이 제대로 된 대응을 못 하자 중국 주변국들은 불안해하고, 유럽은 중국과의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팔짱만 끼고 있었다.” 정치적 좌표는 판이하고 방법은 다를 수 있겠지만, 트럼프와 바이든은 ‘미국이 중국을 제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미국의 진의는) 단순한 선거용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용어는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으로 바뀌었다. 중국과의 모든 경제 관계를 단절할 수도 없다. 이것이 (미·소 간) 냉전과 (미·중 간) 신냉전의 결정적 차이다. 신냉전은 이미 시작됐다. 그 서막은 트럼프의 무역전쟁이었다. 갈수록 미국은 훨씬 더 정교하며 전방위적으로 중국을 압박할 것이다.” 아무래도 미국의 대중국 압박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첨단산업 분야에 집중할 듯하다. “말이 좋아서 디리스킹이지, 핵심산업 분야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두겠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원가 계산해서 비교우위 논리에 따라 비용이 싼 국가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비용이 들어도 내부에 두겠다는 방침이다. 그것이 중장기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훨씬 안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본심은 중국이 더 이상 굴기를 못 하도록 차단하는 것이며 초크(choke, 질식) 포인트를 찾아내겠다는 것이다. 다만 미·중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겠다는 쪽은 아니다.” 미국은 달러 패권에 사활을 걸면서 달러를 마구 찍어내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중국이 달러 패권주의에 반기를 든다면, 미국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로선 대안이 없다. 중국은 디지털 실크로드, 즉 중국판 디지털 코인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빠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미국은 용납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비트코인을 대체가능한 통화가 아니라 하나의 상품으로 생각한다. 미국이 여전히 달러 패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 제재를 만들 수 있고, (제재의) 어디에 구멍이 뚫렸는지 파악할 수 있다. 중국이 도전하겠지만, 미국은 양보가 불가하다.” 최근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한 빈 살만의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달러 외 통화로 결제할 수도 있지 않나? “만약 위안화로 결제하겠다고 한다면 엄청난 파문이 생긴다. 워낙 민감하기 때문에 당장은 어려울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질식시키려 한다면, 그 의도를 간파한 중국도 나름의 방책이 있을 텐데? “중국의 반도체 수입은 석유보다 그 양이 많다. 반도체는 단순히 산업용뿐 아니라 군사용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미국이 이런 식으로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고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만들려 한다면, 중국은 자체적으로 반도체를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러면 이게 얼마나 걸릴 것이냐, 그렇게 만들어낸 반도체가 효과가 있을 것이냐, 그리고 다른 나라의 반도체 생태계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숙제가 남는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중국의 상황 전개를 봐가면서 게임을 계속 바꿔갈 것이다.” ━ 중국의 활로, 미국의 약한 고리를 찾아라 윤석열(왼쪽) 대통령 시대를 맞아 한·중 관계는 ‘리셋’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중 마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한국 외교의 숙제이기도 하다. / 사진:연합뉴스 이렇게 흘러간다면 확률적으로 중국 경제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무엇일까? “중국이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는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빌렸고, 세계 경제에 편입되면서 거대한 공장을 자임한 덕분이었다. 여기서 공장을 돌리려면 원료와 소재의 공급처와 만든 물건을 내다 팔 수 있는 시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전자는 한국·일본·대만 등 주변국가로, 후자는 미국과 유럽으로 갔다. 중국은 ‘우리가 시장이 될 수 있고, 소재도 수급할 수 있다’고 하겠지만, 그러는 순간 축소지향적 경제로 가는 것이다. 중국의 경제 사이즈가 커졌고, 중국 국민의 욕망은 높아졌지만 정작 장기 저성장구조로 들어가고 갈수록 바닥을 칠 가능성이 있다. 특히 국내 자산 과잉투자에 대한 버블이 터졌을 때, 세계 경제와 차단돼 있으면 위기를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이 더 줄어들어 단기적 경제 혼란은 더 가속화할 것으로 본다.” 중국 지도부가 이를 좌시하진 않을 텐데… “중국 지도부가 내세우는 단어가 ‘쌍순환’이다. 여기에는 미국이나 서구에 의존하지 않고 반도체, 전기차, 클라우드, AI 등에서 자체 기술을 만들자는 것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우선 반도체부터 중국은 굉장히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도 반도체 하나라도 효과적으로 틀어막지 못하면 중국에 더 많은 여지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필사적이다. 미국도 처음부터 완벽한 작전을 세운 것이 아니다. 그들도 포위하면서 배우고 있다. 신냉전의 제1장이다.” 중국은 미국에 굴복할 수도 없고, 내수로 버티자니 저성장 늪에 빠지는 진퇴양난에 처한 듯하다. “중국은 미국의 약한 고리인 중부·동부 유럽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 독일, 프랑스만 해도 중국 시장을 중시한다. 숄츠 독일 총리는 ‘중국과의 디커플링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대만 문제는 우리와 관계없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못마땅하겠지만, G7의 불협화음은 중국이 노리는 바다. 미국은 이들 유럽 국가의 중국 의존도를 서서히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이들 국가도 (중국에서의) 기술 유출의 위험성 같은 것을 알고 있기에 (중국 밀착은) 쉽지 않다.” 중국이 설정한 약한 고리 중 하나에 한국도 포함될 것 같다. “우리 정치권은 양쪽으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안미경중의 시대는 확연히 끝났다. 이제 우리의 (미·중 사이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이미 선택은 (미국으로) 돼 있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중국과 우리가 가치는 달라도 비즈니스 파트너로 윈윈 게임을 해왔다’는 시각이다. 반면 다른 편에서는 ‘안미경중의 시대가 약해졌어도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하면 안 된다. 중국이 있어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보는 세력이 있다. 문제는 두 정치 세력 중 어디가 집권하더라도 ‘최소한 이 정도는 지키자’라는 선을 합의해야 한다. 신냉전이 격화할수록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전략적 모호성은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 한국 외교, 체면 차리지 말고 더 치열하게 다퉈야 미·중 사이에서 윤석열 정부의 포지셔닝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신냉전에선 안보의 논리가 경제의 논리를 뒤엎는다. 우리 입장에선 북핵 문제에 대해 중국에 역할을 기대했지만 헛물을 켠 셈이다. 그리고 미국은 미·일 동맹, 한·미 동맹을 적극 활용하려 한다. 이런 면에서 윤 정부가 갖고 있는 기본적 외교 구상은 한반도, 동북아라는 좁은 지역을 넘어서 글로벌 플레이어로서 한국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을 포기할 순 없다. 한·중 관계를 ‘리셋’하는 과정에서 옛날처럼 갈 순 없겠지만, 그 과정이 보다 전략적일 필요는 있다.” 우리 안의 반중, 친중 논란은 한국 정치의 진영논리와 연결되는 측면이 짙다. “조선시대 말기도 아니고, 중국이 우리한테 마음먹고 태업하면 전 세계 경제를 스톱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힘에 대해 인식을 하면, 상대가 거칠게 우리의 주권을 침해했을 때에는 분명히 선을 긋는 것이 제대로 된 정치가 아닌가 싶다.” 미·중이 겉으론 으르렁거리지만, 실제 교역량은 역대 최대다. 한국이 볼 때, 미국은 중국과 저렇게 장사를 잘하면서 왜 정작 우리한테는 반도체 중국 수출을 규제하려 드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미국의 ‘내로남불’에 대해 한·미·일 사이의 경제와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그 대가를 우리도 요구해야 한다. 우리 외교에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 들이대는 것은 없어 보인다’는 정서가 있다. 하지만 국제 문제는 중이 제 머리 깎아야 하는 곳이다. 공무원이 치열하게 다툼을 해야 나중에 다른 것을 얻을 수 있는 여지가 확보된다. 여기서 ‘알아서 해주겠지’, ‘우리 최대의 무역 상대국인데 자극하면 안 돼’ 이런 식으로 넘어가지 않았나. 그 결과 전기차 배터리는 10년 전 우리 기술이 세계를 압도했지만 이제는 중국이 대체재가 됐다. (미국의 글로벌 전략에 따라) 배터리 생산 공장을 미국으로 옮기면 원료 확보가 어렵게 된다. 원료 대부분이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호주, 캐나다는 환경 문제 때문에 안 한다. 상황이 이런데 우리가 미국에 뭘 믿고 투자를 하나? 무조건 우리 기업이 투자만 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미국을 움직이도록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필요하면 비슷한 처지인 일본과 연합 전선을 펴야 한다. 오히려 미국에 할 말을 할수록 우리의 레버리지가 올라간다.” 중국 의존적인 한국의 경제 구조는 ‘회색 코뿔소’ 이미 중국에 공장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셈법이 복잡할 것 같다. 특히 중국 비중이 큰 편인 SK하이닉스는 고민이 깊을 텐데. “미국은 중국에 핵심 반도체 장비 수출을 통제하고 있다. 네덜란드 ASML 같은 외부의 장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투입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게 안 되면 손실이 계속 날 것이다. 설령 네덜란드 장비가 제한적으로 도입되며 제한적 업그레이드가 될 순 있다. 하지만 이것도 미국이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통제 시스템에서 될 것이고, 이마저도 미국이 확신이 없으면 서서히 소멸되는 쪽으로 갈 것 같다. 다만 이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 임박한 상황은 아니다.” 한국이 글로벌 G10에 들어갈 만한 미들파워 잠재력을 갖췄다면 미·중 사이에서 어떻게 관계를 정립해 나가야 할까? “노무현 대통령 때 ‘동북아 균형자’라는 말이 나왔지만, 균형자가 되려면 양쪽 못지않은 힘이 있어야 된다. 기본적으로 미·중 신냉전 시대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선택한 한국이 어느 쪽인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냉전이 끝난 뒤 체제 경쟁이 아니라 잘사는 경쟁이 펼쳐졌고, 이를 위해 한국은 중국이라는 공장을 적극 활용했다. 그러다 이제는 중국에 핵심 부품이 들어가는 것을 잘라내겠다는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제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에서 중국 의존적인 경제 구조에서 탈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제를 무기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블랙 스완(검은 백조)’이 아니라 ‘회색 코뿔소’ 같은 것이다.” -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 사진 최기웅 기자 choi.giung@joongang.co.kr / 녹취 정리 권혁중 월간중앙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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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뛰쳐나와 카카오서 한᛫중 무협소설 세계에 알리는 中 유학생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중국 충칭(重慶) 출신으로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서 우시아월드 팀 리더를 맡고 있는 선징(沈靖·심정)이 지난달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이른바 '신의 직장' 삼성전자를 박차고 나와 지금은 전 세계에 한᛫중 무협소설을 알리고 있는 이가 있다. 이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은 중국 유학생 출신 선징(沈靖᛫심정) 카카오 엔터테인먼트 우시아월드 팀 리더다. 2006년 베이징사범대 교환학생 1기로 한국에 온 선징은 연세대 석사를 거쳐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4년 반 만에 창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곧 사드(THAAD) 사태와 중국 정부의 규제 강화 등 예기치 못한 풍파를 겪었고, 여러 차례 이직 끝에 2019년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 자리 잡았다. 멘사 회원으로 활동할 만큼 비상한 머리와 과감한 도전 정신을 가진 선징을 지난 5월 직접 만나봤다. 선징은 인터뷰에서 한᛫중 한쪽에 속하기보단 한국을 기반으로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게 자기 가치를 최대화할 수 있는 길이라고 당차게 밝혔다. 이날 영미권 무협소설 마니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유일무이한 플랫폼으로 거듭난 '우시아월드(WuxiaWorld)'의 성장 비하인드와 웹툰᛫웹소설 등 콘텐트 현지화 전문가로서의 인사이트는 물론 한᛫중 관계에 대한 솔직한 견해와 시야를 넓히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조언도 들을 수 있었다. 북미를 기반으로 2014년 설립된 아시아 무협 판타지 웹소설 플랫폼 '우시아월드'는 2021년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됐다. 사진 우시아월드 홈페이지 캡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선징이고 중국 충칭(重慶) 사람이다. 현재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서 우시아월드 팀 리더를 맡고 있다. 2006년 중국 베이징사범대학 재학 시절 1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처음 왔고, 졸업을 위해 중국에 잠시 돌아갔다가 2008년에 연세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한국에서 산 건 햇수로 16년 됐다. 한국에 처음 오게 된 계기는? 재학 당시 베이징사범대에는 한국 유학생이 약 1500명 정도 있었다. 캠퍼스에서 한국 친구들과 언어 교환 등 종종 교류했고,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 그러던 중 2005년 말 베이징사범대와 서울시립대가 자매결연을 통해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내가 운 좋게도 1기 교환학생으로 뽑혔다. 한국에 오기 전 한국어를 배우거나 한국에 관심이 있었는지? 사실 중국에서 특별히 한국어를 배운 적은 없다. 교환학생 시절이나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는 오히려 영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어학당도 따로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순전히 직장에서 '생존' 한국어를 배웠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중국에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해서 나도 한국 TV᛫드라마᛫음악 등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기회가 생기기 전까지 한국에 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느낀 점은? 대학 때 전공이 디지털 미디어라 한국에 와서는 시각 디자인을 공부했다. 한번은 서울시립대 기말 전시회를 갔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1학년 작품은 한국이나 중국 학생들 실력이 비슷했지만, 4학년 학생들의 전시작은 거의 예술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전문학교 학생들도 아닌데 작품의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상당히 놀랐고, 한국의 교육 수준에도 감탄했다. 이런 경험은 내가 나중에 연세대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22년 여름, 멘사 코리아 행사에 외국인 멤버로서 참석한 선징. 사진 본인 제공 한국에서 일한 경력이 많은데. 석사과정이 끝날 때쯤, 떨어지면 중국에 돌아갈 각오로 삼성전자 딱 한 곳만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채용이 됐다. 4년 넘게 삼성에서 일하다 창업 열풍이 불던 2015년에 회사를 나왔다. 이직 후 외부 투자를 받아 '사내 창업' 식으로 한국 여행 앱(APP)을 개발했다. 그런데 2016년 사드 사태가 터지면서 결국 서비스를 접었다. 그 후 한국 문화사업에 투자하는 중국 회사에서 잠깐 일했는데, 2017년부터 과학기술 분야 이외 대외 투자에 대한 중국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또다시 회사를 옮겼다. 몇 번의 이직 끝에 2019년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하게 됐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삼성을 나와 창업에 뛰어든 특별한 계기가 있나? 물론 당시 '창업 붐'의 영향도 받았지만, 인생은 고정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컸다. 한 회사에서 50~60대까지 거의 정해진 진로대로 사는 것보다 뭔가 새로운 도전이 하고 싶었다. 나는 그때 안정을 추구하기보단 세상을 더 깊이 경험하고 싶었고, 이미 고향을 떠나 한국에 와서 다양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한᛫중 사이에서 나름 장점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함께 창업했던 세 친구 모두 우리가 한국이나 중국 한쪽에만 소속되면 가치가 최소화되고, 한국을 기반으로 국제화했을 때 가장 가치가 커진다고 판단했다. 한국에는 최대한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려는 경향이 좀 있는데, 도전할 마음이 있다면 한국은 충분히 기회가 많은 나라다. 특히 한국 기업은 국내 시장의 한계를 이미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해외에 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해외 사업의 기회가 중국보다 더 많은 것 같다. 2019년 카카오 엔터테인먼트 입사 초기 마카오 마조묘(馬祖廟)를 방문해 가족과 사업을 위해 소원을 빌었다는 선징. 사진 본인 제공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해왔는지? 2019년 입사 당시 회사는 아직 '카카오 페이지'였는데, 웹툰᛫웹소설 등 한국 콘텐트의 일본 수출을 넘어 글로벌화를 시도하던 참이었다. 카카오는 중국 텐센트(騰訊)와 합작해 '포도만화(PODO漫畫)'라는 플랫폼을 만들었고, 내 역할은 카카오 페이지 내 한국 콘텐트를 중국 시장에 맞게 현지화하는 일이었다. 중국은 광고에 의존한 무료 웹툰 플랫폼이 상당히 많은데, '포도만화'는 고품질 현지화가 요구되는 유료 서비스라 비즈니스적으로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올해 초 나는 '우시아월드' 팀에 합류했고, 지금은 한국과 중국의 남성향 웹소설, 특히 판타지와 무협소설을 영미권 나라에 맞게 현지화하고 있다. '우시아월드'는 어떤 플랫폼인가 '우시아월드'는 북미를 기반으로 2014년 설립된 아시아 무협 판타지 웹소설 플랫폼이다. 2021년 카카오엔터에 인수됐다. 외교관이던 창립자가 유명한 중국 무협소설 '반룡(盤龍᛫Coiling Dragon)'을 직접 번역해 올리다 사정상 연재를 멈추자, 독자들이 자발적인 스폰서십을 지원하기 시작한 게 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회사 구성원 대부분이 유저 출신이자 무협 마니아다. 유저들이 모여 만든 회사라 아주 필수적인 부서나 업무 프로세스만 있고 불필요한 광고나 마케팅이 없는 게 특징이다. 중국과 한국 무협 소설 중 어떤 게 더 인기 있나? 영미권 독자들은 한᛫중 구분 없이 다 좋아하는 것 같다. 인기 웹소설은 웹툰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사실 요즘은 무술이나 협객이 등장하는 전통 무협은 많지 않고, 판타지 무협(선협·仙俠)소설이 인기다. 한국 무협은 현실에 가까운 고대 또는 현대 사회가 배경인 경우가 많고, 중국은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은 편이다. 전 세계 공통으로 인기가 많은 건 평범한 사람이 일련의 수련이나 경험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성장물이나 일반인이 갑자기 초능력을 갖게 되는 판타지물이다. 전통무협의 대가 진융(金庸᛫김용)의 시대를 시작으로 무협소설은 계속해서 진화해왔다. 최근엔 독자가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주제나 줄거리가 대세다. 무협소설도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되고 또 다양해지고 있다. 선징은 이날 인터뷰에서 종종 중국어 성우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은 녹음실에서 작업 중인 선징. 사진 본인 제공 웹툰과 웹소설 시장에서 한᛫중 양국의 서로 다른 특징이 있다면? 한국은 웹툰과 웹소설 두 분야에서 줄곧 강세를 유지해 오고 있다. 한국 웹소설은 오래전부터 인기가 많았고, 웹툰은 모바일 인터넷의 보급으로 스크롤 다운 형태의 열람이 가능해지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중국은 웹툰보다 웹소설이 먼저 발전했다. 웹툰은 그림을 그리는데 기술이나 장비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글은 누구나 온라인에 바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중국 인기 무협소설 '투파창궁(斗破蒼穹)'의 작가는 고작 19살에 이 작품을 썼고, 지금은 1년에 180억 원 이상을 번다고 알려져 있다. 한᛫중 콘텐트를 세계로 수출하는 전문가로서 조언이 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해외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트랜드를 파악해야 한다. 즉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콘텐트만이 성공할 수 있다. 인기 많은 한국 웹툰이나 웹소설을 보면 한국적인 문화 배경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더해 세계적인 명작으로 거듭난 경우가 많다. 요즘 독자들은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소설 속 주인공이 꿈을 실현하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 이런 독자들의 마음을 읽는 게 성공의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금 하는 일은 한᛫중 관계 악화 등의 영향을 받는 편인가? 사실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시아월드'는 글로벌 시장 중에서도 영미권 독자를 대상으로 한 서비스이고, 한국과 중국의 좋은 작품을 세계에 소개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정말 크다. 한᛫중 시장만 있는 게 아니다. 시야를 넓히면 위기도 극복하고 좋은 비즈니스 모델을 찾을 수 있다. 중국 충칭(重慶) 출신으로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서 우시아월드 팀 리더를 맡고 있는 선징(沈靖·심정)이 지난달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개인적인 경험을 비춰 봤을 때,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은 같은 문제를 두고도 완전히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그 중간에 위치한 사업자나 문화 교류인 등은 참 난처하고 또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곤 한다. 그래서 정치᛫외교적인 관계가 어떻든지 양국 국민 간의 신뢰가 중요한 것 같다. 무작정 싫다고 하기보단 직접 방문해 보고 친구도 사귀어 보면 생각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단순히 경제적으로 서로 돈을 벌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영원한 이웃으로서 서로 믿음을 쌓아야 한다. 나라 간 사이가 좋아야 불필요한 비용도 줄일 수 있다. 그게 결국 국민에게 혜택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관련기사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내 목소리 정작 中선…" 중국어 '라디오 여신'의 깜짝 고백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김치 장인' 中교수의 20년 서울살이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중 관계 굴곡 몸소 겪은 中 직장인, 메타버스 회사 CIO된 사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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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北 베팅' 시진핑"…박철언 전 장관이 본 '중국의 착각' [월간중앙]
━ [긴급 인터뷰] 한·중 수교 주역 박철언 전 장관 “문제는 북한에 ‘베팅’하는 시진핑” ■“덩샤오핑의 겸허함 상실한 중국 지도부, 세계 리더 자격 의심 받아” ■“국제사회, 일국(一國) 패권보다 다원화로 가야… 한·중·일 협력 절실” ■“윤 대통령, 격동기 생명 걸고 결단 내린 이승만, 박정희 돌이켜야” 박철언 전 정무장관은 6월 15일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시진핑 정부가 ‘중국몽’에 젖어 오만무례하다”고 중국 정부를 비판했다. 한때 ‘콘크리트 이념’을 녹여낸 세기의 러브스토리가 동북아를 떠들썩하게 했던 적이 있었다. 1989년 12월 ‘자본주의’ 한국과 ‘공산주의’ 중국의 간판 탁구 선수가 오랜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핑퐁 사랑’이 그것이다. 불가능해 보이던 결합에 성공한 이는 바로 한국의 안재형, 중국의 자오즈민. ‘죽(竹)의 장벽’을 넘어 사랑이 결실을 보게 된 데는 중국 요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 허가를 받아낸 실세 정치인 박철언 당시 정무장관의 지원이 주효했다. 6공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처사촌으로 북방정책을 주도했던 그는 내친김에 한국과 중국의 수교(修交)를 향한 숨 가쁜 물밑 교섭을 진행, 노태우 정부 임기 말인 1992년 8월 국교 수립을 끌어냈다. 박철언 전 정무장관은 5, 6공화국의 대(對)북, 대(對)공산권 밀사 역할을 도맡아 사회주의권 권력의 생리에 비교적 밝은 편이다. 이제 팔순을 넘긴(82) 그가 최근 기자들에게 입장문을 배포했다. ‘한·중 수교에 열정을 쏟았던 한 사람으로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의 오만방자한 언행을 통탄한다’라는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날이 섰다. 그는 미국에 베팅하는 한국이 후회할 것이라는 싱 대사의 발언을 ‘망언(妄言)’으로 규정하면서 “중국 정부가 오만한 자세를 버리고 과거를 성찰·반성해야 한다”고 질책했다. 6월 15일 서울 강남구 선릉로에 자리한 개인 사무실에서 [월간중앙]과 만난 그는 30여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한·중 관계가 이렇게 낙하산도 없이 추락하는 듯한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 책임은 싱 대사의 발언을 방조한 시진핑 국가주석 등 중국 정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제거하자면 중국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윤석열 대통령 등 외교·안보 책임자들은 중국을 끌어들여 동북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비전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17세기 중국 선불교 승려이자 시인인 승찬 대사는 “말이 많을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을수록 현실에서 멀어진다”고 했다. 지금 한·중 관계는 현실에서 왠지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중 관계는 1992년 수교 이후 경제적, 물량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을 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국민적 신뢰 측면에서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 ━ “일본에 사과 요구하면서 중국에는 왜 함구하나” 6월 13일 부적절한 발언으로 외교적 논란을 촉발한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를 규탄하는 김종배·김근태· 손정목(왼쪽부터) 예비역 장성들. / 사진:연합뉴스 6월 10일 싱하이밍 대사를 호되게 나무라는 입장문을 냈던데. “싱 대사의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고 한 발언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치밀게 한다. 우리나라의 외교 정책을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대국이 소국에 경고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결례이자 잘못된 발언이다. 대사라는 직분은 두 나라 관계 증진과 친선의 교량 역할을 하는 자리 아닌가. 양국의 공동 이익을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이 제1 야당 대표를 앉혀 놓고 작심해 준비한 것을 장시간 낭독했다. 누가 봐도 대사 개인의 생각이라기보다 중국 정부하고 상통한 어떤 목적을 가진 언동이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싱 대사의 언행은 외교 관례상 맞지 않고 대사 자체로서 기본 매너가 안 됐다. 외교관으로서 상호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고 했다. 이쯤 되면 ‘알아서 처신하라’는 메시지 아닐까? “윤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의 수뇌부가 싱 대사를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즉 비우호적 인물 내지 기피 인물로 선언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중국 정부에서 싱 대사를 소환하거나 외교관직을 박탈하는 게 타당하다. 중국 정부가 불응할 경우, 한국 정부는 싱 대사의 외교관 신분을 인정하지 않고 면책특권을 박탈하거나 추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너무 극단적이다. 한국과 중국은 서로 이사할 수 없는 이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극단 조치를 피하면서 대한민국의 자주성, 정부의 존엄성을 분명히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박 전 장관은 공직 재임 시 활동을 기록한 저서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2005년 펴낸 바 있다. 이 책에는 1985년 3월 22일 중국 해군 어뢰정이 한국 영해를 침범한 사건이 나온다. 당시 중국은 영해 침공에 대해 사과와 해명의 각서를 보내왔다. 한국 정부도 타이완 망명을 요구하며 어뢰정에서 살인과 난동을 부린 두 명을 중국으로 송환하는 등 한·중 우호 환경 조성에 정성을 쏟았다. 박 전 장관은 당시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이 사건 처리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어뢰정 사건 당시 중국 정부에서 한국을 대한 자세랄까 기조는? “그 시절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은 해방 후 한국의 급격한 발전을 존중하면서 겸허하게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 어뢰정이 우리 영해를 침범하자 덩샤오핑 정부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비밀리에 각서를 보내왔다. 한국 측의 조치에 고마움을 표하면서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는 지도자가 굉장히 진지한 태도를 보였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때의 중국과 지금 중국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시진핑 정부는 이른바 ‘중국몽(中國夢)’에 젖어 오만무례하다. 덩샤오핑 시절과 참 대조적이다. 그래서 안타깝다.” 지금 중국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나? “1992년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하면서 기대한 게 있었다. 당시 중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굉장히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유, 민주, 인권, 평화, 복지 이런 가치 말이다. 하지만 개방되면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는 나라로 바뀌겠거니 기대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 바람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아 무척 유감스럽다.” ━ “인류 보편가치 소홀히 하는 중국 미래 안타까워” 베이징 거리에 설치된 시진핑 국가주석의 사진과 ‘중국몽, 인민몽’ 슬로건 홍보물. 박철언 전 장관은 중국이 덩샤오핑 시대의 품위와 미덕을 잃어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 사진:연합뉴스 입장문에서 ‘중국이 500년 동안 조선에 큰 슬픔을 주고, 6·25 남침 전쟁에 가담해 대한민국에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언급했다. “우리가 일본에는 36년 식민통치를 당한 것에 대해 줄기차게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도 여러 번 이에 대한 사과성 장을 밝혔다. 중국은 어떠한가. 500년 이상 한국을 속국처럼 다뤘다. 왕을 책봉하고 해마다 부녀자를 비롯한 엄청난 조공을 요구한 나라가 중국이다. 6·25 남침 당시에는 북한에 가담해 자유를 지키려는 대한민국에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안겼다. 그런데 중국에 대해서는 사과하라, 배상하라 이런 말을 한마디도 안 한다.” 2017년 시진핑 주석은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시진핑 주석이 그런 얘기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세계적 지도자로서의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 시진핑 같은 캐릭터의 지도자가 잘하는 일과 빠져들 수 있는 함정을 짚어본다면? “중화사상, 중국몽, 동북공정, 이런 것으로 중국을 세계 최강이라고 홍보하면서 중국인들을 뭉치게 하는 데는 상당한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류 보편의 가치를 소홀히 하기 때문에 미래를 보자면 안타까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큰 꿈은 인류를 위해서 품어야 한다. 중국 같은 국력을 가진 국가의 지도자라면 중국인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하지 않겠나.” 그동안 중국을 상대해 온 한국 정부의 자세는 어땠나? “우리 정부도 수교 후 국가적 자존심과 상호 존중의 바탕 위에서 중국에 할 말은 하고, 지켜야 할 원칙은 지켰어야 했다. 왜 사드가 우리 안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말을 중국에 당당하게 못 했나.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해 현실적 영향력을 가진 중국이 수수방관하고 있으니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사드를 배치하는 것이고, 미국·일본과 연대해서 북한을 견제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이슈는 처음에는 갈등으로 증폭될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도 이해할 수 있는 사안들이다.” 싱 대사 발언 이전에도 국내 반중(反中) 정서는 고조됐다. “우리 정부는 중국과 관련해 제대로 된 자기주장 같은 게 없었다. 정부가 당당하지 못하니 롯데 등 한국 기업이 중국 현지에서 큰 피해를 보았다. 중국도 잘못을 시정하기는커녕 점점 오만방자하게 나오다 보니 싱하이밍 대사의 ‘베팅 발언’ 같은 게 돌출하는 것이다. 우리 국민 마음속에 중국이라는 나라가 좋게 자리 잡을 수 있겠나. 요즘 여론조사를 보면 반(反)중국 정서가 엄청 높다. 우리 민초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이런 말을 했다. “히데요시의 침략계획에 대한 중국의 저항과 거의 400년 뒤의 한국전쟁 때 미국에 맞선 중국의 공통점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누구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키신저의 관점이 맞다. 중국에는 중국의 국익이 있는 것이다. 미국 등 연합국이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하니 중국 자신이 안전에 위협을 느낀 것이다. 한반도가 친미(親美) 정권으로 통일되면 가뜩이나 국민당 잔당으로 골치 아픈 중국의 안전에 절대 유해하다고 본 것이다. 중국은 중국의 입장, 우리는 우리의 입장이 있다. 우리도 중국에 우리 입장을 설명하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해야 한다. 주한 중국대사가 우리더러 미국에 베팅한다고 말했는데, 지금 중국 정부를 보자. 북한에 베팅하고 있지 않나. 북한은 핵, 미사일을 계속 개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라는 차원에서 보면 엉뚱하게 베팅을 하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에 베팅하는 건 핵과 미사일을 방조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 “중국이 북핵 위협 제거하면 태평양 진출 용인할 수도” 박철언 전 정무장관은 북한을 평화공존 무드로 끌어들이는 세심한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중국의 국익은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실현하려 드는가? “처음에는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였다가 나중에 유소작위(有所作爲, 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이뤄낸다)로 바뀌었다. 힘을 키우며 조용히 있겠다는 입장에서 이제 세계의 중요한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식이다. 구체적으로는 미국 중심의 G1 체제에 도전해 미·중 G2 체제로 가자는 쪽으로 이해된다. 미국에 할 말은 하고 필요하면 투쟁해서 국력을 증진하겠다는 말인데, 동북아에서는 태평양 진출 의지로 표출된다. 미국은 일본-대한민국-대만-호주-인도를 연결하는 ‘C’자형 포위망으로 중국을 제지하고 있다.” 그래서 동북아에서 긴장이 고조되는 것 같다. “미국도 힘이 달리다 보니 일본에 군비를 증강하고, 집단 자위권 개념을 확장해 대(對)중국 견제에 나서주기를 기대한다. 이는 일본이 호시탐탐 준비했고, 바라던 바이기도 하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계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증진하자면 일국(一國) 패권주의보다는 다원화하는 권력 구조가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국제 권력정치가 3개 정도의 축으로 돌아가면 좋겠다. 그 연장선에서 우리도 중국하고 잘 지내야 한다. 꼭 미국 일변도로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염두에 뒀으면 한다.” 새로운 관점이다. 부연설명을 한다면? “미국에 대한 채권과 달러를 가장 많이 가진 나라가 중국 아닌가. 중국은 유럽과 아프리카 등에도 영향을 행사하고 있으며, 후발국에 많은 돈을 뿌린다. 제가 보기에 현실적으로 미국이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제한적으로 G2 체제를 미국이 인정하는 쪽으로 갔으면 한다. 단, 조건이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북핵 위협 제거와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패키지로 묶자는 얘기인가? “한·중·일 세 나라가 동북아에서 연대하고, 그걸 미국으로부터 양해를 구하자면 중국이 먼저 변해야 한다. 중국은 늘 조급하다. 예컨대 대만 문제만 해도 평화공존으로 가면 언젠가 대만 주민의 의사에 따라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시진핑이 조급하게 중국몽을 앞세워 자기 임기 중에 대만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인상이 짙다.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은 미국이 절대 용납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먼저 중국이 자제하면서 인류 보편의 가치에 지속해서 접근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한·중·일 연대도 가능하다. 지금처럼 오만방자하게 굴면 아시아 지역의 연대는 물 건너간다.”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류의 공동 가치, 공동선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자면 세계는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지금처럼 세계 권력의 한 축이 되고, 유럽공동체가 또 한 축이 되고, 아시아에서는 한·중·일이 연대해서 아시아적 가치와 이익을 추구하는 그림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게 옳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미국을 조용하게 설득하고 치열하게 대화해야 한다. 물론 시진핑 정부와도 담판해야 한다. 사실 한국 입장에서는 확장 억제(미국의 동맹국이 핵공격 위협을 받을 때 미국의 억제력을 동맹국에 확장하여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미흡하고 불안하다. 차라리 1991년 한국에서 철거한 전술핵을 재배치하든가 아니면 독자적 핵 개발로 우리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는 게 바람직하다. 이게 안 된다면 우리가 미국을 설득해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양해케 하고, 중국은 북핵과 미사일 위협을 제거하는 게 현실적인 대응이라고 하겠다.” ━ “윤 대통령, 미국의 확장억제 넘어서는 비전 가져야” 기존의 한·미·일 정책 기조와 궤를 달리하는 것 같다. “우리가 미국, 일본과의 연대에만 국한해선 안 된다. 좀 더 크게 미래를 보자. 북한 문제도 그렇다.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등 날을 세우는 건 흡수통일하겠다는 뜻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런 접근보다는 평화공존 무드를 공고히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생각해보자. 김정은이 갑자기 유고가 되거나 나라가 무너진다고 해서 북한이 우리에게 흡수될까? 아니다. 만약 김정은이 죽으면 제2의 친중(親中) 정권이 나온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가졌고, 우리는 확장억제에 의존한다. 상대적으로 불안하고, 불리한 건 우리다. 만약 전쟁이라도 나면 남북은 모두 초토화로 간다. 윤석열 대통령도 좀 더 긴 안목에서 민족의 미래를 보고 대(對)북한, 대(對)중국, 대(對)러시아, 대(對)일본 전략을 세웠으면 한다.” 현 정부 외교·안보팀도 기존 접근법이 익숙하지 않을까? “우리 정부는 그저 친미(親美)로 가거나, 한·미·일이 연대하는 확장억제 같은 얘기만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지켜져 왔는가를 돌이켜보자.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을 지렛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냈다. 이승만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렇게 베팅해서 안보를 얻었지만, 정전 이후 미국의 미움을 샀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닉슨 미국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하자, 박 대통령은 비밀리에 핵 개발에 들어갔다. 이에 미국이 압력을 넣었고, 박 대통령은 그 반대급부로 한미연합사령부를 받아냈다. 북한이 남침하면 미군이 자동으로 개입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박 대통령과 미국의 사이가 틀어졌다. 박 대통령도 나라를 지키려고 생명을 건 도박을 한 것이다. 이처럼 격동의 시기에는 대통령이 비상한 결의를 해야 한다. 세계정세를 제대로 읽고,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대한민국을 지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윤 대통령도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이 시기에 그야말로 잘 대처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중국하고 서로 미워하는 관계로 가선 안 된다. 한국·일본·중국이 다 ‘윈-윈(win-win)’해야 한다.” - 글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최영재 기자 choi.yeong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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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관계 굴곡 몸소 겪은 中 직장인, 메타버스 회사 CIO된 사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패션 메타버스 회사 알타바(ALTAVA)의 CIO 리훙저우(李紅宙)가 지난 5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1년 전 세계를 강타한 '메타버스(Metaverse)'는 영역을 불문하고 여전히 지대한 관심을 받는다. 수많은 메타버스 업체 중 유난히 명품 패션업계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는 회사가 있다. LVMH᛫프라다᛫펜디᛫발망᛫불가리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와 아바타 및 디지털 쇼룸 제작, 버추얼 패션 아이템 론칭, NFT(대체 불가능 토큰) 발행 등 협업을 진행한 '알타바(ALTAVA)'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5월, 패션 메타버스 기업 '알타바'의 창립 멤버로서 회사의 글로벌 경영구조를 확립하는 데 일조한 리훙저우(李紅宙) CIO(최고혁신책임자)를 만나 창립 비하인드와 그간의 이력을 들어봤다. 리훙저우는 중국 옌지(延吉) 출신으로 2007년 한국 기업의 중국 내 공채를 통해 한국으로 왔다. 현재 알바타의 CIO 자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회사와 중국 회사를 두루 거치며 프로그래밍᛫금융᛫법률᛫회계᛫엔터테인먼트᛫메타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얻은 모든 경험과 지식은 기회가 되고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리훙저우는 이날 인터뷰에서 한᛫중 관계의 정점에서 나락에 이르기까지 그 속의 굴곡을 고스란히 겪은 세대로서 갖게 된 독특한 인사이트와 개인사를 소개했다. 이날 중국 내 메타버스 시장 현황과 업계 속사정, 그리고 한᛫중 미래 협력 가능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는 언제, 어떻게 오게 됐나? 2007년 SK C&C의 중국 현지 공채 프로그램에 합격해 중국 저장(浙江)대학 졸업과 동시에 연수차 한국으로 왔다. 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은행᛫증권사 같은 금융회사의 시스템을 개발하고 구축하는 일을 했다. 한국에서 2년 반 일하고 1년은 베이징 지사로 파견됐었다. 리훙저우는 이날 인터뷰에서 첫 직장인 SK C&C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다. 사진은 회사에서 당첨된 워커힐빌라에서 동료들과 주말 모임에 참석한 리훙저우(가운데). 사진 본인 제공 당시 한국 기업의 채용 프로그램은 어땠나? 15~16년 전 SK C&C는 중국 현지에서 채용한 인재를 한국 본사로 데려와 2~3년 정도 기업문화와 업무를 가르치고 다시 중국 현지 법인으로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었다. 한국어를 못하는 중국 직원은 한국에서 근무하며 어학당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구글의 제안을 포기하고 온 동기도 있었다. 그땐 중국 시장에 대한 회사의 의지가 상당했다. 중국 직원들도 그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더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아쉽게도 지금은 이런 프로그램이 대부분 없어지고 거의 모든 회사가 현지 채용만 하는 걸로 알고 있다. 2012년 전후로 한국 회사를 이탈한 중국 IT 인력이 꽤 많은데, 중국 내 모바일᛫ICT 업계 붐이 일어나면서 한᛫중 기업 간 임금 역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2016년쯤엔 한국 기업이 매력적이란 인식도 많이 줄어들었다. 2014년, 한국 개인투자자들의 중국 A주 직접 투자를 허용하는 후강퉁(滬港通) 거래 개시에 앞서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증권사 임원들에게 설명회를 진행 중인 리훙저우. 사진 본인 제공 ICT 회사에서 증권사로 이직한 배경은? 2010~2011년 중국 기업들의 기업공개(IPO)를 통한 해외 진출 열기가 대단했다. 전 회사에서 증권사 차세대 시스템을 개발하며 금융과 관련된 실무를 익힌 게 이직의 계기가 됐다. 옮긴 회사에서 나는 중국 회사의 국내 상장 업무를 주관했는데, 이때 배운 금융᛫법률᛫회계 분야 지식은 훗날 '알타바'의 해외지사 설립과 투자 유치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직 초기 열렸던 호황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일부 중국 회사의 회계 부정 이슈로 IPO 시장에 혹한기가 닥쳤기 때문이다. 예전엔 중국 기업이 직접 IPO를 많이 했다면, 지금은 한국 상장사를 인수᛫합병(M&A)하거나 지분 참여의 방식으로 한국에 진출하고 있다. 2015년, 중국 자본시장 정보를 모니터링 중인 리훙저우. 사진 본인 제공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의 이력도 이목을 끈다. 증권사에 다니면 여러 업종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2016년쯤 중국과 관련해 뜨는 업종은 여행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일 것이란 판단하에 '컬처몬스터'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콘서트 같은 공연에 투자하거나 티켓과 관광 상품을 결합해 중국 현지에 팔기도 했는데, 그해 사드(THAAD) 사태가 터지면서 수입이 뚝 끊겼다. 언제 상황이 좋아질지 기약도 없었다. 그러던 중 2017년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열풍이 불었다. IT와 금융 업계에서의 내 모든 경력을 조합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18년 '알타바'에 합류했고, 지금은 CIO로 재임 중이다. 리훙저우는 2016년 한류 콘텐트를 해외로 전파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컬처몬스터'를 창업했다. 사진은 더쇼(The Show) 진주 콘서트에서 현장을 살피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 제공 알타바(ALTAVA)는 어떤 회사인가? 2018년에 설립한 메타버스 회사다. 처음엔 게임업계 출신인 창업자의 게임과 패션 그리고 커머스를 결합한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시작했는데,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정립되면서 자연스럽게 패션 메타버스 대표회사로 거듭나게 됐다. 즉 게임 아바타가 명품 브랜드 옷을 입고 가상공간에서 활동하게 한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가상공간에서 명품을 구매하면 리워드를 받거나 레벨업 되고, 오프라인에서 실물을 사면 가상 아바타도 똑같은 제품을 착용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식이었다. 2017년 기획 초기부터 여러 럭셔리 패션 브랜드와 접촉해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디지털 사업권을 확보했다. 지금은 자체 B2C 서비스인 메타버스 플랫폼 '알타바(한국)', 'ADA(중국)'을 운영 중이며, B2B 비즈니스로는 브랜드의 맞춤형 '미니버스(Miniverse)' 같은 버추얼 플랫폼 제작이나 NFT 발행 등의 기획᛫개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19년 리훙저우는 패션 메타버스 구축에 필요한 해외 명품 브랜드와의 협력을 위해 패션업체 유럽 본사를 방문했다. 사진은 파트너사 직원과 프라다(PRADA) 밀라노 본사에서 미팅을 마친 리훙저우(왼쪽). 사진 본인 제공 2021년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는데. 사실 우리 회사는 처음에 '게이미파이드 커머스(Gamified Commerce)' 즉 게임을 하면서 실물에 대한 구매동기를 일으키는 모델에 집중했었다. 그러다 나중에 활동무대를 게임에서 메타버스로 점차 옮긴 케이스다. 현실에서의 가치와 생활을 가상공간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알바타의 초창기 구상은 '메타버스'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했다. 우리의 개발 방향은 그대로인데, 무대만 바뀐 셈이다. 운 좋게도 2021년 메타버스가 흥행하면서 우리 회사도 덩달아 주목받기 시작했다. 40여 개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버츄얼 패션을 체험할 수 있는 '알타바 월드 오브 유(Altava World of You)'의 APP 화면. 사진 알타바 자체 메타버스 플랫폼의 한᛫중 버전이 다른 이유는? 초반에는 이름만 다르고 사실상 똑같은 포맷의 플랫폼이었다. 지난해부터 버전이 갈라져 조금 다른 형태로 성장 중이다. 당초 중국 플랫폼을 따로 만든 이유는 중국의 인터넷 규제 때문이다. 중국법상 중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하려면 모든 데이터 서버를 중국 현지에 둬야 한다.'ICP 비안(Internet Content Provider備案)' 신청이 필수다. 우리는 중국회사와 조인트벤처를 설립해 서비스를 출시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메타버스에 대한 중국 내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서 향후 운영 방향을 고민 중이다. 참고로 '알바타'의 중국 버전 'ADA'는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이자 잉글랜드 출신 여성 수학자인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의 이름에서 따왔다. 에이다의 미(美)적 감성과 프로그래밍을 결합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중국어로 ‘꾸미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아이다(愛搭)'인 점도 고려했다. 메타버스에 대한 중국 내 분위기는 어떤가? 사실 메타버스᛫NFT᛫블록체인 등 신기술에 대한 중국 내 분위기는 한국과 사뭇 다르다. 한국은 여전히 이런 기술들을 적극 활용해 보자는 분위기지만, 중국에선 화제도에 비해 실제 적용 사례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특히 블록체인이나 코인의 경우, 초반에는 중국의 발전이 앞서가는 듯했지만 투기나 사기 등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면서 규제가 심해졌다. 지금 중국은 블록체인이나 그 파생 기술의 산업적 사용에 집중하고 있다. 메타버스의 경우도 중국 IT᛫모바일 기업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신중하게 접근하는 분위기이다. 갑작스러운 규제에 대한 우려와 구체적인 사업모델 관련 고민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은 현재 인공지능(AI) 개발엔 적극적이지만 메타버스 개발엔 선뜻 나서기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중국 IT기업의 특성상 성공사례들이 하나둘씩 생긴다면 공백을 채우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메타버스 분야에서 한᛫중이 협력할 공간은 없는지? 중국의 메타버스나 블록체인 등 분야가 완전히 개방되진 않았지만, 제도적인 정비가 끝나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중국은 현재 다른 나라의 상황을 봐 가면서 제도적 틀을 잡아가겠다는 태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이 생기면 시장도 개방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제일 잘하는 분야는 바로 콘텐트다. 메타(META)나 애플(Apple) 같은 회사처럼 세계에서 제일 큰 메타버스를 만들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핵심 콘텐트는 한국이 제일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문화에서만 나오는 창의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는 미래에 매체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한 강점이다. 나중에 중국 시장이 열렸을 때, 한국이 앞서가는 분야에서 공격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싱가포르 블록체인 DAPP(Decentralized Application) 발전방향 세미나에서 가상 세계 속 콘텐트의 핵심 역할을 설명하고 있는 리훙저우. 사진 본인 제공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조언이 있다면? 나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중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의 혜택을 받은 세대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잘 살고 싶다'는 모든 사람의 바람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경제가 좋아져야 하는데, 양국이 갈등할 때 경제가 나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양국이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결국 개인과 국가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물론 사회 전체가 깨달음을 얻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아 전 국민이 경각심을 느끼게 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경제학에서 모든 거래는 서로의 장점을 교환해 이득을 극대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A와 B가 거래할 때, A가 아무리 많은 분야에서 강점을 가졌다고 해도 완전무결할 순 없다. 부족한 부분은 B에게 맡기고 잘하는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는 게 결국 이익의 극대화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이다. 한국과 중국의 상황이 딱 그러하다. '상호 보완'만이 서로가 잘살 수 있는 궁극적인 길이라고 생각한다. 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관련기사 '김치 장인' 中교수의 20년 서울살이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내 목소리 정작 中선…" 중국어 '라디오 여신'의 깜짝 고백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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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장인' 中교수의 20년 서울살이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최근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를 펴낸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세상 어디에 있든지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이다". 21년 전, 중국 다롄(大連)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의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 표지에 적힌 말이다. 지난 4월, 최근 '제2의 고향'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책을 펴낸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 취샤오루를 만났다. 현 대학교수이자 두 고등학생 아들의 엄마이기도 한 취샤오루는 이날 인터뷰에서 유창한 한국어와 솔직한 입담으로 20년에 걸친 한국살이 에피소드를 쉴 새 없이 들려줬다. 매운 음식에 쩔쩔매고 서툰 한국어에 실수투성이였던 날들에서 못 담그는 김치가 없는 진정한 '김치 장인'으로 거듭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울고 웃긴 이야기가 한가득했다. 취샤오루는 낯선 땅에 적응하고 삶을 살아내느라 고군분투하다 한국인 남편을 만나 서울에 뿌리내리고, 비바람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온전히 한국 사회로 녹아들었다. 다른 다문화 가정에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밝힌 취샤오루는 국제결혼 가정의 일원으로서 마주했던 편견이나 어려움, 이를 극복해 온 과정과 노력을 소개했다. 다문화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제도적 문제점에 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중 관계 악화가 아이들에게 가져온 변화와 교육 현장의 실제 상황,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소신도 가감 없이 밝혔다.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의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 사진 좋은땅 출판사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2001년 2월, 우연한 기회로 고(故) 최은택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님이 설립한 회사의 초청을 받아 2주 정도 한국을 방문했었다. 당시 나는 고향인 다롄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중국에 돌아가서도 그 2주간의 경험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일본계 회사에 다녔던 터라 내 상사도 일본 분이었는데, 내게 한국에 가서 한번 살아보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하셨다. 한국행 편도 비행기표를 직접 사주실 정도로 나를 응원해 준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2002년 1월, 결국 고민 끝에 나는 사직서를 내고 28살의 나이로 한국어는 한마디도 몰랐지만 무작정 한국에 왔다. 당시 서울엔 1998년 먼저 한국으로 유학을 온 친언니가 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방학동 반지하 빌라인 언니 집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땠는지? 먹는 것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다롄은 매운 음식이 별로 없는데, 한국은 '고추장의 나라' 같았다. 처음 왔을 때 말이 안 통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매운 음식이 많아 도통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없어 힘들었다. 닭갈비는 물에 씻어 먹고, 라면은 소스를 빼고 간장을 넣어 끓여 먹었다. 한국어를 전혀 몰랐을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반대로 타거나 종점까지 가기 일쑤였다. 한번은 1호선을 반대로 타서 인천까지 갔는데, 한 대학생이 방학역까지 같이 와줘서 정말 감동했다. 지하철에서 취객에게 봉변당할 뻔한 적도 있는데, 다행히 주변 분들이 나서서 도와주셨다. 다만 당시 치한을 냅다 지하철 밖으로 던져버린 분과 쏟아진 소지품을 주워 주며 나를 위로해 주신 분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저 감사하단 말만 반복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중국어 강의하는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어학당을 두 달 다녔다. 하지만 학비가 너무 비싸서 곧장 일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4년간 일한 돈을 부모님께 다 드리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생활비와 학비를 직접 벌어 써야 했다. 나는 어학당에 가야만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회에 직접 들어가 배우는 게 훨씬 더 빠르다. 나도 책이나 어학당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다. 얼마 전 책을 냈다고 들었다. 『안개꽃 별이 되다』는 20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일기식으로 기록한 것들을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다. 특히 국제결혼 가정의 일원으로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문화 차이 그리고 이를 해결해 온 방법과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등을 적었다. 한국 사람끼리 해도 힘든 결혼을 언어᛫국적᛫문화가 다른 사람끼리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적응하다 보면 충분히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 다른 다문화 가정에도 '꾸준히 노력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 책을 쓰게 됐다. 취샤오루가 아들과 함께 TBS 교통방송에서 중국어 라디오 녹음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책을 보니 한국 사회에 상당히 활발하게 참여했던데. 중국어 강의, 라디오 방송, 중국어 더빙이나 내레이션, 중국 문화 관련 행사 진행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아이들 학교 봉사활동이나 녹색 어머니회, 운동회, 방과 후 수업 등 자연스럽게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과 만나고 소통하면서 한국어도 많이 익혔다. 나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안 통하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데, 남을 도와주는 일은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다. 최근에는 환경에도 관심이 커져서 아이들과 함께 쓰레기 줍기 등 여러 캠페인도 몇 년째 하고 있다. 방과 후 수업의 경우는 내가 성북구청 담당 부처에 직접 찾아가 재능 기부를 하겠다고 자원했다. 중국학과 교수라는 장점을 살려 집 근처 학교에서 태극권 등 중국 문화 관련 수업을 무료로 가르치기도 했다. 국민대에서 주최한 제2회 한중문화제에서 방송인 장위안과 함께 사회를 보고 있는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남편과는 어떻게 결혼하게 됐나? 중국어를 가르쳤던 학생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학교 선배이자 회사 동료인데 괜찮은 사람이니 결혼은 안 하더라도 한국어 공부하는 셈 치고 만나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처음에 불순한(?) 의도로 소개팅에 나갔는데, 남편은 나를 만나기 위해 중국어 세 마디를 밤새워 연습해 왔더라. 그런 남편에게 뭔가 진지함을 느꼈고, 그렇게 1년 넘는 연애 끝에 2004년 결혼했다. 사실 나는 1998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대사를 보곤 한국 사회가 상당히 가부장적이라고 느꼈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다. 연애 시절은 어땠나? 나는 한국어가 안 되고 남편은 중국어를 몰라서 한중, 중한사전을 항상 들고 다녔다.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았다. 한번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러 갔는데, 영어를 몰라 3시간 내내 너무 힘들었다. 중국 영화 '무간도'가 개봉했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보러 갔는데, 영화 내내 홍콩말만 나와서 하나도 못 알아듣고 나온 적도 있다. 그래서 그 뒤론 1년 내내 도서관에서 데이트했다. 나는 공부하고 남편은 옆에서 책을 읽었다. 2014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수여식 당일 취샤오루의 모습. 사진 본인제공 석᛫박사 과정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한국에 와서 기업체를 대상으로 중국어 강의를 많이 했는데, 학생들이 어법 관련 질문을 할 때마다 제대로 대답을 못 했던 게 공부를 더 하게 된 계기다. 전문적으로 배워서 더 잘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사실 석사 과정 당시에 아이를 가져서 육아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박사 과정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줬다. 발표 같은 걸 준비할 때면 남편이 자료를 먼저 읽고, 쉬운 말로 설명해 줬다. 새벽 3시에 발표문을 고쳐 달라고 해도 밤새 도와주고 뜬 눈으로 출근하기도 했다. 남편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다. 한국에서 20년 넘게 사는 동안 남편 덕분에 새로운 내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한·중 국제결혼 부부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요즘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아내 혹은 남편이 중국 사람이면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좀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한쪽만 노력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 같은 경우는 한국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한국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받아들인 편이다. 예전에는 김치도 시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것만 먹었는데, 이젠 내가 직접 담가 먹는다. '김치 장인'까진 아니라도 할 줄 아는 김치 종류가 꽤 다양하다. 취샤오루가 직접 담근 김장 김치. 사진 본인제공 결혼할 때 부모의 반대는 없었는지? 시부모님의 반대가 좀 있었다. 제천의 작은 마을에서도 아들 넷을 훌륭하게 키워냈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이었다. '우리 아들이 어디가 모자라서 외국인과 결혼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어느 정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시부모님을 직접 찾아뵙고 '정면 돌파'를 하자 생각이 바뀌셨다. 어머님이 되려 우리 결혼을 서두르셨다. 사실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에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여전히 중국이나 베트남 등이 가난한 나라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인식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을 보지 않고 나라만 보는 셈이다. 그런 편견과 꼬리표는 결국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다문화 가정을 향한 인식이 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문화 가정의 외국인 배우자들도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EBS 중국어 프로그램 담당 강동걸 PD(오른쪽)와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자녀들 언어 교육은 어떤 식으로 했나? 친정 어머니가 오래 한국 계셔서 그런지 지금은 아이들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많은 다문화 가정의 외국인 엄마가 모국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기왕에 한국에 살면 어차피 엄마 빼고는 다 한국어를 쓰기 때문에 엄마는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다문화 가정의 교육과 관련해 조언이 있다면? 대만에선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가르친다. 베트남, 몽골, 필리핀 등 10개 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필수과정이고 중᛫고등학교는 선택과목이다. 중요한 시기에 아이들이 다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가르친다는 점에서 상당히 좋은 제도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다문화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국 사람은 피부색이나 국가 경제력으로 상대방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선 부유한 나라에서 온 사람과 결혼하면 '국제결혼 가정',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과 결혼하면 '다문화 가정'이라고 한다. 차별적인 명칭은 되도록 피하고, 사회적인 논의를 통해 인식을 개선해 나갔으면 좋겠다. 대만에선 대만 내 거주 또는 정착한 외국인을 '신주민'이라고 부른다. 다문화 구성원을 부르는 명칭이나,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점차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서울 숭덕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중국 문화 수업을 진행 중인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한국 사회에 사는 다문화 가정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뭔가? 내 주변의 다문화 가정을 보면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다자녀 가구인 경우가 많다. 현실에 맞지 않는 지원 정책도 문제다. 방과 후 수업료 면제같이 실효성 없는 지원보다 외국인 엄마들의 능력과 사회성을 키워줘야 한다. 그리고 외국인 배우자의 가족이 비자를 받기 까다로운 것도 힘든 점 중 하나다. 나도 친정 어머니 비자가 나오지 않아 상당히 고생했었다. 친정 엄마가 육아를 도와주면 외국인 여성들이 일자리도 구하고 사회에 적응하기도 쉬울 텐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외국인 엄마가 육아 때문에 일을 못 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안정감이 없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더 적응을 못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두 아들과 함께 봉사단체 도담도담이 주관한 안전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취샤오루(가운데). 사진 본인제공 자녀들도 어려움을 겪었나? 한때 큰아이가 한국말이 좀 어눌했는데, 학교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머리채를 잡고 침을 뱉었다고 하더라. 작은 아이는 학교에서 맞아 안경이 부러진 적도 있다. 최근엔 한·중 간 분위기가 안 좋아서 한국을 떠나 말레이시아 등 나라로 이민 가는 가족들도 많이 봤다. 혹여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라고 한다. 나는 이게 피하거나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어디서든 당당하라고 가르쳤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아빠는 한국인이고 엄마는 중국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대신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집에 와서 얘기하라고 일러뒀다. 언제부터 한·중 관계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기 시작했나? 최근 몇 년 정치적인 상황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이 유튜브를 많이 보다 보니 중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안 좋아졌다. 판단 능력이 미성숙한 아이들이 근거 없고 선동적인 뉴스에 노출되고 있다. 우리 아이들에겐 유튜브를 최대한 보지 말고 어떤 일에 관해 판단이 잘 안될 때는 꼭 물어보고 행동하라고 가르쳤다. 사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중국 여행도 많이 하고, 중국어도 열심히 가르쳤다. 집에서는 항상 중국 요리와 한국 요리 두 가지를 만들어 먹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아이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최근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를 펴낸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중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한·중 관계를 개선하는 데 나라 간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개인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최대한 긍정적인 면을 자주 보여주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수업 시간에 한·중 간 여러 갈등에 대해 학생들에게 관련 논문이나 연구 결과를 보여주고, 또 학생들이 직접 조사하고 서로 토론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검증이 안 된 이야기를 무작정 믿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문제점을 찾게 하는 것이다. 요즘 한·중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중국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다며 중국 교환학생을 신청하는 한국 학생도 있고, 한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부모님과 싸우는 중국 학생도 있다. 직접 한국에 와보고 중국에 가보면 원래 알고 있던 사실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나라 간의 교류와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관련기사 "내 목소리 정작 中선…" 중국어 '라디오 여신'의 깜짝 고백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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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 정작 中선…" 중국어 '라디오 여신'의 깜짝 고백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2014년부터 TBS eFM 라디오에서 매일 2시간씩 중국어로 한국의 다양한 소식을 전해온 방송인 무전(牟珍)이 지난 3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드럽고 따듯한 '여신' 목소리로 국내 중국어 라디오 방송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거듭난 DJ가 한 명 있다. TBS eFM 라디오에서 매일 2시간씩 중국어로 한국의 다양한 소식을 전해온 방송인 무전(牟珍)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올해로 한국 생활 15년 차인 무전은 라디오 진행 외에도 현재 한중 MC, 중국어 성우, 한중 동시통역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객원교수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특히 중국어 라디오를 즐겨 듣는 이들에게 무전의 목소리는 더없이 친숙하다. 프로그램의 간판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한국에 사는 중국인이라면 무전의 방송을 안 들어본 이가 없을 정도다. 중국어를 공부하는 한국인 중에서도 애청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20년 팬데믹 시기 쌍둥이 엄마가 됐다고 밝힌 무전은 지난 3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본인의 이야기를 유창한 한국어로 쉴 새 없이 쏟아냈다. 15년 전 한국에 오게 된 배경, 만능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살게 된 과정과 그 뒤에 숨겨진 노력, 일과 육아에 대한 소신 그리고 프리랜서 꿈나무들을 위한 애정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무전이 2020년부터 진행해온 TBS eFM 중국어 프로그램 '천애만리정(天涯萬里情)'. 한국에 체류 중인 중화권 외국인을 위해 한국 생활 정보와 문화 콘텐츠, 고향 소식 등을 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사진 본인제공] 한국은 언제 어떻게 오게 됐나? 2008년 한국에는 직장 파견으로 처음 왔고, 온 지는 15년 정도 됐다. 학부 때 전공이 대외 한어(국제 중국어 교육)과라 졸업 후 출판사를 보유한 베이징(北京) 소재의 한 어학원에서 중국어 강의를 했었다. 부전공이 방송과여서 대학 시절 여러 교내 또는 외부 행사 진행이나 학교 라디오 방송국 국장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발음이나 강의력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교재 녹음이나 출판을 염두에 뒀던 어학원 원장님이 나를 좋게 봐주셔서 채용과 동시에 한국 파견이 결정 났었다. 한국에 올 거라고 예상했는지? 사실 대학 때 고민했던 진로는 한국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어련히 전공대로 중국어 강사가 되거나 아나운서᛫MC(진행자)가 될 거라 생각했다. 주전공은 중국어 교육이었지만 교수님이 MC를 적극 권유하셔서 대부분 그와 관련된 이력을 쌓았다.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TV᛫라디오 방송국에서 MC 관련 상도 받았고, 보통화(普通話,중국 표준어) 홍보대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 방송국에 인턴으로 들어가 TV 프로그램 촬영᛫진행 등을 해봤는데,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진로를 바꿨다. 4학년 때 처음으로 외국인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보람을 느꼈다. 고향은 산둥(山東)성이지만 허난성에서 자랐기 때문에, 졸업 후에는 집과 비교적 가까운 베이징에서 첫 직장을 구했다. 그게 나를 한국으로 보내준 어학원이었고 그렇게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한국에 파견 나온다고 했을 때 부모의 반대는 없었는지? 반대는 안 하셨다. 부모님은 내가 1~2년 정도 가는 걸로 생각하셨고, 실제로 계약도 1년 단위로 해서 내가 원하면 연장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 온 후로 다시 미국으로 유학 갈 마음이 생겨서 한동안 영어 공부에 몰두했었다. 그래서 한국 영어 학원에서 고급 프리토킹반 수업을 들었는데, 여기서 오히려 한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됐다. 그때 만난 인연들 중 지금 대기업에 다니거나 동남아에서 사업하는 친구도 있다. 친구가 생기니 한국에도 점점 관심이 생겨 2년 반 정도 다닌 첫 직장을 그만두고 어학당에서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무전의 생애 첫 동시통역 현장. [사진 본인제공] 통번역대학원 입시학원에서도 일했다고 하던데. 어학당에 다닐 당시 통번역대학원(통대) 입시 대비로 유명한 학원이 하나 있었다. 이 학원에 한-중 통번역을 가르칠 중국어 원어민 선생님이 없다고 해서, 다른 분 추천으로 내가 수업을 맡게 됐다. 그래서 한때 오전에는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오후에는 통대 입시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그런데 내가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통번역에 흥미가 생겼고, 왠지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단 자신감이 생겨 통대 진학을 준비하게 됐다. 통대 입시 준비는 어떻게 했나? 정말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한국어학당에 다닌 지 1년 만에 입시를 시작해서 한국어 실력이 한참 부족했다. 한국어를 끊임없이 쓰고 읽고 외우느라 2년이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볼펜을 한 20자루 정도 쓴 것 같다. 매일 한국어를 한 문단씩 달달 외웠다. 통대 입시에서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줄 파트너가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주로 한국어를 잘하는 국내파 친구들과 함께 스터디를 많이 했다. 무전의 쌍둥이 아들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 순간. [사진 본인제공] 쌍둥이 아들들의 언어 교육은 어떻게 하고 있나? 우리 집은 중국어와 한국어를 엄마 아빠가 명확하게 구분해서 사용 중이다. 한국인인 아빠는 아이들과 무조건 한국어로 대화하고, 나는 중국어만 쓴다. 그런데 한국에 살고 또 어린이집에서도 한국어만 쓰다 보니, 내가 중국어로 물어봐도 아이들은 한국어로 대답한다. 중국어 듣기 수준은 한국어와 비슷하지만 말하기는 아직 서툰 편이다. 아이들이 중국어로 대답하지 않을 때 엄마가 반응을 해주지 않으면 중국어 말하기 실력도 자연히 는다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엄마 입장에서 늘 아이들 빨리 밥 먹이고, 옷 입혀서 데리고 나가기 바쁜 것 같다. 한᛫중 혼혈인 아이들의 국적이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는지?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놔두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나도 어릴 때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었다. 고향은 산둥이지만 허난성에서 자랐기 때문에 허난 사람도 산둥 사람도 아니란 느낌이 있었다. 베이징에 가든 상하이에 가든 나는 언제나 외지 사람이었기 때문에 소속감이 없어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돼 보니 사실 이런 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한국 사람이냐 중국 사람이냐를 따지기보단 앞으로 아이들이 그냥 나는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코로나 시기에 육아가 힘들 진 않았는지? 한국에 온 뒤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2020년에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특히 아이들 첫돌 전까지가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다행히 한국은 산후 도우미 정부 지원이라던가 전반적인 시스템이 잘 돼 있어서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한국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실감할 수 있었다.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의 무전은 중국어 학습자들 사이에서 '라디오 여신'으로 불린다. 사진은 TBS eFM 중국어 시사프로그램 신문재로상(新聞在路上)을 진행할 당시 무전. [사진 본인제공] 한국에서 중국어 라디오 방송은 언제부터 하게 됐나? 2014년에 TBS 교통방송에 합류했으니 거의 10년이 다 돼간다. 2014년은 내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 합격한 해이기도 하다. 라디오 방송과 통학을 병행했던 기억이 난다. 그간 TBS에서는 '서울생활가유참(首爾生活加油站)', '신문재로상(新聞在路上)', '천애만리정(天涯萬里情)'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2015년 새해에 한᛫중 다문화 가정을 인터뷰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했었다. 그때 한 부부가 한᛫중 축구 경기를 보러 가서 각자 서로 태극기와 오성홍기(중국 국기)를 들고 흔들었다는 얘기가 너무 재밌었다. 지금 생각하니 방송하면서 인터뷰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국과의 인연, 부딪히고 적응해 가는 과정, 행복했던 기억 등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즐거웠다. 한국에 온 중국 사람들이 처음에 공통으로 겪는 어려움은 언어적인 부분이다. 식습관이나 문화는 사실 한᛫중 양국에 비슷한 면이 많아서 적응하기 쉬운 편인데, 한국어를 배우는 게 가장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특집 프로그램 방송 전 대기실에서 대본을 점검 중인 무전(가운데)과 천펑(陳鵬) 중국 난카이대 교수(왼쪽), 톈종치(田宗琦) 전 CCTV 스포츠 채널 MC. [사진 본인제공] 한국에 왔을 때 중국과 다르다고 느낀 점이 있다면? 화장을 안 하는 여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나는 중국에 있을 때부터 방송이나 행사가 없는 날엔 거의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 편이었고, 지금도 평상시에 화장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민낯은 본인 미모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거나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고 해서 꽤나 당황했다. 그리고 직장에서 회식할 때 밥 먹고 술 마시고 커피까지 마시는 등 2차, 3차 자리로 이어지는 게 놀라웠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한᛫중 간에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내 주변 한국분들은 자기 부모님을 깍듯이 대하고 조금 어려워하는 면이 있다. 반면 중국에서는 부모님과 좀 격의 없이 지내는 편이다. 미국 사람처럼 부모님 이름을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과 미국의 딱 중간 정도인 것 같다. 올해로 한국 생활 15년 차인 무전은 라디오 진행 외에도 현재 한중 MC, 중국어 성우, 한중 동시통역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객원교수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사진은 KTV 프로그램 '핫플레이스' 출연 당시 무전의 모습. [사진 본인제공] 최근 라디오 방송을 잠시 쉬고 있다고 들었는데. 방송사 사정상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다. 요즘은 한국외대에서 통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 학생들은 중국어 실력이 상당한 것 같다. 10년 넘게 중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옛날보다 훨씬 많아졌다. 통번역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사람들은 동시통역과 순차통역을 혼동할 때가 많다. 동시통역은 리시버 등 기계가 필수적이고, 순차통역은 발화자가 중간에 말을 끊어줘야 통역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순차통역을 동시통역으로 착각해 5~7분 넘게 끊지 않고 말하기도 한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기억에 의존해 키워드만 가지고 통역을 해야만 했다. 용산에서 열린 한 기업 행사에서 진행을 맡은 무전의 모습. [사진 본인제공] 한중 MC로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며 느낀 점은? 한국에서 열리는 행사는 주최 측이 상당히 꼼꼼하게 모든 것을 사전에 체크한다. 전반적인 리스크를 확 줄여 주기 때문에 진행자로서 상당히 든든하고 팀워크가 잘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송이나 통역 등 프리랜서 일을 주로 해왔는데, 후배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프리(Freelancer)'는 '프리(Free)'가 아니다. 프리랜서를 하려면 인하우스(회사 소속)로 일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자격증과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프리랜서로 일하기 전, 먼저 인하우스로 몇 년 정도 일을 해보고 프리랜서가 적성에 잘 맞는지 먼저 파악하고 결정하는 게 좋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일회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최 측이 같은 행사를 매년 나에게 맡기게 됐을 때 제일 뿌듯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난 뒤 주최 측이 애초 협상했던 보수보다 더 많이 챙겨주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내 능력을 인정받는 느낌이라 정말 기분이 좋다. 무전은 이날 인터뷰에서 ″기회는 항상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본인 프로필 이미지. [사진 본인제공] 한중 2개국어 진행을 잘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우선 모국어 진행을 먼저 숙달해야 한다. 모국어로 진행 관련된 모든 기술을 익힌 다음 외국어 진행에 적용하면 된다. 사실 한중 MC의 경우 한국과 중국의 취향 차이가 좀 있다. 중국 사람들은 하이톤에 달콤한 목소리를 더 좋아한다. 내 목소리는 정작 중국에선 인정을 못 받았던 것 같다. 나는 무게감 있고 멀리 잘 퍼지며 파고드는 힘이 있는 목소리라 아나운싱을 가르쳐준 선생님도 행사 MC 쪽으로 나를 많이 밀어주셨다. 방송이나 더빙 관련 수업도 열심히 들었지만, 나한테는 기회가 잘 오지 않았다. 반면 한국에 와서는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차분하고 평온한 느낌의 목소리를 선호하는 것 같다. 현재 가장 큰 고민이나 도전은?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다. 일은 평생 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또 금방 크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 주변에 아이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는 한국 엄마들이 많은데, 오로지 아이 생각밖에 안 해서 그런지 스트레스가 더 큰 것 같다. 나는 육아든 일이든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 없고 잘 못하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면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2020년 쌍둥이 엄마가 된 무전은 이날 인터뷰에서 여전히 끊임없이 도전하고 공부하면서 일과 육아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향후 계획이나 목표는? 내년에는 통번역 박사 과정에 도전해보고 싶다. 올해는 평생교육원에서 경영학 수업을 신청했다. 사람이 불안하고 뭘 하고 싶을지 모를 때는 공부가 최고인 것 같다. 공부를 하다 보면 또 좋아하는 일을 찾게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정치 문제는 정치로 해결하고, 경제 문제는 경제로 해결했으면 좋겠다. 한᛫중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당장 상황이 안 좋다고 해서 마냥 쉬고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기회는 항상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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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중국어 성우 겸 방송 MC 위하이펑(于海峰)이 지난달 13일 KBS 여의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국에서 중국어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목소리. 베일에 싸여 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중국어 성우 겸 방송 MC 위하이펑(于海峰)을 지난달 13일 KBS 여의도 사옥에서 만났다. 위하이펑은 중국에서 아나운서를 가장 많이 배출한다는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으로 누구보다 또렷한 발음과 편안한 목소리를 가졌다. 시중에 나온 교재로 중국어를 접한 한국 사람에겐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2000년 한국으로 건너온 위하이펑은 벌써 한국 생활 23년 차인 '중국 사위'다. 중국어 강사 시절 우연히 시작한 녹음과 내레이션 일로 성우의 길에 들어선 위하이펑은 이제 국내 출판업계는 물론 중국어 녹음 분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됐다. 방송과 라디오 분야에서도 아리랑 국제방송, EBS 교육방송, TBS 교통방송 등을 거친 1세대 중국어 진행자로서 지금은 KBS 월드 라디오에서 중국어 뉴스 보도를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어 라디오 세계와 23년 넘게 양국을 지켜본 산증인으로서 한᛫중 관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위하이펑의 솔직한 견해를 들어봤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위하이펑이고, 중국 헤이룽장에서 태어났다. 2000년에 한국으로 와서 정착했다. 지금은 KBS 월드 라디오에서 중국어 방송을 하고 있다. 중국어 내레이션이나 더빙 일을 하는 성우로도 활동 중이다. 어떤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나? KBS 월드 라디오의 중국어 방송은 매일 약 1시간 정도 편성된다. 나는 그중 뉴스 보도 파트의 녹음을 담당한다. 중국어 프로그램은 시작 부분에 항상 한국의 주요 뉴스를 먼저 보도하는데, 약 10~15분 분량이다. KBS 월드 라디오는 한국어 포함 11개 언어로 해외에 직접 송출되는 방송이다. 한국에선 인터넷으로 청취할 수 있다. 해외에 있는 청취자에게 한국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됐고, 내가 이 일을 한 지는 10여 년 됐다. 녹음 업무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 중국어 방송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회 녹음이고, 매일 첫 송출 시간은 오후 8시 반(한국 시간)이다. 녹음 일정은 녹음실 이용 상황에 따라 매번 바뀌는데, 보통 빠르면 오후 4시쯤 당일 뉴스를 정리한 스크립트가 나온다. 작가들이 중국어로 된 스크립트를 주면, 나는 30분 정도 리딩 연습을 거쳐 곧장 녹음에 들어간다. 가끔 돌발 사건이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땐 녹음도 좀 더 늦어진다. 월드컵이나 올림픽같이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녹음하는 경우도 있다. KBS 월드 라디오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사실상 스카우트됐다. 그 전부터 아리랑 국제방송이나 EBS 등 여러 곳에서 방송했던 경력이 있었다. 2010년 당시에도 이미 TBS 교통방송에서 외국어 라디오 1세대 진행자로서 '샹웨서우얼(相約首爾)'이란 중국어 생방송을 몇 년째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KBS 측의 제안을 받았고, 발음이나 목소리가 아나운서 톤이라 그런지 뉴스 보도를 맡게 됐다. 위하이펑(于海峰)은 방송과 라디오 분야에서 아리랑 국제방송, EBS 교육방송, TBS 교통방송 등을 거친 1세대 중국어 진행자로서 현재 KBS 월드 라디오에서 중국어 뉴스 보도를 맡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어 방송과 성우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사실 원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원래 베이징(北京)에 있을 때 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었고, 한국에 와서도 계속 강의를 했다. 한국어를 잘 못 하는 상황에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4년쯤 같은 학원 선생님이 쓴 교재의 중국어 녹음 작업을 우연히 하게 됐다. 그 이후로 출판사나 녹음 스튜디오에서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 시중에 나온 중국어 회화나 HSK(한어수평고시) 교재의 대부분은 내가 녹음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나 같은 경우는 시장의 수요에 이끌려 이 분야에 발을 담그게 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어떻게 오게 됐나? 결혼 당시 베이징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 중이던 한국인 아내가 졸업하면서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됐다. 결혼 초기에는 베이징에서 2년 정도 살았는데, 아내와 장래를 고민하다 결국 한국행을 결정했다. 내가 한국에 가서 산다고 했을 때, 부모님도 딱히 반대하시진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 와서 발생했다. 2000년 당시에는 한국으로 결혼 이민을 온 중국 남자가 정말 흔치 않아서, 출입국사무소 사람들조차 어떤 비자를 발급해 줘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 시기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 사위 중 내가 정확히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으나, 10명 이내인 건 분명한 듯하다. 혼인 신고도 6개월 넘게 걸리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한국에 온 지 너무 오래돼서 내 고향은 중국이지만 한국도 내 나라인 것 같다. 솔직히 이젠 올림픽 같은 경기에서 한국과 중국 중 누가 이기든 상관없이 다 기분이 좋다. 다문화가정으로서 자녀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는지? 하나 있는 아들의 경우는 자기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한 나라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갖는 게 아이에게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우리 가족에게 큰 문제로 다가오진 않았다. 아마 나도 인생의 절반 특히 내 인생에서 가장 혈기 왕성했던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중국어 성우 겸 방송 MC 위하이펑(于海峰)이 지난달 13일 KBS 여의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3년 전부터 한᛫중 관계를 지켜본 소감은? 막 수교했을 당시 한국 사람의 중국에 대한 인상은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거대한 나라이지만 당시 중국에 대해 알려진 바도 많이 없었고, 심지어 한국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중국 사람을 '빨갱이'로 배웠다고 하더라. 하지만 교류가 시작되자 두려움은 호기심 또는 기대감 같은 거로 바뀌었다. 중국은 어떤 곳이고 어떤 일을 해볼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1995~1997년쯤 중국 유학이 크게 유행했다. 내 아내도 이때 중국에 온 거의 0세대 유학생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느끼는 한᛫중 관계의 '밀월기'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다. 이때 한국을 나쁘게 말하는 중국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화장품, 음식, 노래 등 한국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고 여겼다. 체감상 수교 이래 한᛫중 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사드(THAAD)'와 '코로나 19'인 것 같다. 최근 한᛫중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두 나라 간에는 뿌리 깊은 선입견이 있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좀 많은 것 같다. 인터넷에서 서로의 나라를 함부로 비난하는 이들은 상대국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일부 네티즌들은 편협한 시각으로 서로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인터넷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보니 한᛫중 관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한국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위치에 있다. 사실 누가 한국 대통령이 되든지 한᛫중, 한᛫미 관계 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건 거의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한᛫중 관계에 대한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나는 한᛫중 관계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이고 또 크게 받는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어 내레이션의 경우 한국 기업의 중국 비즈니스가 줄어들어 기업체 홍보 영상이나 광고 녹음 수요가 뚝 떨어졌다. 교육이나 출판 업계도 마찬가지다. 중국어를 배우려는 학생이 없다 보니 교재 녹음 일감도 크게 줄었다. 2012년부터 한 대학에서 대우교수로서 강의했던 중국어 수업도 지난해 9월부로 폐강했다. 옛날에는 한 반에 학생이 10명에서 많게는 20명이 넘었는데, 이젠 1~2명도 모집이 어렵다고 한다. 학교에서 방과 후 교사로 중국어를 가르쳤던 아내도 이제는 과목을 한자로 바꿔 아이들을 가르친다. 한᛫중 관계가 하루빨리 나아지길 바란다. 그래야만 시장도 풀릴 것 같다. 관련기사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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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대기업 주재원과 외교관 등을 대상으로 한 중국어 강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팜 차이니즈' 중국어 학원의 원장 차오팡(曹芳)이 지난달 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 출장이나 주재원 파견을 앞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펼쳐 봤을 교재 『나의 겁 없는 중국 출장 중국어』. 한때 서점마다 중국어 교재 베스트셀러 자리를 휩쓸었던 이 책에는 '팜 차이니즈' 중국어 학원 차오팡(曹芳) 원장의 10년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차오팡은 2006년부터 베이징, 톈진 등지에서 한국 대기업 주재원이나 주중 대사관의 외교관 등을 대상으로 중국어를 가르쳐 온 베테랑 강사다. 중국 전역에 학원 체인을 운영하는 경영인이자 중국인 선생님과 한국인 학생 간 1:1 실시간 온라인 학습사이트를 구축한 개발자이기도 하다. 지난달 7일, 2015년 충동적으로 한국 유학길에 올라 늦깎이 서울대 박사생이 된 차오팡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차오팡은 이날 인터뷰에서 노력과 우연의 일치가 만들어낸 감동의 유학기, 중국 주재원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교재가 나오게 된 배경, 대기업 CEO와 외교관을 가르치며 느낀 소회와 일화 등, 중국어 교육 전문가로서 한·중 문화 교류와 한·중 관계 그리고 중국어 학습에 대한 남다른 인사이트를 공유했다. 차오팡이 집필한 저서 「나의 겁 없는 중국 출장 중국어」 「나의 겁없는 중국 생활 중국어」 「10일 중국어 첫걸음」 등은 한때 서점마다 중국어 교재 베스트셀러 자리를 휩쓸었다. [사진 본인제공] ━ 중국 전역서 '잘 나가던' 중국어 학원 원장, 늦깎이 서울대 박사생이 되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차오팡이고, 베이징(北京) 사람이다. 학교와 직장 모두 베이징에서 다녔고, 한국에 오기 전까지 30년 넘게 고향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한국을 처음 와본 건 2000년인데, 장기적으로 거주하게 된 건 2015년 11월부터다.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어학당, 석᛫박사 공부를 하느라 7년 넘게 한국에 머무는 중이다. 2019년에는 서울대 교육학과에서 교육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지난 2월에는 교육인류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2006년부터 베이징에서 '팜 차이니즈'라는 오프라인 학원을 운영하며 중국어를 가르쳤다. 나중에는 한국기업들이 집중돼있는 선전(深圳), 톈진(天津), 시안(西安) 등 여러 도시에 분원을 열었다. 처음 학원 사업을 시작했을 때, 10년 뒤 단순한 양적 확장이 아닌 질적 성장을 이루자는 목표를 세웠었다. 그러다 마침 베이징에서 예전에 가르쳤던 한국 대기업 임원 한 분이 퇴직 후 한국에 와서도 계속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며, 실력 있는 중국 선생님들과 온라인 강의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했다. 이 제안은 2015년 내가 한국에 와서 공부를 시작하고, 또 온라인 중국어 학습사이트를 만들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차오팡의 서울대학교 한국어학당 재학 시절 모습. [사진 본인제공] 학원을 운영하다 유학 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충동에 비행기 표를 끊긴 했지만, 막상 집과 가족을 떠나 혼자 오려니 정말 막막했다. 게다가 당시 내가 일군 학원 사업은 곧 10년 차를 앞두고 있었다. 내가 오래 자리를 비우면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망설인 끝에 결국 유학길에 올랐다. 어학당에서 내친김에 석사까지 신청하게 됐다. 서울대 지원서를 내기 전 또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었는데, 그때 한 학생이 알려준 한국 드라마 '두 번째 스무 살'을 보고는 결국 마음을 굳혔다. 마흔을 앞둔 여자의 첫 캠퍼스 라이프를 다룬 드라마였다. 막 한국에 왔을 때, 살 집에서부터 임시 휴대전화, 와이파이, 신용카드까지 내가 가르쳤던 한국 학생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줘 유학 생활을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차오팡은 이날 인터뷰에서 인생을 바꿀 기회를 주신 지도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표했다. 사진은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나일주 교수(왼쪽)와 차오팡. [사진 본인제공] ━ '죽도록' 힘들었던 대학원 과정, 인생 바꿀 기회 주신 지도 교수 덕분에 졸업 대학원 지원이 어렵진 않았는지? 우연한 기회로 서울대 석사 과정에 '교육공학'이란 전공이 있단 걸 알게 됐다. 당시 온라인 교육 사업을 하려던 터라 이참에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운 좋게도 어학원에 다닌 지 3개월 만에 한국어능력시험 5급에 턱걸이로 합격했고, 무사히 대학원에 지원할 수 있었다. 지도 교수님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들었다. 한국 유학생활에서 가장 감사한 건 우리 지도 교수님이다. 사실 나는 어릴 때 공부를 무척 싫어해서 대학도 그저 그렇고 학점도 별로였다. 입학 당시 아직 한국어도 잘 못 하는 나를 왜 받아 주셨는지 교수님께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교수님께서 "한 번도 중국 학생을 제자로 받아주지 않아 늘 한편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퇴직하기 전 마지막으로 중국 학생을 받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셨다. 교수님들은 으레 나이 많은 학생을 좀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우리 지도 교수님은 내 지원서를 보시곤 그동안 내가 중국어 교육 업계에서 해온 노력과 앞으로의 꿈을 높이 샀다고 말씀하셨다. 내게 인생을 바꿀 기회를 주신 교수님께 너무 감사하다. 평범한 학원 원장에서 이제는 학술적인 전문성을 갖춰가는 느낌이다. 차오팡이 서울대 교육학과 석사 과정에서 공부한 교재와 작성한 필기. [사진 본인제공] 대학원 공부는 어렵지 않았나? 석사 첫 학기는 정말 죽도록 힘들었다. 수업은 오로지 한국어와 영어로만 진행됐다. 게다가 교육공학 분야는 미국이 가장 선진적이라 대부분 수업 교재가 영어 원서였다. 그래서 입학도 하기 전에 교재를 미리 사서 과 친구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예습하고 관련 전문용어를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정리했다. 얼마나 열심히 적었던지, 주변에서 이 필기를 출판하면 대박 날 거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교수님과 동기들은 어땠나? 우리 과 교수님은 대부분 미국에서 유학하신 분들이라 외국 학생이라고 혜택을 줄 일은 없다고 못 박으셨다.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업은 팀별 과제가 많았는데, 같이 입학한 조선족 친구와 한국어과를 졸업한 중국 친구 그리고 나보다 훨씬 어린 한국 학생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 이 친구들이 없었다면 1학기도 버티지 못했을 거다. 사실 중간에 공부가 너무 힘들어 휴학을 고민했었다. 그럴 때마다 지도 교수님이 퇴직 전까지 꼭 졸업해야 한다고 다그치셨다. 내가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제시간에 졸업한 건 다 교수님의 재촉 덕분이다. 차오팡은 이날 인터뷰에서 대학원 동기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사진 본인제공] ━ 우연히 열게 된 중국어 학원, 주재원 학생들의 '영업' 덕에 전국 체인으로 성장 중국어 교육 업계에 들어선 계기는? 대학 시절 우연히 한국인 유학생에게 과외를 해준 것이 인연이 됐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향후 진로를 고민하다 2004년 중국 교육부의 '대외 중국어 교사 자격증'을 땄다. 당시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삼성의 글로벌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 '지역전문가제도'를 통해 베이징에 파견된 직원의 연락을 받았다. 장기적으로 중국어 강의가 필요하다는 말에 친구와 학원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께 사업계획서를 브리핑하고 20만 위안을 창업 자금으로 빌려 베이징에 '팜 차이니즈' 학원을 열었다. 학원 확장은 어떻게 했나? 학생들의 적극적인 '영업' 덕분이었다. 당시 철저한 현지 적응 원칙 때문에 한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던 주재원 학생에게 종종 김치찌개, 삼겹살 구이 같은 한국 요리를 해줬다. 그러자 그 학생이 한식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내 다른 주재원들이 학원으로 우르르 찾아왔다. 사실 나는 베이징에 있는 학원 하나 운영하기도 벅찼다. 그런데 이 지역전문가가 중국 여러 도시로 파견되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수업을 열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선전 분원도 이런 요청으로 부랴부랴 열게 됐다. 베이징서 실력 있는 선생님 세 분을 선전으로 보냈다. 그리고 강의할 공간과 선생님들이 지낼 집을 급히 마련했다. 톈진, 상하이 분원도 다 이런 식이다. 밥이든 TSC(중국어 말하기 시험) 대비용 자료든 항상 학생들이 필요한 걸 준비해줬다. 사실 나처럼 기업 고객을 만나지 않는 이상,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중국어 교육 업계는 상당히 고생스러운 편이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차오팡은 이날 인터뷰에서 「10일 중국어 첫걸음」은 바쁜 회사 CEO들을 위해 고안한 교재라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늘 시간 쫓기는 CEO 위해 만든 교재, 韓 대학 산학연 협력에 큰 공헌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땠나? 나는 주로 삼성, SK, LG, BMW 등 대기업의 임원이나 주재원, 주중 대사관의 외교관 등 1분 1초가 아쉬울 정도로 바쁜 분들을 가르쳐왔다. 어느 날 한 기업 CEO의 새벽 강의 시작 전, 한 임원이 와서 급한 보고가 있다며 10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CEO는 단호히 그를 돌려보냈고, 내게는 온전히 1시간 반을 내주셨다. 내 수업을 위해 부장급 임원에게 단 10분도 허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컸다. 그래서 늘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분들의 중국어 실력을 키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10일 중국어 첫걸음』이란 교재다. 한국에서 출판한 중국어 교재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10일 중국어 첫걸음』은 왕초보 입문자를 위한 책이다. 간단한 발음에서 시작해 단어와 문장을 배우고 대화를 완성해 나가는 구성이다. 대화가 우선인 기존 교재들과 정반대의 접근 방식을 쓴다. 2020년엔 교육 혁신에 적극적인 울산대학교에서 이 교재를 기반으로 내가 개발한 교육 모델 테스트를 6학기에 걸쳐 진행했다. 학생들 반응과 성과가 상당히 좋았다. 오프라인에서 교수의 강의가 끝나면, 중국에 있는 같은 또래 중국어 교육과 학생들을 온라인 방식으로 한국 학생들과 매칭해 말하기 연습을 돕는 방식이다. 차오팡의 저서 「나의 겁없는 중국출장 중국어」는 한때 중국 주재원 필독 교재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 본인제공] 교육 모델에 대한 피드백은 어땠나? 내 교재는 10시간 수업 이후 HSK 1급을 따는 게 목표다. 목표가 분명하다 보니, 학생들의 적극성이 올라갔고, 수업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이 모델은 산᛫학᛫연 협력 차원에서 교재비를 제외하곤 모두 무료로 대학에 제공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입문 과정만 수업에 적용했는데, 이번 학기부터는 TSC 시험을 목표로 하는 상위 레벨 수업 과정도 울산대에서 개강할 예정이다. 이번엔 20시간 수업을 듣고 TSC 3~4급을 따는 게 목표다. 강의 체계를 무료로 제공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돈은 베이징에서 주재원들을 가르치며 이미 많이 벌었으니, 이제는 사회에 공헌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것일수록 모두가 알고 또 나누면 더 좋지 않나. ━ 사드와 코로나 영향으로 중문과 학생 줄었지만, 비즈니스 중국어 수요 여전 팬데믹 이후 온라인 수업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예상했던 일인가? 운이 좋았다. 사실 내가 석사 과정에서 온라인 강의 모델을 연구할 때만 해도 다들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때는 코로나 전이라 오프라인 대면 수업이 대부분이었고, 온라인 강의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팬데믹이 오는 바람에 내가 개발한 온라인 수업 방식이 빛을 보게 된 거다. 차오팡과 한국인 제자들. [사진 본인제공] 최근 중문과 지원자가 줄어드는 게 많은 대학의 공통된 고민인데. 사드 갈등과 관련이 크다고 본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중국의 일부 조치가 국제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도 분명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중문과 지원자가 줄었다곤 하지만 기업의 비즈니스 중국어와 유아용 한자᛫중국어 교육 분야의 수요는 아직 유효한 것 같다. 아이들이 중국어를 배워 두면 미래에 선택지가 좀 더 다양해질 것이라 여기는 학부모들이 여전히 많다. 여러 대학의 중문과도 과거 학술연구 위주에서 비즈니스 중국어 같은 실용 교육 위주로 바뀌는 추세다. 교재 내용도 실용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다락원에서 출판한 『나의 겁 없는 중국 출장 중국어』의 경우도 정말 실제 상황에서 쓸 법한 내용이 많아 한국 직장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중국 교육부 소속 중외언어교류협력중심(中外語言交流合作中心)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한중 문화 비교 콘텐트 제작 프로젝트 '만보중한(漫步中韓)'. [사진 본인제공] ━ 문화 교류는 진정성과 교감이 중요, 한·중 문화 비교 콘텐트 한·중·일로 확대하고파 중국어 교육 전문가로서 문화 교류에 대한 조언이 있다면? 양국이 서로 문화에 대해 진심으로 이해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중국어 교육을 단순한 '문화 수출'로 보면 안 된다. 과거 중국 정부의 문화 전파 방식은 너무 일방적이었다. 서예나 전지(剪紙) 공예 등 중국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가르치려고만 했다. 무작정 중국 문화를 주입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진정성 있는 교류라면 상대방의 문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서로 교감하는 과정에서 또 상대방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된 프로젝트도 참여했다고 하던데. 지난해 중국 교육부 소속 '중외언어교류협력중심(中外語言交流合作中心)'의 지원을 받아 '만보중한(漫步中韓)'이라는 문화 비교 콘텐트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국과 중국 청년들이 주제별로 각자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는 영상을 찍고 이를 합쳐 교육용 자료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 콘텐트는 '중문연맹(中文聯盟)' 전 세계 중국어 학습자가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한중 문화 비교 콘텐트 제작 프로젝트 '만보중한(漫步中韓)'을 교육자료 구축 중점 사업으로 지정했다는 중국 교육부 중외언어교류협력중심(中外語言交流合作中心)의 통지서. [사진 본인제공] 박사 졸업 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최근 한᛫중᛫일 관계의 중요성을 느껴 일본 와세다 대학에 방문학자를 신청해 놓은 상태다. 앞서 말한 한·중 문화 비교 콘텐트 프로젝트를 한᛫중᛫일로 확대해 진행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중국어 교육은 한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니, 그 대상을 점차 늘려 가려고 한다. 우선은 일본이고 그다음은 영어권도 시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20년 2월, 한국 내 코로나 19 확산 상황과 관련해 중국 인터넷에 '가짜뉴스'가 확산하자 차오팡은 본인 웨이보에 장문의 반박글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사진 본인제공] ━ 한᛫중 간 사소한 오해가 큰 갈등 불러, 문화 비교와 상호 이해가 필수적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과 기대가 궁금하다. 보통 작은 오해가 큰 갈등을 만드는 것 같다. 과거 주중 대사관 사람들을 가르치며 느꼈던 점은 생활 속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오해가 생길 수 있고 또 이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게 정말 중요하단 사실이다. 과거 단오절(端午節) 논란의 경우도 한국이 유네스코에 신청한 건 강릉에서 열리는 '단오제(端午祭)' 행사인데, 잘못된 번역 때문에 양국 간에 큰 오해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예전에 중국 내 한국기업의 중국 직원들을 대상으로 문화 교육을 했었다. 예를 들어 한국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는 건 예의가 없는 게 아니라 문화 차이라고 알려주는 식이었다. 중국 직원들이 한국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한국 동료들에게 반감을 품을 수 있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이렇듯 문화 비교와 상호 이해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중 간에 자주 마찰이 일어나는 건 그만큼 가깝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도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성질을 부리게 마련이다. 상대국에 대한 감정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또 서로를 더 이해하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관계도 자연스럽게 개선되리라 생각한다. 2020년 2월, 한국 내 코로나 19 확산 상황과 관련해 중국 인터넷에 '가짜뉴스'가 확산하자 차오팡은 본인 웨이보에 장문의 반박글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사진 본인제공] 관련기사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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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한중 기업을 위한 컨설팅과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브릿지 엑스'의 대표 둥린징(董琳璟·36)이 지난달 6일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를 보고 한국 유학을 결심했던 17살 중국 소년은 어느덧 올해로 한국살이 17년 차에 접어들었다. 한국어학당에서 대학교를 거쳐 대기업에 취직 후 10년간의 파란만장한 'K-직장생활' 끝에 자신만의 회사를 세우기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주인공은 '브릿지 엑스(Bridge X)' 대표 둥린징(董琳璟᛫36)이다. 지난달 6일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둥린징은 유창한 한국어로 막힘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이날 둥린징은 회사 경영진이 하루아침에 교체된 돌발 사건, 코로나 직격타로 3년 넘게 휴직한 사연, 소개팅으로 만난 한국 아내에게 2달 만에 프러포즈 받은 이야기, 한국 교수님이 중국 부모님 대신 혼주 역할을 맡아주신 감동 사연 등 거침없는 입담을 과시했다. 한중우호협회에서 11년 넘게 활동 중이라는 둥린징은 자신이 관찰해 온 한국 사회의 모습, 한᛫중 관계에 대한 소신과 포부도 이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재한 중국인 중에서도 '핵인싸'로 통하는 둥린징의 평범하지만, 또 한편으론 남달랐던 한국 생활기를 들어봤다. 중국 산둥성 출신으로 올해로 한국 생활 17년 차라는 '브릿지 엑스' 대표 둥린징(董琳璟·36).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한류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보고 알게 된 아시아 속 한국의 존재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둥린징(동임경)이고 고향은 중국 산둥(山東)성 타이안(泰安)시다. '태산이 높다'할 때 말하는 그 '타이산(泰山)'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한국은 2006년에 처음 왔고, 올해로 한국 생활 17년 차다. 성균관대학교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한국 대기업에서 1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 '브릿지 엑스'라는 마케팅 회사를 차려서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17살 때, 해외 유학을 고민하다가 호주, 일본, 한국 세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한국으로 정했다. 호주는 영어에 흥미가 없어서 가고 싶지 않았다. 일본은 당시 어린 마음에 중국과 사이가 안 좋은 나라라고 생각해서 가기가 망설여졌다. 우리 동네는 대도시가 아니라 한류가 비교적 늦게 들어온 편인데, 2000년대 초반에 NRG와 H.O.T가 큰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내가 한국 유학을 결심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다. 어릴 때 한국이 한반도에 위치한 나라라고 배우긴 했지만, 사실 한국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아시아에 이렇게 화려한 나라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에 오면 드라마 주인공 '강민(안재욱 분)'처럼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둥린징은 이날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다양한 교내 활동에 참가해 한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 했다. 당시는 중국에서 한국어학당을 바로 신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베이징 소재의 한 유학사를 통해 24명의 중국 유학생들과 함께 한국에 왔다. 내가 다녔던 경희대 어학당에는 한국 대학생들로 구성된 '어학 도우미'들이 유학생을 일대일로 도와주곤 했다. 그 친구들은 어학 도우미를 하면서 봉사활동 점수를 받고 유학생들은 학업이나 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제도였다. 한국어가 한국인보다 유창한데, 처음 배울 때는 어땠나? 겹받침 발음이 가장 어려웠다. 예를 들어 '밟다'의 발음이 '발다'인지 '밥다'인지 너무 헷갈렸다. 주변 중국 친구들은 존칭 사용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학교 다닐 때 교내 행사나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한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직장에선 대외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과 많이 만나다 보니 한국어 실력이 자연스럽게 늘었던 것 같다. 한중우호협회에서도 11년째 활동 중이다. 성균관대 졸업 후, 한국 졸업생들과 함께 여러 구직 활동 참여했다는 둥린징. 사진은 한국 모 기업에서 교육받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이 파란만장한 'K-직장생활' 한국에서 직장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엔 한국 기업들이 중국 진출이나 글로벌화를 활발하게 추진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 한국에 중국 유학생도 상당히 많았다. 나도 여느 대학 예비 졸업생처럼 4학년 때 인턴도 하고, 여러 대기업 공채에도 지원했다. 결과적으로 금호 타이어에 합격했는데 곧 금호아시아나로 발탁됐고 지난해까지 이곳에서 일했다. 알다시피 지난 10년간 금호그룹에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나도 그 안에서 좋은 곳에 배치되기도 하고 때론 좌천되기도 하는 등 여러 풍파를 겪었다. 힘들긴 했지만, 한국에선 가장 오래 일한 직장이고 또 많은 걸 배운 곳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기 항공사가 무척 어려웠다고 하던데. 회사는 지난해 8월 결혼하면서 그만뒀다. 코로나 때문에 거의 3년 넘게 휴직 상태였다. 1년 반은 완전 휴직이었고, 1년 반은 주 1~2일 출근하는 식이었다. 결혼하고 가장이 되니 그 정도 소득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퇴사하고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한국 대기업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입사하게 된 둥린징. [사진 본인제공]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중국 사람으로서 한국에 오래 거주하다 보니 한국의 문화를 어느 정도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대기업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중국 대기업들의 한국 진출을 돕고 있다. 중국 회사의 한국 법인 설립과 관련된 컨설팅, 상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 등을 맡고 있다. 회사명인 '브릿지 엑스'에서 '브릿지(Bridge)'는 다리처럼 한᛫중을 연결해준다는 뜻이고, '엑스(X)'는 무한한 미래와 가능성을 뜻한다. ━ 코로나 때문에 결혼식 못 오신 부모님, 혼주 돼주신 한국 교수님에 깊은 감동 한국에서 오래 살면서 느낀 바가 있다면? 한국은 뭐든지 질서 있고 빠르다. 한국 사회는 정말 효율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 인간관계도 좀 비슷한데, 소개팅을 예로 들 수 있다. 외모᛫배경᛫관심사 등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의 연락처를 소개받아 빠르게 교환하고, 만남도 시간과 장소만 확정되면 신속하게 이뤄진다. 쓰레기 배출도 비슷하다. 정해진 요일만 버릴 수 있다. 매일 쓰레기를 버리면 인건비도 많이 발생하고,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생활이나 업무 등 모든 면에서 효율성을 강조한다. 지난해 8월 둥린징은 한국인 아내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 본인제공] 아내도 소개팅으로 만났나? 그렇다. 회사 동기들과 만나 '브릿지 엑스'라는 회사명을 짓던 날 한국인 아내를 소개받았다. 2021년 4월에 만나기 시작해 2달 만에 아내의 프러포즈를 받았다. 비싼 시계와 직접 만든 PPT까지 준비했더라. 그렇게 1년 뒤인 2022년 8월에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어땠나?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한국에서 살면서 가장 감동했던 일을 꼽자면 결혼식인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부모님이 못 오셨는데, 대학교 때 은사이신 교수님 내외분이 혼주 역할을 대신 해주셨다. 주례도 아니고 혼주 자리를 흔쾌히 맡아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했다. 이날 친구, 직장동료는 물론 한중우호협회 임원분들까지 다 와 주셨다. 부모님과 친척들이 못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손님이 아내 쪽보다 많을 정도였다. 우리 부모님은 라이브 영상을 통해 중국에서 결혼식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셨다. 아들이 한국에서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모습을 보시곤 크게 감동하신 것 같았다. 나는 한국과 한국 사람들이 좋기 때문에 여기서 계속 살 예정이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해외로 봉사활동을 나가 태극기가 달린 조끼를 입고 자세를 취하고 있는 둥린징. [사진 본인제공] ━ 17년간 늘 한᛫중 관계 기복 있었지만 요즘 가장 심각, 한류 매력 느낄 기회 없어져 한국에서 힘든 때도 있었나? 팬데믹 시기가 가장 힘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교류가 완전히 중단돼 중국에 있는 친구᛫가족들과 오랫동안 만날 수 없어 너무 외로웠다. 원래 항공사 업무상으로도 그렇고 직원 혜택도 있어서 1년에 70~80번 비행기를 탈 정도로 해외를 자주 갔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해외여행은커녕 2주에 한 번 근무, 그리고 나중에는 '반강제' 휴직으로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창업을 하면서 위기를 이겨냈던 것 같다. 한᛫중 관계도 이 시기에 많이 악화했는데. 나는 한국에 오래 산 중국인으로서 한᛫중 관계의 기복을 여러 차례 실감했는데, 요즘만큼 힘든 상황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라 간의 관계가 좋아야 국민도 혜택을 받는데, 안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한중 기업을 위한 컨설팅과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브릿지 엑스'의 대표 둥린징(董琳璟, 36)이 지난달 6일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 시장에서 한국 제품의 매력도가 떨어졌단 말도 나온다. 사실 이 말에 100% 공감할 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제품 자체의 매력도가 떨어진 게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그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 거다. 중국 소비자들이 한국 드라마나 영화 등 한류 콘텐트를 자주 접해야 화장품이나 다른 여러 한국 제품에 관심이 생길 텐데, 사드 사태 이후 한류의 매력을 느낄 기회가 아예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중국은 자체 시장의 수요를 소화하느라 제품의 품질을 크게 개선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제는 딱히 한국 제품을 찾을 이유가 없어졌다. 게다가 코로나나 비자 이슈 때문에 한국에 와서 성형이나 쇼핑, 여행하고 싶은 중국 사람도 마음대로 올 수 없게 됐다. 평소 한᛫중 관계에 대한 생각과 기대는 정부 차원의 소통도 좋지만 민간 교류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술 교류나, 지방 단체 간 소통, 상업적인 교류 등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양국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내가 한중우호협회의 여러 활동에 시간을 할애해서 참여하는 것도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본다. 비즈니스적으로도 한᛫중 간 다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회사를 열심히 키워보려고 한다. 관련기사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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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만난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3달 치 용돈과 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무작정 한국에 온 지 어느덧 20년. 한국어학당에 다니며 시급 3500원인 치킨집 아르바이트로 스스로 용돈을 벌어 유학 생활을 이어갔던 독립심 '만랩' 상하이 아가씨는 이제 한국 여행업계 중국 비즈니스 16년 차 베테랑으로 우뚝 섰다. 세계 2위 온라인 여행사 한국지사 대표를 거쳐 2년 전부터 중국 알리바바의 여행 서비스 플랫폼 '플리기(Fliggy᛫飛豬)'에서 새로운 도전 중이라는 장원(蔣雯) 알리바바코리아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의 이야기다. 용돈이 떨어지면 돌아오리라 믿었던 부모님의 기대와는 반대로 꿋꿋하게 한국에 남아 자신만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았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자 여행업계 프로로서 플리기의 국내 사업 기반을 다지는 데 열성을 쏟고 있다. 최근 코로나 방역 해제와 한᛫중 비자 발급 재개로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8일 장원 이사를 만나 값진 조언과 생생한 경험, 그리고 20년 한국살이의 이모저모를 들어봤다. 중국 상하이 출신으로 한국 여행업계 중국 비즈니스 베테랑으로 꼽히는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치킨집 알바하며 한국어 익힌 中유학생, 16년 차 여행업계 베테랑으로 거듭나 한국에서 주로 무슨 일을 했나? 여행업계에서 쭉 일했다. 한국에서의 첫 직장인 서울 롯데호텔에서 6년, 트립닷컴(Trip.com) 한국지사에서 8년 있었고, 2년 전 알리바바코리아로 이직해 플리기의 국내 사업을 담당하게 됐다. 플리기는 알리바바그룹 산하 온라인 여행 서비스 플랫폼이다. 국내외 교통, 호텔, 숙박 등의 예약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주요 고객층은 중국의 MZ세대들이다. 한국에는 언제 처음 왔나? 올해로 만 20년 됐다. 한국에 처음 온 건 2003년 9월 12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0대 초반에 한국으로 왔으니, 이제 곧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중국에 있었던 기간보다 더 길어지려고 한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어릴 때부터 K-POP 같은 한류 문화를 좋아했었다. 당시 유학을 고민 중이었는데, 호주᛫캐나다 등 여러 나라 중에서 내가 직접 한국을 선택했다. 서방 국가보다는 한국이 중국에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한᛫중 수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앞으로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인재가 더 많이 필요하고, 취직도 잘될 거라는 기사를 보게 됐다. 그때 한국에 와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상하이에 일본어 전공자는 많았지만,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한국은 이미 해외에 사는 친척들 도움 없이 내가 홀로서기에 도전해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오게 됐다. 한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 부모님은 단기 유학을 생각하셨다. 사실 대부분의 아버지는 딸을 멀리 안 보내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와 내기를 한 것 같다. 한국 올 당시 아버지는 딱 3달 치 용돈만 주셨다. 어학당 등록하고 생활비를 쓰다 돈이 다 떨어지면 당연히 중국으로 돌아올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 용돈이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돈과 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무작정 한국으로 왔다. 용돈이 다 떨어진 뒤에는 치킨집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시급은 35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장원(蔣雯) 이사는 팬데믹 이전에 다녀온 중국 베이징 만리장성을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특별히 좋아했던 K-POP 가수나 영화가 있나?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브라운아이즈와 엠씨더맥스(M.C the MAX), 이수영 노래를 좋아했었다. 특히 S.E.S 노래는 공부할 때 정말 많이 들었다. 유학 시절 늘 집에 혼자였기 때문에 음악이 큰 힘이 됐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할 때 봤던 영화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한국어가 이렇게 유창하게 된 비결은? 처음 왔을 때, '안녕하세요' 밖에 몰랐다. 오전에 어학당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는 친구들과 계속 스터디를 했다. 저녁에는 주로 아르바이트 일을 했는데, 시간 날 때마다 사장님과 수다를 떨었다. 사실 어학당에는 외국 친구들이 많아 한국인과 만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나는 계속 기회를 찾아 다녔던 것 같다. 한국어를 빨리 배우고 싶어서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했다. 학교 내 모임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요즘 집에서는 주로 어떤 언어를 사용하나? 여러 가지 언어를 다 쓴다. 부모님이 상하이에서 한국으로 오셔서 함께 살고 있는데, 두 아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와는 중국어를 쓰고 한국인인 아빠와는 한국어로 대화한다. 부모님이 상하이말을 하시다 보니 아들들이 중국 사투리를 다 배웠더라. 역시 아이들도 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더 빨리 배우는 것 같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만난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이젠 한국 길이 더 익숙해, '플리기' 기반 다져 中관광객 유치 늘리는게 목표 한국에서 외국인 워킹맘으로 사는 건? 어느 나라에서든 워킹맘은 정말 힘든 것 같다. 예전엔 잠을 많이 못 자서 괴로웠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약속이나 미팅이 없을 때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평일은 부모님이 도와주시지만 여전히 쉽지는 않다. 하지만 '엄마가 행복해야 애들도 행복하다'는 말처럼 엄마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도 잘 크는 것 같다. 얼마 전 이직하면서 2달 정도 쉬었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집에서 쉬는 엄마가 어색하다고 하더라. 한국에 살면서 중국과 다르다고 생각한 점은? 한국분들은 뭔가 '공통'된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한국 사람은 남의 시선에 대해 신경을 쓰는 편인 반면 중국 사람은 좀 더 개별적이고 개성이 강하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유행하는 메이크업이나 패션을 선호해서 스타일이 서로 비슷비슷하다. 중국 사람들은 외모 면에서 남 신경 안 쓰고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꾸미는 편이다. 팬데믹 이전 중국 장시(江西)성 루산(廬山) 정상에 오른 장원(蔣雯) 이사. [사진 본인제공] 한국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도움 주신 분이 참 많다. 내가 한국에 오래 살게 된 건 다 그분들 덕분이다. 직장도 면접 기회를 알려주셔서 지원했다. 사실 공부가 끝나면 뭘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그때 내 주변 귀인들이 한국에 계속 남을 수 있게 도와주셨고, 또 지금까지도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신다. 당분간은 한국에서 쭉 지낼 생각이다.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다. 솔직히 지금은 한국 생활이 중국보다 더 편하고, 길도 한국이 더 익숙하다. 중국은 퇴직하고 좀 더 나이가 들면 돌아가고 싶다.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한국어와 중국어 두 언어에 정통했으니, 아마 나는 앞으로도 계속 한᛫중 양국을 오가는 일에 종사할 것 같다. 앞으로 한국에 더 많은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는 게 내 목표다. 플리기가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올해는 본격적으로 한국에 '공급망'을 구축하고, 전체적인 기반을 다질 계획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만난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한국인 인플루언서와 함께 한 랜선 투어 반응 폭발적, 한국에 중국어 능통자 많아 얼마 전 한᛫중 간 비자 중단으로 여행업계가 타격을 받았는데, 플리기는 어땠나? 한국 파트가 좀 주춤하긴 했지만, 사실 플리기는 글로벌한 서비스라 전체 그룹 차원에서 봤을 때 큰 영향은 없었다. 중국인이 다른 나라로 가는 건 정상화됐기 때문에 한국 말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많이 간 것 같다. 한᛫중 간 이런 이슈들이 종종 발생하는데,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상품이나 서비스도 그렇고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내일이라도 바로 런칭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게 답인 것 같다. 지난 3년간 팬데믹 시기에도 계속 새로운 상품을 연구했다. 지금은 타오바오 라이브 커머스와 연계해 한국 여행상품 추천이나 한국 여행지 홍보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만난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에서 라이브 커머스가 큰 인기라고 들었다 코로나 시기에 크게 떴다. 다들 집에 있으니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한국의 홈쇼핑처럼 라이브 커머스에는 상당히 경쟁력 있는 상품들이 소개된다. 나도 플리기에 와서 4차례 라이브를 진행했는데, 직접 방송하기도 하고 촬영이나 편집에도 관여해서 지금은 전체 프로세스를 다 알게 됐다. 라이브 커머스를 할 때 모든 콘텐트를 다 신경 쓰다 보니 내가 작은 영화 제작사의 사장이나 감독이 된 느낌이었다. 라이브 커머스 방송하는 분들은 어떻게 섭외하나? 중국 내에서 인플루언서를 섭외하기도 하고 한국에서 호스트를 찾은 적도 있다. 한번은 고양시와 함께 한 랜선 투어에서 한국인 인플루언서를 초대했는데,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이분이 중국말로 너무 귀엽게 연출하셔서 댓글에 한국 사람이 중국어를 왜 이렇게 잘하냐는 질문이 많이 올라왔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래도 한국분의 중국어가 원어민보다 유창할 순 없으니 조금 걱정했는데, 중국 고객들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라이브 커머스가 한᛫중 교류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요즘 중국어 가능한 한국인 인플루언서가 꽤 많다고 알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 유학하신 분들도 많고, 특히 85년에서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분 중에 중국어가 유창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곳 알리바바 서울지사에도 80% 이상 직원이 중국어를 안다. 중국 상하이 출신으로 한국 여행업계 중국 비즈니스 베테랑으로 꼽히는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한국에서 안 통하면 중국에선 더 안 된다, 젊은 층 여행 트렌드 깊이 연구해야 한국 여행업계 베테랑으로서 조언이 있다면? 한국에서 '중국인들은 어떤 여행상품을 좋아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내 대답은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건 중국 사람도 좋아한다'이다. 최근 한국과 중국의 여행 트렌드가 많이 비슷해졌다. 골프᛫서핑᛫스노보드᛫캠핑 등 한국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활동은 중국에서도 똑같이 유행한다. 한국에서 흥행할 만한 아이템을 상품화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주말에 한국 젊은이들이 어디 가서 뭐 하고 노는지 그 여행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업계분들이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더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 한국에서 안 통하는 상품은 중국에선 더 안 된다. 요즘 중국 고객들은 정보가 빠르고 유니크한 상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니즈가 정말 다양하다. 마지막으로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바라는 점은? 한국에 사는 20년 동안 계속 민간 대사의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한᛫중 양국의 문화나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중간에서 조율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많은 분이 중국에 직접 갔다 오면 중국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 나라에 가서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교류하다 보면 자연히 인상이 바뀌게 마련이다. 글로만 보면 표정이나 말투를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떤 생각인지 전혀 알 수 없고, 오해도 많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제 코로나 시대도 끝났으니, 한᛫중 간에 교류가 많아지고 여행업도 발전하길 기대한다. 관련기사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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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떨어질 수 없는 친구, 말다툼 있지만 관계 풀어야”
린쑹톈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회장 “가장 먼저 한국으로 달려왔다.” 린쑹톈(林松添·63·사진)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회장의 말이다. 협회는 1954년 저우언라이 총리의 제의로 중국 각 우호단체가 모여 결성한 중국 최대의 민간외교 단체다. 린 회장은 중국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정협회의)가 끝나자마자 해외순방의 첫 기착지로 한국을 택했다고 밝혔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중국이 그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세계와의 교류를 다시 시작하는 시점에서 그 첫 돌파구는 한국이 돼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고 한다. 린 회장을 27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한국이 중국에 그렇게 중요한가. “좋은 이웃은 금과도 바꿀 수 없다(好隣居金不換)고 하지 않나. 중국은 139개 국가의 3000여 도시와 자매결연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을 가장 먼저 찾은 건 중국 민간외교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예고하는 것이다.” 지난해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았지만 한국 내 중국 비호감도는 80%에 달했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중·한 간엔 말다툼이 있는데 한 집안, 한 친척처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이런저런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양국 간 근본적인 이익 충돌의 문제는 아니다. 이젠 보다 적극적인 면대면(面對面)의 직접적인 교류로 양국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사드(THAAD) 사태 이후 한국으로의 중국 단체관광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16년 이전 중·한 인적 교류가 1000만 명에 달했다. 사드 사태로 양국 관계가 상처를 입었지만 이후 점차 회복해 2019년엔 9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 코로나 사태가 터져 타격을 받았으나 지금은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오! 문희’ 등 한국 영화 10여 편도 중국에서 상영됐다. 한국엔 선진적인 게 많고 중국은 시장이 크다. 민간외교가 중·한 우호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야 한다.” 정부 차원 노력이 더 중요하지 않나. “중국은 이미 한국 정부에 여러 차례 우호적인 신호를 보냈다. 지난해 3월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시진핑 주석이 축전을 보냈고, 5월의 취임식 때는 고령의 왕치산 국가부주석을 시 주석의 특별대표로 파견했다. 8월엔 (서열 3위) 리잔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한국을 방문했고, 11월엔 중·한 정상이 발리에서 만났다. 중국은 한국을 매우 중시한다.” 한국에선 윤 대통령의 방중에 앞서 시 주석의 방한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정상외교가 이뤄지기 위해선 양국 지도자 간의 정치적인 신뢰와 전략적인 신뢰가 중요하다. 누가 먼저 방문하냐 문제를 말하기에 앞서 그런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신뢰 관계가 쌓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이 전략적인 자주와 경제적인 번영을 외교의 목표로 삼는다면 일은 쉽게 풀릴 것이다. 유럽의 나토가 아시아로 오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앞으로 한·중 우호증진을 위한 계획은? “중·한은 이사 갈 수 없는 이웃이자 떨어질 수 없는 친구이며 헤어질 수 없는 동반자다. 이익공동체이자 운명공동체이기도 하다. 여기서 태도가 중요하다. 중·한 국민이 평화와 친선, 개방, 평등의 태도를 견지해야지 배척, 폐쇄의 태도를 가져선 안 된다. 향후 한국 지방정부와 기업, 민간 단체와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유상철 기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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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SNS에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을 올려 화제몰이 중인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이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국 길거리에서 중국 전통춤을 추는 한 청년이 중국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여의도 공원, 신촌, 강남역 등 익숙한 거리에서 몽골족, 위구르족, 다이족 등의 민속춤과 중국 고전 무용을 선보이는데, 짧은 영상 속 '춤선'이 예사롭지 않다. 중국 중앙희극학원 출신으로 얼마 전 중앙대학교에서 현대무용과 석사 과정을 마친 마창성(馬昌盛᛫27)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학 시절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협업한 한᛫중 워크숍을 통해 한국 유학의 꿈을 키웠다는 마창성은 중국 유학생들 사이 이미 유명한 인플루언서다. 30만 팔로워에 인기 영상의 최고 조회수는 무려 6000만에 이른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인터뷰에서 마창성은 왕훙이나 인플루언서가 아닌 무용가로 불리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그리고 한국어를 더 배워서 박사 학위를 딴 뒤 한국 무용단에 입단하고 싶다는 당찬 포부도 밝혔다. 이날 한᛫중 청년 간 문화 교류와 유학 생활 중 느낀 점에서 한᛫중 관계와 중국의 문화 전파에 대한 소신에 이르기까지 열혈 무용학도 마창성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여의도서 춘 몽골춤 영상 조회수만 6000만 회, 왕훙보단 무용가로 불리고 싶어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맥스(Max), 중국어로는 마창성이다. 장쑤(江蘇)성의 해안 도시 롄윈강(連雲港)에서 왔다. 학부는 중국 중앙희극학원(中央戲劇學院᛫중국 3대 예술 대학 중 하나) 무극공연(舞劇表演) 학과를 졸업했고, 석사는 한국 중앙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2020년 8월 한국에 들어왔고 온 지는 벌써 3년 정도 됐다. SNS에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을 올려 화제몰이 중인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이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 SNS에 올린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이 화제다 더우인(抖音·중국판 틱톡)에 올린 몽골 전통춤 영상은 약 6000만 명 정도 본 것으로 안다. 좋아요는 160만 개가 넘는다. 하지만 스스로를 인플루언서(왕훙)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는 그저 길거리에서 전통춤을 추는 중국 청년일 뿐이다. 그냥 무용가로 불리고 싶다. 영상도 상업적인 목적 없이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와 올리게 됐다. 춤 영상을 올리게 된 계기가 있나? 한국에 온 이후, 한국 사람 대부분이 중국 무용을 잘 모르고 본적도 없단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관심이나 이해가 더 적은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중국 전통춤을 배워온 나로서는 한국 친구들도 그 매력을 느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SNS는 문화를 알리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해서 하게 됐다. 영상을 찍느라 서울 길거리에서 춤을 추다 보면 실제로 많은 분이 멈춰서서 박수와 환호를 보내준다. 내가 추는 게 어느 나라의 어떤 춤인지 와서 물어보는 분들도 많다.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은 중국판 틱톡 '더우인'에서 30만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다. 여의도, 신촌, 강남역 등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본인제공] ━ 그저 무대가 좋았던 13살 꼬마, 전통 무용 넘어 현대 무용까지 섭렵하다 ━ 무용은 언제부터 배웠나? 13살쯤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는 좀 늦은 편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빠르면 5~7살, 늦어도 8~10살부터 무용을 배운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부터 춤이 좋았던 건 아니다. 무대가 좋아서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뭔가를 하고, 또 관객들이 좋아해 주는 느낌을 즐겼던 것 같다. 내가 다녔던 예술학교에는 성악᛫악기᛫무용 등 여러 과목이 있었는데, 어릴 때는 노래 부르는 걸 제일 좋아했었다. 그런데 중국 무용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 심오함을 알게 됐고 결국 무용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대학교 때 중국 전통 무용을 전공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사실 중국 전통 무용은 '고전 무용(古典舞)'과 '민족᛫민속 무용(民族民間舞)'으로 나뉜다. 고전 무용에는 '돈황무(敦煌舞)', '한당무(漢唐舞)' 등이 속하고, 민족᛫민속 무용은 중국 56개 민족의 특색이 담긴 춤이다. 중국 중앙희극학원 출신으로 얼마 전 중앙대학교에서 현대무용과 석사 과정을 마친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은 인터뷰에서 몸매나 장애에 상관없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포용성 때문에 현대 무용을 더 좋아한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한국 전통 무용도 배운 적이 있나? 중국에서는 무용 전공이면 대부분 학교에서 한족, 장(藏)족, 위구르족, 몽골족, 조선족 전통춤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친다. 학부 때 무극과 주임이신 선페이이(沈培藝) 교수님이 한국 전통 무용을 좋아하셔서 본인이 사사한 한국 무용계의 대가 김매자 선생님을 학교에 초청했었다. 사실 전공에서 배우는 조선족 전통춤과 한국 전통 무용은 좀 다른데, 우리는 운 좋게도 김매자 선생님께 직접 배울 수 있었다. 그때는 팬데믹 전이라 문화 교류가 상당히 잦고 또 서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전통 무용과 현대 무용 중 어떤 걸 더 좋아하나? 나이가 들면서 보는 것도 많아지고 생각도 많아지다 보니 점점 현대 무용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전통 무용은 일종의 계승이기 때문에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고 또 그대로 따라 해야 한다. 똑같이 춰야만 잘 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현대 무용은 자기만의 생각대로 춤을 출 수 있다. 포용성도 더 크다. 몸매가 어떻든 장애가 있든 없든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 SNS에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을 올려 화제몰이 중인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의 프로필 사진. [사진 본인제공] ━ 학부 당시 한예종과 진행한 한᛫중 워크숍에서 감명받아 한국 유학 결심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모두 잘 아는 사실이지만, 한국 현대 무용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류 문화도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학부 때 우리 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간에 연극᛫현대 무용과 관련해서 한᛫중 공동 워크숍을 했는데, 당시 한국분들의 프로정신과 참신한 예술적 표현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부터 한국에서 더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원을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와서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던데 작년에 '무용여행(舞遊韓國)'이라는 한᛫중 무용 축제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한국과 중국 수강생들에게 몽골 전통춤을 가르쳤는데, 한국 학생들의 열정이 더 뜨거웠다. 이런 수업을 하는 것 자체가 서로의 문화를 널리 알리고 또 교류할 좋은 기회라고 느꼈다. 같은 해 서울국제무용콩쿠르에도 참가했는데, 감사하게도 현대무용 주니어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한국어는 어떻게 공부했나? 한국에 오기 전에 반년 정도 일대일 과외로 배웠다. 막 왔을 때는 거의 초급 수준이었다. 한국어는 계속 배우고 싶어서 이번 새 학기에 한국어 어학당을 신청했다. 말하기 실력을 좀 더 늘리고 싶다. 한국어를 처음 배웠을 때 어순이 좀 달라서 어려웠다. 문화적인 차이랄까.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야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는 것 같다. 중국 중앙희극학원 출신으로 얼마 전 중앙대학교에서 현대무용과 석사 과정을 마친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은 인터뷰에서 학부 시절 한중 무용 워크숍을 통해 유학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코로나 확진에 아킬레스건 파열도, 힘든 시기 이겨낸 건 친구들 덕분 ━ 한국에서 가장 감동했던 순간은? 한번은 춤을 격하게 추다가 아킬레스건을 크게 다친 적이 있다. 수술 후 발에 깁스해서 거동이 상당히 불편했다. 그때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매일 집에 와서 영양식을 만들어주고, 내가 다 먹고 나면 설거지에 청소까지 다 해주고 갔다.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친구들이 정말 많이 보살펴줬다.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작년 콩쿠르를 준비할 때다. 당시 아킬레스건이 아직 회복 중이라 기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해 3월에 걸린 코로나 후유증까지 더해져 폐활량이나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안무도 구상해야 했고, 물리치료를 하면서 계속 춤 연습을 해야 했다. 또 학교 과제도 틈틈이 제출해야 해서 정말 힘든 4개월을 보냈다. 수차례 포기하고 싶었지만, 다행히 잘 버텨냈고 좋은 결과도 얻었다. 한국에 살면서 중국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 부분은? 음식이나 문화적으로 다른 점도 많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게 있다면 한국 사람들은 매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같은 옷을 이틀 입으면 밤새 집에 안 갔거나 외박한 걸로 오해하더라. 중국에서는 같은 옷을 며칠씩 입는 경우가 흔하다. 무용학과 학생들의 스타일 면에서도 한국 친구들은 각자의 개성이 더 강한 것 같고, 생각도 통통 튀고 훨씬 자유롭다. 그리고 항상 대담하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다는 점이 좋았던 것 같다. 매번 수업 때마다 어떻게 저런 독특한 생각을 할 수 있고 개성이 넘치는지 감탄할 때가 많았다. 팬데믹 시기는 어떻게 보냈나? 예전에는 집에 잘 붙어있지 못한 성격이었는데, 이 시기 조용히 집에서 시간 보내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다. 집에서 요리도 많이 해 먹었다. 한국 친구들을 초대해 산둥식 닭볶음 요리(山東炒雞)와 마라룽샤(麻辣龍蝦)도 만들어줬는데 반응이 좋았다.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은 중국판 틱톡 '더우인'에서 30만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다. 여의도, 신촌, 강남역 등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본인제공] ━ 한중 문화 교류 줄어 아쉬움 커, 문화 수출 '짝사랑'처럼 일방적이면 오래 못 가 ━ 지금 가장 큰 고민은? 가장 큰 문제는 언어다. 그래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도 또 어학원을 등록했다. 기회가 된다면 중앙대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가 있다면? 단기간의 목표는 박사과정 입학이다. 물론 너무 어렵겠지만 나중에는 한국국립현대무용단 같은 현대무용을 전문으로 하는 곳에 들어가는 게 꿈이다. 모교인 중앙대 C2Dance 무용단의 안무가, 무용수들도 실력이 대단하다. 이런 곳에서 훌륭한 분들께 더 깊이 무용을 배우는 게 목표다. 팬데믹 이후 한᛫중 무용단 간의 교류와 협력도 돕고 싶다. 그리고 해외로 나가 더 멋진 무대에서 무용의 매력과 배움의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SNS에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을 올려 화제몰이 중인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이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중관계에 대한 생각과 바라는 점 학부 시절 나는 한᛫중 공동 워크숍을 통해 한국에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개인적으로도 얻은 것이 정말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중 간 교류가 주춤하면서 요즘 학생들은 이런 배움과 체험의 기회조차 없는 게 너무 아쉽다. 내가 워크숍 당시 느꼈던 기쁨이나 감동을 요즘 친구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양국의 문화 교류가 빈번했던 시절을 직접 느껴봤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것 같다. 앞으로는 한·중 관계가 다시 좋아져서 한국의 우수한 문화도 중국에 소개하고, 또 한국 친구들도 중국 문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내가 한국 유학 기간에 배운 프로의식이나 전문적인 지식을 중국 학생들에게도 가르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더우인 영상을 찍으면서 많은 분이 중국 문화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국의 문화 전파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현실을 보여준 것 같다. 한류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데, 중국은 문화적 자산이 풍부한 데 비해 약간은 보수적인 것 같다. 그래서 나 한 명이라도 중국 문화와 전통 무용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데 열심히 기여하고 싶다. 문화 수출은 '연애'와 비슷한 것 같다. 짝사랑하듯이 한쪽에서만 쏟아부으면 오래 갈 수가 없다. 반드시 쌍방향 소통이 필요하다. 뭐든지 함께해야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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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중국 신장 출신으로 성균관대와 서울대서 각각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위구르족 부부 김미나(왼쪽, 굴미나 아부두르이무·39)와 마이단(매이단강 오보이·39)이 지난달 21일 서울대학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 명도 하기 힘든 한국 명문대 의학박사 학위를 두 사람 다 가진 '초 엘리트' 중국 부부가 있다. 중국 신장(新疆)에서 온 위구르족 남편 마이단(매이단강 오보이᛫39,麥爾旦᛫吾甫爾)과 아내 김미나(굴미나 아부두르이무᛫39,古麗米娜᛫阿布都熱依木)의 이야기다. 올해 벌써 한국 생활 13년차라는 마이단과 김미나 부부는 이국적인 외모와는 다르게 유창한 한국어로 그간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신비로운 서역 땅 신장을 떠나 서울에 오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한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에서 두 번의 사기, 쉽지 않은 학비 마련, 좌충우돌 육아 스토리까지, 타향살이의 설움을 덜어준 기적같은 은인들의 도움과 한·중 관계에 대한 속마음 등 지난달 21일 화제의 중국 '박사 부부'를 만나 그 풀스토리를 들어봤다. 중국 신장 위구르족 의학박사 부부 김미나와 마이단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첫째 딸 마이지나(麥祖娜·10), 둘째 딸 마이위나(麥維娜·5), 남편 마이단, 아내 김미나. [사진 본인제공] ━ 해외유학을 꿈꿨던 의대 커플, 미래 내다보고 한국행을 결심하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마이단 : 한국 이름은 마이단이고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왔다. 고향에서 신장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는 2010년에 처음 왔다. 서울대학교에서 성형외과학 박사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대 의학연구혁신센터의 박사후 연구원이다. 김미나 : 저도 남편과 같은 중국 위구르족이고, 한국에서는 김미나라고 부른다. 같은 해 남편보다 6개월 정도 늦게 한국으로 들어왔다.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삼성병원 피부과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 성균관대와 서울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 신장 위구르족 부부 김미나(왼쪽, 굴미나 아부두르이무·39)와 마이단(매이단강 오보이·39)의 의사 프로필 사진. [사진 본인제공] 둘은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됐나? 마이단 : 스물두 살쯤 신장의과대학에 다닐 때 만나서 결혼했다. 당시 둘 다 의사가 되고 싶었고, 또 해외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싶다는 목표가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의대에 가는 게 꿈이었는데, 졸업하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사는 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외국에 나가 공부를 더 하자고 마음먹었다. 한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마이단 : 대학교 때 유럽에서 온 한 교수님이 한국에 가서 성형외과를 전공해보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중국은 성형외과 의사가 많이 부족하니, 10년 후 분명 잘될 거라며 한번 고민해보라고 하시더라. 졸업을 앞두고 아내의 고향에 있는 인민병원에서 1년동안 함께 인턴을 했는데, 가보니 실제로 병원에 '화상과'만 있고 성형외과는 따로 없었다. 그때 중국에 이 분야의 인재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했고, 이는 곧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믿게 됐다. 지금 생각하니 그 교수님은 우리가 한국에 오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신 정말 고마운 분이다. 은사의 추천이 있기 전에는 한국에 따로 관심이 없었나? 마이단 : 원래는 일본에 가서 심혈관 분야를 전공하려고 했다. 그래서 방학 때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서 온 교수님께 따로 일본어를 배운 적도 있다. 의대에서는 제2외국어 공부가 필수라 둘 다 일본어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성형외과는 한국이 더 알아준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지막에 한국행을 택했다. 그 당시 이미 모교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교수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중국 신장 출신 의학박사 부부 김미나와 마이단의 가족사진. [사진 본인제공] ━ 학비와 양육비 부담에 남편 먼저 학위 따고 뒤따라 의대에 들어간 아내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어를 배운 적이 있나? 마이단 : 의대 재학 시절 3~4년 동안은 계속 일본어를 배웠고, 마지막 학년 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신장대학교에 한국 학생들이 꽤 많았는데,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었다. 아내는 약 10개월, 나는 약 3개월 정도 배웠다. 한국에 막 왔을 때 한글을 읽고 쓰기만 가능한 수준이었고 말은 잘 못했다. 한국에 와서는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나? 마이단 : 나는 서울대 어학당에서 2년, 아내는 성균관대 어학당에서 1년 반 정도 공부했다. 당시 나는 서울대 의대에 꼭 가고 싶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 영어와 한국어를 둘 다 잘해야 했다. 어학원에 계속 다니면서 지원했는데, 두 번이나 떨어졌지만 계속 문을 두드렸고, 세 번째에 드디어 서울대에 합격했다. 내가 먼저 석·박사과정을 마쳤고, 아내는 나중에 성균관대 의대에 입학해서 얼마전 드디어 졸업식을 했다. 마이단이 먼저 대학원에 입학한 이유가 있나? 김미나 : 둘이 동시에 학교를 다니기엔 학비가 너무 비쌌다. 장학금도 입학 후 2학기부터 신청할 수 있었다. 서울대는 국립이라 그나마 학비가 좀 저렴한 편이었지만, 육아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나중에 내가 공부할 때는 남편이 많이 도와줬다. 마이단 : 부모님이 중국에서 공무원으로 계시는데, 월급이 60만원 정도였다. 유학 오려고 둘이 고향에서 틈틈이 돈을 모으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중국 신장 출신으로 성균관대와 서울대서 각각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위구르족 부부 김미나(왼쪽, 굴미나 아부두르이무·39)와 마이단(매이단강 오보이·39)이 지난달 21일 서울대학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출국 전 유학 사기만 두 번, 한국 와선 학비 벌러 전단지 알바도 한국에 오기 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김미나 : 유학 준비 당시 중국에서 사기를 두 번이나 당했다. 형편이 어려워 통장 잔고증명서 같은 증빙을 중개업자에게 맡겼는데, 수수료만 떼어가고 가짜 서류를 발급해줬다. 그래서 결국 직접 처리하는 게 낫겠다 싶어 남편이 먼저 한국에 들어왔고, 나는 6개월 후에 뒤따라왔다. 한국에 와서는 주로 어떻게 생활비를 마련했나? 김미나 : 막 한국에 왔을 때는 언어를 몰라 전단지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파트 16층부터 집집마다 한 장씩 붙이며 내려온 적도 있다. 나중에는 식당 같은 데서 일했다. 일이 힘들긴 했지만 그때 한국 사람들과 많이 소통하면서 다른 중국 친구들보다 한국어가 훨씬 빨리 늘었다. 외국인 학생 기숙사에서 중국어를 계속 쓰다보니 이러다간 한국어를 영영 못 배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초반 3개월 동안은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매일 도서관에서 자고, 아침에만 숙소에 들어가서 씻은 뒤 수업하러 가는 식이었다. 나중에는 도서관 경비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고 아침밥을 사주신 적도 있다. 한국어를 배울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 마이단 : 일본어를 배우다가 갑자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처음에는 너무 헷갈리고 비슷하게 들렸다. 하지만 한자를 많이 알아서 그런지 한국어를 금방 습득했다. 6개월쯤 배우니 한국말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했다. 김미나 : 나는 3개월만에 그 소리를 들었다. 사실 위구르어와 일본어, 한국어 모두 알타이 어와 관련이 있다 보니 유사점이 많다고 느꼈다. 지금은 우리 둘다 한국어가 제일 편하다. 중국 신장 출신 의학박사 부부 김미나와 마이단의 첫째 딸 마이지나가 KBS 동요 프로그램 '누가누가잘하나'에 출연해 노래하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 둘째 딸 자기가 한국인이라 믿어, 미국가선 김치 찾는 '찐 한국인' 된 부부 두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하고 있나? 김미나 : 첫째 딸은 2013년 생이고, 둘째 딸은 2018년에 태어났다. 큰 딸은 명동 화교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고, 둘째는 한국 어린이집에 다닌다. 두 아이 모두 한국어가 유창하다. 중국어는 학교에서 배우고 있고, 위구르어는 아이들이 말은 못해도 잘 알아들었으면 해서 집에서 최대한 많이 쓰고 있다. 큰 딸은 어렸을 때 중국에서 부모님이 잠깐 키워 주셔서 중국에 대한 이해가 좀 있는 편인데, 이제 5살인 둘째는 자기가 완전히 한국인인 줄 안다. 중국 신장 출신 의학박사 부부 김미나와 마이단의 둘째 딸 마이위나. [사진 본인제공] 한국에 막 왔을 때 음식은 잘 맞았나? 마이단 : 비빔밥 외에는 먹을 게 없었다. 김치랑 백반만 주로 먹었다. 돼지고기를 안 먹고 매운 것도 잘 못 먹다 보니 처음엔 좀 힘들었다. 지금은 거의 한국 사람이 다 됐다. 지난해 미국 뉴욕에 학회를 갔는데 매일 스테이크, 빵만 먹다가 한식집에 가서 김치를 먹으니 그제야 살 것 같더라. 김미나 : 지금은 애들도 한국 음식에 익숙해졌다. 할랄 음식점을 가끔 가기도 하는데, 지금은 주로 집에서 요리를 많이 해먹는다. 훠궈(샤브샤브)같은 중국음식점도 자주 간다. 이태원에서 양고기를 사와서 직접 양꼬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김미나는 이날 인터뷰에서 둘째 아이 출산 당시 산후조리를 도와준 은인인 친구 어머님(왼쪽 네번째)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산후조리 도와준 친구 어머니, 한달 된 젖먹이 맡아준 어린이집 원장에 무한 감동 타지에서 아이들 키우려면 힘든 일이 많을텐데. 마이단 : 둘째가 막 태어났을 때 봐줄 사람이 없어서 37일된 아가를 어린이집에 보내야했다. 의대는 수술이나 진료가 다 끝난 저녁 6시 이후에 미팅이 많은 편이다. 아이 픽업 후 지하철역에서 '바톤 터치' 하듯 아내에게 넘겨주고 급하게 미팅에 간 적도 많다. 김미나 : 2017년 삼성병원에 지원했을 때, 이미 둘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알리면 안될 것 같아 일부러 펑퍼짐한 옷을 입고 면접을 봤다. 2018년 2월 초 출산일 직전에 드디어 합격 통보를 받았는데, 기쁨과 동시에 만감이 교차했다. 3월부터 바로 출근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첫째가 다니던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이 갓난아기였던 둘째를 흔쾌히 받아 주셨다. 삼성병원에서 일할 기회를 잡은 건 다 원장님 덕분이다. 인덕이 많은 것 같다. 김미나 : 사실 둘째 출산 당시 부모님이 못 오셔서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산후조리를 도와줄 사람이 남편밖에 없었다.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던 한국 친구 어머님이 이를 아시고는 아기 옷 한보따리를 들고 우리집으로 오셨다. 집에 머무시며 손수 미역국도 끓여 주시고 친자식처럼 나를 알뜰하게 챙겨 주셨다. 정말 너무 감동이었다. 아기도 거의 키워주다시피 하셨다. 둘째는 이 친구 어머님을 자기 할머니라고 생각한다. 김미나는 이날 인터뷰에서 둘째 아이 출산 당시 산후조리를 도와준 은인인 친구 어머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한국 지도교수 도움에 혁혁한 연구 성과 거둬, 훗날 고향에서 함께 종합병원 여는 게 꿈 ━ 의학공부가 어렵지는 않았나? 마이단 : '인공 피부' 연구팀을 이끌어 주신 최태현 서울대 교수님은 은인 중 한명이다. 항상 연구에 관심 가져 주시고, 또 논문이 경쟁력이라고 늘 강조하신 덕에 7년 사이 13편이 넘는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이만큼 잘 자리잡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김미나 : 보통 지도 교수님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뵙기도 어려운데, 우리는 거의 매일 교수님과 소통했다. 새벽에 나와서 세포 배양도 손수 보여주시고, 하나하나 직접 가르쳐 주셨다. 나는 모발과 네일 분야를 연구 중인데, 얼마 전에는 6개의 새로운 탈모 치료제 성분을 발견했고 특허도 신청 중이다. 지난달 21일 서울대학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만난 마이단(왼쪽)과 김미나. 부부는 이날 인터뷰에서 언젠가 고향인 중국 신장으로 돌아가 종합병원을 여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언젠가는 중국으로 돌아갈 예정인가? 마이단 : 고려하고 있다. 그동안은 중국에 돌아가면 대학교수가 되려고 논문을 주로 많이 썼다. 요즘 중국에 좋은 일자리가 있는지 물색 중이다. 돌아가려면 실력도 중요하니 한국에서 경험을 많이 쌓고 있다. 나중에 상하이나 베이징에서 일하다가 나이가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함께 종합병원을 여는 게 꿈이다. 김미나 : 나는 교수가 되기보단 개인병원을 열고 싶다. 중국에 피부암이나 피부 질환 환자는 너무 많은데, 전문적으로 보는 의사가 많이 없다. 피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사실 대학 때 전공은 산부인과였다. 남편이 성형외과를 전공했으니 나도 피부과 공부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전공을 바꿨다. 김미나는 중국 SNS인 더우인(抖音, 중국판 틱톡)에서 '미나 박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중국 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더우인 캡처] 지금 가장 큰 고민이나 도전이 있다면? 마이단 : 나와 아내는 당장 내일이라도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아이들이 한국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게 걱정이다. 아직 중국 문화를 많이 접하지 않아서, 갑자기 돌아가면 충격을 받거나 스트레스가 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미나 : 아이들은 가능하면 한국에서 교육을 하고 나중에 다 큰 뒤에 중국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도 생각 중이다.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바라는 점은? 마이단 : 한국과 중국은 정말 가깝고 많은 부분이 서로 연결된 나라다.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으로만 상대국을 보다 보니 관계가 좀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이야기가 많지만, 요즘은 안 좋은 것들이 더 잘 보이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중간에서 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얘기, 좋은 소식을 많이 전하고, 한·중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관련기사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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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방송인 쟈오리징(趙里京·35)이 지난달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완벽주의 8학군 아빠' '열성 아빠' '개포동 백종원'…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중국 아빠 쟈오리징(趙里京᛫35) 앞에 붙는 수식어다. 중국 배우 출신으로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인 무역회사 대표 ᛫ 방송인 쟈오리징은 백종원을 넘보는 요리 실력과 뜨거운 교육열로 방송 이후 큰 화제를 모았다. 아빠들 사이에서는 '육아 고수'로 통한다. 일하는 아내 대신 초등학생 딸과 한 살배기 아들을 24시간 완벽하게 돌본다. 교육을 위해 대치동 근처 개포동으로 이사 온 건 기본, 중국식 찐빵 ᛫ 젠빙(煎餅) ᛫ 장수면 등 매 끼니와 간식까지 손수 건강식으로 만들어 먹인다. 중국 남자 이미지를 새로 쓰고 있다는 평이 자자하다. 지난달 말, 쟈오리징을 만나 완벽한 아빠 이미지에 가려진 '사랑꾼' 면모와 가족 이야기 그리고 최근 한᛫중 간 분위기에 대한 솔직한 속내를 들어봤다. 방송인 쟈오리징(趙里京·35)이 지난달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은행에서 첫눈에 반한 아내, 단 두 번의 만남과 2년의 장거리 연애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 고향이 한국과 가까운 산둥(山東)성이다. 초등학교 때, 집 근처에 한국 제품을 만드는 공장들이 생겨났다. 아버지가 한국인 사장님들과 자주 만나시다 보니, 덩달아 한국 식당도 자주 갔었다. 사실 한국에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중학교 시절 좋아했던 한국 드라마 〈순수〉 때문이다. 주인공 명세빈 배우가 너무 예뻐서 그때 한국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별은 내 가슴에〉, 〈명랑소녀 성공기〉 등 작품도 재밌게 봤다. 대학 입학시험이 끝난 2006년 여름, 유학을 고민하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왔다. 그렇게 연세 어학당에서 2년 공부하고 나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한국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일은? 당연히 아내를 만난 일이다. 10년 넘게 옆에 있어 주고, 위안이 된 사람이다. 지금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엄마 같은 존재다. 한국에서 아내를 만난 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다. 한국인 아내와는 어떻게 결혼까지 이어졌나? 아내를 처음 만난 건 2009년 말쯤이다. 당시 은행원이던 아내에게 반해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그뒤로 딱 두 번밖에 못 만났는데, 그해 12월 연기 활동을 위해 내가 중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때부터 2년 넘게 장거리 연애를 했다. 당시 영화, 드라마 촬영 때문에 대부분 밖에 있었지만 하루에도 몇 시간씩 통화를 했다. 그때는 메신저가 없어 만 원짜리 국제 전화카드를 거의 매일 한 장씩 썼다. 연애 시작 후, 2010년 드디어 처음으로 칭다오(青島)에서 둘이 만났다. 한국과 약 1시간 거리이다 보니, 2011년에는 아내가 거의 매달 칭다오로 왔다. 그렇게 그해 11월 11일은 중국에서, 2012년에는 한국에서 각각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에 와서 중국과 다르다고 생각한 점은? 결혼 초반에 약간의 문화 차이가 있었다. 중국 부모님들은 99% 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반면, 한국 부모님들은 좀 더 독립적이라고 느꼈다. 결혼한 자식을 여전히 많이 도와주지만, 자기 인생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첫째 아이는 돌 지나고 3살까지 중국에서 지내고, 3살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장모님이 한국에서 키워 주셨다. 보통 중국에서는 부모님이 무보수로 손주 봐주는 걸 당연시하는데, 한국에서는 부모님께 용돈이나 선물을 챙겨 드려야 하는 분위기다. 우리 부모님의 경우 명절에 용돈을 드리면 오히려 혼을 내실 수도 있다.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에서 요리하고 있는 쟈오리징. 아이들 매 끼니와 간식을 손수 만들어 먹이는 열정과 상당한 요리 실력 때문에 방송에서 '개포동 백종원'이란 별명을 얻었다. [사진 본인제공] ━ 아버지 닮아 '만능 요리꾼', 아이들과 아내 위해 건강 챙긴다 방송을 보니 요리를 상당히 잘 한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아버지가 요리하시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인지 남자가 요리하는 게 특별히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힘이 넘치는데, 힘든 요리를 왜 굳이 아내한테 시켜야 하나. 꼭 여자만 요리를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아내는 나와 결혼한 후, 혼자 주방에서 라면도 끓여본 적이 없다. 결혼 전에는 나도 결벽증이 있어서 기름 냄새나는 주방에 잘 안 들어갔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니 아버지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리 학원도 다녔다. 지금은 요리가 너무 재밌다. 유기농 식재료를 쓰고, 건강식을 주로 만드는 이유가 있나? 내가 건강해야 아내와 아이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한 미국 영화에서 아빠와 딸이 데이트하는 장면을 봤는데, 문득 내가 너무 빨리 늙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했고 벌써 10년이 넘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도 좋고 피부도 좋아진다. 첫째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식을 훨씬 잘 먹는다. 아이들 식성은 어릴 때 정해진다. 아기 때 입이 적응하면 너무 달고 짠 음식은 자연히 안 먹게 된다. 자녀들에게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어릴 때 부모님께는 어땠나? 어렸을 때는 너무 부끄러워서 부모님께 사랑 표현을 거의 안 했다. 감사하다는 말도 다른 사람에게는 괜찮은데 유독 부모님께는 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식이 생기고 나니, 점점 바뀌는 것 같다. 2년 전부터는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국제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 부모님은 내가 뭘 해도 다 지지해주시는 편이다. 어릴 때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베이징에서 유명한 감독님께 훈련도 받게 해주시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연극영화과에 간다고 했을 때도 그렇고,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부모님들은 정말 오로지 자식을 위해 사신다. 자식의 행복이 곧 자기 행복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어릴 때 아버님은 절대 칭찬을 안 하셨는데, 최근 한국에서 방송출연한 걸 보시고는 잘하고 있다고 한마디 해주셨다. 정말 뿌듯했다.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중국 아빠 쟈오리징과 첫째 딸 하늘. 쟈오리징은 인터뷰에서 어려서는 부모님께 애정 표현을 잘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사진 본인제공] ━ 한᛫중 피 반반 흐르는 딸, 자신을 한국인이라 믿어 서운하기도 방송을 보니 아이가 공부를 스스로 알아서 하던데, 비법이 뭔가?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 같다. 12살인 첫째 아이는 외할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책 읽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 모든 공부는 글을 읽는 게 아닌가. 책을 많이 읽으면 독해력이 생기고, 이해를 잘하면 지식들이 머리로 잘 들어오는 것 같다. 요즘은 딸이 역사에 푹 빠졌다. 올해는 가족과 함께 한 달 동안 중국 전역을 돌며 병마용, 만리장성, 장가계 등에 가볼 생각이다. 자녀 중국어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나? 중국어를 따로 가르치진 않고, 집에서 최대한 중국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국 집에 놀러 오시면 그때는 다 중국어로 대화한다. 쓰는 것 빼면 대화의 70~80% 정도는 알아듣는다. 단어를 조합하고 또 자기 의미를 잘 전달하는 걸 보면 아이들은 정말 금방 배운다는 생각이 든다. 자녀의 국적이나 정체성 고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첫째의 경우 자신이 당연히 한국인인 줄 안다. 하지만 딸이 자기가 100% 한국인이라고 하면 조금 서운하긴 하다. 1년 전부터는 아이들에게 한국과 중국 모두 고향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 국적은 그저 종이에 적힌 글자일 뿐이다. 한국과 중국 피가 반반 흐르니 한국어, 중국어를 모두 모국어처럼 잘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중국과 중국어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노력 중이다.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중국 아빠 쟈오리징. 현재 12살 딸과 한 살배기 아들의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 [사진 본인제공] ━ 한국에 사는 중국인으로서 늘 처신 조심, 수준 낮은 행동은 존중 못 받는다 주변에 당부 방송 후 학교에서의 반응은 어떤가? 아이가 학교에서 엄마는 한국인이고 아빠는 중국인이라는 얘기를 딱히 밝힌 적은 없다. 방송에 나오고 나서야 내가 중국 사람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됐다. 시기가 조금 예민한 만큼 아내는 내성적인 아이가 학교에서 놀림당하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반 친구들이 아빠가 너무 멋있다면서 다들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학교 측 초청을 받아서 중국 문화에 대해 강연도 했다. 감사하게도 다들 좋게 봐주셨고, 아이들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요즘 한중 간 분위기 때문에 아무래도 좀 조심스러울 것 같다 솔직히 한국에 사는 중국 사람으로서 요즘 항상 조심하고 신경 쓰면서 지내고 있다. 조금 힘들긴 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오히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중국 친구들에게도 당부하고 싶다. 외국에 살려면 남들보다 뭐든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주변 지인에게도 수준 낮은 행동은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을 수 없다고 늘 이야기한다. 아무리 분위기가 안 좋아도 중국 사람들이 스스로 솔선수범하면 어느 나라를 가든 사랑받을 수 있다. 방송인 쟈오리징(趙里京·35)이 지난달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쟈오리징은 인터뷰에서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중국 남자, 중국 사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며 ″한국에 오는 중국 유학생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멘토링을 하고싶다″고 밝혔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방송활동 조용히 내조해준 아내, 다양한 도전 응원해줘 방송 출연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 프로그램은 아내의 친구가 소개해줬다. 출연은 아내가 적극 지지해준 덕이다. 사실 나는 한국에 사는 중국인 중 나 말고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아내 눈에는 내가 가장 훌륭한 중국 남자였다 보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은 더 안 된다고 추켜세웠다. 사실 과거 JTBC '비정상회담'도 아내가 몰래 지원해서 출연했었다. 부인이 방송활동을 적극 지지해주는 편인가? 평소 아내는 내가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보기에 내 외모도 나쁘지 않고, 건강 관리도 열심히 해서 그런가 보다. 지금 안정적인 사업이 있긴 하지만, 내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보니, 아내 입장에서는 좀 더 많은 도전을 하길 바라는 것 같다. 아내는 내가 단순히 유명해지기보다는 인생을 좀 더 다양하게 살길 바란다. 정신적으로 아내가 주는 힘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것 같다. 연기 쪽으로 더 발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중국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의향이 있나? 항상 머리 속에 연기를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언젠가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평소에도 매일 자기관리를 계속 하고 있다. 올해는 드라마, 영화 촬영을 위해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물론 기회가 된다면 중국 육아 프로그램 같은 데도 출연해보고 싶다. 중국 사람이 해외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는지 그런 경험들을 들려주고 싶다. 평소 엄격한 식단 조절과 꾸준한 운동으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편이라는 쟈오리징은 현재 육아에 전념 중이지만 언젠가는 전문적인 연기자로 거듭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중국 사람에 대한 이미지 바꾸려 노력, 중국 유학생 멘토링도 원해 국제 커플은 나라끼리 경쟁하면 신경전이 있게 마련인데, 지난해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어땠나? 한국과 중국이 경쟁하면 마음이 좀 복잡해지긴 한다. 하지만 아내가 워낙 부드럽고 내성적인 사람이라 그런 일로 크게 다툰 적은 없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살다 보니, 이제는 한국이 제2의 고향 같다. 한국과 다른 나라가 경기하면 무조건 한국을 응원한다. 혹시라도 한국과 중국이 부딪히는 상황이면 그냥 TV를 끄고 차라리 안 보는 편이다. 두 나라에 좋은 점이 참 많은데 굳이 나쁜 걸 찾아서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뉴스도 항상 좋은 것만 보려고 노력한다. 동영상 플랫폼이나 SNS 등에 달리는 악플도 일부러 안 보는 편인가? 거의 보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직접 찾아와서 악플을 달거나 DM(다이렉트 메세지)으로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많이 없는 것 같다. 첫 방송이 나가고 어느 커뮤니티 글에 700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고 처제가 알려줬는데, 감사하게도 대부분 칭찬과 격려의 댓글이었다. 좋지 않은 분위기에도 이렇게 응원해주시는 분이 많아 정말 감동받았다. 더 열심히 하고, 부끄러운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에서 꼭 이루고 싶은 일이나, 목표가 있다면?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중국 남자, 중국 사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 내가 어학당에 다닐 때만 해도 일본 유학생이 가장 많았는데, 지금은 중국인 학생이 제일 많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오는 중국 유학생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멘토링을 해주고 싶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산 선배로서 여러 노하우나 경험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 출연 이후 활발한 방송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쟈오리징. [사진 본인제공] 관련기사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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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데 WEF 이사장 “한국은 신지정학 시대 핵심국가…기후대책 역할해야”
뵈르게 브렌데 국제경제포럼(WEF) 이사장이 지난 10일 스위스 쾰른에서 WEF 연차총회를 앞두고 열린 미디어브리핑에서 올해 회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한국은 신(新)지정학 시대에서 아시아의 핵심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기후·환경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뵈르게 브렌데 국제경제포럼(WEF) 이사장은 16일(현지시간) 개막하는 다보스포럼에 앞서 지난 13일 중앙일보와 가진 화상 인터뷰에서 “한국은 기술 강국으로 이미 세계를 이끌고 있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이어 시급한 과제로 “국제 사회가 ‘탈동조화’ 바람을 멈추고, 다시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포럼 주제가 ‘분열된 세계에서의 협력’이다. “이번 행사는 최근 수십 년 중 가장 복잡한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열린다. 지정학적 긴장과 각국의 산업 정책은 경제 협력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우리에겐 더 잘 협력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경제 성장과 발전, 지속가능한 결과를 끌어내는 데 있어 무역과 투자의 중요성을 재정립하는 ‘글로벌 경제성장 공동체’를 제안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제안인가.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현재의 위기가 새로운 충돌로 악화해선 안 된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 미국과 유럽, 중국과 유럽 간 교역은 균열과 단절을 향하고 있다(미·중 교역 규모는 2021년 6915억 달러로 2017년 대비해 5.5% 늘었지만 상호 비중은 같은 기간 16.6→14.7%로 감소했다). 서로 새로운 벽을 쌓고 보호주의의 길을 선택한다면, 미래의 성장과 번영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계 경제 침체를 타개할 방법은. “우리에게 ‘마술지팡이’는 없다. 경험적으로 무역이 블록화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미래 성장을 위해 무역 기여도를 높여야 한다.” 뵈르게 브렌데 국제경제포럼(WEF) 이사장이 지난 13일 중앙일보와 화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고석현 기자 미래 준비를 위한 또 다른 난제는. “기후변화 대응이다. 국제 사회는 2050년 ‘넷제로’(Net-Zero·탄소 실질 배출량을 제로로 만드는 것)를 약속했다. 이제는 구체적인 대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세계 70여 개 기업이 처음으로 함께 움직인다. 애플·아마존 등이 ‘그린 공급망 선언’을 하고, 지속가능한 연료를 사용하는 항공사만 운항할 수 있도록 압박하고 있다. 이들의 구매력이 다른 기업의 정책 방향을 바꾸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강대국 간 정치적 긴장을 피하면서 환경·사회적 성과 개선을 위한 민간 부문의 연대가 필요하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아직 코로나19가 끝난 게 아니다. 다만 최악의 상황은 지난 듯하다. 이제 미래를 위한 탄력성 구축을 논의해야 한다. 앞으로 덮칠 팬데믹에 어떻게 대응할지 대응 모델을 만드는 게 첫째다. 분명한 건 새로운 국가 안보, 기술·환경적 위기를 다루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대가 필요하다. 코로나19는 탈동조화가 세계 공통의 과제에 대응하는 데 큰 비용을 초래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국의 그동안 활동과 앞으로 역할은. “올해엔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최대 규모로 한국 대표단이 구성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한국 재계의 리더도 대거 참석한다. 한국은 기술 강국으로 이미 세계를 이끌고 있다. 지정학적으로 복잡한 지역인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앞으로 신지정학 시대에서도 핵심 역할을 할 것이다. 무역 개방과 투자에 적극 나서면서 국제무대에서도 힘이 실리고 있다. 기후·환경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정학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먼저 무역·투자에서 행정적 복잡성을 개선해야 한다. 무역 절차 단순화는 관세 면제보다 이익이 더 크다. 이번 포럼에서 100개국 이상이 글로벌 투자 절차 단순화 협상에 서명할 것이다. 리쇼어링(자국 기업의 본국 회귀) 대신 아프리카·남미·남아시아 등 세계 곳곳으로 생산기지를 다각화해 글로벌 회복 탄력성을 키우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뵈르게 브렌데 국제경제포럼(WEF) 이사장. 사진 WEF ☞뵈르게 브렌데=1965년생. 노르웨이 출신 정치인이자 외교관으로, 노르웨이과학기술대에서 경제·법·역사학을 전공했다. 노르웨이 외무·통상산업·환경부 장관과 유엔지속가능발전위원회(UNCSD) 의장,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이사 등을 거쳐 2017년부터 WEF를 이끌고 있다. 클라우스 슈바프 WEF 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나 조직 전체의 전략 개발을 맡고 있다. 고석현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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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는 돈 아닌 마음 문제, 일본 무한 책임 의지 보여야”
━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12일 서울 중구 조선호텔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일본 정부가 ‘무한 책임’, 즉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점을 명시하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야 합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는 지난 12일 위안부·강제징용 등 한·일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이날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사 피해자를 포함해) 한국 국민이 분노하는 부분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해결된 문제를 더는 반복해서 제기하지 말라는 일본의 고압적 태도 때문”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인터뷰가 진행된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선 외교부가 주최한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정부는 이에 앞서 민관협의회를 네 차례 열고 피해자 측과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에도 두 차례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차관·국장 등 각급에서 실무 협의를 지속했다. 이날 토론회엔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단 등 시민단체가 불참하며 ‘반쪽 토론회’가 됐다. 토론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피해자 측의 거센 항의와 고성이 오가며 향후 강제징용 해법 마련을 둘러싼 진통을 예고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국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정치적) 리스크를 감수하며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경우 현재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상황에서 기존의 입장을 바꾸기 어려운 정치적 환경이지만 그럼에도 윤 대통령과 함께 리스크를 감수하고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지난 11일 우당이회영선생교육문화재단(이사장 이종찬)이 수여하는 우당특별상을 수상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독립운동 정신과 평화 사상을 기리는 재단이 일본의 정치인에게 특별상을 수여한 건 매우 이례적이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시상식에서 “한·일 양국에 가로 놓인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서 동시에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 양국의 우호 발전과 동아시아 평화 구축에 미력하나마 힘써 나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강제징용 해법 마련을 위해 일본 측이 할 수 있는 ‘성의 있는 호응 조치’는 뭔가. “개인적으로는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과거사 문제가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 간에 아무리 다양한 협정을 체결했다 해도 개인의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게 국제적인 상식이 됐다고 확신한다. 일본에는 ‘잘못을 고칠 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미 (잘못을 고칠 수 있는) 시기가 많이 늦은 만큼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일본 정부의 입장이 바뀔 수 있다고 보나. “일본 측이 우리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한다면 강제징용 문제는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 전쟁으로 상처를 입은 분들께서 더는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일본 정부가) 사죄하는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 과거사 문제의 해법은 금전적인 문제가 아닌 마음, 심리적인 문제다.” 일본은 한·일 협의를 거쳐 마련될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이 ‘최종적 해법’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무력화하면서 일본은 이미 한국의 정권 교체에 따라 국가 간 합의가 효력을 잃는 과정을 경험했다. 이 같은 일본의 우려에 대해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참을 고민하다 “매우 어려운 문제”라며 운을 뗐다. 이번에 도출될 강제징용 해법의 최종성과 신뢰성을 높일 방법이 있나. “정권이 교체되면 정권마다 생각과 방향성이 달라진다. 다만 2015년 위안부 합의의 경우 일본 측에서 ‘이 합의로 모든 게 끝났고 해결됐다’ ‘우리는 사죄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인 걸 위안부 피해자들이 납득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명예와 존엄, 인권을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합의의 토대 위에서 양국 정부가 약속을 이행하고 협력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한·일 관계 개선은 윤석열 정부의 핵심 외교 과제다. 양국 관계 개선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보나. “비단 한·미·일 3국이 공조해서 중국에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만 한·일 관계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미·중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일 양국이 어느 한 편에 서서 적대적 행동에 나서는 건 상호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일 두 나라는 미·중 대립을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지를 놓고 공조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 단독으로 하면 효과가 부족하겠지만 함께 힘을 합쳐 미·중 대립을 제어한다면 한·일뿐 아니라 미·중에게도 큰 이익이 될 것이다.”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재개하며 북핵 문제가 한·일 양국의 핵심 현안으로 부상했다. “북한의 핵 문제는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가 가장 바람직한 해법이지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CVID라는 높은 수준의 목표를 강조하는 동안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온 게 현실이다. CVID는 결코 포기해선 안 되지만 목표를 한 단계 낮춰서 대응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 우선 북한의 핵 개발 동결을 목표로 내걸고 달성될 경우 대북 제재를 일부 해제해 주는 대응 전략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한·일 공조를 통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도 조금 더 시선을 돌릴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북핵 문제와 관련해 해결 가능한 조건을 제시하고 북·미 관계가 개선될 수 있도록 한·일 양국이 공조해야 한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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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패권 경쟁은 국가대항전, 한국 이대론 안 된다
━ 반도체 전문가 양향자 의원 지난 12일 양향자 의원(무소속)은 최근 반도체 업계 판도는 기업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산적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최영재 기자 한국 반도체 산업이 위기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속에 반도체 재고가 쌓이면서 생존 경쟁이 화두로 떠올랐다. 다른 한편에선 반도체 패권 전쟁의 포연(砲煙)이 더욱 짙어졌다. 미국은 새해 벽두부터 중국 견제와 반도체 동맹 강화에 여념이 없다. 대만과 일본도 심기일전해 지원에 나섰다. 한국은 아직도 반도체 산업 지원책을 확정하지 못한 채 국회 논의를 기다린다.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최대 가전쇼 ‘CES2023’을 참관하고 돌아온 양향자 의원(무소속)은 12일 “혁신 제품 경쟁도 결국은 반도체 싸움이고, 반도체 산업을 향한 미국의 자국우선주의가 견고해지는 걸 확인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개발실에서 상무로 재직하다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겨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국민의힘 반도체 특위 위원장 등을 역임한 양 의원은 국회를 대표하는 반도체 전문가로 꼽힌다. 올해 CES는 어땠나. “매년 참관하는데, 과거 어느 때보다 메타버스와 웹3.0 등 혁신 기술을 구현한 제품들이 실용화됐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만큼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제품이 늘어날 것이고,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이 커진 셈이다. 동시에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가 더욱 견고해졌다는 걸 느꼈다. 중국 기업들의 규모는 물론 참관인도 굉장히 줄어든 게 체감됐다. 현장에서 만난 업체들도 한 목소리로 고민을 전했다.” 어떤 고민인가. “최근 반도체 업계 판도는 기업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산적한 상태다. 국가 패권이 걸린 산업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런데 한국 정치권에선 최근 수년간 미국 정치권을 향한 소통 창구가 굉장히 좁아졌다. 한미 의원간 외교라인도 뒷걸음질 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신냉전이라고 불릴 만큼 미·중 갈등이 깊어지고, 반도체 패권을 차지하려는 주요국 정부 정책이 쏟아지는 상황이라 워싱턴과 접점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어떻게 지원해야 하나. “미국이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 기업에 손을 내미는 것은 미래 패권의 핵심 품목인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더 구체적으론 생산 기지를 미국 안에 두고 싶어 한다. 각종 인센티브를 주며 미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 미국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한국 기업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도 함께 넘어갈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어느 순간 토사구팽 당하는 점을 가장 두려워 한다. 미국에 투자하더라도 우리가 현지 생산기지를 주도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정부 차원에서는 물론 의회에서도 계속 협상할 필요가 있다. 한 목소리를 내야하는 행정부와는 달리 미 의회에서는 여야, 지역구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한국·미국·일본·대만의 ‘칩4 동맹’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하다. “반도체 산업 육성을 일종의 국가 대항전처럼 여기며, 일본·대만 등 경쟁국들은 경쟁적으로 혜택을 뿌리고 있다. 대만에선 연구개발비의 25%를 세액공제하는 방안을 마련해 즉시 적용했다.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 속에 지난해 구마모토에 TSMC의 공장을 유치한 일본은 최근 소니와 도요타, 키옥시아 등 대기업 8곳이 힘을 합쳐 반도체 기업 라피두스를 설립하는 등 숨가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도 이대론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공감을 얻었다. 경쟁국들에 조금 뒤처진 감이 있지만, 나아질 것이다.” 한국의 반도체 지원은 여전히 더디다. “윤석열 대통령의 질책으로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한도가 상향(최대 25%) 된 개편안을 마련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대기업은 15%로 묶었다. 대기업이라고 차등 적용하면 부작용이 만만찮다. 전 세계가 반도체 공장을 자국 영토 안에 확보하려는 경쟁을 벌이는 상황인데 오히려 투자를 줄이라고 하는 셈이다. 반도체 산업은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분야다. 막대한 설비투자 없이는 시장 진입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해외에선 대기업과 여기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을 연합체로 여기기 때문에 이런 구분이 드물다. 한배를 탔는데 덩치가 큰 선원을 차별하는 게 항해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대기업 특혜란 지적이 나올 수 있는데. “또다시 대기업 특혜 프레임으로 갈라치기에 나서는 건 나라의 미래를 파묻는 매국(埋國) 행위다. 오죽하면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대기업의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율을 높이는 게 중소기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겠나. 지난해 1월 통과됐던 반도체 특별법(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 원안은 산업계와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모두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도체 산업 지원 경쟁에 뒤진 상황에서 절박하게 준비한 게 반도체산업 지원 특별법(K-칩스법)이다. 이조차 국회에서 통과가 안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경쟁국과 비교할 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보완 입법이 필요하다. 예컨대 반도체 특화단지 인허가 신속처리기간을 준수하도록 강행 규정을 추가하는 방안이나 반도체 특화단지 설치 지역에 특별조정교부금을 우선 교부하는 방안 등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황건강 기자 hwang.kun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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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소장 "이제는 포괄안보 시대, 시장·정보 선점이 핵심" [新애치슨 시대]
■ 「 1950년 1월 미국은 소련과 중국의 확장을 막기 위한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그리고 5개월 뒤 애치슨 라인 밖에 위치하게 된 한반도에선 전쟁이 발발했다. 73년이 지난 2023년 한국은 다시 미ㆍ중의 공급망 전쟁으로 그려질 ‘신(新)애치슨 라인’의 최전선에 서 있다. 중앙일보는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소장 박수진 교수)와 함께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 한국 외교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아르스프락시아’는 아시아연구소의 의뢰로 2020년 1월~2022년 9월 30일까지 한ㆍ미ㆍ일ㆍ중 4개국 824개 언론사의 기사 550만여건을 빅데이터 분석했고, ‘한국리서치’는 지난달 6~9일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웹설문 조사를 진행했다.(95% 신뢰수준ㆍ표집오차 ±3.1%ㆍ비례할당 후 무작위 추출) 」 박수진(사진)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장은 “앞으로는 시장과 정보의 선점 경쟁을 통해 누가 먼저 새로운 국제질서에 맞는 사회시스템을 구축하느냐가 안보의 핵심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ㆍ중 경쟁으로 새롭게 정립된 글로벌 질서에서 급속한 경제발전과 정보공유 경험을 축적한 아시아 국가의 중요성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수진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장. 박 소장은 지난 5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로운 국제질서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지역과 국가에 대한 실증적이고 경험적 자료를 바탕으로 사전예방적 판단과 정책을 결정하는 일”이라며 “특히 젊은 세대가 아시아 주변국을 서로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교육 및 연구, 문화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포괄안보’ 전략의 필요성이 확인됐다. “역사적으로 전쟁은 상대의 자원을 뺏기 위한 경제전의 성격이 강했다. 즉 안보의 본래적 의미는 경제인데, 20세기 냉전을 거치면서 군사적 안보가 부각됐던 것이 오히려 착시에 가깝다. 냉전 속에서 경제발전을 이룬 한국은 전통적 군사안보에서는 우위를 점한 측면이 있지만, 시장 선점과 정보의 빠른 획득을 위한 지식ㆍ기술ㆍ사회시스템 구축 측면에선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 새로운 글로벌 지형에서 한국의 강점은 뭐라고 보는가. “한국은 급속한 경제ㆍ정치적 발전을 직접 경험했다. 단기간의 압축성장을 통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성공과 실패를 했고, 또 갈등을 겪고 이를 해결하는 경험을 체화했다. 이 자체가 강점이다. 현재의 한류(韓流)도 이러한 경험이 응축적으로 발현된 한 사례로 봐야 한다. 우리의 경험을 세계가 공유한다는 점에서 특히 문화산업은 외교에서도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아시아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지만, 정작 중ㆍ일 등에 대한 호감도가 낮다. “오랜 기간 국경을 접하고 살아온 국가 사이엔 필연적으로 아픈 역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유럽연합(EU) 국가들도 지금까지도 역사ㆍ영토ㆍ민족문제 등 다양한 갈등을 겪고 있다. 극단적 갈등과 혐오는 막아야 한다. 다만 이웃 국가간 견제 심리가 존재하는 것은 선의의 경쟁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 측면도 있다. 단 이를 위해 특히 젊은 세대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질 높은 지원이 필요하다.” 박수진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장. 아시아연구소의 역점 사업은. “한국은 아시아에 대한 축적된 연구 성과나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는 여타 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시아 지역 전문가들과 지식을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해 지식을 공유하고 서로를 배울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제평화공유대학, 해외지역교육원 등 새로운 형태의 교육 및 정보공유플랫폼을 추진하고 있다.” 기획취재팀=강태화ㆍ정영교ㆍ정진우ㆍ박현주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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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7분이면 日타격…유사시엔 따질 시간없다, 지금부터 챙겨야
일본이 북한·중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을 확보하면서 한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게다가 일본은 국내총생산(GDP)의 '1%'에 묶여 있던 방위비를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 패전국 일본의 군사력 증강이 달가울 리 없지만, 날로 과격해지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앞에 두고 한·미·일 안보 협력 강화는 현실이 됐다. 동맹인 미국이 환영 일색의 지지를 밝힌 것도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임시 각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날 적 미사일 기지 등을 공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 보유를 포함한 내용의 안보 문서 개정을 결정했다. 연합뉴스 문제는 한국의 사전 동의 없이 일본이 북한을 겨냥해 한반도에 미사일을 쏠 수 있다는 우려다. 주일 국방무관을 지낸 권태환 한국국방외교협회장(예비역 육군 준장)은 22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긴 어렵다"며 "사전 동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한·일 양국이 한반도 유사시 군사작전에 대한 역할 분담 논의를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왜 '반격 능력'을 가지려 하나. 우선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화됐다. 북한은 50~70발의 핵탄두와 이를 일본에 쏠 수 있는 600여발의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이동식 발사대(TEL)뿐 아니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수단도 다양해져 미국의 확장억제만 의존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또 다른 위협 요소는 중국과 러시아의 연계 가능성 증대다. 일본은 핵전쟁 개념 변화에 주목한다. 그간 핵은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처음으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핵 선제공격' 가능성을 열어뒀다. 미·중 전략경쟁 격화로 역내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커졌다. 일본 입장에선 굉장히 위협이 커진 상황이다. 또 일본이 역내에서 군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미국의 주문도 있었다. 권태환 한국국방외교협회장이 22일 서울 중구 태평로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한국의 동의 없이 북한의 핵·미사일 시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우려는 예전부터 있었다. 실제 2015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안보법제가 논란이 됐을 당시 한민구 국방장관과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상간 회담에서 관련 논의가 오갔다. 한 장관은 "헌법상 북한도 우리 영토"라며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가 북한을 공격할 때는 반드시 한국의 사전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문제 제기했다. 이때 나카타니 방위상은 "한국의 시정권(施政權, 입법·사법·행정 등 3권의 행사 권한)은 휴전선 이남 지역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한·미·일 안보 협력 차원에서 유사시 그 문제는 당연히 사전 논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완곡히 말했다. 결국 "양국간 안보 현안에 관해 한·일 및 한·미·일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했다"는 수준에서 당시 한·일 양국의 공식 입장으로 정리됐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어떤가.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7분 30초 만에 일본 전역에 닿는데, 사전 동의가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이다. 일본이나 미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는 상황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런 공감대를 바탕으로 사전에 대처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 한·미·일 간 긴밀한 정보공유는 물론 유사시 상호 역할 분담과 대처를 위한 훈련도 진행해야 한다. 그동안 한·일 간에는 유사시 군사작전에 대한 역할 분담 논의가 없었기 때문에 관련 논의가 시급하다.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 보좌관은 지난 16일 성명을 통해 일본의 방위문서 개정에 대해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강화하고 방어하기 위한 대담하고 역사적인 조치"라고 평가했다. EPA=연합뉴스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일본의 결정에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을 강화하고 방어하기 위한 대담하고 역사적인 조치"라며 반겼다. 미국은 옛 소련과 맺은 '중거리 핵탄도미사일 제한 협정(INF)' 때문에 역내에 배치한 중거리 미사일(사거리 500~5500㎞)이 전무하다. 반면 중국은 1900발의 탄도미사일과 300발의 순항미사일을 배치했다. 한반도와 대만해협 유사시 중국이 이길 것이란 우려가 크다. 일본이 최대 500발의 미국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사거리 1250㎞)을 구입하고 독자적인 장사정 미사일 개발·배치에 향후 5년간 5조 엔(약 48조원)을 쏟기로 한 배경이다. 일본은 현재 GDP의 1% 수준인 방위비도 5년 뒤 2%까지 크게 늘리기로 했다. 방위비 증액은 이번 일본 정부의 3대 안보문서(국가안전보장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비정비계획) 개정에서 핵심이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요구와도 맞닿아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시절부터 미국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비롯한 동맹국들이 GDP의 2% 정도를 국방비로 편성해 안보 비용을 공동 분담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방위비 증액을 통한 구체적인 전력 증강 방향은? 적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은 물론 미사일 위협을 조기에 탐지하기 위한 정찰위성과 경계 감시 체계를 확충할 것이다. 우주전, 전자전 등 미래전을 대비한 예산도 키운다. 특히 사이버 방어부대의 경우 기존 870명에서 1만명 규모로 늘릴 계획이다. 일본은 방위산업 활성화도 명시했다. 방위산업을 국가발전 원동력의 하나로 설정할 것으로 본다. 또 경항공모함과 같은 전 세계 전력 투사 능력 확대에도 많은 방위비를 투입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반격 능력' 확보와 관련해 오는 2027년까지 미국에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500발을 구매할 계획이다. 사진은 미 해군 알레이버크급 이지스 구축함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 AFP=연합뉴스 한국의 국방비 증대가 일본을 자극했다는 분석도 나오는데…. 처음 일본에 갔던 1992년 당시만 해도 한국의 국방예산 규모는 일본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한국 국방비가 일본 방위비를 넘어섰다. 평소 같으면 일본 국내에서 반발이 심할 법한데 다른 목소리도 나온다. 한반도 안보전문가인 미치시다 나루시게(道下德成)) 일본 정책연구대학원 교수는 "북·중·러 연대와 한반도 유사시 대만 문제 등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한국군이 미군의 전략적 분산을 막아줘야 일본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윤석열 정부는 한·일 간 군사협력을 심화할 것으로 보나. 현 정부는 비정상적으로 가동되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ㆍ지소미아)을 정상화하고 있다. 양국 간 정보공유는 군사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지소미아 개념이 필요하다. 한·미·일이 분리된 형태가 아니라 하나가 돼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야 한다. 북한의 다양한 위협을 아주 짧은 시간 내 대처하기 위해선 정보공유 대상을 북한의 핵·미사일로 한정할 게 아니라 확대할 필요가 있다. 한·미·일이 북한 핵미사일에 대한 미사일 방어 체계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꾸릴 지도 논의해야 한다. 관련기사 北, 日에 "실제 행동 보여주겠다"…'영토 완정'까지 꺼냈다 日 안보문서 개정에 美 "자위권 강화 지지"...中은 "결연 반대" 日 이젠 '적 기지 공격' 가능해진다…안보 3문서 개정안 통과 日 "선제공격은 안 한다"지만...'한반도 유사시' 미사일도 쏜다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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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유사시 한·미·일 군사작전 역할 분담 논의 시급”
━ 권태환 한국국방외교협회장 권태환 한국국방외교협회장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정부의 ‘반격 능력’ 보유 선언이 한반도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일본이 북한과 중국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을 확보하면서 한국은 딜레마에 빠졌다. 더 나아가 일본은 국내총생산(GDP)의 ‘1%’에 묶여 있던 방위비도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 패전국 일본의 군사력 증강이 달가울 리 없지만 날로 과격해지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앞에 두고 한·미·일 안보 협력 강화는 현실이 됐다. 미국이 환영 일색의 지지를 밝힌 것도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문제는 한국의 사전 동의 없이 일본이 북한을 겨냥해 한반도에 미사일을 쏠 수 있다는 우려다. 이에 대해 주일 국방무관을 지낸 권태환 한국국방외교협회장(예비역 육군 준장)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긴 어렵다”며 “사전 동의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한·일 양국이 지금이라도 한반도 유사시 군사작전에 대한 역할 분담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왜 반격 능력을 갖추려 하나. “무엇보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화됐다. 북한은 50~70발의 핵탄두와 이를 일본에 쏠 수 있는 600여 발의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이동식 발사대(TEL)뿐 아니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수단도 다양해져 미국의 확장억제만 믿고 있을 여건이 아니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거다. 또 다른 위협 요소는 중국과 러시아의 연계 가능성 증대다. 일본은 핵전쟁 개념 변화에 주목한다. 그동안 핵은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처음으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핵 선제공격’ 가능성을 열어뒀다. 미·중 전략 경쟁 격화로 역내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커졌다. 일본 입장에선 굉장히 위협이 커진 상황이다.” 한국의 동의 없이 북한의 핵·미사일 시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런 우려는 예전부터 있었다. 실제로 2015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안보법제가 논란이 됐을 때 양국 국방장관 회담에서도 관련 논의가 오갔다. 당시 한국은 ‘헌법상 북한도 우리 영토인 만큼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가 북한을 공격할 때는 반드시 한국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일본은 ‘한국의 시정권(입법·사법·행정 등 3권의 행사 권한)은 휴전선 이남 지역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한·미·일 안보 협력 차원에서 유사시 당연히 사전 논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완곡히 답했다. 결국 양국 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한다는 수준에서 공식 입장이 정리됐다.”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어떤가. “북한이 미사일을 쏘면 7분30초 만에 일본 전역에 닿는데 사전 동의가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일본이나 미국이 북한의 공격을 받는 상황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에 이런 공감대를 바탕으로 사전 대처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 한·미·일의 긴밀한 정보 공유는 물론 유사시 상호 역할 분담과 대처를 위한 훈련도 진행해야 한다. 그동안 한·일 간에는 유사시 군사작전에 대한 역할 분담 논의가 없었던 만큼 관련 논의가 시급하다.” 제이크 설리번 미 국가안보보좌관은 ‘대담하고 역사적인 조치’라며 반겼다. “미국은 옛 소련과 맺은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때문에 역내 배치한 중거리 미사일(사거리 500~5500㎞)이 전무하다. 반면 중국은 탄도미사일 1900발과 순항미사일 300발을 배치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와 대만해협 유사시 중국이 이길 거란 우려가 크다. 일본이 최대 500발의 미국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구매와 독자적인 장사정 미사일 개발·배치에 향후 5년간 5조 엔(약 48조원)을 쏟기로 한 배경이다.” 일본은 방위비도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 “방위비 증액은 3대 안보 문서 개정의 핵심 중 하나다. 한편으론 미국의 요구와도 맞닿아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미국은 동맹국들이 GDP의 2% 정도를 국방비로 편성해 안보 비용을 공동 분담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일본의 구체적인 전력 증강 방향은. “적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은 물론 미사일 위협을 조기에 탐지하기 위한 정찰위성과 경계 감시 체계를 확충할 것이다. 우주전·전자전 등 미래전에 대비한 예산도 늘린다. 방위산업 활성화도 명시했다. 경항공모함 등 전 세계 전력 투사 능력 확대에도 적잖은 방위비를 투입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국방비 증대가 일본을 자극했다는 분석도 나오는데. “1990년대 초만 해도 한국의 국방예산은 일본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일본 방위비 규모를 넘어섰다. 평소 같으면 일본 내에서 반발이 심할 법한데 다른 목소리도 나온다. 한반도 안보전문가인 미치시다 나루시게 일본 정책연구대학원 교수도 ‘북·중·러 연대와 대만 문제 등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면 한국군이 미군의 전략적 분산을 막아주는 게 일본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윤석열 정부는 한·일 군사 협력을 심화할 것으로 보나. “현 정부는 비정상적으로 가동되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정상화하고 있다. 양국 간 정보 공유는 군사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지소미아 개념이 필요하다. 한·미·일이 분리된 형태가 아니라 하나가 되는 내용이 포함돼야 한다. 북한의 다양한 위협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대처하기 위해선 정보 공유 대상을 북한의 핵·미사일로 한정할 게 아니라 보다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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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전 총리 "한·일 관계 개선, 한·중·일 함께 가기 위한 전제"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인도ㆍ태평양 전략에 대한 장기적 대응 차원에서도 한ㆍ일 관계 개선을 조속하게 완료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14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서울국제포럼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태화 기자 서울국제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 전 총리는 14일 서울 서대문 서울국제포럼 사무실에서 진행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ㆍ일 관계의 회복을 발판으로 중국과도 관계를 개선해 궁극적으로 한ㆍ중ㆍ일이 새로운 국제 정세에서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을 만드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 총리는 “강제징용 문제 등으로 한ㆍ일이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지만 일본 역시 양국 관계 개선을 한국 못지않게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며 “특히 윤석열 정부와 기시다 내각이 모두 안정을 찾아가면서 본격적인 관계 개선 논의가 이뤄질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진단했다. 지난 9일 일본에서 열린 '도쿄-서울포럼'. 이번 포럼은 서울국제포럼과 나카소네 세계평화연구소가 ‘한·일 신시대를 향해’라는 주제로 함께 개최했다. 서울국제포럼 그는 지난 9일 일본에서 개최한 ‘도쿄ㆍ서울 포럼’에서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일본 총리와 만나 양국 관계 개선의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 아소 다로 전 총리는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자민당 간사장이 이끄는 모테기파(의원 56명)과 더불어 당내 또 다른 다수파인 아소파(53명)를 이끌고 있는 당내 실력자다. 아소 다로 전 총리가 포럼에서 한ㆍ일 관계 개선에 대한 어떤 언급을 했나. “일본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양국이 맺은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가 사실상 번복한 것 등을 이유로 한국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 한국이 또다시 국가간 합의를 뒤집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아소 전 총리는 ‘당내 최대 파벌끼리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체제를 확고히 하기로 합의를 했다’는 말을 강조했다. 최소 몇 년은 기시다 체제로 간다는 뜻이다. 아소 전 총리는 그러면서 ‘일본 정치 쪽은 걱정하지 말고 이제 한국의 대통령실이 여야를 잘 관리하는 상황만 되면 일은 신속히 잘 풀리게 돼 있다’고 강조했다.” 아소 전 총리는 과거 한국에 대한 강경 발언으로 논란이 됐던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아소 전 총리가 한국이 기획한 행사에 와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말해 준 것이 의미가 있다. 일본 여당의 실력자가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보증을 자처한 셈이다.” 아소 전 총리는 지난달 2일 방한해 윤석열 대통령을 접견한 자리에서도 “양국 사이에 대화와 협력이 지속해야 하고, 양국 관계의 조속한 복원과 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한ㆍ일 관계를 한ㆍ미ㆍ일 공조 강화를 위한 대전제로 접근하는 시각이 많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한ㆍ일 관계 개선은 장기적으로 보면 미국 중심의 인도ㆍ태평양 전략에 대응하기 위한 능동적인 전제이기도 하다. 내 소신은 한ㆍ중ㆍ일이 같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핵심 내용과도 맥락이 통한다. 인도ㆍ태평양을 얘기하면서 중국만 제외하는 것 자체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은 역사적으로 접점을 찾기 어려운 일본과 중국 사이는 물론 미국 사이에서도 할 수 있는 역할이 많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14일 서울 서대문에 있는 서울국제포럼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강태화 기자 윤석열 정부의 대일 전략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는가. “한ㆍ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본다. 최근 외교부 장관이 진행했던 ‘현인회의’뿐만 아니라 한덕수 총리도 ‘도쿄ㆍ서울 포럼’ 바로 전날인 지난 8일 전직 총리 10여명을 초청해 별도로 한ㆍ일 관계 개선을 위한 방안을 청취했다. 이제는 논의를 공식화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정치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고, 피해자들의 뒤에 있는 소위 ‘좌파’ 세력이 협상을 주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일본 역시도 ‘혐한’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적지 않다. “한ㆍ일 관계 개선에 큰 역할을 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가 매번 나에게 강조했던 말이 있다.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일본 측이 한국보다 2배로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 일본 역시 조속한 한ㆍ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아소 다로 전 총리의 말처럼 기시다 내각이 안정을 찾을 경우 선거 때와는 다른 양상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폐수 방류 문제 등은 또 다른 갈등 요인일 수도 있지만, 역으로 양국이 현명한 관계 개선 논의를 진행하기 위한 긍정적 계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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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而立 한중수교 30주년] “중한 관계 앞으로의 30년 위해 상호 존중 견지할 것”
한중수교 30주년 인터뷰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24일로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30주년을 맞았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 인터뷰를 위해 지난 18일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을 찾았을 때 싱 대사는 “30년 전 중앙일보 신문을 마침내 찾았다”며 기쁜 모습이었다. 당시 중국의 젊은 외교관으로 수교 협상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는 그의 손에 들린 30년 전 중앙일보 지면 1면에는 ‘한중 역사적 수교’라는 큼지막한 제목이 새겨 있었다. 감회가 새롭다는 싱 대사는 당시 중국은 베이징의 조어대(釣魚臺) 국빈관 앞에 한중 수교를 기념해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를 특별히 심었다고 전했다. 싱 대사는 “중한 양국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함께 이 신문을 다시 펼쳐 든다면, 수교 당시 냉전의 굳은 얼음을 깨고 수십 년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손을 맞잡았던 그 험난한 여정을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 속에서 수교의 초심을 되새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북돋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서면 질문 내용을 포함한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한중 미래 발전 방향으로 서로 같은 것을 찾아 계속 확대해나가는 ‘구동존이(求同存異)’ 방안을 제시했다. 김상선 기자 수교 당시 싱 대사가 외교 현장 일선에서 뛴 것으로 안다. 협상 당시 가장 큰 난제는 무엇이었나. 또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수교 교섭할 때 저는 통역관이자 비서관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중한 수교는 지역 구도를 다시 쓰는 건 물론 한반도 및 세계의 평화와 관련된 ‘큰 사건(大事)’이었다. 논의해 풀어야 할 문제가 아주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대만 문제와 한반도 문제 등 서로의 핵심 관심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가장 큰 난제였다. 그 결정적 순간에 양국 지도자의 정치적 용기와 지혜로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다. 양국이 평화공존 원칙과 하나의 중국 원칙, 그리고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에 합의한 것이다. 이로써 수교가 이뤄지고 이는 지난 30년간 양국 관계 발전의 정치적 기반 역할을 했다고 본다.” 한국 일각에선 경제 협력과 인적 교류에선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외교안보 측면은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절반의 성공’이란 말이 나온다. 수교 30년에 대한 평가는? “중한 양국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고 평가하고 싶다. 양국의 정치적 관계는 ‘3단계 도약’을 실현해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에 이르렀다. 교역액은 수교 초기 50억 달러에서 지난해 3600억 달러로 증가했고, 중국은 18년 연속 한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인적 교류도 코로나 19 사태 이전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중한 양국은 이미 당신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당신이 있는 이익공동체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일각에선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협력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양국은 30년 전만 해도 서로 단절되고 적대시했던 상태다. 한데 지금은 각 영역에서 긴밀한 소통을 유지하고 있다. 양국은 이미 2+2 외교안보 대화 체제를 구축했고, 양군 간 군사 핫라인도 개설했다. 중국은 ‘다음 30년’을 향해 한국과 함께 독립과 자주, 상호 존중, 호혜와 상생을 견지하면서 이견은 미뤄두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협력을 계속해 나갈 예정이다.” 한중 수교 30년과 관련해 공자의 ‘삼십이립(三十而立)’이란 말이 많이 회자된다. 지난해 9월 한국을 방문한 왕이(王毅)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이 말을 사용해 화제가 됐다. 한중 관계의 ‘삼십이립’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나. “사람은 서른 살이 되면 더 성숙하고 침착하게 처신하며 더 큰 책임을 보여준다. 중한 양국도 지난 30년의 발전 경험을 거울로 삼아 소통을 더욱 강화하고, 상호 신뢰를 더욱 공고히 하며, 협력을 심화하길 바란다. 또 보다 성숙한 자세로 다음 30년의 여정을 시작해 중한 관계라는 큰 나무의 뿌리가 더 깊어지고 가지는 더 무성해지며 열매는 더 많이 맺게 되기를 바란다.” 지난 5월 한국에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중국이 한국 새 정부에 거는 기대와 바람은 무엇인가? “중한은 이사할 수 없는 가까운 이웃이며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다. 중한 수교 30년간의 발전 경험은 양국 관계를 공고히 발전시키는 게 대세이자 민심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한국에서 어느 당, 어느 지도자가 집권하든 관계없이 이들 모두 중국 및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할 것이라고 믿는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윤석열 대통령 집권 전후로 윤 대통령과 여러 차례 전화 통화를 갖고 서한을 주고받았다. 이 같은 소통을 통해 양국 정상은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양국 관계를 심화 발전시키기로 하는 중요한 합의를 이뤘다. 우리는 한국이 양국의 거대한 공통 이익과 더 넓은 미래의 협력을 내다보면서 양국 간 이미 달성한 공통 인식과 양해 사항을 견지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또 중국과 함께 중한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더욱 건전하고 안정적이며 올바른 방향으로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기를 기대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사이엔 아직 대면 접촉이 없다. 언제 두 분의 만남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하나? “정상외교는 중한 관계에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이를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선도적 역할을 한다. 지난 5월 왕치산(王岐山) 중국 국가부주석이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시진핑 주석의 특별 대표로 방한한 바 있다. 또 얼마 전엔 중한 외교장관 회담에서 양측은 양국 정상의 상호 방문과 관련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코로나 상황이 계속 호전되고 중한 간의 각급 별 소통과 왕래가 점차 회복됨에 따라 양국 정상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시기도 무르익어갈 것으로 믿는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사업 환경이 크게 어려워졌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적지 않은 한국 기업이 중국 시장에서의 철수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도 돌고 있는데, 마침내 한국 기업이 중국에서 사업을 접어야 하는 때가 오기라도 한 것인가? “올 상반기 중국 경제 성장률은 2.5%로 안정적인 반등세를 보이는 등 강한 끈기와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안정적 성장을 위한 정책 효과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 경제 성장에 계속 기여할 것이다. 중국은 현재 쌍순환 발전 구도 구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한국기업이 중국에 와서 투자하고 사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더 큰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대중 투자 협력에 뜻이 있는 분들은 좀 더 멀리 바라보시길 바란다. 코로나 사태가 안정됨에 따라 중국 내 실력 있는 한국 기업들의 경영 상황이 날로 발전할 것으로 믿는다. 중국은 이를 위해 더욱 좋은 조건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중 경제가 최근엔 갈수록 보완성보다는 경쟁성이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중국 경제가 점차 발전하면서 조방형 성장에서 질 높은 성장으로 전환되고 있고, 중국 내에서도 산업의 업그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협력 모델만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발전 수요에 적응하기 어렵다. 게다가 중국은 최근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과학기술 산업이 왕성하게 발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한 간 경쟁이 촉발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중국 내 소비수요 잠재력이 여전히 크다는 점을 한국 기업은 주목해야 한다. 또 중국의 질적 경제 성장이익이 이제 막 방출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중국 경제는 새로운 대내외적 ‘쌍순환’ 정책 아래 글로벌 가치사슬의 공급 중심에서 공급과 수요의 ‘쌍중심’으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이는 한국 기업의 중국 시장 참여에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한국 기업들이 중한 양국의 ‘기업 간 연합’을 통해 중국의 ‘쌍순환’ 발전 구도와 더 높은 수준의 개방형 경제 신체제 구축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럴 경우 중국의 발전 이익을 더 많이 공유하게 될 것이다.” 유상철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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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而立 한중수교 30주년] “대사 부임 30개월 동안 한국 행사 600여 차례 참석”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지난 18일 중국대사관에서 가진 인터뷰 도중 30년전 한중 수교를 보도한 1992년 8월 24일자 중앙일보를 꺼내 들어 보이고 있다. 김상선 기자 한중 관계가 직면한 도전으로 최근 미·중 갈등 심화가 거론되고 있다. 미·중이 경쟁하는 가운데 그 사이에 낀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이라고 일컬어지는 ‘칩4(미국, 한국, 대만, 일본)’에 대한 한국의 가입 문제도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된다. “중국은 이미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우선 중국은 미국과 패권을 겨룰 의도가 없다는 점이다. 중국은 그저 중국 자신의 일을잘 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미국은 냉전적 사고를 고수하면서 절대적 패권을 지키기 위해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삼고 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경제와 무역, 그리고 반도체 협력 분야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소집단’ 결성을 통해 중국을 첨단 산업망에서 배제하려 한다. 중국의 제조업을 죽이려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시장경제 규율에 위배되고 전 세계의 산업망과 공급망을 인위적으로 끊는 것이기도 하다. 칩4 가입이 한국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는 한국 측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중국에선 오는 가을 중요한 정치 행사인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다. 20차 당 대회가 중국 발전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중국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는 중국이 전면적인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건설의 새로운 장정을 시작하는 중요한 시점에 열린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대회다. 이 대회는 앞으로 5년 내지 더 긴 기간 중국 국가 산업 발전의 목표와 국정 방침을 과학적으로 계획하게 될 것이다. 이 대회는 또 중국 공산당이 시진핑 주석을 핵심(核心)으로 하는 당 중앙의 주위로 더욱 긴밀하게 단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중국 공산당이 중국 인민을 단결시키고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전면적으로 건설하며,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는 것과 함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뜻하는 중국몽(中國夢) 실현을 위해 계속 분투하는 데 있어 크고도 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싱 대사는 남북한 모두에서 오래 근무한 경험이 있다. 현재 꽉 막혀 있는 북핵 문제 및 남북한 대화와 협력의 물꼬를 트기 위해선 어떤 노력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보나? “중국은 한반도와 산수가 이어져 있는 우호적인 이웃으로, 줄곧 한반도 정세의 발전에 주목해왔다. 중국은 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수호, 한반도 비핵화,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의 방침을 줄곧 견지해왔다. 특히 한반도 정세 완화와 비핵화 추진을 위해 중국은 ‘쌍중단’과 ‘쌍궤병행’ 방안을 제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최근 한반도 정세에 새로운 움직임이 있고, 화약 냄새가 진동해 중국 또한 주목하고 있다. 북핵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냉전의 잔재이며, 그 핵심은 북미 갈등과 남북한 양측의 갈등에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반드시 균형 있는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관련 당사국들은 진정성을 가지고 서로 마주 보며 나아가는 자세로 함께 긴장된 정세를 완화해야 한다. 미국은 실질적인 방안과 행동으로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중국은 남북 양측이 민족적 대의에서 출발해 대화를 통해 화해와 협력을 추진하고 상호 관계 개선에 나서는 노력을 해줄 것을 바란다. 물론 중국도 계속해서 중국의 방식으로 관련국들을 설득하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해나갈 것이다.” 중국은 한국을 중시해 주한 중국대사관에 적지 않은 외교관을 파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대사관의 외교관은 90여 명 정도로, 가족들과 다른 직원들까지 합치면 코로나 이전에는 약 200여명 가까이가 근무하고 또 생활했다. 이러한 규모는 전 세계 중국 공관 중 상위권에 해당한다. 또한 우리 대사관의외교관 중 절반 이상이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이는 중국이 한국과 중한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국민 여러분께서 대사관 업무에 많은 관심과 지지를 보내주시길 바란다.” 싱 대사께선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무척 많은 한국 인사를 만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대체 얼마나 자주, 또 어떤 분들을 만나고 있는가? “저는 주한중국대사관 개관 이후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약 20여년간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각계각층의 인사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났다. 한국은 저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대략 계산해보면, 2020년 1월 말 대사로 부임한 이래 한국의 각 시·도를 다니며 외부 행사에만 600여 차례 정도 참석했다. 그동안 만난 한국 각계 인사들은 솔직히 셀 수 없이 많아 몇 분을 만났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 가운데는 중앙정부의 관리도 있었고 일반 서민, 고령의 노인, 어린아이도 있었다. 제가 한국의 여러분들을 만나며 깨달은 것은 이분들이 중한 관계와 관련해 모두 아름다운 염원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중한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저와 동료들이 끊임없이 노력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끝으로 수교 30년 이후 ‘다음 30년’의 한중 관계를 위해 양국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보나. “맹자 말씀에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近者悅 遠者來)’는 말이 있다. 역사와 실천이 증명하듯이, 양국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 지지하며 함께 성취하는 것은 양국과 양국 국민에게 중요한 이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지역의 평화적 발전과 번영을 위해 안정성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 중국 칭다오에서 왕이 국무위원과 박진 외교부 장관이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중국은 한중 관계의 다음 30년을 위해 ‘5가지 제시’를 잘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5가지 제시’의 내용은 1) 독립과 자주를 견지해 외부 간섭을 배제하고 2) 선린우호를 견지해 서로의 중대 관심사를 배려하며 3) 개방과 상생을 견지해 안정적이고 원활한 산업망과 공급망을 수호하고 4) 평등과 존중을 견지하며 서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아야 하며 5) 다자주의를 견지해 유엔 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한은 이제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에서 있다. 국제 정세가 어떻게 변화하든 수교의 초심을 견지하며 중한 수교 공동성명의 정신을 이어나가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에 따라 공감대와 공통점을 끊임없이 확대하며 중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함께 노력해 나가기를 기원한다.” 유상철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장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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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而立 한중수교 30주년] “한중 경제·무역 투자 지원하고 현지 고객 위한 서비스도 확대”
한중수교 30주년 인터뷰 왕위제 중국건설은행 서울지점 대표 왕위제 중국건설은행 서울지점 대표는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의 우의를 공고히 하는 데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중국건설은행] 왕위제(王玉潔) 중국건설은행 서울지점 대표는 복단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하던 중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졸업 후 중국건설은행에서 일을 시작했고, 한국은 왕 대표에게 첫 해외파견 근무지였다. 왕 대표는 2007년부터 2018년, 마케팅 RM(Relationship Manager)부터 부지점장까지 역임하며 서울지점의 크고 작은 성장을 모두 함께했다. 2018년 8월 도쿄지점으로 근무지를 옮겨 일하던 중 지난 3월 다시 서울지점으로 돌아와 대표직을 맡게 됐다. 중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로 인해 생활의 불편함은 없나. “나의 커리어 중 절반 이상 시간을 서울에서 보냈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을 제외하고 서울이 가장 친숙한 공간이다. 한국에서 수년 동안 생활하면서, 이미 한국 현지 생활과 식습관에 적응했다. 타지에서 가장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음식이다. 음식의 경우, 한국과 중국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특히 한식 하면 김치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인의 하루 세 끼에는 김치가 빠지는 법이 없다. 한국 식기류도 특별하다. 한국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젓가락을 사용하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스테인리스 소재의 젓가락을 많이 사용해 청결하고 친환경적이다. 또한 식칼을 주로 사용하는 중국요리와는 다르게 한국의 주방과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구는 바로 가위다. 한국을 떠나 도쿄로 갈 때는 김치 두 봉지를 따로 가지고 갔고, 가위도 주방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이, 타지의 생활을 열심히 체험하며 다른 경험을 해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또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한국에 근무하면서 특별히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면. “한국에서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변화’라는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직원들의 변화다. 서울지점 설립 당시 지점의 직원은 20여 명에 불과했고, 지점장과 본인 이렇게 2명의 파견 직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모두 한국 현지 직원으로 중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고, 채용시장에서도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현재 중국건설은행 직원 85명 중 과반수 직원이 한·중·영 3개 국어로 소통할 수 있다. 근속 연수가 10년 이상인 직원이 약 40%에 이를 정도로 안정성이 높아졌다.” 한국에서 중국건설은행은 지난 10년간 얼마나 성장했나. “2004년 중국건설은행 정식 설립 초기에 서울지점은 현지 업무가 매우 적었고, 고객의 이해와 신뢰도 얻기 어려웠다. 10여 년 동안 한국시장에 뿌리를 내리고 현지 경영에 힘쓰며 현지 서비스 및 시장에 녹아들기 위해 노력했다. 삼성전자가 중국에 공장을 건설할 때, 서울지점은 중국 내 CCB 지점들과 협력해 각지의 시장 정보와 우대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삼성전자 시안공장의 부지 선정을 도왔다. LG 디스플레이가 광저우에 정착할 때도 중국 시장 개척을 도왔다. 삼성·현대 등 14곳의 한국 내 세계 500대 기업 주요 금융기관이 모두 서울지점의 파트너다. 또한 한국 정부로부터 8년 연속 원-위안화 시장 조성자로 지정됐고 현지 정부, 한국은행,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수차례 표창을 수여받았다. 서울지점은 2014년 중국 금융기관 최초로 명동에 위치한 사옥을 매입했다. 이는 한국 시장과 한·중 양국 간 우호적인 관계 발전에 대한 자신감을 반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국건설은행이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한 부분은. “지난 10년 동안 서울지점의 준법경영의식, 성실경영원칙,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마음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최근 3년간 누적 약 1000억원에 달하는 법인세를 납부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실천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기부로 현지에서 143번째로 1억원 이상 기부 기관에 이름을 올렸다. 코로나19 사태 동안 한중 양국의 지역방역을 지원했다. 또한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친환경 녹색 도시 만들기 정책에 부응해, 3년 연속 나무 기부와 의무식수 캠페인을 개최했고, 녹색 금융 서비스도 확대하고 있다.” 향후 한국에서 업무 발전 계획은. “한중 양국은 지정학적으로 가깝고 인적·물적 자원 교류가 활발하다. 한중수교 30주년을 맞이한 올해, 중국건설은행은 변함없이 양국의 경제·무역 투자를 지원하고, 준법경영을 전제로 현지 고객서비스를 확대할 것이다. 중국계 은행의 가교 역할을 발휘해 590억 달러 규모의 한중 통화스와프 협정을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한국 기업의 비용 절감을 돕고, 녹색금융과 과학기술혁신 분야에서 다양한 한국 기관 및 기업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다. 더 나아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과 중국의 우의를 공고히 하는 데 더욱 공헌할 것이다.” 송덕순 중앙일보M&P 기자〈song.deokso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