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뛰쳐나와 카카오서 한᛫중 무협소설 세계에 알리는 中 유학생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삼성 뛰쳐나와 카카오서 한᛫중 무협소설 세계에 알리는 中 유학생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중국 충칭(重慶) 출신으로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서 우시아월드 팀 리더를 맡고 있는 선징(沈靖·심정)이 지난달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이른바 '신의 직장' 삼성전자를 박차고 나와 지금은 전 세계에 한᛫중 무협소설을 알리고 있는 이가 있다. 이 특이한 이력의 주인공은 중국 유학생 출신 선징(沈靖᛫심정) 카카오 엔터테인먼트 우시아월드 팀 리더다. 2006년 베이징사범대 교환학생 1기로 한국에 온 선징은 연세대 석사를 거쳐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4년 반 만에 창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곧 사드(THAAD) 사태와 중국 정부의 규제 강화 등 예기치 못한 풍파를 겪었고, 여러 차례 이직 끝에 2019년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 자리 잡았다. 멘사 회원으로 활동할 만큼 비상한 머리와 과감한 도전 정신을 가진 선징을 지난 5월 직접 만나봤다. 선징은 인터뷰에서 한᛫중 한쪽에 속하기보단 한국을 기반으로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게 자기 가치를 최대화할 수 있는 길이라고 당차게 밝혔다. 이날 영미권 무협소설 마니아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유일무이한 플랫폼으로 거듭난 '우시아월드(WuxiaWorld)'의 성장 비하인드와 웹툰᛫웹소설 등 콘텐트 현지화 전문가로서의 인사이트는 물론 한᛫중 관계에 대한 솔직한 견해와 시야를 넓히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조언도 들을 수 있었다.      북미를 기반으로 2014년 설립된 아시아 무협 판타지 웹소설 플랫폼 '우시아월드'는 2021년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됐다. 사진 우시아월드 홈페이지 캡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선징이고 중국 충칭(重慶) 사람이다. 현재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서 우시아월드 팀 리더를 맡고 있다. 2006년 중국 베이징사범대학 재학 시절 1년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처음 왔고, 졸업을 위해 중국에 잠시 돌아갔다가 2008년에 연세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한국에서 산 건 햇수로 16년 됐다.     한국에 처음 오게 된 계기는? 재학 당시 베이징사범대에는 한국 유학생이 약 1500명 정도 있었다. 캠퍼스에서 한국 친구들과 언어 교환 등 종종 교류했고,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받았다. 그러던 중 2005년 말 베이징사범대와 서울시립대가 자매결연을 통해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내가 운 좋게도 1기 교환학생으로 뽑혔다.     한국에 오기 전 한국어를 배우거나 한국에 관심이 있었는지? 사실 중국에서 특별히 한국어를 배운 적은 없다. 교환학생 시절이나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는 오히려 영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어학당도 따로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순전히 직장에서 '생존' 한국어를 배웠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중국에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해서 나도 한국 TV᛫드라마᛫음악 등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기회가 생기기 전까지 한국에 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느낀 점은? 대학 때 전공이 디지털 미디어라 한국에 와서는 시각 디자인을 공부했다. 한번은 서울시립대 기말 전시회를 갔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1학년 작품은 한국이나 중국 학생들 실력이 비슷했지만, 4학년 학생들의 전시작은 거의 예술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전문학교 학생들도 아닌데 작품의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상당히 놀랐고, 한국의 교육 수준에도 감탄했다. 이런 경험은 내가 나중에 연세대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22년 여름, 멘사 코리아 행사에 외국인 멤버로서 참석한 선징. 사진 본인 제공   한국에서 일한 경력이 많은데. 석사과정이 끝날 때쯤, 떨어지면 중국에 돌아갈 각오로 삼성전자 딱 한 곳만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채용이 됐다. 4년 넘게 삼성에서 일하다 창업 열풍이 불던 2015년에 회사를 나왔다. 이직 후 외부 투자를 받아 '사내 창업' 식으로 한국 여행 앱(APP)을 개발했다. 그런데 2016년 사드 사태가 터지면서 결국 서비스를 접었다. 그 후 한국 문화사업에 투자하는 중국 회사에서 잠깐 일했는데, 2017년부터 과학기술 분야 이외 대외 투자에 대한 중국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또다시 회사를 옮겼다. 몇 번의 이직 끝에 2019년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하게 됐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삼성을 나와 창업에 뛰어든 특별한 계기가 있나? 물론 당시 '창업 붐'의 영향도 받았지만, 인생은 고정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컸다. 한 회사에서 50~60대까지 거의 정해진 진로대로 사는 것보다 뭔가 새로운 도전이 하고 싶었다. 나는 그때 안정을 추구하기보단 세상을 더 깊이 경험하고 싶었고, 이미 고향을 떠나 한국에 와서 다양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한᛫중 사이에서 나름 장점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함께 창업했던 세 친구 모두 우리가 한국이나 중국 한쪽에만 소속되면 가치가 최소화되고, 한국을 기반으로 국제화했을 때 가장 가치가 커진다고 판단했다. 한국에는 최대한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려는 경향이 좀 있는데, 도전할 마음이 있다면 한국은 충분히 기회가 많은 나라다. 특히 한국 기업은 국내 시장의 한계를 이미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해외에 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해외 사업의 기회가 중국보다 더 많은 것 같다.     2019년 카카오 엔터테인먼트 입사 초기 마카오 마조묘(馬祖廟)를 방문해 가족과 사업을 위해 소원을 빌었다는 선징. 사진 본인 제공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해왔는지? 2019년 입사 당시 회사는 아직 '카카오 페이지'였는데, 웹툰᛫웹소설 등 한국 콘텐트의 일본 수출을 넘어 글로벌화를 시도하던 참이었다. 카카오는 중국 텐센트(騰訊)와 합작해 '포도만화(PODO漫畫)'라는 플랫폼을 만들었고, 내 역할은 카카오 페이지 내 한국 콘텐트를 중국 시장에 맞게 현지화하는 일이었다. 중국은 광고에 의존한 무료 웹툰 플랫폼이 상당히 많은데, '포도만화'는 고품질 현지화가 요구되는 유료 서비스라 비즈니스적으로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올해 초 나는 '우시아월드' 팀에 합류했고, 지금은 한국과 중국의 남성향 웹소설, 특히 판타지와 무협소설을 영미권 나라에 맞게 현지화하고 있다.     '우시아월드'는 어떤 플랫폼인가 '우시아월드'는 북미를 기반으로 2014년 설립된 아시아 무협 판타지 웹소설 플랫폼이다. 2021년 카카오엔터에 인수됐다. 외교관이던 창립자가 유명한 중국 무협소설 '반룡(盤龍᛫Coiling Dragon)'을 직접 번역해 올리다 사정상 연재를 멈추자, 독자들이 자발적인 스폰서십을 지원하기 시작한 게 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회사 구성원 대부분이 유저 출신이자 무협 마니아다. 유저들이 모여 만든 회사라 아주 필수적인 부서나 업무 프로세스만 있고 불필요한 광고나 마케팅이 없는 게 특징이다.     중국과 한국 무협 소설 중 어떤 게 더 인기 있나?   영미권 독자들은 한᛫중 구분 없이 다 좋아하는 것 같다. 인기 웹소설은 웹툰으로 제작되기도 한다. 사실 요즘은 무술이나 협객이 등장하는 전통 무협은 많지 않고, 판타지 무협(선협·仙俠)소설이 인기다. 한국 무협은 현실에 가까운 고대 또는 현대 사회가 배경인 경우가 많고, 중국은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은 편이다. 전 세계 공통으로 인기가 많은 건 평범한 사람이 일련의 수련이나 경험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성장물이나 일반인이 갑자기 초능력을 갖게 되는 판타지물이다. 전통무협의 대가 진융(金庸᛫김용)의 시대를 시작으로 무협소설은 계속해서 진화해왔다. 최근엔 독자가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주제나 줄거리가 대세다. 무협소설도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되고 또 다양해지고 있다.    선징은 이날 인터뷰에서 종종 중국어 성우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은 녹음실에서 작업 중인 선징. 사진 본인 제공   웹툰과 웹소설 시장에서 한᛫중 양국의 서로 다른 특징이 있다면? 한국은 웹툰과 웹소설 두 분야에서 줄곧 강세를 유지해 오고 있다. 한국 웹소설은 오래전부터 인기가 많았고, 웹툰은 모바일 인터넷의 보급으로 스크롤 다운 형태의 열람이 가능해지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중국은 웹툰보다 웹소설이 먼저 발전했다. 웹툰은 그림을 그리는데 기술이나 장비가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글은 누구나 온라인에 바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중국 인기 무협소설 '투파창궁(斗破蒼穹)'의 작가는 고작 19살에 이 작품을 썼고, 지금은 1년에 180억 원 이상을 번다고 알려져 있다.     한᛫중 콘텐트를 세계로 수출하는 전문가로서 조언이 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고 싶다면 해외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트랜드를 파악해야 한다. 즉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콘텐트만이 성공할 수 있다. 인기 많은 한국 웹툰이나 웹소설을 보면 한국적인 문화 배경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더해 세계적인 명작으로 거듭난 경우가 많다. 요즘 독자들은 빠르게 변하는 사회 속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소설 속 주인공이 꿈을 실현하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 이런 독자들의 마음을 읽는 게 성공의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금 하는 일은 한᛫중 관계 악화 등의 영향을 받는 편인가? 사실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시아월드'는 글로벌 시장 중에서도 영미권 독자를 대상으로 한 서비스이고, 한국과 중국의 좋은 작품을 세계에 소개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정말 크다. 한᛫중 시장만 있는 게 아니다. 시야를 넓히면 위기도 극복하고 좋은 비즈니스 모델을 찾을 수 있다.   중국 충칭(重慶) 출신으로 카카오 엔터테인먼트에서 우시아월드 팀 리더를 맡고 있는 선징(沈靖·심정)이 지난달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개인적인 경험을 비춰 봤을 때,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은 같은 문제를 두고도 완전히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그 중간에 위치한 사업자나 문화 교류인 등은 참 난처하고 또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곤 한다. 그래서 정치᛫외교적인 관계가 어떻든지 양국 국민 간의 신뢰가 중요한 것 같다. 무작정 싫다고 하기보단 직접 방문해 보고 친구도 사귀어 보면 생각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단순히 경제적으로 서로 돈을 벌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영원한 이웃으로서 서로 믿음을 쌓아야 한다. 나라 간 사이가 좋아야 불필요한 비용도 줄일 수 있다. 그게 결국 국민에게 혜택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관련기사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내 목소리 정작 中선…" 중국어 '라디오 여신'의 깜짝 고백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김치 장인' 中교수의 20년 서울살이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중 관계 굴곡 몸소 겪은 中 직장인, 메타버스 회사 CIO된 사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7.01 09:00

  • 한᛫중 관계 굴곡 몸소 겪은 中 직장인, 메타버스 회사 CIO된 사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중 관계 굴곡 몸소 겪은 中 직장인, 메타버스 회사 CIO된 사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패션 메타버스 회사 알타바(ALTAVA)의 CIO 리훙저우(李紅宙)가 지난 5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021년 전 세계를 강타한 '메타버스(Metaverse)'는 영역을 불문하고 여전히 지대한 관심을 받는다. 수많은 메타버스 업체 중 유난히 명품 패션업계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는 회사가 있다. LVMH᛫프라다᛫펜디᛫발망᛫불가리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와 아바타 및 디지털 쇼룸 제작, 버추얼 패션 아이템 론칭, NFT(대체 불가능 토큰) 발행 등 협업을 진행한 '알타바(ALTAVA)'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5월, 패션 메타버스 기업 '알타바'의 창립 멤버로서 회사의 글로벌 경영구조를 확립하는 데 일조한 리훙저우(李紅宙) CIO(최고혁신책임자)를 만나 창립 비하인드와 그간의 이력을 들어봤다. 리훙저우는 중국 옌지(延吉) 출신으로 2007년 한국 기업의 중국 내 공채를 통해 한국으로 왔다. 현재 알바타의 CIO 자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회사와 중국 회사를 두루 거치며 프로그래밍᛫금융᛫법률᛫회계᛫엔터테인먼트᛫메타버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얻은 모든 경험과 지식은 기회가 되고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리훙저우는 이날 인터뷰에서 한᛫중 관계의 정점에서 나락에 이르기까지 그 속의 굴곡을 고스란히 겪은 세대로서 갖게 된 독특한 인사이트와 개인사를 소개했다. 이날 중국 내 메타버스 시장 현황과 업계 속사정, 그리고 한᛫중 미래 협력 가능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는 언제, 어떻게 오게 됐나? 2007년 SK C&C의 중국 현지 공채 프로그램에 합격해 중국 저장(浙江)대학 졸업과 동시에 연수차 한국으로 왔다. 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서 은행᛫증권사 같은 금융회사의 시스템을 개발하고 구축하는 일을 했다. 한국에서 2년 반 일하고 1년은 베이징 지사로 파견됐었다.     리훙저우는 이날 인터뷰에서 첫 직장인 SK C&C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다. 사진은 회사에서 당첨된 워커힐빌라에서 동료들과 주말 모임에 참석한 리훙저우(가운데). 사진 본인 제공   당시 한국 기업의 채용 프로그램은 어땠나?   15~16년 전 SK C&C는 중국 현지에서 채용한 인재를 한국 본사로 데려와 2~3년 정도 기업문화와 업무를 가르치고 다시 중국 현지 법인으로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었다. 한국어를 못하는 중국 직원은 한국에서 근무하며 어학당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구글의 제안을 포기하고 온 동기도 있었다. 그땐 중국 시장에 대한 회사의 의지가 상당했다. 중국 직원들도 그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더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아쉽게도 지금은 이런 프로그램이 대부분 없어지고 거의 모든 회사가 현지 채용만 하는 걸로 알고 있다. 2012년 전후로 한국 회사를 이탈한 중국 IT 인력이 꽤 많은데, 중국 내 모바일᛫ICT 업계 붐이 일어나면서 한᛫중 기업 간 임금 역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2016년쯤엔 한국 기업이 매력적이란 인식도 많이 줄어들었다.   2014년, 한국 개인투자자들의 중국 A주 직접 투자를 허용하는 후강퉁(滬港通) 거래 개시에 앞서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증권사 임원들에게 설명회를 진행 중인 리훙저우. 사진 본인 제공   ICT 회사에서 증권사로 이직한 배경은? 2010~2011년 중국 기업들의 기업공개(IPO)를 통한 해외 진출 열기가 대단했다. 전 회사에서 증권사 차세대 시스템을 개발하며 금융과 관련된 실무를 익힌 게 이직의 계기가 됐다. 옮긴 회사에서 나는 중국 회사의 국내 상장 업무를 주관했는데, 이때 배운 금융᛫법률᛫회계 분야 지식은 훗날 '알타바'의 해외지사 설립과 투자 유치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직 초기 열렸던 호황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일부 중국 회사의 회계 부정 이슈로 IPO 시장에 혹한기가 닥쳤기 때문이다. 예전엔 중국 기업이 직접 IPO를 많이 했다면, 지금은 한국 상장사를 인수᛫합병(M&A)하거나 지분 참여의 방식으로 한국에 진출하고 있다.     2015년, 중국 자본시장 정보를 모니터링 중인 리훙저우. 사진 본인 제공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의 이력도 이목을 끈다. 증권사에 다니면 여러 업종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2016년쯤 중국과 관련해 뜨는 업종은 여행과 엔터테인먼트 산업일 것이란 판단하에 '컬처몬스터'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콘서트 같은 공연에 투자하거나 티켓과 관광 상품을 결합해 중국 현지에 팔기도 했는데, 그해 사드(THAAD) 사태가 터지면서 수입이 뚝 끊겼다. 언제 상황이 좋아질지 기약도 없었다. 그러던 중 2017년 비트코인과 블록체인 열풍이 불었다. IT와 금융 업계에서의 내 모든 경력을 조합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2018년 '알타바'에 합류했고, 지금은 CIO로 재임 중이다.      리훙저우는 2016년 한류 콘텐트를 해외로 전파하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컬처몬스터'를 창업했다. 사진은 더쇼(The Show) 진주 콘서트에서 현장을 살피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 제공   알타바(ALTAVA)는 어떤 회사인가? 2018년에 설립한 메타버스 회사다. 처음엔 게임업계 출신인 창업자의 게임과 패션 그리고 커머스를 결합한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시작했는데,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정립되면서 자연스럽게 패션 메타버스 대표회사로 거듭나게 됐다. 즉 게임 아바타가 명품 브랜드 옷을 입고 가상공간에서 활동하게 한다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가상공간에서 명품을 구매하면 리워드를 받거나 레벨업 되고, 오프라인에서 실물을 사면 가상 아바타도 똑같은 제품을 착용할 수 있도록 구현하는 식이었다. 2017년 기획 초기부터 여러 럭셔리 패션 브랜드와 접촉해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디지털 사업권을 확보했다. 지금은 자체 B2C 서비스인 메타버스 플랫폼 '알타바(한국)', 'ADA(중국)'을 운영 중이며, B2B 비즈니스로는 브랜드의 맞춤형 '미니버스(Miniverse)' 같은 버추얼 플랫폼 제작이나 NFT 발행 등의 기획᛫개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19년 리훙저우는 패션 메타버스 구축에 필요한 해외 명품 브랜드와의 협력을 위해 패션업체 유럽 본사를 방문했다. 사진은 파트너사 직원과 프라다(PRADA) 밀라노 본사에서 미팅을 마친 리훙저우(왼쪽). 사진 본인 제공   2021년 메타버스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는데. 사실 우리 회사는 처음에 '게이미파이드 커머스(Gamified Commerce)' 즉 게임을 하면서 실물에 대한 구매동기를 일으키는 모델에 집중했었다. 그러다 나중에 활동무대를 게임에서 메타버스로 점차 옮긴 케이스다. 현실에서의 가치와 생활을 가상공간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알바타의 초창기 구상은 '메타버스'의 개념과 정확히 일치했다. 우리의 개발 방향은 그대로인데, 무대만 바뀐 셈이다. 운 좋게도 2021년 메타버스가 흥행하면서 우리 회사도 덩달아 주목받기 시작했다.     40여 개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버츄얼 패션을 체험할 수 있는 '알타바 월드 오브 유(Altava World of You)'의 APP 화면. 사진 알타바   자체 메타버스 플랫폼의 한᛫중 버전이 다른 이유는? 초반에는 이름만 다르고 사실상 똑같은 포맷의 플랫폼이었다. 지난해부터 버전이 갈라져 조금 다른 형태로 성장 중이다. 당초 중국 플랫폼을 따로 만든 이유는 중국의 인터넷 규제 때문이다. 중국법상 중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하려면 모든 데이터 서버를 중국 현지에 둬야 한다.'ICP 비안(Internet Content Provider備案)' 신청이 필수다. 우리는 중국회사와 조인트벤처를 설립해 서비스를 출시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메타버스에 대한 중국 내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서 향후 운영 방향을 고민 중이다. 참고로 '알바타'의 중국 버전 'ADA'는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이자 잉글랜드 출신 여성 수학자인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의 이름에서 따왔다. 에이다의 미(美)적 감성과 프로그래밍을 결합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중국어로 ‘꾸미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아이다(愛搭)'인 점도 고려했다.     메타버스에 대한 중국 내 분위기는 어떤가? 사실 메타버스᛫NFT᛫블록체인 등 신기술에 대한 중국 내 분위기는 한국과 사뭇 다르다. 한국은 여전히 이런 기술들을 적극 활용해 보자는 분위기지만, 중국에선 화제도에 비해 실제 적용 사례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특히 블록체인이나 코인의 경우, 초반에는 중국의 발전이 앞서가는 듯했지만 투기나 사기 등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면서 규제가 심해졌다. 지금 중국은 블록체인이나 그 파생 기술의 산업적 사용에 집중하고 있다. 메타버스의 경우도 중국 IT᛫모바일 기업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신중하게 접근하는 분위기이다. 갑작스러운 규제에 대한 우려와 구체적인 사업모델 관련 고민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은 현재 인공지능(AI) 개발엔 적극적이지만 메타버스 개발엔 선뜻 나서기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중국 IT기업의 특성상 성공사례들이 하나둘씩 생긴다면 공백을 채우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메타버스 분야에서 한᛫중이 협력할 공간은 없는지? 중국의 메타버스나 블록체인 등 분야가 완전히 개방되진 않았지만, 제도적인 정비가 끝나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다. 중국은 현재 다른 나라의 상황을 봐 가면서 제도적 틀을 잡아가겠다는 태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이 생기면 시장도 개방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제일 잘하는 분야는 바로 콘텐트다. 메타(META)나 애플(Apple) 같은 회사처럼 세계에서 제일 큰 메타버스를 만들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핵심 콘텐트는 한국이 제일 잘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문화에서만 나오는 창의적인 부분이 분명히 있다. 이는 미래에 매체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한 강점이다. 나중에 중국 시장이 열렸을 때, 한국이 앞서가는 분야에서 공격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싱가포르 블록체인 DAPP(Decentralized Application) 발전방향 세미나에서 가상 세계 속 콘텐트의 핵심 역할을 설명하고 있는 리훙저우. 사진 본인 제공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조언이 있다면? 나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중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의 혜택을 받은 세대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잘 살고 싶다'는 모든 사람의 바람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경제가 좋아져야 하는데, 양국이 갈등할 때 경제가 나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양국이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게 결국 개인과 국가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물론 사회 전체가 깨달음을 얻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아 전 국민이 경각심을 느끼게 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경제학에서 모든 거래는 서로의 장점을 교환해 이득을 극대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A와 B가 거래할 때, A가 아무리 많은 분야에서 강점을 가졌다고 해도 완전무결할 순 없다. 부족한 부분은 B에게 맡기고 잘하는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는 게 결국 이익의 극대화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이다. 한국과 중국의 상황이 딱 그러하다. '상호 보완'만이 서로가 잘살 수 있는 궁극적인 길이라고 생각한다.    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관련기사 '김치 장인' 中교수의 20년 서울살이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내 목소리 정작 中선…" 중국어 '라디오 여신'의 깜짝 고백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6.17 09:00

  • '김치 장인' 中교수의 20년 서울살이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김치 장인' 中교수의 20년 서울살이가 전한 희망의 메시지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최근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를 펴낸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세상 어디에 있든지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곳이 바로 내 고향이다". 21년 전, 중국 다롄(大連)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의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 표지에 적힌 말이다. 지난 4월, 최근 '제2의 고향'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책을 펴낸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 취샤오루를 만났다. 현 대학교수이자 두 고등학생 아들의 엄마이기도 한 취샤오루는 이날 인터뷰에서 유창한 한국어와 솔직한 입담으로 20년에 걸친 한국살이 에피소드를 쉴 새 없이 들려줬다. 매운 음식에 쩔쩔매고 서툰 한국어에 실수투성이였던 날들에서 못 담그는 김치가 없는 진정한 '김치 장인'으로 거듭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울고 웃긴 이야기가 한가득했다. 취샤오루는 낯선 땅에 적응하고 삶을 살아내느라 고군분투하다 한국인 남편을 만나 서울에 뿌리내리고, 비바람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온전히 한국 사회로 녹아들었다. 다른 다문화 가정에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밝힌 취샤오루는 국제결혼 가정의 일원으로서 마주했던 편견이나 어려움, 이를 극복해 온 과정과 노력을 소개했다. 다문화에 대한 한국의 인식과 제도적 문제점에 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중 관계 악화가 아이들에게 가져온 변화와 교육 현장의 실제 상황,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소신도 가감 없이 밝혔다.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의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 사진 좋은땅 출판사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2001년 2월, 우연한 기회로 고(故) 최은택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님이 설립한 회사의 초청을 받아 2주 정도 한국을 방문했었다. 당시 나는 고향인 다롄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중국에 돌아가서도 그 2주간의 경험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일본계 회사에 다녔던 터라 내 상사도 일본 분이었는데, 내게 한국에 가서 한번 살아보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하셨다. 한국행 편도 비행기표를 직접 사주실 정도로 나를 응원해 준 정말 고마운 분이었다. 2002년 1월, 결국 고민 끝에 나는 사직서를 내고 28살의 나이로 한국어는 한마디도 몰랐지만 무작정 한국에 왔다. 당시 서울엔 1998년 먼저 한국으로 유학을 온 친언니가 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방학동 반지하 빌라인 언니 집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땠는지?   먹는 것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다롄은 매운 음식이 별로 없는데, 한국은 '고추장의 나라' 같았다. 처음 왔을 때 말이 안 통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매운 음식이 많아 도통 내가 먹을 수 있는 게 없어 힘들었다. 닭갈비는 물에 씻어 먹고, 라면은 소스를 빼고 간장을 넣어 끓여 먹었다. 한국어를 전혀 몰랐을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반대로 타거나 종점까지 가기 일쑤였다. 한번은 1호선을 반대로 타서 인천까지 갔는데, 한 대학생이 방학역까지 같이 와줘서 정말 감동했다. 지하철에서 취객에게 봉변당할 뻔한 적도 있는데, 다행히 주변 분들이 나서서 도와주셨다. 다만 당시 치한을 냅다 지하철 밖으로 던져버린 분과 쏟아진 소지품을 주워 주며 나를 위로해 주신 분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그저 감사하단 말만 반복했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부분이다.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중국어 강의하는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어학당을 두 달 다녔다. 하지만 학비가 너무 비싸서 곧장 일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4년간 일한 돈을 부모님께 다 드리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생활비와 학비를 직접 벌어 써야 했다. 나는 어학당에 가야만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회에 직접 들어가 배우는 게 훨씬 더 빠르다. 나도 책이나 어학당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다.     얼마 전 책을 냈다고 들었다. 『안개꽃 별이 되다』는 20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일기식으로 기록한 것들을 한 권으로 정리한 책이다. 특히 국제결혼 가정의 일원으로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문화 차이 그리고 이를 해결해 온 방법과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등을 적었다. 한국 사람끼리 해도 힘든 결혼을 언어᛫국적᛫문화가 다른 사람끼리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적응하다 보면 충분히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었다. 다른 다문화 가정에도 '꾸준히 노력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 책을 쓰게 됐다.   취샤오루가 아들과 함께 TBS 교통방송에서 중국어 라디오 녹음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책을 보니 한국 사회에 상당히 활발하게 참여했던데.     중국어 강의, 라디오 방송, 중국어 더빙이나 내레이션, 중국 문화 관련 행사 진행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아이들 학교 봉사활동이나 녹색 어머니회, 운동회, 방과 후 수업 등 자연스럽게 학생 그리고 학부모들과 만나고 소통하면서 한국어도 많이 익혔다. 나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안 통하면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데, 남을 도와주는 일은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다. 내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다. 최근에는 환경에도 관심이 커져서 아이들과 함께 쓰레기 줍기 등 여러 캠페인도 몇 년째 하고 있다. 방과 후 수업의 경우는 내가 성북구청 담당 부처에 직접 찾아가 재능 기부를 하겠다고 자원했다. 중국학과 교수라는 장점을 살려 집 근처 학교에서 태극권 등 중국 문화 관련 수업을 무료로 가르치기도 했다.     국민대에서 주최한 제2회 한중문화제에서 방송인 장위안과 함께 사회를 보고 있는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남편과는 어떻게 결혼하게 됐나? 중국어를 가르쳤던 학생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학교 선배이자 회사 동료인데 괜찮은 사람이니 결혼은 안 하더라도 한국어 공부하는 셈 치고 만나보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처음에 불순한(?) 의도로 소개팅에 나갔는데, 남편은 나를 만나기 위해 중국어 세 마디를 밤새워 연습해 왔더라. 그런 남편에게 뭔가 진지함을 느꼈고, 그렇게 1년 넘는 연애 끝에 2004년 결혼했다. 사실 나는 1998년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대사를 보곤 한국 사회가 상당히 가부장적이라고 느꼈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하게 될 거라곤 전혀 생각 못 했다.     연애 시절은 어땠나? 나는 한국어가 안 되고 남편은 중국어를 몰라서 한중, 중한사전을 항상 들고 다녔다.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았다. 한번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러 갔는데, 영어를 몰라 3시간 내내 너무 힘들었다. 중국 영화 '무간도'가 개봉했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보러 갔는데, 영화 내내 홍콩말만 나와서 하나도 못 알아듣고 나온 적도 있다. 그래서 그 뒤론 1년 내내 도서관에서 데이트했다. 나는 공부하고 남편은 옆에서 책을 읽었다.     2014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수여식 당일 취샤오루의 모습. 사진 본인제공   석᛫박사 과정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한국에 와서 기업체를 대상으로 중국어 강의를 많이 했는데, 학생들이 어법 관련 질문을 할 때마다 제대로 대답을 못 했던 게 공부를 더 하게 된 계기다. 전문적으로 배워서 더 잘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사실 석사 과정 당시에 아이를 가져서 육아와 공부를 동시에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박사 과정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줬다. 발표 같은 걸 준비할 때면 남편이 자료를 먼저 읽고, 쉬운 말로 설명해 줬다. 새벽 3시에 발표문을 고쳐 달라고 해도 밤새 도와주고 뜬 눈으로 출근하기도 했다. 남편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한 것 같다. 한국에서 20년 넘게 사는 동안 남편 덕분에 새로운 내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한·중 국제결혼 부부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요즘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아내 혹은 남편이 중국 사람이면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좀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한쪽만 노력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 같은 경우는 한국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한국 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받아들인 편이다. 예전에는 김치도 시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것만 먹었는데, 이젠 내가 직접 담가 먹는다. '김치 장인'까진 아니라도 할 줄 아는 김치 종류가 꽤 다양하다.     취샤오루가 직접 담근 김장 김치. 사진 본인제공   결혼할 때 부모의 반대는 없었는지? 시부모님의 반대가 좀 있었다. 제천의 작은 마을에서도 아들 넷을 훌륭하게 키워냈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이었다. '우리 아들이 어디가 모자라서 외국인과 결혼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어느 정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시부모님을 직접 찾아뵙고 '정면 돌파'를 하자 생각이 바뀌셨다. 어머님이 되려 우리 결혼을 서두르셨다. 사실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에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여전히 중국이나 베트남 등이 가난한 나라라는 편견을 갖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인식은 엄연히 존재한다. 사람을 보지 않고 나라만 보는 셈이다. 그런 편견과 꼬리표는 결국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다문화 가정을 향한 인식이 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문화 가정의 외국인 배우자들도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EBS 중국어 프로그램 담당 강동걸 PD(오른쪽)와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자녀들 언어 교육은 어떤 식으로 했나? 친정 어머니가 오래 한국 계셔서 그런지 지금은 아이들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많은 다문화 가정의 외국인 엄마가 모국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기왕에 한국에 살면 어차피 엄마 빼고는 다 한국어를 쓰기 때문에 엄마는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쓰려고 노력하는 게 좋은 것 같다.       다문화 가정의 교육과 관련해 조언이 있다면? 대만에선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가르친다. 베트남, 몽골, 필리핀 등 10개 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필수과정이고 중᛫고등학교는 선택과목이다. 중요한 시기에 아이들이 다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가르친다는 점에서 상당히 좋은 제도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다문화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한국 사람은 피부색이나 국가 경제력으로 상대방을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선 부유한 나라에서 온 사람과 결혼하면 '국제결혼 가정',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과 결혼하면 '다문화 가정'이라고 한다. 차별적인 명칭은 되도록 피하고, 사회적인 논의를 통해 인식을 개선해 나갔으면 좋겠다. 대만에선 대만 내 거주 또는 정착한 외국인을 '신주민'이라고 부른다. 다문화 구성원을 부르는 명칭이나, 다양성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점차 다문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서울 숭덕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중국 문화 수업을 진행 중인 취샤오루. 사진 본인제공   한국 사회에 사는 다문화 가정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뭔가? 내 주변의 다문화 가정을 보면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다자녀 가구인 경우가 많다. 현실에 맞지 않는 지원 정책도 문제다. 방과 후 수업료 면제같이 실효성 없는 지원보다 외국인 엄마들의 능력과 사회성을 키워줘야 한다. 그리고 외국인 배우자의 가족이 비자를 받기 까다로운 것도 힘든 점 중 하나다. 나도 친정 어머니 비자가 나오지 않아 상당히 고생했었다. 친정 엄마가 육아를 도와주면 외국인 여성들이 일자리도 구하고 사회에 적응하기도 쉬울 텐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외국인 엄마가 육아 때문에 일을 못 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안정감이 없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더 적응을 못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두 아들과 함께 봉사단체 도담도담이 주관한 안전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취샤오루(가운데). 사진 본인제공   자녀들도 어려움을 겪었나? 한때 큰아이가 한국말이 좀 어눌했는데, 학교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머리채를 잡고 침을 뱉었다고 하더라. 작은 아이는 학교에서 맞아 안경이 부러진 적도 있다. 최근엔 한·중 간 분위기가 안 좋아서 한국을 떠나 말레이시아 등 나라로 이민 가는 가족들도 많이 봤다. 혹여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라고 한다. 나는 이게 피하거나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어디서든 당당하라고 가르쳤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아빠는 한국인이고 엄마는 중국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대신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집에 와서 얘기하라고 일러뒀다.           언제부터 한·중 관계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기 시작했나? 최근 몇 년 정치적인 상황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이 유튜브를 많이 보다 보니 중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안 좋아졌다. 판단 능력이 미성숙한 아이들이 근거 없고 선동적인 뉴스에 노출되고 있다. 우리 아이들에겐 유튜브를 최대한 보지 말고 어떤 일에 관해 판단이 잘 안될 때는 꼭 물어보고 행동하라고 가르쳤다. 사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중국 여행도 많이 하고, 중국어도 열심히 가르쳤다. 집에서는 항상 중국 요리와 한국 요리 두 가지를 만들어 먹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아이들의 중국에 대한 호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한국에서의 20년을 회고하며 최근 저서 『안개꽃 별이 되다』를 펴낸 취샤오루(曲曉茹·곡효여) 국민대 중국학부 부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중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한·중 관계를 개선하는 데 나라 간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개인이 가정이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최대한 긍정적인 면을 자주 보여주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수업 시간에 한·중 간 여러 갈등에 대해 학생들에게 관련 논문이나 연구 결과를 보여주고, 또 학생들이 직접 조사하고 서로 토론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검증이 안 된 이야기를 무작정 믿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문제점을 찾게 하는 것이다. 요즘 한·중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중국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다며 중국 교환학생을 신청하는 한국 학생도 있고, 한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부모님과 싸우는 중국 학생도 있다. 직접 한국에 와보고 중국에 가보면 원래 알고 있던 사실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나라 간의 교류와 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관련기사 "내 목소리 정작 中선…" 중국어 '라디오 여신'의 깜짝 고백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5.27 09:00

  • "내 목소리 정작 中선…" 중국어 '라디오 여신'의 깜짝 고백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내 목소리 정작 中선…" 중국어 '라디오 여신'의 깜짝 고백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2014년부터 TBS eFM 라디오에서 매일 2시간씩 중국어로 한국의 다양한 소식을 전해온 방송인 무전(牟珍)이 지난 3월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드럽고 따듯한 '여신' 목소리로 국내 중국어 라디오 방송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거듭난 DJ가 한 명 있다. TBS eFM 라디오에서 매일 2시간씩 중국어로 한국의 다양한 소식을 전해온 방송인 무전(牟珍)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올해로 한국 생활 15년 차인 무전은 라디오 진행 외에도 현재 한중 MC, 중국어 성우, 한중 동시통역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객원교수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특히 중국어 라디오를 즐겨 듣는 이들에게 무전의 목소리는 더없이 친숙하다. 프로그램의 간판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한국에 사는 중국인이라면 무전의 방송을 안 들어본 이가 없을 정도다. 중국어를 공부하는 한국인 중에서도 애청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20년 팬데믹 시기 쌍둥이 엄마가 됐다고 밝힌 무전은 지난 3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본인의 이야기를 유창한 한국어로 쉴 새 없이 쏟아냈다. 15년 전 한국에 오게 된 배경, 만능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살게 된 과정과 그 뒤에 숨겨진 노력, 일과 육아에 대한 소신 그리고 프리랜서 꿈나무들을 위한 애정 어린 조언도 잊지 않았다.   무전이 2020년부터 진행해온 TBS eFM 중국어 프로그램 '천애만리정(天涯萬里情)'. 한국에 체류 중인 중화권 외국인을 위해 한국 생활 정보와 문화 콘텐츠, 고향 소식 등을 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사진 본인제공]    한국은 언제 어떻게 오게 됐나? 2008년 한국에는 직장 파견으로 처음 왔고, 온 지는 15년 정도 됐다. 학부 때 전공이 대외 한어(국제 중국어 교육)과라 졸업 후 출판사를 보유한 베이징(北京) 소재의 한 어학원에서 중국어 강의를 했었다. 부전공이 방송과여서 대학 시절 여러 교내 또는 외부 행사 진행이나 학교 라디오 방송국 국장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발음이나 강의력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교재 녹음이나 출판을 염두에 뒀던 어학원 원장님이 나를 좋게 봐주셔서 채용과 동시에 한국 파견이 결정 났었다.        한국에 올 거라고 예상했는지? 사실 대학 때 고민했던 진로는 한국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어련히 전공대로 중국어 강사가 되거나 아나운서᛫MC(진행자)가 될 거라 생각했다. 주전공은 중국어 교육이었지만 교수님이 MC를 적극 권유하셔서 대부분 그와 관련된 이력을 쌓았다.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TV᛫라디오 방송국에서 MC 관련 상도 받았고, 보통화(普通話,중국 표준어) 홍보대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 방송국에 인턴으로 들어가 TV 프로그램 촬영᛫진행 등을 해봤는데,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진로를 바꿨다. 4학년 때 처음으로 외국인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고 보람을 느꼈다. 고향은 산둥(山東)성이지만 허난성에서 자랐기 때문에, 졸업 후에는 집과 비교적 가까운 베이징에서 첫 직장을 구했다. 그게 나를 한국으로 보내준 어학원이었고 그렇게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한국에 파견 나온다고 했을 때 부모의 반대는 없었는지? 반대는 안 하셨다. 부모님은 내가 1~2년 정도 가는 걸로 생각하셨고, 실제로 계약도 1년 단위로 해서 내가 원하면 연장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에 온 후로 다시 미국으로 유학 갈 마음이 생겨서 한동안 영어 공부에 몰두했었다. 그래서 한국 영어 학원에서 고급 프리토킹반 수업을 들었는데, 여기서 오히려 한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됐다. 그때 만난 인연들 중 지금 대기업에 다니거나 동남아에서 사업하는 친구도 있다. 친구가 생기니 한국에도 점점 관심이 생겨 2년 반 정도 다닌 첫 직장을 그만두고 어학당에서 1년 동안 한국어를 배웠다.    무전의 생애 첫 동시통역 현장. [사진 본인제공]   통번역대학원 입시학원에서도 일했다고 하던데.   어학당에 다닐 당시 통번역대학원(통대) 입시 대비로 유명한 학원이 하나 있었다. 이 학원에 한-중 통번역을 가르칠 중국어 원어민 선생님이 없다고 해서, 다른 분 추천으로 내가 수업을 맡게 됐다. 그래서 한때 오전에는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오후에는 통대 입시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그런데 내가 학생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통번역에 흥미가 생겼고, 왠지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단 자신감이 생겨 통대 진학을 준비하게 됐다.     통대 입시 준비는 어떻게 했나? 정말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한국어학당에 다닌 지 1년 만에 입시를 시작해서 한국어 실력이 한참 부족했다. 한국어를 끊임없이 쓰고 읽고 외우느라 2년이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볼펜을 한 20자루 정도 쓴 것 같다. 매일 한국어를 한 문단씩 달달 외웠다. 통대 입시에서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줄 파트너가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주로 한국어를 잘하는 국내파 친구들과 함께 스터디를 많이 했다.   무전의 쌍둥이 아들들이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준 순간. [사진 본인제공]   쌍둥이 아들들의 언어 교육은 어떻게 하고 있나? 우리 집은 중국어와 한국어를 엄마 아빠가 명확하게 구분해서 사용 중이다. 한국인인 아빠는 아이들과 무조건 한국어로 대화하고, 나는 중국어만 쓴다. 그런데 한국에 살고 또 어린이집에서도 한국어만 쓰다 보니, 내가 중국어로 물어봐도 아이들은 한국어로 대답한다. 중국어 듣기 수준은 한국어와 비슷하지만 말하기는 아직 서툰 편이다. 아이들이 중국어로 대답하지 않을 때 엄마가 반응을 해주지 않으면 중국어 말하기 실력도 자연히 는다고 하더라. 하지만 나는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엄마 입장에서 늘 아이들 빨리 밥 먹이고, 옷 입혀서 데리고 나가기 바쁜 것 같다.     한᛫중 혼혈인 아이들의 국적이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는지? 이 부분은 자연스럽게 놔두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 나도 어릴 때 비슷한 고민을 많이 했었다. 고향은 산둥이지만 허난성에서 자랐기 때문에 허난 사람도 산둥 사람도 아니란 느낌이 있었다. 베이징에 가든 상하이에 가든 나는 언제나 외지 사람이었기 때문에 소속감이 없어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돼 보니 사실 이런 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한국 사람이냐 중국 사람이냐를 따지기보단 앞으로 아이들이 그냥 나는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코로나 시기에 육아가 힘들 진 않았는지? 한국에 온 뒤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2020년에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특히 아이들 첫돌 전까지가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다행히 한국은 산후 도우미 정부 지원이라던가 전반적인 시스템이 잘 돼 있어서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한국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실감할 수 있었다.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의 무전은 중국어 학습자들 사이에서 '라디오 여신'으로 불린다. 사진은 TBS eFM 중국어 시사프로그램 신문재로상(新聞在路上)을 진행할 당시 무전. [사진 본인제공]   한국에서 중국어 라디오 방송은 언제부터 하게 됐나? 2014년에 TBS 교통방송에 합류했으니 거의 10년이 다 돼간다. 2014년은 내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 합격한 해이기도 하다. 라디오 방송과 통학을 병행했던 기억이 난다. 그간 TBS에서는 '서울생활가유참(首爾生活加油站)', '신문재로상(新聞在路上)', '천애만리정(天涯萬里情)'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2015년 새해에 한᛫중 다문화 가정을 인터뷰하는 특집 프로그램을 했었다. 그때 한 부부가 한᛫중 축구 경기를 보러 가서 각자 서로 태극기와 오성홍기(중국 국기)를 들고 흔들었다는 얘기가 너무 재밌었다. 지금 생각하니 방송하면서 인터뷰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국과의 인연, 부딪히고 적응해 가는 과정, 행복했던 기억 등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즐거웠다. 한국에 온 중국 사람들이 처음에 공통으로 겪는 어려움은 언어적인 부분이다. 식습관이나 문화는 사실 한᛫중 양국에 비슷한 면이 많아서 적응하기 쉬운 편인데, 한국어를 배우는 게 가장 어렵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특집 프로그램 방송 전 대기실에서 대본을 점검 중인 무전(가운데)과 천펑(陳鵬) 중국 난카이대 교수(왼쪽), 톈종치(田宗琦) 전 CCTV 스포츠 채널 MC. [사진 본인제공]   한국에 왔을 때 중국과 다르다고 느낀 점이 있다면? 화장을 안 하는 여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나는 중국에 있을 때부터 방송이나 행사가 없는 날엔 거의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 편이었고, 지금도 평상시에 화장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민낯은 본인 미모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거나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고 해서 꽤나 당황했다. 그리고 직장에서 회식할 때 밥 먹고 술 마시고 커피까지 마시는 등 2차, 3차 자리로 이어지는 게 놀라웠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한᛫중 간에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내 주변 한국분들은 자기 부모님을 깍듯이 대하고 조금 어려워하는 면이 있다. 반면 중국에서는 부모님과 좀 격의 없이 지내는 편이다. 미국 사람처럼 부모님 이름을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과 미국의 딱 중간 정도인 것 같다.     올해로 한국 생활 15년 차인 무전은 라디오 진행 외에도 현재 한중 MC, 중국어 성우, 한중 동시통역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객원교수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사진은 KTV 프로그램 '핫플레이스' 출연 당시 무전의 모습. [사진 본인제공]   최근 라디오 방송을 잠시 쉬고 있다고 들었는데. 방송사 사정상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다. 요즘은 한국외대에서 통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요즘 학생들은 중국어 실력이 상당한 것 같다. 10년 넘게 중국에서 살다 온 친구들이 옛날보다 훨씬 많아졌다.   통번역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사람들은 동시통역과 순차통역을 혼동할 때가 많다. 동시통역은 리시버 등 기계가 필수적이고, 순차통역은 발화자가 중간에 말을 끊어줘야 통역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순차통역을 동시통역으로 착각해 5~7분 넘게 끊지 않고 말하기도 한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기억에 의존해 키워드만 가지고 통역을 해야만 했다.     용산에서 열린 한 기업 행사에서 진행을 맡은 무전의 모습. [사진 본인제공]   한중 MC로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며 느낀 점은? 한국에서 열리는 행사는 주최 측이 상당히 꼼꼼하게 모든 것을 사전에 체크한다. 전반적인 리스크를 확 줄여 주기 때문에 진행자로서 상당히 든든하고 팀워크가 잘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송이나 통역 등 프리랜서 일을 주로 해왔는데, 후배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프리(Freelancer)'는 '프리(Free)'가 아니다. 프리랜서를 하려면 인하우스(회사 소속)로 일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자격증과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프리랜서로 일하기 전, 먼저 인하우스로 몇 년 정도 일을 해보고 프리랜서가 적성에 잘 맞는지 먼저 파악하고 결정하는 게 좋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일회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주최 측이 같은 행사를 매년 나에게 맡기게 됐을 때 제일 뿌듯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난 뒤 주최 측이 애초 협상했던 보수보다 더 많이 챙겨주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내 능력을 인정받는 느낌이라 정말 기분이 좋다.   무전은 이날 인터뷰에서 ″기회는 항상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본인 프로필 이미지. [사진 본인제공]   한중 2개국어 진행을 잘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우선 모국어 진행을 먼저 숙달해야 한다. 모국어로 진행 관련된 모든 기술을 익힌 다음 외국어 진행에 적용하면 된다. 사실 한중 MC의 경우 한국과 중국의 취향 차이가 좀 있다. 중국 사람들은 하이톤에 달콤한 목소리를 더 좋아한다. 내 목소리는 정작 중국에선 인정을 못 받았던 것 같다. 나는 무게감 있고 멀리 잘 퍼지며 파고드는 힘이 있는 목소리라 아나운싱을 가르쳐준 선생님도 행사 MC 쪽으로 나를 많이 밀어주셨다. 방송이나 더빙 관련 수업도 열심히 들었지만, 나한테는 기회가 잘 오지 않았다. 반면 한국에 와서는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차분하고 평온한 느낌의 목소리를 선호하는 것 같다.     현재 가장 큰 고민이나 도전은?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다. 일은 평생 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또 금방 크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 주변에 아이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는 한국 엄마들이 많은데, 오로지 아이 생각밖에 안 해서 그런지 스트레스가 더 큰 것 같다. 나는 육아든 일이든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 없고 잘 못하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면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2020년 쌍둥이 엄마가 된 무전은 이날 인터뷰에서 여전히 끊임없이 도전하고 공부하면서 일과 육아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향후 계획이나 목표는? 내년에는 통번역 박사 과정에 도전해보고 싶다. 올해는 평생교육원에서 경영학 수업을 신청했다. 사람이 불안하고 뭘 하고 싶을지 모를 때는 공부가 최고인 것 같다. 공부를 하다 보면 또 좋아하는 일을 찾게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정치 문제는 정치로 해결하고, 경제 문제는 경제로 해결했으면 좋겠다. 한᛫중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당장 상황이 안 좋다고 해서 마냥 쉬고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기회는 항상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5.13 09:00

  •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중국어 교재 속 '그분 목소리', 알고 보니 한국 생활 23년 차 중국 사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중국어 성우 겸 방송 MC 위하이펑(于海峰)이 지난달 13일 KBS 여의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국에서 중국어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을 목소리. 베일에 싸여 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중국어 성우 겸 방송 MC 위하이펑(于海峰)을 지난달 13일 KBS 여의도 사옥에서 만났다. 위하이펑은 중국에서 아나운서를 가장 많이 배출한다는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으로 누구보다 또렷한 발음과 편안한 목소리를 가졌다. 시중에 나온 교재로 중국어를 접한 한국 사람에겐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2000년 한국으로 건너온 위하이펑은 벌써 한국 생활 23년 차인 '중국 사위'다. 중국어 강사 시절 우연히 시작한 녹음과 내레이션 일로 성우의 길에 들어선 위하이펑은 이제 국내 출판업계는 물론 중국어 녹음 분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됐다. 방송과 라디오 분야에서도 아리랑 국제방송, EBS 교육방송, TBS 교통방송 등을 거친 1세대 중국어 진행자로서 지금은 KBS 월드 라디오에서 중국어 뉴스 보도를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어 라디오 세계와 23년 넘게 양국을 지켜본 산증인으로서 한᛫중 관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위하이펑의 솔직한 견해를 들어봤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위하이펑이고, 중국 헤이룽장에서 태어났다. 2000년에 한국으로 와서 정착했다. 지금은 KBS 월드 라디오에서 중국어 방송을 하고 있다. 중국어 내레이션이나 더빙 일을 하는 성우로도 활동 중이다.     어떤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나? KBS 월드 라디오의 중국어 방송은 매일 약 1시간 정도 편성된다. 나는 그중 뉴스 보도 파트의 녹음을 담당한다. 중국어 프로그램은 시작 부분에 항상 한국의 주요 뉴스를 먼저 보도하는데, 약 10~15분 분량이다. KBS 월드 라디오는 한국어 포함 11개 언어로 해외에 직접 송출되는 방송이다. 한국에선 인터넷으로 청취할 수 있다. 해외에 있는 청취자에게 한국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시작됐고, 내가 이 일을 한 지는 10여 년 됐다.        녹음 업무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나? 중국어 방송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회 녹음이고, 매일 첫 송출 시간은 오후 8시 반(한국 시간)이다. 녹음 일정은 녹음실 이용 상황에 따라 매번 바뀌는데, 보통 빠르면 오후 4시쯤 당일 뉴스를 정리한 스크립트가 나온다. 작가들이 중국어로 된 스크립트를 주면, 나는 30분 정도 리딩 연습을 거쳐 곧장 녹음에 들어간다. 가끔 돌발 사건이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땐 녹음도 좀 더 늦어진다. 월드컵이나 올림픽같이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녹음하는 경우도 있다.     KBS 월드 라디오에는 어떻게 오게 됐는지? 사실상 스카우트됐다. 그 전부터 아리랑 국제방송이나 EBS 등 여러 곳에서 방송했던 경력이 있었다. 2010년 당시에도 이미 TBS 교통방송에서 외국어 라디오 1세대 진행자로서 '샹웨서우얼(相約首爾)'이란 중국어 생방송을 몇 년째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KBS 측의 제안을 받았고, 발음이나 목소리가 아나운서 톤이라 그런지 뉴스 보도를 맡게 됐다.     위하이펑(于海峰)은 방송과 라디오 분야에서 아리랑 국제방송, EBS 교육방송, TBS 교통방송 등을 거친 1세대 중국어 진행자로서 현재 KBS 월드 라디오에서 중국어 뉴스 보도를 맡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어 방송과 성우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사실 원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우연에 가깝다. 원래 베이징(北京)에 있을 때 학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었고, 한국에 와서도 계속 강의를 했다. 한국어를 잘 못 하는 상황에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4년쯤 같은 학원 선생님이 쓴 교재의 중국어 녹음 작업을 우연히 하게 됐다. 그 이후로 출판사나 녹음 스튜디오에서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 시중에 나온 중국어 회화나 HSK(한어수평고시) 교재의 대부분은 내가 녹음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나 같은 경우는 시장의 수요에 이끌려 이 분야에 발을 담그게 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어떻게 오게 됐나? 결혼 당시 베이징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 중이던 한국인 아내가 졸업하면서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됐다. 결혼 초기에는 베이징에서 2년 정도 살았는데, 아내와 장래를 고민하다 결국 한국행을 결정했다. 내가 한국에 가서 산다고 했을 때, 부모님도 딱히 반대하시진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 와서 발생했다. 2000년 당시에는 한국으로 결혼 이민을 온 중국 남자가 정말 흔치 않아서, 출입국사무소 사람들조차 어떤 비자를 발급해 줘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 시기 한국에 들어온 중국인 사위 중 내가 정확히 몇 번째인지는 모르겠으나, 10명 이내인 건 분명한 듯하다. 혼인 신고도 6개월 넘게 걸리는 시절이었다. 지금은 한국에 온 지 너무 오래돼서 내 고향은 중국이지만 한국도 내 나라인 것 같다. 솔직히 이젠 올림픽 같은 경기에서 한국과 중국 중 누가 이기든 상관없이 다 기분이 좋다.     다문화가정으로서 자녀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는지? 하나 있는 아들의 경우는 자기가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한 나라에 대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갖는 게 아이에게는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은 우리 가족에게 큰 문제로 다가오진 않았다. 아마 나도 인생의 절반 특히 내 인생에서 가장 혈기 왕성했던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중국어 성우 겸 방송 MC 위하이펑(于海峰)이 지난달 13일 KBS 여의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23년 전부터 한᛫중 관계를 지켜본 소감은? 막 수교했을 당시 한국 사람의 중국에 대한 인상은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거대한 나라이지만 당시 중국에 대해 알려진 바도 많이 없었고, 심지어 한국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중국 사람을 '빨갱이'로 배웠다고 하더라. 하지만 교류가 시작되자 두려움은 호기심 또는 기대감 같은 거로 바뀌었다. 중국은 어떤 곳이고 어떤 일을 해볼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1995~1997년쯤 중국 유학이 크게 유행했다. 내 아내도 이때 중국에 온 거의 0세대 유학생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느끼는 한᛫중 관계의 '밀월기'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다. 이때 한국을 나쁘게 말하는 중국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화장품, 음식, 노래 등 한국 것이라면 뭐든지 좋다고 여겼다. 체감상 수교 이래 한᛫중 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사드(THAAD)'와 '코로나 19'인 것 같다.      최근 한᛫중 관계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두 나라 간에는 뿌리 깊은 선입견이 있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좀 많은 것 같다. 인터넷에서 서로의 나라를 함부로 비난하는 이들은 상대국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일부 네티즌들은 편협한 시각으로 서로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인터넷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보니 한᛫중 관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한국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위치에 있다. 사실 누가 한국 대통령이 되든지 한᛫중, 한᛫미 관계 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건 거의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한᛫중 관계에 대한 생각이나 기대가 있다면?   나는 한᛫중 관계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이고 또 크게 받는 업종에서 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어 내레이션의 경우 한국 기업의 중국 비즈니스가 줄어들어 기업체 홍보 영상이나 광고 녹음 수요가 뚝 떨어졌다. 교육이나 출판 업계도 마찬가지다. 중국어를 배우려는 학생이 없다 보니 교재 녹음 일감도 크게 줄었다. 2012년부터 한 대학에서 대우교수로서 강의했던 중국어 수업도 지난해 9월부로 폐강했다. 옛날에는 한 반에 학생이 10명에서 많게는 20명이 넘었는데, 이젠 1~2명도 모집이 어렵다고 한다. 학교에서 방과 후 교사로 중국어를 가르쳤던 아내도 이제는 과목을 한자로 바꿔 아이들을 가르친다. 한᛫중 관계가 하루빨리 나아지길 바란다. 그래야만 시장도 풀릴 것 같다.     관련기사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4.29 09:00

  •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中주재원 필독 교재 쓴 차오팡 선생님의 늦깎이 서울대 유학기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대기업 주재원과 외교관 등을 대상으로 한 중국어 강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팜 차이니즈' 중국어 학원의 원장 차오팡(曹芳)이 지난달 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 출장이나 주재원 파견을 앞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펼쳐 봤을 교재 『나의 겁 없는 중국 출장 중국어』. 한때 서점마다 중국어 교재 베스트셀러 자리를 휩쓸었던 이 책에는 '팜 차이니즈' 중국어 학원 차오팡(曹芳) 원장의 10년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차오팡은 2006년부터 베이징, 톈진 등지에서 한국 대기업 주재원이나 주중 대사관의 외교관 등을 대상으로 중국어를 가르쳐 온 베테랑 강사다. 중국 전역에 학원 체인을 운영하는 경영인이자 중국인 선생님과 한국인 학생 간 1:1 실시간 온라인 학습사이트를 구축한 개발자이기도 하다. 지난달 7일, 2015년 충동적으로 한국 유학길에 올라 늦깎이 서울대 박사생이 된 차오팡을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차오팡은 이날 인터뷰에서 노력과 우연의 일치가 만들어낸 감동의 유학기, 중국 주재원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교재가 나오게 된 배경, 대기업 CEO와 외교관을 가르치며 느낀 소회와 일화 등, 중국어 교육 전문가로서 한·중 문화 교류와 한·중 관계 그리고 중국어 학습에 대한 남다른 인사이트를 공유했다.            차오팡이 집필한 저서 「나의 겁 없는 중국 출장 중국어」 「나의 겁없는 중국 생활 중국어」 「10일 중국어 첫걸음」 등은 한때 서점마다 중국어 교재 베스트셀러 자리를 휩쓸었다. [사진 본인제공]    ━  중국 전역서 '잘 나가던' 중국어 학원 원장, 늦깎이 서울대 박사생이 되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차오팡이고, 베이징(北京) 사람이다. 학교와 직장 모두 베이징에서 다녔고, 한국에 오기 전까지 30년 넘게 고향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 한국을 처음 와본 건 2000년인데, 장기적으로 거주하게 된 건 2015년 11월부터다.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어학당, 석᛫박사 공부를 하느라 7년 넘게 한국에 머무는 중이다. 2019년에는 서울대 교육학과에서 교육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지난 2월에는 교육인류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2006년부터 베이징에서 '팜 차이니즈'라는 오프라인 학원을 운영하며 중국어를 가르쳤다. 나중에는 한국기업들이 집중돼있는 선전(深圳), 톈진(天津), 시안(西安) 등 여러 도시에 분원을 열었다. 처음 학원 사업을 시작했을 때, 10년 뒤 단순한 양적 확장이 아닌 질적 성장을 이루자는 목표를 세웠었다. 그러다 마침 베이징에서 예전에 가르쳤던 한국 대기업 임원 한 분이 퇴직 후 한국에 와서도 계속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며, 실력 있는 중국 선생님들과 온라인 강의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했다. 이 제안은 2015년 내가 한국에 와서 공부를 시작하고, 또 온라인 중국어 학습사이트를 만들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차오팡의 서울대학교 한국어학당 재학 시절 모습. [사진 본인제공]   학원을 운영하다 유학 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충동에 비행기 표를 끊긴 했지만, 막상 집과 가족을 떠나 혼자 오려니 정말 막막했다. 게다가 당시 내가 일군 학원 사업은 곧 10년 차를 앞두고 있었다. 내가 오래 자리를 비우면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망설인 끝에 결국 유학길에 올랐다. 어학당에서 내친김에 석사까지 신청하게 됐다. 서울대 지원서를 내기 전 또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었는데, 그때 한 학생이 알려준 한국 드라마 '두 번째 스무 살'을 보고는 결국 마음을 굳혔다. 마흔을 앞둔 여자의 첫 캠퍼스 라이프를 다룬 드라마였다. 막 한국에 왔을 때, 살 집에서부터 임시 휴대전화, 와이파이, 신용카드까지 내가 가르쳤던 한국 학생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줘 유학 생활을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차오팡은 이날 인터뷰에서 인생을 바꿀 기회를 주신 지도 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표했다. 사진은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나일주 교수(왼쪽)와 차오팡. [사진 본인제공]    ━  '죽도록' 힘들었던 대학원 과정, 인생 바꿀 기회 주신 지도 교수 덕분에 졸업   대학원 지원이 어렵진 않았는지? 우연한 기회로 서울대 석사 과정에 '교육공학'이란 전공이 있단 걸 알게 됐다. 당시 온라인 교육 사업을 하려던 터라 이참에 전문적인 지식을 배워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운 좋게도 어학원에 다닌 지 3개월 만에 한국어능력시험 5급에 턱걸이로 합격했고, 무사히 대학원에 지원할 수 있었다.   지도 교수님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들었다. 한국 유학생활에서 가장 감사한 건 우리 지도 교수님이다. 사실 나는 어릴 때 공부를 무척 싫어해서 대학도 그저 그렇고 학점도 별로였다. 입학 당시 아직 한국어도 잘 못 하는 나를 왜 받아 주셨는지 교수님께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교수님께서 "한 번도 중국 학생을 제자로 받아주지 않아 늘 한편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퇴직하기 전 마지막으로 중국 학생을 받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셨다. 교수님들은 으레 나이 많은 학생을 좀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우리 지도 교수님은 내 지원서를 보시곤 그동안 내가 중국어 교육 업계에서 해온 노력과 앞으로의 꿈을 높이 샀다고 말씀하셨다. 내게 인생을 바꿀 기회를 주신 교수님께 너무 감사하다. 평범한 학원 원장에서 이제는 학술적인 전문성을 갖춰가는 느낌이다.     차오팡이 서울대 교육학과 석사 과정에서 공부한 교재와 작성한 필기. [사진 본인제공]   대학원 공부는 어렵지 않았나? 석사 첫 학기는 정말 죽도록 힘들었다. 수업은 오로지 한국어와 영어로만 진행됐다. 게다가 교육공학 분야는 미국이 가장 선진적이라 대부분 수업 교재가 영어 원서였다. 그래서 입학도 하기 전에 교재를 미리 사서 과 친구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예습하고 관련 전문용어를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정리했다. 얼마나 열심히 적었던지, 주변에서 이 필기를 출판하면 대박 날 거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교수님과 동기들은 어땠나? 우리 과 교수님은 대부분 미국에서 유학하신 분들이라 외국 학생이라고 혜택을 줄 일은 없다고 못 박으셨다.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업은 팀별 과제가 많았는데, 같이 입학한 조선족 친구와 한국어과를 졸업한 중국 친구 그리고 나보다 훨씬 어린 한국 학생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 이 친구들이 없었다면 1학기도 버티지 못했을 거다. 사실 중간에 공부가 너무 힘들어 휴학을 고민했었다. 그럴 때마다 지도 교수님이 퇴직 전까지 꼭 졸업해야 한다고 다그치셨다. 내가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제시간에 졸업한 건 다 교수님의 재촉 덕분이다.       차오팡은 이날 인터뷰에서 대학원 동기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사진 본인제공]    ━  우연히 열게 된 중국어 학원, 주재원 학생들의 '영업' 덕에 전국 체인으로 성장   중국어 교육 업계에 들어선 계기는? 대학 시절 우연히 한국인 유학생에게 과외를 해준 것이 인연이 됐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향후 진로를 고민하다 2004년 중국 교육부의 '대외 중국어 교사 자격증'을 땄다. 당시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삼성의 글로벌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 '지역전문가제도'를 통해 베이징에 파견된 직원의 연락을 받았다. 장기적으로 중국어 강의가 필요하다는 말에 친구와 학원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께 사업계획서를 브리핑하고 20만 위안을 창업 자금으로 빌려 베이징에 '팜 차이니즈' 학원을 열었다.   학원 확장은 어떻게 했나? 학생들의 적극적인 '영업' 덕분이었다. 당시 철저한 현지 적응 원칙 때문에 한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던 주재원 학생에게 종종 김치찌개, 삼겹살 구이 같은 한국 요리를 해줬다. 그러자 그 학생이 한식을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을 내 다른 주재원들이 학원으로 우르르 찾아왔다. 사실 나는 베이징에 있는 학원 하나 운영하기도 벅찼다. 그런데 이 지역전문가가 중국 여러 도시로 파견되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수업을 열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선전 분원도 이런 요청으로 부랴부랴 열게 됐다. 베이징서 실력 있는 선생님 세 분을 선전으로 보냈다. 그리고 강의할 공간과 선생님들이 지낼 집을 급히 마련했다. 톈진, 상하이 분원도 다 이런 식이다. 밥이든 TSC(중국어 말하기 시험) 대비용 자료든 항상 학생들이 필요한 걸 준비해줬다. 사실 나처럼 기업 고객을 만나지 않는 이상,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중국어 교육 업계는 상당히 고생스러운 편이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차오팡은 이날 인터뷰에서 「10일 중국어 첫걸음」은 바쁜 회사 CEO들을 위해 고안한 교재라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늘 시간 쫓기는 CEO 위해 만든 교재, 韓 대학 산학연 협력에 큰 공헌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땠나? 나는 주로 삼성, SK, LG, BMW 등 대기업의 임원이나 주재원, 주중 대사관의 외교관 등 1분 1초가 아쉬울 정도로 바쁜 분들을 가르쳐왔다. 어느 날 한 기업 CEO의 새벽 강의 시작 전, 한 임원이 와서 급한 보고가 있다며 10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CEO는 단호히 그를 돌려보냈고, 내게는 온전히 1시간 반을 내주셨다. 내 수업을 위해 부장급 임원에게 단 10분도 허용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컸다. 그래서 늘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분들의 중국어 실력을 키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10일 중국어 첫걸음』이란 교재다.   한국에서 출판한 중국어 교재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10일 중국어 첫걸음』은 왕초보 입문자를 위한 책이다. 간단한 발음에서 시작해 단어와 문장을 배우고 대화를 완성해 나가는 구성이다. 대화가 우선인 기존 교재들과 정반대의 접근 방식을 쓴다. 2020년엔 교육 혁신에 적극적인 울산대학교에서 이 교재를 기반으로 내가 개발한 교육 모델 테스트를 6학기에 걸쳐 진행했다. 학생들 반응과 성과가 상당히 좋았다. 오프라인에서 교수의 강의가 끝나면, 중국에 있는 같은 또래 중국어 교육과 학생들을 온라인 방식으로 한국 학생들과 매칭해 말하기 연습을 돕는 방식이다.     차오팡의 저서 「나의 겁없는 중국출장 중국어」는 한때 중국 주재원 필독 교재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사진 본인제공] 교육 모델에 대한 피드백은 어땠나? 내 교재는 10시간 수업 이후 HSK 1급을 따는 게 목표다. 목표가 분명하다 보니, 학생들의 적극성이 올라갔고, 수업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이 모델은 산᛫학᛫연 협력 차원에서 교재비를 제외하곤 모두 무료로 대학에 제공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입문 과정만 수업에 적용했는데, 이번 학기부터는 TSC 시험을 목표로 하는 상위 레벨 수업 과정도 울산대에서 개강할 예정이다. 이번엔 20시간 수업을 듣고 TSC 3~4급을 따는 게 목표다. 강의 체계를 무료로 제공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돈은 베이징에서 주재원들을 가르치며 이미 많이 벌었으니, 이제는 사회에 공헌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것일수록 모두가 알고 또 나누면 더 좋지 않나.        ━  사드와 코로나 영향으로 중문과 학생 줄었지만, 비즈니스 중국어 수요 여전   팬데믹 이후 온라인 수업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예상했던 일인가? 운이 좋았다. 사실 내가 석사 과정에서 온라인 강의 모델을 연구할 때만 해도 다들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때는 코로나 전이라 오프라인 대면 수업이 대부분이었고, 온라인 강의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 팬데믹이 오는 바람에 내가 개발한 온라인 수업 방식이 빛을 보게 된 거다.     차오팡과 한국인 제자들. [사진 본인제공]   최근 중문과 지원자가 줄어드는 게 많은 대학의 공통된 고민인데. 사드 갈등과 관련이 크다고 본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중국의 일부 조치가 국제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도 분명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중문과 지원자가 줄었다곤 하지만 기업의 비즈니스 중국어와 유아용 한자᛫중국어 교육 분야의 수요는 아직 유효한 것 같다. 아이들이 중국어를 배워 두면 미래에 선택지가 좀 더 다양해질 것이라 여기는 학부모들이 여전히 많다. 여러 대학의 중문과도 과거 학술연구 위주에서 비즈니스 중국어 같은 실용 교육 위주로 바뀌는 추세다. 교재 내용도 실용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다락원에서 출판한 『나의 겁 없는 중국 출장 중국어』의 경우도 정말 실제 상황에서 쓸 법한 내용이 많아 한국 직장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중국 교육부 소속 중외언어교류협력중심(中外語言交流合作中心)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한중 문화 비교 콘텐트 제작 프로젝트 '만보중한(漫步中韓)'. [사진 본인제공]    ━  문화 교류는 진정성과 교감이 중요, 한·중 문화 비교 콘텐트 한·중·일로 확대하고파   중국어 교육 전문가로서 문화 교류에 대한 조언이 있다면?   양국이 서로 문화에 대해 진심으로 이해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중국어 교육을 단순한 '문화 수출'로 보면 안 된다. 과거 중국 정부의 문화 전파 방식은 너무 일방적이었다. 서예나 전지(剪紙) 공예 등 중국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가르치려고만 했다. 무작정 중국 문화를 주입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진정성 있는 교류라면 상대방의 문화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서로 교감하는 과정에서 또 상대방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중 문화 교류와 관련된 프로젝트도 참여했다고 하던데. 지난해 중국 교육부 소속 '중외언어교류협력중심(中外語言交流合作中心)'의 지원을 받아 '만보중한(漫步中韓)'이라는 문화 비교 콘텐트 제작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국과 중국 청년들이 주제별로 각자 나라의 문화를 소개하는 영상을 찍고 이를 합쳐 교육용 자료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 콘텐트는 '중문연맹(中文聯盟)' 전 세계 중국어 학습자가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한중 문화 비교 콘텐트 제작 프로젝트 '만보중한(漫步中韓)'을 교육자료 구축 중점 사업으로 지정했다는 중국 교육부 중외언어교류협력중심(中外語言交流合作中心)의 통지서. [사진 본인제공]   박사 졸업 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최근 한᛫중᛫일 관계의 중요성을 느껴 일본 와세다 대학에 방문학자를 신청해 놓은 상태다. 앞서 말한 한·중 문화 비교 콘텐트 프로젝트를 한᛫중᛫일로 확대해 진행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중국어 교육은 한국에만 국한된 게 아니니, 그 대상을 점차 늘려 가려고 한다. 우선은 일본이고 그다음은 영어권도 시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20년 2월, 한국 내 코로나 19 확산 상황과 관련해 중국 인터넷에 '가짜뉴스'가 확산하자 차오팡은 본인 웨이보에 장문의 반박글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사진 본인제공]    ━  한᛫중 간 사소한 오해가 큰 갈등 불러, 문화 비교와 상호 이해가 필수적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과 기대가 궁금하다.   보통 작은 오해가 큰 갈등을 만드는 것 같다. 과거 주중 대사관 사람들을 가르치며 느꼈던 점은 생활 속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오해가 생길 수 있고 또 이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게 정말 중요하단 사실이다. 과거 단오절(端午節) 논란의 경우도 한국이 유네스코에 신청한 건 강릉에서 열리는 '단오제(端午祭)' 행사인데, 잘못된 번역 때문에 양국 간에 큰 오해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예전에 중국 내 한국기업의 중국 직원들을 대상으로 문화 교육을 했었다. 예를 들어 한국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는 건 예의가 없는 게 아니라 문화 차이라고 알려주는 식이었다. 중국 직원들이 한국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한국 동료들에게 반감을 품을 수 있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이렇듯 문화 비교와 상호 이해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중 간에 자주 마찰이 일어나는 건 그만큼 가깝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도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성질을 부리게 마련이다. 상대국에 대한 감정을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또 서로를 더 이해하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관계도 자연스럽게 개선되리라 생각한다.     2020년 2월, 한국 내 코로나 19 확산 상황과 관련해 중국 인터넷에 '가짜뉴스'가 확산하자 차오팡은 본인 웨이보에 장문의 반박글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사진 본인제공]    관련기사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4.15 09:00

  •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K-직장생활' 10년만에 창업...中 청년의 '남다른 한국살이'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한중 기업을 위한 컨설팅과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브릿지 엑스'의 대표 둥린징(董琳璟·36)이 지난달 6일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를 보고 한국 유학을 결심했던 17살 중국 소년은 어느덧 올해로 한국살이 17년 차에 접어들었다. 한국어학당에서 대학교를 거쳐 대기업에 취직 후 10년간의 파란만장한 'K-직장생활' 끝에 자신만의 회사를 세우기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주인공은 '브릿지 엑스(Bridge X)' 대표 둥린징(董琳璟᛫36)이다. 지난달 6일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둥린징은 유창한 한국어로 막힘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이날 둥린징은 회사 경영진이 하루아침에 교체된 돌발 사건, 코로나 직격타로 3년 넘게 휴직한 사연, 소개팅으로 만난 한국 아내에게 2달 만에 프러포즈 받은 이야기, 한국 교수님이 중국 부모님 대신 혼주 역할을 맡아주신 감동 사연 등 거침없는 입담을 과시했다. 한중우호협회에서 11년 넘게 활동 중이라는 둥린징은 자신이 관찰해 온 한국 사회의 모습, 한᛫중 관계에 대한 소신과 포부도 이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재한 중국인 중에서도 '핵인싸'로 통하는 둥린징의 평범하지만, 또 한편으론 남달랐던 한국 생활기를 들어봤다.      중국 산둥성 출신으로 올해로 한국 생활 17년 차라는 '브릿지 엑스' 대표 둥린징(董琳璟·36).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한류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 보고 알게 된 아시아 속 한국의 존재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둥린징(동임경)이고 고향은 중국 산둥(山東)성 타이안(泰安)시다. '태산이 높다'할 때 말하는 그 '타이산(泰山)'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한국은 2006년에 처음 왔고, 올해로 한국 생활 17년 차다. 성균관대학교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한국 대기업에서 1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 '브릿지 엑스'라는 마케팅 회사를 차려서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17살 때, 해외 유학을 고민하다가 호주, 일본, 한국 세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한국으로 정했다. 호주는 영어에 흥미가 없어서 가고 싶지 않았다. 일본은 당시 어린 마음에 중국과 사이가 안 좋은 나라라고 생각해서 가기가 망설여졌다. 우리 동네는 대도시가 아니라 한류가 비교적 늦게 들어온 편인데, 2000년대 초반에 NRG와 H.O.T가 큰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내가 한국 유학을 결심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드라마 '별은 내 가슴에'다. 어릴 때 한국이 한반도에 위치한 나라라고 배우긴 했지만, 사실 한국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아시아에 이렇게 화려한 나라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에 오면 드라마 주인공 '강민(안재욱 분)'처럼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둥린징은 이날 인터뷰에서 대학 시절 다양한 교내 활동에 참가해 한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 했다. 당시는 중국에서 한국어학당을 바로 신청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베이징 소재의 한 유학사를 통해 24명의 중국 유학생들과 함께 한국에 왔다. 내가 다녔던 경희대 어학당에는 한국 대학생들로 구성된 '어학 도우미'들이 유학생을 일대일로 도와주곤 했다. 그 친구들은 어학 도우미를 하면서 봉사활동 점수를 받고 유학생들은 학업이나 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제도였다.   한국어가 한국인보다 유창한데, 처음 배울 때는 어땠나? 겹받침 발음이 가장 어려웠다. 예를 들어 '밟다'의 발음이 '발다'인지 '밥다'인지 너무 헷갈렸다. 주변 중국 친구들은 존칭 사용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학교 다닐 때 교내 행사나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한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직장에선 대외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과 많이 만나다 보니 한국어 실력이 자연스럽게 늘었던 것 같다. 한중우호협회에서도 11년째 활동 중이다.     성균관대 졸업 후, 한국 졸업생들과 함께 여러 구직 활동 참여했다는 둥린징. 사진은 한국 모 기업에서 교육받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이 파란만장한 'K-직장생활'   한국에서 직장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엔 한국 기업들이 중국 진출이나 글로벌화를 활발하게 추진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 한국에 중국 유학생도 상당히 많았다. 나도 여느 대학 예비 졸업생처럼 4학년 때 인턴도 하고, 여러 대기업 공채에도 지원했다. 결과적으로 금호 타이어에 합격했는데 곧 금호아시아나로 발탁됐고 지난해까지 이곳에서 일했다. 알다시피 지난 10년간 금호그룹에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나도 그 안에서 좋은 곳에 배치되기도 하고 때론 좌천되기도 하는 등 여러 풍파를 겪었다. 힘들긴 했지만, 한국에선 가장 오래 일한 직장이고 또 많은 걸 배운 곳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기 항공사가 무척 어려웠다고 하던데. 회사는 지난해 8월 결혼하면서 그만뒀다. 코로나 때문에 거의 3년 넘게 휴직 상태였다. 1년 반은 완전 휴직이었고, 1년 반은 주 1~2일 출근하는 식이었다. 결혼하고 가장이 되니 그 정도 소득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퇴사하고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한국 대기업 금호아시아나그룹에 입사하게 된 둥린징. [사진 본인제공]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중국 사람으로서 한국에 오래 거주하다 보니 한국의 문화를 어느 정도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대기업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중국 대기업들의 한국 진출을 돕고 있다. 중국 회사의 한국 법인 설립과 관련된 컨설팅, 상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 등을 맡고 있다. 회사명인 '브릿지 엑스'에서 '브릿지(Bridge)'는 다리처럼 한᛫중을 연결해준다는 뜻이고, '엑스(X)'는 무한한 미래와 가능성을 뜻한다.      ━  코로나 때문에 결혼식 못 오신 부모님, 혼주 돼주신 한국 교수님에 깊은 감동   한국에서 오래 살면서 느낀 바가 있다면? 한국은 뭐든지 질서 있고 빠르다. 한국 사회는 정말 효율적이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 인간관계도 좀 비슷한데, 소개팅을 예로 들 수 있다. 외모᛫배경᛫관심사 등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의 연락처를 소개받아 빠르게 교환하고, 만남도 시간과 장소만 확정되면 신속하게 이뤄진다. 쓰레기 배출도 비슷하다. 정해진 요일만 버릴 수 있다. 매일 쓰레기를 버리면 인건비도 많이 발생하고,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생활이나 업무 등 모든 면에서 효율성을 강조한다.     지난해 8월 둥린징은 한국인 아내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 본인제공]   아내도 소개팅으로 만났나? 그렇다. 회사 동기들과 만나 '브릿지 엑스'라는 회사명을 짓던 날 한국인 아내를 소개받았다. 2021년 4월에 만나기 시작해 2달 만에 아내의 프러포즈를 받았다. 비싼 시계와 직접 만든 PPT까지 준비했더라. 그렇게 1년 뒤인 2022년 8월에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어땠나?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한국에서 살면서 가장 감동했던 일을 꼽자면 결혼식인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부모님이 못 오셨는데, 대학교 때 은사이신 교수님 내외분이 혼주 역할을 대신 해주셨다. 주례도 아니고 혼주 자리를 흔쾌히 맡아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했다. 이날 친구, 직장동료는 물론 한중우호협회 임원분들까지 다 와 주셨다. 부모님과 친척들이 못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손님이 아내 쪽보다 많을 정도였다. 우리 부모님은 라이브 영상을 통해 중국에서 결혼식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셨다. 아들이 한국에서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모습을 보시곤 크게 감동하신 것 같았다. 나는 한국과 한국 사람들이 좋기 때문에 여기서 계속 살 예정이다.     대학 시절 처음으로 해외로 봉사활동을 나가 태극기가 달린 조끼를 입고 자세를 취하고 있는 둥린징. [사진 본인제공]    ━  17년간 늘 한᛫중 관계 기복 있었지만 요즘 가장 심각, 한류 매력 느낄 기회 없어져   한국에서 힘든 때도 있었나? 팬데믹 시기가 가장 힘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교류가 완전히 중단돼 중국에 있는 친구᛫가족들과 오랫동안 만날 수 없어 너무 외로웠다. 원래 항공사 업무상으로도 그렇고 직원 혜택도 있어서 1년에 70~80번 비행기를 탈 정도로 해외를 자주 갔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면서 해외여행은커녕 2주에 한 번 근무, 그리고 나중에는 '반강제' 휴직으로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창업을 하면서 위기를 이겨냈던 것 같다.   한᛫중 관계도 이 시기에 많이 악화했는데. 나는 한국에 오래 산 중국인으로서 한᛫중 관계의 기복을 여러 차례 실감했는데, 요즘만큼 힘든 상황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라 간의 관계가 좋아야 국민도 혜택을 받는데, 안 좋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한중 기업을 위한 컨설팅과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 '브릿지 엑스'의 대표 둥린징(董琳璟, 36)이 지난달 6일 중앙일보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 시장에서 한국 제품의 매력도가 떨어졌단 말도 나온다. 사실 이 말에 100% 공감할 순 없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제품 자체의 매력도가 떨어진 게 아니라, 중국 사람들이 그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 거다. 중국 소비자들이 한국 드라마나 영화 등 한류 콘텐트를 자주 접해야 화장품이나 다른 여러 한국 제품에 관심이 생길 텐데, 사드 사태 이후 한류의 매력을 느낄 기회가 아예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중국은 자체 시장의 수요를 소화하느라 제품의 품질을 크게 개선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제는 딱히 한국 제품을 찾을 이유가 없어졌다. 게다가 코로나나 비자 이슈 때문에 한국에 와서 성형이나 쇼핑, 여행하고 싶은 중국 사람도 마음대로 올 수 없게 됐다.   평소 한᛫중 관계에 대한 생각과 기대는 정부 차원의 소통도 좋지만 민간 교류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술 교류나, 지방 단체 간 소통, 상업적인 교류 등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양국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내가 한중우호협회의 여러 활동에 시간을 할애해서 참여하는 것도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본다. 비즈니스적으로도 한᛫중 간 다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회사를 열심히 키워보려고 한다.     관련기사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4.08 09:00

  •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한국서 먹히면 중국서도 통한다" 韓 여행업계 중국 베테랑의 뼈 있는 조언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만난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3달 치 용돈과 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무작정 한국에 온 지 어느덧 20년. 한국어학당에 다니며 시급 3500원인 치킨집 아르바이트로 스스로 용돈을 벌어 유학 생활을 이어갔던 독립심 '만랩' 상하이 아가씨는 이제 한국 여행업계 중국 비즈니스 16년 차 베테랑으로 우뚝 섰다. 세계 2위 온라인 여행사 한국지사 대표를 거쳐 2년 전부터 중국 알리바바의 여행 서비스 플랫폼 '플리기(Fliggy᛫飛豬)'에서 새로운 도전 중이라는 장원(蔣雯) 알리바바코리아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의 이야기다. 용돈이 떨어지면 돌아오리라 믿었던 부모님의 기대와는 반대로 꿋꿋하게 한국에 남아 자신만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았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자 여행업계 프로로서 플리기의 국내 사업 기반을 다지는 데 열성을 쏟고 있다. 최근 코로나 방역 해제와 한᛫중 비자 발급 재개로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 28일 장원 이사를 만나 값진 조언과 생생한 경험, 그리고 20년 한국살이의 이모저모를 들어봤다.      중국 상하이 출신으로 한국 여행업계 중국 비즈니스 베테랑으로 꼽히는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치킨집 알바하며 한국어 익힌 中유학생, 16년 차 여행업계 베테랑으로 거듭나    한국에서 주로 무슨 일을 했나? 여행업계에서 쭉 일했다. 한국에서의 첫 직장인 서울 롯데호텔에서 6년, 트립닷컴(Trip.com) 한국지사에서 8년 있었고, 2년 전 알리바바코리아로 이직해 플리기의 국내 사업을 담당하게 됐다. 플리기는 알리바바그룹 산하 온라인 여행 서비스 플랫폼이다. 국내외 교통, 호텔, 숙박 등의 예약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주요 고객층은 중국의 MZ세대들이다.     한국에는 언제 처음 왔나? 올해로 만 20년 됐다. 한국에 처음 온 건 2003년 9월 12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0대 초반에 한국으로 왔으니, 이제 곧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중국에 있었던 기간보다 더 길어지려고 한다.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어릴 때부터 K-POP 같은 한류 문화를 좋아했었다. 당시 유학을 고민 중이었는데, 호주᛫캐나다 등 여러 나라 중에서 내가 직접 한국을 선택했다. 서방 국가보다는 한국이 중국에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한᛫중 수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앞으로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인재가 더 많이 필요하고, 취직도 잘될 거라는 기사를 보게 됐다. 그때 한국에 와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상하이에 일본어 전공자는 많았지만,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한국은 이미 해외에 사는 친척들 도움 없이 내가 홀로서기에 도전해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오게 됐다.     한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 부모님은 단기 유학을 생각하셨다. 사실 대부분의 아버지는 딸을 멀리 안 보내려고 한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와 내기를 한 것 같다. 한국 올 당시 아버지는 딱 3달 치 용돈만 주셨다. 어학당 등록하고 생활비를 쓰다 돈이 다 떨어지면 당연히 중국으로 돌아올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 용돈이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돈과 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무작정 한국으로 왔다. 용돈이 다 떨어진 뒤에는 치킨집 같은 데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시급은 35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장원(蔣雯) 이사는 팬데믹 이전에 다녀온 중국 베이징 만리장성을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특별히 좋아했던 K-POP 가수나 영화가 있나?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브라운아이즈와 엠씨더맥스(M.C the MAX), 이수영 노래를 좋아했었다. 특히 S.E.S 노래는 공부할 때 정말 많이 들었다. 유학 시절 늘 집에 혼자였기 때문에 음악이 큰 힘이 됐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할 때 봤던 영화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한국어가 이렇게 유창하게 된 비결은?   처음 왔을 때, '안녕하세요' 밖에 몰랐다. 오전에 어학당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는 친구들과 계속 스터디를 했다. 저녁에는 주로 아르바이트 일을 했는데, 시간 날 때마다 사장님과 수다를 떨었다. 사실 어학당에는 외국 친구들이 많아 한국인과 만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나는 계속 기회를 찾아 다녔던 것 같다. 한국어를 빨리 배우고 싶어서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했다. 학교 내 모임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요즘 집에서는 주로 어떤 언어를 사용하나? 여러 가지 언어를 다 쓴다. 부모님이 상하이에서 한국으로 오셔서 함께 살고 있는데, 두 아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와는 중국어를 쓰고 한국인인 아빠와는 한국어로 대화한다. 부모님이 상하이말을 하시다 보니 아들들이 중국 사투리를 다 배웠더라. 역시 아이들도 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더 빨리 배우는 것 같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만난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이젠 한국 길이 더 익숙해, '플리기' 기반 다져 中관광객 유치 늘리는게 목표   한국에서 외국인 워킹맘으로 사는 건? 어느 나라에서든 워킹맘은 정말 힘든 것 같다. 예전엔 잠을 많이 못 자서 괴로웠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중이다. 약속이나 미팅이 없을 때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평일은 부모님이 도와주시지만 여전히 쉽지는 않다. 하지만 '엄마가 행복해야 애들도 행복하다'는 말처럼 엄마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도 잘 크는 것 같다. 얼마 전 이직하면서 2달 정도 쉬었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집에서 쉬는 엄마가 어색하다고 하더라.   한국에 살면서 중국과 다르다고 생각한 점은? 한국분들은 뭔가 '공통'된 느낌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한국 사람은 남의 시선에 대해 신경을 쓰는 편인 반면 중국 사람은 좀 더 개별적이고 개성이 강하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유행하는 메이크업이나 패션을 선호해서 스타일이 서로 비슷비슷하다. 중국 사람들은 외모 면에서 남 신경 안 쓰고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꾸미는 편이다. 팬데믹 이전 중국 장시(江西)성 루산(廬山) 정상에 오른 장원(蔣雯) 이사. [사진 본인제공] 한국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도움 주신 분이 참 많다. 내가 한국에 오래 살게 된 건 다 그분들 덕분이다. 직장도 면접 기회를 알려주셔서 지원했다. 사실 공부가 끝나면 뭘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그때 내 주변 귀인들이 한국에 계속 남을 수 있게 도와주셨고, 또 지금까지도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신다. 당분간은 한국에서 쭉 지낼 생각이다. 한국은 제2의 고향이다. 솔직히 지금은 한국 생활이 중국보다 더 편하고, 길도 한국이 더 익숙하다. 중국은 퇴직하고 좀 더 나이가 들면 돌아가고 싶다.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한국어와 중국어 두 언어에 정통했으니, 아마 나는 앞으로도 계속 한᛫중 양국을 오가는 일에 종사할 것 같다. 앞으로 한국에 더 많은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는 게 내 목표다. 플리기가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올해는 본격적으로 한국에 '공급망'을 구축하고, 전체적인 기반을 다질 계획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만난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한국인 인플루언서와 함께 한 랜선 투어 반응 폭발적, 한국에 중국어 능통자 많아     얼마 전 한᛫중 간 비자 중단으로 여행업계가 타격을 받았는데, 플리기는 어땠나? 한국 파트가 좀 주춤하긴 했지만, 사실 플리기는 글로벌한 서비스라 전체 그룹 차원에서 봤을 때 큰 영향은 없었다. 중국인이 다른 나라로 가는 건 정상화됐기 때문에 한국 말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많이 간 것 같다.   한᛫중 간 이런 이슈들이 종종 발생하는데,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상품이나 서비스도 그렇고 항상 준비된 마음으로 내일이라도 바로 런칭할 수 있도록 대비하는 게 답인 것 같다. 지난 3년간 팬데믹 시기에도 계속 새로운 상품을 연구했다. 지금은 타오바오 라이브 커머스와 연계해 한국 여행상품 추천이나 한국 여행지 홍보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만난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에서 라이브 커머스가 큰 인기라고 들었다 코로나 시기에 크게 떴다. 다들 집에 있으니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한국의 홈쇼핑처럼 라이브 커머스에는 상당히 경쟁력 있는 상품들이 소개된다. 나도 플리기에 와서 4차례 라이브를 진행했는데, 직접 방송하기도 하고 촬영이나 편집에도 관여해서 지금은 전체 프로세스를 다 알게 됐다. 라이브 커머스를 할 때 모든 콘텐트를 다 신경 쓰다 보니 내가 작은 영화 제작사의 사장이나 감독이 된 느낌이었다.   라이브 커머스 방송하는 분들은 어떻게 섭외하나?   중국 내에서 인플루언서를 섭외하기도 하고 한국에서 호스트를 찾은 적도 있다. 한번은 고양시와 함께 한 랜선 투어에서 한국인 인플루언서를 초대했는데,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이분이 중국말로 너무 귀엽게 연출하셔서 댓글에 한국 사람이 중국어를 왜 이렇게 잘하냐는 질문이 많이 올라왔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래도 한국분의 중국어가 원어민보다 유창할 순 없으니 조금 걱정했는데, 중국 고객들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라이브 커머스가 한᛫중 교류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요즘 중국어 가능한 한국인 인플루언서가 꽤 많다고 알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 유학하신 분들도 많고, 특히 85년에서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분 중에 중국어가 유창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곳 알리바바 서울지사에도 80% 이상 직원이 중국어를 안다.     중국 상하이 출신으로 한국 여행업계 중국 비즈니스 베테랑으로 꼽히는 장원(蔣雯) 플리기 호텔 부문 이사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알리바바코리아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한국에서 안 통하면 중국에선 더 안 된다, 젊은 층 여행 트렌드 깊이 연구해야   한국 여행업계 베테랑으로서 조언이 있다면? 한국에서 '중국인들은 어떤 여행상품을 좋아하나'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내 대답은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건 중국 사람도 좋아한다'이다. 최근 한국과 중국의 여행 트렌드가 많이 비슷해졌다. 골프᛫서핑᛫스노보드᛫캠핑 등 한국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활동은 중국에서도 똑같이 유행한다. 한국에서 흥행할 만한 아이템을 상품화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주말에 한국 젊은이들이 어디 가서 뭐 하고 노는지 그 여행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업계분들이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더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 한국에서 안 통하는 상품은 중국에선 더 안 된다. 요즘 중국 고객들은 정보가 빠르고 유니크한 상품을 좋아하기 때문에 니즈가 정말 다양하다.   마지막으로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바라는 점은? 한국에 사는 20년 동안 계속 민간 대사의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한᛫중 양국의 문화나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중간에서 조율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중간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많은 분이 중국에 직접 갔다 오면 중국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 나라에 가서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교류하다 보면 자연히 인상이 바뀌게 마련이다. 글로만 보면 표정이나 말투를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떤 생각인지 전혀 알 수 없고, 오해도 많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제 코로나 시대도 끝났으니, 한᛫중 간에 교류가 많아지고 여행업도 발전하길 기대한다.     관련기사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4.01 09:00

  •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 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 '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SNS에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을 올려 화제몰이 중인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이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국 길거리에서 중국 전통춤을 추는 한 청년이 중국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여의도 공원, 신촌, 강남역 등 익숙한 거리에서 몽골족, 위구르족, 다이족 등의 민속춤과 중국 고전 무용을 선보이는데, 짧은 영상 속 '춤선'이 예사롭지 않다. 중국 중앙희극학원 출신으로 얼마 전 중앙대학교에서 현대무용과 석사 과정을 마친 마창성(馬昌盛᛫27)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학 시절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협업한 한᛫중 워크숍을 통해 한국 유학의 꿈을 키웠다는 마창성은 중국 유학생들 사이 이미 유명한 인플루언서다. 30만 팔로워에 인기 영상의 최고 조회수는 무려 6000만에 이른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인터뷰에서 마창성은 왕훙이나 인플루언서가 아닌 무용가로 불리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그리고 한국어를 더 배워서 박사 학위를 딴 뒤 한국 무용단에 입단하고 싶다는 당찬 포부도 밝혔다. 이날 한᛫중 청년 간 문화 교류와 유학 생활 중 느낀 점에서 한᛫중 관계와 중국의 문화 전파에 대한 소신에 이르기까지 열혈 무용학도 마창성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여의도서 춘 몽골춤 영상 조회수만 6000만 회, 왕훙보단 무용가로 불리고 싶어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이름은 맥스(Max), 중국어로는 마창성이다. 장쑤(江蘇)성의 해안 도시 롄윈강(連雲港)에서 왔다. 학부는 중국 중앙희극학원(中央戲劇學院᛫중국 3대 예술 대학 중 하나) 무극공연(舞劇表演) 학과를 졸업했고, 석사는 한국 중앙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2020년 8월 한국에 들어왔고 온 지는 벌써 3년 정도 됐다.   SNS에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을 올려 화제몰이 중인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이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중국 SNS에 올린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이 화제다 더우인(抖音·중국판 틱톡)에 올린 몽골 전통춤 영상은 약 6000만 명 정도 본 것으로 안다. 좋아요는 160만 개가 넘는다. 하지만 스스로를 인플루언서(왕훙)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는 그저 길거리에서 전통춤을 추는 중국 청년일 뿐이다. 그냥 무용가로 불리고 싶다. 영상도 상업적인 목적 없이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와 올리게 됐다.     춤 영상을 올리게 된 계기가 있나? 한국에 온 이후, 한국 사람 대부분이 중국 무용을 잘 모르고 본적도 없단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관심이나 이해가 더 적은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중국 전통춤을 배워온 나로서는 한국 친구들도 그 매력을 느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SNS는 문화를 알리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해서 하게 됐다. 영상을 찍느라 서울 길거리에서 춤을 추다 보면 실제로 많은 분이 멈춰서서 박수와 환호를 보내준다. 내가 추는 게 어느 나라의 어떤 춤인지 와서 물어보는 분들도 많다.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은 중국판 틱톡 '더우인'에서 30만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다. 여의도, 신촌, 강남역 등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본인제공]    ━  그저 무대가 좋았던 13살 꼬마, 전통 무용 넘어 현대 무용까지 섭렵하다    ━      무용은 언제부터 배웠나? 13살쯤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는 좀 늦은 편이다. 중국에서는 보통 빠르면 5~7살, 늦어도 8~10살부터 무용을 배운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부터 춤이 좋았던 건 아니다. 무대가 좋아서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뭔가를 하고, 또 관객들이 좋아해 주는 느낌을 즐겼던 것 같다. 내가 다녔던 예술학교에는 성악᛫악기᛫무용 등 여러 과목이 있었는데, 어릴 때는 노래 부르는 걸 제일 좋아했었다. 그런데 중국 무용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 심오함을 알게 됐고 결국 무용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대학교 때 중국 전통 무용을 전공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사실 중국 전통 무용은 '고전 무용(古典舞)'과 '민족᛫민속 무용(民族民間舞)'으로 나뉜다. 고전 무용에는 '돈황무(敦煌舞)', '한당무(漢唐舞)' 등이 속하고, 민족᛫민속 무용은 중국 56개 민족의 특색이 담긴 춤이다.     중국 중앙희극학원 출신으로 얼마 전 중앙대학교에서 현대무용과 석사 과정을 마친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은 인터뷰에서 몸매나 장애에 상관없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포용성 때문에 현대 무용을 더 좋아한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한국 전통 무용도 배운 적이 있나?   중국에서는 무용 전공이면 대부분 학교에서 한족, 장(藏)족, 위구르족, 몽골족, 조선족 전통춤을 필수과목으로 가르친다. 학부 때 무극과 주임이신 선페이이(沈培藝) 교수님이 한국 전통 무용을 좋아하셔서 본인이 사사한 한국 무용계의 대가 김매자 선생님을 학교에 초청했었다. 사실 전공에서 배우는 조선족 전통춤과 한국 전통 무용은 좀 다른데, 우리는 운 좋게도 김매자 선생님께 직접 배울 수 있었다. 그때는 팬데믹 전이라 문화 교류가 상당히 잦고 또 서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전통 무용과 현대 무용 중 어떤 걸 더 좋아하나? 나이가 들면서 보는 것도 많아지고 생각도 많아지다 보니 점점 현대 무용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전통 무용은 일종의 계승이기 때문에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고 또 그대로 따라 해야 한다. 똑같이 춰야만 잘 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현대 무용은 자기만의 생각대로 춤을 출 수 있다. 포용성도 더 크다. 몸매가 어떻든 장애가 있든 없든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     SNS에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을 올려 화제몰이 중인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의 프로필 사진. [사진 본인제공]    ━  학부 당시 한예종과 진행한 한᛫중 워크숍에서 감명받아 한국 유학 결심       한국에 오게 된 계기는? 모두 잘 아는 사실이지만, 한국 현대 무용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한류 문화도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학부 때 우리 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 간에 연극᛫현대 무용과 관련해서 한᛫중 공동 워크숍을 했는데, 당시 한국분들의 프로정신과 참신한 예술적 표현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때부터 한국에서 더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원을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와서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던데 작년에 '무용여행(舞遊韓國)'이라는 한᛫중 무용 축제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한국과 중국 수강생들에게 몽골 전통춤을 가르쳤는데, 한국 학생들의 열정이 더 뜨거웠다. 이런 수업을 하는 것 자체가 서로의 문화를 널리 알리고 또 교류할 좋은 기회라고 느꼈다. 같은 해 서울국제무용콩쿠르에도 참가했는데, 감사하게도 현대무용 주니어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한국어는 어떻게 공부했나? 한국에 오기 전에 반년 정도 일대일 과외로 배웠다. 막 왔을 때는 거의 초급 수준이었다. 한국어는 계속 배우고 싶어서 이번 새 학기에 한국어 어학당을 신청했다. 말하기 실력을 좀 더 늘리고 싶다. 한국어를 처음 배웠을 때 어순이 좀 달라서 어려웠다. 문화적인 차이랄까.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야 정확한 뜻을 알 수 있는 것 같다.     중국 중앙희극학원 출신으로 얼마 전 중앙대학교에서 현대무용과 석사 과정을 마친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은 인터뷰에서 학부 시절 한중 무용 워크숍을 통해 유학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코로나 확진에 아킬레스건 파열도, 힘든 시기 이겨낸 건 친구들 덕분     ━      한국에서 가장 감동했던 순간은? 한번은 춤을 격하게 추다가 아킬레스건을 크게 다친 적이 있다. 수술 후 발에 깁스해서 거동이 상당히 불편했다. 그때 친구들이 번갈아 가며 매일 집에 와서 영양식을 만들어주고, 내가 다 먹고 나면 설거지에 청소까지 다 해주고 갔다.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친구들이 정말 많이 보살펴줬다.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작년 콩쿠르를 준비할 때다. 당시 아킬레스건이 아직 회복 중이라 기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해 3월에 걸린 코로나 후유증까지 더해져 폐활량이나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안무도 구상해야 했고, 물리치료를 하면서 계속 춤 연습을 해야 했다. 또 학교 과제도 틈틈이 제출해야 해서 정말 힘든 4개월을 보냈다. 수차례 포기하고 싶었지만, 다행히 잘 버텨냈고 좋은 결과도 얻었다.   한국에 살면서 중국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 부분은?   음식이나 문화적으로 다른 점도 많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게 있다면 한국 사람들은 매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같은 옷을 이틀 입으면 밤새 집에 안 갔거나 외박한 걸로 오해하더라. 중국에서는 같은 옷을 며칠씩 입는 경우가 흔하다. 무용학과 학생들의 스타일 면에서도 한국 친구들은 각자의 개성이 더 강한 것 같고, 생각도 통통 튀고 훨씬 자유롭다. 그리고 항상 대담하고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다는 점이 좋았던 것 같다. 매번 수업 때마다 어떻게 저런 독특한 생각을 할 수 있고 개성이 넘치는지 감탄할 때가 많았다.     팬데믹 시기는 어떻게 보냈나? 예전에는 집에 잘 붙어있지 못한 성격이었는데, 이 시기 조용히 집에서 시간 보내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다. 집에서 요리도 많이 해 먹었다. 한국 친구들을 초대해 산둥식 닭볶음 요리(山東炒雞)와 마라룽샤(麻辣龍蝦)도 만들어줬는데 반응이 좋았다.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은 중국판 틱톡 '더우인'에서 30만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다. 여의도, 신촌, 강남역 등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본인제공]    ━  한중 문화 교류 줄어 아쉬움 커, 문화 수출 '짝사랑'처럼 일방적이면 오래 못 가    ━      지금 가장 큰 고민은? 가장 큰 문제는 언어다. 그래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도 또 어학원을 등록했다. 기회가 된다면 중앙대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가 있다면? 단기간의 목표는 박사과정 입학이다. 물론 너무 어렵겠지만 나중에는 한국국립현대무용단 같은 현대무용을 전문으로 하는 곳에 들어가는 게 꿈이다. 모교인 중앙대 C2Dance 무용단의 안무가, 무용수들도 실력이 대단하다. 이런 곳에서 훌륭한 분들께 더 깊이 무용을 배우는 게 목표다. 팬데믹 이후 한᛫중 무용단 간의 교류와 협력도 돕고 싶다. 그리고 해외로 나가 더 멋진 무대에서 무용의 매력과 배움의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SNS에 한국 길거리에서 추는 중국 전통춤 영상을 올려 화제몰이 중인 중국 무용가 마창성(馬昌盛·27)이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중관계에 대한 생각과 바라는 점 학부 시절 나는 한᛫중 공동 워크숍을 통해 한국에 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개인적으로도 얻은 것이 정말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중 간 교류가 주춤하면서 요즘 학생들은 이런 배움과 체험의 기회조차 없는 게 너무 아쉽다. 내가 워크숍 당시 느꼈던 기쁨이나 감동을 요즘 친구들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양국의 문화 교류가 빈번했던 시절을 직접 느껴봤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것 같다. 앞으로는 한·중 관계가 다시 좋아져서 한국의 우수한 문화도 중국에 소개하고, 또 한국 친구들도 중국 문화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내가 한국 유학 기간에 배운 프로의식이나 전문적인 지식을 중국 학생들에게도 가르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더우인 영상을 찍으면서 많은 분이 중국 문화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국의 문화 전파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현실을 보여준 것 같다. 한류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고 있는데, 중국은 문화적 자산이 풍부한 데 비해 약간은 보수적인 것 같다. 그래서 나 한 명이라도 중국 문화와 전통 무용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데 열심히 기여하고 싶다. 문화 수출은 '연애'와 비슷한 것 같다. 짝사랑하듯이 한쪽에서만 쏟아부으면 오래 갈 수가 없다. 반드시 쌍방향 소통이 필요하다. 뭐든지 함께해야 더 아름답기 때문이다.     관련기사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3.25 09:00

  •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중국 신장 출신으로 성균관대와 서울대서 각각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위구르족 부부 김미나(왼쪽, 굴미나 아부두르이무·39)와 마이단(매이단강 오보이·39)이 지난달 21일 서울대학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한 명도 하기 힘든 한국 명문대 의학박사 학위를 두 사람 다 가진 '초 엘리트' 중국 부부가 있다. 중국 신장(新疆)에서 온 위구르족 남편 마이단(매이단강 오보이᛫39,麥爾旦᛫吾甫爾)과 아내 김미나(굴미나 아부두르이무᛫39,古麗米娜᛫阿布都熱依木)의 이야기다. 올해 벌써 한국 생활 13년차라는 마이단과 김미나 부부는 이국적인 외모와는 다르게 유창한 한국어로 그간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놨다. 신비로운 서역 땅 신장을 떠나 서울에 오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한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에서 두 번의 사기, 쉽지 않은 학비 마련, 좌충우돌 육아 스토리까지, 타향살이의 설움을 덜어준 기적같은 은인들의 도움과 한·중 관계에 대한 속마음 등 지난달 21일 화제의 중국 '박사 부부'를 만나 그 풀스토리를 들어봤다.              중국 신장 위구르족 의학박사 부부 김미나와 마이단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첫째 딸 마이지나(麥祖娜·10), 둘째 딸 마이위나(麥維娜·5), 남편 마이단, 아내 김미나. [사진 본인제공]    ━  해외유학을 꿈꿨던 의대 커플, 미래 내다보고 한국행을 결심하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한다. 마이단 : 한국 이름은 마이단이고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왔다. 고향에서 신장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는 2010년에 처음 왔다. 서울대학교에서 성형외과학 박사를 졸업하고 지금은 서울대 의학연구혁신센터의 박사후 연구원이다.    김미나 : 저도 남편과 같은 중국 위구르족이고, 한국에서는 김미나라고 부른다. 같은 해 남편보다 6개월 정도 늦게 한국으로 들어왔다.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피부과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삼성병원 피부과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 성균관대와 서울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 신장 위구르족 부부 김미나(왼쪽, 굴미나 아부두르이무·39)와 마이단(매이단강 오보이·39)의 의사 프로필 사진. [사진 본인제공]   둘은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됐나?   마이단 : 스물두 살쯤 신장의과대학에 다닐 때 만나서 결혼했다. 당시 둘 다 의사가 되고 싶었고, 또 해외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싶다는 목표가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의대에 가는 게 꿈이었는데, 졸업하고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사는 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외국에 나가 공부를 더 하자고 마음먹었다.      한국 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마이단 : 대학교 때 유럽에서 온 한 교수님이 한국에 가서 성형외과를 전공해보는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중국은 성형외과 의사가 많이 부족하니, 10년 후 분명 잘될 거라며 한번 고민해보라고 하시더라. 졸업을 앞두고 아내의 고향에 있는 인민병원에서 1년동안 함께 인턴을 했는데, 가보니 실제로 병원에 '화상과'만 있고 성형외과는 따로 없었다. 그때 중국에 이 분야의 인재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실감했고, 이는 곧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믿게 됐다. 지금 생각하니 그 교수님은 우리가 한국에 오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신 정말 고마운 분이다.      은사의 추천이 있기 전에는 한국에 따로 관심이 없었나? 마이단 : 원래는 일본에 가서 심혈관 분야를 전공하려고 했다. 그래서 방학 때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서 온 교수님께 따로 일본어를 배운 적도 있다. 의대에서는 제2외국어 공부가 필수라 둘 다 일본어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성형외과는 한국이 더 알아준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지막에 한국행을 택했다. 그 당시 이미 모교에 일본 유학을 다녀온 교수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중국 신장 출신 의학박사 부부 김미나와 마이단의 가족사진. [사진 본인제공]     ━  학비와 양육비 부담에 남편 먼저 학위 따고 뒤따라 의대에 들어간 아내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어를 배운 적이 있나? 마이단 : 의대 재학 시절 3~4년 동안은 계속 일본어를 배웠고, 마지막 학년 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신장대학교에 한국 학생들이 꽤 많았는데,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었다. 아내는 약 10개월, 나는 약 3개월 정도 배웠다. 한국에 막 왔을 때 한글을 읽고 쓰기만 가능한 수준이었고 말은 잘 못했다.      한국에 와서는 한국어를 어떻게 배웠나?   마이단 : 나는 서울대 어학당에서 2년, 아내는 성균관대 어학당에서 1년 반 정도 공부했다. 당시 나는 서울대 의대에 꼭 가고 싶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다. 영어와 한국어를 둘 다 잘해야 했다. 어학원에 계속 다니면서 지원했는데, 두 번이나 떨어졌지만 계속 문을 두드렸고, 세 번째에 드디어 서울대에 합격했다. 내가 먼저 석·박사과정을 마쳤고, 아내는 나중에 성균관대 의대에 입학해서 얼마전 드디어 졸업식을 했다.        마이단이 먼저 대학원에 입학한 이유가 있나?  김미나 : 둘이 동시에 학교를 다니기엔 학비가 너무 비쌌다. 장학금도 입학 후 2학기부터 신청할 수 있었다. 서울대는 국립이라 그나마 학비가 좀 저렴한 편이었지만, 육아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나중에 내가 공부할 때는 남편이 많이 도와줬다.       마이단 : 부모님이 중국에서 공무원으로 계시는데, 월급이 60만원 정도였다. 유학 오려고 둘이 고향에서 틈틈이 돈을 모으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중국 신장 출신으로 성균관대와 서울대서 각각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위구르족 부부 김미나(왼쪽, 굴미나 아부두르이무·39)와 마이단(매이단강 오보이·39)이 지난달 21일 서울대학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출국 전 유학 사기만 두 번, 한국 와선 학비 벌러 전단지 알바도     한국에 오기 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김미나 : 유학 준비 당시 중국에서 사기를 두 번이나 당했다. 형편이 어려워 통장 잔고증명서 같은 증빙을 중개업자에게 맡겼는데, 수수료만 떼어가고 가짜 서류를 발급해줬다. 그래서 결국 직접 처리하는 게 낫겠다 싶어 남편이 먼저 한국에 들어왔고, 나는 6개월 후에 뒤따라왔다.          한국에 와서는 주로 어떻게 생활비를 마련했나? 김미나 : 막 한국에 왔을 때는 언어를 몰라 전단지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파트 16층부터 집집마다 한 장씩 붙이며 내려온 적도 있다. 나중에는 식당 같은 데서 일했다. 일이 힘들긴 했지만 그때 한국 사람들과 많이 소통하면서 다른 중국 친구들보다 한국어가 훨씬 빨리 늘었다. 외국인 학생 기숙사에서 중국어를 계속 쓰다보니 이러다간 한국어를 영영 못 배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초반 3개월 동안은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매일 도서관에서 자고, 아침에만 숙소에 들어가서 씻은 뒤 수업하러 가는 식이었다. 나중에는 도서관 경비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고 아침밥을 사주신 적도 있다.      한국어를 배울 때 어려운 점은 없었나?   마이단 : 일본어를 배우다가 갑자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처음에는 너무 헷갈리고 비슷하게 들렸다. 하지만 한자를 많이 알아서 그런지 한국어를 금방 습득했다. 6개월쯤 배우니 한국말 잘한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했다.   김미나 : 나는 3개월만에 그 소리를 들었다. 사실 위구르어와 일본어, 한국어 모두 알타이 어와 관련이 있다 보니 유사점이 많다고 느꼈다. 지금은 우리 둘다 한국어가 제일 편하다.       중국 신장 출신 의학박사 부부 김미나와 마이단의 첫째 딸 마이지나가 KBS 동요 프로그램 '누가누가잘하나'에 출연해 노래하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  둘째 딸 자기가 한국인이라 믿어, 미국가선 김치 찾는 '찐 한국인' 된 부부     두 아이 교육은 어떻게 하고 있나?   김미나 : 첫째 딸은 2013년 생이고, 둘째 딸은 2018년에 태어났다. 큰 딸은 명동 화교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고, 둘째는 한국 어린이집에 다닌다. 두 아이 모두 한국어가 유창하다. 중국어는 학교에서 배우고 있고, 위구르어는 아이들이 말은 못해도 잘 알아들었으면 해서 집에서 최대한 많이 쓰고 있다. 큰 딸은 어렸을 때 중국에서 부모님이 잠깐 키워 주셔서 중국에 대한 이해가 좀 있는 편인데, 이제 5살인 둘째는 자기가 완전히 한국인인 줄 안다.    중국 신장 출신 의학박사 부부 김미나와 마이단의 둘째 딸 마이위나. [사진 본인제공]   한국에 막 왔을 때 음식은 잘 맞았나? 마이단 : 비빔밥 외에는 먹을 게 없었다. 김치랑 백반만 주로 먹었다. 돼지고기를 안 먹고 매운 것도 잘 못 먹다 보니 처음엔 좀 힘들었다. 지금은 거의 한국 사람이 다 됐다. 지난해 미국 뉴욕에 학회를 갔는데 매일 스테이크, 빵만 먹다가 한식집에 가서 김치를 먹으니 그제야 살 것 같더라.   김미나 : 지금은 애들도 한국 음식에 익숙해졌다. 할랄 음식점을 가끔 가기도 하는데, 지금은 주로 집에서 요리를 많이 해먹는다. 훠궈(샤브샤브)같은 중국음식점도 자주 간다. 이태원에서 양고기를 사와서 직접 양꼬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김미나는 이날 인터뷰에서 둘째 아이 출산 당시 산후조리를 도와준 은인인 친구 어머님(왼쪽 네번째)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산후조리 도와준 친구 어머니, 한달 된 젖먹이 맡아준 어린이집 원장에 무한 감동   타지에서 아이들 키우려면 힘든 일이 많을텐데. 마이단 : 둘째가 막 태어났을 때 봐줄 사람이 없어서 37일된 아가를 어린이집에 보내야했다. 의대는 수술이나 진료가 다 끝난 저녁 6시 이후에 미팅이 많은 편이다. 아이 픽업 후 지하철역에서 '바톤 터치' 하듯 아내에게 넘겨주고 급하게 미팅에 간 적도 많다.   김미나 : 2017년 삼성병원에 지원했을 때, 이미 둘째를 임신 중이었는데 알리면 안될 것 같아 일부러 펑퍼짐한 옷을 입고 면접을 봤다. 2018년 2월 초 출산일 직전에 드디어 합격 통보를 받았는데, 기쁨과 동시에 만감이 교차했다. 3월부터 바로 출근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도 첫째가 다니던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이 갓난아기였던 둘째를 흔쾌히 받아 주셨다. 삼성병원에서 일할 기회를 잡은 건 다 원장님 덕분이다.     인덕이 많은 것 같다.   김미나 : 사실 둘째 출산 당시 부모님이 못 오셔서 망연자실한 상태였다. 산후조리를 도와줄 사람이 남편밖에 없었다.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던 한국 친구 어머님이 이를 아시고는 아기 옷 한보따리를 들고 우리집으로 오셨다. 집에 머무시며 손수 미역국도 끓여 주시고 친자식처럼 나를 알뜰하게 챙겨 주셨다. 정말 너무 감동이었다. 아기도 거의 키워주다시피 하셨다. 둘째는 이 친구 어머님을 자기 할머니라고 생각한다.     김미나는 이날 인터뷰에서 둘째 아이 출산 당시 산후조리를 도와준 은인인 친구 어머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고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한국 지도교수 도움에 혁혁한 연구 성과 거둬, 훗날 고향에서 함께 종합병원 여는 게 꿈    ━      의학공부가 어렵지는 않았나?   마이단 : '인공 피부' 연구팀을 이끌어 주신 최태현 서울대 교수님은 은인 중 한명이다. 항상 연구에 관심 가져 주시고, 또 논문이 경쟁력이라고 늘 강조하신 덕에 7년 사이 13편이 넘는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이만큼 잘 자리잡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정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김미나 : 보통 지도 교수님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뵙기도 어려운데, 우리는 거의 매일 교수님과 소통했다. 새벽에 나와서 세포 배양도 손수 보여주시고, 하나하나 직접 가르쳐 주셨다. 나는 모발과 네일 분야를 연구 중인데, 얼마 전에는 6개의 새로운 탈모 치료제 성분을 발견했고 특허도 신청 중이다.     지난달 21일 서울대학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만난 마이단(왼쪽)과 김미나. 부부는 이날 인터뷰에서 언젠가 고향인 중국 신장으로 돌아가 종합병원을 여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언젠가는 중국으로 돌아갈 예정인가? 마이단 : 고려하고 있다. 그동안은 중국에 돌아가면 대학교수가 되려고 논문을 주로 많이 썼다. 요즘 중국에 좋은 일자리가 있는지 물색 중이다. 돌아가려면 실력도 중요하니 한국에서 경험을 많이 쌓고 있다. 나중에 상하이나 베이징에서 일하다가 나이가 들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함께 종합병원을 여는 게 꿈이다.   김미나 : 나는 교수가 되기보단 개인병원을 열고 싶다. 중국에 피부암이나 피부 질환 환자는 너무 많은데, 전문적으로 보는 의사가 많이 없다. 피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 사실 대학 때 전공은 산부인과였다. 남편이 성형외과를 전공했으니 나도 피부과 공부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전공을 바꿨다.     김미나는 중국 SNS인 더우인(抖音, 중국판 틱톡)에서 '미나 박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중국 내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더우인 캡처]    지금 가장 큰 고민이나 도전이 있다면? 마이단 : 나와 아내는 당장 내일이라도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아이들이 한국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게 걱정이다. 아직 중국 문화를 많이 접하지 않아서, 갑자기 돌아가면 충격을 받거나 스트레스가 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미나 : 아이들은 가능하면 한국에서 교육을 하고 나중에 다 큰 뒤에 중국으로 데리고 가는 방법도 생각 중이다.      한·중 관계에 대한 평소 생각이나 바라는 점은? 마이단 : 한국과 중국은 정말 가깝고 많은 부분이 서로 연결된 나라다.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으로만 상대국을 보다 보니 관계가 좀 안 좋아지는 것 같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이야기가 많지만, 요즘은 안 좋은 것들이 더 잘 보이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중간에서 더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얘기, 좋은 소식을 많이 전하고, 한·중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관련기사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3.18 09:00

  •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8학군 아빠' 된 육아고수 중국남자…중대 연영과 출신, 쟈오리징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

      ■  「 “나라의 사귐은 국민 간의 친함에 있다(國之交在於民相親)”한중이 또 다른 30년을 여는 첫해 2023년을 맞아‘이사 갈 수 없는 영원한 이웃’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에 자리잡은 이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방송인 쟈오리징(趙里京·35)이 지난달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완벽주의 8학군 아빠' '열성 아빠' '개포동 백종원'…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중국 아빠 쟈오리징(趙里京᛫35) 앞에 붙는 수식어다. 중국 배우 출신으로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인 무역회사 대표 ᛫ 방송인 쟈오리징은 백종원을 넘보는 요리 실력과 뜨거운 교육열로 방송 이후 큰 화제를 모았다. 아빠들 사이에서는 '육아 고수'로 통한다. 일하는 아내 대신 초등학생 딸과 한 살배기 아들을 24시간 완벽하게 돌본다. 교육을 위해 대치동 근처 개포동으로 이사 온 건 기본, 중국식 찐빵 ᛫ 젠빙(煎餅) ᛫ 장수면 등 매 끼니와 간식까지 손수 건강식으로 만들어 먹인다. 중국 남자 이미지를 새로 쓰고 있다는 평이 자자하다. 지난달 말, 쟈오리징을 만나 완벽한 아빠 이미지에 가려진 '사랑꾼' 면모와 가족 이야기 그리고 최근 한᛫중 간 분위기에 대한 솔직한 속내를 들어봤다.     방송인 쟈오리징(趙里京·35)이 지난달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은행에서 첫눈에 반한 아내, 단 두 번의 만남과 2년의 장거리 연애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됐나? 고향이 한국과 가까운 산둥(山東)성이다. 초등학교 때, 집 근처에 한국 제품을 만드는 공장들이 생겨났다. 아버지가 한국인 사장님들과 자주 만나시다 보니, 덩달아 한국 식당도 자주 갔었다. 사실 한국에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중학교 시절 좋아했던 한국 드라마 〈순수〉 때문이다. 주인공 명세빈 배우가 너무 예뻐서 그때 한국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별은 내 가슴에〉, 〈명랑소녀 성공기〉 등 작품도 재밌게 봤다. 대학 입학시험이 끝난 2006년 여름, 유학을 고민하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왔다. 그렇게 연세 어학당에서 2년 공부하고 나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한국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일은? 당연히 아내를 만난 일이다. 10년 넘게 옆에 있어 주고, 위안이 된 사람이다. 지금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엄마 같은 존재다. 한국에서 아내를 만난 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다.     한국인 아내와는 어떻게 결혼까지 이어졌나? 아내를 처음 만난 건 2009년 말쯤이다. 당시 은행원이던 아내에게 반해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그뒤로 딱 두 번밖에 못 만났는데, 그해 12월 연기 활동을 위해 내가 중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때부터 2년 넘게 장거리 연애를 했다. 당시 영화, 드라마 촬영 때문에 대부분 밖에 있었지만 하루에도 몇 시간씩 통화를 했다. 그때는 메신저가 없어 만 원짜리 국제 전화카드를 거의 매일 한 장씩 썼다. 연애 시작 후, 2010년 드디어 처음으로 칭다오(青島)에서 둘이 만났다. 한국과 약 1시간 거리이다 보니, 2011년에는 아내가 거의 매달 칭다오로 왔다. 그렇게 그해 11월 11일은 중국에서, 2012년에는 한국에서 각각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에 와서 중국과 다르다고 생각한 점은? 결혼 초반에 약간의 문화 차이가 있었다. 중국 부모님들은 99% 자식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반면, 한국 부모님들은 좀 더 독립적이라고 느꼈다. 결혼한 자식을 여전히 많이 도와주지만, 자기 인생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첫째 아이는 돌 지나고 3살까지 중국에서 지내고, 3살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장모님이 한국에서 키워 주셨다. 보통 중국에서는 부모님이 무보수로 손주 봐주는 걸 당연시하는데, 한국에서는 부모님께 용돈이나 선물을 챙겨 드려야 하는 분위기다. 우리 부모님의 경우 명절에 용돈을 드리면 오히려 혼을 내실 수도 있다.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에서 요리하고 있는 쟈오리징. 아이들 매 끼니와 간식을 손수 만들어 먹이는 열정과 상당한 요리 실력 때문에 방송에서 '개포동 백종원'이란 별명을 얻었다. [사진 본인제공]    ━  아버지 닮아 '만능 요리꾼', 아이들과 아내 위해 건강 챙긴다     방송을 보니 요리를 상당히 잘 한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아버지가 요리하시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인지 남자가 요리하는 게 특별히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힘이 넘치는데, 힘든 요리를 왜 굳이 아내한테 시켜야 하나. 꼭 여자만 요리를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아내는 나와 결혼한 후, 혼자 주방에서 라면도 끓여본 적이 없다. 결혼 전에는 나도 결벽증이 있어서 기름 냄새나는 주방에 잘 안 들어갔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니 아버지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리 학원도 다녔다. 지금은 요리가 너무 재밌다.     유기농 식재료를 쓰고, 건강식을 주로 만드는 이유가 있나? 내가 건강해야 아내와 아이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한 미국 영화에서 아빠와 딸이 데이트하는 장면을 봤는데, 문득 내가 너무 빨리 늙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했고 벌써 10년이 넘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도 좋고 피부도 좋아진다. 첫째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식을 훨씬 잘 먹는다. 아이들 식성은 어릴 때 정해진다. 아기 때 입이 적응하면 너무 달고 짠 음식은 자연히 안 먹게 된다.        자녀들에게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어릴 때 부모님께는 어땠나?   어렸을 때는 너무 부끄러워서 부모님께 사랑 표현을 거의 안 했다. 감사하다는 말도 다른 사람에게는 괜찮은데 유독 부모님께는 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식이 생기고 나니, 점점 바뀌는 것 같다. 2년 전부터는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국제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 부모님은 내가 뭘 해도 다 지지해주시는 편이다. 어릴 때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는데, 베이징에서 유명한 감독님께 훈련도 받게 해주시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연극영화과에 간다고 했을 때도 그렇고,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부모님들은 정말 오로지 자식을 위해 사신다. 자식의 행복이 곧 자기 행복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어릴 때 아버님은 절대 칭찬을 안 하셨는데, 최근 한국에서 방송출연한 걸 보시고는 잘하고 있다고 한마디 해주셨다. 정말 뿌듯했다.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중국 아빠 쟈오리징과 첫째 딸 하늘. 쟈오리징은 인터뷰에서 어려서는 부모님께 애정 표현을 잘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사진 본인제공]    ━  한᛫중 피 반반 흐르는 딸, 자신을 한국인이라 믿어 서운하기도         방송을 보니 아이가 공부를 스스로 알아서 하던데, 비법이 뭔가?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 것 같다. 12살인 첫째 아이는 외할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책 읽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 모든 공부는 글을 읽는 게 아닌가. 책을 많이 읽으면 독해력이 생기고, 이해를 잘하면 지식들이 머리로 잘 들어오는 것 같다. 요즘은 딸이 역사에 푹 빠졌다. 올해는 가족과 함께 한 달 동안 중국 전역을 돌며 병마용, 만리장성, 장가계 등에 가볼 생각이다.      자녀 중국어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나? 중국어를 따로 가르치진 않고, 집에서 최대한 중국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국 집에 놀러 오시면 그때는 다 중국어로 대화한다. 쓰는 것 빼면 대화의 70~80% 정도는 알아듣는다. 단어를 조합하고 또 자기 의미를 잘 전달하는 걸 보면 아이들은 정말 금방 배운다는 생각이 든다.      자녀의 국적이나 정체성 고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첫째의 경우 자신이 당연히 한국인인 줄 안다. 하지만 딸이 자기가 100% 한국인이라고 하면 조금 서운하긴 하다. 1년 전부터는 아이들에게 한국과 중국 모두 고향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 국적은 그저 종이에 적힌 글자일 뿐이다. 한국과 중국 피가 반반 흐르니 한국어, 중국어를 모두 모국어처럼 잘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중국과 중국어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노력 중이다.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중국 아빠 쟈오리징. 현재 12살 딸과 한 살배기 아들의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 [사진 본인제공]    ━  한국에 사는 중국인으로서 늘 처신 조심, 수준 낮은 행동은 존중 못 받는다 주변에 당부     방송 후 학교에서의 반응은 어떤가? 아이가 학교에서 엄마는 한국인이고 아빠는 중국인이라는 얘기를 딱히 밝힌 적은 없다. 방송에 나오고 나서야 내가 중국 사람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됐다. 시기가 조금 예민한 만큼 아내는 내성적인 아이가 학교에서 놀림당하거나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반 친구들이 아빠가 너무 멋있다면서 다들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학교 측 초청을 받아서 중국 문화에 대해 강연도 했다. 감사하게도 다들 좋게 봐주셨고, 아이들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요즘 한중 간 분위기 때문에 아무래도 좀 조심스러울 것 같다 솔직히 한국에 사는 중국 사람으로서 요즘 항상 조심하고 신경 쓰면서 지내고 있다. 조금 힘들긴 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오히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기회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중국 친구들에게도 당부하고 싶다. 외국에 살려면 남들보다 뭐든지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주변 지인에게도 수준 낮은 행동은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을 수 없다고 늘 이야기한다. 아무리 분위기가 안 좋아도 중국 사람들이 스스로 솔선수범하면 어느 나라를 가든 사랑받을 수 있다.       방송인 쟈오리징(趙里京·35)이 지난달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쟈오리징은 인터뷰에서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중국 남자, 중국 사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며 ″한국에 오는 중국 유학생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멘토링을 하고싶다″고 밝혔다. [사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  방송활동 조용히 내조해준 아내, 다양한 도전 응원해줘     방송 출연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   프로그램은 아내의 친구가 소개해줬다. 출연은 아내가 적극 지지해준 덕이다. 사실 나는 한국에 사는 중국인 중 나 말고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어도 아내 눈에는 내가 가장 훌륭한 중국 남자였다 보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은 더 안 된다고 추켜세웠다. 사실 과거 JTBC '비정상회담'도 아내가 몰래 지원해서 출연했었다.      부인이 방송활동을 적극 지지해주는 편인가? 평소 아내는 내가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보기에 내 외모도 나쁘지 않고, 건강 관리도 열심히 해서 그런가 보다. 지금 안정적인 사업이 있긴 하지만, 내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보니, 아내 입장에서는 좀 더 많은 도전을 하길 바라는 것 같다. 아내는 내가 단순히 유명해지기보다는 인생을 좀 더 다양하게 살길 바란다. 정신적으로 아내가 주는 힘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것 같다.      연기 쪽으로 더 발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중국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의향이 있나? 항상 머리 속에 연기를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언젠가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평소에도 매일 자기관리를 계속 하고 있다. 올해는 드라마, 영화 촬영을 위해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물론 기회가 된다면 중국 육아 프로그램 같은 데도 출연해보고 싶다. 중국 사람이 해외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는지 그런 경험들을 들려주고 싶다.     평소 엄격한 식단 조절과 꾸준한 운동으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편이라는 쟈오리징은 현재 육아에 전념 중이지만 언젠가는 전문적인 연기자로 거듭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진 본인제공]    ━  중국 사람에 대한 이미지 바꾸려 노력, 중국 유학생 멘토링도 원해     국제 커플은 나라끼리 경쟁하면 신경전이 있게 마련인데, 지난해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어땠나? 한국과 중국이 경쟁하면 마음이 좀 복잡해지긴 한다. 하지만 아내가 워낙 부드럽고 내성적인 사람이라 그런 일로 크게 다툰 적은 없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살다 보니, 이제는 한국이 제2의 고향 같다. 한국과 다른 나라가 경기하면 무조건 한국을 응원한다. 혹시라도 한국과 중국이 부딪히는 상황이면 그냥 TV를 끄고 차라리 안 보는 편이다. 두 나라에 좋은 점이 참 많은데 굳이 나쁜 걸 찾아서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뉴스도 항상 좋은 것만 보려고 노력한다.      동영상 플랫폼이나 SNS 등에 달리는 악플도 일부러 안 보는 편인가? 거의 보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직접 찾아와서 악플을 달거나 DM(다이렉트 메세지)으로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은 많이 없는 것 같다. 첫 방송이 나가고 어느 커뮤니티 글에 700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고 처제가 알려줬는데, 감사하게도 대부분 칭찬과 격려의 댓글이었다. 좋지 않은 분위기에도 이렇게 응원해주시는 분이 많아 정말 감동받았다. 더 열심히 하고, 부끄러운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에서 꼭 이루고 싶은 일이나, 목표가 있다면?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중국 남자, 중국 사람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 내가 어학당에 다닐 때만 해도 일본 유학생이 가장 많았는데, 지금은 중국인 학생이 제일 많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오는 중국 유학생들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멘토링을 해주고 싶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산 선배로서 여러 노하우나 경험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외국인 아빠들의 육아 일상을 다룬 TV프로그램 출연 이후 활발한 방송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쟈오리징. [사진 본인제공]   관련기사 전단지 돌리던 위구르족 부부, 서울대∙성균관대 의학박사 됐다 6000만이 이 영상 봤다…여의도서 몽골춤 춰 대박 난 中청년 [사공관숙의 한국 속 중국]사공관숙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sakong.kwansook@joongang.co.kr

    2023.03.11 06:00

  • 차이나타운의 인기 음식 ‘원턴’, 한국에 오다

    차이나타운의 인기 음식 ‘원턴’, 한국에 오다

    부산에는 ‘18번 완당집’이라는 국숫집이 있다. 1947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니 올해로 창업 70년이다. 역사가 긴 음식점이 많지 않은 한국에선 제법 오랜 점포에 속한다.   시작은 서구 부용동에서 했다. 옛 법원과 경남도청(법원은 연제구 연산동으로, 경남도청은 경남 창원시로 옮겼다) 길 건너편에 있다. 지금은 조용한 주택가이지만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관청가로서 제법 붐비던 곳이었다. 노무현·문재인 법률 사무소가 있던 곳에서도 멀지 않다. 가게가 관청 근처에 있어 부산 근무 경험이 있는 외지 출신들도 이 가게와 그곳에서 내는 메뉴를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요즘은 휴가로 부산에 가서 식도락을 즐기다가 이 가게를 찾는 사람도 많다. 부산 남포동 [사진 셔터스톡] 같은 이름의 또 다른 가게는 중구 남포동 부영극장 맞은편에 있었다. 이른바 ‘남포동 18번 완당집’이다. 원래 1층의 넓은 공간에서 영업했는데 잠시 사라졌다가 인근 건물 지하에 이전보다는 다소 좁은 규모로 부활했다. 부산영화제가 생기면서 외지에서 온 손님들에게 인기였다. 1층에 있을 당시 입구 오른쪽의 작은 방에 여러 직원이 둘러앉아 완당을 빚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지하로 간 뒤로 몇 차례 과거의 규모와 위세가 많이 줄어든 모습이었다. 최근에 부산에 갔더니 광안동 광안 해수욕장 입구에도 ‘18번 완당집’ 간판을 단 가게가 생긴 걸 봤다. 백화점 지하에도 생겼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가게 이름에 ‘완당’이란 메뉴를 앞세웠지만, 부용동 가게의 경우 벽에 붙여둔 메뉴에는 완당이 아닌 ‘발 국수’를 맨 앞에 적어놓았다. 이름이 다를 뿐 사실은 메밀국수다. 국수 제조과정에서 문 앞에 치는 발에 걸어 말렸거나, 반죽한 메밀가루를 천에 싼 다음 발로 밟아 만든 게 아니냐는 상상을 하게 하는 묘한 이름이다. 오래 전 주인에게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느냐고 물어봤더니 메밀국수를 채발 같이 생긴 용기에 얹어준다고 해서 손님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집의 핵심 메뉴이자 고유 메뉴인 완당은 그 다음에 적혀 있었다. 손님들이 아무래도 특색 있는 메뉴인 완당보다 일반적인 음식인 메밀국수를 더 찾아서 그런가 싶다.   이 집 완당 메뉴는 완당만 넣어주는 ‘완당’과 완당에 생라면 비슷한 이 집 특유의 면을 담아주는 ‘완당면’이 있다. 그 외에도 돌냄비우동, 냄비우동, 튀김우동, 유부우동 등 다양한 우동류와 유부초밥과 김초밥이 있다. 메뉴를 보면 면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집이다. 하지만 단골 입장에서 이 집은 어디까지나 완당을 우선적으로 먹으러 가게 마련이다.   남포동 18번 완당집 [사진 중앙포토]  완당은 작은 콩알 정도로 크기가 작지만 고소한 맛이 일품인 소와 무지무지하게 얇고 하늘하늘한 껍질이 일품이었다. 밀가루를 아주 얇게 펴서 껍질을 만드는 기술 덕분이다. 소의 10배가 넘는 넓이까지 편 덕분에 입에 들어가면 호들호들한 것은 물론 쫄깃하기까지 해 식감이 아주 독특했다. 입을 즐겁게 하는 식감이 날 수밖에 없다 이 껍질을 날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기와 채소로 만드는 소의 고소한 맛보다 이 밀가루 껍질 날개의 식감이 오히려 더 자극적이고 유혹적이었다.   완당 [사진 셔터스톡] 완당은 중국에선 떡 혼(餛), 무딜 둔(鈍)자를 써서 중국어 발음으로 훈둔(餛鈍)이라고 한다. 중국식 만둣국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북방에서 쓰는 말이고 광둥을 비롯한 남방에선 운당(雲吞)이라고 쓴다. 만다린으로는 윈쿤, 광둥어로는 완탐이라고 발음한다고 한다. 완탐이란 발음으로 볼 때 음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완당으로 발음이 변했고 이후 한국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짬뽕과 유입 경로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식 원턴은 화교들이 많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이나 영국 런던의 레스터 스퀘어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한국인 입에도 잘 맞아 상사원, 유학생,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영문으로는 통상 원턴(wonton)으로 쓰지만 wantan, wanton, wuntun 등 가게마다 통일되지 않은 다양한 철자로 쓰고 있었다. 홍콩에 가봤더니 한자 표기로 雲吞이 대세였다. 대만에서는 북방에서 쓰는 餛飩에 남방에서 쓰는 雲吞은 물론 扁食이라는 표기도 쓴다고 한다. 중국 남북 모두에 고유의 한자 표기까지 다양하게 쓰는 셈이다. 쓰촨성에선 抄手라고도 쓴다고 한다. 맑은 국물을 쓴다고 清湯이라고 쓰는 곳도 있다고 한다. 중국은 워낙 큰 나라라서 음식문화도 지역별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원턴은 돼지고기, 새우, 채소 등 여러 가지 소를 각각 이용해 실로 다양한 종류가 있다. 특히 새우 원턴이 인기가 높다. 탕은 물론 면을 넣은 누들스프, 만두처럼 따로 내는 튀김까지 다양한  음식으로 낸다. 해외의 중국 식당에선 서구인 사이에도 인기가 높다. 무난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묘한 매력이 있는 음식이다. 화교들이 많이 사는 동남아에선 현지화가 이뤄져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식당에서도 판다. 심지어 해외에서 문을 연 동남아 식당에도 있다. 이런 음식이 일본을 거쳐 한국에 오게 된 것이라면 음식이 문화교류의 산 증인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영국 런던 한복판 차이나타운인 레스터 스퀘어에 있던 원턴 누들수프 가게 ‘왕케이(旺記)’ [사진 셔터스톡] 영국 런던에서 공부할 때 시내 한복판 차이나타운인 레스터 스퀘어에서 원턴 누들수프를 자주 먹었다. 홍콩 사람이 하는 레스터스퀘어의 왕케이(旺記)라는 가게가 단골이었다. ‘값싸고, 양 많고,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중국 식당이다. 시내 중심지 레스터스퀘어의 차이나타운은 물론 깔끔한 주택가인 첼시나 사우스켄싱턴 등 다양한 동네의 중국집을 순례하며 원턴을 고루 맛봤다. 먹을 때마다 부산 18번 완당집을 생각한 것은 물론이다. 홍콩에 가거나 그곳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도 원턴 스프나 원턴 누들스프, 또는 원턴 튀김을 맛봤다.   하지만 중국의 원턴과 18번 완당집의 완당은 서로 조상만 같을 뿐 현재의 모양과 맛은 사뭇 다르다. 면과 국물은 물론 ‘알맹이’라고 할 수 있는 원턴까지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원탄은 대개 큰 대추에서 호도만한 것까지 큼지막한 게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소를 둘러싼 밀가루로 두툼했다. 18번 완당은 후루룩 빨려 들어가면서 입에서 촉촉한 느낌을 주는데 중국 식당에서 먹는 완툰은 조금 뻑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밀가루와 달걀 등을 함께 넣어서 그런가. 아니면 밀가루를 치대고 얇게 미는 기술이 달라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알알이 톡톡 씹히는 새우가 든 원턴은 조금 덜한데 고기 원턴은 뻑뻑함이 더한 듯 했다. 새우 원턴도 신선한 생새우를 쓴 것은 촉촉한 맛이 나지만 값이 조금 재료비가 경제적인 자숙새우(찐새우)를 쓴 것은 팍팍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완당 [사진 셔터스톡] 18번 완당을 상징하는 그 하늘하늘한 껍질 날개는 중국에선 아예 없었다. 두툼하고 뻑뻑한 날개가 조금 붙어있는 건 있었다. 하늘하늘한 껍질 날개를 만드는 기술을 중국인은 개발하지 못했던지 잊어버렸든지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결국 18번 완당집의 것과 비슷한 원턴은 도통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텐데.   이런 경험을 하면서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원턴이 풍토와 사람들의 입맛이 다른 일본과 부산을 거치면서 나름 개량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히 부산 사람의 입맛이 강하게 작용해 현재의 모습으로 변신하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중국에서 나온 원턴이 일본과 한국을 거치면서 다양한 문화 접촉, 문화 접변, 문화 융합, 문화 하이브리드 현상을 거쳐 부산에서 결실을 맺은 게 바로 이 18번 완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산의 전통적인 개방성, 국제성, 그리고 적극적인 성격이 합쳐져서 이 같은 결실을 맺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한중 교류의 깊은 역사의 작은 수확물이기도 하다. 완당 [사진 셔터스톡] 일부 부산 사람은 현재의 18번 완당을 부산의 고유 음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필자도 이런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음식에서 굳이 국적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부산의 18번 완당이 또 다른 문화권으로 퍼져 나가면 또 다른 음식으로 재창작될 수도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18번 완당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대신 문화교류의 산 증인으로 기록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한국 속에서 만나는 중국의 일부로 간직하기 위해서 말이다. 18번 완당은 역사와 음식문화의 작고 소중한 유산이다. 글=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정리=차이나랩

    2017.06.10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