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중앙SUNDAY 창간호부터 연재 중인 중국 근현대사 인물 탐구전

기사 767개

2023.12.30 00:01

총 767개

  • 간첩사건 연루, 10년 복역한 자유주의자 레이전

    간첩사건 연루, 10년 복역한 자유주의자 레이전

    1946년 겨울 개정헌법 초안을 작성하던 중 국민당의 군부대를 방문한 레이전(오른쪽에서 둘째). 맨 오른쪽은 참모총장 바이충시(白崇禧). 김명호 제공 1895년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한 학자가 자유주의(自由主義)라는 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중국과 서구의 차이는 자유의 유무에 있다.” “자유는 서구 부

    2008.08.03 02:06

  • 왼손에 찻잔 20개 …  ‘청두 茶박사’ 올림픽선수촌에 등장

    왼손에 찻잔 20개 … ‘청두 茶박사’ 올림픽선수촌에 등장

    1980년대 말 청두에서 영업하던 천변 찻집(茶館)의 풍경. 김명호 제공 기원이 불분명할 정도로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차를 마셔 왔다. 그러나 워낙 고가였기 때문에 극소수의 기호품이었다. 당대(唐代)에 와서야 생활문화의 한 축을 차지할 수 있었다. 혼례 때 차를 신랑집에 예물로 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08.08.10 03:14

  • 배짱과 기개로 ‘마지막 황제’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다

    배짱과 기개로 ‘마지막 황제’를 평민으로 강등시키다

    루중린(오른쪽)이 두 번째 만난 푸이의 요청을 받고 항상 유념해야 할 것들을 적어 주고 있다. 김명호 제공 1924년 10월 21일 서북군 총사령관 펑위샹(馮玉祥)은 출정 중이던 22여단장 루중린(鹿鍾麟)에게 회군을 지시했다. 루중린은 교외에서 베이징경비사령관과 회합했다. 다음날 밤 성문이 소리 없이 열렸

    2008.08.17 04:06

  • 위안스카이에게 청 왕조 헌납한 룽위

    위안스카이에게 청 왕조 헌납한 룽위

    1912년 1월 퇴위 뒤 태감들과 함께 자금성을 산책하는 룽위(오른쪽에서 세번째). 김명호 제공 룽위(隆裕)는 서태후(西太后)의 친조카였다. 19세에 자금성에 들어와 이듬해 광서제(光緖帝)의 황후가 됐다. 수줍어하고 부끄러움을 잘 탔지만 서태후를 믿고 우쭐거릴 때가 많았다. 광서제는 툭하면 서태후에게

    2008.08.18 11:58

  • 중국 현대사 영웅들 농락한 ‘무서운 천재’

    중국 현대사 영웅들 농락한 ‘무서운 천재’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시절의 위안스카이(가운데). 김명호 제공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오척 단구였다. 다리가 짧고 상체는 통통했다. 항상 팔자로 걸었다. 서 있을 때나 걸을 때 모두 두꺼비처럼 안정감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표정이 풍부하고 몸놀림이 민첩했다. 툭하면 화를 냈지만 생각은 합리적이었다.

    2008.08.24 00:44

  • 80년 회화 인생 “세속 안 따르려니 정말 힘들었다”

    80년 회화 인생 “세속 안 따르려니 정말 힘들었다”

    91세 때인 1984년 상하이 신캉화원(新康花園)에 있는 자택에서의 옌원량. 그의 마지막 사진이다. 김명호 제공 1919년 중국 최초의 미술전람회가 쑤저우(蘇州)에서 열렸다. 전국에 산재한 화가들의 작품 300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엄청난 규모였다. 젊은 서양화가 옌원량(顔文樑)의 기획이었다. 관람객들은

    2008.08.31 02:56

  • 18년간 피란 다닌 1만3491상자의 國寶들

    18년간 피란 다닌 1만3491상자의 國寶들

    고궁박물원 유물들이 1937년 쓰촨의 촨산(川陝)공로를 힘들게 통과하고 있다. 김명호 제공 1925년 10월 10일 오후 2시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선포식이 베이징 고궁의 건청문 광장에서 열렸다. 첫날 1만여 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휴일인 까닭도 있었지만 개관 기념으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8.09.07 02:49

  • 가벼운 ‘명품’은 타이베이, 무거운 ‘국보’는 베이징에

    가벼운 ‘명품’은 타이베이, 무거운 ‘국보’는 베이징에

    1971년 7월 5일 새로운 모습으로 개관한 베이징 고궁박물원. 하루 평균 관람객이 4만여 명이었다. 김명호 제공 수십 년간 타이베이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은 관광객들의 필수코스였다. 변두리 표구사 한번 가본 적 없는 사람들도 한 바퀴 돌고 나서 “중국의 진짜 보물들은 모두 이곳에 있다”는 말을 거침없

    2008.09.13 00:25

  • 외로운 鶴이 되고 싶었던 ‘전쟁의 천재’

    외로운 鶴이 되고 싶었던 ‘전쟁의 천재’

    1947년 하얼빈에서 린뱌오(가운데)가 가오강·천윈·장원톈·뤼정차오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동북국 간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김명호 제공 린위룽(林育容)은 16세 때 한 살 위인 동네 여자아이에게 노골적인 정서(情書)를 보냈다. 말주변이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모욕적인 답장을 받았다. 자존심이 상

    2008.09.20 22:03

  • 漢語병음 표기법 만든 경제학자 … 90세 넘어 책 10권 저술

    漢語병음 표기법 만든 경제학자 … 90세 넘어 책 10권 저술

    1990년대 부인 장윈허(張允和)와 함께한 저우유광. 장은 영문학자며 저명한 곤극(昆劇) 배우였다. 송(宋)씨 3자매와 함께 명성을 떨쳤던 허페이(合肥) 4자매 중 한 사람이다. 김명호 제공 2007년 11월 1일 제5회 우위장장(吳玉章奬) 수여식이 열렸다. 언어문자학자 저우유광(周有光)이 5년에 한 번씩 수여하

    2008.09.27 21:33

  • ‘사람 말이 두렵다’며 자살한 상하이 톱스타

    ‘사람 말이 두렵다’며 자살한 상하이 톱스타

    ‘연화(聯華)’ 이사장이던 허퉁(何東), 홍콩 배우 린추추(林楚楚)와 함께한 완링위(가운데). 김명호 제공 1935년 3월 8일 부녀절 새벽, 중국 무성영화의 톱스타 완링위(阮玲玉)가 25년의 인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신문마다 호외를 발행했다. 평소 스크린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미모에 경탄하던 상하이

    2008.10.04 21:23

  • 천하를 3分했던 장쉐량·장제스·마오쩌둥

    천하를 3分했던 장쉐량·장제스·마오쩌둥

    왼쪽부터 장쉐량, 쑹아이링(쑹메이링 큰언니), 위펑즈(于鳳至·장쉐량 부인), 쑹메이링, 장제스 김명호 제공 시안사변(1936)과 항일전쟁(1937), 항일전쟁의 승리(1945)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은 하나로 연결된 사건들이다. 출발점은 시안사변이었다. 발생에서 수습까지 2주가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 진

    2008.10.12 00:32

  • 장제스 父子와 따로따로 의형제 … 항일전쟁 참전은 좌절

    장제스 父子와 따로따로 의형제 … 항일전쟁 참전은 좌절

    1941년 일곱 번째 연금 장소인 기린동(麒麟洞)에서 감시인들과 있는 장쉐량(오른쪽 첫째)과 애인 자오이디(둘째). 지팡이를 짚은 사람이 감시조 ‘장쉐량 특무대’ 대장 류이광(劉乙光). 김명호 제공 1937년 1월 시작된 장쉐량의 연금은 90년 6월 1일까지 계속됐다. 53년6개월간 17곳을 옮겨 다녔다. 연금 장

    2008.10.19 00:42

  • 장징궈 사망 뒤 대만 떠나 … 91세에 얻은 ‘평민의 자유’

    장징궈 사망 뒤 대만 떠나 … 91세에 얻은 ‘평민의 자유’

    1953년 징상 온천에 연금된 장쉐량. 그가 입은 셔츠는 미국에 간 쑹메이링이 보내준 것이다. 김명호 제공 항일전쟁에서 중국은 승리했다. 장제스를 압박해 거국적 항일운동을 가능케 했던 장쉐량은 여전히 연금생활을 하고 있었다. 각 당파와 동북문화협회·동북정치건설협회 등이 그의 자유 회복을 위해 동분

    2008.10.25 20:51

  • 중국의 산하를 화폭에 … 69년간 ‘한 우물’ 판 거장

    중국의 산하를 화폭에 … 69년간 ‘한 우물’ 판 거장

    1990년 86세의 나이에 자택에서 작품에 열중하는 둥서우핑. 김명호 제공 둥서우핑(董壽平:1904∼1997)은 베이징동방대학 경제학과 졸업 후 군벌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상인으로 변장하고 베이징을 탈출해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산시(山西)성 훙둥(洪洞)현의 서향세가 출신이었다. 역대 명인들의

    2008.11.01 21:42

  • 여섯 살에 전족 거부 … 혁명가 남편엔 “죽음 두려워 말라”

    여섯 살에 전족 거부 … 혁명가 남편엔 “죽음 두려워 말라”

    1916년 4월 9일 도쿄에서 쑨원(앞줄 가운데)·쑹칭링(쑨원 왼쪽) 부부와 함께한 허샹닝(쑨원 오른쪽). 쑨원 앞에 앉은 소년이 허샹닝의 아들 랴오청즈(廖承志). 김명호 제공 쑨원(孫文)의 오른팔이었던 제1세대 혁명가 랴오중카이(廖仲愷: 1877∼1925)는 샌프란시스코의 부유한 화교 가정 출신이었다. 부친은

    2008.11.08 21:46

  • 항일운동 자금 늘 스스로 마련 … 장제스가 보낸 뭉칫돈도 거부

    항일운동 자금 늘 스스로 마련 … 장제스가 보낸 뭉칫돈도 거부

    1953년 2월 헌법기초위원 시절 베이징에서 마오와 환담하는 허샹닝. 김명호 제공 1925년 8월 20일 허샹닝은 랴오중카이와 함께 국민당 중앙집행위 회의에 참석했다. 중앙당부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5발의 총성이 울렸다. 랴오중카이는 “국가와 당을 위해서라면 누가 무슨 반대를 하건 두렵지 않았다. 나를 때

    2008.11.15 20:56

  • 77일 만에 끝난 4인방 재판 … 마오쩌둥의 착오 인정 계기

    77일 만에 끝난 4인방 재판 … 마오쩌둥의 착오 인정 계기

    1980년 11월 특별법정에 선 피고인들. 왼쪽부터 장춘차오·천보다·왕훙원·야오원위안·장칭·황융셩·우파셴·리쭤펑.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毛澤東) 사망 27일 만인 1976년 10월 6일 화궈펑(華國鋒)·예젠잉(葉劍英)·왕둥싱(王東興) 등은 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을 교묘한

    2008.11.22 23:51

  • 국민정부 무능 드러낸 상하이 ‘댄서 시위’

    국민정부 무능 드러낸 상하이 ‘댄서 시위’

    1948년 1월 사회국 문전에서 시위하고 있는 댄서들. 김명호 제공 1948년 1월 말 국민정부는 ‘댄스 금지령’을 발표했다. 상하이(上海) 시장 우궈전(吳國楨)은 행정원에 재고를 요청했다. 행정원장도 공감했지만 이미 법령으로 반포한 후였다. 상하이의 댄스홀 주인들은 일부 업소를 폐쇄하기로 합의했다.

    2008.11.30 01:02

  • ‘帝王의 기상’ 칭찬에 취해 마오쩌둥에게 버림받다

    ‘帝王의 기상’ 칭찬에 취해 마오쩌둥에게 버림받다

    국공전쟁 시절의 가오강(뒷줄 오른쪽 첫째). 김명호 제공 1949년 8월 21일부터 6일간 각계 대표 303명으로 구성된 동북인민대표회의가 선양(瀋陽)에서 열렸다. 인민정부위원회 구성에 합의해 41명을 위원으로 선출하고 폐막했다. 이들은 다음날 열린 위원회 1차 회의에서 가오강(高崗)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2008.12.07 00:12

  • 이홍장, 서태후 호기심 위에 ‘철도시대’를 놓다

    이홍장, 서태후 호기심 위에 ‘철도시대’를 놓다

    이홍장(가운데)이 1880년 탕산(唐山)의 석탄 운반 열차 개통식에 참석하고 있다. 김명호 제공 1863년 상하이에 와 있던 서양 상인들이 장쑤순무(江蘇巡撫) 이홍장(李鴻章)에게 쑤저우(蘇州)에서 상하이까지 철도를 놓자고 제의했다. 그는 외국인이 내지의 영토를 사용하는 것은 국가에 이로울 게 없다고 판단

    2008.12.14 01:58

  • 중국 전통 공법으로 ‘민족철도’ 뚫은 유학파 엔지니어

    중국 전통 공법으로 ‘민족철도’ 뚫은 유학파 엔지니어

    1912년 51세 되는 해 설날의 잔톈유. 김명호 제공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은 패했다. 대놓고 중국을 깔보기 시작한 일본과 서구 열강은 철도 건설과 경영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중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를 헤이룽(黑龍)·지린(吉林) 두 성(省)까지 연결한 후 지선을 다롄(大連)

    2008.12.21 01:31

  • 업자 뇌물과 세도가 방해 뚫고 4년 만에 징장철도 완공

    업자 뇌물과 세도가 방해 뚫고 4년 만에 징장철도 완공

    1909년 10월 2일 난커우(南口)에서 거행된 징장철도 개통식. 김명호 제공 민족철도 건설은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길을 내고, 쇳덩어리를 얹고, 침목을 깔고, 터널을 뚫고, 각종 장비를 구입해야 했다. 눈먼 돈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잔톈유는 자금을 농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온갖 유혹에 시달렸다. 잔

    2008.12.27 23:34

  • 大漢奸으로 처벌받고도 古典번역의 재주를 펼치다

    大漢奸으로 처벌받고도 古典번역의 재주를 펼치다

    1946년 7월 한간재판 법정에 출두하는 저우쭤런. 김명호 제공 1937년 7월 베이징이 일본군에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각 대학의 교직원과 학생들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친형인 루쉰(魯迅)과 함께 중국 문화와 문학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저우쭤런(周作人)은 집안에서 번역이나 하겠다며 베이징을 떠나지

    2009.01.03 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