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기업 CEO·임원 “투자 앞서 북한 배우자” 열기 후끈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기업 CEO·임원 “투자 앞서 북한 배우자” 열기 후끈

     ━  남북경협 채비 나선 경제계   18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 국제회의장에서 중앙일보와 삼정KPMG가 공동 주최한 ‘남북 경제 협력 포럼’ 참석자들이 ‘남북 경협, 이론에서 실제로’를 주제로 경협토크를 진행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수진 탈북민 기업가, 이찬호 법무법인 태평양 외국변호사, 강동완 동아대 교수, 남성욱 고려대 행정대학원장, 조봉현 IBK기업은행 경제연구소 부소장, 유완영 SGI컨설팅 회장, 박영걸 삼정KPMG 상무. [우상조 기자]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관계개선 움직임 등으로 한반도 정세가 요동친 2018년이 저물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 무산으로 다소 주춤하는 분위기지만, 문재인 정부는 내년 대북 접근과 교류·협력의 고삐를 더욱 당길 기세다. 2차 북·미 정상회담과 북한 비핵화 진전이 맞물릴 경우 남북관계와 주변 정세에 근본적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대북 제재의 문턱이 낮아질 경우 금강산 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은 물론 경협과 교역의 물꼬도 트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눈길을 끄는 건 대북 투자와 경제협력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기업과 단체의 발 빠른 움직임이다. “먼저 북한을 배워야겠다”며 CEO와 임원 등이 몰리는 남북 경협 및 대북 비즈니스 포럼 현장을 찾아가 봤다.    어제 오후 서울 명동의 은행연합회관 컨벤션홀.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의 사회로 열린 남북경협 관련 토크콘서트에는 대북 투자 사업가와 탈북민, 경협 전문 변호사와 교수·전문가 등이 패널로 나섰다.   30여년 간 대북투자와 민간 교류 사업을 펼쳐온 유완영 SGI컨설팅 회장은 “북한의 과자나 소비재 등의 상품 질이 최근 들어 크게 높아지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달라진 북한 경제 사정이나 투자환경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기업이 투자하거나 지원하면 무조건 북한이 손을 잡거나 시장을 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란 얘기다. 유 회장은 “대북제재 해제 등으로 대북투자 여건이 조성된다면 중국이나 미국·일본 등에 선수를 빼앗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찬호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대북투자에 있어 우리 내부의 법적 절차도 중요하지만 북한의 관련 법률이나 규정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06년 탈북한 김수진씨도 “비즈니스를 할 때 북한 사람들을 말로 이기기는 힘들 것”이라며 “서류나 계약서 등을 꼼꼼히 준비하는 게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탈북 전 함북 청진에서 5년 정도 밤잠을 줄여가며 장마당 장사를 했는데 1만3000달러 정도를 벌어 상류층 삶을 살았다”며 “하지만 남한에 정착해 사업을 하면서 자본주의식 사업방식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북한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평양 밖 북조선’이란 주제의 발표를 통해 최근 북·중 접경지역에서 관찰한 북한의 변화상을 분석했다. 강 교수는 “평양이나 신의주의 고층 아파트나 대형 건축물을 얼핏 보면 김정은 시대 들어 경제 사정이 놀라울 정도로 나아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망원렌즈 등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실시공과 허술한 안전관리 등 속살이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청중석에선 ‘북한에서도 지적재산권을 보호받을 수 있나’ ‘어떻게 북한 측 사업 파트너 가운데 실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찬호 변호사는 “북한도 베른협약 등 지적재산권 국제협약에 가입해 있고 변리사 사무실도 열고 있다”면서 “하지만 남측의 상표권 등록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부소장은 “차에서 상석에 앉는 사람이나 담배를 거리낌 없이 피우는 인물이 숨겨진 실세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날 토크콘서트는 ‘남북경협, 이론에서 실제로’란 주제로 열린 2018 남북 경제협력 포럼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마련됐다. 삼정KPMG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최한 포럼은 사전 등록한 300여명의 기업체 CEO와 임원, 전문가·시민 등이 참석해 대북 비즈니스 진출에 대한 높은 관심을 확인케 했다. 포럼에선 3명의 전문가가 대북투자의 노하우와 북한 내부 정세 등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는 2018년 남북관계를 ‘무재해, 무사고의 해’로 규정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에 이은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거치며 군사적 충돌은 물론 상호 비난 등 갈등적 요소가 없었던 한 해였다는 평가다. 이를 통해 오랜 기간 남북 양쪽의 발목을 잡아 온 ‘분단 구조의 해소’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전망도 김 교수는 제시했다.   조봉현 부소장은 남북 경협에 성공하기 위한 ‘10계명’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는 ①철저한 준비로 신경영 추구 ②명확한 대북 사업 목표 설정 ③인프라 등 북한 비즈니스 환경 파악 ④추진 능력과 사업성 등 회사 역량 진단 ⑤유망업종 선택 ⑥유리한 비즈니스 지역 선정 ⑦합리적인 대북계약 체결 ⑧합의이행과 신뢰구축 ⑨경쟁력 있는 제품 생산과 판로 모색 ⑩기업 간 공동 비즈니스 전략 모색 등이 꼽혔다. 조 부소장은 유망업종 선정과 관련해 김정은 위원장의 공장·기업소 및 협동농장 현지지도 동선을 주목하라고 권했다. 최고지도자가 관심 있는 아이템이야말로 북한 경제관료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고 성사시키려 하는 사안이란 얘기다.   박영걸 삼정KPMG 상무는 ‘대북 비즈니스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란 주제의 발표에서 “지금 단계는 단순한 형태 또는 설비 제공형 위탁가공이나 교역 수준으로 진행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대북 금융제재나 북·미 관계 문제가 풀린 뒤 법인 설립이나 합영 합작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대북 투자에 본격적으로 나설 경우도 미국·중국 등 해외 기업과 결합된 형태의 경협 모델을 선택해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내년도 대북 비즈니스 추진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김영수 교수는 교류와 협력의 기회가 증가하고 대북 비즈니스 공간이 확장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도 “빠른 경협보다는 ‘바른 경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신중한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조봉현 부소장은 “속도는 느리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남북관계로 가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2016년 김정은이 제시한 경제발전 5개년 계획 목표를 이루려면 내년엔 경제에 더욱 집중해야 하고 실질적 성과도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북한 당국이 남측 기업과의 협력 및 투자 유치에 관심을 보일 것이란 분석이다.   세미나·포럼 형태의 대북 투자·경협 관련 행사 외에도 10차례 안팎의 전문가 특강 등으로 구성된 심층 프로그램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각 대학과 투자 컨설팅 업체, 회계법인 등이 교수와 대북투자 사업가, 고위 탈북 인사 등을 강사로 초빙해 기업체 오너와 대북 담당 임원, 북한과의 교류·협력에 관심을 가진 수강생을 대상으로 전문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방식이다. 중앙일보·JTBC가 주관한 NK비즈포럼의 1기 과정을 지난 13일 수료한 배종배 (주)태양유니스 대표는 “평양의 부동산 시장 변화와 건축 붐 같은 최근의 정보와 함께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의 평양 권력 속사정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대북 투자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2.19 00:05

  • 김정은의 장성택 처형 5년···대북 비판 키운 자충수

    김정은의 장성택 처형 5년···대북 비판 키운 자충수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남북 화해기류에 묻힌 장성택 숙청   김정은 집권 7년 동안 벌어진 가장 충격적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장성택 처형’이 오늘로 꼭 5년을 맞는다. 절대권력을 다지려 고모부를 살해한 ‘청년 지도자’ 김정은(당시 29세)의 모습에 평양 권력 내부는 공포정치의 절정을 맛봤다. 국제사회는 그 잔혹성에 경악했다. 대북 인권감시 기구들에겐 북한 체제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장성택 제거로 권력의 위해요소를 없앴다는 정치공학적 평가와 함께 잠재적 불안요인을 더 키운 것이란 평가가 엇갈린다. 장성택 처형 5년의 북한 권력 흐름과 향후 김정은 체제의 향배를 진단해본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는 흉악한 정치적 야심가, 음모가이며 만고역적인 장성택을 사형에 처하기로 판결하였다. 판결은 즉시 집행되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2013년 12월 13일 새벽 장문의 보도를 내보냈다. 하루 전 열린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에 대한 재판 진행 관련 소식이었다. 장성택에겐 ‘현대판 종파의 두목’이란 굴레가 씌워졌고, “장기간에 걸쳐 불순세력을 규합하고 분파를 형성해 최고권력을 찬탈할 야망 밑에 국가 전복음모의 범죄를 감행했다”는 혐의가 제시됐다. 추종분자들 사이에 장성택이 ‘1번 동지’로 불렸던 점도 거론됐다. 긴 판결문은 사형 선고로 맺어졌고, 그 끝 문장은 선고와 동시에 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됐다는 섬뜩한 내용이 자리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장성택과 그 휘하 세력에 대한 제거는 은밀하고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11월 중순 최측근인 이용하 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 등 노동당 행정부의 실세가 국가안전보위부에 연행돼 공개처형 당했다. 북한 공안기구를 관장하며 쥐락펴락하던 행정부 핵심부가 눈치조차 채지 못한채 몰락했다. 비슷한 시기 장성택의 행적도 묘연해졌다. 우리 국가정보원은 이상징후를 포착해 국회 정보위에 보고했다. 북한은 이후 상황을 생중계하듯 외부에 알렸다. 12월 8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장성택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출당·제명 조치된 후 군관에 의해 끌려나가는 장면이 TV화면으로 공개됐다. 당 간부와 주민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장성택 처단’ 선전·선동을 이어가던 북한은 같은 달 12일 처형 조치를 단행했다.   장성택 사태는 체제 안팎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무엇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막내 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은(당시 국방위 제1위원장)의 후견인으로 낙점한 인물이 하루 아침에 몰락했다는 점에서다. 굴곡은 있었지만 김일성 집권 시기부터 승승장구해온 권력 핵심이란 점에서 파장은 더 컸다. 누구도 김정은 시대의 최고실세로 장성택 부장을 꼽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고모부(고모 김경희의 남편)를 저렇게 무참히 처형하는데 우리 같은 존재는...”이란 생각에 노동당과 군부·내각의 고위 인사들도 벌벌 떨었다. 김정은의 군부 과외교사인 이영호 전 총참모장 숙청 같은 앞서의 상황과는 수준이 달라졌다는 측면에서다.   한국과 국제사회는 더 놀라워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혈족은 물론 친인척도 단숨에 제거해버리는 사화(士禍) 같은 일이 21세기 평양 권력의 중심부에서 벌어졌다는 점에서다. 어릴 적 조기유학을 통해 서방세계를 경험한 젊은 지도자에게 개혁·개방을 기대하던 문명국가들은 할 말을 잃었다. 집권 2년만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잔혹 드라마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북한의 인권실태에 대한 시급하고도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장성택 처형 이듬해 2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발표한 보고서에 김정은과 북한 정권 지도부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우도록 추진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지난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고위급 접촉 등 화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제 최용해 당 부위원장 등 3인을 인권유린과 관련한 대북제재 대상에 올렸다. 제70주년 세계 인권의 날에 실행된 이번 대북제재는 2016년 김정은을 포함시킨 제재조치 이후 4번째다.   처형이 끝나자 북한은 장성택 지우기에 나섰다. 체제 내부에서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건 금기시됐다. 장성택이 주도한 평양민속촌 등 건설·건축 사업은 모두 취소되거나 원상복구됐다. 북한 관영매체는 지금껏 단 한번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5주기를 맞은 올해 장성택 사태는 우리 당국이나 언론의 관심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분위기다. 김정은 체제의 폭압적 실상이나 인권실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던 예년과는 달라졌다. 올 초부터 한반도를 휩쓴 남북 화해·협력 기류, 김정은의 대남 유화제스처와 별로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아예 장성택 처형사태를 두둔하거나 기괴한 논리로 감싸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중견 연구기관 소속 한 대북 전문가는 “김정은 집권 집권 이후 총살·처형된 간부는 140여명으로 김정일 시기 2000명 처형에 비해 더 많은 간부를 숙청한 건 아니다”라는 발표문을 공개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김정은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고 “보수 정부가 ‘김정은이 반인륜적인 행위를 자행했다’는 식의 부정적 여론을 확산시켰다”는 주장만 펼치다가 학계 안팎에서 비난을 부른 것이다. 한 재미 학자는 “사유재산을 챙기고 남쪽 사람들과 친분을 유지하는 등 개인주의적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장성택 쪽에 돌리기도 했다. 장성택 처형을 “이해되지 않는 일”이라 말하면서도 “북한을 악마화화면 안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친정부 성향의 인사도 있다. 김정은의 서울 답방을 환영하는 차원을 넘어 ‘백두 칭송’ 운운하는 건 이런 정서의 극단적 표출이다.   문재인 정부도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공을 들이고 있다. ‘연내 답방’ 성사에 치중하다보니 정작 그의 남한 방문이 어떤 의미를 갖고,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어떤 논의가 오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4.27 판문점 정상회담 이전 남북 정상간 직통전화를 개통하겠다며 시험통화 장면까지 공개한지 8개월이 됐는데도 “북한과 직통전화가 없어서...”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은 안쓰럽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9월 평양 공동선언에 서명한 건 ‘가까운 시일 내내 서울 방문’이다. 그게 ‘연내 답방’이라고 부연한 건 문 대통령이다. 그렇다면 북측에 약속을 이행하라고 촉구하거나 “김정은 위원장이 연내 답방 구두 약속을 지킬 것이라 기대한다”는 수준의 논평을 내고 차분히 답신을 기다리면 족할 뿐이다. 김정은 답방이 요술방망이라도 되는 듯 대통령과 청와대·정부는 물론이고 일부 시민사회와 언론까지 나서 안달하는 건 볼썽사납다. 지난 1년 동안 김정은이 보여온 미소보다 앞서 6년 간의 숙청과 대남 도발·겁박이 훨씬 신경쓰이는 국민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2.12 00:03

  • 김여정 먼저 탔다···김정은 '남조선 체험' 1순위는 KTX 탑승

    김여정 먼저 탔다···김정은 '남조선 체험' 1순위는 KTX 탑승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김정은 답방 위해 풀어야 할 숙제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김정은 서울 답방과 관련한 대통령의 언급이 전례없이 구체적이다. “가능성이 열려 있다”며 말을 아끼는 듯하면서도, 경호·의전을 위한 교통 통제에 국민들이 협조해야 한다는 주문을 내놓는다.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란 말도 나온다. 남북관계와 북한 비핵화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소강상태지만 답방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집중력은 한층 높아진 듯하다. 서울 방문 이벤트가 한반도 정세에 훈풍을 몰아줄 것이란 기대다. 하지만 녹록지 않은 상황이 지뢰밭처럼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약속한 연내 서울 답방을 위해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짚어봤다.    지난 9월 평양 공동선언에는 김정은의 서울 답방 약속이 담겼다. 맨 마지막인 6항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가까운 시일 내로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선언 발표 때 “가까운 시일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올해 안’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현재로서는 서울 방문을 미루거나 취소할 ‘특별한 사정’을 찾기 어렵다. 남북 공동으로 북한 철도 등에 대한 실태조사가 진행 중이고,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 철수와 도로 연결 같은 군사 긴장완화 조치도 속속 이어진다.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연기되고 미국의 대북제재 지속 의지가 재확인되는 국면이지만 판을 헝클어트릴 정도는 아니란 얘기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정상 간의 만남 여부는 논리적 추론이나 예측이 쉽지 않다. 최고지도자의 의지가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을 거머쥔 북한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이 “연내에 답방할지는 김 위원장의 결단에 달려있다”(1일 G20 정상회담 기내 간담회)고 말한 것도 이런 측면에서다. 평양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지켜본 우리측 민간 특별수행원 인사들은 김정은의 의중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언급 내용을 귀띔하고 있다. 방송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은 비공개 발언이다. 서울 답방을 공동선언에 명기한 것과 관련해 김정은은 “문 대통령이 하도 요청해서 간다 했는데, 우리 쪽은 온통 반대입니다”고 운을 뗀 뒤 결국엔 “갈 겁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노동당과 군부의 고위 간부들이 김정은의 서울행을 반대하고 있지만 방문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는 의미다.   서울 답방과 관련해 주목되는 건 김정은이 남한 방문을 적극 희망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평양 정상회담 당시 이른바 ‘태극기 부대’(보수 성향의 단체나 시위대)의 반대 움직임이 제기되자 김 위원장은 “그건 괘념치 않는다”라고 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동생이자 최측근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을 지난 2월 평창 겨울올림픽에 전격 파견한 것도 김정은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 북한은 ‘남조선=적구(敵區)’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처럼 위험하다 여기는 지역에 피붙이를 보냈다는 건 그만큼 남한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의미다. 남한의 실정을 파악해 있는 그대로 보고하라는 뜻도 담긴 듯하다. 김정은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올리려 노심초사하는 간부들과 달리 김여정은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가감 없이 담은 ‘남조선 리포트’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김정은이 초고속열차인 KTX(Korea Train Express)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대목은 흥미롭다. 익명을 요구한 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인사는 “김정은 위원장이 KTX를 타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북측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김여정은 서울~평창 간을 KTX로 오가며 특사 일정을 치렀다. 여동생으로부터 한국의 KTX에 대해 보고받은 김 위원장은 “어떤 기술이 도입·적용됐고, 1㎞ 구간에 공사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등 관련 정보를 꼼꼼히 챙겨달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김 위원장은 2015년 6월 평양 순안공항 리모델링 현장을 찾아 “평양과 공항 사이에 고속철을 건설하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 당국자는 “10대 시절 스위스에서 유학하며 고속철인 TGV를 타고 파리 등지를 관광했던 경험이 작용하는 듯하다”고 풀이했다.   KTX에 대한 북한 측의 각별한 관심은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의 서울 방문 때도 확인됐다. 당시 장성택 당 제1부부장과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 등 일행은 KTX 경부선 구간에 올라 시속 300㎞를 돌파하자 일제히 손뼉을 치기도 했다. 동대문 쇼핑몰에선 “눈이 두 개밖에 없어 더 많이 볼 수 없는 게 안타깝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장성택은 조카인 김정은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됐고, 박남기는 김정은이 주도했던 화폐개혁의 실패 책임을 물어 공개총살 당했다. 개방파의 몰락이라고 불릴만하다.   김정은은 ‘서울에 오면 환영받을 것’이란 우리 측 인사들의 독려에 “남조선에서 환대받을 만큼 제가 해놓은 게 없어서…”라며 자세를 낮췄다고 한다. 모처럼 제대로 된 북한 최고지도자의 현실 인식을 보는 듯하다. 사실 김정은 체제는 집권 이후 지난해 말까지 6년 동안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와 같은 시기를 보냈다. 핵·미사일 위협에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매설 같은 도발은 우리 국민들의 공분을 샀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자초했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전면에 나서 ‘서울 핵 불바다’ 발언을 쏟아내고, 대남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게 자충수였다. 개혁·개방 노선을 기대했던 우리 국민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다. 지난 1년 동안의 유화제스처 보다는 앞서 6년간의 도발과 위협이 더 김정은 체제의 실체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게 사실이다.   이제 김정은 앞에는 ‘서울 답방’이란 허들이 가로놓여 있다.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넘지 못한 장애물이다. 김정은 언급대로 ‘태극기’ 시위대나 극소수 친북·찬양 세력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김정은의 서울 행보를 TV 생중계로 주시할 대다수 국민들의 여론 향배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서울행에 앞서 5년 넘게 강제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 등 우리 국민 6명을 돌려보내는 건 꼭 이행했으면 한다. 자신의 입으로 쏟아낸 대남 위협 발언에 대해서도 적정 수준의 유감 표시가 필요하다. 북핵 문제에 대한 전향적 메시지도 준비하면 좋겠다. 그래야만 서울로 오는 노정이 열릴 수 있다. 비단길은 아니더라도 가시밭을 면할 수 있는 방안이다. 어물쩍 넘기려다간 ‘최고존엄’에 생채기가 날 수 있고, 우물쭈물하다간 게도 구럭도 다 놓칠 수 있다.     정부도 김정은 맞이에 최선을 다하고, 지켜야할 대북원칙과 국민 여론도 챙겼으면 한다. 문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정말 쌍수로 환영해 줄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지만 대통령과 정부가 어떻게 하느냐는 더욱 중요하다. 김정은 답방이 또 한 번의 떠들썩한 이벤트가 아니라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향한 발걸음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2.05 00:0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백두칭송’에 탄식한 태영호 “北서 일주일만 살아봐라”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백두칭송’에 탄식한 태영호 “北서 일주일만 살아봐라”

     ━  민주투사 자처했던 그들…북한 인권엔 ‘침묵의 카르텔’     북한 인권 실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라 안팎으로 봇물을 이루고 있다. 유엔총회 인권 담당인 제3위원회는 이달 중순 대북 인권결의안을 콘센서스(전원 동의)로 채택해 내달 총회로 넘겼다. 국회는 국가인권위원회 측에 김정은 체제의 열악한 인권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정치범 수용소 즉각 해체’ 등을 요구하는 인권 단체 성명도 잇따르고 있다. 그런데 북한 인권 이슈에 유독 침묵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와대와 정부, 친여 성향이나 관변 단체 등에 포진한 소위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다. 한때 민주화와 인권 수호의 투사를 자처했던 이들이 유독 북한 인권 앞에선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게 된 이유는 뭘까.   요즘 매주 화요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선 북한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릴레이 모임이 열린다.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약칭 한변)을 이끄는 김태훈 변호사가 2014년 10월 시작한 화요집회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정부가 적극 나서줄 것을 요구한 어제 행사가 77번째 모임이다. 앞서 정치범 수용소 해체, 북한 억류 국민 석방, 국군포로 송환을 촉구하는 주간 모임이 이어졌다. 김 변호사는 “2016년 3월 여야 합의로 북한 인권법이 공포되고, 같은 해 9월 시행에 들어가면서 잘 될 것이란 기대감에 집회를 접었는데, 지난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직후 재개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가 북한 인권 개선 등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김정은 서울 답방이나 제재 해제 같은 사안에만 몰입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북한 인권법 제7조는 ‘북한 인권 증진에 관한 중요 사항에 관하여는 인권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만 3차례의 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도 정부는 북측에 이 문제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산림 지원이나 스포츠·예술단 교류 같은 문제에만 치중했다는 지적이다. 북한에 억류된 6명의 우리 국민도 기약 없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13년 북한 당국에 불법 체포된 김정욱 선교사는 5년이 넘었다. 대북 인권단체들은 김 선교사 등 억류자 석방과 정치범 수용소 해체, 국군포로 생사 확인과 송환, 강제 북송 탈북민 처벌 중지, 전시 및 전후 납북자 생사 확인 및 송환, 이산가족 자유왕래를 정상회담 의제에 포함해 줄 것을 촉구해 왔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북한 인권 문제를 적극 제기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건 오히려 국제사회와 관련 기구다. 그 중심축은 유엔 대북 인권결의라 할 수 있다. 지난 15일 소위를 통과한 결의안은 2005년 첫 채택 이후 14년째다. 결의안에 담긴 내용은 북한의 열악한 인권 실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북한에 오랜 기간에 걸쳐, 그리고 현재도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중대 인권침해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즉각적인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인도주의에 반(反)하는 범죄행위에 가장 책임 있는 자에 대한 선별적 제재 등 2014년 북한 인권조사위(COI) 결론과 권고사항을 검토해 책임 규명을 위한 조치를 취하라”고 강조하는 대목이다. ‘가장 책임있는 자’라는 표현이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인권 문제가 국제사회의 비판 대상에 오르자 북한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대북 인권결의 채택 현장에서 김성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인권 유린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일부 탈북자들에 의해 조작된 거짓 주장”이라고 말했다. 대남 선전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남조선 당국이 외세와 작당해 동족의 잔등에 칼을 박는 짓을 했다”며 문재인 정부를 압박하고 나섰다. 북한 인권과 관련 국제사회가 이른바 ‘최고존엄’인 김정은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 평양 지도부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최근 공개된 1978년 6월 한·미 정상회담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나눈 대화록은 인권 문제와 관련한 교훈을 던진다. 한국의 인권 상황에 우려를 제기한 카터에게 박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위협 등 한국적 특수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긴급조치 9호를 그대로 두겠다는 게 당신 답변인가’라는 카터의 압박에 결국 “무기한 유지할 의도는 없다. 당신의 충고를 듣고 그런 방향으로 더 노력하겠다”고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에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게 남북관계를 해치고 북한을 자극하는 일이라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되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탈북 인사나 북한 민주화 단체를 지원하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자금 유입에 대해 우리 사회 일각에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 원조기금(NED)’ 등이 반북 활동을 부추기는 불순한 자금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주화·인권 운동을 펼치며 ‘타는 목마름’을 호소하던 우리 인사나 관련 기구에 이 돈은 오아시스 역할을 했다. 대북정책을 총괄했던 한 원로 인사는 “우리 진보세력의 특성은 너무 자기들 편하게 인권을 생각한다는 점”이라며 “독재와 싸우겠다면서도 그 극단이라 할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다”고 지적했다.   황장엽(2010년 사망) 전 노동당 비서는 한국 망명 후 북한 전문가들과의 대화에서 ‘자유 대한민국에 온 뒤 가장 좋다고 느껴지는 건 무엇인가’라고 묻자 “토요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라고 말했다. 소위 ‘생활총화’로 불리는 자아비판 모임은 주로 토요일 기관이나 직장 단위로 이뤄진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김정일·김정은을 제외하고는 고위층도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하는 자리라고 황 전 비서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주기적인 상호비판은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억압하고 인간을 위축되게 만든다는 게 황장엽 전 비서의 지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생생한 증언은 국민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불과 1년 전까지 한반도를 전쟁공포로 몰아갔던 김정은의 핵과 미사일 위협도 망각된 지 오래다. 그 자리엔 남북 정상회담 열기와 북한 예술단의 공연 음악, 스포츠 단일팀 붐이 자리했다. 무비판적인 대북 관련 말과 행보가 이어지더니 아예 김정은을 노골적으로 찬양하는 세력까지 등장했다. ‘백두칭송’ 운운하는 이들 주장에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북한에 가서 일주일 정도만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과거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사들이 북한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김태훈 변호사에게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근본적으로 북한 인권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겁니다. 인권 대변인을 자처했던 사람들이 최악 상태인 북한 인권에 일언반구 없는 상황에 자괴감을 느낍니다. 몰라서가 아니지요. 알면서도 외면하는 겁니다. 훗날 북한에서도 독재체제가 사라지고 민주화의 봄이 찾아온다면 북한 주민들은 이렇게 따져 물을 겁니다. ‘우리가 그처럼 고통받을 때 당신들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고’ 말이지요.”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1.28 00:02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남북 철도·도로 혈맥잇기 … 이벤트 아닌 효율이 먼저다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남북 철도·도로 혈맥잇기 … 이벤트 아닌 효율이 먼저다

     ━  남북 철도·도로 연결 ‘재탕’ 논란   낡은 레코드판을 다시 돌리는 느낌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기적 소리가 또 울린다. 너무도 쉽게 망각되는 요란한 이벤트가 줄을 잇고 있다. 고위 당국자 간 논의와 줄다리기까지 연출된다. 남북 사이의 철도·도로 연결 문제를 둘러싼 최근의 분위기를 두고 하는 얘기다. 이미 11년 전 혈맥을 잇는 공사를 마치고 철마까지 달렸는데 다시 무슨 ‘연결’을 하겠다는 것인지 어리둥절해진다. 왜 이런 일이 생겼고, 무엇이 문제일까. 내로라하는 인프라 분야 전문가들이 모인 ‘한반도 국토 포럼’ 현장을 찾아 진단해봤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12월 11일 경기도 파주 도라산역에선 ‘역사적인’ 행사가 열렸다. 경의선 철길 남북 간 27㎞ 구간이 완공돼 이곳에서 북측 판문역까지 열차 운행이 이뤄진 것이다. 6·25 전쟁으로 멎었던 열차가 56년 만에 다시 달렸다. 첫 열차는 남측에서 싣고 간 도로 공사용 경계석을 판문역에 내려놓고,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신발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남북 화해·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물품을 다시 이어진 철길을 이용해 수송할 수 있게 됐다는 데 초점이 쏠렸다. 남북 경협과 교류에 큰 획을 긋는 획기적 진전이란 청와대와 정부의 의미부여가 나왔다. 동해선 25㎞ 구간도 연결돼 같은 날 시험운행이 이뤄졌다. 공중파를 비롯한 방송 매체가 앞다퉈 생중계하고 신문·통신이 관련 뉴스를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정부 당국자와 관련 업자들 사이엔 발설하기 힘든 고민이 시작됐다. 당장 이틀째부터 화물 열차 컨테이너에 실어나를 물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트럭을 이용하면 남한 쪽에서 곧바로 개성공단 내 생산라인을 오갈 수 있는데 굳이 번거롭게 열차를 이용할 업체는 없었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 연구기관 관계자는 “열차로 화물을 보내려면 트럭에 물건을 실어 경기도 의왕의 내륙컨테이너 기지로 간 뒤, 열차에 옮겨싣고, 다시 판문역에서 화물차량으로 환적해 개성공단까지 가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통일부는 “어렵사리 남북이 합의한 사안인데 빈 차로라도 운행하는 게 중단하는 것보다 낫다”고 버텼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런 방침 때문에 아무것도 실리지 않은 ‘깡통열차’가 주 5회(토·일요일 제외) 남북을 오갔다. 이듬해 12월 북한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며 중단할 때까지 이뤄진 열차 운행은 220회(편도 440차례)에 이른다. 하지만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실어나른 화물은 318t에 불과했고, 화물 컨테이너가 운행된 건 17차례에 31량 수준에 그쳤다. 10번 운행할 때 한 차례 남짓할 정도로 화물 컨테이너가 운행된 것이다. 당초 기관차에 10개의 컨테이너를 달아 운행할 계획이었지만 화물이 없는 경우엔 기관차만 다니는 모양새가 됐다.   철도·도로 연결 문제가 다시 이슈로 떠오른 건 지난 4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다. 판문점선언은 ‘민족 경제의 균형 발전’을 표방하면서 “1차적으로 동해선 및 경의선 철도와 도로들을 연결하고 현대화하여 활용하기 위한 실천적 대책들을 취해 나가기로 했다”고 명시했다. 이런 합의에 따라 6월엔 철도·도로 분과회담이 열려 남북 공동 점검과 조사에 의견접근이 이뤄졌다. 7월과 8월에는 북측의 철도 연결구간과 고속도로에 대한 양측 전문가 공동조사가 펼쳐졌다. 지난달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선 철도·도로 연결과 현대화를 위한 착공식을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남북 정상이 판문점선언에 철도·도로 연결 관련 합의를 담으면서 ‘10·4 선언’을 강조한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10·4 선언의 계승에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교통 및 인프라 분야 전문가 그룹에선 “10·4 합의의 내용과 철도·도로 연결 및 과거 운행 이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청와대와 대북 부처 당국자들이 문재인 정부 들어 북측과 철도·도로 연결을 다시 의제화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한 관계자는 “대북 부처 회의에서 일부 전문가들이 ‘재탕삼탕식 철도·도로 연결 이벤트화는 문제’라고 지적했지만 당국 쪽에서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고 귀띔했다.   전문가와 관련 업계에서는 남북 경협과 교류·협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게 철도·도로 인프라 건설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지난 19일 한국공학한림원이 주최한 ‘한반도 국토 포럼’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 논의됐다. 최기주(아주대 교수) 대한교통학회장은 ‘남북 교통 인프라의 상생협력을 위한 정책제언’이란 주제발표에서 “5300㎞의 북한 철도망 중 70%가 일본강점기 건설돼 선로상태가 엉망이고, 열차가 시속 30~40㎞ 수준에 그친다”고 말했다. 도로 포장률도 10%에 불과하고, 차량은 28만5000대로 남한(2180만 대)의 1.3% 수준이란 얘기다.   이날 포럼에서는 침목이 부족해 통나무를 그대로 베어다 받쳐놓은 철로와 녹이 슬어 구멍이 숭숭 뚫린 화차 등 북한 철도 실상을 보여주는 사진이 공개됐다. 한 전문가는 “침목과 자갈이 부실한 데다 레일을 고정해주는 체결장치가 엉성해 고속주행할 경우 기차가 좌우로 요동치는 등 위험이 따른다”고 설명했다. 북한 열차가 마라토너나 자전거 수준의 속도밖에 내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대북제재가 대북 인프라 지원의 최대 걸림돌이란 분석도 제기됐다. 이종석 휴다임건축사사무소 대표는 포럼 토론에서 “철도·도로 부문에서 새로운 세리머니를 하고 싶어하지만 제재 때문에 한 발짝도 못 나가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건설·건축과 인프라 분야에서 북측이 파트너를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고충도 토로됐다. 이재완 한국엔지니어링협회장은 “조선건축가동맹이나 백두산건축연구원 등이 있지만 북한의 인프라 건설을 실제 주도하는 건 군부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힘을 집중하고 있는 북한 철도·도로 현대화 문제를 두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 “경의선·동해선 철도와 도로 연결을 올해 안에 착공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또 남북한·중국·러시아·일본·몽골에 미국이 참여하는 ‘동아시아 철도공동체’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련국 호응이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철도를 당장 우리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거나 국제협력을 강조하다가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창무(서울대 교수)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장은 “모든 분야의 개량보다는 현재 북한 실정상 문제가 되는 레일과 침목 교체 등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1.21 00:04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10년간 北으로 간 감귤 5만톤···받았다는 北주민 얼마나 될까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10년간 北으로 간 감귤 5만톤···받았다는 北주민 얼마나 될까

     ━  특권층과 군부에 빼돌려진 감귤   제주산 감귤이 북한에 갔다. 200t에 이르는 물량으로 10kg짜리 박스로 2만 개다. 철통 보안 속에 준비 작업이 진행됐고, 이번 주 초 이뤄진 북송에는 공군 수송기까지 동원돼 말 그대로 ‘군사 작전’을 방불케 했다. 청와대는 지난 9월 남북 정상회담 때 북측이 송이를 보내온 데 대한 답례 차원일 뿐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한다. 따뜻한 섬 제주의 감귤을 통해 남녘 동포의 마음이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될 것이란 기대감도 내비쳤다. 과연 그럴까. 대북 감귤 지원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문재인 정부 대북 접근 방식의 문제점과 남북 관계 현주소를 짚어본다.    감귤 대북 지원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남북 정상회담의 물꼬를 트기 위해 공을 들이던 김대중 정부가 집권 이듬해인 1999년 초 제주산 감귤을 북측에 보냈다. 노무현 정부 때까지 10여 년에 걸쳐 전달된 물량은 감귤 4만8328t 수준이다. 제주산 당근 1만8100t도 함께 갔다. 북한에서 ‘신비한 섬’으로 여겨지는 제주의 풍미를 북한 동포들에게 전하고, 남북 화해와 협력의 기운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란 취지에서다. 감귤 구입과 수송비 등에 230억원의 국민 세금이 쓰였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하지만 우리 대북 정보기관에 평양 내부의 이상 징후가 곧 포착됐다. 보내진 감귤 대부분이 노동당과 군부를 비롯한 권력 기관과 특권층에게 흘러 들어간다는 첩보였다. 김정일(2011년 사망) 국방위원장이 충성 유도를 위해 선물로 공급하고 있는 정황도 드러난다. 당근의 경우 노동당 간부 식당 등으로 흘러가 주스를 만들거나 요리 식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이런 움직임을 확인한 국가정보원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청와대에 이를 보고했고, 결국 대북 지원은 중단됐다. 통일부 당국자는 “당시 제주 출신이던 현인택 통일부 장관도 국정원 측의 구체적 정보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더 이상의 감귤 북송은 무의미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런 북한의 전력 때문에 이번 대북 감귤 지원에 대해서도 우려가 제기된다. 김정은 정권이 감귤을 특권층 몫으로 또다시 빼돌리는 것 아닌가 하는 측면에서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대규모 지원이 전격적으로 이뤄진 데 대해 “대량으로 보내 되도록 많은 북한 주민들이 맛보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기대에 북한이 부응할 가능성은 적다는 게 대북 정보 관계자의 전언이다. 한 탈북 인사도 “북한 당국이 감귤을 일반 주민에게 나눠준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어떻게 분배했는지는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다. 통일부는 “북측이 알아서 잘 활용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이다.   북한 관영 선전 매체들은 제주산 감귤 지원에 대해 아예 침묵하고 있다. 통일부는 그제 브리핑에서 “북한의 메시지나 반응은 없었다”고 밝혔다. 북한에 보내진 감귤은 아무런 표기가 없는 흰색 종이 박스에 담겼다. 별도의 설명을 하지 않으면 남한에서 북송된 감귤이란 걸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제주산’이란 표시와 감귤 사진이 실린 포장 그대로 북한에 보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대북 쌀 지원 때는 우리 국민이 세금으로 북녘 동포를 위해 보낸 것이란 점을 알리기 위해 40kg들이 포대에 ‘대한민국’이란 글자를 큼지막하게 새겨 넣었다. ‘백지 포장’은 지나친 대북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대북 수송에 우리 군을 동원한 대목도 부적절했다는 소리가 군 안팎에서 나온다. 지난 11일부터 이틀간 이뤄진 수송 작전에는 공군 C-130 수송기 4대가 투입됐다. 특권층으로의 전용이 우리 정보 당국에 의해 확인된 바 있고, 논란이 재연될 소지가 큰 상황에서 군 운송 장비와 장병을 내세운 건 부적절했다. 청와대와 정부는 민항기 이용이 어려운 대북 제재 상황이라 불가피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간 트럭을 이용해 판문점 육로를 통한 전달하는 등의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군을 개입시킨 건 비판 받을 소지가 크다. 대한민국 국군의 위상과 장병들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군 수뇌부가 입장을 분명히 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안팎에서 나온다.   국방부의 처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기개 있는 엘리트 장교는 장성 진급 이전 대부분 군 밖으로 퇴출당했다”는 한 영관급 장교의 말은 정권에 휘둘리는 우리 군의 단면을 엿보게 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한 외교 안보 실세 인사가 “군 고위층 장악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공연한 걱정이었다. 진급과 보직을 쥐고 흔들었더니 다 납작 엎드려 따라오더라”고 말한 대목이 떠올라 씁쓸하다. 9월 남북 정상회담에 수행한 당시 국방장관이 김정은의 제주 방문 문제가 화제에 오르자 그 앞에서 “해병대를 동원해 한라산에 헬기장을 만들겠다”고 언급한 건 서막에 불과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감귤 대북 지원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시점이다. 평양 정상회담 당시 이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이 우리 경제·기업 인사들에게 “냉면에 목구멍에 넘어 가냐”는 핀잔을 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국민 대북 여론은 들끓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청와대 핵심 참모들은 제주 밀감밭에서 은밀한 수확 작업에 나선 형국이다. 감귤은 11월이 제철이라 가장 맛있기 때문이라는 게 관계 당국자의 설명이다. 감귤이 최고인 시절은 알면서도 국민들의 마음이 어느 절기에 가 있는지는 관심이 없는 듯한 분위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재인 정부가 통치 이념의 중심축으로 삼아온 ‘사람이 먼저다’를 빗대 ‘북한 사람이 먼저다’라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우리 경제 상황이나 국민 대북 정서보다는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을 우선 챙기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남녘의 특산물을 북녘 동포들과 나누는 것 자체를 탓하는 게 아니다. 넉넉한 걸 나누고, 서로 부족한 건 도와주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은 남북 화해와 교류로 가는 초석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국민감정과 분위기는 더 중요하다. 여론 수렴은 무시한 채 국민 세금으로 펼치는 ‘깜짝쇼’는 지금까지로도 충분하다.   감귤을 챙기려 북한은 대남 기구인 조평통 부위원장급 인사를 평양 공항에 내보냈다. 김정은 위원장이 4월 판문점 정상회담 때 공들여 구축한 평양냉면 이미지를 ‘목구멍’ 망언으로 주가를 폭락시킨 이선권이 책임자로 있는 부서다. 안하무인식 대남 태도로 논란이 벌어진 판에 청와대가 서둘러 보낸 귤 산더미를 보며 북한 간부들이 뭐라 쑥덕거렸을지 궁금해진다. 분명한 건 이런 모양새는 국민들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남북 관계 구도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 이 기사의 취재·제작에는 정영교 통일 문화연구소 원구원이 참여했습니다.

    2018.11.14 00:04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흉물 방치 뒤 완공까지 24년···北 105층 유경호텔 트라우마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흉물 방치 뒤 완공까지 24년···北 105층 유경호텔 트라우마

     ━  북한, 무역사이트 개설한 이유는   대북 제재의 고삐가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북한 김정은 체제의 ‘비핵화’ 이행 의지가 시원치 않다는 판단을 내린 때문이다. 제재의 뒷문이 열려있다는 일각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평양 내부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제재 해제에 대한 기대가 실망감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올겨울 노동당과 군부의 외화벌이 기관은 물론 파워엘리트 집단에게 힘든 시기가 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이런 가운데 제재 완화나 해제를 준비하는 북한 내부의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해외투자 유치를 위한 전용 인터넷 사이트가 등장해 주요 대상 사업과 법 제도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중소 규모 호텔 리모델링 등 외국 관광객 방문 대비에 초점이 맞춰져 눈길을 끈다.    평양 시내에서 바라본 유경호텔. [평양사진공동취재단] 88서울올림픽을 목전에 둔 1987년 8월 평양 보통강구역에선 북한 최대 규모의 호텔 공사가 시작됐다. 대동강변 버드나무가 많았던 평양의 옛 이름을 딴 유경(柳京)호텔이다. 피라미드식으로 건설된 이색적인 외양에다 105층이란 규모는 화제가 됐다. 하지만 북한 경제 시스템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극심한 경제난에 빠졌고 소련과 동구권 붕괴 등의 여파로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92년 4월 김일성 출생 80회를 맞아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차질을 빚었다. 녹슨 채 방치돼 평양의 흉물로 불리던 유경호텔은 2008년 이집트 통신그룹 오라스콤 투자로 3년 뒤 가까스로 공사가 마무리됐다. 하지만 북한 지도부에겐 남북 체제경쟁에서 참패한 북한의 실상을 보여주는 보기 싫은 유물로 옹이처럼 남았다. 호기롭게 ‘주체 건설’ 운운했지만 외국 기업의 손을 빌려서야 겨우 완공할 수 있었던 트라우마도 만만치 않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권력이 넘겨진 이후에도 북한 경제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4년 김일성 국가주석 사망 직후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은 대량 아사 사태 등으로 북한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 정도였다.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 조치와 각종 투자유치 구상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핵 개발과 미사일 도발로 인한 대북 제재는 북한 경제의 숨통을 더욱 조였다. 이런 국가체제를 이양받은 28살의 청년 지도자 김정은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인 건 당연했다. 집권 초 대표적 놀이공원인 만경대유희장을 방문했을 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시설을 한탄하며 직접 허리를 숙여 잡초를 뽑았다. 자신이 스위스 조기유학 때 경험한 세계적 명성의 워터파크와 유람선·스키장을 본떠 평양과 지방 도시에 대규모 건설사업을 벌였지만 그뿐이었다.   노동당과 경제관료 등이 다시 경제건설과 해외 자본 유치를 언급하기 시작한 건 올해 들어 북한이 대남·대외 유화노선으로 선회하면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평양의 트럼프 타워’까지 떠올리며 미국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에 나설 수 있을 것임을 알렸다. 문재인 정부도 철도·도로 등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추진하기 위한 대북제재 우회전략 등을 다각도로 모색 중이다.   ‘비핵화’에 뻣뻣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듯 하지만 북한도 제재 해제 이후를 준비하는 징후가 드러난다. 지난달 중순 오픈한 대북투자 유치 인터넷 사이트 ‘조선의 무역(http://www.kftrade.com.kp)’에는 해외자본을 끌어들이려는 북한 당국의 생각이 드러난다. 이곳엔 북한의 무역 정책과 법규·투자 대상·경제개발구는 물론 주요 상품도 사진과 함께 구체적으로 소개돼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숙천농업개발구와 신평관광개발구·어랑농업개발구·청진경제개발구·와우도수출가공구 등 평양의 주요 경제개발구를 소개하고 개발 방식(합영 또는 외국기업 단독개발)·투자 희망액·부지 위치·임대 기간 등을 안내하고 있다. 경제개발은행과 조선경제개발협회·조선대외경제교류협회 등 주요 기관 연락처도 함께 공개됐다. 매년 개최되는 평양국제전람회도 소개하고 있는데, 내년 5월 20~24일 열릴 예정인 ‘제22차 평양봄철국제상품전람회’ 세부계획을 공개하고, 참가 신청을 위한 중국 주재 4개 기업소 담당자의 연락처(휴대전화·이메일)도 안내하고 있다. 대북투자 유치를 위한 해당 기관들의 적극적인 행보를 읽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주목되는 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근 힘을 실어주고 있는 원산갈마해안광광지구 건설 관련 부분이다. 원산-금강산 국제관광지대의 호텔과 발전소·철도·식당·편의시설 등 투자 대상 14곳을 ‘조선의 무역’ 사이트는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가운데 호텔이 7개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동명호텔과 송도원호텔·해안호텔을 리모델링하고 동정호호텔과 시중호텔·총석정호텔 등을 새로 건설한다는 게 북한 측의 설명이다. 각 대상별로 상세한 구상도 제시하고 있는데, 송도원호텔의 경우 207개 객실에 407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1000석으로 늘려 5성급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인터넷 사이트에 공개했다. 북한은 “금강산과 총석정·마식령스키장·명사십리 등 관광명승지의 중심 위치에 놓여있는 원산 관광객을 위한 숙박 능력은 현재 1500명 규모로 하루 4000명으로 예견되는 방문 숫자에 비해 숙박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 국가설계지도국의 ‘원산-금강산 관광지구 개발 총계획’ 에 따르면 오는 2025년까지 78억 달러(약 8조5000억원 규모)를 투입해 원산-금강산 지역을 국제관광지구로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이 지역에 구체적 투자유치 구상이 공개된 건 김정은 위원장의 원산 챙기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북한 고위 인사들은 ‘원산 관련 사업이나 지시는 무조건 선차적(최우선)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판단이 노동당과 내각·군부 핵심 인사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고 방북 교포 인사 등에게 귀띔한다. 원산 갈마공항 옆 해변 송림 일대에 건설 중인 대규모 해양리조트에는 최정예 군인 건설자와 돌격대 등이 총동원됐다. 평양시 뉴타운 건설에 투입됐던 인력과 장비·물자도 갈마지구에 집중 투입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는 원산과 김 위원장의 인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대북정보 관계자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가 재일교포 북송선을 타고 처음 도착한 곳이 원산이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용희가 한때 북한 권력 내부에서 ‘원산댁’으로 불렸다는 첩보도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달 말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 그는 대북제재를 비난하며 해양리조트 건설이 "적대세력들에게 들씌우는 명중 포화”라고 말했다. 주민 불만을 누그러트리고 공사에 속도를 내기 위한 대내용 언급일 수 있다. 하지만 비핵화 합의 실행을 머뭇거리며 모든 탓을 대북제재로만 돌린다면 북한이 맞닥트린 답답한 현실을 돌파할 리더십은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 이 기사의 취재·제작에는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이 참여했습니다.  

    2018.11.07 00:02

  • 손녀에 "내게 양보하라"는 할머니···평양 악단공연 티켓전쟁

    손녀에 "내게 양보하라"는 할머니···평양 악단공연 티켓전쟁

     ━  악단공연으로 본 김정은의 음악 정치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공연장에선 인기 가수를 향한 ‘팬클럽’의 싸인 요구가 쏟아진다. 문자메시지 등으로 팬심을 전하기도 한다. 서방국가가 아닌 평양에서 요즘 벌어지는 일이다. 모란봉악단을 비롯한 북한의 대표적 음악단 공연에 주민의 폭발적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공연 레퍼토리와 가수까지 직접 챙기고, 전용 극장을 지어주는 등 관심을 쏟고 있다. 북한 악단공연을 정밀 분석한 책 『김정은의 음악 정치-모란봉악단 김정은을 말하다』를 지난주 펴낸 강동완 동아대 교수와 함께 평양에 불고 있는 악단공연 바람을 진단해 봤다.    모란봉악단 공연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한 평양 서성구역 김정희 할머니는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지구보급소로 달려가 공연 티켓을 구할 심산이었다. 평양산원 유선종양연구소에 다니는 며느리 관람표까지 구할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해보니 먼저 와있는 사람이 수 십명이 됐다. 김 할머니는 보급원에게 “늙은이가 언제 또 이런 희한한 공연을 보겠나. 이왕이면 앞좌석의 관람표로 달라”고 사정했다.하지만 돌아온 답은 “미안합니다. 앞좌석  관람표는 이미 다 나갔습니다”라는 얘기였다. 겨우 두 장을 구해 집에 돌아오니 5명이 가족이 저마다 성화였다. 그 가운데서도 대학에 다니는 손녀의 떼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손녀를 위한 일이라면 늘 극성이던 김 할머니도 이번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앞길이 구 만리 같은 너희들이야 훗날에도 기회가 있을 터이니, 이번만은 일흔 넘은 이 늙은이가 먼저 가자꾸나”라는 김 할머니의 말에 가족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북한 관영매체들이 전한 이런 에피소드는 북한에 불어닥친 악단공연 관람 붐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간판격인 모란봉악단 공연 열풍은 티켓 구하기에서부터 드러난다. 워낙 인기가 높다 보니 그야말로 전쟁판 같은 데다, 가족 안에서까지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국가예술공연운영국으로 공연 관람과 관련한 전화가 이어지고, 각 지구보급소 주변은 관람표를  사러 오는 사람들로 이른 새벽부터 흥성인다고 한다.   인기 비결은 과거와 확 달라진 선곡과 무대 장치, 그리고 가수 면면이다. 김씨 3부자 찬양과 체제선전을 위주로 하던 데서 벗어나 서정적 요소를 일부 가미한 노래가 등장했다. 레이저 조명과 영상을 활용하는 등 시각적 변화도 시도했다. 현대적인 해외 유명 전자악기도 대폭 도입했다. 지난 2012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북한이 사치품 도입에 쓴 돈이 40억429만 달러인데, 악기가 1235만 달러(140억7000만원 상당)를 차지(국회 외교통일위 소속 자유한국당 윤상현 의원실 국감자료)할 정도다. 김일성 시기 보천보전자악단이나 김정일 집권 때의 은하수관현악단에선 보기 힘들었던 모습이다. 미모의 여성 가수를 내세워 이름을 알리는 전략도 주효했다. 강동완 교수는 “2012년 7월 첫 공연 이후 공연 내용과 무대 형식 등이 점점 화려해지는 추세”라고 말했다.간판급 가수인 라유미와 류진아가 서로 경쟁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베테랑 연주자인 선후향희의 빼어난 기량 등이 관객에게 볼거리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는 얘기다. 강 교수는 지난해 말까지 이뤄진 모란봉악단의 공개 공연 31차례를 모두 분석한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이에 따르면 음악단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각별한 관심은 집권 초반부터 나타났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으로 권력을 거머쥔 김정은은 모란봉악단을 출범시켰다. 부인 이설주를 세상에 처음 알린 곳도 이 악단 창단 공연자리다. ‘음악 정치’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이런 관심은 삼지연관현악단 창단으로 이어졌다. 기존의 삼지연악단과 청봉악단을 결합한 형태인 삼지연관현악단의 존재는 지난 2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이뤄진 남한 방문 공연을 통해 확인됐다. 북한 주요 악단을 거치며 잔뼈가 굵은 가수 현송월은 삼지연관현악단의 단장을 맡아 공연을 이끌었다. 이 악단이 평창을 겨냥해 급하게 만들어졌다는 정황은 북한 매체의 보도를 통해 파악됐다. 지난 4월 김정은이 삼지연관현악단에 선물한 악기를 전달하는 행사에서 박광호 노동당 부위원장은 “갓 태어난 악단의 공연 준비 사업을 (김 위원장이) 이끌어줬다”고 밝혔다. 박 부위원장은 “김정은의 영도가 있어 삼지연관현악단은 온 남녘 땅을 들었다 놓을 수 있었다”고 말해 북측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지난 18일 저녁 평양대극장에서 이뤄진 환영 공연도 삼지연관현악단이 주도했고,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김정은 위원장 부부가 함께 관람했다.   삼지연관현악단을 위해 관현악 전용 공연장을 건립한 데서도 김정은의 관심을 엿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10일 마무리 공사 중인 현장을 방문해 “만점짜리 음악홀을 건설한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평양 보통강변에 자리한 이곳은 원래 서커스 공연이 이뤄지던 모란봉교예극장으로 쓰였다. 폐기되다시피 한 극장을 김정은이 지난 1월 “세계적 수준의 관현악단 전용극장으로 바꾸라”고 지시한 이후 리모델링이 이뤄졌다.   북한에 불고 있는 악단 열풍 앞에는 장애물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북한판 한류로 불리는 남한의 드라마·영화·음악 등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북·중 접경지역을 통한 유입과 함께 해외 방문이나 체류 경험을 한 엘리트 계층을 통한 반입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한류 문화를 맛본 주민들은 식상한 북한의 TV 프로그램이나 악단공연으로부터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제5차 당세포위원장 대회에서 “비사회주의적 현상과 섬멸전을 벌여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우리 내부에 불건전하고 이색적인 사상 독소를 퍼트리고 비사회주의적 현상을 조장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고 외부세력을 비난한 것도 북한 주민의 눈과 귀를 파고드는 콘텐트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서구식 전자악기와 여성 가수를 내세운 김정은의 음악 정치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시대 들어 외부세계에 눈 떠가는 북한 체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긍정적 분석이 제기된다. 체제선전 요소가 여전한 건 사실이지만 개혁·개방 가능성을 읽을 수 있고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얘기다. 하지만 폭압적 독재체제와 3대세습 등 북한 권력의 문제점을 가리기 위한 선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 목소리도 높다. 강동완 교수는 “북한의 악단 정치를 연구하면서 김정은에게 있어 음악은 한 개인을 우상화하기 위한 선전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음악 정치를 그대로 둔 채 그를 평화의 파트너로 미화해서는 안 될 것”이란 주장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0.31 00:0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하트’ 인사 건넨 북 경비병 … 단둥엔 스파게티 파는 평양식당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하트’ 인사 건넨 북 경비병 … 단둥엔 스파게티 파는 평양식당

     ━  북·중 변경에서는 지금   중앙일보NK비즈포럼 북·중 접경 답사단이 지난 20일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압록강대교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 통일문화연구소] 평양 정상회담이 열려 9.19 공동성명이 나온 지 한 달이 지났다.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조치가 취해지고, 대북 산림지원을 위한 후속 회담 등이 줄을 잇고 있다. 교황 방북 이슈가 화제를 모았고, 내달 미국 중간 선거 이후엔 2차 북·미 정상회담 스케줄도 잡힐 것으로 점쳐진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주변 정세에 격랑이 일고 있는 2018년 가을 북한 체제와 주민 삶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나고 있을까. 북·중 접경지역 1400㎞를 중앙일보 NK비즈포럼 현장 답사단 일행과 함께 둘러봤다.    지난 20일 낮 평안북도 삭주군 청수노동자구 앞 압록강변. 중국 측 유람선을 빌려 한 시간 남짓 근접 관찰한 북녘땅에는 가을빛이 완연했다. 단풍이 울긋불긋한 산 중턱에는 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한 노인은 강변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잡이에 한창이었다. 옥수수를 수확하던 주민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환담을 하고 있었다. 초소 2층 망루에 걸터앉아 강 쪽을 응시하던 국경수비대 소속 북한 경비병은 답사단 일행이 손을 흔들자 머리 위로 양손을 올려 하트 모양의 인사로 화답했다. 건물 수리를 하던 남루한 차림의 인부도 같은 포즈를 취하며 반가움을 표했다. 불과 일 년 전 한국 관광객을 태운 중국 배라는 걸 알아차리고 나서는 굳은 표정으로 외면하거나 마지못해 손을 흔들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런 겉모습과는 달리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는 고달픈 현실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압록강변에 접해있는 청수화학공장 굴뚝에서는 매서운 기세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20년 넘게 방치됐다가 2016년 재가동된 이 공장은 1년여 만인 지난해 9월 가동을 멈춘 것으로 알려져 왔다. 현지 관계자 A씨는 “예전엔 거의 멎어있는 듯했는데 올 들어 공장이 가동되는 날이 많아진 것 같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망원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공장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건물 벽은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상태였지만 보수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듯했다. 슬레이트 지붕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군용 배터리를 만드는 것으로 알려진 이 공장에서 정상적인 제품 생산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지난 7월 삭주 인근 신의주 지역 공장들을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수도 하지 않은 마구간 같은 낡은 건물에 귀중한 설비들을 들여놓고 건물보수를 땜때기(땜질)식으로 하고 있다”고 질타한 속사정을 짐작하게 했다.   강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 길이 900m에 낙차가 106m에 이르는 수풍댐의 위용이 앞으로 가로막고 나섰다. 일제 강점기인 1943년 완공돼 해방 직후엔 남한 전력의 92%를 공급하던 동양 최대의 수력발전소였다. 북한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불만을 품고 1948년 5.14 대남 송전중단 조치를 취했고, 서울을 비롯한 남한 지역은 암흑천지로 변하기도 했다. 수풍댐은 현재는 북한과 중국이 공동 관리하고 생산된 전력의 절반을 중국이 가져간다. 하지만 시설 노후로 예전의 영화는 잃어버린듯했다. 전력·에너지 전문가인 남호기 SK가스 고문은 “수풍댐(60만㎾)을 포함해 북한의 발전용량은 700만㎾ 수준인데 우리는 1억㎾ 규모”라면서 “전력이 곧 경제력인 상황에 비춰보면 북한이 처한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실상을 감추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중국과 강을 맞대고 있는 북한 지역 몇몇 곳에 체제 선전용으로 보이는 건물을 짓거나 아예 마을을 새로 조성한 것이다. 중국 창바이(長白)시와 마주한 북한 혜산에는 강을 따라 아파트 수십 동이 세워졌다. 하지만 21일 밤 조망해 본 혜산 쪽 건물은 희미한 백열등이 켜진 몇몇 집을 제외하고는 암흑에 가까운 상태였다. 화려한 조명 속에서 공원에 모인 주민들이 함께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하는 중국 쪽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중국 린장(臨江)과 마주한 북한 중강진에는 아예 수백 가구 규모의 주택을 새로 지은 마을이 눈길을 끌었다. 김정일(2011년 사망) 국방위원장도 수차례 방문한 ‘3월5일청년광산’ 인접 지역에 들어선 빌라형 주택을 놓고 “스위스 유학을 한 김정은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란 말이 나온다. 산 중턱에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 만세’라는 대형 선전구호가 세워져 있었지만 마을에는 인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해 보였다.   중국 단둥시에 최근 등장한 북한식당 ‘윙(WING) 카페’의 내부. 북한 음식과 함께 스파게티, 커피, 아이스크림 등을 판매한다. [사진 통일문화연구소]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서 대북제재의 고삐가 다소 느슨해지자 중국 내 북한 식당은 기지개를 켜고 있다. 단둥시에는 북한 음식 외에도 스파게티와 커피·아이스크림 등을 파는 카페형 식당이 최근 문을 열고 성업 중이다. 이곳에서는 60포들이 인삼차를 400위안(6만5000원)에 팔고 있었고 화장품 세트와 건강보조제, 술 등 북한 상품도 진열해 판매 중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옌지시 류경식당 등에는 백두산 관광객 등 우리 국민의 발길이 늘고 있다. 대북제재 차원에서 내려졌던 우리 정부의 북한식당 출입제한 조치는 유명무실해진 분위기다.   탈북자 숫자는 김정은 집권 이후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나아진 때문이란 분석이 있지만 다른 진단도 있다. 북한 당국의 탈북자 단속이 강화된 데 따른 것이란 얘기다. 실제로 김정은 위원장은 북·중 접경지역 가운데 강폭이 좁아 탈북에 주로 이용됐던 지점 대부분을 철조망으로 둘러쳤다. 특히 곳곳에 촘촘히 세워진 CC-TV는 탈북을 엄두 내기 어렵게 만들었고, 탈북자를 추적·단속하는 데도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여성 탈북자의 비중이 80%에 육박하면서 인신매매가 늘자 중국 당국이 ‘여자와 아이를 판매하지 말 것’이란 경고문을 세우기도 했다. 답사단과 동행한 강동완 부산하나센터장(동아대 교수)은 “평양 특권층을 제외한 일반 주민 삶을 내팽개친 북한 당국이 만들어낸 가슴 아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북·중 접경지역인 중강진 ‘3월5일청년광산’ 인근에 조성한 대규모 주택단지.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 만세’란 선전 간판이 눈길을 끈다. [사진 통일문화연구소]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맞닿은 북·중 접경 1400㎞는 북한 주민들의 삶을 지척 거리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루트다. 평양 대동강변 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 빌딩, 화려한 네온사인에 가려진 북한 체제의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NK비즈포럼 현장 답사단 한 참가자는 “쇼윈도처럼 잘 꾸며진 평양 모습에 현혹돼 ‘김정은 경제 리더십’ 운운하기보다는 지방 주민의 열악한 삶을 균형감 있게 보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 ◆NK비즈포럼 「 대북 진출을 고려 중이거나 북한 경제, 남북경협에 관심 있는 기업체 CEO와 고위 임원, 로펌·회계법인 관계자 등 각 분야 인사가 참여하는 중앙일보의 북한·통일 포럼. 지난 9월부터 38명의 1기 회원이 전문가 강좌와 현장 답사 등을 진행하고 있으며, 내년 초 2기 회원을 모집할 예정이다. 」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0.24 00:0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급물살 탄 남북관계에 후끈 달아오른 대북취재 현장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급물살 탄 남북관계에 후끈 달아오른 대북취재 현장

     ━  통일부 기자실 24시   919 평양 공동선언의 이행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회담 우리 측 수석대표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가운데)이 15일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본부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남북 정상회담과 당국 간 대화,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 일정이 줄을 잇고 있다. 그제 판문점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은 연말까지 이어질 남북관계 시간표를 더 촘촘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김정은 연내 서울 방문’이란 빅 이벤트까지 잡혀있어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쏟아지게 돼 있다. 이런 흐름을 추적하며 팩트 취재와 분석에 부산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통일부 기자실을 지키는 50개 국내 언론사 77명의 북한·통일 담당 기자들이다. 연초부터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 관계와 대북 현안을 쫓느라 파김치가 된 통일부 기자실로 들어가 본다.    지난 7월 초 평양 통일농구대회 취재를 위해 방북한 통일부 출입 여기자는 특이한 체험에 나섰다. 현장 체험 르포기사를 쓸 요량으로 숙소인 고려호텔 미장원에서 평양식 헤어스타일에 도전한 것이다. 첫날 농구 행사가 마무리된 이튿날 한가한 시간을 틈탔다. 간단한 ‘머리빨기(삼푸)’를 한 뒤 북한 미용사가 한창 머리 손질에 공을 들일 때쯤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김영철이 기자실에 온대요”라는 긴급 상황전파였다. 머리에 바른 헤어제품을 제대로 걷어낼 사이도 없이 기자는 황급히 2층 프레스룸으로 달려가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의 언급 내용을 취재 수첩에 담았다. 출입 햇수로는 손꼽히는 베테랑 기자였지만 김영철의 예고 없는 방문을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예상 밖의 돌출 변수가 끊이지 않는 북한 취재의 어려움을 드러낸 사례였다.   지난해엔 사정이 더 심했다. 연초부터 시도 때도 없이 쏘아 올린 북한의 미사일 도발 드라이브에 새벽잠을 설치거나 저녁 약속 자리에서 노트북을 켜야 했다. 핵 이슈나 대북제재와 관련해 평양 군부가 쏟아내는 협박성 주장이나 외무성의 비난 성명도 마찬가지였다. 올들어 유화 공세로 돌아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제 새벽잠을 설치게 하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북한의 돌발행동은 그치지 않는다. 우리 측의 회담 제의에 며칠 동안 묵묵부답하다가 전날 밤 늦게서야 “내일 오전에 만나자”고 알려오는 식이다. 이를 덥석 수용하는 정부 때문에 취재기자는 모든 약속을 접고 판문점으로 향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자실 안에서 “우리가 기동타격대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광화문 정부 서울청사 6층에 자리한 통일부 기자실은 특이한 공존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신문·방송·통신 및 인터넷 언론 소속 기자들이 한 곳에 상주하며 취재 활동을 벌인다. 자동차 업계에 비유한다면 현대와 기아, 한국GM, 쌍용과 르노삼성은 물론 수입차 업체 딜러들이 모두 어깨를 맞대면서 차량 판매에 열을 올리는 형국이다. 다른 업종에선 좀체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A4용지 6장 남짓한 면적의 좁은 칸막이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은 마치 독서실이나 고시원을 떠올리게 한다. 부처 대변인이나 당국자 브리핑과 쏟아지는 각종 보도자료를 챙기기도 빠듯한 시간이지만 특종 경쟁을 위해 익명의 취재원을 만나고 관련 기사를 다른 기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전송해야 한다. 옆 사람의 노트북이나 취재수첩·핸드폰에 눈길을 주는 게 절대 금기인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단독기사를 써낸 기자는 의기양양하며 부러움을 살 수 있지만, 낙종의 아픔은 데스크의 불벼락으로 이어진다.   대북취재 최전선 맡은 통일부 기자단 대북 주무부처라는 특성 때문에 통일부와의 일부 공조도 불가피하다. 당국 회담 취재를 가는 방북 기자단은 ‘보도’라 쓰인 완장 외에 가슴에 태극기 배지를 단다. 김일성 배지(북측은 ‘초상휘장’이라고 지칭)를 패용하는 북한에 상응하는 조치다. 회담 관계자는 “태극기를 단다는 건 우리 대표단의 일원이란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남북관계 취재에 있어 언론과의 교감이 긴요하다는 취지다. 하지만 회담 합의 내용이나 대북 대응에서 문제점이 드러나면 비판의 칼날을 감추지 않는다.   15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에 탈북자 출신 기자를 배제한 통일부 조치에 기자단이 ‘입장문’을 내고 조명균 장관의 사과를 요구한 것도 정부가 대북 저자세를 보였다는 판단에서다. 북한 엘리트 출신인 해당 기자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뒤 6년째 통일부를 출입하며 북한 문제를 담당했다. 특히 지난 2월에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방문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과 북측 수행원·기자단을 밀착 취재했다. 우리와 유엔사가 관장하는 판문점 남측 지역에서 열리는 회담에 탈북자란 이유로 배제한 건 지나쳤다는 게 기자단의 문제 제기다. 더욱이 언론사들이 사전 합의에 따라 대표 취재를 맡긴 풀(pool)기자였다는 점에서 언론 자유 침해에 해당한다는 지적이다.   통일부와 기자단 안팎에선 조명균 통일장관이 독자적으로 탈북자 출신 기자의 취재를 막았을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반발 가능성과 함께 탈북자를 ‘배신자이자 인간 쓰레기’로 비난해온 일부 세력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얘기다. 대북 눈치 보기 비판여론에 시달린 노무현 정부 때보다도 훨씬 후퇴했다는 말도 나온다. 2006년 5월 개성공단 방북 취재에 나선 통일부 기자단 일부를 북측이 거부하자 이종석 당시 장관은 “이런 식으로 선별 조치하면 기자들 앞에서 내 얼굴이 뭐가 되냐”고 따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북측은 “뭐가 착오가 있었다”고 둘러대며 즉각 수용조치를 취했다.   북한 문제를 담당하는 기자들 사이에선 “유일하게 취재원 접근이 안 되는 영역”이란 말이 나온다. 구체적인 사실관계 확인이나 현장접근, 반론 취재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다.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에 대응한 5.24 대북제재 조치의 최대 피해자는 언론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방북 취재기의 파급력 등을 고려해 정부가 언론의 대북접근을 가급적 차단하는 정책을 취한 때문이다. 평양을 자유롭게 오가며 현장 취재할 수 있는 건 남북 관계가 화해 무드를 타고 있는 지금도 꿈같은 일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체제선전 차원에서 일부 서방매체나 친북 성향 교포 언론인을 받아들였지만 남한 언론사나 기자는 예외다.   지난 4월 문재인 정부 첫 정상회담 이후 개별 언론사나 언론단체가 평양에 지국을 설치하거나 상주 취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북측은 선뜻 호응하지 않고 있다. 최근 방북해 통일전선부 최고위급과 만난 해외교포 인사는 “김정은 체제의 이미지를 선전할 수 있는 우호 매체의 단발성 취재는 사안별로 검토하겠지만, 남측 언론이 북한에 상주하는 건 허용할 수 없는 일이란 입장을 분명히 하더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신문·방송을 ‘체제 선전·선동의 나팔수’ 정도로 여기는 북한과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권력 비판·견제를 언론의 사명으로 삼는 우리와는 좁혀지기 쉽지 않은 간극이 자리하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0.17 00:02

  • 천안함 폭침 때도 대북 산림지원은 타진했던 북한의 속사정

    천안함 폭침 때도 대북 산림지원은 타진했던 북한의 속사정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사막으로 변한 북녘 … 대북 산림지원 발등에 불     나무가 거의 없어 민둥산에 가까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북한의 산림. 국립산림과학원은 북한 지역의 산림 899 가운데 32%가 황폐화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진 김성일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  ━  남북 산림협력 해법은    요즘 대북접촉에 나선 우리 민간단체나 기관이 북측 인사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묘목이나 양묘장 같은 산림 분야의 지원을 시급히 해달라는 요청이다. 대북 산림지원 확보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하다는 게 관계자의 귀띔이다. 남북 당국 간 회담이나 접촉에서도 산림 분야 협력은 우선 의제로 떠올랐다. 황폐해진 북녘 산림을 녹화하는 데 주력하는 김정은 체제의 속사정과 대북 산림지원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신발에 흙을 묻히기 싫어하고 그쯤 하면 되겠지 하면서 요령주의적으로 일한 책임 일꾼들의 주인답지 못한 일본새(일하는 스타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달 30일 북한 노동신문은 산림복구 사업을 촉구하는 기사를 통해 현장 간부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평안남도 영원군은 첫 사례로 콕 집어 질타당했다. 황남 신원군에 대해서는 “서로 책임을 위에 밀고 아래에 밀면서 소극적으로 임했고, 나무 심기 계획도 미달하고 심은 나무도 잘 가꾸지 않아 식수 대상지인지 풀밭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지적했다. “나무 심기 계획을 심하게 미달하고도 허풍을 친 지역”으로는 함북 온성군과 자강도 중강군, 평북 의주군 세 곳이 꼽혔다. 공개적인 망신주기를 펼친 뒤 노동신문은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사업 실적으로 증명하는 진짜배기 일꾼이 되라”고 강조했다.   북한 당국이 이 같은 극약처방을 내놓은 건 산림복구가 화급한 사안으로 닥쳤기 때문이다. 그 진앙지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다. 김정은은 집권 첫해인 2012년 5월 ‘국토관리 총동원 열성자 대회’를 소집했다. 토지 정리와 치산치수 같은 자연개조사업은 물론 산림과 도로·하천·지하자원·환경보호를 망라하는 분야에서 대변혁을 이뤄보자는 취지였다. 김 위원장은 특히 잔디와 나무 심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가 방문하는 공장과 기업소·군부대는 눈에 띄는 곳마다 잔디를 입히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산림 황폐화를 인정하는 발언을 수 차례 쏟아낸 김정은은 “10년 안으로 벌거숭이 산을 모두 수림화 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노동당과 북한의 각급 기관, 지역 단위는 비상이 걸렸다. 인민군 부대들이 나서 양묘장 건설에 매달렸고, 조선중앙TV 등 매체는 산림녹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캠페인을 연일 쏟아냈다. 김일성대학에는 산림과학대학이 세워졌다. 천안함 폭침과 핵·미사일 위협 등 북한의 도발로 인해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도 북한은 남측의 민간단체와 인사를 통해 대북 산림지원을 타진할 정도였다.   김정은도 직접 양묘장 등을 찾아 산림복구 상황을 점검했다. 자신이 지시해 북한 군부가 조성·관리하는 122호 양묘장은 그의 단골 현장방문 장소다. 지난 7월 이곳을 찾은 김 위원장은 ‘산림복구 전투’가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을 관철하는 사업이라며 “전 당, 전 국가적으로 힘을 집중해 중단 없이 밀고 나가라”고 강조했다. 산림조성을 “숭고한 애국사업”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지난달 29일자 노동신문이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고 가꾸는 사람이 참된 애국자”라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북 정상회담 과정에도 이 같은 분위기는 반영됐다. 지난달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서명한 평양 공동선언은 남북 환경협력 추진을 합의하면서 “우선적으로 현재 진행 중인 산림 분야 협력의 실천적 성과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정상회담 수행단으로 방북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이 평양 외곽의 122호 양묘장을 찾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분단 이후 70년 넘게 황폐해진 북한의 산림을 어디부터 어떻게 손댈 것인가 하는 점이다. 국립산림과학원 자료에 따르면 북한 총면적의 73% 수준인 899만㏊가 산림지역이다. 이 가운데 황폐화된 산림은 284만㏊로 전체 산림의 32%에 이른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자료(인간개발지수와 지표:2018 통계자료 개정판)는 더 심각한 상황을 보여준다. 지난 2015년 기준으로 북한 전체 면적에서 산림이 차지하는 비율은 41.8%로 파악되는데, 이는 1990년에 비해 38.7% 줄어든 수치라는 것이다. 세계은행(WB)도 90년 68.1%이던 북한의 산림 비율이 25년 사이에 26.3%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양묘장 건설과 조림 기술 제공, 병충해 방제 협력 등의 분야에 집중한다는 입장이다. 정상회담 수행원으로 평양을 다녀온 김재현 산림청장은 “북측은 대규모 양묘장을 원하지만 우리는 황폐화된 곳 위주로 군 단위의 소규모 양묘장을 만들어 주는 게 실용적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촘촘한 대북제재의 벽을 어떻게 넘을까 하는 점은 남북한 모두에게 고민거리다. 정부는 일단 산림 분야 대북지원이 남측에게도 혜택이 돌아오는 협력사업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국회 농림축산식품수산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이 국립산림과학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2년부터 2031년까지 10만㏊의 대북 조림사업이 이뤄지면 600만t의 온실가스 감축이 나타나고, 이를 통한 탄소배출권 판매액은 1006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대북제재 저촉 우려와 관련 김 산림청장은 “병충해 약재는 문제없지만 방제 기자재 등은 일부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산림청이 올해 대북지원용으로 채취해 놓은 35t가량의 산림 종자의 지원에는 큰 걸림돌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묘목을 보내거나 구입 비용을 건네려면 제재에 걸릴 수 있다. 북한도 대북제재로 인해 산림녹화에 어려움을 겪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6월 노동신문은 122호 양묘장의 자동화 설비 도입이 무산된 사실을 공개하면서 “수소탄 시험과 관련해 일부 적대세력들이 터무니없이 발동시킨 제재봉쇄 책동 때문에 그나마도 실현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이 “산림복구 전투의 사령관”(노동신문 9월 29일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녹화사업과 남북 산림협력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경제난과 대북제재의 이중고에 빠진 북한 관리들은 형식주의의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는 게 우리 당국과 민간기구 인사의 전언이다. 북한 매체가 “산림복구 전투 실적은 나무를 몇 대 심었는가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몇 대를 살렸는가에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를 지적한 것이다. 산림 분야 협력사업이 힘을 받으려면 대북제재를 자초한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 결단을 실행하는 게 무엇보다 긴요하다는 얘기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0.10 00:0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남북정상회담 '감격' 속에서도 文·참모가 지켜야 했던 것들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남북정상회담 '감격' 속에서도 文·참모가 지켜야 했던 것들

     ━  뒷맛 개운치 않은 정상회담 말말말   평양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이 나온 지 오늘로 딱 2주일이 됐다. 올 들어 벌써 세 번째 남북한 최고 지도자의 만남이지만 평양과 백두산을 무대로 펼쳐진 2박 3일간의 파노라마는 여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국정 지지율은 회담 이전보다 12.2%포인트 급등해 65%선을 회복(1일 리얼미터 발표)했다. 추석 차례상에 오를뻔한 실업과 경기부진·부동산 등의 이슈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이쯤이면 문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 사이에서 ‘이 맛에 정상회담 하는 것’이란 말이 나올법하다.    남북 정상회담은 성사 자체로 엄청난 폭발력을 갖는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대면은 ‘역사적’이란 수식어가 절로 붙을 만했다. 그만큼 남북 분단과 대치, 반복과 갈등에서 탈피하려는 국민 염원이 간절하다는 얘기다. 이런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집권세력은 늘 정상회담 카드에 유혹을 느낀다. 천문학적 규모의 불법 대북송금을 마다치 않은 김대중(DJ) 정부, 대선 2개월을 남긴 막판에 대규모 인프라 지원을 합의하는 무리수를 둔 노무현 정부가 그랬다. 김일성 사망으로 정상회담 목전에서 좌절한 김영삼(YS) 대통령은 물론 이명박·박근혜 정부 같은 보수 정권도 정상회담의 마력(魔力)에 빨려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난달 정상회담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본(本) 게임이었다. 앞서 4월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5월엔 북측 통일각에서 만났지만 삼세번 만에 제대로 된 회담 테이블이 마련된 셈이다. 김 위원장은 5월 북측 지역 회담 때 식사 한끼 문 대통령에게 대접하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평양에서 만난 문 대통령에게 자세를 한껏 낮추며 2박 3일간 융숭한 접대를 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김정은 체제 들어 처음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을 맞은 평양은 거대한 세트장을 방불케 했다. 8년 가까운 집권 기간 김정은이 직접 꾸민 공간과 건축물에 대규모 군중 동원이 더해졌다. 첫 대면이 이뤄진 순안공항은 평양의 관문이다. 우리의 지방 도시 버스터미널 수준이던 걸 김 위원장이 증축과 리모델링을 지시해 2015년 7월 개장했다. 외신이 ‘평해튼(평양의 맨해튼)’으로 이름 붙인 대동강변 고층 빌딩과 여명거리 등도 김정은이 공들인 작품이다. 도심 건축물에는 좀체 쓰이지 않는 민트와 핑크빛 페인팅은 이를 조금이라도 더 시각적으로 드러나 보이게 하려는 징표다. 문 대통령 일행이 방문해 만찬을 한 대동강수산물식당도 김정은 지시에 따라 지난 7월 개장한 시설이다. 식탁에 오를 순서를 기다리는 이곳 수족관의 철갑상어는 북한 경제와 민생이 도달하려는 목표와 팍팍한 현실의 괴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일반 주민이 이용하는 평범한 식당’에서의 한 끼를 표방한 청와대의 설명과는 다소 거리가 느껴진다.   김정은 위원장은 천연 세트장도 십분 활용했다. 북한 정권이 정통성을 주장하려 차용해온 백두산 정상에 문재인 대통령을 초대한 것이다. 두 정상이 해발 2750m 높이 장군봉에서 손을 맞잡은 장면은 공동선언 서명에 맞먹는 강렬한 이미지다. 평양에서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판문점 정상회담의 공간적 확장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했다. 총감독은 자신이 맡은 듯했고, 세심한 연출은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동분서주했다.   북한이 치밀하게 설정해 놓은 공간과 시간표 속에 들어가 회담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돌발 상황에다 일방적인 장소·시간 변경이 수시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전면에 등장해야 하는 정상회담의 경우는 더욱 조심스럽다. 무엇보다 경호와 의전이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북측 최고 지도자나 고위 인사가 던지는 말에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원정 경기를 치러야 하는 이런 어려움을 감안한다 해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 적지 않다. 정상회담 합의의 감흥과 화려한 카퍼레이드 행렬 등에 묻혀버린 ‘지켜야 할 가치’와 관련한 문제다. 평양 정상회담 첫 회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나온 문 대통령의 모두 발언은 귀를 의심케 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인민의 삶을 향상시킨 김정은 위원장의 리더십에 경의를 표하며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언급에선 상대방에 대한 인사치레를 넘어선 과잉이 감지된다. 회담 이틀째 저녁 평양 5.1경기장에서 펼쳐진 매스게임 ‘빛나는 조국’ 관람석도 마찬가지다. 문 대통령은 “말로 할 수 없는 감격을 느꼈다”는 소회와 함께 “김 위원장과 북녘 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다”고 밝혔다.   정상회담에서 무작정 얼굴 붉히라는 말이 아니다. 폭압적인 70년 노동당 통치와 3대세습의 폐해로 초래된 현실에 눈감지 말라는 주문이다. 정치범 수용소와 대량 아사, 수십만 탈북행렬의 원인 제공자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는 요구다. 유엔이 ‘아동 노동’으로 금지한 집단체조에 강제동원된 어린아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헤아렸다면 ‘경의’나 ‘감격’ 같은 단어는 소거됐어야 한다. 공동선언 서명 직후 문 대통령이 “그동안 전쟁의 위협과 이념의 대결이 만들어온 특권과 부패, 반인권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사회를 온전히 국민의 나라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고 언급한 대목도 적절해 보이진 않는다. 굳이 김정은과 그의 참모들 앞에서 우리 체제 내부의 논쟁적 이슈를 거론할 필요는 없었다는 얘기다.   대통령의 말과 표현을 정제하고 다듬는 보좌역할을 했어야 할 참모진은 한술 더 떴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의 백두산행에 동행한 국방 장관은 김 위원장의 한라산 답방이 화제에 오르자 “우리 해병대 1개 연대를 동원해 헬기 패드(착륙장)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후임 장관이 내정돼 임기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국방장관은 요즘 유행하는 ‘아무 말하기 대잔치’에 나선 듯했다. “백두산이 화창한 건 김정은 위원장 동지가 오셨기 때문”이라고 면전에서 아부성 발언을 한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견줄 만 하다.   안타까운 건 북한 체제의 현실과 동떨어진 부적절한 발언이나 대북 저자세가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권 변호사로서의 경륜과 민주화 운동의 열정 등이 융합된 권력이란 자부심이 무색해진다. 2013년 말 방북한 알벡도르지 몽골 대통령은 김일성대 강연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은 영원할 수 없다”고 갈파했다. 그 발언으로 북한과 몽골 관계가 파국을 맞았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뒷맛이 개운치 않은 평양 정상회담 기간 중의 말과 화법이 남북관계와 비핵화를 위해 불가피했다는 식의 변명은 꿈도 꾸지 말란 얘기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0.03 00:02

  • 북한이 갚지 않은 3조5000억원 … 대규모 추가 경협 걸림돌

    북한이 갚지 않은 3조5000억원 … 대규모 추가 경협 걸림돌

     ━  대북차관 둘러싼 ‘국고손실’ 논란   문재인 정부 들어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북핵 폐기를 목표로 한 ‘완전한 비핵화’ 등 지난 4월 판문점 첫 만남에서의 합의를 이행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분위기다. 눈에 띄는 건 우리 기업인과 경제계 인사 17명이 포함된 대목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경제가 평화’라는 취지로 설명한다. 특히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대북 인프라(SOC) 지원 성격의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유엔 대북제재 말고도 또 하나의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북한이 갚지 않고 있는 철도·도로 건설 자재 등 3조 5000억원 규모의 대북차관이다. 이 문제를 유야무야하면서 또 다른 대규모 추가 투자를 밀어붙였다가는 국민 혈세를 퍼주기 한다는 비판이 거세질 수 있다.    신용은 현대 사회의 최고 덕목 중 하나다. 개인은 물론 나라 사이나 국제거래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남북관계에서는 이런 상식이 좀체 통하지 않는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이의 첫 만남 이후 총 5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지만 사정은 별반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바로 북한의 약속 불이행 문제다. 대남 도발이나 핵·미사일 개발을 않겠다는 합의를 깨는 건 여전히 다반사로 여겨진다. 국제사회가 규율하고 있는 차관 거래의 기본 질서마저 유린하는 일이 벌써 6년 동안이나 벌어지고 있다.   북한이 이상 조짐을 보인 건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3월께다. 2007년부터 2년간 북한에 차관(5년 거치 10년 상환) 형태로 지원한 경공업 원자재 대금 8000만 달러(약 914억원, 이하 당시 환율 기준)를 갚아야 할 시기가 됐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북한이 옷과 신발·비누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원료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해 건네준 물품이다. 이 가운데 3%인 240만 달러를 아연괴 1005톤으로 현물 상환했지만 7760만 달러(887억원)는 남은 상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식량차관 문제도 심각하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북한에 태국산 쌀 30만 톤 등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2007년까지 모두 240만 톤의 쌀이 북한에 보내졌다. 40kg짜리 포장으로 모두 6000만 포대 분량이다. 북한은 2012년 6월 첫 상환 기일이 닥쳤는데도 꿈쩍하지 않았다. 통일부가 북한에 전통문을 보내 차관 상환에 임할 것을 촉구하려 했지만 아예 전통문 수령조차 거부했다.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공사를 위해 북측에 넘어간 자재와 장비에 대한 차관제공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북측 구간 공사에 들어간 돈은 1494억원이다. 국민 세금으로 조성된 남북협력기금에서 나온 돈이다. 노무현 정부 말기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공사가 끝나 몇 차례 시험운행까지 했지만 곧 중단됐다. 정부 당국자는 “당시 철도 연결이란 의미를 부각시키려 시험운행을 서둘렀고, 화물을 싣지도 않은 채 남북 간을 오가는 바람에 ‘깡통열차’라는 비판여론이 일었다”고 말했다. 상환시기를 ‘공사 완료 후 10년 거치 20년 상환’이라고 못 박았지만 북한은 답이 없다.   철도·도로 연결 문제가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른 건 지난 4월 정상회담에서다. 판문점 선언은 제1조에서 ‘끊어진 민족의 혈맥 잇기’를 강조했다. 이 맥락에서 10·4 선언에서 합의했던 사업 중 1차적으로 동해선과 경의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현대화해 활용하자고 합의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과의 환담에서 북한의 철도 사정과 관련해 “불비(不備,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음)하다”고 토로하면서 우선 순위로 당겨진 의제다.   이후 철도·도로 연결은 남북 간 핫이슈로 자리했다. ‘평화, 새로운 미래’를 캐치프레이즈로 한 이번 정상회담에 김현미 국토부 장관과 오영식 코레일 사장이 수행원으로 간 건 이를 잘 보여준다. 정부 지난 7월 남북 철도 연결구간에서 공동점검을 벌였고, 8월에는 경의선 북측 구간을 현지조사하는 등 속도를 낼 기세다.   이런 움직임에 우려도 제기된다.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기 위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마찰음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정부는 국책 연구기관과 전문가를 동원해 대북제재의 틀을 비껴갈 사업추진 묘안을 짜고 있다. 대북 인프라 건설이 북한 만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경제에 필요한 사업이란 논리가 핵심이다. 특히 철도·도로 등 남북 교통망 연결은 동북아와 유라시아에 걸친 철도·물류 공동체로 발전하기 위한 것이란 점을 강조한다. 정상회담 설명자료에서 “TSR(시베리아횡단철도), TCR(중국횡단철도)로의 연결은 북한이 아닌 우리에게 절실한 사업”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지난 11일 국회에 제출된 판문점 선언 비준동의안에서 정부는 1차적으로 내년에만 4712억원의 사업비가 든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철도·도로 연결에 무상 1864억원, 차관 1087억원이 투입된다. 앞서 통일부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합의한 10·4선언 때 개성~신의주 철도·도로 개보수 등 합의이행에 8조6700억원이 든다고 국회에 보고한 바 있다.   정부는 철도·도로 등 남북 교통망 연결을 통해 동북아와 유라시아에 걸친 철도·물류 공동체 건설을 강조한다. 호혜성에 기반한 남북 경제통합으로 평화를 촉진하고 우리 경제의 회생도 모색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핵 폐기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구체적 약속이나 실행 로드맵이 빠진 상태라면 곤란하다. 북한을 도발에서 대화로 돌려세운 원동력인 대북제재와 충돌한다면 더욱 그렇다. 자칫 구두선(口頭禪)에 그칠 수 있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대북 퍼주기라는 전철(前轍)을 밟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렇게 그동안 쌓인 철도·도로와 식량, 경공업 원자재 등 직접적인 대북차관 외에도 거액의 혈세가 투입된 공사가 있다. 바로 북한의 핵 개발로 도중하차한 대북 경수로 건설에 쓰인 2조3063억원의 사업비다. 이 천문학적인 자금 역시 회수가 막막한 상황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북한 비핵화를 위해 남북 경협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하지만 나라의 금고에서 3조5000억원이란 돈이 북한으로 흘러가 떼일 위기에 처했는데도 나 몰라라 하는 건 비정상이다. 한 푼의 세금도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챙기는 공복(公僕)의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9.19 00:03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세균 감염 우려해 김정은 서명할 만년필까지 소독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세균 감염 우려해 김정은 서명할 만년필까지 소독

     ━  남북 정상회담에 돌출변수가 된 메르스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확진환자 발생으로 보건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3년 전 창궐로 186명이 감염되고 그 중 38명이 사망했던 트라우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청와대와 정부 대북부처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북한에 200명 규모의 정상회담 방북단을 파견할 예정이지만 메르스라는 돌출변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각종 감염병에 취약한 북한 당국은 과민반응을 보이며 남북 당국 간 대화나 민간교류의 문을 완전히 닫곤 했다. 이번에도 메르스가 정상회담 일정에 변수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카펠라 호텔. 북·미 간 첫 정상회담 합의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 서명을 앞둔 긴장된 상황에서 행사장에 북한 경호원이 등장했다. 흰색 장갑을 낀 그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리할 테이블에 다가가더니 서명용 펜을 집어 들었다. 이어 미리 준비해 온 천으로 펜을 꼼꼼히 닦아 반듯하게 다시 내려놓았다. 다른 경호원은 휴대용 분무 펌프까지 들고 들어와 김 위원장이 앉을 의자와 주변 바닥 카펫을 소독했다. 이런 상황은 앞서 4월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연출됐다.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 김정은이 도착해 방명록 서명을 하기 직전 북한 경호원들이 테이블은 물론 의자 등받이와 팔걸이까지 소독약을 뿌리고 닦아냈다. 북측 요구로 우리 측이 준비해둔 서명용 펜까지 점검한 뒤 천으로 연신 문질렀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은 이 펜으로 서명하지 않았다.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건네준 펜을 사용했다. 회담 관계자는 “혹시나 펜이 세균이나 위해 물질에 오염돼 있거나 폭발물 등이 숨겨져 있을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옆에서 세세히 챙기는 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모습. 방명록 서명 때 김정은은 준비된 펜 대신 김여정이 건넨 명품 필기구인 ‘몽블랑’ 만년필을 썼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이 이처럼 과도할 정도로 최고지도자의 신변보호에 신경을 쓰는 건 체제 특성 때문이다. 최고지도자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게 좌우되는 유일영도체제에선 ‘수령’의 지위는 절대시 될 수밖에 없다. 자칫 문제가 생기면 체제 와해로 이어질 수 있다. 주민들에게 ‘당신(김정은)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 식의 논리가 강요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북한이 수령절대주의를 주민들에게 체득게 하려 만든 ‘당의 유일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2013년)은 김일성·김정일을 결사옹위할 것을 강조하는 11쪽짜리 소책자다. 제3장은 김일성·김정일과 노동당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자그마한 요소도 절대로 융화묵과하지 말고 “비상사건화해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라”고 촉구한다. 명문화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원칙이 김정은에게도 적용되는 건 당연하다.   남한에서 벌어진 이번 메르스 사태도 북한에겐 그냥 넘기기 어려운 중대사안이다. 오는 18일로 잡힌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정부 당국자는 물론 정계와 경제계 인사, 취재진 등이 방북하기 때문이다. 200명 규모가 될 방북단은 평양에 2박3일 간 체류하는 건 물론이고 김정은 위원장이 자리할 회담장과 연회장에 함께 머물 예정이다. 예민하게 반응해온 북한의 태도로 볼 때 메르스 발병 지역인 남측 인사의 대규모 방북을 수용한다는 건 꺼림칙한 일이다. 김정은 서명에 앞서 북한 경호원이 흰장갑을 끼고 펜을 꼼꼼하게 닦고 있다. [AP,로이터=연합뉴스]   감염 우려가 있을 경우 철저히 차단당하는 건 김정은의 최측근 고위 인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북한의 명목상 국가수반으로 불리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경우 에볼라가 창궐한 지난 2014년 아프리카를 순방하고 온 뒤 북·중 국경 도시인 신의주에 3주간 격리 조처됐다. 러시아를 방문했던 최용해 당 비서(현 노동당 부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해 9월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왔던 최용해와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현재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경우 평양 귀환 뒤 한동안 김정은과 만나지 못했다. 당시 실세인사인 이들의 공개활동이 없자 숙청이나 신변이상설이 나왔지만 국가정보원은 “에볼라 감염을 우려해 격리된 것”이라고 국회 정보위에 보고했다.   외부세계의 감염병에 북한이 바짝 긴장하는 건 열악한 보건·의료 실태 때문이다. 한번 방역망이 뚫려버리면 끝장이란 절박감이 과도한 대처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메르스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조류인플루엔자(AI), 말라리아 등이 번질 때 북한은 특히 긴장하는 모습이다. 3년 전 메르스 사태 때 북한은 개성공단으로 통하는 출입경 사무소에 열 감지 카메라를 설치했고, 북측 근로자에게 마스크를 착용케 했다. 모두 북한 측 요구로 우리가 제공한 장비와 물품이다. 당시 북한은 메르스 전파방지나 예방과 관련한 의학 정보를 우리 측에 비공개리에 요청하기도 했다.   정부는 메르스 사태가 남북 정상회담에 차질을 가져올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구체적인 동향은 없다”(9월10일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는 입장이다. 정부 당국자는 “한 명의 확진환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더 이상의 확산을 막고 북한에 차질 없는 정상회담 개최를 설득하는 게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북한 측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메르스 사태가 통제 가능한 상황에서 수습되고 있고, 우리 방북단이 경우 철저한 사전조치로 감염우려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지난 8일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60대 남성)와 접촉한 사람들의 예후를 지켜볼 잠복기가 14일 걸린다는 점이다. 감염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22일 이전에 평양 정상회담 일정이 걸쳐있는 것이다. 자칫 북한이 이 대목을 빌미로 회담 연기 등을 요구할 경우 딱히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상황이란 데 정부의 고민이 있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은 18일 정상회담 개최 직전까지 상황을 관망할 것”이라며 “메르스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거나, 회담 테이블에 올릴 우리 측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연기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양옆에 앉은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왼쪽)과 최용해 노동당 부위원장. [노동신문]   메르스 불똥이 민간교류로까지 튈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한 민간단체의 150명 규모 방북을 10월 초 받아들이겠다는 계획을 세운 상황이고, 10월 말에는 금강산에서 우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가 공동행사를 열기로 합의한 상태다. 한 당국자는 “2015년에는 6.15공동선언 15주년 행사를 합의해놓고도 메르스 사태로 인해 결국 각기 치르는 쪽으로 해버린 일이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대남 비난에 활용할 가능성을 거론한다. 3년 전 조평통은 “남조선에 치명적인 메르스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전파되면서 공포와 혼란·침체에 빠져있다”며 “부패·무능과 반인민적 통치의 결과”라고 비방한 바 있다. 당시 우리 정부가 “같은 민족으로 최소한의 예의와 상식을 지키라”고 촉구했지만 북한은 비난 공세를 그치지 않았다. 메르스를 내세운 정상회담 연기카드로 북한이 우리 정부에게 대북제재 해제와 적극적 경협을 압박하고, 내부적으로 ‘썩고 병든 남조선’을 부각 선전하는 효과를 거두려 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9.12 00:0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대북 특사단 가슴서 슬쩍 사라진 태극기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대북 특사단 가슴서 슬쩍 사라진 태극기

     ━  대북 특사파견의 명암   외교 무대에서 특사(特使)는 국가·체제 간 냉랭한 관계를 녹이거나 꽉 막힌 대목을 뚫어낸다. 때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소방수 역할도 맡는다. 남북 대치라는 현실 속에선 분단의 벽을 은밀하게 넘나들기도 한다. 공개적으로 특사가 오갈 때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오거나 실패하면 비난 세례가 쏟아진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5명의 대북 특별사절단이 오늘 평양 방문길에 오른다. 3월 초 특사 방문 이후 6개월 만이다. 이번 방북이 실타래처럼 얽힌 남북관계와 북핵, 한반도 주변 정세를 쾌도난마식으로 풀어줄 수 있을까. 대북특사를 둘러싼 논란과 정부의 고민을 짚어본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오른쪽 세번째)을 단장으로 하는 대북 특사단이 5일 오전 성남공항을 통해 방북길에 올랐다. 이들 일행은 가슴에 태극기 배지를 달지 않았다. 남북 당국 간 공식 접촉이나 회담, 특사방문의 경우 남측은 태극기, 북측은 김일성 배지를 다는 게 관례지만 정의용 특사 일행은 지난 3월에 이어 이번에도 태극기 배지를 뗀채 방북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서울방송(SBS)에서 하는 사극 ‘여인천하’ 있지 않습니까. 나는 80회까지 봤어요. 난정이 역을 맡은 강수연의 연기가 특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우리 용순 비서는 얼마나 봤어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러운 질문에 김용순 노동당 통일전선 담당 비서는 당혹해 하며 “저는 20회까지…”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좌중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 2002년 4월4일 밤 평양 백화원초대소. 2시간에 걸쳐 임동원 대북특사와 회담을 한 김정일은 이어진 만찬에서 특유의 과장된 제스처와 유머 섞인 말투로 환담을 이어갔다. 김 위원장은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 특보에게 “특사 선생도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영화 보셨겠지요. 우리 북남 사이의 현실을 잘 그렸더구만요. ‘쉬리’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라며 감상평을 했다. 남한 사회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 “혜은이의 노래 ‘감수광’을 좋아합니다. 나훈아의 ‘갈무리’도 좋지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김정일의 언급에 임 특보는 내심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12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끌어모은 히트작인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지 못한 데다 TV드라마도 미처 챙겨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북 특사파견의 명암 화기애애한 만찬 분위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특사파견은 성공이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군사행동 가능성까지 점쳐지던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는 가까스로 대화와 협상 국면으로 복원됐다. 서울·평양에서 동시 발표된 공동보도문엔 남북관계의 복원과 철도·도로 연결, 이산상봉과 군사 당국 간 회담 등 합의 내용이 풍성하게 담겼다.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임 특보가 기자에게 “좋은 소식 가져왔으니 지면을 많이 비워두세요”라고 귀띔할 정도였다.   대북특사 파견이나 북한 최고지도자 면담이 늘 수월했던 건 아니다. 남북 장관급회담을 위해 2000년 8월 평양에 간 박재규 통일부 장관은 김정일 면담을 위해 밤새 열차를 타고 함경도의 한 초대소로 달려가야 했다. 당시 서울에선 “김정일 면담을 고집 말라”고 훈령을 내렸지만 박 장관은 국방장관 회담 성사 등을 관철시키려면 김정일과 직접 만나야 한다는 판단에서 밀어붙였다는 후문이다. 2005년 6.15 통일대축전 단장으로 방북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현지에서 특사로 임무를 전환해 김정일과 가까스로 만났다. 북한은 정 장관 일행의 입북 때 ‘공군 훈련으로 비행장이 복잡하다’거나 ‘평양 상공에 번개가 친다’며 2시간 넘게 항공일정을 지연시키는 몽니를 부렸다. 임동원 특보도 2003년 1월 특사방문 때는 북핵 논의 등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측에서 이종석 인수위원(전 통일부 장관)이 함께 갔지만 북한은 김정일 면담 등 남측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3월 5일 방북한 정의용 대북특사가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한 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북측 배석자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과 김영철 당 통일전선부장은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는데 비해, 우리측은 모두 태극기 배지를 뗀채 회담에 임했다. 사진=청와대 제공   북한 체제의 특성상 최고지도자 면담 여부는 대북특사의 성패를 좌우한다. 지난달 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이 전격 취소된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비핵화 합의 이행보다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고집하는 북한의 태도로 볼 때 특사파견이 의미가 없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판단한 것이다. 김정은 면담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도 고려됐을 공산이 크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3월 5일 정의용 특사 일행이 평양에 도착하자 오후 6시 회담을 했다. 만찬장에는 부인 이설주와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동반해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막판까지 면담 여부를 놓고 특사단을 애태우게 만들던 김정일 시대의 구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이런 ‘환대’가 이번에도 이어질지는 장담하기 쉽지 않다. 3월 평양은 남북관계 복원에 이은 북·미 정상회담이란 큰 판을 짜고 있을 시점이었다. 2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유화국면으로 돌아선 북한에게 남측 특사의 방북은 서울과 워싱턴으로 갈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특사 방북 자체만으로도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의 기대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했던 북한의 태도가 석연치 않다는 여론이 거세다. 6개월 전 김정은의 말 한마디에 요동치던 상황에서 이젠 합의이행의 발걸음 쪽으로 관전 포인트가 옮겨졌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감정이 다소 격앙된 상태인 것도 문제로 꼽힌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에 나서고 ‘완전한 비핵화’를 언급하면 숨통이 트일 거라 생각했지만 대북제재의 고삐는 여전하다. 세상이 그리 녹록지 않다고 절감한 듯, 김 위원장은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현장에서 “강도적인 제재 봉쇄”(8월17일 조선중앙통신)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5월 9일 방북해 김정은과 면담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왼쪽 가슴에 성조기 배지가 달려있다.   청와대와 정부의 고민은 깊어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 대북특사를 거론하며 “지금은 한반도 평화정착에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임종석 비서실장은 페이스북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특사단을 응원해달라”는 글을 올렸다. ‘9월 평양 개최’로 합의한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 정상회담 일정을 잡는 것 외에도 비핵화 등 현안 논의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특사단의 마음도 무거울 수밖에 없다.   특사는 한 나라의 국격(國格)을 반영한다. 꼬여버린 북핵 문제와 한반도 이슈를 풀어내는 것 못지않게 당당하고 품위를 잃지 않는 대북접근 방식이 대북특사단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3월 김정은 면담 석상에서 정의용 특사와 4명의 우리 대표 전원이 고개 숙여 메모에 여념이 없는 모습은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남북관계에서 때론 중후장대한 정책이나 이슈보다 이런 장면 하나가 여론을 롤러코스터에 태울 수 있다. 꼬리가 몸통을 뒤흔드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과거 특사단의 왼쪽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려있던 태극기 배지가 언제부턴가 슬쩍 사라져버린 것도 유감이다. 김영철 당 통일전선부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 등 북측 배석자가 김일성·김정일 배지(북측은 ‘초상휘장’으로 호칭)를 여전히 달고 나오는 것과 대비된다. 국가대표가 국민의 눈을 피해 태극마크를 슬그머니 떼어버리고 경기에 나간 형국이다. “북측에 한 명의 ‘최고 존엄’이 있다면, 우리에겐 5000만 국민 모두가 최고 존엄인 세상이 있다”고 외칠 수 있는 당당함을 문재인 정부 대북 특사단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9.05 00:03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남북 화해기류에 체제 단속 고삐 더 죄는 북한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남북 화해기류에 체제 단속 고삐 더 죄는 북한

     ━  북한 ‘교양 사업’의 역설   남북한 사이에 화해·협력 분위기가 고조되면 북한 체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다. 주민에 대한 통제를 느슨히 하고 개혁·개방 노선 쪽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핵과 미사일 도발 수위를 높일 때보다는 아무래도 민생을 더 챙기게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북한 관영매체에 투영된 내부 실상은 다르다.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한 한반도 유화 기류에도 불구하고, 체제 결속을 겨냥한 고삐는 더 바짝 조여지는 양상이 드러난다. 노동신문 키워드를 통해 그 흐름을 짚어봤다.    어제 아침 노동신문은 대남·대외면(6면) 머리기사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명의의 이른바 ‘고발장’을 실었다. 통단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은 한국의 보수 성향 정당들이 남북 간 합의에 반대하고, “반민족적 죄악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박정희 정부를 ‘7.4 공동성명을 뒤집어엎은 반통일 원흉’으로 맹비방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는 “북남관계를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었다”며 ‘반역 도배(徒輩)’란 표현까지 동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조평통은 북한의 대남·통일 사업을 담당하는 ‘국가급 부서’인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이 곳 책임자인 이선권 조평통 위원장은 지난 13일 판문점 남북 고위급회담에 북측 단장으로 나왔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4.27 판문점 선언의 조속한 이행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런 조평통이 전면에 나서 거친 대남비방을 펼치고, 우리 정치권을 염두에 둔 내정간섭 성격의 정치 선동을 전개한 걸 두고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결 종식과 남북관계 발전을 약속한 판문점 선언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한 움직임이란 얘기다.   북한은 체제단속에도 부쩍 공을 들이고 있다.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일심단결을 주장하고 사상교양, 외세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게 주요 레퍼토리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훈풍이 불어닥친 지난 상반기에 관영매체를 동원한 주민 대상 ‘교양사업’이 부쩍 늘어난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위협이 극에 달했던 지난 한 해와 비교해 봐도 확연히 증가했다.   이런 추세는 노동신문 키워드 빈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양석(외교통일위 간사) 자유한국당 의원실이 통일부 북한정세분석국에 의뢰해 노동신문 데이터베이스(DB) 분석 작업을 벌인 결과, ‘계급 교양’이란 단어는 지난해 하반기 154회에서 올 상반기 323차례로 부쩍 늘어 110%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이나 미국과의 관계개선 분위기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듯 ‘자본주의’라는 키워드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 262회 등장했는데, 올 상반기에는 497회 나타나 89% 증가율을 보였다. 정양석 의원은 “핵과 미사일 도발이 이뤄지던 지난해 하반기보다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된 올 상반기에 사상교양이나 외세비판 관련 키워드의 빈도수가 대폭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대남·대미 접근 노선 여파로 엘리트 계층이나 주민이 동요할까 봐 북한 당국이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란 게 정 의원 측 분석이다.   주민 사상교양이나 체제결속을 위한 노동신문의 선전·선동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사회주의’였다. 주로 미국 등 서방세력에 맞서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자는 식의 주장을 내놓는 형태로 쓰였다. 이 키워드는 지난해 상반기 8050차례에서 하반기 8120회, 올 상반기 7875번 쓰인 것으로 나타나 꾸준히 강조된 것으로 분석됐다. ‘당 세포’(1075~1174회)나 ‘제국주의’(1094~1391회) 등의 단어도 지난해 초부터 올 상반기까지 비교적 고른 빈도로 활용됐다.   남북 교류·협력 국면에서 북한 당국이 주민 사상무장에 주력하는 양상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의 첫 남북 정상회담 때도 나타났다. 당시 김정일은 “김 대통령께서 나를 은둔에서 해방시켰다”고 말하는 등 변화 제스처를 보였고, 안팎의 기대도 높아졌다. 하지만 북한은 불과 일주일 뒤 “개혁·개방은 망국의 길이며, 개혁·개방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6월20일 중앙방송)는 입장을 내놓았다. “서방식은 망국이며 자기식 만이 살길”(6월29일 노동신문 논설)이라며 북한식 체제를 고수할 것이란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마치 김일성 사망(1994년 7월)으로 집권한 직후 “나의 사상은 붉다. 나에게서 변화를 바라지 말라”고 선언한 김정일 위원장 시절로 돌아간 듯한 모습으로 비쳐졌다. 이를 두고 정상회담 의미를 부각시키면서도 주민의 사상적 혼란을 막아보려는 조치란 해석이 나왔다.   올들어 4월과 5월 잇달아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고, ‘9월 중 평양 정상회담’에 합의한 상태인데도 북한은 남북 간 인적교류에 예민해 하고 있다. 특히 북한 주민의 남한 방문의 경우 매우 제한적이다. 한국과 서방세계의 발전상에 동요할 우려가 적은 스포츠 선수나 예술단 관련 인사 외에 일반 주민들의 서울 방문은 거의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지난 26일 끝난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북측 지역인 금강산에서 열린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북한은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첫 이산상봉을 포함해 1~3차까지 서울·평양 동시 교환방식으로 치렀다. 하지만 서울을 방문해 워커힐 호텔에 머물면서 시내 주요시설을 참관한 북측 이산가족이 평양 귀환 후 동요하고 남한의 발전상을 가족·친지들에게 말하는 사태가 잇따르자 ‘금강산 상봉’을 고집해 관철시켰다.   북한은 이번 경우에도 남측 가족과 만난 북측 이산가족을 곧바로 해산시키지 않고 평양에 합숙시키며 사상교양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우리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교양작업은 주로 상봉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 등을 반성하는 ‘자아비판’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게 고위 탈북인사의 전언이다. 남측 가족과 나눈 대화 내용을 복기해 제출하고, 받은 달러나 선물을 신고하고 당에 바치는 절차도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사전 교육을 받았지만 이른바 ‘남조선 물빼기’를 위해 적어도 2~3주 집단생활을 하며 복귀 채비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9월 캘린더에는 남북한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비중있는 일정이 빼곡하다.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인 9.9절 70주년 행사와 함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 예정돼 있다. 지난 주 전격 취소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방북이 어떻게 가닥을 잡느냐에 따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유엔 방문과 남북한 및 미국의 종전선언 문제도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사상교양을 지렛대 삼아 주민들의 눈과 귀를 가려온 북한 당국의 고민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8.29 00:0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이별 위해 만나다니 … ‘작별상봉’이란 잔인한 말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이별 위해 만나다니 … ‘작별상봉’이란 잔인한 말

     ━  이산가족 창의적 해법 찾자    영원한 헤어짐을 위해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70년 가까이 생이별했다가 찰나의 기쁨을 맛본 뒤에 말이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며 부둥켜안아도 소용없다. 이념과 체제의 서슬 퍼런 눈초리가 핏줄과 천륜을 허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 비인도적이고 무자비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금강산에서 그제부터 열리고 있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얘기다. 세상에서 더 이상 잔인할 수 없는 언어의 조합이라 할 ‘작별상봉’에 비친 이산가족 문제를 짚어본다.    이산가족 상봉 분위기는 만남의 장소인 금강산 기류만큼이나 급변한다. 2박3일의 짧은 일정 속에서 처음엔 격한 재회의 기쁨을 누리다가 결국 헤어짐을 예견하는 안타까움과 회한으로 급전직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틀째 밤은 상봉장 안팎과 이산가족의 얼굴에 무거운 침묵과 암울한 그림자가 가득 드리운다. ‘차라리 만나지 말 걸 그랬다’는 절규는 상봉 트라우마의 아픈 분출이다.   사흘간의 만남 일정이라지만 실제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건 11시간에 불과하다. 헤어진 70년이 61만3200시간에 해당하니 상봉의 장면은 그야말로 눈 감았다 뜨는 짧은 순간이다. 금강산으로 들어가 오후 단체상봉과 환영만찬을 하고, 이튿날 개별상봉과 객실에서의 도시락 점심 식사 등을 마치고 나면 마지막 날 ‘작별상봉’ 일정이 성큼 다가와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관련기사이산가족, 객실서 첫 도시락 상봉 … 이틀 만에 또 작별 준비 작별상봉장은 눈물이다. 2시간 동안의 만남에선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상봉장에 나오지 못한 가족·친지에 전할 안부가 오간다. 편지하라며 주소를 주고받거나 ‘통일되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지만 부질없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금강산호텔 앞 광장에 한쪽 가족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버스를 타고 떠나는 상대측 가족을 배웅한다. 북측 가족의 배웅은 더 가슴 아프다. 북한 안내원의 통제 때문에 버스 근처에 얼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발치에서 하염없이 손만 흔들어야 하는 표정은 더 슬프다.   이번 이산상봉은 2000년 8·15 상봉 이후 21번째다. 당초 남북한이 서울·평양에서 동시에 상봉행사를 치르던 1~3차 이산가족 만남 때는 작별상봉이란 표현이 없었다. 통일부 관계자는 “서울 방문에 부담을 느낀 북측 요구에 따라 금강산으로 상봉 장소를 옮기면서 작별상봉이란 말이 쓰이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상봉은 지난 2015년 10월 이후 2년 10개월 만이다. 이산의 한을 안고 유명을 달리한 고령 이산가족을 생각하면 상봉 횟수나 규모가 더디기 그지없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7월 말 기준으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3만2484명이다. 이 가운데 7만5425명이 숨졌고, 5만7059명이 상봉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1년에 한 번 상봉하는 지금 추세라면 570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500년 넘게 걸린다는 말이다.   절박한 이산가족의 심정과 달리 정부 대처는 미덥지 못하다. 통일부는 어제 국회 외교통일위에 “차기 적십자 회담 등을 통해 전면적인 생사확인과 고향 방문, 상봉 정례화 등을 북측과 본격 협의해 나가겠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북측이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전향적 조치를 취하도록 견인할 방도는 빠진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남북 당국대화나 적십자회담 때마다 ‘상봉 정례화’ 등을 합의문에 담았지만 늘 불발에 그쳤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의 물꼬가 트일 때마다 북한이 시혜성으로 들고나오는 간헐적 상봉 외에 우리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상봉 규모 확대 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상봉 행사가 시작된 지난 2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정기적인 상봉 행사는 물론 전면적 생사확인과 화상 상봉·상시상봉·서신교환·고향 방문 등 상봉 확대방안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의 상시 운영도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지시하달만으로는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란 정책 목표에 다가가기 어렵다. 좀 더 결연한 자세와 전략적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담판을 통해 가시적 성과를 거두겠다는 의지가 필요해 보인다. 마침 남북한은 9월 중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상태다. 평양 회담에선 지난 4월 판문점 정상회담 때 합의한 사안의 이행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 한다. 지난 13일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우리 측은 북한 지역 철도·도로 현대화와 대북 산림 지원 등을 제안했다. 가을로 예정된 북측 예술단의 남한 공연 문제도 거론됐다. 북핵 폐기 등과 함께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모두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산가족 문제의 시급성에 비할 바 아니다.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와의 상봉을 오매불망 그리던 고령 이산가족이 매년 3600여 명 넘게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지난 한 달에만 316명이 눈을 감았다. 넉 달 전 판문점에서 평양냉면으로 의기투합하고, ‘우리 민족끼리’ 기치에 공감대를 이뤄온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라면 못 풀 현안이 없어 보인다. 문 대통령이 공언해온 ‘사람이 먼저’라는 정신에도 부합한다.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면 ‘대북제재의 예외’ 카드를 써먹어도 좋다. 북한산 석탄 수입에 제재 구멍이 뚫렸다고 눈총을 보내온 국민도 이산상봉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눈감아줄 수 있다. 6·25 당시 북한 땅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를 송환받고 있는 트럼프 행정부도 인도적 사안이란 공통점에 고개를 끄덕일 공산이 크다.   당장 돈을 건네기 부담스럽다면 ‘부채 탕감’ 방식의 접근도 가능하다. 상봉 한 건에 1만 달러(우리 돈 1170만원)를 주고서라도 이산가족 문제에 호응토록 북한 당국을 이끌어 내자는 아이디어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김정은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달러 뿐”이라고 단언한다. 이산상봉 담당 기관의 불만을 덜어주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이산가족 행사 한 달 전부터 북측 상봉자들을 집결시켜 매일 목욕시키고 잘 먹여 ‘때벗이’를 하고, 양복(여성은 한복) 차림에 구두·가방·선물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 이를 떠맡은 기관들이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는 게 사실이란 것이다.   마침 우리 관계당국의 장부에는 북한이 갚지 않은 9억3060만 달러(1조405억원)의 채무가 올라있다. 쌀 240만 톤과 철도·도로 자재와 장비 등을 차관으로 빌려 가 떼일 처지에 있는 금액이다. 대부분 노무현·김대중 정부 시절 공여된 물량이다. 이산상봉을 기다리는 5만7000명(1만 달러씩 줄 때 5억7000만 달러) 모두를 상봉케 하고도 넉넉한 액수다. 더 이상의 작별상봉을 없앨 방도 중 하나다. 동독 내 민주화 인사와 정치범을 자유 세계로 데려오기 위해 서독 정부가 돈을 건넸던 ‘프라이카우프(Freikauf, ‘자유를 사다’는 의미)’ 정신은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도 유효하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8.22 00:0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대북제재를 뒤흔드는 손길들 … 정책 실패 자충수 되나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대북제재를 뒤흔드는 손길들 … 정책 실패 자충수 되나

     ━  구멍 뚫린 대북제재   견고해 보였던 대북제재에 쩍쩍 균열이 가고 있다.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리더니 곧 봇물 터질 듯 한 기세다. 지난 2월 북한의 평창 겨울 올림픽 참가를 이유로 극히 예외적으로 취해졌던 제재 완화 및 일시 해제 조치가 이젠 줄을 잇고 있다. 급기야 북한산 석탄이 버젓이 우리 항구에 하역되는 사태까지 드러났다. 그 중심에는 문재인 정부가 있다. 대북 제재의 필요성을 주창했던 한국의 이런 태도 변화에 미국 등 국제사회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북한의 도발 본능을 억제시키고 태도 변화를 이끌어낸 일등공신 지렛대가 망가져 간다는 판단에서다. 대북제재 훼손 논란의 막전막후를 들여다본다.   개성공단이 2004년 12월 가동을 시작하자 미국과 국제사회는 대북 현금 유입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북한에 건네지는 노동자 임금이 핵 개발이나 미사일 자금은 물론 독재 정권의 내탕금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우려에서다. 최대 연간 8000만 달러(한화 904억5600만원)의 뭉칫돈이 노동자의 손이 아닌 북한 관리총국에 건네진다는 점에서 전용 의혹은 커져갔다. 미국 내 일부 보수 학자와 정객들 사이에서는 개성공단 임금을 놓고 ‘1달러 노예 노동’ 논란까지 확산됐다.   노무현 정부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정부와 청와대 외교안보 참모 사이에서 회심의 반격카드가 마련됐다. 당시 워싱턴 측에서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해 수백만 달러 규모의 현금을 지급했다는 점을 특정 언론에 흘려 개성공단 임금 비판 여론의 예봉을 꺾으려는 의도였다. 정부 당국자들도 일제히 미국의 대북 달러 제공 사실을 부각시키는 분위기를 확산시키려 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에 정부는 금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국민 사이에 “미국은 6.25 때 숨진 전사자 유해까지 찾아오려 달러를 쓴다지만, 우린 무엇을 위해 대북 퍼주기를 하는 거냐”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국군포로와 납북·억류 국민 송환에 적극적이지 않은 정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였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노무현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은 2006년 하반기 더 큰 시련에 마주했다. 북한이 국제 사회와의 모라토리엄(발사유예)을 위반하고 그해 7월 탄도미사일을 무더기로 쏘아 올리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북결의를 통해 제재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석 달 뒤 함북 풍계리 동쪽 갱도에서 감행된 첫 핵 실험은 안보리 대북결의 1718호를 불렀고, 대북 반·출입 규제와 금융제재 등이 촘촘히 펼쳐졌다. 한국 정부도 남북 간 총거래의 80% 수준인 3억6000만 달러의 대북지원과 당국 차원의 경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북제재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국제사회가 정한 규율 위반에 대한 징계 성격을 띤다. 북한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안정을 해치는 행위를 중단하고, 대화와 협력으로 나오도록 견인하기 위한 정책 수단이다. 무력 보복이나 군사적 응징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고육책이기도 하다. 북한은 대북 제재에 반발하며 미국과 유엔 등에 책임을 떠넘기는 대내외 선전·선동으로 맞서왔다. “지금까지 제재를 받으면서도 별일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재재를 더 받는다고 하여 못살아 갈 줄 아는가”(『김일성 저작집』 제44권)라는 국가주석 김일성의 사망(1994년 7월 8일) 이틀 전 ‘경제 부문 책임일꾼 협의회’ 발언은 대북제재에 대한 북한의 대응 논리를 엿보게 한다.   김일성의 손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북제재의 쓴맛을 제대로 봤다. 지난 한 해 집중적인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도발로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자초한 것이다. 미국은 물론 후견국을 자처해온 중국도 제재결의에 동참했다. 지난해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도 김정은의 막무가내식 도발 행보에 결국 북한을 ‘적(敵)’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격앙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제재 압살 책동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화를 복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기본 열쇠가 자력갱생”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뒤 그는 신년사를 통해 도발중단과 대화노선 선회를 공언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내몰렸다. 평창 겨울 올림픽은 도발에서 유화국면으로 급선회한 김정은의 쑥스러움을 완충시켜 준 좋은 멍석이 됐다.   지난 8개월간의 남북관계와 한반도 주변 정세 변화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다. 4월과 5월 남북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렸고, 청와대는 9월 추가 회담을 예견하고 있다.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완전한 북핵 폐기와 한반도 평화체제의 빅딜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29일 장거리 미사일 ‘화성-15형’ 발사를 끝으로 오늘까지 260일째 북한은 도발을 멈췄다.   겉으로 보면 김정은의 노선 변화가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핵과 미사일 도발로 일관하다가는 북한 체제의 생존은 물론 자신의 권력 유지도 어렵다는 셈법이 김 위원장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을 공산이 크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압박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데에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담당자들도 큰 이견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최근 들어 대북제재를 뒤흔들고 그 틀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올림픽 정신을 내세운 ‘제재 예외 조치’는 차치하더라도 개성 남북 연락사무소 개설과 금강산 면회소 개보수, 서해 군 통신선 개통 등 남북관계 전반에 걸쳐 제재를 회피한 대북 지원성 사업이 추진 중이다. 모두 김정일·김정은 정권이 대남 도발과 핵·미사일 공세 와중에 단절했거나 우리 정부와 기업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몰수해 훼손한 경우다.   대북제재라는 채찍을 국제공조와 조화시켜 최선의 정책 성과를 거두도록 하는 게 정부의 책무다. 김정은 정권이 ‘완전한 비핵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오도록 이끄는 과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정부가 앞장서 대북제재의 둑을 허물어트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문제다.   민감한 시점에 문재인 정부가 800만 달러 규모의 대북지원 카드를 만지작거리자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대북 압박의 조기 완화는 비핵화 가능성을 줄어들게 할 것”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한·미 불협화음이다. 북한에게도 얕잡혔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몰아세우면서 “돈 안 드는 일만 하겠다는 심산으로 주판알만 튕긴다”고 대남비방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북한의 선의에만 기대는 건 정책이 아닌 요행수다. 정부의 섣부른 제재 풀기에 우려의 시선이 쏠린다. 자칫 대북정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란만 키우고 남북관계와 국제공조에도 파열음만 부르는 자충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8.15 00:02

  • 김정은의 유별난 '메기 사랑'이 왠지 불길한 이유

    김정은의 유별난 '메기 사랑'이 왠지 불길한 이유

    北, '메기의 추억'은 잊고, 북한 개혁·개방의 큰 틀 짜야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김정은의 ‘메기 사랑’ 읽기   북한 김정은의 ‘메기 사랑’이 폭염보다 뜨겁다. 며칠 전 황해남도의 한 메기 양어장을 찾은 그는 “볼수록 희한한 공장”이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냉동 창고에 쌓인 열대메기를 본 뒤엔 “마치 금괴를 쌓아놓은 것만 같다”는 말까지 했다. 지난달 중국과의 접경지대 공장·협동농장과 동해안 지역 산업시설을 돌아보고 거친 불만과 질책을 쏟아내던 모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열대메기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유난히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메기 양식에 비춰진 북한 경제의 현주소를 진단해본다.    메기(catfish)는 하천이나 호수의 진흙뻘에 주로 서식하는 어종이다. 긴 수염이 인상적인 이 민물고기는 매운탕 등의 음식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북한에서 때아닌 메기 붐이 일어난 건 1990년대 후반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과 기록적 폭염, 그리고 이어진 대홍수로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란 혹독한 식량난을 겪었다. 2400여만 명의 북한 주민 가운데 ‘200~300만 명이 굶어죽었다’(실제로는 46만 명 정도로 우리 당국은 추산)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고, 북한 체제의 붕괴가 점쳐질 정도의 위기 상황에 봉착했다. ‘풀판을 고기로 바꾸자’며 토끼 사육을 강조했지만 별무성과였다. 다급해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식량난 극복을 위해 빼 든 카드 중의 하나가 메기였다.   단백질을 충분히 공급하려면 토착종 메기로는 역부족이었다. 덩치가 크고 적은 사료로 빨리 키울 수 있는 열대메기가 낙점됐다.우리의 경우 수족관에서 관상용으로 선보이는 외래종인 클라라 메기가 바로 북한이 열대메기로 부르는 품종이다. 치어를 8개월 정도만 키우면 길이 60~70cm에 무게가 3㎏ 이상 나가는 성어가 된다는 게 장점으로 꼽혔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은 물론 지방 곳곳에 열대메기 양식장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그는 연일 메기공장을 찾아 “메기 생산을 정상화(頂上化) 하라”고 촉구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일본인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에게 해외로 가서 요리법을 배워오라고 해 직접 시식을 할 정도였다. 조선중앙TV 등 관영매체가 총동원돼 열대메기의 영양과 요리법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였다. 평양 고려호텔을 비롯한 고급 식당가에선 열대메기 메뉴가 등장했다. 한 요리 경연대회에 선보인 메기요리만 70가지가 넘는다는 보도까지 쏟아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열대메기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무엇보다 열대 어종 특성상 육질이 푸석거리는 바람에 식감이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지나치게 큰 외래 물고기에 대한 시각적·심리적 거부감도 더해졌다. 메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사시사철 온수 공급이 필요했다. 통상 25~28℃의 수온이 유지돼야 하고, 겨울에도 10℃ 이상이 돼야 하지만 북한의 열악한 경제 사정으론 역부족이었다. 결국 최고지도자가 기치를 내건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흐지부지됐다. 고위 탈북 인사는 “당시 북한 전역에 촘촘히 들어섰던 메기 양어장은 미나리꽝으로 바뀌었다가 곧 폐허처럼 방치됐다”고 전했다. 열대메기는 엉뚱하게도 북한에서 일등 신랑감을 일컫는 말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당증을 ‘메’고 있으며, ‘기’술이 있는 남성을 의미한다는 얘기였다.   2012년 초 집권한 김정은 위원장은 메기를 부활시켰다. “물고기 양식은 주민 식생활 향상에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사업”이라며 다시 메기양식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의 기후 환경에 맞지 않고 주민으로부터 외면받는 상황임에도 김 위원장은 “지금 일부 일꾼(북한에선 간부를 지칭)들이 아직도 이런저런 조건타발(불평·불만)만 하면서 양어에 혁명적으로 달라붙지 않고 있다”고 질책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김정은의 지시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바른말을 할 수 없었다. 메기 소비에 대한 선전·선동도 강화돼 북한의 대외선전 사이트인 ‘조선의 오늘’은 메기된장구이와 깨튀기(튀김)·찹살완자찜·빵가루튀기 등 6종의 메뉴를 ‘조선특산요리’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메기 양식을 강조하는 김정은의 최근 통치 행보에선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북한 경제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첫째는 군부에 의존하는 낡은 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지난 5일 황해남도의 삼천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은 “내각이나 성(省·부처)·중앙기관이 아니라, 물불 가리지 않고 결사관철로 대답하는 것을 체질화한 인민군대가 (공장 운영을) 맡아보고 있기에 당에서는 마음을 푹 놓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 전문부서나 공장·기업소가 아닌 군부의 인력이나 설비·자재에 맡겨 모범단위를 만들고 내고, 이를 다른 기관이 따라 하도록 하는 방식에 북한 경제를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여전히 선대(先代) 수령의 경제노선이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미 대실패로 결론 난 메기양식에 집착하는 건 최고지도자를 ‘무오류의 존재’로 여기는 수령 절대주의의 그늘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통일부 당국자는 “2년 전 여름 함북 지역 대수해 때 북한이 구호물품으로 냉동 생선을 현지에 보낸 건 김정은의 ‘물고기 사랑’ 지침에 당국이 얼마나 경직된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귀띔했다.   셋째,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 경제의 회생이나 개혁·개방을 위한 보다 큰 틀의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지난 6월 북·미 정상회담 개최지인 싱가포르의 발전상을 목도하고, 그 직후엔 베이징을 방문해 궤도교통지휘센터 등 첨단설비를 참관했다. 그런데 북한 귀환 후 김정은이 찾은 곳은 변경지역의 시범 협동농장이나 경공업 생산라인에 그쳤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서명한 뒤 “앞으로 세상은 아마 중대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런 언급은 “나의 사상은 붉다. 나에게서 변화를 바라지 말라”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집권 초기 다짐과 궤를 달리한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테이블에 선뜻 응한 김정은에게 기대가 쏠린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지만 국제사회를 향한 김정은의 약속은 두 달 가깝도록 실행되지 않고 있다. 그가 보여준 건 ‘비핵화’를 둘러싼 지루한 입씨름과 변죽만 울리는 듯한 태도다. 풍계리 핵 실험장 폐쇄와 미사일 시험장 해체, 미군 유해 일부 송환 등에선 합의 이행의 진정성이 감지되지 않는다. ‘중대한 변화’와는 더욱 거리가 멀다.   예고편이 길면 채널은 돌아간다. 이대로 가다간 북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제사회는 실망할 공산이 크다. 대북압박을 통해 김정은 체제에 변화를 강요하는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북한 체제를 감싸는 문재인 정부의 열정도 고갈될 수밖에 없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하루빨리 ‘메기의 추억’을 떨쳐버리고 개혁·개방의 통 큰 전략을 결단해야 하는 이유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8.08 00:0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대북정보 활용 뒤 간첩 굴레? 탈북 엘리트 구속 사건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대북정보 활용 뒤 간첩 굴레? 탈북 엘리트 구속 사건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손꼽히던 탈북 엘리트 L 박사(50)에게 불행이 닥친 건 지난달 중순. 그의 사무실엔 검찰 수사관이 들이닥쳐 압수 수색을 벌였고, L 박사는 결국 구속 수감됐다. 혐의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이다. 민감한 대북정보를 유출하고 이를 해외 정보 요원에게까지 넘겨 대한민국의 국가 이익을 해쳤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하지만 L 박사 측은 “탈북자를 내세워 대북정보 수집에 활용하던 국가와 정보기관이 이제 와서는 간첩의 굴레를 씌우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양측의 입장을 통해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봤다.    대북정보는 엘리트 계층 탈북 인사들에게 ‘양날의 칼’로 불린다.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적지 않은 돈까지 챙길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노동당 간부 출신 탈북 인사는 “서울 도착 후 가장 먼저 동료들로부터 들은 말이 ‘정보 장사 잘못하다간 큰일 난다’는 주의였다”며 “하지만 당국의 요구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귀띔했다.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에 나와 있는 김일성대 동창이나 동료·친지를 활용해 대북정보를 캐내 보라는 정보기관의 은밀한 압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북한 체제 내부의 민감한 동향을 담은 고급 정보는 국가 정보기관에서 가장 탐내는 아이템 중 하나다. 국가정보원과 국군정보사령부, 국군기무사령부 등의 정보 요원들이 경쟁적으로 수집에 나서는 이유다. 결정적 정보는 특별진급은 물론 훈포장과 보로금(상금) 등이 보상으로 돌아온다. 요원들 사이에선 ‘북한 핵 시설의 토양을 캐내 오는 데 성공해 훈장을 받았다’거나 ‘김정일 극비 방중을 중국 단둥역에서 포착했다’는 베테랑 선배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회자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탈북 엘리트인 L 박사도 대북정보 업계에선 선망의 대상이었다. 북한 과학기술계 명문대인 이과대학 출신인 그는 국가과학원과 호위사령부에서 일했다. 그렇지만 기독교 순교자 집안이란 출신성분을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낀 L 박사는 2001년 탈북했고. 중국에 체류하던 중 2005년 한국에 입국했다. 전공을 살려 국내 농업 유전자 관련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박사학위도 취득했다. 누구보다 한국에 잘 정착한 탈북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L 박사가 대북정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2009년 하태경 현 바른미래당 의원이 대표로 있던 대북매체 ‘열린북한방송’을 통해서다. 북한 내부의 핵심 정보를 잇달아 공개하면서 정보기관과 언론 등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L 박사 측은 “김정일의 후계자가 누가될지 우리 정부나 당국도 잘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L 박사가 ‘김정은’을 지목하는 등 북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냈다”고 주장한다. 당시 통일부 정세분석총괄과에서 찾아와 북한에 대한 연구 및 분석을 하는 사단법인 설립을 권유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L 박사는 2011년 ‘대북 전략정보 연구’를 표방하는 사단법인을 만들었고, 이후 통일부에 월 1~2회씩 정세분석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대외비인 정책연구 용역까지 맡아 ‘3대 세습 등장 관련 북한 경제회복 가능성’이나 ‘김정은 통치자금확보 및 운영실태 분석’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통일연구원과 세종연구소 등의 객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한 경력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통일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으로부터 대외비 문서 등을 제공받아 업무를 수행했고, 인맥과 정보력을 통해 양질의 대북정보를 다량 수집하고 있었다”는 게 L 박사 변호인 측의 주장이다.   L 박사의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문제는 검찰이 구속기소한 국군 정보사령부 출신 간부들의 대북정보 누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정보사 공작팀장 출신인 황모(58)씨는 2013년부터 올 1월까지 군사기밀 109건이 담긴 컴퓨터의 화면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수법으로 빼돌렸고, 이 정보를 전임자였던 홍모(66)씨에게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홍씨는 황씨로부터 받은 정보 중 ‘주요 국가 무기정보’ 등 56건을 외국 정보원에게 넘겼다.특히 홍씨는 해외에 파견된 우리 정보 분야 비밀요원의 신상정보까지 수 천만 원에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요원 출신 인사들의 충격적인 기밀유출 행위를 수사하던 검찰은 홍씨가 평소 L 박사로부터 대북정보를 많이 챙겨왔던 점을 수상히 여겨 수사를 확대했다고 한다.   검찰은 단호한 입장이다. L 박사에 대한 압수 수색 결과 컴퓨터와 외장 하드에서 정보사령부가 생산한 군사기밀 63건이 발견됐고, 홍씨와 이메일을 통해 주고받은 정황도 드러났다는 것이다. 일본 측 정보 요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4500만원을 수수한 사실도 있어 “범죄의 정도가 매우 중하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이에 대해 L 박사의 변호인은 “피의자(L 박사)가 북한 관련 자료를 수집·조사하고 분석해서 이를 외부에 제공하는 것은 정당한 업무수행”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L 박사의 지인은 “구속된 전직 정보사 요원 홍씨가 자신이 중국에서 수집한 정보라며 메모한 내용을 가져와 컴퓨터 입력을 부탁한 적이 여러 번 있다”며 “그런 문건까지 모두 군사기밀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면 어떻게 하냐”고 수사에 불만을 나타냈다.   L 박사가 일본 측 정보 요원과 알게 된 과정에 국군기무사령부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L 박사 측은 “2011년경 기무사 군무원을 통해 일본 무관을 소개받았다”며 “당시 기무사 측은 L 박사에게 일본 무관을 소개해주면서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L 박사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대북정보 관련 사단법인 규정대로 북한 관련 자문 대가(월 100만원)를 받았을 뿐이란 얘기다. L 박사 측은 “약 5년간 월 100만원씩 받은 금액을 합치니 5000만원 가까운 돈이 되는 건데, 이걸 일본에 정보를 팔아먹은 대가라고 주장하는 건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에 대해 탈북자 사회는 침묵하고 있다. 자칫 불똥이 대북정보를 다뤄온 탈북단체나 엘리트 인사들에게 튈까 우려해서다. 검찰은 구속된 정보사 출신 홍씨가 L 박사에게 받은 자료를 다른 탈북 박사와 국책연구기관에 근무하는 탈북 인사에게 넘긴 사실을 파악했다고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한 탈북 단체장은 “L 박사 건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탈북자 활용 방식 아니냐”면서 “하지만 분위기 때문에 다들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3대 세습 비판 등 북한이 불편해할 정보를 적지 않게 제공해온 L 박사에 대한 ‘입막음’용이라는 음모론까지 나온다. 일각에서는 L씨가 대북정보와 관련해 무리수를 두다 한계선을 넘은 것 같다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L 박사를 초빙해 ‘객원 연구위원’ 등으로 활용했던 연구기관이나 박사들도 ‘석방 탄원서를 부탁한다’는 가족 요청에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8.01 00:02

  • [서소문사진관] 외신이 본 북한판 귀족학교, 만경대혁명학원

    [서소문사진관] 외신이 본 북한판 귀족학교, 만경대혁명학원

    평양에 주재하는 프랑스 통신사 AFP는 26일 '북한판 귀족학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만경대혁명학원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들은 지난 4월과 6월에 촬영한 것들이다.  평양에는 미국의 AP와 프랑스의 AFP 등 2개의 서방 통신사가 주재하고 있는데, 취재 활동은 북한측의 안내에 따라야 하고 기사와 사진도 검열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이 생물 수업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만경대혁명학원은 1947년 문을 열었다.  처음 이름은 '평양 혁명자유가족학원'이었다. 이름 그대로 항일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유자녀들을 교육하는 기관이었다. 이후 한국전쟁 전사자와 대남 침투요원, 정권 고위간부의 자녀들도 선발했고 이름도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바꾸었다.   '만경대'는 김일성의 생가가 있는 평양의 마을이다. 북한에서는 '혁명의 요람'이요, '태양의 성지'로 성역화된 지역이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백두혈통을 정당화하고 지켜주는 역할을 부여받으며 북한 세습체제의 핵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평양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이 생물 수업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김일성은 학교 건설 때부터 시작해 생전에 백차례 이상 학교를 방문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김일성의 조카인 김선주가 교직원을 맡기도 했을 정도로 이 학교는 북한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중·고등학교 과정 6년에 군사교육 2년을 더해 8년 동안 북한식 엘리트 교육을 받는다.       만경대혁명학원 전경. 건물은 서양식 석조건축이고 운동장엔 인조잔디가 깔려 있다. [AFP=연합뉴스] 만경대혁명학원은 올해 개교 71주년을 맞았다.  교가의 내용은 이렇다. "혁명을 위하여 배우자 / 백두산 장수 힘 키우자 / 우리들은 주체위업 빛내 갈 만경대의 아들들이다."   지난해 개교 70주년 행사에서 한 졸업생은 이렇게 말했다. "만경대의 물과 공기만을 마시며 자라난, 달리는 살 수 없는 만경대의 아들답게 제1 기수가 되어 전군에 앞장 해서 나가겠습니다."     생물수업 풍경. 학생들이 거북과 개구리의 대형 해부모형을 보며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다. 모두 군복 차림이다. [AFP=연합뉴스]     생물실습교실. 동식물의 모형과 그림, 사진이 벽에 장식되어 있다. [AFP=연합뉴스]     태권도 수업 시간. [AFP=연합뉴스]     만경대혁명학원 저학년 학생들이 기관총 벌컨포를 사격하는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4학년이 되면 개인 무기를 수령하고, 이후의 학교생활은 병영생활과 마찬가지다. 아침 기상부터 저녁 취침까지 군인과 다름없다. 유격훈련 등 군사훈련도 받는다. 7, 8학년에는 실전훈련을 받는데 탱크 실습도 포함된다.     사격훈련을 하는 평양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 [AFP=연합뉴스] 졸업생의 명단은 북한의 통치권력 자체다. 1기 졸업생인 연형묵과 최영림은 총리에 올랐고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김영춘과 국방위 부위원장을 지낸 오극렬도 이 학교 출신이다. 처형된 장성택, 해임된 리영호도 졸업생이다.   최근 핵심 실세로 떠오른 최용해, 북미 정상회담의 주역으로 활동한 김영철도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이다.     평양 만경대혁명학원 복도의 반미 포스터. [AFP=연합뉴스] '5점의 총창으로 조국과 부모의 원쑤를 갚자' 학교 복도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돋우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앳된 얼굴의 남녀 학생이 창으로 미군을 찔러 죽이고 있다. 창은 커다란 펜이다.     위 사진은 6월 15일에 촬영한 것이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이후 평양에서 반미 구호와 선전물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니 이 포스터도 철거됐을지 모른다.    최정동 기자     

    2018.07.26 15:3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폭염 속 김일성광장 9·9절 행사 채비 … 남북관계엔 경고음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폭염 속 김일성광장 9·9절 행사 채비 … 남북관계엔 경고음

    요즘 평양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노동당과 내각의 간부와 실무자들은 사실상 비상근무 체제에 들어갔다고 한다. 주민을 대상으로 한 강도 높은 사상교양과 총화(비판·결산 모임)가 이어진다. 올 들어 2차례 남북 정상회담 이후 주춤하던 대남 비방의 포문도 다시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을 정조준한 대목이 찜찜하다. 남북 당국 관계 뿐만이 아니다. 민간 차원의 경협·교류도 남측의 기대치만 높아졌을 뿐, 북한은 시큰둥한 상황이다. 4.27 판문점 선언 석 달을 맞이하는 평양 내부를 들여다본다.    올 여름 평양도 폭염 기세가 대단하다. 연일 30도를 넘는 날이 이어지고, 어제는 34도를 기록했다. 1994년 이후 24년 만의 기록적인 더위다. 그해 7월 북한은 김일성 사망이란 변고를 맞았다. 살인적 폭염 속에 검은 상복 차림으로 장례와 추모 행사를 치르다 열사병에 걸리거나 숨진 경우가 적지 않다고 당시를 체험한 탈북 인사들은 진저리친다. 올해는 9·9절(정권 수립 기념일) 70주년 행사 준비로 부산하다는 게 지난주 평양을 다녀온 재미교포 인사 A씨의 귀띔이다. 이 인사는 “김일성광장과 인민대학습당 마당 등에 흰색 운동복 차림에 모자를 쓴 학생·주민이 김정은 찬양 매스게임과 군중집회 행사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고 전했다. 대학교수 출신 탈북 인사는 “2~3개월 정도의 준비 일정에 강제 동원되다시피 하다 보니 학생의 경우 수업결손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래픽= 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A씨는 노동당·내각의 간부와 실무자도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피곤해하는 분위기였다고 강조했다.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잇달아 치렀지만 체제 내부의 위기감은 누그러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A씨는 “토요일 오전 실시하던 총화를 오후까지 연장해 강도를 높인데다, 출결 여부를 엄격히 체크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평양을 방문한 교포·해외 대표단 안내를 맡은 북측 관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한다. 과거와 달리 총화에 출석도장을 찍기 위해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북·미 정상회담 이후 노동당과 내각·군부 고위층을 대상으로 군기잡기에 나선 김정은의 ‘버럭 통치’가 결정적 작용을 한 듯하다는 게 A씨의 진단이다. 지난달 12일 싱가포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회담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곧이어 베이징을 찾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다. 이후 북·중 경제특구인 황금평 지구가 있는 평북 신의주 일대 공장·기업소를 현지지도했다. 여기에서 김 위원장은 “마구간 같다”거나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온다”는 등의 거친 언사를 동원해 경제관리 실태와 간부의 태도를 질책했다. 이런 행보는 백두산이 있는 양강도 삼지연과 함경북도 청진 지역 등으로 이어졌고, 어제 노동신문은 김정은의 강원도 지역 양묘장 방문 소식을 전했다. 6월 말부터 북·중 접경과 동북부 지역을 잇는 현장방문 여정을 소화한 것이다.     A씨는 평양에 새로운 대형 쇼핑몰이 세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김정은 시대 들어 선보인 쇼핑센터인 광복거리상업중심이 성업 중인데, 보다 현대적 시설이 올 가을 오픈을 목표로 공사 중이란 얘기다. A씨는 “북한에서 상업유통 등으로 막대한 자본을 거머쥔 신흥 부유층의 경우 ‘오늘 소비를 해도 내일 또 더 많은 돈이 들어온다’는 인식이 만연한 상태”라고 말했다. 마치 중국의 개혁·개방 시기 이중가격제의 빈틈을 노려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한 사례를 보는 듯하다는 설명이다.   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 건물이 빼곡한 뉴타운 건설이 한창이던 평양의 건설붐은  속도 조절에 들어간 느낌이었다고 한다. A씨는 “김정은 지시로 건설 중인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해양리조트) 공사에 건설 장비와 자재·인력이 대부분 투입되고 있어 다른 지역이 부진한 것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공사현장에선 강도나 품질에서 B급으로 취급받는 중국산 철근이나 강재가 북한에선 A급으로 간주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북한 건자재의 수준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 당국이 최근 들어 ‘천년을 책임지고 만년을 보증하자’고 품질과 안전을 강조하는 것도 이를 의식한 때문이라고 한다.   한여름에 접어들면서 북한의 대남 분위기는 싸늘해지고 있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동해선·경의선 철도 연결 및 현대화’ 문제도 미온적이다. 이달 중순으로 예정된 동해선 철도 연결지점 공동조사도 시행 하루 전 급작스레 통보해와 지난 20일 가까스로 치렀다. 어제 갖기로 한 경의선 공동조사도 차질을 빚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 테이블에서 직접 “철도 시설이 불비(不備)하다”며 현대화 사업을 우회적으로 요구했던 상황에 비춰보면 이상 징후가 감지된다. 남북 간 합의대로 원만하게 이행된 사안은 김정은이 제안한 통일농구경기(4일 평양) 정도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주민 접촉 신청이 500건을 넘을 정도로 우리 내부엔 봇물을 이루지만, 북한은 극히 제한적 교류에 그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거친 비방을 재개한 건 좋지 않은 징후다. 노동신문은 20일 ‘주제 넘은 허욕과 편견’ 운운하며 문 대통령에게 “감히 입을 놀려대고 있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문 대통령이 지난 13일 싱가포르 렉처를 통해 “북·미 공동성명을 지키지 않을 경우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 데 따른 반발이다. 북한은 내달 20일 금강산에서 열기로 합의한 이산가족 상봉 행사까지 위협하고 있다. 2016년 중국 내 북한 식당에서 일하다 집단 탈북·입국한 것으로 알려진 여종업원의 송환을 요구하며 “상봉행사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 재개 여론 공작에 나서려는 징후도 포착되고 있다. A씨는 “2008년 7월 관광객 박왕자 씨를 피격 사망케 한 북한 경비병을 남한 언론에 출연시켜 ‘경비 임무 수행 중 일어난 불가피한 사건’으로 주장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대남부서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방송매체를 피격 현장이나 제3국으로 불러 인터뷰를 추진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A씨는 “북한은 현대의 관광 독점권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3개의 한국 업체를 사업자 후보에 올려놓고 있다”고 전했다. 9억4200만 달러(1조 687억원) 규모의 관광 대가 지급 논란이 일었던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는 대북제재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사안이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 진전을 통해 올 가을 풍성한 결실을 거둘 것으로 예견해 왔다. 문 대통령의 ‘가을 평양 방문’과 정상회담은 그 정점으로 꼽힌다. 지난 4월 평양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의 방북 공연 ‘봄이 온다’에 이어 북측 공연인 ‘가을이 왔다’를 서울에서 개최한다는 복안이다. 하지만 ‘언제쯤이 좋겠느냐’는 우리 측의 공연 날짜 문의에 북한은 묵묵부답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7.25 00:02

  • '웃돈거래'에 분양 경쟁 치열···이미 돈맛 본 北 부동산시장

    '웃돈거래'에 분양 경쟁 치열···이미 돈맛 본 北 부동산시장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자본주의 맛 본 북한 부동산시장 … 업계는 대북진출 채비   남북 화해·협력 분위기에 힘입어 북한과의 경협과 교류사업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올들어 대북접촉 신청이 500건을 넘어섰다는 게 통일부의 발표다. 그야말로 봇물이 터진 듯한 형국이다. 대북 부동산 투자 열기도 일렁거린다. 평양 대동강변의 아파트 시세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경기도 파주시 등 접경 지역 땅값이 들썩인다. 경기침체의 돌파구를 대북진출로 타개해 보려던 건설·건축 업계는 채비가 한창이다. 이미 돈맛을 들인 북한 부동산 시장의 실태를 살펴보고, 남북 협력과 대북진출 가능성을 진단해 본다.    아파트 분양 과정에서 ‘프리미엄(웃돈)’과 같은 개념이 생겨나고 부동산 중개 수수료까지 챙기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신흥 자본가인 돈주(錢主)들이 투자한 고급 아파트는 분양 경쟁률이 치열하다. 추첨이나 채권입찰 형태의 서구식 분양까지도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주택을 사실상 개인이 소유하는 건 물론이고 사고파는 일도 사실상 가능해졌다. 평양에서 최근 들려오는 이 같은 부동산 관련 소식을 듣다 보면 의아한 생각이 든다. 아파트나 일반 살림집이 개인 재산처럼 간주되는 건 물론이고, 자본주의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들이 점차 사회통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북한이 그동안 내세워온 법률 규정과 딴 세상이다. 북한은 “인민들의 살림집 문제를 국가가 책임지고 원만히 해결해주는 것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제도의 본성적 요구”(살림집법 2조)라고 강조해왔다. 국가부담으로 인민들에게 집을 지어 보장해줘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용허가증 없이는 국가 소유 살림집을 쓸 수 없다”(도시경영법 11조)는 규정도 유명무실해졌다. 집이 없는 경우 여러 채를 갖고 있거나 자신의 집을 팔아넘기려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입주하는 경우가 상식이 된 것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아파트를 중심으로 주택 가격도 껑충 뛰고 있다. 토지주택연구원이 탈북자 면담 등을 통해 조사한 데 따르면 평양 중심지역인 중구역의 경우 2005년 5만 달러 하던 집이 10만~20만 달러로 치솟았다. 평균 가격대가 3만~5만 달러에 이를 정도다. 지방 도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다. 함흥 샛별거리 아파트는 2만~3만 달러를 호가하고, 새로 짓는 아파트도 1만 달러 선을 넘는다. 북·중 접경도시인 신의주는 1만5000~2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10만 달러는 북한 돈(암달러로 1달러당 8000원) 8억원에 해당한다. 주민 월 평균임금 3000원으로 환산하면 무려 2만2000년의 월급을 꼬박 모아야 하는 돈이다. 일반 주민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천문학적 규모다.   이런 일이 가능해진 건 장마당 경제의 힘 때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2년 집권 이후 시장을 단속하지 않고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김정일 통치 시기 200개 수준이던 장마당은 최근 500개 가까이로 늘어났다. 큰돈을 거머쥐게 된 돈주 세력은 장마당의 유통망뿐 아니라 생산·공급까지 장악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원자재나 전력 부족 등으로 가동률이 떨어지거나 멈춰선 공장에 원료를 사주고 물건을 만들게 한 뒤 시장에 팔아 이윤을 챙길 정도로 돈주의 영향이 막강해졌다”고 말했다. 과거 북한 내에서 중국산 생필품 유통망과 공장·기업소 원자재의 비공식 공급 루트를 쥐고 있던 화교세력마저 돈주들에게 밀려나는 형국이란 얘기다.   김정은 위원장의 건축 분야에 대한 각별한 관심도 뒷심으로 작용했다. 평양 대동강변의 고층 아파트군 건설과 미래과학자거리 등 뉴타운 형태의 도심개발이 그의 작품이다. 마식령스키장 건설과 평양 순안비행장 리모델링 등에 이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지난 1월 신년사에서 원산 갈마지구에 해안관광 리조트를 건설하라고 지시한 김정은은 5월 건설 현장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1994년 사망) 생일인 내년 4월까지 완공을 독려했다. 김 위원장은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장에서 건설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천년책임, 만년보증의 원칙에서 건설하라”고 강조했다.   이런 북한 내부의 동향을 주시해온 건설·건축 관련 단체와 업계는 대북진출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지난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철도·도로 연결 등 대규모 경협·인프라 사업에 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난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4선언에서 합의한 북한 철도·도로·항만 현대화에도 탄력이 붙으면 업계에 파급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기대감도 있다.   지난달 20일 한국건설관리학회와 대한건축학회가 공동 개최한 ‘한반도 국토건설 미래전략’ 세미나에서는 통일에 대비한 건설·건축 분야의 과제와 이행방안이 다뤄졌다. 최상희 LH토지주택연구원 박사는 주제 발표에서 “북한 당국의 주택 공급기능 축소로 이중적인 주택시장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입사증(입주권) 거래 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주택이 무상분배가 아닌 사적으로 거래되는 재화라는 개념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국가배정 형태의 건설사업이 축소되면서 개인이나 시행사를 통한 주택 공급이 이뤄지는 등 경로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안병욱 대한건축학회 부설 건축연구소 박사는 “통일 시기 북한의 주거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는 신축 100만 가구 이상, 리모델링 280만 가구 이상의 수요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2400만 인구의 북한 주민이 살고 있는 400만 세대 중 절반은 헐고 다시 지어야 한다는 얘기다.   독일 통일 등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변상욱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부장은 “독일은 통일 이후 15년간 연방예산의 25~30% 수준인 2500조원을 동독지역에 투자했다”면서 “북한 지역 개발 시 중국과 일본·러시아·싱가포르 등과 치열한 경쟁도 예상되는 만큼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북한 실정에 맞는 협력·지원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안병욱 박사는 “건설 현장에 현대식 전동공구를 갖고 간다 해도 북한의 열악한 전력 사정 때문에 정상 가동하기 힘든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인프라와 에너지, 자재·장비 등 건축 수준이 전반적으로 열악한 상황인 만큼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이뤄지지 않으면 대처가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다. 최상희 박사는 “내부 인테리어 등을 마감 않고 골조만 분양하는 이른바 ‘뼈다귀 아파트’가 일반화하면서 입주민이 중국산 자재로 추가 공사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면서 북한 건설·건축에서의 중국화 편중 문제를 우려했다. 북한 지역에 자재와 장비는 물론 인력이 장기간 체류하며 공사를 벌여야 하는 건설·건축의 특성상 남북 당국 차원의 믿을만한 합의와 실행계획은 물론 대북제재 해제가 필수적이란 지적도 나온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7.18 00:20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김정은 호통 소리 커진 경제 현장 … 통 큰 개혁 멀어지나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김정은 호통 소리 커진 경제 현장 … 통 큰 개혁 멀어지나

    김정은의 북방 행보가 심상치 않다. 지난달 말부터 북·중 접경지역에 머물며 경제현장을 잇달아 찾는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해 보인다. 공장과 기업소를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호통소리도 부쩍 늘었다. 최고영도자를 맞이해 어찌할 줄 몰라하는 공장 말단 간부에게 관리 부실을 질책하며 “마구간 같다”는 직격탄을 퍼붓는다. 이런 목소리는 관영 선전매체를 통해서도 그대로 전해진다. 조선중앙TV에 드러난 김정은의 찡그린 표정은 뭔가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는 신호다.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맞닿은 지역을 돌며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대목도 석연치 않다. 김정은 체제가 비핵화를 넘어 체제 생존을 위한 개혁·개방에 나설 것이란 우리 사회 일각의 기대 섞인 관측과도 궤를 달리한다.    북한 김정은의 북·중 변경 체류는 지난달 말 우리 정보 당국 대북 감시망을 통해 처음 포착됐다. 평북 신의주 일대의 경비와 주민 통제가 강화됐고, 이곳에 주둔하는 북한군 1524부대 등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용하는 방탄 리무진과 수행원 및 경호·의전 인력을 태운 차량의 이동 정황도 파악됐다. 김정은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압록강변 신도군이다. 비단섬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갈대 군락지로, 특구 개발이 추진되다 중단된 황금평이 속해있다.   김정은은 고급 승용차나 전용 요트를 이용하지 않았다. 낡고 먼지가 덮인 소형 세단으로 움직이고, 몇 사람이 탈 정도의 작은 모터보트를 탄 장면이 북한 매체를 통해 지난달 30일 공개됐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집권 초인 2012년 8월 노후한 목선을 타고 서해 최전방 무도방어대를 시찰했던 때를 연상케 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귀띔했다. 흙먼지가 묻은 옷차림도 드러났다. ‘인민경제’를 챙기려 동분서주하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김정은이 먼저 들린 곳은 갈(갈대)종합농장 작업반이다. 그는 “신도군을 주체적인 화학섬유 원료기지로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특산물인 갈대를 이용한 섬유 증산을 강조한 것이다. 다음 방문지인 신의주화장품공장에는 부인 이설주가 함께 나타났다. 김정은이 “봄향기화장품으로 명성이 자자한 신의주화장품공장에 언제부터 한번 와보려 했는데 오늘에야 왔다”고 운을 떼면서 분위기는 누그러졌다. 그는 “공장 일꾼들과 노동계급의 이악한(끈기 있는) 투쟁 정신과 근면한 일본새(업무 태도)에 탄복하게 된다”며 “만족에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평양 시내에 봄향기화장품 전문 판매점을 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하지만 김정은의 웃음을 여기에서 그쳤다. 신의주방직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는 “공장이 과학기술에 의거해 생산을 정상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재와 자금·노력 타발(투정)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우리식의 국산화·현대화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는 때에 이 공장은 난관 앞에 주저앉아 일떠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동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불만은 이어진 신의주화학섬유공장 현지 지도 때 폭발했다. 김정은은 “현대화 공사를 진행한다는 이 공장에서는 보수도 하지 않은 마구간 같은 낡은 건물에 귀중한 설비들을 들여놓고 시험 생산을 하자고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동신문은 지난 2일자 보도에서 “최고영도자(김정은) 동지께서는 ‘숱한 단위들에 나가보았지만 이런 일꾼들은 처음 본다’고 엄하게 지적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는 김정은이 백두산 지역인 양강도 삼지연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어졌다. 감자 농사를 주로 하는 중흥농장에선 “20년여 년 전에 장만해 놓은 농기계들을 기계화의 본보기로 내세우고 있다”고 문제 삼았다. 삼지연감자가루생산공장 방문 때는 “공장 건설 초기 기술 신비주의에 빠져 경제적 타산이 맞지 않는 설비를 차려놓고 생산에 지장을 줬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의 북·중 접경지 체류와 경제현장 방문은 지난달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세 번째 중국 방문(6월 19~20일) 직후 이뤄졌다. 첫 행선지인 평북 신도군과 신의주시는 북한의 대표적 경제특구 중 하나인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가 위치한 곳이다. 김정은 집권 후 설정한 5개 경제특구와 19개 지방급 경제개발구 가운데 핵심이다. 이 때문에 김정은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교감 아래 황금평 개발 재추진을 주축으로 북·중 경협에 드라이브를 거는 행보란 전망이 제기됐다. ‘평양의 트럼프 타워’ 등을 내세운 미국의 대북진출 움직임과 비핵화 압박을 견제·회피하기 위한 술수란 얘기다.   하지만 김정은의 동선과 언급을 꼼꼼히 짚어보면 실망스러운 대목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북부 변경의 낙후된 공장·기업소를 찾아 설비 현대화와 생산 증대를 주문하는 게 얼마나 효과가 있느냐 하는 문제다. 갈대를 채취해 종이나 옷감을 만드는 생산 시스템에 대해 대북 전문가들은 회의적 반응이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신의주화학섬유공장을 찾은 김정은은 “교육 사업에서 지금 걸리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종이를 수요대로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교과서나 학습장을 생산할 종이를 원만히 보장할 것을 촉구했다. 경제의 근본적 해법보다 대증요법에 매달리는 형국이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은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정세변화를 반영한 큰 그림을 김정은 위원장이 아직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현장의 말단 책임자를 질책하고 ‘본때 보이기’ 방식으로 처벌하는 걸 두고도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김정은은 앞서 2015년 5월 대동강자라공장을 방문했을 때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업적을 말아 먹었다”며 지배인을 처형토록 지시한 것으로 탈북·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전했다.   이런 모습은 할아버지인 국가주석 김일성의 통치 스타일과 차이가 난다. 김일성은 관련 회의를 소집해 노동당과 내각의 최고위급 책임간부를 질책했고, 현장에 나가서는 실무자들의 고충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망 직전인 1994년 7월 경제부문 책임일꾼 협의회를 주재한 김일성은 김환 당시 화학공업담당 부총리를 일으켜 세운 뒤 “비료공장 설비보수를 책임지라 여러 번 지시했는데 아직도 집행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석 선박공업부장에겐 “큰 짐배 100척을 만들라 한지 여러 해 됐는데 아직도 안 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부족한 원자재나 기술은 돈을 주고서라도 외국에서 사와야 한다”고 10여 차례나 강조했다.   김정은은 꼭 한 달 전 싱가포르의 밤거리를 돌아본 뒤 “귀국의 경험을 많이 배우려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권위주의 리더십을 유지하며 경제발전을 이룬 싱가포르식 개발 모델에 관심을 드러낸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김정은의 발걸음은 여전히 어두운 변경지대에 머물고 있다. 두 눈 가득 담아간 화려한 야경을 외면하며 허송세월하기에는 여름이 너무 짧을 수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07.11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