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백두산에 공들이는 김정은…새 길은 거기에 없다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백두산에 공들이는 김정은…새 길은 거기에 없다

     ━  한겨울 ‘백두혈통’ 띄우기 뭘 노리나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두산 지구 혁명 전적지를 방문했다고 전했다. 북한이 미국에 제시한 연말 비핵화 협상 시한을 앞둔 김정은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관심을 끌고 있다. [AP=연합뉴스] 올 한 해는 김정은에게 운수가 별로였던 때로 기록될 듯하다. 지난해 남북 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주름잡는 듯 분주했던 데 비해 급전직하다. 일이 꼬인 건 아무래도 지난 2월 말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때문이다. 6월 판문점 남북미 회동으로 반전을 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문재인 대통령과 남한 당국에 ‘오지랖 넓은 중재자’니 ‘삶은 소대가리’니 하며 험담을 퍼부었지만 중매쟁이를 탓한다고 바뀌거나 무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건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연초 기세등등하게 ‘연말 시한’을 제시하며 미국에게 “새로운 계산법을 가져오라”고 강조했지만, 자승자박의 형세로 돌아왔다. 평양의 외교 라인이 총동원돼 연일 워싱턴을 향해 담화 메시지를 날려보지만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우리(북)는 더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란 대미 ‘엄포’를 접하니 짠한 마음까지 들 정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백두산을 찾은 김정은 위원장은 백마 타기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는 왜 한겨울 해발 2744m의 한반도 최고봉에 올랐을까.   노동신문은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근 대대적인 개발을 마친 양강도 삼지연군(郡)을 삼지연시(市)로 승격했다고 보도했다. [AP=연합뉴스] 우려와 탄식은 뜻밖의 대목에서 터져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이 한 달여 만에 다시 백두산을 찾았다는 북한 관영 선전매체들의 전언은 웅장하기 그지없다. “영도자께서 몸소 무릎 치는 생눈길을 헤치며 혁명 전구(戰區)를 찾았다”는 찬사부터 이른바 ‘백두혁명’의 전통을 계승을 다짐하기 위한 자리였다는 평가까지 이어진다. “겹쌓이는 만난중하를 단신으로 떠맡았다”는 대목에선 북한 체제와 최고지도자가 직면하고 있는 부담감과 그 위기감이 느껴진다. 거기까지면 족할 법한데, 김정은이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그는 “손발이 시리고 귀뿌리를 도려내는 듯한 추위도 느껴봐야 선열들의 강인성과 투쟁성·혁명성을 알 수 있다”고 일갈한다. 겨울철 혁명전적지 답사를 많이 조직하라는 지시다.  그제 백두산이 자리한 삼지연의 기온은 영하 17도를 기록했다. 겨울 추위가 본격화하면 영하 20도를 밑도는 건 당연지사고 체감 기온을 고려하면 영하 30도 가까이 떨어진다. 눈발까지 거세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 될 게 뻔하다. 하지만 최고지도자의 교시를 거역하긴 어렵다. 당장 김정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노동당 선전선동부 관계자들이 이곳을 찾아야 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발 속에 칼바람이 부는 백두산 신정에 올라 붉은기를 휘날리며 체제 결속과 김정은에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를 벌였다. 삼지연 지역 개선(리모델링) 사업에 동원됐다 완공식을 치른 뒤 한시름 놓고 있던 이 지역 주민들에게도 날벼락이다.   북한의 청년·학생과 노동자 등 주민들이 올겨울 치러내야 할 전적지 답사는 이전과 차원이 다를 듯하다. 김정은이 답사를 형식적으로 하거나 관광식·유람식으로 치르지 말라고 엄중 경고한 때문이다. “꽃피는 봄날에 오면 백두산의 넋과 기상을 알 수 없다”는 게 김정은의 주장이다. 살림살이가 빠듯한 대부분의 주민들로선 제대로 된 방한복이나 신발을 챙겨가지 못하는 건 물론이다. 유사한 겨울 답사 행사에 참여했던 탈북자들은 “손발이 동상으로 얼어 터지는 건 예사”라고 입을 모은다. 도대체 1930~40년 대의 소위 항일 유격대식 체험을 왜 그대로 답습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야 하는지 모른 체 동원돼야 했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백마 타기 퍼포먼스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한창 한 해를 마무리하고 경제 성패와 대미 협상, 남북 관계 득실을 결산해야 할 시점에서 간부들을 대동한 백두산행은 실속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부인 이설주와 당 간부까지 모닥불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모습은 정교한 연출 의도에도 불구하고 외부 세계의 시각에선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   ‘장군님 백말 타고 달리시네’라는 식의 우상화나 찬양은 김일성·김정일 시대로 족하다는 얘기다. 35살 청년 지도자 김정은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현실 정치에 자신감이 없거나 꼬여버리면 상징 조작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북·미 관계나 남북관계, 경제 문제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은 데 따른 답답함이라면 다른 해법을 찾는 게 좋다.   삼지연 방문을 계기로 김정은의 백두산 챙기기는 가속도가 붙고 있다. 그는 내친김에 삼지연을 군(郡)에서 시(市)로 승격시켰다는 게 지난 11일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다. 삼지연읍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호를 딴 광명성동으로 바꿨고, 김일성의 항일 운동 근거지로 선전되는 백두산 밀영의 이름을 딴 노동자구를 ‘백두산밀영동’으로 바꾸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도시 발달 상태나 주민 숫자 등은 고려하지 않은 정치적 행정구역 개편이다.   사실 김정은의 경우 백두산과 거리가 있다. 출생과 성장은 물론 후계자나 최고 지도자로 자리 잡는 과정이 백두산과 아무런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외가는 한국과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제주 출신인 외조부 고경택은 일제시대 오사카로 건너가 군수 업체인 히로타 군복 공장 간부로 일했다.   그때 낳은 딸 중 하나가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2004년 사망)다. 북송선을 타고 입북한 뒤 정착해 김정은을 출산한 곳이 강원도 원산으로 알려져 있다. 10대 시절 김정은은 형 정철, 여동생 김여정과 함께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서 6년 정도 공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일성 사망 이후 몰아닥친 대홍수로 북한 주민이 대량 아사 사태를 겪던 시절을 해외 조기 유학으로 보낸 것이다. 간부와 주민들 사이에 “우리 원수님은 백두혈통이 아니라 후지산·한라산 줄기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백두산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찾을 새 길은 녹록지 않아 보인다. 자작나무 숲을, 전나무 밀림을 걸으며 잠시 생각에 빠져볼 수 있겠지만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거기엔 과장된 무장 투쟁과 조작된 김정일 출생 신화만이 있기 때문이다. 소련군 대위 김일성이 하바로프스크 브야츠크 병영에서 낳은 ‘1941년생 유라 킴’은 ‘1942년 백두산 출생 김정일’로 탈바꿈했다.   이제 ‘백두혁명’ 운운하며 내세워온 허황된 개국신화는 멈췄으면 한다. 혁명박물관에 보내 조작과 분식에 가담했던 빨치산 원로들이 무덤 속으로 가져가게 하는 게 맞다. 그래야 새 길을 찾을 수 있다. 그 첫 발걸음은 역시 민생이다. 집권 첫해인 2012년 4월 공개 연설에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한 걸 이제 실천에 옮겨야 한다. 노동당과 내각 간부들의 보고서만 받아볼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장마당을 나가보라. 용기를 내기 어렵다면 암행 시찰도 좋다. 거기에 경제 문제 해결의 답이 있다. ‘미래’ 브랜드의 화장품 6개 세트가 36만원이 넘고, 이걸 사려면 북한 근로자가 10년 월급(평균 월급 3000원 기준)을 꼬박 모아야 하는 기막힌 현실을 풀어야 북한 경제의 회생이 가능하다.   또 하나의 새 길은 서울행에서 찾아야 한다. 지난해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서울 답방을 지킬 때가 됐다. 지난 11월 부산 한·아세안 정상회의 초청이 다자무대 첫 데뷔라 마뜩잖았다면 문재인 대통령과의 서울 4차 정상회담으로 남북 관계를 복원하는 것도 좋다.   누구보다 북한과 김정은 위원장을 아끼고 챙겨주려 한 문 대통령에 막말 비난은 맞지 않는다. 찌푸렸던 얼굴을 갑자기 웃음으로 바꾸려면 계면쩍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해 여동생 김여정을 서울에 보내고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게 한 결단력이면 가능하다. 기왕이면 제주에도 들려 봉개마을의 외조부 묘소를 참배하고 외가 친지들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런 결단과 노선 변화가 2020년 신년사에 담길 때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기사회생할 수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12.13 00:32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김정은만 바라보는 대북정책 멈춰야”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김정은만 바라보는 대북정책 멈춰야”

     ━  북한은 왜 대남 비난으로 돌아섰나    지난해 2월 평창 겨울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북한 응원단이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응원을 펼치고 있다.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은 지난해 3차례의 정상회담을 하고 예술단 교환 등 교류·협력에 나섰지만 올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남북관계가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난 4월 북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난데없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운운하며 폄훼한 것을 시작으로 악화일로다.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 대북 부처의 핵심 고위 관료들은 제대로 된 대꾸조차 못 한 채 쩔쩔매는 모습이다. 북한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대남 비방의 수위를 올리고 제멋대로 합의 위반과 도발의 길을 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무슨 속사정이 있는 건지 국민은 궁금해하지만 당국은 어물쩍 넘긴다. 이제 2019년을 한 달 남긴 시점이다.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올해 남북관계는 되는 일 하나 없던 시기로 기록될 공산이 크다. 6월 판문점 북·미 회동에 문 대통령이 함께할 수 있었던 건 심리적 위안을 얻을 오브제(object)지만, 북·미 관계마저 소강상태를 맞으며 빛이 바랬다. 국민의 기억 속에는 지난해 평창 겨울올림픽과 판문점·평양을 잇는 3차례 남북 정상회담 파노라마가 일장춘몽처럼 아련하다. 다시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솔직히 자신감이 서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빨간불은 사실 지난해 이맘때 켜졌다. 청와대가 연말 김정은(35)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 가능성을 점치며 분위기를 띄우면서다. 일각에선 구체적인 날짜까지 거론하며 부산을 떨었지만 공수표에 그쳤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시발점은 9·19 평양 공동선언이다. 선언 마지막 구절인 제6항은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가까운 시일 내로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명시했다.      평양선언에 ‘김정은 답방’ 명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919 평양 공동선언문.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합의 당시 문재인(66) 대통령은 김정은 앞에서 "가까운 시일이란 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올해 안이란 의미”라고 설명했다. 면전에서 서울 방문을 채근하는 듯한 인상을 주긴 했지만 아버지이자 직전 최고통치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긴 약속을 아들이 지키도록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청와대의 ‘연내 방남(訪南)’ 설레발에 북한이 언짢아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한참 후에야 재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북한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후속편은 훨씬 더 꼬여버린 남북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무척 안타깝다. 북한의 조롱질과 우리 정부의 무기력한 대응, 국민을 향한 궤변에 가까운 해명과 북한 감싸기는 참담하기까지 하다. 지난 21일 북한이 관영 선전매체인 조선중앙통신으로 까발린 부산 한·아세안 정상회의(11월 25~27일) 김정은 초청 친서 얘기다. "남조선의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위원장께서 특별수뇌자회의에 참석해 주실 것을 간절히 초청하는 친서를 정중히 보내왔다”는 말로 시작한 중앙통신 보도는 "못 오신다면 특사라도 방문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청을 보내왔다”는 등의 내막을 속속들이 공개했다. 시종일관 문 대통령과 남측을 비꼬는 투의 말을 이어가던 북한은 "일이 잘되려면 때와 장소를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며 훈계조로 마무리하고 있다. 국격을 내팽개친 듯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대통령 친서에 상응하는 채널 대신 관영매체의 보도문으로 갈음한 북측의 결례에 청와대와 관계부처는 일언반구 없다.    북 ‘반성 요구’ 내막 미스터리   눈길을 끄는 건 북한이 문 대통령의 초청에 대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죄스러운 마음으로 삼고초려를 해도 모자랄 판국”이라며 힐난한 대목이다. 현 남북관계의 경색이 북한의 단순한 불만 표출 차원을 넘어서는 단계란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정부 당국과 일부 관변 성향 학자 그룹은 한·미 합동 군사연습이나 F-35A 전투기 도입, 대북제재와 금강산관광 등에 대한 대남압박 차원이라고 톤을 낮추려 한다. 하지만 베테랑 대북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와 북한 사이에 물밑에서 뭔가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고, 김정은이 이에 대한 불만으로 문 대통령과 우리 측에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비방과 조롱을 퍼붓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북한이 ‘반성’까지 요구한 내막이 뭔지를 알아내는 게 남북관계의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라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3차례의 정상회담과 문 대통령의 평양 공개연설 허용 등을 둘러싼 남북 사이 모종의 거래에 파열음이 생겼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한 한국 측의 조언이 제대로 먹히지 않자 남측에 책임을 떠넘기며 몽니를 부리는 것이란 관측도 있다.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노딜 직후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비롯한 협상라인은 책벌과 숙청으로 몰락했다. 대남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문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 비난만큼은 자제하던 북한이 하노이 결렬 사태 이후 화살을 서울로 돌린 것도 이런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 8월 광복절 경축사를 내놓은 문 대통령에게 북한이 ‘삶은 소대가리’란 거친 표현까지 동원해 비방세례를 펼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보당국 출신 고위 인사는 "하노이 회담 결렬을 전후해 남북관계에 탈이 났고, 4월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장금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비밀리에 만나 북한 내 분위기 탐색과 해결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남북관계는 최고 지도자 수준의 소통과 교감뿐 아니라 경제 협력과 교류, 인도주의 문제 등 다방면에 걸쳐 불협화음을 표출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슈가 돌출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의 안이하고 물러터진 대응이나 북한 눈치보기 때문에 논란이 확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정은이 금강산 내 남측 시설을 철거하란 지시를 내린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우리 정부 안팎에선 정확한 사태파악이나 냉철한 대응보다는 기대 섞인 ‘관광 재개’ 타령만 흘러나온다. "너절한 남측 시설”이라고 비꼰 김정은을 향해 "11년 전 관광객에 총격을 가해 사망케 하고 늑장 수습책으로 관광을 중단케 한 게 북한 아니냐”고 따끔한 대응을 하는 당국자도 없다. 금강산 내 남측 재산을 일방적으로 동결·몰수해 녹슬고 허물어지게 한 북측에 따지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통일부는 "김정은 말대로 남측 시설이 낡았다”며 현지 시설 사진을 맥락 없이 공개했다. 일각에선 북한이 군 병력과 돌격대를 동원해 철거에 착수했다는 전언이 나오지만 정부는 말이 없다.   지금 청와대와 정부 부처 대북라인, 권력에 줄 대려 애쓰는 관변 전문가 그룹은 심한 난독증에 걸려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한껏 조롱하는 평양발 언술이 쏟아지는데도 제멋대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김정은 심기를 건드릴까 전전긍긍한다.   북한군 최전방 포구에서 불이 뿜어지는데도 군 당국이 이를 은폐하고, 탄로가 나자 군색한 변명을 이어간다. 국회에 나온 국방장관은 "인내하고 또 인내하겠다”며 방점을 엉뚱한데 찍는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가 대북 유화정책에 올인하자 각종 지침이나 작전 원칙을 손바닥 뒤집듯 했던 그 시절 국방부가 떠오른다.      군 당국은 원칙 손바닥 뒤집듯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 남북 공동어로에 대해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오히려 커지고 북한의 위장침투에 취약하다”며 반대했던 고위 간부들은 정상회담 합의가 나오자 일제히 찬성으로 돌아섰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핵심 관계자는 군인을 심하게 비하는 세 글자 표현까지 써가며 "사실 많이 걱정했는데, ○○○ 반발은 아무것도 아니더라. 진급과 보직으로 휘두르니 다들 납작 엎드려 따라오더라”고 말했다.   다른 대북 부처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상 탈북민을 서둘러 북송해 논란을 자초하고, 굶주려 죽은 탈북 모자를 냉대하다 반발에 부닥치는 업(業)을 쌓아가고 있다. 일부 학자·전문가는 북한의 행태에 대해 "대화 재개를 염두에 둔 압박” 이니 뭐니 하며 김정은 심리를 서울에서 꿰뚫는 관심법(觀心法) 수준의 해석을 내놓는다. 잘못 배운 북한연구를 권력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써먹으려니 제대로 된 진단과 처방이 나올 수 없다. 권력 임기가 반환점을 돌고 나니 이들의 마음가짐이 더 초조해진 듯하다.   청와대와 정부는 다시 화려한 봄을 꿈꾸는 듯하다. 김정은의 서울 방문과 4차 정상회담, 금강산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는 한반도 평화 청사진일 게다. 하지만 상대에게 얕잡힌 나약한 모습으로는 모든 게 ‘마른 나무에 물대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약한 상대에게 한없이 강하고 갑질을 일삼는 북한 정권의 속성에 비춰볼 때 더욱 그렇다.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린다면 어딘가 탈이 난 게 틀림없다. 평양의 김정은만 바라보는 대북정책은 이쯤 해서 멈추는 게 맞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11.29 00:25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권력에 줄 댄 관변 전문가 그룹이 대북정책 망쳐”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권력에 줄 댄 관변 전문가 그룹이 대북정책 망쳐”

     ━  공직 진출 조바심내는 북한·안보 전문가 요지경   지난해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9.19평양선언을 채택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튿날 부부 동반으로 백두산을 올랐다. 이 때 절정을 보인 남북관계는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냉랭해졌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정부 임기가 반환점을 돌면서 마음이 바빠진 사람들이 있다. ‘대통령 문재인’ 탄생과 집권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과실을 분배받지 못한 전문가 그룹의 일부 인사들이다. 지금쯤 장·차관 직위나 청와대 요직을 거머쥐어야 2년 남짓 제대로 누릴 수 있지만 감감소식이다. 일찌감치 캠프에 뛰어들어 괜찮은 자리 하나를 낚아챈 동료나 눈치 빠른 후발 주자에게 밀려났다는 불만에 볼멘소리도 슬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늦어도 내년 4월 총선 직후까지를 시한부로 승부를 봐야 할 판이다. 강의나 학문 연구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통일 및 외교·안보 분야의 사례를 통해 입각이나 노른자위 직위를 차지하려 각축하는 친여·관변 성향의 학자·교수 등 전문가 그룹 요지경을 들여다봤다.    한 대학교수나 학자·전문가가 대통령 호칭 뒤에 “~께서”라는 표현을 쓴다면 일단 의심을 해봐야 한다. 머지않아 “~님께서”로 존칭이 바뀌고, 곧이어 청와대나 정부·산하기관 쪽으로 자리를 옮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부지불식 간에 “우리 ○○○ 대통령님께서”라며 ‘연대감’을 강조하는 바람에 속내를 들키는 경우도 있다. 물론 “나 이런 사람이야”하는 식의 자기과시에서 나오는 의도된 실수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대통령이나 유력 대권 후보, 정당 대표급 중견 정치인을 독대한 사실을 떠벌이며 자기 스스로를 누군가의 ‘과외교사’로 은근히 자랑하려 한다면 이미 병은 깊어진 상태다. 대개 여럿이 함께 식사한 걸 ‘독대’로 포장하거나, 자문회의에 참석해 몇 마디 나눈 경험을 개인교습인 것처럼 과장하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통일·안보 분야 씽크탱크의 한 중견 학자가 들려준 위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 전문가 사회의 웃픈 실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과거 현실 정치에 뜻을 둔 교수를 일컫던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수준을 넘어 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참여와 탐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수·학자 등 전문성을 갖춘 인사가 정치나 정부 정책에 관여하는 걸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학문적 지식이나 경험을 입법이나 행정 분야에 활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적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서방 선진국에 비해 비중이 과도하고, 노골적인 권력 줄대기나 구애 때문에 엄청난 사회적 손실과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학생의 강의권 침해를 들 수 있다. 캠프나 정당의 공개·비공개 자문 회의나 TV출연·세미나 등으로 학문연구라는 본업이 후순위로 밀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이들을 위해 국민 세금이 허투루 쓰일 공산도 크다.   최근 들어서는 그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게 정치 참여와 거리를 두고 있는 인사들의 귀띔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에 즈음해 형성된 통일과 외교안보 분야 친여·관변 성향의 학자 및 전문가 그룹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가장 강력한 파워를 발휘하면서 이미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핵심세력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실무 책임자급에 있던 인물들이다. 아직 자리를 차지 못한 인사들로부터 가장 부러움을 사는 그룹이다. 둘째로는 좌파 성향으로 간주되는 학술단체에 소속돼 활동하면서 주로 외곽에서 정책 논리 개발과 우회적 지원을 맡았던 인사들이다. 셋째는 보수 성향을 보인 직전 정부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문재인 정부의 출범 국면에 뒤늦게 합류한 그룹이다. 국책 연구기관 관계자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핵 보유’와 ‘전술핵 반입’ 등 대북 강경 대응을 주장하던 인사가 문재인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 애쓰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남북 대화와 교류, 경제협력 사업에 방점을 둔 정책과 아이디어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핵 실험과 미사일 도발 등으로 초반 동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세미나와 강연, 방송 출연 및 기고 등을 통해 여론 확산을 꾀했다. 지난해 2월 평창 겨울올림픽 북한 참가와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으로 국면 전환에 성공했고, 9월 평양 공동선언으로 절정을 맛보기도 했다. 물론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싸늘해진 북한의 대남 분위기는 이들에게 시련을 안겼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오지랖 넓은 중재자” 운운하며 조롱하는 김정은에게 제대로 된 비판의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곤혹스런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들 그룹은 주로 10~30 명 규모의 몇몇 SNS 단체 대화방을 만들어 소통한다고 한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 등 특정 사안이 발생하면 손 빠른 교수·학자가 핵심 내용을 정리해 “이번 건은 어떤 식으로 봐야 된다”거나 “대응책에서 이런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글을 올리고 이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멤버로 활동하다 방을 빠져나왔다는 한 박사급 전문가는 “주로 3~5명이 경협·군사 등 전공 분야 분석이나 의견을 올리면 이를 언론사 기자나 다른 전문가 그룹에 확산시킨다”고 전했다.   두드러진 특징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비난하기보다는 한·미 당국의 대응을 문제 삼고, 북한이 대화를 압박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발사체 발사’ 등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한 관계자는 “지난달 김정은의 금강산 남측 시설물 철거 발언이 나왔을 때도 북측의 합의 위반을 비난하기보다는 이를 ‘관광 재개를 위한 압박’ 수준으로 톤다운 시키려는 논조를 보였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권력에 줄 선 관변 전문가 그룹이 대북정책을 망친다”는 비판도 나온다.   흥미로운 건 최근 들어 이들 가운데 일부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비판적 뉘앙스의 언급을 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다. 무조건 지지입장을 취하던 데서 벗어나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나 귀순 탈북자 강제북송에 대해 이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인사는 더 나아가 청와대와 정부의 대북 및 외교안보 라인 쇄신을 주장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으로 비칠 것을 우려한 때문인지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 못 한 청와대 대북·안보 참모진은 퇴진하라”는 요구를 하는 목소리도 있다. 대북 전문가 사이에서는 "지금 시점에서 외교안보라인 교체를 요구하는 건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겠다는 의도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진다.   통일·북한 분야는 남북 간 이념대립 못지않게 남남갈등이 심각한 영역이다. 전문가 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부턴가 이들 사이에서 진보·보수를 가르는 진영논리의 깊은 골이 생겼다.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가다 보니 제대로 된 정책제안이나 일관성 있는 추진은 어렵다. 손기웅 한국DMZ학회장(전 통일연구원장)은 "박근혜 대통령은 재임 당시 유엔연설과 외신 인터뷰, 국내 주요 행사 축사 등을 통해 DMZ(비무장지대) 평화공원 건설을 공언했다”며 "벽돌 한 장 쌓지 못하고 임기가 끝났지만 책임지는 참모는 없고,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대통령이 DMZ 국제평화특구를 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우리 대북정책이 국제 사회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다.   전문가 그룹의 끼리끼리 문화도 폐단으로 지적된다. 학술회의나 토론회 등에는 진보·보수 편가르기를 한 한쪽 성향의 학자·교수만 모인다. 그러다 보니 비판 의견은 없고 늘 하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수준에 그친다고 한다. 학술 분야에서도 금기로 여겨지는 동종교배의 위험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전직 통일부 고위 인사는 "보수·진보 정권에서 일한 통일부 장관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게 불가능해져 안타까워했는데, 학계도 이런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 놀랐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남은 임기 동안 공직 진출을 이루겠다며 전문가 그룹 인사들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벌써 다음 정권에 참여할 채비를 하는 발 빠른 사람들도 있다. 여야의 유력 대선주자 캠프를 기웃거리거나 차세대 여성 정치인 쪽을 향해 시그널을 보내는 전문가·학자 이름이 거론된다. 사활을 건 듯한 5년 주기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11.15 00:27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한국서 ADB 총회하는 내년 5월이 북 가입 타이밍”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한국서 ADB 총회하는 내년 5월이 북 가입 타이밍”

     ━  북한과 국제 금융기구 협력 가능할까   지난달 22일 평남 양덕군 온천관광지구를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이설주가 온천욕을 하는 주민과 대화하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달 중순부터 이어진 경제 현장 방문에서 대북제제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간부들의 부실한 업무처리를 질책했다. [연합뉴스] 남북관계가 썰렁해졌다. 당국 대화는 재개 기미가 없고 사회·문화 교류도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경협 재개를 고대하던 정부 당국과 사업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금강산 남측 관광시설 철거’ 언급에 망연자실 상태다. "만나서 금강산 관광을 얘기하자”는 우리 정부 요청에도 요지부동이다. 그제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 모친상에 조의를 표해왔다지만 큰 기대는 어려워 보인다. 어제 미사일 발사를 통해 ‘조의 표명일 뿐’이라며 북측이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는 점에서다. 북·미 관계를 비롯한 한반도 주변 정세도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사이의 친분을 강조해온 북한은 지난 5일 스톡홀롬 실무협상 결렬 이후 대미 강경 메시지 쪽으로 치닫는다.   이런 국면 속에서 단기적 응급처방 못지않게 중장기적인 북한 개혁·개방 프로젝트나 통일 대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북한의 비핵화 이후 후속 조치는 물론 포스트 김정은 체제 등 북한의 변동에 다각적으로 대처하는 준비가 지금부터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국제기구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북 개발협력 방안을 모색 중인 정태용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를 찾아 그 가능성을 타진해봤다.    “ADB(아시아개발은행)가 북한에 관심이 많다. 꽤 괜찮은 시장이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지난달 24일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 라일락룸. 중앙일보와 삼정KPMG가 공동 주관하는 NK비즈포럼 3기 참가 인사들이 정태용 교수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ADB에서 6년 동안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대북 개발협력 로드맵을 흥미롭게 풀어낸 때문이다. 정 교수는 “ADB의 두 번째 사업이 바로 우리 경부고속도로 건설이었다”면서 “북한이 국제기구의 도움을 받는다면 초기에 ADB가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서는 할 사업도 많고, 무엇보다 돈 떼일 염려가 없기 때문에 ADB가 매력적인 대상처로 북한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돈을 떼이지 않을 것이란 건 무슨 이유 때문이냐’는 질문에 정 교수는 "국제 금융기구가 북한에 투자하는 단계가 된다면 당연히 한국이 보증을 서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ADB 가입 신청 10년째 보류 상태   정태용 교수가 지난 달 24일 서울 소공동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NK비즈포럼에서 ‘북한 개발협력과 국제기구의 지원방안’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거나 국제 금융기구로부터의 도움을 받겠다고 결심한다면 ADB가 가장 먼저 평양에 진출하게 될 것이란 게 정 교수의 전망이다. 북한은 이미 1997년과 2000년 두 차례 ADB에 가입을 신청했지만 미국과 일본의 반대로 무산됐다. 현재 세 번째 신청이 10년째 보류된 상태다.   유엔 아태경제사회이사회(ESCAP) 회원이면 ADB 가입이 가능한데, 북한은 이미 ESCAP에 들어있다. 결국 미국이 승인하면 언제든지 ADB 가입이 가능하고 개발협력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세계은행(WB) 같은 경우는 국제통화기금(IMF)에 먼저 가입해야 하는데 북한이 이런 절차를 이행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한다.   물론 ADB나 WB 모두 북한의 비핵화 의지나 남북관계, 한반도 정세 등의 변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 교수는 "내년 5월 인천 송도에서 열리는 ADB 총회에서 우리가 발언권을 갖게 된다는 점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금부터 상황을 잘 관리해 회원국 가입 선물을 북한에 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향후 우리가 ADB에 대한 공여 폭을 늘려가면서 북한에 대한 지원 목소리를 높여가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정 교수는 덧붙였다.   소련 및 동유럽권의 체제 전환과 경제개발 지원을 위해 1990년 설립된 유럽부흥개발은행(EBRD)도 북한 개발협력과 관련해 최근 주목받고 있다. 그 임무를 다했다는 판단에 따라 문을 닫으려 했지만 북아프리카와 몽골 등으로 사업 범위를 넓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는 점에서다. 정 교수는 "EBRD가 몽골에 간다는 건 북한도 갈 수 있다는 얘기”라며 "북한 인프라를 빠르고 많이 건설하려면 가급적 많은 국제 금융기구들이 참여하는 게 좋고 EBRD도 당연히 고려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북·중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의 경우도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이 가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따를 것으로 정 교수는 진단했다. 북한 스스로 AIIB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란 말이다. 정 교수는 "AIIB를 잘 들여다보면 공적 기능이 거의 없는 게 확인된다”며 "말 그대로 투자은행인데, 인프라에 주로 투자하는 은행”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인프라 투자 사업 마저 여의치 않아 다른 투자은행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점은 공적 펀드를 조성하고 있는 ADB와 비교된다. ADB는 사업추진이나 자금운용 과정에서 생기는 이윤을 아시아개발펀드(ADF)에 적립해 저개발 및 극빈국가에 지원하고 있다. 북한도 이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게 정 교수의 분석이다.    북한 눈높이에 맞춘 개발협력   정 교수는 북한의 눈높이에 맞춘 개발협력 프로그램이나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좋은 아이템이라고 판단해 자금이나 자원·지식을 지원해주었지만 수원국(受援國, 도움을 받는 국가)의 입장이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실패를 통해 얻게 된 교훈이나 타산지석으로 삼을 내용을 알려줘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이 개발독재 형태의 빠른 산업화를 이루긴 했지만 환경이나 노동인권 문제 등을 등한시했다가 지금 큰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점은 북한에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남북관계나 북·미 협상의 속도가 나지 않는데 대북투자와 인프라 건설 등 장밋빛 구상에 치중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북한 개발협력이나 개혁·개방 문제는 지나치게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정 교수의 조언이다. 한 국가체제의 전환이나 인프라 구축 등에는 적어도 한 세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북관계나 국제정세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다음 세대를 위해 조건을 갖춰준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는 얘기다. 정 교수는 "베트남이 1986년 취한 도이모이(doimoi, 쇄신) 정책도 시행 초기 10년간 외국 민간업체가 들어가지 않았다”면서 “북한은 베트남보다 더딘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중국식이다 베트남식이다 하면서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결국 북한은 그들만 독특한 방식을 택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19명의 전문가가 진단한 김정은 체제의 북한 경제 「 『가보지 않은 길, 가야 할 길』 평양의 고층빌딩 숲과 화려한 조명. 그와 대비되는 ‘주민 40% 영양부족’ UN 보고서와 대북 제재. 어느 것이 김정은 체제 북한 경제의 진짜 모습일까.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북한은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경제·농업·임학·도시설계·환경 분야 등 19명의 전문가로 짜인 집필진은 “북한이 현재와 같은 폐쇄적인 계획경제에서는 경제발전을 달성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국제 무역에 의한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 저자인 강성진 고려대 교수는 북한이 직면한 정치·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동아시아형 체제전환’을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현 체제를 유지하며 계획경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가격 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전략이다. 강 교수는 “북한이 지난해 4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베트남식 개혁·개방에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에너지·기후변화 대응 전략과 관련해 정태용 연대 교수는 “북한이 온실가스 감축 노력에 동참하기 위해 유엔 기후변화사무국에 자발적 온실가스 감축안(INDC: 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을 제출한 것은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집필진은 “북한이 경제발전 장애물을 스스로 해결할 역량을 키우고 국제사회의 다양한 활동에 동참해야 장기적 경제발전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경제개발을 위한 재원조달, 산업발전, 인력 활용, 농업개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그리고 도시개발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도 담았다.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11.01 00:33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베일 벗은 북한의 예술…“분단도 내 음악 열정 못막아”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베일 벗은 북한의 예술…“분단도 내 음악 열정 못막아”

     ━  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 첫 단독 인터뷰    지난 2월 노동당 중앙위 본부 별관에서 열린 북한 건군절 71주년 기념 공훈국가합창단 경축 공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이래 각종 악단을 동원해 체제결속을 다지는 ‘음악정치’를 펼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북한에서 음악은 절대 권력자와 노동당에 복속된다. 작곡가와 연주자·가수를 비롯한 음악인들이 체제의 부름에 따라 작품 활동을 하고 무대에 서는 것이다. 잘 짜인 교향악단은 김정은 체제를 선전하는 레퍼토리로 해외 순회공연을 하고, 천재 연주자는 국제콩쿠르에서 ‘수령’의 배려에 감읍하는 수상 소감을 말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집권 첫해인 2012년 모란봉악단을 창단해 이른바 ‘음악정치’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정은은 “혁명적 노래는 적의 심장을 꿰뚫는다”며 ‘노래폭탄’을 강조했다. 지난해 대남 유화 전술로 급선회하는 국면엔 가수 출신 현송월이 이끄는 삼지연악단을 서울에 파견했다. ‘친솔(親率)악단’이란 미명 하에 김정은의 총애를 받는 이들 일행은 우리 사회의 대북 경각심을 누그러뜨리는 첨병 역할을 했다.   북한 체제에서 음악·예술인들은 나름대로 안정적 생활을 보장받는다. 그런데 촉망받는 중견 음악인들이 북한 체제를 벗어나 탈북·망명의 길을 떠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김정은 집권 이후 은밀하게 번지고 있는 핵심 엘리트층의 탈북 행렬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대북 정보 관계자의 귀띔이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은둔생활을 하거나 활동 여건이 나은 제3국으로의 재망명을 택한다. 한국 정착 5년여 만에 베일을 벗은 한 탈북 피아니스트를 만나 북한 음악계의 속사정을 들어봤다.    지난 2014년 6월 국내 언론과 일부 외신은 한 탈북 인사 관련 뉴스로 떠들썩했다. ‘북한 피바다가극단 소속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황모 교수가 중국 옌지(延吉)에서 사라져 행적이 묘연하다’는 보도였다. 교육 연수차 극단 단원 30여 명과 함께 현지에 체류하던 중 없어진 그를 찾기 위해 북한 대사관과 공안 당국에 비상이 걸렸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특히 북한 당국이 황 교수의 탈북 가능성에 대비해 중국 공안에 검거 요청 공문까지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 교수’의 신상에 관심이 쏠렸다.   일각에선 그가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와 각별한 관계였다는 관측을 제기하며 북한의 이례적인 체포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는 황 교수의 행방은 드러나지 않았고, 북한 당국도 추가 움직임은 없었다. 언론이나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잊혔다.   서울대 음대 석사과정 졸업 연주를 하는 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씨. 5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난 15일 기자의 핸드폰으로 자신을 ‘황 교수’라고 소개한 연락이 왔다. 오랜 기간 망설여왔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지하 식당가였다. 검은색 남방 차림에 백팩을 멘 그는 한눈에 봐도 특별한 탈북자인 듯했다. 큰 체구에 뽀얀 피부, 북한식 사투리가 전혀 섞이지 않은 말투가 그랬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북한의 음악 예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적지 않고, 무엇보다 제대로 실력을 갖추지 않은 탈북자들이 피아니스트나 음악인으로 행세하고 있어 이를 바로잡고 싶었다”고 말했다. 북·중 접경도시에서 5년 전 사라졌던 ‘황 교수’가 처음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그는 몇 가지 팩트와 다른 게 있다고 했다. 우선 자신은 피바다가극단과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옌지에 머물던 일행 중 그 가극단 소속이 많았지만 자신은 평양음대 교수 자격으로 파견됐다는 것이다. 이설주의 스승이었다는 등의 일부 언론 보도도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황상혁(45)씨는 “한국 대사관에서도 ‘당신이 이설주와 무슨 관계냐’고 묻길래 의아하게 생각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궁금한 건 왜, 어떻게 한국 행을 택하게 됐는가 하는 점이었다. 황씨는 “동료들과 중국 옌지에 체류하던 중 우연히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게 됐는데, 보위부가 이를 포착해 내사에 들어가면서 처벌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과거 해외 유학생 출신의 지휘자인 이동철이 독일의 한 맥줏집에서 한국인이 포함된 일행과 접촉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감옥살이를 하는 걸 본 뒤로 공포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황씨는 “평양의 공연장에서 악단을 이끌던 중 강제로 끌려나간 이동철은 3년형을 받고 폐인이 된 데다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졌다”고 전했다. 체코 출신의 유학생 송강은 외부 사조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공연을 마친 뒤 곧바로 족쇄가 채워져 끌려나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해외에 나가는 북한 주민들은 ‘절대 접촉하거나 가지 말아야 하는 3국가’로 남조선(한국)·미국·이스라엘을 꼽는 지침을 받는다. 황씨는 “당초 미국이나 일본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만 안 가면 평양의 가족들이 다치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과 제3국을 거치는 과정에서 폐기흉으로 다른 국가로 옮겨져 큰 수술을 받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고 결국 한국으로 귀착됐다고 한다.   서울대 음대 석사과정 졸업 연주를 하는 탈북 피아니스트 황상혁씨. 황씨는 지난 2003년부터 3년 동안 예술전문가 대표단으로 옌지에 머물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이 “중국 동북 3성(헤이룽장성, 랴오닝성, 지린성) 지역의 조선족 동포들에게 우리 물을 먹여 공화국(북한) 판으로 만들라”는 교시를 내린 데 따른 파견이었다. 말이 예술대표단이지 실제로 한 일은 현지 사회예술양성센터 측과 계약을 맺고 조선족 어린 학생들에게 피아노 등 음악 과외를 하는 외화벌이 일이었다. 북한으로 돌아가 평양음악학원 피아노 상급교원으로 일하던 황씨는 2011년 1월 다시 옌지로 나왔고, 귀환을 며칠 앞두고 탈북·망명길에 올랐다.   황씨는 북한에서 잘나가는 피아니스트이자 평양음대 교수였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용철의 손녀와 북한군 김광진 차수의 손자 등 최고위층의 자녀들이 그의 피아노 과외를 받으려 줄을 서야 했다. 성악곡 ‘압록강 2000리’를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데 이어 영화로 잘 알려진 ‘도시처녀 시집와요’의 주제가를 편곡해 각광받았다. 황씨는 “내가 탈북한 이후 모두 북한에서 금지곡이 됐다고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재능에다 든든한 집안 배경이 작용했다. 김일성·김정일 경호를 책임진 호위사령부 부부장을 지낸 외할아버지 덕분에 그는 평양 만수대의사당(우리의 국회의사당에 해당) 옆 서문동 5호관저 초대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9살 때 아들의 손을 잡고 평양학생소년궁전을 찾아 피아노 소조 활동을 시작하게 했다. 이 시절 그는 7차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특등상을 받은 바이올린 연주자 백고산과 함께 피아노 협연을 했고, 북한의 간판급 선전화보 ‘조선’에 실리기도 했다.   14살에 평양음악무용대 기악과 피아노 전공으로 입학한 황씨는 북한 최고의 피아노 연주가이자 교육가로 알려진 이경린으로부터 사사(師事)했다. 1953년 소련 레닌그라드 국립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이경린은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남산의 푸른 소나무’ ‘빛나라 정일봉’ 같은 체제 찬양 피아노 독주곡을 창작해 38살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황씨에 따르면 북한의 클래식 음악 계보는 ▶한국 전쟁 당시 소련 유학을 다녀온 1세대 ▶1970~80년대 초 소련에서 기술을 전수받은 2세대 그룹 ▶1980년대 중엽부터 1993년까지 동유럽에 유학하거나 사회주의권 붕괴로 중도 귀환한 3세대 ▶2000년대 들어와 오스트리아 지휘 유학을 포함해 독일 등지에서 공부한 4세대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지난 5년간 황씨는 모든 공개활동을 접고 경기도 분당의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임대아파트에서 월 70만원 안팎의 보조금으로 버텨야 하는 곤궁한 생활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의 예술혼을 달래준 건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며 경험한 한국과 서방 세계의 음악이다.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더는 억누르기 어렵다고 판단한 황씨는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초청 공연 등 공개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설 생각이다. 황씨는 “나는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수 예술인”이라며 “남북 분단이나 이데올로기는 나의 영역이 아니며 음악 열정 또한 막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10.18 00:04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자체 생산 담배 브랜드만 수백 종류"···북한은 흡연 천국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자체 생산 담배 브랜드만 수백 종류"···북한은 흡연 천국

     ━   담배를 통해 들여다본 김정은 체제의 북한   북한 양강도 혜산시 장마당의 담배 노점상 모습. 지난 7월 북·중 접경 지역을 다녀온 강동완 동아대 교수가 망원렌즈를 이용해 포착했다. [사진 도서출판 너나들이] 애연가들에게 남은 지구상 마지막 ‘낙원’이 있다면 아마 북한일 것이다. 최고 지도자부터 미성년 아동까지 담배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호텔이나 음식점·카페는 물론 대중교통에서까지 흡연이 자연스레 이뤄진다. TV 드라마나 영화·신문 등에는 모자이크 처리되지 않은 흡연 장면이 그대로 노출된다. 물론 담뱃갑에는 경고 문구가 새겨져 있고 금연 캠페인도 벌어진다. 하지만 절대 권력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줄담배 앞에서는 모두 무력화될 수 밖에 없다.   왜 북한은 세계 선두권의 흡연국이 됐을까. 담배는 2500만 북한 주민들에게 어떤 의미로 자리 잡은 걸까. 북한 문화와 주민 일상생활을 추적·연구해온 강동완 동아대 교수와 함께 ‘흡연 천국’의 내밀한 실상을 들여다본다.    “전자담배는 미성년자를 비롯해 담배를 피우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흡연자로 만드는 안내자 역할을 수행하는 매우 위험한 매개물이다.”   노동신문은 지난달 27일 자 기사에서 전자담배의 폐해를 처음 언급했다. 북한이 최근 세계적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전자담배의 유해성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북한은 전자담배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북·중 접경 지역을 중심으로 유입이 급격히 늘고 있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해외에서 근무하다 귀국하는 외교관이나 대표부 직원 사이에서는 직장 상사나 친인척에 대한 선물로 서방 국가에서 만든 전자담배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한다.   북한의 담배 소비나 유통 시장을 들여다보면 상당히 기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담배 브랜드는 파악된 것만 수백 종류가 넘는다. 국민총소득(GNI)을 기준으로 47배의 경제력을 가진 한국이 50여 종의 담배를 생산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많은 수준이다. 엄격한 통제 사회인 북한에서 담배가 비교적 손쉽게 유통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전매(專賣) 제도를 운영하거나 지정된 판매소에서만 구입할 수 있도록 할 것 같지만 내고향담배공장, 평양룡봉담배공장, 라선신흥담배회사 등 40여 개 생산 기관이 앞다퉈 담배를 시장에 내놓는다. 강동완 교수는 “북한이 출시한 새 상품 구입을 위해 중국의 접경지역을 자주 방문하는 데 한두 달 만에 5개 안팎의 새 담배가 나올 때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장마당이나 길거리 곳곳에서 담배 노점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많은 담배를 싣고 오가는 도매상도 눈에 띈다는 것이다.   담배를 통해 김정은 체제를 들여다 본 책 『북한담배-프로파간다와 브랜드의 변주곡』 담배는 북한의 일상이기도 하다. 주민 생활 속에 가장 끈끈하게 함께하고 있다는 얘기다. 강 교수는 4일 출간될 저서 『북한 담배-프로파간다와 브랜드의 변주곡』에서 “북한에서 담배는 기호품이라기보다는 생활필수품”이라고 지적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빨리 받아야 하거나 심지어 탈북을 위해 도강(渡江)할 때도 뇌물을 바쳐야 하는데 대표적인 품목이 담배라는 것이다. “담배 두 막대기(보루)를 고이고(뇌물로 줬다는 의미) 압록강을 넘었다”는 탈북자의 증언에서도 이런 모습은 드러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인 남성 흡연율이 한때 54.7%에 달하기도 했다. 세계 평균인 48%를 훨씬 웃도는 건 물론 쿠바·중국·라오스 등과 함께 선두권이란 얘기가 나온다. 일각에선 북한이 여성 흡연자가 없다고 국제기구에 보고한 대목이 현실성이 없다는 점에서 실제 흡연율은 훨씬 높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기도 한다. 금연 캠페인의 효과가 일부 나타난 것으로 북한 당국은 주장하고 있다. 2012년 말 52.4%이던 북한 남성 흡연율이 2014년 말에는 43.9%로 8.4%포인트 감소했다는 것이다.   TV를 통한 금연 캠페인은 과거 사회주의 교양 차원에서 벌어졌지만, 요즘엔 감성에 호소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최근 북한 당국이 제작한 영상에는 한 여성이 등장해 “여자들이 담배를 끊으라고 하면 ‘그러마’하고 끊어야 하는 데, 여자들의 말을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로 듣는다”고 흡연 남성을 힐난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특등 기호품’이란 제목의 캠페인 프로그램은 “남편에 대한 사랑, 가정을 지키려는 자각으로 우리 여성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으로 몸부림치게 했다”며 절절한 심정을 호소하고 있다.   금연 열풍은 앞서 김정일(2011년 사망) 국방위원장 집권 시기에도 있었다. 2001년 중국 방문 때 “담배를 끊었다”고 밝힌 김정일은 ‘담배는 심장을 겨눈 총과 같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북한 당국은 “흡연자와 음치, 컴맹은 21세기의 3대 바보”란 말까지 만들었다. 당시 북한의 노동당 간부와 대남 사업 종사자들은 친분 있는 남측 인사들로부터 “최고지도자와 당에 대한 충성심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 왜 금연 교시는 이행 않는가”하는 지적을 듣기도 했다. 그때마다 북측 관계자들은 “다른 건 몰라도 담배만큼은 정말 마음대로 안 된다”며 곤혹스러워했다. 하지만 2008년 건강 이상 사태를 맞은 상황에서 김정일은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고 금연 지시는 흐지부지됐다.   김정은이 즐겨 피는 담배로 알려진 ‘건설’. 6·25전쟁 직후 복구 시기를 의미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직후부터 담배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줄담배를 예사로 즐겼고, 학교·유치원이나 병원에서까지 담배를 피웠다. 한국 언론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자 노동당의 선전·선동 파트는 김정은의 흡연 장면 사진에서 담배를 지워버렸다. 하지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는 미처 삭제하지 못해 들통났다. 김정은은 10대 시절 스위스에서 조기 유학하면서 담배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는 자신이 펴낸 책 『김정일의 요리사』에서 “김정은 왕자는 10대 중반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 내게 담배를 얻어 피우기도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정은이 나이 많은 노동당과 군부의 간부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두고 강동완 교수는 “젊은 지도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이미지 정치”라고 분석했다. 집권 당시 28세의 청년 지도자로서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이 안팎에서 제기되자 간부들에 대한 장악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흡연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란 얘기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열차 편으로 이동하던 김정은은 중국 난닝 역 플랫폼에 선 채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여동생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이 당시 재떨이를 들고 옆에 서 있는 모습이 포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동완 교수의 책 『북한 담배-프로파간다와 브랜드의 변주곡』은 지난 7년 동안 북·중 변경 지역 등에서 수집한 북한 담배 200여 종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한때 즐겼다는 ‘7.27’ 담배에 대해 강 교수는 “북한에서 7월 27일은 전승절(1953년 휴전협정 체결일)로 기념하는 날”이라며 “실제로 담뱃갑에 ‘1950~1953’이란 전쟁 기간이 기입돼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정은은 최근 들어 ‘건설’이란 상표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는데 “1950년대 전후 복구 건설의 망치 소리를 상징하는 브랜드”라고 강 교수는 해석했다.   북한 담배는 유독 체제의 특성과 관련된 이름이 많다. ‘붉은 별’이란 담배는 북한의 국장(國章)에 새겨진 별 모양에서 명칭을 따왔는데, 이른바 주체 혁명을 상징한다. ‘위성’은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개발을, ‘백두산’과 ‘천지’는 북한 정권 수립의 근간을 의미한다. ‘하나’는 북한 중심의 남북 통일을 강조한 구호와 노래에서 따왔고, ‘고향’은 김일성의 생가인 평양 만경대고향집과 그가 고향 집을 생각하며 불렀다는 ‘사향가’를 떠올리게 한다고 강 교수는 분석하고 있다. 그는 “소비자의 욕구가 강조되는 자본주의와 달리 북한의 브랜드는 국가가 주입하고자 하는 정치사상이 내포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담배를 비롯한 상품 브랜드가 북한 체제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창(窓)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영종 통일 북한전문 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10.04 00:03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장기화 접어든 남북경색…대북 메시지 신중 기해야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장기화 접어든 남북경색…대북 메시지 신중 기해야

     ━  북한을 자극한 대통령과 참모진의 말말말   지난해 3차례 정상회담을 하며 달아올랐던 남북관계가 올들어 6개월 넘게 대화가 끊기면서 위기 상황을 맞았다. 지난달 15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74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경축사를 한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꼬여버린 남북관계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사태를 기점으로 잡으면 6개월 넘게 경색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의 공백이 장기화로 접어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4월과 5월 잇달아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9월에는 평양에서 9·19 공동선언이 체결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를 향해 적대관계의 종식과 한반도 평화를 말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올해 들어서 9차례에 걸쳐 18발이 릴레이식으로 쏘아 올려졌고, 대남 비방과 위협의 선봉에 김정은이 자리하고 있다.   남북 정상 간 소통도 끊겨 서울~평양 핫라인에 대해 “전화는 개설이 됐는데 북측에서 응하지 않고 있다”(8월 6일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 국회 답변)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오는 19일 평양선언 1주년을 맞게 되지만 공동행사는커녕 남측의 단독 이벤트도 제대로 치러지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정부는 내달 15일 평양에서 열릴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에서의 남북전을 기다리는 처지다. 당장 쾌도난마식의 남북 관계 복원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당분간 북한의 도발과 비난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국면 전환의 전략과 시점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평양발 대남 비방 메시지가 심각한 지경이란 판단이 우리 정부 안팎에서 나온 건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북한이 비방 공세를 펼치면서다. 북측이 ‘국가 기구’로 내세우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기다렸다는 듯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밝혔다. “북남 대화의 동력이 상실된 것은 전적으로 남조선 당국자의 자행(恣行, 제멋대로 건방지게 행동함)의 산물이며 자업자득”이라고 화살을 문 대통령에게 겨눴다. 평화경제를 제안한 대목과 관련해서는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 운운하며 남북 정상회담 카운터파트에 대한 금도를 넘어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소형 선박을 타고 신형 방사포 시험 발사장으로 향하는 모습으로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지난달 25일 공개했다. [연합뉴스] 통일부가 “남북 합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북관계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공식 입장을 낸 건 그대로 두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공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 3일엔 조평통이 운영하는 비방·선동 전담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워 “남조선 당국자들과 다시 마주 앉을 생각이 없다”고 강조했다. 통일부를 향해선 “대화 타령을 하고 있다”고 몰아세웠다.   북한의 대남 대립각 세우기는 말로 그치는 게 아니다. 한때 남북 당국 간 소통 채널로 내세워졌던 개성 공동연락사무소는 개점휴업 상태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이후 매주 금요일 남북 간에 차관급 연락사무소장 만남이 이어졌지만 3월부터 중단된 상태다. 이번 주에는 북측이 불참을 통보해옴에 따라 서호 통일부 차관이 아예 개성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사무소 개설을 위해 국민 세금을 투입하고, 대북제재 위반 논란까지 겪으며 물자와 인력을 투입했지만 몇 달 쓰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상태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나선 미사일 시험발사 공세는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성과를 퇴색시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눈 밖에 나지 않을 수준의 발사체를 골라 도발 행보를 이어간 김정은이 현장에서 잇달아 대남 위협발언을 쏟아낸 때문이다. 마치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장거리 발사체를 쏘면서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몰고 간 2017년 상황으로 돌아간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문 대통령과 우리 정부를 극렬하게 비난하고 나선 김정은의 셈법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8월 한·미 합동 군사연습이나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에 따른 불만이란 관측이 있었지만 훈련이 끝난 지난달 20일 이후에도 도발은 이어졌다. 대화의 전제조건을 슬그머니 거둬들이고 회담 테이블로 나오던 과거 패턴도 기대하기 힘든 국면이다. 6월 말 판문점에서 이뤄진 김정은-트럼프 회동의 후속조치로 북·미 실무협상이 추진 중인 상황이라 남북관계를 후순위로 미룬 것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거칠어진 ‘문재인 때리기’의 배경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김정은이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문 대통령을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고 비난한 뒤 한국 정부의 북·미 관계 역할론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대목도 호둣속 같다.   지난달 16일 ‘북한판 에이태킴스’로 불리는 단거리 탄도미사일의 시험 발사 장면. [연합뉴스] 이런 상황 속에서 청와대와 정부 부처가 내놓는 대북 메시지가 보다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북한이 몽니를 넘어선 수준의 대남 비방을 쏟아내는 민감한 국면에 불필요한 자극이나 요구는 역효과를 낼 것이란 측면에서다. 할 말은 하고 짚을 것은 짚는 당당한 자세도 필요하지만 실속 없이 상대측에 빌미만 주는 건 곤란하다는 차원에서다.   대표적 사안이 김정은의 서울 답방 문제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9·19 평양 공동선언에서 남한 방문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내”라고 시한까지 공개했다. 하지만 해를 넘겨버렸다. 청와대는 지난해 말 ‘연내 김정은 방문’이 성사될 것처럼 분위기를 띄웠다가 불발되는 해프닝도 벌였다. 합의 이행을 하지 않은 북한의 책임이 크지만, 김정은으로서는 이를 서울 방문을 압박하는 모양새로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최근 공개 연설이나 외신 인터뷰 등을 통해 11월 부산 한-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별 정상회담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은 “김정은에게는 첫 남한 방문인 데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다자 정상회담이란 이중부담이 갈 수 있는 자리라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아세안의 관계설정 30주년을 기념한 부산 행사에는 아세안 10개국 정상이 참여한다.   북한이 반발한 대통령 8·15 경축사에 일부 문제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체적 기조는 문재인 정부의 평화경제나 ‘통일로 하나된 나라’(One Korea) 구상을 담고 있지만, 각론이나 표현에선 북한을 쓸데없이 자극할 요소가 담겨있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 앞부분에 “회령(함북)에서 자란 소년이 부산에서 해양대를 졸업하고 아세안과 인도양, 남미의 칠레까지 컨테이너를 실은 배의 항해사가 되는 나라”를 제시했지만 북한 입장에선 듣기 거북한 스토리일 수 있다. 특히 ‘2045년 광복 100주년’을 통일의 시점으로 설정하고, 통일된 2050년 국민소득 7~8만 달러를 강조한 대목도 북한으로선 흡수통일 논리로 받아들일 공산이 크다. 통일부 전직 고위 간부는 “마치 이명박 정부 시절 ‘747 공약’(7년 내에 7% 성장으로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을 북한·통일 이슈에 적용한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사실상 무산된 대북 쌀 지원 문제도 통일부와 관련 부처가 고민해봐야 할 사안이다. 2012년 집권한 김정은이 “남조선 것 받지 말라”며 대북지원 식량과 의약품·분유 등에 거부감을 보인 정황을 감안해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수성향의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주는 것은 안 받아도 우리 진보 진영이 주는 건 수용할 것”이란 잘못된 정책 판단이 결국 식량지원 퇴짜 사태를 불렀다는 것이다. 정부는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중국이 80만t 규모로 알려진 대규모 대북지원을 추진한다는 대목도 고려했어야 한다.   남북관계의 경색 국면에 전략적으로 대처한다는 차원에서 청와대와 정부의 대북·안보 참모진이 대통령과 정부 안팎의 북한 관련 메시지를 면밀히 조율할 필요가 있다. 중구난방식 발언이 사태를 꼬이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의 반발에도 이낙연 총리가 “남북미 대화 궤도가 유지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북·미 대화를 도우며 쉬지 않고 나갈 것”(5일 서울안보대화 축사)이라 밝히고,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차관급)은 “한국 정부가 미국을 설득시켜주길 바라는 (북한의) 속내가 있다”며 ‘중재자’ 역할을 자꾸 역설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북한을 제대로 알고, 대화 테이블로 끌어낼 수완과 지략을 가진 정책통과 전문가 그룹의 기용 폭을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9.06 00:03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거칠어진 김정은의 입…남북 물밑접촉서 뭔 일 터졌나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거칠어진 김정은의 입…남북 물밑접촉서 뭔 일 터졌나

     ━  꼬여가는 남북관계 해법 없나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무개차를 타고 평양 순안공항에서 백화원 초대소까지 카퍼레이드하고 있다. 최근 문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대남비방이 거세지면서 남북 정상 사이에 무슨 속사정이 생긴 것 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앙포토] 북한 김정은의 입이 거칠어졌다. 대남 비방은 물론 위협성 발언까지 육성으로 쏟아낸다.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말폭탄을 터트리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미사일 발사나 신무기 체계의 도입 현장을 돌아본 뒤 이런 언급을 내놓고 이튿날 관영 선전매체로 퍼나르는 방식이다. 비난 어투도 점차 강해져 이미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관측이 북한 전문가 그룹은 물론 정부 당국자 사이에서 나온다.   잇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난 행보에 남북 간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지난해 2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한 대남 특사 파견과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후끈 달아올랐던 것과는 천양지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드러나거나 알려진 사실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적지 않다. 김정은이 직접 문 대통령을 지목해 ‘망신주기’ 에 나서야 할 정도의 악재는 없었다는 점에서다. 무엇이 김정은의 몽니를 불렀을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비난 공세는 대북 문제를 상당 기간 다뤄온 관측통들의 고개까지 갸웃하게 만든다. 사사건건 걸고 들며 거친 비방을 퍼붓는 건 물론이고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표현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다. 깐깐한 북한 다루기로 대립했던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집권 당시 북한이 가한 비난 공세에 버금가는 수위다. 정상회담장에서 김정은이 직접 만나 교감했고, 북·미 관계가 꼬였을 때 가교역할을 해준 문 대통령에 대한 태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지난달 25일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지켜보며 주먹을 불끈 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조선중앙통신] 지난 16일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내놓은 담화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조평통은 전날 문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평화경제’와 통일비전을 밝힌 데 대해 “아랫사람들이 써준 것을 그대로 졸졸 내리읽는 남조선 당국자”라고 비난했다. ‘정말 보기 드문 뻔뻔한 사람’이라거나 ‘북쪽에서 사냥총 소리만 나도 똥줄을 갈기는 주제’ 등 막말도 동원했다. 이른바 ‘국가 기구’로 칭하는 조평통이 관영매체를 통해 내보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김정은의 문 대통령 몰아세우기는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8·15 경축사 이튿날 북한은 신형전술지대지 미사일 2발을 강원도 통천군 북방에서 동해 상으로 발사했다(사거리 230㎞). 지난달 25일 KN-23 미사일 2발을 시작으로 6번째 연쇄 도발을 벌였지만 8·15 경축사 하루 뒤 미사일 발사는 메시지가 분명했다.   문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최근 북한의 몇 차례 우려스러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대화 분위기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추진해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큰 성과”라고 강조한 직후 보란 듯이 미사일을 쐈다는 점에서다. 김 위원장은 현장을 지켜본 뒤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고,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그 장면을 해외로 전송했다.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남북관계는 당분간 해법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북한이 대남 비방의 소재로 삼은 건 한·미 연합훈련과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이다. 연합훈련은 지난 20일 마무리됐고, F-35A는 2대가 21일 추가로 청주공항에 도착해 모두 6대로 늘었다. 북한이 대화 복귀 쪽으로 선회한다면 스텔스기 정도는 언제든지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사안이다. 문제는 김정은이 전면에 나서 문 대통령을 향해 독설을 쏟아내고 있는 대목이다. 비방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이런저런 현안보다 문 대통령에 대한 김정은의 불신과 원망의 뿌리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김정은이 작심하고 문 대통령에게 포문을 연 건 지난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이다. 당시 김 위원장은 “남조선 당국은 추세를 보아가며 좌고우면하고 분주다사한 행각을 재촉하며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게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월 신년사에서 남북 정상회담 성과를 과시하면서 “참으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거나 “대단히 만족스럽게 생각한다”고 평가하던 것과는 기류가 확 달라졌다.   물론 여기에는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좌절감이 반영됐을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의 ‘변심’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6월 30일 판문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난 김 위원장은 실무회담 재개 등 회담 궤도로의 복원에 합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문재인 때리기’는 멈추지 않고 파고가 높아지는 형국이다.   광복절 경축사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뉴스1] 남북 간 ‘빅딜 불발설’이나 문재인-김정은 불화설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노이 북·미 결렬 직후부터 김정은의 시정연설이 나온 시점 사이에 북측이 쉽게 풀기 어려운 이슈를 우리 측에 제기했고, 접점을 찾지 못하자 등을 돌렸다는 관측이다. 일각에서는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관리하기 위한 남북 막후접촉이나 비공개 특사파견 과정에서 사단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북한이 구체적 요구를 내놓았을 공산도 크다는 얘기다. 김정은으로서는 지난해 3차례나 남북 정상회담에 응했고, 특히 9월 평양 정상회담의 경우 대규모 퍼레이드와 15만 군중을 동원한 문 대통령 연설 등 ‘통 큰’ 선물을 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북한 전문가는 “6·15 공동선언 당시 4억5000만 달러의 대북 비밀송금이나 10·4 선언의 대규모 인프라 지원 합의 같은 전례를 들어 모종의 상응 카드를 물밑 접촉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에 타진했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남북 모두 이런 관측을 뒷받침할만한 언급이나 분위기는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평양 권력 내 기류를 반영해온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어제 내놓은 설명은 시사점을 준다. 조선신보는 김지영 편집국장이 쓴 기사에서 “지난해 9월 평양 공동선언이 채택된 이후부터 북측 당국의 신경을 건드리는 남조선 당국자의 실언, 망언이 터져 나왔다”고 지적했다. 특히 “(김정은) ‘연내 서울 답방’과 관련한 무책임한 발언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청와대가 지난해 말 김정은 서울방문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였고, 북한이 이에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결국 불발된 점을 지적한 것이다. 김정은의 최근의 대남 대립각 세우기가 대통령과 청와대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북한의 거친 공세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은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나가는 신중함이 필요하다”(8월 19일 수석·보좌관 회의)며 ‘역지사지’를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 우회적으로 남측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주문이다. 하지만 김정은까지 나선 파상공세에 뾰족한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금도를 넘은 듯한 대통령 비방이 수그러들지 않는 걸 보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나 서훈 국가정보원장의 대북 채널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는 분위기다.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따른 한·일 갈등 고조와 조국 서울대 교수의 법무장관 지명 사태 등으로 대북 이슈에 대한 정부 안팎의 집중력도 떨어진 상태다.   통일부와 외교·국방 등 대북 및 안보 부처의 대처가 미흡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연철 통일장관이 21일 남북 철도협력을 강조하며 언급한 남북관계에서의 ‘진정성’은 북한이 과거 보수정부와 대립각을 세울 때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온 단어다. 같은 날 정경두 국방장관이 국회 답변에서 북한을 ‘걔들’이란 표현하고, “맏형은 막내가 재롱을 부리고 앙탈 부린다고 같이 부딪쳐서 그러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도 마찬가지다. ‘맏형론’ 역시 북한이 강한 거부감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북한의 예봉을 꺾을 전략 부재와 참모들의 미숙한 북한 다루기가 겹치면서 문 대통령에 대한 평양발 비방공세는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8.23 00:04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정부 대북정책 리스트에서 실종된 이산상봉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정부 대북정책 리스트에서 실종된 이산상봉

     ━  이산상봉 ‘대북정책 최우선 순위’ 공염불 되나   지난해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금강산 호텔에서 열린 ‘제2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마지막 날인 8월 26일 북측 가족들이 버스를 타고 먼저 떠나며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산가족’이 사라졌다. 청와대와 통일부를 비롯한 대북 부처 고위 당국자 입에서 언젠가부터 남북 이산상봉이란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추석·설 명절과 함께 상봉 행사의 최적기로 간주해온 8·15가 코앞에 닥쳤지만 깜깜소식이다. 역대 정부가 틈만 나면 강조하던 ‘이산가족 문제는 대북정책의 최우선 과제’란 입장도 옛말이 됐다. 그 자리를 파고든 건 ‘평화’ 코드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 어젠더를 부각시키기 위한 이벤트성 행사가 줄을 잇는다. 10일 경기도 파주 지역에서 열리는 비무장지대(DMZ) 평화의 길 개방 행사도 그중 하나다. 후순위로 밀려난 북한 가족과의 만남에 고령 이산가족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이대로 10년 정도 방치되면 사실상 이산가족 1세대가 남아있기 어렵고, 남북 간 이산상봉 이슈도 ‘자연사’ 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수밖에 없다. 지난해 4월 남북 정상회담은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만남의 장으로 택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의기투합했다.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을 재개하고, 한반도 분단 구조를 허물기 위한 ‘역사적’ 합의에 이르렀다. 평양에서 공수된 냉면과 도보다리 독대는 앞서 2000년과 2007년 치러진 정상회담 때와 차원이 다른 논의가 가능했음을 짐작게 했다. 남북 정상 간 합의 사항이 담긴 4·27 판문점 선언엔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도 포함됐다.   넉 달 뒤 ‘8·15 계기’란 부제를 붙여 금강산에서 연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그 실행이다. 물론 상봉장에 앉기까지 험난한 과정이 있었다. 2016년 4월 중국 닝보우 북한식당에서 일하다 탈북·망명한 12명의 여종업원 문제가 부담이었다. 북한이 이를 우리 정부의 ‘북한 공민 유인 납치’로 규정해 대대적인 대남 비난 공세를 펼쳤고, 국내 일부 세력이 여기에 맞장구치면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상봉 일주일 전 열린 판문점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북측 단장인 이선권 조평통위원장은 이 문제를 염두에 둔 듯 “일정에 오른 모든 문제들이 난항을 겪을 수 있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도발은 없었고 8월 20일부터 상봉이 이뤄졌다. 2015년 10월 제20차 상봉행사 이후 2년 10개월 만의 일이다.    ‘상봉 확대’ 정부 공언과 달라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난해 9월 평양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3차 정상회담을 하고 군사합의와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재개 같은 굵직한 사안에 서명했지만 이산상봉은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추석과 설 명절에 이어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지나 8·15 광복절을 앞두고 있지만 정부의 목소리나 대북제안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남북관계에서 ‘인도주의 협력’이란 차원에서 관행처럼 이뤄져 온 대북지원과 이산상봉의 맞바꿈도 챙기지 않는 상황이다. 정부는 북한에 대한 5만t 규모의 쌀 지원을 추진하면서 이산상봉 문제를 아예 꺼내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대통령과 정부 대북 부처가 공언했던 것과 큰 차이가 난다. 지난해 8월 이산상봉 당일 문 대통령은 “정기적 상봉행사는 물론 전면적인 생사확인과 화상상봉·상시상봉·서신교환·고향방문 등 상봉 확대 방안을 실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의 상시 운영 필요성도 언급했다. 통일부도 대통령 발언 이튿날 국회 상임위 보고에서 “적십자 회담 등을 통해 전면적 생사확인과 고향방문, 상봉 정례화 등을 북측과 본격 협의하겠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하다간 이산상봉에 500년 넘게 걸릴 것이란 탄식이 나온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 8·15 상봉을 시작으로 모두 21차례 상봉에 그쳤기 때문이다. 정부와 대한적십자사에 북한의 가족과 만나고 싶다고 신청서를 낸 실향민은 제도 시행을 시작한 1988년 이후 13만 3306명이다. 이 가운데 59%인 7만 8903명이 이산의 한을 풀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생존자 5만 4403명이 일 년에 한 차례꼴로 찔끔찔끔 이뤄지는 상봉행사(회당 100명 선발)를 한다면 544년이 필요할 것이란 계산이다. 안타까운 건 90세 이상 1만 2870명을 포함해 80세 이상 고령 이산가족이 64%를 넘는다는 점이다. 지난 한 해 사망한 상봉 신청자는 4914명으로 해마다 그 숫자가 느는 추세다.    실향민의 고향 성묘는 인도적 권리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북한 가족의 불이익(월남자 가족으로 낙인) 을 우려해 상봉 신청을 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지적도 있다. 남북이 분단된 1948년부터 6·25 전쟁 발발까지 북한 공산 체제를 탈출한 경우가 약 350만 명, 전쟁 중 월남자 150만 명을 합치면 500만 명에 이르고 동반 가족 등을 고려할 때 실향민 숫자가 1000만 명 수준일 것이란 추산이다. 통일부 등록 사단법인으로 1982년 출범한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는 80세 이상 실향민의 고향 성묘를 남북 당국이 최우선으로 협의해 줄 것을 요구하는 등 고령 이산가족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장만순 위원장은 “올 추석(9월 13일)을 계기로 2박 3일 일정으로 개성 출신 80세 이상 실향민의 성묘 방문단 방북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산가족의 고향 성묘는 유엔 ‘실향민 처리 지침’에도 올라있는 인도적 권리라는 설명이다.   세계인권선언은 “가족은 사회의 자연적이며 기초적인 구성단위며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16조 3항)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도 ‘가족의 소식을 알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정치·군사적 분단을 이유로 한 세대가 훌쩍 넘도록 가족·친지의 만남을 가로막고 인도적 상봉을 시혜성 조치나 대남 지렛대로 여기는 경우는 북한 정권이 거의 유일하다.   동독의 경우 1952년 탈출자에 대한 사살 명령을 내렸고, 9년 뒤엔 베를린 장벽을 쌓았지만 연금수령인(정년퇴직·산재·장애)에 한해 연간 4주간 서독의 가족·친지를 방문할 수 있게 허용했다. 1964년 제도 시행부터 71년까지 매년 100만명 이상이 방문했고, 1972년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에는 결혼·출산·조문 등을 위한 서독 방문이 허용돼 1980년에는 연간 150만명이 서독을 다녀갔다. 서독 정부는 모든 방문객에 환영금과 여비·의료지원을 제공했다. 그 결과 1989년 장벽 붕괴 시까지 동독인의 3분의 1이 서독을 방문하게 됐고, 통일 독일을 이루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다.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 담론에 밀려나   남북 이산가족 문제와 관련해 국제적십자사는 ①흩어진 가족의 생사와 주소 확인 ②서신 교환 ③상호 방문 ④재결합 ⑤부수적으로 해결할 인도적 문제 등 단계적 해법을 제기하고 있다. 갈 길은 멀고 상황은 절박해지고 있는데 우리 정부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 의지는 점차 약해지는 듯하다. 북한의 눈치를 너무 본다는 지적도 실향민 사회 안팎에서 나온다. 남북 간 당국 대화나 협력사업이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 담론에 쏠리면서 이산상봉에 대한 집중력을 잃고 있다는 목소리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절 경축사에서 “이산가족과 실향민이 단순한 상봉을 넘어, 고향을 방문하고 가족·친지를 만날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추진’이나 ‘검토’ 수준의 메시지만으로는 부족하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를 70년 세월 만나지 못하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이산가족의 간절함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다. 6·25 피난선을 타고 온 실향민의 후손인 대통령에 대한 실향민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오는 8·15 경축사에는 이산가족 문제의 절박성이 반영된 해법이 담겨야 한다. 문 대통령이 직접 김정은 위원장에게 촉구하는 수준이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도 중요하지만 ‘죽기 전에 가족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청원에도 남북 정상은 대답할 의무가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8.09 00:02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일본 간첩’ 혐의 벗은 탈북 엘리트…“써먹다 헌신짝 버리듯”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일본 간첩’ 혐의 벗은 탈북 엘리트…“써먹다 헌신짝 버리듯”

     ━  무죄 판결로 본 ‘탈북자 간첩’ 수사의 문제점   북한 선박 청류1호가 지난해 5월16일 중국 단둥 동강지역 해상에서 중국 텐더보트로부터 유류를 몰래 넘겨받는 모습. 이윤걸 박사가 북한 내부 협조자로부터 입수해 정보당국에 제공했다. [사진 이윤걸] 탈북 엘리트 이윤걸(51) 박사가 간첩혐의를 벗었다. 꼭 일 년 전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압수수색을 당하고 구속된 이 박사는 지난 24일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에게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씌운 혐의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특히 민감한 대북정보를 일본 측에 넘겼다는 대목은 이 박사를 파렴치범으로 만들었고, 일부 탈북자 그룹에선 그를 ‘대한민국을 배신한 인물’로 낙인찍기도 했다. 대북 정보력 수집·분석 능력이 탁월한 그의 도움을 받아오던 국가 정보기관이나 연구기관 관계자들은 등을 돌렸다.   지난 1월 구속된 상태에서 치러진 1심 재판에서 이 박사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하지만 반년 만에 열린 항소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일본에 넘겼다는 자료가) 이씨 입장에서는 평소에 다루던 북한 정보에 불과하다”는 게 판결 요지다. 평범한 북한 관련 자료가 어떻게 ‘국가 기밀’로 둔갑했을까. 왜 검찰은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을까. 대북 정보기관이 침묵하는 이유는 뭘까. 의혹이 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이 박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지난 일 년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대한민국을 위해 밤낮없이 뛰었는데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절망감이 컸다.”   무죄판결을 받은 탈북 박사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이윤걸 박사는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홀가분함보다 어떻게 이런 사태가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당혹감이 더 커 보였다. 그는 2005년 입국한 뒤 통일부 등 정부 당국과 국가정보원·국군정보사령부 등 대북 정보기관과 협력해 북한 정보 수집과 분석 등 업무를 해왔다. 통일연구원과 세종연구소 등 유력 연구기관의 객원연구위원을 맡아 공동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국가 정보기관의 주선으로 일본대사관 무관부에 북한 관련 자료와 분석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연구비도 받았다. 이 모든 과정은 그가 설립한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의 이름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 모든 행위가 ‘국가 기밀 누설’이자 국가 배신행위로 간주돼 구속기소라는 상황을 맞았다.    정보사령부 군사기밀 수사가 발단   김원홍 전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장의 아들 김철이 대표로 있는 청봉무역이 북한 인력송출을 합의한 비밀문건. [사진 이윤걸] 국정원과 검찰의 무리수는 국군정보사령부 전·현직 간부의 군사기밀 빼돌리기 수사 과정에서 비롯됐다. 정보사 공작팀장이던 황모(59)씨는 2013년부터 지난해 1월까지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휴대전화로 촬영하는 수법으로 군사기밀 160여건을 수집해 퇴직한 홍모(67)씨에게 빼돌렸다. 황씨는 그 대가로 홍씨로부터 670여만 원을 챙겼다. 홍씨는 입수한 기밀 중 일부를 일본과 중국 등 주한 외국 공관 무관이나 정보요원에게 돈을 받고 팔아넘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두 사람은 지난 24일 재판에서 각각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외국에 파견된 정보관의 인적 사항을 외국 정보기관에 전달한 행위는 정보사뿐 아니라 대한민국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판결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사단은 수사당국이 이윤걸 박사를 비롯한 몇몇 탈북 인사를 이 사건과 엮으면서 생겼다. 정보사 요원 홍씨가 평소 친분이 있던 이 박사의 사무실에 들러 대북 정보자료 가운데 쓸만한 걸 챙겨가고, 때로는 이곳에 있던 컴퓨터를 이용해 정보보고서 작성 작업까지 한 걸 문제 삼은 것이다. 검찰은 사무실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컴퓨터와 외장하드에 정보사령부가 생산한 문건 63건이 발견됐고, 홍씨와 이메일을 주고받은 정황 등을 근거로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이 박사는 “북한 내부나 중국 등지에 있는 지인과 정보원으로부터 입수한 북한 내부 동향자료를 정보사 요원이 챙겨가 비밀문건으로 만들었는데, 그 정보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나를 간첩으로 몰아갔으니 어처구니없는 일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검찰은 이 박사 외에도 탈북 엘리트 그룹의 A씨와 단체장 B씨 등을 기소하려 했으나 뚜렷한 혐의가 잡히지 않자 공소장에 거론하는 수준에 그치기도 했다.    ‘돈 받고 일본에 기밀을 팔아’ 누명   국정원이 이 박사를 수 년 간 감시한 결과를 담은 사진자료. [사진 이윤걸] 무엇보다 이 박사가 참을 수 없었던 건 국정원과 검찰이 “일본에 돈을 받고 국가기밀을 팔아넘긴 인물”로 지목한 대목이다. 이 박사는 국군기무사령부 군무원의 소개로 2011년께부터 일본 무관부 측에 북한 관련 정보를 정기적으로 제공하고 이에 대한 용역수행 비용을 받았다. 6년간 일본 무관에게 자문한 경우가 약 140차례이고 첩보 건수로는 약 1000건 정도에 이른다. 그 대가로 받은 돈이 월 100만원 수준이다.   일본 측에 제공된 문건은 북한 관련 국내 언론보도나 전문가 분석 등에 이 박사가 운영하는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의 자체 정보와 해설 등을 덧붙인 게 대부분이었다. 특히 문건마다 센터의 영문 명칭을 붙여 ‘NKSIS 정세분석보고서-일본’이라고 명기했다. 군사기밀을 몰래 빼돌려 일본 측에 돈을 받고 팔아넘긴 문건이라면 제공 기관명을 밝히는 건 난센스다. 통일부로부터 관리·감독을 받는 이 센터는 일본 측에 정보제공이나 자문을 해주고 송금받은 금액은 ‘정보서비스’ 등으로 출처를 밝혀 놓았다.   대북정보와 관련, 한국과 일본은 2016년 11월 체결한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에 따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협정이 밝히고 있는 군사비밀은 ‘당사국이 생산하거나 보유한 국가안보 이익상 보호가 필요한 방위 관련 모든 정보’다. 한국의 경우 군사 2급 비밀과 3급 비밀이 교환할 수 있는 정보 수준이다. 국가안보에 매우 중요한 데다 열람도 극히 제한되는 1급 비밀을 제외한 모든 정보가 교환대상이란 얘기다.   일본 측과 정보를 주고받은 우리 정보당국 관계자나 일본 측 무관, 정보요원들은 문제 삼지 않고 유독 탈북자 출신인 이 박사만 구속기소라는 조치를 취한데 대해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스파이 행위를 한 것으로 검찰이 공소장에서 지목한 일본 무관 나가시마 토로는 사건이 불거진 이후에도 근무하다 지난 6월 임기를 마치고 출국했다.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제시된 검찰 측 자료를 통해 국정원이 탈북 인사들에 대해 지속적인 사찰과 미행을 한 사실도 드러났다. 국정원은 이 박사가 2017년 3월 14일 나가시마 무관을 만나기 위해 서울 시내의 한 식당에 들어가는 모습을 몰래 촬영했다. 또 2015년 5월에는 다른 일본 측 관계자를 만나는 모습을 담기도 했다. 이 박사 측은 “적어도 4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나에 대한 감시와 미행이 이뤄졌다는 걸 국정원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 측은 “일본 측 인사들을 감시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한다.    북한의 민감한 정보 공개에 부담 간 듯   북한 김정은 정권이 노출하기를 꺼리는 민감한 내부 정보를 입수해 공개하자 입막음을 하려는 의도라는 탈북자 사회의 목소리도 있다. 실제 이 박사는 지난해 5월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동강지역 해상에서 북한 선박 청류1호가 중국 측 텐더보트로부터 유류를 불법 환적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입수해 정부 당국자에게 전달했다. 이 배는 북한 인민무력성 소속 붉은별무역총회사 관할이다. 유엔 대북제재위가 북한의 유류 불법 환적을 본격적으로 문제 삼기 전이다. 김원홍 전 국가안전보위부장이 권력 실세일 때 그의 아들 김철이 대표로 있는 조선청봉무역이 중국 측과 북한 인력의 제3국 송출을 합의한 비밀계약서도 이 박사는 공개했다. 김정은 통치자금이나 일가의 속사정을 담은 정보가 잇따르자 정부 당국이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가 감지됐다고 한다.   통상 ‘탈북자 간첩’의 경우 과거 정부에서 공안당국의 강압수사 논란 형태로 불거졌다. 민주와 인권을 표방하는 현 정부에서는 한 엘리트 탈북인사에게 ‘일본 간첩’이란 혐의가 씌워졌다. 공교롭게도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이나 교류, 제재해제에 골몰하는 시점이었다. “수단·방법 안 가리고 대북정보 수집에 내몰더니 이젠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 이윤걸 박사의 호소는 정권에 따라 일렁이는 대한민국 대북 및 외교안보 정책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7.26 00:05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느슨한 정부의 대북 제재 고삐…틈새 파고 든 일본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느슨한 정부의 대북 제재 고삐…틈새 파고 든 일본

     ━  대북제재 문제삼는 아베 정부의 노림수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11일 국회 정론관에서 과거 일본이 대북 전략물자를 밀수출한 사실을 일본 안전보장무역정보 센터(CISTEC) 자료에서 확인했다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4월 통일부 간부 P씨가 북한 남포항으로 향하는 대북 수해 구호물자 운송 선박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100달러짜리 지폐가 100장씩 묶인 돈다발 40개가 담긴 가방이 들려 있었다. 남의 눈에 드러날까 봐 분홍색 비누 상자에 은밀하게 숨겨진 40만 달러의 현금은 평양에서 내려온 북측 관계자에게 전달됐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작동하던 시점이라 경협 업체나 남북교류 사업자가 북한에 현금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적극 챙겨야 할 시점에 주무 부처인 통일부가 북한에 몰래 거액의 달러를 건넨 것이다. 더욱이 이 시점은 북한이 첫 핵 실험을 감행한 지 6개월 지난 때다.   당시 상황에 관여한 퇴직 간부는 “북한이 이산가족 화상상봉에 호응하는 조건으로 컴퓨터와 LCD 모니터를 요구해왔다”며 “전략물자라서 대북 제공이 금지된 물품을 직접 건네기 어려워 중국 등에서 구입해 쓰라며 달러를 비밀리에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은 화상상봉을 포함한 이산가족 만남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고 결국 혈세만 날린 셈이 됐다. 후유증으로 남은 건 한국 정부의 대북 제재 이행 의지가 약하고, 금기시된 현금 제공까지 마다치 않는다는 인식이 미국과 일본 등 유관국 조야에 널리 번졌다는 점이다.    핵과 미사일 도발 수위를 한껏 올린 시점에 이뤄진 노무현 정부의 대북 현금 제공은 북한 당국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기에 충분했다. “남조선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대남 도발이 이뤄지는 상황이라도 돈다발을 들고 찾아온다”는 생각이 북한 최고지도자와 노동당·군부 중추세력을 오만함에 들뜨게 했을 수 있다. 거액의 현금을 챙긴 북한이 약속했던 이산상봉 행사에 제대로 응하지 않은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중국에서 사서 쓰라고 한 일이 없다”고 거짓 해명을 한 당시 통일부 장관, 관련 보도를 내놓은 한국 언론을 겁박하고 나선 북한 대남라인의 태도는 대북 유화정책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을 키웠다.   대북 이슈에 있어 보수 성향을 보인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2008~2017년) 북한에 대한 제재는 더욱 촘촘해졌다.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과 연평도 포격에 대응해 정부가 5.24 대북 제재 등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듬해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본격화하면서 유엔 주도의 국제 제재도 강화됐다.   지난해 초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해빙무드로 돌아서면서 대북 제재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에 이어 지난달 말에는 판문점에서 문 대통령, 김정은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등 3자가 회동하는 ‘역사적인’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렇지만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에 상당한 진전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대북 제재의 고삐를 늦출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간 대북 공조를 강조하면서도 대북 제재와 관련해 온도차를 드러내고 있는 형국이다. 인도적 지원은 물론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 같은 대북 제재의 상징성을 지닌 문턱까지 낮출 기세다. 이 와중에 북한은 대북 제재 해제를 남북관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의지를 읽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으려는 듯 연일 압박과 비난 공세를 펼쳐왔다.    ‘대북 제재 이행’ 공방으로 둔갑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일본은 이런 틈바구니를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한·일이 과거사 문제를 놓고 경제·외교적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대북 제재 카드를 핵심 쟁점의 하나로 꺼낸 것이다. 당초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판결 등 한·일 간 외교갈등에서 시작된 사안을 ‘한국 정부의 대북 제재 이행’ 공방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현재로썬 일본의 주장 자체가 근거 없는 선전전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청와대와 정부·여당뿐 아니라 일부 야당까지 일본의 허위 주장을 공박하는 양상이다. 국회 국방위 소속인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어제 일본의 비정부기관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 자료를 토대로 “일본이 핵 개발에 사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를 북한에 밀수출한 사실이 수십 차례”라고 지적한 것도 그중 하나다. 한국 정부의 관리·감독 부실로 전략물자가 북한에 흘러 들어갔다고 일본 측이 주장했지만 오히려 일본이 밀수출을 했다는 걸 일본 측 자료로 밝힌 것이다.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가 정당하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일본이 무리수를 뒀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팩트’ 반격만으로 일본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일본 당국과 일부 언론매체들은 “한국 기업이 전략물자 156건 밀수출했다”는 등의 자료를 교묘히 덧붙여 국제무대를 대상으로 한 선전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이나 과거사 문제와 관련, 노련한 외교술을 발휘해 우리에게 적잖은 상처를 안겨 온 그들이다.   바짝 긴장하고 전략적 대응에 머리를 싸매야 할 상황이지만 우리 정부의 대응은 미덥지 못하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민감한 물자의 불법유출을 막지 못해 논란을 자초하고도 “적발 건수가 많다는 건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것”이란 안이한 주장을 내고 있다. 3년 동안 한·일 전략물자회의를 열지 않아놓고 “일본 측 국장이 공석이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댔지만 거짓으로 드러났다. 일본의 입지만 세워주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국제사회가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제재 이행 자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다는 점이다. 비핵화 협상의 과정에서 지렛대 역할을 해야 하는 제재를 무력화시킬 주장을 문 대통령과 정부 고위 당국자, 친여 성향의 정치인 및 전문가 그룹 인사가 쏟아낸 데 따른 것이다. 사업자의 답답한 심정을 위로하는 차원을 넘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에 대해 섣부른 제재 해제 주장을 펼치는 한국 내 분위기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접근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실제로 대북 제재의 빈틈을 노출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지난해엔 우리 업체들이 대북 제재 품목인 북한산 석탄과 선철을 대규모 밀반입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기도 했다.   국제사회도 의심의 눈초리   문재인 정부의 대북제재 이행의지에 국제사회가 의심을 눈길을 보내는 건 김대중(DJ) 정부 시절 대북 비밀송금의 트라우마라 할 수 있다.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에 4억5000만 달러를 몰래 보낸 사건은 우리 국민뿐 아니라 서방국가에 큰 충격을 던졌다. 김정일과의 만남을 대가로 한 천문학적인 현금 제공이란 대목뿐 아니라 대북정보 기관인 국가정보원과 그 책임자가 나서 불법 환전소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국민 비판이 일었다. 미 의회 조사국(CRS)이 보고서를 통해 의혹을 제기하자 청와대와 정부가 나서 거짓 해명을 한 대목은 사태를 악화시켰다. 결국 노무현 정부가 대북송금 특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고,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 4명이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돈을 받은 사실을 발뺌하며 “날조극”이라고 주장하던 북한도 그제서야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일본의 공세는 이처럼 대북관계에서 누적된 한국 정부의 전비(前非)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대북 제재에 대해 보다 깐깐하고 치밀하게 대응했으면 일본에 얕잡히지 않았을 일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접근 철학과 방식을 놓고 미·일 등 국제사회는 DJ·노무현 정부의 계승이라고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이다. 아베 정권은 이런 대목을 놓치지 않고 허위와 가짜 정보를 ‘팩트’와 적절히 배합해 국제사회가 진실로 믿게 만들려고 전력투구하는 양상이다. 트럼프의 미국은 침묵하고 있고, 김정은의 북한은 한·일 간 반목과 괴리를 즐기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7.12 00:03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500만 달러 주고도 못 가져온 북 모래…경협 지렛대 될까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500만 달러 주고도 못 가져온 북 모래…경협 지렛대 될까

     ━  대북제재 속 꿈틀대는 경제협력   국내 골재업체인 수양광업㈜ 소속 화물선인 태천1호(688t급)가 2010년 2월 북한 장전항에서 싣고 온 모래 1390여㎥를 울산항 부두에 하역하고 있다. [중앙포토] 남북 관계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이다. 북한은 어제 관영매체를 통해 “남조선 당국자들이 지금 북남 사이에 그 무슨 다양한 교류와 물밑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광고하고 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6일 언론 인터뷰에서 “3차 북·미 정상회담의 시기가 무르익었다”며 남북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기대를 표명한 걸 일축한 것이다. 지난 2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불똥은 남북관계에도 튀었다. 북한은 연일 속이 꼬인 모습을 보이며 우리 정부 당국은 물론 문재인 대통령에게까지 폭언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고 있다. 자칫 지난해 9월 평양에서 서명된 공동 선언이 백지장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 기류와 달리 남북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북측 관계자들이 그런 시그널을 보내오고 있다고 한다. 경협 사업가와 당국자를 만나 흐름을 추적해봤다.   북한이 요즘 들어 대남 경협 재개 의사를 우리 측에 타진해오고 있다는 건 뜻밖의 소식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한·미 공조 움직임에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워왔다는 점에 비춰볼 때 생뚱맞기까지 하다. “북남 사이에 여전히 다양한 경로로 무슨 대화가 진행되는 듯한 여론을 돌리고 있다”(27일 외무성 미국국장 담화)는 대목에선 대놓고 남북관계의 단절을 기정사실화 하는 분위기다. 대미 입장을 밝히는 글인데 대남 비난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토라진 북한을 달래려 국민 비판여론을 무릅쓰고 5만t 규모의 대북 식량지원을 포함한 유화정책을 펼쳐온 문재인 정부로서는 난감한 일이다. 일각에선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나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가동해온 대북 비밀채널에서 뭔가 사달이 난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북한의 불만을 이처럼 증폭시켜버린 경위가 석연치 않다는 점에서다.   이런 국면에서 베이징의 북한 경협 담당자들이 남북관계와 관련해 긍정적 메시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는 대목은 눈길을 끈다. 최근 북측 민족경제협력연합회 관계자를 접촉한 대북 사업가는 “구체적인 배경 설명은 없었지만 ‘곧 좋은 소식이 갈 것’이란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남북 당국 관계가 소강상태를 맞은 상황이라 답답한 속내를 토로하자 “7월 중순께는 풀린다. 교역사업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란 입장을 북측이 전달해왔다는 것이다. 이전과 상당히 달라진 분위기다. 북측은 그동안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대북제재 눈치를 보며 경협이나 남북 교류협력 사업에 미온적이라며 불만을 표명해왔다. 북측 경협 담당자들도 미국과의 협상에 진척이 없는 점과 함께 김정은 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4월 24~26일), 김정은·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정상회담(6월 20~21일) 일정 등을 거론하며 미적대는 모습을 보였다.   북측이 꺼내 든 카드는 모래 반출 건이다. 남북한은 노무현 정부 때 북한산 모래의 국내 반입 사업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0여개 국내 업체가 2004년부터 북측 지역 바다와 강에서 채취한 5600여t을 들여왔다. 하지만 2010년 3월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 대응 차원에서 5·24 대북제재가 시행되면서 중단됐다. 당시 개성공단과 금강산 지역을 제외한 우리 국민의 방북을 불허하고, 남북 교역 중단과 대북 신규 투자 금지가 결정됐다. 또 북한 선박의 남측 해역 운항을 금지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 사업의 경우에도 사전에 정부 당국과 협의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미 대금을 북측에 지급했거나 임가공을 위해 원자재를 보낸 경우가 문제였다. 예외 없는 적용을 했다가는 우리 기업이 공연히 북측에 돈만 떼이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결국 이듬해 이런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는 결정이 이뤄졌다. 모래의 경우도 반입을 앞두고 북측에 돈을 건넸지만 물건을 받지 못한 업체가 생겼다. 북한이 이번에 남측으로 반출을 허용해준 모래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 모래 반출의 경우 이미 지난해 말부터 북측으로부터 언질이 있었다고 한다. 정양근 민간남북경제교류협의회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난해 12월 북측 광명성총회사가 우리측 S업체로부터 대금을 받고도 내주지 못한 바닷모래를 반출해가도 된다는 통지를 해온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정 회장이 공개한 확인서에는 “바닷모래 거래과정에서 발생한 미지불금 500만 달러를 모래 250만㎥로 상쇄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돼 있다.   북한 민경련이 미지불금을 모래로 상쇄하겠다고 우리 측 업체에 보내 온 확인서. 정 회장은 북한 민경련 단둥대표부가 보내온 서한도 공개했다. 여기에는 “모래반입과 관련해 남측 당국의 허가를 받고 반입 일정표를 통지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또 북측이 모래를 내주기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할 것이란 점을 밝히고 있다. 정 회장은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모래 반입을 본격 시행하려 했지만 결렬 사태로 분위기가 냉각되면서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북한 민경련이 미지불금을 모래로 상쇄 하겠다고 우리 측 업체에 보내 온 확인서. 북측은 최근에도 자신들이 보낸 확인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조속히 물량을 넘겨줄 수 있도록 통일부 등 남측 당국에 승인을 받아달라는 당부도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도 모래 반입 문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기류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24 조치 이전 이미 북한에 대금을 건넨 사안인 만큼 해당 물량을 가져오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란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도 26일 AFP 등 통신사 인터뷰에서 “남북경협이 비핵화 협상에 도움이 된다”고 말해 ‘선(先) 비핵화, 후(後) 경협 및 제재완화’ 원칙의 유연한 적용 방침을 시사했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도 학자 시절 모래반입 등 경협을 통한 남북 상생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업계는 모래 반입이 원만하게 이뤄지면 대북제재 국면에서의 경협 물꼬를 트는데 마중물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당장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가동 등이 어려운 현실에서 모래를 돌파구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건설업계도 기대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우리의 경우 환경 생태계 보존 등의 이유로 해양수산부 등이 반대입장을 표명하면서 2016년부터 바닷모래 채취가 급감했다. 국토부는 올해 골재 수급계획에서 전체 골재 1억8728만㎥ 가운데 8.1%인 2160만㎥를 바닷모래로 충당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환경단체와 지역 어민의 반발 등으로 바닷모래 채취는 사실상 중단상태다. 이에 따라 골재 가격이 40% 넘게 뛰기도 했다. 한 건설업체 대표는 “국내 건설업체들이 모래 부족 사태로 어려움을 겪어왔는데 북한산 모래의 반입문제가 성사되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대북제재의 완화나 해제 국면에서는 북한산 모래의 안정적 공급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남북한은 지난해 9·19 군사합의에 ‘한강 하구 지역의 공동 이용’을 담았고 이를 위한 공동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문제는 향후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의 향방이다.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입장에 불만을 드러내며 “실력행사의 방아쇠를 주저 없이 당길 것”(26일 외무성 담화)이라고 위협하는 등 대미 비난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대남 비방 목소리도 한껏 키운 상태다. 하지만 북한이 한·미를 상대로 협상 테이블에 나서기 직전엔 잇단 성명전을 통해 기선잡기에 주력했다는 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대화와 교류 재개를 앞두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월 말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4개월간의 장고 끝에 한여름 담판 채비에 나섰다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 경협 채널이 잇달아 보내오는 메시지가 남북관계 복원의 예고탄일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대북제재의 예외 항목으로 남아있던 모래반입이 경협 재개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6.28 00:06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남북 혈맥 이어줄 DMZ ‘평화의 다리’ 놓여질까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남북 혈맥 이어줄 DMZ ‘평화의 다리’ 놓여질까

     ━  ‘통일 마중물’ 될 남북 인프라 협력   김병석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남북한인프라특별위원장이 29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포럼 특별세션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인프라(infrastructure)는 경제활동의 토대가 되는 기반 시설이다. 철도·도로와 공항·항만 같은 교통망을 중심으로 통신·상하수도·에너지 관련 설비가 망라된다. 최근 들어서는 문화·교육 시설이나 의료·복지 시스템으로까지 개념이 확장되는 경향도 보이지만, 전통적 요소로서의 인프라 중요성은 여전하다. 같은 인프라를 공유하고 연결된 체계로 이를 활용하는 건 동일 공동체의 구성원이란 의미도 있다. 남북한이 인프라 협력을 통해 북한의 낙후된 사회 기반시설을 개선하고 교통·통신망 등을 하나로 이으려는 것도 한반도 경제공동체의 복원에 인프라 건설이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지난 29일 서귀포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에서 열린 ‘한반도 번영을 위한 인프라 협력’ 특별세션 현장을 찾아 그 가능성을 짚어봤다.     “솔직히 우리 교통이 불비(不備)해서 불편을 드릴 것 같다.” 지난해 4월 판문점 첫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렇게 토로했다. 북한 쪽을 거쳐 백두산을 가보고 싶다는 문 대통령의 말에 김정은이 북한의 열악한 교통 사정을 고백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고속철도 얘기를 꺼냈다. 그는 “평창올림픽에 갔다 온 분들이 말하는데 고속열차가 다 좋다고 하더라”라고 말한 뒤 “남측의 이런 환경에 있다가 북에 오시면 참으로 민망스러울 수 있겠다”고 했다. 두 달 전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위해 특사 자격으로 방문한 여동생 김여정으로부터 서울~강릉 간 고속철에 대한 생생한 보고를 들은 걸 토대로 한 얘기로 보인다.   북한의 열악한 인프라에 대한 우려와 대책 마련 필요성을 주문하는 목소리는 제주포럼 특별세션에서도 쏟아졌다. 주제발표를 맡은 김병석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선임 연구위원(남북한인프라 특별위원장)은 “교통과 상하수도는 물론 전반적인 인프라 요소에서 남북한의 격차가 극심하게 나타나고 있어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될 상황”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따른 대북제재가 진행되고 있지만 해제 이후에 대비한 단계별 인프라 협력사업(가칭 ‘한반도인프라 마스터플랜’)을 구상해 실행에 옮겨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제재 해제 이전이라도 북한 인프라 공동조사와 제도·기준 마련, 특화기술 공동개발 같은 채비를 하자는 취지다.   김 위원장이 ‘국민참여형’ 건설을 제안한 DMZ를 가로지르는 ‘평화의 다리’ 조감도. [사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도로의 경우 북한은 총연장이 2만6178㎞에 그쳐 11만 91㎞인 우리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마 주행속도가 시속 50㎞ 이하에 머물렀고, 2.4m보다 좁은 일차선 도로의 비중이 43.5%에 달했다. 철도는 연장이 5287㎞로 남한의 4078㎞에 비해 긴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노선과 철도 시설물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는 등 노후화가 심각했다. 평균 운행 속도도 시속 40㎞ 수준(산악지역은 시속 15㎞)에 그쳐 평양에서 북부 지역 혜산으로 가는 구간 400㎞ 운행에 22시간이 소요된다. 말 그대로 ‘속 빈 강정’에 그쳤다는 얘기다.   독일 연방건설청(BBR) 산하 도시공간연구소의 프로젝트 책임자인 베른트 부테 박사는 주제발표에서 “통일 이전 동서독은 국경에 인접할수록 교통망이 촘촘하지 못했고, 양 지역을 잇는 도로 10개와 철도 건널목 8개가 전부였다”고 지적했다. 부테 박사는 “베를린 장벽 붕괴와 유럽 국가 간 국경개방으로 인해 교통 흐름의 주류였던 남북 방향 교통 외에 동서를 잇는 노선의 교통 흐름이 증가했다”면서 “이로 인해 동독 지역의 열악한 교통 인프라가 문제가 됐고, 특히 동서 연결 구간에서 교통사고 사망자가 급증하는 문제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결국 도로 여건을 개선하고 서유럽 기준에 부합하는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동독지역의 고속도로를 완전히 새로 건설할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것이다. 부테 박사는 “독일도 갑작스레 통일이 돼버렸다”며 “한국은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하길 바라며,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그동안 준비해온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개회사를 하는 한승헌 한국건설기술연구원장. [사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남북 경협에 종사해온 전문가들은 토론에서 북한의 열악한 인프라 여건 개선이 남북 간 협력과 우리 기업의 대북 진출에 결정적 요소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육재희 한라건설 전무는 “금강산 관광 초기 현대아산은 장전항에 접안부두를 직접 건설하고 도로 공사를 새로 하고 발전소를 지었다”며 “초기부터 대규모 투자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적자는 불을 보듯 뻔했다”고 말했다. 육 전무는 “이런 뼈아픈 경험 때문에 개성공단 건설 때는 전력과 수도·오폐수 등이 정부 지원 아래 해결됐다”고 강조했다. 결국 인프라 구조에 따라 대북 비즈니스의 여건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한다 해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게 육 전무의 지적이다. 육 전무는 “남북인프라협력개발공사(가칭) 같은 기구를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회담 합의를 통해 철도·도로와 관광특구 같은 인프라 관련 논의에 진전을 이뤄놓은 상황”이라며 “남북관계가 다소 주춤하는 듯한 현시점에서 재원조달과 거버넌스(추진 체계) 구축에 꼼꼼한 점검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중국이 일대일로를 추진하면서 철도·도로와 항공로·가스 등 6대 인프라의 연결에 공을 들이고 있다”면서 “북한이 인프라 문제와 관련해 중국과 협력을 긴밀히 하는 상황이라 우리 기업이 중국에 선수를 빼앗길 우려가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 당국의 입장도 민간 전문가 그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패널로 나온 하대성 국토교통부 국토정책관은 “국토개발 계획을 수립하면서 어떻게 북한을 한반도 경제권으로 묶어낼 것인가 하는 걸 고민하다 보면 결론은 늘 인프라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도로·철도가 선봉장이 돼서 남북협력의 기초가 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하 정책관은 “솔직히 지난해는 (남북 당국 일정에 바빠서) 민간과 소통할 여유가 없었다”며 “이제 당국과 민간의 대화와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토론 사회를 맡은 이종세 대한토목학회장은 “제주만 섬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섬 아닌 섬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분단으로 본의 아니게 섬이 돼버린 대한민국을 육지로 만드는 그랜드플랜을 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북한과 하나의 교통·물류망을 구축해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대륙으로 나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날 세션에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측은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의 도라산전망대에서 비무장지대(DMZ) 임진강을 가로질러 북측으로 연결되는 ‘평화의 다리’(가칭) 건설 구상을 제안했다. 정부 당국이 아니라 남북한과 국제사회의 민간이 건설 비용을 모아 지구촌 마지막 냉전과 분단의 현장에 한반도 평화의 가교를 마련한다는 취지다. 김병석 연구위원은 “교량 1mm 건설에 100달러의 비용을 들어가는 걸 고려할 때 모두 100만명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제주포럼 인프라 특별세션을 주관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지난해 1월 한승헌 원장 부임 직후 통일북방연구센터를 설립했다. 올해는 이를 특별위원회로 확대해 인프라 분야 남북협력과 대북 진출을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업계와 전문가·시민 등이 참여하는 ‘한반도 인프라 포럼’의 발족도 준비 중이다. 한 원장은 “남북 경협과 평화에 대한 염원은 커지고 있지만 아직은 이상과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건설·인프라 분야 남북협력의 허브 역할을 우리 연구원이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서귀포=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2019.05.31 00:04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퍼주기 말고 ‘잘줬다’ 소리듣는 대북지원 필요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퍼주기 말고 ‘잘줬다’ 소리듣는 대북지원 필요

     ━  식량 지원 둘러싼 논란과 해법   유엔 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 식량안보 평가팀이 황해북도 지역 협동농장을 방문해 식량 사정을 파악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도적’이란 수식어가 붙어야 마땅할 대북 식량 지원은 무척 이념적인 코드가 됐다.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국민 여론을 갈라놓고 논란으로 치닫게 하곤 한다. 북한의 핵 보유나 김정은 3대 세습, 인권 문제 등과 함께 논쟁을 촉발하는 대북 관련 어젠다라 할 수 있다. 찬성·반대 측 모두 나름대로 주장과 논리가 있지만 온전한 설득력을 갖추지는 못한 게 사실이다. 대북지원에 목소리를 높이는 그룹에선 “그게 정말 제대로 배고픈 주민에게 전달되는 줄 아느냐”는 분배 투명성 비판에 속 시원한 답을 못한다. 북한에 쌀을 보내는 게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며 신중론이나 반대의견을 펴는 집단에서는 “북녘 동포가 굶주리는데 너무 매정한 것 아니냐”는 읍소에 혹여 냉혈한으로 낙인될까 봐 말꼬리를 흐린다.   북한의 식량 사정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들려온 건 올봄 들어서면서다. 세계식량계획(WFP)이나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같은 국제기구, 일부 국내외 대북 지원단체가 입소문을 냈다. 처음엔 다소 뜻밖이란 평가가 많았다. 집권 8년차에 접어든 김정은 체제가 농업생산에 있어 일부 개선조치를 취하는 등 전향적이었고, 작황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는 게 그간 대북 전문가들과 정부 당국 분석이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대북 식량 지원 쪽으로 마음을 굳힌 건 나흘 전 데이비드 비슬리 WFP 사무총장의 청와대 방문을 계기로 해서다. 당초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만나려던 계획을 바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접견한 데서도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대북제재 국면과 북한의 이달 초 미사일 도발 때문에 분위기가 꼬인 상황임에도 결심을 굳힌 것이다. 비슬리 사무총장은 WFP가 자체적으로 파악한 북한 식량 사정을 설명하고 한국 정부의 협조를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인도적 대북 식량 지원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했다”는 전언으로 화답했다.   이달 초 WFP와 FAO가 공동 발표한 ‘북한의 긴급 식량안보평가’는 절박한 호소를 담고 있다. 북한의 식량 수급이 최근 10년 내 최악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36만 톤의 외부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제임스 벨그레이브 WFP 평양사무소 대변인이 우리 언론에 전한 실상은 참혹한 수준이다. 북한 인구 2500만 명 가운데 40%가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벨그레이브 대변인은 “주민 대부분이 쌀 같은 곡류와 김치 등 약간의 야채만을 먹을 뿐, 단백질의 경우 고기는 고사하고 계란을 1년에 2~3번 먹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당장 북한에 쌀과 고기·계란, 신선한 푸성귀를 바리바리 실어보내야 마땅하겠지만 사정은 그리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북한의 식량 상황에 대한 평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북한 장마당의 쌀값이 안정적이고, 일부 지역에선 오히려 내린 경우까지 있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국제기구의 조사 결과를 놓고도 공신력에 의문을 보인다. 일각에선 활동이 크게 위축된 구호기구들이 대북 비즈니스 복원에 나선 것이란 곱지않은 시선까지 있다. 이들 단체의 북한 내 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수의 탈북자는 북한이 지원받은 식량을 주민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연출하고는, 모니터링 단이 철수한 뒤 다시 거둬들였다고 증언한다. 대북 물자를 챙기려 평양 대동강 수해 상황을 부풀리는 사진 조작을 했다가 국제 망신을 사기도 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 체제의 경제상황을 지나치게 낙관 일변도로 평가해버린 후유증도 크다.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 때 문 대통령은 모두 발언에서 “어려운 조건에서 인민의 삶을 향상시킨 김정은 위원장의 리더십에 경의를 표하며 기대하는 바가 크다”고 찬사를 던졌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에 찬동해온 일부 북한·안보 전문가 그룹은 “트럼프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는 끄떡없고 전력이나 식량 사정도 좋아졌다”고 주장했다. 친북 성향의 교포인사나 논객도 평양의 밤거리 사진 등을 내보이며 마찬가지 말을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북한 동포들이 광범위한 기아선상에 놓였다면서 대북지원의 절박성을 호소하고 나서니 국민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북지원에 대한 북한의 부적절한 태도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어떻게든 비판여론을 누그러뜨리고 쌀 지원을 성사시키려는 문재인 정부의 노력이 한창인 시점에 무더기 미사일 도발로 찬물을 끼얹었다. 문 대통령에게 ‘오지랖’ 운운하는 막말을 퍼붓더니 “공허한 말치레와 생색내기… 시시껄렁한 물물거래”(이달 12일 선전매체 ‘메아리’) 같은 말로 대북지원을 폄훼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 열기가 뜨겁던 지난해엔 청와대를 ‘미국의 삽살개’로 비방하고 입에 담기 어려운 극언을 서슴지 않는 내용의 동시집을 내놓은 사실도 드러났다. 앙상한 아이들의 모습을 내세워 지원을 호소하면서 뒤편으로는 동심 속에 동족을 악마화하는 증오를 심는 이중성은 용납되기 어렵다. 이러니 북한이 대북지원을 “서울의 ‘조공(tribute)’으로 여긴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북한 당국의 태도야 어떻든, 대북지원 식량이 주민에게 온전히 돌아가건 말건 ‘쌀을 가능한 한 빨리 보내겠다’는 정부의 뜻은 확고해 보인다.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여파로 벽에 부닥친 남북관계를 인도지원이란 도약대로 뛰어넘겠다는 복안이다. ‘인도주의’란 모자를 쓴 식량 지원은 여론 반발을 피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비판하면서도 식량 지원에는 변변한 대응논리를 세우지 못해온 야권은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자유한국당 중진 의원은 “국민정서상 우리 당이 대북지원에 반대하는 순간 ‘반북, 반인도적 정당’이란 프레임에 갇혀버릴 수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청와대와 정부가 꼭 챙겨야 할 대목도 있다. 첫째,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북한에 차관 형태로 보낸 240만 톤의 쌀을 비롯한 3조5000억 원어치의 대북지원 처리문제다. 당시 고위 관료들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상환을 여태껏 거부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혈세가 떼일 위기에 처했는데도 누구하나 책임지려 않는다. 이런 태도는 대북정책에 대한 지지 철회나 비판으로 이어졌고, ‘퍼주기’ 란 말은 무책임한 대북 유화책이나 지원의 대명사가 됐다.   둘째, 식량이나 대북물자 전용(轉用·빼돌리기)을 막을 대책 마련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보낸 쌀은 상당 물량이 군부대로 흘러갔고, 6000만 개(40㎏ 포장)에 이르는 쌀 포장용 마대는 전방 진지 구축용으로 쓰였다. 같은 시기 북송한 4만8000여 톤의 감귤은 노동당 간부와 평양 특권층의 선물용으로 쓰였다. 어려운 북한 주민에게 비타민 공급원이 될 것이란 바람은 퇴색했다. 국가정보원과 국방부 등 부처는 이런 정황을 파악하고도 정부 눈치를 보며 쉬쉬하다 2008년 보수 성향 정권으로 바뀐 뒤에야 앞다퉈 관련 사실을 언론에 브리핑했다.   셋째, 북한 당국이 우리 국민의 대북지원에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주민이 이를 공감토록 하는 일도 중요하다. 향후 남북관계에 대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핵심층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란 점에서다. 아울러 지난해 8·15 상봉행사 이후 중단된 이산가족 해결을 위한 노력도 재개돼야 한다. 북한이 장기 억류 중인 김정욱 선교사를 비롯한 우리 국민 6명의 송환과 국군포로·납북자의 귀환도 북측에 촉구해야 한다. 이는 인도주의의 유무상통(有無相通)이다. 또 대북지원이 국민 성원 속에 지속될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퍼주기’ 논란에 다시 한번 갇혔다가는 정부의 대북접근 구상도 공염불이 될 수 있다. 대북지원은 선이고, 반대는 악이란 구도는 당장 먹힐지 모르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 대북지원 신중론에도 정부가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남녘 동포의 온정이 북한 주민의 밥상에 따끈하게 전해지도록 할 지혜를 모으는데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5.17 00:03

  • 김정은 러시아서 또 빈손 귀환…北 '최고존엄 모시기' 비상

    김정은 러시아서 또 빈손 귀환…北 '최고존엄 모시기' 비상

     ━  블라디보스토크서 ‘빈손 귀환’한 김정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에 위치한 극동연방대학에서 정상회담을 마치고 만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 들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외교 반경이 다소 넓혀지는 분위기다. 새해 벽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북·중 정상회담을 치른 것을 시작으로 북·미, 북·러 정상회담을 잇달아 개최하면서 대외 생존전략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는 못한 국면이다. ‘비핵화’ 의지 표명만으로 환대받던 지난해와 달리 이젠 구체적 행동 조치를 미국과 국제사회가 요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고위급 담판이라 할 정상외교가 뚜렷한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김정은의 대외 리더십은 시험대에 올랐다.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도외시한 회담 전략과 헙수룩한 의전은 블라디보스토크 회담장에서도 드러났다. 자칫 집권 8년 차를 맞는 동안 공들여온 최고지도자 위상 다지기에 상처를 입는 상황까지 점쳐진다.    북한 체제에서 김정은이 차지하는 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당의 유일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다. 조선노동당 고위 간부부터 일반 주민까지 ‘10대 원칙’이라 부르며 신봉해야 하는 11쪽짜리 문건을 말한다. 여기에는 북한이 소위 ‘두 분의 수령’이라 칭하는 김일성 국가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받들어야 하는지가 소상하게 담겨있다. 김정은 집권 이듬해인 2013년 수정 보완된 행동규율이자 지침서인 셈이다. 문건에는 김일성·김정일의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김정은’은 없다. 하지만 죽은 두 사람보다 살아있는 권력인 김정은 위원장을 절대시하려는 ‘10대 원칙’이란 걸 모르는 북한 주민은 없다.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제3항의 “김일성·김정일의 권위, 당의 권위를 절대화하며 결사옹위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김일성·김정일과 노동당의) 권위를 훼손시키려는 자그마한 요소도 절대로 융화묵과하지 말고 비상사건화하여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이며, 온갖 계급적 원쑤(‘원수’의 북한식 표현)들의 공격과 비난으로부터 수령님과 장군님의 권위, 당의 권위를 백방으로 옹호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2013년 12월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도 결국 뿌리를 캐보면 10대 원칙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보위부 특별재판이란 형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김정은이 참석한 행사에서 ‘건성건성 박수를 쳤다’는 등의 괘씸죄로 사형판결을 내리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짚어보면, 지난달 말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 일정은 곳곳에서 10대 원칙으로부터의 탈선을 드러냈다. 이례적으로 북한 출발 이전부터 북·러 정상회담의 개최 소식을 관영매체로 주민들에게 알리고 평양역에서 성대한 환송행사도 했지만 러시아 도착부터 난항이었다. 전용열차가 처음 다다른 핫산역 간이 경사로는 목재를 엉성하게 짜놓은 형태로, 제대로 페인트칠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선 미리 대기하던 북측 경호인력들이 열차 손잡이를 소독하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정차 지점이 어긋나 애를 먹었다. 꼼꼼한 준비가 부족했고 북·러 간 의전 협력도 엉성했다는 얘기다. 환영행사는 역 앞을 지나는 왕복 4차선 도로 위에서 단출하게 진행돼 ‘길바닥 의전’이란 말이 나왔다. 아스팔트를 부분적으로 다시 깔거나 차선도색을 새로 하는 등의 최소한의 ‘국가 원수’ 맞이 준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의전 악몽은 정상회담 당일인 4월 25일에도 이어졌다. 회담장인 극동연방대학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김정은 위원장의 인민복 상의 옷자락은 허리춤에 끼인 채 구겨져 있었지만 누구도 챙기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란 점에서 국제사회와 언론의 이목이 쏠려있는 결정적 장면에서 스타일을 구긴 것이다. 푸틴에게 선물로 장식용 칼을 건넨 뒤 러시아 풍습에 따라 답례로 받은 동전을 김 위원장이 제대로 챙기지 못해 떨어트릴 뻔한 상황이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푸틴과의 단독회담에선 양 엄지손가락을 서로 비비며 초초해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해 시진핑 주석과 첫 대면 때를 떠올리게 했다. 김정은이 감추고 싶어했을 건강상의 문제점이 노출되는 일도 벌어졌다. 열차에서 내려 몇 걸음 이동한 김 위원장에게 국영TV ‘로시아’가 들이댄 카메라에는 가쁘게 몰아쉬는 김정은의 거친 숨소리가 그대로 담겨버렸다.   문제는 의전에만 그치지 않았다. 열차로 1180㎞(평양~블라디보스토크)를 달려온 김정은을 맞는 푸틴의 딱딱한 표정은 북한이 강조한 북·러 간 전통 우호관계와는 거리가 느껴졌다. 북측이 확대회담에 이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제1부상만을 배석시켜 북핵과 한반도 정세 등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러시아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외에 유리 트루트네프 대통령 극동전권대표(부총리 겸임), 예브게니 디트리흐 교통장관, 알렉산드르 코즐로프 극동개발장관, 올렉 코줴마코 연해주지사가 자리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의 대북압박을 거론해 자신이 지난 2월 하노이에서 겪은 수모와 관련한 하소연을 했지만 푸틴의 관심은 달랐다. 북한을 관통해 한국으로 가는 러시아가스관이나 남·북·러 철도협력에 방점을 둔 푸틴은 급기야 기자회견에서 “비핵화와 관련해서는 미국과 입장이 같다”는 말까지 던졌다. 김정은에겐 청천벽력이다.   이런 분위기를 예견한 듯 북한 외무성 라인의 얼굴빛은 어두웠다. 회담 전 푸틴 대통령과 줄지어 인사를 나눈 북한의 고위 간부 가운데 이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제1부상 두 사람만은 고개 한 번 까딱 않고 꼿꼿한 자세로 악수하는 모습이 드러났다. 김정은-푸틴 간 정상회담과 관련한 의제나 경호·의전 조율과정에서 적지 않은 불협화음이 나타났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북한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러시아 측에 10만톤의 밀가루 대북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푸틴 대통령은 절반인 5만톤만 보냈다는 게 북한 매체의 보도다.   일각에선 북·러 정상회담 과정에서 나타난 의전 실책 등의 문제가 ‘김여정의 공백’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여동생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으로부터 세심한 보살핌을 받던 김 위원장이 상당한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란 얘기다. 그렇지만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의 결렬 책임을 지고 김영철 당 부위원장과 함께 문책성 조치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만큼 조기복귀 여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위 탈북인사는 “김정은의 대외적 권위를 충성으로 받들어 모시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강한 압박과 사상검토가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며 “김여정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러 정상회담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두고 ‘예견된 참사’란 평가도 나온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출구로 김정은이 푸틴을 만났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란 지적이다. 러시아는 북한 못지않게 내년 수교 30주년을 맞는 한·러 관계를 중시한다. 2014년 3월 크림반도 침공사태 이후 미국과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어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 무엇보다 미 대선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에서 알 수 있듯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사이의 모종의 커넥션도 북한이 간과해선 안 될 대목이다.   서동주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박사는 ‘북·러 정상회담 평가와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김정은 방러가 8년 만에 이뤄진 북·러 관계의 현주소를 반영한다면, 한·러 정상 간 교류는 보다 잦고 돈독한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2017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동방경제포럼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만난 것을 비롯해 4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곧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답방하는 일정이 양국 간 논의 중이란 설명이다.   방러 일정을 마치고 사실상 빈손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김정은은 절치부심했을 공산이 크다. 지난 2월 하노이 회담 결렬 뒤 60여 시간 열차 귀환 길에서 겪었던 트라우마의 재판이다. 이런 좌절을 통해 그가 어떤 마음의 행로를 정하게 될지는 점치기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핵무기를 거머쥔 채로 그가 북한체제의 ‘최고존엄’으로 오랫동안 자리하기엔 도전적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5.03 00:04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부패와의 전쟁 선포”…칼 빼든 김정은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부패와의 전쟁 선포”…칼 빼든 김정은

     ━  대북제재 속 비리 척결 고삐 당기는 이유는   북한이 지난 2월 발행한 신년사 기념 우표의 모습. 북한은 지난해 말부터 대대적인 부정부패 단속에 나섰으며 김정은도 지난 12일 시정연설에서 비리척결을 강조하는 등 반부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말 대사전』(2017, 사회과학출판사)은 ‘부패’란 단어를 ‘정치사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변질하여 못쓰게 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 뒤에 따라 나오는 예문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 통치배’라고 사례를 들거나 ‘라는 말 속에는 왕궁은 부패하고 백성들은 슬프다는 뜻이 들어있다’는 쓰임새 보여주기에서는 부패 행위가 봉건 시대의 유물이란 뉘앙스가 담겨있다. 이 사전은 ‘비리’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도 ‘역대 봉건통치배들은 온갖 비리와 사기협작으로 부정축재한 모든 불로소득으로 호의호식하여 왔다’며 권위주의 정부나 서방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북한의 요즘 내부 사정은 사전 속 모양새와 달라 보인다. 부정부패나 비리는 딴 세상 얘기라고 하기에는 북한 내부의 상황이 말이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12일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이 문제를 챙기고 나섰다. 집권 8년 차를 맞아 새 권력 진용을 짠 최고인민회의 14기 첫 회의 시정연설에서 그는 부정부패의 폐해를 직설적으로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인민의 이익을 침해하는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를 반대하는 투쟁을 국가 존망과 관련되는 운명적인 문제로 내세우고 그와의 단호한 전쟁을 선포했고, 강도 높은 투쟁을 벌이도록 했다”고 강조했다. 경제와 대외문제, 남북관계 등과 관련한 향후 구상을 밝히는 자리에서 치부라 할 수 있는 간부들의 비리와 부패 이슈를 꺼내 ‘전쟁 선포’란 표현까지 동원하며 직격탄을 날린 건 이례적이다. 대북 정보를 다루는 관계자와 소식통들이 전하는 다음 경우를 살펴보면 김정은의 고민이 짐작된다.   사례 #1. 북한 최고의 공안기구인 국가보위성 국장급 인사가 지난달 부하 간부 2명과 함께 중국 랴오닝성 지역으로 탈북해 잠적했다. 소장(별 하나의 장성급으로 우리 군의 준장에 해당) 계급인 이 보위성 국장은 평양에서 거액의 달러를 챙겨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국 지역에서 활동하던 부하들이 비밀계좌로 비자금을 만들어 온 게 보위성 검열에 적발된 것과 연관된 탈북이란 관측도 있다. 대북 소식통은 “보위성 간부 일행의 행방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북한은 보위성과 호위국 요원 등으로 짜인 체포조를 동원해 추적 중”이라고 귀띔했다.   #2. 지난해 말 김정은과 그 일가의 경호를 책임진 호위국 산하 연못무역회사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횡령 및 축재 사건이 드러났다. 해외 판매자금을 조작하고 외국 업체로부터의 리베이트, 간부 승진·보직은 물론 자녀들의 해외 일자리를 봐주면서 챙긴 뇌물 등 규모가 2000만 달러(우리 돈 227억여 원)에 달했다고 한다. 검열 결과를 보고받은 김 위원장이 “어떻게 됐길래 한 단위에서 이렇게 많은 달러를 빼돌릴 수 있었느냐”고 의아해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김정은 김정은을 격노하게 한 북한 핵심층의 부정부패 문제는 상황이 꽤 심각해 보인다는 게 한 고위 탈북 인사의 전언이다. 평양 권력의 중심부에선 ‘연못에서 퍼지기 시작한 파문이 심상치 않다. 어디까지 번질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이 인사는 “연못무역회사에서 발단이 된 중앙기관 부패 현상에 대한 노동당 검열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압박감을 느낀 간부들이 신변 안전을 위해 가족들까지 동반해 도피·탈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노동당과 군부 핵심 간부나 산하 무역기관의 부정부패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내리막길을 걷던 북한 경제가 김일성 사망(1994년)과 이어진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겪으면서 파국에 이르렀고, 파벌이나 기관·기업소 간의 경제 이권을 둘러싼 다툼이 치열해졌다. 시멘트나 철근·중장비 같은 물품뿐 아니라 군부대의 전투 장비나 식량까지 빼돌려졌다. 공장가동률이 25% 수준을 밑도는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원자재를 훔치거나 헐값에 넘기고, 아예 공장설비를 내다 파는 경우까지 생겼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직장을 결근하거나 중국 쪽으로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지배인이나 경비병에게 돈이나 물품을 주는 건 일상이 됐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탈북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데 따르면 ‘북한에서 살 때 수입의 20% 정도를 뇌물로 바쳐야 했다’고 답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이 정도면 뇌물이 북한 경제의 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지난해 7월 발표한 국제부패지수에서 북한이 조사대상 180개 국가 가운데 171위를 한 것도 이런 현실의 반영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시절 북한은 비리나 부패 문제를 공론화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정은의 경우 군부나 노동당이 외화벌이 사업을 통해 자체적으로 생존하고, 그 과정에서 이권을 챙기는 걸 용인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혁명 2~3세대로 불린 빨치산·고위층 자제들이 장악하고 있는 돈줄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모양새를 취했다는 것이다. 무기판매 대금 등을 챙겨 탈북한 사건이 발생해도 쉬쉬하고 넘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는 “서방 근무 중 가족과 함께 탈북·망명한 간부가 가져온 거액의 달러를 북한 당국이 남북회담 비공개 접촉 과정에서 ‘돌려줬으면 좋겠다’고 요구해온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 시대 들어 대응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 중대한 비리나 부정부패 사건이 생기면 이를 철저히 파헤치고 관련된 기관이나 개인으로 수사 범위를 넓혀 나간다. 이 과정에서 사건의 내용이 핵심 간부 사이에 공유되고 학습제강(비공개 사상교양 자료) 등을 통해 일반 주민들에게까지 알려진다. 2013년 12월 처형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정은은 고모부에게 ‘국가전복음모’ 죄를 씌웠고 군사재판 판결 당일 사형에 처했다. 북한은 관영매체를 통해 장성택이 수천억 원의 북한 돈을 남발했고, 460만 유로 (현재 환율로 우리 돈 59억여 원)를 해외 도박장 등에서 탕진했다고 구체적 비리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북한 매체들은 최근 들어서도 부정부패 척결 목소리를 꾸준히 높여왔다. 연못무역회사 비리가 내부적으로 불거진 지난해 12월 10일자 노동신문은 “우리 당은 세도와 관료주의를 일심단결을 좀먹는 위험한 독소로, 적들을 도와주는 이적행위로 보고 그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강조했다.   단속과 처벌이 강화되면서 ‘걸리면 끝장’이란 위기의식이 고위 간부 사이에 번진다고 한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적행위로까지 간주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어 긴장감은 더할 수밖에 없다. 비리 혐의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집에 숨겨둔 거액의 달러가 발각될 경우엔 탈북하거나 해외로 망명하려 한 것으로 간주되는 등 처벌 수위도 높아졌다. 북한을 움직이는 ‘권력 중의 권력’으로 꼽히는 노동당 조직지도부도 예외가 아닐 정도다. 2017년 초 최용해가 책임자로 있던 조직지도부는 김원홍 보위상의 부패·월권 행위를 조사해 낙마시켰다.   부정부패를 손보겠다며 김정은이 빼 든 칼날이 제대로 먹혀들지는 불투명하다. 만성적인 경제난 속에  노동당과 군부·내각은 물론 장마당에서 부를 축적한 신층자본가 ‘돈주’까지 엉킨 먹이사슬이 하루아침에 끊어지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다. 더욱이 미국과 국제사회가 주도하는 대북제재의 압박수위는 북한 경제의 턱밑까지 차올랐다. 외화벌이 루트가 끊기고 원자재 수입 등이 차단된 북한의 기관·기업소와 간부들에게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비리 단속의 고삐만 당겨질 경우 볼멘소리가 나올 수 있다. 제재 장기화에 따라 챙길 돈이 줄고 살림살이가 빠듯해진 권력층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김정은이 사정 국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4.19 00:05

  • '최악의 위기 임박' 관측 나오는 평양은 지금

    '최악의 위기 임박' 관측 나오는 평양은 지금

     ━  고난의 삼각파도 맞설 김정은의 선택은    4월 평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업한 수령 김일성(1994년 사망)의 생일인 4.15 행사 분위기로 달아올라야 할 북한 내부엔 긴장감이 드러난다는 게 대북 정보 관계자의 전언이다. 무엇보다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김정은(35)의 핵·미사일 도발이 부른 대북제재는 북한 경제의 숨통을 옥죈다. 식량 부족으로 춘궁기를 걱정하는 절박한 목소리가 해외 주재 북한 대사관까지 번졌다. 여기에 김정은 체제의 붕괴를 표방하는 조직 ‘자유조선’이란 파도까지 덮쳤다. 이들은 망명정부 설립을 거론하며 “자유의 명령을 거부할수록 김정은 정권은 수치를 경험할 것”(2일 홈페이지에 게재한 입장문)이라며 기세등등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스텝이 꼬인 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뜻밖의 일격을 당하면서다. 비핵화와 대북제재 해제를 화두로 벌인 담판은 북한의 예상과 달리 녹록지 않았다. 빈손으로 귀환하는 60여 시간 동안 김정은이 전용열차 안에서 절치부심했을 것이란 건 불문가지다.   지난달 말 평양역전백화점에서 열린 봄철전국신발전시회를 찾은 주민들이 제품을 둘러보고 있다. 제재의 여파로 식량부족 사태 등에 직면한 북한 경제는 올 봄 최악의 위기를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연합뉴스] 사실 올 대외전략 이행의 첫 단추는 나쁘지 않았다. 2019년 신년사 첫머리에 김 위원장은 “희망의 꿈을 안고 새해를 맞이한다”고 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역사적인 첫 조·미 수뇌 상봉과 회담은 가장 적대적이던 조·미 관계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했다.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 수립’ 용의까지 밝혔다. 그는 곧장 베이징으로 달려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1월 8일)했고, 향후 대미 관계 전략 등에 대한 훈수를 들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후견국을 자처한 시진핑의 중국도 능수능란한 협상가 트럼프의 변칙 플레이를 예견하지 못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사실을 주민에게 제대로 공표 못 할 정도로 김정은과 노동당 전략가들의 충격은 컸다. 북한 권력 사정에 정통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 내부에서 ‘트럼프와의 담판에 나선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을 제대로 보위 못 해 큰 망신을 당하도록 방조했다’는 논리로 김영철 당 통일전선부장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 등 대미라인에 대한 비판이 엄중하게 진행되고 있을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하노이행에는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인 조용원이 동행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옅은 웃음을 띠며 김 위원장을 보좌하는 조용원은 북한 권력을 움직이는 최고 실세 부서인 조직지도부의 ‘하노이 상무조’(TF·테스크포스)를 가동했다. 대미협상의 전 과정은 귀환 후 최용해 조직지도부장에게 고스란히 보고됐을 것이란 게 대북 전문가들의 견해다.   김영철과 최선희 등 대미 협상라인은 ‘김정은 동지의 대외적 권위를 충성으로 받들어 모시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내가 ‘당신은 협상할 준비가 안 됐다’며 자리를 떴다”고 후일담을 자랑삼아 흘리는 건 북한에 뼈아프다. 이런 점을 들어 최용해가 조직부 검열을 김영철 견제의 수단으로 삼을 공산이 크다. 최근 북한 대남 인사와 접촉한 관계자는 “북측에 ‘김영철이 위험해질 것이란 얘기가 있더라’라며 분위기를 떠봤는데, ‘그렇고 그런 내용이 좀 있습니다’란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물론 북·미 추가 협상이 이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당장 김영철·최선희 등에 대한 혁명화나 숙청 등의 조치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식통은 "최선희의 1.5트랙 국제회의 일정이 취소되고 김영철의 공개활동이 뜸했던 건 이들에 대한 강한 압박과 사상 검토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 첫해인 2012년 봄 "다시는 인민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며 해결을 약속한 민생 문제에는 대북제재란 경고등이 반짝인다.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직후 이용호 외무상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11개 대북제재 모두를 풀어달라는 게 아니라 민생과 인도주의 관련 5개 항목만 해제해달라는 것”이라며 볼멘소리를 냈지만 허사였다. 그간 ‘인도주의’ 간판을 악용해 제재에 구멍을 내온 북한에 대한 비판만 거세졌다. 고위 탈북 인사는 "김정은의 통치 자금 50억 달러가 바닥을 드러냈다는 얘기를 평양 쪽 인사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달러와 에너지(유류)·식량이 부족한 3난(難)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는 얘기다.   결국 김정은은 지난달 초 선전일꾼 대회 서한에서 "경제발전과 인민 생활향상보다 더 절박한 혁명 임무는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57년 전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4차 노동당 대회에서 언급한 ‘이팝에 고깃국, 기와집과 비단옷’ 얘기를 꺼냈다. 차마 자신이 7년 전 약속하고 지키지 못한 ‘허리띠’ 문제는 거론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식량부족 문제는 북한 내부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인도네시아 주재 북한 대사인 안광일(아세안 대사 겸임)이 동남아 지역 북한 공관 등에 전파한 문건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식량 수확은 495만1000톤이다. 이는 2017년에 비해 50만3000톤 줄어든 것이다. 안 대사는 그 원인으로 고온과 가뭄·홍수, 대북제재를 꼽았다. 또 "시급히 다른 나라들로부터 식량 수입조치를 취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지만 올해 부족량이 148만6000톤에 이른다”고 말했다. 안광일은 "현 식량 상황의 위험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시기성 보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하며 "4월 중에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북·미 협상 난항과 경제 문제의 난맥상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움직임까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김정은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 됐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닷새 앞둔 2월 22일 발생한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관 습격사건의 배후로 알려진 단체 ‘자유조선’이 반(反)김정은 기치를 내걸고 본격 활동을 예고한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 찜찜한 건 이들이 미 수사·정보 당국과 연계된 정황이 드러난 점이다. 특히 2017년 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북한 당국에 의해 독극물(VX)로 살해당한 김정남의 아들 한솔(24)의 신변을 보호해온 ‘천리마민방위’가 이름을 바꾼 조직이란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자유조선 측은 김정은 정권에 대해 정치범 수용소 해체와 탈북민 북송 중단, 개혁개방 등의 요구사항을 내놓으면서 "큰일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힌 상태다.   눈엣가시 같던 이복형 김정남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혈육인 한솔이 반체제 단체의 아이콘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건 김정은에게 찜찜한 대목이다. 더욱이 한솔은 파리정치대학 등을 거치며 좋은 교육을 받았고, 마카오 등지에 거주해온 터라 중국 인사들과 교분도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손인 김정남의 아들 한솔을 두고선 김정은이 발편잠을 잘 수 없는 건 자명한 이치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금 백두산 인근 삼지연 지역에 체류 중이다. 어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그가 삼지연 지역 주택건설 현장 등을 방문했다고 전했다. 예전 백두산 방문 때와 달리 최측근 조용원 당 부부장만 대동한 단출한 ‘현지지도’다. 대외 생존전략과 내부 경제가 엉망이 된 내우외환에다 반체제 세력까지 급부상하면서 김정은 체제는 그야말로 삼각 파도를 맞이하는 형국이 됐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대북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백두산 구상’이 어떤 향배를 보여줄지는 오는 11일 열릴 북한 최고인민회의 14기 첫 회의와 그 직전 개최할 노동당 정치국 회의 또는 전원회의를 통해 베일을 벗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4.05 00:04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코드 인사 논란 따라 휘청이는 대북 싱크탱크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코드 인사 논란 따라 휘청이는 대북 싱크탱크

     ━  국책 연구기관 통일연구원에선 그간 무슨 일이    지난 8일 청와대는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을 통일부 장관에 내정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4월 취임한 후 330일 만에 이뤄진 장관 임명 소식에 연구원 박사들 사이에선 수근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전임 원장인 손기웅 박사가 10개월 만에 퇴임한 데 이어 연거푸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수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수장이 자주 바뀌니 조직의 안정은 물론 연구활동의 연속성이나 방향성도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는 목소리였다.   통일연구원에선 그간 무슨 상황이 벌어졌을까. 찬찬히 몇년간의 흐름을 되짚어 보면 정권의 변천에 따라 국책 연구기관들의 책임자를 교체하고, 권력의 코드에 맞는 인사를 낙하산식으로 앉히는 모양새가 반복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와 문재인 정부 출범 시기에 이뤄진 통일연구원장 인사 논란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일 수있다. 총리실이 노골적 개입을 한 것은 물론이고,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배경에 자리한 정황도 감지된다는 게 관련자들의 주장이다.   통일연구원은 1991년 민족통일연구원으로 출범해 통일·북한 중추 국책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 했고, 서울 남산·수유동 시절을 거쳐 2015년 서초동 시대를 열었다. [중앙포토] 발단은 2017년 3월 취임한 손기웅 통일연구원장을 그해 5월 출범한 현 정부가 뒤흔들면서였다. 손 원장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보름여 만에 이뤄진 임용 절차에 따라 발탁됐다. 전임 최진욱 원장이 2014년 3월부터 3년간의 임기를 채우고 퇴임한 데 따른 조치였다. 손기웅 원장은 통일연구원 내부의 동료 박사 2명과 함께 3배수 후보에 올랐고 최종 낙점됐다. 황교안 권한 대행 체제에서 선발 절차와 임용이 이뤄진 데다 어쨌든 연구원 출신 인사들 간의 경쟁에 따른 인사였다. 이전 정권을 ‘적폐’로 치부하는 현 정부의 인식과도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 정부 출범 두 달 후인 2017년 7월부터 국무총리실과 정부 부처가 산하 연구기관장에 대한 인사자료를 뒤적이며 교체를 조율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9월 박근혜 정부 고용노동부 장관 출신인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장이 사임했고, 11월엔 교육부 차관을 지낸 김재춘 한국교육개발원장이 도중 하차했다. 같은 달에 26개 국책연구기관의 인사와 운영을 총괄하는 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사연) 김준영 이사장은 임기를 2년 넘게 남겨놓고도 사퇴했다.   퇴임 압박이 가해진 건 통일연구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손기웅 전 원장은 “원장 취임식을 한 당일 민주당 정책위 회의에서 ‘손기웅 선임에 대한 부적절 보고서’가 회람됐다는 얘기를 듣고 해당 문건을 확인한 뒤엔 눈앞이 캄캄했다”며 “정부 출범 이후엔 사퇴를 요구하는 강도가 더 세졌다”고 말했다.   그간 합리적이고 무난하게 경사연을 이끌어 왔던 김준영 이사장의 퇴임과 때를 같이해 총리실은 경사연 산하 기관장들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같은 해 12월 한국개발연구원(KDI) 김준경 원장이 사임한 것을 시작으로 현정택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 김상호 보건사회연구원장이 자리를 내놓았다. 버티던 손기웅 원장도 이듬해 1월 11일 퇴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책 연구기관장의 사퇴압박이 사전 계획에 따라 전방위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퇴임 이튿날 손 전 원장과 경사연 K 사무총장 사이에 이뤄진 전화통화에서도 확인된다.   ▶손 전 원장=“12월 말에 3대 기관장 나갈 때 제 이름이 청와대에서 나왔다고 사무총장님한테 얘기 들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더라.”   ▶K 사무총장=“다른 분들 것은 11월 초에 나왔고, 원장님 건은 12월에 나와서 한 달의 차이가 있다. 정부 측 잘못이 있죠. 미리 노티스(notice) 줬으면 12월 말에 자연스럽게 정리하면 되는데. 그 사람들이 그걸 참 그렇게 해가지고….”   ▶손기웅=“그런데 BH라는 게 청와대입니까, 국가안보실인가요.”   ▶K=“저희는 인사수석실에서만 통보받아요.”   ▶손기웅=“(잘못 알아듣고) 민정수석실에서?”   ▶K=“아니오. 인사, 인사수석. 다른 루트는 저희는 모릅니다.”   ▶손=“그때 그럼 제 이름이 분명히 12월에 나왔습니까.”   ▶K=“네. 그 이전에는 일괄로 한 번 왔었는데, 그땐 (손 전 원장 이름이) 없었거든요.”   손기웅 통일연구원장 사퇴 논란 손기웅 박사가 원장직을 사퇴하던 시점에 경사연 이사장은 공석(후임 성경륭 이사장은 2018년 2월 취임)이었다. 사무총장인 총리실 고위간부 출신 K씨가 사실상 이사장을 대신해 경사연의 해당 업무를 지휘했다. K 사무총장의 발언에 따르면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국책 연구기관장을 사퇴시키려 리스트를 작성해 시기별로 나눠 실행에 옮겼다는 얘기가 된다. 통일연구원장의 경우, 경사연 산하 3대 기관장 인사를 마무리한 직후 사퇴시키려 했지만, 손 전 원장이 버티면서 해를 넘기게 됐다는 게 K 사무총장의 언급 취지다.   퇴임을 거부하던 손 전 원장이 성희롱 논란에 휩싸인 과정도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 전 원장은 2017년 12월 말 전체 직원들과의 송년회를 연구원 인근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소재 한식당에서 열었다. 회식을 마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남녀 직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햇 동안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는 게 손 전 원장의 주장이다.     그는 “직원 격려 과정에서 신체 접촉이 있었던 점은 명백한 잘못이라 생각하지만 총리실에서 감찰까지 벌이고 원장 퇴임 압박 카드로까지 내세운 건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원 담당관은 원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총리실에 관련 내용을 고발조치 했다는 전언도 나온다. 더우기 손 전 원장은 “퇴임 이후에도 모든 문제를 공론화하기 어려운 압박이 있었다”며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압박인지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재임 중 성희롱 사건에 대한 경위서’ 제출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왔다”고 밝혔다.   손 원장에 대한 사퇴 압박이 절정을 치닫던 시점에 연구원 안팎에서는 “문재인 대선 캠프 출신인 김연철 박사가 후임 원장으로 올 것”이란 소문이 퍼졌다. 원내에서 두 명의 중견 박사가 3배수에 올랐지만 결국 김연철 원장으로 결론 났다.     김 원장 임명을 놓고 “석사급 연구원으로 통일연구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북한 전문가”라는 지적과 “코드에 맞지 않는 전임자를 밀어내고 대선 캠프 출신의 김연철을 앉힌 것”이란 비판이 엇갈렸다. 연구원들 사이에선 이번엔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고 소신있게 올곧은 연구 결과를 고수할 인사가 발탁돼 조직 안정과 연구활동의 정상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기대감이 형성되고 있다. 물론 그런 희망 역시 결국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공감대도 그들의 기대를 잠식하고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3.22 00:04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사그라진 ‘통일’ 목소리…“통일한국 어떤 국가될지 고민해야”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사그라진 ‘통일’ 목소리…“통일한국 어떤 국가될지 고민해야”

     ━  글로벌 피스 컨벤션 2019   지난달 27일 통일 한반도 비전을 주제로 ‘글로벌 피스 컨벤션(GPC)’이 열렸다. [중앙포토] ‘통일’이란 단어가 사라지고 있다. 남북한 통일보다는 교류와 협력, 공존이 강조되고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 쪽으로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청와대와 정부 안팎에선 ‘통일’ 명칭이 붙은 직제와 자리에서 아예 통일이란 표현을 빼버리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지나치게 통일을 앞세우는 건 전략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자칫 우리 사회에서 통일이 실종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지난주 서울에선 인권·종교·경제·여성 등 30여개가 넘는 세션으로 짜인 ‘통일 한반도 비전’ 국제포럼이 열렸다. 현장을 찾아 잃어버린 ‘통일’을 소환하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다.    발제자로 참석한 케네스 배 느헤미아 글로벌 이니셔티브 대표. [중앙포토] “미국 핵무기는 안 무섭다고 하더라. 종교가 들어와 사상을 흔들고 신앙을 통해 주체사상을 무너뜨리면 망한다고 하더라. 형법 60조 위반인데 사형 내지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라고 했다.” 케네스 배(한국명 배준호) 느헤미아 글로벌 이니셔티브 대표는 북한 억류 당시 공안당국 관계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2012년 11월 체포돼 735일간 수감생활을 한 배씨에게 씌워진 혐의는 ‘국가전복 음모죄’ 였다. ‘뭘 했기에 내게 국가전복죄를 묻느냐’는 배씨의 항변에 북측은 “기도와 예배로 전복시키려 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신 같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사상을 무너뜨리면 나라를 지탱할 수 없어 본보기 삼아 벌을 내리는 것”이란 말도 들었다는 것이다.   배씨는 지난달 27일 서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피스 컨벤션(GPC) 2019’에 발제자로 참석해 이같이 밝힌 뒤 “저는 그나마 미국 시민권자이고 언론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아플 때 병원에 보내줬지만, 북한 현실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통일의 주체가 북한 당국이 아닌 주민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이 함께 노력할 때 한반도에 인권이 보장되는 통일국가가 세워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행사에 참석한 전문가·활동가 등은 남북 화해와 협력 분위기 속에서도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과 인권·종교 문제 등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해서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그렉 스칼라튜 미국 북한인권위 사무총장은 주제발표에서 “1950년대 통계에 따르면 북한 주민 22%가 종교활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2017년 보고서엔 3만8000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며 “22%에서 0.2%로 급감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여상 북한인권정보센터 소장은 국내에 정착한 1만3000여명의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를 공개한 뒤 “놀라운 건 비밀스러운 종교활동에 참여해본 사람이 1%가 넘고 최근엔 2%에 달한다”고 말했다. 매우 낮은 비중이지만 종교의 자유가 없는 국가에서 2%는 매우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란 설명이다. 강신삼 통일아카데미 대표는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교황과 외국 대통령 등 국제적인 지도자들이 소련의 무장력보다 종교와 인권이 가진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는 “북한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위해 활동하는 분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북한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남북관계가 나아가야 할 길은 결국 민주적이고 평화적 통일이어야 한다는 공감대도 형성됐다. 신진(충남대 교수) 국가전략연구소장은 “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은 3·1운동을 통해 전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 국가의 독립은 물론 인류 전체가 평등하게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주창했다”며 “한반도 통일은 부국과 빈곤국가의 통합, 인권 탄압과 자유로운 나라와의 통합을 보여주는 사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제발표 중인 존 에버라드 전 주북 영국 대사. [중앙포토] 한국 사회에서 통일에 대한 무관심이 높아지는 데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안드레이 란코프(국민대 교수) 코리아 리스크 그룹 대표는 “통일은 과정이나 수단이 아닌 목표가 되어야 한다”면서 “당장 통일이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미래의 통일이 가능하도록 집중력을 발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존 에버라드 전 북한 주재 영국대사는 “북한의 엘리트와 주민들은 분단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면서 “더 이상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 통일 또는 북한의 붕괴, 중국의 지배라는 세 가지 선택만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기대와 결렬로 롤러코스터를 타던 시점이라 북핵 문제도 화두가 됐다. 통 킴 전 미 국무부 한국어 수석통역관은 “핵이 있어야 정권이 유지되고 생존할 수 있다고 여기는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핵 없이도 체제를 이어나갈 수 있다면 포기하겠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경영 한양대 겸임교수는 “북핵 포기를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며 반론을 폈다. 정 교수는 “2017년 화성-15호를 발사한 후 국제사회로부터의 압력은 상상을 초월했다”며 “체제 보위의 유일 수단이 핵이라 생각했는데 외부의 강한 압박을 받다 보니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그러면서도 “만약 북한이 끝내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북한이 지도상에서 없애야 하는 극단적 상황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남북 간에 대립과 갈등이 해소되고 화해와 협력, 상생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명확해지고 있다”면서 “무엇보다 비전을 가진 통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글로벌피스재단(이사장 문현진)이 주최하는 글로벌피스컨벤션은 국제평화와 인간계발에 헌신한 정치·시민사회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체제 갈등과 분쟁·저개발 등의 해법을 모색하는 행사다. 지난 200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시작됐고, 2012년과 올해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지난달 26일부터 나흘간 ‘통일 한반도의 비전 코리안 드림’이란 주제로 국회의사당과 롯데호텔 등에서 진행됐다. 문 이사장은 기조연설에서 “남북통일과 관련해 한국과 국제사회는 ‘북한을 어떻게 비핵화할 것인가’라는 협소한 질문을 넘어, ‘어떤 통일이 되어야 하는가’라거나 ‘새로운 통일한국은 어떤 국가가 될 것인가’하는 포괄적이고 전략적인 비전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문제의식 없이 비핵화 문제가 북한과 미국 사이에 논의되는 있는 현실은 큰 위험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축사에서 “국민을 통합하고 민족의 미래 운명을 올바르게 개척해 나갈 국가적 비전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며 “그 비전이 바로 분단을 청산하고 평화롭고 번영된 새로운 통일 한반도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3.08 00:03

  •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단백질 연구 국제경연서 1위”…편식 심한 북 이공계의 명암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단백질 연구 국제경연서 1위”…편식 심한 북 이공계의 명암

     ━  김정은 체제 과학기술 수준   노동신문 1면은 북한 체제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창 역할을 한다. 김정은 동정이나 발언을 담은 기사는 머릿기사에 오르고, 북측 표현대로 ‘옹근 한 면(전면 기사)’에 걸쳐 편집되기도 한다. 이런 노동신문에 한 연구자의 국제대회 수상 소식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지난 2일자 1면에 ‘나라의 기초과학 발전 면모를 보여주는 성과’라는 제목으로 등장한 기사다. 북한의 기초과학 분야 인재 양성기관인 이과대학 소속 연구자가 제13차 국제 단백질 구조예측 경쟁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북한이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언급이나 관련 시설 방문 등이 아닌 사안을 1면에 눈에 띄게 싣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이 때문에 북한이 언급한 이 대회의 성격과 북한이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무엇보다 단백질 구조 예측(protein structure prediction)이라는, 일반인들에겐 낯선 첨단 분야에서 북한이 국제사회가 주목할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에서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이과대학 자연과학연구원 한군섭 연구사는 지난해 5월부터 3개월에 걸쳐 여러 부문으로 나뉘어 진행된 ‘제13차 단백질 구조예측 국제대회’(CASP13)의 단백질 구조모형 정확도 추정 종목에서 이 부문 세계 50여개 참가팀을 누르고 1위에 올랐다. 이 신문은 “지난해 12월 초 멕시코에서 진행된 제13차 국제 단백질 구조예측 경쟁 총화회의에서는 이과대학 연구사가 제출한 우리 식의 단백질 구조모형 정확도 예측방법이 가장 우수한 방법으로 평가되었다”고 소개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통일부와 과학계 인사들에 따르면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행사엔 모두 200개 팀이 참가했고, 북한이 나선 ‘구조평가’ 분야에 50개 팀이 경쟁했다. 해당 세션 심사위원 가운데는 석차옥 서울대 화학부 교수가 포함됐다. 한 관계자는 “석 교수가 올 초 과학 관련 강좌 모임에서 북한의 입상에 대해 ‘주목할만한 의미있는 결과’로 평가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1994년부터 2년마다 열려온 단백질 구조예측 국제대회는 아직 실험으로 밝혀지지 않은 단백질의 구조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예측하는 경연장이다. 북한은 이번 대회에 처음 논문을 제출해 수상했는데, 일정상의 이유를 들어 패널 초청에는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단백질의 구조를 해석하는 문제는 질병 등 인체의 비밀을 푸는 열쇠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인체에는 10만개 이상의 단백질 종류가 있고 이는 인체 구성이나 기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고유한 모양을 이탈해 구조가 바뀌면 알츠하이머나 광우병, 파킨슨병 같은 난치성 질병에 걸리게 된다. 이런 사정 때문에 단백질 구조예측은 신약개발과 질병 치료에 있어 꼭 필요한 원천기술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북한의 1위 입상은 국제 과학계에서도 화제가 됐다는 후문이다.   북한은 지난해 4월 노동당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과학교육사업에서 혁명적 전환을 일으킨다’는 전략을 제시하는 등 김정은 집권 이후 과학·기술 중시 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거둔 성과를 김정은의 과학기술 중시 정책의 결과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드러난다. 노동신문도 “단백질 구조예측과 관련한 연구 사업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자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며 확대해나갈 수 있는 좋은 전망이 열리었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기초과학 계열 연구 수준이나 인재 양성 체계가 상당한 정도에 올라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과 몽골 등은 물론 유럽 국가들에서 유학 중인 북한 학생들 가운데 생물학이나 화학, 컴퓨터 공학 등을 전공하는 비중이 많은 점도 눈길을 끈다. 첨단 분야의 과학기술 습득은 물론 기초연구에도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북한 이과대학 생물학부 출신인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는 “김정은 체제들어 과학분야 기초이론과 첨단 기술분야에서는 출신성분이나 토대를 안따지고 능력위주로 발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고 말했다. 핵과 미사일 등 분야에 고급인력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문제도 반영됐다는 애기다.   북한이 일찌감치 체제 유지 차원의 과학인재 양성에 나선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에선 1950년대부터 초보적인 형태의 영재교육이 이뤄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우리와 달리 영재라는 표현보다는 ‘수재’란 용어를 선호하는 북한이 영재교육의 첫발을 뗀 건 1958년 외국어 영재학교인 평양외국어학원이라 할 수 있다. 이어 1960년에는 예체능 분야의 영재학교가 속속 설립됐다. 한국의 경우 1981년 경북 구미고등학교에 영재학생을 위한 특설교실이 만들어지고, 1983년 과학영재교육기관인 경기과학고가 개교했다. 영재교육에 있어서 북한이 출발은 훨씬 빨랐다는 얘기다.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해 평등성과 집단주의식 교육을 중시했을 북한에서 엘리트 교육에 일찌감치 눈떴다는 점은 주목된다.   2017년 7월 홍콩에서 열린 57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다가 한국으로 망명한 이정열 군의 사례는 북한 영재교육의 명암을 드러낸다. 아시아 무대에서 수학천재로 이름을 날렸고,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는 2014년부터 3년 연속 은메달을 땄던 그는 북한 체제에서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탈북 결심을 털어놓자 중학교 수학교사인 그의 부친은 “우리 걱정은 말라”며 200달러를 손에 쥐어 주었다고 한다. 탈북자 가족에게 닥쳐올 참혹한 삶을 알면서도 아들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는 눈물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체제 유지를 위해 학문연구 분야까지 철저한 통제를 가하고 있는 북한이지만 특정 분야의 고급인재 양성과 기술 체득에는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도 드러난다. 인터넷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첨단 정보기술(IT) 전문가를 늘리려 컴퓨터 영재교육에 집중하는 건 대표적인 사례다. 영재교육을 거쳐 김일성대학이나 김책공대 등을 졸업한 북한의 ‘IT 영재’들이 해커로 변신해 한국은 물론 세계 각국의 군사정보와 첩보사항을 수집하며 국제사회의 위협으로 부각됐다. 요즘엔 북한 해커들이 금융망이나 온라인게임 서버에 침투해 외화벌이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북한이 핵 물리학과 미사일 로켓 개발 기술, 생물학과 화학 등의 분야에서 국제수준의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데 대해 평가는 엇갈린다. 국가체제가 필요로 하는 특정 분야에 치중해 영재양성과 엘리트 집중교육, 노동당 차원의 투자를 통해 결과물을 내고 있지만 경제나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 낙후된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핵과 미사일에 이어 컴퓨터 해킹 등은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대북제재의 해제 상황에 보폭을 맞춰 남북 간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와 북한 당국의 과학기술 저변확대 노력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2.22 00:04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노동신문까지 외화벌이에 이용”…선전선동부에 불똥 튀나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노동신문까지 외화벌이에 이용”…선전선동부에 불똥 튀나

     ━  노동신문 인터넷 지면보기 왜 중단됐나   이달 27~28일로 북·미 정상회담 일정이 잡히면서 평양 쪽으로 시선이 쏠리고 있다. 북핵과 대미 협상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꺼낼 카드는 뭘지, 대북제재와 관련한 북한 내부의 속사정 등에 국제여론과 언론의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김정은 체제를 지배하는 노동당의 기관지 노동신문은 북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해왔다. 체제 선전·선동 목적의 관영 매체란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남·대미 관련 공식 입장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런데 요즘 노동신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북한 측 논리나 주장을 한창 쏟아내고 여론 확산에 주력해야 할 시점에 인터넷을 통한 지면 서비스를 중단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노동신문을 인터넷으로 지면과 같은 형태로 볼 수 있는 PDF서비스가 갑자기 사라진 건 지난해 12월 24일부터다. 아무런 예고나 설명이 없이 중단됐다. 사이트 상단 ‘PDF 서비스’ 버튼을 누르면 지면 열람이 가능했는데 하루아침에 없애버린 것이다. 노동신문이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 건 1990년대 말로 파악된다. 당시 인터넷을 통한 체제선전과 대외 선전·선동에 눈뜬 북한이 해외에 서버를 두고 서비스를 시작했다. 북한이 일본과 중국·캐나다 등에 친북단체 명의 등으로 개설한 인터넷 사이트는 162개에 이르는 것으로 우리 관계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대부분 김정은 찬양 선전과 함께 가짜뉴스를 통한 대남비방과 반정부 선동에 주력하고 있다는 게 당국 설명이다. 상당수 친북 성향 홈페이지는 관련 법령에 의해 차단돼 있다.   하지만 통일부·국가정보원 등 정부 대북 부처는 물론 전문가·연구기관의 경우에도 우회 프로그램을 가동해 이들 사이트의 북한 관련 원문자료나 사진·영상을 정책수립이나 연구 목적에 활용해 왔다. 우리 공안당국은 학술연구나 취재·보도 목적의 북한 원문자료나 영상 활용의 경우 비교적 폭넓게 허용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북한도 이런 점을 의식해 노동신문 사이트 등에 속보 형태로 발표문이나 주요 기사를 올리거나 사진을 제공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기관 박사는 “당일 오전에 노동신문 지면을 볼 수 있고, 기사 전문을 접할 수 있어 연구에 보탬이 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북한이 왜 노동신문 지면보기 서비스를 중단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평양의 노동신문 본사나 이를 관장하는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공식 입장 표명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신문의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본 코리아미디어 측과 접촉한 이찬우씨는 자신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노동신문이 홈페이지를 무료로 지면을 보여주었지만 유료로 정책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또 “국제사회가 (북한을) 제재하는 국면에서 자력갱생 시대에 무료로 신문 지면을 보는 상황을 정비했다”고 덧붙였다. 행간을 짚어보면 대북제재로 어려워진 사정과 맞물려 노동신문 지면보기 서비스의 유료화가 결정됐다는 점이 드러난다.   북한이 노동신문 전재계약을 내세워 우리 언론사들로부터 더 많은 달러를 챙기려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뉴스서비스 통신사인 연합뉴스는 2015년 3월 재일 조총련계 중개인과 노동신문 판권 계약을 맺었다. 일정 액수의 돈을 지불하는 대신 ‘한국 내 독점 배포권’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말 국내 일부 언론사가 노동신문 판권을 따내려 중개인 측과 접촉에 나서면서 경쟁이 붙었다. 이들 언론이 연합 측이 현재 지불하는 액수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제시했고, 이를 즈음해 북한과 중개인 측이 인터넷 지면서비스를 중단하는 등 깐깐하게 나오기 시작했다는 게 연합 측 주장이다. 정부 당국자는 “현재로서는 연합 측이 노동신문 독점권을 갖고 있으며, 여타 언론사의 시도는 불발되거나 난항을 겪는 상황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태는 일단 수습국면이지만 노동신문 홈페이지 지면 서비스는 재개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연합뉴스와 외신 등에 유료로 제공하는 PDF서비스만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찬양과 체제선전 위주인 노동당 기관지를 돈까지 내가면서 봐야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응해 한국과 국제사회가 대북제재에 나서고 있고, 대북 현금 제공 등은 엄격히 차단하고 있는 상황과도 배치된다는 지적이다. 제재 차원에서 중단된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업체와의 형평성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의 해당 기관과 직접 맺은 계약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독점 계약 등을 내세워 달러를 챙기는 조총련계 중개인 등이 북한과 공식 계약관계인지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서비스 중단 사실이 평양 최고지도부에 알려질 경우 노동신문과 관계자들이 불벼락을 맞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당 기관지를 달러벌이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될 경우 상황이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당 선전선동부에까지 불똥이 튈 경우 제1부부장인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나서 특단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있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북측이 노동신문 화질을 일부러 떨어트리는 꼼수를 부리다 김정은 위원장의 얼굴 사진이 깨져버린 일도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는 남북 간 저작권 문제의 가교역할을 표방한 단체가 있지만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이란 기관은 북한 조선중앙방송위원회로부터 대행권한을 받았다면서 2005년께부터 우리 방송사들로부터 대북 저작권료를 챙겼다. 지난 13년 간 187만 6700달러(21억 1260만원)를 거둬들였고, 대북제제로 북한에 보내지 못한 일부 금액은 법원에 공탁 중이다. 통일부는 2009년 보고서에서 “경문협의 대북 파트너인 ‘저작권 사무국’의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또 남북 교류 중재라는 당초 취지에서 벗어나 우리 방송 콘텐트를 무단사용하는 북한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남측 방송사에게만 저작권료를 받아 북한에 챙겨줬다는 점도 지적됐다. 통일부는 이 단체의 승인 취소까지 검토했지만 현 정부 들어 유야무야됐다. 경문협의 설립을 주도하고 이사장을 맡은 임종석씨가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면서다.   남북 간 언론교류와 저작권 문제를 북측과 직접 논의해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지난해 국내 일부 신문·방송 및 통신사가 북측과의 교류를 타진했지만 단발성 취재나 간접 접촉 수준에서 벽에 부닥쳤다. 한 재미교포 인사는 “방북 과정에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으로부터 ‘남조선 언론이나 기자가 평양을 휘젓고 다니거나 지국 설치 운운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정적인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2.08 00:03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평양에 택시 늘어나 부끄럽다는 김정은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평양에 택시 늘어나 부끄럽다는 김정은

     ━  김정은 ‘민생경제’ 얼마나 알고 있나   북한 김정은 체제를 굴려 가는 세 축을 꼽으라면 장마당과 휴대폰, 택시로 압축할 수 있다. ‘노동당보다 믿음직하다’는 시장과 570만 대 이상 보급된 ‘손전화’에다 최근 택시가 가세했다. 그만큼 민생을 파고들어 실질적 기능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관영 선전매체가 내세우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나 ‘국가 공급’(노동당의 배급 체계) 같은 건 주민 뇌리에서 잊힌 지 오래다. 김정은 집권 이후 급성장한 장마당과 휴대폰 확산 추세를 무서운 기세로 따라잡고 있는 평양 택시를 통해 민생경제의 실상을 들여다봤다.    “거리에 택시들이 점점 늘어나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TV는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런 발언을 전하며, 그가 새 모델의 트롤리버스를 시승한 뒤 “이제는 전망이 보인다”고 언급한 것으로 소개했다. 트롤리버스는 도로 위에 가설된 전기선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아 운행되는 무궤도 전차 형태의 교통수단으로 평양 주민들의 발 역할을 하고 있다. 중앙TV의 이런 보도는 노후화된 궤도전차와 버스·지하철에 의존해 출퇴근과 이동을 해야 하는 불편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선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8월 이뤄진 김정은의 시승행사 장면을 이른바 ‘현지지도 기록영화’로 만들어 민생을 챙기는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 당국이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평양에는 2500대 정도의 택시가 운행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박영자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12월 ‘김정은 시대 8대 변화’ 보고서에서 평양 택시 숫자를 6000대 수준으로 밝힌 바 있다. 북측 안내원 등을 통해 득문한 정보라 차이가 나지만, 2016년 5개 회사가 1500대 정도의 택시로 영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던 것에 비해 크게 늘어난 건 분명해 보인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택시의 급격한 증가는 평양을 방문한 서방 관광객이나 북한 내부 소식을 현지 영상으로 전하는 중국의 유튜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순안공항이나 평양역·고려호텔 등에 줄지어 선 채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영상 자료엔 공연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데리고 바이올린을 챙겨 들고 택시를 타려 뛰어가는 여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택시를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수행원 자격으로 방문했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평양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해봤는데 요금을 2달러 정도 냈다”고 전했다. 김영윤 남북물류포럼 대표는 “북한 택시요금은 기본거리 4㎞에 2달러이며, ㎞당 0.5달러가 추가된다고 한다”고 말했다. 10㎞를 타게 되면 5달러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는 얘기다.   택시는 김일성·김정일 집권 시기 교통수단으로 매우 제한적인 역할을 했다. 외국인 방문객이나 관광차 방북한 인사들의 경우, 사실상 감시원 역할을 하는 안내원이 타고 있는 북측 제공 차량(승용차나 버스)을 이용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평양에 상주하는 외국인이나 국제기구 요원, 조총련 간부 등이 전화로 택시를 불러 탑승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한 탈북인사는 “초기엔 택시에도 기사와 탑승객을 감시하는 안내원 한 명이 조수석에 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북한 주민이 택시를 이용하는 건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평양과 지방 도시에 택시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건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고, 김정은이 통치의 바통을 이어받으면서다. 각 기관들이 택시영업에 나섰고, 평양을 중심으로 중산층 이상의 이동수요가 늘어나면서 택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장마당 유통 등으로 큰돈을 거머쥔 신흥자본가인 ‘돈주’들도 개인택시 영업에 뛰어들었다. 해외에서 온 방문객들이 택시를 비교적 쉽게 탈 수 있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평양 지역의 택시는 국영 운수회사 격인 대동강여객운수사업소에 등록을 해야 운행할 수 있다. 주로 장거리를 운행하는 것으로 알려진 고려항공 택시는 기본요금 없이 ㎞당 0.49달러를 받는다고 한다.   택시영업이 짭짤한 수입을 챙길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이권을 둘러싼 갈등도 엿보인다. 미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지난달 보도에서 “보안성(우리의 경찰) 산하 택시의 경우 평양 시민들 속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부인 이설주의 측근 인사가 실소유주라는 말이 돌고 있다”고 전했다. ‘이설주 택시’로 불리는 이 회사는 중국산 새 차량을 대거 들여와 손님을 싹쓸이하는 바람에 다른 택시 업체와 기사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출퇴근 시간 정전이 돼 궤도전차가 멎으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특정 회사 택시가 몰려온다는 뒷소문까지 주민 사이에 돌고 있다고 한다.   택시의 증가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먹고살 만한 중상류층 그룹에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고급 아파트와 주말 외식, 스마트폰 등으로 삶의 질을 챙겨온 이들이 이동수단으로서의 택시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평양의 새 쇼핑시설인 광복거리상업중심 앞에는 구입한 생수나 쌀·가전제품 등을 택시 트렁크에 싣는 주민들의 모습이 이어지고 있다. 장마당을 통한 돈벌이나 뇌물 등으로 지갑 사정이 넉넉해진 일부 계층에겐 택시비가 큰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북한 당국이 자가용의 개인 소유나 운행을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도 택시 증가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에 대해 김정은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정책을 펼쳐나갈지도 관심이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택시가 민생 속으로 점차 파고들고 있는 상황에서 ‘평양에 택시가 늘어 부끄럽다’는 식의 김정은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버스·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수단의 현대화도 중요하지만 택시 쪽으로 선택 폭을 넓히고, 자가용을 허용하는 등의 개혁·개방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김정은은 집권 직후인 2012년 봄 첫 공개연설에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며 민생 챙기기를 공언했지만 7년 가깝도록 지켜지지 않고 있다. 노동당과 내각에서 입맛 맞춰 올리는 보고서가 아닌 경제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각본과 동선까지 치밀하게 준비하는 보여주기식 ‘현지지도’에 머물러서는 실상을 알기 어렵다. 거기에 의존하다간 평양 택시 발언뿐만 아니라 “평양~순안공항(20㎞ 거리) 사이에 고속철을 놓으라”는 식의 황당한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다. 택시를 잡아타고, 장마당에 나가 민초들의 팍팍한 삶을 체감해보면 남북관계와 대미접근의 청사진도 더 또렷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1.25 00:04

  • 中 유튜버가 본 평양스타일…그곳엔 물결형 헤어가 뜬다

    中 유튜버가 본 평양스타일…그곳엔 물결형 헤어가 뜬다

     ━  [이영종의 평양오디세이]  북한땅 누비는 중국 유튜버   폐쇄적인 북한 체제의 내부 모습이 뜻밖의 곳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유튜브 공간이다. 조선중앙TV의 김정은 찬양 영상이나 가요 등을 선전·선동 차원에서 북한 당국이 올려온 것과는 차원이 달라졌다. 평양과 지방 도시의 길거리·주민을 담은 장면이 생생히 드러나고, 음식점의 주방과 이발소 등의 풍경도 접할 수 있다. 과거 방북 교포 인사나 서방 관광객이 올려온 단편적인 영상과 달리 분량도 길고 시리즈로 다루는 경우도 나타난다. 유튜브에 비친 김정은 체제의 현주소를 찾아가 본다.    인터넷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북한에서 절대 금기인 단어다. 2500만명 주민을 70년 넘게 외부와 철저히 단절시킨 채 갈라파고스 왕국을 다져온 때문이다. 다원화와 소통의 상징인 인터넷을 허용한다는 건 북한 지배층엔 곧 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일가를 비롯한 극소수 특권층에게만 허용되고, 해커나 대남 선전·선동 요원 등 특정 임무에 종사하는 엘리트에게 제한적으로 제공된다. 물론 노동당 고위 간부들이 인터넷의 효용을 모르는 건 아니다. 통일전선부(부장 김영철 당 부위원장)가 대남 비방 사이트인 ‘우리 민족끼리’를 운영하고, 유튜브에 최고지도자 우상화와 체제 선전 영상을 올린 건 대표적 사례다. 모란봉악단 공연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최근 들어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통해 북한의 생생한 내부 모습이 담긴 영상물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주도하는 건 북한 당국이나 엘리트 계층이 아니다. 뜻밖에도 중국의 젊은 유튜버들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평양과 북한의 지방 도시를 누비며 주민 일상이나 풍경을 영상으로 기록한다. 서방의 언론인이나 관광객들이 대북제재 때문에 방북이 쉽지 않은 국면에서 독보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3월 김정은의 첫 중국 방문을 계기로 복원된 북·중 관계도 이들의 보폭을 넓혀준 것으로 보인다.   중국 스타트업 채널 SAO의 유튜버가 평양 문수몰놀이장 이발소에서 헤어스타일 사진을 보고 있다. [유튜브 캡처] 북한의 미용실 벽에 붙어있는 헤어스타일 사진. [유튜브 캡처]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세계문화기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타트업 그룹인 SAO가 만든 ‘조선세계’ 시리즈다. ‘내가 (직접) 가서 세계를 본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이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북한 각지의 모습을 담아 유튜브에 공개해 왔다. 벌써 20~30분짜리 영상 수십 개를 올려놓은 상태다. 서너명의 남녀로 구성된 취재팀은 마치 관광을 하듯 평양과 원산·남포 등을 휘젓는다. 지난 여름 촬영된 한 영상엔 더위를 피해 고가다리 밑에서 잠을 자는 주민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혼잡한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차량에 불호령을 하는 보안원의 목소리도 담겼다.   평양애육원 주방의 헬로키티 주전자. [유튜브 캡처] 카메라 앵글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모양새다. 호텔을 나서 북한 통역과 만나 밴 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까지 그대로 공개된다. 김정은 위원장이 방문했던 평양애육원(유치원 연령의 고아를 돌보는 시설)을 찾은 이들 일행은 주방에까지 카메라를 들고 들어간다. 영상엔 일본 산리오 회사의 유명 캐릭터인 헬로키티가 그려진 아동용 밥그릇과 주전자가 비친다. 중국인 여성 진행자는 아이들이 간식으로 먹을 ‘해바라기’ 상표의 빵과 탄산음료를 들어 보이며 시청자의 호기심을 풀어준다. 평양 지하철을 체험하는 영상에는 개찰구를 지나 100m가 넘는 깊이의 승강장으로 들어가는 긴 에스컬레이터를 보여주고 열차 안팎의 주민 모습과 벽화·선전구호에 렌즈를 들이댄다. 대북정보를 다뤄온 우리 정부 관계자는 “과거 북한 내부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입수하려 애썼던 평양의 기관·시설 모습이 이젠 고화질 영상으로 생생하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이발소를 방문해 실제 북한식 서비스를 받는 체험형 영상도 눈길을 끈다. 벽에 걸린 헤어스타일 그림에는 물결형을 비롯해 구름형·누운패기형·축포형 등 14가지 유형이 소개돼 있다. M자형 탈모가 진행된 중년 남성에게는 ‘기러기형’이란 이름을 붙여 놓았다. 방문지를 오가는 길에 식당에 들러 대동강맥주를 맛보거나 길거리 매대에서 북한 통역과 함께 꼬치 요리를 함께 맛보기도 한다. ‘가라오케(K-TV)’라고 적힌 노래방에서 북한과 중국의 가요를 부르거나 문수물놀이장을 찾은 북한 주민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즐기는 영상, 강원도 원산의 송도원 국제야영소를 탐방하는 장면도 나온다.   아이들 간식용인 ‘해바라기’ 상표의 빵과 탄산음료. [유튜브 캡처] 중국 유튜버들이 주도하는 이 같은 영상에 대해 ‘그동안 다루지 못해온 북한의 내부 생활상을 보여준다’는 평가와 ‘이 역시 북한 당국의 통제 아래 촬영된 선전 영상일 뿐’이란 비판이 엇갈린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은 “과거 서방 언론을 초청해 북한체제를 선전하려던 시도가 크고 작은 부작용이 드러나자 북한 당국이 우호적 성향의 영상 작가나 네티즌을 활용하는 쪽으로 선회한 건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중국 국적의 관광객이나 유튜버를 북측이 통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보다 한 발짝 더 북한 속으로 들어간 젊은 감각의 앵글과 유튜브라는 미디어의 특성상 김정은 체제의 북한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 체제의 감춰진 속살을 드러내려는 중국 청년 유튜버들의 발걸음이 더 빨라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지구 위에서 유일하게 북한이 쉽게 손대기 어려운 나라가 중국이란 측면 때문이다. 잇단 미국인 억류 사태나 한국과 서방 언론에 대한 방북취재 활동 간섭 움직임과 달리 북한은 중국 관광객이나 네티즌들에게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대북제재 국면에서 중국인 관광이 외화벌이에 숨통을 터주고 있다는 점 때문에 북한 당국이 예전보다 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새해 벽두 이뤄진 김정은 위원장의 중국 방문으로 북·중 밀월관계는 더 밀착하는 모습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양측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유엔 대북제재에 대한 중국의 방관 내지 동참으로 냉랭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지난해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3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북·중 혈맹은 복원 과정을 거쳤다.   지난 8일 베이징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시진핑 주석에게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로 곧바로 나아가는 중국의 실상을 직접 보면서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는 게 북한 중앙통신의 전언이다. 중국식 개혁개방을 ‘사회주의 노선에 대한 배신’이라며 볼멘소리를 했던 지난 시기와 달라진 평가다. 하지만 정작 북한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한 분위기다. 김정은이 마주한 현실은 자신의 35회 생일상을 이국땅에 차려야 할 정도로 녹록지 않다. 야간 국제열차편으로 압록강을 넘으며 가다듬었을 김정은의 2019년 구상이 궁금해진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9.01.11 00:03

  • [평양 오디세이] “대미협상 내가 맡게 해달라” 北김영철, 미국에 비밀청탁

    [평양 오디세이] “대미협상 내가 맡게 해달라” 北김영철, 미국에 비밀청탁

     ━  뒤숭숭한 북한 권력 핵심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7주기 참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에 들어서고 있다. 김 위원장의 왼쪽은 최용해 당 부위원장 겸 조직지도부장, 오른쪽은 이수용 당 부위원장 겸 외교담당 국무위원. 오른쪽 끝에 김영철 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중앙TV 화면캡처] 김정은 체제의 권력 내부가 심상치 않은 기류다. 올해 최고의 ‘파워맨’으로 떠오른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을 향한 견제의 칼 끝이 권력암투 양상으로까지 증폭된 모양새다.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 북·미 최고지도자 간 만남 때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곁을 지근거리에서 지킨 인물이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으로부터 ‘북한에서 두번째로 힘이 센 사람’으로 불린 김영철. 그를 제어하고 나선 건 최용해 당 조직지도부장이다. 연말 평양에 불어닥친 권력 암투의 전말과 전망을 짚어본다.    서울과 워싱턴 외교가에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관련한 은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건 지난달 초.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김영철의 북·미 고위급 회담이 무산되면서다. 복수의 대북 소식통이 전한 내밀한 스토리의 핵심은 김영철 부위원장이 미국 측에 자신의 신상과 관련해 ‘청탁’을 했다는 얘기다. 북한 문제에 정통한 소식통은 “김영철이 협상파트너인 미국측 인사에게 ‘미국 문제도 내가 관장할 수 있게 해달라’는 로비를 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귀띔했다. 대남 문제를 주로 담당하는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겸하는 김영철이 북·미 간 협상도 자신이 계속 담당할 수 있게 해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했다는 얘기다. 소식통은 “김영철이 접촉한 미국 측 인사는 한국계인 앤드류 김(미국 중앙정보국 코리아미션센터장)이란 관측이 있다”고 덧붙였다.   김영철은 올 초부터 시작된 김정은 위원장의 대남 유화 공세의 선두에 선 인물이다.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남북관계 개선과 북한의 평창 겨울 올림픽 참가 문제를 제기하자 통일전선부를 총동원해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2월 말 올림픽 폐막식 참석을 위해 ‘천안함 폭침 도발의 주범’이란 비판 여론 속에서도 남한 방문을 강행했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그는 김정은의 곁을 지키며 최측근 인물로 자리를 굳혔다.   김영철이 ‘파워맨’으로 한 단계 더 뛰어오른 건 6월 초 백악관 방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특사로 간 김영철에게 미국은 캐딜락 승용차에 특급 경호를 제공하는 등 최고의 의전으로 예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친서를 받아들고 큰 만족감을 표했다. 면담 일정을 마치고 떠나는 김영철을 차량 앞까지 나와 배웅했다. 같은 달 중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때 김영철의 존재감은 최고에 달했다.     소식통은 “폼페이오 방북과 싱가포르 회담을 거치며 김영철이 ‘대미 문제까지 관장하는 게 김정은 권력에서 보다 안정적 입지를 다지는 길’이란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미 청탁’이란 무리수를 둔 것도 이 때문이란 얘기다.   하지만 이런 정황이 입소문을 타면서 결국 평양의 정보 당국에까지 포착됐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노동당의 조직과 간부 인사·비리 문제를 관장하는 최용해 당 부위원장 겸 조직지도부장이 칼을 꺼내 들었다고 한다. 최근 북한을 방문하고 온 인사는 “김영철과 통일전선부의 대남·대미 접촉과정과 문제점에 대한 검열을 조직지도부에서 진행 중인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빨치산 혈통으로 북한 권력에 지분이 있는 ‘2인자’ 최용해(부친은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소지가 있는 김영철을 견제,또는 제거하기 위한 수순에 들어간 것이란 관측까지 나온다고 한다.   최용해의 이런 행보를 두고 일 년 전 벌어진 ‘황병서 숙청’의 재연(再演)이란 지적도 나온다. 2017년 10월 노동당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최고 요직인 조직지도부장을 거머 쥔 최용해 부위원장은 군부 핵심인 총정치국을 검열해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전 국가보위상을 몰락시켰다. 총정치국 간부들이 전횡을 일삼고, ‘당적 통제’(노동당의 지도)를 무시하거나 허위보고 했다는 비리사실을 김정은에게 직보해 하루아침에 철직(해임)시키거나 협동농장으로 ‘혁명화’를 보내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김정은 정권 초기인 2012년 4월 총정치국장에 임명돼 2인자로 우뚝선 최용해의 직위를 2014년 앗아간 황병서에게 보복을 가한 구도란 말도 나왔다.   일각에서는 최용해의 조직지도부가 ‘부패와의 전쟁’을 내세워 김영철을 비롯한 정적을 제거하려 할 것이란 관측도 내놓는다. 지난 10일자 노동신문은 “부정부패는 이적행위”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써가며 강도높은 비리척결을 예고했다. 신문은 “일꾼(간부를 지칭)들 속에 이기주의와 공명심, 안일해이된 사상관점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영철을 표적검열한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려 다른 비리 사례를 무더기로 적발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지난해 황병서 숙청 때도 김정은 관련 지면을 부실하게 꾸몄다는 이유로 노동신문 간부를 숙청하고, 평양 고사포 부대 정치부장을 부패혐의로 처형한 것으로 우리 정보 당국은 밝혔다.   김영철은 11월 초 북·미 고위급 회담 무산 이후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해 왔다. 군부 출신인데다 강경파인 김영철을 미국 측이 대미접촉 라인에서 제외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달 초 ‘김영철이 앤드루 김과 판문점에서 만났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있었지만 국가정보원은 “접촉한 사실이 없다”고 국회 정보위에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북 정보 당국은 “아직 김영철 부위원장의 신상과 관련한 특이점이 구체적으로 파악된 게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16일 이뤄진 김정은 위원장의 ‘김정일 사망 7주기’ 참배 때 왼편 앞쪽에 김영철이 자리한 모습이 조선중앙TV에 드러났다. 이날 행사에서 김정은의 오른쪽은 최용해, 왼쪽은 이수용 당 부위원장 겸 외교 담당 국무위원이 각각 자리했다. 이수용은 김정은이 스위스 조기유학 시절 현지 대사(당시 이름은 이철)로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정부 당국자는 “조직·인사 등 내치(內治)는 최용해, 외교는 이수용에게 나눠 맡기겠다는 김정은의 의중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장면”이라고 풀이했다.   관건은 김정은 위원장이 앞으로의 정세변화를 지켜보면서 김영철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다. 국정원 대북정책실장을 지낸 김정봉 유원대 석좌교수는 “남북관계의 소강상태가 장기화 하거나 북·미 관계가 꼬일 경우 김영철의 책임문제가 본격 제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향후 흐름에 따라 북한 당국이 대남·대미 전략을 담당한 핵심인사를 ‘희생양’ 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북한은 최근들어 한국과 미국에 대한 비난선전을 재개하며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은 “북한이 연말 결산에 해당하는 ‘총화’를 마무리한 뒤 2019년 대내외 전략을 담을 김정은 신년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2018.12.26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