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국회에서 법안 최종 처리가 곧 이뤄질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란 법률' 개정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율법의 나라'가 됩니다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처리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며 지난 18일 국회 앞에서 삭발한 허성권 KBS 노조위원장. [연합뉴스]
 2001년 11월의 이야기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타지키스탄이라는 옆 나라로 나와 러시아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곧이어 기내식이 제공됐습니다. 종이 상자에 빵, 주스, 과일, 물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주스 뚜껑을 따고 빵 봉지를 뜯으며 식사 준비를 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변이 너무 조용했습니다. 

  ‘동작 그만’ 상태로 눈치를 살폈는데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옆자리 승객에게 영어에 손짓을 섞어 “지금 먹으면 안 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짧게 답이 돌아왔습니다. “라마단.” 아차 싶었습니다.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물도 마시면 안 되는 라마단 기간(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이라는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저야 무슬림이 아니니 먹어도 괜찮지만 예의가 아닌지라 주섬주섬 상자를 수습하고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꽤 흘러 출발지 기준으로 이미 해 지는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아무도 기내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비행기 유리창 덮개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사람들이 부쩍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승객 중 몇몇이 큰소리로 뭔가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옆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영어 단어들과 창 밖을 가리키는 손짓을 조합해 대답을 했습니다. time, sun, problem 등이 들렸습니다. 상황이 이해가 됐습니다. 해가 져야 기내식 섭취가 가능한데 해가 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비행기가 서쪽으로 나르고 있기 때문에 해가 질 시간이 지나도 해가 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침부터 물 한 모금 안 마신 사람들이니 얼마나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겠습니까? 이후 승객들이 제각기 뭐라고 한 마디씩 하더니 일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토론 끝에 "먹자"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짐작이 됐습니다. 저도 덮어뒀던 기내식 도시락 뚜껑을 열었습니다.  

 잠시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로 가겠습니다. 그곳 사람들 모두가 탈레반을 미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갔을 때가 탈레반 정권 축출 직후라서 대놓고 찬양하지는 않았지만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면 탈레반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뉘앙스를 담아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회 질서가 잡혀 있었고, 퇴폐적 문화가 추방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두환 시절이 좋았다”는 말을 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둑질하면 손이 잘리고,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면 매를 맞고, 자유 연애를 하면 돌팔매질을 당하니 사회가 얼마나 반듯했겠습니까? TV 방송은 금지됐고, 관제 신문만 있고, 여성들은 내내 집에 있다가 밖에 나올 때는 부르카로 온몸을 감싸고 나오니 질서 정연한 사회였을 것입니다.

 중국 진(秦)나라의 재상 상앙도 율법의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범죄에 엄한 형벌을 가했고, 누군가의 죄를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벌을 줬습니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야간 통행금지를 엄격히 시행했고, 여행 허가증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 집에서 잘 수 없도록 했습니다. 훗날 상앙이 도망자 신세가 됐을 때 “내가 만든 법에 내가 당하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역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을 따르는 1990년대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사회나 ‘상앙변법’ 시절의 진나라는 겉으로는 매우 질서 있고 평온한 나라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법이 사람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위에 쓴 ‘기내식 소동’도 엄격히 보면 이슬람 율법 위반입니다. 그것이  만들어질 때 '지는 해를 거르스는 비행'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법은 언제나 구체적 현실을 따르지 못합니다. 법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논란이 되는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의 핵심은 ‘허위 보도를 하지 말라’입니다. 여당 의원들이 '허위 보도는 옳지 않은 것이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도그마적 관념을 앞세워 교조적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조국 전 장관 가족 비리, 윤미향 의원 비리,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등도 처음 언론이 보도할 때 당사자 및 관련 기관이 모두 ‘허위’라고 했던 일입니다. 권력이 진실을 덮어 끝내 ‘허위’로 결론이 날 수 있다는 위험 부담을 안고 기자들이 보도했던 것입니다. 나름의 법적 보호 장치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가중 처벌’을 하는 법이 생기면 이런 일에 나서는 기자가 줄어들 것이고, 결국 신문과 방송에서 '비리 폭로' 보도는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겉으로는 매우 평온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탈레반 정권이나 상앙 시절의 진나라처럼 말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자꾸 국민의 의식을 옥죄는 ‘율법’이 만들어집니다. 북한으로 전단을 날리면 안 되고, 5ㆍ18 공식 해석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표출해서도 안 됩니다. 이미 법이 제정됐습니다. 언론도 가타부타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지 말고 정부 발표에 충실한 보도를 해야 합니다. 지금 국회에는 위안부 피해 문제나 독립운동을 ‘왜곡’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안도 계류 중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율법의 나라’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하경 중앙일보 주필이 '언론탄압법 강행은 문재인 대통령 진심인가'라고 칼럼을 통해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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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30의 글 '저격'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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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국의 '위드 코로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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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상 이상의 연애 리얼리티 방송
  요즘 새로 등장한 연애 리얼리티 방송 프로그램이 화제입니다. 헤어졌거나 헤어지기 일보 직전의 커플들이 모여 생활합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커플이 탄생합니다. 자신의 연인이 다른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 의도를 제작진이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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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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