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마지막주 <103호>

여러분, 찬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면 괜스레 사람이 그리워지고 오래전 기억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옛 추억에 빠져들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미소가 번지기도 하지요. 여러분은 그 시절 어떤 기억과 추억을 안고 계시나요. 송미옥 필진이 전하는 두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쓸쓸하면서도 따뜻했던 인생의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송미옥의 살다보면(204) 2021.09.22
엄마 죽자 갓난 동생 등에 업고 젖동냥 나선 10살 아이


동이 트기도 전에 할머니들이 하나둘 모였다.

“아침밥은 몇 시에 드시는 거예요?”

“새벽에 일어나 밥부터 먹어야 허리가 펴지제. 노인의 든든한 힘은 밥심이야.”

이웃인 90대 어르신들이 내 글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신 지 어언 4년째다. 평소에도 자주 놀러 오시지만 가을이면 고추 꼭지도 딸 겸 특별 출연 섭외를 기다리신다. 하하.

첫해엔 여섯 분이 오셨다. 다음 해 한 분이 쓰러져 돌아가시고 다섯 분이 출석, 다음 해엔 두 분이 요양원으로 가셔서 셋으로 줄었다. 그렇게 남은 세 분 어르신이 마당으로 들어오신다. 앞집 부부도 와서 여섯 명이 되니 왁자지껄 시끄럽다.

한 분은 허리가 기역으로 구부러져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기어 다니신다. 마음이 아프다.

“이 보오, 우야든동 자식들 앞에서는 절대 기어 다니면 안 되여. 요양원으로 납작 들려 갈끼라.”

“암만, 자식들 앞에서는 허리 펴고 걷지. 그래도 때가 되면 얌전히 들려 가야제. 호호.”

“자식들이 보낼라 캐도 내가 중간에서 막을 끼라요. 이 나이에 이젠 암에 걸린들 어떻고 눈이 잘 안 보이도 어떻소? 남에게 뒤처리 안 맡기고 죽을 때까지 걸어 다니기만 하면 되는 거요. 내가 오미 가미 살필꺼이, 밥 잘 챙기 드시고 많이 걸으시소.”

앞집 아저씨가 큰소리치며 위로한다. 서로에게 덕담을 나누며 안부를 주고받다 보면 죽은 조상도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서성거린다.

“아지매는 그때도 꽃같이 예뻤지만 지금도 똑같심더.”

“저이 막냇동생이랑 나랑은 서로 볼 꺼 못 볼 꺼 다 본 사이 제. 호호호. 흐흐흐.”

유독 서로를 보살피고 챙기는 두 어르신의 이야기가 애잔하다.

늘 소녀같이 고우신 어르신은 어린 나이에 남편 얼굴도 안 보고 시집을 왔다.

“낯선 곳에 시집와 힘들어하는 내게 친언니같이 큰 힘이 되어주던 분이 앞집에 살던 저이 엄마였지. 내가 첫아이를 낳고 그 형님은 셋째를 낳았는데 하혈이 심했어. 그는 병을 못 이기고 며칠 후 돌아가셨지. 영양실조였을 거야. 그 당시엔 못 먹어서 아이 젖을 물려 광주리에 재워놓고 밭을 매다 보면 하늘이 노랗게 뱅뱅 돌아갔거든.”

“저이 아버지는 젊은 부인 잃은 허무함에 술에 절어 지냈지. 그런데 초상을 치르자마자 며칠이 지났을까. 열 살 아이였던 저이가 갓난쟁이를 업고는 하루에 몇 번씩 우리 대문 앞에 서성이는 거야, 한마디 말도 없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부라리며 바라보는 큰 눈이 말하는 거야.” ‘내 동생 살려주세요. 내 동생 젖 좀 주세요.’

“아기를 업고 나타나면 시어매는 마당 쓸던 싸리 빗자루를 탕탕 치며 역정을 내셨지. 그 어른도 마음은 여린 분이었어. 너나없이 배고픈 시절이라 제 손자 먹일 젖 뺏어 먹으러 오는 놈이 애잔하면서도 미웠겠지. 나는 눈짓으로 대문 밖에서 기다리라 하고 아기를 받아 젖을 물렸어. 자네는 그렇게 온갖 욕을 얻어먹으며 일 년 넘게 꿋꿋이 젖동냥 출석을 했잖은가. 하하. 그때의 꼬마가 지금은 우리 동네 독거노인들의 큰아들이야.”

어느새 70년을 함께 하며 살아온 질곡의 세월, 100세와 80세를 바라보며 서로를 챙기는 두 어르신의 모습은 모자지간같이 정겹다. 올해도 어수선한 명절이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자식들이 못 온다 해도 그리 외롭지 않다.

친구들은 할머니들이 모여 꼭지 따 빻아 보내는 고춧가루를 비싸게 사준다. 정해진 가격이 있어도 어르신들과 막걸리 파티용이라며 웃돈 얹어 보내는 착한 친구들이 있어 살맛 난다. 공돈까지 생겼으니 이것저것 먹거리에 바나나 막걸리 사서 명절 뒤풀이를 해야겠다. 추억을 먹고 살아도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기원해 본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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