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둘째 주 <105호>

여러분, 지나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지요. 이미 본 영화나 읽었던 책도 시간이 흐르고 다시 보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땐 그랬고, 지금은 또 다른 경험들이 채워졌을 테니까요. 윤경재 필진은 친한 친구를 떠나보낸 뒤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말씀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고 하시네요. 계절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간들도 쌓여서 열매처럼 그렇게 잘 익어가면 좋겠습니다.


윤경재의 나도 시인(91) 2021.10.07
감나무의 감을 다 따지 않고 몇개 남겨 놓는 까닭

까치밥

외가 앞마당에 서리를 마다하지 않던 감나무
입맛 다시는 손주들에게 시리게 떫은맛을 안겨주고
세월이 익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흰 눈 내려 주전부리 궁금한 겨울 녘
앙상한 우듬지 간당간당 추위를 이겨낸 까치밥
맑은 하늘을 벗 삼아 발그스레 빛났다

까치들은 왜 저 맛난 걸 똑 따먹지 않을까
그래도 하늘 위에서 보면
용서받을 쪼인 상처가 있다는 말씀

감나무만큼 하늘 가까이 간 어머니
이파리 다 떨어진 나무보다 외로이
땅 아래 고독을 내려놓고서
식물처럼 뿌리내릴 수 있다는 말씀
비비 꼬인 삭정이 사지 위에
쭈글쭈글 아무 그늘 없는 얼굴은
어린 시절 올려다본 한겨울 까치밥이다
같은 곳을 연거푸 찍어 먹지 않는다는 까치
그놈의 못된 성질머리가 새삼 고맙기까지


해설

얼마 전에 친한 한의사 친구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녀 그의 올곧은 성정을 오래 봐왔기에 친구라도 평소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작년 추석 무렵 불행히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코로나로 문병을 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는 체격과 성품이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 같았다. 화살 맞은 어깨를 칼로 수술할 때 아무 내색 없이 침착하게 바둑을 두었다는 일화가 딱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그와 대학교 다닐 때 친구 동생들을 모아 과외 아르바이트를 같이 했다. 돈 벌이가 아니라 부족한 동생들을 선도하고 봉사한다는 의미로 시작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친구는 수학을 엄청 잘 했다. 보통 학생이 수학을 어려워하고 실수를 잘하며 ‘수포자’가 된다. 그 이유는 다양하고 세심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공식만 암기하려는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했다. 콕콕 찌르는 말솜씨와 유머는 주위에 많은 친구를 모이게 했다. 술도 엄청 세 두주불사였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려 원칙을 지키는 한의사로서 생활했다. 서울 출신이면서도 자식들 공부 다 시킨 후엔 연고가 없는 강원도에 내려가서 개업했다. 의술을 돈벌이보다 환자 고치는데 써야한다는 사명감을 몸소 실천했다. 특히 병이 걸리기 전 미병치료를 강조하는 ‘황제 내경’ 정신을 살려 환자에게 예방의학 교육을 철저하게 했다. 그래서 가끔은 환자에게서 싫은 소리를 들었다.

그런 미병치료 생활을 실천한 그였지만, 암을 피하지는 못했다. 코로나 사태로 가족장을 고집하는 그의 상가엘 다녀왔다. 시절이 그런지 무척이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조화만 즐비했고 문상객이 적었다. 찾아주어 고맙고 미안해하는 상주, 미망인과 오래 그간의 사연을 나누었다. 그가 나보다 먼저 결혼해 아들을 가진 덕분으로 내 결혼 때 함진아비 역을 맡았던 사연을 이야기하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려보려 애썼다. 미망인에게서 고통스런 투병생활을 어떻게 꿋꿋하게 이겨냈는지 소상히 들었다. 평소 성품대로 역시나 죽음의 순간까지 한의사로서 신언서판의 품위를 지키려했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학창시절 키가 작고 소심하며 조용했던 내게 여러 모임자리에 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르바이트도 그렇게 해서 시작했었다. 글씨마저 달필이었던 그는 끝내 내게 존경심과 부러움을 안겨주고 떠났다.

85㎏나 되던 거구가 나중엔 뼈만 앙상했다는 말을 들으니 얼마나 심한 고통 속에서 견뎌야 했는지 짐작이 되었다. 나름대로 한 시간 넘게 미망인과 이야기 하면서 병구완하느라 애쓴 몸과 마음을 위로한다고 했으나 얼마나 보탬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도리어 내 안부를 묻는다. 오랫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계시던 내 어머니 이야기를 물었다. 친구가 평소에 내 어머님 상태를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16년 간 병상에 의식 없이 누워 지내시던 어머니가 3년 전에 소천하신 사연을 꺼내며 자신은 1년여 고생했지만, 나는 더 마음고생을 했을 거라며 공감해주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쪽잠 잤던 일, 옛날 미비한 보험제도 탓에 병원에서 쫓겨났던 일,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 김수환 추기경께서 병자 성자를 해주셨으나 그분이 먼저 소천한 일 등등을 나누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씀씀이가 넓은 친구가 더 생각났다. 또 안타깝고 애석하게 느껴졌다. 죽음의 자리에서 조차 남을 생각하는 그가 보고 싶어졌다. 문상과 위로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위로를 받는 자리가 되었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없는 태도를 견지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감나무 우듬지에 매달려 있던 까치밥을 궁금해 하던 어린 내게 하늘 위에서 보면 누구나 ‘용서받을 상처’가 있다는 아리송한 말씀을 해준 적이 있었다. 하도 어리석어 전혀 알아듣지 못했던 내게 몸소 가르쳐주려고 16년 동안 자리에 누워 계셨는지 모르겠다.

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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