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 주 <110호>

아파서 응급실에 갔는데 오랜 시간 대기한 경험 있으신가요? 응급실에 가면 마음은 급하고 걱정스러운데 반나절을 기다려서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땐 의료진들이 원망스럽고, 답답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이 시간에도 의료진 분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온 힘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전쟁터와 같은 응급실에서 매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조용수 필진의 이야기입니다.


조용수의 코드클리어(84) 2021.11.15
대기시간 뻥튀기되는 응급실···그래도 무소식이 희소식?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응급실에서 환자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 동시에 의사가 절대로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는 일이 없는 질문.

“세, 아니 대여섯 시간쯤요.”

“응급환자인데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환자가 많이 밀려있습니다. 앞 환자 시술이 길어지면 열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대기 시간을 물어오면 빠르게 셈을 굴린다. 대충 견적이 서면 거기에 넉넉히 시간을 보탠다. 그렇게 시간을 한껏 부풀려 대답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응급실에선 예상이 어긋나는 일이 너무도 흔하다.

‘부디. 제발. 내가 말한 시간 안에 환자가 해결되게 해주세요.’

많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지겹게 겪어봤다. 대답한 시간이 지나면 환자는 십중팔구 나에게 분노를 쏟아낼 것이다. 환자의 치료보다 분노를 진정시키는 게 열 배는 힘들다. 치료를 잘 못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조절하기 힘든 시간 문제로 욕을 먹는 건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그래서 으레 시간을 뻥튀기한다.

그렇다. 응급실에서 대기시간은 물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 마나 한 질문이다. 의료진은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을 대답하기 마련인데, 환자가 궁금한 건 절대로 그건 아닐 테니 말이다. 아마도 듣고 싶은 건 이런 식의 대답일 것이다. ‘대충 몇 분쯤 기다리면 식당에 들어갈 수 있는지, 몇 시간쯤 기다리면 물건이 오는지.’ 그래야 다른 볼일을 먼저 볼지 아니면 그냥 대기하고 있을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상 시간을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의료진은 없다. 응급실에서 시간이란 것은 여러 이유로 틀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피검사도 용혈이나 응고로 재검을 들어가는 일이 잦다. 그러면 시간은 처음부터 다시 세팅된다. 급한 뇌경색 환자가 계속 오면? 내 MRI 순번은 끝도 없이 밀려나게 된다. 심지어 다음날까지 기다리기도 한다. 응급이라는 변수 가득한 공간에서, 정해진 순번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고로 의료진의 전략은 늘 똑같다. 적당히 넉넉하게 시간을 말해둔다. 손님에게 대기시간을 얘기해 본 서비스직 종사자라면 이해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다. 예상보다 시간이 줄면 고마워하지만 반대의 경우엔 불같이 화를 낸다. 그나마 다른 직종은 평균 시간이 얼추 비슷하기라도 하지, 응급실은 정말이지 시간 편차가 커다란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최댓값을 말해주는 게 습관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시간을 훌쩍 넘도록 대기하는 환자가 생기는 곳이 바로 응급실이다.

“세시간이면 된다더니 지금 다섯시간째 뭐 하는 겁니까?”

기다림에 지친 환자에게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환자가 왔고 그 때문에 시간이 더 늘어났다는 해명도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결과만 남아있으니까. 책임 추궁이 벌어지고 실랑이가 인다. 다른 위독한 환자를 봐야 할 시간에 소모적인 행위에 몸이 매인다. 다음부턴 아예 최소 하루쯤 기다려야 한다고 설명을 해두는 게 낫겠다는 후회가 든다.

예상 시간이 늘어나도 흔쾌히 용인해 줄 만큼 서로 간에 신뢰가 쌓여있다면 상황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오늘 처음 본 환자와 의사 사이에 그런 신뢰가 급작스레 생기긴 어렵다. 중간중간 대기 시간이 변할 때마다 자주 설명해주면 한결 나아지겠지만, 응급실 사정이 워낙 바쁘다 보니 감히 그럴 엄두를 내기도 어렵다.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그래도 한가지. 안심되는 얘기가 있다. 응급의학과 의사에게 응급실에 있는 모든 환자는 등짝에 짊어진 짐 더미와도 같다. 가만있으면 끝없이 쌓여가는. 빨리 하나씩 처리하고 내려놓아야만 하는. 그렇지 못하면 결국 무게에 깔려 죽게 되는. 응급의학과 의사는 본인이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하나라도 더 많은 환자를 한시바삐 처리하려고 한다. 그러니 혹시나 기다림이 길어진다고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잊어버린 것도 아니고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급한 환자가 많아 정신이 없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어차피 환자 치료를 끝내지 못한다면 퇴근조차 하지 못한다. 검사가 끝나고 결과가 나오면 응급의학과 의사는 지체 없이 뛰어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다림이 길어지더라도 걱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면 된다. 응급실에서 의사가 바로 반응하는 경우가 더 안 좋은 소식이다. 죽음에 제일 가까이 있는 환자라는 뜻이니까.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의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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