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키즈존’이 제 SNS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한 양육자가 올린 게시물이었어요. 아이와 함께 카페에 갔는데, 노키즈존이라 메인홀은 출입할 수 없고, 옆에 있는 작은 홀(메인 홀에 비해 예쁘지 않은)이나 야외만 이용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입구에 ‘노키즈존’이라고 써두지 않아서, 마카롱 먹을 생각에 신난 아이가 쫓겨나는 경험을 했고요. 어린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는 거였습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논란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을 텐데, 카페 사장님이 댓글을 달았습니다. 카페에 키즈존(작은 홀과 야외)이 있었고, 노키즈존과 분리해 운영하는 건 다른 손님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게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거였습니다. 카페 전체가 노키즈존이 아니니 ‘노키즈존’ 카페는 아니며, 노키즈존과 키즈존을 분리해서 운영하는 건 차별이 아니라 규칙이라고요.

여러분은 노키즈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노키즈존과 키즈존을 분리 운영하는 건 차별일까요, 규칙일까요?

미국엔 1875년부터 짐 크로 법이 있었습니다.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법이었죠. 백인이 들어가는 식당에 흑인이 들어갈 수 없고, 버스도 함께 탈 수 없었습니다.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고 이 법은 주장했죠. 이 법은 1965년 사라졌습니다. “평등하다”는 명제와 “분리되어 있다”는 명제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죠. 지금 미국에서 ‘No African American Zone’이 운영된다면 어떨까요? 이 공간은 차별이 아니라 규칙일까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자는 의미로 어린이날을 제정한 지 올해로 정확히 100년이 됐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기로 한 지 100년이나 됐는데, 어린이날을 맞아 나들이 계획을 세우며 혹시 가려는 식당이 ‘노키즈존’이 아닌지 검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합니다. 101주년 어린이날 나들이 때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길 바라봅니다.


저희집엔 1993년 발행된 명광출판사의 ‘위대한 만남’ 전집 중 일부가 있습니다. 무려 30년 가까이 된 이 책은 고모가 물려주셨어요. 고모도 누군가로부터 물려받은 책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좋아서 버리지 못하고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제가 아이를 낳자 물려주신 겁니다.

그래서 저희집 어린이는 『안나의 빨간 외투』를 1993년 발행 버전으로 읽었습니다. 유치원 다니던 시절 가장 좋아하던, 그래서 닳도록 읽은 그림책이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해봤더니 2002년 비룡소에서 출판했더군요. 덕분에 소개할 수 있었고요.

이 책은 전쟁 직후 안나의 엄마가 안나에게 빨간색 새 외투를 마련해주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이제 죽음을 걱정하진 않아도 되지만, 여전히 먹고 살길은 막막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 외투라니, 배부른 소리죠. 하지만 엄마는 아이에게 새 외투를 선물하기 위해 농장 주인, 실 잣는 할머니, 옷감 짜는 아줌마, 재봉사 아저씨를 찾아갑니다. 이들은 엄마에게 금시계나 램프, 목걸이, 찻주전자 같은 걸 받고 양털을 내주고, 실을 자아주고, 옷감을 짜주고, 외투를 만들어 주죠.

빵이나 감자 같은 먹을거리도 구하기 힘든 시절, 과연 금시계나 목걸이 같은 게 필요했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엄마와 아저씨,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는 안나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싶었을 겁니다. 전쟁으로 아이가 꿈을 포기하거나 좌절한 채 살길 원치 않았을 테죠. 그래서 기꺼이 안나의 외투를 만드는 데 동참했을 겁니다.

그런 어른들 덕에 안나는 시종일관 밝습니다. 비록 안나는 유년 시절 전쟁을 겪었지만, 이런 어른들이 있었기에 건강하게 자랐을 겁니다, 분명.

어린이날 100주년, 좋은 그림책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다 조카의 아이에게 물려준 고모처럼, 먹고 살기 팍팍한 와중에 안나의 외투를 기꺼이 만들어준 그 어른들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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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 중인 남편에게 최근 회사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은 남편이 기운 빠진 표정을 짓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혹시 이직할 생각 없냐고 묻네. 아는 분이 다른 회사에 있는데, 휴직자 중에 괜찮은 사람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나 봐.”

저도 육아휴직을 했습니다. 하지만 휴직 기간 동안 이직 제안을 받아본 적은 없어요. “저 사람은 육아하려고 휴직했다”고 굳게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희 남편에 대해선 사람들이 “회사에 다닐 생각이 없어서 휴직했다”고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이런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성별’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이민정 기자가 인터뷰한 썬데이파더스클럽은 육아일기로 뉴스레터를 보내는 아빠들의 모임입니다. 인터뷰를 해보니 5명 중 4명이 육아휴직을 했거나 하는 중이었죠. 그런데 이 아빠들도 다들 “이직할 거니?”란 얘기를 들어봤다고 합니다.

육아하는 아빠들이 늘고 있습니다. 라떼파파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요. 실제로 남성 육아휴직자는 2015년 8200여명에서 2020년 3만8500여명으로 5배 가까이 늘었고요. 그런데도 여전히 이들은 다양한 편견에 시달립니다.

육아에 관한 한 성별에 따른 차이가 분명 존재합니다. 차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차이죠. 이 차이는 비단 불이익을 주로 받는 성별, 그러니까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불편과 불이익이 될 수 있고요. 엄마·아빠가 아니라, 남성·여성이 아니라 그저 양육자로 바라봐 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출산율은 돈 몇 푼 더 쥐여준다고 올라가지 않을 거예요. 육아를 둘러싼 다양한 차별이 사라질 때 비로소 올라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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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다 보면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양육자라면 공감하실 거예요. 다들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하는데, 유독 거슬리는 것들이 있잖아요. 오늘 신의진 교수를 찾아온 상담자도 그랬습니다. 남편도, 어린이집 선생님도 “문제없는 것 같다”고 하는데, 상담자 눈엔 아이가 자동차 바퀴를 굴리는 행동을 반복하는 게 걸렸어요. 신의진 교수는 “괜찮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꺾이지 않고 서둘러 찾아온 걸 칭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 상담자의 아이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걷거나 눈을 흘기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등의 행동을 했습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놀 때도 바퀴를 굴리는 행동을 반복했고요. 대화할 때 눈 맞춤을 제대로 못 하기도 하고요. 신의진 교수는 “눈에 띄는 행동은 운동 기능 발달이 늦어져 생길 수 있다”면서 “그보다 눈 맞춤을 잘 못 하는 게 걸린다”고 했습니다.

눈 맞춤은 사회성 발달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체크하는 첫 번째 척도라고 합니다. 생후 3개월이면 눈 맞춤을 하며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시작한다는 겁니다. 말 못하는 아기의 사회성이 제대로 발달하는지를 확인하려면 눈 맞춤 여부를 확인하라는 게 신의진 교수의 조언이었습니다.

일반인과 전문가의 눈이 이렇게 다릅니다. 양육자의 눈에 거슬리던 이상 행동보다 눈 맞춤이 더 중요한 신호라니 말입니다. 혹시 우리도 아이가 보내는 이상 신호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번 주 ‘괜찮아 부모상담소’를 찬찬히 정독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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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다음 주에도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금요일엔 hello!Par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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