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크닉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좋은 브랜드를 탐닉하는 윤경희 기자입니다. 최근 유럽에선 패션위크가 한창입니다. 16~20일 런던에 이어 다음 주엔 파리에서 패션위크가 열려요. 아쉽게도 올해는 못 갔지만, 유럽에 출장을 가면 꼭 시간을 내 들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숙소가 있는 동네의 그로서리 마켓이에요. 그로서리 마켓은 커피와 간단한 먹을 거리를 파는 식료품점입니다. 편안한 차림으로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산책길에 잠시 앉아 커피와 빵을 먹고, 그날그날 필요한 소소한 식료품을 사는 동네의 사랑방 같은 곳이죠. 동네의 한가로움과 일상이 녹아 특유의 분위기를 가집니다. 우리로 치면 동네 수퍼+동네 카페를 결합한 개념인데, 하나의 브랜드가 된 곳으로는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타치 마켓’이 잘 알려져 있어요. 최근엔 국내에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공간이 속속 생기고 있어요. 오늘은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보마켓’을 소개하려 해요. 동네의 일상을 담는 브랜드이자 공간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생활밀착형 동네 마켓을 지향하는 보마켓 경리단점. 사진 보마켓


그게 뭐든, 동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걸 파는 가게

2년 전 패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 ‘야외에서 떡볶이에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멋진 공간이 생겼다’는 입소문이 돌았어요. 보마켓의 2호점인 경리단점이었죠. 떡볶이에 와인이라니, 생소한 조합이지만 구미가 당겼어요. 가게 안에 있는 와인을 골라 빵이나 떡볶이를 사서 같이 먹어도 되고, 가게에 설치한 팬트리에서 먹고 싶은 치즈나 감자칩 같은 간단한 안줏거리를 집어와서 먹어도 되는, 자유롭고 캐주얼하게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이곳,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다른 한쪽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그릇과 플라스틱 쟁반, 그물 장바구니, 러그 같은 아기자기한 생활용품까지 팔아요. 이곳의 업태를 뭐로 정의해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죠. 동네 수퍼이자, 편의점이자, 식료품 가게이자, 브런치 카페. 이곳을 만든 유보라 대표는 이런 공간들을 한데 합친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공간 분류로는 딱 떨어지지 않는 거예요. 보마켓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냐는 질문에 유 대표는 “생활밀착형 동네 마켓”이라고 답했어요.


2014년 문을 연 보마켓 1호점(남산점)의 입구. 사진 보마켓


보마켓의 시작은 2014년 유 대표가 살던 ‘남산맨션’이라는 남산 끝자락에 있는 작은 아파트 단지부터예요. 100가구 남짓이 사는 외딴 섬 같은 단지인데, 남산이 만들어내는 운치는 좋았지만 주변에 대형마트나 카페 등 상업시설이 없어 일상생활엔 불편함이 있었어요. 가깝게 식료품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아파트 1층에 있던 수퍼마켓이었는데, 그곳이 그만 문을 닫아 버린 겁니다. 유 대표는 그 자리에 자신이 즐겨 먹지만, 그 동네에서 사기 어려운 식료품을 직접 팔기로 했어요.

“시작은 생수 좀 마음 편하게 먹어보자-였어요. 당시엔 지금처럼 식료품 배송이 쉽지 않았거든요. 생수 한 병을 사려 해도 차를 타고 나가야 했어요. 어린 시절 갈 때마다 기분 좋았던 수입 과자 가게의 기억을 떠올려, 제가 동네 가게에서 사고 싶은 콜라나 와인, 꽁치통조림과 시리얼, 수세미 같은 수입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들여놓고 팔게 됐죠.”

퇴사 후 창업 같은 인생 2막의 결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직장을 다니면서 말 그대로 '우리 동네에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가게를 만든 겁니다. 인테리어와 상품 구성도 직접 친구와 놀면서 했어요. 가게를 차리기로 마음 먹고 3달 동안 친구와 텅 빈 가게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여기엔 뭐를 놓을까’ ‘색은 뭐로 칠할까’하며 지냈답니다. 그러던 하루 할머니 한 분이 아파트에서 내려오시더니 “대체 문을 언제 열 거냐. 가게 열기 기다리다 죽겠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때 알았어요. 나만 이런 가게가 필요한 게 아니었구나. 다른 아파트 주민들도 슬리퍼를 신고 쉽게 가서 먹을 것을 사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는 것을요. 정신이 번쩍 들어 속도를 내 가게를 오픈했어요.”


보마켓 남산점의 냉장고. 사진 보마켓


UX 디자이너가 풀어낸 ‘생활밀착형 마켓’

보마켓은 지금 가장 인기있는 공간 중 하나로 꼽힙니다. 힙한 공간을 찾는 MZ세대부터 3~4인 가구 동네 주민까지 이곳을 찾아요. 하지만 보마켓의 ‘명성’만 듣고 방문한 사람 중엔 실망감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어요. 입이 떡 벌어지는 세련된 공간 디자인이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물건을 갖춘 곳은 아니거든요. 파는 음식은 햄버거·샌드위치·샐러드·떡볶이 같은 가벼운 메뉴들이고, 판매하는 생활용품도 어떻게 보면 소소하다 할만한 것들이죠. 그런데요. 자꾸 눈이 가고 발길이 향한다는 사람이 많아요. 브랜드는 이들과 협업하고 싶어 줄을 서고요. 이유가 뭘까요.

답을 얻으려면 유보라란 사람을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지금은 보마켓에 전념하고 있지만, 유 대표는 자동차 UX(사용자 경험) 디자이너로 오랜 경력을 쌓았어요. 대학에선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고, 졸업 후 한국과 일본 자동차회사에서 근무하며 콘셉트 카를 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엔 집 짓기 놀이를 가장 좋아했던 소녀였데요. 코로나19가 퍼지기 전 3년간 근무한 일본에선 오모테산도, 나카메구로 지역에 살았어요. 일본 중에서도 라이프스타일 문화가 풍부한 곳으로 손꼽히는 동네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일본과 해외에서 접했던 ‘좋은 동네 마켓’을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어요. 그는 그 시작과 끝은 “보마켓을 찾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제가 만약 라이프스타일과 연관된 분야에서 일했거나 이게 직업이었다면 시각이 달랐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직종이 자동차라는 무거운 분야이다 보니, 오히려 고객의 행동을 더 많이 관찰하게 됐어요. ‘왜 이걸 좋아하지’ ‘왜 저렇게 하시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판매할 상품을 구성하고, 동선을 잡아요."


보마켓의 유보라 대표. 보마켓의 ‘보’는 유 대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사진 본인 제공


UX디자이너로서 사용자의 관심과 움직임을 관찰하고, 경험을 설계했던 노하우를 그대로 동네 마켓에 녹여 낸 거예요. 그래서 보마켓 집기는 대부분이 움직이기 쉬운 것들이에요. 시기에 따라, 고객의 관심에 따라 진열 방법을 다르게 바꾸기 위해서요. 얼마 전에는 경리단점의 잘게 나누어져 있는 진열장을 하나로 텄답니다. 고객들이 더 편하게 그릇과 상품을 집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사료·배식그릇 등 강아지 용품은 강아지가 가게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코를 들이대는 곳에 놓고, 크레파스는 아이들의 시선이 닿는 조금 아래쪽 선반에 배치합니다.

“저는 이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물건에 관심이 있는 소비자의 시선에 맞춰서 상품을 놓아야 쉽게 볼 수 있잖아요.”


타깃 고객의 시선에 맞춰 정리돼 있는 잼, 과자 등 식료품들. 사진 보마켓


‘동네의 맥락’ 담긴 어른들의 놀이터

보마켓에서 동네 사람들은 단순한 고객이 아닙니다. 마켓에 놓을 물건을 고르는 머천다이저(MD)이자, 공간의 콘텐트를 만들어가는 기획자죠. 유 대표는 이들이 원하는 것을 보고 듣고, 여기에 자신의 바람과 감각을 담아 정리해 보여줍니다. ‘주인이 좋아하는 예쁜 것들’을 보여주는 편집숍이 아니라, ‘이용자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하는 공간인 겁니다. 동네 사람들의 취향이 담긴 생활밀착형 플랫폼이라 말할 만 해요.

“마케팅도 브랜드 전략도 없었다”고 말하지만, 유 대표는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지켜보고(고객 리서치), 이를 자신의 색깔로 해석한 상품을 선정하고(상품 기획), 이를 발 빠르게 내놔 반응을 보고(AB 테스트), 실제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골라 본격적으로 판매(상설화)하는 과정을 본능적으로 실행하고 있었어요.


일러스트레이터 티보 에렘이 그린 보마켓과 강아지 장미. 사진 보마켓


특히 단골은 보마켓의 콘텐트를 함께 만들어가는 파트너예요. 먼저 보마켓에서 판매하는 그림 카드를 볼까요. 1호점의 전경과 가게 밖을 내다 보고 있는 강아지 그림(유 대표의 반려견 장미. 실제로 늘 이 모습으로 가게에 앉아 있었다)인데요, 남산맨션에 3개월간 머물던 일러스트레이터 티보 에렘이 그렸어요. 티보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그린 작가로 지난해 방영한 드라마 ‘그해 우리는’에서 주인공 최우식이 그린 그림의 원작자이기도 하죠. 아침마다 보마켓에 와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는 그에게 유 대표가 가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일상 속 건물과 식물을 소재로 삼아온 그는 흔쾌히 수락했어요.

6년간 1호점을 운영해온 유 대표가 경리단길에 2호점을 낼 때도 그랬어요. “멀리서 오는 손님들 앉으라고 자리를 양보하는 동네 주민들을 보니, 그분들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는 매장을 하나 더 내야겠더라고요. 그랬더니 주변에 먹을만한 빵집이 없다고, 빵집도 만들어 달라 하셨어요. 어떡해요, 만들었죠.”

보마켓이 운영하는 5개의 매장은 같은 곳이 없어요. 브랜드 컬러와 톤은 유지하되, 매장마다 음식 메뉴와 선보이는 상품이 다릅니다. 인테리어와 상품 진열 방식도요. 프랜차이즈처럼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고 그대로 확산하면 쉬울텐데, 굳이 지점마다 차별화를 두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의 기본이 동네 마켓이니, 지역별로 다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네가 가진 맥락이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고, 어떤 것들을 찾는지요.”


보마켓 서울로점. 사진 보마켓


가장 최근에 생긴 5호점 신촌점. 사진 보마켓


가장 최근에 문을 연 신촌점은 ‘에피소드’이라는 공유 주거 공간 1층에 자리 잡았어요. 동네 생활밀착형'을 강조하는 유 대표는 이곳에 매장을 열면서 아예 집을 이곳으로 옮겼어요. 직접 이 동네 주민이 되기로 한 거죠.

“여기 와서 동네를 계속 돌아다녔어요. 이 근처에 편의점, 동네 수퍼, 다이소, 심지어 백화점까지 근처에 있는데, 우리는 그곳과는 다르게 가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직접 이곳에 살면서 동네 주민이 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겠더라고요. 지금은 매장이 많이 비어있는 상태예요. 이곳의 기존 상권과 상생하면서 주민들이 놀러 올 수 있는 공간을 그리며 천천히 채워가고 있습니다.”

일본 디자이너 하라 켄야는 “좋은 디자인이란 ‘생활’이라는 살아있는 시간의 퇴적이, 필연성에서 비롯된 형태를 한층 완성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했어요. 그의 이야기는 디자인뿐아니라 공간과 브랜드에도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네 사람들의 생활에 그 근간을 두고 있는 보마켓이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하고요. 어른들을 위한 놀이터가 되겠다는 보마켓, 앞으로 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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