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형의 퍼스펙티브] 첨단 재생의료 활성화 막는 한국판 ‘붉은 깃발법’ 없애야

     ━  첨단 의료기술 육성 전략    이광형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답게 자동차도 처음 만들어 이용했다. 그러나 자동차가 등장하자 기존의 마차업자들과 마부들이 피해를 보게 됐다. 그래서 영국은 1865년 자동차의 등장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마차를 보호하기 위해 법을 만들었다. ‘붉은 깃발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자동차 한 대에는 반드시 운전사·기관원·기수 등 세 명을 두도록 했다. 시내에서 최고 속도는 시속 3.2㎞로 제한했다.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55m 앞에서 차를 선도하도록 했다. 즉 자동차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붉은 깃발을 앞세워야 했다. 이런 식으로 자동차가 마차보다 빨리 달릴 수 없게 했다.   붉은 깃발법은 1896년까지 31년간 유지했다. 이 법은 영국의 자동차 산업을 옥죄면서 산업의 주도권을 독일·미국·프랑스 등에 내주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국이 우스꽝스러운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에는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  「 19세기 영국, 시대착오적 규제로 신생 자동차 산업 발목 잡아 21세기 한국은 세포·유전자 치료 분야서 비슷한 실책 되풀이 전 세계 재생의료 시장 규모 2028년 280조원으로 커질 전망 재생바이오법 개정안 국회 통과는 다행, 시행령도 정비해야 」    난치성 질환 치료법으로 주목   퍼스펙티브 우리 몸에 병이 생겼을 때 전통적인 방식은 주로 화학 물질을 먹거나 몸에 주입하는 식으로 치료한다. 반면 세포치료 기술도 있다. 살아있는 세포를 배양해 몸에 주입함으로써 질환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 세포치료는 기존 치료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난치성 질환에서 새로운 치료법으로 기대를 모은다.   세포치료는 크게 체세포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로 나눌 수 있다. 체세포 치료는 환자의 체세포를 채취·배양해 환자의 몸에 주입한다. 새로운 세포가 몸에 많이 들어가 손상된 세포를 대체한다. 체세포 치료제에는 피부 화상, 흉터, 퇴행성 관절염 등에 적용하는 피부세포 치료제와 연골세포 치료제 등이 있다. 인간의 피부나 심장 세포를 채취해 배양하기 위해서는 인체 내부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고 영양분을 제공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초정밀 세포 배양 시스템이 구축돼 있어야 한다.   줄기세포 치료는 줄기세포를 배양해 환자의 몸에 주입한다. 줄기세포란 한 개의 세포가 다양한 종류의 세포로 발전할 수 있는 세포를 말한다. 이런 줄기세포는 손상된 신체 부위의 세포들을 재생할 수 있다. 줄기세포는 피부 조직의 노화, 퇴행성 질환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심혈관질환, 관절염, 당뇨병 등에 줄기세포 치료가 사용된다. 뇌·척수 신경이나 심장 근육이 손상됐을 때 환자의 회복을 도와줄 수도 있다.   유전자치료는 유전자에 결함이 있는 사람에게 유전자 편집 기술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채취한 체세포나 줄기세포에서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제거해 정상적인 세포로 만든다. 그리고 이 정상 세포를 배양하고 환자의 몸에 주입해 치료한다. 유전자 치료는 유전병에 대한 치료법으로 크게 기대를 받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세포치료(체세포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와 유전자치료를 첨단재생의료라고 부르기도 한다.   줄기·면역세포 연구개발도 활발   초기에 허가받은 세포치료제는 주로 피부세포나 연골세포를 이용한 피부재생·연골결손 치료제였다. 최근에는 암, 퇴행성 질환을 타깃으로 하는 줄기세포와 면역세포에 대한 연구개발이 활발해지고 있다.   세포치료나 유전자치료의 경우 기존 치료제보다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다. 암과 신경 퇴행성 질환, 유전병 등 난치성 질환의 치료를 가능하게 해줄 기술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재생치료제는 연구개발과 상업화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주입된 세포의 효과 미흡, 생명윤리와 관련된 이슈 등이 주된 원인이었다.   최근 들어 세포의 배양·조작 기술과 유전자의 분석·조작 기술 등의 발전으로 기술적 문제들이 상당히 해결되고 있다. 많은 세포치료제와 유전자치료제 제품들이 미국과 유럽 등에서 허가를 받으면서 제도적인 면도 정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지난해 발표한 첨단재생의료 전략포럼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재생의료 시장 규모는 2028년 280조원으로 2017년(30조원)의 아홉 배 이상으로 커질 전망이다. 이 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22.7%로 추산된다. 전체 바이오 의약품 시장에서 재생의료의 비중은 2021년 약 1%에서 2030년에는 약 30%로 확대될 전망이다. 한국에선 2016년 419억원이었던 재생의료 시장이 2026년에는 4190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 바이오의약품 시장에서 재생의료가 1% 남짓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계산이다. 전 세계 바이오 의약품 시장으로 보면 0.1% 수준으로 미미하다.   매년 1만~2만 명이 해외 원정 진료   한국이 재생의료 시장에서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규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유달리 이러한 연구와 시술에 규제가 많아서 이 분야의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매년 1만~2만 명이 주변 국가에 가서 세포치료를 받고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치료비는 1인당 최대 1억원씩 든다고 한다. 해마다 약 1조원의 외화가 외국으로 빠져나간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시작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이 분야는 계속 급성장할 것이고 해외로 유출되는 외화의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의 붉은 깃발법과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다시 산업을 옥죄고 있다.   한국은 2019년 첨단재생바이오법(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재생의료 발전의 초석을 만들었다. 국회는 지난 2월 첨단재생바이오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재생의료 대상자를 희소성이나 난치성 질환자로 제한하지 않고 폭넓게 적용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재생의료를 임상시험뿐 아니라 시술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제한을 없앴다. 다만 시술에 앞서 전문가위원회 심의를 거쳐 허가를 받도록 했다. 매우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임상연구 제약하는 규제 풀어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한다. 앞으로 정부가 할 일은 시행령을 제대로 고쳐 법 개정의 효과가 제대로 반영되게 하는 일이다.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   첫째, 실험실 연구 결과가 임상연구로 원활히 이어지도록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실험실에서 수행한 줄기세포 치료 연구로 임상 연구 허가를 받으려면 세포를 채취하는 시점부터 모든 절차가 정부가 허가한 세포 처리시설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연구기관이나 중소병원에서는 자체적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은 세포 처리시설이 마련돼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실 연구가 임상 연구로 연결되는 데 있어 제약이 많다.   미국의 경우에는 ‘연구자 임상 트랙’이라는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즉 연구 실험실에서 생산한 줄기세포라도 그 생산 과정이 잘 검증된다면 연구자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예외 조항을 두고 실험실 연구가 임상 연구로 원활히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둘째, 연구기관이나 중소병원이 대기업이나 국가의 치료제 생산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현재는 연구자가 대기업이나 병원, 국가시설을 이용해 세포를 직접 배양하는 게 매우 어렵게 돼 있다. 개방형 국가 재생의료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관련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치료제 생산 시설을 개방형으로 하면 비용절감 효과도 얻을 수 있다. 현재는 세포치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일반인들이 이용하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셋째, 재생의료 실시 여부의 심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 심의위원회에 연구자의 참여가 필요하다. 이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선진국 수준의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심의를 너무 까다롭게 하면 연구가 활성화하지 못한다. 그러면 선진국보다 뒤처진 기술 수준을 회복하기 어렵다. 시술의 경우도 포괄적인 허용 방침으로 해야 한다. 해외 원정 진료가 더는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한국판 붉은 깃발법이 일부라도 개선된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그동안 뒤처진 기술 수준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더욱 과감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규제를 논할 때는 국내 요소만 볼 것이 아니라 국제 경쟁과 국부 유출 가능성까지 봐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광형 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2024.04.16 00:32

  • [박원곤의 퍼스펙티브] 확증파괴 능력 없이 핵 공격 감행은 자살 행위일 뿐

     ━  북한은 한국에 핵 공격 할 수 있나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일 “모든 미사일의 핵무기화를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화성-16나’형이라고 명명한 초음속 미사일 발사가 성공했다며, 이로써 북한이 보유한 단거리·중거리·장거리 미사일의 고체연료화와 탄두 조종 능력을 갖췄다고도 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한·미 군 당국의 요격을 피해 기습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가공할 파괴력의 핵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게 된 셈이다.     ■  「 김정은 “모든 미사일 핵무기화” 한·미 훈련 맞서 남침 계획 점검 전쟁은 북 정권 종말 가져올 뿐 군, 건설에 투입하는 편이 현명 」    북한이 지난 2일 평양 인근에서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극초음속 미사일인 ‘화성-16나형’을 발사하고 있다. 북한은 모든 미사일의 핵무기화를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뉴스1] 김 위원장의 이런 언급은 지난해 말 남북관계를 ‘두 개의 적대적인 국가 관계’로 규정한 기조에서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는 지난 2월 8일 건군절에 “한국 영토를 점령, 평정하는 것이 국가의 최고 목표인 국시”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른바 ‘전쟁할 결심’을 연이어 발신한 것이다. 특히 지난달 한국과 미국이 연례적으로 실시하는 ‘자유의 방패’ 연합 훈련을 시작하자, 노골적으로 남침 시나리오를 점검했다.   북한의 전쟁 시나리오   북한이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공개하진 않았지만 최근 북한의 움직임, 특히 최근 시도하고 있는 각종 미사일 시위를 통해 남침 시나리오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전쟁 시나리오의 시작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군사 충돌이다. 한국이 북한의 도발에 대응할 경우 북한은 이를 빌미로 전방에 배치한 장사정포나 다연장로켓으로 서울과 수도권을 공격하고, 전차와 기갑사단을 동원해 남침에 나서는 시나리오가 유력하다. 또 전쟁 초기 주도권을 쥐기 위해 저위력 핵으로 불리는 전술핵을 사용할 수도 있다.   한·미는 연합 작전 계획에 따라 한반도 유사시 대규모의 증원군을 파병하게 되어 있다. 북한이 두려워하는 부분이다. 그런 만큼 북한이 미군이나 연합군의 증원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란 건 상식이다. 괌과 일본 내 유엔사 후방 기지 등을 공격하기 위해 중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이유다.   김 위원장이 지난달 보인 행보는 정확히 이 시나리오에 기초한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6일 서해 북방한계선을 공격하는 서부지구 작전훈련기지에 대한 현지 지도를 시작으로, 수도권 타격 임무를 부여한 포병부대(7일), 전차부대 훈련(13일), 전술핵 탑재가 가능한 초대형 방사포 사격 훈련(18일)을 연달아 챙겼다. 그의 발걸음은 신형 극초음속 미사일 엔진 연소 실험(19일)과 지난 2일 일본과 괌까지 날아가는 중거리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발사로 이어졌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북한은 정말 한국을 침략할 수 있을까. 미국 내 일부 대북 협상파들의 분석처럼 김정은이 제2의 한국전쟁을 결심했을까. 특히,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가 수차례 공언한 것처럼 한국을 핵으로 선제공격에 나설 수 있을까.   북한의 핵 사용 계획은 ‘희망사항’   ‘화성-16나’형 미사일 발사장을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뉴스1] 물론 북한이 핵을 동원한 전쟁에 나설 수는 있다. 하지만 찬찬히 따져보면 북한의 핵 선제 사용은 희망 사항일 가능성이 크다. 군사전략과 핵교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북한은 답이 없는 수수께끼다. 북한이 추진하는 전략은 역사적 사례나 이론적 측면에서 모두 생소하기 때문이다.   핵을 사용하기 위해선 2차 공격 능력 확보가 필수다. 내가 핵을 사용했는데 상대가 더 많은 핵으로 공격해 온다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확증 보복 능력’이라고도 불리는 2차 공격 능력을 못 갖춘 국가가 미국 같은 핵 능력 보유 국가를 상대로 핵전쟁을 시도하는 건 자살 행위다. 북한은 미국과 대등한 핵 능력을 갖출 수 없다. 미국은 핵 대응의 3대 요소인 사용 억제, 사용 시 방어, 사용 후 반격 측면에서 모두 절대 우세다.   북한이 지난해 11월 정찰위성 한 기를 발사했지만, 정찰 능력은 미국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다. 미국은 북한이 핵을 사용할 조짐을 위성과 다양한 정찰 장비로 사전에 탐지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무기 사용 움직임이 명확하다면 정밀 타격을 통해 저지할 수 있다. 이는 ‘작전계획 5015’의 일부이기도 하다. 사전 제거에 실패하더라도 알래스카와 미 본토에 구축된 미사일 방어체계로 요격에 나선다. 이마저도 실패한다면 잠수함 발사 트라이던트 II 등의 전략핵 등 고위력 핵무기로 북한을 사실상 ‘확증 파괴’ 할 수 있다. 이른바 대량 응징보복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자신들이 전쟁을 시작할 수 있고, 특히 재래식 전쟁과 핵전쟁을 섞어 초기부터 핵을 사용하겠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발신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 “유사시 핵 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계속 박차를 가해 나가겠다”는 김 위원장의 언급이 대표적이다.   한반도 전쟁 시 김정은이 가장 큰 타격   일각에선 북한이 한국을 상대로 저위력 핵을 사용한 후, 미국에 “핵 보복 공격을 할 경우 미 본토를 전략핵으로 타격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정치·군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북한이 전쟁 초기 한국의 소도시나 인구가 분산된 지역을 저위력 핵으로 공격하여 공포심을 극대화한 뒤, 미국이 핵으로 반격하려 하면 화성-15·17·18형 등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핵탄두를 실어 워싱턴 DC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핵 보복을 막으려 한다는 가정이다. 북한 입장에선 전면적인 핵전쟁을 하지 않고도 미국의 개입을 막고 전쟁 승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의도한 대로 될까. 우선 한·미가 보유한 미사일 다층 방어체계를 뚫기 쉽지 않다. 한·미의 ‘방패’를 뚫더라도 북한 입장에선 문제가 생긴다. 남한 대부분은 인구 밀집 지역이므로 대량 핵 피해가 불가피하다. 즉, 북한이 남한을 핵으로 공격하는 순간 전면전으로의 확전은 불가피하다.   한국은 핵이 없지만, 대형 탄두 탑재가 가능한 현무 5와 각종 정밀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 F-35 스텔스기 등을 동원해 북한 지도부 제거에 나설 수 있다. 북한이 핵을 사용한다면 미국도 핵으로 북한을 응징할 것이다. 핵우산이다. 미국이 북한의 본토 공격을 우려해 핵 사용을 주저하기보다는 오히려 북한의 추가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훨씬 더 강력한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다. 북한은 한·미 연합 전력의 막강한 대응에 직면하고, 이는 정권 종말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김정은이 스스로 파멸하겠다는 비이성적 판단을 하지 않는 한 전쟁 결심은 쉽지 않다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많은 걸 잃게 되는 사람은 한반도 ‘최고 부자’이자 북한의 독점 권력 소유자인 김정은이다.   북한이 재래식 무기와 핵전쟁을 혼합하겠다며 위협 수위를 높이더라도 한·미가 압도적 대응 의지와 능력을 갖춘다면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 그 핵심은 어떤 종류의 핵 공격에도 정권 종말로 이어지는 대규모 응징보복을 가한다는 메시지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54·55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미국의 핵 태세 보고서 등에서 명시한 것처럼 “북한의 어떠한 핵 공격도 용납할 수 없고, 핵 공격은 김정은 정권의 종말을 초래한다”라는 경고를 뒷받침할 수 있는 억제 능력을 갖춰야 한다.   나아가 북한이 핵을 사용하지 않는 한 미국이 북한을 향해 핵을 먼저 사용하지 않는다는 ‘핵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방침을 천명한다면 확전을 막는 데 효과적일 것이다. 이는 북한이 핵을 사용한다면 핵으로 대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 신중해야   반면, 국내 일각에서 제기되는 미국 전술핵의 한국 재배치 주장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전술핵의 재배치는 북한의 저위력 핵무기에 대응해 미국도 제한적 또는 비례적 대응에 그친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군사력으로 한국 영토 전체를 점령하는 ‘영토 완정’을 주장하고 있지만, 전쟁은 김일성으로부터 70여년간 이어진 백두혈통 통치체제 종말을 초래한다. 한·미 작전 계획은 북한의 선제공격을 절대 전제로 작동한다. 따라서, 북한은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선택이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북한이 지난달 4일 국방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밝힌 것처럼 인민의 복리 증진을 위한 경제건설에 대규모 군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현명하다. 전쟁할 결심을 접고 경제를 살리는 것이 현재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2024.04.05 01:01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21세기엔 사과가 리더의 언어…쿨한 사과로 전화위복을

     ━  총선 D-6일, 여당서 쏟아지는 대통령 사과 요구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은 ‘사과를 많이 한 대통령’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변명하지 않겠다” “나한테 책임이 있다” 같은 진솔한 화법으로 야당의 반발을 잠재우고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유형의 리더십으로 기억된다.   2013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오바마 케어(건강보험 개혁)가 웹사이트 장애를 일으켜 혼란과 비난이 빗발쳤을 때다. 오바마는 TV로 중계된 백악관 로즈가든 연설을 통해 “내 책임이다. 문제 개선을 위해 24시간 노력하고 있다”며 공식 사과했다. 그의 재빠른 사과로 정치 쟁점화를 노리던 공화당은 그만 공격의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같은 해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참사 때도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바로 사과했다. 장관이나 실무자들을 비난하지도,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았다.     ■  「 윤 대통령, 이태원·엑스포 사과 변화된 행동 이어지지 않아 실망 “성난 국민 감정 다독여줬어야” 사과 요구 높을 때가 사과의 적기 」    굳이 대통령이 나설 일일까 싶은 것까지도 공개 사과의 정공법으로 난관을 돌파하는 모습은 책임 인정에 인색했던 역대 대통령들과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다. 피해 당사자와 직접 소통해 문제를 해결한 사례는 경영학 서적에 등장할 정도다.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공습으로 국경없는의사회 병원의 의료진·환자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때 발 빠른 대처로 분쟁이 확산하는 걸 막은 게 대표적이다. 당시 오바마는 직접 의사회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한다”며 투명하고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   여기자에 말실수한 뒤 사과 메시지 남겨   김영삼 전 대통령(왼쪽 사진)과 김대중 전 대통령(가운데)이 각각 재임중 아들이 구속 기소된 데 대해 “국민에 걱정 끼쳐 죄송하다”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에 대해 사과하며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중앙포토] 김호·정재승 교수의 공저 『쿨하게 사과하라』는 흥미로운 케이스를 다뤘다. 발단은 2008년 대선 후보 시절, 오바마가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 방문을 동행 취재한 여기자에게 “스위티(sweety)”라고 부르는 실수를 하면서 벌어졌다. 연인이나 친한 친구에게 쓰는 ‘스위티’는 부적절한 언어 선택이었고, 자칫 성희롱 논란으로 불거질 수도 있는 중대 사건이었다. 오바마는 곧바로 잘못을 깨닫고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하려 했지만 통화가 되지 않자 이런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스위티라는 표현을 쓴 것에 사과합니다. 비하하거나 상처를 줄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번 실수를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에게 전화 한번 주세요. 다음에 디트로이트에 올 때 제 홍보팀이 당신에게 보답할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   어떤가. 이런 메시지를 듣는다면 불쾌한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고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피어오르지 않을까. ‘무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인간미 있는 사람’으로 인식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극적 반전을 이끌어내는 데 사과의 힘이 있다.   저자들은 21세기엔 사과가 ‘리더의 언어’가 됐다고 소개했다. 과거 권력자는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하면 권위와 지도력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사과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마지못해 하던 ‘루저의 언어’였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 사과는 리더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됐다. 자신의 잘못이나 책임을 축소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오히려 투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믿음이 생기고, 신뢰가 쌓이면서 갈등과 분쟁 조정이 수월해진다. 공감을 이끌어내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정치력이야말로 리더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일 것이다. 그러니 사과를 하는 게 패자가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사과를 하지 못하는 리더가 21세기엔 패자가 된다.   YS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   사과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선 되지 않는다. 사과의 진정성을 입증할 ‘충분조건’이 필요하다. 충분조건이란 ①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②피해를 준 데 대해 책임을 지며 ③변화된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사과에 대하여』의 저자 아론 라자르는 강조한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임기 말, 차남 김현철씨의 한보 특혜 연루 의혹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그는 1997년 2월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며 국민 앞에 사과했고, 얼마 후 현철씨는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인환 전 공보처 장관은 저서 『김영삼 재평가』에서 “검찰에 진상조사를 주문했지만 이렇다 할 혐의를 밝혀내지 못하자 YS가 불같이 화를 냈다. 현직 대통령 아들을 봐준 수사 결과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별건 수사를 통해 차명 보관 중인 정치자금을 발견했다. 한보 특혜와는 무관했지만 민심을 돌리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YS는 아들의 구속을 지시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두 아들이 사법처리되는 비운을 겪은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2002년 기자회견을 열어 “제 자식들 문제로 국민에게 걱정을 끼친 데 대해, 죄송하고 슬픈 심정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제 자식들이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벌받는 데 조금도 이의가 없다”며 고개 숙였다. “친·인척 감시에 소홀했던 점을 반성한다”며 제도 개혁도 지시했다.   YS·DJ의 경우는 성공한 사과라 할 만하다. 사과의 ‘표현’뿐 아니라 재임 중 아들을 구속하는 구체적 ‘행동’이 뒤따르면서 국민이 진정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변화된 행동을 통해 사과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조언한 라자르 교수의 지적대로다. 정치인, 특히 지도자에게 있어 사과는 고도의 정치 행위인 것이다.   “오만과 독선 보인 데 대해 사과해야”   2013년 오바마 케어 가입 웹사이트의 접속 장애로 혼란이 일자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AP=연합뉴스] 22대 총선(4월 10일) D-6일. 각종 악재로 열세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국민의힘 곳곳에서 대통령 사과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조해진(김해을) 후보는 “국민을 실망시키고 분노케 한 것, 당을 분열시킨 것, 오만과 독선으로 불통의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대통령이 무릎 꿇고 사과하고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특히 윤석열 정권 심판을 캐치프레이즈로 걸고 나온 조국혁신당이 기세를 올리면서 수도권 출마 여당 후보들의 위기감이 급상승하고 있다. 관심을 모았던 윤 대통령의 의료 파업 담화(1일)마저 기대치에 못 미치면서 여권 내 갈등이 심화하는 양상이다. “민심의 방향과 동떨어졌다”거나 “국민들의 성난 감정을 좀 다독여줬어야 한다”는 거친 비판이 나온다. 심지어 “거추장스러운 국민의힘 당원직을 이탈해주길 요청한다”(함운경 마포을 후보)며 윤 대통령을 직격하기도 한다.   돌아보면, 윤 대통령이 사과를 안 한 건 아니다. 2022년 이태원 참사, 집중 호우 등 고비마다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지난해 부산 엑스포 유치에 실패하자 대국민 담화를 내고 “모든 것은 저의 부족 탓”이라고 사과했다. 그런데 왜 국민은 윤 대통령이 사과에 인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윤 대통령으로선 혹평에 서운할 수 있겠으나, 사과의 수용 주체인 국민의 입장에선 변화된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말뿐인 사과’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태원 참사, 엑스포 실패로 사과하긴 했지만 실세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책임져야 할 관료들을 되레 영전시키는 일이 벌어지니 납득할 수도, 사과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 아닐까.   아리송한 디올백 논란 사과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수수 논란에 대한 해명과 사과는 여권 내에서도 논란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월 “(백을 선물한 목사가) 자꾸 오겠다고 해서 그거를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책임을 인정한다는 건지 아닌지 아리송한 화법이다. “일관된 원칙과 잣대는 제 가족, 제 주변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던 후보 시절 발언과도 180도 다르다. 설치를 검토한다던 제2부속실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게다가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던 김 여사의 약속도 식언이 돼버리면서 국민은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여권이 사과에 인색한 데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트라우마 때문이란 얘기도 나온다. 최순실과의 연관 고리를 쉽게 인정하는 바람에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줘 결국 탄핵에 이르렀다는 후회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의 비극은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과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공멸을 막을 정치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표류하며 시간을 허비한 정치력 부재 탓이 크다. 엊그제 로이터통신은 김 여사가 지난해 12월 15일 이후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게 “김 여사가 부정적 논평으로부터 여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란 해설 기사를 게재했다. 뼈아픈 지적이다.   100% 완벽한 정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공(功)과 과(過)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고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드는 사과의 기술, 즉 정치력에 달렸다. 쇠도 달궜을 때 치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게 타이밍이다. 상대가 들을 자세가 돼 있을 때 진정성 담긴 사과를 해야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사과 요구 높은 지금이 바로 그때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4.04 00:54

  • [박현도의 퍼스펙티브] 계층·국가 간 빈부차 커지면서 테러 조직도 돈이 우선

     ━  모스크바 인근 테러와 후폭풍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지난달 22일 금요일 저녁 8시쯤 모스크바 북서쪽 크라스노고르스크에 위치한 크로쿠스 시티홀 음악 공연장에서 테러가 발생해 144명이 죽고 360명 이상이 다쳤다. 극단주의 테러로 악명이 높은 IS는 이번 테러를 자신들이 저질렀다고 밝혔다. 미국은 테러 발생 가능성을 러시아에 미리 알려줬다고 하면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이번 테러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애써 강조했다. 사건 발생 직후 러시아 당국은 주범 네 명, 공범 여덟 명 등 모두 열두 명의 테러범을 체포한 후 조사에 들어갔다.     ■  「 러시아 “범인은 급진 이슬람주의자”…우크라이나를 배후로 지목 미국 등은 아프간에 거점 둔 IS 호라산 지부의 독자 행동으로 판단 정확한 테러 배후 규명은 어려워, 각자 유리한 대로 ‘음모론’ 팽배 모스크바 테러범 740만원에 비인간적 범행…테러 세계 확산 기세  」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의 테러 현장에서 한 시민이 지난달 26일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을 놓고 있다.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 조직인 IS는 이번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배후에 있다고 지목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사건 발생 사흘째인 지난달 25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주범이라면서도 누가 이번 테러에서 이익을 얻는지 반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도 책임이 있다는 걸 암시했다. 며칠 후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돈과 암호화폐를 받은” 범인들이 잔금을 받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향하다가 잡혔다고 밝혔다. 결국 우크라이나가 급진 이슬람주의자를 매수해 러시아에 테러 공격을 가했다는 말이다.   미국 “우크라이나는 테러와 무관”   미국과 서유럽은 러시아가 테러를 빌미로 우크라이나에 맹공을 가하기 위해 테러의 배후로 우크라이나를 지목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미국과 서유럽은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러시아 항쟁을 지원한다. 일단 배후를 제외한다면 범인은 IS나 급진 이슬람주의자다. 러시아는 IS라는 말을 쓰지 않았는데 IS는 사건 직후 자신들이 테러를 벌였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더 구체적으로 IS-K(IS의 호라산 지부)를 지목했다.   IS의 기관지 알아으막은 안보 소식통을 인용해 “IS 전사들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외곽 크라스노고르스크에 모인 기독교인들을 공격해 수백 명을 죽거나 다치게 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기지로 안전하게 철수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테러범 네 명이 테러를 결의하는 사진과 상세한 공격 내용도 담았다. 그러면서 이번 공격이 IS와 이슬람에 맞서 싸우는 국가 간 전쟁이라는 자연스러운 맥락에서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보도에는 테러를 저지른 조직이 IS-K라는 말은 없지만 서구 정보당국과 언론은 IS-K가 테러를 독자적으로 계획하고 수행했다고 봤다.   독일·프랑스도 테러 위협에 시달려   지난달 28일 IS 기관지 안나바는 러시아가 실패를 인정하기보다는 은폐하고자 서구 십자군 국가들이 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적국인 서구를 테러 공모 혐의로 비난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고 조롱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이란이 지난 몇 년 동안 IS 전사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패배를 인정하기보다는 서구를 비난했다고 꼬집었다. 더 나아가 IS 전사들의 공격에 배후가 있다는 ‘음모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전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으니 패배를 인정할 준비를 하라고 충고했다. 음모론을 집어치우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경고다. 모스크바 이외의 다른 십자군 국가의 수도에서도 유사한 공격을 하겠다는 말이다.   IS는 독일 뮌헨의 얼라이언스 아레나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 “그들이 나올 때 잡아라”는 위협적인 메시지를 아랍어로 발표했다. 올여름 파리올림픽을 앞둔 프랑스는 모스크바 테러 이후 경계 태세를 최고 단계로 격상했다.   IS-K 후원자는 파키스탄 정보국?   그럼 도대체 IS-K는 어떤 조직인가. 2011년 시리아 내전을 틈타 ISI(이라크의 IS)와 ISS(시리아의 IS)가 합쳐 ISIS(이라크와 시리아의 IS)가 됐다. ISIS는 2014년 6월 29일 자신들이 점령한 이라크와 시리아 땅을 통합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선포하면서 스스로를 IS(이슬람 국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전 세계 무슬림들은 IS의 급진적이고 잔혹한 이슬람은 진정한 이슬람이 아니므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계 언론을 향해 IS라는 말 대신 다이시(Daish 또는 Daesh)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IS의 아랍어 표기에서 앞글자만 따서 만든 말이다. 뜻은 IS나 다이시나 같지만 무자비한 범죄 조직이 스스로를 이슬람 국가라고 부르는 것을 영어에 익숙한 전 세계인들이 비판 없이 받아들일까 걱정해서다. 무슬림들이 꿈꾸는 이슬람 국가는 테러 분자들의 IS가 아니기 때문이다.   IS-K는 IS의 호라산 지부로 아프가니스탄을 거점으로 삼는다. 페르시아어로 해가 뜨는 곳을 뜻한다는 호라산은 현재 이란 북동부 지역을 차지하는 주의 이름이다. 전통적으로는 이란·아프가니스탄·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까지 포함하는 너른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IS-K는 역사적으로 호라산으로 불린 곳을 모두 다스리겠다는 큰 꿈을 꾸고 있다.   사실 IS-K는 파키스탄 정보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에도 탈레반이 있는데 이들 조직 이름은 타흐리케 탈레반 파키스탄(TTP)이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마찬가지로 파슈툰족이 중심이다. 이들은 파키스탄 군경을 대상으로 싸우면서 독립 국가 건설을 추구한다. 파키스탄 정부에는 발로치스탄족 독립 세력과 함께 골칫거리다.   탈레반과 IS-K는 적대적 관계   펀잡 출신 파슈툰이 주축인 파키스탄 탈레반 역시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다. 내부 갈등으로 파벌이 발생하자 파키스탄 정보국이 불만 세력의 지도자인 하피즈 사이드 칸(1972~2016년)을 매수해 세력을 만들고 지원했다. IS-K의 시작이다. 일설에 따르면 2013년 하피즈 사이드 칸이 IS에 충성을 맹세해 호라산 지부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확실한 것은 IS가 아니라 파키스탄 정보국에서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파키스탄 정보국은 왜 IS-K를 지원했을까. 무엇보다도 파키스탄 탈레반 세력을 분열시키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도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IS-K의 주축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 지역에 사는 오라크자이 부족이다.   IS-K는 현재 탈레반과도 적대적이다. 모스크바 테러 직후 탈레반은 IS-K를 비난했다. IS-K는 “서방과 동방 십자군의 동맹이 돼 테러를 규탄한” 탈레반을 배교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IS-K의 비난과 달리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 똬리를 튼 IS-K를 서방의 끄나풀로 인식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을 뒤흔드는 서방의 전초대로 여기는 것이다. 이들 뒤에는 미국과 파키스탄이 있다는 말이다.   ‘적의 적은 친구’, 복잡한 이해관계   IS나 IS-K를 보는 눈은 복잡하다. 순수한 테러 단체로 보면 간단한데, 저마다 이들 배후에 어떤 나라가 있다고 보는 ‘음모론’이 팽배하다.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나라는 미국·영국·이스라엘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보기관인 미국 중앙정보국(CIA), 영국 해외정보국(MI6), 이스라엘 모사드다. 그럴싸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리아 내전에서 이란과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 편에 섰고, 미국·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카타르는 반군을 지원했다.   반군과 급진 이슬람주의자 세력인 안누르라 전선이 합해 만든 조직이 IS인데, 이들이 미국과 아랍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IS 전사들이 다치면 치료를 해줬다. 또 IS가 시리아 정부군과의 싸움에서 밀리면 미국 공군이 나서 지원 폭격해 전세를 뒤집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IS 공군이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IS를 서방이 만들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마음으로 지원한다고 여긴다. 이번 모스크바 테러에서 푸틴이 급진 이슬람주의자의 배후를 말하는 이유다. 반면 IS는 기관지를 통해 밝혔듯이 IS 전사들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본 측이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서 늘 음모론을 들고 나온다고 일축한다.   테러의 정확한 배후를 밝히는 것은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난해 10월 7일에 발발해 여전히 진행 중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후 크고 작은 테러가 2024년 세계를 위협할 기세다. 이번 모스크바 테러에서 돈이 테러의 중요한 원인이 된 점은 특히 주의할 일이다. 코로나19 이후 계층이나 국가 간 빈부차가 큰 현실에서는 잘못된 종교적 신념보다 돈이 더 매력적이다. 모스크바 테러범은 740만원에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2024.04.02 01:07

  • [김현철의 퍼스펙티브] 의료 가성비 악화의 공범…자기부담금 50% 이상으로 올려야

     ━  실손보험이 대한민국 의료체계 개혁의 주요 과제인 이유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정책학과 교수, 의사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직후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재외 국민이 모국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건강 검진과 병원 순례다. 전 세계에 대한민국처럼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저렴하고 신속하게 제공하는 나라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손보험 유무로 치료 달라진다고?   병원에서 받은 첫 질문은 “실손 보험 있으세요?”였다. 의학적 필요가 아닌 실손보험 유무로 치료를 다르게 하겠다는 이 말이 경제학자인 내게는 위태로운 대한민국 의료보험체계의 구조 신호(SOS)로 들렸다.     ■  「 불필요한 의료서비스 줄이는   본인부담금 순기능 잘 살려야     안과·정형외과 등에 혜택 많아 필수의료 부족사태에도 한몫   비급여항목 가격 통제 강화하고   실손 폐지 포함해 담대한 개혁을 」    직원은 “건강보험에서는 비급여지만 각종 검사와 피로 해소에 도움이 되는 비타민 주사 등은 실손보험 청구가 가능하다”며 실손 보험이 없는 40대 중년 남자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물론 그 직원은 주사의 효능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실손 보험이 대한민국 의료를 어떻게 위태롭게 하는지 살펴보자.   가성비 높은 대한민국 의료 체계   우리나라 국민 건강과 의료 서비스의 수준은 경이롭다.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보건통계(Health Statistics)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수명은 83.6세로 OECD 38개 조사 국가 중 3위다. 사망률도 낮다. 순환기계 질환 사망률은 조사 대상국 중 최저, 암 사망률은 세 번째로 낮다. 생명을 다루는 필수 의료의 영역인 회피 가능한 사망률 역시 다섯 번째로 낮다.   차준홍 기자 우리는 이러한 눈부신 성취를 비교적 저렴하게 달성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 의료비는 9.3%로 OECD 국가 평균수준(9.7%)에 미치지 못한다. 비교적 적은 돈을 쓰고도 높은 성취를 이루었으니, 한마디로 ‘가성비’가 높다.   건강보험의 본인부담금은 우리나라 의료서비스를 효율적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개인이 입원 시 20%, 외래진료는 병원 종류에 따라 의원 30%, 병원 40%, 종합병원 50%, 상급종합병원 60%를 본인부담금으로 낸다. OECD 국가 평균인 약 20%에 비해 높은 편이다. 그래서 과도한 의료비 지출을 막고자 본인부담 상한제를 도입했다. 일정 수준을 넘는 본인부담금은 면제된다. 그 결과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잘 굴러가는 의료시스템을 만들었다. 적절한 본인부담금이라는 인센티브의 마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덕적 해이 막는 적정 본인부담금   사실 본인부담금은 양날의 검과 같다. 적정 수준의 본인 부담금은 불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보건경제학에서는 도덕적 해이를 막는다고 한다(Einav and Finkelstein, 2018). 그런데 본인부담금이 너무 높다면 꼭 필요한 의료서비스마저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 너무 낮아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공짜거나 싸니까 꼭 필요하지 않아도 병·의원을 이용할 수 있다.   차준홍 기자 일본은 70세 생일이 되면 의료비의 본인 부담이 30%에서 10%로 줄어든다. 소득이 적은 노인들을 경제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정책이다. 의료비가 싸지니 입원과 외래 진료가 10% 정도 증가했다. 그 결과 목표했던 전체 본인부담 의료비는 줄지 않았다. 사망률, 주관적인 건강, 정신 건강의 변화도 없었다(Shigeoka, 2017). 본인 부담금을 낮춘 것이 별 소용이 없었다.   반대로 미국에서는 노인의 태어난 달에 따라 약값 본인부담금이 크게 차이 나는 제도의 허점이 있었다. 이를 분석해보니 본인부담 약값 100달러가 증가하면 고지혈증 및 고혈압 치료제의 사용이 줄고, 노인 사망률이 13.9% 증가하기도 했다(Chandra, 2021).   우리나라는 “복지 줬다 뺏기”의 고난이도 개혁을 관철시켜 본인 부담금의 순기능을 강화한 역사가 있다. 과거 의료급여 1종 대상자는 외래 진료와 약국이 공짜였다. 그 결과 의료 과소비라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막기 위해 2007년 7월 1000~2000원의 본인부담금을 신설했다.   홍콩과기대 최윤지 박사는 이들과 비슷하게 가난하지만 본인부담 수준의 변화가 없었던 의료급여 2종 대상자를 의료급여 1종 대상자와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작은 본인부담금 도입으로 외래 진료가 10% 가까이 줄어들었고, 물리치료는 16.3%가 감소했다. 경증치료만 줄어들었고, 꼭 필요한 만성 질환의 치료는 변화가 없었다(Choi, 2023).   13조원 넘어선 실손보험 청구액   차준홍 기자 우리나라 의료의 가성비는 급격히 악화하는 중이다. 한국의 GDP 대비 총 의료비 증가 추세는 OECD 국가 중 1위다. 의료비가 많이 늘어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고령화와 소득 증가다. 그런데 그 공범이 바로 실손보험이다. 2016년 이미 7조원이었던 실손보험 청구액은 2021년 13조 2000억원이 됐다. 같은 해 건강보험의 총진료비 93조 5000억원의 14% 수준이다.   실손보험은 2003년 도입돼 계약 건수가 2006년 1000만 건, 2009년 2000만 건, 2022년엔 4000만 건을 넘어섰다. 처음엔 의료비가 사실상 공짜였다. 2009년 이전까지는 자기부담금이 없었다. 의료이용이 급증했고, 보험사의 손해는 가파르게 커졌다.   본인부담금의 마법이 사라진 공간에 전 국민 ‘실손보험 타 먹기’ 경쟁이 불붙었다. 큰 사회적 비용이 들지만, 국민의 후생 증가는 제한적이었다(Ko, 2020).   결국 2세대 실손보험이 나왔고 10%의 자기부담금이 도입됐다. 자기부담금은 2017년엔 급여 10%, 비급여 20%로 조정됐고(3세대), 2021년엔 급여 20%, 비급여 30%로 올랐다(4세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부담금은 여전히 낮아 보인다. 가령 병·의원 외래 이용 시 건강보험에서 30%의 본인부담금이 발생하는데, 여기서 80%를 실손보험이 보장해주면 실제 본인부담금은 6%(=30%의 20%)에 불과하다.   보호 필요한 환자와 노인 가입은 적어   실손보험은 의사 수입의 전공과목별 불평등에도 일조했다. 실손보험 이용 실적에 따라 의사 수입 증가 폭이 크게 달라졌다. 2021년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인기과(피부과·안과·정형외과·재활의학과)의 평균 연봉은 2020년 기준 3억 8579만원이다. 반면 필수의료인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는 평균 2억 3396만원이다. 이들의 격차는 지난 10년 동안 급격하게 벌어졌다. 인기과의 수입은 2010년에 비해 1.9-2.4배 상승했으나,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연봉은 오히려 16% 줄었다. 안과는 시력 교정술 및 백내장 수술, 정형외과는 관절 수술, 재활의학과와 마취통증의학은 도수치료와 비수술 척추치료 등으로 실손보험의 혜택을 본다. 필수의료 부족 문제에도 실손보험이 한몫하는 셈이다.   정말 보호되어야 할 환자와 노인층은 정작 실손보험에 가입하기 어렵다. 20~40대의 가입률이 80%를 넘지만 70대 이상의 가입률은 15%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 과소비로 실손 보험사의 누적 손해액은 2021년에 이미 3조원을 넘어섰다. 실손보험은 팔면 팔수록 보험사의 손해가 커진다.   금감원에서 복지부로 관리 주체 이관을   실손 보험을 악용한 사례는 많다. 가령 강남의 한 안과 병원은 브로커들에게 알선비를 주고 실손보험이 있는 백내장 진단 환자를 찾아내서 최대 1200만원인 ‘다초점 인공수정체’ 삽입 수술을 유도했다. 브로커는 실손보험 판매원이다. 이 중 일부 비용은 건강보험에 청구되므로 실손보험이 건강보험 재정 악화에도 기여하는 셈이다.   이번에 보건복지부는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의 일부로 실손보험 관리체계를 강화하겠다고 했다. 첫째가 급여/비급여 혼합진료 금지다. 정교하게 설계되어야 하지만 구체성이 없으니 논란만 낳았다. 나머지 방안도 아직은 선언적 수준이다.   많은 비급여 항목이 병·의원 마음대로 가격을 정할 수 있어 실손보험 남용의 주된 대상이다. 독일과 같이 민영 건강보험과 의사 조합 간의 협상으로 가격을 통제해야 한다. 또 실손보험의 자기부담금을 50% 이상으로 대폭 올려야 한다.   이와 더불어 실손보험의 관리 주체를 전문성이 부족한 금융감독원에서 보건복지부로 이관하는 것도 고려하자. 그래야 건강보험과 실손보험을 상호보완하는 개선이 수월해진다.   마지막으로 실손보험을 대체할 보충적 공적 보험의 도입도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이다.   무엇보다 실손 보험이 국민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과연 투입 대비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 이를 기반으로 실손 의료보험의 폐지까지도 고려한 담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정책학과 교수, 의사   Reference Einav, Liran, and Amy Finkelstein. "Moral hazard in health insurance: what we know and how we know it." Journal of the European Economic Association 16.4 (2018): 957-982. Chandra, Amitabh, Evan Flack, and Ziad Obermeyer. The health costs of cost-sharing. No. w28439.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2021. Shigeoka, Hitoshi. "The effect of patient cost sharing on utilization, health, and risk protection." American Economic Review 104.7 (2014): 2152-84. Choi, Yunji. “Does $1 matter? Healthcare demand response to a small copayment.” Doctoral dissertation, Seoul National University. (2023). Ko, Hansoo. "Moral hazard effects of supplemental private health insurance in Korea." Social Science & Medicine 265 (2020): 113325.  

    2024.03.21 00:36

  • [임재준의 퍼스펙티브] 실손보험이 왜곡시킨 의료시장부터 바로잡아야

     ━  의·정 갈등 해법은 없나   임재준 서울대병원 공공부원장·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 의대 정원 증원을 놓고 정부와 전공의들이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다. 법정 최고형까지 언급하는 정부의 거듭된 압박에도 9000명 이상의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거나 임용계약을 포기하고 병원을 떠났다. 의대생 1만 3000명가량도 휴학계를 내고 등교하지 않고 있다. “증원 규모를 2000명에서 단 한 명도 줄일 수 없다”는 정부에 맞서 “원점에서 재검토하자”고 요구하는 전공의들 사이에 타협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서 이번 사태의 가장 가능성 높은 결말을 생각해보자. 정부는 2000명 증원을 관철하고, 병원과 학교를 떠난 전공의들의 면허는 정지되고 의대생들은 유급되는 것이다. 정부는 목표를 달성하겠지만, 대형 병원들의 진료가 장기간 대폭 축소돼 중증 및 암 환자들의 치료에 큰 지장을 받을 것이다. 상당수 전문의와 의사가 1년간 배출되지 않아 생기는 보건의료 체계의 혼란은 상당히 오래갈 것이다.     ■  「 의사들은 돈 되는 비급여 선호 환자들은 너무 쉽게 의료 쇼핑   낮은 수가 방치 필수의료 기피 피부미용 등 쉬운 분야로 몰려   갑작스런 2000명 증원은 무리 단계적 증원 후 다시 검토해야 」    이번 사태는 정부와 의사에 반반 책임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침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이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일 대전의 한 의과대학 의학과 강의실이 텅 비어 적막한 모습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어떻게 의사가 환자 곁을 떠날 수 있냐며 비난하기는 쉽다. 하지만 400명 증원 계획에도 파업했던 전공의들이 2000명 증원에 쉽게 찬성할 리 없다는 것을 정부도 알았을 테니 책임은 반반이다. 정부는 지금의 의대 정원을 유지할 경우 2035년에 의사 1만 명이 부족할 것이라고 추계한다. 의료 취약 지역의 의사 인력을 확보하려면 5000명이 더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부 주장의 근거가 된 세 가지 연구는 미래 인구 구조, 소득 및 건강 수준, 의료 기술 등에 대한 다양한 가정들을 포함하고 있어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 의사가 모자라는 것도 문제지만, 남는 것도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 의사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형 병원조차 영상의학과 의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어느 지방의료원은 신장내과 의사를 구하지 못해 투석실을 폐쇄했다. 수 억원의 연봉을 제시해도 의사를 구할 수 없는 지방 병원들의 이야기도 가짜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10년 전만 해도 이런 뉴스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된 것일까.   김영옥 기자 소아청소년과 ‘오픈 런’은 의대 정원 증원의 주요 근거 중 하나다. 그런데 2003년 15세 미만 아이들이 962만4097명이었는데,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3582명이었다. 10년이 지난 2013년에는 아이들 숫자가 743만3119 명으로 크게 줄었지만,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5051명으로 늘었다. 다시 십년이 지나 2023년에는 아이들 숫자가 566만3861명으로 줄었는데,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6385명으로 더 늘었다. 그러니 소아청소년과 ‘오픈 런’의 원인은 전문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고된 진료와 낮은 수가를 방치해 전문의들이 소아청소년 진료를 접고 피부미용 분야나 요양병원으로 향하게 한 역대 정부의 정책 실패가 더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실손보험이 만든 거대한 비급여 시장   몇 해 전에 허리디스크가 도져 집 근처 의원을 찾았을 때 창구 직원이 처음 물어본 말은 실손보험이 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실손보험이 있다면 이러저러한 검사와 처치를 받을 수 있다고 안내했다. 이렇게 실손보험을 기반으로 의사와 환자가 함께 만들어낸 거대한 비급여 시장이 필수의료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5대 보험사가 실손보험을 통해 1차 병원(의원)에 지급한 비급여 처치 비용은 2018년 1조2110억에서 2022년 2조2222억으로 불과 4년 만에 82.5% 증가했다. 당연히 비급여 진료를 주로 하는 의사들의 수입이 늘었고, 의사들은 힘들고 위험한 필수의료를 떠나 편하고 수입이 좋은 비급여 진료로 방향을 틀었다.   실손보험을 가진 경증 환자들의 지나친 응급실 방문은 ‘응급실 뺑뺑이’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정부가 이야기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국민도 꼭 필요하지 않은 병원 방문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1인당 의료기관 방문 횟수는 2022년 20.6 회. 단연 세계 최고인 데다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22년에 365회 이상 병·의원을 방문한 환자가 2260명이나 됐고, 이들의 평균 외래진료 횟수는 무려 452회였다.   비정상 의료전달체계 바로잡아야   이런 과다한 병원 이용에 더해서 무너져 내린 의료 전달체계가 지역의료 공동화 현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집 근처 의원에서 형식적인 의뢰서 하나만 받으면 어디에 살든, 어떤 질병이든, 길어야 몇 주 안에 소위 빅5 대형 병원의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과도한 접근성을 적극적으로 억제하는 의료전달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지역별 의료 서비스 불균형 문제 해결의 핵심이다. 이는 의사를 늘려 쉽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김영옥 기자 물론 의사들도 많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 의사들은 메르스 사태와 코로나19 위기 때 환자 진료를 자원하며 기꺼이 자기 생명의 위험을 감수했다. 그런 의사들이 의료 정책에 대해서는 너무 좁은 시야를 갖고 있어 안타깝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도 국민 건강 관점에서 접근하고 평가해야 한다.   진찰료나 수술료 등은 건강보험 수가가 낮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비급여진료에만 몰두하는 일부 의사의 모습은 국민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인공수정체 삽입이나 도수치료가 정말 그렇게 많은 환자에게 필요한 것인지, ‘신데렐라 주사’와 ‘백옥 주사’의 효과는 과연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인지도 의문이다. 비대면 진료의 확대가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될지도 열린 마음으로 따져봐야 한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의 위기는 의사 수 부족보다는 분포의 문제일 수 있지만, 완벽히 이상적인 분포는 불가능하다. 아예 전공의 과정을 선택하지 않고 일반의로 피부 미용 시술을 하며 편하고 윤택한 삶을 추구하는 젊은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에 헌신할 의사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의료 이용량이 많은 노령인구도 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급작스러운 2000명 증원은 분명히 무리수다.   정부는 대학들의 수요조사를 근거로 이 숫자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학에 원하는 의대 정원 증원 규모를 묻는 것은 아이들에게 사탕을 줄 테니 몇 개씩 먹고 싶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다. 대학 이사장이나 총장은 증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우수한 학생을 유치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6년 동안 비싼 등록금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갖춘 의대 교육 무너질 수도   의대 교육이 부실해질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고려할 겨를도 없다. 110명인 현재 정원을 300명까지 늘리겠다는 대학도 있고, 40명을 네 배 가까운 150명으로 증원하겠다는 대학도 나온다. 정부 계획대로 2000명을 증원하면 의과대학들이 오랜 기간 노력해 어렵게 갖춘 의학교육의 틀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소그룹 교육, 심층연구과정, 모의환자 실습, 시뮬레이션 실습 등의 선진교육 기법을 폐기하고 수십 년 전의 획일적 강의실 수업 위주의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쩌면 수업도 2부제로 해야 할지 모른다.   정부는 국립대병원 교수를 1000명 증원해서 해결하겠다지만, 벽돌 찍어내듯 교수 1000명을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다. 점진적이고 신중한 증원이 옳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던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한다. 의대 정원과 같이 중요한 문제라면 충분한 숙의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민주적인 절차가 필수적이다.   우선 내년에는 의학교육을 맡은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가 제시한 350명을 늘리는 건 어떨까.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정부가 증원의 근거로 삼는 논문의 저자인 서울의대 홍윤철 교수가 제안한 750명 증원도 고려할 수 있다. 이후 함께 다시 고민하자. 이것이 당장 눈앞에 닫친 파국을 막고 의학교육과 보건의료체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파국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임재준 서울대병원 공공부원장·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

    2024.03.08 00:34

  • [이재승의 퍼스펙티브] 트럼프 재등장 신호…동맹 외교의 골든타임을 살려라

     ━  불확실성 커지는 국제 정세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미국 대선 투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차기 미국 행정부에 대한 불확실성은 국제 정세의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지난달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열린 공화당 후보 경선 유세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그는 분담금을 다 내지 않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에 대해선 미국이 보호하지 않고 러시아가 마음대로 하도록 격려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발언은 힘을 과시하면서 현상 유지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기 위한 다소 과장된 수사법일 순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우방을 경시하는 기조는 벌써 외교가에 파문을 불러오고 있다. ‘트럼프주의’ 외교정책은 유럽과 인도·태평양 지역의 동맹국들이 더는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지 않으며 미국이 동맹국들에 이용당한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미국 하원에선 950억 달러 규모의 대외 안보 지원 패키지가 발이 묶여 있다.     ■  「 서방 빈틈을 파고드는 중국·러시아…개별 국가 차원 대응 어려워 한국, 안보·경제적 이익 담보하기 위한 국제적 네트워킹 힘써야 올여름 워싱턴 나토 정상회담은 한국 동맹 자산 공고화 분수령 동맹과 비동맹 양자택일 함정 빠지지 말아야…플러스 알파 전략 필요 」    전쟁 발발 2년, 서방 결속력 시험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예비 경선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콘웨이에서 열린 유세 현장에서 오른쪽 주먹을 들어 보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승기를 잡으며 영토 점령을 고착화하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한 600억 달러 규모의 지원은 미뤄졌다. 얼마 전 유럽연합(EU)과 이탈리아·캐나다·벨기에 정상들은 전쟁 발발 2년을 맞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공항에 모였다. 이들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변함없는 지원을 약속했지만 어딘지 어두운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장기적 소모전으로 흘러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의 결속력을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렸다.   에스토니아의 카야 칼라스 총리는 옛 소련 시절에 건설한 기념물 철거를 주장했다가 러시아의 공개 수배 명단에 올랐다. 역사적 기억을 모욕하고 러시아에 적대적으로 행동했다는 이유다. 에스토니아는 발트해 연안에 위치해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러시아의 위협을 느끼는 나라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 구조가 균열의 틈을 보이자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북한과 이란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연합의 축이 파고든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의 보수 언론인 터커 칼슨과의 인터뷰에서 전쟁 장기화의 책임을 미국으로 돌렸다. 그는 공공연하게 트럼프 진영을 옹호하며 미국의 분열을 유도했다. 불간섭주의와 실리주의를 표방하는 제3세계 국가들은 서방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며 서방의 이중잣대를 비난한다.   떠오르는 트럼프에게 흔들리는 나토   2024년의 국제 정세는 불확실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금보다 훨씬 무질서한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지난 10여 년에 걸쳐 서서히 약해졌고 권위주의의 도전은 거세지고 있다. 자유와 인권과 같은 보편적 규범을 지키지 않는 쪽을 제재할 의지와 힘을 잃어버린다면 국제질서는 비대칭적인 다극화로 이행할 수도 있다. 다자간 협력을 위한 국제기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세계 경제가 블록화로 재편되는 걸 막을 수 없다.   동맹 외교는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집단방위 조항을 준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트럼프의 언사에 나토가 흔들린다. 언제든 미군 철수 검토 카드를 받을지 모르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트럼프주의가 득세하고 미국 주도의 글로벌 동맹이 한계에 부닥친다면 어떻게 될까. 한국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비롯한 동맹 우선의 기조에서 한발 물러나야 할까.   한국에 이론적 중립 옵션은 없어   한국·미국·일본의 협력 수준을 낮추고 중국·러시아·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한반도 안보 상황이 좋아질 것이란 기대는 근시안적 오류에 가깝다. 오히려 동맹에서 후퇴하면 장기적으로 한국 외교의 레버리지를 약화할 위험이 더 크다. 전선 국가인 한국은 실용뿐 아니라 국제적 차원의 원칙이 아직 절실히 필요하다. 핵 억지를 포함한 안보의 핵심 이익이 존재하는 한 이론적인 중립의 옵션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쪽에선 동맹에 지나치게 몰입한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다. 이는 중국·러시아·북한 및 제3세계와의 대화와 교류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대응할 문제지 동맹의 온도를 낮춰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양자택일로 진영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동맹 체제를 기반으로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한국의 동맹외교는 아직 완전한 궤도에 오른 게 아니다.   한·미 동맹의 신뢰도는 핵협의그룹(NCG) 설립을 비롯해 지난 2년간 많이 회복했다. 한·일 관계의 개선과 한·미·일 협력 구도는 한국이 인도·태평양이나 유럽 우방국들과 양자 또는 다자 차원에서 새로운 연계를 용이하게 구축할 플랫폼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한국이 속한 ‘리그’를 확실히 해야   미국이 본격적인 대선 정국에 돌입하기 직전인 올해 상반기가 한국으로선 동맹 자산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한·미 양자 관계뿐이 아니다. 한·미·일 협력 관계와 함께 나토+아시아·태평양 4개국(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의 파트너십을 포괄한다.   동맹 체제의 공고화는 차기 미국 행정부의 성격에 상관없이 중요하다. 만약 바이든 행정부 2기가 출범한다면 한국이 보다 능동적으로 국제 질서와 규범 형성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다. 만약 트럼프 체제가 들어선다면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국제 질서 변화에서 안전판 역할을 할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한국이 우방과의 연계를 다시 수립할 수 있는 복원점이 될 것이다. 올여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담은 이런 동맹 체제 논의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동맹 외교의 공고화에서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사안이 있다. 첫째, 한국이 속할 수 있는 ‘리그’를 확실히 해야 한다. 국제 질서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려면 어떤 집단과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한국은 아직 주요 7개국(G7)에 정식으로 가입한 게 아니다. 한국이 속한 주요 20개국(G20) 회의는 내부적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데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동아시아에선 유럽처럼 지역 차원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문화나 언어를 공유하는 권역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해 부산 엑스포 유치전을 되돌아보면 한국이 주도할 수 있는 리그가 부족하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안보와 경제의 차원에서 한국이 적극적으로 팀을 만들어 참여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소다자주의를 포함한 외교적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민간 역할 강화한 병진 노선 필요   둘째, 동맹에 공고히 참여하는 동시에 원조와 지원에 대한 보상 조건을 명확히 해야 한다. 동맹도 거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혜택을 받는 수직적 동맹 관계만 볼 게 아니다. 수평적 차원의 파트너십 체제를 염두에 두고 일본·호주·영국·독일 등 주요국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한국은 경제적·정치적으로 몸집과 위상이 커졌다. 그만큼 국제 사회의 요구를 더 많이 받을 것이다. 학생에 비유하면 학년이 높아질수록 숙제는 늘어나고 시험은 어려워지는 것과 같다.   한반도를 벗어난 국제 문제에서도 이제는 내향적 거부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가 필요하다. 그래야 한국도 필요한 걸 당당히 요구할 수 있다. 대신 한국이 원하는 보상과 거래 조건을 국익 차원에서 명확히 해야 한다. 여기엔 군사·안보뿐 아니라 산업·기술, 탄소 중립을 목표로 한 기후동맹 같은 요소도 세밀하게 포함해야 한다.   셋째,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를 포함한 신흥시장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동맹 체제를 약화하면서 균형을 맞추자는 게 아니다. 범 동맹 체제의 공고화를 기반으로 협상력과 흡입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에서 아쉬웠던 결과를 그냥 묻어둘 게 아니라 축적한 네트워킹을 외교적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 물론 모든 국가와 동시에 관계를 개선하는 건 물리적 한계가 있다. 따라서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전략국가군 선정을 선행해야 한다.   넷째, 한국의 동맹 외교 논의를 기업 등 민간 차원에서 병행해야 한다. 최고 지도자와 정부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그렇지 않은 영역이 있다. 세밀한 부분은 산업의 최전선에 있는 기업과 학계 등 전문가 집단이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정부는 이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나설 필요가 있다.   공급망 재편과 다각화, 첨단산업 경쟁 심화 등을 고려하면 국익을 정의하는 건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상대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민간 자원을 동원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에는 민·관 공조체제를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복잡하게 엮이는 안보·경제적 이해관계를 추려 내고 새로운 규범 창출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2024.03.05 00:50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이민정책 장기 플랜 세울 컨트롤타워, 더 늦출 수 없어

     ━  전북도와 제천시의 이민 실험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20일 의림지·청풍호·한방축제로 유명한 충북 제천시를 찾았다. 나타·마리아·홈 베이커리…. 한글과 키릴문자가 병기된 간판을 내건 식당·제과점·식료품점이 눈길을 끈다.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즐기는 소시지·치즈·만두 같은 식재료를 팔거나 양꼬치·보르쉬(러시아 스프)·고기 파이 등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이다.   이국적 풍경이 생겨난 건 지난해 10월. 고려인 동포 이주·정착의 첫 사업으로 24가구 57명이 둥지를 틀며 고려인 커뮤니티가 생겨나면서다. 구한말~일제 강점기 고국을 떠나 옛소련 일대로 이주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     ■  「 고려인 이주 물꼬 튼 제천시 전북지사, 외국인 비자 연장 권한 이민정책 수립 가늠자 될 수도 산업·분야별 정밀 계획 세워야 」    제천에 새 보금자리 튼 고려인 57명   제천시 이주 고려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을 김창규 시장(왼쪽)이 돌아보고 있다. [사진 제천시] 제천의 고려인들은 ▶일시 거주가 아닌 정착을 목적으로 ▶가족 단위로 이주했다는 게 특징이다. 4년 동안 살며 ▶한국어 등 소양 요건과 ▶소득 요건(연봉 2900만원 이상)을 갖추면 영주권(F5)을 취득할 수 있다. 영주권은 선거권을 포함, 내국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보장한다. 사실상 이민이다. 고려인 이주 사업은 제천시가 지난해 ‘지역특화형 비자 사업자’가 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지역특화형 비자는 일정 요건을 갖춘 외국인에게 취업을 조건으로 특례비자를 발급해 주는 제도다.   제천시는 정부 발표 89곳에 해당하는 인구 감소 지역이다. 청년들은 떠나고 산업단지·농장에서 일할 노동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인구 절벽의 위기를 고려인 동포 이주로 극복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건 아제르바이잔·키르기스스탄 대사를 지낸 김창규(국민의힘) 시장이다. 1993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관 근무 경험에 착안했다. 김 시장은 “당시 옛소련 붕괴로 고려인 보호를 위한 당국의 지원이 모두 끊겨 고려인 동포사회가 해체 위기에 놓였다. 문 닫을 위기에 처한 동포 신문·방송 등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 정부의 예산 지원을 끌어내고 민간 기업의 후원금을 모금하는 일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인이 굉장히 우수하다는 걸 실감했다”고 말했다. 또 “고려인은 같은 언어를 쓰고 동질한 문화를 갖고 있어 이질감이 크지 않기 때문에 유럽 국가와 같은 이민 실패의 부작용을 겪지 않고 이민이 잘 정착될 수 있다”고 했다.   57명의 고려인은 취업(산업단지 근무가 대부분)과 주거지 마련, 자녀 양육, 의료 복지 시스템 구축이 모두 끝난 상태다. 제천시와 시 부설 재외동포지원센터 직원들의 헌신적 노력 때문에 빠른 정착이 가능했다. 임정호 미래전략팀장은 “은행 계좌, 핸드폰 개설부터 주택 임대계약이나 자녀 입학, 장보기까지 직원들이 1대1로 도우미 역할을 했다”며 “현재 임시로 대원대 기숙사에 머무는 9세대 19명도 취업과 자녀 입학 절차가 마무리되면 곧 정착이 완료될 것”이라고 전했다.   “손주 낳으면 4대가 한국에 살게 돼”   고려인들은 이주 생활에 만족하고 있을까. 시내 청전동 주택가에 문을 연 ‘홈 베이커리’를 찾았다. 여주인 김 옥사나(36)는 어머니와 남동생, 두 자녀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그는 “유치원생인 딸이 체조에 소질이 있다”며 “국가대표급의 훌륭한 체조선수로 키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남편과 함께 식료품점 ‘나타’를 운영하는 남 발렌티나(45)는 “딸이 임신 중인데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와 사위, 손주까지 모두 4대가 한국에 살게 된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들은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했는데, 제천살이에 대해 대체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재외동포지원센터에서 통역 주임으로 일하는 김 야나(48)는 “사할린 동포신문에 실린 제천시의 이주 모집 광고를 보고 딸(초등학생)과 함께 오게 됐다”며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너희는 러시아 사람 아니고 한국 사람이다’는 얘기를 듣고 자라서인지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제천시는 올해 추가로 300명, 향후 3년간 1000명까지 고려인 이주를 추진할 계획이다. 사업의 성패 여부가 대한민국의 이민정책 수립에 가늠자가 될 전망이다. 이 실험이 주목받는 이유다.   “박사 따고도 취업 안 돼 해외로”   전북특별자치도가 운영하는 ‘결혼이민자 365 언니 멘토단’. 한국 정착과 국적 획득 과정을 멘토들이 돕고 있다. [사진 전북특별자치도] 올 1월 특별자치도가 된 전라북도도 새로운 실험에 나섰다. 작년 10월, 김관영(민주당) 전북지사와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외국인 산업인력의 비자 연장 권한을 사실상 도지사가 가질 수 있게 업무 협약을 맺으면서 탄력이 붙었다. 외국인 이주 근로자는 비자 기한(5년)이 지나면 연장이 불가능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산업현장에서 안정적 노동력 공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구 감소를 부채질하고 있다. 도내에선 고창군·김제시·남원시 등 10개 시·군이 인구 감소지역이다. 김 지사는 “비자 규정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일할 만 하면 돌아가니까 기업들 애로가 많다”며 “성실하게 일하는 우수 인력은 비자를 연장해서 일할 수 있게 도지사가 명단을 건의하면 법무부 출입국관리소가 연장을 허가해 주도록 협력을 맺어 전북도의 기업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시적(3년)이지만 도지사에게 비자 연장 권한을 준 건 전북을 미래 인구정책의 테스트베드로 활용하려는 심모원려다. 국가적으로 그간 300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은 2015년 1.24명에서 2022년 0.78명으로 오히려 떨어지는 악순환에 직면해 있다. 인구절벽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그러려면 ▶산업 부문별 과학적인 수요 예측으로 인력 수급 계획을 세우고 ▶내국인이 외국인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역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정밀한 시스템 구축이 필수적이다. 김 지사는 “지방대 공대의 경우 석·박사 과정 절반이 외국인 학생들인데, 졸업 후 국내에서 취직이 되지 않거나 취업이 돼도 짧은 기간만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우수 인력이 미국이나 일본 등지로 빠져나간다”며 “IT나 제조업 분야의 고급 인력이 지역에 정착해 자녀 낳고 살면 영주권과 국적 획득까지 가능하도록 돕는 이민 프로세스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후발 이민자 국적 획득 돕는 멘토단   외국인 이민 정착이 가능하려면 자녀 양육과 경제적 자립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부모 양쪽 혹은 한쪽의 한국어 능력이 필수적이다. 전북도는 지난해 결혼 이민의 국적 취득을 위한 조례를 제정한데 이어 국적 취득에 필요한 한국어 교육과 모의 면접, 행정 절차 안내를 1대 1로 돕는 국적취득반을 운영하고 있다. 이미 국적을 취득한 결혼 이민자(선주민)가 멘토가 돼 새로 온 이민자들의 국적 취득을 도와주는 ‘결혼이민자 365 언니 멘토단’도 지난해 발족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대1 만남(1시간30분)을 통해 국적 취득과 정착에 필요한 세부 사항을 전수하는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80명의 멘토단이 240명의 멘티를 돕는 활동을 벌였다. 김문강 가족다문화팀장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핸드폰 앱을 통해 수준별 한국어 음성 교재를 개발했고, 국적 취득 면접시험을 위한 기출문제도 녹음 교재로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저출산 스페인, 이민 받아 인구 늘어   저출생과 가파른 인구 감소는 발등의 불이다. 어린이집부터 대학원까지 각급 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폐교나 축소 운영이 불가피한 형편이다. 기업은 필요한 노동력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생산 차질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제품을 소비할 수요 시장의 축소로 산업 생태계 기반이 위협받고 있다.   미국은 물론 영국·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은 출산율 높이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외국인 이민 유입을 통해 적정 인구 수를 유지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다. 우리와 인구 규모가 비슷한 스페인을 보자. 외신 보도에 따르면, EU 내에서 몰타(1.13) 다음으로 출산율이 낮은 스페인(1.19)은 2023년 출생아 수가 32만2075명을 기록, 10년 만에 25%가 감소했다. 그러나 600만 명가량의 외국 이민자를 받아들여 총인구는 1.26%(4860명) 증가했다.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은 이민청 신설을 한목소리로 주장해 왔다. 다문화 인구는 불어나는데 이를 다루는 부처는 법무부·외교부·행정안전부·여성가족부 등으로 분산돼 있어 컨트롤 타워가 절실하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은 2020년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법무부도 지난해 이민청 설립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21대 국회에선 논의에도 착수하지 못한 채 표류했다.   무책임한 국회와 달리 광역 시·도와 기초단체들은 절실하다. “이민정책에 대한 장기적 계획을 세울 컨트롤타워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김관영 전북지사)는 목소리가 높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일선 담당자들은 “주거와 정착 목적으로 입국하려는 외국인에 대해 외교부와 법무부가 협력해 행정 절차만 간소화해 줘도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2.23 00:32

  • [이광형의 퍼스펙티브] 세계는 AI 전쟁 중, 반도체 같은 기간산업으로 키우자

     ━  국가 AI 전략   이광형 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인공지능(AI)의 열풍이 거세다. 일반 회사에서 이용하고, 교육 현장에서 이용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한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픈 AI 회사가 출시한 챗 GPT는 이용자의 질문에 똘똘한 답을 준다. 심지어 질문에서 요구하는 그림도 그려준다. 현재의 추세로 보면 AI의 발전과 활용은 더욱 가속할 것이다.   이처럼 놀라운 속도의 AI 발달에 따라 우리 인간도 많은 변화를 겪을 것으로 예상한다.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일자리의 변화다. 이미 교육과 회사 업무에서 상당 부분 AI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  「 갈수록 거세지는 AI 열풍, 기술 넘어 문화·국방 영역에도 확장 소프트웨어 산업 특성상 소수 기업이 세계 시장 독과점 전망 질적으론 미국 우위지만 논문·특허 출원 수에선 중국이 앞서 한국은 전략적 대응 미흡…글로벌 경쟁력 가진 기업 육성해야 」    퍼스펙티브 AI는 사람 말의 맥락을 정확히 읽어내고 음식점을 추천해주는 일부터 변호사나 세무사 등 전문직만이 할 수 있던 깊이 있는 자료 분석과 결론 도출까지 해낸다. 앞으로는 검색하는 방식과 일하는 방식, 나아가 일자리 판도 자체가 모두 바뀔 것이다. 방대한 자료를 단숨에 요약하는 비교적 단순한 업무 처리부터 의사와 상담 시간을 잡을 필요 없이 24시간 사람보다 더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까지 가능해진다. AI는 인류의 생활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인간의 창의적인 영역까지 AI가 침투한다. AI가 소설을 쓰거나 음악을 작곡하는 일은 이미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래 전쟁은 AI에 크게 의존   AI는 기술이다. 그러나 AI의 발전 추세를 보면 기술의 단계를 뛰어넘어 문화와 국방까지 확장할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AI의 도움을 받는다. 이때 학생들은 AI가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운다. AI가 존댓말을 하면 존댓말을 배운다. 독도가 한국 땅이라 가르치면 그렇게 배운다. 만약 AI가 독도는 일본과 분쟁 지역이라고 하면 그런 줄 알고 배운다. 국어도 AI가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울 것이다. 정부에서 한글 맞춤법을 바꿔도 AI가 뒷받침하지 않으면 일반 국민은 사용할 수 없다. AI는 국가의 문화와 정체성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래의 전쟁도 AI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미래에는 AI 미사일과 무인탱크·무인전투기·무인함정 같은 무기가 전투에 나설 것이다. 전통적인 전투에선 아군이 적을 발견하면 작전사령부가 대응할 무기를 결정하고 반격을 지시한다. 그러나 미래전은 사람이 개입할 시간이 없다. 드론이나 인공위성이 적을 발견하면 이 정보를 받은 작전사령부의 AI가 대응 전략을 세운다. 각각의 무기도 중요하지만, 작전 계획을 세우는 AI의 성능이 무척 중요해진다. 만약 자체적인 국방 AI 기술이 없으면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소프트웨어 산업의 특성상 AI 산업은 약 10년 뒤에는 몇 개 기업이 독과점 체제를 구축할 것이다. 지구 위에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몇 개로 압축되고 이들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그날이 되면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이들 회사가 제공하는 언어·역사·과학·문화·윤리의 영향을 받는다. 현재 전 세계 인터넷 검색 시장이 독과점 체제로 굳어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미·중, AI 경쟁에 전력투구   이러한 AI의 잠재력을 아는 선진국은 AI에 전력투구하는 모양새다. 미국에선 오픈 AI의 챗 GPT를 시작으로 구글·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이 뛰어들고 있다. 중국도 막대한 인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결전을 준비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기술 기업인 바이두·알리바바·텐센트 등은 AI에 집중한다. 이들 기업은 아직 챗 GPT와 경쟁할 만한 제품을 선보이지 못했지만 기세가 만만치 않다.   지난해 미국 스탠퍼드대가 발간한 AI 인덱스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AI 연구 활동에서 미국을 앞섰다. 2010년부터 2021년까지 전 세계에서 발표한 AI 관련 논문에서 중국은 전체의 39.8%를 차지했다. 같은 기간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은 10.3%에 그쳤다.   지난해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과 다국적 정보분석 기업인 엘스비어(Elsevier)가 제시한 데이터도 비슷한 결론을 보여준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9년간 발표한 AI 논문 건수의 1위는 중국이었다. 2021년만 해도 중국이 발표한 AI 논문은 4만3000건으로 미국의 두 배 수준이었다. 이 기간 중국의 AI 논문은 전 세계 AI 논문의 32%를 차지했다. 논문의 질에서도 중국은 미국을 앞섰다. 피인용지수 상위 10%에 들어가는 논문 건수에서 중국은 7401건으로 미국보다 70% 많았다.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에 따르면 2022년 중국이 출원한 AI 특허는 2만9853건이었다. 전년 대비 20% 증가했다. 같은 해 미국이 출원한 AI 특허는 1만7000건으로 전년 대비 10% 감소했다. 2022년만 보면 중국의 AI 특허 출원이 미국보다 75.6% 많았다. 다만 질적인 면에선 중국이 미국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그렇더라도 논문과 특허는 미래를 보여준다. 중국이 미국에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은 AI를 활용한 얼굴 인식 기술에서 두각을 보인다. 길거리에서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 이름을 알아낼 정도라고 한다. 그 배경에는 중국의 느슨한 개인정보보호 정책이 있다. 데이터의 자유로운 활용은 AI 발전에 날개를 달아준다.   미국은 다양한 조치로 중국을 견제한다. AI 기술이 경제와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AI 기술의 중국 수출을 고강도로 규제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 생산 장비나 엔비디아가 개발한 고사양 반도체 칩의 중국 수출을 막았다. 중국 기술 기업에 대한 미국 투자도 강력하게 제한한다.   잘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해야   이런 AI 세계대전 속에서 한국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많은 기업이 각각 AI를 개발하고 응용 서비스를 만든다. 그러나 국가적인 전략은 보이지 않는다. 기업들은 각각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해보자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정부는 ‘기업이 알아서 잘 해봐라. 그러면 도와주겠다’ 정도인 것 같다. 그렇게 해선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AI 기업을 만들기 어렵다고 본다.   AI 비즈니스에도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챗 GPT처럼 직접 생성형 범용 AI를 제공하는 방식도 있고, 특별한 분야에 특화된 AI를 개발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육·역사·자동차·건강·여행·운동·문화 등 전문 영역에 강점을 가진 AI도 가능하다. 아마존처럼 AI 개발에 필요한 인프라를 제공하는 비즈니스도 가능하다.   아니면 남이 만든 AI를 이용해 편리한 서비스를 개발하는 비즈니스가 있을 수 있다. AI를 이용한 전자상거래나 기업 맞춤형 컨설팅, 헬스케어 서비스 등도 가능하다. 엔비디아처럼 AI 전용 칩을 제공하는 비즈니스도 있다. 한국은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다. 어느 형태의 비즈니스에 집중할 것인지 전략을 세워야 한다.   AI 바라보는 인식부터 바꿔야   어느 비즈니스 모델을 택하든 한국은 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에 정면으로 맞붙어 경쟁하긴 어려운 면이 있다. 한국은 틈새시장을 개척하든지, 다른 나라들과 연합해 공동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일본·동남아·아랍권도 한국과 비슷한 처지다. 이들과 힘을 합해 공동 개발과 서비스를 하면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 AI를 대하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 12대 국가 전략기술에 AI가 포함되긴 했지만, AI의 중요성에 비하면 국가 차원의 전략적인 대응은 매우 부족하다. AI는 지금 뒤처지면 영원히 따라잡기 어렵다. 현재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자동차·조선·반도체 등 기간 산업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생각해 보자. 될성싶은 기업에 낮은 이자로 막대한 자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투자를 도와줬다. 그 방식을 AI 산업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두 단계에 걸친 10년짜리 국가 AI 전략을 만들고 2조원의 투자 계획을 세우자. 1단계에선 국가 전략에 적합한 기업 두 개를 선정한다. 이 두 개 기업에 5년간 매년 1000억원씩 저금리 융자를 제공해 AI 투자를 유도한다. 5년이 지난 뒤 2단계에선 두 개 기업 가운데 하나를 선정한다. 여기엔 매년 2000억씩 5년간 지원한다. 그렇게 하면 10년 뒤 우리나라는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AI 기업 하나를 가질 수 있다. 30년 전 선배들의 지혜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광형 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2024.02.20 00:39

  • [안현호의 퍼스펙티브] 미래 반도체는 ‘첨단 패키징’의 싸움…집중 육성책 세워야

     ━  미·중 반도체 전쟁과 한국의 대책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전 한국산업기술대 총장 반도체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인공지능(AI), 빅데이터, 6G, 로봇, 항공우주, 양자컴퓨터 등은 물론이고 방위산업의 근간이다. 반도체 기반의 첨단 기술은 민·군이 겸용하며, 경제와 국가안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로 반도체 갈등은 미·중 패권 전쟁의 핵심이며, 시간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지구촌은 최근 AI 혁명의 초입에 들어섰다. 관련 산업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AI는 인류의 모든 삶을 바꿀 것이며, AI 경쟁에서 뒤지면 열등 기업, 2등 국가로 전락하기 쉽다. 이 때문에 대다수 기업, 국가가 AI 기술에 사활을 건다. 특히 미·중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은 중국이 미국 기술(반도체)을 활용해 컴퓨팅 능력을 향상함으로써 안보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AI 기술을 방위산업에 활용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는 중국 반도체 생태계는 살리되 첨단 반도체 발전은 억제하는 것이 목표다. 반도체산업이 미국의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제재는 적어도 10년은 지속할 것으로 생각된다.     ■  「 미국 대중 제재는 기회이자 위기 기회 살려 확고한 경쟁력 갖춰야   AI 반도체 커지며 파운드리 중요 그중에서도 패키징 기술력 관건   한국의 후공정 기술 생태계 취약 해외 한국 기술자 적극 영입해야 」    미국의 대중 제재 10년은 더 갈 것   중국 반도체는 미국의 제재가 지속하는 한 첨단부문의 자립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제조 장비 자급률은 10% 내외여서 첨단 주요 장비를 국산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D램 반도체 자급률도 10% 정도에 그친다. 현재는 19㎚ 양산에 머물러 삼성·하이닉스에 5년쯤 뒤진 상태다. 앞으로도 미국의 규제로 19㎚ 한계를 넘어서기 힘들다. 낸드도 마찬가지다. YMTC가 2020년 4월 128단 낸드 개발과 양산 후 232단 양산을 앞두고 있지만, 현재 미국 정부의 제재로 장비 도입이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그동안 대규모 정부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돈을 벌어 다음 세대에 투자비를 마련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대부분은 자본 잠식 상태이고, 미국 제재로 한계기업도 급증하고 있다. 기댈 것은 정부 지원뿐인데, 중국 정부의 재정도 열악하기에 반도체 기업들은 지금처럼 지원받기 어렵다.   그러나 28㎚ 이상의 저가 범용 부문(특히 장비)은 급속도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최대 강점인 해외 전문 인력과 거대한 수요에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반도체 기업의 대다수 경영진은 미국에서 석, 박사를 마친 글로벌 엔지니어다. 또한, 중국은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생산국이다. 언젠가 미국의 제재가 해제되면 중국 반도체 산업은 저가 범용 부문의 기술을 바탕으로 첨단 부문까지 폭발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TSMC의 최첨단 패키징 기술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미국의 중국 반도체 산업 제재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는 중국의 숨 가쁜 추격을 잠시 따돌리고 여유를 가질 기회를 제공한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찬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현재 상황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미국 규제에 묶여 삼성, 하이닉스의 현지 공장에 첨단장비를 투입하지 못할 진퇴양난에 처해 있으며, 중국의 제재로 중국시장의 일부를 잃을 위험도 있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대중 제재로 인한 공급망 재편과 AI 혁명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 및 국가 단위의 반도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잠재력은 무섭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기간에 확고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현재 한국 반도체 산업의 대들보인 삼성전자가 흔들리고 있다. 오랜 기간 1위에 안주하다 보니 방심한 탓은 아닌가 싶다. 미래의 반도체 산업은 AI의 급속한 발전으로 파운드리 부문이 더 중요해진다. 메모리 부문도 범용보다는 HBM처럼 맞춤형으로 재편되고 있다. 결국 첨단 패키징(Advanced Packaging) 부문의 중요성이 급속히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부문의 절대 강자인 대만의 TSMC와의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인텔의 추격으로 2위 자리도 흔들리고 있다.   2023년 초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엔비디아의 AI칩 ‘H100’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H100칩을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TSMC밖에 없다. TSMC의 최첨단 패키징 기술 덕분이다. H100칩 수요가 폭발하는 상황에서 수요업체들이 삼성에 생산을 맡기고 싶어도, 삼성은 필요한 후공정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 기회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삼성은 H100칩에 필요한 고성능 메모리인 HBM 생산에서도 SK하이닉스에 밀리기도 했다.   파운드리에서 삼성과 TSMC의 격차가 커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후공정 기술력이다. 한때 파운드리 전공정 기술력에서도 2~3년 격차가 있다는 분석도 있지만, 이 차이는 크게 좁혀졌다는 평이다. 그런데 후공정 부분에서는 왜 격차가 커지고 있는 걸까?   뿌리 깊은 삼성의 전공정 우선 문화   우선 삼성의 전공정 기술 부문을 우선시하는 뿌리 깊은 문화를 들 수 있다. 글로벌 추세가 후공정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첨단 후공정 기술개발을 소홀히 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 후공정 기술 분야 생태계는 매우 취약한 상태다. 현재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페낭이 후공정 분야 클러스터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자칫 우리나라 반도체 생태계가 완전히 뒤처질 위험마저 있다.   한국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장비는 미국과 일본, 소재는 일본과 유럽이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 이들과 경쟁할 반도체 기업이 한국엔 거의 없다. 게다가 지금처럼 삼성, 하이닉스와 소·부·장 업체의 종속적 관계가 지속한다면 앞으로도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업체가 나오긴 어렵다. 반면, 중국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은 저가 범용 반도체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장비 분야가 두드러진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자립 전략 때문이다. 한국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이 샌드위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이 시급하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후공정 기술 선도하는 한국인 인재   첫째, 중국 반도체 산업 관련 정책 및 현황 파악을 위한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중국 반도체 산업 관련 정책에 관한 정보 파악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중국 정부 정책과 반도체 산업의 분야별·기업별 현황을 파악해야 한다.   둘째, 파운드리 부문, 특히 첨단 후공정 기술 분야의 집중 육성을 위한 중·장기 계획 수립이 매우 중요하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역량, 특히 첨단 후공정 기술 역량이 지금보다 대폭 강화되고 관련 생태계도 보강된다면 AI혁명 시대 한국 반도체산업의 위상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우리나라 첨단 후공정 기술은 뒤떨어져 있으나 글로벌 첨단 후공정 기술을 선도하는 인재들은 한국 사람들이다. 세계적인 후공정 전문업체인 앰코는 사실상 한국업체이며, 인텔도 최근 패키징 총괄 책임자로 한국인을 영입했다. TSMC의 최첨단 고급 패키징 기술 개발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사람도 한국 엔지니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 인재 및 기업의 국내 유치가 절실하다. 국내 후공정 기술에 특화된 연구 센터의 설립도 조속히 추진해야 하며, 첨단 후공정 기술 관련 소부장 기업에 대한 지원 대책도 강구해야 한다. 아울러 대학 내에 인재 양성과 기초 연구를 위한 R&D 지원도 병행해야 한다.   셋째, 반도체 소부장 기업 육성을 위한 종합 대책 수립이 시급하다. 해당 분야에서 유망한 기업의 경우는 산학연과 협력해 10년 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종합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소부장 육성 전략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ASML뿐만 아니라 약 30개의 세부 분야 전문 기업들이 있는데, 이는 첨단 하이테크 산학연 클러스터의 결과물이다. 한국도 이제는 단편적인 R&D 지원 정책에서 벗어나 실효성 있는 지원 정책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넷째, 미국 주도의 세계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의 수출입 감소 및 대중 직접 투자 축소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인도와 아세안 등에 대한 협력관계 구축이 중요하다. 반도체 소재·장비의 절대 강자인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필요하다. 일본 기업의 한국 이전은 한국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할 것이다. 차세대 반도체 기술 확보를 위한 기초과학 투자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며, 핵심 반도체 인력 유출 방지를 위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전 한국산업기술대 총장

    2024.02.19 00:34

  • [박원곤의 퍼스펙티브] 김정은의 ‘헤어질 결심’은 자기 방어적 패배 선언일 뿐

     ━  ‘두 국가’ 선언한 북한의 속내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연말과 연초 회의 석상에서 터뜨린 한국과의 ‘헤어질 결심’ 및 전쟁 불사 발언의 파장이 크다. 지난해 12월 말에 개최된 노동당 전원회의(8기 9차)와 지난달 15일 최고인민회의(14기 10차) 시정 연설을 통해 김정은은 남북 관계가 더는 동족 관계가 아닌 전쟁 중인 ‘두 국가’임을 선언했다. 한국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한반도의 전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대사변(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북한 전 주민에 선언했다. 미국 내 일부 전문가는 김정은의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해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한 지도자가 실제 전쟁을 결심했다면서 올해 동북아 핵전쟁 가능성을 우려했다.     ■  「 전쟁 불사 언급해 긴장 높이지만 한미 확장억제로 핵 효용 낮아져 미국 의식 중국은 북·러 선긋기 군 아니라 경제 우선만이 살길 」    국내 통일 단체들은 김정은의 발언에 당황하고 놀랐다. 이들은 김정은의 두 국가론이 남북관계를 파탄시키는 반통일적, 반민족적 행태라면서 북한에 정책 전환을 주문하기도 했다. 동시에 윤석열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남북 긴장 고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북한이 김일성 시기부터 내려온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포기한 ‘김정은식 독립선언’은 결론적으로 자기방어적 패배 선언이다. 김정은이 자신감에 넘쳐, 이른바 강국 콤플렉스에 따라 공격적으로 노선을 전환했다는 주장을 자세히 뜯어보면 답이 나온다.   김정은의 강국 콤플렉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월 진수한 김군옥영웅함을 둘러보고 있다. 북한 매체들은 이 잠수함이 수중에서 핵미사일 발사가 가능한 전술핵공격 잠수함이라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핵과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북한이 자신감을 토대로 공세적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했다고 보는 공세론자들은 북한이 주도권 확보를 시도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북한이 한국을 겨냥한 핵을 실전에 배치했고,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포함한 다양한 사거리의 미사일을 개발함에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는 주장이다. 북한이 군사적으로 자신감을 갖게 됐으니 현실성 없는 고려연방제 따위의 통일론은 효용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 능력이 확장된 것은 분명하지만, 김정은이 체제의 종말을 각오하지 않는 한 핵을 먼저 사용할 수 없다. 북한은 핵을 재래식 무기와 섞어서 언제든지 선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관련 법을 만들기도 했다. 북한이 핵 사용을 강행한다면 미국의 막강한 핵전력 즉 핵우산으로 대규모 응징 보복을 받는 자살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이가 김정은일 것이다.   북한이 핵을 쓰면 정말 미국이 핵으로 대응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지난해 한·미 워싱턴 선언과 핵협의그룹(NCG)을 통한 확장억제가 제도화됐다. 이에 따라 한국의 독자 핵무장론의 주장도 힘을 잃게 됐다. 미국이 보유한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 III는 발사 후 34분 만에 평양을 초토화할 수 있다. 북한은 미국 미사일의 발사 움직임을 사전에 탐지할 능력이 없고, 발사한 미사일을 막을 요격미사일과 같은 방어 체계도 전무하다. 한·미는 한국의 재래식 전력과 미국의 핵전력을 함께 사용하는 ‘핵재래식통합작전’(Conventional & Nuclear Integration: CNI)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   군사적 효과를 판단하기 어려우면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빠르다. 그런데 김정은의 입으로 불리는 김여정은 이미 미국의 확장 억제를 비판하는 담화를 수차례 발표했고, 김정은도 연말 연초 회의에서 정권 종말, 핵협의그루빠(그룹), 미국 핵전략 자산, 한미연합훈련, 일본과 한국의 군사적 결탁 등을 조목조목 언급하면서 ‘신경이 쓰인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김정은·김여정 남매가 확장 억제를 견제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북한은 핵무기 보유로 주도권 확보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핵의 효용성이 더욱 감소하는 정반대 결과가 나타나는 상황이다.   신냉전은 북한의 ‘희망사항’일 뿐   북한 공세론의 두 번째 근거는 세계 질서의 변화와 연계된 신냉전의 도래다. 미국의 주도로 한·미·일의 협력 소위 남방 삼각관계의 강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이에 맞서 북·중·러가 힘을 합쳐 대응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지난해 9월 연설을 통해 “제국주의 반동 세력에 의해 전 지구적 범위에서 ‘신냉전’ 구도가 현실화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중국, 러시아, 이란 등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국가가 연대해 미국 주도의 1극 체제를 분쇄하고 다극 체제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게 김정은의 주장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해 유난히 밀착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북·중·러를 한 축으로 하는 신냉전은 북한이 만들고 싶은 희망 사항일 뿐이다. 최근 나타나는 북·중·러 협력은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라기보다 ‘편의에 의한 결합’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특히 북한과 러시아의 협력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라 조성된 일시적인 관계 증진일 가능성이 크다. 북·중·러 간에는 최고지도자에게 권력이 집중된 권위주의 정치 체제라는 특성과 미국을 적대시하는 인식 외에는 공유할 만한 가치나 공통점도 없다. 경제적으로도 상호 보완적이지 않다.   지난해 러시아와 관계를 다졌던 북한은 올해 수교 75주년을 맞는 중국과도 밀월을 유지하려 하지만 미묘함은 여전하다. 김정은이 지난해 9월 북·러 정상회담에서 “조·로(북·러) 관계를 우리 대외정책에서 제1순으로 제일 최중대시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은 중국에 보내는 압박 메시지로 들린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방북은 기정사실화된 반면 북·중 정상회담 이야기는 아직 없다. 비공개회의에 참석했던 중국 측 인사가 “북·중·러가 하나로 묶일 경우, 가장 불리한 것은 중국”이라고 한 발언은 북한 및 러시아와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중국의 고민을 보여준다. 중국은 북한·러시아와는 달리 현재 국제질서의 노골적인 파괴를 원하지 않고, 특히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라도 유럽 국가와의 관계를 중시한다.   통일 담론 대체할 비전은 전무   북한 공세론 중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북한 신세대론’이다. 북한의 신세대인 ‘장마당 세대’는 물론 김정은·김여정도 선대(先代)와 달리 통일에 대한 ‘갈망’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견해다. 북한은 정권 출범 이래 사회주의 건설과 조국 통일을 역사적 사명으로 선전해 왔지만, 김정은 남매는 통일론과 결별을 하더라도 별로 문제가 없다고 인식한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북한이 그동안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 온 통일론을 대체할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북한의 신세대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외부 문물과 사조에 익숙하다.   통일론을 대체할 수 있는 건 경제발전론이지만 현재 북한의 상황으론 녹록지 않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무너진 지 오래다. “사(私)경제 종사율이 급격히 증가했고, 국가의 배급이 아닌 장마당 활동이 주된 소득원이 됐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통일부가 최근 발표한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보고서』가 이를 잘 보여준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조선노동당보다 더 센 당이 장마당”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북 주민 결속했던 통일론 무용해져   통일을 걷어낸 상태에서 경제상황도 마이너스의 길을 걷게 된다면 모든 책임은 김정은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김정은이 2021년 8차 당 대회 때 공표한 2025년 말까지 북한 경제를 1.4배 성장시키도록 하겠다는 목표는 그 이행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김정은은 매년 4%대 성장을 제시했는데, 이를 위해선 지난해와 올해 두 자리 숫자의 경제 성장율을 달성해야 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북한은 2021년 -0.1%, 2022년 -0.2%로 역성장했다.   결론적으로 김정은이 선포한 남북한 두 국가론과 통일 포기 선언은 패착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북한 내에서 조직적인 반발이 당장 일어나진 않겠지만, 북한이 그동안 최상위 가치로 강조해온 통일·평화·민족을 근간으로 하는 ‘혁명’이 사라진 자리는 결코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통일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했지만, 이마저도 더는 할 수 없게 됐다. 김정은의 새 노선은 통일 대의에 익숙한 북한 주민들을 혼란으로 빠뜨릴 뿐만 아니라 남북간 체제 경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군사력 건설만으로 바깥 세상이 궁금한 북한 주민을 극장에 잡아둘 수 없다. 결국 선군(先軍)을 포기한 선경(先經) 만이 답이다. 김정은도 이를 잘 알기에 잠 못 드는 밤이 길어지고 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2024.02.09 00:30

  • [김현철의 퍼스펙티브] 질문하라, 비판하라 ‘똑똑한 문제아’가 사회 발전시킨다

     ━  문제 잘 풀고 성실한 한국 학생을 걱정하는 이유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정책학과 교수, 의사 나는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질문을 두려워하지도 고분고분하지도 않은 좀 유별난 학생이었다. 학교의 비합리적 처사에 이의를 제기하면 권위에 맞서지 못하게 몽둥이가 날라왔다. 오랜만에 만난 중·고교 동창들은 학창시절을 ‘야만의 시대’로 회고했다. 의과대학 실습생 시절엔 교수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레지던트에게 불려가 ‘가만히 있으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경제학과 대학원에선 세미나 발표 내용의 허점을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는데, 발표자뿐만 아니라 동료 학생들도 불편해했다. 치열하게 토론해야 할 학문의 전당에서도 예의 바른 질문만이 허용됐다.     ■  「 체제 순응적 모범생 문화로는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 안 생겨   혁신은 능력보다 환경 영향 커 저소득층·여성 혁신재능 계발을   프로젝트 단위 연구비 지원보다 연구자의 미래를 보고 지원해야 」    해외에서 느낀 한국의 교육 문화   그런데 미국에 경제학 박사과정으로 유학을 가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나의 적극적인 문제 제기와 질문 세례는 미덕이 되었다. 반면 대부분의 아시아권 학생들은 여전히 교수의 학문적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침묵했다. 교수들은 그런 나를 “한국 학생 같지 않다”며 칭찬했고 내가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도록 힘써주었다.   한국 학생 같지 않다니 무슨 말인가? 미국 교수가 되고 나니,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비교적 솔직한 이야기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동아시아권(한·중·일) 학생들은 주어진 문제를 잘 풀고, 연구 조교로는 누구보다 성실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라는 것이다. 연구를 위해서는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이를 넘어서는 창의력이 중요한데, 한국 학생들은 이것이 결여되어 있다고 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김영희 디자이너 박사과정 선배였던 한 저명한 미국 교수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의 유명 대학 박사과정 동료 중엔 한국이 낳은 천재가 있었다. 시험 성적이 모든 과목에서 압도적인 일등이었다. 그동안 이 대학은 박사 종합시험의 성적을 합격/불합격으로만 기록했는데, 이 분 때문에 ‘뛰어난 합격 (High Pass)’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문제는 본격적인 박사 논문 작성과정에서 발생했다. 본인이 스스로 연구 주제를 찾아야 하는데 이 한국인 천재는 주어진 문제를 푸는 엄청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풀어야 할 문제를 찾지 못했다. 결국 “나는 연구에 적합한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다”고 선언하며 박사과정을 그만두었다. 이는 다소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실제 많은 한국 학생들이 이와 유사한 어려움을 경험한다.   한편 코로나 팬데믹에서 비판적 사고에 관한 국가적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정부가 몇 명이 모일 수 있는지, 마스크를 써야 하는지 등 시민의 일상의 삶에 깊숙이 개입했다. 자율성이 침해될 때 합리적 시민은 그 이유를 따져 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조치가 꼭 필요한지 되묻기보다는, 정부 지침을 어기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늦게 마스크를 벗었고, 불필요하게 오랫동안 학교 문을 닫았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규칙 깨는 문제아가 혁신 이끌어   경제학자들은 혁신과 기업가 정신에 주목한다. 창의성은 측정하기 어려운 추상적 개념이다. 반면 혁신은 특허의 질과 양으로 측정할 수 있고 기업가 정신은 창업의 질과 양으로 측정할 수 있다. 또 창의성이 혁신이나 창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공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혁신적 기업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제 발전에 핵심인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김경진 기자 버클리대와 런던정경대의 경제학자들은 똑똑한 문제아(Smart and Illicit)가 혁신을 만들어가는 기업가(주식회사의 소유주)가 될 가능성이 크게 높다는 사실을 밝혔다(Levine and Rubinstein, 2016). 어린 시절 소위 문제아로 불리는 공격적이고, 위험 감수적이며, 혼란스럽고, 규칙을 깨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똑똑하기까지 하다면 혁신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좋은 자존감도 혁신가가 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혁신과는 거리가 먼 체제 순응적 모범생을 길러내고 있다. 나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인 코넬대에서 8년, 아시아 정상권 학교인 홍콩 과기대에서 4년째 교편을 잡고 있다. 오랫동안 미국, 유럽, 남미, 한·중·일 등 동아시아 학생들은 물론이고 다양한 나라의 국제학교 출신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세계 다양한 교육 제도가 낳은 가장 뛰어난 대학생들을 비교해 볼 기회가 많았던 셈이다.   나는 수업에서 경제학이 검증하고 축적한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한다. 학생들은 수업에 비판적으로 임해야 한다. 내가 가르친 것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토론한다. 더 나아가 본인 국가의 특정 이슈에 대해서 본인이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 유럽, 남미 출신이 동아시아 한·중·일 출신 학생보다 일반적으로 더 적극적이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생각도 잘한다. 교수의 권위에 맹종하는 경우도 드물다. 사람마다 차이가 크지만 교수와 개인적으로 친해질 만한 사회성을 갖춘 아시아 학생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다. 물론 동아시아 출신 학생이 시험은 더 잘 본다.   국제학교를 졸업한 동아시아 출신은 흥미로운 집단이다. 문화적으로는 동아시아에서 살지만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이들은 중간자적 특징을 가졌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학생들의 침묵에는 교육과 문화 모두가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권위주의 중국이 혁신 못 하는 이유   세계은행에서 올해 출간될 세계 개발보고서(World Development Report)는 중진국의 경제발전을 다룬다. 창조적 파괴 과정을 통해 어떻게 중진국이 선진국으로 발전하는지 살펴본다. 이를 위해 지난달 중국을 거쳐 홍콩을 방문한 세계은행 팀을 만났다. 이들은 모방(imitation)에서 크게 성공한 중국 경제가 왜 다음 단계인 혁신(innovation)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중요하게 논의된 것은 교육제도와 권위주의적 사회였다. 중국 교육은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자 극한 경쟁의 대명사다. 여기에 더해 중국인들은 권위적인 정부를 비판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고가 경직되고 창의력이 싹틀 공간이 제한적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혁신적 성장에 모든 국민이 창의적일 필요까지는 없으니 창의적 엘리트를 기르는 것을 논의했다.   최근 하버드대 라즈 체티(Raj Chetty) 교수팀은 혁신적 발명가 120만명의 삶을 추적했다(Bell et al, 2019). 지난 수십년의 특허 자료, 국세청 및 뉴욕시 교육청 자료를 통합한 대형 프로젝트다. 혁신가는 대부분 중산층 이상에서 태어났다. 소득수준 하위 50% 이하의 가정에서 발명가는 1000명 중 1명 미만이나, 상위 1%는 그 확률이 10배도 넘었다. 성별 격차도 상당했다. 발명가의 82%는 남성이었다.   이 연구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이러한 격차가 타고난 능력 차이보다는 환경의 차이에 의한 것이 더 크다는 점을 보인 것이다. 가령 초등학교 시절 수학 시험 점수가 비슷한 아이들 사이에서도 가정 형편에 따라 발명가가 될 확률에 큰 차이가 났다. 어린 시절 특정 분야의 기술 혁신이 일어나는 동네·가족에서 자라면 그 분야의 발명가가 될 확률이 증가한다. 이는 혁신의 자질이 롤 모델 또는 인턴십 등 통한 네트워크 효과 등으로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학창시절 혁신에 노출되었다면 중요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잃어버린 아인슈타인’이 저소득층과 여성에게 많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개인의 힘으로는 꽃피울 수 없었던 이들의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 사회에 이바지하게 돕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국가는 혁신 창업의 위험 줄여야   국가는 혁신을 촉진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우선 혁신적 창업에 따른 위험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가령, 프랑스는 2002년 창업 실패 시에 최소 2~3년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창업이 크게 늘었고 이로 인해 연간 9000~2만4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다(Hombert et al, 2020).   혁신을 위한 연구비 사용도 개선하자. 연구비는 대개 프로젝트에 기반한 단발성 과제에 주어진다. 평가 주기도 짧고,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편이다. 미국의 비영리 의료 연구 기관인 하워드 휴즈 연구소는 프로젝트가 아닌 ‘연구자’의 미래를 보고 연구비를 수여했다. 최소 5~10년 동안 자유롭게 연구하고, 중간에 실패하면 다른 방식으로 도전할 수 있게 도왔다. 그 결과 비슷한 액수의 연구비를 받은 다른 연구자에 비해 훨씬 큰 학문적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Azoulay et al. 2011).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한 기관이다. 그런데 이미 학문적 성과가 높은 사람들이 이를 주도하고 있다. 만일 노벨상을 원한다면 전도 유망한 소장학자에게도 이와 같은 투자를 고려하자. 노벨상은 보통 70세를 넘어서 받지만, 이들이 노벨상을 받게 한 연구는 평균적으로 40대에 이루어졌다(Bjørk, 2019).    권위에 대한 복종, 강요된 침묵, 남 눈치나 보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식의 대한민국 사회의 운용 법칙을 이제 끝을 내자.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꽃피우고, 다양한 문제 제기가 존중되며, 국가는 이를 보호하고 조용히 약자를 도울 때 혁신이 가속화된다.   문제아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질문하라. 비판하라. 외쳐라. 이것이 이 사회를 변혁하고 국가를 발전시킨다!   ◆김현철=의사이자 경제학자. 연세대 의과대학 졸업 후 의사로 활동하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코넬대 정책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홍콩과기대 경제학과에 재직 중이다. 사회실험, 자연실험, 빅데이터를 통해 보건·교육·노동·돌봄 및 복지 정책을 연구한다.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정책학과 교수, 의사   참고문헌 Levine, Ross, and Yona Rubinstein. "Smart and illicit: who becomes an entrepreneur and do they earn more?."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132.2 (2017): 963-1018. Bell, Alex, Raj Chetty, Xavier Jaravel, Neviana Petkova, and John Van Reenen. "Who becomes an inventor in America? The importance of exposure to innovation."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134, no. 2 (2019): 647-713. Liang, James, Hui Wang, and Edward P. Lazear. "Demographics and entrepreneurship."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126, no. S1 (2018): S140-S196. Acemoglu, Daron, Ufuk Akcigit, and Murat Alp Celik. Young, restless and creative: Openness to disruption and creative innovations. No. w19894.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2014. Azoulay, Pierre, Joshua S. Graff Zivin, and Gustavo Manso. "Incentives and creativity: evidence from the academic life sciences." The RAND Journal of Economics 42, no. 3 (2011): 527-554. Hombert, Johan, Antoinette Schoar, David Sraer, and David Thesmar. "Can unemployment insurance spur entrepreneurial activity? Evidence from France." The Journal of Finance 75, no. 3 (2020): 1247-1285. Gottlieb, Joshua D., Richard R. Townsend, and Ting Xu. "Does career risk deter potential entrepreneurs?." The Review of Financial Studies 35, no. 9 (2022): 3973-4015. Bjørk, Rasmus. "The age at which Noble Prize research is conducted." Scientometrics 119, no. 2 (2019): 931-939.  

    2024.02.08 01:02

  • [박현도의 퍼스펙티브] ‘미군 인명 피해’ 미국 보복 천명에 긴장하는 이란

     ━  국제적 확전 우려 높아지는 중동 정세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6일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한 지 124일을 맞았다. 기존 최장 기록은 2014년의 가자 전쟁이었다. 당시 7월 8일부터 8월 16일까지 50일간 전쟁이 벌어졌다. 이번 전쟁 기간은 2014년의 배 이상으로 길어지고 있다.   전쟁 발발 직전으로 시계를 돌려 보자. 지난해 9월 9~10일 인도 뉴델리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회의에서 미국 주도 아래 독일·아랍에미리트(UAE)·유럽연합(EU)·이탈리아·인도·사우디아라비아·프랑스는 중요한 합의를 했다. 바닷길과 철로를 이용해 인도~UAE~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이스라엘을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인도~중동~유럽의 경제 회랑 건설이다.     ■  「 이라크 국경지대 미군 기지 드론 공격 받아…사망자 3명 발생 공격 배후 의심받는 이란에 대한 미국 내 여론 극도로 악화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 124일, 최장 중동 전쟁 기록 경신 예멘 후티 반군, 화물 항로 봉쇄…민족 갈등 얽혀 복잡한 양상 」    미국 전략 폭격기인 B-1B 랜서가 지난 1일 텍사스주 다이스 공군기지에서 출격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 3일 친이란 세력 거점 85곳을 폭격하고 추가 공습을 예고했다. [UPI=연합뉴스] 열흘 뒤인 지난해 9월 20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미국 폭스뉴스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매일 더 가까워지고 있다”며 이스라엘과의 수교가 머지않다는 걸 암시했다. 이틀 후 유엔 총회 연설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역사적 평화라는 더 극적인 돌파구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먼저 아랍 국가와 수교하고 그다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네타냐후 총리가 제시한 해법이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의 해법이 실현되기 직전에 와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이스라엘은 2020년 미국 백악관에서 UAE·바레인과 아브라함 협정을 맺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이 수교하면 아브라함 협정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전체 아랍 인구의 2%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98%의 아랍 사람들과 이스라엘이 친구가 되면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이스라엘을 파괴하려는 환상을 버릴 것이고, 그러면 평화가 온다는 구상이었다.   사우디·이스라엘 수교 논의에 찬물   지난해 9월 29일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중동지역은 지난 20년보다 현재가 더 평온하다”며 중동 평화 낙관론을 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극적인 수교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1일 이란의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교 장관이 나섰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대화로 설득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수교를 막겠다고 언급했다. 다음 날 이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경주에 질 말에 내기를 걸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우회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맺지 말라고 충고하고 나섰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수교라는 훈기를 차단하는 얼음물을 끼얹었다. 수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하마스를 무시하고 도모할 수 없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반이스라엘 공동 전선 강화   이스라엘이 영토 침범을 당한 건 1973년 10월 이집트의 기습 공격 이후 50년 만이었다. 그것도 다른 나라 정규군이 아니라 무장 조직이란 점에서 치욕적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가자지구를 맹폭격했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폭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사망자는 2만6000명을 넘었다. 죽은 사람의 60%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였다. 건물의 70%가 파괴됐고 주민의 80%는 난민으로 전락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막으려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쪽을 향해 로켓을 발사했다. 이스라엘은 주민을 대피시키고 대응 공습으로 맞섰다.   예멘의 후티 반군은 아덴만에서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바불만답 해협을 막았다. 가자지구 인도적 지원 재개와 공격 중단을 요구 사항으로 내세웠다. 후티 반군은 이스라엘과 관련된 상선과 화물의 이동을 막을 뿐 아니라 미사일이나 드론으로 공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은 3년 만에 다시 후티 반군을 국제 테러조직으로 지정했다. 미국이 영국과 함께 폭격을 가해도 후티 반군은 물러서지 않는다.   이슬람 수니파인 하마스와 달리 헤즈볼라와 후티 반군은 시아파다. 그중에서도 헤즈볼라는 12이맘 시아파, 후티 반군은 5이맘 시아파로 서로 다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이란 공통의 목표를 향해 공동의 적 이스라엘에 대항해 싸우고 있다.   튀르키예, 쿠르드 지역 폭격   중동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겐 이번 전쟁과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쿠르드와 발로치가 왜 갑자기 언급되는지 의아할 것이다. 튀르키예는 지난달 13일 시리아와 이라크의 쿠르드 지역을 폭격했다. 튀르키예는 시리아 북부에 군을 주둔하고 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의 쿠르드가 튀르키예의 쿠르드와 연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란은 이틀 뒤인 지난달 15일 이라크 쿠르드 지역 중심도시 에르빌의 한 건물을 미사일로 파괴했다. 이란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거점이다.   이란은 다민족 국가다. 유일한 공식 언어인 페르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60%다. 그다음으로는 아제르바이잔어와 쿠르드어를 쓰는 사람이 많다. 양쪽 모두 분리독립 세력이 활동한다. 이란의 분열을 노리는 미국과 이스라엘로서는 유용한 협력 세력이다.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분리독립 세력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믿는다. 중동 지역에서 쿠르드족과 이스라엘은 특별히 우호적이기 때문에 이란이 경계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발로치족 역시 마찬가지다. 발로치족은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아프가니스탄·이란·파키스탄에 나뉘어 살고 있다. 이란과 파키스탄에는 발로치 분리독립 단체가 활약한다. 파키스탄의 발로치 분리독립 세력이 이란으로 들어와 테러를 저지르는데 파키스탄은 제대로 막지 못했다. 이란은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반이란 성향의 발로치와 반시아파 성향인 IS를 지원한다고 본다. 그래서 지난달 15일 파키스탄 발로치 지역과 시리아 이들립의 IS 거점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파키스탄도 이란 내 발로치 분리독립 세력을 공격했다. 파키스탄으로선 이란이 자국 영공을 침해하였기에 맞대응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공격 대상은 파키스탄의 골칫거리인 발로치로 삼았다. 이렇게 중동 지역의 취약한 안보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받진 못했지만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안고 있던 문제점이다. 이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통에 터져 나왔다.   미군 기지, 석달간 165차례 피습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과 이라크 이슬람 저항단체는 이스라엘의 시온주의 정권 타파라는 대의를 위해 연대한다. 이란이 말하는 저항의 축으로 반미와 반이스라엘 공동 전선이다. 이라크 이슬람 저항단체라는 말은 간판일 뿐, 사실상 주축은 아부 마흐디 무한디스가 지휘했던 카타이브 헤즈볼라다. 그는 2021년 1월 3일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솔레이마니와 함께 미국의 드론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미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17일부터 지난달 29일까지 미군 기지는 165차례 공격을 받았다. 특히 지난달 28일 드론 공격으로 미군 세 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크게 다쳤다. 미국은 이라크와 국경 지역에 있는 요르단의 타워22 기지가 공격을 받아 미군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르단 정부는 자국 영토가 공격받은 적이 없다며 미국 발표를 부인했다.   이라크 이슬람 저항단체는 공격 직후 성명서에서 다섯 곳의 미군 기지를 공격했다고 밝혔다. 시리아의 세 곳(탄프·루크반·샷다디)과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즈불룬 해군 시설(하이파), 이라크 쿠르드 지역의 에르빌 공항 근처다. 미군 기지를 공격한 이유로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주민 학살을 들었다.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놀란 이란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미군 세 명이 목숨을 잃은 건 바이든 행정부에 재앙이다. 더욱이 미국 내 반이란 여론이 심상치 않다. 공격의 배후인 이란을 가만히 둬선 안 된다는 강경 여론이 끓어오른다. 일단 바이든 행정부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보복하겠다며 이란을 정조준하고 있다.   미군 기지 공격을 주도한 카타이브 헤즈볼라는 이라크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다시는 미군 기지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단히 이례적이다. 문제를 정리했으니 미국은 보복하지 말라는 신호다. 이란 정부는 그동안 무시했던 전임 정부의 외교 장관(모함마드 자바드 자리프)에게도 조언과 도움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나온다. 의의로 강경한 미국의 태도에 놀란 이란은 혁명수비대를 자국으로 불러들였다. 이란 본토나 이란 사람이 희생돼선 안 된다고 하면서 만일 공격을 받으면 반격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3일 이라크와 시리아 내 친이란 세력 거점 85곳을 폭격하며 추가 공습을 예고했다. 다만 이란 본토를 공격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전선을 더 확대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란과 친이란 세력의 자제력이 시험대에 오를 상황이다. 확전이 없길 바란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2024.02.06 00:30

  • [김윤의 퍼스펙티브] 의대 정원 확대, 잘못된 의료제도 개편과 병행해야

     ━  부족한 의사, 얼마나 어떻게 늘려야 하나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 위원 정부가 조만간 의대 증원 규모를 확정·발표할 예정이다. 하지만 의대 정원을 얼마나 늘릴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정부와 의사협회는 지난 1년간 25번이나 회의를 했지만 의대 증원 규모에 아무런 합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의사협회는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는 주장을 고장 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고 있고, 정부는 의사가 부족하다는 근거를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의사협회에 명확한 숫자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  「 종합병원·동네의원 합쳐 2050년에 의사 6만5500명 부족 중장기적 공급난 해소하려면 의대 정원 4500명 확대해야 필수의료 대책 없이 정원만 늘려선 의료취약지 해결 못해 실손보험 이용한 과잉진료 줄이고 의료 생태계 바꿔나가길 」    의대 증원과 함께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 진료 대란을 해결하고, 지방 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기존의 잘못된 의료제도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도 함께 밝혀야 한다. 필수의료를 전공하는 의사가 늘어나도록 의료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의대 증원은 큰 효과를 내지 못한다. 지금 의대 정원을 크게 늘려도 전문의 배출이 늘어나기까지는 10년 넘는 시간이 걸리니 당장 효과를 낼 대책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아직 잘못된 의료제도를 바로잡을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정부가 근거를 제시하면서 의대 증원 규모를 발표하고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하게 만들 대책을 내놓기를 기대하면서, 의사를 얼마나 어떻게 늘려야 하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여섯 명 중 한 명, 필수의료 취약지 거주   전국 226개 시·군·구를 응급·심뇌혈관·분만 진료 같은 필수의료를 1시간 이내에 이용하는 의료생활권으로 묶으면 모두 55개 중진료권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들 중 절반 가까운 25개 중진료권은 심장병·뇌졸중 같은 응급환자의 절반 이상이 다른 지역에 가야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필수의료 취약지’였다. 우리 국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필수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지역에 살고 있다. 전체 입원환자 중 자기 지역 병원에서 치료받는 비율인 ‘자체충족률’이 60% 이하인 중진료권도 24개에 달했다. 강원도 속초와 동해처럼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뿐만 아니라 수도권의 이천·여주·시흥에도 3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이 아예 없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중등증 입원환자의 네 명 중 세 명이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김영희 디자이너 필수의료의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큰 종합병원을 늘리면서 응급환자와 중환자를 보는 의사를 함께 늘려야 한다. 모든 국민에게 대도시 수준의 필수의료를 보장하려면 종합병원 의사가 1만2500명 더 있어야 한다. 이렇게 종합병원 의사 수를 늘리면 의료취약지의 응급환자와 입원환자 사망률을 15~30% 낮출 수 있다.   고혈압·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을 진료하는 동네 의원도 부족하다. 동네 의원이 많은 대도시 소진료권의 인구당 의사 수는 군 지역과 비교해 일곱 배 많았다. 만성질환을 잘 관리해 합병증 발생을 예방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면 인구 1만명당 동네 의원 의사 수가 최소 10.7명은 있어야 하는데 이 수준에 도달하려면 동네 의원 의사가 2만2000명 더 있어야 한다. 이렇게 동네 의원을 늘리면 매년 사망자를 2만명, 건강보험 진료비를 약 6조원 줄일 수 있다.   큰 종합병원과 동네 의원에 부족한 의사 수를 합하면 3만2500명에 달한다. 지금보다 의사 수가 적어도 1.3배는 되어야 우리 국민이 어디에 살든지 간에 필수의료는 차별 없이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도시에서 시골로 ‘의료 낙수효과’ 미미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서울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2050년에 부족한 의사 수는 최소 2만5000명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이런 수요 추계는 지금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고 가정하였기 때문에 미래 의사 수요를 과소 추계한 것이다. 지금 당장 의사가 30%가량 부족한 것을 고려하면 2050년 부족한 의사 수는 3만3000명이 돼야 맞다.   김영희 디자이너 지금 당장 부족한 의사 수와 2050년에 부족한 의사 수를 합하면 약 6만5500명이 된다. 2025년부터 의대 정원을 늘려 2035년부터 전문의 배출이 늘어난다고 가정하면 의대 정원을 약 4500명 늘려야 2050년까지 부족한 의사를 충원할 수 있다.   의대 정원을 늘리면서 잘못된 의료제도도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의료제도를 고치지 않고 의사 배출만 늘리면 의사가 부족한 곳에 의사가 늘어나는 효과는 미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5~2019년 사이 대도시와 시골에서 의사가 얼마나 늘었는가를 살펴보면 ‘낙수효과’는 미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간에 의사가 부족한 의료취약지는 의사가 거의 늘지 않았지만 의사가 많은 대도시 진료권의 경우 의료취약지보다 종합병원 의사는 두 배, 동네 의원 의사는 아홉 배 늘어났다.   먼저 부족한 의사를 더 부족하게 만드는 응급·중증·소아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의 공급 과잉을 해소해야 한다. 가뜩이나 부족한 의사가 여러 병원으로 분산되면서 24시간 365일 환자를 진료할 수 있는 병원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응급·중증·소아 환자의 수요에 맞게 적절한 수의 병원만 전문센터로 지정하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의사 인력을 전문센터에 집중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부족한 의사 인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병원당 환자 수가 늘면서 의료의 질도 좋아진다.   지역응급센터 세 곳 중 두 곳, 심장병 환자와 뇌졸중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은 세 곳 중 한 곳, 종합병원 세 곳 중 두 곳만 소아 전문센터로 지정하면 골든타임을 유지하면서도 의사 인력 부족을 완화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전문센터의 응급과 중증 환자 진료에 대한 건강보험 진료비를 획기적으로 올려줘도 건강보험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재정이 늘어나지도 않고, 건강보험 재정이 낭비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응급·중환자 진료 전문의 확충해야   둘째,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서 응급환자와 중환자를 보는 의사를 크게 늘려야 한다. 전문센터의 전문의 인력 기준을 크게 높이고 이를 충족한 병원만 높은 건강보험 진료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면 가능한 일이다. 진료 분야별로 적어도 6~7명의 전문의를 고용하도록 인력 기준을 정하면 필수의료를 선택하는 의사들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높일 수 있다. 건강보험 진료비 인상분 중 일정 금액을 필수의료 분야 의사 월급으로 주도록 하면 개원의와 수입 격차도 줄일 수 있다. 새로 배출되는 외과·산부인과·흉부외과 같은 필수의료 분야 전문의의 30~50%가 동네 의원을 개원하고 있으니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서 적절한 워라밸과 월급만 보장하면 필수의료 의사를 늘릴 수 있다.   셋째, 지역 병원들과 힘을 합쳐 의료취약지 필수의료를 책임지겠다는 대학병원에만 늘린 의대 정원을 배정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늘어난 의대 정원을 지렛대로 무한경쟁, 각자도생의 의료체계를 협력과 상생의 의료생태계로 바꿔나갈 수 있다. 지역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도 실력만 있으면 대학교수가 될 수 있도록 하고, 대학병원 교수들이 지역 병원에 나가서 환자를 진료하도록 하면 대학병원과 지역병원 사이에 협력하는 체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여기에 대학병원은 중환자를 진료하고, 지역병원은 경증환자를 진료할 때 높은 진료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면 의사 부족, 과잉 진료, 의료 질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넷째, 동네 병·의원이 실손보험을 이용해 과잉진료를 하고, 비급여 진료비를 높게 책정해 지나치게 높은 수익을 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로 인해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서 응급환자와 중환자를 보고 있는 의사들이 동네 병·의원으로 급격하게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 민간 의료보험처럼 가입자와 보험회사 뿐만 아니라 환자를 진료하는 병·의원도 실손보험 계약에 참여하도록 하면, 동네 병·의원의 과잉진료와 함께 비급여 진료비 가격도 관리할 수 있다. 지금처럼 동네 병·의원 개원의들이 실손보험과 비급여 진료로 수입을 계속 늘려나가면 건강보험 진료비를 아무리 올려도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의사들이 동네 병·의원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정부는 의대 증원 규모를 발표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근거를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지금 당장 의사가 얼마나 부족하고, 앞으로 노인 인구가 증가하는 등 의료 수요가 늘어나면서 미래에 의사가 얼마나 더 부족해질 것인가를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해야 한다. 정부가 의대 증원 규모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깜깜이 증원’을 하면, 의사협회는 이를 핑계로 더 반발할 것이고 의대 증원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   정부는 의대 증원을 발표할 때 무정부적인 의료공급체계를 ‘질서 있는 의료시장’으로 개편하는 의료개혁 방안도 함께 내놓아야 한다. 무정부적인 의료공급체계는 그대로 둔 체 건강보험 진료비만 올려봐야 응급실 뺑뺑이, 소아 진료대란, 지방 의료 붕괴는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다.   김윤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 위원

    2024.01.23 00:39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앞으론 ‘제2의 이석기 사건’ 수사 어려워져

     ━  국정원 대공수사권 폐지, 안보 문제 없을까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18년 4월 28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왓 바텀 공원. 한 남성이 계단에 앉아 생수병 마개를 따 물을 마시고 있다. 7~8m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다른 남성은 선글라스를 벗어 손수건으로 안경 렌즈를 닦는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치더니 북적대는 인파 속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간격을 유지한 채 이동하던 두 사람은 각각 오토바이와 택시를 타고 공원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시 후 둘은 어느 한적한 호텔의 객실로 들어섰다.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이 해외 거점으로 쓰던 곳이다. 감시의 눈을 피했다고 판단한 L씨 등 북한 공작원 2명과 한국에서 온 Y씨는 숙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매의 눈’으로 이들을 주시해 온 국가정보원 요원들에 의해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Y씨 등 일당 3명은 이로부터 3년 뒤인 2021년,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  「 ‘보안·대공·대정부 전복’ 직무 삭제 공청회 없이 민주당, 법 단독 처리   경찰, 해외 정보망 없고 수사 한계 국정원-경찰 신뢰 강화해 나가야 」    전직 국정원 직원 A씨가 전한 간첩단 사건의 전말은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A씨는 “몇 년 전부터 이들 핵심 피의자들을 추적해 왔지만 뚜렷한 증거를 잡지 못하다가 중국·캄보디아 등지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하는 현장을 포착했다. 사진·동영상을 촬영하고 접선 경로를 추적하는 등 핵심 증거를 채집, 본격 수사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통상 간첩 사건은 최초의 첩보와 혐의 포착→내사를 통한 증거 수집→본격 수사→검거 및 기소→재판까지 수년에서, 길게는 십수 년이 걸린다.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가 단서가 되지만 압수수색·감청 등 수사를 통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위의 간첩단 사건에서도 이들이 북한으로부터 F-35 스텔스 전투기 도입을 반대하라는 등의 지령문을 받은 사실이나 2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은 정황 등은 수사 착수 후 압수수색에서 드러난 것이다.   간첩 확실하지 않으면 정보 수집 못 해   퍼스펙티브 하지만 이런 패턴의 간첩 수사가 이젠 어려워졌다. 국정원법 개정으로 올 1월 1일부터 국정원이 직접 간첩 사건을 수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또 국정원의 직무 범위에서 ▶국내 보안정보 ▶대공 ▶대정부 전복 관련 업무가 삭제되고, ▶국외 및 북한 ▶사이버 안보 ▶위성 자산 정보의 수집·작성·배포만 할 수 있게 했다. 다시 말해 ‘북한과의 연계가 확실하거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수사는 물론 정보 수집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국정원 대공 수사파트에서 근무했던 정구영 한국통합전략연구원 부원장은 “간첩 의심자의 행적을 추적하고도 북한 공작원과 접선 현장을 포착하지 못하거나 증거 인멸로 북한 연계를 입증하지 못하면 그간의 정보 수집 활동은 불법이 된다. 그런데도 이를 각오하면서 간첩을 추적하고 채증 활동을 할 직원이 있겠느냐”며 “국정원(정보 수집)-경찰(수사)-검찰(공소 유지)의 3축 중 한 축이 무너지면서 나머지 두 축도 자동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해외에서 간첩 잡는 활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어느 나라든 정보 요원은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데, 채증 자료를 법정에 제시할 수 없고 되레 불법 활동 혐의로 불이익을 받는다면 정보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영상 촬영이나 사진 증거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수사관’ 신분으로 채증된 것이 아니면 법정에서 유의미한 증거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도 장애 요인이다.   친북 세력 해외로 불러 사상교육   국내에 자생적 친북세력, 이른바 주체사상파(주사파)가 생겨나면서 북한은 간첩 직파보다 친북 세력을 해외로 불러내 사상교육을 하고 지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전환했다는 게 당국의 분석이다. 정 부원장은 “경찰이 국정원이 넘겨준 첩보를 받아서 과거 국정원이 하던 방식대로 해외에서 현장 채증을 해야 하는데, 한국 경찰 신분으로 외국에서 수사하는 건 주권 침해에 해당해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해외에서 대공 수사를 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국정원 대공수사단장을 지낸 황윤덕 양지회(전직 국정원 직원들 모임) 부회장은 “버젓이 친북 반국가 활동을 한 게 드러나도 북한과의 연결고리를 밝혀내지 못하면 국정원이 관여할 여지가 없게 됐다”며 “제2의 이석기 RO(Revolutionary Organization) 수사 같은 건 이제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은 지하혁명 조직을 결성, KT 혜화지사 등 국가 기간시설 파괴 등을 모의한 혐의로 고발됐으나 대법원은 “RO의 실체는 인정되지 않는다”며 내란음모에 대해 무죄 판결했다(내란선동,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   “국민 설득 없이 안보부서 없애는 나라”   신재민 기자 국정원법 개정은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20년 12월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국회 정보위·법사위와 본회의 모두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이 단독으로 처리했다. 국정원 출신의 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개정안을 발의했고, 전해철 정보위원장은 “국정원이 불법 행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개혁 법안이라며 법안 통과를 강행했다. 하지만 공청회 한 번 없이 다급하게 졸속 처리를 밀어붙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당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소속 정보위원이던 조태용 국정원장은 “어떤 나라가 국가안보의 핵심적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를 없애는데 국민 설득 없이 일단 없애자고 하나? 국가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부서를 없앤 다음 이게 어떻게 될지는 나중에 보자는 식의 국가안보는 없다”고 비판했다. 실제 여론조사기관 ‘공정’이 지난해 5월 11~12일 전국의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3%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폐지에 대해 ‘모른다’고 답변했다.   경찰청 정보국장 출신의 이철규(국민의힘) 의원은 “대공수사권의 경찰 이관이라는 건 사실을 왜곡하고 국민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낸 레토릭에 불과하다”며 “이관이라면 국정원의 장비와 예산·인력 등 권한과 역량을 넘겨줘야 하는데, 하나도 넘어간 게 없지 않느냐. 국정원이 대공수사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해체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공수사를 전담하게 된 경찰청은 국가수사본부 산하에 안보수사국과 안보수사단을 신설하고 경무관급을 단장에 임명하는 등 조직 정비에 한창이다. 안보수사 인력은 지난해보다 56% 증가한 1127명, 이 중 대공수사 인력은 700명이다. 수사관 역량 강화를 위해 안보수사 경력자를 전임안보수사관(5년 이상)과 책임안보수사관(7년 이상)에 발탁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일각에선 경찰이 그동안도 유관 수사를 해왔다는 점을 들어 수사 역량에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의 안보 수사는 국가보안법상의 찬양 고무, 집시법 위반, 탈북민 관리 등 치안 질서 침해 사범 위주였다. 국정원과 달리 해외 정보망이 없는 데다 다단계 보고 체계의 공개 조직이라 수사기밀 보안유지가 허술해질 수 있다. 입사부터 퇴사 때까지 대공수사만 전담하는 국정원 수사국과 달리 경찰은 순환인사제여서 전문성과 업무 연속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북한이라는 특수 집단을 상대하는 장기적인 간첩 수사를 해 본 적도, 전문성도 없다”(이철규 의원)는 게 결정적 취약점이다. 인력을 늘린다 해도 수사 역량을 하루아침에 끌어올릴 순 없다.   안보범죄 정보 협의체 효율 가동해야   정부와 여당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복원이 필요하다”(조태용 원장)는 입장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협조 없이 법 개정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안보 공백 최소화를 위해 국정원·경찰·군·검찰 등 유관기관이 참여하는 ‘안보범죄 정보 협의체’의 효율적인 운영 모델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황윤덕 부회장은 “수사의 착수와 종결권이 경찰에 있는 만큼 첩보 이첩 후 수사 진척 상황 등을 경찰이 성실히 브리핑해 주는 등 기관 간 신뢰 유지가 관건”이라며 “보안 누설이나 조직 간 갈등이 생겨 정보의 질이 낮아지지 않도록 지휘부가 브레이크와 가속 페달을 조절하는 자제력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올해 들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국가’로 규정,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등 대남 기구를 폐지하고 서해상 도발에 나서는 등 위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의 안보 역량이 취약해진 틈을 타 간첩 공작 등을 본격 강화하겠다는 의미”라고 우려했다. 게다가 4월 총선을 앞두고 진영 간 갈등과 대립도 고조되고 있다. 간첩망을 통한 요인 암살이나 폭력적 파괴 행동 같은 후방교란 도발을 벌일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9·11테러 사건에서 보듯 안보의 최전선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국민 희생이 따르는 대형 안보사건으로 비화할 수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1.19 00:25

  • [손인주의 퍼스펙티브] 높아진 대만해협 파도…한국이 양안 평화 중재자 될 수도

     ━  대만 총통 선거, 안보·경제 영향은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이변은 없었다. 지난 13일 치른 대만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라이칭더(賴清德·65) 후보가 승리했다. 대만 유권자는 중국의 ‘양안(兩岸) 전쟁’ 위협과 사이버 공작에 굴복하지 않고 지도자를 민주적 방식으로 선택했다. 라이 당선자는 선거 운동 기간 내내 반중(反中)·독립노선을 내세웠고, 지지율 선두를 달렸다.   그는 2017년에 자신을 ‘대만 독립에 힘쓰는 일꾼’(務實台獨工作者)로 지칭했지만, 지난 8년간 대만을 이끌어온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의 ‘양안 관계 현상유지’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이번 선거 기간에 천명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라이 당선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  「 대만 독립파 당선에 중국 격앙 군사·경제 압력 한층 강화할 듯 대만 무력충돌 땐 한반도 격랑 양측에 ‘현상 유지’ 목소리 내야 」    대륙엔 온건파 목소리 거의 실종   대만 총통 선거(13일)에서 승리한 민진당 라이칭더(사진 가운데) 당선자가 자신이 시장을 역임한 타이난시의 한 유세장에서 지난 12일 지지자들과 함께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중국 정부의 눈에 라이 당선자는 차이 총통보다 더 강경한 반중 독립주의자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미국도 내심 불안하게 보는 것 같다. 라이 당선자가 선거 전 마지막 TV토론에서 “중화민국 헌법은 대만의 재난”이라고 대중 강경 발언을 한 때문이었다. 만일 대만 정부가 법을 만들어 독립을 추구할 경우 중국이 설정한 ‘레드 라인(red line)’을 넘게 된다. 지난해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정상 회담 이후 미·중은 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 채널을 착착 가동하고 있다. 하지만 대만 문제에 대한 시진핑(習近平)의 중국 정부 입장은 극도로 강경하다.   필자는 최근까지 대만에 머물면서 현지의 여러 전문가를 만났다. 그들은 선거 이후 양안 갈등이 더욱 고조될 것으로 전망했다. 양안 전략대화에 깊이 관여했던 루예중(盧業中) 국립정치대학 교수에 따르면 2019년 무렵부터 중국 본토에서 온건파의 목소리가 거의 사라졌다. 라이룬야오(賴潤瑤) 중앙연구원 박사는 중국에서 ‘자기기인(自欺欺人·자신을 기만하고 남도 속임)’ 현상이 심화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중국 관료와 전문가들이 최고 지도자의 뜻을 무조건 따라가는 ‘과잉 충성 리스크’를 지적한 것이다.   대만 독립 노선의 민진당이 12년 연속 집권에 성공함에 따라 중국은 앞으로 대만에 무역 제재뿐 아니라 군사적 압력을 더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대만은 이미 주권 독립 국가”라는 라이 당선자가 오는 5월 20일 제16대 총통에 취임하면 “통일을 위해선 무력도 불사한다”는 시 주석과 충돌이 불가피할 듯하다.   현 총통보다 더 강경한 정책 예상   타이베이(臺北)현의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라이 당선자는 최고 명문 대만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 출신으로, 입법위원(국회의원)과 타이난(臺南) 시장, 행정원장(총리에 해당) 등을 역임했다. 내치에는 밝지만, 국제 문제에는 생소한 편이라 외치 역량을 보완하기 위해 샤오메이친(蕭美琴·53·여) 주미 대만경제문화대표부 대표를 부총통 후보로 영입했다. 민진당 파벌 정치 실상에 밝은 대만의 한 싱크탱크 인사는 신임 총통이 전임 총통과 차별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4년 전 민진당 총통 후보 경선에서 경쟁했던 라이 당선자와 차이 총통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다.   라이 당선자는 차이 총통의 부하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인사들을 등용하려 하지만 인재 풀이 다소 빈약하다는 평이 있다.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강경파의 지지를 받아온 라이 당선자가 발탁할 외교 실무자들은 차이 총통 때보다 더 강경하고 도전적인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런 가능성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다수 전문가는 단기간에 양안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을 낮게 본다. 그렇지만 리스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는다. 지난해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은 향후 2~3년 안에 중국의 대만 무력 침공 가능성을 5%로 전망했다. 대만해협에서 무력 충돌 리스크는 앞으로 일상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국은 미국의 대중 억제 의지와 능력을 분석한 뒤 무력 사용 여부와 방법 및 시기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현상 유지 계속될까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원 중이다. 미국이 동시에 중국발(또는 북한발) 동아시아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중국이 판단하면 대만을 무력으로 도발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미국보다 국력이 열세였던 마오쩌둥 시대에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대약진운동(1958~62년)의 혼란 와중에도 1962년 인도를 침공했던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미국의 강력한 억제 때문에 중국이 현상을 유지할 것이란 믿음에 집착하면 치명적 오판을 범할 수도 있다.   통일을 포함한 대만의 미래는 민주·자결 원칙에 따라 대만인들이 선택할 사안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의 힘을 고려할 때 대만은 중국과의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대만 문제는 이제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글로벌 이슈다. 한국의 국익과도 불가분의 관계다. 대만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무력에 의해 전복된다면 세계 질서는 격랑으로 요동치고 한국의 번영과 안보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양안 전면전 땐 한국도 큰 손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대만해협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글로벌 국내총생산(GDP)의 10%에 해당하는 약 10조 달러의 천문학적 손실이 예상된다. 무역 의존도 약 75%로 세계 2위인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따른 리스크로 큰 손실을 볼 것이라고 한다. 한국의 무역 물동량의 43%가 대만해협을 통과한다. 한국은 수출입 화물의 99%를 선박으로 운송하고 있다.   양안 충돌의 최악 시나리오인 중국의 대만 본섬 공격 또는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중국 인민해방군 동부 전구뿐 아니라 북부 전구 일부도 참전할 것으로 군사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이 경우 서해와 남해 일부 해상에서도 주한미군을 포함한 미국의 동맹군과 중국군의 충돌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직면한 대한민국의 앞바다가 미·중 전쟁터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대만 문제와 관련해 한국은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힘에 의한 대만해협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고 한 것은 이런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안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한국 정부는 당당하면서도 정교한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억제(Deterrence)와 보장(Assurance)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중국의 대만해협 봉쇄나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한국은 이웃 우방들과 함께 ‘힘에 의한 현상 변경 반대’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하나의 중국’에 기초한 평화 통일을 위한 과정이자 수단으로서 대만의 방어적 군사력 유지는 불가피하다. 또 대만의 경제적 번영은 국방력의 근본이다. 따라서 대만의 신남향 정책을 비롯한 자유무역에 국제사회는 지지를 보내야 한다. 경제가 고사하면 대만의 대중 억제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불안감 해소 대책도 필요   동시에 중국의 불안감을 해소할 정책도 추진해야 한다. 대만의 독립 추구에 의한 현상 변경에 대해서도 한국은 반대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의미다. 가령 대만 독립을 향한 수순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국호 변경이나 중화민국 국가 폐지 등에 한국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협상에 의한 현상 변경’, 즉 평화 통일 옵션이 여전히 존재함을 중국 측에 설득하고 보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대만 문제에 입장을 천명할 수 있는 특별한 역사적 경험과 명분을 갖고 있다. 중국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 편에 서서 침공해 한국인은 크나큰 희생을 치렀다. 한국은 중국에 “참담하고 허욕에 가득 찬 무력 통일 시도는 위험하다”고 경고할 수 있는 도덕적 위치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경험한 이웃으로서 대만에 당분간 현상을 유지하도록 권유할 수 있다. 분단의 아픔과 함께 민주주의·시장경제 등 가치·제도를 공유하는 한국인은 대만인과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국민당 소속으로 2008~16년 집권한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은 언론 인터뷰에서 “외국 정부가 대만을 돕는 최고의 방법은 대만과 본토가 평화 협상을 통해 전쟁을 피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대만대학 황민화(黃旻華) 교수는 양안의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트랙 투’ 대화가 거의 단절됐다며 우려했다. 그는 대만이나 중국 본토에서 양측 인사의 접촉은 어려울 거라면서 대안으로 제3국에서 공신력 있는 민간기관이 대화의 장을 제공하는 옵션을 언급했다. 한국도 후보지가 될 수 있다. 세계의 중심국으로 부상한 한국은 증대된 국력을 바탕으로 세계 평화와 번영을 이끄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다. 당당하고 정교한 국가전략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손인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4.01.16 00:23

  • [김현철의 퍼스펙티브] 노동시장 격차 해소가 교육 과열·저출산 해결 열쇠

     ━  승자독식사회가 된 한국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학 경제학과·정책학과 교수 의사 대한민국이 상위 소수가 더욱 많은 과실을 가져가는 ‘승자 독식 사회’화 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외환 위기 이후다. 1995년 이전 대한민국의 상위 10%는 전체 소득의 35% 정도를 차지했다. 그런데 2000년 이후엔 이 수치가 45%를 훌쩍 넘겼다[그림 1]. 상위 1% 집중현상은 더욱 심각하다. 우리나라 하위 50%의 1인당 연간 평균소득은 약 1234만원인데, 상위 1%의 평균은 이들에 비해 무려 46배 많은 5억6000만원이다[표 1]. [그림 2]에서 보듯 우리나라의 상위 1%에 대한 소득 집중은 지난 10년 급격하게 증가했다. 반면 미국, 일본, 프랑스는 모두 불평등이 다소 완화되었다.   한국 상위 1% 집중 심각   〈그림 1〉 정근영 디자이너 의과 대학의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은 것도 이즈음이다. 급기야 최근에는 초등학교 의대 준비반이 등장할 정도다. 왜 이토록 의사가 되고 싶어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의사의 평생 소득이 다른 직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종합병원 의사의 평균 연봉은 2억원이 훌쩍 넘는다. 개원의는 평균적으로 이들의 2배 정도 버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노동연구원 홍민기 박사의 2016년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 상위 0.1% 최상위 고소득자는 대기업 임원 29%, 의사 22%, 금융업 종사자가 20%이다. 하지만 이 중에서 정해진 은퇴 연령이 없는 의사만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고소득을 영위한다. 이것이 의대 광풍의 핵심 원인이다.     ■  「 의사 정년 없고, 평생소득 높아 의대 광풍 핵심 원인으로 작용   언어·제도 탓,병원은 내수 중심 0.1% 의대 가는 사회 희망 없어     고임금 일자리 촘촘히 만들고   실손보험 개편 등 국가개입 필요  」    의사였던 나는 2002년 사회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의사는 당시에도 고소득 직장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만일 그때도 지금처럼 의사의 소득이 다른 직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면, 내가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좋은 일자리, 미국이 한국의 15배   정근영 디자이너 미국도 의사가 고소득을 누린다. 하지만 미국엔 로펌, 컨설팅, 정보기술(IT)업계의 다른 고소득 전문직 수가 많다. 대기업 일자리 수도 많다. 2022년 기준 포춘(Fortune)지 선정 글로벌 500대 기업 중 미국 기업이 136개인 반면 대한민국은 18개에 불과하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세계적 대기업에 고용된 인원은 각 1480만 명, 100만 명 수준이다.  미국 인구가 3억 3000명으로 우리보다 6.5배 많지만, 좋은 일자리 수는 15배나 많다. 이렇듯 좋은 직업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미국에서는 꼭 아이비리그나 그 수준의 대학을 나오지 않더라도 좋은 일자리에 대한 접근성이 높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와 같은 의대 광풍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와 다른 직군의 소득 차이만큼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도 크다. 대기업의 연봉이 중소기업에 비해 높은 것은 만국 공통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격차가 유달리 크다. 2021년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종업원 500명 이상 기업의 임금은 5~9인 사업장 대비 약 2배다(2019년 기준). 반면 일본은 1.3배, 미국은 1.5배, 프랑스는 1.6배 수준이다. 더구나 이들 국가는 그 격차가 줄고 있지만, 우리나라 대기업-중소기업 격차는 점차 커지고 있다.   직종·사업규모별 소득격차 지나쳐   독보적 고소득 직종인 의사가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의과대학에 가는 것이고, 연봉이 훨씬 높은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는 확실한 길은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이다. 극한 경쟁과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로 요약되는 대한민국 교육 과열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이러한 직종별, 사업 규모별 큰 소득 격차에 있다.   〈그림 2〉 정근영 디자이너 격차 자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격차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격차가 지나친 것이 문제다. 격차가 클수록 자녀 교육에 투자해서 명문대 입학에 성공했을 때 누리는 이득이 크다. 그러므로 교육에 대한 과잉 투자는 학부모와 학생의 입장에서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반면 그 격차가 크지 않다면 무리하면서까지 극한 대입 경쟁에 뛰어들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지나치게 과열된 교육은 모두를 불행하게 하여 저출산의 주요 원인이 됨은 물론이다.   최근 하버드대 라즈 체티(Raj Chetty) 교수팀은 미국 아이비-플러스(8개 아이비리그 대학 및 듀크, 스탠퍼드, 시카고 대학)의 대기자 명단에 있다가 아슬아슬하게 합격한 사람들과 결국 떨어진 사람들의 삶을 추적 조사해 ‘명문대 효과’를 추정했다. 대기자 명단에 있었던 이들의 고등학교 졸업 시의 능력은 거의 같았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명문대에 입학한 사람들은 졸업 후 동문이 포진한 고소득 기업에 입사할 확률이 7.2%에서 25.5%로 증가했다. 상위 1%의 고소득자가 될 확률도 8.1%에서 12.8%로 증가했다.   ‘명문대 효과’는 친구·동문 힘   명문대가 잘 가르치기 때문일까? 답은 '아니요'다. 2019년 하버드대의 펠리페 바레라-오소리아(Felipe Barrera-Osorioa) 교수팀은 남미 콜롬비아의 명문대에 작은 점수 차이로 입학한 학생과 탈락한 학생을 추적 조사했다. 물론 입학 당시 능력은 거의 같은 사람들이다. 콜롬비아의 대학엔 졸업시험이 존재하기에, 이 성적을 비교하여 명문대의 (차 상위 대학 대비) 교육 효과를 측정할 수 있었다. 결과는 흥미롭다. 입학 당시와 마찬가지로 졸업할 때도 이들의 성적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명문대생은 취업률과 임금이 각각 7.4%, 4.6%포인트 높았다. 명문대 효과가 대부분 대학 이름값(신호 효과)에 있다는 결론이다.   같은 방식으로 예일대의 세스 짐머만(Seth Zimmerman) 교수는 2019년 칠레의 명문대 효과를 측정했다. 그 결과 졸업 후 상위 0.1% 고소득자 될 확률이 1.4%에서 2.1%로 증가했다. 그런데 그 효과가 명문 사립 고등학교 출신 남자에만 국한되었다. 네트워크가 부족한 일반 공립 고등학교 출신과 여성은 명문대 효과가 없었다.   교육경제학의 대부분 연구는 명문대 효과가 학생의 능력을 높이는 것보다는 동문·친구 및 신호 효과에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명문대 진학을 위한 무리한 투자는 고임금을 위한 개인의 선택으로는 합리적 결정일 수 있으나 국가적으로는 큰 손해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진짜 해법   상위 0.1%의 인재들이 의사가 되는 현실 또한 국가적 손해다. 가장 유능한 인재들이 일하는 병원 산업은 내수 시장 중심이다. 의료에는 언어, 문화, 제도의 장벽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소수의 외국인 진료와 일부 병원의 해외 진출이 사실상 병원 산업이 가진 확장성의 전부다. 우리 사회의 가장 뛰어난 인재는 고부가가치 제조업이나 기술 기업에서 혁신을 통한 생산성 혁명에 투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세계적 제조업·기술 기업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출을 늘려 국가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   결국 무한 경쟁으로 사회의 비효율성을 초래하는 교육 문제 해결의 열쇠는 노동시장의 지나친 격차 해소에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입시제도와 교육 정책의 변화만으로는 백약이 무효함을 이미 알고 있다. 근본적인 이유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과열이 사그라들 리 만무하다. 누군가는 고소득자 세금을 올리자고 선동할 수 있겠지만, 한국의 소득세 최고구간 세율은 (지방세 포함) 49.5%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무엇보다 더 많은 고임금 일자리가 촘촘하게 존재해야 한다. 즉 고부가가치 과학기술 제조업 및 서비스업 육성이 중요하다. 현행 제조업 일변도인 산업 구조의 다양화도 필요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2022년 분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서비스업 일자리의 30.0%가 도소매 및 숙박·음식업 등 저부가가치 산업에 몰려있고(OECD 9위), 전문·과학·기술서비스업 등의 고부가가치 지식기반산업 비중은 6.2%로 낮은 편이다(OECD 28위).      기울어진 운동장을 좀 더 평평하게 하는 적절한 국가의 개입도 필요하다. 지난 20년간 다른 전문직에 비해서 의사의 소득만이 유달리 증가한 중요한 이유가 실손보험이다. 병·의원 이용 시 본인부담금이 대폭 줄거나 심지어 공짜가 되니 의료이용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상당수는 도덕적 해이에 기반한 불필요한 의료 이용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건강보험재정 악화와 의사 수입의 확대로 이어졌다. 실손보험의 본인 부담을 대폭 늘려야 한다. 비급여 의료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필요하다.   또한 연구 개발에 종사하는 과학기술인의 보상을 늘려야 한다. 적어도 공공기관에서는 과학기술인의 임금을 올리고 은퇴 연령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을 단순히 이윤을 나누어 가지라하는 방식은 하수다. 중소기업이 자체적으로 생산성을 올릴 수 있도록 정부와 대기업이 돕고, 나머지는 시장기능에 맡겨야 한다.   기억하자. 승자 독식의 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과도한 사교육 투자도 세계에서 제일 낮은 출산율도 해결이 요원하다. 지나치게 기울어진 운동장엔 미래를 위한 건물을 세울 수 없다.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학 경제학과·정책학과 교수, 의사   참고문헌   홍민기. "최상위 소득 집단의 직업 구성과 직업별 소득 분배율." 사회경제평론 29.3 (2016): 27-50. Chetty, Raj, David J. Deming, and John N. Friedman. Diversifying society’s leaders? The causal effects of admission to highly selective private colleges. No. w31492.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2023. Zimmerman, Seth D. "Elite colleges and upward mobility to top jobs and top incomes." American Economic Review 109.1 (2019): 1-47. Barrera-Osorio, Felipe, and Hernando Bayona-Rodríguez. "Signaling or better human capital: Evidence from Colombia." Economics of Education Review 70 (2019): 20-34.  

    2024.01.11 00:28

  • [이재승의 퍼스펙티브] 나토 최전선서 본 한반도…동맹 중요성 상기해야

     ━  중립의 시대가 저무는 세계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쪼개진 지각이 충돌하는 단층대는 지정학에도 존재한다. 단층대 위에서는 긴장과 분쟁이 수시로 발생한다. 전쟁 발발 이후 두 번째 겨울을 맞는 우크라이나 위쪽으로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서 핀란드로 이어지는 유럽의 지정학적 단층대가 존재한다. 미국과 유럽의 집단방위체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최전선이다.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단층대 위에 놓인 한반도 역시 같은 도전과 고민을 숙명처럼 맞이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10월 노르딕·베네룩스센터장 자격으로 외교부와 주한 발트해 3국 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북유럽과 발트해 3국을 방문했다.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발트해의 바람은 고풍스러운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구도심을 날려버릴 듯이 강했다. 핀란드만의 파도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몰아친다. 발트 3국의 안보 환경 역시 거칠다. 발트해에 인접한 세 나라는 동쪽으로 자연적 국경이 없고, 총인구가 700만도 채 되지 않는다. 영토도 전쟁 초기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보다도 작다. 옛 소련에 합병되며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던 쓰라린 역사도 공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이들 소국의 우려는 역사적 기시감을 그대로 반영한다. 군사적 강대국이자 핵 무장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이 지역으로 다시 눈길을 돌린다면 발트 3국은 자신의 역량만으로 스스로를 지키기 어렵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자유와 독립과 주권을 지켜야겠다는 의지는 단호하다. 동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다.     ■  「 핀란드·발트 3국, 중립 버리고 나토 가입한 건 생존 위한 선택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동맹이 주는 안보 확증 더욱 중요해져 각자도생 국제 질서에서는 약소국이 보다 큰 부담 지게 돼   한반도 넘어 글로벌 안보 행위자가 돼 외교 협상력 키워야   」    ‘나토 호수’가 된 발트해   지난해 10월 벨기에 브뤼셀 나토 본부에서 열린 나토 회원국 국방장관 회의에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과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과 발트해 3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나토와 더욱 결속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발트 3국의 공통적인 최우선 과제는 안보 확증이다. 과거 독일·스웨덴·러시아 등 강성한 주변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특히 오랜 기간 독일 영향권 안에 있으면서 쌓인 역사적인 반감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반감은 소련 시기 동안 오히려 ‘반감’되었다. 어느 쪽이 더 필요한 파트너인지에 대한 우선순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보다 명확해졌다.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우려는 독일을 보다 가까운 파트너로 만들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된 1990년대 초반 발트 3국의 재무장관들은 일제히 독일로 향했다. 이미 그 시기에 유럽의 금융과 산업은 독일의 주도권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지정학적 최전선에서 발트 3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미국과의 동맹이다. 아직 실질적인 군사적 동원력이 경제력에 미치지 못하는 독일이나,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예측하기 어려운 프랑스에 의지하기보다는 미국과의 안보 동맹, 특히 미군의 주둔이 자신들의 안보와 경제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 된다. 발트해 주위는 얼마 전까지 중립국과 NATO 회원국, 그리고 러시아의 일부 영토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제 발트해는 핀란드와 스웨덴을 아우르는 NATO 국가들로 둘러싸인 ‘NATO 호수’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안에 러시아의 1945년 전리품이었던 칼리닌그라드가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작은 섬처럼 남아 냉전이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약소국은 균형자 되기 어려워   “지금도 불안을 느낍니까?”  발트 3국의 안보 관련 기관들을 방문하며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단호했다. “NATO가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처럼 되지는 않아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되묻는다. “한국은 어떤가요? 미국의 확장억제는 믿을만한가요? 한·미·일 공조는 견고한가요?” 질문은 서로 반복되었다. 쪼개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오래된 문구가 여전히 맴돌고 있다.   유럽에서 중립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발트 3국은 1990년대 중반, 중립은 위험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핀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안보 정체성을 재정립하며 75년간의 중립을 접고 NATO 회원국이 되었고, 러시아와의 1340㎞에 달하는 국경으로 NATO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중립국이었던 스웨덴도 NATO 가입을 마무리하고 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유지하고는 있으나, 가치의 측면에서 확연히 서방의 입장과 결을 같이 하고 있다.   냉전 시기 공산과 서방 진영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치는 것으로 보이던 핀란드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균형이요? 약소국은 균형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했던 것은 생존 외교입니다.” 돌아오는 답변은 냉정하다. 하지만 그 생존 외교는 결과적으로 역내 균형을 이루는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지키겠다는 핀란드의 신념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쟁을 마다치 않을 만큼 견고했다. 550만 명 인구의 핀란드는 현재 북유럽·발트국가 중 가장 강력한 군사 및 민간 방어력을 보유하고 있다.   트럼프 등장 땐 국제질서 위기 올 수도   “규칙에 의한 국제 질서가 무너지고, 서방이 약화되는 것은 큰 위기입니다.” 에길스 레비츠 전 라트비아 대통령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첫마디를 꺼냈다. 그는 2004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사법재판관을 역임했고, 작년 여름 대통령 퇴임 후에도 라트비아 국제법 특별대표를 맡고 있다. 원로 정치인이자 법조인인 그의 눈에는 힘의 정치로 귀환해 가는 글로벌 지정학이 더욱 위기로 다가온다. 국제 질서 규칙이 붕괴하면 가장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은 지정학적 단층대에 놓인 약소국들이다. 가치와 원칙은 강대국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 국가에 더욱 절실한 생존의 수단이 된다.   “만약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가 다시 등장한다면 정말로 위기가 올지도 모릅니다.” 2023년 NATO 정상회의를 주관했던 리투아니아에서 만난 여러 전문가는 강한 위기감을 표출했다. 미국이 고립주의로 나가고, 각자도생의 국제 질서가 펼쳐진다면 유럽과 NATO의 응집력은 약화할 것이고, 중국과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서방의 분열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쉽게 달성하며 영향력을 키울지 모른다는 우려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대만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이후, 리투아니아는 집요한 중국의 보복에 당면하고 있다. 경제적 의존이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중국은 리투아니아가 관련된 거의 모든 글로벌 비즈니스에 제동을 걸고 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전에서 러시아 편에 섰던 중국을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그 위험을 감수하며 대결의 최전선에 서 있다. 미국과 서방이 흔들리게 되면 그만큼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일 것이다. 그 우려는 한국과 일본도 공유한다. 2024년 유라시아 지정학의 두 최전선에 던져진 최대 위협은 푸틴인가, 트럼프인가? 씁쓸한 질문이 던져진다.   글로벌 안보 담론 형성에 적극 나서야   발트 3국, 그리고 핀란드보다 한국은 훨씬 규모가 큰 나라다. 경제력으로나, 군사력으로나 국제사회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행위자다. 하지만 중국·러시아·북한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지정학적 구도와 무게는 유럽 지정학의 최전선에 놓인 이들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이 우리와 더 많은 대화를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의제들이 많습니다.” 출장 중 만난 발트 3국의 정책 결정자들과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의 방위산업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발틱 안보회의’나 ‘리가 콘퍼런스’와 같은 이 지역의 안보 다자대화기구에도 한국이 더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일본은 이미 상당히 깊이 관여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이 그동안 눈여겨보지 못했던 새로운 군사, 경제안보의 장을 열어놓았다.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그리고 동북아에서의 동시다발적 갈등과 지정학과 지경학, 기술경쟁이 복합된 새로운 국제 질서는 하나의 위기가 한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불확실성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국제 질서에서 상대방의 선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낭만적 예측은 금물이다. 쓰라린 역사는 되풀이되기 쉽고, 희망 섞인 기대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게 지정학의 숙명이다.   중립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동맹의 공고화를 외교의 중심축으로 놓으면서 주변국과 여러 겹의 양자, 다자관계를 더해가면서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 글로벌 안보와 규칙 형성의 담론에도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 문제의 해법에도 더 많은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닮은꼴의 안보 지형에 놓인 NATO의 최전선에서 한국을 바라본다. 한국이 냉엄한 동북아 지정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벗어난 더 넓은 시각에서 글로벌 안보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이제 그럴 역량과 시기가 되었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 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2024.01.09 00:32

  • [김경식의 퍼스펙티브] ESG, 도입은 했지만 인식 부족하고 제도도 미비했다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착한자본의 탄생』 저자 대한민국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터널에 갇혔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진화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ESG가 터널에 갇힌 것은 여러 요인이 있다. ESG에 대한 각 경제 주체의 생각은 다르다. 대기업은 처음엔 긴장했으나 지금은 워싱(Washing·위장)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중소기업은 처음엔 ESG를 너무 몰랐고 지금은 혼란스럽다. 시민단체는 처음엔 혹시나 하고 기대했으나 지금은 걱정이 많다. 그 외 많은 기관·단체는 ESG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고민은 많이 하지만 딱히 실행하는 것은 없다. 최근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에너지 공급망을 교란하면서 여러 국가와 기업의 ‘ESG 회피 심리’에 절묘한 도피처를 제공했다.    ━  ESG는 자본주의에 대한 브레이크   ESG란 용어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주도로 2004년 발간한『Who Cares Wins(배려하는 이가 이긴다)』에서 처음 사용됐다. 친환경적 경영, 사회적 가치 창출, 합리적 거버넌스 운영을 통합하여 평가·판단·투자하는 것이 ESG다. 코피 아난은 이 작업에 세계 9개국 20여 개 금융기관을 참여시켰다. 이어서 2006년 4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주요 연기금 기관장들과 함께 ‘책임투자원칙’ 성명을 발표했다. PRI로 불리는 이 성명서에는 이윤 추구가 존재 목적인 투자(Investment) 앞에 책임(Responsible)을 강조했다. 즉 PRI는, 연기금들이 투자대상 기업을 판단함에 있어서 재무능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E), 사회적 가치(S), 지배구조(G) 등 비재무적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원칙으로 했다. 위기로 치닫는 자본주의 급행열차에 ESG라는 완충적 브레이크를 유엔이 공식적으로 제안한 것이다.   김영옥 기자   ■  「 ESG 20년, 세계 각지 제동 기류 수익 낮고, 에너지 값 급등 작용 한국 재생에너지 OECD 최하위 한전 전력시장 독점 큰 걸림돌 남녀차별·거수기 이사회 여전 기업 안팎 강력 견제장치 쓸 만 」  이를 계기로 금융가들은 ESG를 기반으로 기업을 평가하고 투자를 결정하게 됐다. ESG 항목에 대한 측정·보고·검증이 중요해지다 보니 ESG 보고서도 이를 염두에 두고 작성이 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개별 금융 자본마다 ESG 평가 항목과 항목별 가중치가 다른 데다 금융기관 스스로도 항목별 가중치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피평가자 입장에서는 혼란이 가중된다.    ━  금융자본의 변심   그러면 금융자본은 왜 스스로 이런 혼란을 자초하고 있는가. 주요 이유로 ESG에 대한 금융자본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금융자본의 가장 큰 리스크인 전 세계적 기후위기와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 ESG를 시작했지만, 현재로선 ESG 투자가 막상 자본의 자기 증식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는 2018년 초 주요 기업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화석에너지 다소비 기업에는 투자를 중단하겠다’라고 하고 실제로 투자를 축소했다. 이를 계기로 ESG가 급격히 확산했다. 그러나 그렇게 회수한 자금이 재생에너지를 비롯한 ESG 중심 투자에서 기대한 만큼의 수익을 내지 못했다. 화석에너지 기업은 여전히 고수익을 내고 있지만, ESG ‘가치’는 아직 소비자들이 지불하는 ‘가격’에 반영이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래리 핑크는 ESG란 단어가 과도하게 정치화되었다며 용어 사용을 중단했다. ESG의 주요 지지자였던 금융자본의 태도 변화는 ESG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김영옥 기자 우리 경우는 어떤가? 그 터널이 더 어둡고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라는 점에서 문제가 보다 심각하다. 여기엔 ESG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인식 부족과 제도적 미비 탓이 크다.    ━  한국 재생에너지 여건 좋아   친환경가치(E) 측면에서 대표적인 걸림돌은 재생에너지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낙후된 전력시장 제도다. 많은 이가 우리나라는 재생에너지 여건이 안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절대 아니다. 우리와 같은 제조업 국가인 독일, 일본, 중국보다 좋거나 비슷하다. 태양광의 경우 연평균 일사량(㎾h/m2)은 한국(1459), 중국(1457), 일본(1355), 독일(1056) 가운데 우리가 가장 좋다. 육상풍력발전 평균 이용률은 23%로 일본(20%), 호주(27%), 중국(26%)과 비슷하다. 해상풍력발전은 약 30%로 일본(30%), 중국(35%), 미국(30~50%, 일부 지역은 30~31%) 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국에너지공단 통계) 우리나라 풍속 범위도 5.39~8.12m/s(중위값 6.2m/s)로 경제성 확보 기준인 6m/s를 넘는 지역이 다수 존재한다. 재생에너지 선진국인 독일의 경우도 발전은 북부지역에서, 수요는 남부지역에서 일어나서 송전 문제가 심각하다. 그런데도 독일은 2023년 발전량에서 재생에너지가 52.5%를 차지했고, 2030년까지 80%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의 재생에너지가 아직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인 10% 미만에 머무는 또 다른 이유는 전력 판매시장이 한국전력 독점 구조라는 점이다. 기업이 필요한 전기를 재생에너지로 하는 RE100의 경우 해외 사업장에서는 거의 100%를 달성하고 있지만, 국내는 거의 바닥 수준이다. 재생에너지를 직접 구매하는 전력(PPA)의 경우 송배전 요금이 기존 한전 제공 전력보다 거의 배나 된다. 앞으로 국내 RE100 부족으로 많은 기업이 제조 공장 투자를 국내보다 해외에 할 것이다. OECD 국가 중 전력 판매 독점은 한국과 멕시코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전력산업 구조 개편은 않고 누수도 못 막는 땜질 처방으로 대처하고 있다.    ━  애플은 성별 임금 격차 0%   사회적 가치창출(S) 상황은 더 짙은 암흑이다. 2015년 유엔이 ESG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목표로 결의한 것이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다. SDGs는 기본적으로 경제·사회·환경 정책의 균형을 전제로 하는데, 핵심은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다’이다. 이를 실현하는 방법은 조직의 가치사슬을 세부 단계로 나누고, 그 가치사슬에 있는 이해관계자를 적극 참여시켜 ‘숙의 공론화 과정’을 밟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쾌한 방법이 ‘협력회사와 기술 공유’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잘 안 되고 있다. 심지어 숙의 공론화 과정 그 자체가 ESG 활동임에도 그런 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갑(甲)의 기준 준수를 강요하거나 책임 전가용 근거를 남기기 위한 기록 활동이 많은 게 현실이다. 평소 이해관계자와의 소통이 원활하고 축적된 조직일수록 예방적 인지 능력이 높아 위기 극복도 잘하게 된다. 따라서 소외 없는 소통과 적극적 실행이 중요하다. 글로벌 기업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4년간 850만 명에게 디지털역량 교육을 제공하고, 넷플릭스는 남녀 불문하고 직원에게 52주의 유급 출산휴가를 제공하고 있다. 애플은 이미 2017년에 전체 사원의 성별 임금 격차를 0%로 만들었다. 우리는 가장 앞서있는 삼성전자도 23.1%나 된다(2022년).    ━  낙하산 인사로 거버넌스 왜곡   합리적 거버넌스 구성과 운영(G)은 터널 끝이 명확히 보이건만 실행을 못 하고 있다. 유엔개발계획은 “거버넌스란 한 국가의 여러 업무를 관리하기 위하여 정치, 경제 및 행정적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뜻한다. 거버넌스는 또한 시민들과 여러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밝히고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을 다 하며, 서로 간의 견해 차이를 조정하는 기구나 제도로 구성된다”라고 정의했다. 기업 입장에서 ESG는 ‘기업의 지속가능을 위한 가이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욕망이 있고 자본은 탐욕을 추구한다. 욕망 있는 인간이 탐욕 있는 자본을 제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이 탐욕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강력한 견제기구(G)가 필요하다. 그러나 견제해야 할 거버너스 구성은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대부분 조직 오너의 측근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로 인한 폐해는 심각하다. 최근의 카카오 사례는 드러난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는 공공기관, 민간기업 모두 낙하산 인사가 일상화되었다. 반면 GM은 이사회 46%가 여성이고 산하 위원회의 50%를 여성위원장이 리드하고 있다.   ESG 확산에 일부 제동이 걸리긴 했으나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자동차 산업이 결국엔 전기차로 옮겨가게 될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도 ESG 터널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ESG 실천은 개별 조직이 자생력을 갖고 자기 생태계의 이해관계자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ESG를 추진하는 조직이라면 거버넌스가 시대 가치를 인식하고, 권한 남용에 빠지지 않도록 강력한 견제 장치를 둘 필요가 있다. 외부적으로는 자본에 독립적인 언론이나 시민단체, 내부적으로는 직원협의회 같은 커뮤니티를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새해엔 ESG를 보호무역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질 것이다. 환경과 공동체 사회에 얼마나 기여를 했느냐가 기업 가치와 비즈니스 성패를 좌우할 것이다. ESG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다. 세계가 움츠릴 때 오히려 뛰어나가야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김경식 ESG네트워크 대표 착한자본의 탄생 저자 

    2024.01.02 02:45

  • [박명림의 퍼스펙티브] 진영논리와 포퓰리즘 앞에서 무너져버린 공적 권위

     ━  권위의 소멸 시대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한국의 오늘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시대 언어는 소멸이다. 특별히 지방소멸, 인구소멸, 학교소멸은 한국사회의 3대 소멸이라고 부를 만큼 심각하다. 이제 ‘위기’나 ‘감소’와 같은 평범한 언어로는 - 사실은 이들 언어조차 결코 평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이 시대 전체를 드러내기에는 너무 온건할 정도로 오늘의 상황은 위중하다.   소멸의 속도와 규모는 끔찍할 정도다. 이대로 가면 이 공동체가 소멸로 치달을 것이라는 객관적 지표와 예견은 국내외로부터 제출된 지 오래다. 아니다. 그러한 객관적 진단과 추론들을 계속 뛰어넘을 만큼,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3대 소멸 지표의 속도와 규모는 더 빠르고 더 압축적이다.     ■  「 사회 각 부문 독자성·자율성 존중하는 데에서 공적 권위 시작 한국은 정치·국가 과도한 우위…권력은 커졌으나 권위는 축소 이익 배분에서 사적 관계 작용하는 ‘무도덕적 가족주의’ 판쳐 파당 논리 벗어나 대화와 권위 회복해야 공동체도 소생 가능 」    우리는 여기에 하나의 소멸을 더 추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권위의 소멸이다. 한국 사회에서 거의 모든 부문과 영역에 걸쳐, 이익과 권력이 매개되지 않는 한, 아니 외려 그것 때문에, 공적 권위 구조와 체계는 붕괴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올해 대표적인 사건은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자살이었다. 사사(私事)와 사익(私益)의 과도한 공공영역 침투와 파괴를 말한다. 가정의 사적 관계와 자녀 사랑이 공적 교육영역으로 넘어와 어떠한 영역과 역할 구분도, 따라서 권위도 권한도 존중하지 않는 상태가, 숨 막히는 상황에 몰린 교사의 자살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공적 권위 붕괴와 초교 교사의 비극   박명림 퍼스펙티브 정치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상대 진영의 가치와 권위는 존경과 존중은커녕 인정과 수용도 안 한다. 권위는 애초에 권한·저작권과 같은 뜻이다. 즉 각기 사회 영역과 부문들의 고유한 존재 이유와 직분,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말한다. 한 사회가 공적으로 건강하게 발전하는 지름길이다. 사적 신분적 권위가 아닌, 자율적이고 공적인 권위의 구축은 인류에게 근대를 가능하게 한 요체의 하나였다. 입법권·행정권·사법권의 분리도 물론이다. 권위·권한 개념의 등장과 함께 국민주권, 민주공화국, 권력분립, 대의민주주의가 함께 발전하였음은 익히 아는 바대로다.   공적 권위는 사회 각 영역의 분획과 분별을 통한 독자성과 자율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발원한다. 그러나 한국은 정치와 국가 영역의 과도한 우위와 독주가 일반이다. 각 고유 영역의 본질적 자율성을 침해하면 자유와 권리는 물론 민주주의와 민주공화국도 위협받는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권위도 점점 실종되고 추락한다. 워싱턴과 링컨과 루스벨트는 지금보다 훨씬 더 권력은 적었으나 권위는 절정이었다. 지금은 당시보다 권력은 비교할 수 없이 커졌으나 권위는 형편없다.   공적 권위의 상실을 대체하는 한국사회의 중심 원리는 무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오늘을 압축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핵심적인 공적 가치들의 판단과 적용의 준거는 마치 가족과 같은 사적 관계와 윤리들이다. 공적 조직 역시 사적 가족처럼 보호하거나 배제한다. 무도덕적 가족주의에서는, 자리이건 물질이건, 이익들이 공적인 권위적 배분보다 단기적인 직접적 보상에 의해 제공된다. 거기에서 엄정한 공적 기준과 공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국가의 거시적인 탈진영적 공적 의제들이 더욱 악화하는 이유다. 진영 이익이라는 사익의 공공화를 말한다.   진영으로 갈라진 한국사회에서 - 적어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 정부와 대통령, 국회와 정당, 법원과 검찰은 더 이상 전체 국민의 통합과 수렴의 기제이자 제도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지난 촛불시위 당시 한국사회는 6월항쟁 이후 최고의 국민통합 기회를 맞았다. 시민들과 의회와 법원의 일치된 견해는 한 사회의 일정한 의견 통합을 함의한다. 그러나 촛불 이후의 상황은 우리를 크게 당혹하게 만들었다. 국민통합 대신 적폐청산과 함께 나라는 정의와 불의, 합법과 불법, 청산과 법치의 이분법 사회로 치달았다.   국민통합 기회 날린 촛불 이후 상황   오늘의 민주주의 연구들에 따르면 진영 대결의 정치는 이른바 ‘민주적 교착상태’를 넘어 ‘민주적 난기류’와 ‘민주적 수렁’으로 빠져들어 민주주의 자체를 형해화하고 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현대 국가의 ‘역할’과 ‘과제’는 폭증하는 데 비해, 나라가 두 진영으로 쪼개져서 ‘권위’와 ‘승복’은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빈발하던 민주적 교착상태는 입법부와 행정부, 또는 대통령과 의회 사이의 제도적 권력적 길항과 충돌을 말한다.   그러나 민주적 난기류와 민주적 수렁 상태는 제도를 넘어 사사건건 진영대결이 반복되는 상황을 말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주 제도와 절차를 넘어 진영으로 갈라진 국민과 시민사회까지 함께 얽혀서 온통 편을 갈라 드잡이하곤 한다. 진영대결이 포퓰리즘과 한 짝인 이유다. 그러니 지지층 절반의 열광적인 지지의 반대편에는 국민 절반으로부터 권위의 인정과 존중은커녕 극단적인 저주와 혐오를 받기 일쑤다. 오늘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거리와 인터넷 공간의 구호와 언어들처럼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다.   부족장 숭배 방불케 하는 팬덤 현상   따라서 권위의 실종은 포퓰리즘의 한 유의어인 팬덤 현상과 직결된다. 참여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정치를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과 팬덤 현상의 부정적 효과는 강조할 필요도 없다. 본래 팬·열광은 공개된 정통 종교시설이 아니라 은밀한 이단·신전·무속시설에서 파생되었다. 광적·광기라는 말의 연원이기도 하다. 근대화·문명화·시민화는 이러한 사적인 미신과 주술을 타파하는 과정이었다.   팬덤 현상은 종교·문학·음악·미술·연예·스포츠, 즉 사적 영역에서의 취미나 애호로 충분하며, 본시 그러한 영역이었다. 그것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공적 영역과 준거로 들어올 때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인류의 최고 철학자는 이러한 영역 전이가 지니는 위험성을 깊이 통찰한 바 있다. 공적 여과와 발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사적 기호나 선호가 공공 영역으로 넘어올 때는, 마치 광기와 주술이 그러하듯, 소통과 설득이 불가능하며 항상 평행이며 요지부동이다. 절대 양보나 타협을 모른다.   더욱 문제는 이러한 직접성이 중우성(衆愚性)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지금 한 진영과 파당과 파벌의 수장과 리더에 대한 지지와 혐오는 마치 사적 부족장에 대한 충성과 배척처럼 집요하고 극렬하다. 종파의 교주와 신전을 옹위하듯 비판과 지적에 대해 벌떼처럼 격렬하게 반응한다. 진영 내부에서조차 파당적 공격의 언어들은 강렬하고 모욕적이며 지극히 비도덕적, 반인간적이다.   집단 내부에서마저 사라진 대화   그렇다 보니 진영과 진영 사이의 대화 단절과 사생결단식의 능멸과 모욕은 진영 내부에서도 동일하다. 대화는 진영과 진영, 여와 야 사이에만 단절된 것이 아니다. 여당 내부, 야당 내부에서도 대화가 거의 없다. 집권세력 내부의 권력 핵심 대 권력 주변 사이의 대화는 거의 없다. 같은 당 내부일지라도 일반 의원들과 지도부 사이의 대화도 거의 없다. 현실이다. 여야 대화 부재? 그렇다면 각각 여당 내, 야당 내에서는 이견 세력들 사이에 대화가 존재하는가? 그냥 윽박지름과 일방통행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대화주의를 말한다. 같은 당내의 계파가 다른 의원들 사이, 또 지도부와 평의원들, 즉 헌법기관인 의원 자신들끼리도 긴밀히 대화하지 않으면서 국민과는 소통하겠단다. 이런 대화는 위선이며 민주주의의 원리에 반한다. 자기들의 파당적 논리에 따라 국민과 지지자들을 위로부터 동원하려는 우민(愚民) 관점과 논리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모든 공적 권위를 해체하고 부정하는 진영 논리와 진영 대결, 포퓰리즘과 팬덤 정치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근대화·문명화·시민화가 탈(脫)주술화·탈(脫)광기화 과정과 직결되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공적인 민주적 절차와 과정도 진영 대결과 포퓰리즘이 결합해서는 안 된다. 둘 다 민주주의에 위배되며, 둘의 결합은 더욱 최악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민주적 대화를 통해 진영 대결과 포퓰리즘을 넘어 함께 사회 각 영역들의 공적 권위를 회복할 때이다. 그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소멸’이라는 불행한 시대 흐름은 끝내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2023.12.28 00:35

  • [이광형의 퍼스펙티브] 50년 뒤 인구 반 토막, 파격적으로 외국인 유입시켜야

     ━  국가 소멸 위기   이광형 KAIST 총장·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지난 17일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 추계에 따르면 앞으로 50년 후인 2072년에 우리나라 총인구는 3600만 명대가 될 것이라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예측이 합계 출산율 1.0을 가정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출산율이 현재와 비슷한 0.7~0.8명 선이면 3000만 명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24만6000명이 태어나서 합계 출산율 0.78을 기록했다. 출산율 감소 추세가 현재처럼 이어지면 50년 후의 인구는 2000만 명대 중반으로 떨어질 것 같다.   생산연령(15~64세) 인구도 50년 후에는 현재의 45.8%가 된다. 0~14세 유소년 인구는 6% 선으로 줄어들고,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50%에 육박하면서 극단적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생산연령인구 100명당 부양인구는 104.2명이 될 전망이다. 모두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국가 중 최악의 기록이다. 그리고 통계청은 한국인 기대수명은 2072년 91.1세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사는 국가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  「 현재 출산율 추세론 2072년 인구 2000만 명대 중반으로 떨어져 생산성도 낮아져 20년 후엔 경제 성장률 마이너스 기록할 전망 외국인 이공계·기술 분야 인재는 영주권·국적 등 특별 우대하고 법정 정년 점진적으로 늘리며 여성 경제활동 참여 적극 지원해야  」    이상의 예측을 보면 현재처럼 가면 대한민국은 50년 후에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경제활동인구는 절반도 안 된다. 생산성도 낮아져서 2042년이 되면 경제성장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통계청은 이런 추세라면 100년 후에는 인구가 2000만 명도 안 될 것이라 내다봤다.   정해진 암울한 미래   퍼스펙티브 이런 예측은 통계청이 가정한 소설이 아니다. 정해진 미래다. 인구 예측은 출산율과 사망률이 정해지면 저절로 계산되는 숫자들이다. 다만, 별도로 외국인 유입과 해외로 나가는 숫자가 있을 뿐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미래다. 나라는 거의 반 토막으로 줄어들고, 1인의 생산인구가 1인의 노인을 부양하게 된다. 연금은 이미 고갈되어 있을 것이고, 세금은 수입의 50% 이상 내야 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은 100년 후 지구 상에서 소멸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어려운데 2000만 명도 안 되는 인구 가지고 강대국 틈에 끼어 살아날 수 없다. 우선 그보다도 먼저 북한보다 더 작은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연구개발은 누가 하고, 생산은 누가 한단 말인가? 더 나아가 국방은 누가 한단 말인가? 이대로 가면 시간은 김정은의 편이 될 것 같다. 통계청에 따르면 북한의 출산율은 1.61 정도라 한다. 이제 더는 머뭇거릴 수 없다. 특단의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첫째, 출산 장려책은 지속해서 펼쳐야 한다. 일부에서는 출산율이 반등한 예가 없다며 포기하는 듯한 말을 하지만, 프랑스처럼 출산율을 회복하여 1.8 수준을 유지하는 나라도 있다. “출산은 가정에서, 양육은 국가에서 한다”는 마음으로 계속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특히 여성의 ‘육아와 직장 양립’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집을 대폭 늘려서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길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여성 결혼 후 경력 단절 없애야   둘째, 경제활동인구를 늘여야 한다. 인구 감소를 걱정하는 이유는 경제활동인구의 감소 때문이다. 현재 노인 연령이 65세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65세는 청년이다. 10년 늘려서 75세로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직장마다 정년을 10년씩 늘려야 한다. 현재 우리는 인력난을 말하면서 숙련된 인력을 조기에 퇴출하는 모순을 계속하고 있다. 정년을 한꺼번에 늘리기 어려우니, 일본처럼 점진적으로 연장하면 좋을 것 같다. 정년을 1년 연장하면 경제활동인구가 수십만 명이 늘어날 것이다.   셋째, 여성 인력 활용이다. 우리나라의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은 2022년에 54.6%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인구 감소 시대에 추가로 활용할 수 있는 인력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성의 활동을 10%만 올려도 경제활동인구가 수십만 명이 늘어난다. 어려서 양육할 때는 남녀 구분 없이 정성으로 기른다. 그런데 결혼 후에는 귀한 인력을 놀리고 있는 일이 너무나 아쉽다. 가장 큰 원인인 ‘결혼 후 경력 단절’을 겪지 않을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   매년 외국인 1만 명 한국인 만들어야   넷째, 외국인 유입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자주 단일 민족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 의미가 매우 약한 말이다. 역사 속에서 외국과의 교류와 전쟁 기록을 보면 한국인은 매우 많은 피가 섞여 있는 민족이다. 그래서 현재처럼 명석하고 적극적인 유전자를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피가 섞이면 더욱 좋은 일이다. 거기다가 현재 우리의 인구 상황을 보면 외국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처지다.   현재 외국인이 약 180만 명 정도 체류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한국 국적을 받은 외국인은 극소수이다. 국적 부여 조건이 결혼 등으로 매우 제한적이다. 필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50년 후에 인구가 반 토막이 나게 생겼는데, 순수 한국인이란 말은 불필요하다. 미국·캐나다 등은 이민자가 만든 나라다. 아랍에미리트(UAE)·카타르·싱가포르의 경제활동인구는 절반이 외국인이라 한다. 현재 매년 출생자 수가 평균 1만 명씩 줄고 있다. 이를 외국인으로 채우면 좋겠다. 매년 1만 명의 외국인을 한국인화 하는 목표를 세우자.   우리나라는 유달리 외국인에 대해서 배타성이 강한 경향이 있다. 이제 그런 생각을 벗어버려야 한다. 국가가 소멸하게 생겼는데 그럴 여유가 없다. 오늘날 세계 최강국 미국에는 ‘미국 민족’이란 개념이 없다. 미국 땅에 살면 미국인이 된다. 미국 내에서 잘 나가는 100대 벤처기업의 창업자 50%가 이민자라는 통계도 있다.   미국 100대 벤처 창업자 절반이 이민자   이제 외국인을 많이 받아들여서 소멸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맥을 잇게 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집안에 대가 끊기게 되면 양자를 받아들이는 풍습이 있다. 이제 양자를 받아들여 대한민국의 대를 잇게 해야 한다. 양자를 받을 때 거주 비자는 물론이고 영주권과 국적을 파격적으로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붙이고 살 수 있도록 가족도 초청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양자를 받아들일 때도 무조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고려해서 양자를 받았다. 우리가 지금 외국인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 외국인 유입에 가장 성공적인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처럼 하면 된다. 필요한 분야에서 머리 좋고 성실한 사람을 우선 받아들인다. 특히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이공계 기술 분야 인재는 특별 우대하여 영주권과 국적을 파격적으로 주면 좋겠다. 그 외에도 작업 현장의 기술직도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로 현장에는 숙련된 기술직도 필요하다.   대상자 선정에서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은 교육기관과 회사의 추천을 받는 것이다. 대학의 추천을 받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직업학교 등 공공 교육기관의 추천도 가능할 것이라 본다. 회사에서 필요한 인력을 추천받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모든 추천 기관이 동일할 수 없으니 실적과 평가를 통하여 추천 가능 숫자를 할당하면 될 것 같다. 초기에 이렇게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추천 내용을 평가하여 숫자를 조정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추천 기관은 스스로 신용을 관리할 것이다.   북핵보다 무서운 미래 인구 감소   한국인이 거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 아이가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투입하는 노력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하다. 직·간접적으로 투입된 경제적인 비용만 생각해도 1억원이 훨씬 넘을 것이다. 외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들려면 이 정도의 돈을 투입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한국어를 가르치고 사회에 적응하도록 기술을 가르치는데 투자해야 한다. 이렇게 해도 처음부터 아기를 낳아서 양육하는 것보다 싸게 먹힐 것이다.   외국인을 받아들일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외국인끼리만 모여 살게 하면 안 된다. 그들끼리 살다 보면 한국인화 되기 어렵고 부작용이 생긴다. 한국어 시험을 봐서 합격자에게만 비자를 줘야 하고, 그 후에도 지속해서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교육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비자를 갱신하려면 한국사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가족을 초청할 때에도 한국어 시험을 봐야 하고, 입국 후에도 교육해서 한국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이민을 많이 받는 선진국이 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 외국인에 대해 우려 섞인 시선이 있다는 점을 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국가가 소멸하게 생겼는데, 나의 핏줄, 남의 핏줄 따질 때가 아니다. 김정은의 핵무기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미래 인구 감소가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이광형 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2023.12.26 00:42

  • [은종학의 퍼스펙티브] ‘자유로운 청년’이 최고 자원…그들의 잠재력을 자극하라

     ━  미·중 경쟁시대 넘어서기, 중국이 가지 못한 길   은종학 국민대 중국정경전공 교수 장면 하나. 지난 11월 5일 일요일 한낮, 상하이의 대형 백화점은 썰렁하리만큼 한산하다. 하지만 같은 시각, 멀지 않은 곳의 티엔즈팡(田子坊)엔 사람이 많다. 역시 물건을 사는 이는 적은 듯하지만,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안내하는 옛 마을 테마 공간인 이곳엔 거닐고 사진 찍고 그사이 차 한잔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새 상품을 구매하여 소유하려는 물적 욕구는 경기침체 속에 감퇴하였지만 삶을 경험하려는 욕구는 남아 있다. 여기서 첫 번째 힌트를 얻는다.   MZ세대가 직장을 그만두는 이유   지난 11월 초에 방문한 중국 상하이의 한 대학 풍경. 마오쩌둥 동상과 ‘새로운 여정에 분발 전진하자’는 내용의 신시대 건설을 주창하는 시진핑 시대의 구호가 보인다. [중앙포토] 장면 둘. 한국에서도 MZ세대가 직장을 그만둔다. 고연봉과 풍부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소수의 직장 앞에서 최상위 능력자들은 옛 공식을 따른다. 치열한 노력, 경쟁, 성취의 공식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우를 약속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직장은 젊은이들의 버림을 받는다. ‘소중한 젊은 시간을 희생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막막한 모색을 하지만 통계 분류상으로는 ‘그저 쉰단다’. 직장을 떠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연봉과 같은 최고의 대우라면 좋지만, 아니라면 적어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한다. 여기서 두 번째 힌트를 찾는다.   장면 셋. 동력을 잃어 어두워진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칼럼 끝에 어김없이 기술혁신, 첨단과학, 연구개발(R&D)에 대한 강조가 등장한다. 물론 과학기술에서 앞서간다면, 심지어 ‘초격차’까지 만들어낸다면 우리의 경제적 기회가 커지는 것은 맞는다. 당연하다.     ■  「 요즘 젊은이는 ‘진짜 하고 싶은’ 일 추구…돈보다 창의 중시 ‘시진핑 말씀’ 따르는 중국의 오늘, 새로운 동력 찾기 힘들어 디지털 시대에는 소유보다 체험, 교육과 문화의 역할 늘어나 AI 활용해 ‘한국어 장벽’ 허물고 더 개방적인 사회 만들어야 」    하지만 많은 학자, 관료, 칼럼니스트들이 전개하는 그러한 논의의 일면은 ‘현대판 기우제(祈雨祭)’다. 하늘에서 선물이 떨어지듯, 사회경제 시스템 외부의 과학기술계가 골치 아픈 사회경제의 문제를 풀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과학기술계를 향한 기원과 응원은 좋지만, 비과학기술계가 모두 주변화하고, 운동장이 아닌 응원석이 비대해지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다.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게 세 번째 힌트다.   장면 넷. 미·중 갈등으로 세계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세계화로 하나가 된 세상에서는 최고의 기술이 전체 시장을 호령한다. 하지만 쪼개진 세상에서는 각 지역의 기술적 승자가 병존할 수 있다. 이류 기술도 ‘갈등의 보호막’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포위된 중국도 과학기술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봉쇄와 제약을 우회하는 기술경로를 개발할 것이다. 그래서 과학기술의 우열만으로 세계를 논하고 점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즉, 비과학기술의 영역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는 게 네 번째 힌트다.   과학기술이 전부는 아니다   상하이 중심의 대형 서점에 중앙에 진열된 시 주석 관련 서적. [중앙포토] 흩어진 힌트 위에 드러나는 우리의 갈 길은 무엇인가. 상품의 물리적 소유 극대화가 아닌 체험과 경험을 추구하는 세상. 진정 해보고 싶은 일들에 대한 젊은이들의 추구. 과학기술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으로 착각하고 주인공이 아닌 방관자로서 응원석에 끼여 앉는 일의 어리석음. 이런 것들을 곱씹을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창의(Creative), 자아실현(Self-Realization), 새로운 체험(Fresh Experience) 공간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이다.   웅크렸던 자아를 당당하게 구현하는 뿌듯함. 그것이 주는 보상이 젊은이들의 진정성 있는 참여를 높일 것이다. 그런 생명력과 역동성이 미래 경제에 활력을 더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어야 한다. 창의적 콘텐트를 위해선 미술, 디자인, 음악, 문예와 뉴미디어의 역할이 클 것이며, 육체적 정신적 자아를 갈고 닦는 데는 관람을 넘어 직접 참여하는 다양한 사회 스포츠와 심리적 공감의 장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새로운 체험은 가깝거나 먼 여행, 다양한 모빌리티에 연계될 것이다.   ‘냉혹한 진실(hard truth)’ 모드의 경제, 산업, 과학기술과 상반되는 것들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니다. 그 둘을 갈라쳐서는 사회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지점에 왔다. 그래서는 소수만의 번성과 다수의 소외, 생명력·역동성의 상실과 침체를 피하기 어렵다.   이미 여러 과학기술 분야에서 한국을 추월한 중국도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중요한 조건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런 중국과 친구가 될 것인가, 적이 될 것인가’는 핵심적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다름’에 기초하여 중국에 ‘경쟁우위(competitive advantage)’를 가질 것인가. 이것이 진짜 핵심적인 질문이다. 경쟁우위란, 경쟁자가 쉽게 모방하여 가질 수 없는 독특성에 기초한 우위를 뜻하며, 중소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기초가 된다.   박물관 많은 중국, 콘텐트는 빈약   중국의 R&D 총지출은 2022년 한해 3조 위안(550조원)을 넘어섰다. 한국의 6배 규모다. 저성장 국면에서도 전년 대비 10.4%를 늘렸다. 우리는 그런 중국을 상대로 6배 높은 IQ와 6배 많은 노력으로 맞설 것인가. 물론 한국은 쪼개진 세상, 소외된 중국의 덕을 한동안 추가로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류를 타는 그 불안한 요행을 넘어 진정한 복안을 만들고 다져야 한다.   김영희 디자이너 중국도 문화창의산업을 이야기한다. 중국엔 문화적 축적이 엄청나다. 하지만 그 가치는 그것을 ‘뻔한 일상’이 아닌 ‘신선한 충격’으로 체험할 외지인, 외국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방성’이 낮아지면 중국의 문화적 잠재력도 절하된다. 창의로 넘어오면 중국의 한계는 더욱 크다.   최근 중국에 화려한 박물관들이 곳곳에 건설되었지만 내부의 큐레이션은 박제된 콘텐트의 교육용 진열대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다. 급증하는 박물관(2011년 2650개 → 2021년 5772개)과 달리 ‘살아있는’ 라이브 공연장은 줄어들었다. 진리와 창의적 해법을 추구해야 할 인문사회과학 혹은 정책 관련 회의의 각 세션 서두는 시진핑 총서기의 말씀으로 채워진다. 이런 오늘의 중국에서 창의를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독 과학기술에 관한 한 그러한 회의 진행이 큰 방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경제학자 펠프스가 강조한 ‘개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에드먼드 펠프스(Edmund Phelps)는 2013년 『Mass Flourishing』란 제목의 책을 냈고 한국에선 ‘대번영’으로 소개되었다. 중국에서도 2015년 이후 리커창 총리가 주도한 ‘대중창업 만중창신(大衆創業 萬衆創新)’ 운동에 붐업을 해주는 책으로 환영받았다.   그런데 펠프스가 얘기하는 ‘flourishing’은 단순히 경제적 의미의 성장과 번영이 아니다. 펠프스는 flourishing을 ‘개인이 자기만의 것으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또 그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정의한다. 한마디로, 창의적 자아실현이다. 그것이 경제에 활력을 더하고 혁신을 추동한다는 것이 펠프스의 요지다. 덧붙여 그는 금전적 이득보다 개인의 가치 추구가 진정한 동력임을 확인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2015년 중국은 그런 깨달음 없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유명인사 펠프스를 초청해 행사를 벌였지만, 사실 펠프스의 사상은 중국이 본격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근 갑자기 고인이 된 리커창 전 총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떤 설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한국은 중국이 제대로 가지 못하는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경쟁우위를 획득하는 길이다. 중국과 적이 될 필요는 없다. 다름으로 빛나는 길을 찾는 것이다. 펠프스에게서 영감을 얻되,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 내부와 주변의 힌트들에 주목하고 귀 기울여 정책을 세우고 추진해야 한다.   ‘창의성 본산’ 대학의 기능 살려야   창의, 자아실현, 새로운 체험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인정하더라도, 펠프스의 지적처럼 이윤과 상업적 설계가 그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문화란 포장 아래 이념과 정파의 하수인들이 거짓된 작품들로 설친다면 그 또한 판을 흐릴 일이다. 따라서 청소년, 젊은이들이 내면의 창의성을 끌어 올리고 그를 구현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관건이다. 입시에 찌들지 않은 미술·음악·스포츠가 중등교육에서 더 큰 비중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돈벌이에 직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축된 대학 내 창의의 본산도 되살려야 한다.   과학기술과 비과학기술 영역이 제로섬(Zero Sum)을 다투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한국은 탁월한 통·번역 능력을 갖춰가는 인공지능(AI)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국의 언어적 장벽을 완전히 걷어내고 대(對) 세계 개방성을 크게 높여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한국은 창의, 자아실현, 새로운 체험의 장을 창출·확대하고 세계를 우리 안에 끌어들여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한국의 경제, 산업, 과학기술, 대(對)중국 경쟁 정책이어야 한다.   ◆은종학 교수=서울대 경제학사·석사, 칭화대 기술경제경영학 박사. 『중국과 혁신』(2021) 등의 책을 썼다.   은종학 국민대 중국정경전공 교수

    2023.12.18 00:45

  • [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집단사고의 오류가 부른 참사, 발상의 전환 필요해

     ━  부산 엑스포 참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는 국민에겐 실망과 충격을, 나라밖엔 국격의 실추라는 망신살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더 참담한 건 투표 당일까지도 판세를 오판하고 역전 드라마를 믿은 ‘정보의 실패’와, 할 수 있다는 희망 고문으로 국민과 여론을 호도하며 국정운영의 미숙과 무능을 드러낸 점이다. “윤석열 정부가 집단 편견과 확증편향에 빠졌고, 이 때문에 국민도 속았다”(The Diplomat)는 외신 보도가 과장이 아니다.   정부는 엑스포 유치를 위해 대통령과 총리·장관·기업 총수 등이 지구를 495바퀴(1989만1579㎞) 돌았고, 182개 국가의 대표급 인사 3472명을 만났다고 밝혔다. 국가 예산만 5744억원이 들었다. 국가적 역량과 에너지를 모두 갈아 넣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받아든 성적표가 29표(총 165개국 투표)다. 열세로 판단, 사실상 중도 포기하다시피 한 이탈리아(로마 17표)보다 12표 더 얻었을 뿐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  「 집념·의욕 앞서 정세 잘못 판단 대통령 사과…물러난 참모 없어 냉철한 판단과 전략적 선택 절실 전시 행사보다 퍼스트 무버 돼야 」    윤 대통령은 “모든 것은 저의 부족 탓”이라고 사과했다. 기업 총수들을 이끌고 “Busan is beginning(부산은 다시 시작한다)”을 외쳤다. 부산시도 2035 엑스포 재도전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다시 시작하자”고 해서 모든 문제가 눈 녹듯 사라지고 뒤죽박죽 난맥상을 보인 국정 시스템이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을까.   “대통령 유엔 방문이 판도 바꿔” 주장   2030년 엑스포 개최를 위해 뛰었던 한국 대표팀이 지난달 28일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 1차 투표에서 부산이 탈락한 것으로 드러나자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사진 국무총리실] 한국이 엑스포 유치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난해 7월,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세론을 굳힌 상태였다. 사우디 실권자 MBS(무함마드 빈살만)는 한 손엔 두둑한 오일 머니를, 다른 한 손엔 ‘비전 2030’이란 청사진을 들고 유치전을 진두지휘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 이어 중국·이스라엘·튀르키예 등이 줄줄이 공개 지지 선언을 했다. 특히 프랑스가 유럽연합(EU)의 일원인 이탈리아를 외면하고 사우디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세가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후발 주자인 한국 정부는 올해 들어 “엑스포 판도가 바뀌고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지난 9월 윤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이 분수령이었다. 장성민 특사 겸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윤 대통령이 47개국 정상을 만났고 상당수 중립 성향 국가들이 부산 지지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나타냈다”며 “엑스포 유치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육개장에 밥 한 숟갈 말아먹고 저녁 늦게까지 정상들과 만났다. 부산을 글로벌 자유무역항으로 성장시키려는 대통령의 열망과 신념이 엑스포 유치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낙관론을 폈다. 이후 “사우디와 박빙 승부”(박형준 부산시장)라거나 “어느 정도 따라왔다”(한덕수 총리), “2차에서는 이길 수 있다”(박진 외교부장관) 같은 장밋빛 전망이 이어졌다. 구두 지지나 외교 서한을 보내온 국가가 50개국 이상이라는 분석이 대통령실에 보고됐고, 결선투표에서 로마를 찍었던 표와 리야드 이탈표를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사우디가 3분의 2가 넘는 119표를 얻어 1차에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 불러   “정보를 객관적이고 신중하게 판단했다”(박진 장관)는 설명과 달리 현장 실무자들과 지휘부 사이엔 상당한 온도 차가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유치전에 관여한 정부·기업 실무자들 사이엔 “열세라고 판단한 현장 보고서가 위로 올라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라거나 “제대로 뛰어보지도 않고 비관적 보고를 한다는 질책이 떨어지니, 좀 더 노력하면 상대국이 부산을 지지할 의향이 있는 것처럼 여지를 두고 보고서를 쓰게 된다”는 볼멘 얘기가 나왔다. 정보 전달의 왜곡이 판세 오판을 불렀다는 지적이다.   엑스포 유치위와 산자부·외교부·국정원 등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특히 해외 정보망을 통한 냉철한 정세 분석을 해야 했을 국정원이 유치전이 한창일 때 지휘부 간 알력 다툼으로 분란에 휩싸였다는 건 뼈아픈 대목이다. 일각에선 대통령실에 설치된 부산 엑스포 유치 특임기구의 운영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부산 엑스포 유치를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대통령실에 미래전략기획관실을 신설, 장성민 전 의원을 기획관에 임명했다. (현재는 대기발령 상태다.) 장 전 기획관은 대통령 특사를 겸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남미 카리브 연안국 등 “100개 이상의 국가”를 방문했다. 전략을 짜고 정보를 수집·평가하고 대통령 보고까지 하게 되면서 사실상의 컨트롤타워처럼 인식됐다. 오히려 실질적 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유치위 사무총장(윤상직 전 산자부장관)이 로펌 근무를 이유로 비상근으로 일해 온 것과 대비된다.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우디 지지 국가의 지도부를 비밀리에 만나보면 공개 지지한 적 없다고 한다. 한국 지지 국가가 늘고 있다”(장 전 기획관)는 아프리카 출장 보고를 듣고 “엑스포 유치 현황과 전략을 국무위원들에게 설명하는 게 어떠냐”고 했을 만큼 힘을 실어줬다.   국제 행사 유치 실무에 밝은 외교가에선 “대통령실이 직접 실행 업무에 관여하면서 상황 평가와 보고의 균형추가 무너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유치전 사정에 밝은 전직 대사는 “대통령 어젠다의 실행 동력을 만들고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며 프로세스를 관리해야 할 수석급 비서실이 직접 교섭·출장·지휘·보고를 떠맡게 되면 정보를 왜곡하거나 잘못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를 위험이 있다.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고 동시에 지휘도 하는 통로로 자리 잡으면 전권을 갖고 지휘해야 할 유치위나 다른 조직은 보조적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시스템 문제를 제기했다. 유럽 지역 공관장을 지낸 다른 전직 외교관도 “국제사회는 실리로 움직인다. 이번에 우리를 밀어주면 다음에 도와준다는 약속하에 철저히 기브 앤드 테이크(주고받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냉철한 상황 파악을 못 하면 쉽게 오판할 수 있다”며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과 실제 표가 오가는 건 전혀 다른 얘기”라고 말했다. 엑스포 유치에 대한 집념과 의욕이 앞서 객관적 정세 판단을 흐리게 하는 집단 사고의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우디와 빅딜 설로 혼선 빚어   엑스포 유치전 와중에 사우디와의 이면 합의 빅딜 설이 흘러나오면서 혼선을 빚은 것도 미스터리다. 윤 대통령은 투표 한 달을 앞둔 지난 10월 사우디를 국빈 방문, MBS와 정상회담을 갖고 건설·인프라 분야 협력 강화 등을 담은 한·사우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세일즈 외교의 일환이었다고는 하나, 표를 놓고 대결을 벌이다 별안간 국제사회에 잘못된 사인을 줄 수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내 재계에도 이면 합의설이 파다했다. 의도치 않은 오발탄이었다면 외교 전략의 부재이거나 컨트롤타워의 무능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외교적 자산으로 생각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었다”(한 총리)며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외칠 게 아니라 구멍 난 국정 시스템부터 손봐야 한다.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했는데도 물러나는 참모 하나 없고, 책임 있는 인사들이 오히려 진급하거나 총선에 차출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서울올림픽 유치 당시 국회 문공위원장을 지낸 이영일 전 의원은 “과거엔 장관·수석이 자신이 대통령인 것처럼 뛰었다”며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서 대통령이 제대로 된 보좌를 받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2035 부산 엑스포는 가능할까   이번 실패의 이면엔 ‘중국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 못 한 측면도 크다. 2035년 엑스포 유치를 노리는 중국은 ‘2025 오사카-2030 부산’ 구도는 부담이다. 그래서 비동북아 국가인 사우디를 지지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슬람 같은 강력한 종교 연대나 지역협력 연대 같은 ‘뒷배’가 없는 한국은 한표 한표 쌓아가는 외교를 해야 하는데, 아프리카·중동·남미에 상당한 교두보를 확보한 중국과의 표 대결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부산의 재도전을 전략적인 틀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근래 외교무대에선 “한국이 출마하지 않는 데가 어딘지 알려달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지방자치단체들 간 국제대회 유치 경쟁, 유엔 등 국제기구의 선출직 출마가 남발되면서 피로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ILO(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에 출마해 참패했고,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연임에 실패한 것도 이런 정서와 무관치 않다.   높아진 국격만큼 냉철하게 정세를 따져보고 전략적 선택을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엑스포 유치전에 관여했던 한 인사는 외국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K팝·K드라마 등 한국의 소프트 파워가 높아졌는데 왜 엑스포 같은 전시성 행사에 집착하느냐”며 “라스베이거스의 CES(소비자가전쇼)나 바르셀로나 MWC(모바일 월드 콩그레스)같이 한국의 발전한 IT기술과 독창성으로 미래지향적인 퍼스트 무버로 가는 게 낫지 않은가”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면 된다는 정신승리법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2.14 00:33

  • [박현도의 퍼스펙티브] 미국·이란 확전 꺼리지만 중동 앞날은 안갯속

     ━  석 달째 접어든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지난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전격 침략하면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비국가 단체의 비정규군 하마스에, 50년 전 이집트군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이스라엘이 두고두고 곱씹을 수밖에 없는 치욕적인 역사다. 하마스의 존속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이스라엘이 압도적 화력으로 전쟁을 마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  「 미국 항모의 중동 급파,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하겠다” 위협 러시아는 미그-31 흑해 배치, 중국 군함 6척도 호르무즈로 이동 내년 대선 앞둔 미국과 이스라엘에 이란은 말려들지 않을 태세 누구도 전선 확대 원하지 않으나 자칫 국제전으로 번질 수도 」    불의의 습격에 추락한 이스라엘   지난 8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시티에서 작전을 벌이는 이스라엘 탱크와 군인들. [로이터=연합뉴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이 이겨도 이겼다고 말하기에는 찜찜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철통 안보 신화의 주인공으로 세계가 경탄해 마지않았던 이스라엘군의 위상이 한없이 추락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하마스가 매우 잘 짠 계획으로 이스라엘 영토를 공격하여 가자 지구만큼이나 넓은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침공을 미국의 9·11 테러 사태에 비교하였지만, 사실 이스라엘은 9·11 테러를 훨씬 뛰어넘는 폭풍에 직면해 있다. 강력한 적에 둘러싸여 있는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 이후 예전에 누렸던 강국의 특권적 지위를 쉽게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역내에서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 안전한 국가로 존재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이라도 하듯, 극우인 아미하이 엘리야후 이스라엘 예루살렘·문화유산 장관과 탈리 고틀립 여당 의원이 가자 지구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촉구하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전쟁으로 하마스보다 더 강력하고 대하기가 훨씬 까다로운 적을 이웃으로 둔 이스라엘이 장기적으로 안전한 국가로서 온전히 존립할 수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달갑지 않은 시험장이 열린 셈이다.   아랍민족주의에서 이슬람으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이스라엘이 직면한 정세에 큰 변화가 일었다. 혁명 성공과 함께 ‘억압받는 자의 해방’이라는 혁명 구호가 이란 국내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갔다. 혁명 지도자 호메이니가 직접 반이스라엘 정책을 이끌었다. 라마단월 단식 마지막 금요일을 ‘예루살렘의 날’로 지정하여 팔레스타인 해방에 헌신하는 분위기를 끌어올렸고, ‘카르발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라는 구호는 이란·이라크 전쟁 때 전의를 북돋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자 이란의 지원으로 생긴 헤즈볼라는 반이스라엘 투쟁의 핵심 동력원이 아랍민족주의에서 이슬람으로 바뀌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대패한 직후인 1968년 무슬림 학자들이 이집트 카이로 아즈하르대학에 모여 코란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막는 지하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랍인뿐 아니라 무슬림의 투쟁을 독려하였지만, 1948년 이스라엘 독립 때부터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를 살해할 때까지도 아랍민족주의가 반이스라엘 투쟁을 이끌었다. 그런데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1982년 헤즈볼라, 1987년 하마스, 1988년 알카에다가 등장하면서 아랍민족주의 대신 이슬람이 반이스라엘 투쟁의 동력원이 되었다.   ‘시아 초승달’ 만들어준 미국   이슬람이 아랍민족주의를 대신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국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아랍어를 모국어로 쓰지도 않는 이란이 선명한 이슬람의 가치를 외치며 반이스라엘 투쟁을 주도하여 반이스라엘 아랍 민심을 사로잡을 가능성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란이 이슬람 공화정이라는 독특한 체제로 민의를 반영한 선거를 한다는 자체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랍 왕정은 영국이나 일본과 달리 왕이 군림도 하고 통치도 하는 절대왕정으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자국 내 시아파 주민을 수니파 주민과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았기에 시아파인 이란의 영향으로 이슬람 혁명의 불씨가 옮겨올 것도 걱정하였다.   아랍 왕정국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이에 이란은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결정적 역할을 한 나라는 역설적으로 친아랍 반이란 지향의 미국이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면서 이란은 24년 앓던 이를 속 시원하게 뽑았다. 이란을 막는 아랍 세계 동쪽의 수호자로 자처한 사담 후세인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라크 건국 이래 소수 수니파의 지배에 숨죽이며 살던 다수 시아파가 미국식 민주주의 선거에 따라 집권하면서 이란의 영향력권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의 표현대로 이란에서 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아 초승달 지역’이 탄생하였다. 역내 아랍 수니 국가뿐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악몽이 현실화하는 순간이었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최정예 부대인 고드스(예루살렘)군 사령관 솔레이마니는 2011년 ‘아랍의 봄’ 이래 이란의 영향력을 굳게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2020년 1월 3일 바그다드 공항에서 미국이 이스라엘과 함께 솔레이마니를 제거한 이유다.   ‘저항의 축’에 포위된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마주한 현실은 포위라는 말이 가장 적확하다. 북쪽 레바논의 헤즈볼라, 북동쪽 시리아의 친이란 아사드 정권과 시아파 무장 조직, 동쪽 이라크의 시아파 무장 조직, 남쪽 예멘의 안사룰라(후치 반군)가 가자 지구의 하마스와 함께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을 형성하며 이란의 엄호 아래 언제든지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다.   수니파인 하마스를 제외하고서라도 저항의 축 모두가 이란과 같은 시아파는 아니지만, 이란의 지원 아래 친이란, 반이스라엘, 반미로 뭉쳐 있다.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유대인에 저주를, 이슬람에 승리를’이라는 안사룰라의 구호는 저항의 축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저항의 축을 이끄는 이란은 명령을 내리는 나라가 아니다. 저항의 축은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행동을 조율한다. 잠재적인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급변하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한다. 감정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자제하면서 위험한 행동을 피하는 신중함으로 다양한 카드를 한꺼번에 사용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대규모 분쟁에 대비해왔다.   일례로 이스라엘이 헤즈볼라가 도발하면 레바논을 초토화하겠다고 경고하자,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현재 저항 세력은 최상의 상태이며, 모든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다”고 대응하였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공격하면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를 공격할 것이고, 공항이면 공항, 항구면 항구, 대량 살상은 대량 살상으로 맞대응하겠다는 공식을 적용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절제·억제 없이는 평화 어려워   하마스 기습 이래 이란 외교장관 압돌라히안은 전선이 여럿 열릴 가능성을 경고하였다. 어느 나라도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이란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 짜 놓은 계획에 따라 싸우고 싶어 하지 예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엉겁결에 싸움판에 끌려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더욱이 잔꾀의 대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수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자꾸 전선을 확대하여 궁극적으로 미국과 이란의 싸움 구도를 만들고 그 틈을 타서 이란에 결정적 한 방을 때리려고 몸이 단 네타냐후의 계산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현재 이란은 신중한 언행으로 억지력을 발휘하면서 확전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란과 미국 모두 확전을 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시작하자 미국은 항공모함을 급파했고, 이란의 유력 정치인들은 미국이 참전하면 호르무즈 해협을 막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미국은 헤즈볼라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 이란이 미국에 선전포고한 것으로 여기겠다고 경고하였다. 서로 크게 싸우기는 싫으니 자제하라는 말이다.   모두가 패자일 수밖에 없는 전쟁   시리아에서 공군과 해군 기지를 운영하는 러시아도 미국 항모가 뜨자 항모를 파괴할 수 있는 초음속미사일을 장착한 미그-31기를 흑해로 긴급 배치하였고, 에너지 안보를 위해 중국 역시 6척의 군함을 호르무즈 해협으로 움직였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국지전이라 아니라 국제전으로 확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고전하는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대선을 앞두고 또 다른 전선을 열고 싶지 않다. 그러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헛발질이라도 하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절제와 억제 없이 평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말처럼 모두가 패자일 수밖에 없는 전쟁이 멈추기를 바란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대우교수

    2023.12.12 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