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선2035]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그러나’ 대통령

    박태인 정치부 기자 비슷한 뜻을 지닌 단어인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그러나’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역사적 평가를 피할 수 없는 대통령에게 그 차이는 모든 걸 말해주기도 한다.   3년 전 작고한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에서 자주 들린 문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중앙일보 2021년 10월 28일자 1면).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던 박남선씨는 빈소를 찾아 “광주학살에 책임 있는 전두환 등 어떤 사람도 사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은 그런 입장을 밝혀 조문을 온 것”이라고 했다. 조문을 했던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빛과 그림자가 있고, 빛의 크기가 그늘을 덮지는 못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을 다한 점을 평가한다”고 했다.   지난 16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시민들이 TV로 중계되는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노 전 대통령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생전 유언을 남겼다.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가까웠다. 5·18 쿠데타와 12·12사태의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북방정책 추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추징금 완납 등을 평가했다.   갑작스레 노 전 대통령 일화를 꺼낸 건 16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 모두발언 때문이다. 야권에 192석을 내준 뒤 나온 첫 육성 메시지엔 ‘그러나’와 ‘하지만’ 같은 접속사가 15번이나 등장했다. “올바른 국정 방향을 실천하려 최선을 다했다”면서도 그러나 “세심한 영역에서 부족했다”는 것이 요지였다.   대통령실은 “그러나 뒤 발언에 방점이 찍혔다”고 했지만, 그렇게 느끼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좋은 정책을 몰라준 언론을 탓하는 건지, 국무회의에 참석한 장관을 질책하는 건지, 대통령 탓만 한 여당에 섭섭함을 드러내는 건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비슷한 단어가 달리 들리는 건 뒷받침하는 실천의 차이 때문 아닐까. 여소야대 국회를 상대했던 건 두 대통령 모두 마찬가지였다.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인 정해창 노태우센터 이사장은 회고록 『대통령 비서실장 791일』에서 “노 대통령은 생활물가, 유엔 가입, 걸프전쟁 의료진 파견 문제 등 당면 문제를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게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고 했다. 3당 합당 뒤 원내 의석이 없던 민중당 이우재 상임대표까지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윤 대통령이 ‘그러나 대통령’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 기억됐으면 한다. 줄곧 개혁의 당위성을 외쳤으나 실제 이룬 것은 없었던 대통령이 아닌, 극단의 정치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미래의 토대를 닦은 정치인으로 남길 바란다.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회동이 곧 열린다. 변화의 출발점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박태인 정치부 기자

    2024.04.22 00:10

  • [시선2035] 웃지 않은 이재명 대표

    성지원 정치부 기자 더불어민주당이 많게는 197석을 가져갈 거라고 예상됐던 출구조사 발표 순간, 이재명 대표 표정이 왜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지 궁금했다. 당 지도부에 물어봤더니 “표정 관리를 한 것 아니겠냐”고 했다. 낙선이 예상되는 사람, 낙천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좋은 티를 낼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민주당 단독 175석은 4년 전 180석만큼이나 완승이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볼수록 이 대표가 활짝 웃었더라면 좀 민망할 뻔했다. 먼저 친(親)이재명계의 성적이 그랬다. 이 대표가 ‘차은우보다 잘생겼다’던 안귀령 대변인은 12년간 민주당이 수성했던 서울 도봉갑에서 국민의힘 김재섭 후보에게 1098표 차로 졌다. 이 대표는 도봉갑 현역인 인재근 의원에게 직접 불출마를 권유한 뒤 안 대변인을 전략공천했는데, 안 대변인은 선거 직전에도 자신이 출마하는 지역구 행정동 이름을 못 외웠다.   지난 10일 방송3사 22대 총선 출구조사 결과 발표 직후 무표정한 얼굴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운데). 김성룡 기자 부산 출신으로 PK에서 경력 대부분을 쌓았음에도, 이 대표 피습 당시 헬기 이송 논란으로 부산 민심이 흉흉해지자 곧장 수도권 출마를 선언해 빈축을 샀던 류삼영 전 총경은 서울 동작을에서 국민의힘 나경원 전 의원에게 넉넉히 졌다. 동작을은 이 대표가 선대위 출범 후 8번이나 찾아 지원 유세를 한 지역이다. 영입 인재로 서울 마포갑에 출마한 이지은 총경도 당적을 바꾼 국민의힘 조정훈 의원에 졌다. 당 지도부에서도 “무리하게 공천배제를 한 지역들이 조직력이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당선된 친명 후보들도 새벽까지 가슴을 졸였다. 선대위 상황실장이던 김민석 의원은 서울 영등포을에서 상대 박용찬 후보에게 1135표 차로 겨우 이겼고,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도 경기 하남갑에서 친윤 초선 이용 국민의힘 의원에게 1199표 차로 신승했다. 경기 수원정에선 막말 논란에 휩싸인 김준혁 후보가 이수정 국민의힘 후보와 접전 끝에 2377표 차로 이겼는데, 무효표(4696표)가 두 후보 표차보다 더 많이 나왔다.   PK 선거결과도 우울했다. 특히 부산에선 현역 3명 가운데 전재수 의원만 승리를 거뒀고, 북을·강서·부산진갑·기장·해운대갑 등 선전을 예상했던 지역에서도 예상보다 큰 표차로 졌다. 경남 양산을에선 지역구를 바꿔 현역 김두관 의원에게 도전한 김태호 국민의힘 의원이 승기를 쥐었다. 특히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원 유세를 한 PK 후보 11명 중 9명이 낙선했다.   민주당은 선거 내내 “나쁜 정권에 책임을 물어달라”며 정권심판론을 호소했지만, 사실 유권자들은 기억력이 좋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 정권의 실체를 정확히 보시고 주권자로서 심판해 달라”고 호소해 정권교체 한 게 딱 2년 전이다. 그 2년 동안 0.73%포인트 차 승리를 압승처럼 써서 여권이 졌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올해의 이런 승리를 어떻게 쓸지가 궁금하다.     성지원 정치부 기자

    2024.04.15 00:10

  • [시선2035] 부끄러움 없는 날 우리는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눈앞의 임산부를 어떻게 못 보지.’ 지난달 출입처인 한 IT기업의 주주총회장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지하철을 탔다. 정자역까지 가려면 한 번 갈아타고 21개 역을 지나야 했다. 함께 지하철을 탄 20대 여성이 비어있는 임산부석에 잽싸게 앉아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 같았고 임산부는 아닌 듯했다. 다음 역에서 임산부 배지를 건, 배가 나온 임산부가 그 앞에 섰다. 임산부석에 앉은 이는 눈을 마주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몇몇 사람들이 헛기침했지만 소용없었다. 5~6개 역을 지난 뒤 그는 임산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죄송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내렸다. “임산부 배지를 달아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모른 척해 힘들었다”는 출산한 이들의 말이 떠올랐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등의 시를 쓴 김광규 시인이 2018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신사역에서 내려 신분당선 열차를 탔다. 임산부석이 없는 칸이었다. 자리에 앉아 뉴스를 보다 보니 종착지 정자역에 가까워졌다. 내 앞에는 중년 여성 두 명이 서 있었다. 내가 일어나자 앉을 줄 알았던 아주머니는 누군가에게 손짓하며 말한다. “아가씨, 여기 앉아요.” 서너 걸음을 걸어온 임산부는 “고맙다”며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보였을 텐데 왜 못 봤을까. 난 임산부석에 앉아 있던 게 아니잖아. 아니 3호선 임산부석에 앉아있던 이에게 내가 혀를 찰 자격이 있나.’ 자리에서 일어난 뒤 지하철 문이 열리기까지 그 몇 초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진 걸까. 뒤통수가 뜨거웠다.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누가 묻는듯했다.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묻는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외에도 ‘부끄러운 계산’ ‘부끄러움 없는 날’ 등에서 김광규 시인은 부끄러움을 다뤘다. 김 시인은 등단 40주년을 맞은 2016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인간의 자의식은 부끄러움에서 시작되는 건데,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며 “용기 같은 덕목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게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시인의 말이 무색하게 이번 총선에서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은 정치인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입시 비리, 대출과 증여, 막말 문제까지. 모두 국민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 아울러 각 정당 지지자들이 열광하는 날 선 말의 향연은 선거를 부끄러움의 축제로 만든다. 상대 당을 ‘쓰레기’나 ‘깡패’로 부른다거나 반대편 지지자를 혐오하는 ‘2찍’, 재혼 가정에 상처를 주는 ‘때리는 의붓아버지’란 말 등이 그렇다. 또 다른 당의 검찰 출신 비례 1번 후보는 배우자의 40억원 전관예우 논란에 대해 “160억원은 벌었어야 한다”고 응수했다. 시 ‘부끄러움 없는 날’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부끄러운 데 가리고 이 세상으로/ 쫓겨난 그때부터 왜 곳곳에서/ “부끄럽지도 않으냐”라는 말/ 욕설로 쓰이게 되었는지/ 그렇다면 바로 부끄러움 없는 날/ 우리는 가장 부끄럽지 않은가.’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2024.04.08 00:10

  • [시선2035] 저출산, 우리가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진호 경제부 기자 “화나지 않으세요?”   또 하락한 출산율에 취재 차 연락한 인구 전문가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 문제를 얘기하면서 어떻게 목소리가 평온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출산율이 바닥없는 추락을 이어가면서 미래가 어두울 게 뻔한데 청년층이 분노하지 않는 게 의아하다고 했다. “저야 곧 은퇴하고 연금 받으니 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상관없지만, 기자님은 다를 텐데”라는 말을 덧붙였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역대 최저, 세계 최저다. 작년 한 해 태어난 아이는 23만명이다. 1970년대엔 연간 출생아 수가 100만명대, 1990년대엔 70만명대였다. 불과 2016년만 해도 40만명이 넘었다. 지난 1월 출생아 수는 더 충격적이다. 2만1442명으로, 1년 전보다 7.7% 감소했다. 올해는 출산율이 0.6명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김영옥 기자 출생아 수 감소로 가장 큰 피해를 볼 계층은 이른바 MZ세대다. 교육·고용·산업·연금 모두 저출산 기조가 이어지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 국민연금 고갈은 2055년으로 예고됐다. 30년 남은 셈이니 지금 30대라면 대략 연금 수령 시점 고갈된다. 일할 사람은 빠르게 줄고 있다. 인력난으로 인해 중소 제조업체 위주로 산업계에 위기가 닥친 지도 오래다.   저출산이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던 만큼 학령인구 감소는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72개 초·중·고교가 문을 닫았다. 지난해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대학의 입학정원은 47만명이다. 작년 출생아(23만명)가 전부 대학에 간다 해도 이대로면 대학의 절반이 신입생을 1명도 받지 못한다. 대학 구조조정이 시급하지만 청사진은 없다.   향후 터질 저출산 충격을 흡수해야 하는 건 지금 일하는 세대와 앞으로 일할 세대다. 은퇴했거나 은퇴를 앞둔 이들보다 감당해야 할 무게가 무겁다. 생산연령인구 100명이 부양할 인구(유소년·고령층)를 뜻하는 총부양비는 2022년 40.6명에서 2058년이면 101.2명으로 100명을 넘어선다.   길에선 요란한 선거송과 함께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 “범죄자 정당에 투표할 거냐” 같은 구호만 들린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저출산 대책을 공약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향후 출산을 지원해주겠다는 것일 뿐 곧 다가올 인구 충격에 대한 논의는 없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교육개혁, 연금 고갈을 막기 위한 연금개혁, 노동력 감소를 대비한 노동개혁 등은 공약 테이블에 올라오지 않는다.   미래 세대를 위한 개혁은 고령층의 희생이 수반되다 보니 인기가 없다. 2020년 총선 20대와 30대 투표율은 각각 58.7%, 57.1%다. 60대 이상 투표율은 80%였다. 화가 안 난다는데 누가 챙겨주겠나.     정진호 경제부 기자

    2024.04.01 00:34

  • [시선2035] 오타니와 조국 열풍이 던지는 질문

    박태인 정치부 기자 동경하는 사람과 투표하고 싶은 사람은 다른 것 같다. 오타니 열풍과 조국혁신당 열풍이 동시에 부는 모습에 떠오른 생각이다. 최근 한국을 찾은 미국 메이저리그(MLB) LA다저스 소속 오타니 쇼헤이는 ‘만찢남’(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으로 불린다. 실력도 인성도 완벽한 몸값 1조의 남자라는데, 그의 아내 다나카 마미코마저 4만원대 가방을 들어 화제를 모았다. 열광을 안 하기가 오히려 어렵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코리아 2024』에서 한국 사람들이 외모·학력·자산·직업·성격·특기 등 모든 측면에서 완벽한 ‘육각형 인간’을 선망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오타니 열풍을 보면 우리는 완벽한 인간을 갈망한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가 지난 21일 부산 부산진구 서면 거리에서 지지자에게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육각형 이론이 유독 정치에는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열풍을 넘어 태풍에 가까운 조국혁신당의 약진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당 대표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지난달 2심에서 뇌물수수·직권남용 등 혐의로 징역 2년을 받았다. 그의 비례대표 순번은 2번이다. 청와대 하명수사 혐의로 지난해 1심에서 징역 3년을 받고 불출마를 선언했던 황운하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뒤 8번을 받았다. 현재로선 모두 당선권에 가깝다. 양당도 마찬가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총선 지역구 후보 699명 중 전과자만 242명이다. 막말과 성범죄 변호는 뺀 수치다. 양당 비례대표 명단에는 뒷배가 누군지부터 궁금해지는 이름이 상당했다. 육각형은 고사하고 삼각형 후보도 찾기 어려웠다.   유권자의 이념과 신념, 이상을 국회의원이 대리해 입법과 정책으로 현실화하는 대의민주주의의 전제가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더 이상 정치는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있다. 실제 해결도 못 할뿐더러, 그런 기대조차 버린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삶과 정치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이다. 윤태곤 정치평론가는 이번 총선을 ‘무쟁점 선거’라고 했다. 정책은 없고 혐오와 조롱만 남은 싸움판이라는 것이다.   대신 사람들은 정치인이라는 존재를 차마 현실에선 내가 할 수 없는 말과 행동, 상대 진영을 향한 적대와 혐오 등 내 안의 가장 극단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충실한 확성기 정도로 여기는 것 아닐까. 그런 목적이라면 굳이 동경하는, 혹은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투표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현실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야당 대표는 대통령을, 여당 대표는 다시 야당 대표를 저격하는,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날 선 언어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장면도 수긍이 간다.   사실 육각형 정치인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 안에 가장 좋은 마음과 가장 선한 모습을 대변해주는, 나보다 조금 더 용기 있는 이들이 정치하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오타니·조국 열풍이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꽤 까다롭다.     박태인 정치부 기자

    2024.03.25 00:20

  • [시선2035] 영입 인재 12명의 결말

    성지원 정치부 기자 4년 전 그들의 첫 등장을 기억한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20명의 영입인재를 소개하며 강조한 건 ‘혁신’이었다. 파란 백드롭에 ‘좋은 사람, 좋은 정치’란 문구를 걸고 맞이하는 인재마다 “소중한 인재”, “민주당이 지향하는 혁신에 꼭 맞는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도 그럴 것이 면면이 제법 풍성했다. 1호 인재로는 무명의 최혜영 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 이사장을 깜짝 발탁해 ‘보통 사람의 정치 혁신’을 내세웠다. 4호 인재론 전관예우 관행을 거부하고 교수로 지내던 소병철 전 대구고검장을 발탁해 검찰개혁의 명분을 쌓았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건 민주당의 의무”라며 오영환 소방관을 5호 인재로 영입했을 땐 다른 당에서도 호평이 나왔다.   2020년 1월 7일 총선을 앞둔 더불어민주당 5호 영입 인재로 오영환 소방관(오른쪽)이 입당했다. [연합뉴스] 20명 중 비례대표·지역구로 12명이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 존재감 없는 초선이 속출한 21대 국회에서 이들의 입법 성과도 작지 않았다.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출신 이용우 의원은 내부자 주식거래를 사전 공시하게 하는 자본시장법 등 금융소비자 보호 법 개정을 주도했고, 지난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21대 국회의원 입법평가에서 경제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소방관 출신 오 의원은 가연성 건축자재 사용을 막는 건축법 개정 등 임기 내내 소방 관련 입법에 집중했고, 미래에셋대우 사장 출신 홍성국 의원은 불법 공매도 처벌 강화법, 불법 주식리딩방 금지법 등을 통과시켜 ‘경제통’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4년 뒤 오늘 바라본 그들의 모습은 씁쓸하다. 12명 중 8명이 국회를 떠나기 때문이다. 소병철·오영환·이탄희·홍성국 등 4명은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한 사람의 힘으로는 개혁을 이룰 수 없고 혼탁한 정치 문화를 바꿀 수 없다”(지난달 26일 소 의원)는 한계를 공통적으로 들었다.   비(非)이재명계로, 이재명 대표의 강성 지지층으로부터 ‘수박(비명계를 비하하는 은어)’이란 비난을 받아왔던 홍정민·이용우 의원은 경선에서 지역구 사수에 실패했다. 경기 안성에서 재선에 도전했던 최혜영 의원도 경선에서 ‘찐명’ 에 밀려 탈락했다. 이수진 의원은 컷오프됐다. 민주당 혁신의 결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깃발 아래 최근 이들의 빈자리를 속속 “이재명과 함께 혁신”을 내세운 원외 인사들이 대체하고 있다. 너도나도 혁신을 외치는데 물갈이 외엔 정확히 뭘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 잘 손에 안 잡힌다. 단어의 초라한 지속가능성을 눈으로 봤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긴 이제 혁신이란 단어만큼 인재라는 말도 정치권에선 우스운 말이 됐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옥중 창당’한 소나무당의 손혜원 전 의원, 변희재 전 미디어워치 대표도 ‘영입 인재’다. ‘좋은 사람, 좋은 정치’ 같은 평범한 영입식은 더 이상 주목받기도 힘들 것 같다. 성지원 정치부 기자

    2024.03.18 00:10

  • [시선2035] “푹 쉬었냐”는 말은 참아주시길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그동안 푹 쉬었지? 앞으로 더 열심히 해.” 육아휴직을 마치고 온 직원에게 상사가 건넨 이 말은 덕담일까 악담일까. 덕담으로 듣기엔 불편하고 악담으로 듣기엔 모호한가. 육아를 휴식으로 여기는, 저출산 시대의 ‘악마의 디테일’이 녹아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최근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또래 직장인 친구 A(남)는 부서장으로부터, B(여)는 임원으로부터 이같은 말을 들었다며 ‘복직자 성토대회’를 열었다. 공교롭게 A와 B의 상사는 모두 50대 남성이었다. A·B에 따르면 이들의 아내는 각각 공무원과 전업주부로 커리어 대신 육아와 돌봄을 택해 남편의 사회적 성공을 도운 것처럼 보였다.   지난해 6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서울 중구의 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워킹맘&대디 현장멘토단 발대식에 참석한 모습. [뉴스1] 남자 선배들이 육아휴직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휴직을 신청한 A는 “팀이 바쁜 시기 하필 지금 써야겠냐. 애가 학교 갈 때 쓰면 어떠냐”는 말을 들었다. A는 “예상과 다르게 육아휴직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고백한다. 육아를 분담하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뒤에 지친 회사 업무와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고. 하지만 육아의 즐거움은 첫 달도 아닌 첫 주까지였다. A는 “종일 육아를 하며 회사에서의 커피 한 잔, 점심시간의 여유, 저녁 회식자리까지 그리웠다”고 했다. 지난해말 보건복지부가 개최한 육아휴직자 간담회에 참석한 아빠들도 A처럼 육아를 휴식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여성인 B는 어땠을까. 임원으로 부터 “푹 쉬었냐”는 말을 들으니 ‘고과에 불이익이 생기는 건 아닐까’ 싶었다고 했다. B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까. ‘만약 누군가 어쩔 수 없이 낮은 고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게 내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는 얘기다. 현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임원의 말 한마디에 괜한 신경이 쓰인다.   “잘 쉬었냐”고 묻는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려볼까. ‘나 때는 남자 육아휴직은 꿈도 못 꾸고, 여자가 육아휴직을 쓰면 퇴사를 해야 했는데 요즘 세상 참 좋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회사 정도면 감사하게 다녀야지. 별것이 다 불편하네’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좋은 세상’의 합계출산율은 0.7명마저 위태롭다. 기업과 정부는 이를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달 직장갑질119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은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필요한 정책으로 ‘부부 모두의 육아휴직 의무화’를 꼽았다.   효과적인 정책이 나오고, 그 정책이 현실에서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과 기업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 하는 위기의 저출산 시대에 육아휴직을 마치고 출근한 직원에게 “푹 쉬었냐. 잘 쉬었냐”는 말은 부디 참아주시길. “자네 덕분에 기업도 국가도 지속가능하게 됐어. 출산에 육아까지 정말 고생했네”라는 말은 못 해주더라도 말이다. IT산업부 여성국 기자

    2024.03.11 00:10

  • [시선2035] 존경받는 직업

    정진호 경제부 기자 중·고등학교 때까지 기자는 존경받는 직업 중 하나였다.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고, 다른 사람에게 존중도 받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목표로 기자가 됐다. 현실은 달랐다. 기자라는 명함을 받아들고 나선 이후 존중보단 비난의 시선을 더 많이 받았다. ‘기레기’라는 말은 이제 너무 흔해 모욕죄도 성립하지 않는다.   어떠한 직업 뒤에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의미의 ‘님’이라는 의존명사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직업은 많지 않다. 흔히 쓰는 사장·부장·차장 뒤에 ‘님’은 직업이 아닌 직함 뒤에 붙이는 것일 뿐 직업과는 다르다. 요리사님, 은행원님, 가수님 등 직업 뒤에 하나씩 님을 붙여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정부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우리 곁으로 돌아와 주세요’ 유튜브 영상. [유튜브 캡처] 기레기라고 불리기 이전에 기자님이라는 말이 쓰이던 때도 있었다. 민주화 등 사회 발전 과정에서 기자의 역할이 있었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이익만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게 직업에 ‘님’이 붙는 전제다. 성직자들을 목사님·스님 등으로 부르는 것을 고려하면 직업윤리를 지키기 위해 높은 도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이 같은 존중 표현의 전제임을 알 수 있다.   의사는 그냥 의사님도 아니다. 무려 ‘의사 선생님’이 통용되는 호칭이다. 그 어떤 직업보다도 더 많이 존경받았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 본 위인전집엔 슈바이처 의사가 빠지는 일이 없었다. 전집이 30권이든, 50권이든 몇 권으로 구성됐건 간에 슈바이처 의사는 꼭 포함됐다. 같은 맥락에서 의료인 나이팅게일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그만큼 숭고해서다.   의사 파업 이후 의사 선생님은 ‘의새’가 됐다. 심지어 N번방 사건의 범죄자 조주빈을 빗댄 ‘의주빈’, 이스라엘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하마스와 합친 ‘의마스’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의사가 존경받은 이유는 환자의 생명을 지킨다는 직업윤리가 숭고해서다. 이 전제가 무너졌을 때 그 반발도 더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기자가 그랬다.   김민철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포털 뉴스 댓글을 통해 본 “기레기 현상”’에서 “기레기라는 표현이 언론에 대한 불신을 넘어 기사를 쓰는 기자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난다”며 “저널리즘 윤리를 저버리는 기자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기자가 가진 권한을 공정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독자의 의심으로, 내 직업은 존경을 잃었다.   상대적으로 센 업무 강도나 많지 않은 월급, 이런 것보다 기자 하기 어려운 건 기레기라는 시선이다. 재작년 검찰을 그만둔 A 검사는 사직 이유를 묻자 “처음 만난 사람한테 검사라고 소개하는 게 꺼려져 거짓말까지 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 존경받는 직업이 몇 남지 않았다. 의사는 계속 그런 직업으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진호 경제부 기자

    2024.03.04 00:10

  • [시선2035] 출산은 초미안함과의 사투

    박태인 정치부 기자 대한민국의 특이점이 온 것 같다. 웬만한 단어에 초(超)가 붙지 않으면 주변 현상을 설명하기가 버거울 지경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에게 선물했던 저서 『90년생이 온다』로 화제를 모았던 작가 임홍택이 지난해 11월 펴낸 『2000년생이 온다』에서도 초는 요긴하게 쓰인다. 회사 상사에게 “월급에 비례해 일하자”라거나 “회식에 참석하지 않은 만큼 회의비를 달라”는 2000년대생들을 저자는 ‘초합리·초개인·초자율’이란 키워드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특징이 상호작용을 하며 국가소멸 수준인 0.6명대 합계출산율이라는 초저출산을 발생시킨 것이라 분석한다.   지난해 12월 서울 공공산후조리원 신생아실 요람이 비어있는 모습. 통계청은 올해 합계출산율을 0.68명으로 추산했다. [연합뉴스] 그런 시대에 아내와 나는 기꺼이 아들을 낳았다. 오늘은 출산휴가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한 첫 번째 날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후배가 없던 입장에서,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제는 헤아릴 수 있다. 출근의 두려움도 아이를 보면 눈 녹듯 사라진다. 이를 초사랑이라 부르면 적절할까. 현재 갖춰져있는 국가 지원 시스템의 실태와 한계도 체감했다. 1년간 매달 110만원의 부모·아동 수당이 지급된다. 자녀 1명당 1억씩 준다는 대기업도 있다지만, 출산 그 자체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꽤 파격적이었다. 출산에 따라 내야하는 병원비는 병실비뿐이었고, 아이가 집중치료실에 입원했으나 영수증에 찍힌 치료비는 14만원이 전부였다.   그러나 “둘째를 낳겠느냐”고 묻는다면, 혹은 “다른 이에게도 출산을 권유하겠느냐”고 묻는다면 답하기는 쉽지 않다. 당장 우리 가족부터 둘째와 ‘영끌 자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처지다. 소득에 따라 올라가는 출산율을 두고 ‘유전자녀, 무전무자녀(정재훈 서울여대 교수)’라는 표현까지 등장한 세상 아닌가. 출산 이후의 삶은 여전히 막막하다.   아이를 낳고 보니 대한민국에서의 출산은 ‘초미안함’과의 사투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 대비 남성의 육아휴직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상황에서, 남편보다 많은 월급을 받던, 커리어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육아휴직을 쓴 아내에 대한 미안함부터, 내 출산휴가로 업무가 가중됐던 선후배에 대한 송구함, 여전히 주 40시간이 아닌 52시간 근로제가 기준인 노동 현실에서, 양육을 도와주시는 양가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매일 아빠와 짧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내 아이에 대한 죄책감까지. 비교와 과시가 일상이 된 초경쟁사회에서 자라날 아들의 미래까지 걱정하는 건 사치라 느껴진다. 이런 수많은 미안함을 “아이를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선언적 주장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차라리 부모의 일상에서 미안할 일을 하나라도 제대로 줄여주겠다는 게 어떨까. 2000년대생도 90년대생도 아닌 80년대생 부부였기에 아이를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초합리와 초개인, 초자율주의로 무장한 앞으로의 세대는 다를 것이다. 박태인 정치부 기자

    2024.02.26 00:10

  • [시선2035] ‘독고다이’ 실패기

    성지원 정치부 기자 이효리가 모교 졸업식 축사로 펼쳤다는 ‘인생 독고다이론’에 처음엔 공감했다. 마침 로마로 혼자 무계획 여행을 다녀온 참이었다. 하루 세끼 파스타를 먹어도, 미술관에서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그림 앞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라파엘로의 걸작은 까먹고 못 봐도 괜찮은 여행. 혼자라 편한 그런 여행이었다.   “우리는 가족이다 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 더 조심하세요. 누구에게 기대고 위안받으려 하지 마시고 그냥 인생 독고다이다 하시면서 쭉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사이에…”라며 격의없던 ‘우리끼리주의자’들에게 종종 뒤통수를 맞았던 터, 무릎을 탁 쳤다. 결국 결정적 순간엔 각자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법. 언제부턴가 힘든 일이 있어도 친구보단 집, 술자리 대신 일기장을 찾는 게 습관이 됐다. “나보다 나아 보이는 누군가가 멋진 말로 날 이끌어주길, 그래서 내 삶이 조금은 더 수월해지길 바라는 마음 자체를 버리세요.” 정말 그랬다.   가수 이효리가 14일 모교 국민대에서 열린 2023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뉴스1] 그런데 어쩐지 씁쓸했다. 대단한 뭔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혼자 여행 중엔 불쑥 파스타가 너무 짰다고, 와인이 오래됐는지 쿰쿰했다고 말 건넬 데가 필요했다. 답하지 않으려는 취재원과 선문답으로 기진맥진 하고 나면 툭 “고생했다” 한 마디가 필요했다. 왜 나는 멋지게 독고다이도 못 하는 건지! 자책하는 내게 친구가 말했다. “혼자인 걸 좋아하는 건 같이 있고 싶을 때 같이 있어 줄 사람들이 있어서”라고.   독고다이 실패기는 어디에나 있다. 2000년대 초중반, 한일 월드컵 직후 특출난 기량의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이 ‘꿈★은 이루어진다’를 가슴에 품은 채 속속 유럽 리그로 떠났다. 그런데 적지 않은 선수들이 초라한 성적표를 안고 금세 귀국했다. 독한 정신력에 실력까지 갖췄는데도 이상하게 유럽에선 시원하게 발을 못 뻗곤 했다.   2003년 국내 최초로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했던 이천수도 2년이 채 안 돼 무득점으로 K리그에 돌아왔다. ‘독고다이’의 상징 같던 그는 이후 예능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선수들이) 나한테 패스를 줘도 되는데 자꾸 다른 선수한테 주더라”고 토로했다. 외로웠다고 했다. 역시 해외 리그를 경험했던 안정환이 이렇게 답했다. “나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일단 동료들과 친해지는 게 중요하다. 축구도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최근 불거진 손흥민·이강인의 불화, 다음날의 요르단전을 떠올려보니 역시 안정환이 맞았다.   정치부 기자로 지켜보니 ‘독고다이형’ 정치인들도 늘 결정적 순간에 실패한다. 화려한 언변, 정곡을 찌르는 어젠다도 주변 사람이 다 떠나가면 결국 패스 미스가 나기 마련이다. 하긴 이효리 옆에도 반려견 순심이가 있었고 이상순이 있지 않나. 기대고, 위안받고, 누군가한테 이끌려 가보는 독고다이 실패기를 응원한다. 성지원 정치부 기자

    2024.02.19 00:15

  • [시선2035] 신혼부부의 돈 고민,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정진호 경제부 기자 기사엔 실제 사례가 자주 들어간다. 공공기관에 재직하는, 경기 광주에 사는 각자의 사연은 주변 사람이나 인터넷에서 찾는다. 그러다 보니 네이버 카페, 인스타그램 등에 “연락 부탁드립니다” 댓글과 쪽지를 하루에도 수십 개씩 남긴다. 최근 쓴 기사 ‘결국 ‘있는 사람’이 결혼했다’도 같은 취재 과정을 거쳤다. 결혼준비 카페에 올라온 파혼 게시물 36건 중 16건(44.4%)이 돈 문제였는데 실질적으론 절반이 넘는다. 성격·생활 차이(33.3%), 집안 갈등(11.1%) 상당수도 돈과 관련 있다.   대부분 신혼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전셋집을 구하는데 더 보태줬다는 이유로 집에 자주 찾아오길 원하는 시어머니나 신부 측 부모가 집을 해주면서 생긴 예비 장인과 사위 간 갈등도 있다. 집이 없다고 모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지만, 문제가 생긴 곳엔 돈과 집이 얽혀 있다.   지난달 29일 신생아 특례대출 신청이 시작됐다. [연합뉴스]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는 댓글이 여럿 달렸다. 먹고살 만한 시절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단칸방→투룸 빌라→20평대 아파트→30평대 아파트’ 식으로 집 평수를 늘려가겠다는 계획은 이제 상상에서나 실현될 이야기다. 보통의 소득 증가 속도로는 자산 가격 상승을 따라잡을 수 없다. 마강래 중앙대 교수는 “과거엔 점차 늘어나는 월급을 모아 집을 불려 나가는 게 가능했는데 이젠 아니다”며 “청년 세대가 결혼을 미루고 코인·주식을 찾는 현실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월급보다 집값이 더 많이 오르는 시대라는 의미다.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2022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수도권 자가 가구의 연 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PIR)은 9.3배를 기록했다.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전부 모으면 집을 장만하는 데 9.3년이 걸린다는 뜻이다. 서울 지역의 PIR은 15.2배다. 5년 전인 2017년엔 수도권 PIR이 6.7배였다. 부동산이라는 골대는 월급을 모으다 보면 점점 멀어진다.   정부도 집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지난달 29일 아이를 낳으면 집 살 때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신생아 특례대출을 출시했다. 그런데 호응만큼이나 비판이 들린다. 부부 합산 소득은 1억3000만원을 넘지 않아야 하고, 주택가액 9억원, 전용면적 85㎡ 이하여야 한다는 각종 제한 때문이다. 엊그제부턴 신생아 특례대출 사례 수집에 들어갔다.   “합산 소득이 1억원 중반대인데 혼인신고를 안 하면 아내 소득으로만 잡히냐”, “지방에 살면서 셋째를 낳았는데 ‘국평’보다 조금 더 넓은 집은 왜 해당 안 되냐”, “대기업 맞벌이는 늘 소외된다” 등 사연이 쏟아진다. 결혼 한 건, 출생아 한 명이라도 늘리는 게 시급하다기엔 대출 조건이 참 많다. 이런 글이 보인다. “출산율이 0.7명대까지 떨어졌는데 아직도 이것저것 따지고 앉아 있느냐. 아무래도 정부는 배가 불렀다.” 정진호 경제부 기자

    2024.02.05 00:11

  • [시선2035] 돌이킬 수 없다

    박태인 정치부 기자 ‘문빠·달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만으로 논란이 되고 사과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언론은 “혐오발언 논란 일파만파”라는 보도까지 했다. 불과 5년 전인 2019년 5월, 당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에서 ‘문빠·달창’이란 표현을 쓴 것에 “문 대통령의 극단적 지지자를 지칭하는 과정에서 의미와 유래를 모르고 특정 단어를 썼다”며 사과했다.   ‘수박’‘2찍남’ 등 혐오와 조롱이 일상이 된 2024년에 돌이켜보니 생경한 장면이다. 이젠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 시대 아닌가. 정치학자 박상훈은 팬덤 민주주의 속 혐오 발언을 “조롱과 멸시의 의미를 담는 비유적 표현으로 상대를 함부로 해도 좋은 존재로 만들며 심리적 부담감과 죄책감도 들지 않게 한다”고 했다.   경찰 과학수사대가 지난 25일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이 피습당한 서울 강남구 한 건물의 현장감식을 하고 있다. [뉴스1] 혐오는 피습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목을 칼로 찌르고,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의 머리를 돌로 내리치는 장면은 섬뜩하고 소름이 끼치게 한다. 그러나 곧 익숙해질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도 든다. 테러를 규탄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비난은 멈추지 않는 정치인들처럼, 안타까운 듯 피습 영상을 공유하며 조롱을 덧붙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대로라면 예정된 미래는 곧 다가올 것이다. 미국인들은 더는 총기 난사 사건에 놀라지 않는다. 총만 들지 않았을 뿐 우리도 혐오 범죄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돌이킬 수 없다(No return)’. 미국 뉴햄프셔주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압승에 대해 현지 언론들은 이렇게 평했다. 차기 대선뿐 아니라, 차별과 반목으로 점철된 트럼프 시대로의 회귀를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도 느껴졌다. 82세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막아서기엔 버거운 현실이라는 걸 전 세계는 알고 있다.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 불린 재일 조선인 작가 고(故) 서경식 도쿄경제대 명예교수는 유작 『나의 미국 인문 기행』에서 “선한 아메리카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열세에 몰리고 있다”며 “우리는 앞으로 긴 악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우려했다. 미국을 찾았던 시점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처음 당선된 2016년이지만, 현재도 유효한 듯하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원고를 보낸 지난달 영면했다.   굳이 먼 나라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른 건 미국뿐이 아니란 걸 말이다. 잇달아 발생하는 묻지마 범죄와 정치 테러, 번져가는 혐오를 알고도 묵인하는 소위 윗사람들을 보면 ‘선한 한국’도 열세에 몰렸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지 않나. 언제부터 이렇게 망가지고 공동체는 무너져 내린 것일까. 돌이킬 방법이 무엇일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박태인 정치부 기자

    2024.01.29 00:05

  • [시선2035] ‘K 파티’ CES를 바라보며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이 정도면 서울 코엑스, 일산 킨텍스라고 해도 믿겠다.” 지난 9~12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 전시회인 소비자가전쇼(CES) 취재 현장의 기자들 사이에서 나온 말이다. 삼성, SK 등 국내 대기업과 아마존, BMW 등 글로벌 기업이 모인 LVCC(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와 스타트업들이 모인 유레카 파크의 풍경은 조금 달랐다. 유레카 파크는 마치 ‘K 파티’가 열린 곳 같았다. 한글로 쓰인 한식당 전단지가 눈에 띄었고, 전시장의 절반 정도를 한국 기업과 한국인들이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지난 9~12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 전시회인 소비자가전쇼(CES) 현장. [연합뉴스] 올해 CES 참가 기업에 한국(772개)은 미국(1148개), 중국(1104개)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스타트업으로 좁혀보면 512개사 참가해 미국(250개), 일본(44개)을 압도했다. 134개 국내 기업이 혁신상을 받았고,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 사티아 나델라가 유레카 파크의 국내 스타트업 부스를 찾아 시선을 끌었다. 유레카 파크에는 지방자치단체와 창업 지원 기관, 대학들이 마련한 부스들이 곳곳에 있었다. 신기했던 것은 대구, 광주 등 지자체의 부스가 독일 전체 스타트업이 모인 인근의 ‘독일 파빌리온’보다 큰 규모였다는 점이다. 프랑스나 일본 부스는 독일보다는 컸지만, 국내 공공기관 부스보다 규모가 작았다. 독일과 프랑스, 일본이 선별한 스타트업의 경쟁력이 우리나라보다 한참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마침 현장에서 지난해 독일 출장 기간 인터뷰했던 베를린의 AI 기업 관계자를 만났다. 그는 “독일은 정부와 기관이 엄선한 스타트업들이 참가했고, 해외 기업들과 비즈니스 미팅을 하고 매출을 내기 위해 CES에 온다”고 말했다. 한국은 어떨까. 현지에서 만난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인 퓨처플레이 류중희 대표는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국내 스타트업들이 많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프랑스가 ‘라 프렌치 테크’ 란 깃발 아래 모이고 일본도 국가 브랜드를 갖고 자국 스타트업들을 추려 모였지만, 우리나라는 구심점과 브랜드 없이 지자체와 기관 이름을 앞세운 느낌”이라고 지적했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CES에 참석한 국내 스타트업 임원은 “지자체 등 국내 기관이 개최하는 행사와 만찬에 의무적으로 참석하느라 해외 기업 관계자들과 교류하거나 그들의 서비스나 기술을 살펴볼 시간이 생각만큼 충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와 지자체가 상당한 예산을 써 기관 이름으로 부스를 마련하고, 스타트업들이 CES 참가에 의의를 두는 사이 다른 국가는 선별한 참가 기업들이 조용히 성과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올해 CES를 두고 ‘한국인 파티’란 지적이 나온다. 그 파티의 실속을 우리는 제대로 챙겼을까. CES를 통해 지자체와 기관, 스타트업들은 국내 홍보용 이외에는 무엇을 얻었는지 냉철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2024.01.22 00:15

  • [시선2035] 성난 사람들

    성지원 정치부 기자 기자가 된 후 변한 게 있다면 욕설에 익숙해졌다는 점이다. 입사 1년 차엔 “대한해협에 빠져 죽어라”는 이메일을 받고 하루종일 심란했던 적이 있다. 며칠 후 “네 집을 아니까 찾아가서 죽이겠다”는 적극적 협박 메일을 받고서야 대한해협을 잊을 수 있었다. 입사 7년 차인 지금은 유튜브에 신상이 떠돌고 커뮤니티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일도 무뎌졌다.   그런데도 아직 기사 댓글 창을 열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에 분노하는지 새삼 놀란다. 특히 정치 기사에선 욕 없는 댓글을 찾기가 힘들다. 얼마 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 기사를 쓰고 댓글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아깝다”는 댓글이 너무 많아서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일 부산 강서구에서 지지자로 위장한 남성에게 흉기로 피습당했다. [뉴시스] 누군가 ‘죽지 않아 아깝다’는 무시무시한 생각. 곰팡이처럼 번진 댓글 창의 분노는 언제 어디서 또 다른 테러를 불러낼지 모른다. 지난해 이 대표의 단식장 앞에서 50대 여성이 쪽가위로 경찰을 찔렀고 70대 남성이 커터칼을 휘둘렀다. 그즈음 대구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폭탄 테러를 암시한 20대도 있었다. 누구보다 시민과 소통해야 할 정치도 테러 앞에 주춤한다. 최근 한 의원은 “행사장에서 갑자기 다가오는 지지자를 흠칫 놀라 피했다”고 토로했다.   올해 골든글로브 TV 미니시리즈 및 영화 부문 남우주연상·작품상·여우주연상을 휩쓴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을 보면 제3자를 향한 뒤틀린 분노가 비단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주인공들은 주차장에서 사소한 다툼으로 보복운전을 하고, 이후 끝없는 복수전을 펼치다 끝내 파국에 이른다.   분노의 양상은 파괴적인데, 주인공들 심연의 외로움, 결핍이 처연하게 돋보였다. K장남의 무게에 짓눌려 살지만 잘 풀리는 일 하나 없던 대니(스티븐 연), 잘 나가는 사업가지만 가족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에이미(앨리 웡)는 그 감정을 직면하는 대신 제3자인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쓴다. 그러다 결국 나락에 떨어진 주인공들이 눈을 마주 보며 “네 인생이 보인다. 불쌍하다. 혼자가 아니기만을 바랐을 뿐인데”라고 말하는 장면이 클라이맥스다.   분노의 바닥을 들춰보면 약한 것이 보일 때가 있다. 한국교정복지학회 논문에 따르면 분노 범죄는 ‘선진국형 범죄’라고 한다. 사회는 발전했는데 나만 뒤처지고 고립됐다고 느끼는 박탈감이 주원인이다. 그래서 영국은 2018년 ‘외로움부’를, 일본은 2021년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신설해 이런 분노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정부 차원에서 다룬다. 정치의 역할이 속 시원히 욕먹는 것 이상이어야 할 이유기도 하다.   불과 며칠 전 “정치인의 막말이 정치혐오로 번졌다”며 테러에 고개를 숙였던 한국 정치권에선 슬그머니 다시 분노의 설전이 펼쳐지고 있다. 테러의 배후가 밝혀진들 테러가, 분노가 사라질까. 오늘도 댓글 창을 조심스레 연다. 성지원 정치부 기자

    2024.01.15 00:02

  • [시선2035] 남과 비슷한 정도

    정진호 경제부 기자 저출산은 주된 대화거리 중 하나가 됐다. 정책 당국자와 만날 때뿐 아니라 사석에서도 빠지지 않는 주제다. 중학교 동창들과의 연말 송년회에서도 안줏거리로 올라왔다. 보통은 “나라 망하겠다”는 결론으로 금방 귀결되는데 결혼을 준비하거나 자녀에 대해 고민하는 나잇대에 들어서다 보니 저출산 토크는 사뭇 진지해졌다.   실수령 월 300만원 정도를 버는 A는 1년 전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태어난 달엔 월급의 2배 이상을 썼다고 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을 보다 보면 호텔 스위트룸 같은 산후조리원, 브랜드 있는 준명품 유아 옷이 기본인 것 같아서 따라가게 된다”고 말했다. 둘째 계획은 취소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무자녀 부부에게서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듣기 위해 가진 간담회에선 “아이를 학교에 태우고 갔을 때 아이 기가 죽을까 봐 무리해서라도 외제차로 바꾼다는 부모도 있다고 해 걱정”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달 26일 서울의 한 산후조리원 신생아실 요람이 비어 있다. 지난해 출생아 수는 또 역대 최저를 기록할 전망이다. [연합뉴스] 출생아 수와 합계 출산율은 지난해까지 포함하면 9년째 꾸준히 감소했다. 출산율은 한 해도 빠짐없이 가파른 내리막이다. 2015년 1.24명이었던 출산율은 2016년 1.17명으로 떨어졌고, 2018년엔 0.98명으로 1명대가 깨졌다. 2022년(0.78명)에 이어 지난해는 아직 집계가 끝나지 않았지만 0.72명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임신 기간을 고려하면 2015년을 기점으로 아이를 낳는 이들이 줄었다는 풀이가 나온다. 2015년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2015년은 집값이 오르기 시작하고, 수도권 집중이 강화한 시기”라며 “또 SNS가 본격적으로 활성화하면서 출산율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SNS가 결혼·출산의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건 연말 술자리에 둘러앉은 ‘방구석 전문가’들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사진·영상 공유가 특징인 인스타그램은 2012년 12월 한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했고, 2015년에 국내 활성이용자수(MAU) 500만명을 넘겼다.   해외에서도 SNS를 저출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다. 헝가리 오부다대 연구팀이 18~34세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인스타그램 이용 빈도가 잦을수록 타인에게 더 좋은 모습으로 노출되길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향 비교를 원인으로 지적하면서다. 핀란드 헬싱키대 연구팀은 지난해 논문에서 “2010년대 소셜미디어의 급격한 확산이 출산을 포기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야기했다”고 분석했다.   언젠가부터 ‘남이 하는 만큼’이 선택의 기준이 됐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신혼집, 예식장, 예복 등 선택의 순간마다 무의식적으로 따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비교군인 ‘남’의 실체조차 불분명하다. 올해는 나만의 기준을 세울 수 있을까. 정진호 경제부 기자

    2024.01.08 00:20

  • [시선2035] 의사 공화국

    박태인 정치부 기자 시험 만점자 인터뷰는 가능한 한 읽지 않았다. 왠지 줄 세우기에 동참하는 것 같고, 부럽기도 하고, 학원 홍보 기사에 가깝고, 시험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취재 현장에서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난해 역대급 불수능 결과 뒤 나온 ‘2024수능 만점자 1명, 서울대 의대 지원 불가’라는 뉴스를 클릭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못 간다는 말인가.   서울대 의대를 가려면 과학탐구에서 물리와 화학 중 하나를 응시해야 하는데, 만점자인 유모 씨는 생명과 지구과학을 택해 다른 의대에 진학한다는 내용이었다. 수능 만점자는 당연히 의대를, 무조건 서울대 의대를 가야만 하는 것이란 사회적 합의가 있기에 뉴스가 될 수 있었던 기사라 씁쓸하기도 했다.   그 뒤엔 ‘만점자 앞지른 표준점수 수석, 서울대 의대 지원 가능’이란 보도가 뒤따랐다. 표준점수가 높고 서울대가 요구한 화학을 택한 이모 씨는 다행히도 서울대 의대를 갈 수 있다는 후속보도였다. 두 응시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예상대로 의대 진학을 희망했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지난 11월 정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반발하며 삭발을 하고 있다. [뉴스1] 대통령에 이어 여당 비상대책위원장까지 검찰 출신이라며 야당에선 ‘검사 공화국’이라고 핏대를 높인다. 하지만 수능 만점자들의 행보를 보면 앞으로는 ‘의사 공화국’이라는 말이 사실에 더 부합할 듯하다.   재작년 수능 만점자 인터뷰도 다르지 않았다. 만점자 3명 모두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올해 역시도 비슷할 것이다. 반면 2년 전부터 석차가 공개된 변호사시험 수석 합격자들은 대형 로펌행을 택했다. 검사 인기가 확 식었다. 초등 의대반이 더는 신기한 일도 아니다. 의대 진학 희망자들이 많아지며 강남에선 “고3 학생 중 실제 문과생은 10명 정도뿐”이라는 고등학교도 나왔다. 수능 만점자를 연예인 다루듯 인터뷰한 방송과 유튜브 영상도 수십 개다.   2006년 이후 17년 만에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는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다. 180석 가까운 의석을 지닌 문재인 정부도 의사들의 반발을 넘지 못했다. 대한의사협회 지도부는 삭발식을 거행하며 강경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곧 있으면 의사가 대통령이 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대중은 언제나 그랬듯 ‘1등’을 선호할 것이다.   정부가 2028학년도 수능부터 찬반 문제가 일었던 ‘심화수학’(미적분Ⅱ·기하)을 도입하지 않기로 해 논란이다. 미적분Ⅱ는 과학 기술에 쓰이는 ‘미래의 언어’라며 국가 경쟁력 하락 우려까지 제기된다.   하지만 모두가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현실에서, 문제의 본질은 아닌듯하다. 어떠한 수학을 가르치든, 결국 가장 잘 푸는 학생은 의사가 될 것 아닌가. 수능 1등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게 차라리 현실적 대책일까. 의사 공화국의 시대, 우린 정말 괜찮은 걸까. 박태인 정치부 기자

    2024.01.01 01:54

  • [시선2035] 부끄러운 포기

    성지원 정치부 기자 입사 7년차인 친구는 최근 팀 후배를 “포기했다”고 했다. 처음엔 후배가 회식에 안 간다 해서 ‘요즘 애들’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러다 업무 연락 답이 너무 늦어서 불만이 쌓였다고 한다. 어느 금요일엔 주말까지 급하게 끝내야 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후배가 업무 도중 “먼저 가보겠습니다”하고 칼퇴근했다고 한다. 결국 친구가 밤까지 남아 잔일을 처리했다. “왜 뭐라고 안 했어?” 물었더니 친구 대답이 이렇다. “꼰대라고 생각할까 봐.” 입사 7~8년차 지인 대부분이 이렇게 잔소리 대신 한두 명씩 후배를 포기해본 경험이 있다.   연차가 쌓일수록 깨닫는 것 한 가지. 건방진 요즘 애들이 되기도, 고지식한 꼰대가 되기도 쉽지 않다. 위에는 “그건 아닌데요”라고, 아래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요”라고 말하는 건 엄청 품 드는 일이란 걸 깨달아서다. 으레 3, 6, 9년차를 퇴사 욕구가 가장 높은 연차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9년쯤 지나면 적당히 포기하는 법을 익힌다는 뜻이다.   지난 2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시 나경원 전 의원의 출마 반대 연판장을 돌린 초선 의원들과 나 전 의원(가운데). [연합뉴스] 그 포기가 부끄러워진 건 최근 양당 초선 의원들을 보고서다. 정확히는 그들을 대하는 ‘선배 의원’들의 태도 때문이다.   올해 초 ‘나경원 반대 연판장’을 돌렸던 국민의힘 초선들은 수직적 당·청 관계를 지적한 중진들을 향해 “자살특공대”라며 퇴출까지 거론했다.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의혹으로 구속된 송영길 전 대표에 대해선 반성 한 마디 없는 민주당 초선들은 당의 문제를 지적한 ‘이낙연 신당’에는 득달같이 반대 연판장으로 침묵을 압박했다.   “공천 때가 되니 이 당이나 저 당이나 초선이 완장 차고 한다”는 진중권 교수의 비판보다, 침묵하는 재선, 3선이 더 눈에 띄는 건 적지 않은 숫자 때문이다. 민주당 70명(재선 48명, 3선 22명), 국민의힘 38명(재선 21명, 3선 17명) 의원들이 초선의 ‘연판장 정치’에 뚜렷이 비판도 대안도 제시한 기억이 없다. 사석에선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데…”라면서도 적극적 목소리 대신 눈치보기 바쁘다. 양당 내에선 “재선의 최대 덕목은 눈치”라는 씁쓸한 자평까지 나온다.   그러니 멋진 재선 도전 대신 우울한 초선의 불출마가 줄을 잇는다. 얼마 전 불출마를 선언한 홍성국 민주당 의원은 “문제 제기를 국회 밖에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다. 좌충우돌 초선에게 “이렇게 하면 국회가 달라질 것”이라고 방향을 제시하는, 또는 닮고 싶은 재선이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2년 전 구인구직 플랫폼 사람인이 기업 500곳을 대상으로 ‘1년 이내 조기퇴사자’ 현황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 절반이 ‘MZ 세대 조기 퇴사비율이 높다’고 답한 게 화제였던 기억이 난다. 후배를 포기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비겁하다. 그 후배도 잘 하고 싶었을 텐데.” 성지원 정치부 기자

    2023.12.25 00:07

  • [시선2035] 카카오의 ‘브러더’와 ‘지긋지긋한 반대자’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카카오의 SM엔터 인수 문제, 김정호 카카오 CA협의체 경영지원총괄의 사내 비위 폭로전 등으로 김범수 창업자의 ‘브러더(brother) 경영’이 도마 위에 올랐다. 김 창업자와 주요 계열사 대표들이 형·동생 문화로 뭉쳐 서로의 문제를 묵인한다는 평가가 카카오 안팎에서 나온다. 지난달 29일 김 총괄의 폭로를 다룬 보도 외에도, 또 다른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과 투자 목적의 지주회사 버크셔 해서웨이(이하 버크셔)를 이끌던 찰리 멍거(향년 99세)의 부고 기사였다.   ‘이사회 구성에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 지난 5년간 공개된 주요 의결 사항에 반대표가 나온 적 없는 카카오만의 얘기는 아니다. 버크셔도 ‘친구나 가족 중심 이사회’란 지적을 받는다. 버크셔와 카카오는 업종과 상황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이사회가 비판받고 창업자 또는 리더가 단짝을 기용한다는 점은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버핏의 파트너이자 브러더인 멍거는 카카오의 브러더들과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과 ‘지긋지긋한 반대자’였던 생전의 찰리 멍거 부회장(오른쪽). [AFP=연합뉴스] 멍거는 다른 사람들이 버핏에게 ‘노’라고 말하기 주저할 때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죽하면 버핏이 멍거를 ‘지긋지긋한 반대자’라고 불렀을까. 버핏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극도로 논리적인 파트너의 존재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메커니즘”이라며 멍거를 치켜세웠다. 미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그린의 『돈의 공식』(Richer, Wiser, Happier)에 따르면, 멍거는 자신에게도 철저히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과 같이 자신과 의견은 달라도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의 글을 빠짐없이 찾아 읽었다고 한다.   ‘위대한 투자자이자 반대자’란 말이 손색없는 멍거는 세상을 떠나기 2주 전 CN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정리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덜 어리석게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적게 한 것뿐이다.” 그는 남들보다 덜 어리석기 위해, 자신과 타인의 어리석음을 수집했다고 밝혔다. 그린은 『돈의 공식』에서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들여다볼수록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 줄어든다”면서 다음과 같은 멍거의 말을 인용한다.   “저는 자신이 완전한 멍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자신의 실수를 자꾸 상기해야 다음에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이 경이로운 비결을 체화해야 합니다.”   실제로 멍거는 2017년 4만 명 주주 앞에서 구글과 월마트 주식을 매수하지 않은 것을 자신과 버핏의 실수라고 고백했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일과 삶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고, 나를 위해 쓴소리를 해주는 이들의 가치를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 실수를 반복했지만, 쇄신을 준비하는 카카오뿐 아니라 기업과 국가의 의사결정 책임자들은 더욱 그랬으면 한다.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2023.12.18 00:26

  • [시선2035] 남의 돈 쓰긴 쉽다지만

    정진호 경제부 기자 ‘#내돈내산’(내 돈으로 내가 산). 이런 해시태그를 내건 인플루언서의 콘텐트 일부가 광고로 밝혀졌을 때 많은 이들이 분노한 건 내돈내산의 의미 때문이다. 돈 내고 사는 전제는 충분한 고민이다. 그냥 남의 돈, 공짜라면 손해 볼 게 없다.   인테리어를 해본 적이 있다면 공감할 텐데 상담을 받다 보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끝없이 두들기게 된다. 무엇 하나 결정할 때마다 돈 계산을 하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어제는 기본 수도꼭지보다 10만원 비싼 걸 쓰기로 했다. 30만원 비싼 게 더 예뻤지만, 욕실에 설치했을 때를 상상해보니 20만원어치의 만족감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런 식으로 전등의 종류, 타일의 패턴, 싱크대 상판의 브랜드 등을 결정하는 동안 끊임없이 지갑 사정을 따져봤다.   광주~대구를 잇는 달빛고속철을 건설하는 특별법 발의엔 헌정 사상 최다인 여야 의원 261명이 참여했다. 최고 시속 350㎞ 복선 철도를 만들면서 예비타당성 조사는 면제하는 내용이다. 예상 사업비는 11조2999억원이다.   김영옥 기자 당초 4차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안에는 해당 노선을 단선에 최고 시속 250㎞의 일반철도로 가정했다. 여기엔 6조429억원이 든다. 관련 법안 검토보고서를 보면 복선 고속철도로 운행 시 광주~대구 구간에 83.6분이 소요된다. 단선 일반철도의 소요시간은 86.3분이다. 정차역이 많다 보니 최고 속도를 낼 수 있는 구간이 짧다. 2.7분 단축에 5조2570억원이 드는 셈이다.   논란이 되자 광주시는 고속철도 대신 일반철도면 충분하다고 입장을 다시 정했다. 그러나 복선 노선은 포기하지 않았다. 복선 일반철도의 예상 사업비는 8조7110억원이다. 단선보다 선로 하나를 더 놓아야 하니 2조6681억원 더 든다. 정부 관계자는 “복선으로 하면 더 자주 운행할 수 있긴 한데, 예상 수요를 고려하면 단선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5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가 법안심사소위를 열고 당장 특별법 통과 대신 공청회를 열고 재논의하기로 하면서 한숨 돌렸지만, 이와 비슷한 법안은 한가득이다. 지하철 김포 5호선 연장, 도심철도지하화예타면제법 등이 국회에 올라와 있다. 사업비 13조7000억원의 가덕도 신공항, 11조4000억원의 TK(대구·경북) 신공항은 이미 예타 면제를 받았다.   예타는 비용 대비 효과를 따지는 절차다. 내 돈이 아닌 나랏돈 수억, 수조원의 돈이 제대로 쓰이는 사업인지를 따지는 과정이다. 국회나 정부나 남의 돈(국민 세금)을 쓸 수밖에 없다 보니 국가재정법은 총사업비 500억원 SOC·R&D 사업 등은 예타를 거치도록 했다.   이 글을 쓰다 들른 편의점에서 1400원짜리 새우깡과 100원 더 비싼 매운새우깡을 놓고 고민했다. 600원을 더 줘야 하는 트러플 새우깡은 일찌감치 제쳤다. 정진호 경제부 기자

    2023.12.11 00:05

  • [시선2035] 몰랐을 수밖에 없다

    박태인 정치부 기자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지난달 29일 새벽.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투표가 막 시작되자 현장에 있던 정부 당국자가 전한 말이다. 역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눈치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밀 정보라도 있는 줄 알았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가 119표, 부산이 29표를 받을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부산엑스포 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인 한덕수 국무총리는 해외 출장 때마다 ‘막꺾마(막판까지 꺾이지 않는 마음)’를 외쳤고, 어떤 대통령실 참모는 윤석열 대통령의 60여 개국 연쇄 정상회담을 “100년간 외교사에 없을 일”이라며 치켜세우지 않았나. 예상외 투표 결과를 받아본 윤 대통령은 이날 “예측이 많이 빗나간 것 같다”고 고개를 숙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2030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역대급 불수능’이 끝난 직후 정부 내에선 자화자찬이 쏟아졌다. 대통령의 결단으로 킬러 문항이 사라졌다는 자평이었다. 사교육 스킬을 요구하는 문제도 없어졌다고 했다. 킬러 문항 논란에 비판적이던 일타강사들이 세무조사를 받았기 때문일까. 이젠 아무도 킬러를 킬러라 부르지 못한다. 최근 학원가엔 재수생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엑스포 결과와 겹치며 묘한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다.   대통령실을 취재하면 내부 인사들로부터 반복해 듣는 말이 있다. 그중 하나가 “대통령은 최고의 정보를 받아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듣기보다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엑스포는 물론, 지난 10월 여권이 17.15%포인트 차로 대패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의 민심도 대통령실은 알았어야 한다. 킬러 문항이 사라졌다는데, 왜 사교육 업계가 환호하는지도 따져봐야 했다.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을 대통령실 사람들만 모른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윤 대통령은 일하기 편한 대통령이다.” 정부 고위관계자 중에 의외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논리적으로 정책의 필요성이 설득되고, 국민이 필요하다면 정치적 고려 없이 과감히 밀어준다는 이유를 든다. 문제는 대부분의 관계가 ‘기능적 상하 관계’에 머문다는 점이다. “일하기 편하다”는 그들에게 “고언을 한 적은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런 역할까지 맡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대답한다.   처참한 엑스포 성적표를 보고 떠올랐던 첫 번째 질문은 “왜 몰랐을까”였다. 최고의 정보를 받는다면 가장 정확했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뻔히 밝혀질 일임에도, 모두가 한 사람을 향한 보여주기에만 집중했던 건 아닐지.   이해관계와 욕망, 압박감과 간절함이 엉킨 엑스포 총력전은 대국민 희망고문으로 이어졌다. “왜 몰랐을까”를 묻다 보니 “몰랐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란 생각도 든다. 부러 진실을 알려 하지 않았고, 굳이 말하려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박태인 정치부 기자

    2023.12.04 00:09

  • [시선2035] 도파민 중독

    성지원 정치부 기자 “의원님 휴대폰을 뺏어야 돼요.”   어떤 보좌관이 이렇게 토로했다. 보좌하는 의원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유튜브와 SNS를 들여다보는 휴대폰 중독이란다. 가끔 ‘새벽감성’으로 감성글을 SNS에 올리기라도 하면 의원실은 비상이다.   이젠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다. 지난 7월 더불어민주당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철회를 촉구하며 국회에서 철야농성을 벌일 때 기자들 눈에 띈 건 의원들의 결기보다 농성장에 앉아있는 내내 휴대폰을 보는 이재명 대표였다. 이 대표는 성남시장 시절 SNS 중독을 스스로 인정했다. 짧고 굵직한 SNS 소통은 ‘사이다’의 원천이기도 했다.   최강욱 전 더불어 민주당 의원이 최근 한 출판기념회에서 ‘여성비하’ 발언 논란에 휩싸이자 지난 2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 [최강욱 전 의원 페이스북 캡처] 리그오브레전드(LOL)의 살아있는 전설 페이커도 최근 중독을 고백했다. 페이커는 19일 롤드컵 우승 후 기자회견에서 동기부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한마디를 묻자 대뜸 “요즘 유튜브나 틱톡이 너무 중독성이 강해서 많은 분이 그런 거로 고생할 것 같다. 저도 이제 많이 끊고 노력할 테니 함께 화이팅하자”고 했다. 그래서 많이 끊었을까? “페이커도 못 참는데 내가 어떻게 참느냐”는 반응이 대다수다.   도파민에 정처 없이 노출된 시대, 중독엔 국회의원도 프로게이머도 없다. 영화나 드라마는 한 줄 요약이, 구구절절 설명보단 사이다 발언이 각광받는다. 기자로선 품 들인 취재, 공들여 쓴 기사가 무색할 때가 있다. 25일 사내 통계로 확인한 오늘 가장 많이 읽힌 기사의 총소비시간은 37초. 대선 때 여야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윤석열 후보), ‘부자감세 반대’(이재명 후보) 등 한 줄 공약만 열심히 내세운 이유가 있다.   트렌드라지만 가끔은 글과 영상의 길이만큼 생각마저 요약될까 두렵다. 1분 내외 짧은 영상인 숏폼에 30분만 노출돼도 사고력과 기억력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잠깐 마비된다고 한다.   한국리서치 여론조사에서 숏폼 콘텐트 이용자 63%가 숏폼의 문제점으로 ‘전체 맥락보다 결과에만 집중돼 있다’는 점을 꼽았다. 최근 민주당은 SNS 게시물 1000건을 만점으로 하는 디지털·언론 소통실적을 선출직 공직자 평가 기준으로 내세웠는데, 당내에선 “생각 없는 ‘아무 말’이라도 개수만 채우면 되느냐”는 불만이 나왔다. 최근 몇 정치인의 화끈한 SNS ‘아무 말’을 보자니 합당한 문제 제기다.   짧은 게 미덕인 시대에도 이런 소식도 있다. 내년 아카데미 작품상 유력 후보작인 ‘오펜하이머’와 ‘플라워 킬링 문’ 두 편의 영화는 모두 3시간 넘는 장편이다. ‘플라워 킬링 문’의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최근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전개 방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러닝타임은 필요했다”고 말했다. 대사 없는 장면, 쉼표와 마침표가 모두 이야기를 담고 있단 얘기다. 장광설도 때론 의미가 있다. 성지원 정치부 기자

    2023.11.27 00:02

  • [시선2035] 남이 내준 문제, 내가 찾은 문제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수능은 말 그대로 대학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이다. 주어진 문제를 남보다 많이 맞히면 경쟁 우위에 선다. 대학 입시, 자격증 취득, 취업까지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10대와 20대를 보낸다. IT산업과 스타트업을 취재하다 보면,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음을 깨닫는다. 일과 삶에서 개인과 기업이 풀어야 할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해결하는 능력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지난 13·14일 본지 기획인 ‘AI(인공지능) 전쟁 시즌2’를 취재하면서다.   지난달 5일 방문한 베를린 공대 캠퍼스. 여성국 기자 좋든 싫든 AI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됐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생성AI 기술을 ‘인쇄술 이후 가장 큰 지적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중앙일보 IT산업부는 미국·캐나다·영국 등 주요 AI 선진국을 돌며 국가별 경쟁력과 그들이 풀고 있는 문제를 살펴봤다. 이번 취재를 위해 지난달 독일 베를린을 다녀왔다.   유럽의 리더 독일은 제조업 강국이지만, 빅테크 기업은 없다. 디지털 전환도 상대적으로 더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기에 미국과 캐나다에 출장 간 동료에 비해 빈손으로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됐다. 마침 ‘독일이 다시 유럽의 병자가 됐나’ 의문을 품는 외신 기사도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AI를 활용해 풀어야 할 문제를 정의하고, 실속 있는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AI 전략을 총괄하는 연방교육연구부의 마리오 브란덴부르크 차관은 “(정부가) 빅테크나 대기업의 AI를 지원하는 것은 독일 경제구조에 맞지 않는다”며 “경쟁우위에 있는 제조업의 혁신과 노동력 부족 문제를 AI로 풀어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5일 베를린 공대 캠퍼스에서 만난 클라우스 로베르트 뮐러 교수는 “독일 AI 기술은 (AI 자체보다) 꼭 해결할 문제에 집중한다”며 “에너지 가격 상승, 기후위기 문제 해결을 위해 재생에너지 발전 장치를 AI로 효율화하는 방안이 주된 관심사”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전국 7개 도시에 위치한 독일AI연구센터(DFKI)는 화학·의학·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300개가 넘는 AI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데 집중한다. 장병탁 서울대 AI 대학원장은 “국내에서도 기업들이 AI 연구소를 만들고 있지만, 제조업 강국인 우리나라가 해결할 문제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어떻게 AI를 이용할 것인지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AI 시대, 우리는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할까. 선진국과 기술격차를 좁히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하지만 남이 내준 문제만 실컷 풀다가 정작 우리가 AI를 활용해 풀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뒤늦게 발견하는 건 아닐까. 기업과 국가가 유행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AI라는 날개를 어디에 달아,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정의하고 가다듬을 때다.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2023.11.20 00:14

  • [시선2035] 최만리를 다시 보게 됐다

    정진호 경제부 기자 이제 와서 생각하면 세종의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는 꽤나 용기 있는 신하다. 세종 때는 왕권이 강하던 때다. 조선 초기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왕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세종 즉위 직후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이 발생하면서 병조판서(국방부 장관 격)였던 조말생 등 태종 때의 관료들마저 요직에서 대거 몰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자 최만리는 반대 상소문을 올린다. 그는 6가지 이유를 댔는데, 새로 만든 글자가 쉬운 만큼 중국의 학문을 멀리하게 될 것이라거나, 여진·일본·서번(티베트) 등 자신들의 글자를 가진 나라처럼 오랑캐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지금은 비난받는 인물이 됐지만, 최만리는 조선왕조 519년간 공식적으로 217명뿐인 청백리 칭호를 받은 사람 중 하나다. 모두 기록으로 남았다.   10일 코스피는 2409.66에 거래를 마치면서 공매도 금지 직전(2368.34)과 비교해 1.7%(41포인트) 상승에 그쳤다. [연합뉴스] 6일부터 공매도가 전면 금지됐다. 전날 국민의힘과 정부, 대통령실 고위당정협의회를 열어 공매도 관련 대책을 논의한 직후 금융위원회는 임시 금융위를 개최하고 내년 상반기까지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기로 의결했다. 공매도는 주식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미리 팔겠다’고 계약하고, 이후에 결제하는 투자 기법으로 주가가 내려갈 것이라는 데 ‘베팅’하는 방식이다.   지난달 11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나온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외국인 투자가 중요한 국내 주식시장에서 공매도 거래를 어렵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외국인 자본 이탈을 불러올 수 있다”며 “(공매도 금지가) 개인투자자를 보호하는 정책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공매도 전면 금지를 발표하기 25일 전이다. 그 사이 주식시장이 급변한 걸까.   환경부는 7일 일회용품 규제 계도기간을 무기한 연장했다. 매장 내 플라스틱 빨대, 종이컵 등 일회용품 사용을 가능케 했다. 23일 계도기간 종료가 예정돼 있었지만, 이를 약 2주 앞두고 규제를 철회했다. 최소 “종이 빨대가 환경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근거라도 제시하길 기대했지만, 그런 건 없었다.   환경부는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뒤집기 2달여 전 서울시와 함께 일회용품 사용 규제에 대한 정책 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종이빨대 제조업체 대표 10여명은 13일 환경부 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플라스틱 빨대 대신 종이빨대를 사용토록 한다는 정부 말을 믿고 제조설비를 구축하고 생산량을 늘려왔던 제조업체는 줄도산 위기에 처했다.   세종시에서 만난 많은 공무원들은 “우리도 일반 직장인과 똑같은 월급쟁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보통 ‘그냥 월급쟁이’에겐 그만한 권한이나 영향력이 없다. 심지어 왕권 국가였던 조선시대에도 왕의 역점사업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시절엔 벼슬이나 재물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걸어야 했는데 말이다. 정진호 경제부 기자

    2023.11.13 00:23

  • [시선2035] 전직 국가대표의 허영

    박태인 정치부 기자 전과 10범인 전청조를 재벌 3세라 믿은 남현희는 왜 비난받는 걸까. 모두가 전직 펜싱 국가대표를 손가락질하는데, 막상 따져보면 그 이유가 분명치는 않다. 네티즌 수사대가 주장하듯 전씨와 공범이란 의혹 때문인지(남씨는 부인 중이다), 나이를 마흔둘이나 먹고 성전환 남성의 아이를 뱄다고 믿은 어리석음 때문일지. 자신을 피해자라 주장하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이런 현실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소 19억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된 사기범을 두고 전 국민이 웃고 떠들며, 그의 ‘I am’ 화법까지 흉내 내는데, 국제 무대에서 수많은 메달을 따낸 자신에겐 한없이 가혹하니 말이다. 전청조는 완전히 가짜지만, 남현희는 피·땀·눈물로 메달을 따낸 진짜 국대 아닌가.   지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출전을 앞두고 훈련 중 인 전 펜싱 국가대표 남현희. [중앙포토] 남씨의 화려한 SNS를 비난의 이유로 지목하는 이들도 있다. 커피를 마시는 듯, 소파에 누워 잠을 자는 듯 보이지만, 그가 올린 사진 구석구석엔 명품 가방과 시계, 목걸이가 정교한 아웃포커싱과 맞물린 다양한 구도 속에 놓여 있다. 허영으로 가득한 그의 계정엔 전씨가 선물한 명품이 가득했다. 남씨는 벤틀리 차량을 포함한 명품 40여 종을 경찰에 제출하며 소유권을 포기했다. 너무나 자랑을 많이 한 죄. 남씨가 여기서 벗어나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대한민국의 저출산은 SNS의 허세 때문이란 일타 강사의 주장이 공감을 일으키는 사회에서, 남씨에 대한 비난이 역설적이란 생각도 든다. 사기꾼이 사기 친 돈으로 사준 명품을 자랑한 것은 문제겠으나, 남씨의 허영심 그 자체를 지적하며 고소해 하는 목소리도 상당해서다. 남씨가 공유한 사진과 비슷한 명품 사진은 SNS를 조금만 검색해도 수천, 수만장이 나온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랑인 듯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좋아요’와 팔로워를 늘리며 사는 것이 대한민국의 일상 풍경 아니었나.   ‘전청조·남현희 사태’와 같은 사건이 한국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넷플릭스는 자신을 수백억 상속녀라 속이고 특급호텔에서 무전 취식하며 미국 사교계를 뒤흔든 애나 소로킨이란 여성의 이야기를 드라마(‘애나 만들기’)로 만들었다. 정체가 드러나 감옥에 갔지만, 소로킨의 고급스러운 취향과 허세 가득한 SNS에 사람들은 그를 진짜라 여기며 열광했고 돈을 빌려줬다. ‘애나 만들기’에서 검사 캐서린은 “오늘날 미국의 문제점이 모조리 담긴 사건”이라며 소로킨을 단죄하려 한다.   경호원을 대동하고 월세 2000만원 레지던스에 살았던 전씨의 사기와 남씨의 허영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러 문제점을 압축한 하나의 현상처럼 느껴진다. 사는 곳과 먹고 타는, 오로지 드러나는 것으로만 끊임없이 계급을 나누는 현실. 종종 가짜가 진짜를 압도하는 속살이 두 사람 덕에 벗겨진 것은 아닐지. 박태인 정치부 기자

    2023.11.06 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