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1주년…대러 제재에 미온적인 한국[신동찬의 고발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해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다.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독재자 푸틴이 동원한 압도적 무력 앞에, 국정 경험 없는 코미디언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허약한 정부가 금세 무너질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개전(開戰) 1주년이 된 현재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용감하게 러시아 침공에 맞서고 있다. 얼마 전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함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밝은 햇살 아래서 미국 등 자유 진영이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할 것임을 밝히는 모습과, 자신이 시작한 침략 전쟁임에도 우크라이나 땅에 발도 못 들이고 모스크바에서 개전 책임을 미국과 서방에 떠넘기는 푸틴의 대조적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깜짝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났다. AFP=연합뉴스 지난 1년은 또한, 이 전쟁이 머나먼 동유럽에서 일어난, 우리와 무관한 사태가 아님을 실감하게 만든 한 해이기도 했다. 세계적 곡창인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가 주요 전장이 된 탓에, 국제 밀가루 가격이 폭등해 국내 빵 값도 비싸지는 사태가 벌어졌는가 하면, 최근 난방비 폭탄으로 빚어진 소란 역시 우-러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앙등에 상당 부분 그 원인이 있다 하겠다. 심지어 우리 밥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태마저 러시아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 탓에 귀한 금(金)태가 되는 품귀 현상마저 빚어졌다. 더구나 미국을 포함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등 서방 진영은 바이든의 전임자 트럼프 때와는 달리, 전례 없는 공동 전선을 형성해 우크라이나군에 무기와 군수품을 지원하며,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광범위하고 강력한 국제 경제 제재를 시행 중이다. 다만 핵무기 보유국인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직접 군사 개입은 하지 않고 있다. 한국도 이런 국제 사회의 대(對)러 제재에 동참해 57개 품목의 대러 수출을 통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한국도 다른 서방국들처럼 러시아에 의해 이른바 비(非) 우호국으로 지정돼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도 큰 피해를 보고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를 돕느라 무기 및 방산물자가 소진된 우크라이나의 접경국 폴란드에 이른바 K-방산을 대대적으로 수출하는 파급효과까지 누렸다. 나아가 한국 기업들도 전후 우크라이나 복구에 대대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장밋빛 희망에 부풀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방한 중인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을 접견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그러나 1월 말 방한한 옌스 스톨텐베르그 NATO 사무총장은 한국이 무기를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우크라니아를 군사적으로 원조할 것을 촉구했다. 우리 스스로 평가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기여도와 서방에서 보는 한국의 이 전쟁의 기여도 사이에 온도차가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특히 미국 및 일본을 포함한 G7과 EU, 그리고 호주는 금년 초부터 러시아산 원유 수입에 대하여 소위 가격 상한제(price cap)를 부과하는 경제 제재를 시행 중인데, 글로벌 중추 국가를 지향하겠다는 윤석열 정부는 여기에 빠져 있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이른바 가격 상한제는 ‘사우디 아라비아가 핵무기를 가진 격’이라고 비유되는 산유국 러시아의 주 수입원인 원유 판매에 타격을 주어 침략 전쟁 전비(戰費)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게 하게 하려는 제재이다. 현재 러시아산 원유의 가격 상한은 배럴당 60달러로 정해졌는데, 이를 초과해 러시아산 원유를 해상으로 수입하면, 여기에 수반되는 운송, (재)보험, 금융 서비스 등을 금지시키겠다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다. 사실 유럽 국가들도 이번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이 폭등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실정임에도 인위적으로 국경선을 다시 긋겠다는 푸틴의 침략 전쟁에 결연히 반대하겠다는 의지를 원유가 상한제에 참여해 표방하고 있는 셈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과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 [연합뉴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러한 국제적 대러 원유 가격 상한제 실시 국가들의 명단에서 빠져 있다.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는 지난해 7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 간의 회담에서도 거론됐다. 한국 정부가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취지의 보도자료까지 나왔던 점에 비추어 보면, 호주까지 들어간 명단에 한국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우리 정부로서는 6자 회담 당사국이었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핵보유국인 러시아와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싶겠고, 가뜩이나 서민들의 삶을 팍팍하게 하는 가스, 전기, 난방비가 크게 오르는 상황에서 국내 원유 수입량의 5.6% 정도를 차지하는 러시아산 원유 수입이 막히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을 수 있겠다. 러시아는 원유 상한제 동참 국가들에게는 자국산 원유를 팔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우리 정유업계의 부담도 정부로서는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주년(2월 24일)을 앞둔 21일(현지시간) 국정연설을 위해 걸어가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연합뉴스 하지만, 지난해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직후 러시아에 대하여 미국이 해외직접생산규칙(Foreign Direct Product Rule) 제재를 시행할 때 무려 전세계 30여개국이 미국과 유사한 수출통제 조치를 러시아에 대하여 취해 미국으로부터 예외국 지위를 인정 받았으나, 하필이면 한국만 조치를 취하지 않아 예외국에 들지 못 했다. 그 결과 당시 우리 기업들에게 오히려 큰 부담을 주었는데 그 악몽이 이번에도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당시 문재인 정권은 러시아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하다가 예외국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유하자면, 미국 교장 선생님이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반 담임 선생님의 지도 방침에는 공감해 그 반 학생들(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기업들)은 담임 선생님(각국 정부)의 숙제 검사만 받아도 충분하다고 인정해 준 반면, 한국반 담임 선생님의 숙제 검사는 믿을 수 없다며 한국 반 학생들(우리 기업들)은 교장실까지 와서 직접 숙제 검사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이런 상황이 무려 한 달여간 이어지다가 부랴부랴 뒷수습에 나선 끝에 겨우 FDPR 예외국 지위를 인정받았다. 과연 이번 러시아산 원유 가격 상한제에 주요 서방 국가들 중 사실상 한국만이 참여하지 않은 게, 국익을 치밀하게 고려한 결단의 산물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앞서 본 FDPR 사건이나 최근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파장에 우왕좌왕했던 사례들의 연장 선상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만약 불행히도 후자의 경우라면 세계 경제의 험난한 파고 속에 북한 핵문제까지 다시 불거진 요즘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미국발 파고까지 더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된다. 즉 원유가 상한제에 동참하지 않은 한국에 북핵 대응에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유무형의 불이익을 줄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전쟁 1주년을 맞은 오늘, 대러 제재에 보다 적극 동참하여 우리의 실리를 찾아가는, 아니 예기치 못한 피해라도 한국 경제에 미치지 않게 미리 대비하는 한국 정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신동찬 변호사
-
"담배는 독약" 잊혀진 이주일 경고…골초父 따라 암 걸린 아들 [김범석의 살아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오랜 기간 암 환자 진료를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암은 몸에 생기는 순간 이미 늦기에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이 최선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예방이 안 되는 암도 있고 아무 잘못이 없어도 생기는 암이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간에 암 발생 확률을 낮추는 확실한 방법은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예방법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금연’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흡연 탓에 암에 걸린 가족을 곁에 두고도 쉽사리 끊지 못하는 게 바로 담배다. “아드님도 담배 피우시나요? 아버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입에 댄 담배 때문에 암에 걸린 게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드님은 이참에 담배를 끊지 그러세요?” 진료실에서 만난 환자 아들들에게서 담배 냄새가 풀풀 풍길 때마다 이런 잔소리를 많이 한다. 그럴 때면 옆에 있던 어머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꼭 한마디 한다. “의사 선생님 말 잘 들어. 담배 꼭 끊으라잖아. 하여간 너희 아버지나 너나 말 안 듣는 거는 다 똑같아. 당장 끊어.” 그러면 환자도 멋쩍은 표정으로 한마디 거든다. ‘그래. 지금까지 살아보니 엄마 말 틀린 거 하나 없더라. 암에 걸리니 숨이 차서 이제는 힘들어서 누가 피라고 해도 더는 담배를 못 피우겠다. 내가 담배를 이렇게 끊게 될 줄은 몰랐네. ” 하지만 의사의 권고와 아버지의 후회, 어머니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끊는 아들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담배 탓에 암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지금 아버지의 모습이 30년 뒤 당신 모습이라고 독하게 경고해도 이들은 담배를 쉽사리 끊지 못한다. 남자들에게 이상한 똥고집이 있어서 그런가, 눈앞의 실제 사례를 보고도 귀를 막은 채 담배를 피우다 결국 제 아버지처럼 암에 걸리고 만다. 암이 가장 무섭긴 하지만 담배는 암뿐만 아니라 만병의 근원이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담배엔 살충제 성분인 DDT, 연탄가스 성분인 일산화탄소, 조선 시대 사약으로 쓰이던 비소, 사형 가스인 청산 가스, 중금속 카드뮴·니켈 등 유해성분이 너무나 많다. 담배를 피운다는 건 이런 독극물을 폐에 들이붓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걸 뻔히 알면서 사람들이 계속 담배를 피우는 건 담배회사가 유해성분에 더해 중독물질을 첨가했기 때문이다. 담배를 못 끊는 것은 당신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끊을 수 없는 덫에 빠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흡연에 면죄부를 주겠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담배는 혼자서 끊기는 매우 어렵지만 주변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흡연이 기호가 아닌 질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금연클리닉에 가는 건 기본이다. 주변에 금연 사실을 널리 알려서 피우다 걸리면 꽤 큰 벌금을 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작심삼일도 꼭 나쁘지만은 않다. 100번, 200번이라도 반복적으로 시도하면 결국 끊어진다. 골초였던 나의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에 폐암을 진단받았다. 아버지와 유전적으로 판박이인 내가 만일 아버지처럼 20대 초반부터 담배를 피웠다면 아마도 나 역시 지금쯤 폐암 환자가 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 나에게는 벌어지지 않은 현실이지만 환자들을 보면 그들이 겪는 일이 마치 나에게 일어난 일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게 여겨지는 한편으로 담배를 배우지 않았음에 대해 무척 감사하면서 산다. 내가 담배를 피웠다면 지금쯤 나는 죽은 목숨일 텐데, 다행히 아직까지는 암에 걸리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보너스로 주어지는 인생이라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방식도 금연을 실천하는 방법의 하나다. 당장 내게 벌어지지 않은 일이라도 체감해보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약간의 관찰력이 필요하다. 얼마 전 일이었다. 기록적인 한파에 눈이 얼어붙어 길거리가 빙판이 되었던 날이었다. 그날 외래 진료를 보는데 오전에만 환자 두 분이 낙상한 채 왔다. 한 분은 차에서 내리다가 넘어졌고 다른 한 분은 집 앞에서 넘어졌다고 했다. 똑같이 낙상했는데 결과는 사뭇 달랐다. 그중 한 분은 심지어 뼈가 통째로 부러져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지만 다른 환자는 부상이 가벼웠다. 그날 내원한 또 다른 82세의 환자분은 외래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도 오다가 넘어질 뻔했어요. 다행히 균형을 잡아서 넘어지진 않았지만 정말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넘어졌으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내 친구 중 한 명은 넘어져서 허리뼈가 주저앉았는데 수술도 안 된다고 하더니 나중에 일어나지 못하더라고요. 그렇게 두어 달 누워서 시름시름 앓더니 그냥 가버렸어요. 가만 보니까 다리가 가늘어져서 흐물거리는 친구들이 꼭 넘어져요. 그래서 저는 다리 근육이 안 빠지도록 매일 스쿼트를 하고 다른 운동도 해요. 오늘 같은 날은 웬만하면 밖에 안 나가고요. 나갈 때는 아이들 불러서 같이 나가요. 다른 노인들도 넘어지면 안 되니까 눈 오는 날에는 애들한테 집 앞에 쌓인 눈을 수시로 치우라고 잔소리도 하고요. 그분은 낙상하지 않았음에 감사해 했고 친구들을 관찰하며 터득한 자신만의 낙상 예방 비결을 말해주었다. 친구의 사례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자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거기에서 나아가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미리 내다보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모든 일에는 예방이 최선이다. 암도 그렇다. 김범석의 살아내다 다시 돌아가 금연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금연은 무척 힘들다. 담배에는 온갖 중독 물질이 첨가되어 있고, 대마초보다 중독성이 더 강하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당신이 담배를 피워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국가는 손쉽게 세금을 걷고, 담배 회사는 돈을 챙기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제약회사와 병원이 이익을 본다. 몸 버리고 돈 버리고 가장 손해 보는 건 당신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따지기 이전에 주변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많은 암 환자가 담배부터 끊으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무수히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경고를 가볍게 여긴다면 그들이 지금 겪는 현실이 바로 당신이 곧 겪을 현실이 될 것이다. 주변에 담배를 피워도 건강한 사람이 많다고? 담배로 건강을 잃고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살아있는 사람만 보이는 착시 효과일 뿐이다. 당신은 괜찮을 거라고? 내일부터 끊을 거라고? 전자담배는 괜찮다고? 흡연에 관대해지는 만큼 암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암 환자의 경고를 실감하기 어렵다면 병원에 와서 사람들이 어떻게 아프게 되는지 한번 주의 깊게 관찰해보시라. 이왕 사는 것, 건강을 잃고 후회하기보다 건강하게 살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고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을 잠시 상상해보고 체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단 한 명이라도 담배를 끊는다면, 그리하여 한 명이라도 암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없이 행복한 일이다. 2023년 설날이 지났고 다시 새해다. 작심삼일의 약발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심삼일이라도 사흘에 한 번씩 100번만 작심하면 한 해 동안 금연할 수 있다. 폐암으로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 씨는 임종을 앞두고 뼈저리게 후회하며 말했다.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김범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
"'UAE 적=이란'은 상식적 발언"…그런데도 이란 발끈한 이유 [신동찬이 고발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UAE에 주둔한 아크 부대를 찾아 우리 장병을 만났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아랍에미리트(United Arab Emirates, UAE) 순방 중 현지에 파병된 우리 아크 부대 장병들을 만나 “UAE의 적은 이란”이라고 말했다.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발언 다음 날 “오지랖(meddlesome)이자 이란이 UAE를 포함한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과 맺고 있는 역사적·우호적 관계, 그리고 빠르고 긍정적인 개선에 대해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18일에는 주한 이란 대사관을 통해 “한국의 설명을 기다린다”더니 윤강현 주이란 한국 대사를 초치했다. 이에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은 주한 이란 대사를 불러“윤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 장병에 대한 격려 차원이었고, 한·이란 관계 등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설명했지만 대외는 물론 국내 정치권에서도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 우선 몇 가지 사실 확인부터 해보자. UAE는 지난 2016년 주이란 자국 대사를 소환한 이후 무려 6년 만인 지난해 8월에야 테헤란에 다시 파견한 바 있다. 이런 관계에 비춰 페르시아만 국가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빠르고 긍정적으로 관계가 개선되고 있다는 이란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더더욱 그렇다. UAE가 영국의 협정국가 지위에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해다. 당초 카타르와 바레인까지 합해 9개의 토후국이 UAE라는 연방 국가를 이루려다 지금처럼 두바이 등 7개 토후국만 참여하게 됐다. 이 논의 과정에서 빚어진 혼란을 틈타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그해 11월 7개 토후국 중 하나인 라스 알 카이마가 다스리던 호르무즈 해협 부근의 소툰브와 대툰브 섬을 점령했고, 이어 또 다른 토후국 샤르자 땅인 아부무사섬까지 점령했다. UAE는 현재까지 이란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세 섬의 점령을 불법이라며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사국인 UAE가 이란과 달리 윤 대통령 발언을 놓고 침묵하는 데는 이러한 영유권 분쟁과 관련한 앙금이 작용하고 있을 게다. 섬의 면적은 얼마 되지 않지만, 주변 대륙붕의 부존자원도 적지 않은 전략적 요충지다. 독도를 사이에 둔 한·일 간의 영토분쟁을 떠올리면 쉽다. 2012년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이 섬을 방문해 UAE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과정도 지난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유사하다. 지난 2012년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 사진공동취재단 ] UAE와 이란의 관계는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후 더욱 나빠졌다.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리고 신정(神政) 독재국가 체제를 수립한 이란의 이슬람 성직자들이 혁명을 수출해 UAE를 포함한 왕정 국가들을 흔들려 했기 때문이다. 이에 1981년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바레인·카타르·오만·쿠웨이트는 걸프협력기구(GCC)를 결성했다. 경제협력체를 표방했지만 이들 왕정 산유 국가들이 이란의 정치·군사적 위협에 함께 대처하려는 의도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UAE 등 GCC 국가들은 이란과 경계가 되는 만(灣)의 명칭부터 아라비아만이나 그냥 만(Gulf)이라고만 쓰는 데 반해 이란은 이번 외무부 대변인 성명처럼 페르시아만이라고 쓴다. 이 역시 같은 바다를 놓고 한국은 동해, 일본은 일본해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 또 UAE를 비롯한 GCC는 중동의 대표적 친미 국가들인데 반해 이란은 이슬람 혁명 당시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가장 강경한 중동의 반미 국가다.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도 이란은 현재까지도 알 쿠즈(예루살렘을 지칭하는 이란어)의 날이라는 공공연한 연례 이스라엘 증오일까지 두고 있다. 반면 UAE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 시절 이스라엘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아브라함 협정을 맺어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가장 결정적으로 지난 2016년 사우디가 자국 내 이슬람 시아파 성직자를 처형하자, 시아파 성직자가 주류인 이란이 강력히 반발하고 이란 군중은 주이란 사우디 대사관을 방화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UAE는 당시 항의의 뜻으로 주이란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심지어 UAE와 이란은 대리전 형태이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맞서는 중이다. 내전 중인 예멘에 사우디와 UAE는 정부 측을 지원하고 있고, 이란은 후티 반군을 지원 중이라 양국이 간접적인 교전 상태다. 후티 반군의 습격으로 예멘에 파견된 UAE 장병이 전사하기도 했다. 지난해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UAE를 방문 중일 때 후티 반군이 UAE 국제공항과 석유 시설을 드론으로 공격해 아부다비 왕세제(현 UAE 대통령)와의 정상회담이 취소된 바도 있다. 이런 관계를 보면 이란이 말하는 “역사적·우호적 관계”나 “빠르고 긍정적인 개선”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UAE의 적은 이란”이라는 윤 대통령 발언은 양국 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본 상식적 발언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두 가지 문제를 짚어봐야 한다. 하나는 이란의 강경한 반응의 배경, 다른 하나는 윤 대통령의 외교적 실언 여부다. 우선, 이란은 왜 이렇게까지 격앙한 것일까. 알려진 대로 아크 부대는 이명박 정부가 UAE 원전 4기를 수주한 직후 당시 UAE 실권자이던 아부다비 왕세제(현 UAE 대통령) 요청으로 파병되어, 아랍어로 형제라는 부대 명칭처럼 현지에서 UAE 특수 부대와 합동 훈련 등을 해오고 있다. 한반도 못지않은 UAE와 이란 간의 긴장 관계를 고려할 때 양국의 직접적 군사 충돌이 벌어지면 아크 부대가 과연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는 불편한 질문이 늘 우리 앞에 던져져 있다. 이란이 아크 부대의 개입을 암묵적으로 의심하는 게 이번 사태의 배경에 있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 정부는 아크 부대는 비전투원으로 이 이상의 확대 해석은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이란과의 관계를 고려해 아크 부대는 비전투원이라는 공식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과 UAE의 관계를 담보하는 중요한 버팀목 역할을 한다. 아크 부대 자체가 대한민국을 미묘한 상황에 놓는 존재라 하겠다. 문재인 정부 초기 철군 얘기에 발끈한 UAE를 달래려고 당시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날아간 것도 다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대통령이 아크 부대원 앞에서 "UAE의 적은 이란"이라고 한 건 분명 외교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지난 2017년 12월 임종석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UAE로 가 아부다비 모하메드 왕세제를 만났다. 아크 부대와 관련해 UAE 달래기 행보라는 얘기가 나왔다. [사진 청와대] UAE는 물론 이란도 알고 미국이나 이스라엘도 다 아는 그런 중동 정세를 굳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UAE 국빈 방문 중에 해야만 할 이유는 찾기 어렵다. 이란이 어떤 나라인가. 핵무기 개발 의혹으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를 지금까지 받는 '빌런'이면서 우리 대통령의 말꼬리를 잡아 "NPT 위배" 운운하며 해명을 요구하는 것만 봐도 북한 못지않은 막무가내, 적반하장 전략을 구사한다. 그런 이란에 쓸데없는 빌미를 준 것 같아 안타깝다. 어디 이뿐인가. 이란은 지난 2021년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던 우리 선박 한국케미 호를 ‘해양오염’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억류한 일도 있고, 지금은 자국의 히잡 반대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해 국제사회의 맹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통령의 실언 하나를 빌미 삼아 중동 평화의 사도인 양 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속이 쓰리다. 지난 2012년 두바이 등에서 근무했던 일개 시민도 이러한데, 정부 입장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UAE에서 거둔 대규모 투자 유치의 성과가 실언 한 마디로 빛이 바래게 되는 건 윤 대통령 본인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상하게 외국 순방 중에 이런 실수가 자주 보인다. 부디 앞으로는 대통령이 국익을 생각해 신중하게 언행을 해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신동찬 변호사
-
정진상은 꽁꽁 감추고…검사 신상 공개한 野 '악플 깡패' 본능 [노정태가 고발한다]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와 박찬대 최고위원. 오른쪽은 민주당이 유포한 이재명 대표 관련 수사를 하는 검사들의 이름과 얼굴 사진이 담긴 도표.. 그래픽=신재민 기자 "공익을 높이는 측면에서 또 피의자 인권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검사 신상 공개를 검토하고 있다. "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지난 2일 한 언론에 밝힌 내용이다. "당내에서 검찰 신상을 공개하는 것과 관련된 법제도 개선을 검토 중"이라고도 덧붙였다. 검찰 신상을 공개하는 법이라니 무슨 말일까? 검찰은 암약하는 국가정보원이 아니다. 모든 검사의 신원은 이미 공개되어 있다. 국가공무원법, 검찰청법 등으로 정해져 있는 기존 제도에 따르면 그렇다. 어떤 검사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등은 전혀 비밀이 아니다. 다만 범죄자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면 관심 가질 일이 아니므로 언론에 잘 보도되지 않을 뿐이다. 박 위원 발언의 진의가 무엇인지 헤아려보려면 지난해 12월 23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민주당 홍보국은 "이재명 대표 관련 수사 서울중앙지검·수원지검 8개 부(검사 60명)"이라는 제목의 웹자보를 제작해 당원들에게 배포했다. 주임 검사급 이상 16명의 실명과 사진, 그들 각각이 담당하는 이재명 관련 사건의 내용, 그리고 검사의 얼굴 사진 옆에 '尹(윤) 사단'이라는 방패 형태의 부호를 붙여 놓았다. 이런 웹자보를 만든 민주당의 의도는 분명하다. '이재명을 윤석열 사단이 수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함이다. 그래서 검사들 이름과 얼굴, 근무처를 공개하고 그 옆에 '尹 사단'이라는 낙인을 쿵쿵 찍어놓은 것일 테다. 말하자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너 윤석열 사단이지? 그래서 이재명 수사하는 거지? 나 너 얼굴 봤어! 너 어디서 무슨 일 하는지도 알거든? 조심해!" 의도는 잠시 뒤로 하고, 일단 일반 국민 눈높이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망라된 범죄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 실제로 문제의 웹자보에는 공직선거법 위반, 대장동·위례 개발사업, 쌍방울 변호사비 대납, 이 대표 아들의 불법도박, 법인카드 유용, 성남FC 사건 등 이재명 대표와 관련한 범죄 혐의가 총망라되어 있다. 한 사람이 받는 범죄 의혹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다.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가 다룬 콜롬비아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절로 연상케 할 지경이다(그러고 보니 에스코바르 역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남미 범죄 조직의 수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 홍보 영상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민주당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이재명 대표가 이토록 많은 범죄 혐의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는 눈치다. 오히려 수사를 하는 검찰이 잘못되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재명을 수사하는 검사들의 신상을 공개하겠다'는 발상 자체를 떠올릴 수 있겠나. '우리 당 대표가 이렇게 많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수사하는 놈들이 나쁘다.' 정상적인 세계관을 가진 이라면 애초에 떠올리지도 못할 논리 구조다. 아무리 당원 대상이라지만 너무 비상식적이다. 민주당은 심지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필요하면 수사에 참여한 검사 150명의 신상을 전부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앞서 박 위원이 언급한 "법제도 개선"은 이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민주당 홍보국과 극렬 지지층은 '개인 신상 정보'에 대해 정상적 시민과 판이하게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화번호는 어떻게 되는지, 또는 개인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SNS가 무엇인지 등은 그저 평범한 개인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당 홍보국과 극렬 지지층에겐 이 정보 자체가 그들이 적대시하는 상대방의 '약점'이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지난해 12월 27일 전남 무안군에서 열린 당 '국민보고회'에서 이재명 대표 관련 수사를 하는 검찰 간부 이름을 스크린에 내걸고 설명하고 있다. 뉴스1 개인정보를 어떻게 약점으로 볼 수 있을까? 그건 타인의 개인정보를 악용하겠다는 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논리 구조다. 이재명을 추종하는 이른바 '개딸'을 비롯해 극성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개인정보란 '그냥 그렇구나' 하고 흘려보낼 일이 아니라 내 손에 쥔 무기다. 가령 전화번호를 안다면 문자 폭탄을 날리고, 주소가 확보되면 집 앞에서 시위하거나 이상한 우편물을 보내고, 또 정말 고맙게도 개인적으로 쓰는 SNS가 있다면 몰려가 악플을 다는 것은 물론 웹 주소를 공유해 조리돌림을 해버린다.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감히 쉽게 품을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이다. 언제든 타인에게 해코지하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는 자들, 이름 붙여보자면 '악플 깡패'의 세계관을 가진 자들만이 하는 행태다. 혹자는 검사가 하는 일이 당당하다면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는 게 왜 문제냐고 묻는다. 민주당 의원과 당원, 지지자들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변명이다. "야당 파괴와 정적 제거 수사에 누가 나서고 있는지 온 국민이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민주당은 앞으로도 더 검사의 실명과 얼굴을 알리는 일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는 김의겸 민주당 대변인의 말이 그런 관점을 잘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얼굴과 근무지 등이 알려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소리다. 백번 양보해서 그 말이 옳다고 치자. 그렇다면 민주당은 왜 스스로에게는 그런 원칙을 지키지 않을까? 가령 27년간 이재명의 오른팔이자 복심으로 활약해왔다는 정진상 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은 이상하리만치 얼굴을 감춰왔다. 그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지난해 11월 28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에 출석한 다음이다. 그 전까지는 언론은 물론 당내에서조차 그의 연락처나 최근 얼굴, 거주지 등의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비선 실세가 아니라 공식적인 당 직함까지 달고 있었는데 공식 조직도에 사진 한장 붙어 있지 않았다. 괴이하다. 지난해 11월 18일 구속영장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한 정진상 더불어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 당의 고위직을 맡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이 언론에 제대로 공개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뉴스1 수사에 참여하는 일선 평검사보다는 정진상이 훨씬 권력과 가깝고 이런저런 사안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다. 그러니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재명 사건 수사 검사들의 얼굴을 공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려면 민주당은 앞서 이재명의 복심이라 불리는 정진상 얼굴부터 국민에 공개했어야 마땅하다. '이재명 사단' 중에서도 최측근 얼굴은 꽁꽁 감추면서 공무를 수행하는 검사들을 '윤석열 사단'이라 낙인찍어 얼굴 공개로 위협하는 건 그래서 그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 이재명 대표는 성남FC 후원금 의혹과 관련한 검찰의 소환 통보에 한 차례 불응한 후 오늘(10일) 검찰에 출석하겠다고 했다. 진짜 결백하다면 제 할 일 하는 검찰 탓을 하기에 앞서 국민에게 제대로 설명하는 게 우선 아닐까. 노정태 작가
-
왜 日실패 따라하나…의사 늘려도 '문닫는 소아과' 해결 못한다 [이형기가 고발한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전국 수련병원 소아청소년과는 2023년에 201명의 전공의를 모집했는데 33명만 지원했다. 이렇게 낮은 지원율(17%) 추세가 지속한다면 한국에서는 아이가 아파도 데려갈 병원이 없어질지 모른다. 실제로 인천의 상급종합병원인 가천대 길병원은 전공의가 없어 소아의 입원 진료를 2월 말까지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소아청소년과는 물론 산부인과나 외과와 같은 필수 진료과 지원을 기피하는 현상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낮은 수가에다 의료사고라도 나면 의료진 과실이 아니어도 의사를 구속해 망신 주는 걸 이 사회가 당연하게 여긴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의사가 필수 진료과를 선택할까. 가천대 길병원은 전공의 부족으로 소아 환자 입원 중단을 결정했다. [가천대 길병원 홈페이지] 지난해 7월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은 필수 진료과 기피 현상이 초래한 부작용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간호사가 근무 중에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긴급 수술할 의사가 없어 다른 병원으로 이송했고 결국 사망했다. 서울아산병원이 국내에서 가장 환자를 많이 보는 병원이라는 걸 고려할 때 매우 충격적이다. 당시 서울아산병원은 지역응급센터로 지정된 병원인 만큼 ‘응급환자를 24시간 진료할 수 있도록 시설과 인력, 장비를 운영해야 한다’고 명시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거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뇌혈관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데다 어렵게 의사를 구해도 수술을 하면 할수록 병원은 적자를 보는 현행 의료수가 체계에서 무작정 병원을 나무랄 수도 없다. 이럴 때마다 정부는 ‘의대 입학 정원 확대’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이번에도 교육부가 보건복지부에 정원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다. 정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별 인구 대비 의사 수를 근거로 들이댄다. 실제로 2019년 한국의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5 명으로 OECD 평균(3.4명)보다 적다. 문제는 이 통계가 나라별 의사의 근무 조건이나 생산성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순 비교라는 점이다. 인구 대비 의사 수보다 한 명의 의사가 얼마나 많은 지역의 환자를 진료하느냐, 즉 국토 면적 대비 의사 수가 더 중요하다. 10㎢당 의사 수는 한국이 12.1명으로 네덜란드(14.8명)와 이스라엘(13.2명)에 이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다. 또 의사 수와 관계없이 의료접근성은 한국이 가장 뛰어나다. 가령 2019년 한국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횟수는 연 17.2회로 OECD 최고였다. 평균(6.8회)보다 무려 2.5 배나 많다. 뿐만 아니라 한국 대부분의 병원은 당일 진료가 가능한데 이 역시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 이런 마당에 한국에서 의사 수가 모자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백번 양보해 부족하다 해도 정부 주장처럼 의대 정원 확대로 필수 진료과 기피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정부는 의사 수가 늘면 피부과 같은 선호 과 경쟁이 심해져 자연스레 경쟁이 덜한 필수 진료과로 유입되는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공급 확대로는 수요 불균형을 해결할 수 없다. 지난 5년 동안 매년 전체 전공의 지원자 수는 모집 정원을 상회했지만 필수 진료과인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일반외과, 흉부외과는 항상 미달이었다. 이 숫자 하나만 봐도 정부 주장은 틀렸다. 의대 정원 확대는 오히려 다른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의료 특성상 공급자가 많아지면 없던 수요를 창출하게 된다. 정부가 그렇게 염려하는 건강보험 재정의 건전성이 악화한다는 얘기다. 의대와 전공의 교육도 부실해질 게 뻔하다. 결국 폐교한 서남의대의 예처럼 급조된 신설 지방 의대의 열악한 수련 환경은 의사의 질 저하만 가져온다. 의사는 많아졌는데 의료 질이 떨어진다면 그 어떤 환자도 반길 리가 없다. 사실 의사 수 부족보다 더 큰 문제는 의료의 지역 격차다. 지난 2020년 최혜영(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가 서울 종로구, 대구 중구, 부산 서구는 각각 16.3, 14.7, 12.7명인 데 반해 강원 고성군과 양양군은 0.45, 0.47명에 불과했다. 상급종합병원 43개의 절반이 넘는 22개가 수도권에 위치(2020년 기준)한다. 병원이나 의원급 의료기관도 수도권에 밀집돼 있다. 2019년 기준. 『창조적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의 저자인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는 세상은 편평하지 않고 오히려 뾰족(spiky)하다고 지적했다. 뾰족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특정 지역, 즉 도시에 몰려 산다. 특히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과학자와 첨단 기술자는 더욱 그렇다. 우수한 의료 인력도 시설과 장비가 갖춰진 도시에 집중된다. 의료의 지역 편재는 비단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현상이다. 이를 오판해 의사 수 증원과 같은 국소적 대책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이런 주장을 하면 일본 사례로 반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의사 수를 늘려 필수 진료과 기피와 의료의 지역 편재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최근 정책 방향을 수정했다. 일본 정부는 소위 ‘신(新) 의사확보 종합대책’에 따라 2008~2017년까지 의대 정원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지역정원제도를 둬서 의사 면허 취득 후 9년은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는 조건을 걸었다. 그 결과 2019년 일본의 의대 입학 정원은 9420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필수 진료과 기피는 해소되지 않았다. 지역정원제도 역시 의료 격오지에서 근무하는 지역 의사 양성이라는 취지가 무색하게 면허 취득 후 의료 취약지가 아닌 곳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경제재정운영 및 개혁 기본방침(2018)’을 통해 의대 정원을 다시 줄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무슨 일이든 몇 년 차로 늘 일본을 닮아가는 한국이 이것마저 또 따라 하려 하는데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코로나 19 팬데믹 초기에 사상 초유의 전공의 파업을 촉발했던 공공의대 설립은 더더욱 대안이 아니다. 자칫 지역 토호의 현대판 음서제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공정성 이슈를 차치하고라도 의료 질 저하를 막을 방법이 없어서다. 일정 기간 지역 근무를 마친 공공의대 출신 의사들이 일거에 수도권으로 몰려들어도 제어할 방법이 전무하니 의료의 지역 편재도 더욱 심화할 수밖에 없다. 지난 2020년 8월 전국의사 2차 총파업 와중에 서울대병원 출입문 앞에서 전공의들이 의대정원 확대 등 정부의 의료정책을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뉴스1 그렇다면 대안이 뭘까.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묘책이 없다는 게 진짜 문제다. 이해당사자가 조금씩 양보하고 자기 몫을 부담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정부는 필수 의료, 그리고 취약 지역의 의료 수가를 현실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불요불급한 의료 서비스에 섣달 그믐날 개밥 퍼주듯 보험 급여를 했던 선심 정책은 당연히 거둬들여야 한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싼 게 비지떡인데 돈은 조금 내고 양질의 서비스를 요구한다면 그건 도둑 심보다. 건강권이 천부의 권리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의료진이 국민에 무슨 큰 빚이라도 것처럼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면 안 된다. 종합병원도 돈은 안 되지만 꼭 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시설과 인력, 시스템을 갖추는 데 인색하게 굴면 안 된다. 십수 년이 걸리는 의사 양성에 눈곱만큼도 공헌한 게 없으면서 걸핏하면 "의사는 공공재"라며 자기 맘대로 부릴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시민단체도 자기 몫을 부담하길 바란다. 어쩌다 문제라도 생기면 의사를 포토 라인에 세우는 일에만 열정을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부자를 가난하게 만든다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없듯이 의사를 겁주고 명예를 훼손한다고 환자 병이 낫는 게 아니다. 우린 이런 상식적인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 모두 이젠 꼭 생각해봐야 한다. 이형기 서울대학교병원 임상약리학과 교수
-
"선생님, 아빠 마지막 생파 오세요" 평생 못잊을 이 가족 이별 [김은혜의 살아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환자를 진료하면서 가장 마음이 힘든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을 받으면 보통 이렇게 대답한다. “걸어서 퇴원하셨던 분이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셨을 때요. ” 이 환자도 그랬다. 그는 아내가 끄는 휠체어를 탄 채 병원에 들어왔다. 암 진단 초기부터 함께해와 몇 년간 지켜봤는데 본인 혼자 힘으로 걷지 못하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한쪽 손을 부여잡으며 앉아있는 모습이 몇 달 전 손을 흔들며 병원 밖을 걸어나가던 모습과 겹쳐졌다. 언젠가 올 순간이라는 걸 알았지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유독 더 충격이 컸던 건 두 부부가 이제 겨우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아내 뒤를 보니, 어린 세 소녀가 있었다. 환자로부터 자주 이야기를 들었던 부부의 세 딸이었다. 수년 간 부부와 연을 이어오다 보니 아이들의 초등학교 입학, 글짓기 대회 입상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들이 처음으로 만든 카네이션까지 직접 봤던 터라 처음 봤는데도 참 반가웠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반가움은 금세 슬픔이 됐다. 아빠 병세를 아는지 모르는지 막내는 병원 냄새가 무섭다며 훌쩍거렸고, 둘째는 병원 지하에서 뽑아 온 헬륨 풍선을 손에 꼭 쥔 채 “여기 왜 온 거야?”라고 엄마에게 계속 물었다. 그나마 첫째가 “엄마! 아빠 휠체어 내가 밀까?”라며 엄마 손 위에 본인의 작은 손을 포개고 있었다. 문득 환자가 손 흔들며 퇴원하던 날 둘째의 운동회에 참석하러 간다던 말이 떠올라 “운동회는 잘 다녀오셨어요?”라고 물었다. 그제야 얼굴을 들어 나와 눈을 마주친 환자는 해사하게 웃으며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그 웃음을 보자 ‘맞아. 원랜 이 분은 원래 이렇게 웃던 분이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 그간의 사정을 물었다. “말기 판정을 받았어요. 마지막으로 항암 치료를 받긴 하는데 대학병원 교수님이 큰 기대 하지 말고 주변을 정리하라고 해서 연명 치료 중단 동의서도 쓰고 왔어요.” 말기란 더 이상 시도해 볼 수 있는 표준치료가 없어 보통 6개월에서 1년 남짓 남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항암 치료가 시작됐다. 그러나 생각보다 더 쉽지 않았다. 보통 체력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항암 치료를 허약해진 몸으로 버텨내는 건 무리였다. 좋지 않은 상황이 자주 나타나서 한 달에 한 번 맞아야 하는 항암제가 며칠씩 지연되었다. 들어가는 주사가 하나둘씩 늘고, 진통제 양이 점점 많아지는 중에도 환자는 스스로 주변을 정리해야만 했고 아내는 또 그런 고통스런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감히 그 누구도 가늠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부부는 병실을 찾을 때마다 항상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밖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낮에는 세 딸의 웃음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왔고, 밤에는 부부가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르웨이 작가 아돌프 티데만의 'A Boy Bring Home a Sick Lamb'. 그렇게 석 달을 아내는 매일같이 남편의 옆을 지키며 몸을 닦아주었다.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도 아내는 의연하게 버텼다. 큰 기대 없이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몸을 본인 의지대로 움직여질 수도 없게 됐지만 환자 또한 의연하게 버텨냈다.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걸까. 우연히 아내가 딸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 후 그 궁금증이 풀렸다. “설령 아빠가 우리를 먼저 떠난다 해도 그게 우리를 버렸다거나 포기했다는 건 절대 아니야. 너희가 보듯이 아빠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 식구 5명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오래 지키려고 버티고 있어. 그러니 우리도 아빠가 같이 있는 시간 동안 힘이 되어 주자. ” 언젠가부터 막내도 둘째도 누워만 있는 아빠 앞에서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대신 때때로 "아빠, 힘내"라고 말하며 손에 뽀뽀를 쪽 하고 부끄러운 듯 도망가는 귀여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처음부터 의젓했던 첫째는 엄마가 아빠 몸을 닦을 때면 물을 떠 날랐고 엄마가 쉴 때는 다리를 통통 두드려 주었다. 길지 않은 시간에 너무나 의젓해진 딸들이 기특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자는 환자를 깨워 이런저런 상태를 확인한 뒤 병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평소 가운 입은 나를 무서워하던 막내가 같이 따라 나왔다. “선생님 힘드셔. 괴롭히지 마!”라고 엄마가 딸을 말렸지만 나는 막내 손을 잡고 나와 스테이션에 같이 앉았다. 몇 분 뒤 첫째도 나왔다. 뭔가 말하려다 쭈뼛하게 입을 못 여는 막내를 병실로 돌려보내고는 첫째가 그 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작은 아이들이 나를 붙잡는 걸까. 지금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기에 괜히 긴장되었다. 첫째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주말에 막냇동생 생일 파티하는데… 와 주실 수 있어요? ”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당직이 아니라 편한 마음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이번이 아빠랑 같이하는 마지막 생일 파티가 될 거 같아서요. 막내가 선생님 좋아하니깐….” 생일파티는 생각보다 성대했다. 지방에 사는 환자 어머니는 오랜만에 고향 음식을 배불리 먹자며 한 보따리를 챙겨왔다. 막내는 유명 할리우드 영화 캐릭터의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불렀다. 그 재롱에 온 식구가 활짝 웃었다. 특히 누구보다 환자가 딸의 기운을 듬뿍 받았다. 그는 몇 번이고 "오늘은 오래 앉아 있어도 안 아프다""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하니 참 좋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북받쳐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그의 해사한 웃음을 보고 있자니 감동스러운 한편 먹먹하기도 했다. 그날 오후 그 환자는 체력 문제로 며칠간 지연되고 있던 항암 치료를 다시 받았다. 딸과의 마지막 생일 파티를 함께 보내고, 마지막 항암 치료를 받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덤덤하게 남편을 잘 보내주었다. 본인이 꿋꿋이 거둬야 하는 세 딸을 생각하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견뎌냈으리라 생각한다. 장례식장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이후로 그 가족을 다시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난 이 가족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딸들이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도록 끝까지 버텼던 환자, 그 옆에서 희생을 감수하며 본인 마음을 혼자 추스르던 아내, 그리고 엄마 아빠의 노력에 잘 따라온 딸들. 어찌 보면 평범한 장면이지만 내겐 그 어떤 장엄한 영화보다 감동적으로 각인되었다. 임종을 앞두고 가족이 와해가 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기에, 이렇게 온 가족이 합심하여 이별을 천천히 준비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남겨진 아내와 딸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만큼, 그 환자가 하늘에서만큼은 편히 쉬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어도 우리 모두 서로 웃으면서 끌어안을 수 있기를 바란다. 김은혜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
-
"누가 오나요?"는 오해...무연고 사망 장례식, 붐비는 이유 [김민석의 살아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고인의 이름 앞에 ‘무연고 사망자’라는 수식이 붙는 순간 사람들은 그의 삶이 외롭고 쓸쓸했다고 오해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수식이 내포하는 뜻이 ‘아무런 연고가 없음’이니까. 이 단어는 매우 직관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고인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그를 대표하게 된다. 개인의 역사를 지우고, 혼자로 만들어버린다. ‘서울시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를 통해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지원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그렇게 고인들을 오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해는 질문을 부른다.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러봤자 누가 오는데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무연고 사망자’의 정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연고 사망자’는 크게 세 가지로 정의된다. 1. 연고자가 없거나, 2. 연고자를 알 수 없거나, 3.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경우다. 앞선 두 가지, 즉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사법)에 명시되어 있는 법조문이고,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경우는 보건복지부 지침에 명시되어 있는 정의다. 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은 보건복지부 지침인 세 번째 경우에 의아함을 느낀다. ‘무연고 사망자인데 가족이 있다고?’ 그렇다. 가족이 있어도 ‘무연고 사망자’가 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경우가 전체 무연고 사망의 7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세상에 혼자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와 연결된 채였고, 설령 그 연결이 끊어지더라도 필연적으로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연고 사망자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겐 혈연이 있었고, 살아가면서 맺은 혈연 외의 인연도 있었다. 무연고라는 꼬리표와 달리 연고가 있는 셈이다. 폴란드 작가 유제프 리슈키에비치의 'Death of Vivandiere'. 무연고 사망자 빈소를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시신을 위임한 가족도 많다. 장례식이 끝나고 빈소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이 직접 장례를 치르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된다. 재작년에 만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제 나이가 벌써 칠십입니다. 은퇴한 지도 꽤 됐고 지금은 생활이 어려워서 기초생활수급비를 받고 있어요. 동생이 죽었다고 했을 때 장례식장을 찾아갔더니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당장 비용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위임하게 됐습니다.” 그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사람 노릇을 못 했다며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무연고 사망자 대부분은 빈곤하고, 그건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2015년 한국소비자원이 조사한 평균 장례 비용은 1380만 원에 달한다. 웬만한 형편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물론 조의금으로 장례비용을 메우기도 하고, 그럴 자신이 없다면 빈소 사용료나 음식 등 여러 가지를 생략해 최대한 부담을 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줄여도 장례는 최소 백만 원 단위의 목돈이 들어간다. 결국 무연고 사망자의 시신처리위임서에 가장 많이 적히는 위임 사유는 ‘경제적 어려움’이다. 빈부 격차가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 따라붙는 셈이다. 가족처럼 살았지만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도 장례에 참여한다. 장사법이 이야기하는 가족의 범위는 매우 협소해서 사촌지간은 서로의 장례를 바로 치를 수 없다. 사위나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상식선의 가족도 이러한데, 혈연을 벗어난 이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무연고 사망자의 사실혼 배우자와 친구 등이 돈과 의사가 있음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보건복지부가 지침을 바꾼 덕분에 이들이 장례를 치를 방법이 생겼지만,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까운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고인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도 기꺼이 그를 애도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의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는 일종의 시민장이다. 애도하길 원하는 이들은 누구나 빈소에 조문올 수 있다. 바쁜 삶을 사는 와중에 시간을 내어 찾아오는 시민을 볼 때마다 뭉클함을 느낀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죽음 이후에도 단단한 결속을 지닌 공동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설령 당신이 혼자 세상을 떠나더라도 시민이 곁에 함께 할 것이라는 인기척인 셈이다. 이들의 존재는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이유가 된다. 실제로 서울시립승화원에 마련된 공영장례 빈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많은 사별자와 시민들이 고인의 위패 앞에서 눈물짓고 애도한다. 그때마다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치러봤자 누가 오는데요?”라는 처음의 질문을 떠올린다. 나는 뒤늦게나마 속으로 대답한다. ‘무척 많아요. 무연고 사망자는 외딴 무인도에 살던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와 함께 살았던 시민인걸요.’ 사별자들에게 애도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고, 많은 시민이 고인의 곁을 지킨다면 무연고 사망자라는 개념 자체를 없앨 수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동안 보아왔던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내게 가르쳐 준 믿음이다. 김민석 나눔과나눔 팀장
-
스타 이승기·츄도 당했다…K엔터 후진적 행태 더 무서운 이유 [임명묵이 고발한다]
소속사의 불투명한 정산 문제로 갈등을 빚은 이승기(왼쪽)와 걸그룹 이달의소녀의 츄. 그래픽=신재민 기자 요새 내가 가장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K-팝이다. 단순한 분석을 넘어 K-팝이 이루고 있는 문화 생태계 자체의 매력에 푹 빠져 살고 있다. 특히 주요 걸그룹의 신곡은 나오자마자, 아니 그 이전에 언제 공개된다는 공지가 뜨자마자 친구들과 빠르게 공유하고 관련 주제로 계속 토론을 한다. 이전에는 눈길도 안 주던 연예 뉴스도 자연스레 자주 챙겨본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고백하자면 과거의 나는 K-팝 팬덤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기는커녕 사회적 아노미 현상의 일종으로 보았다. 자극적으로 나오는 관련 뉴스도, 그 기사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안 되었다. K-팝에 ‘귀의’한 지금은 정반대다. 이제는 내가 연예 뉴스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고, 이젠 내 주변 사람들이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는 중이다. 그래서 연말 연예계를 달군 가수 이승기와 걸그룹 이달의 소녀 멤버 츄의 정산 이슈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승기 사례부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의 소속사인 후크엔터테인먼트(이하 후크)가 누가 봐도 톱의 위치인 그를 "마이너스 가수"로 지칭하면서 정산해줄 게 없다고 주장해 무려 18년 동안이나 그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났다. 미지급된 정산금은 후크 셈법으로도 수십억에 이르렀다. 여론이 악화하고 경영진의 횡령 의혹까지 불거지자 후크 측은 부랴부랴 정산금을 지급했지만, 이승기 측은 애초 돈이 문제가 아닌 만큼 이 돈은 전액 기부하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가수 이승기씨(왼쪽)와 그가 소속했던 연예기획사 후크엔터테인먼트의 권진영 대표(오른쪽). 가운데는 가수 이선희씨. 중앙포토 이달의 소녀츄를 둘러싼 논란은 조금 더 복잡하다. 소속사였던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이하 블록베리)는츄가 이달의 소녀 활동을 하며 소속사 직원들에게 한 ‘갑질과 폭언’을 사유로 츄를 퇴출했다. 아이돌 멤버가 소속사와 이런저런 갈등 끝에 나가는 경우조차 표면적으로는 쌍방간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온 게 지금까지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속사가 일방적으로 ‘퇴출’을 통보하는 건 워낙 이례적이라 비단 이달의 소녀 팬이 아니라도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츄의 퇴출은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오래된 갈등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었다. 양측의 폭로전이 시작되면서 이달의 소녀 계약 구조에 원천적인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났다. 수익은 회사와 아티스트(가수)가 7:3으로 나누는데, 비용은 5:5로 나누는 구조였다. 이달의 소녀가 음반·음원 판매나 광고 수익 등 꽤 좋은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멤버들이 활동해온 만큼 정산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얘기다. 문제가 불거지자 회사 측은 이달의 소녀 데뷔를 위한 프로젝트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을 감안해 멤버들이 모두 동의한 사안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달의 소녀를 응원하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걸그룹이 인기를 얻어 수년간 아무리 열심히 활동해도 정산받기 어려운 구조라는 걸 과연 처음에 알고 사인을 했을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멤버들보다 예능 등 개인 활동을 더 많이 하면서 높은 인기를 얻은 츄가 처음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끝에 결국 전속 계약 해지 소송에서 승소했고 곧바로 퇴출당했다. 이러니 츄의 갑질과 폭언이 퇴출 사유라는 소속사 주장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는 것이다. 그리고 츄의 퇴출 후 나머지 멤버 11명의 계약과 정산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걸그룹 '이달의 소녀' 멤버였던 츄가 최근 SNS에 자신의 심경을 밝힌 게시물. 중앙포토 거의 시차 없이 불거진 두 아티스트의 정산 문제는 우위를 점한 소속사의 불투명한 회계 처리로 아티스트가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K-팝은 이제 늦어도 20살 전후면 데뷔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10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에 수년에 걸친 연습생 생활을 거치다 보니 연습생 본인이나 부모 모두 당장 데뷔가 급하다. 계약을 충분히 검토할 심리적 여유나 지식 없이 불공정한 계약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아,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많은 사람들은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다’라는 오랜 금언을 꺼낼지 모른다. 실제로 문제는 일단락되어가고 있고, 두 아티스트 모두 뛰어난 매력이 있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인기를 구가하며 지금까지 못 번 돈을 단숨에 벌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설령 그렇다 해서 그동안 받은 부당한 처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건이 일반 대중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간 것은 이들이 힘없는 무명이 아니라 대중적으로 상당한 인지도를 확보한 성공한 연예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빠르게 우호적 여론을 만들고, 소송을 결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 정도의 힘을 지니지 못한 아티스트는 공정하지 못한 계약 탓에 부당한 처우를 당해도 소속사와 마찰을 빚으며 제대로 된 권리를 요구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고 주어진 시간은 짧은 연예계에서 소속사와의 갈등은 자칫 연예계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2017년 3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연예기획사의 불공정 계약 관행을 개선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브리핑 장면. KTV 영상 캡처 소속사의 부조리한 행태, 그로 인한 아티스트의 갈등은 사실 익숙한 이야기다. 지난 2001년 MBC가 연예계 부조리를 폭로하면서 이른바 ‘노예계약’이라는 봉건적 관행 등이 문제로 제기되었고, 이후에도 잊을 만하면 새로운 갈등이 불거져 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조금씩 발전과 개선이 이뤄졌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 수준이 올라간 데다 특히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대형화하고 글로벌화한 게 큰 역할을 했다. 이번 이슈에서도 여론이 아티스트에 우호적으로 형성된 것 역시 우리 사회가 공정과 보상에 있어 높은 기준을 지니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본다. 이번 사건을 통해 알게 됐듯이 여전히 미흡한 게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이 연예계에 아직 남아 있는 불공정한 관행을 혁파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마침 국회에서도 소속사가 아티스트에 회계 내역을 의무적으로 공개하여 투명성을 제고하는 대중문화예술산업 발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달의 소녀의 경우도 ‘비용을 5:5로 한다'는 연예계 전반의 표준에서 상당히 벗어난 계약 내용 자체도 문제였지만, 과연 회사 측의 비용 지출 내역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도 관건이다. 이 부분을 신뢰할 수 없으니 츄도 전속 계약 해지 소송이라는 초강수를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흔히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나은 이유로 급여도 급여지만 ‘절차’와 ‘투명성’이 낫다는 이야기가 많다. 당연하게도 대기업이라고 절차를 다 지키는 것도 아니고 중소기업이라고 절차를 다 뭉게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저런 인식은 납득할 수 있는 기준과 절차, 투명한 정보 공개를 많은 이들이 갈망한다는 것만큼은 드러낸다. K-팝을 비롯한 연예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한국 문화가 세계적이 되었으니 그에 맞는 규범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니다. 세계적이 됐든 아니든 많은 사람이 납득할 수 있게 합리적 절차와 투명성을 갖추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다른 사회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자체적인 정화 노력 이외에 대중의 감시가 꼭 필요하다. 임명묵 작가
-
그는 떠났지만 딸 살아내게 했다...10년 암 아빠 '기적의 월드컵' [김은혜의 살아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말한다. 퇴근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모금, 추운 겨울 전기장판으로 데워진 뜨뜻한 이불 속, 갓 세탁한 옷에서 풍겨 나오는 산뜻한 냄새 등이 모두 소확행을 느끼게 해주는 것들이다. 나는 아직 미혼이지만 옆에서 다양한 가족을 지켜본 경험으로 감히 말하자면 부모가 되면 소확행의 범위가 훨씬 더 넓어지는 것 같다. 가령 아이가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는 소확행을 느낀다. 아이는 설령 그 장면을 금세 잊을지 몰라도 부모는 그런 작은 순간순간의 행복을 쌓은 덕에 오늘을 살아내는 힘을 얻는다. 이 환자도 그런 사람이었다. 레지던트(전공의) 1년 차였던 몇 년 전 3월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업무, 그리고 때로 감당이 어려운 중환자로 인해 허덕이던 나에게 어떤 환자가 말했다. “○○○ 교수가 인턴 때부터 이 병원에 다녔던 사람인데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다 지나가니까 잘 버텨봐요.” 암의 완전관해(검사상 잔존 암이 사라져 암을 확인하지 못하는 상태) 진단을 두 번이나 받는 등 암 투병만 10년 가까이 해온 환자였다. 그 두 번 사이의 재발 기간을 포함해 할 수 있는 암 치료는 모두 다 받았다. 다행히 마지막 선택지였던 치료제가 기적적으로 그의 암을 없애준 매우 드문 경우였다. 나에게 이 위로의 말을 건넸을 때가 두 번째의 완전관해 진단 후 약 1년이 지난 시기였다. 길고 힘든 암 투병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워낙 서글서글했던 터라 그 환자가 드물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면 병동 스테이션에 있는 의료진 누구나 먼저 나서서 부탁을 들어주려고 애를 썼다. 의료진 입장에선 등장만으로도 병원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였고, 같은 병실을 쓰는 암 환자들에게는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어느 날 그 환자가 나에게 물었다. “나 한 달 동안 외국에 갔다 올 수 있을까?” 곧 월드컵 시즌이었는데 마침 축구 좋아하는 딸의 방학과 본인의 완전관해 시기가 겹쳤기에 딸과 함께 월드컵을 직관하고 싶다는 거였다. 이미 한 번의 재발을 경험했고, 희망과 절망의 반복을 수년간 겪었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건네는 희망 섞인 질문이었다. 유사시 응급 대처할 수 있는 의료 체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무려 한 달을 어린 딸과 단둘이서 보내는 것을 선뜻 허락하기는 누구나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 시기에는 경과 관찰과 주기적인 검사만 하는지라 결국 의대 병원의 허락까지 받은 후 월드컵을 보러 떠났다. 퇴원하는 날 딸이 축구 경기 하는 동영상을 보여주며 웃음 짓는 그를 보며 난 부녀의 첫 여정이 평생 회자될 행복이 되리라 생각했다. 미국 작가 윌리엄 베르플랭크 버니의 'A Break from Child's Play'. 한 달 뒤 그 환자는 한층 더 밝은 기운을 품은 채 병원에 돌아왔다. 딸이 좋아한 것은 물론이요 본인 역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왔다면서 현지에서 방방 뛰며 응원하는 딸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대화를 이어가던 중 흘러나온 한 문장에서 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많이 걸어서 그런지 돌아올 즈음부터 왼쪽 골반이 저릿저릿하더라고.” 이 말을 듣자마자 다른 의료진에게 빠르게 연락을 돌렸다. 증세 호전이 없어 찍은 CT에서 결국 골반에서의 암 재발을 확인했다. 영상의학과에 거듭 부탁해 몇 번을 꼼꼼히 확인한 끝에 겨우 발견했을 만큼 아주 작은 암이었다. 아무리 작아도 암은 암이다. 소식을 듣고 급하게 찾아온 그의 아내가 "월드컵을 괜히 다녀왔나"라는 후회 섞인 말을 했다. 하지만 정작 환자는 “여보, 딸래미 얼굴을 보고도 괜히 갔다 왔다는 말이 나와? 밥도 잘 안 먹던 애가 월드컵 가서 그렇게 많이 먹었다니까. 그리고 그 덕에 이 작은 암을 오히려 빨리 찾은 거일 수도 있잖아요.” 지금 이 환자가 받을 수 있는 항암 약물치료는 이전에 기적을 선사했던 그 마지막 선택지뿐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감당해내던 환자는 "아빠랑 같이 월드컵 보니까 너무 좋다!"고 말하던 딸의 얼굴을 떠올리며 버틴다고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결국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이별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결국 죽음으로 귀결됐다고 해서 모든 게 같은 건 아니다. 오랜 기간 힘든 투병 생활을 버티는 데는 딸과의 지난 추억이 큰 힘이 되었다. 비단 암 투병 같은 극한 상황에 몰린 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부모에게는 자식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여실히 느꼈다. 인터넷과 SNS 등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방법이 넘쳐나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부정적 감정만 쏟아내는 시대라는 생각이 가끔씩 든다. 소통하는 도구는 늘었는데 타인과 타인 사이는 물론 가족 내에서도 단절이 일어나기도 한다. 함께 나누는 작은 순간의 행복이 발휘하는 힘을 생각한다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큰 노력 없이도 당장 누구와도 나눌 수 있는 게 행복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당장 내가 그 순간을 만들 수 있다.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
-
병원 대기실서 하하호호…무례하다 쏘아붙인 '아줌마 수다' 반전 [김범석의 살아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종종걸음으로 아침 외래에 가는 도중이었다. 임상시험 센터 옆 대기실을 지나는데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보니 한 무리의 중년 아주머니들이 떡과 과일 등 각종 먹을거리를 가져와서 판을 벌였다.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신나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수다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병원에서 저게 뭐하는 짓이람…, 엄연히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아픈 사람들 진료받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저렇게 자기들끼리 모여서 간식 먹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들다니.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참 무례하다고 느꼈다. 한마디 하려다가 시간도 없고 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 속에서 내 환자를 발견했다. 어이쿠야, 저 아주머니 내 환자분인데. 어휴…. 내 환자는 열심히 귤을 까서 옆의 아주머니들에게 나누어 주며 수다 떨고 있었다. 귤을 받은 아주머니는 또 옆의 아주머니에게 떡을 나누어 주고, 그렇게 맛있게 간식을 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외래에 와서 진료하다가 아까 보았던 그 환자 순서가 되었다. 다행히 환자의 치료 경과는 무척 좋았고 특별한 문제도 없어서 기존에 해오던 신약 항암 치료를 처방했다. 진료를 끝내며 조금 전의 일이 떠올라서 환자분께 한마디 쏘아붙였다. "아까 떡이랑 귤 맛있었나요?" 환자는 얼굴이 빨개지며 미안하다고 했다. 다른 환자들도 있으니 병원 대기 공간에서는 조금 조용히 해달라고 말씀드렸더니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연을 이야기해주었다. 항암 치료를 하면서 2주에 한 번 오는 일정이 비슷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게 되어 안면을 트고 지내는 환자들이 생겼다고 한다. 투병생활이 길어지면 남편이랑 애들이 있어도 어느 순간부터는 같이 와주지 않는다. 매번 같이 가자고 하기도 미안해져서 점차 혼자 오게 되는데, 어떤 때에는 가족보다도 동료 암 환자가 서로의 고충을 더 잘 이해해준다고 한다. 그렇게 동병상련하며 혼자 오는 암 환자들끼리 서로 알고 지내며 친해지며 언니 동생 하며 자연스럽게 모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알고 보니 간식을 먹는 데에도 사연이 있었다. 피검사 때문에 전날 밤부터 쫄쫄 굶고 와서 아침 식사도 못 한 채 피검사 하고 결과 나올 때까지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병원에 사 먹을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한다. 집에서 주섬주섬 싸 온 음식을 혼자 먹으면 맛이 없는데, 함께 나누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모임에 좋은 면만 있지는 않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한명 두명 모임에 못 나오는 사람이 생긴다. 늘 나오던 사람이 안 나오면 ‘아…, 그분 안 좋으신가 보다. 그분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라고 하며 숙연해진다고 한다. 죽을 때 순서 없다는데 다음은 누구 차례가 될지 걱정이 된다고 한다. 동료 중에 누가 호스피스로 갔다는 소식이 들리면 다들 마음속으로 기도한다고 한다. 아프지 말고 편안히 가라고. 이번 생에 고생 많았다고. 하늘나라 가면 더 이상 아프지 말라고. 나중에 나도 따라갈 테니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2주 뒤에 다시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고 한다. 죽지 않고 살아서 와주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고맙다고 한다. 그렇게 반갑고 고마운데 귤이라도 하나 까서 줘야지…, 떡이라도 하나 줘야지…, 그렇게 모여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헤어지면서도 다음 달에도 또 만나자고 약속을 하면서 헤어진다고 한다. 또 만나자는 말의 뜻은 꼭 살아있으라는 서로 간의 당부였다. 벨기에 작가 테오도어 롬부츠(1597~1637)의 '탁자에서 카드놀이하는 여자와 남자'(1620). 그 모임에서 자기가 가장 오래 산 사람이어서 다들 자기를 보며 언니 언니 하며 따르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항암 치료 받으며 멀쩡하게 오래 잘 살 수 있느냐고 비결을 묻는단다. 내가 안 아프고 오래 살아야 다른 암 환자들에게 희망이 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어느덧 왕고참이 되어있어 나를 의지하며 따르는 후배 암 환자들이 생겼는데 내가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잘 먹으라며 떡이라도 하나 챙겨주는 일밖에 없다고 한다. 평생 솥뚜껑 운전만 해서 할 줄 아는 일은 먹을 거 챙겨와서 잘 먹이는 일이라고. 지금도 항암 치료 받으면서도 남편과 아이들, 시댁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하는데 나는 팔자가 먹을 거 해와서 남들 배곯지 않게 하는 팔자인 것 같다고. 그래도 이렇게라도 계속 살아 있고 솥뚜껑 운전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환자분은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집에서 음식을 해와서 서로 나누어 먹고 수다 떠는 일은 애정을 표현하는 그녀들만의 방식이었다. 서로를 위하는 그녀들만의 방식이었다. 그녀들의 사연을 알고 나니 조금 전에 들렸던 아주머니들의 고성방가가 소음이 아니라 살아있음에 기뻐하는 소리로 들렸다. 암에 걸려서도 가족들 뒷바라지해야만 하는 그녀들의 고된 삶을 위로하는 소리로 들렸다. 혼자 와서 씩씩하게 치료받고 가는 그녀들이 서로를 응원하는 소리로 들렸다. 무례한 사람은 누구인가? 결국 무례한 사람은 나였다.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제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한 내가 무례했다. 예의도 없었지만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 더 문제였다. 모든 문제는 나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면서 바랬다. 떠들어도 좋으니 다음에 또 모이기를, 또 모여서 즐겁게 음식을 나누어 먹기를, 그녀들이 계속 살아내기를…. 김범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
[반론보도]해고노동자 김용희씨 관련
본 신문은 8월 2일 및 9일 3일자 오피니언면 '김경율이 고발한다' '김경율의 댓글 읽어드립니다' 코너에서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씨가 여성 직원을 성추행하여 해고됐고, 지난 2020년 고공농성 과정에서 다른 해고노동자의 보상금을 독식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용희 씨는 "여직원을 성추행하지 않았고, 관련하여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실도 전혀 없다" "삼성의 보상금을 부당해고 기간 동안의 임금 일부 및 정신적 위자료이며, 다른 해고노동자의 보상금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MZ, 또 정치권 '호구' 될 건가…86세대 본받아라, 뻔뻔해져라 [강덕구가 고발한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왼쪽)·이재명 후보가 MZ세대에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만든 홍보 영상의 한 장면. 그래픽=신재민 기자 한 번 당한 사람이 계속 당하면, 호구(虎口)라고 부른다. 이 시대 호구는 MZ세대다. 여당인 국민의힘에서 2024년 총선에 대비한 MZ세대 차출론이 나오고 있다.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MZ세대, 미래 세대의 새로운 물결에 공감하는 그런 지도부가 탄생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준석 전 대표의 몰락을 본 이라면, 여당의 MZ 구애가 ’보여 주기용 쇼‘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지난해 돌풍을 일으키며 당 대표가 된 이준석 전 대표는 유튜브 채널 가세연이 제기한 성 접대 의혹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대표를 보고,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던 소위 이대남은 이제 윤석열 대통령을 제일 혐오하는 집단이 되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다르지 않다.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에 의해 발탁된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대선 후 도와주는 의원이 아무도 없어 당 대표 출마 선언을 국회 앞에서 했다. 이동형과 김용민 등 친이재명 스피커는 박지현을 향해 날 선 말을 뱉었다. 어느 시기부터 신세대라는 호칭으로 젊은 정치인을 발탁해 얼굴마담을 맡긴 후, 필요성이 떨어지면 내다 버리는 모습이 관행처럼 고착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MZ세대를 발탁해 환심을 얻겠다는 여당의 의도는 미심쩍을 수밖에 없다. 지난 7월 국회 담장 앞에서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선거 출마 선언을 하는 박지현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현역 의원이 회견 장소 사용을 도와주지 않아 국회 밖에서 해야 했다. 뉴시스 물론 새삼스러울 건 없다. 한국 정치에서는 중요한 길목마다 세대론이 호출됐다. 세대론이 작동해온 방식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86세대처럼 청년 정치 주역으로 평가받는 경우다. 두 번째는 88만원 세대처럼 가난하고 무력한 이미지로 규정되는 경우다. 386이란 명명은 1999년 조선일보 기획에서 시작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운동권 세력을 한국 사회를 움직일 주력으로 꼽았다. 재야인사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으로 여야 교체를 이룬 후 386세대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비록 386세대는 기성세대인 조선일보에 의해 명명됐지만, 한국 사회의 주류를 교체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88만원 세대는 불쌍하고 무력한 이미지인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로 호명 당했다. 86세대처럼 군부독재에 저항한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88만원 세대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실험용 쥐처럼 간주되었다. 그래서인지 ‘저항’은 일종의 스펙이 되었다. 중산층 출신 대학생들이 자퇴선언을 하고, 대자보를 붙였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란, 다니는 대학을 자퇴하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자퇴 선언만큼 우스운 일이 없다. 그런데도 언론은 가까운 지인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거대한 저항인 것처럼 실어 날랐다. 88만원 세대의 정치는 86세대의 그것처럼 사회 전반의 기조를 바꾸는 데 이르지 못했다. 2013년 대학생 연쇄 자퇴 선언의 효시가 된 당시 고려대 3학년 김예슬씨가 붙인 대자보. 중앙포토 그렇다면 MZ세대론은 어떨까. 88만원 세대에 가깝다. 박지현·이준석 같은 청년 정치인이 MZ세대를 대변하며 등장했지만, 결국 장기판의 졸로 전락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 이 전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발탁한 소위 박근혜 키드였다. 이 전 대표의 정치란 여의도 정치 바깥을 나가지 못했다. 기층에 있는 시민의 삶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대신 바른미래당에서 손학규 전 대표, 안철수 전 대표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TV 프로그램 패널로 여의도 정치의 현안을 분석했다. N번방 사건을 공론화한 '불꽃페미단’으로 명성을 얻었던 박 전 비대위원장도 이 전 대표의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반복되는 청년 정치인의 운명을 목격한 탓일까? 이 전 대표는 얼마 전 “MZ세대는 없다”고 말했다. MZ세대의 등에 올라타 열풍을 일으킨 그였기에, 이 발언은 의아하게 들렸다. 세대포위론이라는 전략을 구상했던 그답지도 않았다. 자신에 들러붙은 청년 정치인 이미지를 지우려고 했을 수 있다. 박근혜부터 윤석열까지, 자신이 손잡았던 정치인과 결별하는 과정에서 온 염증 탓일 수도 있다. 아니면 MZ세대라는 단어에서 피로함을 느끼는 청년 세대의 심경을 반영하는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의도가 무엇이든 세대론 자체를 부정하기란 힘들다고 본다. MZ세대를 부정한다고 그 세대가 사라질 리 없기 때문이다. 세대론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86세대는 정치적 경험을 공유하면서 결집했다. X세대는 90년대의 유례 없는 호황을 경험하며 본격적으로 해외 문화를 향유했다. MZ세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대표 발언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견 타당해 보인다. MZ세대는 공유할 정치적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젠더 이슈와 관련해 극단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그렇다고 단일한 문화 소비 경험을 갖는 것도 아니다. X세대는 오랫동안 폐쇄됐던 문화를 외부로 개방한 시대를 살았다. 반면 MZ세대는 전 세계의 문화를 동시에 경험한다. 단일한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MZ세대는 정치적 경험을 공유하지도 못했고, 단일한 문화를 경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게 MZ세대론을 부정할 근거는 아니다. 한국 정치는 계급이나 인종이 변수로 작동하기 힘들다. 이는 청년 정치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청년 정치는 특정 계급이나 특정 인종 같은 특정 집단에 기반을 둘 수 없다. 어린 나이에 정치에 참여하는 서구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의 청년 정치인은 자생 없이 철저히 선발되기 때문이다. 중산층 출신 대학생에 초점을 맞췄던 과거의 세대론은 청년 정치를 전광판에 비치는 홀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언론이나 정치계가 세대론을 만들면, 청년 정치인은 홀로그램 속에서 세대론을 연기했다. 이 전 대표가 박근혜 키드로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평범한 노동자 남성을 대변한다고 자임했다. 직접 택시를 몰며 평범함을 추구한 건 세대론 뒤에 있는 ‘진짜 청년’의 얼굴을 보여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전 대표는 결국 세대론을 돌파하지 못하고, 세대론 안에 갇히고 말았다. 지난 2019년 택시 기사로 변신했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중앙포토 그렇다고 세대론의 무용론을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생각할 수 있다. 계급이나 인종이 결정적 변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야말로 세대론이 큰 힘을 갖는 배경이다. 세대론이 부정적으로 작동할 때조차 세대론은 하나로 뭉치기 어려운 청년 집단을 묶어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발언을 다시 음미해 봐야 한다. MZ세대 차출론은 오래전부터 한국 정치에서 활용된 낚시에 가깝다. 이 전 대표나 박 전 비대위원장은 모두 권력이라는 미끼에 걸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청년이 사라지지 않듯 청년 정치인도 사라지지 않는다. 청년 정치인을 대체할 또 다른 청년 정치인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청년 정치인들은 이런 수난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MZ세대 정치인들은 86세대 정치인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그들은 기성세대를 역이용했다. 세대론을 마키아벨리적으로 이용했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자 군부독재의 저항자로 자신들을 포장했다. 이 시대 청년 정치인 역시 호구가 되기보다 자청해서 호랑이 입으로 들어갈 강단이 있어야 한다. 또 어느 순간에는 MZ세대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필요할 때 다시 MZ세대를 호명하는 정치인처럼 뻔뻔해지길 바란다. 강덕구 작가
-
어느날 회사 PC 비번을 잊었다…노인도 아닌데 찾아온 치매 [조기현의 살아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치매는 65세 이상 노년만 걸릴 수 있는 질환이 아니다. 노년기에 접어들기 전 ‘초로기’에도 치매가 시작될 수 있는데 이를 초로기 치매라고 한다. 한국의 치매 환자 중 10% 정도를 차지한다. 아직 중년이기에 인지가 저하돼도 치매 진단을 받지 않는 경우를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초로기에 치매가 시작되면, 한창 직장을 다니는 나이라 업무에 차질을 빚는다. 동료와 마찰이 생기고 상사의 질책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출퇴근할 때 길을 잃는 경우도 많아지고, 교통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크고 작은 사고는 결국 실직으로 이어진다. 더 이상 일을 못 해 소득이 없지만, 치매로 인한 의료비 지출은 늘어난다. 빈곤에 빠질 위험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치매가 시작된 당사자는 자존감이 낮아지고, 주변 지인들은 낯설어진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서서히 거리를 둔다. 그렇다고 갈 곳도 마땅치 않다. 돌봄 기관은 대부분 신체가 노쇠한 노년 치매 환자에게 맞춰져 있는 데다 인지 기능이 저하됐을 뿐 아직 팔다리에 힘이 넘치는 활달한 초로기 치매 환자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 입소해도 어르신들이 "젊은데 왜 이런 곳에 오냐"며 타박하는 경우도 있으니, 초로기 치매 환자는 몸도 마음도 오갈 곳이 없다. 사회적 관계가 위축되고 고립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유다. 정기적으로 치매 가족을 돌보는 보호자들을 만나고 있다. 거기서 만난 조금순님은 초로기 치매 남편을 돌본다. 남편이 은퇴를 앞둔 시점에 치매가 찾아왔다. 토목감리를 하던 남편은 출퇴근길을 자주 잃어버렸다. 그래도 일을 그만둘 수는 없으니 처음엔 금순님이 동행하기도 하고, 휴대폰으로 길을 알려주면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 남편이 사람들에게 잊히는 게 싫더라고요.” 일을 그만뒀어도 친목 모임이나 경조사를 열심히 다닌 이유였다. 남편이 속했던 모임 자리에 남편을 데려다주고 다른 곳에서 기다리다가 모임이 끝날 시간에 맞춰 남편과 함께 집에 오는 날이 여럿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보다 잊히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어느 날 한 모임에서 남편이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멍하니 사람들만 쳐다보는 모습을 봤다. 남편이 마치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모임을 열심히 다니는 게 다 부질없는 짓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남편이 기억을 잃더라도 사람들은 남편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또 다른 초로기 치매 남편을 돌보는 황경민님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직장에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회사 컴퓨터에 로그인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전화 횟수가 늘어나더니, 시말서를 쓰는 날도 더러 생겼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지 못했지만 아직 50대 초반이었기에 치매라는 말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우울증이나 건망증이라고 여겼다. 그게 아니면 남성의 갱년기 증상인가 싶기도 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치매 진단을 겨우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남편은 퇴직했다. 당장 소득이 아예 없어졌다. 아직 집 대출금과 자동차 할부금이 남아있었고, 대학생·고등학생인 세 아이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눈앞이 깜깜했다. 당장 아무 일이나 해야 했지만, 진단을 받고 1년쯤은 깊은 우울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남편이 치매를 앓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치매가 있어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17세기 이탈리아 화가 구에르치노의 'Saint Matthew and the Angel' (1622) “남편이 치매 걸렸는데 내가 웃고 떠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이해 못 할 것 같았고,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요.” 동굴 속에 숨어 들어가듯이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치매가 마치 전염병이라도 되는 듯이 멀리하려는 지인들 모습에 상처를 입었고, 젊은데 치매가 걸린 이유를 악의적으로 추측하는 친척들의 대화에 상처는 더 곪아만 갔다. 젊은 나이에 치매가 시작돼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도 지지하지도, 함께 답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 이 질문에 답을 찾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금순님과 경민님이 만난 자조 모임에서 그 답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치매를 받아들이기까지의 혼란, 실제로 돌봄 상황에서 마주하는 어려움, 의료나 복지 절차에서 겪는 문제, 세상에서 겪는 차별까지 이전에는 ‘말’이 되지 못했던 경험이 자조 모임에서는 비로소 ‘말’이 됐다. 서로의 말이 서로의 삶의 결을 고운 빗으로 빗겨주는 것처럼 위안이 됐다. 지금 경민님의 남편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지낸다. 일자리를 얻고, 공동체 안에서 그의 역할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천시치매광역센터 부설기관인 ‘뇌건강학교’는 그의 학교이자 일터다. 초로기 치매 환자에 맞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3시간씩 카페에서 차를 내리고 청소를 한다. 또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가치 함께 사진관’이라는 행사에 보조 인력으로 함께 하기도 한다. 가치 함께 사진관은 사진사 출신인 초로기 치매 환자가 직접 사진을 찍어주는 행사로, 다른 초로기 치매 환자는 사진 인쇄와 액자 구성을 돕는다. 그렇게 해서 월 10만원 정도의 수입이 생긴다. 적은 돈이지만 공동체 안에서 역할을 해내 받은 돈이기에 보람이 크다. 무엇보다 남편에게 활기가 생겼고, 표정의 밝기부터 달라졌다고 한다. 이런 상호작용이 삶의 질을 높이고, 치매의 악화도 지연시킬 수 있다. 인지가 저하될 뿐 몸과 마음은 아직 하고 싶은 활동들이 많다. 제대로 된 일자리로 만들어볼 수 없을까? 실제로 치매 일자리 사업을 제대로 시행하는 곳이 있다. 시흥시치매안심센터에서는 초로기 치매 당사자 3명이 노동자가 돼서 센터 행사나 관리 업무를 함께 한다. 일일 행사를 넘어 지역공동체 일자리이기에, 주 5일 출근한다. 근무시간은 주 30시간 이내로, 최저시급에 간식비까지 포함해서 월 150만원 내외의 임금을 받는다. 초로기 치매 당사자가 자신이 지내는 동네에 치매 인식을 높이는 활동을 하기도 하고, 다른 치매 어르신을 돕는 활동을 하기도 한다. 매일 아침 출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데서 자존감이 샘솟고,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면서 근력과 인지력이 향상된다. 일하는 도중에 누군가 기억을 잃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먼저 도와주면 그만이다. 서로가 힘을 합쳐서 실수 없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는 날의 보람의 크기는 말도 다할 수 없다. 치매여도 투명인간이 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갖고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기. 어쩌면 초로기 치매뿐 아니라 경증 치매 환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한국의 빠른 고령화 속도는 단지 국가의 인구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일상이 크게 변한다는 걸 말해준다. 고령자가 많아지면 인지가 저하되는 상황을 일상적으로 마주할 확률이 높아진다. 우리 모두 치매 환자나 치매 가족이 될 수 있다. 치매와 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민이다. 조기현 작가
-
몇달 안치실에 방치해놓고, 병원은 수백만원 청구서 내밀었다 [김민석의 살아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보통 장례는 삼일장으로 치러진다. 고인이 장례식장이나 병원 안치실에 머무는 기간은 길어봐야 사나흘 정도라는 얘기다. 하지만 무연고 사망자는 다르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사망한 변사자는 경찰이 수사부터 먼저 해야 하고, 설령 병원에서 사망했다 하더라도 연고자 파악과 시신 인수 의사를 묻기까지 어쩔 수 없는 행정 소요가 발생하는 탓에 훨씬 길어진다. 이 모든 절차를 밟고 나면 무연고사망자의 안치 기간은 평균 한 달이다. 그 기간 고인은 계속 차가운 안치실에 있어야 한다. 더 안타까운 건 한 달 정도면 그래도 꽤 준수한 편이라는 점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보니 고인을 애도하고자 하는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은 행정처리가 끝날 때까지 기약 없는 기다림을 겪는다. 안치실에 방치된 고인을 생각하며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지만,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실제로 이런 장례에 참여했던 사람들 말을 빌리자면 "참으로 피 말리는 시간"이다. 가끔 안치 기간이 상상을 초월해 길어지기도 한다. 한두 달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연 단위로 안치실에 방치되어 있었던 고인의 공문을 받으면 그 아득한 시간에 아찔함까지 느껴진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경찰 수사나 행정 절차는 시간이 오래 걸릴 순 있어도 언젠가 끝이 난다. 경찰이든 지자체든 고인의 존재를 인지하는 한 가능한 한 빨리 장례를 치르고 싶어하기에 수개월까지 방치되긴 어렵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민원 발생 우려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안치 기간이 길어지는 것일까? 아예 고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할 때 이런 일이 벌어진다. 겨울 초입에 사망해 봄에 화장된 고인이 딱 그런 경우였다. 병원에서 숨을 거둔 고인은 그대로 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되었다. 보통의 절차대로라면 병원과 장례식장이 고인의 연고자 파악과 시신인계를 위해 지자체에 공문을 보내야 했다. 그래야 담당 주무관이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행정 절차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병원과 장례식장은 공문을 보내지 않았다. 고인이 안치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세 들어 살던 집의 집주인 덕분이었다. 고인은 매일 같이 술을 마시던 사람이었다. 집주인은 그런 고인의 건강상태를 걱정했다.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자 병원에 입원시킨 것도 집주인이었다. 치료를 받고 나면 몸을 회복해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퇴원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집주인은 기다리다 못해 병원에 찾아갔다. 집주인은 병원으로부터 황당한 부고를 들었다. 고인은 이미 수개월 전 사망했고,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안치실에 방치되어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집주인은 지자체에 부고를 알렸다. 가족이 아니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담당 주무관은 뒤늦게 연고자 파악을 시작했다. 알고 보니 고인에게는 별거 중인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당장은 떨어져 살지만 고인과 언젠가 재결합할 것을 생각할 정도로 애정이 남아있었기에 당연히 장례를 치르고자 했다. 그런 아내에게 병원이 내민 건 수백만 원에 달하는 안치료 청구서였다. 수개월 간의 안치료를 모두 지불해야 장례를 시작할 수 있다는 말에 아내는 시신 위임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발생한 안치료에 장례비용을 더한다면 1000만원은 우습게 넘었을 거다. 도저히 아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폴란드 작가 조제프 체르멘토브스키(1833~76)이 그린 '소작농의 장례식'(1862). “사망 사실을 빨리 알았다면 장례를 치렀을 거예요. 병원과 장례식장은 왜 가족을 찾지 않았을까요? 말씀 들어보니까 본인들이 찾을 수 없으면 지자체에 요청하면 되는 거잖아요. 이해가 안 돼요. 그 오랜 시간 동안 안치실에 방치한 이유가 뭘까요? 안치료로 이미 수백만원이 깔렸는데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아내는 공영장례에 참여해 울분을 토했다. 고인이 설마 죽었으리라곤, 심지어 안치실에 방치되어 장례를 치러줄 수도 없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아이들이 모두 자라고 나면 언젠가 다시 합치리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꿈꿀 수 없는 미래에 황망해 하며 아내는 오열했다. 병원과 장례식장이 고인을 왜 그토록 오래 방치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안치실 사용료는 하루 평균 10만원 이상 청구된다. 바로 가족이 나타나지 않는 고인이 한 칸을 차지하고 있으면 차지한 시간만큼 손해가 발생하고, 그 손해는 고스란히 장례식장의 몫이 된다. 그래서 안치실의 상황판에는 고인이 언제 들어왔고 언제 나가는지 표시돼 누군가 늘 체크하게 되어 있다. 가장 유력한 추측은 이렇다. 고인이 안치되어 있던 곳은 커다란 부지를 가진 한 종합병원 장례식장이었다. 이곳은 작은 장례식장과는 달리 안치실의 규모가 커 빠른 회전에 굳이 에너지를 쏟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상황판에 들어온 날짜가 적힌 뒤로 고인은 천천히 잊혔을 것이다. 아마도 병원과 장례식장은 그렇게 고인을 '깜빡'한 것 같다. 그동안 이 일을 하면서 모종의 이유로 오랫동안 안치된 고인을 여럿 만났다. 국가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다. 우리사회는 청구되지 않은 죽음을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 뜻하지 않게 남편을 무연고로 보낸 아내의 오열이 귓가에 맴돈다. “왜 바로 가족을 찾지 않은 걸까요? 도무지 이해가 안돼요!” 김민석 나눔과나눔 팀장
-
소아과 최악 미달, 돈만 문제 아니다…또다른 배경, 부모갑질 [박은식이 고발한다]
서울 성북구의 한 병원에서 지난 10월 소아 환자와 보호자가 대기하는 모습(연합뉴스). 그래픽=김현서 기자 주요 대학병원을 포함해 전국 수련병원의 2023년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레지던트) 지원율이 16.6%에 그쳤다. 정원(199명)의 16.6%(33명)만 채웠다는 얘기다. 이미 기피 과로 소문났던 지난 2019년 당시에도 80%였던 지원율이 사상 처음으로 10%로 뚝 떨어진 최악의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극적인 반전이 없다면 소아 진료 인프라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미 전국 대학병원 가운데 24시간 소아 응급진료가 가능한 곳은 36%밖에 되지 않고, 대학병원 네 곳 중 세 곳은 당직 서는 전공의가 부족해 교수가 당직을 선다. 지방만 따로 떼서 보면 더욱 심각하다. 전북대병원·충북대병원을 제외하면 지역 거점 병원에 전공의 1년 차가 단 한 명도 없다. 보호자가 한밤중 진료 보는 의사를 찾아 헤대다가 아픈 아이의 상태가 악화하는 사례가 최근 빈번하게 보고되는 이유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산부인과·외과 등 생명과 직결한 바이털 과의 인기가 점차 떨어지고 있지만 새내기 의사들의 소아과 기피는 유독 두드러진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저출산으로 인한 진료 수요의 감소다. 하지만 올해 산부인과 지원율이 지난해(70%)보다 오른 79%인 걸 고려할 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이보다는 미국의 10분의 1 정도로 낮게 책정된 수가체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성인과 달리 아이는 의사의 진찰에 협조적이지 않아 진료 시간이 더 길 뿐만 아니라 아이를 잡아주는 역할을 해줄 보조 인력 채용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성인보다 약물의 투여 용량이 작아 병원으로선 약제 매출이 적다. 각종 검사 장비 사용 빈도도 높지 않다. 한마디로 진료 시간과 인건비는 많이 들지만 매출이 적다. 국가적으로는 매우 중요하지만 의사 개개인으로선 굳이 소아과를 택할 유인이 없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저수가를 개선하기는커녕 과거 비급여였던 예방백신들을 2013년 급여화하면서 현행 수가의 70% 정도만 받도록 했다. 심지어 신생아 필수접종인 로타바이러스 백신 같은 경우 현행 수가의 40%만 받도록 했다. 돈이 전부는 아니다. 자녀 수가 준 만큼 부모가 소아 진료에 갖는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아진 것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령 아이를 빨리, 혹은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고 의료진에게 폭언, 심지어 폭행하는 사례가 늘었다. 맘카페 갑질도 무시 못 할 기피 요소다. ‘애가 먹을 건데’라며 없는 메뉴나 공짜 서비스를 요구한 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별점 테러를 일삼아 식당 사장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갑질 사례가 SNS에 자주 등장한다. 소아과 병원에선 ‘애가 아픈데’ 버전으로 바뀌어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영향력 있는 맘카페 회원이라며 좋은 후기를 대가로 진료비를 공짜로 해달라는 등 이런저런 요구를 하다 거절당하면 거꾸로 악성 포스팅을 올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실제로 이런 피해 탓에 소아과를 아예 닫아야 했던 사례를 주변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사명감으로 진료 현장을 지키던 의료진 이탈을 가속화했다.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암 투병을 하며 미숙아를 돌보던 의료진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구속되는 모습을 보면서 다들 '나도 언젠가는 죄인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 천안의 대학병원 소아응급실에서 근무하는 한 소아과전문의는 "환아 상태가 안 좋아질 때마다 죄 없이 법적 처벌을 받을까 봐 두렵다"고 했다. 2017년 말에 일어난 이대목동병원 영아 사망 사건으로 구속됐던 주치의. 사진은 2018년 1월 그가 경찰에 출석할 때의 모습. 이후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됐으나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19로 소아과 진료가 40%나 감소하자 소아과의원의 폐업이 속출했다. 새내기 의사들이 개원도 여의치 않은 과를 지원할 리 없고, 그렇게 지원이 줄면서 병동 및 응급실 당직 업무를 교수가 떠안게 됐다. 학생 때 우러러보던 나이 지긋한 교수마저 밤 당직을 서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더더욱이 소아과 지원을 할 수 없다. 악순환은 또 다른 악순환을 낳는다. 급기야 근무하던 소아과 전공의와 교수도 병원을 떠나면서 중증치료를 전담하는 많은 대학병원에서 24시간 소아과 진료가 불가능해졌다. 더 이상 소아 진료 인프라가 붕괴하지 않도록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 소아 진료 인프라가 붕괴하면 당장 안타까운 어린 생명을 잃게 되는 것도 문제지만, 한 번 붕괴하면 재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등 의료 현장에서 나오는 대안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먼저 소아 가산 수가를 적용해 저수가를 개선하는 것이다. 입원 진료는 100% 인상하고 특히 중증 질환일수록 가산율을 높인다. 전공의 부족으로 대학병원의 진료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입원전담전문의 인건비 지원도 필요하다. 의료붕괴가 이미 시작된 지방에서는 지역 가산 수가를 신설한다. 재원이 문제라는 건 안다. 하지만 MRI 검사 등 비급여진료를 급여화해 건강보험 재정 고갈을 불러온 지난 문재인 정부의 문케어를 중지해 낭비를 막는 등 일부 조정만으로도 일정 부분이나마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동네의원이 안심하고 중환을 의뢰할 수 있는 지역 거점 병원 육성도 빼놓을 수 없다. 다음으로 의료진이 고의적 위해를 가한 게 아니라면 구속수사 및 형사책임을 면제하는 법 제정이 필요하다. 불가항력적 의료사고 피해자를 위한 보상재원을 정부가 100% 부담해 분만의료기관의 부담을 줄이는 걸 골자로 하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이 최근 통과됐다. 소아과도 여기 포함되면 좋겠다. 일각에서는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행 체제에서는 소아과 전문의를 취득하고도 다른 진료를 하는 의사가 이미 부지기수다. 대한민국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약 2.5명으로 일본 2.5명, 미국 2.6명과 비슷하다. 오스트리아(5.3명)나 폴란드(4.8명)에 비해선 적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에서의 기대수명이나 암, 뇌 심장질환 사망률 등 주요 의료 지표는 훨씬 앞서있다. 단순히 의료인 숫자만 늘려서 의료 질을 향상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모두 힘든 시기에 상대적으로 돈 잘 버는 의사를 지원해달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기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진료비를 의사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현 건보 체제에선 어쩔 수 없다. 추후 수가 조정을 다시 하더라도 급한 불은 꺼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아무도 소아과 의사를 하지 않으려는 지금의 상황은 코로나보다 더한 위기상황이다. 그야말로 나라가 소멸할 수 있다. 근본적인 초저출산에 의한 인구절벽만큼이나 귀한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인프라 붕괴를 그대로 두면 대한민국은 망한다. 나라를 지킬 사람이 없는데 국방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대한민국 사람이 소멸하고 있는데 이념이고 정당이고 다 무슨 소용인가? ‘망해야 정신 차린다’는 말은 그만하자. 어떻게 세우고 발전시킨 나라인가. 또 얼마나 소중한 어린 생명인가. 박은식 의사
-
아들을 시장에 버린 엄마…그 고통으로 모자는 삶을 견뎌냈다 [김은혜의 살아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대학에 들어가 첫 교양 수업을 듣던 날, 교수님이 해주신 짧은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 없이,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매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똑같은 학대를 받고 똑같은 폭언을 들으며 자랐지만, 성인이 된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됐다. 언니는 ‘가정폭력 대물림을 막기 위해 절대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사회에 잘 적응해 가정을 꾸렸다. 반면 동생은 ‘보고 자란 게 알코올중독자의 일상뿐’이라고 한탄하며 결국 아버지와 똑같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 말미에 교수님이 질문을 덧붙였다. “이거 사실 제 이야기에요. 제가 둘 중 누구인 거 같아요?” 정답을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이후 "나는 기억을 흘려보내는 연습을 너무 늦게 시작한 사람"’이라고 종종 언급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야기 속 동생이었던 거 같다. 그 아버지는 ‘나는 우리 두 딸과 함께해서 정말 행복했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잊고 있던 이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난 건 한 환자의 섬망(뇌 기능장애 증후군)이 시작됐을 때였다. 한 유방암 환자가 있었다. 할 수 있는 치료를 다 했음에도 뇌에 있는 전이암이 커져서 편안한 임종을 준비하기 위해 내가 있는 한방병원에 머무르던 분이었다. 유방암은 ‘할 수 있는 치료’의 선택지가 많은 편에 속한다. 이 많은 선택지는 환자들에게 긍정적인 희망으로 다가가는 동시에 그만큼 힘든 치료를 오래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두려움을 안겨주곤 한다. 이 환자는 그 긴 기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하나뿐인 아들 덕이었다고 늘 말했다. “걔는 진짜 혼자 힘으로 컸어요. 내버려 뒀더니 알아서 길 찾아서 지금 대기업 다녀요.”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자주 듣는, 익숙한 자식 자랑이었다. 매일 반복하는 자랑에는 ‘대기업’과 ‘혼자’라는 단어가 꼭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혼자라는 단어에서는 아들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져 당시엔 살짝 뭉클하기도 했다. 그 아들은 매일 꼬박꼬박 병문안을 왔다. 모친의 변화를 묻고 잠깐이라도 옆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암 환자 보호자로서의 정석과도 같았다. “오늘은 좀 어떠셨어요?”라며 가벼운 안부 인사를 조용히 주고받는 모자 사이에는 무뚝뚝한 분위기도 흘렀지만 부정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의 대화 중에 가끔 내가 끼어들면 어김없이 당신 옆에 있는 아들 자랑이 ‘대기업’과 ‘혼자’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 상황을 몇 번 반복해 마주하면서 우연히 깨달은 건, 그 아들은 어머니가 본인 자랑을 할 때 민망해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그저 안 들리는 사람 마냥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익숙한 상황이니 다른 생각을 하나 보다’라고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들은 과거의 어떤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던 거 같다. 어느 날부터인가 환자의 섬망이 시작되었다. 곳곳에 전이된 암을 생각했을 때 섬망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섬망이 어떤 형태로 표현되는지는 개개인마다 다른 것이라 예측이 불가능했지만 보통 공격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 그 날부터 촉을 세웠다. 이 환자의 경우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조용히 중얼거리며 찾아온 사람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거로 시작되었다. 내가 찾아갈 때도 눈을 번쩍 뜨고 내 얼굴을 낱낱이 훑어보다가 얼굴 아래 흰 가운을 보고서야 눈을 감으며 다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가끔은 누군가를 찾는 느낌이기도 했다. 얼마 안 가 그 누군가가 바로 아들이라는 게 밝혀졌다. 회사 일로 한동안 병문안을 못 오던 아들이 오랜만에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역시나 환자는 눈을 번쩍 뜨고는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너 또 왜 왔어! 이 새끼! 너는 그 년 집이나 가! 내 집에서 나가!” 핀란드 작가 로베르트 빌헬름 에크만(1808~73)의 '시험 전날 아침'의 일부분. 처음 듣는 쌍욕에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얼른 아들을 살펴보았는데, 정작 아들은 소리치는 엄마를 덤덤히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큰 충격에 언 건가 싶어 바로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오자 아들이 말했다. “놀랐네요.” 미안한 마음에 나는 해명을 했다. “원래 웅얼거리기만 하고 욕설을 하거나 큰 소리를 낸 건 아니라서 적극적인 처치는 안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그랬더니 아들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 놀랐다는 게 그 욕에 놀랐다는 게 아니고요, 오랜만에 저 말을 다시 들었는데 아무렇지가 않아서 저 혼자 놀랐다는 말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아들은 환자의 친아들이 아니라 남편의 외도로 태어난 혼외자식이었다. 환자는 남편의 바람과 출산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초등학생 남자아이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날 바로 아이를 동네에서 제일 복잡한 시장에 버렸다. 그렇게 버림받고 일주일을 시장 바닥에서 떠돌았다고 한다. 아들의 첫 기억은 엄마의 버림이었다. 두 번째 기억은 동네 주민들 도움으로 집을 찾아간 아들에게 환자가 한 말이었다. “너 왜 왔어! 이 새끼! 너는 그 년 집이나 가! 내 집에서 나가!” 많은 감정과 다양한 일을 생략한 것이겠지만 아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여기서 어떻게든 인정받아서 살아남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짐 하나로 부친의 방치와 모친의 폭언을 감당해내며 자랐다. 아마 한편으론 인정받고 싶은 마음, 다른 한편으론 평생 엄마에게는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나온 힘이었을 것이다.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를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아들은 문득 본인이 사회에서 꽤 인정받는 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남아있을지언정 안정된 사회생활 속에서 적어도 ‘나는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자존감은 높아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기업 이름이 찍힌 명함을 건네자 처음으로 ‘아들’이라고 불러주는 엄마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벗어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냥 흘려보냈어요. 그랬더니 최소한 겉으로나마 최근 선생님이 보신 그런 보통의 모자같은 관계가 된 거예요.” 나는 그 환자가 ‘대기업 다니는 아들 덕에 버텼다’라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이 받은 상처를 모르지 않았지만 아들의 존재로 인한 본인의 상처가 더 컸기에 애써 외면했을 것이다. 그런 엄마를 보며 아들은 고통받았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이 자신의 삶을 한단계 도약하도록 도와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아들 덕에 삶을 견뎠다. 이 모자를 포함해 병원에서 다양한 갈등 관계를 지켜보며 깨달은 게 있다. 인생은 과거를 흘려보내는 연습을 반복하는 과정이라는 것 말이다. 과거는 변색이 잘된다. 오죽하면 ‘아무리 힘든 일도 지나가면 다 좋게 기억된다’라는 말도, 정반대로 ‘99명의 응원과 1명의 악담을 동시에 들으면 악담만 기억에 남는다’는 말도 있을까. 무엇이든 과거가 지금의 현실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기억이 주는 상처’ 보다 ‘추억이 주는 힘’으로 전환해 흘려보내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지 생각해 본다. 김은혜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
-
"제가 좀 막살았습니다" 돈의 무게에 짓눌렸던 암환자의 삶 [김범석의 살아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제가 좀 막살았습니다.” 보호자는 안 계시냐는 질문에 사내는 멋쩍어하며 대답을 했다. 환자분한테 보호자에 대해 질문을 하면서 받은 대답 중 가장 인상적인 대답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막살았다”는 대답이 오랫동안 여운이 남았다.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면 막산 것일까.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그에게 보호자에 관해 묻기 어려웠다. 그는 늘 혼자였다. 가족 없이 혼자 와서 혼자 항암주사를 맞고 갔다. 항암치료를 할 때마다 늘 "돈이 얼마나 드냐"고 물어봤다. 그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표준치료가 실패하고 다른 치료 대안마저 없어지자 그에게 임상시험(trial) 참여를 제안했다. 그는 선뜻 응했다. 신약은 처음엔 효과가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효과가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임상시험 신약마저 효과가 없어지자, 그는 다른 임상시험 참여를 원했다. 다른 임상시험 참여 기회가 생기면 꼭 연락해 달라고 연신 부탁했다. 몇 주 뒤 참여 가능한 임상시험이 생겨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의 휴대전화는 정지돼 있었다. 연구간호사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요금을 내지 않아 정지된 거 같다고 했다. 연구간호사는 나에게 몇 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었다. 그는 연구간호사에게 5만원이 언제 입금되는지를 자주 물었다고 했다. 임상시험에 참여하면 검사와 치료가 무상으로 이뤄질 뿐 아니라 매주 병원 올 때마다 교통비 5만원이 제공되는데, 그 5만원이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돈이었나 보다. 넉넉지 않아 보인다고 짐작은 했지만, 그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나 싶었다. 간혹 경제적 사정이 내 짐작이 크게 벗어나는 환자를 보면 당혹스럽다. 사람마다 느껴지는 돈의 무게가 다르다. 5만원이 5000원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 50만원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전자는 후자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돈의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삶은 막살아지고 돈의 무게로 삶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도 그랬던 것 같다. 스위스 작가 에른스트 스튀켈베르크(1831~1903)의 '노인의 얼굴'의 일부분. 보호자가 없다고 했는데 병원 차트에 보호자 번호가 적혀 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했다. 그랬더니 동료 택시기사가 받았다. 동료 택시기사의 말에 따르면 그는 무연고자였고, 요즘은 자기도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목욕탕이나 찜질방을 전전하며 잠을 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차트에 주소가 적혀있지 않았다. 한참을 통화하다 보니 그의 막 삶이 서서히 정체를 드러냈다. 사업, 사업실패, 음식점, 음식점폐업, 빚보증, 이혼, 가족해체, 가족 단절, 다시 사업, 사업실패, 사기, 소송, 택시…. 술·담배는 기본, 그리고 암. 그리고 연락 두절. 그게 60평생 그의 삶이었다. 그러면서 막살았다고 했다. 그 결과로 보호자가 없다고 했다. 태어났을 때 누군가에게 큰 기쁨이었을 것이고, 한때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을 텐데, 어떤 이유로 단절되고 이렇게까지 내팽개쳐질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그에게도 분명 어머니가 있었을 것이고, 가족이 있었을 것이고,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막살면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을 수 있어도 처음부터 그에게 아무도 없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가 혼자였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에 무연고자는 없다. 태어났으면 낳아준 사람이 있고, 핏줄로 연결된 사람들이 있다. 그저 가족에게 버림받는 사람과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졌다.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을지 시신은 누가 인도해 갔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무연고 시신이 되어 싸늘한 냉동 창고에 꽁꽁 언 채 오래 보관되진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때는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건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사람들. 그렇게 소리 없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한때는 소중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내 기억에서 그의 삶을 쉽게 지워버려도 될 만큼 나는 그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을까. 아무도 없이 홀로 맞는 죽음, 아무도 거두지 않는 죽음은 그래서 가슴 아프다. 김범석 서울대 암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
순간만 요란한 조두순 집 문제…"딴 데서 살아라" 전쟁 해법은 [김재련이 고발한다]
조두순·김근식과 가까운 곳에서 살 수 없다며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 모습. 그래픽=김현서 기자 8세 여아를 성폭행해 12년간 복역하고 2년 전 출소한 조두순.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배우자와 살고 있는 그는 최근 옆 동네로 이사하려고 했다. 배우자가 새 주거지 임대 계약까지 마쳤지만 그 동네 주민의 극심한 반발에 부닥쳐 이사 계획이 무산됐다. 조두순 부부가 지금 거주하는 곳의 월세 임대차 계약은 이미 시효가 지났다. 이웃들은 그가 하루라도 더 빨리 떠나기를 바란다. 연쇄 미성년자 성폭행범인 김근식이 16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출소하게 돼 있던 지난 10월 중순, 그가 경기도 북부의 한 도시에서 살려고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당 지역 시장이 도로를 봉쇄해서라도 그의 정착을 막겠다고 선언했다. 김근식은 출소 직전에 추가로 드러난 혐의 때문에 구금이 연장돼 시장의 물리적 저지는 실행되지 않았다. 여성 8명을 성폭행한 죄로 징역 11년을 선고받은 박병화. 그는 지난 10월 말에 출소해 경기도 서남부 지역에 살고 있는데, 그곳 주민들이 관청 등을 상대로 퇴거 조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세 사람은 끔찍한 성폭력 범죄자들로, 범행에 상응하는 높은 형벌을 받았다고 보기 어려우며, 다수의 시민이 재범을 우려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출소 임박 시점부터 그들이 어디에 살게 될 것인지가 사회적 관심사가 됐다. 2020년 12월 서울남부교도소 앞에서 조두순의 사회 복귀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길에 누워 시위를 벌였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어디엔가에 장소를 정해 영원히 사회와 격리해야 하나? 그게 법적으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이들이 이웃 주민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고 거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과연 그런 곳이 있나? 내가 품은 질문들이다. 그들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피해자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직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내려진 형벌의 무게는 피해자가 겪고 있는 고통의 무게를 넘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 사회가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만든 법과 제도의 기본 정신은 형벌을 통해서 범죄자의 성행을 교정·교화하는 것이다. 그 세 사람도 법으로 정한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했다. 범행에 상응하지 못하는 수준의 형벌이 내려졌어도 법적 절차에 따라 정해진 벌을 다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용서하기 어려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합법적 처벌을 받은 뒤에도 기본적 권리를 박탈할 수는 없다는 게 우리 헌법의 정신이다. 물론 흉악범들이 출소 뒤에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범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신상정보 공개, 취업 제한, 전자발찌 착용 등의 보안처분을 가할 수 있다. 범죄 전력자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면서 그들의 재범을 막으려는 사회적 장치다. 2년 전 가을 조두순의 출소가 임박하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이런 보안처분 정도로는 재범을 온전히 방지할 수 없으며, 그가 거주할 곳 인근의 주민들이 심한 불안감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여론이 확산됐다. 그러자 국회에 여러 법안이 발의됐다. 죄질이 매우 나쁜 성범죄자 등을 형기 만료 뒤에 수용시설에 일정 기간 격리하도록 하는(보호수용제) 법안이 나왔고, 조두순 같은 사람의 활동을 거주지 주변 200m 이내로 제한하는 법안도 제출됐다. 그 당시 조두순이 교도소에 있던 12년 동안 이 사회는 무엇을 하다가 그제서야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펄쩍펄쩍 뛰게 됐느냐는 반성론이 일었다. 보호수용제를 놓고 한동안 갑론을박이 오갔다. 같은 죄를 두 번 처벌하는 것이라는 반대론이 거셌다. 그러자 수용시설에서 출퇴근을 하는 중간 형태의 모델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자 그것이 효과적 통제 수단이 되기 어렵다, 이것 역시 이중 처벌이다 등의 지적이 잇따랐다. 딱 거기까지였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뜨겁게 달궈졌다가 금세 식어버린 냄비처럼. 그렇게 2년여가 흘렀고, 이 사회는 여전히 조두순·김근식·박병화의 거주지 문제로 몸살을 앓는다. 달라진 게 하나 있기는 하다. 최근 법무부가 13세 미만 아동·청소년을 성폭행해 형을 선고받은 자는 형기를 채워 수감 생활을 한 뒤에 재범 위험성을 판단해 치료감호가 가능하도록 하는 치료감호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이에 동의한다. 그런데 피해자 연령 기준이 꼭 있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 범죄자도 재범 위험성이 높은 경우 치료감호제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 법안의 국회 통과 여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실제로 법제화가 돼도 엽기적·상습적 성범죄자의 출소 후 거주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피해자가 13세 미만이어야 하고, 재범 위험성이 높은 것으로 진단이 돼야 하며, 치료 목적의 한시적 조치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숙제는 별로 줄지 않는다. 조두순·박병화 같은 사람들이 교도소나 치료감호소에서 사회로 복귀할 때마다 여전히 '딴 데 가서 살아라' 전쟁을 치를 것이다. 진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정치인·법조인·행정가 등이 머리를 맞대고 시민 의견을 들으며 진지하게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게 사회적 합의를 이뤄 문제를 푸는 것이 제대로 된 나라의 모습 아닌가. 모두가 동의하는 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좀 더 정확하게 인식하고, 현실적 답을 찾아갈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연쇄 성폭행범 박병화가 출소한 지난 10월 31일 그의 거주지 앞에 배치된 경찰 인력. 뉴스1 그 전에 모두가 꼭 염두에 둬야 할 게 있다. 근본적으로 성 범죄자의 재범 위험성을 낮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범죄 연구를 보면 성 범죄자의 경우 심리적 문제, 정신적 문제, 가족관계, 경제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재범에 영향을 미친다. 취업 제한, 신상정보 공개, 전자발찌 착용 등의 보안처분은 심리적 압박감을 키우고, 경제활동 기회 차단하고, 가족관계 해체에 영향을 미치는 제재 일변도의 것들이다. 이런 처분이 오히려 재범 위험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이른바 '묻지마'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다. 캐나다에는 'COSA'(Circles of Support and Accountability)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이 있다. 전문가들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성폭력 범죄자의 출소 이후 사회 복귀를 지원하는 회복적 사법 모델이다. 멘토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상담을 하며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회 복귀 의지를 북돋는 효과를 낸다. 출소자의 재범 위험성을 낮추고, 건전한 사회 복귀의 길을 열어준다는 면에서 주목할 만한 정책이다. 조두순·박병화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를 전문가가 주기적 대화를 통해 파악한다면 사회는 그만큼 안전해진다. 성폭력 범죄자이든, 다른 종류의 범죄자이든 잘못된 행위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이 계속 공격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그들이 다시 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도와야 한다. 이것이 성숙한 문명 사회의 모습이다. 조두순·박병화·김근식이 우리 사회에 던진 숙제를 계속 그대로 덮어둘 수는 없다. 김재련 변호사
-
몸 아픈 부모 죽음에 해방감 느낄까...간병청년 옥죄는 죄책감 [조기현의 살아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가족 돌봄 청년’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청년을 일컫는 용어인데, 정부가 올해 2월 이들에 대한 지원 대책을 발표하면서 이 말을 세상에 내놓았다. 앞서 지난해 11월, 22세 청년이 병간호 부담 때문에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주목을 받으면서 정부는 빠르게 대책을 마련했다. ‘가족 돌봄 청년’이라는 말은 그동안 우리 주변에 늘 있었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이들을 보이고 들리게 한다. 당사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또래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쉽게 설명할 수 있고, 더는 어른들에게 효녀·효자라고 불리지 않을 수 있는 말이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은 어린 친구들 사이에선 낯선 일이고, 그래서 또래들 사이에서 고립된다. 거꾸로 어른들이 효녀·효자라고 칭찬을 하는 건 당사자들이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한다. 가족이기에 당연히 책임지라는 강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 '가족 돌봄 청년'이라는 말이 생겼으니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이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가족 돌봄 청년'은 영 케어러(young carer), 즉 어린 돌봄자를 번역한 말이다. 가족 돌봄 휴가, 가족 돌봄 휴직 같은 기존 용어를 참조해 만들었기에 원어에 없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돌봄이 이제 막 ‘가족’을 넘어 ‘사회’의 책임이라는 합의를 이뤄가고 있는데, 이 용어가 오히려 돌봄에 대한 가족 책임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지 우려된다. 고령화와 저출생이 계속 진행되고 가족 규모가 지속해서 축소되면, 혈연이나 혼인으로 맺어지지 않은 이들끼리 돌보는 경우도 지금보다 훨씬 많아질 수 있다. 그래서 ‘가족’을 붙이지 않고 ‘돌봄 청년’이라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든 공식 용어가 생겼다는 것 자체는 환영한다. 이 사회가 아픈 이들을 돌보는 청소년·청년의 존재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어서다. 돌봄 청년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을까? 돌봄 청년은 아픈 이를 돌보는 일뿐 아니라, 학업이나 취업 준비 등 진로 이행을 병행해야 한다. 거기에 생계까지 담당하는 경우도 많다. 돌봄, 진로, 생계라는 삼중의 역할을 혼자 해내야 한다. 아픈 이의 병세가 악화하거나 막대한 병원비를 마련해야 할 때, 돌봄과 진로와 생계는 서로 꼬이고 엉킨다. 그런 ‘위기’를 해결하려고 고군분투하다 보면 삶의 의욕이 떨어진다. 영국 작가 애프터 앨프레드 랭클리의 작품 'Old Schoolfellows'의 한 부분. 많은 돌봄 청년들은 어릴 적부터 가사나 돌봄을 해야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부딪히며 배워야 했다. 형제가 없는 외동이거나 형제가 너무 어린 탓에 함께 협력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어른이 없었고, 어른이 있더라도 나이 어린 보호자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할머니가 널 키워줬으니 네가 어른스럽게 책임져야 한다’며 돌봄 역할을 떠넘기거나, 심지어 아픈 부모의 재산에 손을 대는 친척들도 있었다. 나를 포함한 돌봄 청년들이 겪었던 일이다. 지난해 중순, 나는 돌봄 청년들이 서로를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각자 혼자서 삼키고 삭혔던 돌봄 경험을 비로소 말하기 시작했다. 울화가 치미는 일부터 돌봄에 필요한 지식까지 차근차근 공유했다. 무엇이 힘든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 모임에서 조금만 말해도 비슷한 경험들이 줄을 이었다. 서로의 말에 서로의 경험이 포개지며 서로의 경험을 더 넓게 해석할 수 있게 됐다. 이 경험이 함께 연결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변화였다. 자연스레 나 혼자만 불행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됐다.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목소리를 냈다. 누군가는 돌봄 경험에 대한 글을 썼고, 다른 누군가는 방송에 나가서 인터뷰했다. 정부 간담회에 참가해 복지 사각지대를 알렸고, 여러 연구에 인터뷰이로 어려움을 증언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문제를 ‘증언’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직접 해결하면 어떻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제안한 사람은 모임에 함께 하는 형민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건설 현장에서 다쳐 돌봄자가 됐다. 아버지는 인지가 저하됐고 거동도 쉽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 지내던 중 낙상으로 골반이 부러졌다. 치료는 잘 받았지만, 주변에서는 “고령자의 경우 골반 골절로 인공관절 수술을 하면 3년을 넘지 못하고 죽더라”는 말을 들었다. 덜컥 죽음이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아픈 이를 돌보는 과정에서 죽음은 순간순간 어른거렸다. 돌보는 이는 가까운 죽음을 혼자서만 두려워해야 하는 걸까? 돌봄이 끝나면 나는 아버지를 잘 애도할 수 있을까? 형민의 질문에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아버지를 여읠 수 있으며, 그것을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내게도 때때로 묵직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징글징글하게 얽히고설킨 돌봄 과정을 되돌아보면 혹여나 내가 아버지의 죽음에 해방감을 느끼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한 존재가 마치 짐짝 내려놓듯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마음속 깊이 죄책감이 뿌리내릴 것만 같았다. 돌봄과 애도가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고민하고 싶었다. 지난 3년간 돌봄 청년들을 만나면서 상실과 애도가 큰 문제임을 확인하기도 했다. 돌보는 순간만큼이나 돌봄이 끝난 뒤에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돌봄을 하는 순간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결국 마음속에 남는 건 내가 ‘해낸 것’이 아니라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잘 떠나보내는 일도 어려운 일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직장을 그만두거나 은둔하는 이들의 슬픔의 무게를 덜어줄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함께 모임을 하는 경훈(가명)은 전적으로 돌보았던 외할머니를 떠나보냈다. 2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지난 순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경훈의 어머니도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건 매한가지인 것 같다. 어머니는 늘 할머니에 대해 언급하며 가족들이 할머니를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경훈은 그게 어머니가 풀지 못하고 마음 속에 간진하고 있는 죄책감을 경훈과 아버지에게 전가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경훈은 어머니와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만약 가족 사이에도 애도에 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부터 고민이었다. ‘돌봄 청년의 애도 연습’, 우리가 진행할 프로젝트의 이름이다. 떠나보내기 전에도, 떠나보낸 이후에도, 애도는 연습이 필요할지 모른다. 돌봄 과정에서 순간순간 떠올리는 죽음을 혼자서만 감당하는 것을 넘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이들끼리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고자 한다. 장례와 애도, 상실을 주제로 한 강연 시리즈를 기획하고, 돌봄 경험자들이 모여서 죽음에 얽힌 감정들 나눌 수 있는 라운드 테이블 모임을 진행하려고 한다. 마지막에는 각자의 마음에 맞는 장례 형식도 고민해 본다. 그렇게 돌봄 청년들은 돌봄과 애도를 잘 연결해 보려고 한다. 흔히 늙음·질병·죽음은 젊은이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여긴다. 하지만 늙음도, 질병도, 죽음도 결국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삶이다. 죽음이 삶의 필연이라면, 곁에 있던 이를 잃는 상실도 필연이다. 모두가 생애 어느 순간에 겪게 되는 일이다. 왜 이제까지 혼자서만 감당해야 했을까? 애도가 결국 스스로 해내야 하는 마음의 문제라도, 그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은 충분히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조기현 작가
-
지면서도 주먹 뻗던 투혼…복싱 챔피언, 왜 무연고 사망자 됐나 [김민석의 살아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무연고 사망자 장례의 특징 중 하나는 영정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장례 의뢰 공문에는 고인 사진이 첨부돼 오지 않는다. 개인정보 유출을 우려하는 동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설령 가족이 찾아가도 사진을 내어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치러주는 '나눔과나눔'은 고인의 연고자에게 부고를 알릴 때 적극적으로 영정에 쓸 사진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 이런 상황을 모르는 채 장례에 와서 당황하는 가족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례에 영정이 있고 없고는 차이가 크다. 모두가 영정과 위패를 같이 들고 있는 화장장에서, 나 홀로 위패만 덩그러니 들고 있으면 소외감이 들고 움츠러든다. 괜히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현대의 장례 문화에서 영정 사진은 ‘당연히’ 필요하다. 운이 좋아 그 당연한 사진을 가족이나 지인에게 받는다면 편집을 해야 한다. 대부분 단체 사진 속 고인을 확대해서 촬영한 탓에 화질이 뭉개져 있기 때문이다. 편집 작업은 통상 내가 맡는다. 퇴근 후에 별도의 시간을 내야 하기에 남들 눈엔 귀찮게 보이겠지만, 작업을 위해 고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보면 마음속에 작은 친근함이 자리하게 된다. 그때 느끼는 친밀감은 장례 현장에서 고인을 애도하는 걸 보다 수월하게 만들어준다. 지난겨울 장례를 치른 한 고인의 영정도 내가 만들었다. 고인의 임종을 지킨 친구들이 그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히 그 사진을 쓸 수 있었다. 나는 주민등록증에서 고인의 얼굴만 잘라낸 뒤 새롭게 배경을 만들고 정장을 입혔다. 그러자 선한 눈매의 고인은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처럼 보였다. 편집이 완성된 영정을 액자에 넣고 가방에 챙겨 퇴근했다. 다음날 오전 장례라 사무실에 들를 여유가 없었다. 나는 집에 도착해 고인의 영정을 책상 한쪽에 세워두었다. 그냥 가방에 넣어두기도, 그렇다고 바닥에 두기도 애매했다. 괜히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잠들기 직전까지 집에서 생활하는 내내 고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 덕에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땐 눈감고도 고인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고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것은 수골(화장하고 남은 뼈를 거두는 일) 도중의 일이었다. 화장이 끝난 유골 속에서 관에 박혀있던 못을 골라내는 승화원 직원의 손을 바라보다 고인의 친구들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혹시 고인은 어떤 분이셨나요? 제가 사진을 편집해서 한참 고인의 얼굴을 보았는데, 인상이 참 푸근하시더라고요.” 미국 화가 토머스 에이킨스의 작품 'Between Rounds'의 한 부분. 나의 질문에 돌아온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친구들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도리어 나에게 되물었다. “김O동이를 몰라요? 얼굴까지 봐놓고!” 고인의 이름도, 얼굴도 처음 보는 나는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다는 그 반응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혹시 예전에 활동했던 연예인인가? 아예 모르겠다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친구 중 한 명이 이번엔 정보를 조금 더 추가해 다시 한번 물어왔다. “복싱 아시아 챔피언 김O동 몰라요? 이 친구가 바로 그 김O동이에요!” 그 말에 반응한 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조회사의 장례지도사였다. “아~ 그 김O동이 이 분이에요? 저는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고인의 친구들과 연배가 비슷한 장례지도사는 고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고, 고인을 아는 사람이라는 반가움 때문인지 친구들은 장례지도사와 고인의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어나서 복싱은커녕 종합격투기도 본 적이 없는 나는 낄 수가 없는 대화였다. 더군다나 고인이 활동했던 시기는 1970년대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역사다. “이 친구가 무연고로 갈 사람이 아니에요. 은퇴하고 술집도 크게 했거든요. 결혼을 안 하고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갔어요. 건강하게 살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아프니까 다들 가족을 찾아. 병원도, 장례식장도요.” “저도 예전에 경기를 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무연고로 장례를 치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세상 참…. ” 장례지도사와 친구들은 혀를 차며 고인의 유골함을 기다렸다. 다시 한번 수골실에 침묵이 깔렸다. 나도 덩달아 말없이 고인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설마 복싱 챔피언일 줄은 몰랐다. 나는 챔피언과 하루를 보냈구나. 장례를 모두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며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복싱을 좋아했다. 그 시절엔 오락거리가 그것뿐이었다며 술 마신 날에는 종종 과거의 챔피언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곤 했다. 아버지는 고인을 알고 있을까? “어. 민석아 무슨 일이냐?” 휴대전화 너머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나는 어제부터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영정 사진을 편집하고, 그 영정을 책상 위에 두고 하루를 보냈던 것, 그리고 오늘 들은 고인의 과거에 대해서. “그래서 제가 전화를 건 이유는, 아버지도 고인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가 해서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다 그 시절에 복싱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인을 알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 체급을 석권했던 챔피언인데 모를 수가 없다면서. “그래도 챔피언인데 무연고 사망자로 장례가 치러졌다는 게 조금 씁쓸하네.” 아버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인은 링 위에 마지막까지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고인이 무연고사망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항상 사람들에게 모든 무연고 사망자가 빈곤하지 않다고 이야기해왔고, 실제로 그런 사례를 접하기도 했지만 ‘챔피언’이라는 말이 주는 울림은 조금 달랐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복싱은 단순한 스포츠 이상이었다고 한다.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헝그리 복서가 난전 끝에 쟁취하는 승리는 때로는 삶의 희망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어린 시절에 본 영화 '로키'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승패와 상관없이 그의 경기가 주었던 감동을 생각하니 아버지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나는 포털에 고인의 정보를 검색하다 어느 블로그에 게시되어 있는 고인의 경기를 보았다. 아주 오래전의 영상이라 화질에는 노이즈가 가득했지만, 링 위에서 고인을 찾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하루 종일 보았던 얼굴이니까. 고인은 영상 속의 경기에서 일본 선수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찾아본 바로는 이 경기 이후 고인은 더 이상 링 위에 오르지 않았다. 영화가 아닌 실제 복싱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것은 처음이었다. 무연고 사망자의 대부분은 빈곤하다. 그 사실을 살짝 비틀어 이야기하자면, 모든 무연고 사망자가 빈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고인이 빈곤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빈곤은 게으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너무도 손쉽게 단정 짓는다. 종종 기사를 보다 보면 그렇게 고인을 비난하는 댓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길래 잘 살았어야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성실하게 살았어야지.' 전직 ‘복싱 챔피언’이었던 고인에게 누가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고인이 게으름을 피우며 성실하지 않게 살았다고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경기는 일본에서 치러졌다. 당시의 일본 관중들이 고인을 응원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 속 고인은 투지를 불태우며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끝내 수건을 던졌지만, 그 전까지는 끊임없이 주먹을 뻗고 있었다. 나는 영상을 끄고 버스 등받이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눈을 감자, 이번엔 고인이 내지른 주먹이 생생히 그려졌다. 김민석 나눔과나눔 팀장
-
北서 건너온 후진국병 말라리아 …'에르메스 말안장'에 격분한 이유 [박은식이 고발한다]
2011년 경기도·인천시 등이 북한에 말라리아 방역 물자(살충제)를 보낼 때의 모습. 왼쪽 위는 국내의 주요 말라리아 발생 지역 표시도. 그래픽=박경민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변호사비 대납 의혹 수사 도중 해외로 도피한 쌍방울 김성태 전 회장이 문재인 정권 때인 지난 2019년 대북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북한에 프랑스 최고급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의 말 안장과 150만 달러를 건넨 정황이 포착됐다는 언론 보도를 최근 접했다. 또 당시 집권당이었던 몇몇 야당 인사가 관련됐다는 정황 역시 나와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이 사건은 과거의 여러 남북 협력 사업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일단 내세운 대의명분은 이번에도 똑같다. 김대중 정부 이래로 주로 진보 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남북 경협은 늘 민족의 평화라는 거창한 구호를 앞세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업을 빌미로 우리가 찔러주는 뒷돈이 핵심이었다. 그 결과 실질적인 남북 평화는 물론 북한 주민의 생활고와 같은 난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북한 최고위 집권층의 배만 불려준 실패로 귀결됐다. 쌍방울이 북한에 제공했다는 뇌물도 아마 비슷한 결말을 맞을 것이다. 여기서 과거와 달리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바로 김 전 회장이 소속 임직원을 동원해 직접 북한 측에 전달했다는 에르메스 말 안장이다. 사실이라면 우선 대북 사치품 반출을 금지한 유엔의 대북 결의 1718호 위반이다. 게다가 즉각적으로 그 돈의 쓰임새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외화와 달리 최대 수억원에 달한다는 이 말 안장은 북한 주민과 무관한 집권층의 사치 성향을 그대로 노출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논란거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종종 타는 백마 위에 얹기 위한 것이든, 혹은 그가 다른 고위층에게 주려 한 선물이든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북한 주민의 삶과는 너무나 큰 격차를 보여주는 탓이다. 프랑스 명품 회사 에르메스가 만든 말 안장. 주문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고가 제품은 가격이 수억원이다. 중앙포토 의사인 내가 북한에 뇌물로 바친 에르메스 말 안장 보도를 보고 격분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말라리아다. 대표적인 후진국 병으로 알려진 말라리아 얘기를 왜 갑자기 꺼내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역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말라리아 발생률 1위다. 군의관 시절 군내 감염병을 전담할 당시 이 사실을 처음 알고 많이 놀랐다. 말라리아는 원래 한반도에 창궐해 있었다. 하지만 역대 우리 정부가 성공적인 방역 정책을 시행한 덕분에 1979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말라리아 완전 퇴치국가로 인정받았다. 북한은 달랐다. 말라리아 창궐을 막지 못했다. 휴전선 부근의 모기떼가 북한 감염자의 피를 빨고 우리나라로 날아와 접경지역의 주민과 군인을 물었다. 한국에 다시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이유다. 경기 북부에 거주하는 인구가 많아지면서 말라리아 환자는 1990년대 이후 연 4000명까지 증가했고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한국 정부는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기준치 이상의 환자가 발생한 파주·연천·철원·강화 등 북한 접경 지역 주민의 헌혈을 제한했다. 또 군부대 환자 발생을 줄이기 위해 전방 부대 장병들에게는 말라리아 집중 발생 기간인 5~10월 사이 관련 약을 복용시켰다. 비유하자면 예방약으로 몸속을 무장한 우리 군이 휴전선을 따라 '인계철선'을 구축한 다음 북에서 쳐들어오는 말라리아 모기 부대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환자 발생을 꾸준히 줄여 2014년에는 4000명에서 뚝 떨어진 400명을 기록했다. 자료: 질병관리청 그러나 내가 군에 입대한 2016년 무렵 다시 600명으로 증가했다. 한국의 말라리아 환자는 주로 전방 군 부대 장병과 인근 지역 주민 사이에서 발행하는데, 군내 환자가 늘어난 탓이었다. 말라리아는 예방약을 한번 먹으면 끝나는 게 아니라 기존 치료약을 매년 5~10월 내내 장기간 복용하는 방식이다 보니 구토·설사·피부발진 등 부작용이 빈발했다. 심지어 성 기능 장애가 생긴다는 잘못된 소문이 돌아 약을 몰래 버리는 장병까지 늘었다. 군대 내 환자 발생이 늘어난 이유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들이 군내 감염병 예방 업무 담당자들을 불러 환자 발생을 줄이라고 닦달했다. 나를 포함해 당시 담당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극단적인 조처를 취했다. 반드시 간부와 병사가 함께 모여 약을 복용하게 하고 약 삼키는 것까지 확인하도록 강제했다. 또 불시에 지도 방문을 나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려진 약 봉투가 보이면 해당 부대 지휘관을 징계하겠다고 협박했다. 부작용에 시달리는 장병들의 빗발치는 민원에 시달려가면서까지 강제적으로 약 복용률을 높인 덕분에 환자 발생을 300명까지 줄였지만 여기서 더는 줄지 않았다. OECD 말라리아 발생률 1위라는 오명도 그대로였다. 휴전선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모기를 막을 수 없으니 북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를 퇴치하지 않는 이상 백약이 무효했던 셈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한반도는 열대지역보다 모기가 많지 않다. 유충이 서식하는 물웅덩이만 제대로 방역하고 북한과 인접한 지역 주민에게 예방약을 보급하고 환자 치료만 제때 해도 말라리아 정도는 쉽게 퇴치할 수 있다. 북한은 워낙 보건의료 인프라가 열악하지만 여러 국제기구가 진단키트와 치료제, 방충망 등을 지원해 2001년 30만명에 이르렀던 환자 수를 2017년 1800명까지 줄인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북한은 잇따른 군사 도발로 유엔 안보리의 제재가 강화되자 보건의료물품처럼 제재 대상이 아닌 인도적 지원까지도 거절했다. 게다가 지난 2020년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창궐하자 국경을 완전 봉쇄해 의료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 결과 말라리아 완전 퇴치가 요원해진 상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다시 말라리아 환자가 30만 명을 넘고 우리나라에까지 환자가 급증하는 사태가 생길 수 있다. 말라리아는 환자 치료에 비용이 크게 들지도 않는다. 약값 7000원이면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은 이런 말라리아 환자는 방치한 채 400억원짜리 연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쏘아대고 있다. 한번 쏠 때마다 말라리아 환자 570만 명을 치료할 수 있는 돈을 허공에 날려버리는 것이다. 굳이 ICBM 얘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에르메스 말 안장 하나 살 값이면 북한의 모든 말라리아 환자를 치료하고도 남는다. 제대로 남북 경협을 하려는 사업가라면 에르메스 말 안장이 아니라 말라리아 치료제를 선물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이니 김정은을 계몽 군주라 칭하는 추종하는 세력이 아니고서야 뒷돈 주고 얻어낸 거짓 평화를 지지하는 국민은 없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는 지난 10월 유니세프(UNICEF)와 WHO의 코로나 백신 및 마스크 지원과 말라리아 퇴치 사업, 일반 예방접종 사업 등의 인도적 대북 지원에 제재 면제를 승인했다. 북한만 동의한다면 뒷돈 없이도 충분히 말라리아 퇴치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윤석열 정권에서는 말라리아 남북 공동방역 사업처럼 호혜적인 사업의 투명한 진행을 통해 당장 눈앞에 놓인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박은식 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의사
-
"나 기다린거야?" 막내딸의 눈물…그제야 엄마 심장은 멈췄다 [김은혜의 살아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임종을 앞둔 환자 곁을 지키다 보면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종종 겪곤 한다. 하늘에서,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 간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준 것, 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 되는 그런 일들 말이다. 혹자는 간절함이 이뤄 낸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폐암 환자가 있었다. 60대 후반이라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였지만 우리 병원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의식이 없었다. 한방병원 암 병동을 찾는 암 환자는 이 환자처럼 더이상 손쓰기 어려운 마지막 단계에 보통 이곳에 온다. 보호자들은 미리 작성해둔 연명치료중단동의서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어머니가 고통 없이 가실 수 있도록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는 세 아들을 앞에 앉혀 두고 의학적 예후를 설명하자 모두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달을 넘기기 힘드실 것"이라는 말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 가족은 남은 과정을 존엄하게 준비하며 어머니를 잘 보살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긴 대화 끝에 자리를 마무리하려 하자 큰아들로 보이는 보호자가 주춤하며 내 가운을 붙잡고 말했다.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미리 알려주실 수 있나요?” 지금 외국에 있는 막내 여동생이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는 물론 임종 날짜를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건 경험상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전에 어느 병원 응급실에 갔을 때도, 연명치료중단동의서를 작성하기 전 또 다른 병원의 중환자실에 있을 때도, 그리고 우리 병원으로 옮기기 바로 전날에도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거나 "이번 주를 넘기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막내는 급하게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매번 환자는 그 고비를 넘겼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 오갔더니 직장 다니는 막내가 쓸 수 있는 연차가 이제 일주일 남짓만 남아 있다고 했다. 임종을 지키고 장례를 치르고 입출국을 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일주일도 빠듯했기에 막내가 최대한 빨리 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막내는 아들만 셋이었던 집안에 늦둥이로 태어난 딸이었다.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가서 해외에 쭉 사는 터라 유독 더 애틋한 동생이라고 덧붙였다. 한 사람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끝이지만 남은 이들에게는 그 부재를 견디고 일상에 적응해나가는 단련의 연속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냈으니까. 그렇기에 저 부탁을 들었을 때 받은 압박감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말로는 "월 단위, 최대한 주 단위 정도로는 말씀드릴 수 있지만 구체적 날짜를 지정할 수는 없다, 죄송하다"고 했지만 그 날부터 나는 매일 기도했다. 저 가족이 온전히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도록 제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환자는 오랜 기간 와식생활을 해와서인지 상태가 하루하루 달랐다. 어느 날은 범상치 않게 안 좋아졌다가 다른 날은 갑자기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암 환자의 생체징후를 보다 보면 ‘오늘’ 돌아가실 것 같다는 예감이 맞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이전 병원에서도 거듭 임종 날짜를 정확하게 얘기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 거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변화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에도 몇 번이고 환자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매일같이 서로 교대로 의식 없는 어머니를 찾아와, 듣고 계실지 모를 일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세 아들의 모습을 보니 그런 노력을 더욱이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실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소름이 확 돋는 기분이 들었다. 환자 주변의 공기와 냄새가 변한 것처럼 느껴졌고 무엇보다 안색이 다르게 보였다. 그 이상한 변화를 동료들에게 묻자 “오늘 그 병실 전등 하나가 나가서 그런 거 아니야?”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나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진 채 보호자에게 전화했고 큰아들은 전화를 받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어머니 지금 안 좋으세요?” 나중에 들어보니 그 날 먼저 가신 아버지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꿈을 꾼 막냇동생이 오빠들에게 전화했고,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내가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내 전화를 기점으로 나와 보호자들은 임종 준비를 시작했다. 막내딸도 바로 한국으로 출발했다. 사실 생체징후 상으로는 평소와 비슷한 정도였는데 왜인지 모르게 이번에는 저절로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환자의 옆을 계속 지켰다. 겨우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밤, 환자의 혈압이 잡히지 않기 시작했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첫 징후였다. 따님 도착시각을 물었더니 13시간도 뒤라고 했다. 결국 나는 이 가족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느끼며 "그때까지 버티기는 힘들 것 같다"고 보호자들에게 고했다. 그들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수긍했다. 그렇게 몇 시간 뒤, 심전도에서 아무것도 측정되지 않는 걸 확인하고 환자 몸에 부착되어 있던 기계들을 떼어 내며 사망선고를 하려고 했다. “2021년….” 프랑스 작가 펠릭스-조제프 바리아스의 '쇼팽의 죽음'(1885)의 한 부분. 연도를 시작으로 운을 떼려던 그때, 갑자기 환자가 크게 들숨을 쉬었다. 옆에 서 있던 간호사는 너무 놀라 펄쩍 뛰며 손에 쥐고 있던 기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급하게 다시 확인해보았지만 잠깐 심장이 멈췄던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심전도에 다시 작은 그래프가 찍히기 시작했고 호흡도 1분에 1번꼴로 큰 들숨을 쉬고 있었다. 몇 시간 뒤 "심전도 상에 그래프가 멈췄다"는 콜을 받고 다시 찾아갔을 때도 너무 미약한 반응에 기계가 측정을 못 하고 있었을 뿐 환자는 여전히 아주 가끔 숨을 쉬고 있었다. 이때부터 모든 기계가 무용지물이 되었고 의료진이 교대로 상주하면서 호흡을 체크하며 임종을 판단하기로 했다. 그렇게 그 환자는 병실로 뛰쳐 들어온 딸이 울면서 “엄마, 날 기다린 거야?”라고 말하며 끌어안았을 때, 당신의 두 눈에서 몇 방울의 눈물을 흘리고 나서야 호흡을 멈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의료진도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을 삼켰다. 이 모든 상황은 의학적으로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혹자는 우연이라 할 것이고 혹자는 간절함이 준 선물이라 할지 모른다. 무엇이든 간에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생각지 못한 순간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기 위함이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간절함을 잃지 않는다면 누군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살아내길 희망한다. 김은혜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
-
"암말기父 매주 찾아봬라" 의사 처방에...아들 "바빠서 그건 좀" [김범석의 살아내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시골에 사는 팔순 노인이 폐암4기 진단을 받았는데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보다 못한 서울 큰아들이 아버지를 억지로 서울대병원으로 모시고 왔다. 환자는 항암치료를 거부했고 아들은 강력히 항암치료를 원했다. 환자와 아들은 진료 내내 실랑이를 벌였다. 이 둘 사이에서 내가 환자 손을 들어주자 아들은 강력히 항의했다. “선생님, 항암치료를 하지 말자고요? 안됩니다. 우리 아버지 항암치료 꼭 해주세요. 이대로 돌아가시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남은 기대여명이 6개월 정도 돼요. 항암치료를 하면 4~5개월 더 연장할 수 있지만 무척 힘들어서 견디기 힘들어요. 무엇보다 환자분 본인이 원하지 않으시고요.” “그래도 항암치료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우리 아버지,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아들과 나의 실랑이가 길어지자 환자 본인이 한마디 했다. “내 나이가 이제 팔십둘이예요. 이 정도면 살 만큼 산 거에요. 때 되면 가야 하는데 이제 때가 된 거예요. 나는 이 정도면 만족해요. 내 친구도 항암치료 받다가 고생만 하다 그냥 가버렸어요. 항암치료 안 할래요.” 이쯤 되면 환자 뜻을 따르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아들을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들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평소 아버지를 얼마나 자주 찾아뵙나요?” 의외의 질문에 아들은 멋쩍어하며 잠시 쭈뼛거리다가 대답했다. “명절에 찾아뵙고 그 외엔 1년에 두세 번 정도 더 찾아뵙습니다.” 따져보니 많아야 1년에 너댓 번 찾아뵙는 셈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항암치료 처방이 아닌 다른 처방을 냈다. 내가 내린 건 매주 주말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라는 처방이었다. 항암치료를 해서 삶을 1년 더 연장한다고 하면 1년에 5번 볼 아버지를 2년에 10번 보는 거다. 그런데 매주 주말 아버지를 뵈면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도 스무 번 넘게 볼 수 있었다. 항암치료 없이도 함께 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오래 사시며 시간을 늘리기를 원한 아들에게도, 항암치료를 원하지 않은 아버지에게도 모두 윈윈이 되는 처방이라 생각하며 나 혼자 뿌듯했다. 하지만 아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 밖이었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제가 회사 일이 바빠서…. 매주 고향에 내려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오래 사셔야 효도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던 바로 그 아들이었다. 그런데 바빠서 매주 고향에 내려가긴 어렵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이탈리아 작가 폼페오 바토니의 '탕아의 귀환'(1773)의 한 부분. 자식들은 바쁘다. 어찌 된 노릇인지 죄다 바쁘다. 자식치고 안 바쁜 자식을 보지 못했다. 바빠도 보통 바쁜 게 아니다. 회사도 다녀야 하고 야근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자식들은 너무나 바쁘다. 맞다. 요즘처럼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는 그렇게라도 바쁘게 살아야 근근이 먹고 살 수 있다. 자식들도 사실 살기 힘들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모의 시간과 자식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그것도 많이 다르게 흘러간다. 나의 시간으로는 부모님은 아직 돌아가실 때가 안되었는데, 부모의 시간으로는 이미 때가 되었다. 나이든 부모는 이미 기다림을 많이 써서 그렇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하루 24시간 같지만 누구에게나 다르게 흘러간다. 자식에게는 고향 내려가는 길이 3시간 같아도 노부모에게는 3일로 느껴진다. 주말에 자식들이 내려온다고 하면 3일 전부터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지 않던가. 나에게는 고작 3시간이 지났지만 부모님은 3일만큼 늙어버렸다. 그래서 부모의 시간과 자식의 시간은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벌어진다. 60대 같았던 부모님은 이미 80대가 넘었다. 그 와중에 바쁨은 시간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의 문제가 된다. 부모에게 자식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적이 없건만 자식에게 부모는 살아온 세월의 흔적만큼 우선순위에서 멀어진다. 물론 정말 어쩔 수 없는 바쁨이 있다. 다른 피치 못한 중요한 일이 많을 수 있다. 그래서 노부모에게 양해를 구하고 죄송하다고 하면 대부분의 부모는 이해해준다. 오히려 바쁜데 뭐하러 오냐고 대답한다. 사실 바쁜데 명절 때 오지 말라는 이야기는 정말 오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잘해드린 건 없는데 자꾸 늙어만 가는 모습을 보면 자식들도 괴롭다. 자식들은 효도도 하고 싶고 바쁜 일을 포기하기도 싫고 모든 것을 다 움켜쥐고 싶다. 효도는 머릿속으로만 맴돌고, 현실은 처리해야 하는 바쁜 일로 골치 아프다. 자식들도 괴로울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때 내 귀에는 바쁘다는 이야기가 "자식들이 바쁘니 당신은 더 늙지도 말고 아프지도 마시고 지금처럼만 계시라"는 야박한 이야기로 들린다. 이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이런 야박한 생각은 접고, 부모님의 시간에 맞춰보면 어떨까. 김범석 서울대 암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
순식간에 사그라든 청년 정치 열풍...그래도 포기하진 맙시다 [허은아가 고발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지난주에 외동딸이 수능 시험을 봤다. 두 번째 도전이다. 시험장에 가고 오는 길을 딸과 함께했다. 그날 수험생 부모 마음은 모두 같았을 것이다. 자식이 좋은 성적을 얻어 원하는 길로 접어들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안다.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더라도 앞으로 수많은 성공과 좌절의 갈림길을 계속 마주하게 될 것을. 시험장에서 나오는 학생들, 그리고 근처 허공에 걸려 있는 정치인의 응원 플래카드를 번갈아 보면서 정치가 청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동안 생각했다. 미안한 마음이 내내 들었다. 그런 마음이 앞설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프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정치인은 공정·정의·자유·혁신의 미래를 말해왔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의 젊은이들은 그게 말뿐이라고 한다. 혹시 내게 '살아남은 자'의 뻔뻔한 당당함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7일 경기도 수원시의 한 학교에서 수능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이 환하게 웃으며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1972년생인 나는 산업화 시대에 태어나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며 자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항공사 승무원이 됐다. 허리가 고장 나 5년 만에 퇴직했다. 잠시 쉬고 일반 기업에 취업하려고 했는데, 기혼 여성을 받아주는 곳이 거의 없었다. 암 투병 중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둘러 결혼을 한 게 재취업의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떠밀리듯 자본금 500만원으로 20대 후반에 창업했다. 외환 위기 직후인 1999년에 지인 회사의 책상 하나를 빌려 이미지 컨설팅 회사를 만들었다. '청년 창업'은 예나 지금이나 말만 화려할 뿐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많이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조그만 과일 가게 딸이라 가족의 경제적 도움이나 인맥을 바랄 수 없고, 기댈 학연도 없던 젊은 창업자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하루에 수백 군데 문을 두드리며 일감을 구했고, 그 힘으로 20년을 보냈다. 나처럼 직접 겪어 본 사람은 안다. 그냥 얼마씩 뿌려주는 돈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내가 벌어가면서 갚을 수 있는 사업 지원금 제도가 더 필요하다. 또 돈보다 투명한 정보와 공정한 경쟁이 절실한 순간이 많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원하는 것을 말할 때 진지하게 들어주며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버팀목이 된다. 나는 운이 좋았다. 사다리에 올라탄 후에 여러 고비가 있었지만, 다행히 떨어지지 않고 사업가가 됐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런 의문이 있었다. 운이나 확률에 의한 생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도 되는지, 사다리가 너무 적은 것은 아닌지. 2년여 전 총선을 앞두고 보수 정당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청년들에게 사다리 대신 예측 가능하고 비교적 안전한 계단을 만들어주는 선한 정치에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느덧 3년이 되어간다. 현실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취업·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청춘은 줄지 않았다. 일자리·노동·주거·보육·교육에서 운에 의지하는 아슬아슬한 사다리 타기는 여전하다. 물론 당장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하루아침에 획기적으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변화의 기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성 정치가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반성과 함께 '청년 정치'가 보수 정당에서 돌풍을 일으켰을 때다. 30대 정치인 이준석이 몰고온 청년 바람 속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이 보궐선거에서 당선했다. 청년들이 유세 단상에 올라가 자신들이 바라는 공정하고 상식적인 세상에 대해 거침없이 얘기했고, 그들의 희망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가 꿈틀댔다. 그 에너지는 이듬해 20대 대통령 선거로 이어졌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그들이 만든 다양한 정치 콘텐트가 넘실댔다. 국민의힘의 변화는 다른 당으로도 퍼졌다. 이제 좀 세상이 바뀌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해 4월 보궐선거 유세장에서 청년들과 함께 연단에 서서 지지를 호소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선거라는 파티가 끝난 후에 환희와 열광이 순식간에 사그라진 것은 보수, 진보 양 진영 다 마찬가지였다. 정치는 제자리로 회귀했다. 청년에게 했던 온갖 약속도 그들의 자리처럼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들이 배신감을 느낄 만하다. 내가 300분의 1의 책임을 안고 있는 21대 국회는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 의원들 스스로 각자의 사다리 타기 투쟁이 먼저다. '민의'가 아닌 '충성'에 목매게 하는 정당 정치의 결과다. 과거의 유산인 권력과 보스 중심의 계파 줄서기, 공천권을 위한 헤게모니 갈등, 그리고 최근에 추가된 팬덤 정치 속에서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커갈 뿐 청년 문제 해결 노력은 보기 어렵다. 선의의 경쟁은 보이지 않고 적의 가득한 말들만 난무한다. 그 과정 속에서 한편에선 청년이 들러리가 됐고, 다른 한편에선 청년이 '방탄' 조직이 됐다. 지난 6·1 지방선거에서 30대 이하 투표율은 30%대에 그쳤다. 대선 때 50%에 육박했던 2030 세대의 여당 지지율은 최근에 20%대로 내려앉았다. 야당도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다. 기성세대와 달리 지금 이 나라의 청년은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서 청춘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다. 때때로 발표되는 높은 자살률, 낮은 행복지수가 이를 증명한다. 초저출산 때문에 온 나라가 걱정인데도 뭘 좀 하려 들면 높은 경쟁률에 기겁한다. 이곳은 여전히 고밀도 사회다. 좁은 사다리에 몰려든 좀비 떼에 자신들을 비유하는 청년도 있다. 권력 싸움과 기회주의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를 그들은 절대로 '추앙'할 수 없다. 다시 정치와 정치인을 외면하는 청년들에게 무어라고 말하며 관심을 아예 버리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정말 모르겠다. 정치인으로서 미안하고 부끄럽다. 염치없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싶다. 우리는 반드시 계층·세대·젠더 갈등과 고령화에 따른 무거운 짐 대신 희망의 계단이 곳곳에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부탁한다. 정치와 완전히 헤어지지는 않기를, 그리고 기회를 만들어 직접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를. 동시에 나 스스로 다짐한다.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걷겠다고.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