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세 신구 "죽은 뒤 시신 기증해 의대생들 공부에 도움되고 싶다" [이지영의 직격인터뷰]

     ━  흥행 돌풍 ‘고도를 기다리며’ 주인공 88세 배우 신구   지난 11일 서울 잠실에서 만난 배우 신구.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행복”이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88세 노배우는 “더 바랄 게 없다”고 했다. 63년 차 배우 신구. 그는 지난해 12월 개막해 연일 만원사례 역사를 쓰고 있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의 주인공이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린 ‘고도’는 울산·춘천·세종·강릉·대구·고양·화성·대전 등을 다니며 지금까지 총 69회 공연 전 회차 전석 매진 기록을 세웠다. 오는 26일엔 국립극장으로 돌아와 서울 앵콜 공연에 들어간다. 앵콜 공연 이후에도 부산·부천·이천 등 기다리는 무대가 줄을 섰다. 다음달 7일 시상식을 하는 제60회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 후보에도 올라있다.   “내 연극 인생에서 이렇게 관객들이 호응해 준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배우 신구를 지난 11일 그의 서울 잠실 집 근처 음식점에서 만났다.     ■  「 총 69회 매진…서울선 앵콜 공연 “63년 연기 인생 이런 호응 처음”   급성 심부전에 심장박동기 삽입 “탈진할 때까지 온 힘 쏟을 각오”   자랑도, ‘라떼’도, 잔소리도 질색 “사후 시신 기증해 도움 되고파” 」  이지영 논설위원 우리 연극사에 유례없는 흥행 바람이다. 지금 기분이 어떤가. “너무 고맙다. 사실 난 요즘 이 ‘고도’ 때문에 산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고도’를 계속 하고 싶다.”   부조리극의 대명사 ‘고도’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대표작이다. 고도(Godot)라는 미지의 인물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노숙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역을 그와 박근형(84) 배우가 나눠 맡았다.   관객들이 왜 이렇게 ‘고도’에 열광할까. “다 내 얘기고 우리들 얘기여서다. 우리 일상이 늘 그렇지 않냐. 각자 다 바라고 기다리는 게 있고, 자고 나면 뭐가 달라지겠지 기대하며 살고, 안 달라져도 또 달라지겠거니 하면서 살고…. 그러면서 나이 드는 게 아니겠나.”   매회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의 기립박수가 쏟아진다. “번번이 소름이 끼칠 만큼 전율을 느낀다.”   한물 간 것처럼 보였던 연극이란 장르로 이렇게 관객을 열광시킬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음식도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들어내면 장소가 어디라도 맛집이라고 찾아간다. 진정성 있는 사람들이 모여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면 볼 만한 연극이라고 관객들이 인정해주신다. 진정성이 중요하다. 이번 ‘고도’ 의상처럼 마음에 드는 연극 의상은 처음이다. 안에 입는 속옷까지 진짜 노숙자 옷처럼 구멍을 내고 찢어놨다.”   그는 ‘처음처럼’이란 말을 좋아한다. ‘고도’ 공연 시작 전 출연진들끼리 외치는 구호도 ‘언제나 처음처럼’이다. 그는  ‘처음’의 의미에 대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이라고 설명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에스트라공을 연기하는 배우 신구. 누군지도 모르는 ‘고도’를 무작정 기다리는 역할이다. [사진 파크컴퍼니] 처음 ‘고도’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망설였다. 건강 문제가 컸다. 지난해 4월 그는 인공 심장박동기를 몸에 삽입하는 시술을 받았다. 급성 심부전증으로 느려진 심장 박동을 정상 리듬으로 조절해 주는 장치다. 시술 전후 그는 체중이 8㎏나 줄어들며 급격히 체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고도’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걸 놓치면 앞으로 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42㎞를 뛰고 결승선에 들어와 탈진해 쓰러지는 마라토너처럼, 그렇게 온 힘을 다 쏟아내기로 했다.”   교체 배우 없는 원캐스트로 장기 공연을 이어가고 있는데, 건강은 괜찮나. “공연을 시작하면서 체중도 늘고 더 건강해졌다. 다리 힘을 키우기 위해 매일 1시간반씩 실내 자전거와 레그프레스를 한다. 체력 보강용으로 두 차례 링거도 맞았다.”   그야말로 ‘올인’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나. “연극은 내게 소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먹고 사느라 연극에 올인하지 못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하니 연극만 해선 먹고살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불러주니까 거기 가서 돈 벌어 우선 살자 했다. 연극을 하고 싶은데 자꾸 시간이 밀렸다. 그래도 틈을 봐서 해마다 한 편씩은 연극을 하려고 했다.”   그는 남산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서울예대 전신) 1기로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경기중·고 출신인 그는 서울대 상과대학를 목표로 치른 입시에서 두 차례 낙방한 뒤 군대에 갔다. 제대 후 우연히 신문에서 아카데미 1기생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을 했다. 운명같은 끌림이었다. 그곳에서 동랑 유치진(1905∼74) 선생으로부터 체계적인 배우 훈련을 받았다. 이름 ‘신구’도 동랑이 지어줬다. 그의 본명은 ‘신순기’다. 동랑의 추천으로 1년간 미국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 West Center)로 유학도 다녀왔다.   그의 연기 인생은 순탄했다. 1962년 연극 ‘소’로 데뷔한 뒤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1966, 69, 71년 세 차례나 받았고, 1972년 TV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하면서 근엄한 아버지상의 대표 얼굴이 됐다.   인터뷰가 자신의 ‘활약상’으로 흐를 기미가 보이자 그는 불편해했다. “60년 해서 이 정도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고도’에도 ‘저마다 끊임없이 제 인생 얘기 지껄여댄다’는 대사가 있다”면서 화제를 바꾸고 싶어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트라우마가 됐다”는 실패담을 끄집어냈다. 2020년 연극 ‘라스트 세션’ 초연 무대에 섰을 때 일이다.   “공연 중에 대사를 잊어버려 서너 페이지를 건너뛴 적이 있다. 전문용어가 생각이 안 나서 막히니까 그 뒤가 전부 막혀버렸다. 겨우 기억해낸 게 서너 페이지 뒷부분이었다. 연극이 엉망이 됐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2인극인 ‘라스트 세션’은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나니아 연대기』 작가 C S 루이스가 신(神)과 양심, 행복과 고통, 성(性)과 억압 등에 대해 논쟁을 펼치는 내용이다. 공연 시간 90분 내내 두 배우의 설전이 마치 학술 대담이라도 하듯 쉬지 않고 이어진다. 배우의 대사 암기 부담이 상당한 작품이다.   관객들도 눈치를 챘을까. “물론 알았을 거다. 무대는 거짓말을 못 한다. 관객들이 얼마나 불쾌했겠는가. 너무 미안하다. 그 마음의 짐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날 관객들 박수 소리가 평소와 좀 달랐나. “기억 안 난다.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끝이 났다.”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했나. “그걸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에 오기가 생겼다. 연습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후 새 작품 ‘두 교황’(2022)에 출연하면서는 난생 처음 인이어(in-ear)까지 사용했다. 혹 대사를 잊어버릴 때를 대비해 무대 밖 스태프와의 소통 통로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인이어가 오히려 연기에 방해가 됐다”고 했다. 다시 반복 연습이란 정공법으로 돌아왔다. 자다가도 ‘고도’ 대사를 할 수 있게 된 요즘에도 “공식 연습과 별도로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저녁에 자기 전에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집에서 연습을 한다”고 했다.   그는 젊은 후배 배우들과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기로 유명하다. 함께 연극 공연을 했던 이상윤·조달환·박소담·권유리 등과는 생일파티도 함께 하는 사이다. 작품 속에서 그의 아들 역할을 여러 번 했던 조달환은 그를 평소에도 ‘아버지’라고 부른다.   잔소리 안하는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다. 후배 연기자들에게 못마땅하거나 걱정스러운 부분이 보일 법도 한데. “나이 들었다고 자기 세대만 잘 하고 살았다고 주장하면 안된다. 옛날에도 늘 어른들은 ‘라떼’ 얘기 하면서 ‘세상이 망했어’ 그랬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발전했다. 내가 어렸을 땐 이맘 때가 딱 보릿고개였다. 먹을 게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곤 했다. 내가 차를 갖게 될 거라론 상상도 못했다. 우리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자라는 애들에게 굳이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필요 없다. 물어오면 알고 있는 것 대답해주기만 하면 된다.”   주례도 안 한다고 들었다. “주례 하면 다 좋은 말 해야 할텐데 내가 그렇게 살 자신이 없어서 못한다고 했다.”   그는 충고나 제언을 이렇듯 조심스러워했다. 하지만 연극 지원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땐 강한 목소리를 냈다.   “좋은 창작 연극이 안 나온다고 그러는데 10억쯤 고료를 주면 호응해 오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요즘 세상은 돈도 따라야 한다. 현재 상태론 좋은 작가를 기르는 데 한계가 있다. 국가 정책으로 창작 희곡 작가를 육성하는 배려를 해주면 좋겠다. 한 작품이라도 건질 수 있게. 우리나라가 옛날처럼 못 사는 나라도 아니지 않냐. 우리도 예산이 적지는 않다. 그러니까 누가 정책만 잘 세우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인터뷰 내내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다시 연기하고 싶은 작품이 있냐는 질문에도, 평생 기억에 남는 명대사가 있냐는 질문에도 “없다”고 못박았다. 다음 작품 계획도 “없다”고 했다.   “내일이 되면 오늘이 역사고, 오늘이 미래의 모멘텀이 되는 것 아니냐. 오늘을 어떻게 지내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지금 하고 있는 작품만큼 중요한 게 없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도 없나. “그냥 살 때 최선을 다해 재미있게 살면 그만이다. 누가 알아주고 말 것도 없다. 다만 시신 기증은 하려고 마음이 거의 기울었다. 살면서 쌀 한 톨 생산해 본 적 없는데 죽어서 의대생들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다.”   ◆신구=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2년 데뷔한 이후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파우스트’‘3월의 눈’, 드라마 ‘개국’‘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나의 아저씨’,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천문’ 등 2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2002년 롯데리아 광고의 ‘니들이 게맛을 알아’는 아직도 회자되는 유행어다. 평양냉면을 즐겨 먹고, 커피는 아이스아메리카노로 마신다.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2024.04.19 00:34

  • 尹캠프 보건총괄 "정부 2000명 고집 말고, 의사 사직서 거둬야" [신성식의 직격인터뷰]

     ━  윤 캠프 보건위원장 박은철의 의료사태 해법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혼란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전공의 이탈에 이어 의과대학 교수의 집단 사직이 줄을 잇는다. 의대 교수는 피로 누적을 이유로 외래 진료까지 축소하고 있다. 수술이 무기한 연기된 환자들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나중에라도 수술을 받아야 할 처지라 의사 눈치 보느라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도 못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일 의료계의 대화 참여를 촉구하고 예산 편성까지 협의하겠다고 나섰지만, 의사들은 요지부동이다. 의대 교수들은 “2000명 증원 철회”를 대화의 선결 조건으로 내세운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신임 회장은 오히려 의대 정원 축소를 주장하고 있다.     ■  「 2000명 고수하면 대화 불가능, 대화 의제에 포함해야 급격히 늘리면 줄이기 힘들고 기초의학교육 부실해져 ‘1000명 10년 증원’ 바람직, 의과학과 400명 검토 필요 의대 교수는 마지막 보루, 의사 본분 벗어나지 말아야 」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2022년 대선 캠프 정책총괄본부 보건바이오의료정책분과 위원장을 지낸 박은철(62) 연세대 의대 교수(예방의학)에게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방안을 들었다. 박 교수는 20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사회복지분과 자문위원을 지냈고, 지금은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지역필수의료혁신TF 민간위원을 맡고 있다. 박 교수는 의료계와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한동훈 위원장 역할 더 필요   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가 지난 25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의료 혼란 사태의 원인과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사태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2000명 증원 방침’을 수정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의료계도 환자를 떠나 있으면 결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진료에 복귀해서 대화를 개시해야 한다.”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이유는. “2000명이라는 숫자를 고정한 상태에서 대화하자고 하니 잘 풀리지 않는다. 정원 문제를 의제에 포함해야 한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2000명 선 시행, 후 조정’ 비현실적   김경진 기자 일단 2000명을 시행하고 내년에 재조정하자는 주장이 나오는데. “현실성이 떨어진다. 충북대 의대의 경우 49명 정원을 200명으로 늘렸다가 다시 줄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럴 바에 차라리 2000명을 계속 늘리는 게 낫다.”   의사를 늘려야 하지 않나. “서울·수도권에서 일상적인 진료를 받을 때는 부족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필수의료 의사, 지역 의료 의사는 분명히 부족하다. 이건 현재 시점의 문제이다. 의대 증원과 관계없이 당장 풀지 않으면 안 된다.”   박 교수는 왜 ‘2000명 증원’을 풀자고 주장할까. 박 교수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한국개발연구원 등의 3개 보고서와 별도로 인구·의료이용·진료량 등의 데이터를 활용해 향후 의사 인력을 추계했다. 3개 보고서처럼 2035년 의사가 1만명 부족하다고 나왔다.   1만명 부족해서 1만명 늘리자는 게 잘못인가. “한국은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올해보다 내년이, 내년보다 그다음 해가 더 심해진다. 의사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지만 2035년 이후를 잘 봐야 한다. 조금씩 의사 부족(의료 수요) 현상이 줄어들고, 2045년에 의사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 이후 의사가 남기 시작해 2070년 10만명 넘친다. 정부 계획대로 가면 수요·공급 일치 시점이 2040년께로 당겨진다.”   수요가 급격히 느니 의사도 급격히 늘려야 하지 않나. “의료 수요가 가파르게 느는 건 맞다. 다만 2010~2020년 노인 인구 증가율이 그전보다 떨어지는 추세다. 2000명씩 가파르게 늘리면 나중에 줄일 때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출산율이 0.6명대로 급락하지 않았느냐. 이런 게 의료 수요에 다 영향을 미친다.”   김경진 기자 그는 “통계청의 장래인구 추계가 나올 때마다 그 전 추계보다 평균수명은 조금 늘고, 출산율은 훨씬 낮아진다”며 “이런 현상 탓에 예측보다 의료 수요가 더 줄어 의사가 더 남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또 “대폭 증원이 교육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부가 의대생이 본과에 들어가는 2027년까지 여건을 맞추겠다는데. “시설과 장비는 어떡하든 맞추고 임상 진료 의사는 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초의학 담당 교수는 당장 구하기 어렵다. 기초의학은 20년 동안 곪을 대로 곪았다.”   이공계 박사를 활용할 수 없나. “한계가 있다. 그들이 전공한 심장을 가르칠 수는 있으나 이와 관련된 폐까지 짚어주기는 힘들다.”   서울 0명, 나머지 50% 증원이 적정   대안이 있나. “정부가 40개 의과대학에 배정한 증원 규모를 그대로 인정한 상태(서울은 0명)에서 세 가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1안은 현 정원의 두 배까지만 늘린다. 그러면 1494명 증가한다. 2안은 60%까지만 늘리는 안이며 1093명 증가한다. 3안은 50%까지 늘리며 956명 늘어난다.”   박 교수는 “1안도 교육 여건이나 향후 감축 과정을 고려하면 선택하기 쉽지 않다. 3안, 2안 순으로 적합하다”며 “1000명을 10년 늘리는 것도 대안”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다 2026학년도에 50명 정원의 의과학과(의사과학자 양성)를 4개 대학에 신설해 200명을 뽑고, 이듬해 4개 대학을 추가해 400명으로 늘리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경희대·부산대·원광대·동국대 등 의대·한의대를 둔 5개 대학의 한의대 정원 350명을 의대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하면 2000명을 늘리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박 교수는 “특히 신설 의대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지금 40개 의대도 통합해야 할 텐데 더 늘려서는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정원 문제까지 포함해 대화해야 윤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필수 패키지 대책 95점, 지역의료 80점   필수의료 패키지를 어떻게 보나 “잘 만든 대책이다. 필수의료 대책은 95점, 지역의료 대책은 80점이다. 교통사고특례법처럼 의료사고 형사처벌 특례법 제정을 제시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들을 빠짐없이 담았다. 2000명 증원 빼고는 크게 문제 삼을 게 없다. 그런데 2000명 증원을 좀 더 일찍 공개했으면 시뮬레이션을 해서 따져볼 수 있었을 텐데,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오는 바람에 토론할 기회가 없었다. 적정 의사가 어느 정도인지 토론회 한 번 한 적이 없다.”   보완할 점은 뭔가. “수가 인상 계획을 구체화해야 한다. 또 응급·야간은 무조건 올려야 한다. 진료 과목이 아니라 세부 과목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뇌 수술 같은 신경외과 분야를 지원하고 척추 같은 데는 뺄 수 있다. 뇌·심장·암 등의 고난이도 행위는 돈을 더 주는 게 맞다. 골든 타임이 있는 분야는 어떡하든 수가를 크게 올려야 한다.”   박 교수는 의료계의 집단행동에도 일침을 가했다. 박 교수는 “의료계가 2020년 의대 정원 파업에서 완벽한 KO승을 거둔 기억을 되살려 이번에도 밀어붙이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듯하다”며 “정부를 굴복시키고 백기 투항을 받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비판했다.   2020년 파업 때와 이번이 다른가. “현 정부는 이전 정부와 스타일이 다르다. 이번 사태의 환경도 2020년 파업 때와 다르다. 당시 정부가 공공 의대를 만들되 시민단체가 추천한 학생을 뽑게 하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코로나19와 싸우는 전사(의사)를 힘들게 한다는 동정적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게 없다. 다만 이번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규모를 2000명까지 높게 잡지 않았으면 의료계의 큰 반발 없이 넘어갔을 수도 있는데, 아쉽다.”   아무리 억울해도 환자 외면 안돼   의대 교수 사직이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본분을 벗어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눈앞의 환자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대화가 시작되려는데 물리적 행동을 하는 건 곤란하다. 협상 도중에 망치를 들어서야 되겠나. 사직서를 낸 게 잘못이다. 이를 취소하고 협상하는 동안 보류해야 한다. 대학병원 교수는 환자의 최후의 보루이다. 쓸 수 있는 무기가 사표밖에 없는데 아껴야 한다.”   의료계가 흩어져 있다. “의사협회·병원협회·교수·전공의·의대생 등 5개 직역 대표단을 구성해야 한다. 2000년 의약분업 파동 유사하게 10인 소위원회를 꾸려 타협을 끌어냈다.”   환자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의료 파행이 더 길어지면 의사 집단이 국민 신뢰를 크게 잃게 될 것이고 이를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태가 끝나면 전공의가 돌아올까 “전공의는 50%, 의대생은 80% 돌아올 것으로 본다. 이참에 대형병원도 전공의 의존 구조에서 탈피해야 한다. 입원환자 전담 의사를 비롯해 전문의와 진료 지원 인력(PA)을 늘려 전공의의 빈자리를 메워야 한다. 정부는 조속히 법률과 수가로 뒷받침해야 한다.”   ◆박은철(62)=연세대 의대 출신의 예방의학 전문의이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후과정을 밟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연구실장, 한국보건행정학회장, 여의도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등을 거쳤다. 현재 기재부 서비스산업발전TF 위원, 제21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2024.03.29 00:35

  • 신진서 "커제? 자신 있었다…부담감? 1인자라면 이겨내야" [손민호의 직격인터뷰]

     ━  농심배 역전 우승 신진서   손민호 레저팀장 지난달 23일 한국 바둑 최강자 신진서(24)가 끝내기 6연승으로 제25회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로써 한국은 농심배 4연패이자 16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이렇게만 정리하면 신진서가 이뤄낸 쾌거의 의미, 동시에 바둑 팬이 느낀 희열의 강도가 바래고 만다. 신진서의 승리는 이보다 더 위대했다.   비유하자면, 신진서의 승리는 히어로 영화를 닮았다. 홀로 남은 주인공이 적을 다 무찌르고 나라를 구하는 영웅담 말이다. 여기에서 나라는 중요하다. 농심배는 한·중·일 세 나라가 펼치는 국가 대항전이어서다. 나라마다 5명씩 출전해 연승 방식으로 최후 승자를 가린다. 이번 대회 한국은 신진서 혼자만 남았었고 일본도 1명, 중국은 5명 전원이 살아 있었다. 1대 6의 궁지에 몰렸던 한국 바둑을 신진서 혼자 구해냈다. 신진서의 농심배 승리는 이렇게 극적이었다. 도무지 깨질 것 같지 않았던 이창호의 19년 전 기록도 새로 썼다. 알파고 이후 잠잠했던 한국 바둑계가 다시 술렁였고, 신진서 한 명에게 소위 ‘올킬’ 당한 중국은 시방 후유증을 앓고 있다.    ■  「 끝내기 6연승으로 이창호 기록 넘고 한국 우승 이끌어 “커제 지자 중국팀 초조해지고 공기 달라지는 것 느껴져 끝없이 성장하고 끝없이 성숙해지는 기사 되고 싶다” 」  4일 오후 서울 한국기원에서 신진서를 만났다. 농심배가 열린 중국 상하이에서 돌아온 지 열흘 만이었다. 그동안 신진서는 바빴고, 아팠다. 열이 39도까지 올라 병원에서 수액 주사를 맞고 대국에 나가기도 했다. 신진서와 세기의 역전 드라마를 재구성했다. 농심배 복기 일문일답이다.  제25회 농심배에서 끝내기 6연승으로 한국의 역전 우승을 이뤄낸 신진서 9단. 최종전에서 중국 구쯔하오 9단과의 대국 장면을 다중 촬영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해 12월 4일 농심배 2라운드 최종전. 7연승 중이던 중국 셰얼하오를 부산에서 만났다. 신진서 당신도 지면 한국 선수 전원이 2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당신에게도 복수의 기회였다. 불과 13일 전 당신은 삼성화재배 8강전에서 셰얼하오에게 대마를 잡히며 패했다. 복수를 생각했나.  “개인적인 복수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이 꼴찌 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삼성화재배에서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나는 컨디션이 돌아왔고, 셰얼하오가 기세를 탔다고 하지만 최상위권 선수는 아니다.”   지난달 18일 상하이로 날아갔다. 어떤 생각이었나. “상하이로 갈 때는 우승만 생각했다. 꼴찌만 피하자는 생각은 오래전에 버렸다. 승산이 있다고 봤다. 한 판 한 판 집중하면 연승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난달 19일 농심배 최종 3라운드 첫판. 일본의 이야마 유타를 가볍게 제쳤다. 일본 선수에게 한 번도 안 졌다는 걸 알고 있었나. “물론이다. ‘전생에 이순신 장군이었느냐’고 말하는 바둑 팬도 있다. 프로기사 초창기에는 싸움을 즐겼다. 얌전한 편인 일본 바둑을 상대하기가 수월했다. 내가 계속 이기니까 요즘은 일본이 부담을 느끼는 것 같다(신진서의 일본 기사 상대전적은 41승 무패다).”   지난달 20일 중국팀의 첫 주자로 자오천위가 나왔다. 자오천위가 장고파라 해도 다 끝난 바둑인데 시간을 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당연한 작전이었다. 농심배는 단체전이니까. 막판까지 형세가 미세했거나 난해한 전투가 벌어졌으면 피로를 느꼈을지 모르지만, 다른 대국도 대부분 종반에는 편한 형세였다. 별 타격은 없었다.”  한국 바둑의 전설 이창호, 조남철, 김인, 조훈현의 손 동판 앞에서 손을 들어보이는 신진서 9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다음날 상대는 커제였다. 요즘 하락세라지만, 커제는 103개월이나 중국 1위를 지켰던 강자다. 지금도 중국 2위다. 그런 커제에게 완승을 거뒀다. 바둑 내용도 가장 좋았다. 이제 커제는 당신의 상대가 못 되는가. “내가 어렸을 때 커제는 나보다 분명 뛰어난 기사였다. 그러나 2019년 바이링배 결승과 2020년 삼성화재배 결승을 치르며 생각이 바뀌었다. 두 번 모두 커제에게 졌지만, 실력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경험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이번에도 자신 있었다(이날 승리로 신진서는 커제와의 상대전적에서 앞서기 시작했다. 현재 12승 11패로, 최근 7연승 중이다).”   커제를 이기고 우승을 예감했나. “자오천위를 이겼을 때 5대 5라고 봤다. 커제를 이겼을 땐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중국팀이 초조해하는 게 느껴졌다. 커제가 지자 중국팀 공기가 달라졌다.”   그 다음날엔 딩하오도 쉽게 이겼다. 초반 연구한 포석이 나왔다던데. “한국에서 국가대표팀과 공부했던 포석이 그대로 나왔다. 초반에서 기울어지니까 딩하오도 당황했던 것 같다(바둑에도 국가대표팀이 있다. 그러나 올해 바둑 국가대표팀은 축소됐다. 코치가 3명에서 1명으로 줄었다. 문체부가 한국기원 예산을 10% 깎았기 때문이다.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체부 유인촌 장관은 지난달 26일 금의환향한 신진서를 불러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진서는 장관에게 바둑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   딩하오는 지난해 2관왕(LG배와 삼성화재배)을 차지한 초일류 기사다. 그 딩하오에게도 초반 확보한 우세를 끝까지 끌고 갔다. 치열한 전투바둑이었던 기풍이 바뀐 것인가.  “후반전에서 자신감을 느끼면서 예전과 달리 급한 마음이 없어졌다. 중반에 판을 장악하는 능력이 나아졌다. 이창호의 형세 판단과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싸움을 하면서 판을 정리한다.”   딩하오와 대국 이후 중국 팬 수백 명이 당신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다. “중국에서 바둑은 인기 스포츠다. 좋아하는 선수가 있으면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에선 꿈도 못 꿀 일이다.”   지난달 23일 최종국이 열렸다. 상대는 중국 1위 구쯔하오였다. 승리를 확신했나. “오히려 이날은 긴장했다. 피곤하기도 했다. 중후반 우변에서의 실수도 그래서 나왔던 것 같다.”   실수가 나왔을 때 상황을 좀 더 설명해달라. 그때 한국에선 정말 지는 줄 알았다. 중국 검토실에선 환호성이 터졌다고 한다. “나중에 보니 AI는 형세가 크게 나빠졌다고 분석했더라.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유리했던 바둑이 복잡해졌다는 느낌 정도였다. 구쯔하오가 바둑을 어지럽게 잘 짰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당황했으면 작년 란커배처럼 망쳤겠지만, 다시 승부에 집중했다. 운이 작용했는지, 구쯔하오도 실수가 나왔다(지난해 란커배 결승에서 신진서는 구쯔하오에게 1대2로 역전패했다).”   구쯔하오에 재역전승을 거두면서 신진서는 끝내기 6연승을 완성했다. 끝내기 5연승으로 2005년 우승을 이끌었던 이창호의 상하이 대첩을 뛰어넘었다. 신진서는 농심배 16연승을 기록해 이창호의 대회 최다 연승 기록(14연승)도 갈아치웠다.   그러나 신진서는 기념비적 승리를 만끽하지 못했다. 신진서가 상하이로 날아간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가족은 대회가 끝나고서야 할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신진서는 그날 밤 호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새 역사를 쓴 신진서에게 다음 목표를 물었다. 1인자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바둑 외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모습이 여전히 바둑에서 나오는 것 같다. 끝없이 성장하는 기사, 끝없이 성숙해지는 기사가 되고 싶다. 1인자로서 져야 하는 부담감이 약점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인자라면 당연히 이겨내야 한다.”   ■ 신진서 누구인가 「 제25회 농심배에서 이창호 9단의 기록을 뛰어넘은 신진서 9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00년 부산에서 신상용(61)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운영하는 바둑학원에서 다섯 살 때 처음 바둑을 배웠다. 바둑 입문 1년 만에 아마추어 5단 기력의 아버지를 상대로 백을 잡았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인터넷 바둑을 뒀는데, 그때 아이디가 ‘수미성모’였다. 당시 수미성모는 천야오예·미위팅 등 중국 프로기사들을 꺾는 얼굴 없는 강자였다.    신진서는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 때 프로기사 입단대회에서 떨어졌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대회에 참가하는 게 힘들었다고 신진서는 회고했다. 신진서의 부모는 남다른 아들을 위해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서울로 이사 왔고, 신진서 뒷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이윽고 신진서는 2012년 12세 4개월에 영재 입단대회를 통해 프로기사가 됐다. 역대 5위의 어린 나이 입단이다. 충암도장에서 지도사범을 맡았던 한종진 9단은 “승부욕이 대단했던 아이”라며 “바둑을 지면 화장실에서 한참 안 나왔다”고 말했다. 충암중학교에 진학한 신진서는 바로 학교를 그만뒀다. 바둑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신진서는 2020년 LG배에서 메이저 세계대회 첫 우승을 기록했다. 기대보다 첫 우승이 늦었다. 신진서는 정상 문턱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2016~2019년을 “굴곡의 시기”로 기억한다. 현재 신진서의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 기록은 6회다. 중국의 커제가 8회 우승했고, 이창호가 17회 우승이라는 독보적인 기록을 갖고 있다. 이달 4일 기준 신진서의 통산 전적은 785승 209패(승률 79%)다. 지난달 현재 신진서는 51개월 연속 국내 1위를 독주 중이다. 프로기사 신진서의 누적 수입은 72억1778만2733원이다. 」 관련기사 대게 제철이 12월? 엉터리다…당신이 모른 4가지 '별미 비밀' [국내여행 일타강사] 25곳 모은 ‘BTS 투어 지도’…대구 원숭이가 욕먹는 사연 신진서 '끝내기 6연승' 세계 바둑 새역사...한국 농심배 4연승 마지막 한 명만 남았다…농심배 수호신 신진서 파죽의 5연승 ‘나미나라’ 건국한 괴짜 CEO, 또 제주땅 파서 나라 세웠다 이번엔 1대 5다...신진서, 19년 전 이창호 '상하이 대첩' 재현?     손민호 레저팀장

    2024.03.06 00:32

  • 박상욱 과학수석 "R&D 삭감, 아쉽고 죄송스러워…내년부터 증액할 것"[최준호의 직격인터뷰]

     ━  윤석열 정부 첫 과학기술수석 박상욱   최준호 과학 전문기자·논설위원 늦어도 한참 늦었다. 이제라도 출범하니 다행일까. 지난달 25일 임명된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 수석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 취임했으니 1년 8개월만의 출발이다. 현 정부는 ‘과학기술 선도국가’를 자임했지만, 시작은 그렇지 못했다. 지난 정부에 있었던 대통령실 과학기술보좌관을 없애고 한 단계 낮은 비서관으로 시작했다. 보완책으로 김창경 한양대 교수(전 교과부 2차관)를 과학기술특보로 임명했으나, 건강 문제로 한 달 만에 사임했다. 과학기술비서관은 경제수석실의 6명 비서관 중 한 명이라 권한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과기비서관실엔 비서관 외 행정관 4명이 전부였다. 과기계에서는 이때부터 ‘윤 정부의 과학기술 컨트롤타워가 누구냐’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난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를 계기로 시작된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대폭 삭감 소동은 이런 구조적 문제점이 낳은 결과라 할 수 있다.     ■  「 기존 1비서관 체제에서 수석 외 비서관 4명, 행정관 10명으로 확대 예산 축소 따져보니 16.6% 아니라 7.8%…원천 R&D는 안 깎여 경제성장 둔화 시작된 선진국들도 국가 R&D 예산은 줄이지 않아 」    박상욱 수석은 박사학위가 2개다. 화학을 전공했지만, 과학기술정책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학위를 받았다. 사진은 국립어린이과학관에 선 박 수석. 강정현 기자 늑장 출범에 대한 보상일까. 현 정부 초대 과기수석실은 수석 외 비서관 4명과 행정관 10명으로 시작한다. 대통령실 과학분야 역대 최대 진용이다. 지난 6일 박 수석을 만났다. 박 수석은 인터뷰 장소로 서울 창경궁 옆 국립어린이과학관을 선택했다. 1960~80년대 우리나라 첫 국립과학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는 “박근혜 정부 당시 미래전략 수석이 있긴 했지만, 명실상부한 과학기술 수석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비서관 4명 중 3명 민간 영입 추진   과학기술수석실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역할을 맡나. “일단 연구개발혁신, 첨단바이오, AI·디지털, 미래·전략기술 이렇게 4개 비서관과 그 아래 10명의 행정관으로 구성된다. 향후 확대 가능성이 있는 유연한 조직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선 연구개발혁신 비서관은 R&D의 종합 조정, 제도 개선, R&D 혁신 생태계 업그레이드를 담당한다. 기존 최원호 과기비서관이 경제수석실에서 자리를 옮겼다. 첨단바이오 비서관은 범부처 바이오 정책과 국가 바이오 산업 육성을 맡게 된다. AI·디지털 비서관은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 전환과 디지털 플랫폼 정부 구현, AI 윤리규제 등을 담당한다. 미래·전략기술 비서관은 양자과학을 중심으로 한 12대 국가전략기술 분야 연구개발과 기술 안보, 기술 유출 방지, 과학기술 국제협력 등을 담당한다. 이 세 분은 민간에서 모시려고 한다.”   뒤늦은 출범이 R&D 예산 축소에 대한 민심 달래기라는 말도 있다. “그러기엔 너무 거대한 조직이다. 정책을 담당하는 수석이 경제와 사회밖에 없었는데, 과기수석이 신설됐다는 건 국가정책을 3분할할 때 과학기술이 그 한 축이 됐다는 것을 뜻한다. 민심 달래기용으로 이런 조직을 신설하는 정부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2022년 5월 정부 출범과 동시에 시작했으면 당연히 더 좋았겠다. 하지만 당시엔 지나치게 컸던 지난 정부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작은 대통령실’이라는 가치를 우선시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뒤늦게나마 과기수석실을 출범시킨 것은 현재 체제로는 더이상 과학기술의 도약을 꾀할 수 없다는 한계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정부 출범 시기에 그걸 절감하지 못했다가 국정 운영을 해보니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본다. 과기수석실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라는 점에서 출범에 2년이 아니라 70년 넘게 걸렸다고 얘기하고 싶다.”   R&D 예산 대폭 삭감으로 과기계가 큰 혼란에 빠졌는데. “과학기술계에 아픔과 섭섭함을 드린 것을 인정한다. 아쉽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R&D 예산이 깎인 건 이번이 처음이고 이례적 상황이다. 경제 성장률 둔화가 오래 전 시작된 선진국들도 R&D 예산을 줄이지는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경제와 과학기술 관점 사이의 오해가 빚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관점에서만 보면 R&D는 연구비를 주고 기술을 납품 받는, 용역이나 조달의 개념이다. 앞으로 교훈을 얻기 위해서도 이 사안은 리뷰가 필요하다고 본다. 사실 삭감 폭은 알려진 것만큼 크지 않다. 이 부분을 꼭 해명하고 싶다.” (과기계에서는 ‘재정적자가 심각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R&D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경제수석실과 기획재정부에서 R&D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쪽으로 예산을 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과학기술의 G3가 목표   정부 보도자료를 통해 R&D 예산 16.6% 축소가 명기되지 않았나. “제가 와서 따져보니 완전히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 그걸 바로 잡으려고 노력 중이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7.8% 감소다. 어쩌다 잘못된 숫자가 나갔다. 올해 정부 전체 연구개발예산은 26조5000억원 규모로, 올해부터 비R&D로 재분류된 2조1000억원을 포함하면 총 28조6000억원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7.8% 줄어든 거다. 구체적으로 기초 원천 R&D는 총액 기준으로는 안 깎였다. 다만 기초 부문 계속 과제가 10% 일괄 삭감되고, 국책 연구 사업 중 계속 과제도 또 삭감이 됐기 때문에 이에 대해 불편을 느끼는 분들이 많이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수습하나. “대통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게 있다. 당장 내년부터 R&D 예산을 증액하겠다는 거다. 저는 과학기술 수석으로서 대통령의 뜻에 따라 증액 가능한 규모를 파악하고, 그 근거를 찾아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드릴 계획이다. 저는 대한민국이 과학기술로 세계 3대 강국, 즉 G3가 될 수 있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현재도 R&D 절대 투자 규모 기준으로 일본·독일 다음인 세계 5위다. 성과로 보면 당연히 G3를 노려야 하지 않을까.”   정부 R&D 기반 혁신 기술이 실험실을 넘어 기술사업화로 이어지는 게 중요할텐데. “100% 동의한다. ‘시장주의 도입’을 말하고 싶다. 미국은 예외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기술사업화가 R&D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기술사업화가 R&D의 핵심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R&D 로드맵을 짤 때부터 기술사업화를 염두에 둬야 한다. 또 기술사업화 전문인력들이 R&D 단계에서부터 연구자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기술사업화 조직이 관료화돼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전문인력도 제대로 양성되지 않고 있다. 이런 혁신 조력자들이 성과에 걸맞는 인센티브를 받는 구조도 중요하다.”   기술 대전환 시대, 관제탑 있어야   국내 대기업들은 여전히 혁신 스타트업 투자나 인수를 통한 ‘오픈 이노베이션’에 소극적이다. “알파벳과 아마존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혁신기술 스타트업을 인수·합병(M&A)하는 방식으로 성장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딥테크(deep-tech) 스타트업들이 최근 많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인수할 때 기술 탈취 혹은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니 머뭇거리는 측면이 있다. 대기업은 스타트업 M&A를 오픈 이노베이션 관점에서 접근하고, 스타트업들은 성공적인 엑시트(exit) 전략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규제 장벽이 있다면 과기수석실에서 챙겨볼 생각이다.”   현 정부에 과학기술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런 측면이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최근까지 컨트롤타워 역할을 대통령실 과학기술 비서관실이나 과기정통부 과학기술혁신본부가 담당했다고 본다. 평소 컨트롤타워라는 톱다운식 용어 자체에 그렇게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지만, 선도국가로의 변신 및 디지털·탈탄소를 향한 대전환의 시대에는 어느 정도의 관제탑은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최근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제 과기수석실이 신설된 이상 그런 역할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옥상옥(屋上屋)이 돼서는 안 되겠지만, 긍정적 역할을 하고 싶다.”   ◆박상욱=1972년생. 서울대에서 화학으로 학·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영국으로 건너가 서섹스 대학에서 과학기술 정책학으로 다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 행정학부,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를 거쳐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로 일했다. 국가산학연협력위원회 위원, 수소경제위원회 민간위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문위원, 공공기관경영평가위원 등을 지내며 과학과 정부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최준호 과학 전문기자·논설위원

    2024.02.16 00:54

  • [서경호의 직격인터뷰] “국회 다수 의석 확보 때까지 개혁 미루면 백년 가도 못해”

     ━  재정학자 전주성이 제시하는 ‘개혁의 정석’   서경호 논설위원 “개혁은 어렵다. 확실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모르면 알려고 해야 하는데 다들 안다고 생각하니까 문제를 못 푸는 것이다.”   재정학자인 전주성 이화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신작 『개혁의 정석』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교육·인구·노동·연금·조세·정부개혁의 성공 공식’이라는 야심 찬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다들 모르면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난제에 나름의 실천적 해법을 제시한다. 2022년 대선 직전에 썼던 책 『재정전쟁』처럼 흔히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주장이 많아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개혁의 골든타임은 정권 초기’라든가 ‘보수의 개혁은 감세가 필수다’ 같은 우리의 상식이 잘못됐다며 ‘발상의 전환’을 주문한다. 개혁에는 돈이 필요하고 재정의 힘과 시장의 힘을 이용해야 개혁에 동력이 생긴다고 했다. 지난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  「 중도 지지 얻으면 의회 소수당도 개혁 위한 정치적 타결 가능 정권 초기가 ‘개혁의 골든타임’? ‘정권 이어가는 개혁’이 중요 무능한 보수정부는 복지 확대 찬성하지만 증세 기조엔 반대 연금개혁은 우선순위 정해 하나씩…보험료 인상부터 추진을 」    ‘청사진, 여론 지지, 정치적 타협’ 중요   전주성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지난 18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전 교수는 “여당이 의회 소수당이라도 잘 만들어진 청사진을 바탕으로 압도적 다수의 우호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면 개혁 과제를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했다. 김종호 기자 책에서 개혁의 세 가지 성공조건으로 ‘청사진, 여론 지지, 정치적 타협’을 꼽았다. 윤석열 정부도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을 공언했다. 어떻게 평가하나. “개혁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청사진, 전략, 동력이 안 보인다. 그저 부처나 위원회가 부분적 사안을 나눠 맡는 백화점식 방식이다.”   개혁의 청사진에 담을 내용은. “미래 비전이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무엇이 달라지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목표가 구체적이고 단순해야 힘을 받기 쉽다. 정책 자원을 어떻게 동원하고 배분할지 정하고 목표와 우선순위도 설정해야 한다. 교육·인구·노동·연금 등을 총괄하는 국가인적자원위원회 같은 컨트롤 타워를 만들어 정책 결정과 자원 배분에 실권을 주면 좋겠다.”   외환위기 때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수동적 개혁이었지만 김대중 정부 때 개혁을 많이 이뤘다고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는 자발적인 구조 개혁을 가장 많이 구상한 정부라고 했던데. “DJ 정부 개혁은 목표가 분명했고 수단도 구체적이었다. 수동적인 개혁이어서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치렀다는 평가도 있다. 노무현 정부는 지역 불균형 해소를 위해 수도 이전을 추진했고, ‘비전2030’이라는 복지 비전을 내놨다. 수도 이전은 우여곡절 끝에 행정도시 세종시 탄생으로 이어졌지만 국력 소모가 컸다. 일방적인 ‘대못 박기’ 대신 공론화 과정을 제대로 거쳤다면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비전2030도 재원에 대한 고민이 없었기에 막연한 보고서 수준에 그쳤다. 재원 확보를 먼저 생각하고 복지 비전을 다음에 놓은 식으로 우선순위를 바꿨다면 결과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의회 다수당인 야당에 밀려 제대로 할 일을 못 한다고 하소연해왔다. 그런 면이 있긴 하다. 야당의 거부권 정치는 반대를 위한 반대, ‘비토크라시(vetocracy)’라는 비판이 없지 않다. 그런데 전 교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우호 여론을 등에 업으면 설사 의회 소수당이라도 정치적 타결이 가능할 수 있다”고 썼다. “막연히 선거를 통해 다수 의석을 확보할 때까지 개혁을 미룬다는 식의 소극적 태도로는 백년이 가도 무엇 하나 이루기 어려울 수 있다. 설사 여당이 의회 다수석을 가졌더라도 여론의 뒷받침이 없으면 개혁의 추진력은 사라진다.” 이런 지적은 현 정부가 귀 기울일 만하다. 전 교수가 제안하는 개혁의 각론을 들어봤다.   교육개혁, 청사진 만들어 차기 정부로   최근 여야가 경쟁적으로 저출생 대책을 발표했다. “예산을 무한정 사용하면 출산율을 쉽게 높일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재정자립도가 15% 안팎에 불과한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현금을 지원하는 건 국가 차원에서 최악의 선택이다. 전체 출산율을 높이기보다 인근 지역 출산율을 낮춰 효과가 상쇄된다. 저출산은 국가적 과제니까 지자체의 무분별한 현금 지원을 줄이고 중앙정부가 총괄할 필요가 있다. 한시적으로 파격적 유인책을 쓰면서 구조적 변화도 도모해야 한다.”   교육 개혁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분 개편만 하니 제도는 더 복잡해지고 입시의 불확실성만 커졌다. 현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 기존 제도를 바꾸지 않고 좋은 청사진만 만들겠다는 취지의 ‘교육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 임기 중에 다수 여론의 지지를 받는 사회적 합의안을 만든 다음, 이를 깨끗하게 다음 정권에 넘기는 게 바람직하다. 현 정부와 차기 정부 모두 정치적 부담을 덜 수 있는 상책이다. 점수 기반의 내신 상대평가를 없애고 수능은 자격시험으로 만들고 대학에 학생 선발 자율권을 줘야 한다.”   ‘더 내고 덜 받는’ 또는 ‘더 내고 좀 늦게 받는’ 연금개혁은 현실성이 없다고 했다.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연금은 정치문제인데 경제문제로만 풀려고 하니 벽에 부딪히는 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연금 수급 개시연령을 늦추는 건 지금 꺼내기보다 아껴둬야 할 옵션이다. 연금 보험료 인상과 연금 수령을 늦추는 것을 동시에 시도하는 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저항의 강도만 높이는 하책이다. 우선순위를 정해 한 번에 하나씩 고치자. 지금은 보험료 인상에 집중할 때다.”   세대통합 기금으로 청년층 지원을   보수는 국민연금의 재정안정성을 높여 기금 고갈 시기를 최대한 늦추려 하고, 진보는 소득 보장 없는 개혁은 무의미하다며 소득대체율(생애평생소득 대비 노후에 수령하는 연금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별기금 형태의 ‘세대통합기금’ 조성을 제안한다. 조세 저항과 세대 갈등을 한 큐에 해결할 수 있다. 연금보험료 인상분 일부를 보조금으로 지원하되, 중장년층보다 청년층에 더 유리하게 배분하는 방식이다. 이런 ‘세대 간 이타주의’에 기반한 해법이 가장 유용하다.”   세대통합기금은 어떻게 만드나. “국내총생산(GDP)의 1%에 해당하는 한 해 평균 20조원을 10년에 걸쳐 모아 200조원을 마련해 보험료 인상분의 일부를 보조해주는 식이다.”   복지 포퓰리즘을 좌파세력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는 관행을 비판했다. “지금은 진보건 보수건 복지 확대 자체를 반대하기는 어렵다. 재원 확보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무능한 진보 정부는 적자 재정을 해서라도 복지 지출을 늘리겠다고 나선다. 반면 무능한 보수 정부는 복지 확대는 찬성하지만 증세 기조에는 반대한다. 결국 두 정부 모두 정부 재정을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유능한 정부가 집권한다면 지금처럼 적극적 정부 역할이 필요한 시대에 수십 년 전 유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작은 정부 논리에 사로잡혀 무모한 감세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을 거다.”   ‘세수 확대형 균형재정’으로 가야   시대 조류에 부합하는 재정 기조를 강조했는데. “보수 이념의 집권당이 시대 조류와 어긋나는 재정 기조를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2022년 9월 취임했던 영국의 트러스 총리는 적자 재정이 지속되는데 감세 정책을 추진하다 시장의 반격을 받고 역대 최단명 총리의 불명예를 안고 퇴진했다. 반면 1980년대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감세 정책은 구조적 재정적자를 초래했지만 시장의 역습을 받지 않았다. 무능한 큰 정부보다 정부 개입을 자제하는 작은 정부로 향해 가던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 이념이 아니라 얼마나 믿을 만한 정부냐가 중요하다. 결국 정부 신뢰도가 시장의 심판을 가르는 잣대다. ‘세수 확대형 균형 재정’이 우리의 최적 선택이다.”   윤석열 정부가 법인세 최고세율을 3%포인트 내리는 감세를 추진했다가 국회에서 1%포인트 인하로 결정됐다. “감세 취지는 좋지만 방법은 달라야 했다. 미국 같은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법인세가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세수 감소 효과가 큰 세율 인하보다는 투자 유인에 집중해 유효세율을 낮춰주고 규제개혁으로 기업 활력을 높이는 게 시대 조류에 맞고 보수 정권의 정체성도 살리는 길이다.”   ‘임기 내 마무리’ 조바심 없어야   그의 제안 중에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긴 호흡으로 개혁하자는 대목이었다. 어느 정권이나 하기 힘든 선택이겠지만 그래도 이 길이 옳다고 믿는다. 이런 내용이다. “정치적 저항이 강하기 마련인 개혁과제는 힘 있는 정권 초기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틀린 얘기다. 개혁의 골든타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청사진 하나만 제대로 만들어 ‘정권을 이어가는 개혁’의 단초를 놓은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업적이 될 수 있다. 지난 수십년, 개혁 같은 개혁을 본 적이 없었던 데에는 임기 내에 뭔가 마무리를 해야만 자신의 업적이라 여기는 이기적인 조바심이 한몫했다.”   ◆전주성=1957년생. 서울대 경제학과(74학번)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낸 마틴 펠드스타인과 재무장관을 지낸 로런스 서머스가 그의 지도교수였다.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으며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한국재정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활동하며 개도국에 재정정책을 조언해왔다. 교수 퇴직 후에는 ‘한국형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DPI(발전패러다임연구소)를 설립해 대표로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

    2024.01.26 00:30

  • [주정완의 직격인터뷰] "수능서 심화수학 배제는 자해 행위, 하향 평준화 막아야"

     ━  혼란의 수학 교육, 대안은…차상균 서울대 특임교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확 바뀐다. 올해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학생들이 치르는 2028년도 수능부터다. 교육부가 지난해 12월 27일 발표한 대학 입시제도 개편안이다. 선택과목을 폐지하고 문·이과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이 같은 국어·수학·탐구 시험을 보게 하는 게 이번 개편안의 핵심이다.   교육부 발표 이후 수학 출제 범위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교육부는 일반수학(대수·미적분Ⅰ·확률과통계)만 수능에 포함하고 심화수학(미적분Ⅱ·기하)은 빼기로 했다. 수험생 입장에선 부담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지만, 이공계 대학교수들은 강력히 반발하는 분위기다. 수학 기초가 부족한 학생들이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하면 제대로 대학 수업을 따라갈 수 없다는 지적이다. 장기적으로 첨단 기술 인재 육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  「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차원 공간 수학적 기초 없으면 AI 이해 못해   입시에서 쉬운 수학만 하라는 건 첨단 기술인재 양성 목표와 모순   디지털 기기 활용한 교재 개발로 학생 흥미 유발식 수학 교육해야 」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특임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차 교수는 “수능에서 심화 수학을 빼는 건 AI시대에 국가의 미래를 포기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지난 6일 오후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특임교수를 만났다. 국내외 메모리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호암상(2022년 공학상)을 받은 차 교수는 혁신적 연구 성과로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분야의 석학으로 꼽힌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가로도 성공한 이력이 있는 그는 교육과 산업 현장에서 모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다. 국가교육위원회에 자문위원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심화수학에서 킬러문항 안 내면 돼   수능에서 심화수학을 배제한다는 교육부 발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마디로 말하면 자해 행위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잘라버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국가적 목표에 심각하게 모순된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다차원이다. 기하와 미적분을 포함한 수학은 그런 현상을 표현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문·이과의 구분 없이 수학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고교 교육에서 문과와 이과의 구분을 없애는 게 맞다. 그렇다고 문과 위주로 수학 교육을 하향 평준화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이공계, 특히 빅데이터·AI 연구에서 수학이 중요한 이유가 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그 변화를 쫓아가는 게 AI 시스템이다. 기본적으로 다차원 미적분 개념을 모르면 AI를 이해할 수 없다. 미적분을 배운다는 건 세상의 변화를 표현하는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AI의 핵심인 딥러닝(심화학습)은 미적분을 기반으로 돌아간다. 이때 하나의 변수만 보는 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변수를 동시에 봐야 한다. 이런 세계는 1차원 선형이나 2차원 평면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3차원 공간적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기하를 알아야 한다.”   교육부는 수능에 심화수학을 포함하면 사교육비 부담이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킬러문항’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 것으로 짐작한다. 미적분이나 기하에선 문제를 복잡하게 꼬아서 킬러문항을 만들기 쉬운 측면이 있다. 정말 그것 때문이라면 방향이 틀렸다. 미적분과 기하를 살리는 대신 이쪽에선 킬러문항을 내지 않으면 되지 않나. 지나치게 어려운 문제로 학생들을 곤란하게 하는 건 좋은 교육이 아니다.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챗GPT를 언급하며 어려운 문제풀이 중심의 수학교육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이 한 번 쉬운 길로 가기 시작하면 어려운 길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챗GPT를 쓸 수 있는 능력만 갖추는 것으론 발전이 없다. 챗GPT가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제대로 알아야 할 게 아닌가. 그래야 다른 나라가 하지 않는 걸 찾아서 새롭게 치고 나가는 길이 열린다. 여기엔 미적분과 기하 같은 수학적 개념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AI 후진국을 면치 못한다. 남이 만든 걸 쓰기만 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영원히 남의 밑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하향 평준화식 수학 교육이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고 하는 이유다.”   AI 시대에 수학 없이 아무것도 못 해   다른 나라의 수학 교육은 어떤가. “수학 교육을 강화하는 건 세계적인 흐름이다. 미국의 주요 대학은 고교 교육과정에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대학에 와서 데이터사이언스 등을 배우려면 수학적 기초가 중요하다. 그걸 고교 시절에 미리 준비하게 하자는 취지다. 물론 미국 고교생의 다수는 수학적 이해도가 높지 않다. 하지만 소수의 엘리트 그룹은 매우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 있다. 우리나라처럼 획일적인 입시 제도가 아니라서 가능한 방식이다. 우리는 미국처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수능에선 심화수학을 빼겠다고 한다. 그럴 거면 차라리 학생 선발의 자율권을 대학에 줘야 한다.”   혹시 미국만 수학 교육을 강조하는 건 아닌가. “아니다. 인도를 보라. 수학을 잘하는 인도 출신 인재들이 미국 정보기술(IT) 업계를 휘어잡고 있다. 구글·마이크로소프트·어도비 같은 기업에선 인도계가 최고경영자(CEO)까지 올랐다. 유럽에선 프랑스가 AI 분야에서 앞서나가고 있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수학 교육이 강한 나라여서다. 옛 공산권에 속하는 동유럽 국가들도 수학을 잘하는 인재가 많다. 과거 컴퓨터가 제대로 없던 시절에도 수학 실력으로 서구 선진국들과 경쟁했던 전통이 있다.”   공학이 아닌 분야에서도 수학이 필요한가. “물론이다. 사회과학에서도 수학적 기초가 점점 중요해진다. 예컨대 변호사가 AI를 쓴다고 해도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고 쓸 수는 없지 않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보면 수학적 기법을 활용한 계량경제학 연구자가 많아진다. 예술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기하를 모르면 컴퓨터를 활용한 3차원 시각디자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AI의 시대에 수학에서 자유로운 분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조금이라도 어릴 때부터 수학을 경험하게 해주는 게 낫다.”   교육은 한번 망가지면 돌이킬 수 없어   ‘수포자’(수학 포기자)라는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학생들은 수학을 어려워한다. “예전 방식으로 고지식하게 수학을 가르치니까 그렇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AI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면 복잡한 문제도 3차원적으로 알기 쉽게 풀어서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수학 교육 콘텐트를 만들 때 계량경제학이나 시각디자인 전문가들도 참여하면 좋을 것이다. 원래는 나도 수학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공부할 때 물리적 현상과 수학을 연결해 쉽게 설명하는 교수가 있었다. 진작에 이런 분을 만났더라면 나도 수학을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교에선 기초수학만 익히고 심화수학은 대학에서 배우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다.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물리의 사례를 봐도 그렇다. 과학이나 공학을 하려면 물리를 알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물리 교육이 완전히 엉망이 돼 버렸다. 수능에서 물리를 선택과목으로 하니까 물리를 배우려는 학생이 확 줄었기 때문이다. 수학이나 물리는 일단 배움의 끈을 놓아버리면 나중에는 그쪽으로 가는 걸 더욱 꺼리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한 번 교육이 망가지면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다.”   수학 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수학을 최대한 재미있게, 그리고 현상과 의미 있게 연결해 가르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동안 디지털 기기가 얼마나 좋아졌나. 학생이 직접 손으로 디지털 기기를 터치하면서 배울 수 있게 교육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런 투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못사는 나라가 아니지 않나. AI 시대에 수학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2등, 3등 국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배제한 전문가 그룹에 수학 교육의 주도권을 맡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경우 정부는 최소한의 뒷받침만 하고 세부 사항에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차상균=1958년 부산 출생.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제어계측공학),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전기공학)학위를 받았다. 2002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을 창업한 뒤 2005년 독일의 대형 소프트웨어 기업 SAP에 성공적으로 인수합병(M&A)시켰다. 차 교수가 연구개발을 주도한 데이터베이스 솔루션인 ‘SAP HANA’는 삼성전자와 미국 월마트 등 세계 3만 개 이상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다. 2020년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개원을 주도하고 초대 원장을 지냈다.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벤처캐피털 설립을 준비 중이다.   주정완 논설위원

    2024.01.12 00:38

  • [최준호의 직격인터뷰] “집단 사고에 갇힌 정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  22대 총선 불출마 선언한 ‘경제통’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   최준호 과학 전문기자·논설위원 2024년 4월 10일. 22대 총선이 4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다. 여의도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국회의원이라면 응당 공천과 출마에 열을 올릴 시점이지만, 여야 모두에서 불출마 선언을 하는 의원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 국민의힘에선 ‘친윤의 핵심’이라는 장제원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이탄희·홍성국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하는 등 지금까지 6명의 현역의원이 22대 총선 도전을 접었다. 불출마의 변은 제각각이지만, 공통분모는 ‘변화’다. 그중 홍성국 의원의 불출마 변이 유독 눈에 띈다. 그는 성명서에서 ‘후진적인 정치 구조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언급하며 “국회의원보다는 국민과 직접 소통하고 우리나라의 미래 비전을 만드는 ‘미래학 연구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고 밝혔다. ‘30년 증권맨’ 출신으로 ‘여의도의 미래학자’라 불리기도 한 그는 민주당 내에서 경제특보를 맡는 등 경제전문가로 활동해 왔다.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홍 의원을 만났다.     ■  「 “사회 바꿔보고자 정치권에 들어왔는데, 간극 컸다” 우리 정치권, 기득권 중심에 지연·학연 비중  높아 국회, 예산 살펴볼 시간 부족에 감액만 가능해 한계 정치권 바뀔 게 많은데, 정치인 스스로 변화 어려워 」    여의도의 미래학자가 경험한 정치권   홍성국 의원은 ‘여의도의 미래학자’로 불린다. 30년 증권맨의 경력 동안 매일 시장과 경제 흐름을 파악하며 저술활동과 강연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고민해왔다. 전민규 기자 비명계라 공천이 어려워져서 불출마하는 건가. “전혀 아니다. 정세균·이낙연 전 총리 등과 정책 공부를 하면서 정치와 인연을 맺은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의 경제 비전을 만든 사람이 나다. 경제전문가로 민간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초선의원을 친명·비명으로 구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22대 총선 불출마는 내가 세상을 보는 잣대와 현재의 정치권이 가진 한계에 대한 간극 때문이다. 사회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데, 정치권은 과거의 관성 때문에 변화를 좇아가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국회의원이 되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사람들은 ‘민주당 의원이니 당리당략 차원에서 저런 말을 한다’라고 받아들인다. 정치인이 아닐 때보다 영향력이 더 없어졌다. 우리 사회를 바꿔보고자 정치권에 들어왔는데, 정치인으로서는 이 간극을 메울만한 능력도, 세력도 없다고 느꼈다.”   성명서에서 ‘후진적인 정치 구조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언급했는데. “정치는 미래를 만들어 가는 거다. ‘후진적’이라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게 관점이 현재와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거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앞에 어마어마한 난관이 있고 이걸 정치가 돌파해야 하는 데, 그게 안 된다. 일단 선거제도부터 기득권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다. 게다가 정치인들의 네트워크를 보면 지연·학연 비중이 너무 높다. 공천할 때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논란이 되는 비례대표제나, 국회의원들이 거의 손댈 수 없는 예산문제도 그렇다. 국회는 감액만 가능하고, 세부 내역을 제대로 살펴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후진적 정치 구조, 문화다.”   “정치권, 과거의 관성 때문에 안 변해”   애초 출마 계기는 뭐였나. “정치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 투쟁적인 요소와 정책적인 요소가 그것이다. 나는 3, 4선이 되고 당대표가 되겠다는 그런 권력 투쟁적 요소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정책으로 한국 사회가 잘 되게 하고 싶었다. 대우증권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사장까지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책을 써온 것들을 정책에 구현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한계가 너무 컸다. 나가서 자유롭게 생각을 펼치는 게 우리 사회에 더 영향력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본 정치권과 안에서 경험한 정치권은 뭐가 다른가. “밖에서 본 정치권은 일반인하고 큰 차이는 없었을 거다. 나는 정치인이란 미래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정치권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는 전제로 말하는 거지만,  정당 정치인은 집단적인 사고로 갈 수밖에 없는 면이 있다. 게다가 통상의 경우 정치 입문 시절 선배들로부터 배운 DNA를 바꾸기가 어려운 게 작용한다. 세상이 바뀌고 정치권 내부도 바뀔 게 너무 많은데, 정작 정치인들은 스스로 변화하기 어려운 거다. 게다가 정치인은 지역구 관리를 포함해 너무 바쁘다. 정치권 자체가 새로운 것을 충전하고 고민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선진국 함정에 빠진 대한민국   지난 4년간 우리 사회는 한 발짝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했고,  우리에게 주어진 대전환의 골든타임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나는 이런 현상을 선진국 진입의 초입에서 겪는 선진국의 함정, ‘하이 인컴 트랩(high income trap)’이라고 표현해왔다. 그간 한국 사회는 소득 중심의 성장만 하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러 저출산·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대규모 은퇴자들이 나오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산업적으로 살펴봐도 문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금까지 산업 구조 전환에 특별히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수출에서 반도체 비중이 너무 커졌고, 다른 것들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게 자동차인데, 실은 전기차 효과가 아닌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신모델이 많이 나온 것뿐이다. 이외에도 국민연금·건강보험 개혁처럼 혁명 수준으로 바꿔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등 다른 패스트팔로워의 추격을 받는 시점에 와 있는 거다.”   미래학 연구자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의사결정을 미래를 생각해서 하지 않나. 정치권을 포함해 우리 사회 지도층은 대중보다 2~3년 앞서 살아야 한다. 이게 사실 미래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말하는 미래학 연구자는 미래를 학문적으로 연구한다기보다 현재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 변화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역할이다.”   지금은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   지난 여름  『수축사회 2.0:닫힌 세계와 생존게임』을 내는 등 그간 적잖은 저서를 썼다. “30대까지 책을 계속 많이 읽다가 40세를 넘기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겠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2004년 『디플레이션 속으로』를 시작으로 같은 주제로 8권을 써왔다. 특히 40세를 넘기면서 어떤 직위보다는 ‘무엇을 했느냐’로 인생의 좌우명이 바뀌게 됐다. 과거와 완전히 다른 대전환, 즉 새로운 미래가 온다는 것을 인생의 주제로 삼았다.”   (『수축사회 2.0』은 전 세계가 본격적으로 수축사회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고, 변화한 현실과 이후 미래를 전망하는 내용이다. 그는 지금이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이며, 사람들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나라의 파이를 빼앗아 자신의 생존을 모색한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는 ‘수축’이란 잣대로 다양한 영역을 탐구하는 것이 자신의 저술 방향이라고 말한다. 2004년 첫 저서 『디플레이션 속으로』를 출간한 이래,  『세계 경제의 그림자 미국』(2006), 『글로벌 위기 이후』(2008), 『미래 설계의 정석』(2012), 『세계가 일본 된다』(2014), 『인재 vs 인재』(2017), 『수축사회』(2018)를 연이어 써왔다.)   30년 증권맨이었다. 한국 증시의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내년 전망을 하자면. “내수 경기의 위기다. 부동산 PF 대출 잔액이 134조원,  한전과 가스공사의 누적적자가 57조5000억원, 소상공인 원리금 만기연장 규모가 76조원이다. 2024년 증시는 상고하저로 본다. 상반기엔 글로벌 금리의 바닥 확인 기대감 때문에 증시가 좀 올라가다가 체력이 여실히 드러나면서 다시 가라앉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제 뭘 할 건가. “22대 총선 지원은 나의 마지막 책무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내 순수성을 알아줄 테니까. 국회를 나가면 사무실을 하나 차릴 계획이다. 예전에 미래에셋증권 사장 끝나고 국회에 들어오기 전 3년간 혜안이라는 개인 사무실을 운영한 적이 있다. 그걸 복원해서 책 쓰고, 기고하고, 강의하면서 지낼 계획이다. 정당 구분 없이 만나자고 하면 만나서 필요한 정책을 제안할 예정이다.”   ◆홍성국=1963년 충남 연기군 생. 서강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학부 졸업 후인 1986년 첫 직장으로 대우증권에 입사했고,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장과 KDB대우증권 대표이사,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 등을 역임했다. 2020년 더불어민주당 경제대변인으로 정치권에 입문, 21대 총선에서 세종시 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지금은 원내대표 경제특보다. 최준호 과학 전문기자·논설위원

    2023.12.29 00:27

  • [강주안의 직격인터뷰] 일본보다 심각한 한국 은둔 청년…부모도 함께 치유해야

     ━  한·일 은둔 청년 지원 활동가 오오쿠사 미노루 씨   강주안 논설위원 우리나라의 고립·은둔 청년이 54만명에 이른다고 정부가 지난 13일 발표했다. 이에 따른 사회적 손실이 연간 약 7조원이며 은둔 청년 4명 중 3명이 자살을 생각해봤다는 내용이 충격을 던졌다. 사단법인 ‘씨즈(Seeds)’의 오오쿠사 미노루(47) 팀장은 2012년부터 일본과 한국의 은둔 청년을 돕는 활동을 해왔다. 지난 20일 오후 그를 만나 은둔 청년의 실태를 들었다. 인터뷰는 씨즈가 운영하는 서울 은평구 소재 은둔 청년 활동 공간 ‘두더집’에서 진행했다.   능력주의와 강박감이 은둔 배경   54만명이면 엄청난 숫자 아닌가. “그렇다. 일본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수와 별 차이가 없다. 올해 일본 정부 조사에서 파악한 15~39세 히키코모리가 67만명이다. 일본 인구(약 1억 2329만 명)가 한국의 두 배가 넘으니 한국이 훨씬 높은 비율이다.”   현장에서도 이런 수치가 체감되나. “일본과 한국의 은둔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가 꽤 크다. 은둔의 배경이 되는 능력주의와 강박감 같은 건 비슷하다. 그런데 한국은 경쟁에 대한 압박이 더 심하다.”     ■  「 한국 은둔 청년 54만 명, 인구 2배인 일본의 67만 명보다 심각 일본은 남 의식한 ‘동조압력’ 세지만 경쟁 압박은 한국이 극심 은둔 당사자가 도움 요청하는 경우 한국이 훨씬 많아 긍정적 문제 사례 살펴보면 부모 책임이 절대적…부모가 교육 받아야 」    오오쿠사 미노루 씨즈 고립청년지원팀장이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의 은둔 청년 실태를 설명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왜 그런가. “가령 일본에선 자식이 라멘집을 연다든가 미용사가 되거나 농업을 시작하면 많은 부모는 기꺼이 응원한다. 반면 한국은 대학을 나와서 몸을 쓰는 일을 한다면 싫어하는 분위기다. 직업 선택권이 제한되고 화이트칼라 지향적이다. 이런 시선 때문에 압박을 느낀다. 학업에 대한 욕구도 한국이 더 강한 거 같다.”   일본 은둔 청년의 문제는 무엇인가. “일본은 자기표현을 어려워하고 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는 ‘동조압력(同調壓力)’이 심하다.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는 원인이 된다.”   “원래 사람 싫어하니까” 위험한 오해   또 어떤 차이가 있나. “은둔 당사자를 만나면 일본 사람은 한국 사람보다 조용하다.”   은둔하는 사람은 조용한 거 아닌가.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 누군가 귀를 열면 열변을 쏟아내는 사람이 많다. 듣는 귀가 없었을 뿐이다. 한국 청년들은 더 말을 많이 하고 자기표현도 잘하는 편이다.”   이런 특성이 치유에 도움이 되나. “그렇다. 한국은 당사자가 스스로 많이 나오려 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일본은 당사자가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10% 정도인데 한국인은 내 경험상 40% 정도는 된다.”   당사자의 도움 요청이 많다니 의외다. “은둔은 취향이 아니다. 사회가 나한테 보내는 시선이 공격적이라 사람을 피하는 거다. 선택도 아니다. ‘원래 사람을 싫어하니 그냥 놔두자’라는 생각은 매우 잘못됐다.”   흔한 오해를 더 소개한다면. “몸이 진짜로 안 움직여진다. 씻고 싶은데 몸이 너무 무거워 세수를 못 한다. 밖에 나가고 싶은데 현관까지 가면 눈물이 쏟아진다. 부모는 ‘너 또 꾀병이야’라고 한다. ‘게으르다, 의지가 부족하다’고 하는데 실은 의지의 힘을 빼앗긴 상태다. 느리다는 문제도 많다.”   느리다? “행동이나 말이 느리고 머리가 빨리빨리 안 돌아가는 상황이 있다. 가령 설거지를 해도 느리고 심부름을 시키면 대응이 느린 사람이 있다. 그러면 부모는 빨리하라고 말하는데 그게 아이들에게 굉장한 상처를 준다. ‘빨리빨리’는 자녀의 속도를 무시하는 말이다. 이런 조건들이 갖춰진 상태에서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단 한 명의 연결된 사람이 없고 사회에 내 자리가 없으면 은둔을 하게 된다. 나도 느림 때문에 한때 아주 힘들었다.”   은둔 젊은이와 범죄 연결은 편견   은둔 경험이 있나. “기질은 있는 것 같다. 다만 조건이 맞아야 은둔을 한다. 우선 은둔 공간이 필요하고 나를 맞아주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나에겐 평가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냥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은둔을 안 했다. 친구 만들기가 어렵고 내성적이었다. 내 얘기를 하는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지금 얘기를 너무 잘하는 것 같은데. “이건 내 생각을 얘기한다기보다 그동안 겪었던 경험들이 그냥 입으로 나오는 거다. 내 생각을 표현 못 하고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느리기도 했다. 부모님이 ‘빨리빨리’ 라고 할 때마다 힘들었다. 취업 노력도 하지 않는 ‘니트(NEET)’ 생활을 6개월 정도 했다. 당시 무대에서 일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그게 도움이 됐다. 은둔하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희망이 없는 ‘무망감’이다.” (NEET는 일하지 않고 일할 의지도 없는 청년 무직자를 뜻하는 조어.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   요즘 묻지 마 범죄의 요주의자로 은둔형 외톨이를 떠올리는데. “은둔 청년에 다양한 유형이 있지만 대부분 밖으로 나가는 걸 무서워한다. 사람을 해치는 행동을 상상도 못 한다. 통계에 따르면 일반인의 중범죄 비율이 은둔형 외톨이의 3배 이상이다.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다. 간혹 심한 폭력이 발생하는데 대부분 피해자는 부모 등 가족이다. 사실 은둔의 원인은 부모가 많이 제공한다.”   부모에게 문제 있는 비율이 어느 정도인가. “내 경험으로는 부모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경우는 10%가 안 된다. 부모도 치유해야 한다. 부모가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경우가 많다. 일본에선 ‘옳음 중독(正義中毒·정의중독)’이라고 한다. 이 중독이 자녀에게도 가는 거다. 부모가 너무 눈부셔도 자신과 비교해 압박을 느낀다.”   부모와 비교로 압박감 느껴   부모의 영향이 그 정도로 큰가. “청년에겐 가족이 첫 번째 사회이고 부모가 1차 방어망이자 안전망이 돼야 하는데 그 역할을 못 할 때가 많다, 청년의 감정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념을 자녀에게 강요한다.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계속 준다.”   부모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부모를 탓하기도 어려운 이유가 부모 역시 힘들기 때문이다. 은둔형 외톨이의 가족 간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보면 부모 역시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참으며 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부모의 치유가 필요하다. 자녀는 ‘이게 다 부모님 탓이다’라고 원망하는 동시에 ‘부모님이 나를 정성껏 키워주셨는데 이에 보답하는 나로 자라지 못해 부끄럽다’는 양가 감정이 있다.”   부모 치유는 어떻게 하나. “상담을 받는 게 좋다. 부모가 있는 그대로를 누군가에게 말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부모 역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부모에게 감정의 억압을 경험했기 때문에 아이한테도 비슷한 요구를 한다. 부모님이 ‘사실 나도 힘들었어’라고 말을 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취미 생활을 하는 것도 좋다. 자녀가 5년 정도 은둔한 어머니가 상담을 받고 평소 하고 싶었던 그림을 시작했다. 부모님 모임에도 계속 나오면서 굉장히 좋아졌다.”   은둔 청년 지원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을 마치고 연극 무대 일을 했다. 2004년에 워킹 홀리데이로 서울과 대구에서 일본어 강사를 했다. 한국의 사회적 기업 활동에 참여해 학교 밖 청소년 도왔다. 일본에 돌아갔다가 은둔 청년을 돕는 일본의 K2 인터내셔널에 참여해 2012년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 청년 지원 업무였나. “처음엔 은둔 청년 당사자가 일본인 한 명이었다. 일본에서 더 많은 사람이 오고 한국의 은둔 청년도 동참하게 됐다.”   일본인에게 효과가 있었나. “많이 좋아졌다. 한국어를 배운 게 큰 도움이 됐다. 일본에서 모국어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한 경험이 있는데 외국서 외국어로 대화하고 친구도 생기니 소중한 경험이 되어 변화를 이끌었다. 2년 정도 다녀간 친구는 얼마 전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다.”   일본 청년이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했나. “K2가 서울 합정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했다. 청년들은 톤부리 같은 음식을 만드는 일을 했다.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경험이 정말 중요하다.”   지금도 운영하나. “코로나19 사태로 2021년 말에 문을 닫았다. 당시 일본인 3, 4명에 한국인이 10명 정도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비자가 안 나와 돌아가야 했다. 한국 청년 중 일부는 집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셰어하우스에서 지낸다.”   K2는 한국에만 왔나. “호주와 뉴질랜드에도 갔다. 거기선 일본인만 생활했다. 그 나라들은 은둔 청년이 거의 없어서 개념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좋은 부모가 되는 교육 받아야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원책을 발표했는데 앞으로 은둔 청년 상황이 나아질까. “사회적으로 무관심하다는 자체가 청년들에게 부정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최근 사회에서 고립 청년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특히 지자체나 정부에서 지원에 나서 예전과 다른 메시지가 청년들에게 다가가는 것 같다. 긍정적인 변화가 기대된다.”   한국 사회에 조언을 해준다면. “제일 중요한 게 예방이다. 코로나19로 치자면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어야 하는데 그런 건 안 하면서 쓰러진 사람에게 약 주고 검사하는 식이다. 한국은 학교에서 경쟁이 너무 심하다. 상대평가보다 절대평가를 늘리면 좋겠다.”   좀 더 쉬운 주문은 없나. “부모 교육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사실 누구도 좋은 부모가 되는 교육은 안 받는다. 부모를 만나면 ‘아이가 말을 안 들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한다. 그런데 자녀도 똑같다. ‘부모님이 내 말을 안 들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한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한다. 부모 교육과 치유가 은둔 청년을 예방한다.” 강주안 논설위원

    2023.12.22 00:36

  • [윤석만의 직격인터뷰] “방향 잃고 학력고사처럼 변질, 원조 수능으로 돌아가야”

     ━  혼란의 수능, 해법은…김성열 경남대 명예교수    윤석만 논설위원 수능 뒤엔 언제나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올해는 유독 그렇다.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발언으로 시작된 혼란은 수능 당일까지 계속됐다. 특히 이번 수능은 전 과목 만점자가 한 명에 불과할 만큼 ‘불수능’이어서 8일 성적표 공개 후 논란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매년 반복되는 혼란과 갈등의 원인은 무엇인지 올해 30주년을 맞은 수능의 개선책에 대해 김성열(67) 경남대 명예교수에게 물었다.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과 한국교육학회장을 지낸 그는 입시·평가 분야의 전문가다.   학교 수업 미비해 수능 변질   수능이 정말 문제인가. “그렇다. 당초 의도를 벗어나 과거의 학력고사처럼 변질했다. 원래 수능은 미국의 수학능력평가(SAT)처럼 통합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이고, 학력고사는 미국대입시험(ACT)처럼 특정 과목의 지식과 학력을 평가하는 시험인데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가 돼버렸다.”   사고력과 지식 평가 방법이 다른가. “지리 과목을 예로 들면, 학력고사에선 교과서와 참고서의 지식을 얼마나 잘 습득했는지 측정한다. 그러나 원래 수능에선 기본 개념을 바탕으로 지리 현상을 분석하고 함의를 유추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본다. 어떤 조건에서 도시가 형성되고 발전하는지, 세계 각 도시의 차이는 무엇인지 탐구하는 식이다.”     ■  「 통합 사고력 측정 목표로 했지만 당시 학교는 수능식 수업 어려워   점차 교과목 측정 시험으로 변질 급기야 변별 위한 킬러문항 등장   현재 학생 줄고 탐구식 수업 가능 수능 원래 취지 살릴 여건 갖춰져 」    김성열 경남대 명예교수(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지금의 수능은 많이 변질했지만, 국가 수준의 지필고사 중 원조 수능 만큼 퀄리티 높은 시험은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경록 기자 왜 변질했나. “초기 수능은 학력고사의 폐해를 잠재울 만큼 혁신적이었다. 언론에서도 높은 평가를 했다. 그러나 수능을 뒷받침할 만큼 학교 수업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수능을 잘 보려면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통합하고, 스스로 탐구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하는데 학교가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교사들의 잘못인가. “교육제도를 입안할 때는 먼저 사회에 적합한 인재상을 구상하고, 필요한 교육 내용이 무엇인지 정한 다음, 그에 맞는 학습법과 평가 시스템을 갖추는 게 순서다. 수능 이전까지 학교에선 젖먹이에게 지식을 떠넘겨주듯 하는 ‘암죽식’ 교육이 팽배했다. 그런 상황에서 입시제도만 덜렁 바꿔놨으니 현장에서 적응할 수 없었다.”   전국 수석 제주 대기고의 비법   1993년 수능 수리 탐구Ⅱ 42번 문항. [사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2020년 한국사 20번 문항. [사진 한국교육과정평가원] 1997년 수능에선 유수의 명문고를 제치고 대기고(제주)가 전국 수석을 깜짝 배출했다. 알고 보니 앞선 수능에서도 전국 5위(1994학년도), 3위(1995학년도)의 성적을 내며 명문고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비결은 학생 중심 수업이었다. 사회 시간에 교과서 대신 신문자료를 스크랩해 발표하고, 수학 시간에 다른 학생의 문제풀이 과정을 보며 토론하는 등 당시로선 혁신적 수업을 펼쳤다.   수능에 적합한 수업이란. “탐구식 수업이다. 대기고처럼 학생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직접 해결하며 역량을 기르는 방식이다. 그러나 당시 학교에선 자기주도학습을 강조했더니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고 ‘알아서 풀어보라’는 식의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학교가 준비돼 있지 않았고, 학생 수도 한 반에 50명씩이나 돼 탐구식 수업을 할 여건이 안 됐다.”   수능이 변질한 건 언제부터인가. “대략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다. 암죽식 수업으론 수능 준비가 어렵다는 불안감이 커지자 사교육이 파고들었다. 학원식 문제풀이가 주목 받으며, 수능이 사교육비의 주범처럼 몰렸다. 학교에서도 수업 시간에 다른 과목의 수능 문제집을 푸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등 파행이 커졌다. 그러면서 수능 출제 기조가 바뀌었다.”   어떻게 달라졌나. “교과목 중심 출제로 서서히 돌아갔다. 대다수 학교는 대기고처럼 할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공교육 정상화란 이름으로 개별 교과의 지식을 평가하는 방식이 힘을 얻었다. 출제진 입장에서도 통합적 사고력과 문제해결력을 측정하는 문항을 만드는 게 매우 까다로웠다. ‘더 이상 낼 문제가 없다’는 현실적 고충도 있었다.”   단편 지식 평가로 변질한 수능   1993년 첫 수능의 수리탐구Ⅱ 42번은 한국사·세계사 지식을 바탕으로 경제학의 원리를 묻는 문항이다. 얼핏 역사 문제 같지만, 국내 통화량이 늘면 물가가 상승하고 인플레이션이 생기면 수입량이 증가한다는 개념을 알고 있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 반면 2020년 한국사 20번은 3점짜리 고배점 문항인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추론 없이 단편적 지식만을 묻고 있다.   출제 방식이 바뀐 건가. “언어, 수리탐구Ⅰ·Ⅱ, 외국어 등의 영역에서 통합적 사고력을 측정하던 수능이 2014학년도부터 국어·수학·영어 등 교과목 시험으로 바뀌었다. 개별 교과의 지식위주 평가가 강화됐고, 교과서 중심 출제, EBS 연계 등 방침과 함께 본격적인 ‘쉬운 수능’의 시대가 열렸다. 변별력 논란이 일면서 자연스레 ‘킬러 문항’도 등장했다.”   이쯤에 ‘자격고사화’ 주장도 있었다. “1969~1980년 실행한 예비고사가 대표적인 자격고사다. 말 그대로 대입 자격만 평가하는 시험이라 지금처럼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적용하는 정도의 의미라면 자격고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수능이 입시의 주요 수단인 상황에서 자격고사화하자는 건 비현실적이다. 그렇게 하면 대학별 고사가 더욱 중요해진다.”   절대평가 논란도 있었다. “단계적 절대평가 전환은 지난 정부의 공약이었다. 영어·한국사만 절대평가로 바꾼 상태에서 학생·학부모의 반발로 중단됐다. 학생의 성취수준을 평가하는 것과 선발을 위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또 절대평가는 시험이 쉬울 거라 생각하는데 그건 착각이다. 이번 수능 영어처럼 성취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어려울 수 있다.”   정권에 따라 오락 가락이 문제   입시정책은 왜 자꾸 바뀌나. “전형 요소는 크게 내신(학생부+교과), 수능, 대학별 고사(심층 면접+실기)다. 학교는 공교육 정상화를 내세우고, 대학은 자율성을 주장한다. 정부는 객관적인 평가 자료로 사교육을 감소시킬 수 있는 국가적 차원의 시험을 필요로 한다. 이들 세력의 목소리 크기에 따라 입시가 계속 바뀌었다. 결과는 학생만 혼란스러웠다.”   지난 정부에서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이 큰 문제 아니었나. “취지 자체는 옳지만 공정성 논란이 거셌다. 세계 올림피아드 대회 1등이 서울대에 떨어져서 MIT에 장학금 받고 진학한 사례도 보도됐다. 학생부에 교외 수상실적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스펙이 될 만한 대회를 잘 여는 학교가 있고 그렇지 못한 학교도 있다. 기록 내용을 제한하기보다 다양한 활동을 기재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고교학점제는 수능과 모순된다는 주장도 있다. “학점제의 취지는 다양한 과목을 골라 듣는 건데, 수능 과목 위주로 파행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하지만 수능 과목만 공부한다는 편견을 깨야 한다. 컴퓨팅이 중요해지면서 정보과목 학습이 강화됐지만, 수능에 나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교육부가 예고한 대로 통합 출제를 하면 다양한 과목을 심화 학습한 학생이 유리할 것이다.”   입시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 “대학입학처럼 중요한 시험에선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가 꼭 있어야 한다. 한때 서울대가 수시모집으로만 83%를 선발했는데, 어느 한 전형 요소가 3분의 2를 넘으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수능과 내신, 대학별 고사가 5:3:2 정도 되면 적합한 것 같다. 다만 지금 같은 방식의 수능은 안 된다.”   수능 개선 방향은. “기본으로 돌아가라(Back to the Basics)다. 원조 수능은 국가 단위의 평가 방식 중 품질(퀄리티)이 가장 높았다. 요즘 학교는 탐구식 수업을 많이 하고 학생 수도 줄었다. 원래의 수능처럼 통합적 사고력 측정이 가능한 여건이 됐다. 다만 제도는 늘 현실 속에서 진화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꺼번에 바꾸려 하지 말고, 목표를 향해 직진하지 않고 꾸불꾸불하게 가야 한다. 정책의 취지를 국민에게 친절히 설명하고, 이해관계가 다른 교육 주체들을 설득해야 한다. 교육이 백년대계인 이유다.”   ◆김성열 교수=한국교육학회·한국교육행정학회·한국교원교육학회·한국지방교육경영학회 등 복수의 학회장을 지낸 교육정책연구 분야의 권위자로 2016년 세계적 인명사전인 마르퀴즈 후즈후에 등재됐다.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경남대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 윤석만 논설위원

    2023.12.08 00:24

  • [이상언의 직격인터뷰] “빈대, 국가가 감염병 관리 수준으로 대응해야”

     ━  해충 전문가 양영철 을지대 교수   이상언 논설위원 사라진 줄 알았던 빈대가 곳곳에 있었다. 지난 19일까지 2주 동안 120여 곳에서 서식이 확인됐다. 가정집·고시원·기숙사·찜질방 등에서 동시다발로 나타났다. 서울·부산·대전·광주 등 발견 지역도 다양하다. 왜 다시 퍼진 것일까. 얼마나 위험한 벌레일까.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궁금한 게 많다. 곤충 전문가 양영철(59) 을지대 보건환경안전학과 겸임교수에게 물었다. 한국방역학회 부회장인 그는 모기·빈대·벼룩 등을 기르며 연구했다.   빈대 문제가 정말 심각한가. “앞으로가 걱정된다. 들춰보니 ‘어, 이 정도였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들춰본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빈대 확산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법정 감염병 관련 항목에 포함돼 있지 않기 때문에 발견했어도 신고 의무가 없다. 법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할 의무도 없다. 따라서 빈대에 의한 피해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 최근에 SNS 등을 통해 빈대 문제가 알려져 신고가 잇따랐고, 그 결과로 빈대가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 빈대가 병 옮긴다는 증거 없지만 물리면 심각한 정신적 고통 유발   최근엔 ‘반날개빈대’ 많이 발견 아열대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돼   여행객 늘어날수록 확산 불가피 실태파악·방제 통합 체계 필요 」    해충 전문가인 양영철 을지대 보건환경안전학과 겸임교수가 20일 중앙일보 사옥에서 빈대의 유해성과 퇴치 방법 등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빈대는 반드시 사람 주변에 서식하기 때문에 정신적 고통이 크고 없애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빈대가 질병을 옮기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한가.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빈대가 감염병을 매개하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바이러스·박테리아·리케차 등을 옮길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는 않았다. ‘현재는 빈대가 병을 옮긴다는 증거가 없다’가 과학적인 설명이다.”   모기에 의해 말라리아에 걸리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빈대 확산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 않나. “그렇지 않다.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빈대에 물린 사람들은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라고 한다. 방 안에 빈대 100마리가 살면 100마리가 다 사람을 문다. 갓 알에서 깨어난 길이 1㎜짜리 새끼 빈대도 사람을 문다. 빈대는 일주일에 한 번 흡혈한다. 따라서 100마리가 있으면 매일 10여 마리가 흡혈한다. 한 마리가 한 군데만 무는 것도 아니다. 혈관을 찾아 이동하면서 또 문다. 한 번 흡혈 시간이 8∼10분이다.”   오죽했으면 집을 태웠겠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인가. “빈대 잡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있지 않나. 빈대가 열에 약하다는 것을 조상들이 알아채서 횃불 같은 것으로 집 안의 빈대를 죽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불이 옮겨붙어 집을 태우는 사고가 종종 있었을 것이다. 작은 일에 집착해 큰 화를 부른다는 뜻으로 이 속담이 쓰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빈대에 의한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빈대 없애는 것이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요즘 나타난 빈대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와 90년대에 빈대가 거의 사라졌다.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새마을 운동의 주택 개량 사업, 70년대에 부쩍 증가한 연탄 난방에 의한 일산화탄소 발생, 살충제 보급 등이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파악한 게 한 해 두세 건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정도부터는 한 해에 10여 건으로 늘었다. 여행객과 이주노동자가 늘면서 생긴 일로 추정된다.”   지금 발견되는 빈대는 모두 해외에서 유입된 것인가. “그렇다고 본다. 빈대에는 23개 종류가 있다. 그중 사람을 무는 빈대는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그냥 빈대(학명 Cimex lectuarius)고, 다른 하나는 반날개빈대(Cimex hemipterus)다. 우리나라엔 반날개빈대가 없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아프리카 등 아열대 지역에 주로 서식했다. 내가 최근 10여 일간 8곳에서 채집된 빈대를 봤더니 모두 반날개빈대였다. 전 세계적으로 반날개빈대 서식 지역이 늘고 있다. 이미 유럽으로도 퍼졌다.”   반날개빈대만 유입됐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냥 빈대도 발견된다. 이들도 해외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냥 빈대는 미국·중국·유럽 등의 온대지역에서 주로 서식해왔다.”   빈대와 반날개빈대가 사람을 무는 정도나 번식력, 살충제 저항성 등에서 차이가 있나.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구가 충분하지는 않다.”   한 마리로도 집단 번식 가능   여행 가방에 빈대 한 마리만 붙어 와도 집에 빈대가 퍼질 수 있나. “그 한 마리가 알을 품은 암컷인 경우엔 그럴 수 있다. 암컷 한 마리가 평생 200∼250개의 알을 낳는다. 곤충은 근친교배를 하기 때문에 금세 자손이 불어난다. 빈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서도 몇 달씩 산다.”   빈대의 천적은? 바퀴벌레가 빈대를 없앤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무근이다. 빈대와 바퀴벌레는 먹이와 서식지가 다르다. 경쟁 관계가 아니다. 집에 빈대와 바퀴벌레가 같이 살 경우 서로 신경 안 쓴다. 빈대의 천적은 사람과 빈대다. 수컷 빈대의 생식기가 날카로워 교미 과정에서 암컷이 죽는 경우가 꽤 있다.”   빈대를 없애는 방법은. “빈대는 주로 침실에 서식한다. 흡혈해야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충제를 마구 쓸 수가 없다. 살충제에는 많든 적든 독성이 있다. 한 번 뿌려서 제거가 되지 않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써야 하는데, 그러면 사람도 피해를 본다. 빈대가 집 안에 있다면 반드시 사람이 자는 곳 가까운 데에서 서식한다. 개체 수가 많으면 벽 틈, 커튼레일 안쪽, 전기 콘센트 안에도 산다. 침대 매트리스, 침대 틀 사이가 주요 서식처다. 빈대가 발견되면 우선 진공청소기로 매트리스와 침구, 침대 틀 사이의 빈대를 빨아들이고, 그다음에는 스팀다리미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게 좋다. 빈대는 섭씨 60도 이상에서 금방 죽는다. 실험해 보니 52도 물에서 15초 만에 죽었다. 스팀다리미에는 5초 안에 죽는다. 살충제 중에는 꽃에서 추출한 내추럴 피레스린 성분이 든 것을 사용하는 게 비교적 안전하다.”   지금 발견되는 빈대는 살충제 저항성이 있어서 잘 죽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일부가 그런 것인지, 전부 그런 것인지 확인이 되지 않는다. 잘 듣는 살충제도 있다. 그런데 집 안에 뿌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프랑스에서 빈대 때문에 뿌린 살충제로 사람이 피해를 본 사례가 1000여 건 보고됐다. 어린이가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물리적 방제가 우선이다.”   전문 방역업체에 의뢰해야 하지 않나. “개체 수가 많으면 구석구석에 있기 때문에 다 없애기가 쉽지 않다. 빈대가 있을 만한 곳을 다 확인하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프랑스 파리엔 열 집 중 한 집꼴   빈대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요즘 서울에 연간 1000만 명의 관광객이 온다. 앞으로 두세 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유입되는 빈대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프랑스 파리가 그런 경우다. 연간 7000만 명이 방문하는 파리는 지금 열 집에 한 집꼴로 빈대가 나온다.”   해외에서 유입되는 빈대를 막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입국자의 가방을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고, 열어 본다고 해서 바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입국자 몸과 짐에 살충제를 뿌려댈 수는 없지 않은가.”   정부나 지방 정부가 할 일은. “빈대를 질병 유발 해충으로 인식해야 한다. 병을 옮기지 않는다고 해서 관리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경제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는 질병 전파 여부를, 선진국에서는 삶의 질을 중시한다.”   정부 대응은 잘 이뤄지고 있나. “실태 파악과 대응의 통합적 체계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지금은 각 지방자치단체가 보건소를 통해 신고 내용을 확인하고 방역업체를 보내고 있다. 질병관리청이나 행정안전부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 빈대 퇴치에는 신속한 신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개체 수가 불어나면 없애는 데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   가방 지퍼 재봉선을 잘 봐야   빈대 서식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프랑스에선 탐지견을 쓰기도 한다. 빈대와 빈대 분비물에서 독특한 냄새가 난다. 이를 탐지해 알리도록 훈련하면 쉽게 서식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해외여행 갔을 때 빈대에 안 물리는 방법은. 몸에 바르면 빈대가 접근하지 않는 기피제 같은 게 있나. “숙소에 빈대가 있다면 물릴 수밖에 없다. 빈대는 흡혈 의지가 매우 강하다. 사람과 동물의 피 외에는 먹이가 없다. 개발된 기피제도 없다.”   해외여행에서 빈대를 데리고 집으로 오지 않으려면. “현관 밖에서 가방을 풀고, 옷은 온수로 세탁하고, 가방의 지퍼 재봉선 쪽을 잘 확인하는 게 좋다. 거기에 많이 붙어 온다.”   ◆양영철 교수=인천대 생물학과 재학 때부터 곤충에 대해 공부했고, 전북대에서 해충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기·파리·머릿니·벼룩·빈대의 습성과 방제 방법을 연구해왔다. 을지대 보건환경안전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질병관리청 중앙말라리아퇴치사업단 자문위원과 한국방역협회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한국유용곤충연구소 대표직도 맡고 있다. 이상언 논설위원

    2023.11.24 00:32

  • '금쪽이'가 문제아 키워?…오은영 "오냐오냐 교육, 절대 아니다" [이지영의 직격인터뷰]

     ━  ‘금쪽이 육아법’ 논란 오은영 박사가 말하다   지난달 31일 만난 오은영 박사. 육아에 대한 책임이 부담스러워 부모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완벽을 육아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며 “부모의 실수 때문에 아이들이 망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요즘 소아·청소년 정신의학과 전문의 오은영(58) 박사는 흡사 ‘동네북’ 같은 신세다. 한국 사회의 심각한 병리 현상이 불거질 때마다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지난달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간담회에선 그가 진행하는 방송 ‘금쪽같은 내 새끼’(채널A)가 “결혼·출산에 대한 부정적인 메시지가 많다”며 저출산 극복의 걸림돌로 거론됐고, 교권 침해 문제가 속출하자 그가 설파해온 ‘공감 육아’가 문제아와 문제 부모를 양산하는 원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  「 다른 사람에 공감하는 능력 중요 ‘넘지 않아야 할 선’ 확실히 해야   육아는 과학…뇌 신경회로 문제 아이 어려울 땐 교사와 의논을   ‘체벌 있던 과거가 낫다’는 환상 80년대생 부모 책임론도 편견 」    이지영 논설위원 지난달 31일 서울 삼성동 오은영아카데미에서 만난 오 박사는 “내게 영향력이 있다면 더 세심하게 살펴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어깨가 무겁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주장하는 ‘공감’과 ‘이해’가 ‘허용’과 같은 개념으로 오해받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아이의 뜻을 오냐 오냐 받아주고 ‘금이야 옥이야’ 키우면 절대 안 된다. 단호한 훈육으로 인간으로서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오냐, 오냐” 무조건 허용은 금물   ‘공감하라’ ‘이해하라’는 것은 어떤 뜻인가. “공감은 누군가가 아파하거나 고통스러워할 때 내가 똑같은 상황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저런 상황에서는 참 마음이 힘들고 아프겠구나’를 아는 것이다. 이런 공감 능력을 통해 인간은 서로 마음을 나누고 소통을 하고 행복을 느낀다. 요새 ‘지나친 공감’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잘못된 표현이다. 공감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이 뜻을 다 받아주고 소원 성취하도록 하는 것은 ‘지나친 공감’이 아니라 ‘지나친 허용’이다. ‘이해’란 말도 마찬가지다. 내가 방송에서 ‘이 아이를 이해해보자’고 이야기하는 건 이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을 하고 해결 방향을 찾아보자는 의미다. ‘그냥 이해해줘, 무조건 받아줘버리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한계와 규율을 가르치는 ‘훈육’이란 말 역시 오해해선 안 된다고 했다. “아이들이 공포를 느끼도록 해서 찍소리 못하게 하는 건 훈육이 아니다. 당장은 잘못된 행동을 멈추게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는 옳고 그름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공감과 훈육은 반대 개념이 아니다. 집 지을 때 기둥을 세우듯 부모가 늘 동시에 고려하고 같이 실천해야 한다.”   정상·비정상 이분법 구분은 위험   TV 프로그램에서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부모 되기가 겁나는 게 사실이다. ‘문제 있는’ 아이들의 육아법을 보통의 부모들이 따를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신체적인 질병과 달리 육아 과정에서 불거지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모든 아이가 겪는 일이다. 이를테면 누구나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걸 할 줄 모르는 상태에서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 관계를 맺고 유지를 하는지 단계적으로 익혀나간다. 이런 발달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정상·비정상으로 나누는 건 위험한 생각이다. 그 어려움의 본질적인 이유와 해결 방향을 알면 누구에게나 육아가 더 수월해지고 아이들도 더 행복하게 자란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건 알지만, 성장하면서 안 행복했다고 말하는 어른이 많다. 이들은 자신이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도 안 행복할까 봐 두렵다고 한다. 올바른 육아 방법을 알게 되면 적어도 이런 사례는 좀 줄어들지 않겠나.”   ‘솔루션’이란 방법을 통해 정말 아이가 바뀌나. 사람의 변화가 그렇게 과학 공식처럼 이뤄질까. “과학이 맞다. 양육은 자녀를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인간은 발달을 통해 기능을 획득한다. 대뇌의 해당 신경회로가 잘 연결돼 거기에서 정보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때 기능이 발휘된다. 집중할 때 쓰는 신경회로, 잔소리를 받아들일 때 쓰는 신경회로가 따로 있기 때문에 잔소리한다고 집중력이 좋아지는 게 아니다. 필요한 뇌 회로가 잘 발달하게 하려면 의학적·과학적 관점에서 잘 관찰해 정확한 원인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선하려는 부모의 노력이 아이 뇌의 신경회로를 변화시키고 대뇌의 신경 생화학적 환경과 신경 생리적 환경을 변화시켜 아이의 정서와 행동, 부모와의 관계를 바꾼다. 그래서 아이의 발달상 어려움을 부모가 빨리 알아차리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교사와 의논하되 요구하지 마라”   지난 7월 서울 서이초 교사의 극단적 선택 이후 교권 침해 문제가 수면 위에 올라왔다. 교사에게 악성 민원을 일삼는 학부모들이 성토 대상이 되면서, 그의 책 『금쪽이들의 진짜 마음속』도 도마 위에 올랐다. 아이가 특정 교사와 맞지 않아 부딪히면 교사를 찾아가 이야기하고 교사에게 “조심하겠다”는 말을 듣고 오라고 조언한 부분을 두고 ‘학부모 갑질’이라는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책의 사례는 교사가 책상을 ‘땅!’ 하고 칠 때 아이가 놀라고 무서워하는 경우였다. ‘이런 일에 교사를 찾아가기까지?’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교권 침해로 힘들어하시는 선생님들이 많은 상황에서 ‘교사와 같이 의논해보라’는 말을 하기가 겁이 난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와 교사가 함께 의논해서 지도하고 키우는 게 맞다. 아이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교사를 찾아가 의논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오해하면 안 된다. ‘의논’을 하라는 것이지 ‘요구’를 하라는 게 아니다. 책 내용의 초점은 아이의 상황을 교사에게 알리고 의논을 해서 같이 잘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의논하면 선생님은 ‘조심해서 잘 살펴야 되겠네요’라고 하실 거다. 사과를 받으라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독자분들이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수정하는 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상대방만 너를 배려하고 이해할 수는 없어. 너 또한 처한 환경에 맞춰 나가야 해’라고 가르치라는 내용도 책 바로 뒷부분에 나와 있다.”   공정에 민감한 1980년대생 부모들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과거보다 늘어났다고 한다. 왜일까. “유아 교육 단계에서부터 너무 일찍 학습을 시작하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학습이 인성 교육, 정서 교육의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또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면서 배운다. 옳고 그름을 알아 양심껏 행동하고 약자를 도와주며 사는 모습을 사회에서 배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최근에는 코로나 영향으로 발달 지연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도 많다.”   체벌이 흔했던 과거에 도리어 ‘문제아’가 적었다는 주장도 있다. 매는 정말 안되는 건가. “안 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 나를 비난해도 할 수 없다. ‘예전엔 때려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라는 건 환상이다. 지금처럼 디지털화돼 있지 않아 드러나지 않았을 뿐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었다. 매로 아이를 굴복시키면 반응은 금방 온다. 하지만 유아기·아동기에 가장 가까운 부모로부터 경험했던 공포감이 나중에 정서적인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은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이다.”   자기 권리를 내세우는 1980년대생 젊은 부모들이 교권 붕괴 등의 원인이라는 얘기도 있다. “위험한 편견이다. 실제 그렇지도 않다. 세대별 특징이 있을 뿐이다. 1980년대생들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네 생각을 말해보라며 자기주장을 하도록 교육받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공정한 것인가를 많이 배웠고 그런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불의를 봤을 때 말을 하게 된 것은 너무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를 내재화하면서 잘못 적용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 몇몇 사례가 눈에 띄는 것 같다.”    “할 일과 안 할 일 분명히 가르쳐야”   자녀의 정서적 상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젊은 부모 세대 특징이다. “스트레스와 정서적인 상처에 대한 개념의 혼동이 양육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 아이들이 일상생활의 스트레스를 다뤄내는 내면의 힘이 생겨야 독립·자립할 수 있다. 그 연령 대부분의 아이가 하는 일은 해야 하고, 대부분이 안 하는 일은 안 하는 게 맞다. 아이들이 스트레스로 힘들어한다고 ‘그래그래 알았어 하지 마’ 하면 아이를 망친다는 건 사실 상식 아닌가. 젊은 부모 세대가 정서적 상처에 특히 예민한 것은 이들의 성장 환경과 관련된 일일 수 있다. 성취와 성과에 대한 지나친 압박, 디지털을 통한 불특정 다수와의 비교 등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가 너무 많은 세대여서 자녀의 상황에 자신의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 같은 반응을 하는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할까. “부모가 되어 한 사람을 깊은 사랑으로 키워내는 일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마음이 편안하고 다른 사람과 잘 지내면 그게 행복한 인생이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건 아이를 그런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다. 또 내가 행복해야 자녀를 출산할 마음도 생기지 않을까. 학교에서부터 ‘마음’과 ‘관계’를 가르치는 교과서로 이런 교육을 하면 좋겠다.”   ◆오은영=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소아·청소년 정신의학과 전문의.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아주대 의대 정신과 교수를 지냈다. 2005년부터 11년 동안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출연하면서 ‘육아 멘토’로 명성을 얻었다. 2003년부터 오은영소아청소년 클리닉과 오은영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 『내 아이가 힘겨운 부모들에게』 등을 펴냈다.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2023.11.03 00:51

  • [장세정의 직격인터뷰] “리더십 위기 네타냐후, 지상전 규모·기간 놓고 고심”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문가 마영삼 전 대사   장세정 논설위원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에 있다.”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겸 군사학자였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가 『전쟁론(Vom Kriege)』에서 꿰뚫어 본 전쟁의 본질이다. 그의 말처럼 전쟁은 내치의 연장이지만, 외교의 실패가 전쟁으로 치닫기도 한다. 물론 전쟁 중에도 외교는 해야 한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 전후의 양상을 살펴보면 클라우제비츠의 공식대로 움직이는 듯하다.   이스라엘의 국내 정치 분열과 미국의 빈자리를 노린 하마스의 기습 공격, 이스라엘과 아랍의 동상이몽, 요동치는 중동의 지정학,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급거 중동 순방이 그것이다. 바이든과 아랍 정상들의 회동이 무산되면서 이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선택만 남았다. 그는 예상대로 지상전을 감행할까, 가자지구를 재점령하려 할까.     ■  「 아랍과 4자 회담 무산으로 확전 위기, 미국의 영향력 한계 드러내 인명 피해 커 보복 여론 비등, 반격 안 하면 네타냐후 정치 위기 하마스에 반격해도 완전 제거 불가능, 가자지구 재점령도 부담 커 북한은 기습 공격서 학습 효과, 한국은 이스라엘 반면교사 삼아야 」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지상전 투입이 예상된다. 주팔레스타인대표부와 주이스라엘 대사관에서 모두 공관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마영삼 전 대사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이스라엘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민규 기자 이런 궁금증을 안고 마영삼(67)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을 만났다. 외시(15회) 출신으로 2005년 초대 주팔레스타인 대표부 대표, 외교통상부 아중동국장, 주이스라엘대사(2008~2011), 주덴마크대사 등을 역임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에서 공관장을 지낸 유일한 전직 외교관이다.   바이든의 중동 순방을 어떻게 봤나. “이번 방문 목적은 이스라엘과의 연대 과시, 확전 방지, 민간인 보호 및 인도적 구호, 인질 석방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텔아비브 도착 전날 가자지구에서 병원 폭발 참사가 터지는 바람에 바이든 대통령이 요르단에서 요르단 국왕, 이집트 대통령,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함께 하려던 4자 회담이 아랍 측의 막판 거부로 무산됐다. 미국과 이스라엘 모두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바이든은 이번 방문에서 전쟁 범위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충돌로 국한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병원 폭발 참사로 인해 아랍권이 분노하면서 확전을 막으려던 바이든의 의도와 달리 확전의 위험성이 고개를 들고 있다. 방문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고 중동에서 미국의 지도력 한계를 보여줬다.”    하마스 제거와 인질 구출이 목표   네타냐후는 지상전 개시할까. “바이든의 방문이 이스라엘의 강력한 보복 작전을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상전을 시작할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그럴 경우 지상전 규모와 기간을 놓고 고민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어린이를 포함해 많은 민간인이 살해되고 인질로 납치되면서 이스라엘 국민의 분노가 깊어 대규모 보복 공격이 상당 기간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   지상전의 1차 목표는. “이스라엘 정부의 발표를 보면 하마스 세력의 제거가 가장 중요한 목표다. 주요 지휘부와 시설을 타격하는 작전을 펼 것 같다. 하마스가 건재하면 언제든 똑같은 공격을 당할 수 있다고 이스라엘은 우려한다. 이번 기습을 ‘이스라엘판(版) 9·11’이라 부를 만큼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번 기회에 하마스의 뿌리를 뽑으려 할 것이다. 인질(199명 추산)을 구출해야 하는 목표도 있다.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 이스라엘의 고민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네후 이스라엘 총리. [연합뉴스 중앙포토]   하마스 발본색원이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하마스 완전 제거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마스 간부 상당수는 이미 지하터널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지상전은 매우 어려운 작전이 될 것이다. 인구 230만명 가자지구의 중심인 가자시티는 110만 명이 주거하는 인구밀집 지역이다. 길이 좁고 복잡하다. 하마스 대원들이 매복하기 쉬운 지형이다. 더구나 지하 터널이 500㎞나 된다니 미로 같은 지하터널로 잠적하면 일일이 찾아내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가자 지구 재점령을 노릴까. “1967년 ‘6일 전쟁’ 때 가자지구를 점령했던 이스라엘이 2005년 샤론 총리 주도로 완전 철수를 단행했다. 당시 가자지구에 건설한 25개 정착촌에 약 9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는데, 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군대 주둔에 따른 부담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에 이스라엘 군대가 가자 지구를 재점령하면 얼마 가지 않아 2005년의 고민을 다시 하게 될 것이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비난도 받을 것이다. 아마도 지상전의 일차적 목표를 달성하면 이스라엘 스스로 철군할 것이다.”   ‘5차 중동전쟁’으로 가진 않을듯   이스라엘 대 이란, 미국 대 이란 대결로 비화할 우려는.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팔레스타인과 하마스를 구별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하마스를 테러 세력으로 규정했고, 사우디 등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할지언정 하마스 편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네 차례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이었지만, 이번에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중동 국가들 모두 확전 방지와 조속한 휴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란도 매우 정교한 외교를 구사하고 있어 최대한 직접 개입은 자제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5차 중동전쟁으로 확전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물론 돌발 변수에 따라 아랍권이 어떤 행동에 나설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14년 8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충돌한 '가자전쟁' 당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대원이 지하 터널을 지나는 모습. 가자지구는 땅굴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스라엘은 2020년 9월 미국의 중재로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s)’에 따라 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모로코·수단과 수교했다. 이집트·요르단을 포함해 아랍권 22개국 중 6개국이 이스라엘과 수교한 상태다. 이번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수교 협상이 진전되고 있었다.   하마스는 이번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나. “수니파 이슬람의 지도국인 사우디가 이스라엘과 수교하면 파급 효과가 매우 클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마스의 입지가 좁아지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뒷전으로 밀릴 것으로 하마스는 계산했을 것이다. 이번 전쟁 때문에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수교 교섭이 상당 기간 차질이 예상되니 그런 측면에서 하마스가 일차적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권력 투쟁을 하고 있다. 하마스는 이번 기회에 반이스라엘 투쟁으로 선명성을 부각해 주도권을 잡기 원했을 것이다. 다만 최종 평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이스라엘은 ‘안보 모범국’이었는데. “아이언돔이 뚫리고 정보기관(모사드와 신베트)이 무기력했던 가장 큰 원인은 이스라엘의 자만심과 방심 때문이었다. 네 차례 중동 전쟁을 치르면서 이스라엘은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했다. 주변의 어느 국가가 공격해도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스라엘 내부 문제도 원인을 제공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극우 성향 정당과 연정을 구성해 정착촌 확대 등 강경 정책을 채택했다. 벤그비르 국가안보 장관이 알아크사 사원 방문을 감행해 무슬림을 자극했다. 사법부 개편안으로 국민 저항이 벌어지자 정부 일부와 예비군 및 정보기관 요원도 동참했다. 네타냐후 총리의 리더십이 손상을 입었고, 이것이 정보 실책과 군의 초기 대응 실패를 야기했다. 하지만 나라가 전쟁 상황이 되자 정쟁을 중단하고 ‘전시 거국내각’을 구성했고 국내외 유대인이 대동단결하고 있다.”   영국의 ‘이중 약속’이 분쟁의 불씨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당시 중동 지역을 지배했던 오스만제국과 싸우던 영국은 ‘맥마흔 서한’(1915~1916년)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 국가 창설을 지지했고, 1917년 ‘밸푸어 선언’으로 같은 땅에 유대 국가 수립을 약속했는데 ‘이중 약속’이 분쟁의 화근이 됐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두 개의 노벨 평화상을 배출했지만, 평화는 정착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시위가 지난 11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참가자들이 이스라엘 국기와 이란 국기(가운데)를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번 충돌의 끝은 어디일까. “이번 전쟁으로 양측의 원한이 매우 오래 갈 것으로 보여 과거보다 훨씬 비관적이다. 이스라엘 우익 정부는 강경 정책을 고수할 것이다. 하마스 세력이 약화하는 경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팔레스타인 전체 지역을 얼마나 실효적으로 통치하느냐도 중요 변수다. 만약 사태가 진정되고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수교 교섭이 재개되면 사우디와 미국이 근본적 해법을 시도하겠지만, 1947년 유엔에서 영토 분리를 통한 ‘두 국가 해법’ 결의안이 제시됐을 때나 2000년  캠프 데이비드 협상 때 같은 절호의 기회를 다시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반도에 준 시사점은. “먼저 북한은 하마스의 기습 작전을 통해 ‘학습 효과’를 많이 얻었을 것이다. 수천 발의 로켓포에 아이언돔이 무용지물이 됐으니 하마스와 비교할 수 없는 무력을 보유한 북한은 상당히 고무됐을 법하다. 한국 정부는 누구든 반인도적 행위를 자행하면 비판하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다만 국론 분열로 인해 정보체계와 안보체계에 금이 가면서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의 분열과 자만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새삼 새길 때다.” 주팔레스타인 대표부 초대 대표를 역임한 마영삼 전 주이스라엘대사가 18일 오후 서울 서소문 네오스테이션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장세정 논설위원

    2023.10.20 00:37

  • [이지영의 직격인터뷰] 자궁 안에 정관이 있다고? 24년 만에 뜻 바꾼 국어사전

     ━  표준국어대사전 바로잡기 나선 박일환 시인   2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박일환씨가 전자칠판에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 오류를 적으며 설명하고 있다. “상식 수준에서만 살펴봐도 1000개 이상의 오류를 금세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현동 기자 전직 국어교사이자 시인인 박일환(62)씨는 “국어사전을 보다 보니 어느 날 화가 나더라”고 했다. 신선한 시어(詩語)를 발굴할 요량으로 가까이 지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그가 찾은 것은 숱한 오류와 허점이었다. 어떻게든 국어사전이 제자리를 잡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2015년 『미친 국어사전』을 시작으로 『국어사전 혼내는 책』(2019), 『맹랑한 국어사전 탐방기』(2020), 『국어사전 독립선언』(2022) 등을 연이어 펴내며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있다.   오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만난 그는 표준국어대사전에 대해 “최다 표제어 등에 집착한 성과주의의 산물”이라며 “오류로 점철된 국어사전을 ‘국가대표’ 사전으로 그냥 두고 보는 것은 우리 문화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된다고 자인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대수술이 필요하다”면서다.     ■  「 1999년 정부 편찬 첫 국어사전 최다 표제어 집착, 뜻풀이 오류   한자어 남발, 이해하기 어려워 온라인 ‘우리말샘’도 정비해야   영국처럼 다양한 예문 담아야 정치·지식인의 언어 파괴 심각 」    이지영 논설위원 1999년 출간된 표준국어대사전은 정부가 직접 나서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이다. 1991년 설립된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이 92년부터 7년여에 걸쳐 500여 명의 인원과 112억원을 투입해 만들었다. 표제어 50여만 단어를 총 7328쪽에 담아낸 막대한 분량이다. 2008년부터는 종이사전 대신 인터넷 ‘웹사전’으로만 발간된다.      백과사전·일본사전 베낀 흔적   표준국어대사전의 최대 문제점은. “수많은 한자어·외래어·전문어 등을 끌어와 표제어 숫자 늘리기에 급급하면서 무성의한 뜻풀이를 남발한 것이다. 기존 백과사전이나 일본사전을 베낀 흔적도 많다. 이를테면 ‘전선병(여자의 긴 양말이 세로로 올이 풀리는 일)’ ‘몽롱체(시문·회화 따위에서, 명확한 의미나 윤곽 따위를 갖지 않은 것)’ 등 낯선 단어를 표제어로 올리고 일본사전의 뜻풀이를 표절하다시피 옮겨 적었다. 내용 자체가 틀린 경우도 여럿이다. ‘자궁’을 ‘여성의 정관의 일부가 발달하여 된 것’이라고 설명해 놓았을 정도다. ‘정자가 이동하는 관’인 정관이 여성의 몸에 있다는 게 말이 되나.”   그는 채소 ‘당근’의 사례를 ‘사전 뺑뺑이’를 해야 의미 파악이 가능한 뜻풀이의 예로 들었다.   ‘당근: 산형과의 두해살이풀. 높이는 1미터 정도이며, 잎은 뿌리에서 나고 우상 복엽이다. 여름에 흰 꽃이 줄기 끝에 복산형 화서로 피고, 원뿔 모양의 불그레한 뿌리는 식용한다.’   ‘우상’이 뭘까. 사전을 다시 검색해 ‘새의 깃 모양(羽狀)’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복산형’은 표제어로 수록돼 있지 않았고, ‘산형’도 없었다. 한자사전까지 찾아보고 나서야 ‘우산 모양’이란 ‘산형’의 뜻을 알게 됐다.   그는 “‘꽃차례’란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도 ‘화서’라는 한자어를 썼다”며 “뜻을 알기 위해 사전을 펼쳤는데 이해가 안 된다면 이건 사전으로서 부적합”이라고 성토했다.    모범이 되지 못하는 ‘국가대표’ 사전   무엇이 가장 우려스러운가. “국어사전을 보면 우리말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한국어에 대해 지레 겁먹고 주눅이 들게 한다. 또 국어사전의 난해한 뜻풀이가 어려운 말, 특히 한자나 영어가 더 수준 있는 언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쉬운 말이 더 좋은 말이라는 것, 말을 잘한다는 것은 간명하고 쉽고 정확하게 뜻을 전달하는 것이란 걸 사전이 모범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다.”   신조어·방언 등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어휘를 보완하기 위해 국립국어원은 2016년부터 개방형 한국어 사전 ‘우리말샘’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우리말샘 표제어는 115만여 개에 이른다.   “세상에 떠도는 온갖 말이 다 우리말샘 표제어로 수록돼 있다. 유행어라고 볼 수도 없는, 곧 사라질 낱말도 다 갖다 뒀다. ‘몸매’가 들어간 표제어만 해도 극세사 몸매, 명품 몸매, 반전 몸매 등 수십 가지다. 줄임말도 엄청나게 많은데, 게임을 알지 못하다는 ‘게알못’, 배구를 알지 못하다는 ‘배알못’, 연애를 알지 못하다는 ‘연알못’ 등이 다 우리말샘의 표제어다. 다양한 어휘를 다루는 것도 좋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명확한 기준과 체계를 세워 집중해야 할 부분에 역량을 쏟아야 한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사전 아쉬워   외국의 국어사전은 어떤가. “영국의 옥스퍼드 사전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다. 1857년부터 71년에 걸쳐 1000명이 넘는 학자가 동원돼 1928년 초판이 완성됐다. 실제 문학작품이나 신문 기사에서 뽑아온 다양한 용례가 가장 큰 장점이다. 해당 단어가 실생활에서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려면 예문을 많이 보여줘야 한다.”   또 추천할 만한 사전이라면. “4000여만 부가 팔린 일본의 ‘신메이카이(新明解) 사전’의 뜻풀이도 좋은 모델이 된다. 개성 넘치는 표현으로 듣는 사람이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단어의 의미를 전달한다. 예컨대 ‘연애’에 대한 이 사전의 풀이는 ‘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고양된 기분으로 둘만 함께 있고 싶고 정신적인 일체감을 나누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육체적인 일체감도 얻고 싶지만 항상 이루어지지는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 사로잡히거나 드물게 이루어져서 환희하는 상태에 몸을 두는 것’이다.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이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으로 풀이한 단어다.”   오는 9일은 제577돌 한글날이다. 해마다 한글날이면 ‘한글 파괴’가 논란이다. “한글 파괴와 언어 파괴는 별개 문제다. 한글 파괴라고 하면 ‘멍멍이’를 ‘댕댕이’로, ‘명작’을 ‘띵작’으로 쓰는 것 정도일 텐데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어 파괴 문제에서도 외래어를 많이 쓴다거나 지나친 줄임말을 쓰는 것 정도는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문제는 ‘커피 나오셨습니다’처럼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언어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모든 게 상품으로 환원되는 상품경제 시대에서 소비자는 왕이라는 인식, 지나친 소비자 중심주의가 ‘존대어 과잉’이란 언어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커피 나오셨습니다”가 맞나   다른 사례를 꼽는다면. “같은 이유에서 ‘이리 오세요’ ‘돌아누우세요’란 말 대신 ‘이리 오실게요’ ‘돌아 누우실게요’가 통용되고 있는데, 내가 하는 일에 써야 할 어미 ‘∼게요’를 상대방에게 쓰는 셈이라 어법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 표현도 맞는 표현으로 용인될지 모르겠다. 말을 바르게 만들려면 사회 분위기와 문화를 바꿔야 한다. 언어를 탓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모습과 환경을 돌아보는 게 먼저다.”   언어 파괴가 심각한 상황이다. “현학적 표현으로 자기 지식을 과시하는 지식인, 막말을 일삼는 정치인 등 지도층의 책임이 크다. 특히 정치인들의 억지 쓰기와 목소리 높이기는 말의 품격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말하기와 듣기로 이뤄지는 언어생활의 기본을 흔든다. 국회에서 질문을 던져 놓고 답변하는 도중에 끼어들어 막 소리치는 광경이 익숙하다. 경청이 안 되면 언어생활이 안 되고, 그것이 바로 언어 파괴다.”   그와 인터뷰를 마친 뒤 국립국어원에 반론을 받기 위한 문의를 했다. 그가 지적한 대로 자궁의 뜻풀이가 ‘여성의 정관의 일부가 발달하여 된 것으로 태아가 착상하여 자라는 기관’으로 명시돼 있는 이유를 묻기 위해서였다.   4일 국립국어원 어문연구과 사전팀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1990년대 기존 사전을 참고해 표준국어대사전을 집필하면서 ‘수란관’을 ‘수정관’으로 잘못 인용했고, 이후 ‘수정관’을 일괄적으로 같은 뜻인 ‘정관’으로 바꾸면서 함께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여성은 정관이 없다”며 뜻풀이의 오류를 지적하는 의견이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만 2017년과 올해 4월 등 두 차례 올라왔고, 박씨가 2019년 펴낸 『국어사전 혼내는 책』에서도 언급됐다.   하지만 여전히 오류 수정이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해 국립국어원 이대성 사전팀장은 “외부 의견이 올라오면 비속어 등을 걸러내는 1차 검토를 마치고 내용 검증의 2차 검토를 한다. ‘자궁’에 대한 의견은 1차 검토를 끝낸 뒤 2차 검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인력이 부족해 밀려있는 사안이 많다”고 대답했다.    국어사전 담당 학예직 3명 불과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사전 업무를 하는 학예직 공무원은 3명이고, 계약직 직원까지 포함하면 총 13명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수정 절차는 단순 오류는 국립국어원 사전팀에서 수정하고, 논의가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분기마다 열리는 정보보완심의위원회를 거쳐 수정 여부를 결정한다. 한 해 수정 건수는 총 500~600건 정도다.   국립국어원은 본지가 문의한 지 2시간여 만인 4일 오후 1시39분 ‘자궁’의 뜻풀이를 ‘여성 생식 기관의 하나. 골반 안쪽에 있으며, 수정란이 착상하여 분만 때까지 태아가 자라는 기관’으로 수정했다. 1999년 표준국어대사전이 처음 발간된 이래 24년 만이다.   ◆박일환=1992년 전태일문학상 단편소설 우수상 수상.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시인 등단했다. 1987년부터 30년 동안 중·고교 국어교사 생활을 하며 시집 『푸른 삼각뿔』 『학교는 입이 크다』 등과 『국어 선생님, 잠든 우리말을 깨우다』 『미주알고주알 우리말 속담』 『나는 바보 선생입니다』 등을 냈다.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2023.10.06 00:33

  • "북, 포탄 공급량 '밀당'하면 조급한 푸틴 연내 평양 갈듯" [장세정의 직격인터뷰]

     ━  경제학자 김병연 교수가 본 김정은·푸틴의 위험한 거래   장세정 논설위원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지난 13일 있었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부적절한 만남'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도발을 일삼아온 북한도 문제지만,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인 러시아의 무책임을 규탄하는 목소리도 크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북·러 군사 거래는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를 직접 겨냥한 도발"이라고 비판했다. 한·미의 대응 움직임도 빨라지고, 미·중과 중·러의 접촉도 잇따르고 있다.    ■  「 '실패국가'와 '실패 중인 국가' 만남, 제재 탈출 이해관계 맞아 빅딜보다 스몰딜 가능성… 러, 포탄 생산 늘리면 북 버릴 수도 우크라 전쟁에 빨려든 북한, 한·미·일 한목소리로 경고해야 북·러 무기원료 공급망은 차단하되 대화 통로는 열어둬야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현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양측은 모종의 무기거래를 한 것으로 보인다.[AP 연합뉴스]  북한·러시아 문제에 정통한 김병연(61)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국가미래전략원장)를 만나 이번 북·러 정상회담의 의미와 파장 등을 들어봤다. 푸틴의 연내 평양 답방 가능성에 대해 "북·러 사이의 거래, 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면서 "11월 평양에서 북·러 정부 간 위원회가 열리는데 포탄 공급량을 놓고 북한이 튕기며 밀당이 벌어지면 푸틴이 조급해져 연내에 평양에 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국가미래전략원장)이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푸틴의 양동작전, 일관성 없는 말  -이번 정상회담을 어떻게 봤나.  "러시아의 실제적 필요와 전략적 고려가 북한과 맞아떨어졌다. 실제적 필요는 포탄과 로켓 등 재래식 무기였을 것이고, 북한은 식량·에너지 및 첨단 군사기술을 원했을 것이다. 이 모든 거래가 한꺼번에 이뤄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전략적 고려란 북·러 모두 미국을 압박해 미국 주도의 현상을 변경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의미다. 러시아는 북한과 군사적으로 연대하고 북한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북한도 러시아와 거래해 미국의 제재를 무력화하고 핵무기 고도화를 조기에 이룰 수 있음을 과시하려 했다. 또 김정은은 자신이 환대받는 모습을 부각해 2019년 '하노이 노딜'로 추락한 국내적 위상을 만회하려 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물밑 거래가 있었을까.  "러시아가 절실히 원하는 포탄을 북한이 갖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에 러시아의 포탄 재고가 350만~500만발 정도였고, 연간 포탄 생산량은 수십만 발로 추정한다. 러시아는 전쟁 중에 하루 5000발 이상, 그동안 누적 300만발가량 사용한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사상자의 70%가 포탄으로 인한 것일 만큼 포탄이 전쟁의 핵심인데, 포탄이 부족해지면서 전쟁 수행 능력에 제약이 생기자 러시아는 방어 중심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른바 빅딜이 있었다고 보나.  "북·러 거래에 대한 푸틴의 언급은 일관성이 없다. 러시아는 양동 작전을 펴고 있다. 한편으로 러시아 자체 포탄 생산량을 연간 200만발 정도로 늘려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북한산 포탄을 들여와 최대한 버티자는 계산이다. 북한의 포탄 공급은 러시아의 포탄 생산량이 소비량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단기 차입하는 ‘브릿지론(Bridge loan)’ 성격이 짙다. 러시아는 '단기적으로 충분한 인센티브를 주고 북한의 포탄을 공급받아야 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북한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는 심산일 것이다. 지금은 급박해 단기차입에 나섰지만, 포탄이 충분해지면 북한이 팽당할지도 모른다. 일단 식량·에너지를 주는 스몰딜로 시작해 군사적 빅딜은 차후에 논의하자는 식으로 거래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하고 있다. 양측은 모종의 무기 거래에 합의했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연합뉴스] 더욱 어려워진 북한 비핵화 해법  -대한민국 안보에 어떤 위협을 줄까.  "이번 회담으로 곧바로 결정될 것 같지는 않다. 러시아의 첨단 군사기술이 북한에 제공되면 이는 한반도 평화에 큰 안보 위협이다. 북한이 무기 제공 대가로 식량과 에너지를 얻으면 경제적으로 버틸 힘을 일정 기간 얻는 것이니 한반도 평화에 일시적 충격이다. 그런 면에서 무기와 경제의 교환은 스몰딜이다. 반면 러시아의 첨단무기 기술은 북한 군사력을 불가역적으로 끌어올리니 우리에겐 영구적 충격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 재래식 무기와 러시아 첨단무기 기술의 교환인 빅딜이 훨씬 더 위험하다. 지금 구도에선 스몰딜 가능성이 크고 빅딜은 우크라이나 전쟁 양상과 포탄 생산량을 증가하려는 러시아의 노력 결과에 달려 있다. 스몰딜이 빅딜로 갈 수도 있고, 스몰딜로 끝날 수도 있다."  -국제정치에 끼친 영향은.  "러시아나 북한은 지금 같은 지정학적 상황을 자국에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바꾸려고 시도했다. 북·러가 연대하고 서로를 대미·대서방 레버리지로 사용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전쟁과 비핵화에 가해 오는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한반도의 변동성이 더 커졌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가 북한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영향을 줄 수 있게 됐다. 북한 비핵화가 더 어려워졌다는 점도 문제다. 북한 비핵화가 미·중 패권경쟁과 연결된 것이 1차 충격이라면, 이번 북·러 밀착은 2차 충격이다. 북한 비핵화는 이런 지정학적 다중성을 동시에 풀어야 한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전쟁에 빨려 들어가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북한이 원하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북한이 러시아와 밀착한 것은 따지고 보면 엄청난 도박이다."   북·러의 도박, 중국엔 잠재적 손실  -북·중·러 관계에 미묘한 기류가 감지된다.  "러시아는 '실패하고 있는 국가(Failing state)'이고 북한은 '이미 실패한 국가(Failed state)다. 일부에서 거론하는 북·중·러 구도 형성은 아주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국제 제재를 받는 북 ·러와 연합한다는 것이 중국엔 큰 매력이 아닐 수 있다. 북·러 회담 직후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모스크바로 날아갔지만 북·러 밀착을 반기기보다 위험하다고 여길 것이다. 중국은 대북 영향력을 독점하고 싶어하지 러시아와 나누기를 원하지 않는다. 중국이 더 필요한 것은 중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북한이다. 중·러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북한은 중국에는 잠재적 손실이다. 러시아의 첨단무기 기술까지 넘겨받은 북한이 중국 말을 듣지 않는다면 중국은 북한을 대미 레버리지로 쓸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세 국가의 셈법이 달라 북·중·러 구도 형성이 말처럼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 러시아는 북·중·러 연합 군사훈련을 원하겠지만, 중국이 동의할지는 의문이다. 북·중·러가 연합군사훈련까지 하면 미국과 서방은 중국을 더 멀리하며 더 강하게 압박할 것이고 그러면 중국경제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부터).  -북·러에는 어떤 추가 제재가 가능할까.  "미국 하원이 북·러 군사협력을 제재하는 법안을 초당적으로 발의했다. 개인·기업·기관에 대한 세컨더리 보이콧을 포함해 대러 및 대북 제재를 강화할 것이다. 여기에는 러시아와 북한의 무기 제조, 특히 포탄 제조 공급망을 균열시키는 제재를 포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포탄의 원료, 금속 외피, 화약 등의 공급망을 파악해 북·러로 들어가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 미국은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화해 대북 억지력을 증가시키려 할 것이다."   심각한 기능부전에 빠진 유엔  -유엔이 제역할을 못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쏴도 중·러의 반대로 유엔이 새로운 대북 제재를 부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 위험한 것은 기존 대북 제재를 찬성한 러시아가 '기존 대북 제재는 우리가 아니라 유엔 안보리가 한 것'이라고 발뺌한 대목이다. 유엔의 기능부전이 심각하지만, 유엔을 개혁하거나 대체할 새로운 국제기구를 만드는 것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 필요한 대응 전략은.  "우리는 이제 유엔 외에 다른 다자 및 소다자 네트워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북·러 군사 거래에 대해 대한민국에 대한 도발이라며 비판했다. 내년 11월 미국 대선 결과가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합의와 8월의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협력 합의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합의를 조기 이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한국은 동북아 평화와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 러시아가 장기적 견지에서 정책을 결정하도록 촉구할 필요가 있다." 유엔 총회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을 면담하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윤대통령은 기조연설에서 북한과 러시아를 비판했다.[대통령실 뉴스1]    9·19 군사합의 폐기는 신중히  -바람직한 대북 정책은.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 핵이 남북의 최대 걸림돌임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위한 남북대화와 남북관계 개선에 열려 있음을 주지시켜야 한다.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첨단무기 기술을 받은 것이 확인되거나 북한의 실제 도발이 있을 때는 9·19 군사합의를 폐기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먼저 폐기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북한이 귀를 기울일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북·러 밀착으로도 요행수 찾기에 실패해 아무것도 얻지 못한 북한이 '이거 도저히 안 되겠구나' 하는 진실의 순간에 직면했을 때 돌아올 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 두는 것이 필요하다. 대북정책은 군사적 대응, 외교적 대화, 경제적 레버리지, 북한 정보화 등 네 축을 모두 동원해야 한다. 이를 단계와 상황에 맞게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복합순차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가 중앙일보 네오 스테이션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김병연 석좌교수=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학 경제학 박사. 경제체제 전환과 사회주의 경제, 북한경제 전문가. 대한민국 학술원상(2018년) 수상.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임근홍 인턴기자가 인터뷰 정리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2023.09.22 00:47

  • "아쟁 30대 부숴도 모자랐다" 국악에 빠진 작은 거인 김수철 [이지영의 직격인터뷰]

     ━  데뷔 45년 ‘작은 거인’ 김수철의 ‘큰 음악’   다음달 김수철은 동서양 악기가 어우러진 100인조 오케스트라 지휘를 한다. 그는 현대인에게 익숙한 서양 오케스트라와 우리 국악기가 조화롭게 협연할 수 있을 때 국악 현대화가 실현된다고 믿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작은 거인’ 김수철(66)이 다음 달 11일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다. 1980년 국악 공부를 시작한 이래 40여년 간 꿈꿔온 무대다. 우리 전통음악을 현대화한 음악, 국악에 뿌리를 둔 동서양 소리의 음악으로 세계인을 감동시키겠다는 게 그의 오랜 목표였다.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기대해도 좋다. 그동안 못 들어본 사운드를 들을 수 있는 공연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사명감? 아니 좋아서 했을 뿐”   김수철은 1977년 데뷔했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정신 차려’ 등 메가 히트곡을 잇달아 내며 1980년대 중반 한국 가요계의 정상에 섰다. 대중가수로 승승장구하던 바로 그때부터 그는 국악 현대화의 선구자를 자처했다. 손에 잡힌 부와 인기를 스스로 뿌리치고 가시밭길에 뛰어든 셈이다. 그동안 낸 국악음반 25개 중 돈을 번 음반은 1993년 영화 ‘서편제’ OST 딱 하나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사명감·보람 운운하는 걸 불편해했다. 그저 “좋아하는 것, 호기심이 생기는 것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면서다.     ■  「 내달 11일 세종문화회관 공연 소방대원·환경미화원 등 초청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무대  ‘국악 현대화 40년’ 큰 꿈 이뤘다     청소년에 우리 음악 알리고파 듣고 또 들으면 좋아하게 될 것 」    이지영 논설위원 지난해 국악계는 음악 교과서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교육부가 발표한 개정 교과서 시안의 성취 기준 항목에서 국악이 빠졌다는 사실이 드러나 국악계가 발칵 뒤집혔다. 원로 무형문화재 보유자들까지 나서 반대 운동을 펼친 끝에 이는 복원됐지만, ‘국악 홀대’ 논란의 여파는 컸다.   한편 지난 6월 국악인들의 숙원이던 ‘국악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정부 차원의 국악 지원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국악 대중화에 음악 인생을 바친 그에게 우리 국악의 현주소를 물었다.   김수철은 “국악 현대화 음반 중에서 내 음악처럼 웅장한 건 없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만큼 돈을 쏟아붓는 사람이 없어서다”라며 열악한 국악계의 현실을 에둘러 꼬집었다.   양희은·성시경 등 무료 출연   그동안 인터뷰 때마다 희망사항으로 얘기했던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가 데뷔 45년에 마침내 실현됐다. “15년 전부터 국악이 이끄는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를 준비했다. 영화 ‘서편제’ 음악, 1988 서울올림픽 전야제와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식 음악, ‘팔만대장경’과 기타산조 등 내가 만든 국악 창작 음악을 대중에게 공연으로 보여주고 싶어서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후원사가 안 생겼다. 후원해줄 재력가를 찾아다니다 다 거절당한 뒤 그냥 자비로 하자 생각했다. 이번 공연은 세종문화회관과 공동 기획으로 한다. 환경미화원·우편배달원·소방대원 등 어려운 곳에서 애써 주시는 분들은 무료로 초청할 예정이다.”   이번 공연 제작비는 얼마나 드나. “한 10억 정도? 십시일반 후원을 받고 나머지는 자비로 충당한다. 모자라면 일단 돈 빌려서 하고 벌어서 갚을 생각이다. 게스트로 양희은·김덕수 선배, 성시경·백지영·이적·화사 등이 오는데 모두 개런티 없이 우정 출연한다. 출연료가 있었으면 몇억 더 들지 않았을까.”   돈 빌릴 각오까지 하고 공연을 추진하는 이유는 뭔가. “우리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서다. 내가 작곡한 국악 음악을 매니어들만 듣고 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 청년들에게 긍지를 가질 만한 문화를 알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소규모 공연, MZ 세대를 위한 공연 등 다양한 공연을 할 생각이다.”   “국악듣기 3년, 그때야 재밌어졌다”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소신은 역사가 길다.   그는 1980년 광운대 통신공학과 4학년 때 영화 공부하는 친구들과 ‘뉴버드’라는 모임을 꾸려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음악 작곡을 맡았던 그는 한국 젊은이들의 단면을 그린 영화 ‘탈’을 만들면서 우리 음악을 넣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국악 공부를 시작했다.   “막연하게 중학교 음악 교과서부터 뒤졌다. 근데 교과서가 서양음악 위주로 돼 있고 국악을 너무 조금밖에 다루지 않아 놀랐다. 일단 수박 겉핥기식으로 국악을 공부해 기타를 가야금처럼 쳐서 ‘탈’ 음악을 만들었다. 그게 기타산조의 효시다. 그러곤 내가 우리 음악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인 국악 공부에 들어갔다. 가야금 산조, 가야금 병창, 판소리 등 국악 음반을 찾아듣는 게 공부였다.”   국악의 매력을 알 수 있었나. “3년 동안 계속 졸았다. 이렇게 재미없는 게 왜 훌륭한 소리란 거지? 멜로디도 잘 안 변하고 막 소리만 지르고 이게 뭐지? 계속 그랬다. 재미도 없는데 무슨 매력이 있었겠나. 계속 자면서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자는 심정으로 계속 들었다.”   전환점은 어떻게 찾아왔나. “어느 날 갑자기 거문고 소리가 확 귀에 들어왔다. 깊은 울림과 잔향, 색다른 소리 색깔, 그리고 그 어떤 신선한 느낌…. 너무 좋았다. 정신이 맑아졌다. 아 이것 때문에 훌륭하다고 그랬구나, 이러면서 그때 깨달았다. 누가 나처럼 3년을 기다리겠냐는 것이다. 교과서에도 없지, 공연도 접할 수 없지, 국악을 대중화·생활화하기 너무 힘들겠다는 걸 느꼈다. 내가 국악을 현대화한 음악을 작곡해 대중이 익숙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국악과 서양음악 부단한 접목   2002년 미국 뉴욕 유엔본부 총회의장에서 전기기타로 국악 가락을 표현하는 ‘기타 산조’ 공연을 하는 모습. [사진 남궁돈] 그는 “음악은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겐 국악이 수면제 구실을 했던 3년이 길들여지는 과정이었다. 그는 “피아노·바이올린 소리는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접하면서 국악기 소리는 들어보기 힘든 현실이 국악 대중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초·중·고 교과서에서 기본적인 국악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국악을 현대인이 듣기 편한 악기들과 협연시켜 대중화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이후 그의 작업에서 빠짐없이 실행됐다. 국악에 애정을 갖고 있다 해서 서양악기가 국악기를 돕는 방식을 쓰지는 않았다. 국악기와 서양악기가 충돌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게 작업 방향이었다.   1983년 영화 ‘고래사냥’의 메인 테마음악에선 플루트와 국악기 피리를 조화시켰고, 1986년 영화 ‘허튼소리’에선 아쟁을 서양악기 보코더와 협연하는 시도를 했다. 1988년 올림픽 전야제 음악 작업을 할 때는 태평소와 어울리는 신시사이저의 소리를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했다.   하이라이트는 19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 음악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린 기타산조다. 국악 기악 독주곡 형식 중 하나인 산조를 서양악기인 기타로 연주하는 음악으로, 그가 개발한 새로운 장르다.   “기타는 세계인이 다 알고 익숙하게 생각하는 악기다. 우리 소리를 기타로 연주하니 전 세계 사람들이 낯설어하지 않으면서도 새롭게 느낀다. 2002년 뉴욕 유엔본부 유엔의날 기념공연 등 해외에서 반응이 엄청나게 좋았다.”   국악녹음·국악기 계속 개량해야   올 6월 국악진흥법이 공표됐다. 국악 진흥을 위한 정부 지원이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예산 10억을 20명한테 5000만원씩 나눠주는 방식의 지원은 안 했으면 좋겠다. 대중이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뭔가를 시도하려면 그 이상의 예산을 들여 집중해야 할 일이 있다.”   그는 지원과 투자가 필요한 분야로 국악 녹음 방식 개발과 국악기 개량을 꼽았다. 그 스스로 자비를 들여 시도해보았지만, 개인으로선 감당할 수 없었던 일이다.   “국악기는 고정된 음이 오래가지 않아 연주 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음을 다시 맞춰야 한다. 공연장 온도·습도에 따라서도 음이 달라진다. 서양 악기들과 장시간 협연하려면 개량이 필요하다. 1986년 아쟁을 개량하려다 포기한 기억이 있다. 당시 아쟁을 30대 정도 분해했는데, 제대로 하려면 100대는 부숴야겠더라. 조상님 악기를 왜 부수냐는 욕까지 먹어가며 몇몇 실험을 해봤는데 결국엔 예산 문제로 중단했다.”   그는 현재 개량돼 사용 중인 국악기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특히 개량 가야금에 대해 “줄 개수를 늘리면서 농현(弄絃·줄을 흔들어 떠는 소리를 내는 것)이 없어졌다. 우리 소리의 특징·색깔이 없어졌으니, 하프보다 나을 게 뭐냐. 뿌리를 통째로 뽑아버리는 개량은 의미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춤과 의상으로 승부하지 말아야   국악을 현장에서 들을 땐 분명 좋았는데 음반이나 방송 중계에선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잦다. “서양음악 기준의 녹음 방식 때문이다. 악기에 따라, 녹음실 모양에 따라, 마이크의 위치와 방향부터 연구해야 한다. 1993년 대전엑스포 개막 축제 음악을 작곡하면서 국악 타악기 녹음 방식을 개발한 적이 있다. 장고 한 대에 왼쪽과 오른쪽, 가운데와 위쪽 등 네 곳에 마이크를 설치해 녹음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연구해야 하니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든다.”   방탄소년단 등 국악을 대중음악에 접목하려는 가수가 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국악의 소리를 자주 들려준다는 게 의미가 크다. 후배들에게 자신이 가진 정서와 감각으로 자꾸 실험적인 시도를 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단, 국악이란 음악에 대한 연구 없이 단순하게 춤이나 의상 등 아이디어로 승부하려고 하면 안 된다.”   ◆김수철=1957년 서울 출생. 중학교 2학년 때 기타를 접한 이후 가수·작곡가·음악감독 등 전방위 음악인으로 살았다. ‘못다 핀 꽃 한송이’ 등 히트곡뿐 아니라 영화 ‘고래사냥’ ‘서편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등의 음악을 만들었다. 1988 올림픽 전야제, 2002 월드컵 개막식 등 대규모 국가행사의 음악감독도 맡았다. 그를 상징하는 ‘작은 거인’은 1978년 결성한 밴드 이름이기도 하다.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2023.09.08 00:34

  • [안혜리의 직격 인터뷰]"LH 개혁 손 놓은 원희룡 미스테리…대통령 직접 나서야"

    김헌동 SH 사장은 지난 23일 "분양원가와 자산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전관 특혜가 사라진다"며 "윤석열 정부 취임 후에도 국토부와 LH가 왜 정보 공개를 꺼리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종호 기자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다시 문제다. 국토부 산하 공기업인 LH는 지난 2021년 임직원의 개발예정지 땅 투기 의혹이 불거져 전 국민적 공분을 산 후 해체 수준의 개혁을 약속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혁신은커녕 이른바 '순살 아파트'로 상징되는 철근 빠진 부실시공, 그리고 설계·시공·감리 전 분야를 망라한 전관 특혜와 이권 카르텔 병폐만 더해졌을 뿐이다.    2021년과 2023년. 그새 더불어민주당에서 국민의힘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심지어 반(反) 카르텔 정부를 내세워 하루가 멀다고 각 분야 카르텔 혁파를 강조하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왜 LH는 달라지지 않을까. 해법은 뭘까. 김헌동 서울주택도시공사(SH) 사장을 만난 건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  「 전관특혜 쌓여 부실 시공 만연 폐해 드러나도 개혁 의지 없어 공공성 결여된 공기업의 비극 원가 자산 공개가 카르텔 해법 」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운동본부장 시절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맹공했던 그는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이후인 지난 2021년 11월 시민운동가에서 공기업 사장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취임 한 달 만에 서울 고덕강일 4단지 분양원가 공개를 시작으로 공기업 최초의 보유 자산 공개, 후분양제, 건물만 분양하는 토지임대부 주택 도입, 원청의 직접시공제 등 10여 개 혁신안을 연달아 내놓았다. 그는 "SH는 하는데 LH는 하지 않는 것,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LH가 발주한 무량판 아파트 전수조사를 보니 검단 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윤 대통령이 지적했듯이 이권 카르텔 구조 탓이다. 국토부와 건설사도 문제지만 특히 일련의 대형 사건·사고에도 아무 책임을 안 지는 LH 전·현직 임직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다. 2021년 광명 시흥지구 투기 의혹 이후 결국 단 1명도 처벌받지 않았다(2명 구속됐으나 결국 무죄 판결). 이번에도 몇달만 지나면 다 잊힐 거라 생각할 거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과 이한준 LH 사장이 지난 7월 30일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사과했다. 이 사장은 조직 혁신을 위해 전체 임원 사직서를 받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2년 전 투기 논란 때와 똑같이 임기가 이미 끝났거나 곧 끝나는 사람의 사표를 받는 대국민 사기극이었다. 심지어 윤 대통령이 이권 카르텔을 깨부수어야 한다고 강하게 얘기했음에도 철근 누락 아파트 명단이 공개된 이후 보름 동안 새로 체결한 648억원 규모 11건의 용역 계약 역시 부실시공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 전관 업체가 차지했다. 계약 취소로 끝날 일이 아니라 수사가 필요하다. " ※지난 4월 인천 검단 사고를 계기로 국토부가 무량판이 본격 도입된 2017년 이후 5년 동안 무량판 공법으로 지어진 LH 아파트 91개 단지를 전수 조사했더니 15개 단지(이후 6개가 늘어 총 21개)의 설계·시공 단계에서 철근 빼먹기가 드러났다. 전관 업체가 독식한 감리는 무용지물이었다. 감사원에 따르면 LH 3급 이상 퇴직자 절반이 LH 계약 업체에 재취업했다. 이 기간 전관 업체에 몰아준 일감이 9조원이 넘는다. 또 21개 철근 누락 단지에선 25개 전관 업체가 지난 3년간 3232억원의 수의계약을 땄다. '엘피아(LH+마피아)'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고개숙인 원희룡 장관과 이한준 LH 사장 (서울=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왼쪽)과 이한준 LH 사장이 30일 오후 LH서울지역본부에서 열린 공공주택 긴급안전점검 회의에 앞서 시흥 은계지구 수돗물 이물질 발생 사태 등에 대해 사과하며 고개 숙이고 있다. 2023.7.30 pdj6635@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공공 주택 공급이라는 역할이 같은데 SH와 달리 왜 LH에서만 유독 전관 문제가 불거지나.  "두 조직의 경험이 다르다. SH는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인 2004년에 이미 상암 아파트 분양원가를 공개하면서 혁신 마인드가 조직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특히 2006년 오세훈 시장이 취임하면서 완전히 다른 길을 갔다. 당시 여당인 노무현 정부의 '후분양제 로드맵'은 '2007년 건축공정률 20%'였는데, 야당이었던 오 시장은 2006년 SH에 공정률 80% 후분양제를 도입했다. 다음 해엔 원가까지 공개해 부당이익을 숨길 수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또 후분양으로 부실공사 책임을 SH가 직접 지게 했으니 철근 빼먹기 같은 일을 벌일 수 없다. 정보 공개로 감시의 눈이 많아지면 전관 특혜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   -고(故) 박원순 시장 재임 9년 동안 SH도 후퇴했는데.  "맞다. 오 시장은 2010년 원가가 3.3㎡(평)당 580만원인 강서구 발산 30평 아파트를 평당 790만원에 분양했다. 당시 강남 아파트 분양가의 3분의 1 수준 가격이다. 그런데 박 시장은 2015년 인근 마곡 지구 아파트를 원가 공개 없이 평당 1570만원에 분양했다. 발산과 비슷한 시기에 사들인 땅이라는 걸 고려할 때, 박 시장 시절 SH가 서울시민을 상대로 얼마나 폭리를 취하면서 집값을 올려놨는지 알 수 있다. LH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경실련에 있을 때 두 기관에 원가 정보 공개를 요구했지만 거절했다. 특히 SH는 소송을 2년이나 끌면서 분실을 이유로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 지난해 1월 한 시민이 서울 서울주택도시공사(SH) 로비에서 SH가 공개한 아파트 분양원가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박원순 전임 시장 시절엔 적법한 정보 공개 요구에도 끝내 원가 정보를 밝히지 않았다. [뉴스1] -취임하자마자 원가 공개가 가능했던 이유는.  "SH가 거짓말한 거였다. 원가분석 자료가 고스란히 다 있어 지금까지 8차에 걸쳐 공개했다. SH의 주인은 서울시민이다. 주인에게 원가와 자산을 공개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게 비정상이다. 정상으로 회복 중이다. "   -원가·자산 등 정보공개와 후분양제 등이 카르텔 해체의 해법인가.  "그렇다. 설계도면과 시공 과정 동영상까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LH는 그동안 땅장사와 바가지 분양으로 너무 쉽게 너무 큰 돈을 벌었다. 정보를 독점하고 국민에게 거짓말하면서 조직 차원은 물론 전·현직 임직원 개개인이 주거니 받거니 이익을 향유해왔다. 전직은 설계·감리 수의계약으로, 현직은 신도시 땅 투기로 돈을 벌었다. 원가를 공개하면 바가지 분양이 드러나 비난이 쏟아질 걸 알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고 버티는 거다. 땅값은 서울이 비싼데 경기도 등의 LH 아파트 분양가가 더 비싼 게 말이 되나. 공기업이 국민을 위하는 대신 장사꾼 마인드로 자기 장사만 했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시절 LH는 연 2조~5조원의 과도한 이익을 얻었다. SH는 연 1500억~2000억 원대다. 또 검단 아파트 붕괴와 '순살 아파트' 문제는 한국 건설업계의 선분양 관행 탓이 크다. 짓지도 않은 아파트를 먼저 팔아 돈을 확보하니 LH와 건설사들은 날림공사하고 자재 빼먹는 돈 떼먹는 기술만 연구한다. 후분양이었다면 절대 부실시공 못 한다. 최소한 분양받은 입주자 피해는 없다. "   -임대아파트 적자 탓에 신규 택지 판매로 수익을 올려야 한다는데.     "거짓말이다. 지난 1990년 2100만원(건축비용 1000만원에 땅 1100만원)에 지은 대치 1단지 20평 임대아파트가 지금 12억원이다. 건축비용을 상각하고 수리·유지·보수 비용을 다 합해도 늘어난 자산이 훨씬 많다. LH는 이런 자산 현황을 감추고 맨날 적자 타령이다. 자산을 투명하게 공개하면 이런 거짓말 못 한다. " 김헌동 SH 사장이 지난 8일 서울 송파구 위례 단지에서 분양원가를 직접 공개했다. 연합뉴스 -LH가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출발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다. 대선 때 분양원가 공개를 약속했던 노 대통령은 취임 후인 2004년 원가 공개는 개혁이 아니라며 10배 남는 장사도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국민 주거 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한 공기업(1962년 설립한 주택공사가 토지공사와 통합해 2009년 LH 출범)을 대통령이 장사하는 기업으로 규정하면서 대국민 바가지 씌우기가 시작됐다. 공기업이 독점하는 토지 수용권을 이용해 싸게 확보한 택지를 공익적 목적으로 쓰지 않고 비싸게 팔아 땅장사하고, 또 민간과 같은 비싼 가격에 아파트를 팔았다. 민간과 똑같이 바가지 분양했다. 이럴 거면 공기업이 왜 필요한가. 전부 민간에 맡기고 개발이익만 환수하는 게 더 낫지. 공기업이 돈만 밝히니 부패하고 부실공사로 이어지는 거다. "   -정권이 바뀌었는데 LH는 왜 원가·자산 공개를 안 하나.  "나도 원희룡 장관에게 묻고 싶다. 새 정부 새 장관이 왔으면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1년 반 가까이 손을 놓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 시절인 2006년 원가 공개 법안을 발의했던 원 장관이 취임 후엔 LH는 사업구조가 다르다고 딴소리한다. 다르지 않다. 국토부 관료에 휘둘린 것인지, 아니면 원 장관 본인이 너무 정치적이라 눈치를 보는 건지 모르겠다. 원 장관이 끝내 안 하면 윤 대통령이 직접 '공개하라'고 나서는 방법밖에 없다. "   ◆김헌동 SH 사장=쌍용건설에 20여년간 재직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건설 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2004~2014년 경실련 아파트값거품빼기운동본부장을 거쳐, 2019년부터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운동본부장을 맡았다. 지난 2021년 11월 SH 사장에 취임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08.25 00:54

  • '이승만 지우기'로 생긴 역사의 공백을 채우고 싶었다 [장세정의 직격인터뷰]

     ━  이승만 소재 대하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 펴낸 복거일   장세정 논설위원 체감 온도가 섭씨 40도에 육박할 정도로 폭염이 끓던 지난 2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합장 묘역에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3kg(총 2700여쪽)이 넘는 소설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정중하게 제물처럼 다섯권의 책을 묘소에 올리더니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묵상했다. 볼에는 금세 물방울이 맺혔다. 소설가 복거일 씨가 대하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을 들고 지난 2일 국립서울현충원의 이승만 전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합장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장진영 기자  소설가 복거일(77). 2016년부터 7년에 걸쳐 '월간중앙'에 이승만을 소재로 연재해온 대하 전기소설을 최근 『물로 씌어진 이름』(백년동안)으로 발간했다. 지난 2015년 4월 벚꽃 흩날리던 묘소를 참배하며 이승만과 그의 시대를 조명하는 소설을 쓰겠다던 약속을 8년 만에 실천한 셈이다. 『물로 씌어진 이름』은 2012년 암 선고 이후 항암 치료를 마다하며 쓴 작품이다. '광복'을 큰 주제로 이번에 출간한 1부 다섯 권에 이어 2부(건국)와 3부(호국)를 합쳐 다섯 권으로 쓰는 작업도 시작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커지는 암세포도 꺾지 못한 마음속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  「 항암 치료 마다하며 7년간 집필 내면풍경보다 시대 묘사에 집중   "한·일 수교 실기, 3선 개헌 오점   그래도 공이 과를 압도하는 인물   이승만의 삶은 역사를 보는 창 우남 외면하면 정체성 망각돼" 」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미드웨이 해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히틀러 정권의 아우슈비츠 대학살, 스페인 내전,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 소련의 대미 공작, 얄타회담 등 세계사를 종횡으로 넘나들면서 '급진적 혁명가' 이승만의 고뇌와 선택을 그려냈다. '역사를 보는 창'으로 표현된 이승만의 전기소설이라지만, 역사 다큐멘터리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복 작가는 "없는 것을 보태지 않아서 소설답지 않은 소설을 썼다"며 겸손해했다. 소설가 복거일 씨가 7년만에 출간한 대하전기소설 '물로 씌어진 이름'. [사진 백년동안]   너무 쉽게 잊힌 업적을 비유한 제목  -출간까지 장장 7년 세월이 걸렸다.  "2012년 봄에 간암 판정을 받으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이미 상당히 진행돼 치료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항암 치료 없이 그냥 글을 쓰기로 했다. 병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힘이 달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됐다. 허허."    -묘소에 책을 바치며 마음속으로 건넨 말이 있을 것 같다. "시대와 세상을 앞서간 위대한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그리는 데는 실패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남은 수수께끼로 남은 위인이다. 다만 이전에 알던 것보다 업적이 훨씬 위대하다는 사실을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는 고백의 말씀을 드렸다."  -현대사 인물 중에 이승만을 유독 주목한 계기는.  "원로 언론인 이도형(1933~2020, 전 한국논단 대표) 선생께서 권했는데 처음엔 사양했다. 사학자들은 가볍게 여기고 문학가들은 주류에서 벗어난다고 여기는 것이 역사소설이다. 쓰기는 힘들고 문학적 보답은 적다는 이유에서 내키지 않았다. 그러자 정색하시며 '지금 이 나라에서 이승만 소설 쓸 사람이 복 선생 말고 누가 또 있소'라며 자극을 주셨다."  제1권 제1장 첫 부분과 저자가 쓴 작품 해제('역사를 보는 창')를 보면 책 제목을 『물로 씌어진 이름』으로 지은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영국 시인 존 키츠의 자작 묘비명에 '여기 누워 있다/그의 이름이 물로 씌어진 사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경구('사람들의 나쁜 행태는 청동에 새겨져 남는다. 그들의 덕행을 우리는 물로 쓴다')에 나오듯 이 대통령의 업적은 물로 쓴 것처럼 쉽게 잊히고, 일부 허물만 지나치게 부각된 현실을 책 제목으로 꼬집은 것이다.   '이화장 문서'가 고증에 큰 도움  -역사 고증에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우남은 사소한 영수증까지 기록을 많이 남겼는데, 전집으로 출간된 ‘이화장 문서’가 큰 도움이 됐다. 10만 장이 넘는 이화장 문서 분류와 고증은 얼마 전에 별세한 유영익 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가 주도했다. 과격한 주장을 하면 추앙받는 나라에서 명분론보다 현실론을 중시한 유 교수 덕분에 우남을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할 수 있었다. 1945년 우남이 얄타회담 밀약(미국과 영국이 조선을 궁극적으로 러시아에 넘기겠다는 내용)을 폭로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았는데, 이번에 이화장 문서를 뒤지다 우남에게 제보했던 실존 인물을 확인했다. 당초 추정된 에밀 구베로라는 인물이 미국의 실존 언론인 에밀 헨리 고브로(1891~1956)란 사실을 최초로 규명했다." 1945년 2월 흑해 연안의 소련 휴양도시 얄타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종지부를 찍은 역사적인 얄타회담이 열렸다.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프랭클린 루스만민공동회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수상. [중앙포토]  -이 대통령의 어떤 면을 집중 조명하려 했나.  "우남은 구한말 만민공동회 시절(1897~1899)부터 1960년 물러날 때까지 역사의 중심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외면하면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역사에서 지우려 애쓰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의 공백을 조금이라도 채우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그분을 홀대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이고 부끄러움이다. 그에 관한 사실이 더 많이 알려지면 공정한 평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1부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대목은.  "얄타회담에 얽힌 이야기들이 핵심이다. 현대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나치 독일에 패배할 뻔했던 러시아가 어떻게 2차대전 뒤 유라시아의 태반을 차지했나’하는 것이다. 그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 가장 보람이었다."   -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1954년의 '사사오입' 3선 개헌을 빼면 뚜렷한 잘못이 별로 안 보인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변명 없이 본인이 모두 책임지고 물러났다. 얄타회담에서 비밀 협약이 있었다고 폭로해 당시 미국 국무부의 부인하는 성명을 끌어낸 일이 가장 큰 업적이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게 중대한 판단의 근거를 밝혀내는 것이 이번 작품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한·일관계 정상화 늦어 아쉬움도  -5권 말미의 '해제'에서 우남의 실기와 허물도 지적했던데.  "우남이 1951년 한·일 국교 정상화 시작은 잘했다. 하지만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한·일 관계는 1950년대 중반에 정상화됐을 것이고, 박정희 정부 때인 1965년의 한·일 협정보다 한국에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쉽게도 실기했다. 제헌의회 선거에 이어 1950년 5월 2대 총선도 민주적으로 치르면서 건국이 사실상 완성됐지만, 6·25전쟁으로 의미가 퇴색했다. 1953년 가을 무렵 우남이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다 이뤘는데,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욕심내는 바람에 자신이 주도해 세운 대한민국의 기초와 스스로의 업적을 허물었으니 통탄할 일이다." 1954년 7월 28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모습.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 동맹 70주년을 계기로 미국을 국빈 방문해 지난 4월 27일 같은 자리에서 연설했다. [중앙포토, 연합뉴스]  -독립·건국·호국에 성공했으나 분단이란 숙제도 남겼다.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정권은 타협이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는 북한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 공산주의자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침투하려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이승만 라인'으로 독도를 사수한 이 대통령이 일각에서는 친일파라고 매도당한다.  "친일파 몰이는 근거가 없다. 의도적으로 유포된 결과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 상륙할 때부터 미군정청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경찰 조직을 거의 그대로 활용했다.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청이 물려준 경찰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통령을 헐뜯는 세력은 그런 상황을 친일파 득세로 몰아 비난해왔다."   이승만기념관, 자녀 교육의 장 됐으면  -이승만의 공훈을 압축하면.  "대한제국이 러일 전쟁에 휘말려 풍전등화이던 1904년 11월 이승만은 미국의 도움을 구하라는 민영환·한규설의 지시로 제물포(인천)에서 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당시엔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수십 년 각고의 노력 끝에 1953년 대통령으로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이듬해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연설했다. 1904년에 받는 사명을 50년 만에 완수하면서 그의 삶은 정점을 찍었다."  -이승만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황식 전 총리)가 활동을 시작했다.  "그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많은 시민이, 특히 조부모가 손자녀의 손을 잡고 함께 가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보고 배우는 공간으로 만들기 바란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기념관과 링컨 기념관처럼 억지로 주입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느껴서 스며들도록 하면 좋겠다."  지난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을 맞아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 기념관' 마당에 세워진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동상. 북한의 남침을 격퇴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연합뉴스]  -앞으로 계획은.  "1부를 쓰는 데 7년이 걸렸고 다시 2, 3부를 합쳐 7년을 예상한다. 그때까지 살 자신은 없지만…(웃음). 2017년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희곡 『박정희의 길』을 썼다.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근근이 공연했는데, 이제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으니 좀 나은 공연을 시도해볼 생각이다."  ◇복거일=1946년 충남 아산 출생. 부친은 남로당 당원이었다. 대전상고,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한국과학연구원 부설 선박연구소 연구개발실장을 역임했다. 문화미래포럼 대표로서 우파 논객이자 사회평론가로 활동해오고 있다. 작품으로는 데뷔작 『비명을 찾아서』 외에 『역사 속의 나그네』『파란 달 아래』『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한국의 자유주의』『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프란체스카』 등이 있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2023.08.04 00:59

  • [강찬호의 직격인터뷰] 나토와 협력, 한반도 넘어 ‘범동맹 중첩 외교’ 서막 연 것

     ━  유럽 외교 전문가 이재승 교수가 본 한국 - 나토 파트너십   강찬호 논설위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지난해 6월 중국을 ‘구조적 도전(systemic challenge)’으로 규정한 전략개념을 채택했다. 이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2일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린 나토 동맹국 및 아시아·태평양 파트너국(AP4: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정상회의에 지난해에 이어 다시 참석했다. 사이버 방위 등 11개 분야 협력을 제도화하는 문서도 채택해 관계를 한층 강화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단기적으로 러시아, 중장기적으로 북한과 중국을 억제하는 글로벌 안보망의 당당한 주체로 입지를 굳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종속되고, 북·중·러의 밀착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유럽과 나토 전문가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의 분석을 들어봤다.     ■  「 한·미동맹 넘어 다층 안보 구축 중·러 의식 ‘마이너스 균형’ 안돼 나토의 아·태 관심 적극 활용을 중·러 반발, 민관 합동 대응해야 」    유럽 “아시아를 미·중에만 맡길 수 없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재승 교수는 2018년 유럽지역학 연구에 탁월한 성과를 낸 학자에게 유럽연합이 수여하는 ‘장 모네 석좌 교수’에 선정됐다. 탈냉전기 유럽의 대외정책과 전쟁사를 분석한 『유럽과 전쟁』 등의 저서(공저)가 있다. 고려대 싱크탱크인 일민국제관계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김경록 기자 한국과 나토의 관계 강화는 한국에 어떤 의미가 있나. “그동안 한국의 안보 전략이 북한 문제를 강조했다면 이번 나토와 인도·태평양 파트너국(일본·호주·뉴질랜드) 간의 정상회의(NATO+AP4)는 한국이 한반도를 벗어나 글로벌 안보로 이행해가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범동맹 외교’를 공고화하는 플랫폼을 구축하기 시작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범동맹 외교’라는 개념이 눈에 띈다. “이제까지 한국의 안보는 한미동맹이 중심이었다. 일본은 한일관계 경색으로 안보적 측면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유럽은 북한 문제에 보조적으로 동원하는 수준이었다. 세 축이 따로 도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 들어 한국이 나토 정상 회담에 두 번 연속 참석하고 AP4 회의체도 참여함으로써 모든 동맹과 우방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계기가 되었다. 한미동맹이란 홑겹에서 나아가 여러 겹의 다층 협력 구조로 형성된 ‘중첩 안보’를 통해 외교를 업그레이드할 기회가 열렸다. 특히 AP4는 쿼드와 달리 인도가 빠지고, 미국의 동맹인 한국과 일본·호주·뉴질랜드가 엮인 구조다. 한국이 애치슨 라인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고 안정적인 동맹망을 구축하는 가운데 인도-태평양에 안착할 장이 마련된 것이다.”   나토는 왜 한국을 포함한 인도-태평양에 접근하는가. “대중 견제에 동참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는 측면도 있지만, 아시아를 미국과 중국 두 나라만 나눠 갖는 구도는 유럽에 유리하지 않다는 계산이 깔렸다. 무엇보다 유럽의 이해를 위해 이 지역에 관여하는 것이다. 유럽은 미·중 간에 데탕트 조짐이 보이면 즉각, 아니면 그 이전에라도 그 움직임에 편승해 대(對) 중국 관여 정책으로 국익을 늘리려 할 것이다.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궁지에 몰리지 않겠다는 의도다. 유럽과 나토의 움직임을 읽으면서 우리도 그런 전략적 포지셔닝을 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한국의 선택권 확대될 것   우리도 미·중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지 않으려 하는데. “그 측면에서도 나토와의 관계 강화는 의미가 있다. 한국이 나토의 집단 안보망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나토의 안보 파트너로서 공조 체제를 갖추면 그만큼 더 안전해지고 레버리지가 증진될 수 있다. 친구가 많은 동물은 맹수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나토 국가들은 국제사회의 규범(norm), 즉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핵심 주체다. 한국이 이들 국가와 협조하고 규범 형성에 참여하면 그 규범에 의해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은 미국과 협력하면서도 선택의 딜레마는 피할 수 있는 규범을 만들고 게임을 하는 데 능숙하다. 로즈 고테묄러 전 나토 사무차장은 ‘나토는 중국의 위협에 주의하면서도 중국과 협력할 방법을 찾을 것이며 군축과 비확산 토론도 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이 나토와 협력하면서 미·중 사이에서 막다른 선택 상황에 몰리는 일을 피해야 한다. 혼자 떨어져 나오면 더 위험하다. 이들 파트너와 함께 해법을 찾는 것도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나토 접근은 북한이 중·러와 밀착하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북·중·러가 가까워지고 한국과의 대립 구도가 심화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선택권과 레버리지가 확대될 기회가 될 수 있다. 나토 접근 반대론은 ‘나(한국)는 다른 애들(서방)이랑 안 사귈 테니까 너(북·중·러)는 나랑 친하게 지내자’는 논리다. 동맹의 벽돌을 빼내 적대국의 선의에 호소하는 노선이다. 나는 이것을 ‘마이너스의 균형’으로 부른다. 이는 동맹의 신뢰를 잃어 내 편이 될 나라들을 상실한 가운데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적대국의 선의에만 매달리는 위험을 안고 있다. 결국 우리의 외교적 입지만 약해진다.”   중·러는 윤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한 목소리로 비난하는데. “중국이나 러시아에도 한국이 필요하다. 우리랑 영원히 같이 지내지 않을 국가들이 아니다. 다만 단기적으로는 압박 수위가 올라갈 것이다. 일례로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에 압박이 더해질 수 있다. 정부와 민간이 합동으로 다차원 대응을 해야 한다. 정부가 전면에 나서기보다 중·러를 아는 전문가들을 활용해 물밑 외교를 해야 한다. 이미 한국은 우크라이나 지원 의사를 명확히 했기에 중·러도 한국의 나토 접근 자체에 큰 충격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나토 접근이나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이 동북아 정치판을 본질적으로 바꿔놓지는 않는다. 단기적 어려움을 극복해내면 오히려 한국의 위상은 올라간다. 거기서 새로운 균형점을 확보해야 한다.”   급변 사태 땐 미국 도움만으론 부족   우리의 나토 접근은 미국의 국익에 따른 것이란 주장도 있다. “한국의 나토 접근이 미국의 대중 견제와 연관된 점은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변국에는 불행하게도 초강대국들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 군사전뿐 아니라 경제제재와 무기 지원, 여론·심리전이 중첩되어 있다. 미국뿐 아니라 국제사회 전반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급변 사태가 났을 때 미국의 도움만으론 대응이 어렵다. 급변 사태 뒤에 중국이 있다면 중국과 경제적인 관계를 가진 나라들이 기꺼이 대중 제재에 동참해주겠는가? 게다가 유엔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남발로 이미 상당 부분 무력화되었다. 6·25 때처럼 유엔군이 와줄 리 만무하다. 유사시 한국을 적극적으로 도울 나라는 결국 나토와 AP 3개국 등 35개국이 거의 전부가 될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범동맹 전략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범동맹 외교에 나토라는 도구가 생긴 걸로 봐야 한다.”   그러면 북한 비핵화에 나토가 역할을 할 수 있나. “북한은 최근 수년간 핵과 미사일 능력이 급신장했다. 또 평양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서 종이로 된 안전 보장은 무력하다는 걸 알았을 것이기에 북한 비핵화 협상은 더욱 어려워졌다. 기존의 6자회담 구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미·일과 나토를 아우르는 범동맹 외교로 북핵 위협에 글로벌 버팀막을 만들어야 한다.”   전략적 모호성 면에서 루비콘강 건너   윤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을 평가한다면. “꼭 가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가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가치 연대’의 상징성을 보여주고 재건 사업 진출 여지를 넓혔다는 의미가 있다. 이미 한국을 포함해 46개 국가 정상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 아시아에선 호주·인도네시아·일본 정상이 찾았다. 윤 대통령도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만큼, 전략적 모호성 측면에서는 루비콘강을 건넌 셈이다. 한국의 입장이 명확해졌으니 외교에 새 판을 짜야 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방문의 성패는 앞으로 한국이 대중·대러 외교에 얼마나 세련된 전략을 구사할 것인지에도 달렸다.”   나토는 근본적으로 군사동맹이다. 아시아로 군사력을 투사할 가능성은. “나토는 그럴 능력도 안 되고 의사도 없다. 프랑스도 도쿄에 나토 연락사무소를 설치하는 방안에 반대한다. 중국에 ‘나토의 팽창’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따라서 나토의 동진을 과대평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내가 주목하는 건 나토와 아시아·태평양 국가 간의 사이버·우주 등 신기술 분야 공조다. 양측의 연대는 군사동맹 같은 과거형이 아니라 하이테크 동맹 같은 미래형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그 힘은 강력할 수 있다. 중국은 이걸 더 신경 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의 안보에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반도를 뛰어넘어야 한반도가 보이고 안보 방책이 나온다. 북한만 쳐다본다고 북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기승전 한반도’였던 한국의 외교 방정식을 바꿀 때다.”  강찬호 논설위원

    2023.07.21 00:52

  • 프리고진 암살? 용서? 재활용? 자존심 타격 푸틴의 계산[장세정의 직격인터뷰]

     ━  윤의철 전 합참차장이 보는 러시아 반란 사태   장세정 논설위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러시아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의 무장반란이 발생(6월 23일)한 지 보름이 다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상황을 장악하면서 하루짜리 반란은 찻잔 속 태풍처럼 잦아드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러시아 국내는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국제 정세에도 적잖은 파문을 줄 전망이다. 총 잡은 푸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2021년 12월 국방위원회 확대간부회의를 마치고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과 함께 군수 전시회를 방문해 무기를 살펴보고 있다. [AP=뉴시스]   ■  「 바그너 사태 국내외 파문에도 푸틴의 국내 지지 흔들림 없어 군 지휘부 통일성·효율성은 커져  우크라 주춤, 전쟁 장기화 조짐 양국 내년 3월 대선 후 협상 전망 」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62)이 주도한 반란은 왜 일어났으며, 앞으로 러시아 국내는 물론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을 줄까. 휴전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까, 오히려 전쟁을 장기화하는 작용을 할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윤의철(59) 전 합동참모본부 차장(예비역 육군 중장)을 인터뷰했다. 육사(43기) 출신으로 포병 주특기인 그는 28사단장,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장, 7기동 군단장, 교육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대중적 인기 얻은 프리고진 견제  -이번 사태를 어떻게 지켜봤나.  "서방에서는 러시아의 혼란을 유도하는 호기로 여겨 쿠데타라며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반면 러시아 연방보안국(FSB)과 검찰은 형법 279조를 근거로 군사반란으로 규정했다. 쿠데타라면 정권 교체를 목표로 세우고 언론을 장악해 정당성을 국민 앞에 설득하는 계획과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치밀한 정치적 행위는 없었다. 프리고진의 행위는 쿠데타보다는 무장반란으로 보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윤의철 전 합참차장이 지난 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번 사태의 원인은.  "먼저 정치적·군사적 이유가 있다. 첫째, 정치적 이유는 내년 3월 실시하는 러시아 대선과 관련이 있다. 푸틴 대통령과 군 지휘부는 크림 반도에 이어 루한스크·도네츠크·자포리자·헤르손 주를 차지하며 전쟁을 잘 이끌고 있다는 인상을 국민에 심어줘 대선에서 확실한 지지를 얻고 싶어 했다. 그런데 비정치인이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은 프리고진이 군 지휘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파열음을 일으키자 그를 전쟁에서 배제해 정치적 싹을 자를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프리고진과 군 지휘부의 알력도 심했다던데.  "푸틴과 군 지휘부는 지난 6월 10일 그동안 독자 행동을 해온 바그너 그룹의 용병들이 군 당국의 단일한 지휘 체계를 따르며 전투를 수행하도록 7월 1일까지 재계약하라고 요구했다. 프리고진이 이런 조치에 반발하면서 사달이 벌어졌다."  -프리고진이 '계륵'이 된 셈인가.  "그동안 러시아군이 총동원령을 발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공식적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꼼수로 바그너 그룹이 용인되고 활용됐다. 그런데 군 지휘부의 작전 지휘에 따르지 않고 프리고진이 독자적 작전에 나서면서 군 지휘의 통일성이 약해졌다. 바그너 그룹이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만과 착각에 빠진 프리고진은 무능한 간신들인 군 지휘부를 징벌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여겨 반란을 일으켰지만,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6월 23일 무장반란을 일으킨 러시아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텔레그램 영상을 통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들은 애국자라고 주장했으나 하루 만에 회군했다. [AFP=연합뉴스]   '프리고진 암살' 명령설 더 지켜봐야  -파죽지세였던 프리고진은 왜 모스크바 200㎞ 지점에서 회군했을까.  "프리고진은 세르게이 쇼이구(68) 국방부 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68) 총참모장의 농간을 문제 삼으면 푸틴이 바그너 그룹의 재계약 결정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도중에 푸틴의 결심이 확고하고 반란에 대해 진노하자 진격을 멈췄다. 프리고진의 잘못에 대한 선처를 중재한 알렉산드르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역할도 주효했다."  -러시아의 후방 방어 태세가 '종이 호랑이'처럼 허술해 보였다.  "세계 2위 군사력을 보유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병력의 대부분을 투입해 모스크바에는 친위부대만 남아 있었다. 반란에 대응할 군사력이 제한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예로부터 러시아는 광활한 국토 자체를 방어력으로 삼고, 적에게 땅을 내주며 시간을 벌었다. 전략적으로 꼭 지켜야 할 곳만 지키며 버텼다. 푸틴과 군 지휘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바그너 그룹의 진격 과정에서 군사적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먹혔다."  -푸틴의 리더십이 흔들릴까.  "자존심에 상처가 났겠지만, 급변 사태가 일어날 상황도 아니다. 전쟁과 푸틴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관료와 언론은 슬라브주의 등 푸틴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비전을 여전히 확고하게 지지한다.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이 모스크바로 진군할 때 보였던 시민들의 환호는 정치적 지지라기보다는 러시아를 위해 싸운 데 대한 감사의 응원으로 볼 수 있다." 세르게이 수로비킨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총사령관이 2022년 12월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과 합동참모본부 회의에 참석해 설명하고 있다. 프리고진은 두 사람을 간신이라 지목했다. [AP=연합뉴스]  -앞으로 사태는 어떻게 전개될까.  "반란 수습 과정에서 푸틴의 민간 군사 기업에 대한 장악력이 확고해질 것이다. 제2의 반란과 쿠데타는 어려울 것이다. 푸틴은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의 국고 횡령 수사 등 다양한 법적 조치로 행동의 자유를 옭아맬 것이다. 연방검찰청이 프리고진의 친인척과 측근 및 사업체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별건 수사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의 운명은.  "프리고진에 대한 암살 지시가 있었다는 우크라이나 국방 당국의 발표는 러시아 지도부와 프리고진을 분열시키려는 심리전일 수 있다. 그가 암살될지, 또 다른 충성 기회를 받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푸틴은 굳이 바그너 그룹을 해체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별도의 임무를 부여하는 등 다른 활용 방안을 찾을 거다."   러시아, 양동작전 펼 가능성도  -미국은 반란에 모종의 역할을 했을까.  "러시아군 지휘부와 프리고진 사이를 벌려 놓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고 정보작전을 전개해왔을 수 있다. 다만 미국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푸틴이 '치명적으로 실패'하기보다는 글로벌 전략적 안정이 무너지지 않는 수준에서 '전략적으로 실패'하길 바랄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깜짝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났다. 미국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우크라이나를 줄곧 지원해왔다. [AFP=연합뉴스]  -반란은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 어떤 영향을 줄까.  "전술적 전투에 능한 정예 바그너 그룹 용병(5000~8000명 추산)들이 돈바스 지역에서 이탈함으로써 러시아에 부분적 전투력 감소가 생겼겠지만 감수할 수준이다. 오히려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이 돈바스 전선에서 제외되면서 전쟁의 효율과 효과 측면에서 보면, 얻는 이익이 손실을 상쇄하고 남을 것이다. " -이익이 크다는 판단의 근거는.  "첫째, 러시아가 전장에서 지휘의 통일을 이루게 됨에 따라 작전과 전술적 전투의 효율성이 증진된다. 둘째, 정규군과 바그너 그룹의 분열, 나아가 러시아군 지휘부의 분열을 노린 우크라이나의 심리전과 여론전에서 벗어났다. 셋째, 프리고진과 바그너 그룹이 벨라루스로 이동함에 따라 동부전선에서 있을 우크라이나의 반격 압력을 북부 전선으로 분산할 기회를 얻었다. 양동작전 가능성이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대반격을 노리고 있는데.  "가을까지 잃었던 땅을 되찾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의 방어 취약점을 찾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찔러보는 '위력 수색'을 진행 중이지만 성공적이지 못하다.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항공 지원으로 취약점을 만들고 대규모 기계화 부대를 편성해 집중적으로 돌파하기 전에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휴전이나 종전 가능성은.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내년 3월에 대선이 있다. 푸틴이 무난하게 승리하면 대선 이후에 평화 협상의 여지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서로 지지 않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서방과 러시아는 어느 시점에 타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중앙포토]   장기적 관점서 한·러관계 관리해야  우리 입장에서는 이번 반란이 앞으로 한반도 주변에 끼칠 영향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한반도와 육지를 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중 패권 경쟁 와중에 북·중·러가 밀착하면서 한·미·일과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란 이후 중국과 북한의 움직임은.  "중·러 외교차관 만남에서 러시아는 변함없는 중국의 지지와 전쟁 물자 지원을 당부했을 것이다. 중국의 러시아에 대한 지지에도 변함이 없어 보인다. 김정은 정권은 지금처럼 러시아가 요구하는 포탄을 포함한 다양한 탄약과 무기를 계속 지원할 거다. 호위사령부와 평양방어사령부의 능력을 보강하고, 보위사령부나 총정치국의 위상을 더 올려 군부에 대한 감시 및 통제를 강화할 것이다."  -한국의 외교·안보 정책에 준 시사점이 있다면.   "러시아의 전쟁 지휘 체제가 안정되고 작전의 효율성이 증가할 경우 우크라이나가 전쟁 목표를 연내에 달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줄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요구가 증가할 거다. 비살상 무기에 한정된 지원 정책을 기본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살상 무기를 지원할 수밖에 없는 전략적 상황이 되더라도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제3국을 통한 우회 지원으로 가야 한다. 능력에 맞게 지원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 장기적 안목에서 한·러 관계를 관리하길 바란다." 윤석열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5월 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대통령실 홈페이지]  -우크라이나 전쟁이 주는 교훈은.  "전쟁은 사람이 중요하다. 전쟁은 국민 의지의 싸움이다. 국민의 전쟁 의지와 군의 전투 준비 태세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월남전에서 봤듯 좋은 무기는 그다음이다. 적이 도발할 때 몇 배 보복하고 강하게 나가면 함부로 못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 반란 사태를 정치적 시각보다는 군사·안보적 관점에서 냉정하게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2023.07.07 01:08

  • [신성식의 직격인터뷰] “의대 정원 500명 늘리고 지역 학생 80% 뽑아야”

     ━  무너지는 지방 의료 해결책은…전병율 대한보건협회장   전병율 대한보건협회장이 20일 오후 중앙일보 서소문 사무실에서 지방 의료 붕괴의 원인과 대책을 설명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경북 울진군의료원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신장내과·신경과 전문의를 뽑지 못하고 있다. 연봉은 4억4000만원. 한두 명 면접을 했지만 채용에 이르지 못했다. 경기도의료원 포천병원도 연봉 3억3000만원을 내걸고 재활의학과 의사를 뽑고 있다. 전국 지방의료원(35개) 7곳이 의사를 찾고 있다. 이들에 앞서 경남 산청군 보건의료원은 1년 넘게 공석이던 내과 전문의를 5차 공모 끝에 뽑았다. 속초의료원은 넉 달 만에 응급실 전문의 3명을 채용했다. 산청군은 연봉 3억6000만원이고, 속초의료원은 3억5000만원을 내걸었다가 응모자가 없어 4억2000만원으로 올려서 겨우 채웠다. 충북 청주에서 10억원 연봉을 내걸고도 심장전문 의사를 뽑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다.   지역 의료가 무너지고 있다. 4억원이 넘는 연봉을 제시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지역 의료를 커버하던 공중보건의(공보의)도 점차 자원이 줄어든다. 전남·경북·전북·강원·충남 등은 이미 노인 인구가 20%를 넘어 초고령사회가 됐다. 지역의 의료 수요는 폭발하고 있는데, 의사를 못 구해 쩔쩔매고 있다. 치료 기술 세계 최고라는 한국 의료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전병율 대한보건협회 회장(차의과학대 보건산업대학원장, 전 질병관리본부장)은 “그간 쌓인 게 이번에 펑 터졌다”며 그간 정책을 ‘폭탄 돌리기’에 비유했다. 전 회장은 “의대생 선발과 교육이 잘못됐다”며 “의사 양성에 15년 걸리니 하루빨리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전 회장과 일문일답.     ■  「 지역의사 혼란 의사양성 잘못 탓 강남 출신이 의대 가니 지역 기피 지방의대 입학생 정원 확 늘리고 일정 기간 지역 근무 의무화해야 」    대도시 출신 의사 지역근무 낯설어   지방에 의사가 안 간다. 왜 그런가. “의과대학에 가는 애들이 대도시 출신이어서 농어촌이나 지방 소도시 경험이 없다. 이들은 의사가 된 뒤 지방에 혼자 근무하는 걸 상당한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인다. 배우자도 마찬가지다. 자녀 교육도 걸림돌로 본다. 간호사·약사 등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 경북의 한 지방의료원 관계자는 “의사의 대부분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왔고, 혼자 산다”고 말했다.   4억원 연봉이 결코 적지 않은데. “월급이 많고 적음을 떠나 지방에 가서 혼자 수술하고 입원환자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이 크다고 한다. 내가 아는 의사가 공공의료기관으로 가려 했으나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기 벅차다고 포기하더라. 게다가 요즘 젊은 의사는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크게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설령 연봉이 4억원이어도 절반은 세금으로 낸다.”   킬러문항 익숙한 세대가 의사 돼   요즘에만 힘든 건 아니지 않으냐. “젊은 의사는 전공의특별법에 따라 주 80시간 근무제에 익숙해져서 과거보다 야간 당직이 훨씬 줄었다. 젊은 의사들의 특성이 이렇게 달라졌다.”   2022년 ‘의대 진학 톱 25개 고교’의 소재지를 보면 서울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와 양천구, 부산 해운대구, 대구 수성구 등 경제력이 높은 지역이 대부분이다. 전 회장은 “사교육의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제)에 익숙한 애들이 의대에 간다.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있는 부유층의 자녀가 의대로 가는, 불공정한 게임이 됐다”며 “의대생 선발부터 잘못됐다”고 말한다. 전 회장은 “이런 애들이 의사가 되면 머리는 좋지만 마음은 덜 따뜻하다. 자신이 손해 보는 걸 감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지방의사가 늘어날까. “편하게 성적만을 보고 뽑지 말고 성장 환경이나 인성을 고려해야 한다. 예과 2년 동안 인문학적 소양을 가르치고 일정 기간 시골병원에서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거기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몸소 느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수도권 학생 비중을 줄일 방법은. “지역 학생 선발(의·약학계열 지역인재전형) 비율을 70~80%(지금은 비수도권의 경우 40%)로 늘려야 한다. 40%로는 티가 안 난다. 대신 전문의가 된 뒤 그 지역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게 하면 의료 공백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그러면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하나. “당연하다. 2000년 의약분업 때 351명을 줄였는데, 이만큼에다 ‘플러스알파’를 더해 늘리는 게 바람직하다. 500명 정도가 적합하다. 30~40명대인 지방 의대 정원을 80명가량으로 늘려 제대로 교육할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공공이든 민간이든 의대 신설은 곤란   공공의대를 설립하자는데. “의대 신설은 절대 안 된다. 의대를 만들려면 우수한 교수진과 연구 역량을 갖춘 병원이 필요하다. 그런 걸 단기간에 갖추는 게 불가능하다. 의대 신설이 학원 만드는 거냐. 2017년 문을 닫은 서남대 의대의 재판이 될 것이다.”   의사를 늘린다고 지방으로 갈까. “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 책임을 면하게 해야 한다. 한국에서 의료행위를 하다 사망사고나 중대 사고가 났다고 의사를 구속하는 걸 다른 나라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의료인 구타, 병원 난동도 문제다.”   그런다고 정말 지방으로 갈까. “적절한 대우와 보상이 따라야 한다. 환자가 100명에서 50명으로 줄어도 병원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의사협회는 은퇴 의사를 활용하자는데. “가족이 지방행을 반기지 않는다. 은퇴 의사를 도울 레지던트가 없는데, 밤에 환자를 맡아 줄 동료가 없는데 누가 가려 하겠느냐.”   지방거점병원에 공보의 몰아줘야   지방의 민간병원도 의사를 못 구해 문 닫는 데가 많다. “보건지소마다 공보의를 보내지 말고 거점병원(민간병원 포함)에 몰아줘야 한다. 이들이 입원환자를 보게 하고 방문 진료팀을 짜서 돌면 된다. 이렇게 하는 게 훨씬 비용 대비 효율이 높다. 한 주에 세 팀 정도의 방문의료팀을 돌리면 좋다. 시골에서 보건소나 보건지소에 공보의를 먼저 배치하면 민간 거점병원에 갈 사람이 없다.”   공보의와 군의관도 기피하고 장병으로 간다는데. “공보의 복무기간이 37개월로 장병의 두 배가 넘는다. 보수 차이도 줄어든다. 그러니 공보의를 기피한다. 복무기간을 24개월 정도로 줄이고 연봉을 올려야 한다.”   외국 의사를 수입해야 하나. “그렇게 하면 지역 주민이 ‘우리를 무시하느냐’고 반발하게 된다. 주민들이 외국에서 온 의사를 찾지 않을 것이다.”   ◆전병율 대한보건협회장=홍익대사범대학 부속고교-연세대 의대를 나온 예방의학 전문의다. 전문의를 따고 1989년 복지부에 특채됐다. 보험급여과장·보건정책팀장·질병정책관·대변인·질병관리본부장 등을 지냈다.     ■ “의사를 못 구하니 환자가 없는 악순환에 빠져” 「 조승연 조승연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장(인천광역시의료원장)은 코로나19에 몸을 던져 고군분투했다. 조 회장은 “지방 의료가 총체적 위기에 봉착해 붕괴 직전인데 해결책이 안 보인다. 점점 악화하는데 너무 답답하다”고 말했다. 조 회장은 “지방의료원들이 의사를 못 구한다. 의사가 없으니 환자가 없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다”며 “수가를 올려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지방의료원들이 코로나 정상화 과정에서 유동성 위기에 빠졌고 연말이면 임금을 못 주는 데가 속출할 것이라고 한다.   조 회장은 “‘의사 연봉 4억원’은 지속 불가능한 급여 수준”이라고 말한다. 그는 “영상의학과 의사를 구하기가 특히 어렵다. 이 전문 의사가 없으면 CT·MRI를 못 찍게 돼 있어서다. 연봉 5억~6억원이 나간다”고 말했다. 정부가 지방의료원 의사를 유치하기 위해 지역의 국립대 의대와 연계해 공공임상교수제를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인기가 별로 없다고 한다.   조 회장은 “의사가 지방에 의무적으로 근무하게 하든지, 2년 근무하면 교수 채용의 인센티브를 주거나, 지방의료원 의사를 공무원으로 만들되 월급체계를 달리하고, 시골 근무하는 게 장점이 되도록 종합적인 인력 수급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방의료원장도 “지방의료는 사실상 붕괴 직전이다. 이대로 두면 진짜 큰일 난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금 씨를 뿌려서 의사를 양성하는 데 최소 10년 넘게 걸린다”며 “정부가 의사 정원 증원, 공공 수가·지역 수가 신설 등을 꺼낸 지가 오래됐는데, 말만 무성할 뿐 하나도 된 게 없다”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의사만 부족한 게 아니다. 간호사도 부족해서 간호대학 특강 다니면서 끌어온다”고 말한다.   그는 “그런데 수도권에 대학병원 분원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 6000개 병상이 새로 생긴다는데, 그러면 지방 의료 인력의 블랙홀이 될 게 뻔하다. 도대체 왜 그런 걸 허가해 주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인건비가 계속 오르는데, 어찌하려는 것인지”라고 한탄했다.   강원도 영월의료원은 영월군의 유일한 종합병원이다. 소아청소년과·응급의학과·내과·신경과 의사를 구하고 있다. 비뇨기과 의사가 오랫동안 비어 있다가 최근 공중보건의가 배치돼 해결됐다. 이 병원 관계자는 “의사 정원을 거의 다 채웠다”며 “어렵게 맞춰서 나간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속초의료원 응급의학과 의사 연봉이 4억원으로 알려지면서 이게 시장가격처럼 돼 버렸다”고 걱정했다. 경북 울진군의료원은 의사 정원 27명 중 24명이 차 있다. 이 중 5명이 공중보건의이다. 이 의료원 관계자는 “의사들이 떠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한데,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비용을 맘대로 못 쓴다. 진료의 애로를 덜어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2023.06.23 00:52

  • 낡은 민방공 경보 시스템, 미사일 대응 체제로 바꿔야 [장세정의 직격인터뷰]

     ━  비상대비 및 위기관리 전문가 최계명 동국대 겸임교수   장세정 논설위원 크고 작은 북한의 도발이 우려되지만, 대한민국의 비상 대비 태세는 뭔가 불안하다. 비상 상황이 생기면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한다. 정부도, 군도, 국민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달 31일 이른 아침 서울시민들은 사이렌과 경계경보 문자 때문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상대비 전문가'인 최계명 동국대 겸임교수가 지난 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의 민방공 대피소를 점검하고 있다. 전국 지하철역과 아파트-빌딩 지하 주차장 등 1만7000여곳에 민방위 대피소가 마련돼 있다. 최 교수는 북한의 핵미사일 등 각종 도발에 대비해 지하철 입구에 '방폭 문' 설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진영 기자   ■  「 적 항공기 대응 현행 경보론 한계 정부도 국민도 돌발 상황에 당황 훈련 잘한 일본은 침착하게 대처 2008년 폐지 비상기획위 살리고 '북핵 대비 국민안전법' 제정해야 」   반면 백령도 주민은 같은 날 사이렌이 울려도 침착하게 움직였고, 일본은 정부도 국민도 일사불란하게 대처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위협이 잦은 상황인데 왜 이렇게 돌발 상황 때마다 허둥대는 것일까. 한국과 일본은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국가 비상사태 및 위기관리 전문가인 최계명(66) 동국대 비상안전학과 겸임교수를 인터뷰했다. 육군사관학교(36기)를 졸업한 그는 대령으로 예편한 뒤 청와대 국가비상기획위원장 비서실장, 국민안전처와 행정안전부 비상대비정책국장 등을 역임했다.   안보 현실에 경각심 깨우친 계기  -전문가의 눈에 비친 5월 31일 경계경보 소동은 어땠나.  "북한 공군 조종사 이웅평 대위가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한 1983년 2월 25일 서울 전역에 실제 경계경보가 울린 지 40년 만에 실제 상황을 알리는 경보가 발령됐다. 이번에 몇 가지 문제가 드러났지만, 역설적으로 차라리 잘됐다는 시각도 있다. 안보 불감증에 걸린 정부와 국민에게 잠깐이라도 '비상사태가 무엇인지',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게 했다. 무엇보다 안이했던 정부 부처들에 경종을 울렸고,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무관심했던 국민이 경각심을 갖게 했다." 북한이 지난 5월 31일 오전 6시 29분 평안북도 동창리에서 '우주 발사체'(정찰위성)를 발사했다. 이날 오전 서울시가 재난문자를 발송하자 행정안전부는 "서울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이라고 정정했다. 이 때문에 행안부와 서울시가 엇박자를 보였다는 지적을 받았다. [연합뉴스]  -이번에 드러난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담당 공무원들의 전문성과 훈련 부족으로 발생한 일이다. 행안부의 일개 국(局)으로 편제된 비상 대비 및 민방위 조직은 부여된 과업의 중요성에 비해 부서 통제 능력 미흡, 담당자들의 전문성 부족, 소외 부서의 사기 저하 등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더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지난 정부 5년 동안 유화적 대북 정책으로 국민이 참여하는 전국 단위 민방위 훈련을 하지 않았던 것이 원인을 제공했다."  -재난문자에 경보 발령 원인도, 어디로 대피하라는 핵심 메시지도 빠졌다.   "서울시가 발송한 재난문자로는 항공기에 의한 공습인지, 포탄이나 미사일 공격인지, 지진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공습이면 지하로 대피해야 하고, 지진이나 화생방 공격이면 학교 운동장 같은 넓은 공간으로 대피해야 한다. 발령 원인과 대피 장소를 알려주지 않으니 국민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경보 담당 공무원들은 육하원칙에 따라 문자 데이터 용량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발령 원인과 대피 장소 등 핵심 정보를 작성해 발송하는 훈련을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 이번 혼란을 보면 훈련과 전문성 부족이 실수를 유발한 것 같다."   '양치기 소년' 취급당할까 걱정  -행안부와 서울시가 엇박자를 냈고 책임 공방도 했다.  "행안부가 자체 경보를 하라고 지자체에 보낸 문자에서 '경보 미수신 지역'이란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사이렌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외딴 마을이나 독립가옥을 의미했다. 그런데 서울시 공무원들이 잘못 알아듣고 자체 판단에 따라 경계경보를 발령했다고 한다. 행안부와 서울시가 평소 원활하게 소통하면서 다양한 상황을 부여한 훈련을 제대로 했다면 이런 착각과 오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행안부는 '오발령'이라 주장하고, 서울시는 과잉 대응을 인정하면서도 오발령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책임 회피 행태가 보기 민망했다." 역대 공습경보와 경계경보 주요 발령 사례 [연합뉴스 그래픽]  -지난해 11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때 울릉도 군청은 공습경보조차 인식 못 해 37분 뒤에야 대피 방송을 내보냈다.  "정말 창피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망신을 당하고도 정부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이번에 또다시 우왕좌왕했다. 만약 실제 도발 상황에서 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가비상사태 상황에서 정부의 미숙한 대응이 반복되면 국민 신뢰가 추락해 '양치기 소년' 취급당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백령도 주민들과 일본의 침착하고 체계적인 대응이 돋보였다.  "최전방 접적 지역 주민들은 경계경보가 울렸지만 당황하지 않고 평소 하던 대로 동요 없이 잘 대처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보다 빨리 경보를 발령했고 국민은 신속하게 대피소로 이동했다. 평소 훈련을 얼마나 철저히 했고, 훈련이 몸에 익숙해졌느냐가 이런 차이를 만들었다."  -5월 16일 민방위 훈련을 공공 부문만 했는데.  "당초 윤석열 대통령 지시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전국 단위 민방위 훈련을 5년 만에 재개한다고 정부가 홍보했는데 불과 일주일 전쯤 갑자기 공공 부문으로 축소했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국민 불편 등 여론을 의식해 누군가 잘못된 메시지를 전한 것 같다. 국민 참여 없이 공무원들끼리 시늉만 내는 훈련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전 국민 참여 훈련을 예정대로 실시해 전국의 모든 경보 시스템을 가동 및 점검했다면 이번 오발령 논란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5월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414차 민방위날 훈련에 참여해 심폐소생술 체험을 하고 있다. 당초 전 국민 대상 훈련으로 계획했으나 막판에 공공 부문으로 축소했다.[연합뉴스]   북 미사일, 1~2분이면 서울에 떨어져  -역대 정부의 위기관리를 비교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안보 정책이 원칙 없이 쉽게 달라지고 바뀐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1968년부터 40년간 비상 대비와 국가 총력전을 담당해온 국가비상기획위원회를 폐지했는데, 잘못된 결정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9·19 남북군사합의서 서명 이후 민방위 훈련과 을지연습 등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을 약화하고 군과 국민의 안보 의식을 약화한 잘못된 과정이다."  -국가 차원의 위기 컨트롤 타워가 없다.  "국가위기 대응 측면에서 보면 진보 성향으로 평가된 노무현 정부가 잘했다. 국가비상기획위원회를 십분 활용했고, 비상사태에 대비한 각종 위기관리 매뉴얼을 정부 부처마다 만들게 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주기적인 위기 대응 훈련을 주관하고 감독했다. 이런 점에 착안해 윤석열 정부도 대통령실 또는 총리실 산하에 국가비상기획위원회 같은 위기관리 조직을 부활하면 다양한 위기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가 가능할 것이다."  -비상 대비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점검해야 할 텐데.  "시대 상황과 안보 환경이 바뀌었는데 국민 보호를 위한 비상 대비 체제는 아직도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 이래서는 실질적인 국민 보호가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경계경보와 공습경보는 적 항공기를 대상으로 한 재래식 경보 수단이다. 적 항공기가 대한민국 영공에 들어오기까지 약 10~20분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속도가 더 빠른 핵미사일 위협이 현실이 됐다. 북한 지역 어디서 발사해도 서울 상공에 1~2분이면 도달하는데 경계경보나 재난문자가 소용이 있겠나. 지금처럼 군(합참)이 행안부를 거쳐 지자체에 보내는 문자 시스템은 자칫 무용지물일 수 있다. 민방공 경보시스템을 신속히 미사일 대응체제로 바꿔야 한다. 경보 책임도 군이 맡아 행안부 경보통제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해당 지자체 경보소에 보내도록 체제를 바꿔야 한다. 국가안보실이 조속히 검토해 조치해야 한다." 최계명 동국대 비상안전학과 겸임교수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 무력 정책법'에 대응해 우리는 '북핵 대비 국민 안전법'을 시급히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장진영 기자   핵 대비, 대피소에 '방폭 문' 등 갖춰야 -대비 시설도 확충해야 하지 않겠나.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례를 보면 지하 시설로 대피하면 생존 가능성을 대폭 높일 수 있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민방위 대피 시설인데 천문학적인 예산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접경 지역에 정부 지원으로 민방위 대피 시설 238개소를 설치했다. 지하철역과 아파트·빌딩 지하 주차장 같은 민방위 대피 시설이 전국에 1만7000여 곳이 있다. 하지만 '방폭 문'이나 공기정화 장치 등이 없어 핵 피폭 시 방호 설치 기준에 미달해 개선이 필요하다. 경보 사이렌 신호음도 국민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인공지능(AI) 음성 사이렌'을 개발해야 한다."  -그 외에 필요한 대책이 있다면.  "첫째, 거듭 강조하지만, 비상 대비 및 민방위 훈련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훈련 기간에 '국민 행동 요령 팸플릿'을 나눠주고 '안전 디딤돌'과 '국민 재난 포털'을 활용해 각자 생존법을 익혀 자신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둘째, 민간 비군사 분야와 군사작전 지원을 전담할 정부 기구로 '국가비상대비청'을 신설해야 한다. 셋째, 핵 사용 요건을 명시한 북한의 '핵 무력 정책법'에 대응해 '북핵 대비 국민 안전법'을 제정해야 한다. 현행 '민방위 기본법'이나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으로는 핵 피폭 사태 대응이 어렵다. '북핵 대비 국민 안전법'에는 범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 지정, 북핵 피폭 시 행정 각 부처와 지자체의 역할 분담, 북핵 대비 조직과 인력 양성, 건물 신축 시 지하 핵 대피시설 설치 의무, 의료 체계 구축 등을 두루 담아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위협에 맞서 민방공 훈련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일러스트=김지윤] 비상사태 시 국민행동요령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2023.06.09 00:52

  • [이현상의 직격인터뷰] 획일적 ‘플랜테이션’ 대학에선 거목이 클 수 없다

     ━  ‘일대 혁신’ 내걸고 취임 100일…유홍림 서울대 총장   이현상 논설실장 캠퍼스는 몰라보게 변했다. ‘샤’자 정문 밑을 지나던 차로는 옆으로 비켜났고, 교내는 새로 들어선 건물로 빽빽해졌다. 중앙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 계단’은 그대로지만, 축제장으로 쓰였던 행정관 앞 잔디광장은 새로 들어선 지하 주차장과 캐스케이드(계단형 수경시설)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리 대학의 질적 변화는 이런 외양의 발전을 따라가고 있을까. 인공지능(AI), 4차 산업혁명, 융복합 같은 단어가 난무하는 지금, 우리 대학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가. 그 발걸음의 속도는 또 어떤가. 지난 2월 1일 4년의 임기를 시작한 유홍림 서울대 총장을 찾은 것은 이런 궁금증 때문이었다. 인터뷰는 지난 10일 집무실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  「 규제와 칸막이로 다양성 잃어…생태계 숨쉬는 ‘자연림’ 돼야 1, 2학년 대상 융합형 교육하는 ‘학부대학’ 2025년 설립 준비 신설되는 첨단융합학부, 새로운 교육 모델의 실험장이 될 것 」    혁신 대학 특징은 다양성과 융합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생태계가 살아 숨 쉬는 자연림 같은 대학 환경에서 큰 인재가 자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취임 후 100일이 지났다. 취임사에서 ‘대전환 시대 서울대의 일대 혁신’을 내걸었는데.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앞으로 대학이 어떻게 가야 하나, 존재 이유는 뭔가, 서울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총장 출마 결심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10년 후 서울대가 지금 같아서는 안 된다는 젊은 교수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서울대는 이런저런 발전계획이 있었다. 1975년 종합화, 2011년 법인화 때도 그랬다. 작년에는 ‘중장기발전계획’도 발표됐다. 그러나 큰 틀의 변화를 체감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진짜 변화가 필요하다.”   가장 변하지 않은 게 무엇인가. “관료제형 대학의 모습이다. 서울대가 국립대인 데다, 국가 주도의 대량 인력 공급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불가피한 측면은 있었다. 그러나 규제가 획일적으로 적용되다 보니 다양성을 잃었다. 농업으로 치면 단일 작물을 대량으로 경작하는 ‘플랜테이션’이다. 학생 및 교수로 서울대에서 40여년을 보냈는데, 규정집이 점점 두꺼워졌다. 규정은 기본적으로 불신의 산물이다. 지나치게 강조되면 유연성이나 탄력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대학 교육이 ‘플랜테이션 경작’을 닮았다는 진단이 인상적이다. “미래에 필요한 지식과 인재의 형태는 과거와는 다르다. 엄청난 능력을 갖춘 개인(super-empowered individual)에 의해 세계가 바뀔 수 있는 시대다. 스티브 잡스가 좋은 예 아닌가.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네르바 대학, 애리조나 주립대 같은 세계적 혁신 대학의 목표는 그런 개인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런 개인은 지금의 ‘플랜테이션’ 같은 대학에선 나올 수 없다.”   혁신적 대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자연림(natural forest) 같은 모습이다.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대학들은 다양성을 최대한 확보하고 있다. 그런 다양성을 이어주는 연결성이 또 다른 특징이다. 공간적 캠퍼스가 아니라 네트워크와 플랫폼이 요체다. 그 위에서 유연성, 자발성, 자생성 등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자연림 하면 약육강식에 대한 거부감이 앞서지만, 오해다. 모든 게 연결돼 결국 균형을 이루는 생태계가 자연이다. 경쟁도 물론 있지만, 경쟁과 함께 협업이 가능한 에코 시스템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대학이다.”   학문의 출발은 연결성에 대한 인식   지난 2월 8일 총장 취임식에서 유홍림 총장이 오세정 전임 총장(오른쪽)으로부터 서울대 상징 열쇠를 전달받고 있다. [연합뉴스] 유 총장은 총장 출마의 변으로 J.S.밀의 ‘자유론’을 인용한 바 있다. “인간은 틀에 맞춰 제작돼 주어진 작업을 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 자라나는 나무와 같다.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오직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만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다.”   총장 출마하면서 학부대학 신설 구상을 밝혔는데. “입학 후 1~2년이 가장 중요하다. 진로와 가치관이 결정되는 시기다. 학부대학은 1~2학년 학생에게 문제해결 능력, 소통 및 공감 능력, 비판적 사고력, 시민성 같은 공통 교육을 진행하는 과정이다. 지금도 교양과정이 있지만, 이 역시 분절적이고 플랜테이션적 학사과정이라 한계가 있다. 학생들은 거대한 우주로부터 내면의 사소한 감정까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배우고 싶어한다. ‘존재의 거대한 사슬’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 배우는 게 큰 대(大)자 쓰는 대학 아닐까. 철학자 칸트도 출발은 천체 물리학이었다. 최첨단 로보틱스, 하이테크 등이 인간의 행복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고민해야 한다. 이런 연결성에 대한 시선이 학문의 출발이라고 본다. 서울대 종합화(1975년) 50주년인 2025년에 맞춰서 학부대학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에 생기는 첨단융합학부, 기존의 자유전공학부와 기초교육원이 학부대학에 포함될 것이다.”   서울대는 최근 교육부와 협의를 거쳐 218명 규모의 첨단융합학부 신설을 확정했다. ▶디지털헬스케어 ▶차세대 지능형반도체 ▶지속가능기술 ▶혁신신약 ▶융합데이터과학 등 5개 전공 과정이다. 유 총장은 “내년부터 신입생을 뽑는 첨단융합학부를 새로운 교육 실험 모델로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첨단융합학부는 기존 공과대학 교수진뿐 아니라 인문·사회대학 교수진도 참여시킨다는 구상이다.   “공간이 교육이다”는 말이 있다. ‘레지덴셜 칼리지(RC·기숙형 대학)’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서울대에서 ‘LnL’(Living & Learning)이라는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영국 옥스퍼드, 미국 스탠퍼드 등 서양의 전통 명문 대학들은 애초부터 RC 형태지만, 우리는 아직 실험 단계다. 캠퍼스 내 기숙사(관악사) 한 동을 리모델링해서 다양한 학과 학생을 입주시켰다. 지난해 300명을 모집했는데, 경쟁률이 4대 1이 될 만큼 높았다. 장기적으로 기숙사를 학부대학 과정과 결합할 구상도 있다. 단과대 학생을 섞어서 입주시켜 융복합형 인재로 키우고 싶다. 모든 비(非)교과 프로그램은 학생들 스스로 개발하게 해 자연스럽게 시민성과 리더십 함양으로 연결할 생각이다. 이를 위해 기숙사 재건축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와 별도로 캠퍼스 내에 학내 구성원의 학습, 교류, 소통의 공간으로 ‘SNU Commons’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대학 총장은 멀티형 리더십 요구돼   작년에 발표된 중장기발전계획에는 ‘서울대엔 2200명의 총장이 있다’는 표현이 있다. 혁신은 좋지만, 구성원의 생각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게 총장 리더십의 핵심이다. 교수, 학과, 단과대 등 자율적인 주체가 워낙 많으니까. 서울대 총장은 ‘선출직’과 ‘임명직’이라는 상반된 성격이 있다. 이사회가 최종 결정을 하지만, 교수들은 자신들이 선출에 사실상 간여한다고 생각한다. 총장이 강한 장악력을 쥐어야 한다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이 맞선다. 결국 소통과 설득이 중요하다. 명분과 비전이 합의를 이끌 원동력이다. 지금의 대학 총장은 멀티태스킹(다중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야 하고, 때로는 세일즈를 해야 한다.”   서울대 교수진의 연구가 평균적으론 우수하지만, 아주 탁월한 실적(Only One)은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다. “교육도 그렇지만, 연구도 ‘자연림’ 환경이 중요하다. 전임 교원을 학과부 소속으로 두는 학칙부터 바꿔야 한다. 전체 대학 소속도 있어야 하고, 단과대 소속도 있어야 한다. 소속을 유연화하면 융합·소통이 쉬워진다. 커뮤니티가 중요하다.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교수는 수상 소감에서 동료 교수에 대한 감사부터 표했다. 선진국 대학처럼 ‘브라운백 미팅’(샌드위치 등을 들며 하는 모임) 등을 통해 교수들끼리 교류하는 문화가 활성화해야 한다.”   제도혁신위원회가 신설됐는데. “두 가지가 목표다. 규정집을 줄이는 것과 ERP(전사적 자원관리) 도입. 규제는 ‘포지티브 형’에서 ‘네거티브 형’으로 바뀌어야 한다. 명시적 규제를 빼고는 기본적으로 모두 푼다는 뜻이다. ERP는 효율적인 행정지원 체계를 위해서 필요하다. 그래야 관료제형 대학에서 플랫폼형 대학으로 갈 수 있다.”   입시제도는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보나. “대학별 특성화가 제대로 되려면 대학별로 입시 자율성이 커져야 한다. 서울대 입시 제도가 초중등 수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조심스럽긴 하나, 큰 방향은 자율 강화다. 앞으로 AI나 하이테크의 발전으로 ‘기초학력’의 개념도 달라질 것이다. 수학 문제 푸나 못 푸나가 기초학력의 기준이 아니게 될 수 있다.”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시구가 유명하다. 그 시구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나. “이 시구는 1971년 종합캠퍼스(관악캠퍼스) 기공식에 부친 축시다. 다양성·유연성·연결성·포용성 같은 개념은 어쩌면 캠퍼스 종합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칸막이가 문제 된다. 그걸 넘어서는 것이 이 시구를 유효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본다.”    ◆유홍림 총장=1961년 충북 청주 출생. 청주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미국 럿거스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정운찬 전 총장에 이어 21년 만의 사회대 출신 총장. 포용력과 온화한 성품을 지닌 외유내강형 학자라는 평. 이현상 논설실장, 정리=김홍범 기자

    2023.05.19 00:54

  • [강찬호의 직격인터뷰] "신종 감염병 백신 100일 내 개발할 역량 갖추겠다"

     ━  '코로나 위기 종식' 시대 지영미 질병청장      강찬호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11일 "코로나 위기 단계를 ‘심각’에서 ‘경계'로 조정하고 6월부터 적용한다"고 밝혀 사실상 코로나 위기 종식을 선언했다. 2020년 1월 첫 확진자가 발생한 지 3년 4개월 만이다. 지난해 12월 질병관리청장에 취임해 코로나 종식 과정을 총지휘해온 지영미 청장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지 청장은 지난 5일 글로벌 차원에서 코로나 위기 종식을 선언했던 세계보건기구(WHO) 긴급위원회 멤버이기도 하다.     -코로나 위기가 정말 지나간 것으로 볼 수 있나.  "국민의 70%가 한 번씩은 자연 감염이 됐고, 백신 접종률이 90%에 달한다. 백신 접종을 한 경우에도 코로나에 걸릴 수 있으나 중증이나 사망으로 이어질 리스크는 크지 않다. 질병청 내 연구에 따르면 국내에서 코로나 백신으로 구한 생명이 약 18만명에 달한 것으로 추산됐다. 올 초 두 차례 단계적으로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면서 확진자가 늘 가능성이 우려됐지만, 하루 확진자 수는 1만~2만명 사이에 머물러 위험도가 '낮음'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WHO가 위기 해제 조치를 하지 않아도 한국은 단계를 낮출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다만 오미크론 항원이 추가된 2가 백신 접종률이 15%선에 그친 점은 우려가 있다. 60세 이상에서도 40%가 안된다. 오는 10월에 65세 이상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접종 권고에 나서겠다." -3년 4개월간 이어져 온 코로나 K-방역을 어떻게 평가하나.  "초기엔 확진자 숫자가 많이 나와 '위험한 나라'로 오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발 빠른 '3T'(검사, 추적, 치료) 전략으로 국경 봉쇄(록다운) 같은 무리한 조치 없이 피해를 최소화한 나라가 한국이다. 10만명당 코로나 누적 사망률도 66.9명(6일 기준)에 그쳐 낮은 치명률(0.11%)을 기록했다. 미국과 일본의 치명률은 각각 그 10배와 2배다. 불편을 무릅쓰고 정부의 방역에 협조해주신 국민께 감사드린다."   -코로나 초기 병상 부족과 사망자 급등 같은 혼란도 있었는데.    "코로나 이전 우리가 겪은 대표적 감염병이 메르스인데, 확진자가 186명이었다. 코로나 확진자는 3000만명이 넘는다. 많을 땐 하루 62만명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대응할 의료 역량이 준비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코로나 위기 종식을 계기로 '신종 감염병 중장기 계획'을 수립했다. 하루에 100만명까지 감염병 환자가 생겨도 대응할 역량을 만드는 것이 골자다. 우선 중환자용 비상 병상이다. 코로나 초기 중환자용 병상이 700개뿐이라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약 2800개를 긴급 동원했는데 병상을 완전히 비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 10주나 되더라. 따라서 1주 만에 비울 수 있는 병상을 3500개로 늘릴 예정이다. 우리는 인구당 중환자실 수가 독일의 3분의 1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평균보다도 낮다."  -그 밖의 대책은.   "신종 감염병이 해외에서 발생해 국내에 유행할 때까지 전 과정을 조기에 탐지하는 체제를 구축할 것이다. 우리가 진단 역량은 강한데 감염병 발생 지역 정보에는 약하다. 메르스 사태 때 영어권 정보만 접한 결과 전파력을 과소평가해 피해가 커졌던 바도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감염병 발생 가능성 높은 국가나 대륙에 지역 사무소를 두고 정보 습득과 의료 협력을 꾀할 방침이다. 일단은 동남아시아, 그중에서 라오스를 후보지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또 방역 대책의 효과적 수립을 위해 슈퍼컴퓨터도 한 대 들여올 예정이다. '식당 영업 종료 시간을 밤 10시에서 1시간 늘리면 감염률이 어떻게 되나' 같은 분석을 빠른 시간 내에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스크는 앞으로도 써야 하나.  "실외는 몰라도 사람들이 밀집한 실내에서는 마스크 쓰는 게 효과가 있다. 마스크 의무 해제는 마스크 안 쓴 이에게 과태료를 물리지 않는다는 거지, 마스크를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특히 고위험군에 속한 분들은 가급적 쓰는 걸 권고한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백신 개발이 과제로 등장했는데.   "그렇다. 제일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우리도 코로나 말기에 자체 백신을 개발했는데 접종하기엔 늦은 시점이었던 것이 안타깝다. 미국이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데 걸린 시간이 327일이다. 보통은 백신 개발에 10~15년 걸리는데 1년 미만으로 단축한 건 엄청난 성과다. 비결은 'mRNA'(메신저 리보핵산) 전달체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신종 감염병 발생 시 백신을 100일 안에 개발하기로 목표를 잡고 77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한다. 우리도 100일 또는 200일안에 백신을 개발하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다. 그러려면  mRNA 기술이 꼭 있어야 하는데 국내엔 관련 전문가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따라서 범부처 협력 기반을 구축하고  학계와 업계의 기술 개발을 지원하려 한다." -질병청이 청으로 승격한 뒤 세번째 청장이 됐는데.   "청으로 승격하며 인력이 500명 늘었지만 그래도 크게 부족해 충원이 절실하다. 질병청은 감염병 대응 외에도 만성, 희귀 질환 등 많은 업무를 이관받았다. 또 코로나 관련 장례비나 생활지원비 등 지급도 질병청이 한다. 또 '심각' 기간 동안 휴일도 없이 과로에 시달린 끝에 휴직한 인원이 한때는 전체 인력의 10%에 달했다. 지금도 1617명 직원 중 124명이 휴직 상태다."   -그에 대한 대책은 뭘까.   "질병청은 윤석열 정부의 두 번째 국정과제인 ‘감염병 대응 체계 고도화’를 주관하는 기관이다. 청으로 승격된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예산규모나 역할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커나가야할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숨진 분들에 대한 대책은.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다. 지난 3월에 코로나 피해자 가족들을 만났다.사연을 얘기하시면서 우시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다. 현재 사망자 신고가 2000건, 보상 신청은 1300여건인데, 백신으로 인한 피해가 입증돼 보상된 분은 17명뿐이다. 그래서 '(인과성이 입증되지 않았어도) 관련성이 의심되는 질환'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 최대한 지원의 폭을 넓히려하고 있다. 그러나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지려면 법이 필요하다. 국회에서도 입법 움직임이 있는데 빨리 실현됐으면 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 정세균 국무총리 특보를 지냈다. "말씀을 나눈 적은 없었는데 어느 날 총리실에서 특보 자리를 제안해오더라.  파스퇴르연구소에 재직 중인 시절이라 사양했더니 '(겸직해도) 상관없다'고 해서 특보를 맡게 됐다. 나는 백신 전문가였기 때문에 백신 도입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조언했다. 질병청장에 임명됐을 때 정 전 총리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 코로나 발생 초기 WHO가 중국 눈치를 봐서 비상 사태 선포를 늦췄다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비상 사태 선포 여부를 결정하는 긴급위원회 위원이었는데 비상 사태 선포를 막으려는 중국의 압박이 있었나  "긴급위원회 위원들은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절대 외부에 발설해선 안된다. 그러면 위원 자격 박탈이다. 그래서 대답을 줄 수 없다. 다만 당시 이 논란과 관련해 국내의 어느 누구도 물어보는 사람이나 언론이 없어서 난처한 입장이 된 적이 없다.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 한국이 국제 보건 외교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감염병 등으로 인해 보건의료가 국제 정치의핵심 쟁점으로 떠오른지 오래다. 따라서 우리 보건의료 종사자들도 국제 정치적 안목을 갖고 일할 필요가 있고 외교를 담당하는 분들도 보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WHO는 이제는 종식된 천연두 바이러스를 유일하게 보유한 미국과 러시아의 바이러스 보관 상황을 사찰할 권한도 있다. 우리가 WHO에 보다 많이 진출하면 그런 글로벌한 이슈를 더 많이 접하고, 발언권도 커지게된다."     강찬호 논설위원

    2023.05.12 00:48

  • [서경호의 직격인터뷰] “교육·복지 투자로 생산성 높여 ‘멋진 노동자’ 만들어야”

     ━  음식으로 경제 이해하는 『경제학 레시피』 펴낸 장하준 교수   서경호 논설위원 장하준 런던대 교수는 이종격투기 선수 같다. 시장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며 복지국가를 강조할 때는 영락없는 진보지만, 경제발전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정책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대기업의 경영권은 지켜주되 투자를 끌어내는 재벌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대목은 보수 쪽에 가깝다. 단기 이익을 좇는 주주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제조업을 중시한다. 좌우 양쪽에서 모두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요리를 앞세워 경제 얘기를 풀어가는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를 출간한 장하준 런던대 교수를 18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 “세상 달라졌다” 노동의 질적 유연성 높이고 생산성도 올려야 기본적인 팩트체크부터 해야 진영 갈등 줄이고 타협도 가능 경제학자 더 소통해야…국민이 경제학 알아야 민주주의도 작동 미·중 경제 분리 힘들어…30~40년 된 현재 공급망 쉽게 못 바꿔 」    18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하준 런던대 교수. 장 교수는 “경제학은 이론적 다원주의, 정책은 실용주의와 점진주의를 추구한다”고 했다. 김경록 기자 한겨레에 나온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 회고록에 노무현 정부 출범 전후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를 청와대 경제자문위원장으로 검토했고 장 교수가 스티글리츠의 승낙을 받아내는 등 다리를 놨다고 썼다. “내가 정치에 관여하는 사람은 아닌데, 정태인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나중에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냈다)이 스티글리츠를 잘 아는 내게 부탁했다. 유럽 기준으로 보면 대단한 좌파도 아니지만, 어쨌든 좌파 정부가 출범하니까 국제자본시장에서 사시(斜視)로 보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명망 있는 외국 교수를 자문으로 초빙해 조언도 듣고 신뢰성도 얻자는 취지였는데 잘 안됐다. 인수위의 과민반응 탓이다.”(2003년 초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시절, 전경련 임원이 외신 인터뷰에서 인수위를 “사회주의적(socialist)”이라고 표현해 논란이 됐다.)   스티글리츠의 진보 성향 때문에 월가의 신뢰를 얻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굳이 말하자면 스티글리츠는 중간에서 왼쪽으로 간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좌파는 아니다.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할 때 국제통화기금(IMF) 비판했다고 월가가 싫어할 거라는 얘기는 너무 알아서 긴 것 아닌가. (노무현 정부 인수위가) 미국에서 보면 좌파일지 모르지만 독일에서 보면 메르켈의 기민당보다 우파다. 그 정도도 소화 못 하나. 사실 비즈니스쪽 분들은 포용력이 넓다. 돈을 버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어서 어느 이론이냐 무슨 학파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비주류 경제학을 하지만 사업가를 설득하기는 더 쉬웠다. 내가 반(反)자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만 초반에 이해시키면 내 이론이 마르크스에서 끌어온 것이든, 하이에크에서 끌어온 것이든 상관 안 한다.”   자본의 합리성 같은 것이겠다. “그렇다. 영국에선 산업정책을 노동당이 했기에 산업정책 얘기하면 좌파라고 하고, 한국에선 박정희 때 했기 때문에 운동권 출신 중에는 산업정책 옹호하는 내게 ‘파쇼’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중앙은행 독립도 유럽에선 우파 정책, 과거 관치금융을 경험한 한국에선 좌파 정책이라고 한다.”   개발경제학자 혹은 제도경제학자로 불리던데. “사실 난 학파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학파가 장단점이 있고 배울 게 있다. 내가 개발경제학자·제도경제학자로 많이 인용되는 건 내 연구의 주제가 경제발전, 특히 산업화여서다. 내가 추구하는 경제학은 이론적 다원주의다. 정책적으로는 실용주의고.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행동주의 경제의 창시자 허버트 사이먼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다.”   우파는 자본론을 읽고 좌파도 하이에크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결론엔 90% 이상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의 사회 분석에서 많이 배웠다. ‘본능과 지성 사이에 관습과 전통이 있다’고 했던 하이에크로부터는 점진주의를 배웠다. 경제는 이데올로기로 접근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는 어느 경제이론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나라다. 자유무역을 하고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지만, 토지의 90%를 국유화했고 주택의 80% 이상을 정부가 공급한다. 국내총생산(GDP)의 20% 이상을 국영기업이 산출한다. 땅 좁고 인구밀도 높은 나라에서 토지·주택문제가 해결 안 되면 정치가 불안하고 경제 발전도 못 한다. 그래서 실용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경제학의 95%는 상식을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나머지 5%도 아주 전문적인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거기에 숨은 근본 논리는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썼다. 그런데 왜 경제학 어렵다는 이들이 많을까. “대중과 소통하려는 경제학자의 노력이 부족했다. 경제학이 어렵고 무서운 학문이라는 선입견이 있고 경제학자들도 이를 은근히 즐긴다. 시민들이 경제학을 배워야 시장주의가 득세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감세로 투자가 확대된다는 주장은 증거가 없는 얘기”라며 “세율 자체보다 그것으로 나라가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한국은 어떤가. 세금 낸 만큼 기업 활동하기 좋은 나라, ‘세금 가성비’가 있는 나라인가. “잘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개별 기업이 할 수 없는 걸 해줘야 한다. 수도권 집중을 줄여 지역에서도 물류가 편하고 좋은 인재도 구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복지에 투자하고 노동자 재교육과 재취업 잘하게 하면 해고도 쉽게 할 수 있다. 그래야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나라가 된다.”   몇 년 전 강연에서 소수의 승자가 폭식하고 나머지 절대다수가 도태하는 ‘압정형 사회’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복지를 강화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고령화 추세를 고려할 때 현재의 복지를 유지해도 복지비용이 커지는 속도가 빨라 재정 부담이 커진다고 우려한다. “기획재정부 설명처럼 구조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자살률 1위, 특히 노인자살률 1위, 출생률 꼴찌 등 복지가 더 필요하다는 객관적인 지표가 분명히 나와 있다.”   2009년 본지 인터뷰에서 “정치는 경제의 경계선을 규정짓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요즘 윤석열 정부 지지도가 20%대로 떨어졌다. 정부에 조언한다면. “진취적인 어젠더를 가졌으면 한다. 우리 사회는 지난 60년간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영국으로 말하면 18세기 말에서 갑자기 21세기로 온 거다. 시대가 바뀌었다. 노동시간 제도 개편도 못 할 얘기는 아니지만 노동의 질적 유연성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노동자 한 사람이 여러 기술을 갖고 있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멋진 노동자’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나라 밖에서 보면 22세기를 사는 것처럼 보이는 데 정책 어젠더는 옛날식이어서 안타깝다.”   진영 갈등이 심각하다. 지지정당이 다르면 결혼은 물론, 연애하기도 싫다는 이들이 많다. “적어도 서로 기본적인 팩트체크는 했으면 한다. 같은 대상을 두고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대화가 되겠나. 이번에 방한해서 거리에 내걸린 정치권 플래카드 보면서 충격받았다. 상대방 얘기를 ‘괴담’ ‘거짓말’이라고 하던데, 그런 자세로 어떻게 논쟁하고 타협을 하겠나.”   노사 갈등도 심각하다. “경제정책으로 다 풀 수는 없다. 정치로 풀어야 한다. 스웨덴도 1920년대 노사 갈등이 심했다. 이러다가 다 같이 망한다는 위기감에서 노사가 대타협을 했고 복지국가를 키웠다. 최소한의 기본은 보장한다는 합의를 하고 약육강식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하는 분위기가 돼야 평화가 온다.”   미·중 갈등을 보면 미국이 자유무역이 아니라 보호무역으로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 “미·중 경쟁은 과거의 미소 냉전과는 다를 것이다. 과거엔 두 블록이 경제적으로 완전히 분리됐지만 지금 미국과 중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중국의 싼 소비재가 없으면 미국 상점을 텅 빌 것이다. 현재의 공급망은 과거 30~40년간 만든 것이다. 쉽게 바꾸기 힘들다.”   미국에 투자하는 한국 대기업이 늘어나면서 제조업 공동화를 걱정하기도 한다. 첨단 제조공정은 국내에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 방향이 맞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따라오기 힘든 기술은 자기네 땅 안에 쥐고 있어야 한다. 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자본의 뿌리가 어디냐에 따라 최고경영자가 달라지고 고부가가치가 어디서 나오는지도 영향을 받는다.”   이기주의자보다 독선주의자가 더 위험하다고 썼던데. “이기주의자는 정책 인센티브를 바꾸면 다른 식으로 행동한다. 반면 독선주의자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에 아무리 인센티브를 바꿔도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특정 개인을 떠올리고 한 얘기는 아니다.”   케인스는 데이터 등 상황이 달라지면 과거 주장을 수정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더 발전한 나라와의 무역은 해롭다는 이유로 한·미 FTA에 반대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미국과 기술 격차가 있는 만큼 우리의 최첨단 산업을 키우려면 보호무역이 필요하다고 봤다. 당장 망한다는 얘기도 아니었다. 10년 후에 보면 내가 틀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판단을 바꾸진 않겠다.”   ◆장하준 교수=1963년생. 서울대 경제학과(82학번)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 한국인 첫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됐다. 지난해 SOAS 런던대로 옮겼다.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 17권의 책을 썼다. 김대중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장재식씨가 부친, 과학철학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동생이다. 요리와 추리소설, 공상과학 소설 읽는 게 취미다. 서경호 논설위원

    2023.04.21 0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