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시평] 개혁 과제와 새로운 국가지도층의 부상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한국 경제가 이만큼 성장, 발전해 온 것은 당시 시대가 당면한 도전과 과제에 나름 적절한 대응을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 다시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지금 한국 경제가 직면해 있는 과제의 성격은 과거와는 크게 다르다. 과거의 주 과제가 한국인에 내재해 있는 잠재력을 결집해 이에 걸맞은 나라발전을 이루고 소득수준을 향상하는 것이었다면, 지금 한국이 당면한 과제는 한국사회와 국민의 잠재력, 기본역량 자체를 높여 선진사회로 확고히 진입해 나가는 것이다. 전자는 국내외 자본을 동원하고 인프라를 건설하여 해외에서 도입한 기술과 설계로 공장을 짓고 투자와 고용, 생산을 늘리는 것이 핵심이었다면, 후자는 우리 사회 전반의 합리성과 효율성, 교육의 질과 기술·지식 수준을 높이고, 공정경쟁 질서와 사회적 신뢰 제고, 그리고 일하는 방식의 개선 등을 이루어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전자는 하드웨어를 설치하는 것이 주 과제였다면 후자는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주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후자가 훨씬 어렵다. 여기에는 압축성장이라는 것이 없다.     ■  「 과거와 달라진 한국 경제의 과제 ‘소프트웨어’의 업그레이드 절실 개헌으로 국가지배구조 개편하고 비전·의지 갖춘 정치세력 길러야 」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최근 통계를 보면 한국 근로자의 근로시간은 여전히 회원국 평균보다 훨씬 많고, 1인당 노동생산성은 G7이나 회원국 평균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1위인 아일랜드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인구는 줄고 일인당 근로시간도 줄어들고 있으며 투자율도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우리 경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지 않으면 성장은 정체되고 국가 위상은 추락한다.   지금 한국이 당면한 이러한 과제를 제대로 풀어갈 수 있기 위한 내부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무엇보다 정치, 사회적 여건이다. 1960년대 초와 지금을 비교해 보자. 구한말, 일본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신분계급이 거의 완전히 붕괴했고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이 해체되었으며 한국전쟁을 통해 그나마 남아있던 부와 자산은 거의 파괴되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가 신산업을 육성하고, 기업인들을 지원하며 수출지향적 정책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남미나 인도, 필리핀 등과 달리 대지주라든가 수입대체업자 등 기득권 저항세력은 미미했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이들 국가와 달리 수입대체 정책이나 재분배 정책에 구속되지 않고 수출과 산업화를 위한 광범위한 제도개편과 정책개혁을 통해 고성장을 실현해 나갈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거기에 군부에 기반을 둔 강력한 정치권력과 박정희 대통령의 유능하고 강단 있는 행정력이 이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이다. 경제도약이 시작되고 반세기가 더 흐른 지금 한국사회는 재벌, 노조, 시민단체 등 강고한 기득권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나라가 당면한 도전을 돌파해 나가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기반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국가지배구조를 개편하는 것이다. 지난 30여년 우리나라의 기득권과 사적 권력은 더욱 강고해졌으나 국가권력 구조와 행정 능력은 더 취약해졌다. 거기에 5년 단임 대통령제는 국가 전반의 시계(視界)를 짧고 좁게 하고 있다. 우리가 당면한 개혁과제를 돌파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후자가 더 보강되고 유능해져야 한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국가지배구조 개편과 개헌이 필요하다.   둘째는 우리 사회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분석에 기반을 둔 비전과 이를 실천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춘 새로운 국가지도층의 부상이다. 디지털 혁명, 급변하는 국제정세 흐름을 통찰하는 능력과 비전,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춘 지도자 그룹 또는 정당이 형성되어야 한다. 통합과 협치를 이룰 포용성을 갖추면 더 좋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그 뿌리가 매우 깊고 서로 얽혀 있다. 어느 한두 분야의 정책, 제도개편으로는 오늘날의 문제를 치유할 수 없다. 지금 한국의 혁신은 현실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종합적이며 체계적 접근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 인재의 흐름과 성공의 방식을 지배해온 인사제도와 보상유인 체계를 전반적으로 재편해 나가야 한다. 우리 국민은 어떤 인센티브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추구하는 능력에서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왔다.   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개혁을 10~20년, 또는 한 세대에 걸쳐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밀고 나갈 정치적 세(勢), 국가권력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주먹구구식 논쟁, 지역 정서와 팬덤에 기대어 오로지 정권쟁취를 위해 대립을 위한 대립을 이어가는 오늘의 정치지형에서 벗어나 지역을 초월하고 냉철한 현실분석과 미래 비전에 기반을 둔 정당이 나오길 기대한다. 기존 정당의 환골탈태도 좋고, 신당의 출현도 좋다. 어떤 경우든 그 비전을 일관성 있게 장기간 추진해 나갈 수 있으려면 이제는 보다 젊은 세대가 주도그룹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2023.11.24 00:43

  • [중앙시평] 트럼프 당선이 우리 외교에 미칠 영향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미국 대선이 1년 남았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현재 트럼프의 전국적 지지도는 바이든보다 약간 높고, 경합 주에서도 우위에 있다. 물론 트럼프에게는 사법 리스크가 있고, 극단적 성향에 대한 우려도 상존한다. 바이든에게도 건강문제, 인플레 등 약점이 있다.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50%는 된다고 보아야 한다.   트럼프가 대통령일 때 그는 치우친 주장을 정책으로 밀어붙인 적이 많았다. 지금의 트럼프는 분노와 복수심에 차고, 자기 식대로 하려는 결의로 충만하다. 트럼프 진영의 측근 참모들은 트럼프 1기 때 기득 세력인 ‘딥스테이트(Deep State·숨은 권력집단)’에 의해 트럼프의 ‘참신한’ 정책들이 좌절된 사례가 많았다고 본다. 이들이 보기엔 켈리 비서실장, 틸러슨 국무장관, 매티스 국방장관, 볼턴 안보보좌관들이 방해꾼들이다. 참모들은 트럼프 2기에는 ‘딥스테이트’의 방해를 막을 방안을 인사와 운영 측면에서 마련하고자 부심하고 있다.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그는 더 극단적인 정책을 더 강하게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만류할 인물은 아예 기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  「 미국의 한국 안보 공약 약화하고 한국 배제 미북대화 재개 가능성 대중 견제 강화로 한국 부담 커져 심각한 파장 지금부터 대비해야 」    그렇다면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우리 외교에 닥칠 변화를 따져 보는 것이 괜한 일은 아닐 것이다. 미국 대선 즈음에 임기의 반환점을 맞는 윤석열 정부는 임기 후반부를 트럼프 행정부와 함께하며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달라질 것 중 첫째는 동맹 공조의 수준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나 동맹 경시가 더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나토로부터 한미동맹에 이르기까지 공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미 간에는 연합훈련, 전략자산, 방위비 등 동맹 운용을 둘러싼 논란이 늘어날 것이다. 근본적으로 미군 철수 내지 감축 주장이 부상할 가능성도 배제 못 한다.   그간 윤석열 정부는 대외정책의 근간을 동맹 강화에 두고 바이든 행정부와 확장억제 강화, 한미일 안보협력 및 나토와의 협력 강화를 추진해왔다. 이런 윤석열 정부로서는 트럼프가 동맹을 새롭게 규정하고 한미 공조의 톤을 바꿀 경우, 거시적 측면에서 정책의 철학과 기조를 재조정해야 할지를 놓고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아울러 트럼프 발(發) 동맹 관련 논란에 대처해야 하는 미시적 측면의 부담도 안게 될 것이다.   아울러 주목할 것은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질 가능성이다. 미국 우선주의에 경도된 트럼프가 미국에 대한 핵 공격을 무릅쓰고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할지 의문이 커질 것이다. 트럼프가 확장억제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이라도 하게 되면 한·미가 해온 확장억제 강화 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반작용으로 국내에 핵무장론이 재부상할 수 있다. 그런 분위기가 이어져 차기 대선에서 핵무장론이 이슈가 될 소지도 있다.   두 번째 변화는 미·북 관계다. 지금 북한은 미국 대선을 주시하고 있다. 북한은 트럼프의 당선을 바랄 것이다. 당선되면 김정은은 축하 친서를 보낼 것이다. 트럼프가 회신을 안 하리라고 보기 어렵다. 둘 사이에는 이미 수십 차례 소위 ‘연애편지’가 오고 갔다. 트럼프는 자신이 계속 집권했다면 지금과 같은 북핵 대결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호언한다. 미·북 간에 접촉이 재개될 것이다. 반면 북한은 한국과의 대화는 피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미·북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   한미 동맹이 이완되고 남북대화가 단절된 가운데 재개되는 미·북 대화는 난제가 될 것이다. 한반도 문제 논의에서 한국이 배제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 않다. 동맹을 경시하는 트럼프가 우리 문제를 북한과 협상하는 상황은 안심할 수 없다.   셋째로 미·중 대립이 더욱 격해져 한국의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 바이든 시기의 ‘작은 영역에 높은 담장(Small Yard, High Fence)’ 류의 절제된 접근은 퇴조하고, 대결 영역이 확대되며 견제의 담장도 높아질 수 있다. 미·중 관계가 디리스킹을 넘어서 사실상 디커플링으로 들어갈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동맹에 대한 배려는 줄이면서, 동맹을 대중국 견제에 동원하기 위한 압력은 늘릴 것이다. 관련하여 한국이 반도체나 배터리에 대해 바이든 행정부로부터 어렵사리 확보했던 운신 공간이 축소될 소지가 있다. 또 트럼프의 미국 위주 보호주의 정책이 한국 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이처럼 트럼프의 집권은 가능성의 영역이고, 그 파장은 심대할 것이므로 대비가 필요하다. 특히 동맹, 북한, 중국 관련 대책이 중요해 보인다. 동맹에 관해서는, 공조가 일정 선 이하로 이완되지 않아야 하고 확장억제에 대한 의구심이 극단적인 정책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아야 한다. 한국이 배제된 한반도 문제 협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국이 미·중 대립의 와중에 과도한 타격을 입지 않아야 한다. 지금은 이런 목표를 염두에 둔 대비책을 연구하고 여론을 모으기 시작할 때라고 생각한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2023.11.22 00:48

  • [중앙시평] 백정의 아들이 선사한 서양의학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가면 한쪽 구석에 아늑한 역사관이 있다. 다들 모르고 그쪽을 찾지 않기 때문에 아주 조용하다. 병들어 고생하는 가족들을 힘겹게 돌보는 보호자들이 평화롭게 잠시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역사관 전시물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은 세브란스병원의 창립자라 할 수 있는 에비슨(Oliver Avison)의 생애와 업적이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겸 의사였던 에비슨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었던 제중원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1893년 한국에 왔고, 고종 황제의 주치의도 맡게 되었다. 그 후 에비슨은 미국의 자선사업가 세브란스(Louis Severance)의 지원을 받아 제중원을 세브란스병원으로 크게 재설립했다.     ■  「 세브란스병원 창립 에비슨 박사 천민 집안 박서양을 의사로 키워 양반이 꺼리던 외과 수술서 명성 힘들고 험했던 의사의 과업 귀감 」    얼마 전 그 전시물에서 보고 놀라운 감동을 받은 내용이 있었는데, 에비슨이 아끼며 키웠던 제자 박서양의 이야기이다. 그의 아버지는 천민 중에도 가장 경멸당하는 백정이었는데,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던 중 우연한 인연으로 소개받은 에비슨 선생에게 치료받고 완쾌된 후 서양의학과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재능 있는 자기 아들에게 서양의학을 공부시켜보겠다는 꿈도 꾸었다. 그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에비슨은 1900년도에 제중원 의학교를 설립하면서 제1회 입학생으로 박서양을 받아주었다. 그 동기 중 7명만이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1908년에 서양식 의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는데, 그중에 천민 박서양이 당당히 끼었다.   박서양은 졸업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들을 길러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현지에서 학교를 세워서 한국계 동포들을 교육하고, 독립운동단체 대한국민회의 군의관으로 재직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만주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자 귀국하여 황해도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1940년 해방을 못 보고 50대 중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는 SBS 드라마 ‘제중원’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박서양이 의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일부 학생들이 그의 천민 신분을 문제 삼자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워라”라고 질책하며 독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통사회에서 천시받았던 사람이 외국에서 들어온 학문을 선구적으로 배워 자신을 아껴주지도 않던 사회에 너그러운 기여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 조선에 서양의학을 도입한 것이 왜 중요했는가에 대해선 차근차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양의학도 사실 그 당시에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항생제도 없었고 엑스레이 찍는 기술조차 정립되기 전이었다. 의학의 과학적 기반이 되는 생리학, 생화학, 유전학도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전통의학보다 현저히 우월한 점이 적어도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전염병을 통제하는 방역에 대한 지식이었다. 일단 감염이 된 환자는 잘 치료하지 못 했지만 공중보건 정책을 써서 병이 퍼지는 것을 상당히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19세기 서양의학이 고안해 낸 환자 격리, 접촉자 추적조사, 소독약 사용 등의 방법은 지금까지도 전염병 관리의 초석이다. 최근에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다시 상기하게 된 점들이다. 1895년에 조선 땅에 콜레라가 돌았을 때 에비슨은 방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큰 공로를 세웠고 우리 정부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얻은 영향력으로 그는 고종 황제에게 신분 차별을 완화하는 조치들을 권유했고, 그 덕분에 박서양 같은 천민들도 갓을 쓰고 양반들과 같이 당당히 예배를 보고 공공장소에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또 하나 서양의학에서 보여준 것은 수술이었다. 우리 전통 의술에는 사람의 몸에 칼을 대는 법이 없었다. 명성황후가 1871년에 낳은 첫 왕자는 항문이 없이 태어나서 며칠 만에 사망하였는데, 수술로 해결했으면 간단했을지 모른다. 한국 최초의 외과 의사라 칭해지는 박서양이 백정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다. 피를 튀기며 사람의 몸을 자르고 도려내고 꿰매는 것은 백정이 할 일이지, 어떻게 양반이 손을 대었겠는가. 유럽 의학의 역사를 봐도 초기에는 내과 의사에 비해 외과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훨씬 낮았다. 그러나 서양 의학이 약진하기 시작했던 것은 훌륭한 이론 때문이 아니라 더럽고 끔찍하고 천한 해부와 수술을 감행하면서 인체의 신비를 하나하나 배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박서양은 백정의 피 대신 과학의 피를 보라 했지만, 백정의 피와 과학의 피는 따지고 보면 긴밀히 섞여 있다.   대학입시에서 의대가 최고 인기인 것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한 장래가 보장된다는 생각에서이리라. 그러나 진정한 의사의 과업이 절대 편하고 고상하지 않다는 것은 직접 해 보지 않더라도 잠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2023.11.21 00:43

  • [중앙시평] 평생학습은 미래의 권리이자 의무

    양형진 고려대 명예교수 수학자이기도 했던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소설 『거울나라의 앨리스』에는 붉은 여왕의 경주가 나온다. 여왕은 숨 막힐 정도로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거기서는 그렇게 달려야만 같은 장소에 머무를 수 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면 적어도 두 배는 더 빠르게 달려야 한다. 이 장면에서 먼저 드는 생각은 그런 세계에서 산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였다. 가상의 세계에나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상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와 가까이 있는 실제 세계다. 흐르는 물에 사는 민물고기는 물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떠밀려 내려가게 된다. 민물고기가 바다로 떠내려가지 않는 것은 계속 헤엄치기 때문이다. 민물고기의 세상에선 헤엄치지 않으면 하류로 떠밀려 내려가고, 두 배 빠르게 헤엄쳐야 상류로 갈 수 있다.     ■  「 지식의 생명 점점 짧아지는 시대 대학 졸업장만으론 버틸 수 없어 동화 속 붉은 여왕처럼 달리려면 평생 즐겁게 공부할 수 있게 해야 」    붉은 여왕의 경주는 군비 경쟁이나 생명의 진화처럼 경쟁하면서 공존하는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는 가설로 사용돼왔다. 이런 분야는 책이나 뉴스를 통해서나 접할 수 있는 영역이어서, 대다수 시민의 일상적인 삶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상황이 점점 달라지면서 변화의 물결이 우리의 일상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정보·디지털·인공지능·의생명 분야의 눈부신 발전은 우리 사회의 지형을 급속히 바꿔놓았다. 그 변화의 속도와 활용도는 앞으로 더욱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다.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는 외관상으로는 인간과 점점 더 비슷해질 수도 있겠지만, 여러 능력에서 인간을 압도적으로 추월할 것이다. 자동차와 장거리 경주를 한다거나 인공지능과 암기력을 겨루는 것처럼 그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이 곳곳에서 펼쳐질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하던 일의 대부분은 기계와 로봇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여러 연구보고서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재 우리 사회의 직업군 중에서 20년 후에도 존속할 직업군은 기껏해야 반 정도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전 세대는 평생직장에서 평생직업을 가지고 일했다. 한 가지 능력만 있어도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충분했기에 대학을 나오면 더 이상 공부하지 않아도 됐다. 이런 상황은 지식기반 사회로 변하면서 확연히 달라진다. 미래 사회에서 지식은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지식 기반 산업뿐 아니라 사회 경제 체계의 중추적 요소로 작용하면서 국력의 기초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기여와 역할을 충실히 하게 하고 자아 성취를 이루게 하는 기본 요소가 될 것이다. 지식의 사회적 역할과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지식의 축적 속도가 빨라지면서, 지식의 총량이 증가하고 지식체계의 지형이 변하는 속도가 더욱 가파르게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초 지식이 아닌 한, 지식의 유효 수명은 점차 짧아지게 된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지만 지식의 유효 연한은 짧아진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등장하면서 사회 구조와 조직이 바뀐다. 지금의 직업이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나타나며, 그 등장과 소멸의 간격은 점점 좁아진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대학은 대부분 사라질 수도 있지만, 설령 존재하더라도 졸업하고 10년만 지나면 대학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는 새로 생긴 일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대응하여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려면 새로운 지식을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과거가 평생직업의 시대였다면, 미래는 평생학습·평생교육의 시대다. 붉은 여왕처럼 계속 뛰어야 하고, 점점 빨리 뛰어야 한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붉은 여왕처럼 밤낮으로 쉬지 않고 뛰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건 우리에게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속 가능한 달리기가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평생교육이 필요하다는 이 지점에서 약점을 드러낸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인의 업무 역량은 20세 초반에서 정점에 이르고 30세 초반까지는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높지만, 이후 OECD 평균보다 낮아지면서 가파르게 하락한다. 역량 개발을 위한 재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량 강화를 위한 학습권을 보장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비용지원 등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공부가 재미있어야 한다. 그래야 평생 공부할 수 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너무 많이 공부하라고 강요한다. 인생의 모든 것이 대입 전형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학교와 학원을 쉴 틈 없이 돌게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기보단 차라리 암기하는 게 고득점을 얻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가 어떻게 재미있겠는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탈진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가니 20대 초반 이후 한국인의 역량이 하락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미래엔 어느 대학을 다녔는지가 아니라, 평생 즐겁고 행복하게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 평생학습은 미래의 의무이고 권리다.   양형진 고려대 명예교수

    2023.11.17 00:28

  • [중앙시평] 게릴라전 닮아 가는 여권의 선거 전략

    이현상 논설실장 물과 물고기의 관계. 마오쩌둥(毛澤東)이 했다는 이 말은 게릴라전의 핵심을 찌른다. 물자와 병력이 부족한 비정규군은 인민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선 패배 후 급격한 태세 전환을 하는 정부·여당을 보면서 떠오른 단어가 게릴라전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은 무조건 옳다”며 참모와 각료들에게 ‘민심의 바다’로 뛰어들 것을 주문하고 있다. 부족한 의석수와 30%대에 머무르는 지지율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여권이 총선을 앞두고 쏟아내는 이런저런 정책들은 의표를 찌른다. 그러나 다른 말로 하면 느닷없고 뜬금없다. 시작은 김포의 서울 편입이었다. 주식 공매도 금지, 업소용 전기료 동결과 대용량 산업용 전기료 인상, 일회용품 규제 백지화, 대주주 주식양도세 기준 완화 등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연금 개혁이나 근로시간 개편 같은 골치 아픈 문제들은 국회나 경사노위로 슬쩍 넘겼다. 사이사이 간주곡처럼 탐욕스러운 기업과 은행 때리기로 박자를 맞췄다. 그야말로 게릴라전을 닮았다.     ■  「 민심 명목으로 쏟아지는 정책들 변신보다는 급조·후퇴로 비쳐져 임기응변이 최종 승리 보장 못해 결국 비전·리더십으로 승부 내야 」    태세 전환의 속도와 내용이 어지럽다. 정부가 수행하던 ‘정규전’과는 180도 다르다. 환경이나 균형발전 등 우리 사회가 합의했던 미래 그림과도 모순된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가령, 윤석열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는 국토 균형발전이다. 지난 7월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가 출범했고, 9월에는 ‘지방시대 선포식’까지 열었다. 여당에서 김포 편입론이 나오고 사흘 뒤 윤 대통령은 대전에서 열린 ‘제1회 지방자치 및 균형발전의 날 행사’에 참석해 지역 교육과 의료를 강조했다. 그러나 김포의 그림자에 묻혀 대통령의 메시지는 존재감이 없어졌다.   불과 얼마 전 “공매도가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소리 높였던 금융위원장은 당과 용산의 채근에 입장을 바꿨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쯤이야 별거 아니라고 치자. 한국 경제의 ‘군사 교리’가 흔들리는 것이 진짜 문제다. 한국은 곡절이 있긴 했지만 시장경제라는 전투 지침에 따라 분투해 세계 10위권 경제를 일구었다. 선거철마다 이 지침이 요동치는 게 이제 당연해졌다. 대용량 산업용 전기료 외 인상 유보, 대주주 주식양도세 완화 등도 정공법을 벗어난 변칙 전술이다. 그 와중에 보인 사소한 작전 미스는 차라리 애교다. 카카오 갑질을 호소했던 택시운전기사가 대선 때 국민의힘 당직자였고, 은행 갑질에 눈물짓던 자영업자의 실체는 매출 100억원대 기업인이었다.   급조된 정책의 효과도 의심스럽다. 공매도 금지 다음 날 폭등했던 주가는 일일천하로 끝났고, 묘수로 여겼던 김포 편입은 다른 지역의 반발로 역효과를 걱정하게 생겼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대를 벗어날 기미가 없고, 여당 지지율도 제자리다. 그래도 뭔가 변하려는 노력, 민심 가까이 가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결과는 신통찮지만 노력은 가상하다고나 할까.   도덕 교과서처럼 총선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표를 얻어야 권력을 쟁취하는 정치제도에서 민심을 얻기 위한 정책은 불가피하다. 정책 전환이 필요하면 해야 하지만, 그에 이르기까지 고민의 과정을 보여주는 서사와 스토리텔링 또한 필요하다. 그런 전략과 노력이 없다면 유연한 변신이 아니라 무책임한 후퇴로 여겨질 뿐이다. 즉흥적이고 파편적인 정책은 어렵게 쌓아온 보수의 정체성마저 흔들 수 있다.   게릴라전은 분명 유용한 전술이지만 임기응변의 몇 개 전투가 전체 국면을 바꿀 수는 없다. 역사상 게릴라전이 효과를 거둔 전쟁이 몇몇 있지만, 최종 승리는 언제나 정규군의 몫이었다. 파리의 레지스탕스, 2차대전 때 이탈리아의 파르티잔은 훌륭하게 싸웠지만 연합군이 없었다면 의미 없는 희생에 그쳤을 것이다. 베트콩은 북베트남군이 밀고 내려와 승자로 남았고, 만주 유격대는 소련군의 힘으로 북한 장악에 성공했다. 앞으로 5개월 남은 총선이 게릴라전을 연상케 하는 무(無)맥락 정책 몇 개로 좌우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현재 여당의 모습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윤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 문법에 익숙지 않고, 인요한 혁신위원장도 정치 경험이 사실상 없다. 혁신의 목표가 뭔지도 분명치 않은 상황이다. 대통령 스스로 정치 초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문가나 경험자의 조언을 구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더 꼬일 가능성마저 있다. 지금 여권에서 전체 상황을 조망하며 그림을 그리는 전략가가 있는지 의문이다. 선거전이 파편적 게릴라전이 돼서는 승산이 없다.   본질은 정치 리더십의 혁신이다. 얄팍한 정책으로 본질을 가린다면 역풍이 불 가능성이 크다. 헨리 키신저는 베트남전쟁 중 “정규군은 이기지 못하면 지는 거고, 게릴라는 안 지면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저성장과 양극화 위기에 빠진 한국을 ‘안 지면 그만’이라는 자세의 리더십이 이끌어 간다면 서글프지 않은가. 승부는 미래 비전과 이에 어울리는 리더십을 어떻게 보여주느냐, 즉 ‘정규전’에서 결정된다. 여든, 야든 마찬가지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11.16 00:53

  • [중앙시평] 바이든과 트럼프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전 세계가 바이든 대통령의 노쇠함과 무능을 비웃고 있다. 전 세계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에너지와 능력을 두려워하고 있다. 바이든의 얼굴에는 중동 인질극 사태로 재선에 실패한 카터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트럼프의 얼굴에는 복수에 눈이 먼 조커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걱정이다. 하지만 더 두려운 사실은 누가 되든 한국의 어느 정치세력도 이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미국 대선 결과보다 사실 이게 더 두렵다.   아니, 바이든 2기는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아닌가? 바이든 대통령,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그리고 블링컨 국무장관은 우리에게는 오랜 시간 익숙한 워싱턴 내부 인사이니 말이다. 천만에. 친중파에서 중국 견제론자로 180도 바뀐 그들의 변화에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그들은 2016년 대선 패배 후 치밀한 연구 끝에 내놓은 소위 ‘신냉전 자유주의’라는 신노선에 따라 움직이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기후 등에서는 지구적 협력 체제를 추구하지만 자유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중국, 러시아, 북한 등과는 단호한 가치 투쟁을 각오한 이들이다. 만약 당내 경선에 이어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2기에 펼칠 ‘신냉전’과 기후협력, 보호주의와 동맹 시스템, 중동과 북한에 대한 강압적 외교와 핵 합의 사이에서의 좌충우돌은 그들 자신도 당황할 정도로 더 혼란스러울 게 뻔하다.     ■  「 누가 되든 불확실성 가득한 2기 준비되지 않은 한국의 정치세력 이명박과 문재인 시대 반복될라 새로운 가치와 노선을 고민해야 」    아니, 트럼프 2기도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아닌가? 1기 때 우리는 그가 중동과 북한에서 펼친 위험천만한 전쟁 카드와 ‘광폭 외교’, 그리고 동맹국 바가지 씌우기를 이미 경험했으니 말이다. 천만에. 2기 트럼프 참모는 1기의 매슈 포틴저 국가안보 부보좌관보다 더 강경한 매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최근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부차관보와 같은 군사주의적 중국 봉쇄전략가가 공화당 내부에서 인기가 높다. 그리고 트럼프의 국내 정치 불장난은 이란 공습이나 북한에 대한 북풍 등으로 불길이 이어 붙을 수 있다.   아마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 정가에서 인기가 높기에 어떤 미래가 오든 자신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윤석열 행정부의 외교안보 노선이 과거 이명박 대통령 시절과 무엇이 다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도 기업인 출신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유주의 이념을 거창하기 내걸기에는 너무 ‘세속적’ 실용주의자였다. 이 실용의 감각만 빠진 현재의 노선은 탈냉전 시절의 낡은 반복이다. 그저 미국과 일본의 구상에 적극 동참하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길 기다리면 좋은 세상이 온다? 참 국정 운영하기 쉽다.   물론 야당들도 참 쉽게 견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난 가끔 이들이 아직 탈냉전 시대라는 ‘아름다운 시절’ 추억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다. 그 당시에는 미·중 사이에서의 전략적 모호성과 북한에 대한 접촉 외교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신냉전 자유주의’와 복합 열전, 그리고 임박한 기후파국이라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저 문재인 행정부 시절의 노선을 단순 반복하며 정권을 비판하는 그 편리함이 놀랍다.   물론 먹구름이 가득 찬 바이든과 트럼프 2기에도 희망은 존재한다. 즉 더 이상 재선 걱정할 필요가 없는 바이든은 정치 자본을 희생해가며 이란과 북한을 상대로 다시 핵 합의를 추구할 가능성이 있다. 혹은 2028년이나 2032년  민주당이 다시 대선에서 승리하고 의회 다수당까지 되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국가 해법’ 및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까지 근접할 수 있다. 심지어 트럼프 2기조차 악몽만 있는 건 아니다. 퇴임 후 조지아주 등에서의 사법처리를 걱정하는 그는 다시 노벨 평화상 수상을 노릴 가능성이 있다. 이는 곧 광기의 벼랑 끝 전술 후 중동과 한반도에서 극적인 타협의 여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과연 우리는 이 작은 틈새를 너무 늦지 않은 타이밍에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을까? 과거에 대해 성찰하지 않으며, 현재에 대해 지구적 시야를 가지지 못하면 기회의 창을 지혜롭게 활용할 수 없는 법이다. 이명박 시절 비핵 개방 3000과 문재인 시절 하노이 회담의 실패를 그들이 철저히 복기한다면 나도 생각을 바꾸겠다.   낡은 사고에 갇힌 이들이 주도하는 정치 지형에 대한 도전자들이 여기저기 생기고 있다. 이준석 신당 구상과 금태섭 등의 제 3지대, 민주당 내 비명계, 그리고 정의당과 녹색당을 혁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단지 현 양당의 주류를 대체할 정치세력화 계산만이 아니라 새로운 혼돈의 시대에 맞는 자신들의 가치와 신노선은 무엇인가? 지금은 물론 국내 정치 이슈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총선 국면이 지나면 그간 고민한 자신들의 외교안보의 신노선을 본격적으로 밝히며 대논쟁의 장을 만들기를 요청한다. 『리더의 용기』 저자인 브레네 브라운 교수가 지적하듯이 오늘날 용기 있는 자란 곧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자이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2023.11.14 00:59

  • [중앙시평] R&D 예산 삭감을 둘러싼 논란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올해 정부 예산안의 주요쟁점 중 하나는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다. IMF 외환위기 때에도 축소하지 않았던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을 16.6%나 삭감하였고, 이에 대해 과학기술계의 반발이 심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계의 반발은 특히 젊은 연구자와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정부와 여당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도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젊은 과학기술자의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날 만도 하다. 국가연구개발 중장기투자전략(2023~27년)에 따라 전년도보다 약간 증가한 상태로 진행되던 내년도 과학기술 예산안이 지난 6월 말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전면 재검토를 지시하면서 갑자기 대폭 삭감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과학기술계 카르텔도 거론되었고, 이유조차 분명히 설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비가 무차별적으로 삭감되었다. 이러한 예산 삭감으로 젊은 연구자와 대학원생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되자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이 상황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보거나 일조(一助)하는 듯한 과학계 출신 공직자나 과학기술 단체, 그리고 과학계 리더들에게 분노를 표시하기까지 한다. 그렇지 않아도 의대 쏠림현상으로 인재들의 과학기술계 영입에 문제가 있는데, 이번 사태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까 우려된다.     ■  「 갑작스러운 정부 R&D 예산 삭감 피해 예상 젊은 과학자들은 분노 비효율 분석 후 예산 조정했어야 도전적 연구 지원 시스템 필요해 」    정부 여당의 명분은 지난 수년간 연구개발예산이 급격히 증가하여 비효율이 발생하였으므로, 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코로나19로 인한 예산 팽창기에 연구개발예산도 급격히 증가했고, 그중 효율성에 문제가 있는 사업도 일부 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응은 비효율 사업을 가려내어 그 부분을 조정하는 것이 원칙일 텐데, 이번에는 일괄적으로 예산부터 삭감하였다. 그것도 국회예산정책처가 지적한 대로 법규에 정해진 절차를 지키지 않고 졸속으로 처리하였다. 결국 국제 과학계에서도 우려를 표시하는 등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하자 정부와 여당은 “신진연구자 지원 등에 지장이 없도록 필요하면 R&D 예산을 증액하겠다”고 한발 물러섰고, 대통령도 대덕에서 젊은 연구자와 모임을 갖고 “도전적 연구에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이러한 사태 진행은 윤석열 정부의 전형적인 문제점을 보여준다. 정책의 취지나 목표는 이해할 만한데, 집행 과정이 거칠고 이해 당사자들과의 소통이 부족하여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일 과학기술계에 카르텔이 존재한다면 직접 피해를 보는 일반 과학자들이 카르텔 척결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또한 예산의 효율화는 당연한 명제이고 합리성을 존중하는 과학자들이 반대할 명분이 없다. 그런데 카르텔의 존재나 비효율성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예산을 삭감하니 반발하는 것이다. 사실 예산 효율화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문제 사업을 골라내어 법과 규정에 맞게 대통령의 뜻을 관철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참모와 공무원들은 그 시기를 놓쳤고, 때늦은 지시가 있었을 때 문제점을 직언하기보다 무리하게 집행에 나섰다. 결국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졌고, 대통령이 직접 수습에 나서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까지 몰렸다. 그러나 한번 무너진 신뢰는 다시 회복하기 어렵기에 이 실수는 뼈아프다.   사실 R&D 예산의 효율성 제고는 과학기술계의 오래된 숙제이다. 우리나라는 정부 R&D 투자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해 왔지만, 예산부처를 중심으로 그 효율성에 의구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기에 정부가 바뀔 때마다 이슈가 제기되었고, 특히 정부출연연구소 관련 제도가 자주 바뀌었다. 불만의 요지는 왜 우리나라의 국가 연구개발사업에서는 미국이나 이스라엘처럼 눈에 띄는 세계 최초의 선도 기술이 나오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근본 원인은 우리나라 정부 연구과제 선정과 평가 기준이 과거 ‘따라가기’ 시대의 관성에 묶여 선진국형으로 탈바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부 연구개발 과제의 성공률은 95%를 넘는다. 이러한 높은 성공률은 거꾸로 보면 될만한 과제만 수행한다는 말이다. 실패하면 엄청난 불이익이 있기 때문에, 실패 위험도 크지만 성공하면 세계 최초의 위대한 성과가 될 수 있는 도전적 과제는 제안하기도 어렵다. 반면 이스라엘의 경우는 성공률이 30%를 넘으면 과제 설계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고 한다.   앞으로 연구개발을 주관하는 정부 부처가 중점적으로 노력해야 할 부분이 여기에 있다. 즉 연구과제 선정과 평가시스템을 미국이나 이스라엘처럼 선도형으로 바꾸어 도전적 과제를 지원하는 것이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도 해외 순방 때마다 과학자를 만나는 등 과학기술에 관심을 보이고 도전적 연구를 강조한다. 공무원들은 제대로 된 제도를 마련하여 우리나라가 진정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2023.11.10 00:55

  • [중앙시평] 대추알, 주유소 그리고 도시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우리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다녔다. 나는 벤츠를 탄다. 우리 아들도 아마 벤츠를 탈 것이다. 그런데 우리 손자들은 다시 낙타를 타야 할 수도 있다.” 이 문장이 산유국의 위기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매장량이 고갈되어서든 기후변화 환경정책 때문이든 석유 시대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이 전망에는 이견이 없다.   이런 위기감이 중동에 신기루 도시들을 만든다. 이들도 대안 전략으로 관광 도시 조성을 꺼내 든다. 그러나 낙타 체험 여행이 미래 관광상품이 될 수 없으니 사막에 물을 뿌려 골프장 만들고 유럽 프랜차이즈 미술관 세운다. 냉방 쾌적한 쇼핑센터와 분수 뿜는 호텔 포진한 대추야자 가로수 도시다. 방향이 어찌 되었든 이들은 백 년 뒤를 가늠하고 도시를 만드는 중이다.     ■  「 신기루 같은 아랍의 도시 건설 석유시대 종말 대비 장기 계획 온갖 변수 작동하는 곳이 도시 도시가 득표 도구인 한국 정치 」    20세기를 받쳐온 에너지가 석유였으니 그 마무리 여파도 전 세계에 미칠 것이다. 산유국 아니라고 한국이 예외일 수 없다. 일단 조선산업의 수주 목록에 결국 유조선이 사라지겠고, 정유공장도 철거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도시 곳곳에 박힌 것들도 변화해야 할 터인데, 그건 주유소다.   승용차가 희귀하던 시절에는 주유소도 특별했다. 대통령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대에 청와대도 아닌 주제에 무엄하게 청기와를 얹어 유명해진 주유소도 있었다. 당시 버스정류장 이름이 될 정도였으니, 청기와주유소는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주유소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자동차가 일상재가 되면서 주유소 간 거리 제한도 풀렸다. 주유소가 도시에 숱하게 뿌려지면서 소매 유가를 놓고 주유소가 서로 경쟁하는 체제에 돌입했다. 그래서 휴지와 물통이 주유 고객 사은품으로 등장했다. 주유소의 입지가 더 중요해졌는데, 그게 좀 흥미롭다. 일반적인 소매점이라면 가장 선호하는 곳은 블록의 모서리다. 백화점은 투자 규모가 크니 입지조건은 무조건 교차로 모서리다. 그래서 백화점 건물은 둥근 모서리와 그곳의 전망 엘리베이터가 일반적 모습이다. 그런데 주유소는 입장이 좀 다르다. 승용차의 주행 원칙은 직진이다. 차선변경은 접촉사고 최고 빈발 원인이다. 그래서 초보운전자에게 최고난이도 주행이 바로 차선변경이다. 그런데 교차로 주유소에 들어서려면 우회전하려는 차량들과 차선변경으로 위치경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주유소 위치로는 교차로 모서리의 장점이 없다. 지도를 펴고 주유소 위치들을 짚으면 보인다.   마지막 주유소. 가끔 도로에서 만나는 최후통첩이다. 주유하고 가지 않으면 낭패를 보리라는 위협이기도 하다. 우리의 운전자들은 이 상황을 현장 전문용어로 ‘앵꼬’라고 한다. 그래서 다시 지도를 펴놓고 짚어보면 도시고속도로 진입 마지막 위치에 자리 잡은 주유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청기와주유소도 김포공항 가는 길에서 당시 이름으로 제2 한강교를 건너기 직전의 마지막 주유소였다. 비행기 탑승이 특권이던 시절에 다리 너머는 허허벌판이라 청기와주유소는 위치와 형식이 걸맞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기민한 주유소가 다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분명 자동차들이기는 한데 이미 밤새 충전하고 나왔다는 차들이 무심히 주유소를 지나친다. 주유소의 미래에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실제로 주유소는 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요인이 복잡하고 흥미롭다.   치킨점과 햄버거집에 키오스크라는 것이 등장했다. 최저임금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손님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한 풍경이다. 주문받던 알바생들의 최저임금을 분식점에서 버티기 어려웠는데 주유소인들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주유소 역시 손님에게 일을 시키기 시작했고 그걸 셀프주유소라 호칭한다. 그러나 주유소의 상황은 소매점과 좀 달랐다.   이전의 주유소에서는 운전자가 차창을 내리고 ‘만땅!’이라고 외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손님이 차 문 열고 내려서 카드 넣고 버튼 누르고 주유구 열고 기다리다가 다시 주유기 걸고 영수증 챙겨야 한다. 자본주의의 민첩한 메커니즘이 차에서 내린 이 운전자들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이들을 커피·빵으로 유혹하고 잊었던 물휴지·담배 사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주유소의 업종 이종교배에 따른 진화가 시작된 것이다.   대추 한 알에도 태풍·천둥·번개 몇 개가 들어있다더라. 대추야자 뿌리도 모래 속에서 치열하다. 주유소 하나에도 세계사 전개, 국제정세 변화, 소비자 행태가 다 간섭한다. 당연히 편의점·커피점·분식점도 다 그렇게 민감하고 탄력적이다. 거기 모두 식구들의 생존이 매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여 작동하는 구조체를 도시라 부른다. 그래서 도시는 거대한 유기체다.   그런 도시를 이리 자르고 저리 붙이겠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불거지는 걸 보니 또 선거철이 된 모양이다. 도시를 투표지에 찍을 붓두껍 인장 개수로 계량하는 순간, 시민들은 갈등으로 부대낀다. 도시에 담긴 인생들을 기껏해야 대추 알처럼 빨간색, 파란색으로 나눠 세겠다는 정치에 무슨 미래가 있겠나.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2023.11.09 00:48

  • [중앙시평] 미국의 리쇼어링, 성공할 수 있을까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석좌교수 미국 정부가 리쇼어링(reshoring), 즉 해외로 나간 제조업을 국내로 불러들이는 정책을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탈(脫)제조업을 왜 지금은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을까. 일차적 이유는 글로벌 공급망의 균열이 빈번해짐에 따라 경제의 회복탄력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국가 전략 차원에서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미·중 패권 경쟁의 승패가 첨단 제조업에서 결판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양자역학, 반도체는 경제뿐 아니라 안보와도 직결된다. 생명공학과 2차전지도 미래의 핵심 기술이다. 미국은 이러한 첨단기술 경쟁에서 중국을 제압함으로써 패권국 지위를 확실히 굳히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  「 미국의 첨단 제조업 재건 정책은 미국형 자본주의에 적합지 않아 신산업 수출 역량 세계 4위 한국 미국 리쇼어링 이후도 내다봐야 」    중산층 강화를 위해서도 첨단 제조업이 필요하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더 나은 발전(Build Back Better)’ 전략을 통해 미국의 중산층을 재건하려 한다. 지구화된 세계에서 미국은 금융과 첨단기술 및 플랫폼 산업으로 성장을 구가해 이 산업의 임금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전통 제조업에서는 다른 국가와의 경쟁에 밀려 근로자의 임금이 오르지 못했다. 이는 경제 양극화를 초래했고 나아가 정치 양극화의 뿌리가 되었다. 미국의 지니계수는 0.43으로 G7 국가 중 소득불평등도가 가장 높다. 상위 1%에 속하는 미국인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로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수준이다. 따라서 양극단의 중간 정도 소득을 제공하는 첨단 제조업의 리쇼어링은 미국의 심각한 불평등을 치료하는 해결책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미국의 리쇼어링이 미·중 패권 경쟁 이후까지 지속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국이 첨단 제조업 생산에서도 강자가 되려면 미국형 자본주의를 한국이나 독일·일본형으로 전환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 논의에 따르면 미국형, 북구형, 유럽대륙형 등으로 분류되는 선진국 자본주의는 체제 내적인 일관성을 갖는다. 노동, 교육, 금융, 문화와 가치관이 일관적으로 정렬되어 있을 뿐 아니라 효율성도 그에 비례한다. 미국은 ‘반도체 및 과학법’에 따라 국내에서의 반도체 연구와 생산을 위해 향후 5년간 약 70조 원의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써는 어림도 없다. 단순히 법률을 제정하고 재정을 투입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 경제체제 자체를 전환하는 거대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력 문제를 보자. 미국의 유능한 젊은 세대가 대량생산 공장에서 일하기를 원할까. 창의성을 강조하는 미국의 교육제도가 제조업 강국 정책과 부합할까. 소득 3만 달러 이상, 인구 1000만 명 이상인 국가 중에서 국내총생산 대비 제조업의 비중이 18%를 넘는 국가는 2021년 현재 한국(25%), 일본(20%), 독일(19%) 뿐이다. 미국은 10%에 그친다. 그런데 일본과 독일의 평균 근속연수는 미국의 두 배 정도다. 한국도 근속연수가 매우 짧은 비정규직 중소기업 근로자를 제외하면 미국보다 높다. 첨단 제조업은 특정 직무에 있어 고도의 숙련도를 요구하며 숙련도는 근속연수에 비례한다. 인력 없는 완전자동 공장은 아직 요원하며 고숙련 근로자의 암묵지(暗默知)는 여전히 반도체 수율의 핵심 결정요인이다. 이처럼 고숙련 장기근속 근로자가 충분하지 않다면 미국의 첨단 제조업 발전은 난망하다.   범용(汎用)과 창의성 교육이 핵심인 미국 교육은 제조업 공장에서의 노동과 맞지 않는다. 학교에서 특정 직무를 배우지 않았고 창의성이 강한 청소년들은 반복적인 생산공정에서 일하기보다 아직 세상에 없는 신기술을 개발하고 싶어 할 것이다. 직장 이동이 빈번한 미국은 어느 직종에도 쓰일 수 있는 범용 교육에 집중한다. 반면 독일은 초등학교 이후 직업학교와 실업학교에서 특정 직무에 대한 직업교육을 받는다. 일본은 졸업 후 작업장에서의 교육훈련(OJT)을 통해 제조업 직무훈련을 효과적으로 받는다. 근속연수가 짧은 상황에서 미국 기업이 OJT를 강화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경우는 문제 해결 역량이 높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이공계 인력이 강점이다. 미국 대학의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졸업생 비중은 20% 이하지만 한국은 30%를 상회한다.   대한민국은 첨단 제조업 강국의 지위를 지켜야 한다. 대격변의 시대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첨단 제조업 역량에 달려 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의 경제안보지수에 따르면 한국은 12개 신산업 분야에서 세계 4위의 수출 역량을 가진 나라다. 미국은 1950년과 같은 애치슨 라인을 더는 긋기 어려우며, 중국도 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문제는 우리 내부다. 첨단 제조업 인력 부족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인구 감소와 의대 열풍, 젊은 세대의 산업 현장 기피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리쇼어링이 끝나고 첨단 제조업이 재편될 미래에도 한국의 위상은 여전히 높을까. 대학은 어떻게 변해야 하나. 우리 정부는 어떤 정책을 갖고 있나.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석좌교수

    2023.11.08 01:04

  • [중앙시평] 의대 열풍을 의학 혁명의 동력으로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장관 ‘혁신’은 21세기 유행어다. 혁신의 아이콘은 과학기술이다. 근대적 의미의 과학연구가 제도화한 것은 베를린 훔볼트대학(1810년 설립)에서였고, 이 모델이 미국 등으로 전파되며 연구중심대학을 낳았다. 그에 앞서 13세기 라틴 유럽에서의 ‘대학(universitas)’의 출현은 그 자체가 혁신이었다.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1088년 설립)이 최초로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황제의 공인(1158년)을 받은 이후 옥스퍼드 대학, 파리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 등이 설립되면서 교과과정은 3학(trivium)과 4학(quadrivium)의 7학 교양학부와 3개 전공으로 짜여졌다. 3학은 문법·수사학·논리학, 4학은 산술·기하·음악·천문학, 3개 전공은 신학·법학·의학이었다. 이처럼 의학은 대학 설립 당시에도 신을 연구하는 학문과 맞먹는 지위였다.     ■  「 지역의료와 필수의료 붕괴 위기 의대 증원만으로는 해결 역부족 바이오시장 바꿀 첨단기술 등장 융합혁신 인력·인프라 확보해야 」    그 의학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국내 사정은 지역의료 붕괴와 필수의료 불균형이 리스크를 넘어 위기국면이다. 정부가 의대 증원계획을 발표하자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2000년 의약분업으로 감축된 이후, 의대 입학정원은 2006년부터 전국 40개 의대 3058명으로 동결상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의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3.7명이고 한국은 2.2명이다. 그러나 서울은 3.47명이고, 전국 4만1192개 병원과 의원 중 2만2545개가 수도권에 몰려있다.   2035년경에는 의사가 1만 명 정도 부족하리라 한다. 변수가 많아 얼마나 맞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이대로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의대 증원만으로 고질적 불균형이 해소되기에는 상황이 너무 복잡하다. 그렇다면 현장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의료계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과의 소통과 공감으로 실효적 방안을 도출하는 일이 남아있다. 높은 의료 역량에 걸맞은 사회적 협상 능력이 열쇠다.   그보다 본질적으로 연구개발의 최전선에서는 의학혁명에 버금가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기존 의학과 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 간의 융합 혁신이 그것이다. 선진국은 이미 AI·빅데이터·딥러닝 기술과의 융합으로 방대한 데이터를 신속 처리해 성공확률이 높은 신약 후보물질을 골라내고 원격의료 서비스도 상용화했다. 디지털 기술과의 융합으로 암·치매·노화 극복을 위한 맞춤형 유전자, 세포치료, 뇌과학, 재생의료, 첨단의료기기, 디지털치료제, 원격의료 등에서 신천지를 열고 있다. 융합 혁신은 가장 비용 효과적인 혁신이다.   미국 칼 일리노이대학교 의대(CICM)는 2018년 공학 기반 의대를 설립했다. 학생들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높여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표는 AI와 머신러닝 등 공학과의 융합, 대학-기업 협업에 의한 임상의료 혁신이다. 그보다 먼저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는 1969년 공대 내에 의대를 만들어 의료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모바일인터넷, 클라우드, 첨단소재, GPT, 로보틱스, 3D프린팅, 실시간 컴퓨팅 시뮬레이션 등은 첨단바이오 시장을 혁신할 ‘파괴적 기술’로 꼽힌다.   2023년 세계 의료시장 규모는 1조5570억 달러, 2027년에는 1조9170억 달러로 예상된다. 한국의 점유율은 1% 남짓이다. 세계 바이오헬스 시장 규모는 2600조원으로 반도체 시장의 세 배를 넘어섰다. 경쟁에 뒤질세라 우리 정부도 지난 6월 ‘제4차 생명공학육성 기본계획’에서 바이오산업 규모를 2020년 43조원에서 2030년까지 100조원 규모로 키우고, 미국 대비 기술 수준을 2020년 78%에서 2030년 85%로 올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디지털 치료기기 15개 제품화, 알츠하이머 등 7개 난치질환 치료를 위한 전자약 핵심기술, AI 기반 신약 10개 후보물질 발굴, 차세대 신약 개발 플랫폼 등등 혁신 메뉴가 총망라돼 있다.   이 야심찬 계획을 현실화할 수 있는 동력은 융합형 인력이다. 그 양성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 초유의 의대 블랙홀 현상으로 초등 의대준비반이 개설되고, 유수 자연대와 공대 학생들이 해마다 수백 명씩 이탈하는 상황에서 임상의사 양성 위주 인프라로는 격변하는 미래에 대비할 수 없다. ‘혁신형 미래의료연구센터’ 지정 등 의과학 공동연구를 지원하는 미봉책으로 대비하기에는 융합혁신의 물결이 너무 거세고 빠르다.   바이오 강국으로의 청사진과 추진과제는 일단 정리된 듯하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다. 의료계 의견대로 교육과정 개편에 의한 기초의학과 연구 강화, 연구중심의대 사업 등 혁신안을 추진하되, 본격적 융합혁신 인프라 도입 등 전방위적 생태계 혁신이 필요하다. 이는 임상의료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4차 산업혁명의 격동기, 미래를 향한 개방과 혁신, 경쟁과 협력은 불가피하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매번 하던 대로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insanity)이다. 혁신이 아니다.”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온다. 지금이야말로 의대 열풍을 의학 혁명의 추동력으로 삼는 기회로 만들어야 할 때다.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장관

    2023.11.03 00:55

  • [중앙시평] 대한민국은 지금도 국가건설 중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대한민국 정부수립 7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웬 국가건설이냐고 묻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가건설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해방은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왔다.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이 출범할 때 당시 국민이나 정치지도자들은 국가설계의 준비가 잘 되어있지 않았다. 미군정하 정치적 혼돈과 무질서 속에 제헌국회 선거가 치러졌고, 국가체제와 조직, 헌법이 만들어졌다. 서구의, 특히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모방하다시피 해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토의 기간을 거쳐 제헌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런 헌법이 오랜 유교 이념과 관습에 젖어온 우리 국민의 생활을 제대로 규율하거나, 국가운영의 전범이 되기 어려웠다. 제헌헌법은 40년도 안 되어 무려 아홉 번의 개헌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출범은 그리 튼튼한 기초 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없다. 지향하는 가치와 정치경제체제도 혼돈스러웠다.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이 지지하는 이념에 관한 질문에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 사회주의 70%로 조사되었다. 출범 후에도 좌우대립이 심각했고, 참담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후 한미동맹과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대한민국은 자유, 반공, 시장경제체제라는 국가정체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  「 명시적 제도가 효율적 작동하도록 새로운 국가운영 체계로 개편 필요 국가건설은 사회적 자산 축적과정 ‘성공이 부른 실패’ 극복해 나가야 」    지난 75년 대한민국은 경이적 발전을 이뤄냈다. 성공의 역사를 써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헌법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신, 헌법에 규정된 국가권력 구조를 충실히 실행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좋게 보자면 실용적으로 운영해 왔고, 나쁘게 보자면 종종 편법적·탈법적 운영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관행과 관습, 전통적 사고와는 크게 다른 법체계와 삼권분립에 의한 국가지배구조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상황에 따른 편법적·실용적 접근을 자주 해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편법적·탈법적 국가운영은 용인되지 않는다. 이미 정치, 행정, 기업, 언론환경뿐 아니라 우리 국민의 지식, 교육, 의식 수준이 크게 달라졌다. 정부수립 당시 중등교육을 받은 국민은 1%에 지나지 않았고 국민 4분의 3 이상이 전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제 우리 국민은, 특히 젊은 세대는, 세계 최고수준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야말로 국가건설을 제대로 해나갈 입지를 가진 것이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는 명목상 보상유인 체계와 실질적 보상유인 체계가 달랐다. 그사이에는 부패와 유착과 특권이 있었고, ‘윤활유’라고 표현했던 금일봉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둘이 거의 같아졌다. 세상이 많이 투명해진 것이다. 공직자에 대한 보상유인 체계도 그렇다. 권력구조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국회권력과 지금의 국회권력은 헌법상 크게 바뀐 것이 없으나 실질적으로 행사되는 권력은 크게 달라졌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통령의 당 지배, 정치자금 제공, 권력기관을 동원한 의원들의 회유·협박이 없어지면서 헌법에 규정된 국회의 권력이 오롯이 살아난 것이다. 국회 다수당이 이제 행정부를 무력화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현재 법에 규정된 국가권력 구조, 국가기관과 정부조직의 구성과 역할, 우리 사회의 보상유인 체계가 지금의 환경에서 최적·최선인가? 그것이 우리가 여기서 더 발전해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안착하게 하고 한반도 미래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는 제도인가? 국가 최고엘리트들을 행정과 정치에 끌어들일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이제 법에 규정된 국가지배 구조, 정부조직의 구성과 역할, 명시적 보상유인 체계가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 한국의 모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국가운영체계로의 개편이 필요하다.   대통령 단임제로 주요기관장들 거의 모두 짧은 임기로 끝나 국가의 정책시계가 극히 짧은 나라, 낡은 임금체계와 인사제도로 조기 명퇴가 일상화되고 인재를 키우지 못하는 나라, 필요한 구조조정을 제대로 못 하고 미봉책만 남발해 저생산성이 고착화되는 경제, 사교육비와 주거비 부담이 끝없이 늘어 아이 낳기가 두렵고 출산율이 세계 최저인 나라를 더 이상 지속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국가운영 체계와 보상유인 제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국가건설이란 사회적 신뢰자산과 새로운 사회문화를 창조해 가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동안 초단기간에 이뤄낸 경제적 성공이 가져온 사회문화적 실패들을 돌아봐야 한다. 고질적 분열과 대립, 소모적 파쟁과 갈등에서 합리적 경쟁과 견제, 통합과 협치의 전통을 세워나가 보자. 지금과 같은 분열적 정치로는 어느 하나 제대로 변화와 진전을 이뤄낼 수 없다. 그동안 우리 개인, 기업들은 크게 번영했다. 그러나 국가, 사회는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제 국가사회의 성공을 이루는 새로운 사회문화, 제도적 토대를 만들어 보자.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2023.10.27 00:51

  • [중앙시평] 탈진실 시대를 사는 법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16년 옥스퍼드대학이 매 연말 발표하는 그해의 단어는 ‘탈진실’ 이었다. 탈진실이란, 객관적인 사실보다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에 따른 주장이나 정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론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현상을 말한다. 그해 영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하였고,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일들의 배경에 허위 조작 정보를 활용한 공작이 있었음을 안 것은 한참을 지나서였다.   전 지구적으로 분열과 갈등은 더 깊어만 가고 있다. 일례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나고 미국의 대학 캠퍼스는 서로 양측을 지지하는 편으로 갈라져 상대를 공격하고 반대편 지지성명이 나온 것을 이유로 기부약정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  「 주장과 확신 넘치는 탈진실 시대 각자 정체성 정치로 공통점 상실 불편한 보도에는 가짜뉴스 딱지 무분별 언론 공격은 공론장 위협 」    이러한 흐름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각자 의미를 두는 정체성에 따라 시민들이 쪼개지면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갖는다. 서로 다른 젠더이지만 주변 사람의 시선이나 인정 한마디에 힘을 얻거나 상처받는 똑같은 인간이고 서로 다른 정당을 지지하지만 모두 다음 세대의 번영을 염원하는 국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통점은 희미해져만간다.   누구든 서로 비슷한 성향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가 편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조차 그 안에서 맴돌게 되면 내게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고 내 세계관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된다.   소셜미디어로 촘촘히 연결된 세상에서는 개인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즉각 정서적 공감을 주는 세세한 묘사를 담은 이야기가 전파력 있고 주목받기 마련이다. 알고리즘은 내가 끌릴 법한 이야기들을 귀신같이 내 앞에 대령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탈진실 현상과 각자가 의미를 두는 하나의 정체성 속에 몰입하는 현상은 서로에게 동력을 주면서 강력해진다.   가짜뉴스라 부르는 현상은 이러한 환경을 먹고 자란다. 허위정보를 만드는 비윤리적인 사람이나 이를 믿거나 속는 어리숙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실 가짜뉴스라는 용어부터가 문제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게 팩트와 팩트가 아닌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사실성을 검증한다는 팩트체킹조차 특정한 관점과 그에 따른 자료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가짜뉴스란 겉으로 형식상 언론보도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으나 뉴스 제작과정을 거치지 않은 정보를 말한다. 그런데 정치인들뿐 아니라 정책당국까지 앞장서 각자 불편한 정보는 죄다 가짜뉴스라고 부르니 무엇이 진짜 가짜뉴스인지, 그럼 진짜뉴스는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만 더할 뿐이다. 지난 정부가 가짜뉴스로 인한 피해구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며 비판했던 사람들은 이제 자리를 바꾸어 가짜뉴스가 국론을 분열하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니 때려잡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무분별한 가짜뉴스 공방은 확신의 광신이 넘치는 탈진실시대의 늪을 더 깊게 파는 길이다. 토론은 실종되고 맹목적인 적개심만 남기는 싸움만 보인다.   물론 허위조작정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하지만 불편한 언론보도까지 싸잡아 가짜뉴스로 낙인찍는 것은 제도화된 사회적 대화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를 부추기고 공론장으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더 위험한 일이다. 정보의 늪에서 중심을 잡고자 하는 시민이 우선 경계해야 할 대상은 가짜뉴스 딱지를 남발하는 정치지도자들이다.   비록 언론의 현재 모습에 할 말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진실의 시대에 시민들이 기댈 곳은 언론 밖에 다른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 권력 집단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과 감시가 무뎌졌을 때 그 사회는 죽은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나 개인이나 성숙해진다는 것은 더 많은 다양성과 가능성들이 서로 부딪치고 때로 필연적인 부조화와 갈등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지 질서정연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논쟁적인 이슈일수록 성급한 가짜뉴스 딱지는 대화와 성찰의 과정을 봉쇄한다.   인공지능의 진화는 탈진실시대를 또 한차례 변모시킬 것이다. 미디어 기술과 제도를 담당하는 정책당국이 대비해야 할 과업은 그야말로 태산이다. 더 많은 팩트체킹과 양질의 저널리즘 교육을 지원하고 사회적 차원에서 정보 리터러시를 키워야 한다. 딥페이크나 알고리즘 조작을 통한 허위조작 정보 문제, 인공지능의 부상에 따른 저작권 질서의 재정립,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양립시킬 수 있는지 하나하나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다. 이러한 시기에 가짜뉴스 때려잡기에 올인하는 듯한 올드한 모습에 탈진실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시민들은 마음이 편치 않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23.10.26 01:00

  • [중앙시평] 정전 70주년에 외교를 생각한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올해는 동맹 70주년이자 정전 70주년이다. 동맹으로 안보를 지켜 정치·경제 발전을 이뤘으나,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바꾸지는 못한 70년이라는 뜻이다. 이 두 의미를 함께 되새겨야 할 터인데, 세간에 동맹 70년에 대한 상찬은 많으나 정전 70년에 대한 성찰은 적다.   정전 70년의 궤적은 대결로 점철되어 있고, 그 끝에는 최고조의 북핵 위협과 단절된 남북 및 미북 관계가 있다. 미·중, 미·러, 한·중, 한·러 관계가 최저점이므로 평화상태를 모색할 주변 여건도 나쁘다. 남북은 극한대립 속에 엽서 한장 교환하지 못하는 상황을 70년 넘게 이어가야 한다. 세계 10위권의 국가인 한국의 외교가 이를 방치할 수는 없다.     ■  「 우리 북방외교 위기감에 북 핵개발 동맹강화 옳지만 여파는 대비해야 북중러와 협상·외교 공간 남겨둬야 비핵화 평화 정착의 길 막히지 않아 」    돌아보면 그동안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탈냉전 초기 북방외교 때였다. 잘했으면 평화 정착의 길이 열렸을 수 있다. 그러나 북방외교 성과는 한·소, 한·중 수교에 그쳤다. 미·북, 일·북 관계 개선은 없었다. 당시 미국에는 냉전을 이겼다는 승리주의가 강했고, 한국에는 남북 경쟁에서 이겼다는 승리주의가 강했다. 워싱턴과 서울에는 북한이 느낄 위기의식에 대한 원모심려가 적었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북한은 생존을 명목으로 핵 카드를 집어 들었다. 세계는 화해 협력으로 향했으나 한반도에는 대립이 남았고 핵 문제까지 새로 생겼다. 기회비용치고는 엄청났다.   둘째 기회는 2018~19년의 남·북·미 정상회담이었다. 미·북 정상이 최초로 회동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잘 되었더라면 비핵화와 평화정착에 진전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회담은 하노이를 계기로 좌초했다. 북한은 한미와 대화를 끊고 핵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정전 상황은 어느 때 못지않게 위태롭다.   눈을 돌려 동맹 70년의 궤적을 보면, 6·25의 산물인 동맹은 냉전기에 북·중·러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 이후 탈냉전기에 한국에 대한 중·러의 위협은 감소했으나 북한의 위협은 증대되었다. 동맹은 이에 대처해야 했다.   이후 미·중 경쟁과 미·러 대립으로 신냉전이 도래했다. 미국은 동맹인 한국의 역할을 요청했다. 이 시기에 집권한 윤석열 정부는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한국이 미·중, 미·러 사이에서 명료하게 동맹 편에 서기 시작한 셈인데, 최고조의 북핵 위협과 진영 대립의 흐름을 고려할 때 필요한 정책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불가피하게 북·중·러의 반발이라는 기회비용을 유발했다. 정전 상황 타개 전망은 더 나빠졌다. 미국과의 대결심리에 경도된 중·러는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을 더 감싸고 들었다. 비핵화의 전망도 더 어두워졌다.   우리가 북방외교 때의 기회비용으로부터 교훈을 찾는다면, 신냉전 시기의 한국외교는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비핵화 평화정착 통일을 지향할 수 있도록 북·중·러를 향한 원모심려를 잊지 않아야 한다.   이 맥락에서 첫째로 드는 생각은 대북 억제력을 강화하더라도, 남북이 대증적 행동의 악순환은 피하고 협상의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억제와 제재로 비핵과 평화를 달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장래의 협상을 염두에 두고 외교가 작동할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과거 패턴을 볼 때 북한은 도발 후 어느 시점에서 대화로 전환한다. 아마 미국 대선 이후일 것이다. 그때 북한은 미국과 대화하면서 한국은 배척할 것이다. 한국이 우리 문제 논의에서 배제되는 일은 없도록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할 일은 중·러와 과도한 대립관계에 들지 않도록 외교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중·러를 도외시하고는 비핵 평화 통일을 도모하기 어렵다. 한국이 중·러를 상대로 생산적인 협의를 하려면, 미·중·러에 대해 통합되고 조율된 전략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 전략에는 동맹과의 공조를 근간으로 하면서, 공조수위는 어느 선인지, 중·러와의 외교 공간은 어느 만큼인지에 관한 한국형 좌표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전략을 가지고 미국과 공조의 정도를 조율하고, 중·러와 외교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특히 비확산과 평화 안정을 저해하는 북핵 문제를 미·중, 미·러 대립에서 떼어내 미·중·러가 협력할 공동의 이해 사안이 되도록 만드는 데 한국이 나서야 한다.   셋째로는 한미 동맹의 지역적 역할로 인하여 생길 안보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캠프 데이비드 공약에 따라 한국은 중국과 관련되는 분쟁에 대해 미·일과 협의하여 대응하게 된다. 북핵 위협하에 있는 한국이 또 다른 분쟁에 연루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 사실이다.   한국외교는 동맹과 정전 70주년에 기로에 섰다. 동맹 강화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북·중·러 발 기회비용을 관리하는 보완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주요 외교 어젠다인 비핵화 평화정착 통일추구의 길이 가로막히지 않는다. 자칫하면 과거처럼 의도치 않게 큰 기회비용을 치를 수 있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2023.10.25 00:37

  • [중앙시평] 힘 뺌의 미학, ‘조정’의 재발견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799년 여름 조지 워싱턴은 유언장을 작성한다. 말미에 다음을 쓴다. 앞으로 다툼이 생기지 않길 바라지만 혹시나 그러하다면 법원으로 가지 말라. 대신 세 명의 현인(賢人)을 정해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결정토록 했다. 내밀한 다툼이 법적 절차로 해결되긴 쉽지 않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최근 국제사회에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 기업 간 국제적 성격의 분쟁을 지금처럼 법원이나 중재절차로 갖고 갔더니 득도 많지만 때론 실도 있다는 자각이다. 판결이 나와도 밑에 깔린 갈등은 오히려 그 과정에서 더 커진다. 장기적으로 영업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국제 기업들엔 마이너스다. 대안은 뭘까. 법원·중재 대신 믿을 만한 제3자를 찾아 이 사람의 ‘조정(調停·mediation)’으로 해결방안을 찾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이기는 쪽도 지는 쪽도 없다. 갈등을 인정하고 윈윈 계획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작업이다. 당사자 간 협상과 법적 해결의 중간쯤 있는 ‘하이브리드’ 방식이다.     ■  「 승패보다 상생 협력의 해법 모색 한 템포 늦춘 ‘저강도’ 절차에 관심 여러 국제 위기와 복합 분쟁에서   갈등해결 위한 창조적 대안 제시 」    여러 국가에서 국내적으론 이미 이런 제도가 익숙하다. 문제는 국제 분쟁으로 가면 마땅한 기제가 없다는 점이다. 이 빈틈을 메우고자 유엔 주도로 새로운 조약도 들어왔다. 2019년 싱가포르 협약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56개국이 서명했다. 기업 간 조정의 ‘국제화’를 위한 첫걸음이다.   기업만이 아니다. 국가 간 분쟁도 이런 움직임이 활발하다. 여태 국가 간 분쟁 해결은 ‘모 아니면 도’였다. 다투는 두 나라가 외교적 협의를 하거나, 아니면 국제법원이나 중재절차로 법률의 끝단으로 치닫는다. 중간이 없다. 그러나 때론 딱 중간 정도가 필요할 때도 있다. 잘잘못을 따지되 양쪽이 서로 양보하고 협력해야 문제 해결에 이르는 분쟁이 바로 그러하다. 법적 문제를 포함, 여러 이슈를 통섭적으로 평가해 솔로몬의 지혜를 내는 현인이 이땐 필요하다. 분쟁도 해결하고 관계도 이어간다.   국가는 기업보다 더 절박하다. 다른 곳으로 본사를 옮길 수도 없다. 밉다고 사업 종목을 바꿀 수도 없다. 서로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도 많다. 자연스레 ‘관계 유지형’ 분쟁해결에 관심이 간다. 그래서 지금 여러 조약·협정에선 국가 간 분쟁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조정절차가 속속 들어오고 있다. 기존의 ‘고강도’ 법적 절차를 없애는 게 아니다. 이는 그대로 둔다. 새로운 ‘저강도’ 선택지를 추가할 따름이다. 둘 중 골라 맞춤형으로 가라는 이야기다. 그저 조정을 권고하는 게 아니라 자세히 절차를 규정한다. 그간 조정이 활용되지 않은 큰 이유가 세부 내용이 없어 국가들이 선뜻 선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 국제사회 현실은 분쟁해결 수단으로서 조정의 유용성을 새롭게 부각한다. 두 측면이다. 먼저, 적지 않은 분쟁들은 외교, 정치, 감정, 법률이 얽혀 있다. 법적 문제만 발라내 딱 잘라 결론 내리기 쉽지 않다. “법적으로 문제가 끝났다고 인간적으로도 문제가 끝난 건 아니며,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영속적 관계에 도달할 수 없다.” 2022년 8월 도쿄에서 열린 한일 포럼에서 오와다 히사시 전 국제사법재판소장의 말이다. 국제법원 수장의 말이라 더 공감이 간다.   그다음으로, 법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아예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기후변화, 디지털, 공급망이 그러하다. 흔히 ‘규범 기반 (rules-based)’ 체제라고들 이야기한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게 작동하려면 ‘규범’이 무엇인지 먼저 명확해야 한다. 이게 애매하면 법적 해결의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위 두 상황에선 기존 법적 절차로 결과가 나와도 국가 간 분쟁이 원만한 수준으로 해결되긴 어렵다. 진 쪽이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여기서 조정은 빛을 발한다. 조정을 통해 낮은 단계의, 그러나 객관성을 담보한, 결론이 나온다면 오히려 문제 해결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물론 모든 문제가 이 방식으로 해결될 순 없다. 국가 간에도 때론 법적 절차가 유일한 해결 방안인 경우도 많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얼굴을 붉혀 반드시 승패를 갈라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다툼들은 소통과 상생의 논의에 친하다.   중동에서 전운이 감돈다. 중동에선 전쟁도, 법적 다툼도 많았다. 그리고 조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이집트-이스라엘 분쟁을 끝낸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스라엘-아랍에미리트 갈등을 마무리한 2020년 아브라함 합의는 모두 조정의 결과다. 1979년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시작된 미국-이란 분쟁이 1981년 한풀 꺾인 것도 조정이다. 그간 경험을 되새겨, 그리고 조정에 대한 새로운 국제적 관심을 배경으로 지금의 위기도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타협점을 찾기를 기대한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국가 간 분쟁도 완벽한 해결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합리적인 차선책, 차차선책은 찾을 수 있다. 국제법원만큼 화끈하거나 시원하진 않아도 ‘저강도’ 옵션이 때론 요긴하다. 힘 뺀 절차지만 힘 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3.10.24 01:04

  • [중앙시평] 한국 보수의 선 자리와 갈 길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이번과 다음 칼럼은 우리 보수와 진보의 선 자리와 갈 길을 계속 다룬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이 주제를 꺼낸 것은 내년 4월 10일 총선에서 보수와 진보가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에서 보수의 고전적 기초를 세운 이는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영국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다. 버크는 인간의 합리성에 한계가 있고, 사회가 이성보다 도덕과 관습으로 재생산되며, 문명의 진보가 안정의 기반 위 점진적 개혁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버크의 보수주의는 전통주의·질서주의·점진주의를 앞세워 계몽주의의 진보에 맞서는 이념적 대항 거점을 선사했다.     ■  「 실용과 통합 강조 지구촌 보수 이념과 갈라치기의 한국 보수 박정희주의·선진화론을 넘어 ‘열린 보수 3.0’으로 나아가야 」    서구 보수가 두 차례 혁신을 모색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첫 번째 혁신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으로 무장한 1980년대 초반 ‘신보수’였다. 감세, 민영화, 규제완화 등을 내건 신자유주의와 가족 및 국가의 가치를 중시한 공동체주의는 신보수주의의 양 날개였다. 미국 레이건 정부와 영국 대처 정부는 그 성공 사례였다.   두 번째 혁신은 좌파의 ‘제3의 길’을 벤치마킹한 2000년대 초반 ‘우파적 제3의 길’이었다. 좌파적 제3의 길이란 신보수로부터 권력을 탈환한 영국 블레어 정부와 독일 슈뢰더 정부의 신사회민주주의를 지칭했다. 우파적 제3의 길은 실용과 통합을 내세워 신자유주의에 온기를 불어넣으려는 정치적 기획이었다. 영국 캐머런 정부는 ‘따듯한 자본주의’를, 독일 메르켈 정부는 ‘탈이념적 정치연합’을 추구해 보수의 21세기적 지평을 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서구 보수는 미국 공화당에서 독일 기민당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독일 기민당이 시장·통합·품격을 중시하는 전통적 보수 노선을 걸어왔다면, 미국 공화당은 ‘트럼프주의’라는 보수적 포퓰리즘 노선으로 전환했다. 특히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성 정치인들을 기득권자로 공격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적대시하며 리버럴한 개인보다 ‘위대한 미국’이라는 국가주의를 앞세우는 전략을 구사했다. 트럼프주의가 내년 미국 대선에서 한번 더 승리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광복 이후 보수의 동의어는 ‘박정희주의’였다. 박정희주의는 경제성장이란 목표를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할 수 있다는 통치 논리가 핵심을 이뤘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성장제일주의가 ‘시장 보수’로 거듭났다면, 개인의 인권보다 국가의 안보를 중시하는 반공권위주의는 ‘안보 보수’로 나타났다. 시장 보수가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이었다면, 안보 보수는 박근혜 정부의 정체성이었다.   주목할 것은 박정희주의에 대한 성찰적 담론이 보수 안에서 태동했다는 점이다. 박세일의 선진화론이다. 박세일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선진화를 건국·산업화·민주화를 잇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내놓았다. 특히 박세일이 주조한 ‘공동체자유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를 모두 강조함으로써 선진화를 위한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박정희주의가 ‘한국 보수1.0’을 이뤘다면, 선진화론은 ‘한국 보수2.0’이라 부를 만했다.   2000년대에 보수로서 세 번째 집권에 성공한 윤석열 정부에게 요구된 것은 ‘한국 보수3.0’이었을 것이다. 그 방향은 가시화된 신냉전 질서에 대처하는 안보 역량과 가속하는 과학기술혁명을 선도하는 경제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따듯한 사회통합이라는 보수 본래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보수의 안보적 과제를 성취했더라도 경제적·사회적 과제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커져 왔다는 점이다. 게다가 일방향 명령 식의 국정운영은 쌍방향 소통이 만개한 지식정보 시대에 철 지난 통치 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지구적 보수가 실용과 중도통합의 ‘열린 보수’로 나아가는 것에 반해 윤석열 정부가 이념과 갈라치기의 ‘닫힌 보수’를 고수하는 것은 비전·정책·전략의 측면에서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는 하나로 이뤄져 있지 않다. 변화보다 안정을 선호하는 ‘기질적 보수’, 정부개입보다 자유시장을 중시하는 ‘정치적 보수’, 개인과 공동체의 공존을 소망하는 ‘철학적 보수’ 모두 보수라는 큰 울타리 안에 존재한다. 개인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위한 사회의 통합을 구현하며, 부국(富國)을 위한 국가의 성장에 매진하는 것이 보수의 일차적인 덕목이다. 욕망의 배려, 사회의 통합, 국가의 성장, 더하여 소통의 거버넌스를 중시하는 ‘열린 보수’는 ‘한국 보수 3.0’이 가야 할 길일 것이다.   나는 보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가 ‘적대적 공존’이 아닌 ‘생산적 경쟁’ 관계를 이룰 때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네. 삶의 황금나무는 초록색이지”라고 노래한 이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다. 지나간 이론과 이념을 넘어서 현재와 미래의 생활과 행복을 놓고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가 생산적으로 경쟁하기를 바라는 이, 결코 나만은 아닐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2023.10.23 00:49

  • [중앙시평]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장 갈등이 심각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갈등이 심각하다기보다는 제대로 갈등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생각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세상에 갈등은 항상 존재하는 것인데, 갈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히 표출하고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에서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후쿠시마 원전수 방류, 의대 정원 증원 등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유사 종교 수준의 ‘진영 논리’에 맹목적으로 휩쓸리다 보니 입장에 따라 말과 주장이 정반대로 바뀌는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이념이란 사람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많은 요소 중 하나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우파냐 좌파냐로 스스로와 상대방을 낙인하고 편 가르고 있다. 각자가 사안마다 판단하고 결정하는 스스로의 권한과 능력을 진영에, 아니 정확히는 양극단의 유튜버들에게 맡기고 종교처럼 따르고 있는 듯하다.     ■  「 공동체 파괴 수준의 이념·정치 갈등 갈등 표출·해결 능력에 심각한 문제 ‘나도 변화하겠다’는 유연성이 필요 ‘다른 편’과의 소통이 신뢰의 첫걸음 」    갈등 관련 조사마다 우리나라의 심각한 수준이 드러난다. 전국경제인연합회(현재 한국경제인협회)에서 2021년 발표했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비교에서 한국은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전 영역에서 세 번째로 갈등이 심각했다. 그에 앞서 진행됐던 연세대 보건복지연구실의 전국 규모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약 90%가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생각했고, 가장 심각한 갈등으로는 정치적·이념적 갈등을 꼽았다. 또한 우리 사회 갈등을 심화시키는 가장 큰 원인으로 갈등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정치권을 꼽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갈등 문제가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갈등으로 고통받을 때 인간은 끊임없는 위협감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느껴 두뇌 에너지가 고갈돼 인지적 능력을 잃게 된다. 갈등으로 인한 위협으로 옳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간의 능력이 손상되고, 그로 인해 다시 갈등이 깊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영국 사상가 버트런드 러셀의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은 협력이다”는 말이 절실한 시대다.   갈등 문제가 심각해질 때마다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곤 한다. 통합은 사회 구성원이 생각과 가치를 공유함으로써 사회에 소속감과 결속감을 느끼게 됨을 말한다. 그러나 통합이 잘못 사용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소통과 존중 없는 통합은 다른 이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나에게 동화되기만을 강요하곤 한다. ‘나 역시 변화하겠노라’는 유연성을 갖추지 못한 통합 시도는 ‘나에게만 맞추라’는 강요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형태의 파시즘이다.   건강한 통합은 사회적 신뢰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 신뢰는 ‘같은 편’만 아니라 ‘다른 편’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 모두와의 신뢰다.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사회적 신뢰와 재난 극복 사이의 관계에 대한 미국 하버드대 이치로 가와치 교수와 리사 버크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재난 자체의 강도보다 사회가 어떻게 대응했느냐가 피해 복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핵심은 사회적 신뢰의 정도였다. 오랫동안 지역 주민들 간에 협력 활동을 하고 유대감을 나눠온 지역에서는 자발적 구조 활동이 잘 이뤄지고 정확한 정보가 공유되며 빠른 회복이 진행됐다. 또한 다른 집단과 자주 접촉하며 사회활동의 신뢰 경험을 쌓은 지역은 폭력을 조장하는 선동이나 가짜뉴스에 흔들리지 않고, 평화를 지키며 재난을 극복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의 열린 만남과 소통이 만든 힘이다.   ‘사회적 신뢰’가 사람을 보호했다는 결과에서 다시 우리의 현실을 되새긴다. OECD 최근 통계에 따르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을 도와줄 이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우리나라의 점수는 OECD 38개국 중 밑에서 4번째일 정도로 낮았다. 우리보다 낮은 나라는 튀르키예·멕시코·콜롬비아뿐이다. 게다가 도와줄 이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응답한 박탈 지수는 18.8%에 이른다.   사회 갈등에 대처하기 위한 사회적 신뢰를 쌓으려면 공정한 제도와 문화, 교육 등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할 것은 공존과 협력에 대한 태도다.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투입되더라도 끊임없이 소통하고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이 시작이다.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인터넷의 시대에 우리는 정말 마음을 열고 소통하고 있는가? 오히려 갇힌 정보망 속에서 비슷한 의견만 반복하며 편협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아프리카의 오랜 격언이라 알려진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당연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잠시 빨리 가려 한다면 혼자서 가는 게 편하고 쉬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 앞에 놓인 길은 멀고도 멀다. 해결해야 할 과제와 장애물도 많은 먼 길이다. 그 먼 길을 함께 가야만 한다. ‘함께’는 다른 의견을 가진 다양한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장

    2023.10.20 00:51

  • [중앙시평] 저절로 통하는 정치는 없다

    이현상 논설실장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즐겨 쓰던 붓글씨는 ‘경청’이었다. 아들인 이건희 회장에게도 가끔 선물했다고 한다. 기업을 취재하던 시절, 관련 기사를 썼더니 다음 날 삼성 홍보실에서 전화가 왔다. “敬聽(경청)이 아니라 傾聽(경청)입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다’와 ‘몸을 기울여 듣다’의 차이다. 둘 다 사전에 나오긴 한다. 듣는 건 마음의 행위라고 생각해 무심코 ‘敬聽’으로 썼는데, 아니었다. 홍보실 직원의 말이 걸작이었다. “몸 기울이지 않으면 듣고 있다는 걸 상대가 어찌 알겠습니까.”     ■  「 마치 민심 몰랐다는 듯 호들갑 쌍방향 소통 부족했다는 증거 “보여주기 정치는 없다”는 고집 ‘침묵의 권력’ 행사한 것 아닌가 」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후 여권 안팎에서 쇄신 요구가 쏟아진다. 국민의힘은 잠시나마 요란했는데, 용산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내심 충격을 받았을진 몰라도 내색은 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를 추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였다. ‘변화’보다는 ‘차분’이라는 단어에 더 힘을 실었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태도가 여당에서 김기현 대표 체제 유지와 임명직 당직자 교체라는 어정쩡한 수습책으로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을 대표하는 태도 중 하나는 “쇼하지 않겠다”다. 수사로 말한다는 검사 출신이라 그런지, 정치인의 과시성 이벤트를 싫어한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국내 정치에 남북통일 문제를 이용하는 쇼는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비상경제민생회의를 TV 생중계하며 “쇼를 연출하거나 이런 거는 절대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정치적 고비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이태원 참사 때는 “책임이라는 건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한다”는 논리로 ‘정치적 문책’을 거부했다. 검사 출신의 한계라는 지적에도 아랑곳없었다. 취임 1년 즈음 분위기 쇄신을 위한 개각론이 제기됐을 때도 “국면전환용 개각은 없다”고 못 박았다. 지지율이 갑자기 내려가도 ‘보여주기 정치’는 없다는 메시지를 낼 뿐이다. 비교적 담담한 보선 패배 반응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윤 대통령의 ‘쇼 혐오’는 ‘쇼통’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던 전임 문재인 정부와는 차별화 포인트다. 탁현민이라는 ‘걸출한’ 연출가를 뒀던 문재인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화려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광화문 호프집에서 시민들과 만나 맥주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임기 중 두 차례 ‘국민과의 대화’를 TV 생중계했다. 그럼에도 문 정부가 ‘불통’ 딱지를 못 뗀 것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했기 때문이다. ‘국민과의 대화’는 우호적인 패널 구성으로 ‘팬미팅’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그 와중에 문 대통령은 현실과 동떨어진 ‘부동산 안정론’을 펼쳐 빈축을 샀다.   문제는 이런 쇼마저 아쉽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난해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이 윤 대통령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이었다. 지난해 11월 18일 중단된 출근길 질의응답(도어스테핑)은 재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소통의 기본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인데, 국민은 국무회의나 국가 행사에서나 대통령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듣는다. 몸은 청와대를 나왔지만, 마음은 청와대보다 더한 구중심처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말이 권력이듯 침묵도 권력이다. 말하고 싶을 때 입 열고,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입 다물 수 있는 것이 힘이다. 윤 대통령은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권력을 국민에게 행사한 셈이다. 용산은 이를 ‘묵묵함’이라고 쓰지만, 국민은 ‘답답함’이라고 읽는다. ‘의연함’이라고 말하지만, ‘오만’이라고 느낀다.   “용산만 쳐다보지 말고 쓴소리도 하라.” 여당의 강서 패배 후 한 신문에 나온 대통령실 관계자의 반응이다. 사실이라면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정말 대통령실이 분위기를 몰랐단 말인가. 매일같이 쏟아지는 여론조사는 쌓아두기만 하는 건가. 맥줏집에서 옆자리 테이블에 잠깐만 귀 기울이면 쉽게 짐작했을 민심이다. 집단편향에 빠져 듣고 싶은 것만 들었기 때문에 이런 어이없는 반응이 나온다.   “용산이 민심을 못 읽으면 시정을 요구해 관철시키겠다.” 2기 체제를 시작한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말했다. 여당으로서 당연한 역할이다. 그러나 장삼이사라도 알 만한 이야기를 집권 정당이 큰마음 먹어야 대통령실에 전달하는 상황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에 종속돼 자율성을 잃은 우리 정당 시스템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마땅히 할 말을 대단한 용기를 내야 할 수 있는 조직이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나. 팬덤 정치에 오염된 우리 정치가 어느새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여나 야나 마찬가지다.   쓴소리는 하는 쪽의 용기가 우선이겠지만, 듣는 쪽의 용기가 더 필요하다. 듣기 싫은 소리라도 반응해야 한다. 쇼라도 해야 한다. 몸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대통령실은 국민을 상대로 ‘침묵할 수 있는 권력’을 포기해야 한다. 이현상 논설실장

    2023.10.19 01:00

  • [중앙시평] 이민청 설립, 좌고우면할 여유 없다

    조영태 서울대 교수·인구학 요즈음 많은 사람으로부터 유사한 질문을 듣고 있다. 우리나라 인구문제 해결은 이제 이민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60대마저 청년인 농촌지역, 일할 사람이 없어 문 닫기 직전까지 간 제조업·건설업 등 소위 기피 산업 업종으로부터 이 질문을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최근에 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영역과 배경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해졌다. 이제는 지역만이 아니라 도시, 심지어 서울에서도 이민을 인구문제의 대안으로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금융, 유통, 운송 및 서비스업, 교육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도 이민의 필요성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외면할 수 없게 된 노동인력 부족 산업·시장의 미래 변화 대비 필요 종합적 관점서 부처 간 조율 위해 이민 정책 설계 컨트롤타워 시급 」    이렇게 이민의 필요성이 회자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구변동의 영향을 다수가 체감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모든 국민이 공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조업과 농촌을 넘어 다양한 산업군과 서울에서도 이민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큰 변화임엔 틀림없다. 과거에는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관점에서 외국인력 필요성이 제기되었다면, 이제는 내수 시장 곳곳에서도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인구가 줄어들어 발생한 다양한 문제들과 앞으로 발생할 문제들이 이민 유입 정책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보통 ‘그렇지 않다’는 답을 전제로 한다. 실제로 나는 이민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견지해 왔던 터라, 만일 이 질문을 몇 년 전에 받았다면 ‘인구는 그저 숫자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학령인구 감소로 많은 대학은 물론 대학원마저 외국 학생 없이는 운영이 어려워진 고등교육계의 변화를 체감해서일까, 합계출산율이 더욱 위태로워져서일까, 이제는 나도 ‘그렇지 않다’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물론 이민이 인구문제 해결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견해는 여전하다. 하지만 인구가 줄어서 발생한 문제들의 해소에 이민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이민정책의 방향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시급한 일은 이민과 관련된 컨트롤타워를 설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컨트롤타워는 당장 외국인 근로자를 받기 위함이 아니다. 인구변동에 따른 노동시장 변화를 살피는 것은 물론, 기술 진보로 인한 산업 섹터별 변화의 수준과 속도를 보며 실질적으로 얼마나 외국인이 필요한지도 예측해야 한다. 컨트롤타워는 이민과 관련된 여러 부처의 의견과 이해관계를 아우르는 역할도 해야 한다. 현재 이민과 관련된 일은 법무부, 고용노동부, 산업통상자원부, 계절근로자를 요구하는 지방자치단체 등 관련 부처와 기관이 매우 많다. 그런데 여러 부처가 연관된 대부분 사안이 그러하듯 컨트롤타워가 없으면 각 부처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정책은 결국 제대로 작동할 리 없고, 시간이 지나 조정이 필요할 때가 되면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해 시간이 또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컨트롤타워의 구축이 가장 시급한 것이다.   다행히 법무부는 작년 초 ‘출입국·이민관리체계 개선추진단’을 설치하고 컨트롤타워가 될 수 있는 이민청 설립을 추진해 오고 있다. 이민을 오려면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국경을 넘어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일과 관련된 제반 사항이 법무부 소관이므로 법무부가 이민청 설립에 앞장서는 것은 당연할 일이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해서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법무부의 출입국 관리는 ‘관리’라는 말 그대로 입국 자격을 심사하는 일이 주된 업무다. 그런데 앞서 나열한 컨트롤타워 역할과 이민정책의 방향 설계는 심사의 업무를 뛰어넘어야 비로소 실현이 가능하다.   예로 제조업을 보자. 저출산으로 인한 청년 인구 감소와 제조업 기피로 향후 12년 정도 지나면 수많은 제조 공장은 고용할 청년 내국인 인력이 없어져 외국인 근로자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때까지 제조업은 제조 공정의 여러 단계들을 지금 수준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얼마 전 디지털제조혁신기업을 2027년까지 2.5만개 육성한다고 발표하였다. 계획이 실현되면 제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 상황은 오늘과 비교해서 달라진다. 이민청은 미래의 산업환경 변화까지 고려해서 이민정책 방향을 설계해야 한다. 이민청을 준비할 때 법무부가 꼭 감안해 주기를 희망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단 컨트롤타워로서 이민청은 하루빨리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좌고우면하는 사이에 실타래가 더 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일단 이민청이 설립되면 당장 이민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관련 부처 및 단체들과 협조하여 우리나라의 미래 관점에서 외국인이 언제 얼마만큼 어느 나라에서 들어와야 하는지 계획부터 마련해야 한다. 우리나라 인구는 이제 시행착오를 용인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조영태 서울대 교수·인구학

    2023.10.17 00:54

  • [중앙시평] 노벨 과학상과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올해도 노벨상 발표 시즌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허무하게 지나갔다. 지난 몇 년 동안은 수상 후보자로 거론되는 한국인들이 있어서 흥미를 끌었으나, 올해는 그마저도 없어서 더욱 심심하게 지나간 듯하다. 우리나라가 경제력으로는 세계 10위권이고, 요즘은 K컬처를 통해 문화적으로도 인정받는 국가인데, 어째서 세계 30개국 이상이 배출한 노벨 과학상을 아직도 못 받고 있는지 일반 국민은 궁금해 할 만하다. 사실 노벨상을 시상하는 스웨덴의 학자들도 이 상황을 관심있게 보고 있는 모양이다. 필자의 지인 중 노벨물리학상 심사위원장을 역임한 스웨덴 물리학자가 있어 사석에서 한국이 못 받는 이유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자기들도 국가 위상에 비추어 한국이 아직 노벨 과학상을 못 받은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마땅한 후보가 아직 없다는 이야기였다.     ■  「 올해도 이루지 못한 노벨상의 꿈 일천한 기초과학 연구가 주원인 독창적 연구엔 장기적 지원 필수 지원하되 간섭 않는 원칙 지켜야 」    한국이 과학기술 투자에도 적극적인데, 왜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을 낸 사람이 없을까.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요인은 우리나라가 기초과학을 지원한 역사가 일천(日淺)하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노벨상은 논문 발표 후 상을 받을 때까지(‘노벨 시차’라고 부른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특징이 있다. 그만큼 엄정한 검증을 거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과학기술 투자의 목적이 경제개발에 있었기 때문에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인색하였다. 최근에 와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도 늘렸지만, 선진국에 비해서는 많이 늦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대표적 기초과학 연구소로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도 여럿 배출한 이화학연구소(RIKEN)는 1917년 설립되었는데, 한국의 기초과학연구원(IBS)은 2011년에나 설립되어 한 세기 가까이 뒤졌다.   소위 ‘노벨 시차’는 최근 들어 점점 길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지금은 거의 30년에 달한다. 즉 지금 노벨상을 받으려면 30여 년 전에 업적을 내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스포츠나 대중문화와 다른 점이다. 축구는 지금 실력이 좋으면 바로 금메달을 딸 수 있고 K팝 같은 대중문화도 좋은 작품을 내면 바로 빌보드 차트에 오른다. 심지어 수학 분야도 검증에 그렇게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아서, 좋은 업적을 내면 몇 년 안에 필즈상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노벨 과학상은 훨씬 오랜 기간의 검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짐작하다시피 30여 년 전 한국의 기초과학 연구 여건은 매우 열악하였기에 당시 노벨상을 받을 만한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힘들었다. 당연히 지금 노벨 과학상 후보가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제는 한국의 기초과학 연구 여건도 많이 개선돼 선진국과 비견되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다. SCI 발표논문 숫자도 세계 12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피인용 횟수도 세계 평균을 웃돌고 있다. 그러면 이제는 충분히 기다리면 노벨 과학상이 자연히 나온다는 이야기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문제다. 긴 노벨 시차가 말해주듯이 노벨 과학상을 받으려면 장기적이고 끈기있는 연구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정책은 매우 단기적이어서, 몇 년 안에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프로젝트가 없어지기 일쑤다. 과거 선진국을 따라가면서 신속히 산업기술을 확보하려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효율적인 정책이었을지 모르나, 이제 남이 생각하지 못한 독창적 기술을 창출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비효율적인 정책이다. 하물며 장기적인 기초과학 연구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기초과학 지원에 대한 선진국의 태도가 한국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201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중력파 검출 실험은 미국 국립연구재단(NSF)의 지원으로 수행되었다. 그런데 NSF가 이 연구과제에 지원을 시작한 것은 1992년이었고, 중력파 검출은 2015년이 되어서야 성공하였다. NSF는 23년 동안이나 결과가 나오지 않는 프로젝트에 꾸준히 연구비를 지원한 것이다. NSF가 지원을 결정할 때 총재였던 월터 마시(Walter Massey) 박사를 후에 필자가 만날 기회가 있어서 어떻게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과제에 과감한 지원을 시작할 수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NSF는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기관입니다”라고 당연한 듯이 대답하였다. 만일 한국의 연구재단이 그런 결정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부와 국회에 불려가 성과없는 과제에 지원했다고 온갖 비판을 받았을 것이고, 아마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지원도 끊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 선진국은 기초과학 연구에 대해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있고, 이런 정책이 노벨 과학상 수상 업적을 만든다. 과연 한국 정부와 국회가 이런 수준까지 올라가려면 몇 년이나 걸릴까. 또한 지금 정부는 연구과제 관리를 추격형에서 선도형으로 바꾸는 진정한 연구·개발(R&D) 혁신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전 총장

    2023.10.13 01:10

  • [중앙시평] 안드로메다에서 온 교훈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무슨 역이름이 이렇게나 기냐. 무려 아홉 자다. 그런데 수사어가 길면 뭔가 의심스럽다. 이것도 피해의식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가보면 별 역사, 공원 없다. 있는 건 동대문인데 그건 동대문역에 선점되었다. 게다가 이 역의 행정구역은 동대문구가 아닌 중구다. 참고로 동대문은 동대문구에 한 뼘도 안 걸친 채 종로구에 있다. 남는 건 문화다. 그나마 근처에 DDP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문화행사가 벌어지는 곳.   이 건물이 준공되자 여기저기서 평가가 무성했다. 한마디 하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존재감이 너무나 육중했기 때문이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저 거대한 금속성 비정형 물체. 미증유의 건축적 걸작이라는 호평과 안드로메다에서 왔다가 불시착한 미확인 비행물체냐는 혹평 사이에 평가의 스펙트럼이 이루어졌다.     ■  「 도심 살리려는 문화거점 DDP 자생 목적으로 내부 상가 운영 빈약한 주변 상권과 경쟁 구도 거점의 역할은 유동인구 유입 」    형태 문제의 비난은 대체로 부당했다. 왜 그런 괴상한 건물을 만들었냐는 건 건축가가 받을 힐난은 아니었다. 중국집 주방장은 짜장면을 만든다. 이미 그런 모양의 건물로 알려진 건축가를 초대하고는 접시 위의 식사가 돈가스가 아니라고 타박하면 곤란하다. 형태가 하도 독특하여 주변 도시맥락과 안 어울린다는 비난도 부당했다. 원래 서울은 뒤죽박죽 도시경관을 갖고 있어서 맞춰야 할 도시맥락은 찾기가 좀 어렵다. 특히 건물 형태의 무정부적 자유분방함에서 바로 여기, 동대문 근처가 예외가 아니다. 뭘 갖다 놔도 안 어울리고 그래서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등장했다. 이 거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주변 상권이 시름시름 쇠락해간다는 점이었다. 분명 지하철 3개 노선 환승역에 방문 유동인구가 저리 많은데 도대체 어떤 연유일까. 짚어보려면 과거를 들춰봐야 한다. 역이름이 담담하게 동대문운동장이던 시절, 주변을 지탱하고 있던 상권은 체육 상업시설들이었다. 권투글러브, 볼링공, 축구화에 챔피언 트로피를 장만하려면 이 근방 상가를 방문하면 됐다. 모두 동대문운동장의 영향력이니 이렇게 유동인구를 모아주는 시설을 상권의 거점이라고 한다. 상업 부동산개발에서는 영어를 써서 앵커라고 부른다. 이런 앵커의 배치는 상가개발의 기본 조건이다.   지난 시절 복합상가의 최고 앵커 업종은 영화관이었다. 영화관만으로 부족한 대규모 시설에는 수족관, 서점, 전망대 등이 추가됐다. 영화가 입장객 방문 시점에 맞춰 시작되지 않는다. 입장객은 남는 시간에 아이스크림 사 먹으며 배회하다 팝콘 사서 영화 보고 저녁 먹고 귀가했다. 그래서 상권이 유지되었다. 아파트 거실 벽면의 TV 크기가 거대해지기 전까지는.   서울의 코엑스에는 이상하고 거대한 책 공간이 자리 잡았다. 도서관이라 자칭하기는 하나 이곳은 도서관도 카페도 아니다. 정말 안드로메다에서 왔는지 별마당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수익시설이 아니다. 뚜렷한 것은 유동인구를 끌어모으는 앵커라는 점이다. 모나리자가 루브르박물관의 앵커고, 루브르박물관이 파리의 앵커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방문객을 모아서 주변에 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 상권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DDP는 거대시설인 것은 맞는데 거점시설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운영구도다. 이런 거대한 문화시설을 건립까지만 하고 운영에는 예산을 추가 지원하지 않겠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이 시설들이 선택하는 방식은 자체 생존이다. 그러려면 방문객들의 소비가 외부로 새지 않도록 내부에 소매점을 확보해야 한다. 결국 거점시설이 주변 상가와 경쟁하게 된다. DDP는 내부에 훌륭한 상가를 갖추고 있으니 방문객이 굳이 주변 도시를 배회할 필요가 없다.   DDP에서 중요한 문제는 형태가 아니고 건물이 도시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여기부터는 건축적 해결의 문제다. 이 건물은 도시에 대해 철저히 배타적이다. 건물 외부에는 창도 진열장도 없다. 방문객은 무조건 내부로 입장해서 외부를 잊어야 한다. 양변에 건물들의 진열장이 도열한 도로를 가로라고 부른다. 도시의 길은 가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DDP 주변의 외부공간은 가로도, 공원도 아니다.   미술관, 박물관, 음악당이라는 문화시설이 전국 곳곳에 세워진다. 그런데 건설사업까지만 진행하고 지원을 끊으니 시설 생존을 위해 건물 내부에 식음료 시설 포함한 쇼핑센터를 조성해야 한다. 새 건물의 현대적 상업시설은 투자예산 규모가 다르니 이미 쇠락한 인근 풀뿌리 상권이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원도심 살아나고 세수도 늘어나라고 만들었는데 엉뚱하게 주차수요만 늘어난다. 도시는 여전히, 더욱 쇠락해간다.   고속버스터미널도 고터로 줄여 부르는 세대의 시대다. 그러고 보니 DDP, 이 이름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줄인 것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이 유장한 지하철역 이름은 시대를 잘못 읽고 있는 듯하다. DDP는 도시를 잘못 읽고 있고.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2023.10.12 01:11

  • [중앙시평] 북한의 보이지 않는 전쟁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석좌교수 북한은 안정적인가. 지금 같은 체제가 지속될 수 있을까.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수시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은 겉으로 보기엔 안정적이다. 미국의 비핵화 압박에 오히려 핵무기 생산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겠다고 받아칠 뿐 아니라 최근에는 핵 무력 강화 정책을 헌법에 명시할 정도로 체제 유지를 자신하는 듯 보인다. 수령체제라는 강고한 이념에다 강력한 권력 유지 기제를 구축했기 때문에 북한이 변할 가능성은 없다는 전망이 많다.     ■  「 북한의 겉모습 안정돼 보이지만 내부선 시장과 정치 심하게 충돌 상부와 하부구조가 전쟁하는 양상 이 결과에 따라 체제 운명 갈릴 듯 」    그러나 북한 내부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다르다. 정치체제와 경제 현실 사이 모순이 최고 수준이다. 사회주의 역사를 통틀어 지금 북한만큼 정치와 경제가 대립 구도를 형성한 적은 별로 없었다. 수령체제를 근간으로 한 북한 정치제도는 사회주의 내에서도 가장 경직적이다. 반면 밑으로부터의 시장화는 사회주의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진전돼 있다. 극단적으로 수직적인 정치제도와 시장이라는 수평적 제도 사이의 충돌이 체제 취약성의 뿌리다. 수령체제는 시장경제를 배격한다. 그러나 시장은 수령체제를 잠식한다. 김정일이 2009년 화폐개혁을 통해 시장을 정치에 복속시키려 한 시도가 1차전이었다. 이제 김정은이 정권 대(對) 시장의 2차전을 벌이고 있다. 북한이 밖으로 보여주는 거침없는 행동은 오히려 내부 취약성을 감추고 보완하려는 절박한 시도다.   수령체제는 주민의 완전한 복종을 요구한다. 수령체제가 지속되려면 주민을 지시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각종 정치 학습으로 세뇌하고, 배급제로 관리하며, 지도자를 우상화해 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주민의 존재 이유도 최고 권력과 수령체제의 옹위에 있다. 다른 사회주의에선 당(party)이 최고 권력기관이었지만 북한에선 최고 권력자의 명령을 집행하는 조직에 불과하다. 핵도 수령체제의 산물이다. 외부 세력이 최고 권력자를 겨냥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주민 희생도 감내해야 한다. 북한 정치이념에서는 수많은 주민의 굶주림보다 한 명 권력자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반면 시장은 주민을 능동적, 자율적 인간으로 변모시킨다. 1990년대 이전의 북한 주민은 위에서 내린 결정을 받들어 행하던 존재였다. 그러나 시장이 대세가 되자 주민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자로 승격했다. 시장에서는 김정은이 아니라 주민이 대세다. 스스로 돈 벌 방법을 찾고 장사와 사업을 위해 인맥을 구축한다. 큰돈을 벌면 권력자도 아쉬운 손을 내민다. 가치관도 달라졌다. 외국에 출장 간 고위 관료가 출장 내내 공무는 거들떠보지 않고 북한에 돌아가서 사업할 아이템을 찾아다녔다는 일화도 있다. 주체사상은 점차 힘을 잃어가고 그 자리를 돈이 차지한다. 기강도 해이해졌다. 불확실한 가운데 결정할 일이 많다 보니 점집을 찾는 이들이 급증했다.   김정일은 화폐개혁을 통해 시장을 없애려 했지만 완패했다. 2000년대 중반 그는 시장이 자본주의의 서식처라며 관료에게 단속을 지시했다. 그러나 관료와 주민 사이 뇌물을 고리로 한 관경(官經) 유착은 이 지시를 무력화했다. 좌절한 김정일은 구권 100원을 신권 1원과 바꾸게 하면서 일정 금액 이상은 교환해 주지 않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시장으로 들어가는 돈을 줄여 시장을 없애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생존이 어려워진 주민과 관료의 반발이 거세지자 다급히 후퇴했다. 총리가 인민에게 사죄하고 다시 시장 활동을 묵인했다.   2019년부터 시작된 김정은의 반(反)시장 전쟁은 훨씬 조직적이다. 코로나 상황을 이용하고, 정권의 보이는 손을 숨기면서, 시장을 서서히 질식시키려 한다. 상업, 무역, 금융을 국가가 주도하여 스탈린식 경제체제로 돌아가려 한다. 먼저 시장이 아니라 국가가 식량 판매를 독점해야 한다며 양곡판매소를 설치했다. 협동농장에서의 식량 수매와 외국에서의 수입을 국가가 전담하고 이를 양곡판매소에 공급함으로써 개인 밀수와 시장 판매를 줄이려 한다. 또 환전상을 단속해 외화 사용을 금지한다. 이 시도가 성공해 주민이 원화만 사용하게 된다면 시장은 힘을 잃고 국가의 경제장악력은 커진다. 식량뿐 아니라 소비재를 국영상점에서만 살 수 있게 하고 국가가 무역마저 독점하면 시장은 사라진다. 나아가 주민이 양곡판매소와 국영상점에서 지출한 돈을 은행에 예치하고 이를 기업의 대출 재원으로 삼으면 사회주의 금융이 회복된다. 마르크스를 빌자면 상부구조인 정치가 하부구조인 경제를 바꾸려는 시도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권력을 유지하려는 독재자와 생존을 갈망하는 주민 사이 거대한 충돌이 북한에서 진행 중이다. 이 결과에 따라 북핵 문제뿐 아니라 체제 유지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북한은 겉만 봐선 모른다. 안과 밖, 전체를 봐야 한다. 정치와 군사, 경제와 사회를 연결해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정책을 세워야 한다. 지력(智力)이 없으면 전략이 나올 수 없다.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석좌교수

    2023.10.11 01:03

  • [중앙시평] 동성결합 법적 편입, 법원에 맡길 것인가?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얼마 전 동료 법조인으로부터 “대한민국 운명은 판사 펜 끝에 달려 있다”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재명 대표 구속영장도 판사 한 명이 발부 또는 기각을 결정한다. 경우의 수대로 시나리오를 써봐도 국정에 엄청난 변수를 가져올 게 분명하지 않나”는 거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판사들이 내리는 경우가 점차 늘고 있다.     ■  「 동성 커플 피부양 자격 인정 판결 ‘혼인은 남녀 결합’ 법체계와 배치 성적지향, 선천적이라 단정 못 해 사회적 합의 및 입법 절차 밟아야 」    올해 초엔 ‘동성결합 상대방에게 국민건강보험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라’는 꽤 놀랄만한 하급심 판결이 나왔다. 1심인 서울행정법원은 “동성결합이 남녀결합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없고, 구체적 입법 없이 혼인의 의미를 동성결합에까지 확대해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단의 자격 불인정이 적법하다고 봤다. 그러나, 2심인 서울고등법원은 “이성 관계인 사실혼 배우자는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고 동성 관계인 동성결합 상대방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에 대하여 성적지향(性的指向)을 이유로 한 차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위법이란 판단을 내렸다. 특히 “동성결합은 동거·부양·협조·정조의무에 대한 의사의 합치 및 밀접한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 관계를 전제한다. 이제 사회보장제도를 포함한 공법적 관계를 규율하는 영역에서 성적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야 한다”는 열변까지 토했다. 1심과 2심의 결론이 엇갈린 이 사건은 현재 최종심인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2심이 성적지향은 선택이 아닌 본성이라고 단정한 점이다. 그러나, 동성애 취향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1900년대 연구들은 금세기 들어 과학적 근거들이 탄핵받고 있다. 2016년 존스 홉킨스 대학 연구팀은 200개 이상 동성애 관련 논문을 분석한 결과 성적지향이 선천적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 정신의학회 홈페이지에도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의 원인을 묻는 말에 ‘모른다’는 답을 달아 놓았다. 오히려 동성애 운동가들은 ‘동성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물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선택권을 강조한 것이다.   가장 근본적 문제는 법률상 또는 사실혼 배우자가 ‘남녀 사이의 결합’인 혼인을 전제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국민건강보험법 제5조 제2항 제1호는 피부양자의 자격요건을 ‘혼인’을 전제로 한 ‘배우자’로 한정하고, 헌법재판소나 대법원도 ‘혼인’에 관하여 ‘1남 1녀의 정신적·육체적 결합’이라는 명확한 정의적 해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녀에 한하지 않은 사회적 결합관계를 혼인에 준하는 공동체로 포섭할 것인지는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둔 ‘입법자의 결단’이 필요한 부분이다. 개별적 효력을 갖는 사법작용을 통해 뚝딱 결론을 낼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동성결합 피부양자 자격인정이 건강보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란 점이다. 국민연금법, 군인연금법, 고용보험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 각종 사회보장 관련 법령은 ‘동성결합 상대방’에게 사회보장수급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위 법률들이 모두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에 해당한다면 전체 법질서의 체계 정합성이 적잖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가족의 개념이 혼란에 빠지고, 동성결혼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오른다. 모든 법령, 조례와 규칙, 각종 제도 및 정책 전체를 유기적으로 고찰해야 할 문제다.   현재 동성결합은 대한민국의 사회적 시스템과 법률적 테두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 동성 관계의 여러 유형 중 어디까지 동성결합으로 볼 건지, 동성결합을 참칭하는 경우 어떤 방법으로 진위를 가릴 건지 학문적 논의조차 찾기 힘들다. 개념 정립과 편입 여부에 관한 사회적 논의들이 성숙했다고 보기 어렵고, 구성원들의 폭넓은 공감을 받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법률과 판례도 마찬가지다. 사실혼 배우자에겐 일정한 권리·의무 내지 지위를 부여하고, 법률혼에 준하는 효과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성결합 상대방에겐 어떤 법률에서도 권리·의무나 지위를 부여하고 있지 않고, 판례도 가족관계에 준하는 생활공동체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성결합 상대방과 사실혼 배우자를 동일하게 보고 피부양자 규정을 똑같이 적용한 건 판사들이 입법부를 대신해 법률을 창설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과연 동성결합을 사회보장제도에 편입할 것인지, 편입한다면 어떤 입법론을 선택할 것인지는 전체 법질서를 염두에 둔 열띤 토론과 치밀한 검토를 통해 ‘사회적 합의’로 해결할 문제다. 단순히 법원의 판단에 기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또는 정책적 이슈다. 판사들이 시대의 흐름을 좌우하고 국민을 선도하려는 생각은 좀 자제해 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2023.10.06 00:51

  • [중앙시평] 민주주의 위기와 정치 실종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다.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한 시민혁명은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아 사회나 국가를 통치할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만들었다. 시민은 선거를 통해 사회를 다스릴 권한을 통치자에게 위임하고 통치자는 견제와 균형의 국가 시스템 안에서 민주적 통치를 하게 된다.   이런 민주주의 사회 질서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삼권분립과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에서조차 선거결과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난입 사태까지 벌어졌다. 세계 곳곳에서 극단주의 정치지도자들이 등장하고 입법·행정·사법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상호존중의 민주주의 질서가 도전을 받고 있다.     ■  「 극단주의 득세 민주주의 흔들어 상대편 탓만 하는 정치권 무능 정부 역할은 미래 위한 정책설계 화합의 예술 보여주는 정치 절실 」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지켜야 할 정당에서조차 유리하지 않은 사법부 판결이 나오면 강한 비난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행정과 입법 사이에도 질서는 무너지고 있다. 장관과 국회의원의 입씨름이 도를 지나쳐 정책토론이 아니라 감정적 상호비방으로 일관한다. 미국도 대통령이 의회에서 연설하고 나자 하원의장이 그 자리에서 연설문을 찢어버릴 정도로 심각한 갈등 양상을 보인다.   정치는 서로 다름을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지혜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혜를 갖춘 정치와 정치가는 실종되고 있다. 정치적 갈등의 심화는 극단적 강경파의 활약을 부추기게 된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의 예산안을 강경파 공화당 의원들이 반대하고 나서서 연방정부 셧다운을 몇 시간 남겨 놓고 임시 예산안이 간신히 통과되었다. 하지만 이후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이 이런 합의를 끌어낸 자기 당 하원의장에 대해 불신임안을 상정한다고 한다. 20여명에 불과한 친트럼프계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이 공화당 하원의원 221석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주 민주주의문화재단(Democracy and Culture Foundation)과 뉴욕타임스 주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아테네 민주주의 포럼’에 참석했다. 전 세계 지성인들이 모여 민주주의의 위기와 해법을 고민하는 자리였다. 최근 독재적 지도자들의 권력이 확장되고, 인공지능이 인간 노력의 가치를 침해하고, 빈부격차는 심화하고, 기후변화는 더욱 심각해지고, 표현의 자유는 공격을 받고, 유럽에서 전쟁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포럼에서는 21세기가 직면한 민주주의 위기의 극명한 현실로 보았다. 지난 20세기 후반 누려왔던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는 오늘 과연 인류의 미래에 희망이 있는가를 고민하는 모임이었다.   포럼에서는 민주주의 위기가 발생한 원인은 급격한 사회변화에 있다고 분석했다. 디지털 혁명으로 사회가 빠르게 변하면서 사람들은 이에 적응하지 못해 위협을 느끼게 된다. 기술의 발전은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이에 따라 돈의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정부의 힘도 커지지만, 시민의 영향력은 점점 감소한다고 느껴서 불안감이 커진다고 한다. 불안감과 무력감은 모든 문제를 자신이 아니라 사회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 이것이 정치 선동과 연결될 때 극단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개인의 사회적 불신뿐 아니라 정치권도 상대에 대한 불신으로 사회문제를 풀려고 한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사회문제를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상대편의 과거 잘못에 대한 비난이 우선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나 윤석열 정부의 카르텔 철폐를 보면 모두 상대편을 탓하는 닮은꼴이다. 정부의 역할은 남의 탓보다는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정책설계를 하는 일이 우선이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프리츠 하이더(Fritz Heider)는 일찍이 이런 현상을 귀인이론(attribution theory)으로 분석했다. 인간은 종종 문제의 본질보다는 이를 외부적 상황이나 개인적 특질의 탓으로 돌려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도 상대편 집권세력의 과거를 청산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서로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회 불신을 가중하는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정치선동가들이 사회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사회 불신과 개인의 불안감이 언론의 편향보도와 개인 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정치 선동으로 인해 극단주의 세력의 역량을 더욱 키워주고 있다. 극단주의 세력의 득세는 기존 정당의 정치질서나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쉽게 무너뜨린다. 극단적 팬덤 현상은 헌법기관이라고 하는 국회의원의 소신을 쉽게 마녀사냥감으로 만들고 정당의 기본 이념이나 가치보다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게 한다.   우리 인류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세계대전을 일으켜 몰락한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극단적 세력이 득세할 때 합리적 사고는 길을 잃는다. 정치는 치열하게 대립하더라도 결국은 화합을 끌어내는 예술이다. 정치권에서 내로남불이 일상화되어가는 오늘 김수환 추기경이 남기신 “내 탓이오”라는 말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2023.10.04 00:24

  • [중앙시평] 중국이 러·북의 접근을 견제할까?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은 많은 파문을 남기고 끝났다. 이제 세간의 관심은 러·북 정상회담의 후속 진전과 중국의 행보에 쏠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러·북 협력의 잠재력은 제한적이며, 중국은 러·북 접근을 견제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는 한국이 중국의 견제심리를 활용하여 러·북에 대응할 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편리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소망대로 될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다.     ■  「 중의 러·북 견제는 기대 어려워 한·러 및 한·중 관계 관리하면서 한국형 미·중·러 좌표 수립 통해 비핵 평화 통일 위한 외교 나서야 」    원래 북한과 러시아는 국제제재 하에서 동병상련하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더욱 접근한 바 있다. 양국은 자신들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적대시 정책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이후 양국은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이 강화되는 상황을 보면서, 정상회담을 통해 군사협력 가능성을 과시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그것도 안보리 결의를 무시하는 방식으로 하기로 조율한 것 같다. 이미 러시아는 핵미사일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의 역성을 들었는데, 급기야 제재 대상인 북한과 손잡고 미국 주도의 안보 구도에 대항하니, 한반도의 대결은 심화하고 북핵 문제 해결 여건은 나빠졌다.   러·북 양자 측면에서 볼 때, 이번 정상회담은 전략적 협력 관계를 알리는 계기였다. 호혜적인 실익 추구 계기이기도 했다. 일례로 러·북이 무기와 식량 에너지 군사기술을 거래하는 것은 서로 유익하니 추진동력이 클 것이다.   한국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한·러가 오랫동안 가꾸어 오던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유명무실해졌다. 그 지위는 러·북으로 넘어갔다. 한·러 우주, 방산 협력도 끝나고 이 사업이 러·북 간에 전개될 판이다. 이미 최저점에 이른 한·러 관계는 러·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지속되는 악순환에 빠질 소지가 커졌다.   이러한 러·북의 접근에 대해 중국은 어떻게 대처할까? 물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러의 관점에 차이와 경합이 없지 않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중·러가 오랫동안 미국이라는 공통의 적수를 상대로 최고 수준의 연대를 구축해왔다는 점이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한·미·일 연대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중국은 러·북이 보인 미국 대항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 중국이 러·북 협력에 견제심리를 발동하여 중·러 연대를 손상할 가능성은 적다. 비근한 예로 중국이 러시아의 세력권인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키워도 중·러 연대에 별 지장은 없다.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지 않고 무기를 지원하지 않지만, 중·러 연대는 약화하지 않는다.   이처럼 러·북 접근의 부정적 여파는 상당하고 중·러 연대는 비교적 견고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러·북 협력의 잠재력을 경시하고, 가능성이 적은 중·러 간의 틈새 활용에 기대를 건다면 우리의 대응에 착오가 생길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중국을 견인하여 러·북을 견제하려 하면서 러·북에는 강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런 접근이 성과를 낼지 의문이다. 한·중 관계도 최저점인데 말이다. 러시아의 반작용과 한·러 관계의 추가 악화만 초래할 수 있다. 오히려 중·러가 연대를 지속하며, 향후 중·북 협력도 증대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대처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관련하여 고심해야 할 것은 지금의 시대 상황이 한·미·일 공조를 필요로 하나, 이는 불가피하게 한러, 한·중 갈등이라는 기회비용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앞에는 한·미·일 협력의 새 시대와 함께 북·중·러와의 대립의 시대도 열린 셈이다. 중·러와의 관계가 크게 악화하면 한국의 주요 외교·안보 과제인 한반도의 비핵화, 평화정착, 통일추구는 요원해진다.   이런 흐름을 고려할 때, 당장은 할 일과 안 할 일을 변별하는 것이 중요하지 싶다. 안 할 일은 중·러와 대증적으로 치고받기를 하여 관계를 계속 악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면 외교의 공간이 사라진다. 과거 냉전 시기에 한국은 미국 진영의 최전선 국가였으며, 중·러와 외교 부재 상태에 있었다. 그 시대에 미·일은 중·러와 일정한 외교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은 냉전 내내 누구보다 더 분단, 긴장, 대립에 따른 비용을 지불해야만 했다. 신냉전 시대에 한국이 그런 상황으로 회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할 일은 미·중·러에 대해 통합되고 조율된 한국의 대응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첨예한 미·중, 미·러 대립구도 속에서 운신하는 한국에 대미, 대중, 대러 정책이 별개일 수 없다. 그 전략 속에는 대미 공조는 어느 정도이고 중·러와의 외교 공간은 어느 만큼인지를 알 수 있는 한국형 좌표가 내장되어야 한다. 이런 전략과 좌표가 있어야 중·러와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은 러·북의 움직임과 중국의 셈법을 잘 헤아려서 최적의 대처방안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신냉전 기류가 커지는 지금, 한국외교는 과거 냉전 시기와는 달리 한·미·일 공조를 하면서도 한국 나름의 외교·안보 과제인 비핵 평화 통일의 길을 열어가는 폭넓은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냉전과 탈냉전을 거치면서 G7 반열의 국가로 성장한 한국이 나갈 길이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2023.09.27 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