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혜리의 시선]'잘못이 잘못이 아닌' 대통령의 남은 3년

    지난 16일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 모두발언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국민은 사과를 기대했지만 윤 대통령은 "국정방향은 옳지만 국민체감이 부족했다"며 변화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연합뉴스 '병식이 전혀 없네. '    여당의 4·10 총선 참패 이후 윤석열 대통령의 첫 육성 입장표명 자리였던 지난 16일 국무회의 모두발언 생방송 직후 한 젊은 의사가 SNS에 올린 글이다. 이 포스팅을 보자마자 좀 과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까지 썼는지 묘하게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었다. '병식(病識)의 부재'는 병에 걸렸지만 인지를 못 하거나 아예 부정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의학용어인데, 오죽 답답하면 이런 표현까지 썼을까 싶었다. 대통령이 이번에도 또, 진솔한 사과를 기대한 국민을 배반해 화만 더 돋웠으니 하는 말이다.     ■  「 형식·내용 부적절한 담화 반복 강서 보궐 참패 때도 "웬 호들갑?" 총선 참패 불구 태도 변화 없어 」    지금껏 민심과 어긋난 게 어디 사과의 타이밍뿐인가.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할 때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사회적 합의를 구하기는커녕 정부 내의 공론화 과정조차 없이 대통령 혼자 어느 날 뜬금없이 불쑥 관련 이슈를 꺼내 방침을 지시하곤 했다. 이렇게 나온 대통령 말 한마디로 입시(사교육)·연구 개발(R&D)·의료 등 우리 사회의 중요한 여러 시스템이 한순간에 초토화되다시피 하는 걸 국민은 무기력하게 목격해야 했다. 취임 후 2년 넘게 지속해온 이같은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의 원인을 놓고 그동안 '김건희 여사의 입김'이라느니 '대통령실 내 특정 강성 문고리 권력의 오판', 혹은 '참모의 무능' 등 여러 해석이 분분했다. 공식적인 보고 라인을 통한 결정과 집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고들 느꼈기에 나온 반응들이다. 이런 추측을 하다 하다 '병식의 부재'라는 상상력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디올백'으로 상징되는 김건희 여사의 부적절한 처신을 작위적 연출의 KBS 사전 녹화 대담으로 어물쩍 넘기려던 것이나, 출국금지까지 당한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피의자인 전 국방부 장관을 굳이 대사로 임명하고 서둘러 출국시켜 외교적 망신을 자초한 일, 1999나 2001은 절대 안 되고 꼭 2000명이어야만 하는 오로지 대통령만 납득 가능한 의대 증원 수 지침 탓에 단 한 발도 앞으로 못 나가고 교착 상태에 빠져버린 의료대란까지….     잘못은 알지만 고집을 꺾기 싫어하는 성정의 발현이거나, 적당히 버티면 해결될 거라는 오판에서 내린 결정일 거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뭐가 잘못인지에 대한 인식이 국민과 사뭇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특히 정권 초부터 반복되는 인사 참사를 볼 때마다 이런 의구심이 더 강하게 든다.    지난해 10월 12일 김기현 당시 국민의힘 대표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뒤 열린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다. 여당은 국민의 경고로 받아들였지만, 윤석열 대통령은 생각이 달랐다. 연합뉴스 이번 총선 참패의 예고편과도 같았던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몇 주 뒤 대통령 최측근 중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가 들려준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잠시 복기해보자면 국민의힘 소속 김태우 당시 강서구청장의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 3개월 만에 윤 대통령이 무리하게 특별 사면을 하고, 바로 그 보궐 선거의 귀책 사유자를 다시 강서구청장 국민의힘 후보로 공천하도록 한끝에 결국 17.1% 포인트의 큰 차이로 더불어민주당에 완패했다. 여당의 선거 전략 실패라기보다 측근만 계속 돌려쓰는 윤 대통령 인사의 결정적 실패였다. 언론의 비판이 들끓었던 것은 물론이요, 여당 내에서도 독선적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그런 민심을 가장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윤 대통령이 선거 다음 날 이 최측근에게 "그깟 구청장 선거 하나 진 걸 갖고 웬 호들갑이냐"고 오히려 타박하더란다.     총선 참패와 관련해 겉으로는 참모를 내세워 비공개 대리 사과를 했지만, 이번에도 속으로는 "웬 호들갑이냐"며 의아해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결코 비약이 아니다. 요직을 검사와 지인으로 돌려막는 인사 스타일까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런 의심을 할 만한 사례가 차고 넘친다. 여당의 총선 열세가 점쳐지던 지난달 말, 윤 대통령이 여론은 아랑곳없이 갑자기 없던 자리를 만들어 본인의 20년 지기인 검찰 수사관 출신 주기환 전 국민의힘 광주시당위원장을 민생특별보좌관에 임명한 게 대표적이다.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측이 위성정당 비례대표로 지원한 그를 안정적 당선권 밖 순번에 배치한 데 따른 분풀이 인사였다. 국회의원 자리를 거저 주지 않는다고 대통령 측근이 몽니 부리는 꼴도 볼썽사나운데, 대통령이 이를 만류하는 대신 그 엄중한 시기에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다니 정말 뜨악했다. 특히 정권 초기 주 특보 아들을 대통령실에 불러들여 이미 사적 채용 논란을 일으킨 전력을 고려하면 국민 입장에선 더더욱 해석 불가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앞으로의 3년, 정말 걱정된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4.04.18 00:30

  • [안혜리의 시선]'정치재해' 보상법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조국혁신당의 비례대표인 조국 대표(가운데)와 박은정 전 검사(왼쪽), 차규근 전 법무부 출입국ㆍ외국인정책본부장(오른쪽). 정치보복을 앞세워 지지율을 얻고 있는데, 이들 모두 당선권이다. 연합뉴스 총선이 2주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치 열기가 고조되는 게 아니라 국민의 혈압만 치솟고 있다. 각 당은 요동치는 지지율 그래프를 보면서 차지할 의석수와 그로 인한 정치적 역학관계 계산에 여념이 없겠지만, 대다수 국민은 이제 아예 총선 결과를 궁금해하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정확히는, 기대를 접었다.    여야 각 정당의 대진표를 보고 있자면 대략 난감이다. 투표하든 말든, 무슨 당을 선택하든 결국 사리사욕·권력욕에 눈 멀어 자기 당 보스의 아부꾼 노릇을 자청하며 충성 경쟁할 사람만 국회에 가득 채워질 게 뻔해서다. 한마디로 표 줄 곳이 없다. 민생에 눈 감은 사상 최악의 21대 국회를 견디고, 거대 양당의 수준 미달 공천 파동과 저질 막말 경쟁을 겨우 참아냈더니 저 앞에 놓인 게 역대급 퇴행적 국회라니. 게다가 이들이 막대한 국민 세금을 받아가며 반드시 저지르고야 말 온갖 분탕질을 생각하면 화가 나다 못해 총선 이후가 정말 두렵다.    ■  「 표 줄 곳 없는 역대 최악 22대 국회 조국·정치 검사의 보복정치 임박 '정치판 중처법' 도입하고픈 심정 」    안 그런가. 어느 당이 몇 석을 가져가는지와 무관하게 이미 안정적 당선권에 든 각 당 비례대표·지역구 후보의 면면만 봐도 22대 국회에서 펼쳐질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국회에 입성한 정치 검사들의 보복 정치, 패싸움 정치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나라를 두 동강 낸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윤석열 정부에 대한 정치 보복을 내걸고 창당한 조국혁신당은 현재 지지율(22%)대로라면 지역구 한석 없이 무려 12석을 확보한다. 비례대표 명단엔 2심 징역 2년을 받은 조 전 장관 본인(2번)은 물론 '윤석열 찍어내기 감찰'로 해임된 박은정 전 부장 검사(1번), 울산시장 선거 개입으로 1심에서 징역형 받은 검수완박 주역 황운하 의원(8번) 등이 포함돼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방탄 국회 운영에 지칠 대로 지쳤는데 아예 복수심에 사로잡힌 범죄자들이 모인 이 기묘한 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어떤 난장을 벌일지 벌써 한숨만 나온다. 내놓겠다는 1호 법안이 '한동훈 특검법'이니 할 말 다했다. 여기에 현직 검사 신분으로 조국 북 콘서트에 등장해 윤석열 정부 비판을 쏟아냈던 이성윤 전주시을 후보 등 민주당의 친문 검사 출신 4인까지 가세하면 정말 목불인견이겠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9일 법원 허락없이 본인 재판은 불출석한채 원창묵, 송기헌 후보와 함께 원주 중앙시장을 방문했다. 22대 국회는 21대보다 더한 방탄 국회가 될 전망이다. 뉴스1 지난 2019년 조국 사태는 우리 사회에 공정과 정의를 다시 세우고, 내로남불을 일삼는 위선적 인물을 정치권에서 솎아내는 계기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민심의 심판과 사법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인물들이 기존의 몰상식에 더해 몰염치까지 장착하고 막강한 입법 권력을 쥐게 되다니 기가 막히다.    여기엔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당인 국민의힘의 책임이 적지 않다. 표 갈 곳 없다는 고민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콘크리트 보수층마저 선뜻 찍기를 저어할 만큼 오만한 국정 운영이 이어지는데 당은 대통령 눈치 보느라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다. 공천이라도 잘했으면 어느 정도 만회했겠지만 이마저도 혁신과는 거리가 먼 구태 그 자체였다.    명분 없는 의원 꿔주기로 탄생시킨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는 부실 검증 논란에 한 차례 대대적 조정을 했는데도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동교동계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조카인 한지아 비대위원(11번), 그리고 조정 끝에 13번에서 당선권(16석) 밖(21번)으로 밀리긴 했지만 이명박 정부 법무비서관 강훈 변호사의 딸인 강세원 전 대통령실 행정관을 공천해 불필요한 '(큰)아빠 찬스' 논란을 만들었다. 이러니 정치적 자신이라고는 후광밖에 보이지 않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위인 곽상언 민주당 종로 후보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그렇게 기회의 공정을 요구해왔는데 22대 국회는 여야가 합심해 세습 권력의 힘만 보여주게 될 판이다.    지역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국민의힘은 당초 약속과 달리 현역 85%에 공천을 몰아줬다. 그 과정에서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마구잡이 돌려막기 공천을 했다. 이러니 '비명횡사'(친이재명 아니면 공천에서 살아남지 못함)로 벼락공천돼 본인 지역구 투표권조차 없는 한민수 민주당 강북을 후보의 흠을 부각하지도 못한다.    이런 의문이 든다. 민생 법안은 외면하고 맹목적 추종이거나 발목잡기만 일삼는 국회의원이 왜 필요한가. 무엇보다 국민은 왜 이걸 지켜보느라 스트레스받아야 하나. 이쯤 되면 웬만한 산업재해는 저리 가라 할만한 '정치재해'를 온 국민이 겪는 셈인데, 정치판 중대재해 처벌법이라도 만들어 수준 미달 정치인들이 국민 뒷목 잡게 할 때마다 당 대표에게 1년 이상의 징역이나 10억원의 벌금을 물렸으면 좋겠다. 아니면 선거 치를 돈으로 국민에게 정치재해 보험금이라도 주든가. 너무 답답하니 이런 헛된 망상까지 든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4.03.28 00:28

  • [안혜리의 시선]기어이 의사의 굴복을 원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의사를 향한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6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하는 불법 집단행동에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중히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의사들은 "국민 생명을 볼모로 잡는 건 정부"라며 반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의대 교수가 잇따라 사직 의사를 밝혔다. 경북의대 이식혈관외과 윤우성 교수와 충북의대 심장내과 배대환 교수다. 두 사람 모두 윤석열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의 주요 명분으로 삼는 부족한 지역 필수의료를 책임지고 있는 핵심 인재들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공개적으로 사직 의사를 밝힌 날은 윤 대통령이 경북대에서 열린 16번째 민생 토론회에서 "지역 기반 명문 의대 정원을 대폭 늘려 좋은 의사를 길러내겠다, 대구를 비롯한 지방에서 그 혜택을 더 확실히 누리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한 바로 그 당일이었다.    윤 교수는 "외과가, (신장이식 등 혈관질환을 다루는) 이식혈관외과가 필수과라면 그 현장에 있는 우리에게 왜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걸 짊어진 전공의 뒤에 (교수가) 숨는 현실이 부끄럽다"며 사직했다. 배 교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  「 10년 뒤 의사 1만명 늘리겠다고 의사 8000명 면허 취소 옳은가 이미 접어든 필수의료 붕괴의 길 」  젊은 교수들의 사직 소식에 언론은 "수억 원 버는 배부르고 선민의식 가득한 엘리트 의사들의 밥그릇 투쟁에 교수까지 합류했다"는 식으로 비판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사직은 파국으로 치닫는 작금의 의·정 갈등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출발은 지역의료·필수의료 살리기와 고령화하는 의사집단에 새 피 수혈하기였다. 그런데 그 명분이 사라진 건 이미 오래고, 처벌 만능 검사 정부의 의사 군기 잡기로 변질해 가뜩이나 부족한 필수의료 인력만 의료현장을 떠나게 만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침에 반발해 가장 먼저 현장을 떠난 건, 수억 원 버는 성형외과·피부과 개업의들이 아니다. 명예와 사회적 지위를 누려온 의대 교수도 아니다. 정부가 진작에 해결했어야 할 비정상적인 원가 이하 의료수가 구조 탓에 저임으로 중노동을 견뎌온 각 종합병원의 가장 약한 고리인 필수의료 전공의들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원가 이하로 물건을 팔아 계속 적자를 보는 어떤 회사가 비용을 줄여보겠다고 직원 40%를 저임의 수습사원으로 채워놓고는 연속 36시간 잠도 못 잘 만큼의 엄청난 노동강도를 강요해온 것과 같다. 이런 회사에 더는 미래가 없다고 전부 사표를 던졌더니, 사측이 이건 사표가 아닌 불법 파업이라며 사표는 수리할 수 없으니 무조건 근무하라고 윽박지르다 못해 여길 나가면 아무 데도 취직 못 하게 불이익 주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윤 교수가 "모든 걸 짊어진 전공의 뒤에 숨어 부끄럽다"고 한 이유다.    결코 비약이 아니다. 가령 의료진 12명이 투입돼 평균 14~15시간 하는 '고혈류 뇌혈관 우회수술'의 수가는 237만 5000원이다. 수가를 적용받지 않는 성형외과 코 수술보다 훨씬 싸다. 또 '뇌동맥류 결찰술' 수가는 250만원인데, 일본은 1140만원이다. 이렇게 낮은 수가 탓에 수술할수록 병원이 적자를 보는 구조라, 병원은 전문의를 적정 인원만큼 채용하는 대신 공백을 전공의들로 채워왔다.  5일 서울의 한 대형 병원 응급실 모습. 전공의에 이어 전문의를 딴 전임의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모든 전공의가 대체 불가하지만, 전국 모든 병원이 이런 상황이라 특히 필수의료 전공의는 더더욱 귀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난해 말 집계된 2024년도 전공의 지원율을 보면 필수의료 진료과목 지원율 감소 추세에 따라 올해도 소아청소년과 25.3%, 흉부외과 38.5%, 산부인과 67.4%, 응급의학과 79.6%에 불과했다. 환자를 제대로 보려면 꼭 필요한 적정 정원조차 채우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 부족한 수만큼 해당 필수의료로 진로를 택한 전공의들이 이미 오랫동안 눈 한번 못 붙이고 어쩔 땐 연속 36시간, 또 누구는 이틀에 한 번 당직을 서는 가혹한 업무환경을 견디며 지금까지 병원을 지켜왔다는 의미다. 이들은 의사면허는 땄으니 선배 수만 명이 그리했듯이 굳이 어려운 전문의를 따지 않고 지금 당장에라도 '진료과목 성형외과·피부과' 간판을 내걸고 얼마든지 쉬운 돈벌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 동안 병원을 지켜왔다. 그런데 돌아온 건, 정부의 의대 2000명 증원 방침 첫날부터 대통령·총리·검찰총장 등이 돌아가며 내뱉은 "협상 불가, 면허 취소, 처벌" 발언, 즉 범죄자 취급이었다. 히포크라테스 아니라 예수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 아닐까.    혹자는 "이번에 윤 정부가 2000명 증원을 관철하면 총선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라며 응원한다. 총선 결과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2000명을 관철하든, 단 1명의 정원도 못 늘리든 이미 소아청소년과에서 목격했듯이 앞으로는 의대 정원과 무관하게 모든 필수의료를 선택하는 의사가 크게 줄어들 것이고, 이미 고령인 현직 전문의들이 다 떠나면 우리 생명을 살릴 의사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던 수준 높고 값싼 한국 필수의료의 붕괴, 우린 이미 그 길에 접어들었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4.03.07 00:28

  • [안혜리의 시선]'건국전쟁'의 박수엔 이유가 있다

    이승만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14일 현재 관객 38만명을 넘으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상영관마다 매진이 이어지고, 영화가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오는 이례적 현상까지 등장했다. 연합뉴스 남다른 집안 분위기 덕분에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에서 자행돼온 전 국민적 이승만 폄훼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 지금도 집 이곳저곳의 책꽂이에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의 업적을 기술한 관련 서적 10여 권이 손때 묻은 채로 꽂혀 있다. 대한민국 번영을 이끈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1953)이나 독도를 우리 영토로 편입한 평화선(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선언·1952) 발표,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법무부 장관 시절 상공회의소 제주포럼 연설에서 언급한 농지개혁(1950) 등등…. 뛰어난 외교 역량을 토대로 시대를 앞서간 이런 공은 쏙 빼고 과오만 부각한 초·중·고 역사 교과서를 통해 이승만을 편향적으로 배운 다른 사람들보다 그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  「 다큐로 드물게 38만 흥행 가도 4·19 이면의 역설적 상황 다뤄 교과서가 안 다룬 평가에 울림 」  이승만을 재조명한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이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관객 30만명(14일 현재 38만명)을 넘기며 흥행 가도를 달린다기에 보러 가면서도, 그래서 오히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그저 숙제하는 심정으로 일단 영화 예매는 했지만 내심 '뭐 새로운 게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당시 맨해튼 카퍼레이드 모습. 100만 인파가 몰렸다.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은 이 사진을 본 후 워싱턴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어렵게 45초 분량의 동영상을 발굴해 70년만에 공개했다. [사진 기파랑] 무방비로 영화를 보다 도입부부터 울컥했다. 요즘 말로 '국뽕' 차오르는 영웅적 면모의 1954년 맨해튼 100만 인파 속 카퍼레이드 동영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정반대로 그의 가장 치욕스런 과오인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촉발한 4·19 시위 직후 서울대병원 문병 장면에서였다.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다친 학생을 위로하러 달려간 그는 울음을 가까스로 삼키며 한없이 죄스럽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를 가까이에서 보필한 김정렬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 『항공의 경종』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며 "한 사람도 더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며 하야를 결심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는 증언이 나온다. 영화는 사진으로도 미처 다 담지 못한 그의 진심을 이렇게 수 초 동안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스란히 전달한다.    국익이나 국민 의사에 반하는 잘못을 해도 진정한 사과는커녕 남 탓이나 남일 말하듯 하는 요즘 여야 정치인들의 유체이탈식 화법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평생 그토록 이 땅에 뿌리내리려고 노력했던 대한민국 국민의 자유민주주의에의 각성을 목격하고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 것이다. 그게 비록 자신의 정치적 사망과 맞바꾼 것이라도 말이다. 실제로 그는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비난한 적이 한 번도 없다(『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 오히려 하야 후 사저인 이화장에 머물 때 대만 장제스 총통의 위로편지에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가 있으니 나라의 미래가 밝다'는 답장까지 썼다. "이승만은 4·19를 유발한 부정적 존재인 동시에 4·19를 촉진한 긍정적 존재"라는 평가(박명림 등『이승만 대통령 재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4월 23일 4·19 시위로 다친 학생을 위문하러 서울대병원을 찾은 모습. 그는 시위대를 비난하기는커녕 부정을 보고 일어섰으니 "장하다"고 했다. [사진 기파랑] 결코 과장이 아니다. 줄곧 꿈꿔온 문명 부강한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려고 힘쓰는 국민을 만들기 위해 그는 교육을 가장 중시했다. 왕을 몰아내려는 역모죄로 1899년 투옥된 후 1904년 29살 나이로 옥중 집필한『독립정신』서문에는 '무식하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스스로 각성하여 올바로 행하며, 아래로부터 변하여 썩은 데서 싹이 나며, 죽은 데서 살아나기를 원하고 또 원한다'고 썼다. 영화에도 그가 교육에 기울인 노력이 잘 나타나 있다. 건국 후 대통령 취임 이후뿐만이 아니라 일제 치하 1910~20년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하던 시절부터 8개 섬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학생을 모으고, 여자라는 이유로 버려진 아이를 구해 공부시킨 감동적인 스토리가 나온다. 차별 없이 공부하라고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까지 지었다.  심지어 6·25 전쟁 중에도 학교 문을 닫는 대신 전시연합대학을 세우고, 전후 복구의 원동력이라며 대학생의 병역 유예 조치를 했다. 이런 정책 덕분에 광복 직후 70%가 넘었던 문맹률을 크게 낮췄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교육 기적을 이뤄냈다. 그렇게 공부한 학생들이 이후 박정희 시대 산업화는 물론 4·19라는 민주화의 토대를 이뤘다. 영화 말미에 "이승만이 놓은 레일 위에 박정희의 기관차가 달렸다"는 내레이션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과연 소문대로 아무도 시킨 사람이 없는데 한 자리도 비지 않은 영화관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두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고마움, 미안함, 그리고 부끄러움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4.02.15 00:32

  • [안혜리의 시선]친윤, 개딸 행태를 답습해서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3일 충남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이로써 두 사람의 갈등은 표면상 봉합됐다. 연합뉴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충돌은 한 위원장의 90도 폴더 인사로 일단 '봉합'됐다. 아무 죄 없이 영조의 노여움 앞에서 석고대죄할 수밖에 없었던 사도세자처럼 한 위원장은 살을 에는 한파에 패딩도 입지 않고 우산 없이 눈을 맞으며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 충남 사천시장을 찾은 윤 대통령을 맞았다. 만남 뒤 취재진에게는 "대통령에 대한 깊은 존중과 신뢰의 마음에 변함이 전혀 없다"며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한 위원장이 한껏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윤 대통령 체면은 살려주면서 다가오는 총선에 악재로 작용할 소모적인 내분 확산을 막았기에, 여권은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  「 윤-한 갈등 촉발한 김건희 명품백 대통령 무리수에 친윤은 궤변 상식 외면하면 민심 멀어진다 」    두 사람의 속마음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다만 국민 눈높이로 보자면 안도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단순히 누군가의 사과나 누군가의 사퇴와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한 '봉합'이냐 '해결'이냐의 차원을 넘어 윤석열 정부의 근본적 한계를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계란 바로 김건희 여사다. 그동안 적잖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추측만 했다면, 이번 대통령실의 비대위원장 사퇴 요구 소동을 계기로 다들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20년을 동고동락한 최측근에다 지난 문재인 정권에선 모진 탄압까지 함께 맞서 싸운 동지적 관계조차 한순간에 위험에 빠뜨릴 만큼 김 여사는 이 정권의 불가침 성역 같은 존재라는 사실 말이다.    한 위원장은 법무부 장관 시절은 물론 비대위원장 취임 후에도 줄곧 김 여사를 두둔하는듯한 모습이었다. 대통령과의 수직관계를 벗어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수준의 변화를 기대하는 적잖은 국민은 그래서 오히려 실망했다. 김 여사와 관련해 당내 인사로선 처음으로 김경율 비대위원이 문제를 제기한 이후인 지난 18일과 19일 한 위원장이 한 발언도 국민 눈높이에선 과하기는커녕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대통령더러 야당의 김건희 특검법을 받으라거나 김 여사더러 명품백 수수와 관련해 당장 사과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고작 "국민이 걱정할 부분이 있다"라거나 “국민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이를 문제 삼아 다른 꼬투리를 대서 취임 28일밖에 안 된 집권당 대표를 '또' 갈아치우겠다고 나섰다. 게다가 이 문제를 제기한 비대위원 사퇴를 양측 화해의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누가 봐도 명분이 없을뿐더러 비상식적이다.  김경율 비대위원(가운데)이 지난 22일 국민의힘 비대위에 참석했다. 김 위원은 앞서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논란과 관련해 당내 인사로는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뉴스1 그런데 이른바 친윤이라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이들은 이번 갈등을 촉발한 김 여사의 명품백 논란과 관련해 "피해자에게 사과하라는 격"이라며 김 여사 엄호에 나섰다. 윤심의 핵심이라는 이철규 의원은 "국민이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려한다"는 식으로 국민을 가르치려드는 태도까지 보였다. 이 의원을 비롯해 장예찬 전 최고위원, 이용 의원 등 윤 대통령 부부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이들이 말하는 진실은 딱 하나다. 전후 맥락 다 잘라내고 몰카 함정이었으니 그저 김 여사는 무고한 피해자라는 거다.    대통령 부인이 특정 세력의 저열한 몰카 공작에 속았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걸 몰라서 민심이 요동치는 게 아니다. 민심이 김 여사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건 애초에 대통령 부인 자리에 걸맞은 공적 마인드 하나 없이 그런 인사와 거리낌 없이 만남을 이어가고, 아무리 사석이라지만 국정에 개입하는듯한 부적절한 언행을 쏟아내고, 결정적으로 값비싼 여러 선물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하다 하다 이젠 공작을 진행한 친북 목사한테 받은 300만 원짜리 디오르 백을 김 여사가 돌려주면 국고 횡령이라는 궤변까지 이철규 의원 입에서 나왔다. 김 여사는 이 선물을 사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와 규정에 따라 받아 처리했다는 주장을 하려고 이런 무리수까지 두는 모양인데, 기가 막히다. 법상으로는 대통령이나 공직자가 직무수행과 관련해 국가적 보존 가치가 있는 선물인 경우 즉각 신고하고 선물을 인도하도록 돼 있는데 디오르 백이나 샤넬 화장품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호위무사들의 일련의 발언은 조국 사태 때 어용 지식인을 자처한 유시민 작가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측의 증거 인멸 시도를 "증거 보존"이라는 궤변으로 옹호하던 걸 떠올리게 한다. 또 적잖은 친윤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김경율 비대위원을 맹비난하며 사퇴를 요구하는 대목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하나 지키겠다고 당내의 합리적인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는 '개딸' 행태와 정확히 겹쳐 보인다. 개딸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출발한 비대위에 개딸의 그림자라니. 이래저래 국민의 근심만 깊어진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4.01.25 00:26

  • [안혜리의 시선]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고 싶다는 희망

    지난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에서 피습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헬기로 서울로 이송된 후 다시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오전 10시 27분 목의 1.5㎝ 열상으로 경정맥 손상이 의심되는 중증 외상 환자 발생. 구급 장비 갖춘 소방차가 출동해 응급조치 취한 후 20여 분 뒤인 10시 49분 구급차 현장 도착. 10㎞ 거리 병원 응급실 대신 14㎞ 떨어진 인근 축구장으로 이동. 11시 4분 119 헬기(소방 응급의료헬기)를 타고 사고지점에서 27㎞ 떨어진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 도착. 응급 조치와 수술에 필요한 검사를 마친 13시 무렵 다시 119 헬기를 타고 410㎞ 떨어진 서울대병원으로 출발. 원래 14시 무렵 도착 예정이었으나 서울대병원 헬기장 공사로 인해 서울 용산구 노들섬 헬기장으로 착륙지점이 바뀌는 바람에 1시간 지연된 15시 도착. 구급차 이용해 18㎞ 떨어진 서울대병원 응급의료센터로 출발해 15시 19분 병원 도착. 15시 45분 수술 시작.    지난 2일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보던 중 "살해 의도로 달려들었다"는 60대 남성의 흉기에 피습당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날 이송 동선이다. 만약 다른 정보 없이 경로만 알려졌다면 대다수 국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섬뜩한 테러를 규탄한다"며 이 대표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는 한편,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가 이렇게까지 엉망이었느냐"며 의사와 병원을 향해서도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을 거 같다. 중증 외상 환자가 무려 총 450㎞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하고 허공에서 지체하느라 사고 발생 5시간을 넘겨서야 수술을 받은 건 누가 봐도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통상 중증 외상 환자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은 1시간 내외다.  지난 2일 이재명 대표가 서울 용산구 노들섬 헬기장에 도착한 후 서울대병원 이송을 위해 구급차로 이동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헬기장 공사로 도착이 지연됐다. 연합뉴스 표면상 응급실 뺑뺑이처럼 보이지만 이 비상식적 동선은 의료진·병상 부족에서 파생하는 응급의료체계의 문제나 취약한 지방 의료 인프라 탓에 빚어진 일이 아니었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부산대병원 의료진은 대량 출혈 등 이송 중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하고자 전원 없이 직접 수술할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서울 행은 향후 일정을 고려한 이 대표 가족과 민주당 측 결정이었다는 얘기다.      ■  「 부산대 대신 서울대 택한 이재명 민주당 의료정책의 허점 드러내 이념 대신 현실 기댄 진단 내놓길 」  중증 외상에 관해선 국내 최고인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를 두고 이 대표가 119 헬기 최대 운항 거리(편도 400㎞, 전국 8대인 닥터헬기는 지역에 따라 70~120㎞)를 꽉 채우는 서울대병원까지 이동해 수술받은 소식이 전해지자 적잖은 의사들이 비판을 쏟아냈다. 이들 의사들은 일부 반(反) 이재명 세력의 자작극 음모론이나 증상 부풀리기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촌각을 다투는 응급이 아닌데 세금으로 무상 지원하는 119 헬기를 두 차례나 이용한 것은 특혜가 아니냐"고 지적했다.    SNS에서 이런 논란이 빚어지자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테러로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본인 가족이 당해도 중증이 아니라거나 특혜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정치색이 달라도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선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당장 큰 봉변을 당한 사람을 두고 너무 야박하다는 마음일 것이다.    아마 대다수 국민 역시 강 대변인 주장에 동의할 거라 본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절차상 잘잘못을 따져 묻기 전에 치료부터 하는 게 우선이다. 또 강 대변인 지적대로 내 가족이 다쳤다면 당장 생사의 기로에 놓인 위중한 상태는 아닐지라도, 아니 그 정도로 긴박하지 않으니 오히려 수백 ㎞를 헬기로 이동해서라도 최고의 병원이라 생각하는 곳에서 수술받기 원할 거다. 인지상정이기는 한데, 지난 2004년 KTX 개통 이후 지방 사람들이 인근에 크고 좋은 병원이 있어도 서울의 빅5 병원만 찾는 통에 수도권 쏠림이라는 기형적인 의료 왜곡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추진해온 일련의 의료 정책들을 보면 보통 사람들의 이런 바람과 욕망을 무시한 채 이념에 경도돼 엉뚱한 해법만 내놓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가령 지난해 '지역·필수 의료 살리기 TF'까지 만들어 무리한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배경에는 지방에 의사와 병원이 없다는 진단이 깔려 있었다. 이를 토대로 헌법상 자유를 침해하든 말든 지방 붙박이 의사를 만들고 공공병원을 더 짓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의도치 않게 이번 사건으로 민주당 진단과 해법의 허점을 드러낸 셈이 됐다.   욕망을 부인하고 이념이나 당위에만 기대는 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특혜를 따져묻는 사람들에게 발끈하기 전에 민주당이 그걸 깨닫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안혜리 논설위원

    2024.01.04 01:26

  • [안혜리의 시선]어쩌면 명품 핸드백은 작은 문제일지 모른다

    대선을 앞둔 지난 2021년 12월 김건희 여사는 허위 이력 논란에 대해 “잘 보이려 경력을 부풀렸다”며 대국민사과를 했다.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약속했지만 지키지 않고 있다. 대통령 부인의 행보는 대선 때부터 논란이었다. 민간인 사업가 시절 행태야 새삼 다시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대통령 부인이 된 후엔 세금 내는 국민 눈살 찌푸리게 하는 행실은 물론 언행에도 조심해야 한다. 스스로 제어를 못 하면 대통령실 참모진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문제 재발을 막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론의 여지 없는 상식이다.  그런데 지금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에선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임기 초 김건희 여사 주변의 비선 논란이나 수천만 원대 액세서리 착용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 궤변 또는 무대응으로 일관하더니, 급기야 자칫 뇌물로 비칠 수 있는 수백만 원대의 화장품·핸드백 수수나 불필요한 인사·정무 개입 의혹 제기에도 여전히 모르쇠 전략을 이어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  「 시기 내용 측면 심각한 영상 공개 큰 파괴력 불구 대통령실은 침묵 부메랑으로 오기 전 해법 찾아야 」  대통령실은 지금 논란이 수그러들기만 기다리는 모양인데, 세상이 그리 간단치 않다. 잘못한 일에는 겸허히 사과하고 과장이나 왜곡엔 깔끔하게 해명해두지 않으면 결국 이게 발목을 잡아 윤석열 대통령, 아니 보수 진영 전체가 낭패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유튜브 채널 '서울의소리'가 몰카 함정취재를 통해 2주 전 공개한 30분 길이 영상 안에 다 들어있다. 지난 박근혜 정부의 탄핵 국면에서 튀어나온 최서원(최순실) 씨의 의상실 CCTV 장면을 통해 온 국민이 체감했듯이 영상의 파괴력은 매우 크다. 서울의소리 취재 의도와 방식이 워낙 저열하고 불법적이라는 건 명백하다. 그 자체로 죄를 물어야 한다. 웬만한 레거시 미디어가 이 문제를 가급적 다루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명품 선물 정도는 곁가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한 장면이 많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런 영상이 만천하에 공개된 이상 대통령실이 침묵한다고 언제까지나 수면 아래로 가둬둘 수 없다. 게다가 대선 기간 녹취록에 이어 벌써 두 번째 당하는 일이다 보니 이런 영상과 녹음이 언제 어디서 또 튀어나올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영상 속 김 여사는 김일성 생일 행사 참석 등을 위해 수차례 방북해 국가보안법 위반 조사를 받았던 친북 목사를 앞에 두고 거리낌 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여기엔 "제가 (문재인 정부에 대해) 엄청난 충성심이 있었던 사람이라…어쨌든 보수의 힘으로 탄생한 정부니까 그들의 비위를 살짝 맞추는 건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고"라는 식의 보수 조롱으로 여겨질 법한 발언도 포함돼 있다. 윤 정부 탄생에 힘을 모은 보수 진영 입장에선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백번 양보해 비공식 자리의 사적 대화라 치고 눈 한번 질끈 감을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6월 스페인 동포 만찬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날 착용한 펜던트는 사이즈에 따라 수천만원에서 1억원을 넘는 반클리프앤아펠 스노우플레이크 모델이다. 2주 전 공개된 '서울의소리' 영상에서 김 여사는 "지인에게 빌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문제는 그다음이다. 김 여사는 "저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끊어지면 적극적으로 남북문제 (해결에) 나설 생각"이라며 "우리 목사님도 한번 크게 저랑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면담을 마치면서 한 번 더 "일정 잡을 테니까 북한 문제에 대해 저랑 얘기하자"고 했다.  누가 실질적인 V1이니 V2니 하며 김 여사의 국정 개입 의혹에 군불을 때는 야당 측에 좋은 먹잇감을 던져준 거나 마찬가지다. 부부지간에 무슨 영역이든 사적 조언은 할 수 있고, 이런 간접적 방식으로 대통령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하지만 대통령 부인이 대체 무슨 법적 권한과 자격이 있길래 본인이 직접 남북문제에 나서겠다는 얘기를 거침없이 하고, 검증되지 않은 특정 인사에게 같이 일하자는 제안까지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데도 대통령실이 아무 해명을 내놓지 않는 건 진위 확인조차 못 할 정도로 여사님이 무섭거나 아니면 국민이 우습거나, 혹은 둘 다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까닭이든 국민 눈높이에선 이런 무책임한 대통령실을 더는 용납하기 어렵다.  이 영상은 시기 면에서도 매우 우려스럽다. 영상이 찍힌 지난해 9월 13일은 김 여사 주변 특혜 의혹으로 더불어민주당이 국정조사 으름장을 놓던 때다. 김 여사가 운영하던 코바나컨텐츠를 여러 차례 후원했던 H 건축 대표가 윤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은 데 이어, 대통령 관저 인테리어와 용산 대통령실 청사 리모델링 설계·감리용역을 수의계약으로 수주한 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적잖은 언론이 이런 잡음을 없애기 위해 김 여사를 공식적으로 보좌할 제2부속실과 대통령 친인척 비위를 감시하는 특별감찰관 임명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런 조언에 귀 기울이는 대신 세간의 관심이 잦아들면 국가의 주요한 정책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니 말문이 막힌다.  그간 대통령실 참모진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다. 만약 서슬 퍼런 대통령 부부 눈 밖에 날까 두려워 손을 놓고 있던 거라면 녹을 먹는 공직자의 자세가 아닐뿐더러, 언젠가 돌아올 후폭풍에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지금이라도 명심했으면 한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12.14 00:33

  • [안혜리의 시선]'민주당스럽다' 는 말 또 나오게 한 최강욱

    최강욱 더불어민주당 전 의원(왼쪽에서 두번째)이 민형배 의원(맨 오른쪽)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뜬금없이 여성을 비하하는 '암컷' 발언을 해서 비판받았다. 유튜브 캡처 온갖 추문의 중심인 더불어민주당 강경파 초선 모임 '처럼회'의 최강욱 전 의원이 여성 비하 발언으로 또 구설에 올랐다. 그는 검수완박 법안 처리를 위해 민주당을 위장탈당했던 민형배 의원의 북 콘서트에 참석해 김용민 의원 등과 검찰개혁 관련 대화를 하다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사회자가 조지 오웰의)『동물농장』에 비유했는데 유시민 선배가 말씀하신 코끼리, 침팬지 비유가 더 맞다" 며 "『동물농장』에도 암컷들이 나와서 설치고 이러는 건 없다"고 했다. 살짝 아쉬웠는지 한 문장 더 걸쳤다. "암컷을 비하하는 말씀은 아니고, 설치는 암컷을 암컷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     ■  「 또 나온 '암컷' 발언 속 여성혐오 실수 아닌 당의 내재된 습성 의심 여심 호소하다 선거 후엔 늘 돌변 」  여성혐오 혐의가 짙은 천박한 언어사용에 대한 비판은 일단 젖혀두고, 참 뜬금없다. 최 전 의원식 표현을 빌자면 수컷들끼리 치고받았던 검찰개혁 논의에 웬 "설치는 암컷" 타령인가. 이 맥락을 이해하려면 9개월 전 발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지난 2월 민주당 의원들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과 관련해 국회에서 김건희 여사 특검을 촉구하는 농성을 벌일 때, 유시민 작가의 지난해 tbs 라디오 인터뷰를 인용했다. "코끼리가 한 번 돌 때마다 도자기가 아작 난다. 코끼리가 도자기를 때려 부수려고 들어온 건 아닌데 (그저) 잘못된 만남이다. " 윤 대통령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국정을 망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그런데 최 전 의원은 굳이 이 비유를 끌고 와 김 여사 비하에 활용했다. "(코끼리) 한 마리도 부담스러운데 암놈까지 데리고 들어가는 바람에…도자기가 어떻게 되든 암컷 보호에만 열중한다. " 최강욱 전 의원은 지난 2월에도 국회에서 김건희 여사 특검 촉구 농성을 벌이며 김 여사를 ″암컷″이라 지칭하며 비난했다. 그는 이날 ″(윤 대통령이) 암컷 보호에만 열중″이라고 했다. 유튜브 캡처 북 콘서트 때 튀어나온 "설치는 암컷" 발언은 현장 분위기에 휩쓸린 돌출 발언이나 실언이 아니라 그의 일관된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계획된 신념 표명이었던 셈이다. 다만 그가 계산하지 못한 건 특정인을 조롱하려다 그의 한심한 여성관까지 통째로 노출해버려 국민 욕받이가 된 상황 정도일 것이다.    당시 객석에는 민주당 강민정, 부동산 논란으로 제명당한 무소속 양정숙 의원 등 여성 의원들도 있었으나 문제 제기는 일절 없었다. 다른 민주당 여성 의원들도 똑같았다. 과거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 당시 피해 여성을 피해호소인이라 부르며 2차 가해를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비판 대신 침묵을 택했다. 여론이 악화하자 마지못해 민주당 전국여성위원회 명의로 "강력히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을 냈을 뿐이다.    이런 민주당 분위기와 달리 SNS는 들끓었다. 적잖은 여성들이 '수컷이 설치면 안 되는 이유를 직접 보여주는 중'이라거나 '수컷 같지도 않은 것들이 설친다'며 최 전 의원 발언을 비튼 비판을 쏟아냈다. 최 전 의원은 당 지도부 경고와 비판 여론에 아랑곳없이 SNS에 영어로 'It's Democracy, stupid! (이게 민주주의야, 멍청아)라고 썼다.     대체 누가 멍청한 것인지, 이런 행태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겠다면 해답을 동물에게서 찾으라"는 조언(생물학 권위자 히다카 도시타카 교토대 명예교수)에 따라 진짜 수컷에 대해 찾아봤다. 일본의 기생충 박사로 유명한 후지타 고이치로 도쿄대 의치과대학 명예교수의『유감스러운 생물, 수컷』에 보면 수컷은 생존에 불리해도 번식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도 진화하는 다윈 진화론의 '성 도태(성 선택)'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암컷을 필사적으로 꼬시는 수컷의 눈물겨운 구애 말이다. 가령 극락조 수컷은 화려한 색의 장식 날개를 등에 업고, 코믹한 구애춤까지 춘다. 극락조와 같은 화려한 치장도, 그렇다고 진심으로 여성의 마음을 얻으려 하지도 않는 최 전 의원은 동물의 세계로 보자면 선택은커녕 도태되기 쉬운 수컷일 뿐, '번식' 혹은 지지층 확대라는 관점에서 봐도 결코 수컷다운 수컷이 아니다.    지난해 2월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n번방 추적으로 유명세를 탄 박지현 여성위원회 부위원장과 대화하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사실 수컷이니 뭐니 따질 필요도 없이, 민주당 전체가 여성 비하 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대 국회 때 표창원 의원은 국회에서 현직인 박근혜 대통령의 누드 그림 전시를 강행했고, 박원순 전 시장 외에도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의 성 추문이 내내 이어지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이번엔 점잖게 "관용 없는 엄정한 대처"를 말하며 최 전 의원에게 당원권 6개월 정지 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본인 역시 지난 대선 당시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형수 욕설' 녹음이 공개돼 평소 여성을 대하는 저열한 태도를 드러내지 않았나. 이런 당이 지난 대선 때 n번방 추적으로 젊은 여성들 지지를 받던 박지현을 내세워 여성 표를 구걸했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유감스러운 생물, 수컷』에 진짜 수컷답지 않은 치사한 수컷 얘기도 나온다. 수컷 각다귀붙이는 교미가 끝나면 방금 전 암컷에게 준 먹이 선물을 힘으로 빼앗은 뒤 또 다른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선물로 재활용한다. 선거 때마다 목격하는, 딱 민주당 행태 아닌가.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11.23 00:57

  • [안혜리의 시선]거짓을 말해야 돈이 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 8월 낸 에세이에는 법원의 유죄 판결을 받은 명백한 사실마저 부정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벌써 20쇄 가까이 찍으며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다. 뉴스1 광화문 교보문고 정치·사회 섹션 앞에서 책을 뒤적이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윤미향 의원(무소속)의 신간 『윤미향과 나비의 꿈』하나만으로도 뭔가 싶었는데, 그 옆엔 재직 당시 공영방송의 중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던 박성제 전 MBC 사장의 『MBC를 날리면』, 눈을 돌리니 지난 8월 출간 이후 줄곧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디케의 눈물』이 있었다. 저자의 경력도 구체적 내용도 모두 다르지만 세 책엔 뚜렷한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셀프 면죄부다.      ■  「 윤미향·박성제·조국 신간 잇따라 사법 판단 책임없이 셀프 면죄부 팬덤 기대 돈벌이와 복권 노리나 」  조만간 책을 쓰는 사람보다 책을 읽는 사람이 더 귀해질 때가 올 거라는 어느 작가의 말마따나 모두 자기 얘기를 자기 관점에서 책으로 내는 시대다. 하지만 국민으로부터 적잖은 도덕적 질타를 받은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일부 사안과 관련해선 이미 법원 판단까지 내려져 사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공적 인물들이 이런 과오엔 일말의 반성조차 없이 침묵하거나 더 나아가 스스로 조작된 신화를 쓰고, 그걸 또 자기 진영 팬덤을 겨냥한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향후 정권 교체 시 복권의 디딤돌로 쓰려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가령 '위안부 비즈니스'라는 비판을 받았던 윤미향 의원은 불과 한달여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후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로 2심 재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의 의원직 상실형을 선고받았다. 일찌감치 지난 2020년 더불어민주당의 꼼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인 시절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로부터 직접 제기된 정의기억연대 횡령 의혹에도 불구하고 지난 문재인 정부 때 출범한 김명수 사법부의 선택적 재판 지연 덕분에 아직 의원 지위와 특혜를 누리고 있다. 그런 그가 억울하다면서 낸 게 이번 신간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심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마음이 여전할 것이라 믿는다"는 응원의 추천사를 써준 이 책의 제1장 '무죄·무죄·무죄…로 끝난 마녀사냥'의 첫 소제목부터가 '나는 무죄다'였다. 제대로 된 근거는 없다. 오히려 2019년 미국 워싱턴 소녀상 제막식 참석 때 한 활동가의 실수로 비즈니스 좌석이 예약된 걸 공항에 도착해서야 알게 됐다느니, 후원금을 비즈니스 업그레이드에 쓸 수 없어 일단 내가 비용을 정의연에 송금했느니 하는 믿기 어려운 자기변명이 대부분이다.  박성제 전 MBC 사장은 지난달 SNS에 교보문고 정치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른 자신의 책 사진을 공유했다. 1위가 조국 전 장관 책, 10위가 박성제 전 사장 책. 페이스북 캡처. '공영방송 수난사'라는 부제가 붙은 박성제 전 사장의 『MBC를 날리면』도 비슷하다. 그는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양분됐던 지난 2019년 MBC 보도국장 신분으로 김어준 라디오에 출연해 그 유명한 "딱 보니 100만(명)짜리 (집회)" 발언을 한 당사자다. 지상파 방송의 보도국장이 정파성이 뚜렷한 타 방송국에 출연한 것만으로도 매우 이례적인데, 서울교통공사의 승객수 분석 등 과학적 계산법으로는 10만명 정도였던 집회 인원수를 놓고 "계산하고 이런 게 중요하지 않다. 경험 많은 사람은 감으로 안다"며 앞장서서 선동에 나섰다.    이러니 4개월 뒤 그가 사장에 취임해 더 선명해진 MBC의 편파성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대표적인 게 당시 취임 직후 한동훈 당시 부산고검 차장검사를 무리하게 엮은 '검언유착' 프레임 왜곡보도다. MBC와 김어준 등의 대대적 합작으로 유시민 등 문재인 정권 실세들의 신라젠 의혹을 좇던 이동재 전 채널A 기자는 200일 넘게 감옥살이를 했다. MBC 보도를 근거로 왜곡 후속보도를 한 KBS의 두 기자는 올 초 이 전 기자의 강요미수 무죄 확정 뒤 공개 사과를 했지만 박 전 사장은 책에 이와 관련해 별다른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현직 시절 "MBC는 엄정한 취재윤리를 준수했다"라거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검언유착이 허구는 아니고 일부 언론이 몰고 가는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이런 정파성 덕분에 장사는 잘했다. 하지만 김건희 여사 캐겠다던 취재진의 경찰 사칭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취재윤리는 땅에 떨어졌다.    "등에 화살이 꽂힌 채 길 없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겠다"는 홍보문구로 포장한 조국 전 장관 책은 딱 기대대로다. 이미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사실까지 부정하며 자기합리화로 일관한다. 엄마 일을 도운 후 엄마가 준 표창장을 학교에 제출한 것밖에 없는 딸의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입학이 취소되는 날벼락 같은 일을 당했다는 식이다. 그런데도 교보문고 앱 책 리뷰엔 "십자가를 짊어진 장관님" 운운하며 책 구매 인증을 한다. 사실이 아니지만, 어쩌면 사실이 아니어서 진영 팬덤의 지갑이 술술 열리는 이상한 시대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 기억이 흐릿해질 즈음 이런 거짓까지 진실로 둔갑할까 두려워 기록을 남긴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11.02 00:42

  • [안혜리의 시선]"정부는 영원히 피만 빨린다"

    일론 머스크가 세운 우주기업 스페이스X는 정부 R&D 예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지 보여준다. 로이터=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논란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카르텔의 세금 나눠 먹기 방지책이라며 정부 방침을 지지하는 측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세금 몇푼 아끼겠다고 첨단산업 발전에 발목을 잡는 악수라며 비판한다. 이와 관련해 양측 모두 주목할만한 사례가 월터 아이작슨의 신작 『일론 머스크』에 등장한다. 머스크가 세운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 얘기다.    전 세계적인 혁신산업을 주도하는 미국도 우주·방산 산업만큼은 공고한 민관 카르텔이 빚어내는 국가 예산 낭비가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가령 보잉과 록히드마틴 등 대형 방산기업들은 원가가산 방식으로 정부의 우주·국방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예산을 초과해서 쓸수록 더 많은 돈을 지원받는, 쉽게 말해 세금을 더 많이 쓸수록 기업은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구조다. 더 값싼 부품을 찾고, 일정을 단축해 원가를 줄일 동기가 없다. 당연히 혁신도 없다.      ■  「 예산 구조 바꿔 카르텔 깬 머스크 규모만큼 방식 중요성 일깨워 셀트리온 R&D 실패 답습 말자 」  설립 2년만인 2004년 스페이스X가 미 항공우주국(NASA) 프로젝트를 따내자마자 머스크는 이 안락한 관행에 문제를 제기했다. NASA와 국방부가 해오던 원가가산 방식 계약을 거부하고, 대신 회삿돈으로 우선 로켓을 만든 후 정부와 약속한 이정표에 도달했을 때만 대금을 받기로 했다. "원가가산 방식 계약이 지속하는 한 정부는 영원히 피만 빨린다"고 정부에 경고하며 편안한 돈벌이를 버리고 리스크를 떠안았다.    결과는 어땠을까. 세 번의 실패 끝에 2008년 스페이스X의 팰컨 1호가 우주 궤도에 진입한 최초의 민간 제작 로켓이라는 역사를 썼다. 보잉의 비슷한 사업부(5만 명)의 1%에 불과한 500명의 직원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그해 말 NASA와 우주정거장을 12회 왕복하는 16억 달러 규모 계약을 체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왕복에 성공해야만 대금을 받는 계약이었기에 비용 절감에 초점을 맞췄다. 기존에 200만 달러였던 발사대의 크레인 한 쌍 비용은 30만 달러로 낮췄다. 록히드와 보잉의 합작투자사가 구축한 유사한 발사 단지의 10분의 1 비용으로 발사 단지를 재건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경비 절감과 혁신 제작 기술을 이뤄냈다.    NASA는 2014년 우주정거장에 우주비행사를 데려갈 로켓 제작을 위해 스페이스X와 보잉 두 군데와 동시에 계약을 체결했다. 경쟁을 붙이며 보잉에는 스페이스X보다 40% 더 많이 지원하기로 했다. 스페이스X가 2020년 미션에 성공하는 순간까지 보잉은 우주정거장에 도킹하는 무인 시험비행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우주비행사를 보내려면 러시아 로켓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쇠락한 미국 우주산업을 되살려낸 건 이렇게 낭비가 아닌 성과에 보상하는 방식으로 혁신을 이뤄낸 스페이스X였다.  문재인 정부는 국산 코로나19 치료제를 만든다며 셀트리온 한 기업에만 관련 R&D 예산 63%를 쏟아부었다. 당초 잡힌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비용이 투입됐지만 결국 실패했다. 등진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자리를 함께한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 [청와대사진기자단] 덩치가 크다고, 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한다고 꼭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그저 남의 나라 얘기로 치부하고 말 일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 당시 국산 코로나 19 치료제를 만들겠다며 관련 예산 전부를 셀트리온 한곳에 몰아준 사례만 봐도 그렇다. 정부는 당시 셀트리온 치료제 렉키로나주의 임상 1·2상 지원에 50억원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021년 실제 지원된 건 당초 약속의 4배가 넘는 220억원이었다. 2020~2022년 복지부가 백신 및 치료제에 지원한 전체 R&D 예산 832억원 가운데 522억원(63%)을 셀트리온에만 투입하고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 셀트리온의 구체적인 예산 집행 내역은 알 수 없지만 50억원으로 예정된 예산이 5개월 동안 4배나 더 늘어 집행된 걸 보면 미국 우주산업의 원가가산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마 국비가 투입된 다른 민간 지원 R&D 예산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방만하게 세금이 쓰이는 동안 문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 그리고 코로나를 담당하던 복지부 고위 관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렉키로나주를 홍보해준 덕분에 셀트리온 주가 상승으로 서정진 회장 주식 가치만 수조 원대로 늘어났다. 만약 머스크식의 성과 보상 방식을 도입했다면 어땠을까. 성과까지 바뀌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투입된 세금은 크게 줄지 않았을까.    기초과학 연구 수준의 척도인 노벨 과학상은 연구에서 수상까지 보통 30~40년의 시차가 있다. 이번 연구비 삭감이 반도체 등 모든 첨단산업의 핵심으로 쓰일 기초과학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다. 당장 돈은 안 되지만 꼭 필요한 장기 기초연구는 몰라도 단기 성과를 위한 예산 투입만큼은 머스크 방식을 한번 도입해보면 어떨까.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10.12 01:07

  • [안혜리의 시선]기막힌 문재인 발언, 수능 한국사에 답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 평양 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섰다. [사진공동취재단] "진보정부에서 경제 성적도 월등히 좋았다. 경제는 보수정부가 잘한다는 조작된 신화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다. 우리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진입한 시기는 노무현·문재인 정부뿐이다. "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 평양 공동선언 5주년 기념식에서 한 말이다. 기만전술로 북핵 위기를 키워온 북한에 대한 짝사랑은 차라리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재임 중 각종 무리한 경제정책을 도입해 국민 삶을 어렵게 만든 전직 대통령의 자화자찬은 참기 어렵다.    ■  「 문 "진보, 경제 잘 했다" 자화자찬 보수 깎아내린 역사 시험도 한몫 일제 비중 34%, 진보만 긍정 묘사  」    고속도로와 반도체 등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 다져놓은 산업 인프라로 지금 우리가 이만큼 먹고사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조차 한 해도 빠짐없이 플러스 성장을 한 게 보수 이명박 정부(3.2%)다. 문재인 정부는 연평균 2.32%로 보수 박근혜 정부(2.97%)보다 못했다. 재정은 차이가 더 확연하다. 박근혜 시절 23조원이었던 연 순재정적자를 77조 8200억원으로 키웠다. 한마디로 이전 보수정부가 차곡차곡 모은 곳간을 거덜 냈다. 지난 2020년 초 터진 코로나 19사태가 좋은 핑곗거리겠지만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나 무분별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13만명이나 늘린 공무원 수 등 실책 탓이 훨씬 크다. 특히 공무원 급증은 재정을 압박하는 인건비 상승이나 후세에 부담 주는 연금 적자 확대뿐만 아니라 늘어난 공무원 수만큼 규제도 늘어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직접적 요인이 됐다. 한 민간연구소가 실질 국내총생산(GDP)을 1.3%나 떨어뜨렸다고 분석했을 정도다. 그나마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를 타결시킨 공이라도 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경제에 관해서라면 아무 공이 없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답습하다 못해 통계 조작으로까지 이어진 부동산 실패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숫자 몇 개만 찾아봐도 뻔히 드러나는 불과 몇 년 전 일로도 문 정부 사람들은 이렇게 '조작된 신화'를 만들어낸다. 뻔뻔하다는 비판을 넘어 꼭 짚을 대목이 있다. 보수가 지난 수십 년간 실패해온 역사 전쟁 말이다. 진보를 참칭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입맛대로 역사를 기록하고 결국 이를 토대로 좋은 평가를 받을 거라는 자신감이 이런 거짓에 가까운 주장을 거리낌 없이 하는 배경이라서 하는 얘기다.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지난해 공개한 중학교 국정 역사교과서. 중앙포토. 근현대사 중심인 데다 대부분의 내용이 일제 침략 비판과 보수 정부 비방 등 편파적인 데다 경제적 측면은 비중이 미미하다. 중앙포토 지나친 비약이 아니다. 지난 2017학년도 수능부터 필수인 한국사 문제지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7년 치 수능을 전부 찾아봤더니, 매년 총 20문제 중 10문제(2018학년도는 9문제, 2023학년도는 13문제)가 일제 침략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조선 고종 이후 근현대사였다. 입만 열면 5000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 정작 후세를 가르치는 교과서에선 절반을 근현대사로 채운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일제 탄압과 관련한 문항이 매년 5~8개(총 34%)로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한국사가 아니라 대일 적개심 유발을 위한 일제 수난사로 과목 이름을 바꿔 달아야 할 판이다. 특히 진보가 추앙하는 북한군 창설 주역 김원봉이나 함께 활동한 김익상, 사회주의 단체 정우회 등 유독 사회주의 계열 인사와 독립운동을 연결한 문항이 많다.    일제와 해방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문항은 더 기가 막히다. 긍정적 측면만 부각한 남북화해가 총 6번이나 등장한다. 일제와 남북화해를 빼면 7년을 전부 합해도 겨우 10문제가 남는데 그중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 3·15 부정선거가 4번, 첫 진보정부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3번, 전두환 정부 비판이 1번, 6·25 관련 내용이 1번 나온다. 마지막 한 문항은 유일한 경제 관련인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인데, '전태일 분신 사건으로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보여줬다'고 부정적 측면을 더 강조한다. 문 전 대통령이 자랑스럽게 얘기한 글로벌 10대 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던 과거 보수정부의 전향적 경제정책이나 기업인의 과감한 도전은 어디에도 없다. 수능 문제만 보면 한국은 좌파와 남북화해 덕에 번영한 나라다.  삼성반도체가 글로벌 1위에 올라선 1993년 이건희 삼성 회장은 오히려 위기를 말하며 '신경영 선언'을 했다. 이런 결단이 지금의 반도체 강국을 만들었지만 교과서는 이를 담지 않는다. [사진 삼성전자] 반도체 관련 책들을 찾아 읽다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던졌다는 질문(『이건희 반도체 전쟁』) 하나에 꽂혔다. 조선이 개국한 1392년과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의 1인당 GDP를 묻더란다. 쌀 생산량 기준으로 개국 때 2달러, 임진왜란 때는 1달러였다. 이 보고를 듣고 이 회장이 "사회지도층이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정권 연장이나 재창출만 고민하면 지금이 (200년만에 생산이 반 토막 난) 조선과 다를 게 없지 않겠느냐"고 한탄했다고 한다. 지도층 인식과 별개로, 이렇게 좌파 편향적인 데다 이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한국사 교육으로는 실패한 조선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정부가 야기한 정율성 공원이나 홍범도 흉상 같은 지엽적인 역사 논란도 퇴행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정말 제대로 역사 전쟁을 하려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오늘을 만든 기업가나 경제정책을 가르쳐야 한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09.21 00:40

  • [안혜리의 시선]거친 표현에 진의 가려지는 대통령의 언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8일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놓고 "1+1을 100이라는 세력과는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연합뉴스 "언론은 부당하게 짓밟고, 항의한다고 더 밟고, 맛볼래 하며 조진다. (장관들도) 이 횡포에 맞설 용기가 없으면 그만둬라. 언론과 적극적으로 접촉해 봐야 득 될 게 없으니 (기자들의 정부 부처 개별 취재를 막고) 공식 브리핑을 활용하자.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기사에 민사소송 등을 위한 전문기관과 예산을 꾸리는 등 정부는 단호한 법 집행을 해라. "   이 발언은 지난 2003년 8월 노무현 대통령이 장·차관을 앞에 두고 한 발언이다. 장관더러 언론과 싸우라고 독려하는 이 낯선 장면은 즉각 '언론과의 전쟁 선포'라는 비판을 불러왔다. 하지만 이런 우려에 귀 기울이는 대신 거꾸로 대응 수위를 점점 더 높였다. 2007년 5월 재경부(현 기재부) 출입기자단 180여명이 정부의 기자실 통폐합과 취재원 접촉을 막기 위한 기자 출입 제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자 노 대통령은 "언론이 터무니없는 특권을 주장하는데, 일부 정당과 정치인까지 이에 영합하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브리핑룸에 더해 기사 송고실 폐지까지 지시했다. 임기 내내 공개적으로 언론을 타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김영삼 정부 시절 25건에 불과했던 언론중재 신청을 752건이나 했다. 대통령 본인이 직접 16건의 정정·반론보도 청구를 했을 정도다.    ■  「 언론 적대 국민 이분한 참여정부 그시절 생각나는 전투적 발언 정제된 언어로 갈등 줄였으면 」  언론과의 대립각은 국민 편 가르기로 이어졌다. 지난 2006년 3월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노 대통령은 "근로소득세 90%를 상위 20%가 내고 있으니 혹시 세금을 올리더라도 상위 20%만 화가 나고 나머지는 손해 볼 것 없다"고 했다. 국민 통합에 나서야 할 대통령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대놓고 편 나눈 것이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를 위한 전략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잡히지 않는 부동산값을 놓고는 정책 수정 대신 "강남이 불패라면 대통령도 불패"라며 강남 때리기에 골몰했다.  한 직장인이 지난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진행한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를 보고 있다. 이날 노 전 대통령은 "상위 소득 20%" 발언으로 국민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편가르기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중앙포토 20년 전 일을 새삼 소환한 건 요즘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과 주요 부처 장관들의 행보에서 자꾸만 고(故)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이 겹쳐 보여서다. 윤 대통령은 지난 29일 국무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이 했던 것처럼 장관들에게 싸우라고 주문했다. "여러분(장관)은 정무적 정치인이기 때문에 말로 싸우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여야 간극이 너무 넓으면 점잖게 얘기한다고 되지 않는다. 공격받기 싫다고 피해서는 안 된다. " 하루 전 국민의힘 연찬회에서는 "지금 국회는 여소야대에 언론은 전부 야당 지지 세력들이 잡고 있어서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언론을 향한 불만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늘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게 숙명인 언론계를 전부 "야당 지지 세력"으로 규정했다. 앞서 통상 국론 통합을 얘기해온 8·15 광복절 경축사에선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는 반국가세력들이 활개 치고 있다"고 했다. 무슨 걱정에서 나온 말인지는 알겠으나 대통령 품격에 걸맞은 정제된 언어와는 거리가 있다.    물론 답답한 윤 대통령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다수 의석을 무기 삼아 사사건건 윤석열 정부의 발목을 잡아 온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여기 발맞추는 듯한 일부 친 민주당 언론이 가세해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계기로 또다시 국익을 해치는 반일 선동에 나섰으니 화가 날 법도 하다. 하지만 "1+1을 100′이라고 하는 이런 세력들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는 식의 거친 발언은 비단 민주당뿐만 아니라 그저 일상과 건강을 걱정하는 보통 사람들까지 등 돌리게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쯤에서라도 멈췄으면 좋겠는데, 요즘 대통령이 신뢰한다는 장관들의 행보를 보면 요원하다.    이 정부 장관들은 다들 지난해 10월 국감에서 저질스런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제기한 김의겸 민주당 의원을 향해 "나는 다 걸겠다, 의원님은 뭘 걸겠느냐"고 되받아쳤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모범사례로 보는 모양이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과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도 잇따라 "장관직을 걸겠다"는 전투적 발언을 쏟아내니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은 한미 FTA 비준 등 성과도 적지 않았지만 언론과 대립하고 끊임없이 국민을 편 가른 탓에 노동개혁 등 국정의 주요 고비고비마다 제대로 된 국민의 협조를 끌어내지 못했다.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윤석열 대통령은 달라야 한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김건희 여사가 좀 나서줬으면 좋겠다. 비단 윤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아무리 최측근이라도 대통령 뜻에 거스르는 고언을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김건희 여사는 대통령이 국민 눈높이에서 보다 정제되고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 섬세한 언어로 소통하도록 조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희망을 걸어본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08.31 00:42

  • [안혜리의 시선]김현숙 여가부 장관의 무책임

    김현숙 여가부 장관이 지난 7일 새만금 잼버리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사실 출발부터 기이했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대선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됐으니, 이 정부 초대 여가부 장관에게 처음 주어진 미션은 오로지 '부처 폐지'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폐지에 동의하면서 왜 그 자리에 있느냐"는 야당 인사청문위원들의 조롱을 견디고 지난해 5월 임명된 김현숙 장관을 기다리고 있는 핵심 과제도 부처 폐지였다. 두 달 뒤 첫 업무보고 때 윤 대통령이 "부처 폐지 로드맵을 조속히 마련하라"며 공약 이행 의사를 분명히 하자 김 장관의 지상과제가 여가부 폐지라는 게 더욱 뚜렷해졌다.      ■  「 '부처 폐지' 믿고 잼버리 손 놓았나 안팎 지속적 경고 무시 배경 의문 무책임·무능으로 '최종 미션' 달성? 」  사라질 부처의 시한부 장관 눈에 1년 앞으로 다가온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이하 잼버리)가 들어왔을 리 없다. 업무보고 한 달 뒤인 지난해 8월 국회 상임위(여가위)에 참석한 송주아 국회 수석전문위원은 김 장관 바로 옆에 앉아 "여가부가 잼버리 조직위와 전북도에 교부한 56억원의 예산 실 집행률이 각각 32%와 39%로 저조해 철저한 사업 집행 점검과 관리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잼버리 주무 부처인 여가부가 예산 집행과 승인 권한을 갖고 있을뿐더러 여가부 장관이 조직위원장을 겸하는 만큼 김 장관이 잼버리를 자기 일로 생각했다면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새만금 현장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김 장관은 "차질없이 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돌이켜보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 같다. 여가부가 없어지면 본인이 책임질 일은 없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이원택 민주당 의원(오른쪽)은 지난해 10월 국감에서 김현숙 여가부 장관에게 '여가부 폐지' 이후 책임있는 부처가 잼버리를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 장관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유튜브 캡처 지난해 10월 국감 발언을 보면 이런 안이하고 무책임한 상황 인식이 확연히 드러난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행정관을 거쳐 전북도 정무부지사를 지낸 민주당 이원택 의원(전북 부안군)은 "배수가 안 되는 상황에 폭염·폭우·해충 대책이 필요한데 아직 기반시설 공정률은 37%"라며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역경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여가부 폐지 후) 다른 부처로 이관되더라도 책임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며 두 달 전 상임위 때 본인이 했던 주문을 다시 반복했다. 여가부가 못할 거 같으면 문화체육부든 어디든 다른 부처와의 협의를 거쳐 빨리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김 장관은 엉뚱하게 전북도와의 업무협약(MOU)을 들고 나왔다. 그는 "이 부분은 전북지사와 MOU를 맺은 상태"라고 했다. 무슨 상세한 매뉴얼이라도 담겼나 봤더니 국감 한 달 전 김 장관이 준비상황 점검을 겸해 새만금에 처음 내려가 잼버리 실무총책임자이자 집행위원장인 김관영 전북도지사(더불어민주당 소속)와 '전 세계 청소년의 교류 증진을 위한 잼버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적극 노력한다'는 문구의 MOU를 체결한 게 전부였다.    비극은 올 2월 다수당인 민주당의 반대로 여가부가 존치하면서 불거졌다. 1년 가까이 사실상 손 놓고 있었는데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진짜로 "차질없이" 치러야 하는 주체가 된 거다. 이때라도 심기일전했더라면 좋았으련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난 5월 새만금잼버리특별법상 정부지원위원장인 한덕수 총리와 함께 나선 현장 점검도 사진 찍기용 요식행사로 끝났다. 심지어 일주일 뒤인 5월 25일 공동조직위원장인 김윤덕 의원(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잼버리가 공포와 트라우마로 남는 대회로 전락할 수 있다"며 여가부 장관 등 공동조직위원장 5인과 전북도지사와의 긴급 공동회의를 제안했는데도 아무 조처를 하지 않았다.  한덕수 국무총리(가운데)는 지난 5월 17일 새만금 잼버리 현장을 찾아 김현숙 여가부 장관(왼쪽), 김관영 전북도지사(총리 오른쪽)로부터 준비상황을 보고받았다. 앞서 3월엔 지원위원장 자격으로 직접 회의까지 주재했다. [사진 전북도] 이후 벌어진 잼버리 파행은 이미 우리가 목격한 그대로다. 윤 대통령 내외가 깜짝 방문했던 행사 첫날부터 온열 환자가 쏟아지는 등 부실 준비가 논란이 되자 정부와 여당은 일제히 전 정부 탓을 했다. 대통령실은 "전 정부에서 5년 준비한 것"이라 퉁쳤고, 대회 일주일 전 현장 점검까지 했던 국민의힘 지도부는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문재인 정부와 전·현직 전북도지사에게 있다"고 했다. 심지어 지원위원장 자격으로 지난 3월 직접 회의까지 주재했던 한 총리는 "지금부터 중앙정부가 책임지겠다"며 마치 잼버리 문제를 처음 접하는 양 과거의 책임에는 입을 닫았다. 물론 전북도의 방만한 조직 운영과 무능, 그리고 혈세만 낭비한 외유성 출장 등 대회가 끝난 후 잘잘못을 따져야 할 일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난맥상이 전부 사실이라 하더라도 1년 반 동안 안팎의 잇따른 경고를 무시한 정부, 특히 김현숙 여가부 장관 책임이 감해지진 않는다.    지난 8일 언론 브리핑 현장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세계연맹이 할 말, 전북도가 할 말"이라는 식의 준비 안 된 답변으로 일관하더니 급기야 "부산엑스포 유치에 악영향을 주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김 장관은 "위기 대응을 통해 전 세계에 대한민국 역량을 보여줬다"는 망언을 내놓았다. 잼버리 실패 책임으로는 모자라 온 국민 열 받게 해서 원래 부여받은 미션이었던 여가부 폐지를 이뤄낼 심산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생각인가 싶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08.10 00:56

  • [안혜리의 시선]권영준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권영준 대법관이 19일 서울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뉴스1 고액 법률의견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쉽게 재석 265명 중 찬성 215명으로 국회의 임명동의안을 통과한 권영준 신임 대법관(53)은 한국 주류층의 핵심인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성) 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엘리트다. 서울법대 4학년 재학 중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고, 1999년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한 후 법원 내 최고 엘리트 코스인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판사를 거쳐 2006년 서울법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판사 재직 시 국비로 하버드 로스쿨 석사(LLM)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학자로서의 학문적 성과도 탁월하다. 단행본 20여권(공저 포함)을 냈는데,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2021)로 선정된 『민법학의 기본원리』처럼 쟁점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면서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서술해 호평받은 책이 많다. 그런가 하면 우수한 교수법으로 강의하는 교수에게 주는 서울대 학술연구교육상(2022)을 받을 정도로 교육자로서의 자질도 뛰어나다.    ■  「 능력·사생활 모두 평판 좋지만 김앤장 10억 등 거액 받은 건 문제 전관예우 넘어 후관예우 우려 커 」    공식 프로필만큼 비공식적 삶의 모습도 남다르다. 법관 시절 명사 음악회에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의 협연자로 무대에 설 정도로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음악 전공자인 모친의 피를 물려받아 피아노·클라리넷도 수준급이란다. 운동도 잘해서, 서울대 총장 배 테니스대회 우승 경력도 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학창 시절 교수인 부친을 따라 미국 유타주에 머문 덕분인지 영어는 원어민 수준이고, 도쿄대 특임교수 시절엔 일본어로 강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은 범접조차 어려운 천재, 또는 수재다. 사생활 면에서의 흠도 없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귀감이 되는 4남매의 아버지인데, 본인이 쓴 책 서문마다 치과의사인 아내와 네 자녀 이름을 꼬박꼬박 언급할 만큼 가정적이다.  권영준 신임 대법관은 대학 4학년 시절 사시에 수석 합격했다. 지난 1993년 사시 수석한 후 가족과 함께 언론 인터뷰를 했다. [KBS 뉴스 캡처] 이쯤 되면 '완벽'이라는 단어도 그를 묘사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진작부터 법조계 안팎에서 "권영준이 대법관 되는 건 시간 문제"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가 자칫 국회 임명동의안을 넘지 못하고 불명예 하차할 뻔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시절인 지난 2018~2022년 5년 동안 김앤장 등 대형 로펌 7곳이 맡은 사건 38건과 관련해 63건의 법률의견서를 써주고 무려 18억원 넘는 보수를 받은 게 문제가 됐다. 특히 김앤장 한곳으로부터만 30건에 9억5000만원을 받았다. 많게는 1건에 5000만원, 평균 3000만원이 넘는다. 불법이 아니고 "학자적 소신에 따라 기존의 학문적 견해를 표명했을 뿐"이라지만 국민 눈높이에서 볼 때 특정 로펌으로부터 매해 교수 연봉(1억20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대가를 챙긴 건 분명 상식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난관이 예상되던 임명동의안은 예상과 달리 쉽게 통과됐다. 여당뿐 아니라 야당까지 진보 성향도 아닌 그에게 찬성표를 던진 덕분이다. 명분은 그가 의견서로 벌어들인 소득상당액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다 의견서 일부를 국회가 열람할 수 있도록 동의했다는 것인데, 평소 더불어민주당 행태로 볼 때 이례적이다. 대법관이라는 자리는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하고, 그러기에 가혹하리만큼 투명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는 청문회에 앞서 단 1건의 의견서만 스스로 공개했다. 엄격하게 비밀유지를 해야 하는 국제중재 건 이외에 다수의 국내 재판 관련 의견서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야당은 찬성표를 던졌다.   권영준 대법관이 2018년 한 민사소송 피고 대리인인 대형로펌 의뢰로 작성한 의견서. 자료 민형배 의원실 이러니 국민 사이에서 법조 카르텔 이야기가 나온다. 21대 국회도 20대와 마찬가지로 법조인 출신 비율이 15%나 된다. 권 대법관과 대학을 같이 다녔던 한 변호사는 "낙마하면 국민적 손해"라고 했고, 국제중재 건으로 그에게 정부 측 의견서를 여러 차례 받았던 또 다른 변호사는 "한국법을 잘 모르는 외국 중재인에게 영어로 설득력 있게 의견서를 쓸 수 있는 매우 드문 인재라 일이 몰렸던 것"이라며 "돈 욕심은커녕 술 안 마시고 골프 안 치는 성직자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법조계 내부에서의 이런 좋은 평판이 이심전심 국회의 찬성표에 영향을 끼쳤겠지만 법조계가 아닌 다른 분야 전문가였다면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었다 해도 진행 과정이 사뭇 달랐을 것이다.    국회의 동업자 봐주기나 향후 권 대법관이 맡을 재판의 신뢰도도 물론 문제다. 하지만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인 전관예우를 넘어 '후관예우'가 고착화할 수 있다는 점이 더 우려스럽다.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객원교수는 페이스북에 "대형로펌은 향후 대법관 임명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상대로 의견서를 의뢰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 할 것"이라며 "전형적인 이권 카르텔"이라고 비판했다. 권 대법관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지만 반박하기 어렵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07.20 00:56

  • [안혜리의 시선]사이다 대통령이 꼭 칭찬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7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5일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킬러 문항 배제를 콕 집어 언급했고, 이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연합뉴스 내가 지금 보수 정부 아래 사는 게 맞나.  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 말 한마디가 일으킨 대혼란, 그리고 이걸 수습하겠다며 정부와 여당이 내놓은 번지수 잘못 짚은 과격한 발언을 연이어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 말마따나 이 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도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시기도, 접근 방식도 잘못됐다. 무엇보다 보수 정권답지 않게 시장을 부정하는 듯한 행보 탓에 이 정부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까지 불러일으킨다. 이번 수능 대혼란 국면만 보자면, 이재명식 사이다 행보와 똑 닮았다는 의구심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국민이나 법·시스템은 아랑곳없이 "누구 한 놈만 때려잡자"며 근본적 해결책 없이 일단 지르고 봤던 그 행보 말이다.      ■  「 '킬러 문항' 콕 집어 문제 제기 과격 용어로 일타강사 악마화 갈등만 키우고 해법은 멀어져  」  잠시 복기해보자. 지난 15일 교육부 업무 보고에서 윤 대통령이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게 한 발언이 전해지면서 수험생과 학부모는 대혼란에 빠졌다. 대통령은 콕 집어 '킬러 문항', 더 정확히는 언어 영역의 킬러 문항에 죄를 물었다. "과도한 배경지식을 요구하거나 대학 전공 수준의 비문학 문항 등을 출제하면 무조건 사교육에 의존하라는 것. " 범인도 지목했다. "교육 당국과 사교육 산업이 한편(카르텔). " 당장 손쉬운 희생양도 만들었다. 대입 담당인 교육부 인재정책기획관을 임명 6개월 만에 문책성으로 경질했다. 또 수능 출제를 담당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에 대한 감사 방침을 밝혔고, 19일 이규민 평가원장 사임으로 이어졌다. 20일엔 국무조정실이 교육부와 평가원에 대한 복무 감사에 착수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28일 EBS 본사를 방문해 수능 강의 제작 현장을 찾았다. 15일 교육부 업무 보고 이후 이 장관의 발언은 논란의 연속이었다. 연합뉴스 대통령실이 아무리 "대통령 지시는 (수능 난이도가 아니라) 사교육 개혁과 공정한 입시에 방점이 있고, 이미 지난 3월 지시했으나 이행되지 않았다"고 강변해도 소용없었다. 그간 밀실에서 무슨 논의가 오갔든 국민 입장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였고, 논란은 커져만 갔다. 6월 1일 실시한 모의평가(6모) 채점 결과(27일)가 나오기도 전에 벌어진 일들이다.    결국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큰 틀의 국민적 공감대는 사라지고 킬러 문항이나 카르텔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쟁과 갈등만 촉발됐다. 야당으로선 저절로 굴러온 호재였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입시 공정성을 지탱하는 큰 기둥인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발언은 비록 야당 입에서 나왔지만 충분히 새겨들 할만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귀를 막고 다른 길을 찾았다. 사교육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인 사교육업체 일타강사 악마화에 나선 것이다.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은 "연 수입 100억, 200억원이 공정한 시장가격이냐"며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주면서 그 피해를 바탕으로 초과이익을 취하는 것은 범죄이고 사회악"이라고 주장했다. 돈 많이 벌면 범죄자라는 주장도 놀랍지만, 이런 반시장적인 발언이 민주당도 아니고 국민의힘에서 나왔다는 게 충격적이다.  국세청이 28일 사교육업체 메가스터디에 대한 비정기(특별) 세무조사에 나섰다. 윤석열 대통령의 '킬러 문항' 언급 뒤에 국민의힘 의원들은 사교육업체 일타강사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다. 연합뉴스 여기서부터는 충격보다는 예측 가능한 수순으로 가고 있다. 국세청은 28일 스타강사가 포진한 메가스터디와 최근 의대 정시 입시로 급성장한 시대인재 등 사교육업체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앞서 이주호 장관은 "사교육 이권 카르텔 등 학원 부조리 집중신고 기간을 운영한다"고 밝혔고, 대통령실 관계자도 "(사교육 이권 카르텔에) 사법적 조치가 필요하다면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좀 과장하자면 대통령 한마디에 온 나라가 지금 일타강사와 사교육업체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왜 공교육이 사교육의 경쟁력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지에 대한 각성은 어디에도 없다. 교육부는 지난 26일 킬러 문항 26개를 공개했는데, EBS 교재 지문을 담은 문항도 있어 오히려 혼선을 일으켰다. 게다가 바로 다음 날인 27일 나온 6모 채점 결과는 당초 대통령실이 언급한 언어 영역은 오히려 최근 8년간 가장 쉬웠던 것으로 드러나, 교육 당국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    이런 투박한 사교육 때리기는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마저 등 돌리게 한다. 갑작스러운 수능 방향 전환은 학부모 불안 심리를 키워 사교육 수요만 더 키운다. 그리고 정보력과 경제력 있는 계층이 유리해진다. 현장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부 여당엔 이 쉬운 상식이 통하지 않나 보다. 마치 코로나 19가 발병하면 신천지부터 때려잡고(대법 무죄), 개고기가 문제면 법상 단속 근거가 없어도 일단 시설부터 폐쇄하며 '사이다'로 불렸던 과거의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보는 느낌이다. 아마 적잖은 국민이 그런 사이다 행보가 불안해 윤석열 대통령을 뽑았을 텐데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06.29 00:57

  • [안혜리의 시선]새벽 4시 30분, 오늘도 확성기 소음에 잠이 깼다

    맘상모가 아파트 단지에서 24시간 확성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하는 사람은 없고 확성기와 현수막만 보인다. 안혜리 기자 현충일에 종일 두통에 시달리다 자정이 넘어 겨우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새벽 4시 30분쯤 눈이 떠졌다. 확성기 소리가 요란했다. "더 이상 인근 주민들의 불편을 야기하지 말고…어쩌고저쩌고. " 지난달 부처님오신날 연휴부터 시작해 벌써 2주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시위 소음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 아파트와 마주 보고 있는 건너편 빌라트 앞이 그 현장인데, 베란다 새시는 물론이고 닫을 수 있는 모든 창문을 다 닫아봐도 집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확성기 소음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집시법상 소음 기준(주거 지역 00~07시 55dB 이하, 일반 사무실 소음이 45dB 수준이다) 초과 여부와 무관하게, 신고해봐야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이미 경험했기에 112는 아예 떠올리지도 않았다.    ■  「 심야 주거지서 시달린 소음시위 무고한 피해 불구 규제 어려워 심야 집회, 헌법적 권리 아니야 」  그런데 한편으론 의아했다. 분명 집회라는데 평일 오전 6시 30분이든 휴일 오전 9시 30분이든 출근길에 보면 시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근조(謹弔)'와 '본 현수막은 집회 허가 등록필하였음 훼손 시 형사처벌을 받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검은색 현수막 세 개, 그리고 인도에 세워둔 확성기만 요란했기 때문이다.  흔히들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지키는 헌법적 권리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주장을 알리겠다는 당사자는 이런저런 핑계로 자리를 지키지도 않으면서 분쟁의 당사자도 아닌 아무 잘못 없는 동네 주민만 편하게 잠들어야 할 심야에조차 소음공해에 시달리도록 방치하는 게 정말로 보장해줄 수밖에 없는 헌법적 권리일까.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경찰 등에 확인해보니 4년 전 이곳 주민과의 송사에서 패소한 맘상모(맘 편히 장사하고픈 상인모임)라는 단체 등등이 이름을 올린 집회인데, 이달 하순까지 한 달 동안 하루 24시간 내내 집회 신고가 돼 있어 심야든 새벽이든 맘상모가 내킬 때마다 확성기를 트는 거란다. 맘상모 페이스북 계정에 스스로를 '소유권을 과도하게 보호하는 잘못된 사회와 법, 그리고 약탈하는 건물주들을 바꾸는 활동을 한다'고 소개한 거로 미뤄 짐작할 때 이번 시위는 오랜 분쟁을 겪어온 특정 임대인에 대한 사적 벌주기에 가까운데도 이런 탈법적 행위를 헌법적 권리라며 보장해주고 있는 셈이다.  사실 주택가나 대기업 사옥 앞 소음 시위는 이젠 사람들이 별 관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워낙 해묵은 문제다. 쉽게 말해, 시위자 권리를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보호하는 한국만의 강력한 집시법에다 무기력한 공권력이 결합해 지난 10년간 숱한 피해자를 양산한 채 다들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 주거지 시위에 대해서도 경찰은 "주민이 직접 시설보호 요청과 집단 탄원서를 제출하면 시위 주최 측에 소음을 줄여달라고 요구하는 '제한 통고'를 하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추가 집회 신고를 받아주지 않는 '금지 통고'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경찰로선 신고가 들어올 때마다 소음 채증을 하긴 하는데 기준을 넘겨봐야 경범죄 처벌이 전부고, 신고된 집회 기간 내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사저 인근 시위 소음에 대한 불편을 호소하자 경찰은 경호 구역 확장 방식으로 시위를 막았다. 경호 구역 확장 첫날인 지난해 8월 평산마을 도로에서 경찰과 시위자들이 대치하는 모습. 뉴스1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마침 여당인 국민의힘이 지난달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 심야 집회시위를 금지하는 법률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시민들 눈살 찌푸리게 했던 건설노조 노숙집회가 직접적 계기가 됐지만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볼 사람들은 평안해야 할 거주지에서 소음에 시달리느라 최소한의 행복권마저 침해당한 평범한 사람들이 될 게 분명하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윤석열 정부가) 집회의 자유마저 박탈하겠다는 위헌적 발상"이라며 "집회 때문에 수출이 무너졌나. 민생이 무너졌나. 민주주의가 파괴됐나. 무슨 문제가 생겼느냐"고 거세게 반발했다. 이른바 진보를 표방한 친노조 언론들도 비슷한 비판을 쏟아냈다. 아무리 내로남불이 민주당의 전매 특허라고는 하지만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양산 사저에서 집회 소음에 시달릴 땐 전직 대통령 사저 인근 집회 자체를 아예 금지하는 집시법 개정안까지 발의해놓고, 심야라도 좀 조용히 쉬고 싶다는 시민의 작은 바람을 담은 법안에는 위헌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니 좀 어이가 없다. 사저 시위를 놓고 "법에 따르자"던 윤석열 대통령 발언에 당시 민주당 대변인은 "퇴임한 자연인에 대한 폭력적 테러(를 막지 않는) 옹졸함의 극치"라고 거세게 반발하더니, 이제 보니 모든 국민은 평등한데 내 편 전직 대통령은 특별히 더 평등하다는 말이었나 보다.  참고로, 친노조 언론들이 헌법적 권리라며 소환한 지난 2014년 헌재의 야간 집회 금지 위헌 판단은 해가 진 후부터 같은 날 24시까지의 시위였다. 그때도 0시 이후 필요한 규제는 국회의 입법판단에 맡겼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06.08 00:56

  • '코인' 김남국 감싼 김어준, 전매특허 음모론 대신 새 지령 [안혜리의 시선]

    김남국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자마자 지난 15일 김어준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김어준은 ″진보는 보수가 쳐놓은 도덕 프레임에 갇혀 있다″며 탈도덕을 주장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코인 게이트로 당내에서조차 코너에 몰리자 더불어민주당의 대표적 친명계 조직인 7인회 소속 김남국 의원은 당초 당 진상조사위에 약속한 본인의 코인 거래 자료 제출도 거부한 채 지난 14일 전격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당을 뛰쳐나간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민주당의 막후 실세이자 브레인이라는 '정치 무당'(※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표현) 김어준의 유튜브였다. 문재인 정부 시절 막대한 서울시민 세금이 들어가는 지역 공영방송을 사유화하다시피 하는 친정부 편파방송을 일삼다 정권 교체 6개월여만인 지난해 말 마지못해 tbs(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후 옮겨간 동명의 그 유튜브 채널 말이다. 이달 초 김 의원의 석연찮은 코인 투자와 관련한 첫 언론 보도 후 하루에도 수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 각종 의혹은 그가 입 열 때마다 말을 바꾸며 앞뒤 안 맞는 해명을 반복하면서 자초한 측면이 있다. 친 민주당 성향의 언론마저 비판 대열에 가세한 이유다. 이처럼 우군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김 의원은 그 어떤 헛소리도 의심 없이 품어주며 지지자들 상대로 맘껏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는 곳은 김어준 유튜브뿐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렇게 탈당 다음날 출연한 유튜브 방송을 뒤늦게 들어보니 과연 예상했던 시나리오 그대로였다. 코인과 관련한 해명은 해명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본질에서 벗어난 조악한 일방적 주장으로 가득한데 자기들끼리만 더할 나위 없이 비장하다. 단순한 도덕성 논란을 넘어 범법 혐의까지 받는 김 의원이 구국의 열사라도 된 듯이 "내년 총선은 우리 역사와 대한민국의 국운을 결정하는 선거"라고 운을 떼니, 김어준은 "이게(코인 의혹) 끝이 아니고 시작일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느냐"고 판을 키운다. 주거니 받거니 김 의원은 "이런 폭발적인 이슈를 총선 전에 터뜨릴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1년 전에 터뜨렸다는 건 (윤석열 정부가)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라며 이성이 마비된 지지자들의 눈을 가리는 음모론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코인 논란 초기 김 의원이 이미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기획설'로 물을 타보려 시도했지만 여론은 그의 바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처럼 이번 음모론 역시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그래서일까. 김어준은 코인 국면을 계기로 그의 전매 특허인 음모론 대신 탈(脫) 도덕을 밀고 있다. 그리고 김어준의 주장이 마치 '지령'이라도 된 듯, 민주당 의원이며, 종교계가 일사불란하게 이 논리를 퍼 나르고 있다. 탈 도덕이 별 게 아니다. 단순하고 좀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이젠 착한 척 위선 떨지 않고 대놓고 나쁜 짓 하겠다는 얘기다. 김어준은 지난 10일 방송에서 김 의원의 코인 논란에 대해 이야기하다 "진보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 부분만 편집한 영상도 며칠 뒤 따로 올렸다. 재밌는 건 자신들이 그간 보수를 비판하는 강력한 도구로 써온 도덕적 우위를 거꾸로 '보수가 진보를 억누르는 프레임'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그는 "오랜 세월 보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진보를 도덕성이라는 굴레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며 "이걸(도덕성)로 때리면 위축돼서 스스로 반성하는데 잘못된 생각"이라고 했다. "김남국의 60억 (논란이) 가능한 토대도 진보가 도덕성을 자기 본류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지난 14일 밤 김남국 사태가 촉발한 민주당 쇄신 의원총회에서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출당된 후 슬그머니 복당한 양이원영 의원이 "진보라고 꼭 도덕성을 내세울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 것이나, 17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지성용 신부가 페이스북에 "욕망 없는 자, 김남국에 돌을 던져라, 진보는 돈 벌면 안 되는가”라고 본말이 전도된 주장을 한 건 개개인의 돌출발언이라기보다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돈을 번 게 문제가 아니라 의문투성이인 자금 출처나 투자 방식 등을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하는 게 핵심인데도 김어준 논법 그대로 돈을 벌면 도덕적 비난을 받는다는 식으로 교묘하게 비튼 것이다. 민주당을 위시한 이른바 자칭 진보 세력은 문재인 정부 시절 앞에선 혼자 정의로운 척 도덕적인 척을 하며 뒤로는 끼리끼리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다 위선과 내로남불이라는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다. 지난 수십 년간 자신들이 독점해온 도덕과 정의는 그렇게 스스로 무너졌다. 정상적 사고를 하는 지성인이라면 부끄럽게 여겨 쇄신을 할 법도 한데 김어준을 위시한 좌파 무리는 역시나 정반대 해법을 내놓았다. 그렇게 일반의 상식과는 점점 멀어져간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2023.05.18 00:54

  • [안혜리의 시선]의대 광풍 뒤의 불편한 진실

    안혜리 논설위원 이달 초 벌어진 서울 대치동 마약 음료 사건은 마약과 보이스피싱을 결합한 신종 사기 수법이라는 측면에서 충격적이었다. 범죄 대상과 장소는 더 찜찜하다. 중국 범죄조직이 우리 사회의 취약한 지점인 비이성적 교육열을 제대로 파고든 것 같아 하는 얘기다. 마약 탄 음료엔 '메가 ADHD'라는 조악한 라벨이 붙어 있었는데, 이들 일당은 대치동 학원가에서 무작위로 마주친 어린 학생들에게 "집중력 향상과 기억력 강화를 돕는다"며 유혹했다. 진짜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환자도 의사 처방이 있어야 치료제를 먹을 수 있는데 이와 무관한 학생들이 별다른 거리낌 없이 ADHD 이름이 붙은 음료를 받아마실 거라는 걸 일당은 잘 알고 있었다. 공부 잘하게 만들어준다며 일부 대치동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이 약을 먹여온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말이다.  지난 3일 CCTV에 포착된 마약 음료 사건 피의자들. 이들은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기억력과 집중력 향상에 좋다″며 ADHD 라벨이 붙은 마약 음료를 학생들에게 먹인 혐의를 받고 있다. 사진 서울강남경찰서 실제로 지난해 국감에선 강남·송파·서초구 순으로 ADHD약을 많이 처방받았을뿐더러 강남 3구의 처방 인원 역시 급증하는 추세라는 자료가 나왔다. 지난 2014년 '강남 엄마의 공부 알약…정체는 ADHD 치료제'라는 제목의 기사가 날 만큼 부모의 과도한 교육열이 청소년 약물 오남용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수차례 나왔는데 지난 10년 동안 문제 해결은커녕 거꾸로 범죄조직의 먹잇감이 될 만큼 더 만연해진 셈이다.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가 지난 17일 마약 음료 사건 관련 브리핑을 하며 공개한 마약 음료. 뉴스1 몇 년 전 자살 충동 등으로 분당서울대병원 정신병동에 한 달쯤 입원했던 한 청년의 경험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놀라웠던 건 같이 입원했던 중고생 환자들이 병실에서도 주요 과목 문제집을 풀고 있더라는 목격담이었다. 어디 출신이고 무슨 연유로 입원했는지 자세한 속내는 알 수 없기에 일반화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정신과 집중 치료 와중에도 부모가 원하는 좋은 대학 가겠다고 정신병동에서 문제집 푸는 장면은 대한민국 중고생들이 부모의 과도한 기대를 충족시키느라 비상식적인 공부 압박에 시달리는 현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는데 여기엔 의대 광풍이 일조하고 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유행한다는 초등학교 4학년 대상 의대 입시반 기사가 올 초 탄식을 자아낸 적이 있다. 사실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초4 인생 결정론' 식의 공포 마케팅이 횡행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벌써 20년 전인 2004년 『평생 성적, 초등 4학년에 결정된다』는 책이 출간됐을 정도다. 『특목고 초등 4학년 성적이 결정한다』(2010)거나 『초등 4학년 공부뇌가 일류대를 결정한다』(2012) 등 학부모들의 목표가 서울대나 특목고에서 의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과거보다 더 큰 우려를 자아내는 건 초4 정도가 아니라 유아 대상 의대 설명회가 열릴 만큼 의대 준비 연령대가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아이 적성과 무관하게 부모 희망에 따라 의대로 몰리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아져서다. "자녀의 안정적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는 부모들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부모 욕심, 그러니까 자식의 의대 진학을 자신들이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트로피로 여겨 아이들을 재수, 삼수도 모자라 n수로 떠미는 부모도 적지 않다.  지난해 성균관대학교 열린 '종로학원 2023대입 수시·정시전략 설명회'에서 한 학부모가 의대 입시 전망 등이 담긴 설명회 자료집을 살펴보고 있다. 뉴스1 적성 불문 성적 잘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에 등 떠밀려 간 의대생이 과연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사명감을 갖고 환자를 돌보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까. 긍정적 답을 하긴 쉽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온 사회가 의사를 선망하면서도 정작 의사에 대한 존경은커녕 존중도 없다. 아마 '의사들은 돈만 밝힌다'는 통념이 작용하기 때문일 텐데, 그렇게 욕먹는 기성세대 의사들조차 만나면 요즘 젊은 의사들 걱정을 한다. 의사가 보기에도 환자 대신 돈에만 진심인 의사가 요즘 너무 많단다. 소아청소년과나 산부인과 등 힘들기만 하고 상대적으로 돈은 적게 버는 필수의료에 안 가는 정도가 아니라, 의사 면허증만 딴 후 병원에서 수련 없이 개업하는 의사 비중이 점점 느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좋은 의사를 배출하는 환경은 점점 요원해지고 있는데 연구 실적마저 실망스럽다. 이미 10~20년 전부터 최상위 성적 학생만 의대에 갔다. 당연히 의대 수준이 높아졌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지난달 발표된 전 세계 의대 순위(영국 QS)에서 100위 안에 든 곳은 서울대가 유일했다. 전국 의대를 한 바퀴 다 돈 후 들어간다는 서울공대(화학공학과)가 같은 기관 조사에서 세계 17위인 것과 대조적이다.  지금 입시 전쟁의 최상위 승자가 의대 진학이라는데, 그 의대조차 현실은 이 지경이다. 그저 암울할 따름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2023.04.27 01:16

  • [안혜리의 시선]내편이라 챙겼나 공범인가… 닮은꼴 금감원과 CJ ENM

    안혜리 논설위원 금융감독원은 저승사자로 불린다. 인허가 취소와 영업정지, 해임 권고에 이르기까지 금융사와 임직원의 생사여탈권을 쥘 만큼 막강한 감독 권한이 있기에 붙은 별명이다. 비용은 금융사들로부터 분담금을 거둬들여 충당하는데, 지난해만 2872억원이었다. 금감원 전체 예산의 75%가 넘는다. 금감원 입장에서 보자면 매년 예산 대부분이 그냥 굴러들어오는 구조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금감원의 방만 경영 논란이 불거지는 데는 다 이런 배경이 있다.    라임 사태 수사 무마 의혹을 받는 김모 전 청와대 행정관이 지난 2020년 구속영장 실질심사에 출석하는 모습. 금감원 출신인 그는 면직 후 금감원으로부터 해고 수당을 받았다. 뉴스1 잘잘못을 판가름하는 심판 노릇은 필연적으로 공정성에 더해 높은 도덕성까지 요구받기 마련이다. 더욱이 관련 비용을 선수들한테 직접 받았다면 누가 따지지 않더라도 스스로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마땅하다. 하지만 지난 4일 감사원이 공개한 금감원 정기감사 보고서를 보면 금감원의 도덕적 해이는 처참한 수준이다. 업무추진비 카드를 아예 배우자한테 줘서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했다는 등 167쪽에 달하는 보고서 내용 하나하나가 다 예사롭지 않다. 그중에서도 '해고 예고 수당'은 부정적 의미에서 그야말로 압권이다. 이 수당의 취지는 갑자기 직장을 잃은 이들의 생계비 보조인데, 비리가 드러나 이미 수개월 전 업무에서 배제됐다가 실형을 선고받은 범법자들이 죄다 타갔다. 온정주의를 넘어 실은 조직 전체가 공범이 아니었느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가령 지난 문재인 정권 때 벌어진 피해 규모 1조 6000억 원대의 권력형 사기 사건인 라임 펀드 사태 당시 청와대 행정관이었던 금감원 파견직원 A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A씨는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에게 수천만 원의 금품을 받고 감사 자료를 유출한 혐의로 지난 2020년 1심에서 징역 4년에 벌금 5000만원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면직당했다. 1심 판결은 9월 18일, 면직 처분은 인사위원회(10월 7일)를 거쳐 10월 16일에 이뤄졌다. 금감원은 30일 전에 해고를 예고하지 않았다며 면직 2주 만에 전광석화로 해고수당 985만원을 챙겨줬다. 근로자의 귀책사유가 있으면 수당은커녕 예고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시행규칙을 무시하고 수사 무마 의혹을 받아온 제 식구의 주머니를 살뜰히 채워준 것이다. 라임 피해자 수천 명이 돈을 잃고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는 데는 A씨의 범법행위와는 별개로 금감원의 감독 부실도 한몫했다. 대신증권 등 판매사들이 초고위험 펀드를 은행예금 수준의 안전한 5~6등급으로 속여 판매하는 걸 적시에 제대로 감시·감독하지 못한 탓이다. 반성하고 시스템을 정비해도 시원찮은 마당에 금감원은 5년 만의 감사원 감사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몰랐을 해고수당까지 챙겨줬다. 이러니 자꾸만 권력 비호설이 흘러나온다.    그런가 하면 채용 비리로 1심(2018년 5월 18일)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B씨 사례는 해고수당을 챙겨주려고 금감원이 고의로 예고기간 30일을 채우지 않았다는 합리적 의심마저 가능하다. 필기시험에서 탈락한 전 한국수출입은행 부행장 아들을 합격시키려고 채용 인원을 부당하게 늘렸던 B씨는 인사위원회(6월 8일) 후 한 달에서 고작 3일이 부족한 7월 5일 면직 처분을 당한 덕분에 619만원을 챙길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퇴직 후 3년인 재취업 금지 기간 동안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금감원 퇴직자들의 단골 피난처인 모 신용정보 회사의 자회사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조직 차원의 봐주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쯤 되면 단순히 제 식구 챙기기인지, 아니면 조직 비리를 개인 일탈로 꼬리 자르기 한 것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지난 2019년 팬들이 구성한 프로듀스 X 101 진상규명위원회 고소대리인들이 서울중앙지검에 제작진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했다. 뉴스1 영역은 다르지만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 권력인 CJ ENM에서도 최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금감원이 금융사의 저승사자라면, Mnet 채널 등을 가진 CJ ENM은 아이돌 지망생에겐 신과 같은 존재였다. 아이돌 연습생을 단숨에 글로벌 초대형 스타로 만들어준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시리즈'가 이런 평판에 한몫 했는데, 팬들의 집요한 추적으로 제작진이 시즌 1~4에 걸쳐 광범위하게 시청자 유료 문자투표를 조작했다는 게 드러났다. 결국 김용범 CP와 안준영 PD는 징역형을 받았고, CJ ENM은 "개인 일탈"이라며 대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형기를 마친 안 PD의 재입사를 비롯해 조작의 주역이 모두 복직했다는 게 뒤늦게 알려졌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사상 최고인 1억2000만원의 과징금을 받는 등 조직 신뢰를 갉아먹은 범법자를 내 편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챙긴 것이다. 이런 조폭식 의리는 정치권 하나만으로도 신물이 난다. 그런데 어쩌다 금융감독기관부터 엔터기업까지 죄다 닮은꼴이 돼버렸는지 한숨만 나온다.  안혜리 논설위원

    2023.04.06 00:56

  • [안혜리의 시선]공직으로 간 아가동산 변호사들

    안혜리 논설위원 한국의 주요 사이비종교 사건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로 연일 시끄럽다. 농락당한 여성 알몸을 노출하고 외설적 대화 녹취를 반복적으로 재생한 탓에 흥행만 노린 '다큐 포르노'라는 비판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외부인은 알 수 없는 교단 내 성폭력과 재산 갈취, 노동 착취 등을 당사자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사이비 교주를 향한 대중의 분노를 펄펄 들끓게 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 1996년 12월 검찰이 김기순씨 등 아가동산 사건 관련자들을 기소했을 당시 방송 보도 화면. 무죄로 이끈 민변 출신 변호인 등은 판결 이후 청와대 등에서 주요 공직을 맡았다. [사진 MBC 방송 캡처] 다큐 공개 전후로 각각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던 기독교복음선교회(JMS)와 아가동산 등 네 사건 모두 끔찍하지만 나는 아가동산 편이 유독 소름 끼쳤다. 친 이모까지 동원해 다섯 살 먹은 낙귀를 각목으로 때려죽이는 장면의 재연이나 아들의 억울함은 외면한 채 교주 김기순을 위해 위증했던 낙귀 엄마가 뒤늦게 후회하며 스스로 양 뺨을 시뻘게지도록 때리는 모습 등 고발의 수위가 높아서만이 아니다. 고통과 죄의식 속에 사는 탈퇴자들과 달리 김기순은 신도 헌금으로 키운 신나라레코드를 여전히 유지하며 부를 누리며 잘살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이었다. 여기엔 상해치사 공소시효(당시 7년)를 넘겨 8년 만에 기소가 이뤄진 법적 한계에다 실패한 사체 발굴(강미경 사건) 등 검찰의 실책도 한몫했다. 하지만 조세 포탈 등 경미한 죄목으로만 벌을 받은 건 한 김기순 조력자의 표현대로 "유명 변호사"의 공이 컸다.    찾아보니 사건이 처음 불거진 1996년 서울지검에서 퇴직한 A 변호사, 그리고 비슷한 시기 서울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은 B 변호사였다. 막 개업한 '전관' 두 사람은 사시 동기라는 점 외에도 다시 공직에 진출한 경력까지 똑같다. A 변호사는 김대중 정부 시절 '옷 로비 의혹사건' 특검팀 특검보를 거쳐 노무현 청와대에서 사정 비서관으로 재직했다. 사시 동기인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등 진보 성향 판사들과 함께 우리법연구회를 만든 B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추천위원과 대북송금 특검보를 거쳐 현직 판사가 맡아온 관례를 깨고 대법원장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B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출신이고 A 변호사는 범민변계로 분류된다. 민변은 1997년 12월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과 함께 급성장했고, 노무현 정부 시절엔 '민변 정부'라고 불릴 만큼 숱한 고위 공직자를 배출해 전성시대를 열었다. 두 변호사는 이런 흐름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었다.   1996년 검찰에 자진 출석한 아가동산 김기순씨. [중앙포토] 변호사의 사건 수임 자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제아무리 악랄한 흉악범이라도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변호인은 그런 고객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게 본연의 역할이니 말이다. 또 형사 사건 변호사라고 공직을 맡지 말란 법도 없다. 하지만 이들이 선뜻 공직에 간 선택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사이비종교 교인으로 의심받는 이들이 8월 찜통더위에 어린아이를 돼지 축사에 가둬 굶기고 매질한 끝에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를 받은 참혹한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그 누구도 제대로 죗값을 치르지 않도록 법 기술을 구사한 변호사들이 판결 후 검찰·법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요 공직을 맡은 건 불필요한 오해와 논란을 낳을 수밖에 없다. 당장의 이해충돌은 아닐지 몰라도 숱한 피해자를 양산한 가해자 측 변호인의 공직행 자체가 김기순의 공고한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작용할 수 있어서다. 혹시 아가동산 탈퇴자를 숨게 만들고 추가 폭로까지 막는 효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까.    지난 2001년 서울지법 남부지원은 김기순 측의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아가동산 그 후 5년' 편을 방송 당일 결방시켰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당시 김기순 측 대리인 역시 김대중 정부에서 방송위 방송발전기금위원으로 임명(본인 고사)될 정도로 잘 나가던 민변 언론특위 위원장 출신 C 변호사였다. 이 변호사는 아가동산 보도를 '언론에 의한 살인'이라며 모든 언론사에 관련 기사 삭제를 요구하고,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과 함께 언론(피해)인권센터까지 만들었다. 언론 보도 피해 구제를 내세웠지만, 김기순이 후원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가동산을 수사했던 수원지검 여주지청 출신 강민구 변호사는 "법원에서 폭행에 따른 사망은 인정했지만 공소시효 등 법리적으로 무죄를 받았을 뿐인데 당당하게 무죄 운운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힌다"고 했다. 평소 피해자의 인권을 앞세우는 민변 출신 변호사들이 김기순의 인권을 앞세워 정작 수많은 다른 피해자 인권을 외면하는 행태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는 24일 아가동산 측이 낸 방송중단 가처분 신청에 대한 심문이 열린다.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여러 의미에서 궁금하다.   ■  「 본보는 지난 3월 16일, 사이비 종교단체인 '아가동산' 사건과 관련해 변호사 A,B,C가 민변 소속이었다는 내용의 칼럼을 게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A변호사는 민변 소속이었던 적이 없어 이를 바로잡습니다. 또 민변 측은 "B변호사는 아가동산 사건의 항소심 판결 종결 시점에 민변에 가입하였으나 이후 탈퇴하였다"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 안혜리 논설위원

    2023.03.16 00:48

  • [안혜리의 시선]윤 대통령이 호통칠 대상은 따로 있다

    안혜리 논설위원 혁신은커녕 지난 수십 년간 땅 짚고 헤엄치기 식 이자놀이만 즐기다 국민 욕받이가 된 은행 편들 생각은 없다. 아무리 내수산업이라지만 대놓고 배짱 장사 하는 통신사도 밉긴 마찬가지다. 외국 항공사에 비해 쌓기도 쓰기도 힘든 마일리지 제도만으로도 화나는데, 이미 공들여 쌓은 마일리지의 값어치를 뚝 떨어뜨리는 개편안을 소급 적용하겠다는 항공사는 더 말해 뭐할까. 소비자 눈높이에서 볼 때 선량한 이윤 추구라고 두둔하기엔 이들 기업의 도가 지나쳤다.  지난해 6월 확장 이전했던 로톡 운영사 로앤컴퍼니 사무실 앞. 직원 절반을 내보낸 후 재택근무로 전환하기로 했다. 연합뉴스 "은행은 공공재적 시스템"(1월 30일)으로 시작한 윤석열 대통령의 기업 때리기 발언이 "은행 고금리로 국민 고통 크다"(13일)를 거쳐 "금융·통신은 이권 카르텔"(15일)이라는 거친 표현으로 강도를 더해가는 데는 이처럼 돈벌이에 혈안이 된 일부 독과점 기업들의 호구 노릇 하다 임계치에 다다른 국민 불만이 자리 잡고 있다. 대통령 발언을 신호탄으로 각 부처 장관들까지 나서서 아무 거리낌 없이 연일 기업을 윽박지르는 배경이다. 주요 타깃이 된 은행·통신은 물론이요, 코로나 19로 존폐 기로에 놓였던 항공사도 비껴가지 못한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대한항공 마일리지 개편을 비판했던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눈물의 감사 프로모션을 하지는 못할망정"이라며 무슨 시민단체나 할법한 감정적 비판을 이어간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은행은 대출금리를 낮추고, 통신사는 싼 요금제를 내놓고, 실세 장관의 분노를 산 항공사는 마일리지 개편안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으니 당장 혜택을 본 국민은 "속 시원하다"며 박수를 친다. 모두 환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근본적 해결책 없는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은 시장경제 원칙을 역행하는 포퓰리즘'이라는 식의 국민 정서와 거리가 먼 원론적 비판은 굳이 안 하련다. 기업과 시장을 존중하는 대신 '선의로 포장한 반(反) 자본주의적 정책 독주를 일삼아 각종 부작용을 낳았던 지난 문재인 정부와 뭐가 다르냐'는 문제 제기도 일단 접어두겠다.  지난 2021년 헌재의 위헌 판결 이후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로앤컴퍼니 김본환 대표(왼쪽)와 정재성 부대표. 이후 주무부처인 공정위와 법무부의 결정 지연으로 피해는 더 커졌다. 장진영 기자 하지만 이해당사자 간 조정 역할은 고사하고 이익단체의 위법 행위조차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고 수수방관한 탓에 결국 존폐 위기에 몰린 변호사판 '타다'인 법률 플랫폼 서비스 '로톡'을 보고 있자니 정부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윤석열 정부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간 대통령실이 기업 때리기 명분으로 앞세웠던 혁신이나 국민 편의라는 측면에서 봐도 로톡 관련한 정부의 행보는 문제가 있다. 또 여러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전 정권 탓" 역시 이번 사안에서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인 지난해 5월 헌법재판소가 로톡 광고를 금지한 대한변호사협회(변협)의 새로운 광고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뒤에도 공정위·법무부 등 주무부처는 1년 가까이 판단을 미루거나 방치했고, 그 과정에서 로톡은 제대로 사업을 영위하기 어려울 만큼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로톡을 운영하는 로앤컴퍼니는 변협의 세 차례 고발 등 법적 분쟁에 대응하기 위한 법률 비용만 10억원 이상 쓰는 등 기존 변호사업계와의 갈등으로 인한 누적 적자가 100억원에 달하면서 지난 17일 직원 절반 감원을 목표로 희망퇴직 접수에 나섰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정부가 제때 개입했더라면 구조조정은 없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터무니없는 불만이 아니다. 공정위가 부당행위와 관련해 변협 제재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낸 게 벌써 지난 2021년 11월이다. 신속하게 결정해도 모자를 판에 공정위는 오히려 제재 여부와 처벌 수위를 결정하는 전원회의 기일 지정을 "변협 요청"이라며 이례적으로 계속 연기해 1년을 넘겼다. 오늘(23일)로 예정된 전원회의에서 설령 법정 최고 과징금(20억원)이 변협에 부과된다 한들 로톡 입장에서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손해만 남았을 뿐이다.  법무부도 마찬가지다. 법무부는 변협 감독기관으로, 법령에 어긋나는 결의를 취소하거나 부당한 징계는 철회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간 갈등 국면에서 관리·감독에 나서지 않았다. 변협의 징계에 대해 이의신청하면 변호사법상 법무부 징계위원회는 90일 이내에 징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로톡 측은 90일(3월 8일) 이전이라도 빨리 판단을 내려달라고 계속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애타는 건 그저 기업뿐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 한동훈 장관이 "현 단계에서 법무부가 특정한 입장을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답해온 걸 보면 신속한 결정은커녕 아예 결정 자체를 미룰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의 "영업사원" 운운이 립서비스인 줄은 알았지만 왕조도 아닌데 대통령이 누굴 희생양 삼아 제왕적으로 호통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꼭 필요하다면 그 대상은 기업이 아니라 기업 발목 잡는 정부가 돼야 하지 않을까.  안혜리 논설위원

    2023.02.23 00:55

  • [안혜리의 시선]당신이 못 간 신혼여행에 드리운 문 정부 그림자

    안혜리 논설위원 지금 대한민국은 여권 대란이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온갖 잡음을 내는 여권 국민의힘 얘기가 아니라, 진짜 여권(passport)이 문제다. 각종 커뮤니티에는 신청한 여권이 나오지 않아 열흘 넘게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가려던 여행을 취소하고 위약금을 내거나 출장을 늦췄다는 경험담이 넘친다. 심지어 신혼여행을 제때 못 갔다는 사연도 있다. 발급 업무를 대행하는 구청 창구에서 두세 시간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 예상을 훌쩍 넘겨 보름 만에 겨우 발급된 여권을 찾는 데만 1시간 40분이 걸렸다는 사람까지 봤다. 이러니 민원이 폭주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해 12월 서울 은평구청 야간 민원실 민원의 90% 이상이 여권 관련이었다. 실제로 지난달 평일에 종로구청 여권발급 창구에 가보니 발급신청 대기인은 오전 오후 할 것 없이 30명 가까이 됐고, 지난해 12월 중순만 해도 4일로 안내하던 소요 기간은 '평일 기준 8~10일'로 늘었다. 예년 상황을 기대하고 신청했다간 출국일을 못 맞춰 봉변당하기 십상이다.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청 여권 민원실의 여권 신청 대기표. 지난해 12월만 해도 3~4일 걸리던 게 지금은 보름 넘게 소요된다. 연합뉴스 세계 각국의 코로나 19 입·출국자 방역 완화 조치에 따라 지난해 하반기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여행 수요가 겨울방학과 맞물려 여권 발급 신청으로 이어진 게 직접적 원인이다. 한해 500만권 수준이던 여권 발급은 2021년 67만권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9월 150만권을 회복했다. 이후 연말까지 석 달 동안 132만권(월평균 44만권), 그리고 올 1월에만 53만권이 발급됐다.  수요 폭증이 맞다. 하지만 이게 작금의 여권 대란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충분히 예상된 상황이었던 만큼 여권 발급 업무를 담당하는 한국조폐공사가 보다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약간의 지체는 있었을지언정 불과 한 달 만에 발급에 걸리는 시간이 세 배 이상 늘어나지는 않았을 거란 얘기다. 결국 빈말이 됐지만 반장식 조폐공사 사장은 올 초 한 언론 기고문에서 '수요 폭증에 대비해 공백 여권을 충분히 비축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요청이 쏟아져도 공급 차질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공백 여권이란 말 그대로 빈 여권이다. 미리 생산해뒀다가 신청이 들어오면 조폐공사 여권발급과에서 정보만 얹히면 된다. 조폐공사는 지난해 285만권의 공백 여권을 확보하기도 했고 자동화 생산설비를 갖췄기 때문에 설비를 가동할 최소한의 인원만 있다면 여권 발급이 이렇게까지 늦춰질 이유가 없다.  결국 일할 사람의 문제다. 평소 워라밸 좋기로 유명한 조폐공사의 조직문화,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경직된 주 52시간 정책이 숨겨진 원인이라는 얘기다. 조폐공사는 코로나 초기인 2020년부터 순차적으로 비정규직 일용직인 여권발급원의 계약을 해지했다. 사측과 노동자 간에 다툼의 여지는 있으나 원론적으론 일이 없으니 사람을 줄인 걸 뭐라 할 수는 없다. 다만 일이 늘어나면 사람을 늘리거나 같은 인원으로 초과근무를 통해 늘어난 업무량을 소화하는 게 맞다. 하지만 조직 내 인력 재배치로 담당 업무자 수를 일부 늘린 건 지난달 하순에야 이르러서다. 추가 채용은 아예 없었다. 그렇다고 기존 인원이 밤이든 주말이든 집중적으로 근무해 늘어난 물량을 소화한 것도 아니다.  과연 워라밸 좋기로 유명한 조폐공사답다. 점점 실물화폐를 안 쓰는 추세라 조직의 미래는 불투명하고, 본사가 서울도 아닌 데다 금융공기업처럼 연봉이 높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직장인 커뮤니티나 채용플랫폼 평가를 보면 직원 만족도는 대한민국 최상위권이다. 워라밸 덕분이다. 원래부터 '돈(연봉) 적고 미래 불확실하지만 워라밸은 그거 다 포기할 정도로 개꿀'이라는 리뷰가 붙을 정도였지만 여권 업무가 폭주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0월 이후 쓰여진 리뷰에도 '워라밸 넘어 (워크는 없이) 라라밸 지향하는 이곳으로 오시오'라는 식의 내용이 적지 않다.  직원 만족도 높은 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만 공기업인 만큼 국민에 불편을 끼치면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업무가 폭주하든 말든 칼퇴로 직원만 행복하고 제때 서비스받아야 하는 국민은 고통받는다. 그런데도 이 조직에서 별다른 문제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특유의 조직문화에 더해 지난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강력한 주 52시간 정책 덕에 주 12시간을 넘기는 집중 근무가 사실상 불법이라 떳떳한 거다. 마침 문 정부 말기에 알박기 낙하산으로 온 문재인 청와대 일자리 수석 출신 반장식 사장은 근로시간 단축 법안에 관여한 인물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안혜리 논설위원

    2023.02.02 00:53

  • [안혜리의 시선]창비와 김어준이라는 권력

    안혜리 논설위원 창비(창작과비평)와 김어준. 지난 세기부터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권력을 상징해온 두 키워드가 2023년 시작부터 사람들 입에 나란히 오르내리고 있다. 한쪽은 돈도 안 되는 논란으로 한숨짓고, 다른 한쪽은 쏟아져 들어오는 돈 앞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표면적으론 이처럼 양극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이벤트는 결국 같은 맥락 위에서 봐야 한다. 그들만의 작은 왕국을 구축한 편향적 권력의 작동 방식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해악 말이다.    TBS에서 하차한 김어준은 9일 새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 캡처 먼저 6년 3개월 만에 드디어 TBS(교통방송) 라디오 진행자에서 하차한 김어준 얘기부터 해보자. TBS에서 진행하던 같은 시간에 같은 이름을 내건 새 유튜브 채널로 지난 9일 시작한 김어준 방송은 당장은 모두에게 윈윈이다. 방송 첫날부터 슈퍼챗 전 세계 1등, 사흘 만에 구독자 87만명을 넘기며 돈벼락을 맞고 있는 김어준이 가장 큰 수혜자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선동으로 그렇게 쉽게 큰돈을 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긴 하지만 선량한 시민의 아까운 세금이 아니라 맹목적 추종자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 굳이 안타까워할 필요는 못 느끼겠다. 무엇보다 그에게 비판적인 사람들로선 서울시의 재정 지원으로 운영하는 방송국에서 라디오 전파라는 공공재를 점유하며 정치적 편향성을 뛰어넘는 각종 음모론의 생산기지 노릇을 해온 김어준의 퇴출 자체가 큰 선물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외면하기 어렵다. 최다 제재 기록을 세우며 법정 제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이미 보였던 김어준이다. 이젠 아예 방송심의라는 최소한의 족쇄마저 풀어버렸으니 가뜩이나 거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로 둔갑시켜온 그의 재주가 어떤 혼란을 불러올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 선동에 휘둘려 대통령궁을 비롯해 의회와 대법원까지 짓밟으며 민주주의를 유린한 최근의 브라질판 대선 불복 폭동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극성 팬덤을 확보한 음모론자가 끼치는 폐해는 결국 온 사회가 떠안을 수밖에 없어서다.  지난 2015년 소설가 신경숙 표절과 관련한 문제제기 후 열린 토론회. 당시 신경숙 작가 책을 출간했던 창비는 최근 장강명 작가가 이 부분을 언급하자 문장 수정을 요구해 논란을 일으켰다. 중앙포토 이번엔 창비의 장강명 작가 글 검열 논란이다. 과정을 상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단순히 출판사가 몇몇 문장을 손보려다 작가와 의견이 갈려 잡음이 생긴 게 아니다. 이보다는 조작한 진실을 제3자가 쓴 기록으로 남기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만하다. 발단은 이미 보도된 대로 '신경숙의 표절을 창비가 궤변으로 옹호하며 표절 기준을 무너뜨리려 한 것에 대해 한국작가회의는 끝내 아무 논평도 내지 않았다'는 문장 하나였다. 앞서 작가가 웹진으로 공개한 글에도 포함된 문장이다. 정 동의할 수 없다면 책 마지막에 출판사 입장을 별도로 밝히거나 편집자 각주를 달 수도 있는데 그 대신 본문 한가운데에 '표절에 대해 창비와 나의 입장은 다르다'는 문장을 넣으라고 작가에게 요구했다. 표절이라는 건 장 작가의 일방적 주장이고 표절이 객관적 사실로 드러난 건 아니라는 뉘앙스를 작가 본인의 글로 남기려 한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는 당 구호 그대로 왜곡된 사실을 역사로 만들기 위해 신문·잡지 등을 고쳐 쓰는데, 이것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김어준식 선동만큼 위험해 보이는 이유다.    저자와 편집자 간의 3차에 걸친 교정까지 모두 끝난 마당에 왜 출판사 경영진이 무리하게 이런 시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난 2015년 신경숙 작가의 표절로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작가회의의 전신) 결성을 주도하며 비단 문단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창비의 정신적 지주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당시 편집인)가 보였던 입장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당시 백 교수는 유사성은 인정하면서도 "표절로 단정 지을 수 없다"며 부인했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건이 불거진 후 비슷한 사례가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2021년 창비 편집주간을 지낸 한 역사학자의 책 서평을 부탁받았던 강진아 한양대 교수는 당시 서평과 관련한 한 기고 글을 통해 '중국 비판이 집중된 부분에 대해 반박과 수정 요청을 받았다, 진보 지식인 사회에서 중국론이 가지는 민감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썼다. 중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창비가 검열했다는 이야기다. 창비가 점유하고 있는 문화권력을 감안할 때 이런 식의 공론장 왜곡이 더 많지 않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이미 지나간 창비의 망신과 김어준의 하차, 대수롭지 않아보이는 이벤트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 이유다.  안혜리 논설위원

    2023.01.12 00:52

  • [안혜리의 시선]이 시대 또 하나의 이권 카르텔

    안혜리 논설위원 최근 생애 첫 책을 낸 이를 비롯해 몇몇 2030 남성 논객을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깜짝 놀랐다. 지금 한국 출판계를 비롯한 문화판은 이성애자인 젊은 남성, 게다가 좌파 진영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전력까지 있다면 책 출간은 물론 잡지 기고나 크고 작은 강연, 유튜브 섭외나 방송 출연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지식 생태계 안에서의 커리어를 이어갈 기회 얻기가 매우 어렵다는 경험담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사실상 커리어의 명줄이 끊길 위기에 처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순양 창업자 진양철 회장 역을 맡은 이성민. JTBC 가령 이런 식이다. 책 출간 전 기획안을 들고 진보를 표방하는 어느 신문 출판국을 찾았더니 담당자가 대뜸 "내용 자체는 매우 흥미롭지만 보수 신문에 우리 진영을 향해 비판적인 글을 쓴 저자의 책을 내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다른 몇몇 주요 출판사의 반응도 자칭 진보 신문의 출판국만큼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모두 비슷한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2030 세대를 구세대적 관점에서 좌우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지만 굳이 이 필진의 성향을 따지자면 보수보다 진보에 훨씬 가깝다. 그런데도 크든 작든 문화권력을 쥔 사람들은 내 편 마음에 안 드는 글을 쓴 적이 있다는 이유로 상대적 약자를 이렇게 배제하고 고립시켜 또래 전체에 겁을 준다. 이미 상당한 팬덤을 확보한 기득권 논객이거나 교수·의사 등 글쓰기 말고도 다른 생업이 있다면 또 모를까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전업 작가가 감당하기 어려울 공포다. 다행히 그의 칼럼을 눈여겨본 한 유명 작가가 다리를 놔줘 책을 낼 수 있었지만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출판계 주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 되더라는 고백을 했다.  비단 특정인에만 해당하는 이례적 사례가 결코 아니다. 또래의 젊은 남성 논객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어려움이다. 참신하고 깊이 있는 저술로 주목받았던 이가 최근 몇몇 칼럼에선 이상하게 진영에 갇혀 좌파 기득권 논리만 재생산해 의아하다 싶었는데, 원하는 학계로 가기 전 지자체나 시민단체의 무슨 무슨 연구원 자리라도 하나 얻으려면 이런 식으로라도 자기 증명을 해야 최소한 배제는 당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설명했다. 동성애자가 주류인 서구 패션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성애자도 동성애자인 척을 해야 한다더니 우리 지식 생태계가 딱 그런 식인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의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전 정부 블랙리스트 사태를 사과하는 모습. 정부의 불법적 블랙리스트는 없지만 다른 진영 입막음을 하는 교묘한 취소 문화는 더 만연해졌다. [사진 문화체육관광부] 2030 필자들은 이런 현실을 담담하게 말했지만 사실 심각한 문제다. 문서로 이름만 적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매우 광범위한 블랙리스트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셈이라서다. 아무리 서울시장이 박원순에서 오세훈으로 바뀌고, 문재인 정권 대신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도 이처럼 공고한 문화권력은 교체되지 않았다. 정치적 편향성은 차치하고 지난 십수 년 동안 음모론 생산기지 역할을 하며 더불어민주당의 전략통이자 스피커 노릇을 해온 김어준·주진우 같은 진행자가 대선 열 달이 다 지나가도록 여전히 tbs 방송을 장악하고 있는 데는 단순히 해당 방송국 내부 논리나 정치공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이런 문화판의 거대한 카르텔도 한 배경이라고 봐야 한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일 청년들을 만나 "미래 세대가 이권 카르텔에 의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공정한 기회를 갖지 못해 결국 우리 사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까 우려해 대선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이날 발언은 청년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대기업 등의 강성노조를 타깃으로 한 것이겠지만 우리 지식 생태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주인공 진도준(송중기 분)이 이전 생애 가족이 하는 식당을 찾는 장면. 원작엔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드라마에선 친부는 해고 노동자, 친모는 기업 주가조작 희생자로 나온다. JTBC 최근 화제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재밌게 보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맥락에서 의구심이 들었다. 무려 550쪽짜리 책 5권 분량의 웹소설을 16부작 드라마로 만들다 보니 원작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하지만 좀 과하다. 한국 재계사를 대기업 순양 오너 일가의 치열한 경영권 다툼에 대입해 보여준 원작에서도 정경유착이나 비자금 조성, 불법 승계 등 재벌의 치부를 보여준다. 하지만 초점은 기업가의 선택이다. 반면 드라마는 원작과 달리 손자 진도준의 원래 가족을 해고 노동자 등으로 등장시켜 기업의 약자 착취를 부각시킨다. 또 굳이 '머슴''마름' 등 자극적 단어를 반복하면서 기업가를 제 배만 불리는 파렴치한으로 그린다. 작가의 신념이라면 차라리 다행인데 혹시 이런 좌파 한 스푼 없이는 드라마 제작도 쉽지 않은 환경인가 싶어 찜찜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의 입을 막기 위해 자행되는 이른바 '취소 문화'를 다룬 『지식의 헌법』에서 미국 언론인 조너선 라우시는 '진리 추구 영역에 속하는 비판과 달리 취소는 프로파간다 전쟁 영역'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지만 이런 만연한 취소 문화가 건강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안혜리 논설위원

    2022.12.22 0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