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하의 시시각각] 여당, 수도권 강화없이 미래 없다

    김정하 논설위원 보수 정당에 이제 수도권 선거는 죽음의 무대가 됐다. 2016년 총선(더불어민주당 82석, 새누리당 35석)부터 의석 차가 확 벌어지더니 2020년 총선(더불어민주당 103석, 미래통합당 16석)과 이번 총선(민주당 102석, 국민의힘 19석)에선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연거푸 당했다. 수도권 득표율을 분석해 보면 4년 전엔 격차가 12.5%포인트(민주당 53.7%, 통합당 41.2%)였는데, 이번엔 9.2%포인트(민주당 53.6%, 국민의힘 44.4%)로 약간 줄었다. 그래도 의석 차는 여전히 어마어마하다. 1위를 제외한 나머지 표는 모두 사표가 되는 소선구제의 특성 때문이다.     ■  「 이대로 그냥 가면 4년 뒤에 또 참패 영남권 지도부 수도권 감수성 부족 당 운영을 수도권 중심으로 바꿔야 」  4년 전과 이번 총선을 비교하면 여야 구도가 뒤바뀌었고, 선거 쟁점도 완전히 달라졌으며, 핵심 플레이어도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비슷한 규모의 압승을 했다는 것은 수도권의 인구통계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이대로 그냥 가면 2028년 총선에서도 국민의힘은 수도권에서 80석 차가 넘는 대패를 당할 가능성이 농후하단 얘기다. 세 번 연속으로 그런 참패를 당하면 당이 과연 유지나 될까.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4월 11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비대위원장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김성룡 기자   국민의힘에 두 가지 해법이 있다. 먼저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나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으로 바꾸는 방법이다. 하지만 소선거구제의 이점을 크게 누리고 있는 민주당이 선거법 개정에 선선히 응할 리 없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당의 체질을 수도권에 맞게 고치는 수밖에 없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국민의힘이 수도권 정당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당 지도부를 수도권 위주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수도권 원외 인사들을 우대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당의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30·40세대의 의견도 비중을 높여야 한다. 보수 정당의 특성인지 전통적으로 국민의힘은 민주당보다 훨씬 더 현역 의원들 중심으로 당 운영이 이뤄진다. 그러다 보면 국민의힘 현역 의원의 다수가 영남 출신이다 보니 당 전체가 자연스레 영남 중심의 시각에서 굴러가게 된다.   그 결과로 당의 ‘수도권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얼마 전 만났던 대구·경북 지역의 국민의힘 의원은 “주중에 여의도에서 뉴스를 보면 ‘이거 큰일났다’ 싶은 일이 많은데, 주말에 지역구에서 당원들을 만나면 다들 ‘윤 대통령 잘한다’는 칭찬뿐이다. 그러면 여의도에서 했던 걱정은 덮어두게 되더라”고 털어놨다.   4월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2024 총선 참패와 보수 재건의 길'을 주제로 연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서성교 건국대 교수, 국민의힘 김용태 당선인, 윤상현 의원,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 박상병 시사평론가. [연합뉴스]   ‘수도권 감수성’ 부족의 대표적 사례가 지난해 10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다. 국민의힘 소속 김태우 전 구청장은 문재인 정부 시절 공무상 기밀누설 등 혐의로 지난해 5월 실형을 선고받고 구청장직을 상실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실시된 보궐선거에 국민의힘은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은 김 전 구청장을 재공천했다. 아무리 억울한 사정이 있더라도 본인 귀책사유로 열리는 보궐선거에 당사자를 재공천하는 게 말이 되나. 그런데도 영남권 중심의 국민의힘 지도부는 무리한 공천을 밀어붙이는 대통령실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결국 김 전 구청장은 17.2%포인트 차로 대패하면서 이번 총선의 예고편을 찍었다. 지금 국민의힘은 ‘수도권 참패→당의 영남화→수도권 참패’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수도권은 약간의 표 차로 당락이 뒤바뀌기 때문에 여론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이번 총선 때 국민의힘에서 이종섭 전 호주대사와 황상무 시민사회수석의 경질을 요구한 후보들은 대부분 수도권 출마자였다. 국민의힘이 이번에 수도권에서 득표율을 5%포인트만 올렸다면 1, 2당이 바뀔 수도 있었다. 수도권에선 약간의 움직임도 엄청난 변화를 낳는다. 이런 정치적 감수성을 키우는 것, 즉 영남권 정당에서 수도권 정당으로 체질을 개선하는 것은 국민의힘에 사활이 걸린 과제다.   김정하 논설위원

    2024.04.19 00:36

  • [이상렬의 시시각각] 민생, 방향을 잘못 잡았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는가 보다.’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의 국무회의 12분 모두발언을 보며 많은 국민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 같다. 4·10 총선 참패의 최대 요인이 된 윤 대통령 자신의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 독선, 불통에 대해선 반성도, 사과도 없었다. 대신 윤 대통령은 “국정의 최우선은 민생”이라며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이 체감할 만큼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모자랐다”고 말했다. 민생이 국정의 최우선이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대통령과 정부가 민생의 어려움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는 짚어볼 일이다.     ■  「 양질 일자리 줄고 자영업은 위기 불황에 보험까지 깨며 버티는데 구조조정·구조개혁은 말만 요란 」    지난해 12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의 경제 성과를 비교 보도했다. 물가와 성장 등 종합점수에서 한국이 2위였다. 아니나 다를까,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보도를 소개하며 “정부가 민간 주도, 시장 중심의 경제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한 것에 대한 평가”라고 자찬했다. 과연 ‘OECD 2위’는 국민 다수의 현실 인식과 부합할까.   체감 경기는 지표와 따로 노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미국 바이든 대통령도 미 경제가 ‘골디락스 경제(Goldilocks Economy, 고성장에도 물가가 안정적인 상태)’에 가까운 호황인데도 유권자들에게 잘 먹히지 않아 대선 캠페인에서 고전하고 있다.   민생의 고충 가운데 하나는 일자리다. 3월만 해도 고용률 62.4%, 실업률 3%. 종합 수치는 괜찮아 보이지만 속사정은 사뭇 다르다. 청년층(15~29세)은 취업자가 1년 전보다 13만1000명 감소했다. 공식 실업률은 6.5%지만, 일이 있으면 추가 취업하겠다는 이들 등을 포함한 확장실업률은 16.2%였다. 더구나 청년 취업자 중 약 9%(34만9000명)는 포장·운반·하역 등 단순노무직에 종사한다(2023년,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마이크로데이터). 양질의 일자리가 태부족한 게 현실이다.   자영업 경기는 최악이다. 지난해 말 자영업자 대출금은 1109조원이 넘는데, 3개월 이상 못 갚고 있는 돈이 27조원으로 1년 새 약 50%(9조원) 급증했다(나이스평가정보). 3곳 이상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 추가 대출이 사실상 불가능한 ‘다중채무자’는 173만 명이나 된다.   게다가 만약을 위해 들어둔 보험을 깨고 받아간 해약환급금이 작년에 45조원, 보험약관대출이 71조원으로 역대 최대 수준으로 뛰었다. 이런 게 민생 경제의 위기 신호다. 수출이 살아나 경제가 호전된다는 말은 딴 세상 얘기다.   그런데 정부 움직임은 이상하게 돌아갔다. 느닷없이 주식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더니 대주주 주식양도세 완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선언이 잇따랐다. 윤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중엔 “주식 시장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서민들의 삶에 대한 배려가 미흡했다”는 대목이 있다. ‘부자 감세’에 대한 비판이 언론에 넘쳐났는데 보지 못했다는 것인가.   윤 정부의 굴욕은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무능하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아무리 사과값·대파값이 많이 올랐다고 한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폭등, 소득주도성장만 하랴. 문제의 본질은 국민 다수가 지금 겪고 있는 혹독한 불황과 양극화다. 서민 경기가 바짝 메말라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치솟는 생활물가, 그리고 정권의 안일한 대처가 민심에 불을 질렀다.   윤 정부 경제 운용의 큰 결함은 불황을 타개해 나갈 전략과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빚더미에 짓눌린 이들에게 이자 감면이나 환급, 전기요금 지원 등은 미봉책일 뿐이다. 경기 침체에서 제대로 벗어나려면 구조조정과 구조개혁밖에 방법이 없다. 노동시장 유연화, 최저임금제 개편, 전기요금 정상화 등 할 일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윤 정부는 지난 2년간 말만 요란했지, 개혁에 서툴렀고 소홀했다. 국민들도 그 정도는 안다. 그러니 윤 대통령의 민생 강조가 자꾸만 공허하게 들리는 것이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2024.04.18 00:38

  • [이상언의 시시각각] 반도체 여야 협치는 몽상인가

    이상언 논설위원 #1 저녁 퇴근시간 기쿠요마치(菊陽町) 하라미즈역 플랫폼에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졸릴 정도로 한산했던 곳이다. 구마모토역 방향으로 가는 기차(신칸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TSMC(대만 반도체 회사)에 소재와 부품을 공급하는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도쿄일렉트론 등의 직원이다. 산업 현장에서 쓰는 안전모를 넣은 투명한 백팩을 멘 승객도 보인다.   #2 기쿠요마치 자치단체 사무실 직원들이 반도체 공장이나 이와 관련된 부품·장비 업체에서 일할 의향이 있는 사람을 찾는 전화를 열심히 돌린다. 기쿠요마치에 세워진 TSMC 반도체 공장에 약 400명의 근로자가 대만에서 파견됐다. 그들은 이 지역 다른 제조업체 근로자보다 약 30% 많은 보수를 받는다. 이 때문에 이곳의 다른 업체에서도 임금이 오르기 시작했다.     ■  「 TSMC 들어선 구마모토현 활기 한국의 클러스터 조성은 제자리 초당적, 거국적 지원 조직 필요 」    #3 구마모토현의 다다미가 깔린 연회장. 출장 온 대만 TSMC 임직원들과 지역 상공회의소 간부들이 티셔츠와 열쇠고리 등의 기념품을 주고받기에 바쁘다. 스시 접시 옆으로 기린 맥주와 일본 청주가 담긴 잔이 놓인다. 건배사가 울려퍼진다. “우리가 벌어들일 돈을 위하여(To all the money we’re going to make).”   한국에서 총선이 치러진 지난 10일 뉴욕타임스 1면과 8면에 실린 기사의 현장 묘사 부분이다. 기사 제목은 ‘옛 반도체 챔피언이 다시 링에 오르다(Old chip champ re-enters ring)’. 두 달 전에 가동이 시작된 TSMC 기쿠요마치 공장에 일본 반도체 산업 부활의 가능성이 보인다는 내용이다. ‘TSMC 공장 주변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인다. 화학 소재 제조업체와 장비 제조사가 반도체 경제 덕을 보려고 열띤 경쟁을 벌인다. 소니·덴소·도요타 등의 반도체 의존 기업들은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에 대규모 투자로 호응한다’고 전한다.   일본 정부는 이 공장을 짓는 데 4760억 엔(약 4조2000억원)을 댔다. 직접 지원(보조금)이다. 현재 TSMC 두 번째 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거기에는 일본 정부가 7320억 엔을 내기로 했다. 기쿠요마치 TSMC 합작 1호 공장 건설 계획이 확정된 것은 2021년 6월이다. 이듬해 4월에 공사가 시작됐고, 지난 2월 초에 부분 가동에 돌입했다. 완전 가동 시점은 올해 말로 계획돼 있다. 한국만큼이나 인허가 행정 절차가 까다로운 일본에서 이례적인 속도다. 정부가 앞에서 일사천리로 걸림돌을 치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돈을 모아 세운 반도체 회사 ‘래피더스’는 홋카이도에 공장을 짓는다. 라틴어 ‘라피두스’는 신속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던 ‘빨리빨리’를 일본이 외친다.   ‘명실상부한 반도체 초강대국을 이룩하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 81쪽 큰 글씨 제목이다. 아래에는 ‘실효적인 반도체 산업 지원 대책 마련’이 적혀 있다. 시설투자 세액 공제 확대, 전력·공업용수 등 인프라 신속 지원이 세부 사항이다. 지난달 15일 윤 대통령은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300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민간투자를 바탕으로 수도권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신규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 집권이 2년이 다 돼 간다. 뭐가 됐다는 얘기는 없고, 아직도 “하겠다”는 말뿐이다. 전기·용수 공급 방법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오롯이 대통령 책임은 아니다. 반도체산업 지원 법안은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이해가 각기 다른 지방자치단체가 발목을 잡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야당 측도 함께하는 ‘거국적(초당적) 반도체 지원 조직’ 창설을 제안한다. 우선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가 만나 반도체산업 정책을 논의하기 바란다.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순 없다. 부부가 싸워도 아이들 공부는 시켜야 한다. 형제 간 다툼으로 집이 엉망이 됐어도 누군가는 소를 키워야 한다. 예전 챔피언이 장갑을 끼고 링에 올랐다고 하지 않는가.       이상언 논설위원

    2024.04.17 00:34

  • [서경호의 시시각각] ‘창드래곤’이 시끄러운 까닭은

    서경호 논설위원 한국은행 총재 하면 으레 조용하고 점잖은 경제학자를 떠올린다. 실제로 교수 출신 총재 중에 그런 분이 많았고, 내부 승진 총재라 해도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은 자체가 ‘한은사(寺)’라고 불렸을 정도로 절간처럼 조용한 동네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한데 이창용 한은 총재에겐 이례적으로 ‘창드래곤’이란 재기발랄한 별명이 붙었다. 그런 지 꽤 됐다. 창드래곤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별명 ‘재드래곤’처럼 누리꾼의 호의가 담긴 애칭이다. 사실 이름에 한자 용(龍)을 쓰는 건 가수 지드래곤(본명 권지용)이지 이 총재도, 이 회장도 다른 한자를 써서 드래곤과는 아무 상관없다. 아무튼 그렇게 불린다.     ■  「 과일 수입, 최저임금 차등 적용 등 논쟁 감수하고 ‘불편한 진실’ 언급 우리에겐 더 많은 쓴소리가 필요 」    이 총재에게 별명이 붙은 건 국민의 관심을 꽤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오는 21일로 취임 2주년이 되는 그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우선 통화정책 운용 과정이 보다 투명해졌다. 총재로 부임한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2.0%포인트 올리면서 언론이 ‘K점도표’로 부르는 조건부 포워드 가이던스를 도입했다. 금통위원들이 생각하는 향후 3개월간의 정책금리 수준을 알려줬다. 미래의 금리정책에 대해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했던 한은의 전통에서 벗어났다.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한은이 시끄러워졌다는 점이다. 지금 한은은 더 이상 절간이 아니다. 이 총재 스스로 논쟁적인 현안에 개입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주 금통위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이 총재는 농산물 물가 상승을 통화·재정정책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고 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생산 감소를 재배면적 늘리고 재정을 투입해 가격 보조하는 정책으로는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수입도 검토해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이를 ‘망언’으로 규정하고 “농업을 모르면 입을 다물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의 의중을 충실하게 담은 보고서도 잇따라 나왔다. 지난달 초 ‘돌봄 서비스 인력난·비용 부담 완화 방안’에선 외국인 노동자 활용과 최저임금 차등 적용 필요성을 제기했다. 민감한 사안을 정면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지만, 민주노총과 외국인 노동자 인권단체는 한은 앞에서 “반인권적 발상”이라며 비판 시위를 했다. 보고서 때문에 사회단체가 한은을 찾아와 시위를 벌인 건 한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지난해 11월 보고서엔 선택과 집중에 실패한 역대 정부의 균형발전 전략에 대한 반성을 담았다.   이 총재는 작심하고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겨냥하고 있다. 2년 전 취임사에서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한 이래, “재정당국과 통화당국의 단기 정책을 통해 (구조적 저성장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2023년 5월), “10년 넘게 중국 특수(特需)에 취해 우리 산업이 한 단계 더 높이 가야 할 시간을 놓쳤다”(2023년 7월), “높게 매달린 과일을 수확하려면 어려움이 수반된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올해 3월) 등의 쓴 소리를 이어 왔다. 그가 자주 거론하는 ‘높이 매달린 과일’ 비유에 공감한다. 이제 편하게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과일은 다 따먹었다. 높이 매달린 남은 과일을 따기 위해선 힘껏 도움닫기를 하고 온 힘을 다해 도약해도 겨우 닿을까 말까다. 시끄럽고 불편한 논쟁을 피하면 안 된다.   한국은행이 본연의 역할인 물가와 금융 안정에나 신경 쓸 일이지 웬 오지랖이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총재 취임사에 답이 있었다. 장기 저성장 위기에 몰린 우리 경제의 중장기적 도전을 생각할 때 한은의 책임이 통화정책의 테두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야당에 힘을 실어준 총선 결과에 경제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우리 경제의 골든타임이 끝나간다는 한은의 진단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겐 더 많은 ‘창드래곤’의 쓴 소리가 필요하다.      서경호 논설위원

    2024.04.16 00:36

  • [최현철의 시시각각] 세월호 10년, 기억공간의 힘

    최현철 논설위원 한 주 전만 해도 온 나라를 뒤덮었던 벚꽃이 어느새 졌다. 그 자리에 여린 새잎이 돋았다. 세상은 이제 온통 녹색이다. 이맘때 산야는 초록으로 푸르지만, 다 같은 녹색이 아니다. 아기 볼살처럼 투명한 연두가 있는가 하면 벌써 햇빛을 튕겨내며 반짝이는 발랄한 녹색도 있다. 겨울을 지나며 계절에 동화된 잿빛 상록도 보인다. 단색 수묵화가 단조롭지 않은 것처럼 녹색도 그 농담(濃淡)만으로 다채롭다. 지난 13일 이 녹색의 세례를 받으며 차를 달려 경기도 안산 ‘4·16 단원고 기억교실’에 닿았다.     ━  단원고 2학년 교실 그대로 재현    2021년 개장한 기억교실은 10년 전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이 희생된 단원고의 2학년 10개 교실과 교무실을 그대로 재현했다. 칠판과 책상, 문짝과 게시판까지 그대로 가져온 이곳에서 아이들의 시간은 10년 전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에 멈춰 있었다. 책상마다 기억노트 한 권, 캐리커처와 기억패 하나, 그리고 유족과 방문객이 남긴 메모와 꽃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간 3만여 명이 다녀갔다. 10주년을 맞아 올해는 찾는 발길이 좀 더 늘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일주일 앞둔 9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4.16기억교실 모습. 2021년 문을 연 기억교실은 세월호 참사로 250명의 학생과 11명의 교사가 희생된 안산 단원고 2학년 교실 10개와 교무실 1곳을 그대로 옮겨와 재현했다. 연합뉴스 사진과 캐리커처, 기념패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예쁘고 싱그러웠다. 그러나 초록들이 다 같은 녹색이 아니듯 그 풋풋함 속에서도 개성들이 뚜렷했다. 셰프 복장 인형과 경찰관 제복처럼 아이들의 다양한 꿈을 기억하며 친지들이 가져온 소품도 눈에 띄었다. 이 책상들을 하나씩 지나며 먹먹한 마음이 눈가에서 물기로 변한다. 티슈나 손수건 필수지참이다.      ━  기억의 의지를 다지는 기억 공간   교실을 둘러본 방문객들은 저마다 노란 메모지에 글을 남겼다. 특이하게도 “기억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는 문구가 빠지지 않았다. 기억은 희생자들의 안타까움과 사고의 참혹함에 그치지 않는다. 안전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각성과 안전이 침해받아선 안 된다는 다짐이 단단히 뭉쳐 있다. 생중계 화면을 보면서도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떠나보낸 미안함과 근본적인 책임 소재를 묻는 의구심도 녹아 있다. 이날 목포에서 찾아온 단체 방문객에게 기억교실을 안내한 유가족은 “기억은 마음을 모으는 것”이라고 말했다. 모인 마음엔 지키려는 힘이 있다.   ■  「 유족들이 지킨 기억공간 여럿 방문객들은 안전과 기억 다짐 생명안전공원 건립도 서둘러야 」  벌써 10년. 이 시간 동안 유가족들은 흐릿해져 가는 기억을 붙들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을 쳤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특별법을 만들고, 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특별조사위원회를 지켜봤다. 일부에서 지겹다, 그만하자 소리쳤지만 굴하지 않았다. 스스로 여러 추념 사업을 벌이고 노란 리본 같은 기억의 상징물을 배포하며 추모의 공간을 만들었다. 단원고 기억교실을 비롯해 팽목항과 제주의 기억관, 서울시 의회 옆 기억공간, 목포 신항만의 세월호 선체까지. 유족과 자원봉사자들이 아픔을 추스르며 지켜낸 공간에 시민들이 찾아와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다잡고 돌아간다. 이제 시민을 지키지 못한 정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지 8년이 지나 발생한 이태원 참사가 대표적이다.    ━  계속 미뤄지는 생명안전공원   지난 2021년 열린 4.16 생명안전공원 국제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된 이손건축의 설계도. 당초 9962㎡ 부지에 495억원을 투입해 봉안시설과 교육, 활동 공간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건립해 세월호 10주기에 맞춰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협의기간이 길어지며 아직 착공도 하지 못한 상태다. 사진 안산시청 예정대로라면 10주기를 맞는 올해 세월호 추념 행사에서는 기억공간의 결정판이 공개될 예정이었다. 정부와 지자체, 유가족들은 2019년 단원고 건너편 화랑유원지에 495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9962㎡의 추모공간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희생자 유골이 봉안되는 공간과 안전과 재난에 대비하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어우러지게 할 계획이었다. 뉴욕 9·11 메모리얼 파크의 한국판인 셈이다. 당초 2021년 착공해 10주년 기념식에 개장한다는 목표였다. 그런데 사업비 협의 과정이 늘어지면서 착공이 계속 지연됐다. 그러는 사이 건축비가 급상승해 총비용이 500억원을 넘길 상황에 처했다. 기재부는 지난해 규정상 사업비 적정성 재검토가 필요하다며 또 제동을 걸었다. 6개월의 검토를 거쳐 사업비는 508억원으로 늘리고, 대신 연면적을 20%가량 줄이는 선에서 합의를 봤다. 이래저래 올해 완공은 고사하고 첫 삽도 뜨지 못한 상태다. 설마 정부가 기억공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최현철 논설위원

    2024.04.15 00:36

  • 한동훈과 이재명의 앞날[강주안의 시시각각]

    강주안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모두 배우자와 따로 투표한 희한한 선거가 끝났다. 비방으로 점철된 이번 총선의 살기가 실감 난다. 야당의 압승이되 개헌 가능 의석에는 못 미친 성적표. 지난 4년 내내 반복된 국회 풍경을 4년 더 봐야 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야당 국회의장이 법안을 강행 처리하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정부가 제출한 법안은 야당이 퇴짜를 놓는다. 한덕수 총리 등이 사의를 표했는데 인사청문회의 고성이 벌써 들리는 듯하다.  ━  배우자와 따로 투표한 최악 선거   서로에 대한 적개심은 극에 달한 상태다. 여야의 리더가 이를 조장했다. 정치권에 새 바람을 일으키리란 기대를 모았던 한 전 위원장이 거친 말을 쏟아내며 기성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데는 넉 달이 채 안 걸렸다. 이 대표는 자신에게 반대 목소리를 냈던 당내 인사들을 제거한 이후엔 대파를 열심히 들고 다녔다. 이제 손익 계산을 해볼 때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6일 경기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사거리에서 지원 유세를 하던 중 대파 헬멧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탈리아 역사학자 카를로 M 치폴라는 자신과 남에게 이익 또는 손해를 끼치는지를 기준 삼아 사람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눴다(『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 남에게 이익을 주고 자신은 손해를 보는 사람은 ‘순진한 사람(sprovveduti)’, 양쪽 모두에게 이익을 주면 ‘현명한 사람(intelligenti)’, 남들이 손해를 봐도 내가 이익을 얻으면 ‘영악한 사람(banditi)’, 나도 남도 손실을 입으면 ‘어리석은 사람(stupidi)’으로 규정했다. 이를 양당 리더에게 적용하면, 네거티브 유세로 일관한 두 사람이 남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자신도 실속을 못 챙긴 한 전 위원장은 ‘어리석은 사람’에 속한다. 승리를 이끈 이 대표는 ‘영악한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  「 배우자와 따로 투표한 최악 선거 삼겹살·대파 비방전 여야 리더 탓 협치 노력에 따라 둘의 미래 결정 」  이제 총선을 변곡점으로 두 사람은 새로운 갈림길에 섰다. 어제 사퇴한 한 전 위원장은 남에게라도 이익을 안기는 ‘순진한 사람’을 지향할 만하다. 정권 독선을 염려하는 민심을 받들어 정부에 고언하고 야당과의 협치에 헌신하는 길이다. 그러나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벼르는 ‘한동훈 특검법’을 피하려면 윤 대통령의 거부권에 기대야 하는 형편이니 진퇴양난이다.     이 대표는 어떨까. 민심은 민주당에 현 정부의 독주를 막기에 넉넉한 의석을 줬다. 그러나 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200석 이상을 허용하진 않았다. 정부와 국회가 서로 견제하라는 유권자의 뜻이다. 이 대표 앞에는 사법리스크가 첩첩산중이다. 갈등이 최악인 상황에서 이 대표가 의원직을 잃는 결과가 나온다면 그 역시 ‘어리석은 사람’ 신세가 된다. 협치에 진력하면 새 길이 열린다. 법원이 그의 손을 들어줄 경우 사회 통합에도 기여한 ‘현명한 사람’이 된다. 설령 판결이 뜻대로 안 나와도 정치 갈등을 극복하려 애쓴 ‘순진한 사람’의 잔상으로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인권변호사에서 성남시장·경기도지사를 거치며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받은 이 대표는 중요한 고비마다 포용력을 내세웠다. 2017년 대선에 도전장을 낼 땐 “내가 진짜 보수”라는 주장까지 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윤석열 검사를 검찰총장에 기용하겠다”고 공언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수중에 들어온 권력의 크기에 반비례해 포용의 폭이 좁아졌다. 이번 총선 공천 과정에선 박용진 의원까지 상식 밖 우격다짐으로 배제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이런 퇴행을 선거 승리라는 명분으로 덮는 데는 한계가 있다. 윤 대통령도 어제 “총선에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겠다”고 했으니 이 대표가 태세 전환을 하기에 좋은 여건이 됐다.  ━  삼겹살·대파 비방전 여야 리더 탓    ━  협치 노력에 따라 둘의 미래 결정    선거 운동 막판까지 고기 불판 사진을 확대하며 ‘삼겹살 검증’에 열을 올린 여당 위원장과 파를 모자에 꽂고 퍼포먼스에 열중한 야당 대표는 국민에게 큰 자괴감을 안겼다. 우리 정치 수준이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을 달래주는 숙제가 이들에게 남았다. 이 과제를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는가에 두 사람의 미래가 달렸다. 관련기사 [강주안의 시시각각] 방치될수록 위험해지는 공수처 조국혁신당이 소환한 친박연대 기억 [강주안의 시시각각] [강주안의 시시각각] 가짜 뉴스보다 겁나는 거짓 뉴스 [강주안의 시시각각] 추미애·최강욱의 반전 [강주안의 시시각각] 읍소 대상이 된 제2부속실 설치 [강주안의 시선] 물러날 때를 놓친 장관의 비애강주안 논설위원

    2024.04.12 00:36

  • [김현기의 시시각각] 국민의힘 참패가 남긴 것

      ■  「 입법·행정부 파워게임 불보듯 뻔해 앞으로 3년이나 '데드덕' 봐야 하나 연정이건 내각제건 정치 틀 바꿔야 」    김현기 논설위원 #1 선거는 기세, 인물, 구도의 세 요인으로 결판난다. 한 달 전, 그러니까 3월 초까지만 해도 국민의힘의 2승1무였다. 일단 기세에서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돌풍이 앞섰다. 1승. 민주당의 '비명횡사, 친명횡재' 공천 덕분에 어부지리로 국민의힘 2승. 다만 구도는 '정권심판론'과 '운동권 청산론'의 팽팽한 무승부. 결정적 변화가 생긴 건 3월 중순이었다. 공천이 마무리돼 가는 상황이던 3월 10일, 이른바 '이종섭 도주 대사' 사건이 터졌다. 정부·여당은 이 전 국방부 장관이 출국금지 상태인 줄 정말 몰랐다고 한다. 앞뒤 안 가리고 007작전 하듯 출국시켰다. 무지와 무능이 합체된 결과는 무방비 상태의 지지율 하락. 이때 우물쭈물, 용산 대통령실의 눈치를 본 한동훈의 기세는 꺾이고 말았다. 검찰 재직 때부터 "수사는 기세"란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이번 선거에서도 "기세를 보여 달라"고 했던 게 한동훈. 그 기세가 힘을 못 쓰게 된 순간 바람은 순식간에 이재명으로 방향을 틀었다. 1패. 구도 또한 '운동권 청산'을 외치다 돌연 '이·조 심판' '범죄자 심판'으로 오락가락 엉키다 보니 한 길을 간 야당의 '정권심판론'에 뒤집히고 말았다. 2패. 공천 국면이 진정되자 인물론은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무승부. 그래서 국민의힘의 1무2패.    한동훈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 마련된 국민의힘 총선 개표상황실에서 관계자의 보고를 받고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뉴스1   #2 참패를 면할 막판 기회는 있었다. 열흘여 전부터 '양김(양문석·김준혁) 효과'로 국힘이 상승세를 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 변곡점에서 찬물을 끼얹은 결정적 한 방은 4월 1일의 윤석열 대통령의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 아니었나 싶다. 99%는 '어디서 감히!'였다. 이런 대통령의 '가르치려 드는' 태도에 지난 대선 때 윤 대통령에게 한 표를 던졌던 중도 지지층이 '막판 뜨악'을 했다고 본다. 생방송으로 담화를 지켜보다 데자뷔를 느낀 장면이 있다. 지난해 3월 윤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의 공동 기자회견장. 일본 기자가 강제징용 해법으로 한국 정부가 제시한 3자 변제안에 관해 물었다. 윤 대통령은 한동안 설명한 뒤 미소를 머금은 채 질문한 기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부족하면 제가 더 답변해 드릴 수 있는데…." 일본 기자들은 움찔했다. 윤 대통령 본인은 자기 생각이 늘 옳다고 생각하지만(실제 그럴 수도 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한 수 가르치듯 말하는 경우가 많다. "바른 말을 얄밉게 이야기하는 게 한동훈, 틀린 말을 그럴싸하게 이야기하는 게 이재명, 모든 말을 위에서 이야기하는 게 윤석열"이란 항간의 말에는 뼈가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이해찬·김부겸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 홍익표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가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 마련된 제22대 국회의원선거(총선) 민주당 개표 상황실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보며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3 총선은 끝났다. 역대급 비호감, 역대급 저질 선거였다. 당선된 후보에겐 잔인할지 모르나, 앞으로 4년간 이들을 봐야 할 국민은 고역이다. 냉정하게 보자. 우리가 치른 최근 30년의 총선 중 "이번 선거는 역대 최악"이라고 안 불린 적이 있었던가. 늘 도돌이표였다. 국회의원의 질은 떨어지고 나라 전체가 극단적 진영 대립으로 치달았다. 뉴욕타임스의 지적대로 '단두대 매치'다. 22대 국회도 협치는 기대난망이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행정부와 입법부가 늘 틀어져 있고, 국민이 뽑아 놓은 대통령을 남은 임기 내내 '데드덕'으로 놔두는 게 정답일 순 없다. 이번 총선을 계기로 연정을 하건, 내각제로 바꾸건 하루속히 정치의 틀을 바꿔야 한다. 내각제로 가면 몇 개월에 한 번씩 총리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맞다. 한때 일본이 그랬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5년간 한 발짝도 정치가 앞으로 못 나갈 바에야 차라리 바꾸는 게 나을 수 있다. 또 그런 시행착오 속에 정치도, 국민도 그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자연스럽게 타협과 대화를 모색하는 법이다. 그걸 잘하는 지도자는 오히려 롱런한다. 독일과 영국이 그랬다. 나아가 연정이나 내각제를 택하고 있는 주요 선진국의 국민성이 공통적으로 타협과 절충에 능한 건 우연일까. 아니다. 모든 것에 우연은 없다. 김현기 논설위원

    2024.04.11 02:28

  • [고정애의 시시각각] 이렇게 투표하는 게 맞을까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우리가 사는 세계는 단순다수제(first-past-the-post)가 지배한다. 대선이든, 총선 지역구든, 지방선거든 한 표라도 많으면 승자가 된다. 실제 지방선거에선 한 표 차로 이긴 사례가 있다. 총선에선 세 표 차였다(2000년 경기도 광주).    분명 그렇지 않은 세계도 있다. 후보자가 세 명 이상일 경우 과반 아닌 후보가 당선되곤 하는데, 대표성이 충분하냐는 문제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다. 19대 대선이 예일 수 있겠다. 문재인 대통령이 17%포인트 차로 당선됐다(득표율 41.1%). 기권자를 포함한 전체 유권자로 보면 10명 중 7명(68.4%)은 문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단순다수제의 경험이 가장 오랜 영국에선 그래서 19세기부터 대안이 모색됐다(영국답게 여전히 단순다수제다). 토머스 헤어가 제안했고, 친구인 존 스튜어트 밀이 열렬히 옹호한 방식이 그중 하나인데, 단기이양(單記移讓)투표제(single transferable vote)다. 밀의 설명은 이랬다.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일차적으로 선호하는 후보 외에 차선의 후보 이름도 적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이 일차적으로 지지한 후보가 당선 가능한 수의 득표를 하지 못한다면 그다음 순위의 후보가 득을 볼 수 있다.”(『대의정부론』)   ■  「 한 표 더 많으면 되는 단순다수제 열성층 동원하는 혐오정치에 취약 중도층 위해 결선투표 등 검토해야 」     대영제국에서 퍼져나가던 아이디어는 호주에서 실현됐다. 한 번의 투표로 과반 당선자를 만들어낼 비법을 찾아냈다. 1918년부터 적용된 선호투표제(preferential voting)다. 5명이 후보라면 투표할 때 1위부터 5위까지 선호도를 표기한다. 개표할 땐 1위 표부터 센다. 절반에서 한 표라도 많은 이가 나오면 그가 당선된다. 없다면 꼴찌(5위) 표에 표시된 2순위 후보에게 꼴찌 표가 배분된다. 과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이 과정을 되풀이한다. 첫 선호에서 최다 득표자가 당선자가 될 수도 있지만, 않을 수도 있다. 2, 3위 표도 중요해진다. 호주는 투표가 의무이기도 하다. 집단적 거부감을 받는 처신을 해선 곤란하다.      단순다수제와 선호투표제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할 수 있겠다. 누군가 2022년 호주 하원 선거를 분석했던데, 151석 중 16석에서 1위 최다 득표를 하고도 당선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집권당인 ‘연합(자유당-국민당 연합)’에서 노동당이나 소수당·무소속(기타)으로 바뀜이 많았다. 단순다수제였다면 '연합'이 과반에서 3석 모자란 73석으로 노동당(71석)을 제치고 1당이 됐을 것이다. 실제론 노동당이 과반(77석)을 했고, '연합'은 53석으로 쪼그라들었다. 기타가 7석에서 16석으로 크게 늘었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 투표일을 하루 앞둔 9일 대구 중구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관위 관계자가 기표용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널리 알려졌다시피 프랑스의 세계는 또 다르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가 제안한 방법을 변형해,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1·2위 후보끼리 결선투표를 치른다. 프랑스가 극우정당(국민연합)의 위협을 그나마 저지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이다. 2022년 대선에서도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이 1차 투표에서 23.7%를 얻었으나 결선투표에선 17.8%포인트 늘리는 데 그쳤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8.5%에서 58.6%가 됐다.    이미 22대 국회는 21대 국회 이상으로 최악일 거라고 예상한다. 경쟁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더 자극하고 조롱하고 경멸하고 욕설하는 데 능숙한 인물들이 후보가 됐고, 열성적 지지층만 동원해도 당선이 가능한 거로 나온다. 오래전부터 조짐은 있었으나 이젠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된 듯하다. 최악을 상상해도 그 이상의 최악이 등장하고 있다. 반면에 혐오를 혐오하는 중간지대는 발언권을 잃어 간다.      어떤 투표제도 완벽하진 않다. 그렇더라도 혐오 정치의 시대에 단순다수제는 너무나도 한계가 뚜렷하다. 열성 지지층에 과도한 발언권을 준다. 일종의 프리패스가 되고 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니, 병립형 비례대표제니 하는 것 이상으로, 투표 방식을 고민할 때가 됐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2024.04.10 00:44

  • [최민우의 시시각각]대통령의 벼랑 끝 유턴

    최민우 정치부장 윤석열 대통령이 의대 증원 대국민담화를 한다는 건 일요일인 지난달 31일 저녁부터 흘러나왔다. 오후 9시20분쯤 KBS가 인터넷 뉴스로 처음 내보냈다가 돌연 20분 만에 삭제했다. 용산 대통령실도 혼선을 빚는 듯 보였다. 결국 10시35분 출입기자단에 공식 공지가 떴다. “의사 증원 추진에 대해 대통령이 내일 소상히 설명드릴 예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의대 정원 증원 등 의료개혁과 관련 대국민담화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당초 의대 증원은 여론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이슈였다. 다만 두 달 가까이 의료 공백 사태가 이어지면서 피로감이 쌓여 갔고, 대통령실이 ‘2000명 증원은 돌이킬 수 없다. 숫자는 건드리지 마라’는 메시지를 반복하면서 ‘꼭 저래야 하나’라는 반감도 생겨났다. 게다가 총선은 9일 뒤였다. 이런 민감한 시점에 대통령이 직접 나선다면 ‘2000명 양보’라곤 말하지 못해도 ‘증원 문제도 열어놓고 얘기해 보자’는 취지의 발언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이 굳이 전면에 나설 이유가 없지 않은가.     ■  「 의대 증원 담화에 '비둘기파' 배제 발표 뒤엔 "2000명에 매몰 안돼" 극적인 입장 변화, 통할 수 있을까 」   하지만 담화문은 강경했다. 대승적 타협보다 검사의 공소장처럼 직진이었다. 의사 집단의 반발은 “제대로 된 논리와 근거도 없이 힘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시도”로 규정했고, 의료개혁이 좌초하는 건 “이해집단의 저항에 굴복하는 것으로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다”고 했다. 의사 소득 OECD 국가 중 1위, 2035년 70세 이상 의사 비중 19.8%, 의사단체와의 협의 37차례 등 실무적인 수치도 제시했다. 특히 “역대 정부가 아홉 번 싸워 아홉 번 모두 졌다. 나라고 정치적 득실을 따질 줄 모르겠나”라면서 “국민이 나를 불러세운 건, 기득권 카르텔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라는 대목에선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대통령의 진정성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선거 막판 이렇게 갈등을 부추길 거면 왜 나선 거야’라는 의문도 들었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지난달 2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현안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전은 그 직후였다. 오후 들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발로 “이번 담화의 방점은 대화”라는 얘기가 전해졌다. 이렇게 실컷 의사 집단을 두들겨 놓고 본심은 대화라고? 물론 담화 후반부에 의료계를 향해 “더 합리적인 방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는 대목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는 복지부의 기존 입장과 동일하고, 사실상 원론적인 얘기 아닌가. 그런데 대화·논의가 초점이라니. 그뿐이 아니었다. 불가역적이라던 ‘2000명 증원’도 바꿀 수 있다는 전언이 또 나왔다. 급기야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당일 저녁 방송에 나와 “2000명은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다. 2000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공식화했다. 반나절 만의 롤러코스터였다.    이번 대통령 담화는 발표 사흘 전부터 준비됐다고 한다. 의대 증원과 관련해 대통령실 내부의 ‘비둘기파’는 철저히 배제된 채 ‘매파’가 주도해 초안을 작성했다. 그만큼 윤 대통령의 뜻은 완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담화 직후 180도 달라졌을까. 여권 고위 관계자는 “그게 바로 윤석열식 벼랑 끝 유턴”이라고 설명했다. “담화에서 협상의 뜻을 내비치면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득실을 따지거나 비굴하게 꼬리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반면에 원칙적인 담화를 발표하고 나서는 본뜻이 전파됐으니 대통령 스스로도 돌아설 명분이 생긴 것”이라고도 했다. 돌이켜보면 2년 전 대선 과정에서 코너에 몰리던 이준석 대표를 “우리가 뽑지 않았나”라며 와락 감싼 것도, 결렬이 유력하던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가 대선 6일 전 극적으로 성사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긴 하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7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열린 의대정원 증원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제7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스1  이번 윤 대통령의 벼랑 끝 선회도 성공할 수 있을까. 의·정 협상은 여전히 교착상태지만, ‘불통’ 이미지는 조금 덜어낸 듯싶다. 대통령은 대화하려는 스탠스지만 의료계는 대통령과 면담한 박단 위원장을 성토하고 있으니 말이다. 의대 증원 논란이 총선에서 어느 쪽에 유리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선거 이후라도 진척된 성과가 도출된다면 대통령의 뚝심만큼은 평가받아야 할 것 같다.  최민우 정치부장

    2024.04.09 00:52

  • [양성희의 시시각각] 투표소 가는 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파도 파도 막말 대행진이다. 4·10 총선 더불어민주당 수원정의 김준혁 후보 얘기다. 이번에는 과거 저서에서 ‘유치원과 한유총(한국유치원총연합회)의 뿌리는 친일’이라 주장했던 것이 알려져 논란이다. 1호 유치원인 경성유치원이 일제 강점기 친일파에 의해 만들어졌고, 1995년 설립된 한유총은 그 후예로 정신적 친일파란 단순 논리다.   역시 ‘친일파’ 김활란 이대 초대 총장이 미 군정기 이대생들을 미군에 성 상납했다는 과거 발언으로 여성계로부터 후보 사퇴 요구를 받은 그다. 미 군정기 김활란, 모윤숙 등이 영어가 가능한 여대생을 동원해 “외교와 미군 장교 위안 명목의 ‘파티대행업’에 나선 것”(이임하 성균관대 박사후 연구원 논문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을 ‘성 상납’이라고 냉큼 결론 내렸다. 여대생들이 ‘파티 주최자(호스티스)였다’는 미국 CIC(방첩부대) 보고서를 오독한 결과였다. 물론 이임하의 논문이 적절히 비판하듯, “직접적인 성적 유흥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해도” 전시 국가가 여성 지도자들의 주도적 역할 아래 여성성을 동원한 부끄러운 역사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과 ‘여대생 성 상납’은 다른 얘기다.     ■  「 또다시 반복된 ‘비호감 선거’ 유감 분노·심판 에너지는 선거일까지만 이후엔 대화·타협 모드로 돌아서길 」    역사학자 출신인 김 후보는 이재명 당 대표를 정조에 빗댄 것으로 유명한 ‘친명’ 인사다. ‘궁중 에로’ 전문가를 자처하며 여성 비하와 술자리 음담패설 수준의 발언을 유튜브 등에 쏟아내 왔는데, 사고 회로가 의심스러운 수준 이하의 ‘아무말 대잔치’를 이 자리에 옮길 필요는 없겠다. 단,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국민의 공복이 되겠다는 큰 뜻에 흔들림 없다는 게 유감이다. 한편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용혜인 후보는, 야권 여성 의원들이 김 후보 발언에 침묵한다는 비판에 “민주 진보 진영 바깥에서 여성 의원에게 화살을 돌리려는 시도”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만약 상대 당 후보가 이런 발언을 했다면 결코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란 점에서, 진영논리에 굴복한 젊은 여성 정치인의 이율배반에 실망을 감출 수 없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이번 총선은 역대급 비호감 총선이 될 듯하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부적격 후보들이 보스에 대한 충성도와 친소 관계에 따라 공천심사대를 통과했다. 미래를 이끌 참신한 새 인물은 없고, 다시는 정치권에서 보고 싶지 않았던 이들이 소생·귀환했다. 선거 캠페인 역시 막말과 저질 공세, 미래지향이라기보다 과거 응징, 극단적 진영논리와 팬덤 결집 수준을 벗지 못했다. 꼼수 위성정당이 다시 등장했고, 3지대는 존재감을 잃었다. 언제까지 ‘A가 좋아서가 아니라 B가 되는 것을 볼 수 없어’ 투표소로 가야 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리는 유권자도 많다.   이번 총선에서 “시대정신은 망가졌다. 원칙 있는 승리, 공정과 상식도 무너졌다. 주류 교체 전쟁과 패권 전쟁만 남았다.” 선거 전문가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쪽은 대통령과 정권의 ‘불통과 독단, 무능’에, 다른 한쪽은 야권 지도자의 ‘방탄과 복수극, 부도덕과 내로남불’에 분노하며 선거로 응징하려 한다. 중도층은 중도층대로 더 싫은 쪽을 혼내주기 위해 덜 싫은 쪽에 표를 던질 태세다. 역대 총선 중 최고 사전투표율이 보여주듯 그 열기는 뜨겁다.   그러나 분노와 심판의 열기는 딱 여기까지여야 한다. 이틀 후 성패가 갈리고 나면 한쪽은 환호하고 다른 한쪽은 분루를 삼킬 테지만, 이후에는 서로를 향한 적의와 분노를 거두고 타협하고 대화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서로를 향한 분노와 혐오의 정치, 극한투쟁의 정치가 얼마나 공동체를 분열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지,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충분히 지켜봤다. 그게 다시 되풀이된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지금 우리 앞에 산적한 미래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그래도 선거는 민주주의 꽃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부여안고 투표소로 가려 한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4.08 00:34

  • [김정하의 시시각각] 이ㆍ조가 기여한 국회 문턱 낮추기

    김정하 논설위원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한국 정치의 큰 변화를 이끌었다. 아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 국회의 문턱 낮추기를 선도한 것이다. 이 대표의 기여부터 살펴보자.   우선 금융기관 대출 시 허위 자료를 내는 불법을 저질러도 국회의원을 할 수 있게 했다. 경기 안산갑의 민주당 양문석 후보는 서울 강남 아파트 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생 딸을 사업자로 둔갑시켜 새마을금고에서 11억원을 대출받았다. 금융 당국은 양 후보가 사업자 대출을 유지하기 위해 허위로 문서를 꾸며 딸이 사업을 하는 양 위장한 사실을 확인하고, 양 후보 딸과 대출 모집인을 수사기관에 통보키로 했다. 불법이 드러났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일단 당선되는 게 먼저다. 안산갑은 민주당 초강세 지역이다. 나중에 금배지를 달고 당국에 압력을 넣으면 사건이 흐지부지될 수도 있다. 앞으로 한국에서 불법 대출이나 문서 위조 같은 범죄는 출마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전망이다. 누가 문제 삼으면 이러면 된다. 양문석은요?   경기 안산갑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양문석 후보(가운데)가 3일 오전 안산시 SK브로드밴드 한빛방송에서 열린 방송토론회에 참석해 대기실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막말 문턱도 제거됐다. 수원정의 민주당 김준혁 후보가 신기원을 열었다. 김 후보는 지난 몇 년간 유튜브 채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초등생ㆍ종군위안부와 성관계를 했다는 둥,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제자들을 미 장교에게 성상납시켰다는 둥 근거 없는 저질 발언을 마구 쏟아냈다. 그래도 지금 끄떡없이 선거운동을 잘만하고 있다. 여론조사도 앞선다. ‘목발 경품’ 발언으로 공천이 취소된 정봉주 전 의원의 경우는 아무래도 이재명 대표가 경솔했던 것이리라. 지금처럼 그냥 깔아뭉개면 되는 건데. 요즘 정치 지망생들이 유튜브에 우글거리는데 아무 말이나 마음 놓고 던지자. 나중에 누가 막말 전력으로 시비를 걸면 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외치자. 김준혁은요?   ■  「 불법대출ㆍ막말 의원 탄생 유력 전관예우ㆍ음주운전도 문제 안돼 얼굴 두께만 최소 문턱으로 남아 」    그동안 2030 세대의 가슴에 불을 지른 ‘아빠 찬스’도 앞으론 논란거리가 안 된다. 화성을 민주당 공영운 후보는 군 복무 중인 아들에게 현 시세 30억원대 성수동 땅을 증여하고, 딸의 20억원대 성수동 아파트 구매도 도왔다. 광주 서을에 출마한 민주당 양부남 후보는 한남동 재개발 구역 단독주택을 20대 두 아들에게 증여했다. 누구처럼 부정대출을 받지도 않았고, 깔끔하게 증여세까지 완납했으니 공ㆍ양 후보가 국회에 입성하면 이제 이런 케이스는 살뜰한 부정(父情)의 미담으로 승화되지 않겠나.   4일 오후 경기 수원시 영통구의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후보 선거사무실 앞에 ‘여성혐오 인격살인’이라고 적힌 피켓을 든 여성 십여명이 모여 김 후보 막말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정용환 기자   국회 문턱 낮추기엔 조국 대표의 기여도 만만찮다. 본인 스스로가 2심까지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당 비례대표 8번 황운하 후보도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도 무난히 국회에 입성할 듯싶다. 이제 검찰에 기소되거나 1ㆍ2심에서 실형을 받아도 출마엔 전혀 족쇄가 되지 않는다.   음주운전 문턱이 사라진 것도 조국당의 역할이 컸다. 비례대표 4번 신장식 후보는 음주운전 1회, 무면허운전 3회에 걸친 전과를 갖고 있다. 신 후보는 4년 전 총선에서 이 문제 때문에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를 사퇴했는데, 이번엔 음주운전 논란을 과감히 안면몰수하면서 정치를 하는 데 음주운전이 더는 걸림돌이 아님을 당당히 선언했다. 물론 음주운전 문턱 제거엔 이재명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긴 하지만.   검찰 전관예우도 이젠 별것 아니다. 조국당 비례대표 1번 박은정 후보의 남편 이종근 변호사가 검사장 출신으로서 개업 1년 만에 40억원의 수임료를 번 것에 대해 조국 대표는 특별한 혜택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이제 검사 출신들은 변호사 개업 후 연간 40억원 정도만 벌면 금배지를 달아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다. 이처럼 이제 국회의원은 아무나 할 수 있게 됐다. 획기적 변화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아무나는 아니다. 반드시 얼굴은 두꺼워야 한다. 최소한의 문턱은 남아 있는 셈이다.   김정하 논설위원

    2024.04.05 01:07

  • [이상렬의 시시각각] 이재명 대표의 달콤한 말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22대 총선은 대한민국이 포퓰리즘 청정국이 아님을 보여준다. 온통 세금 깎아주고 현금 쥐여 주겠다는 말뿐이다. 포퓰리즘 공약 대부분은 선거가 끝나면 흔적 없이 사라지겠지만, 앞으로 국가 정책을 오랫동안 비틀 것도 있다. 거대 야당을 이끄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전 국민 지원금 공약과 ‘셰셰(謝謝, 고맙다)’ 발언도 그중 하나다.   이 대표는 민생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전 국민에게 1인당 25만원, 4인 가구 평균 100만원의 민생회복지원금을 지역화폐로 주자고 했다. 달콤한 말이다. 정부·여당의 반대로 실현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공돈을 주겠다는 야당 대표의 공약은 불황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기대감을 불어넣을 것이다. 거부하는 집권 세력은 민생에 무심한 것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  「 현실성 낮은 전 국민 지원금 공약   ‘셰셰’만으로는 안보·경제 못 풀어 총선 후 무책임한 정치 난무 걱정 」    어떤 나라도 처음부터 포퓰리즘 천국은 아니었다. 민생 지원이란 명목의 현금 살포에 맛들이고 중독되면서 망가져 갔다. 이 대표 말대로라면 돈(지역화폐)을 나눠주고 돌게 하면 경제가 살아난다. 그는 현 정권을 향해 “무식한 양반들아, 이렇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럼 많은 선진국은 바보라서 그렇게 하지 않나.   전 국민 현금 지급은 전통 경제학에서 비판하는 정책 중 하나다. 우선 효과가 크지 않다. 우리도 실험 전례가 있다. 코로나19 때 전 국민에게 25만원(4인 가구 기준 100만원)씩 줬다. 자영업 경기가 반짝 좋아지긴 했지만, 약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매출 증대 효과가 투입 예산의 26.2~36.1%에 그쳤다는 분석(한국개발연구원)도 있다. 재난지원금이 들어오자 원래 지출하려던 돈을 쓰지 않고 아끼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돈을 풀면 필연적으로 물가를 자극한다. 이 대표가 흔들어대는 대파값이 더 올라갈 수 있다. 이 대표가 13조원으로 추산한 재원은 또 어떤가. 세금이 덜 걷히는 상황이니 빚을 더 낼 수밖에 없다. 다 국민 부담이다. 그가 이것만 주겠다고 한 게 아니다. 출생기본소득(8~17세 자녀 1인당 월 20만원)을 지급한다고 했고, 신혼부부에게 1억원 기본대출을 해준다고 했다. 국립대 전액 무상교육도 있다.   돈을 거저 준다는 제안은 솔깃하다. 그러나 공짜 점심이 없듯이 포퓰리즘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물가가 뛰고 재정이 무너진다.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만 사례가 여럿이다.   이 대표는 ‘셰셰’ 발언에서 “왜 중국을 집적거려요? 그냥 ‘셰셰’, 대만에도 ‘셰셰’ 이러면 되지”라고 했다. 또 “대만해협이 뭘 어떻게 되든, 중국과 대만 국내 문제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 있나”는 말도 했다. 물론 국가 간 선린 관계는 중요하다. 그러나 ‘셰셰’만으로 평화와 번영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 국제관계의 현실이다. 대만이 중국과의 대립으로 위기에 빠지면 한반도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주한미군의 대만 사태 개입과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대중 무역수지가 나빠진 것을 중국의 한국산 불매 탓으로만 보는 건 오진이다. 2차전지·석유화학·철강 등에서 양국 경합이 치열해진 게 큰 이유다. 중국을 그저 고마워한 이의 대명사는 아마 문재인 전 대통령일 거다. 그는 2017년 중국 방문 때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에 비유하고, 한국은 ‘작은 나라’라고 했다. 방중 기간 열 끼 식사 중 여덟 끼나 ‘혼밥’을 하면서도 불평 한 번 안 했다. 그런데도 중국은 우리의 사드(THAAD) 배치에 대해 ‘한한령’ 등 경제 보복을 가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았다. 이런데도 ‘셰셰’가 만능키라는 말인가.   많은 이가 총선 후를 염려한다.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한 무책임한 정치가 난무할까 걱정한다. 이 대표에게 공천장을 받아 국회에 입성한 충직한 호위무사들은 이재명의 정치 구현에 앞장설 것이다. 정권은 국회가 견제한다. 그러나 야당엔 그런 견제가 없다. 한국 정치의 아킬레스건이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2024.04.04 00:54

  • [이상언의 시시각각] 선거 좌우하는 ‘응징 기권’

    이상언 논설위원 1단계:강의실 안 학생 중 일부에게 20달러를 주면서 18달러를 자신이 갖고 2달러를 다른 학생에게 주거나, 10달러만 갖고 나머지 10달러를 다른 학생에게 주는 두 방안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2단계: 10달러씩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택한 학생들과 18달러를 챙긴 학생들을 앞으로 나오게 한 뒤에 18달러 가진 학생들에게서 6달러를 회수해 12달러를 보유하게 한다. 강의실의 나머지 학생에게 앞으로 나온 학생과 가진 돈을 절반으로 나누는 작업을 할 경우에 어느 쪽을 선택하겠느냐고 묻는다. 10달러를 가진 학생과 짝이 되면 5달러를 갖게 되고, 12달러를 가진 학생과 짝이 되면 6달러를 갖게 된다.     ■  「 6·1 지선, 야당 쪽 투표율 극저조 이번 총선에선 여당이 기권 걱정 ‘미워도 다시 한번’엔 절박함 필수 」    미국 경제학자 리처드 탈러(베스트셀러 『넛지』의 저자)가 한 실험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81%의 학생이 10달러 가진 쪽을 골랐다. 1달러 손해를 감수하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탈러는 “피실험자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기꺼이 이익을 포기할 것인지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이 실험을 설계했다고 밝혔다(『행동경제학』, 웅진지식하우스). 그리고 결과를 이렇게 해석했다. “다수의 피실험자가 ‘부당한’ 제안자(20달러 중 18달러를 챙겼던 학생)와 12달러를 나눠 갖는 쪽보다 ‘공정한’ 제안자(20달러의 절반만 챙겼던 학생)와 10달러를 나눠 갖는 쪽을 택했다. 이 결과는 사람들이 부당한 제안을 하는 사람을 처벌(선택받기 어려운 존재라는 것을 드러냄)하기 위해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려 든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준다.”   탈러는 이 실험에 ‘처벌(punishment) 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다른 학자가 ‘갖게 되는 돈의 차이가 1달러밖에 안 돼 경제적 이기심이 발동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문을 갖고 액수를 열 배로 올렸는데, 결과는 비슷했다. 탈러는 인간에겐 부당한 쪽을 응징하기 위해 경제적 합리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성향이 있음을 이 실험이 보여준다고 역설했다.   ‘6·1 지방선거 투표율이 50%를 겨우 넘기며 역대 두 번째로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더불어민주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기권이 민주당 대패로 이어졌다.’ 2022년 6월 2일자 한겨레 기사의 첫 문장이다. ‘민주당 지지층의 기권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들은 지난 3월 대선 패배 이후 0.73%포인트 차라는 숫자에 매달려 반성이나 성찰, 쇄신 없이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내세운 민주당에 투표할 동력을 얻지 못했다.’ 기사는 이렇게 전개됐다. 당시 선거 투표율은 40대가 43%, 광주광역시가 38%였다. 전통적 민주당 지지 기반에서 기권 비율이 높았다. 결과는 민주당의 대패였다.   4·10 총선을 코앞에 둔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경남에 부동층(지지 정당·후보 없음 또는 모름)이 20% 후반대인 지역이 상당수고, 전국적으로 선거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20대가 많아졌다. 지난달 29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19∼29세 유권자 중 38%가 부동층으로 나타났다.   2년 전 윤석열 대통령이 48.56%의 표를 얻어 당선했다. 하지만 지금 여당의 전국 평균 지지율은 30% 중반을 오르내린다. 야당에 약 10%포인트 차로 뒤진다.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실망이 전세를 역전시켰다. 대선에서 윤 대통령을 찍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기권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흔하다. 냉정히 이해득실을 따져 보면 여당에 투표하는 게 맞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한다. 6달러가 아니라 5달러를 택한 학생들의 태도와 비슷해 보인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투표장으로 나와 달라”고 호소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 읍소다. 그런데 여권 수장인 대통령에게서는 ‘응징 기권’을 생각하는 과거 지지자의 마음을 돌리려 하는 절박감이 보이지 않는다. 선거까지 일주일 남았고, 이틀 뒤엔 사전투표가 시작된다.       이상언 논설위원

    2024.04.03 00:54

  • [최현철의 시시각각] ‘수사 검은 띠’ 검사의 변심

    최현철 논설위원 “물 들어올 때 노 안 젓고 뭐하고 있는 거요?”   지난 1월 말 정년퇴임한 강민구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요즘 가끔 듣는 얘기다. 그는 법원 안팎에서 모두 인정하는 법조계 정보기술(IT) 분야 일인자였다. 이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개업하면 IT 분야 사건이 물밀 듯 몰려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변호사 사무실을 열지 않았다. 두 달째 전국을 돌며 인공지능(AI)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또 AI가 몰고 올 미래에 대해 함께 고민할 사람들을 모아 ‘디지털·AI 상록수 협회’를 창설했다. 그러다 보니 개업은 자꾸 늦춰졌다.     ■  「 ‘다단계 수사 블랙 벨트’ 이종근 퇴임 후 다단계 변호로 40억 벌어 검찰개혁 외치기엔 본인 허물 커 」    지난해 퇴임한 이종근 전 검사장은 수사 유단자다. 검찰 공인 전문검사 1급(블랙 벨트)을 땄다. 주특기는 다단계·유사수신 분야. 2013년 도입한 이 제도를 통해 300명 가까운 전문검사가 나왔다. 하지만 대부분 2급(블루 벨트)이고 1급은 딱 8명밖에 없다. 이 변호사는 2016년 1호 ‘검은 띠’ 검사가 됐다. 다단계 사기의 양대 산맥인 JU와 조희팔 사건에 모두 관여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가 부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관내 다단계 조직이 지하로 숨거나 근거지를 옮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정치 바람을 탔다. 대검 형사부장 시절 당시 법무부 감찰담당관에 발탁된 부인 박은정 검사와 함께 윤석열 검찰총장 찍어내기에 공을 세웠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1순위로 물을 먹었다. 한직으로 밀려나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발령나자 사표를 던졌다.   그래도 재야에서 전문성을 살릴 것이란 기대가 컸다. 개업 무렵 언론 인터뷰에서도 “검찰에서 쌓은 전문성과 경험을 토대로 불법 다단계, 유사수신, 가상화폐 및 코인 사기 사건 등에서 사건 관계자가 억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다단계 수사 역량을 반대로 쓰면 사기범들에게는 더없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를 간파한 다단계 사기범들이 그에게 몰렸다. 휴스템 코리아 사건을 수임해 22억원을 받는 등 1년 동안 40억원을 벌었다. 그러다 부인이 출마하며 수임한 내역과 수임료 규모가 드러났다.   논란이 일자 이 변호사는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청빈불고가사(淸貧不顧家事·가난해서 집안을 건사하지 못함)해야 한다면 저도 입을 닫겠다”고 항변했다. 박 후보도 “남편의 경우 전체 건수가 160건이기 때문에 전관으로 한다면 160억원을 벌었어야 한다”고 했다. 억지 주장이다. 40억원 자체도 엄청난 돈이고, 버는 과정은 개혁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다는 게 분노의 원천이다. 나아가 검찰을 개혁하겠다고 나서기엔 스스로의 허물이 더 커 보인다.   특수부 검사들이 개업하면 재벌 회장이나 고위 공무원의 횡령·배임·뇌물 사건을 변호하는 게 다반사다. 여의도 저승사자라는 증권범죄합수단 출신은 주가조작 피의자를 대리한다. 현직들이 무시하지 못할 전문성, 그 현직들과 쌓은 인맥이 조사실과 법정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몸값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통의 시민들이 법정에서 이런 상대 변호사를 만나면 ‘전관예우’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다단계 저승사자가 피해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성폭력 전문 검사 출신이 가해자에게 빠져나가는 방법을 교육하며 거액을 벌어들이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강민구 전 부장판사는 과거 송종의 전 법제처장의 글을 모아 전자책으로 출간한 적이 있다. 범죄와의 전쟁을 지휘하고 슬롯머신 사건에서 수사팀의 방패막이가 됐던 검사다. 그런데 대검 차장으로 퇴임한 뒤 아예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았다. 농업법인을 차려 밤과 딸기, 수박을 기르고 그 돈으로 ‘천고법치문화상’을 제정해 해마다 거액의 상금을 수여하고 있다. 모든 전관이 강 전 부장판사나 송 전 처장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공직에서 익힌 기량을 범죄자를 돕는 데 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평범한 시민들의 바람이다.     최현철 논설위원

    2024.04.02 01:15

  • [서경호의 시시각각] 부가가치세까지 건드린다고?

    서경호 논설위원 암울한 유신시대였던 1977년 도입된 부가가치세는 성공적인 세금이다. 아시아에서 우리가 처음이었다. 세원이 투명해진 덕분에 세금이 잘 걷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국세의 30% 안팎을 차지하는 효자 세금이다,   처음에 밑그림을 그린 이는 김재익 박사였다. 나중에 전두환 정부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내며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권을 행사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당시 그는 한국은행에서 청와대 비서실로 파견나와 있었다. 김재익은 1973년 당시 서영택 재무부 과장을 청와대 자기 방으로 불러 세 시간 넘게 부가세의 장점과 도입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거의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식이었다. ‘강의’는 이랬다. 첫째, 부가세는 납세자 간의 사고파는 거래를 크로스체킹할 수 있어서 탈세가 어렵다. 우리 세정의 고질적 병폐인 인정과세(認定課稅)가 없어진다(인정과세는 정부가 자체 조사를 근거로 과세하기에 세무공무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크다). 둘째, 어느 세금보다 중립적이다(경제 왜곡이 없다는 뜻). 셋째, 복잡한 간접세 제도를 단순하게 한다. 당시 간접세 세목은 13개에 달할 정도로 복잡했다(서영택, 『신세(新稅)는 악세(惡稅)인가』).   김정렴 비서실장과 남덕우 재무장관은 길잡이 역할을 했다. “김정렴은 박정희 대통령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합리적 세제 구축의 필요성을 대통령의 머릿속에 심어줬고, 남덕우는 학자 출신답게 원리원칙에 입각해 기존 세제의 틀을 실제로 고쳐나갔다.”(이장규, 『대통령의 경제학』).   재무부 태스크포스에서 부가세 도입의 실무를 책임졌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부가세 도입을 둘러싼 오해와 착각 때문에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과세특례는 영세사업자가 쉽게 납세할 수 있도록 과세 방법에 대한 특례를 주는 것인데, 세율에 대해서도 2%의 특례를 줬다. 오해 내지 착각이었다. 80%에 가까운 개인 납세자가 과세특례니 제도적 탈세로 이어졌다. 부가세에 큰 구멍이 생겼다. 강 전 장관은 무려 23년이 흘러 세제실장이 돼서야 원래의 취지대로 바로잡았다. 강 전 장관은 “가장 어리석었던 ‘착오의 행진’이었다”고 썼다(강만수,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     ■  「 여당의 한시적 부가세 인하 요구 단일세율 흔들어 세금 근간 위협 선거 급해도 보수는 보수다워야 」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주 유세에서 라면·즉석밥·밀가루 등 식재료와 육아용품 등에 대한 부가세율을 한시적으로 10%에서 5%로 인하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정부는 검토에 들어갔다. 지난해 부가세 세수는 74조원으로 전체 국세 수입의 21.4%였다. 세수 펑크로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데 조 단위의 세수 감소를 감당할 수는 있겠나. 부가세 도입 이후 40년여간 이어진 10%의 단일세율 체제를 바꾸면 부가세의 장점인 경제 활동에 미치는 세금의 중립성이 훼손되지 않을까.   1977년 부가세 도입을 앞두고 물가와 민심 걱정에 연기하자는 주장이 커졌다. 여당인 공화당은 물론, 재무부 장관 시절 부가세 도입을 결정했던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까지 반대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는 내가 책임질 테니 재무부 장관은 경제를 잘 챙겨라”고 하며 예정대로 시행을 결정했다(강만수, 위의 책). 부가세 도입은 박정희의 주요 경제정책 중에서 가장 비정치적으로 내려진 결정이었다. 실무 전문가들의 의견을 주축으로 오랜 토론과 검토 끝에 나온 정책이었다(이장규, 위의 책).   선거가 아무리 급하더라도 세금의 근간까지 흔들면 안 된다. 보수는 보수다워야 한다. 부가세를 도입하고 안착시키려고 고생했던 그때 그 시절의 용사들은 부가세까지 건드리려는 지금의 정부·여당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까. 5% 품목이 예전의 과세특례처럼 부가세의 구멍이 되지는 않을까. 경제정책을 너무 정치적으로 결정하는 건 아닌가. 실무 전문가의 의견을 충분히 듣긴 했나. 여당과 정부는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서경호 논설위원

    2024.04.01 01:01

  • [강주안의 시시각각] 방치될수록 위험해지는 공수처

    강주안 논설위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정치권에 핵폭탄을 투척했다. 이종섭 주호주 대사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통해서다. 검찰을 비롯한 수사기관이 수시로 취해온 출국금지 조치는 통신 조회와 함께 고질적 인권 침해 요소로 꼽혀왔다. 법원의 영장 없이 진행된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더욱이 공수처는 출범 초기 야당과 언론에 대한 통신 조회를 남발해 인권 침해 논란의 중심에 선 전력이 있다. 이번 수사를 두고서도 “공수처의 장기간 출국 금지는 심각한 인권 침해”(전직 검찰 간부)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부임 11일 만인 21일 귀국해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이 대사는 25일부터 열리는 방위산업 협력 6개국 공관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했다고 밝혔다. 김현동 기자   그러나 이번 출금은 전직 국방부 장관이 대상자로 확인되면서 사뭇 다른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이 대사는 국방부 장관이던 지난해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 도중 순직한 해병대 채수근 상병 사건과 관련해 수사 대상에 올랐다. 그의 혐의를 두고선 “군에는 사망 사건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직권 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전직 고위 군법무관)는 반론이 나온다. 그러나 유·무죄를 차치하고 수사가 안 끝난 그를 대사에 임명한 인사가 합당했느냐 하는 논란으로 번졌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김은혜 전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즉시 귀국”을 요구할 정도로 정부가 궁지에 몰렸다. 공수처의 출금 하나가 던진 파문이다.  ━  이종섭 대사 출국금지로 핵폭탄   공수처만큼 논란을 몰고 다닌 기관도 드물다. 수사 대상인 실세 검찰 간부를 차로 모셔온 ‘황제 조사’ 논란이 대표적이다. 미숙한 헛발질을 연발하던 공수처가 지난 1월 검찰 내 엘리트로 꼽히는 손준성 대구고검 차장검사(검사장)에 대해 1심에서 유죄를 받아냈다. 포렌식을 동원한 치밀한 수사를 통해서였다. 검찰을 비롯해 공직자 비리를 감시하라는 설립 취지에 걸맞은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공수처가 생기기까지 국회에서만 20년 넘는 숙성기간을 거쳤다. 각종 문헌은 우리나라 공직 수사의 역사가 1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뿐 아니라 관료의 죄목에도 유사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고려 시대인 1146년에 어사대가 압록강 수군 익사 사고의 책임을 물어 병마사를 처벌했고, 조선 시대에도 1615년 사헌부가 조직을 비호한 의금부의 고관을 기소한 기록이 나온다. (강효백 『공수처』 등)   어렵게 설립한 공수처의 취지를 퇴색시킨 건 문재인 정부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이 여야 합의를 깨고 정권에 유리하게 바꿔 강행 처리했다. “공수처장 임명이 집권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정웅석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법과 제도의 이해』)이라는 해석이 따랐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초창기 어설픔을 극복하고 굵직한 공직 관련 이슈를 사회에 던지기 시작했다.    ━  수장 공석에 리스크 관리 어려움      ━  정상화 미루면 정권 부담 더 커져    하지만 지난 1월 김진욱 초대 공수처장이 퇴임한 이후 처장은 물론 차장까지 공석인 상황이 길어지고 있다. 공수처장 후보 추천위가 판사 출신 오동운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 변호사를 추천한 게 한 달 전이다. 두 사람 모두 우파 성향이라는 평가다. 오 변호사와 함께 근무했던 전직 고위 법관은 “보수 성향으로 극우는 아니며 합리적인 성품”이라고 말한다. 이 변호사를 잘 아는 전직 검찰 간부는 “특수수사통은 아니지만 다양한 수사 경험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누가 돼도 무리 없다는 평판이니 윤석열 대통령이 한 명을 선택해 절차를 밟으면 된다. 당장 이 대사 수사 처리를 위해서도 정상화가 시급하다. 여권에선 “공수처 수사에 문제가 많다”고 비난하지만, 수장이 와야 해결될 사안이다.   고위 공직자만을 겨냥하는 조직이 정부 입장에선 달가울 리 없다.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공수처였으나 ‘1호 사건’으로 진보 성향인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특혜 채용 의혹을 골랐다. 2심까지 징역형이 나왔다. 공직자 비위를 수사하는 기관의 숙명이다.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고 해서 비정상적인 상태를 오래 방치하면 위험은 계속 자라난다. 누구에게 또 어떤 공격이 들어갈지 두렵지도 않은가.   관련기사 조국혁신당이 소환한 친박연대 기억 [강주안의 시시각각] [강주안의 시시각각] 가짜 뉴스보다 겁나는 거짓 뉴스 기껏 아파트 잘랐는데…공항 옆 고도 초과 장애물 3647곳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의 시시각각] 읍소 대상이 된 제2부속실 설치 [강주안의 시선] 어느 희귀병 환자의 죽음강주안 논설위원

    2024.03.29 00:37

  • [김현기의 시시각각] 신의 직장, 국회의원

    김현기 논설위원 #1 최강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3일 “정봉주 전 의원이 국회의원 시절을 그리워하는 대표적 이유는 공항 의전 때문”이라고 말했다. ‘발목지뢰 밟으면 목발 경품’ 발언이 부상하며 정봉주 전 의원의 공천은 곧 취소됐지만, 난 ‘아, 이거다’ 싶었다. 38억원 부동산, 37.6억원 빚의 갭투기 변호사(부동산업자에 가깝다), 정치를 잘 못 배운 음란 예찬 청년 정치인, 횡령·음주운전 등 전과 11범 범죄자 등 너나 할 것 없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금배지에 달려드는 이유를 말이다. 최 전 의원 말대로 한번 특권의 맛을 보면 헐떡거리고 (국회의원) 하려 한다. “예를 들어 봉도사(정봉주)가 제주도에 식구들과 여행을 가면 공식 출장이 아닌데도 신분증 내고 티케팅할 때가 되면 공항이 시끌해지면서 (의전이) 막 나온다. (중략) ‘아, 국회의원이 이런 게 있었구나’라고 처음 느끼신 거다.” 어디 이뿐인가. 비행기 비즈니스석, KTX 특실 좌석, 귀빈실과 귀빈 주차장 모두 무료다. 보좌진 9명에 의원사무실 지원 경비로도 1억원이 나온다. 후원금으로 매년 1억원, 선거가 있는 해에는 3억원을 챙길 수 있다. 그러니 공식 연봉은 1억5700만원이지만 이런저런 혜택을 다 합하면 실질 연봉은 5억원이 훌쩍 넘는다. 의원회관 내 이발소·헬스장·목욕탕·약국 공짜, 회관 내 내과·치과·한의원은 가족까지 공짜다. 이런 특권 조항이 무려 186개다. 아마 국회가 세종시로 내려가면 특권은 더 늘어날 것이다. 신의 직장이다.     ■  「 특권 186개, 그러니 금배지 오픈런 폐지 안 하면 ‘제2의 정봉주’ 나온다 폐지 공약 내건 정당에 표를 던지자 」    #2 미국 워싱턴DC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국내선 항공편에 우연히 랜드 폴 상원의원(켄터키주)과 동승했을 때 본 광경이다. 50개 주에 2명씩 총 100명인 상원의원은 거의 대통령급이다. 그런데 탑승부터 짐 찾기까지 의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야구모자 쓰고 배낭 하나 멘 채 다른 승객과 똑같이 줄을 서 수속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워싱턴 근무 시절 만난 하원의원 대부분도 늘 약속장소에는 우버를 타고 나타났다. 기사 딸린 검은 고급 승용차 같은 건 없었다. 일본은 미국보다는 조금 특권이 있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지방 선거구 의원이 국회 출석을 위해 도쿄와 지역구를 오갈 때에 한해 열차 일등석 무료 탑승권, 월 3회 무료 항공권을 주는 정도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의 두 배가량인 스웨덴의 국회의원 연봉은 1억원에 ‘불과’하다. 일을 많이 하고, 일을 잘하면 뭐라 시비를 걸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은 OECD 35개 국가 중 국민소득 대비 세비는 3위인데, 의회의 효과성 평가는 꼴찌에서 2위다. 이런 국회의원들에게 국민 혈세로 돈과 특권을 퍼주는 건 낭비이자 모순이다.   #3 총선까지 앞으로 13일 남았다. “세 자녀 대학등록금을 면제하겠다” “금융소득세를 폐지하겠다” 등 선심성 공약이 난무한다. 여야 가릴 게 없다. 선거 막판으로 가면 더할 것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제 아무도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진짜 면제, 폐지해야 할 건 그런 것 말고 당사자인 국회의원들의 특권이다. 이미 수준 미달의 후보 공천 시스템, 국가관도 뚜렷하지 않은 비례대표가 위성정당이란 희한한 자동출입문을 타고 국회에 입성하는 현실을 국민들은 목도했다. 이들에게 왜 세계 최고급 특권을 줘야 하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개혁신당, 조국혁신당은 이 문제에 아무런 답이 없다. 그나마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이달 초 ▶헌법상 불체포 특권 폐기 ▶의원 정수 250명으로 50명 감축 등 7개 사안을 공약으로 발표했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186개 의전과 특권 모두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제2의 정봉주’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야 국회의원이란 특권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국민에게 봉사하는 머슴이란 인식을 뿌리내릴 수 있다. 그것만 돼도 성공이다. 어느 정당이건 먼저 그걸 약속하는 정당에 표를 던지자. 지금 아니면 바꾸기 힘들다.      김현기 논설위원

    2024.03.28 00:38

  • [고정애의 시시각각] 아무나 정치해선 안 됐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비사회주의 좌파 운동가 중에 사울 알린스키란 인물이 있다. 생전에 “너희가 정말 행동하는 사람으로 살려면 자기 침대에서 죽을 생각은 말라”고 했다는데, 그의 마지막이 그랬다. 길을 걷다 쓰러져 숨졌다. 그가 쓴 책 중에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 있다. 가진 자들을 위해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담은 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라면,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위해 권력을 빼앗는 방법을 담은 게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이라고 그는 자부했다.    급진주의자이니 교조적일 것이라고 짐작하겠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많은 이에게 미움 또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독단적 교리를 혐오하고 또 두려워한다.” 그는 그러면서 “인간의 정신은 과연 우리가 옳은지를 살펴보는 내적 의심이라는 작은 불빛을 통해서만 빛날 수 있다”며 “자신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자들은 내적으로 어둠에 가득 차 있고, 외적으로는 잔혹감과 고통·불의로 세상을 어둡게 한다”고 주장했다.       ■  「 일방 독주나 악마화는 정치 아냐 정치과잉 같으나 실제론 정치부재 대화·타협의 진정한 정치 가능할까 」   그에게 타협은 ‘아름다운 단어’였다. 100%를 요구했다가 30%에서 타협해도 30%는 얻은 것이라고 봤다. 그게 새로운 출발점이 될 터였다. 그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는 끊이지 않는 갈등 그 자체며, 갈등은 간헐적 타협에 의해 멈추게 된다. 그 타협은 갈등과 타협 그리고 끝없이 계속되는 갈등과 타협의 연속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인식했다.    의사소통은 절대 중시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비춰서만 사물을 이해한다. 이는 당신이 그들의 경험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더욱이 소통은 양방향이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당신의 생각을 그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면 당신은 사물의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길게 인용했다. ‘조직가’를 ‘정치가’로 바꿔도 맞는 말이어서다. 설마 하겠지만, 진짜 그렇다. 실례도 있다.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은 알린스키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이들이다. ‘내적 의심’, 타협과 의사소통은 정치가에게도 필수적 자질이다. 인간 간 적대와 싸움 본능을 평화적으로 처리하는 게 정치여서다. 정치란 본질적으로 “차이를 없애는 게 아니라 차이를 공존할 수 없는 적대가 아닌 생각의 차이나 이견으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좀 더 나은 공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경쟁하고 타협하고 싸우고 조정하는 ‘종합예술’ 같은 것”(박상훈)이다. 공적 결정에 사(私)가 배제될 순 없겠으나 사로 뒤범벅될 순 없다.   (대전=뉴스1) 김기태 기자 = 대전 중구청 직원들이 26일 대전 중구 서대전초등학교에서 진행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및 중구청장 재선거 대비 사전투표 모의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는 정당 38곳으로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51.7cm로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웠다. 2024.3.26 /뉴스1  누군가의 표현대로, 요즘 ‘누구나 정치할 수 있지만 아무나 정치해선 안 된다’(박성민)는 걸 절감하고 있다. 정치도 1만 시간이 필요한 고도의 전문직이란 점도 새삼 느낀다. 요새 정치 좀 한다는 이들은 갈등을 증폭하고, 차이·이견을 공존할 수 없는 적대로 키운다. ‘정치’란 외피를 두른 채 말하고 행동하니, 많은 이가 이런 행태를 개탄하며 ‘정치 혐오’로 인식한다. 매번 정치 안 해 본 사람을 새로 소환하지만, 그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일방 독주가 정치인가? 아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게 정치인가? 아니다. 사적 복수를 위해 공적 자원을 소모하는 게 정치인가? 아니다. 우리가 혐오하는 건 정치 자체가 아닌 정치의 부재다.      대체로 원칙이라고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원칙이라고 고집하는 대통령과, 탄핵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치른 지 불과 몇 년인데 또 대통령 임기를 중단시키겠다는 세력이 맞서고, 의원 배지란 사익을 위해선 존엄성마저 내려놓고 돌진하는 혼미한 정신들로 넘쳐나는 총선 목전이라 더욱 진짜 정치를 그리워하게 된다. 대화하고 타협하며 공통의 공익을 찾아가는 것, 답답해 보일지언정 그게 정치다. 어떤 어려움에도 그걸 해내겠다는 사람이 정치가다. 그런 정치와 정치가가 있는가. 우리에게 그걸 가려낼 의지가 있는가.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2024.03.27 00:34

  • [서승욱의 시시각각] 이재명은 왜 겁을 먹었나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선거 때마다 야당이 이겼던 서울 강북을 공천이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될지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공천 과정에서 찬 수많은 '✕볼'의 하이라이트였다. 최종 낙점된 한민수 후보에게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박용진을 죽이기 위해 픽업된 앞선 두 사람에 비하면 훨씬 낫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지켜본 그 과정이 너무 지저분했다. 자객 공천, 경선 방식의 급변침, 기상천외한 '신공'들이 등장했다. "시스템 망천(亡薦)의 결정판" "꼼수 공천의 끝판왕"이란 욕을 먹어도 싸다.        지난 대선 때부터 한국 정치를 규정하는 큰 흐름은 '윤석열 대 이재명', 비호감 정치인 둘의 적대적 공생이다. 그중에서도 이 대표를 상대로 맞은 윤 대통령의 '야당 복(福)'이 먼저 주목을 받았다. '사법리스크 백화점'인 이 대표에 대한 비호감으로 중도층 국민들은 아무리 윤 대통령이 싫어도 도망칠 공간이 별로 없었다. 국민의힘보다 낮은 민주당 지지율이 그 증거다. 하지만 거꾸로 이 대표가 누리는 행운도 범상치 않다. 숱한 약점에다 아무리 헛발질해도 인기 없는 정권 덕분에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자넌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 함께 참석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역대 보수 진영 대통령들의 집권 2년 차 3, 4분기 직무수행 긍정 평가 비율에서 윤 대통령은 최하위권이다. 한국갤럽 집계에서 이명박(3분기 36%, 4분기 47%), 박근혜 44%(3, 4분기)였는데 윤 대통령은 2년 차 3분기 평균이 33%다. 야당인 민주당엔 싸우기 만만한 상대다. 특히 이 정권은 고집스럽게 민심을 거스르다 자멸하기 일쑤다. 국민들을 화나게 하는 독특한 능력을 지녔다. 공감 능력 결여의 대표적 사례가 총선 정국을 흔든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이다. 왜 하필 이 시점에 그를 호주로 보냈는지 여당까지도 불만인데, 대통령실은 '국방과 방산 협력이 중요하다'는 답이 전부였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칼에 잘라내야 했던 여사 명품백이나 '회칼 황상무' 이슈도 질질 끌며 화를 키웠다. 대국민 소통도 빵점이다. 대통령은 신년회견 대신 특정 언론사와 대담이나 인터뷰를 했다. 입맛에 맞는 언론에서, 뻔한 질문만 받고 싶은 욕심이 다른 대통령들은 없었을까. 이전 정권에선 국민이 두려워 감히 꿈도 못 꾼 일을 이번 대통령실은 태연하게 실천한다.          ■  「 용산과 한동훈 독주와 실책에도 대권 불안감에 결국 속 좁은 공천 정치적 도약 기회 스스로 걷어 차 」    책으로, 머리로 정치를 익힌 탓일까.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공감 능력도 도마 위에 올랐다. 국민들은 경제·물가 때문에 못 살겠다는데 '종북 극단주의 세력' '이재명, 감옥' '운동권 심판' 같은 관념적 얘기만 입에 달고 살았다. 안 그래도 '검찰 정권'과 '검찰·경찰당'에 반감이 큰 중도층 국민들을 더 멀리 밀어낸다. 대통령과의 잦은 충돌과 감정 소모, 후보들보다 본인 홍보에 진심인 듯한 모습에 "총선이 아니라 대선을 뛰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지만, 심지어 여당 일부 당직자들도 사석에선 불만을 쏟아낸다.     열등생들의 경쟁에선 조금만 노력해도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총선은 이 대표에게 빅 찬스였다. '비명'들을 횡사의 절벽으로 내몰지 않고 가슴으로 품었다면 국민들은 의외의 대인 풍모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여권의 리더십과 대비되면서 정권심판론의 크기도 지금보다 훨씬 커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전은 없었고, 이 대표는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찼다. 임종석과 박용진을 줄줄이 내친 건 대선 가도의 변수들을 빨리 제거하겠다는 조급증과 새가슴 탓일 것이다. '이재명의 민주당'을 만든다지만, 이보다 훨씬 견고했던 과거 '이회창의 한나라당'도 대선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대표의 정치적 그릇은 지난해 9월 그 굴욕적인 체포동의안 부결 호소 때보다 조금도 커진 게 없다. 용기없는 자가 세상을 거머쥔 적이 있었나. 이재명의 정치적 꿈이 결국 실패한다면 '비명횡사'로 얼룩진 이번 공천이 그에겐 천추의 한이 될 것 같다.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sswook@joongang.co.kr

    2024.03.26 00:41

  • [김정하의 시시각각] 윤 대통령의 손을 떠난 국민의힘

    김정하 논설위원 22대 총선을 19일 남겨놓고 국민의힘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수도권 요충지의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에 밀리는 결과가 대부분이다. 이대로 가면 103석에 그쳤던 21대 총선 수준의 참패를 당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사실상 윤석열 대통령 탄핵까지 시사하고 나섰다.   몇 주 전만 해도 1당을 바라본다던 국민의힘이 순식간에 미끄러진 건 윤 대통령이 선거의 한복판에 뛰어들면서부터다. 이종섭 주호주 대사의 ‘해외 도피’ 논란과 황상무 전 시민사회수석의 ‘기자 테러’ 발언이 연이어 터지면서 윤 대통령이 선거 이슈를 장악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해외 도피' 논란을 일으킨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2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사실 국민의힘은 지난 연말 한동훈 비대위원장 체제가 되면서 선거 이슈에서 윤 대통령을 지우기 위해 무지하게 애썼다. 민주당이 정권심판론을 들고 나올 게 뻔한데, 대통령 지지율이 30%대에 불과한 상황에서 정권심판론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것은 자살 행위다. 그래서 국민의힘은 ‘윤석열 vs 이재명’의 프레임을 ‘한동훈 vs 이재명’의 프레임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  「 참패 위기 속에 황당한 윤·한 충돌 대통령은 정치판 속성 인정해야 여당을 점유물로 착각하면 안돼 」  이런 전략은 한때 먹히는 듯싶었다. 특히 지난 1월 김경율 비대위원 문제로 윤 대통령이 한 위원장 축출에 나섰던 것도 결과적으론 국민의힘에 나쁘지 않았다. 누구는 약속대련이라고 비꼬았지만, 사실은 진짜로 두 사람이 충돌했다. 당시 한 위원장은 자신이 윤 대통령의 아바타가 아니라는 걸 입증했고, 이는 국민의힘의 프레임 전환에 도움이 됐다. 이후 민주당에서 ‘비명횡사’ 공천 파동이 벌어지면서 국민의힘은 순항하는 듯했지만, 이종섭·황상무 논란으로 공든 탑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의 문제 자체보다 그로 인해 선거 프레임이 원상 복구됐다는 점이 국민의힘엔 뼈아프다.   국민의힘에서 친윤계 핵심인 이철규 의원이 2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비례대표 공천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비판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 이해가 안 가는 건 윤 대통령의 속내다. 지금 국민의힘은 윤석열 정권의 명운이 걸린 총선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불법만 아니라면 여당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줘도 시원찮을 판이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이종섭·황상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그토록 요청해도 한동안 뜸을 들인 건 뭣 때문이었을까. 윤 대통령은 자신과 국민의힘이 운명공동체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알지만 당에 밀리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겠다는 오기였을까. 결국 이 대사는 귀국했고, 황 전 수석은 사퇴했지만 대통령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이미 두들겨 맞을 것은 다 맞아버렸다.   긴급 봉합되긴 했지만 20일 벌어진 비례대표 충돌도 황당하다. 친윤계 핵심인 이철규 의원이 기자회견을 열어 비례대표 사천(私薦) 논란을 제기하며 한 위원장을 들이받았다. 이 의원의 발언은 대통령의 의중을 반영했다는 게 정설이다. 윤 대통령이 요청한 인사가 비례대표 당선권에서 밀려나 대통령이 화가 났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선거를 코앞에 두고 대통령 측이 여당 지도부를 공개 저격하다니.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을 자신의 점유물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큰 착각이다. 대통령이 득표에 보탬이 된다면 절대 충성을 맹세하지만, 대통령이 선거에 부담이 된다면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버리는 게 정치판의 속성이다. 윤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던 이용 의원과 김은혜 전 홍보수석도 선거 현장에서 싸늘한 민심을 확인하니 곧바로 ‘이종섭 귀국, 황상무 사퇴’를 외치지 않던가.   2012년 총선 때 이명박(MB)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쳤지만 여당이 예상을 깨고 승리한 것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내세워 프레임 전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당시 MB는 선거기간 내내 철저히 로키를 유지했다. 공천에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자녀가 중2만 돼도 부모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세상 이치다. 윤 대통령도 국민의힘에 대해 마음을 비우는 게 바람직하다. 국민의힘은 이미 윤 대통령의 손을 떠났다. 총선 이후엔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김정하 논설위원

    2024.03.22 00:41

  • [이상렬의 시시각각] 차라리 한국은행에 개혁을 맡겨라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10대 공약을 봤다. 눈길이 간 것은 간병 대책이다. 양당 모두 요양병원 간병비 급여화 추진을 내걸었다. 반가운 이야기지만, 결국 재정 문제다. 복지부 추산 연간 간병비는 최소 15조원이다. 막대한 사업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양당의 설명은 두루뭉술했다. 다른 지출을 줄이고 매년 늘어나는 재정수입을 활용한다고 했다. 말뿐인 공약(空約)이 되기 십상이다. 최근 한국은행이 간병과 관련해 보다 손에 잡히는 보고서를 내놨다. 지난해 월평균 간병비(추정치)는 약 370만원. 40~50대 중위소득(588만원)의 63%다. 간병비 부담 등의 사정 때문에 가족이 직접 돌보는 가족간병 규모가 2042년엔 212만~355만 명에 이르고, 그에 따른 노동 손실 비용이 46조~77조원으로 그 시점 국내총생산(GDP) 예상치의 2.1~3.6%가 되리란 추산이다. 국민에겐 ‘간병 지옥’이고, 나라엔 ‘국가적 재앙’이다.     ■  「 한은, 간병 노동 외국인 활용 제시 수도권 집중 완화 같은 해법 눈길 돈 써서 문제 풀자는 주장은 하책 」    한은은 현실적 대안을 제시했다. 간병 같은 돌봄 서비스에 외국인 노동자를 투입하고, 대신 간병비 부담을 낮출 수 있도록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이 그중 하나다. 간병비에 시달리는 한국인도, 자국보다 훨씬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외국인도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이다. 그러나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업종별 차별과 최저임금 하락을 우려하는 노동계의 반대에 가로막혀 있다. 과연 노동자들의 속마음도 그럴까. 저소득층일수록 간병비 체감 고통은 더 커지고, 간병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그간 최저임금 차등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정치권도 힘을 보태지 않았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간병비 문제 해결에 진심이라면 외국인 노동자 활용부터 진지하게 추진할 일이다.   양당은 저출생 대책도 내놨다. 국민의힘은 한 달 유급 아빠휴가와 육아휴직급여 인상을 제시했다. 이 정도로 출산 기피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지금도 제도가 없어 육아휴직을 안 하는 게 아니다. 눈치 보여 안 쓰고, 잘릴까 봐 겁나서 못 쓴다. 그래서 한국의 육아휴직 사용률(19.8%)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이다.   민주당은 모든 신혼부부에게 10년 만기 1억원 대출을 약속했다. 첫째 자녀를 낳으면 무이자 대출로 전환, 둘째 출생 시 원금 절반 감면, 셋째 출생 시 원금 전액 감면 내용이다. 그럼 재원은? 지난해 혼인 건수 19만4000건을 단순 적용하면 연간 대출 재원만 19조원 이상이 필요하다. 양당 모두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저출생 원인은 얼추 나와 있다. 일자리, 주거, 양육이 주요인이다. 한은은 작년 말 보고서에서 이런 여건을 OECD 평균으로 개선하면 출산율을 0.85명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중엔 도시인구집중도를 OECD 평균으로 낮추면 출산율이 0.41명이나 올라간다는 시나리오도 있다. 사람도, 돈도 수도권으로 몰리는 바람에 집값이 뛰고 경쟁이 심해져 출산을 더 꺼리기 때문이다. 청년 고용률을 OECD 평균으로 높이면 출산율이 0.12명 높아진다는 항목도 있다. 물론 월급과 복지가 좋은 직장에 다닐수록 결혼과 출산에 좀 더 적극적이다. 현실적으론 주로 대기업 일자리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기업 일자리 비중은 14%로 OECD 중 가장 낮다(한국개발연구원, 고영선). 미국(58%)의 4분의 1, 프랑스(47%)의 3분의 1이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대기업 억제 정책의 결과다.   돌봄도, 저출생도 한국 사회의 숨통을 죄는 문제다. 돈으로, 국민 세금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것은 하수(下手)다.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화, 수도권 집중 완화, 대기업 일자리 늘리기 등 생각만 고쳐먹으면 할 수 있는 게 많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사회적 타협을 통한 구조개혁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 왔다. 맞는 말이다. 그렇게 국민을 설득하고 대타협을 이뤄내는 것이 정치다. 지금은 영 보기 힘든 모습이 됐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2024.03.21 00:38

  • [이상언의 시시각각] 성공 공식 잊은 이준석

    이상언 논설위원 지난해 11월 26일 대구 엑스코 오라토리움 홀. 1400석 규모의 객석이 꽉 찼다. 뒤편에 선 사람까지 합하면 약 1600명이 모였다. 명칭은 콘서트인데 무대에 연예인이 없었다. 출연진은 이준석과 ‘천아용인’.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우리의 고민’ 토크 콘서트였다. 경향 각지에서 기차, 고속버스로 갔다. ‘내 돈 내 표’로. 대다수가 젊은이였다. SNS에 참가 후기가 속속 올라왔다.   한 달 하고 하루 뒤 이 대표가 창당을 선언했다. 2주 만에 당원 5만 명이 모였다. 신당 홈페이지로 자원해 몰려갔다. 수십 년 된 정의당보다 당원이 많아졌다. 한국 정당사 초유의 일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양당 구도를 깰 제3의 정치세력 출현’. 이런 제목의 기사도 있었다.     ■  「 청년이 목소리 내는 무대 만들고 그들의 자발적 참여 끌어냈으나 ‘혼자 결정’ 정치로 실망감 안겨 」    개혁신당은 잇따라 정책을 내놨다. 5호가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폐지였다.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새 정치’ 열망의 크기에 걸맞은 멋진 공약은 아니었다. 그 앞 1∼4호도 귀에 확 꽂히지는 않았다. 지지자들은 더하고 빼는 변화가 아니라 곱하고 나누는 개혁을 기대했다.   1월 20일 개혁신당 창당대회. 이상한 분위기가 돌았다. 두 달 전 대구 콘서트처럼 작은 축제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했는데, 고리타분한 정치 행사로 끝났다. 김종인 전 의원과 이낙연 전 총리가 축사를 맡았다. 조응천 의원, 금태섭 전 의원 등 당시엔 손님이었던 정치인들과 이준석 대표가 인사하는 모습이 부각됐다. 그들만의 잔치가 됐다. 무대에 선 청년이 “나는 왜 개혁신당 당원이 됐나”를 주제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이 대표가 청년들의 희망으로 떠오른 것은 3년 전 이맘때다. 서울과 부산에서 시장을 새로 뽑는 장이 섰다. 일반 청년들이 유세차에 올랐다. 홍보 전략을 담당한 이 대표와 젊은 당직자들이 만든 선거운동이었다. 대학생이 연단에서 “오세훈 후보도 마음에 안 들지만”이라면서 연설을 했다. 뒤편의 오 후보는 빙긋이 웃었다. 학생, 취준생, 카페 사장 등이 “무너진 공정사회”를 큰 목소리로 비판했다. 4·7 보궐선거 당일에는 청년들이 투표소에 다녀왔음을 증명하는 ‘인증샷’이 SNS에 쏟아졌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듬해 3월 대선으로 흐름이 이어졌다. 이준석과 국민의힘, 그리고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젊은이들이 민주당을 곤혹스럽게 하는 사진과 영상을 만들어 퍼뜨렸다. 과거에는 보수 정당이 당하던 일이었다. 청년들이 부모와 애인을 설득하며 표를 모았다. 시킨 사람이 없고, 생기는 것도 없는데 열성이었다. 석 달 뒤 지방선거에서도 그랬다. 국민의힘의 3연승이었다.   이 대표가 개혁신당 홈페이지를 개설했다고 자랑할 때 당원들과 정책, 선거 전략, 정당 간 제휴, 공천 등의 주요 진로에 대해 논의할 플랫폼을 만든 줄 알았다. 그때까지 그가 이룬 정치적 성공에 수평적 소통과 청년들의 참여가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플랫폼 정당’을 만들겠다고 말한 적도 있다. 창당 10년 만에 다수당이 됐던 이탈리아 ‘오성운동’은 ‘루소’라는 이름의 온라인 커뮤니티로 총의를 모은다. 이 대표는 그러지 않았다. 혼자 ‘빅 텐트’를 쳤다가 금세 접었다. 당원들이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개혁신당이 창당대회를 준비하던 1월 중순 대만에서 총선이 치러졌다. 제3 세력인 민중당의 커원저 주석이 청년층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청년들의 주거 비용과 저임금 노동 문제에 집중했다. 대만 젊은이들이 유세장으로 몰려갔다. ‘고향 가서 투표’ 운동까지 벌어졌다. 민중당은 113석 중 8석을 차지해 의회 ‘캐스팅 보터’가 됐다.   정치개혁을 향한 청년들의 열의가 많이 식었다. 젊은이들이 조용해지니 선거판에 과거사 논쟁과 손가락질만 난무한다. 이 대표의 책임도 크다. 무대에 청년들을 세우고 그들의 동지 역할을 한, 자신의 성공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물론 그는 젊다. 그리고 4·10 총선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   이상언 논설위원

    2024.03.20 00:34

  • [서경호의 시시각각] 통계조작과 정치감사 사이 ②

    서경호 논설위원 현재 스코어로 정확히 반타작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가 통계 작성 실태에 대한 지난해 9월 감사원 감사 결과와 지난주 대전지검 수사 발표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물론 아직 법원의 판단은 남아 있다.   지난해 감사원은 전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4명(장하성·김수현·김상조·이호승)과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 강신욱 전 통계청장 등 22명을 검찰에 수사 요청했다. 감사원은 통계법 위반, 직권남용, 업무방해 등 범죄행위가 ‘확인된’ 이들이라고 적시했다. 통계청장 외에 통계청 공무원 4명도 여기에 포함됐다.     ■  「 검찰, 감사원 요청의 절반만 기소 소득 통계는 7명 중 1명만 재판에 검찰 제언이 정책 개선에 더 도움 」    검찰 수사 결과는 사뭇 달랐다. 대전지검은 김수현·김상조 전 정책실장과 김현미 전 장관 등 11명을 불구속 기소했지만 장하성·이호승 전 실장과 차영환 전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 통계청 공무원 4명 등 11명은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다. 감사원이 검찰에 수사 요청한 22명의 절반이다.   감사원이 ‘확인한’ 범죄행위를 검찰은 왜 확인하지 못했을까. 국가 통계의 근본을 뒤흔든 전 정부의 잘못을 검찰이 봐줬을 리는 없다. 검찰 스스로 ‘최초의 통계법 위반 수사·기소’라고 의미를 부여할 만큼 주요 사건이었다. 검찰이 이번에 기소한 윤성원 국토부 전 차관 등 관료 2명에 대해 두 차례나 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된 것을 보면 집값 통계 조작의 청와대 연결고리를 더 찾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사원과 검찰 발표에서 달라지지 않은 점은 집값 통계 조작이다. 청와대가 한국부동산원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해 최소 94회 이상 통계를 조작하게 했다는 감사원 발표는 검찰 수사에서 125차례 조작으로 늘어났다. 부동산원은 사전 보고가 부당하다며 12차례에 걸쳐 중단을 요청했지만 김상조 전 실장이 “사전 보고를 폐지하면 부동산원 예산이 없어질 텐데, 괜찮겠냐”고 압박했다는 내용도 새로 나왔다.   반면에 가계소득 통계는 차이가 났다. 자료 순서부터 달랐다. 감사원은 가계소득, 고용 순이었지만 검찰은 고용, 가계소득 순으로 발표했다. 중요도가 달라진 거다. 검찰은 소득 통계와 관련해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인식별정보가 포함된 통계 기초자료를 제공받은 홍장표 전 경제수석 한 사람만 기소했다. 감사원이 통계청 공무원 넷을 포함해 모두 7명을 검찰에 넘겼음을 떠올리면 말 그대로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다. 전임 정부 마지막 통계청장을 지낸 류근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대학신문에 ‘통계청에 의한 통계조작 있었던가’라는 글을 올렸다. 소득 통계의 원자료인 가계동향조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표본 개편과 가중치 부여 자체는 통계조작이 아니다”고 썼다. 검찰도 그렇게 본 것 같다. 정책 비판의 대상은 될지언정 법의 잣대로 판단할 일은 아니었다.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감사원 발표보다 상대적으로 차분한 검찰 발표가 더 돋보인 대목이 있었다. 검찰은 집값 통계조작으로 국민은 시장 상황을 오판하게 됐고 국토부 예산 368억원이 허비됐다고 지적했다. 국가 통계가 무용지물이 됐으니 거기에 쓴 세금이 낭비된 것은 맞다. “정확한 국가 통계는 정부정책 수립의 근간이자 사회 구성원의 각종 의사결정을 합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공공자원이므로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중립적으로 작성돼야 함”이라는 검찰 발표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돼 있는 현행 통계법의 벌칙 규정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제안도 고개를 끄떡이게 했다. 두 기관의 발표문만 보면 검찰이 정책감사에 신경 쓰는 감사원 같고, 감사원은 법전 펴놓고 단죄하는 검찰 같다. 검찰 지적이 향후 정책 개선에 더 도움이 되겠다.   지난해 감사원 발표 직후 ‘통계조작과 정치감사 사이’라는 칼럼에서 진실은 그 사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고 썼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서경호 논설위원

    2024.03.19 00:41

  • 사법주권 수호의 허무한 결말 [최현철의 시시각각]

    최현철 논설위원 32개국 128만 명의 회원이 36만 건의 아동 성착취물을 거래한 다크웹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의 꼬리를 처음 잡은 것은 2015년 영국이었다. 이후 각국 수사기관의 공조로 300여 명의 공범과 이용자가 체포됐다. 메인 서버 장소를 한국의 충남 당진으로 특정한 것은 미국 국토안보수사국(HSI)이었다. 2018년 5월 손정우를 체포한 것은 한국 경찰이지만 사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처벌은 더 대조됐다. 영국의 영상 제작자는 22년, 미국의 사이트 공동운영자는 15년, 영상을 내려받은 사람도 5년형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주범은 한국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비트코인을 이용한 돈세탁은 기소도 안 됐다. 그런데 미국 사법당국이 이 틈을 파고들어 손정우의 형기 만료 직전 범죄인 인도 청구를 했다. 범죄인 인도 조약에 따라 한국에서 처벌받지 않은 죄는 인도 대상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알린 여성 활동가들이 2020년 7월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사법당국을 비판하고 있다. 뉴스1  손정우 측은 아버지가 아들을 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검찰은 재빨리 기소했고, 법원은 두 달 만에 인도 불허 결정을 내렸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한국인을 한국에서 처벌하고야 말겠다는 ‘사법주권 수호’ 의지의 표현이었다. 문제는 의지를 뒷받침한 관행과 법 제도가 허술했다는 점이다. 미국으로 인도됐으면 20년형 이상을 선고받았을 손정우에 대해 한국 법원이 선고할 수 있는 형량은 고작 징역 2년뿐이었다. 2022년 7월 법정구속된 그는 넉 달 뒤면 출소한다.     ■  「 아동 성착취물 운영 주범 손정우 미 인도 거절 후 고작 2년형 추가 권도형 데려와 엄벌할 수 있겠나 」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53조원의 손실을 입힌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송환을 둘러싼 한·미 사법당국의 경쟁은 4년 전 모습의 데자뷔 같다. 잠적했던 권씨가 지난해 3월 23일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되자 미국 대사관은 3월 27일 신병 인도를 요청하는 서한을 현지 정부에 공식 제출했다. 한국 정부의 서한은 28일 접수됐지만, 미국보다 사흘 앞선 24일 영문 e메일 요청서를 보냈다. 미국의 서류가 단순 구금 요청이었지만 우리는 구체적인 인도 요청 서류가 첨부됐다. 이런 탓에 인도 재판은 줄곧 엎치락뒤치락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2월까지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은 세 차례 미국으로의 송환 결정을 했다. 그때마다 몬테네그로 항소법원이 파기환송했다. 결국 미국 송환을 고집하던 포드고리차 고법도 지난 8일 한국으로의 송환을 결정했다. 지난해 5월 11일(현지시간)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 권도형(32) 테라폼랩스 대표가 몬테네그로 수도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현지 법원은 권씨를 한국과 미국 중 어느쪽으로 보낼 것인지를 두고 여러차례 결정과 번복을 거듭한 끝에 올 3월 한국 송환을 결정했다. 연합뉴스  4년 전 손정우 송환 사건 담당 재판부는 결정문에 송환 불허 사유를 이렇게 적었다. “네트워크 기반으로 이뤄진 이 사건은 범죄자 관할국이 어느 한 곳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인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동음란물 관련 범죄의 예방과 억제 측면에서 대한민국에 이익이 된다.” 국내 피해자가 많으니 한국에서 처벌해 사법주권을 실현하자는 것인데, 지금의 권도형 사건과 판박이다.    사법당국과 달리 피해자들은 한국에서 재판받는 것을 우려한다. 제대로 처벌받을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여러 죄를 한꺼번에 저지른 경우 미국은 각 죄에 대한 형을 합산하는 반면, 우리는 가장 무거운 죄를 기준으로 그 절반만 가중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사기범이 100년 이상 형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역사상 43년형(김재현 전 옵티머스 펀드 대표)이 최대였다. 한국 정부와 사법부는 아직도 가상화폐를 증권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공식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 경우 사기 혐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테라·루나를 상장하기 전에 권씨가 직접 피해자를 속여 판 금액(프리 세일)만 피해 규모로 인정될 수도 있다.    더구나 법관 기피, 공판 연기, 위헌법률 심판, 보석 신청 등 최근 한국 법정에서 유행하는 다양한 재판 지연 전술이 등장할 수도 있다. 1년쯤 지나면 보석이 불가피해지고,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은 한정 없이 늘어질 수도 있다.  오는 23일이면 권씨의 여권법 위반 혐의에 대한 구금 시한이 끝난다. 한국 송환이 초읽기에 들어간 셈이다. 수영장의 물은 빠지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수영복을 제대로 입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때다. 최현철 논설위원

    2024.03.18 0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