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대 증원의 ‘블루 스폿’ [최현철의 시시각각]

    최현철 논설위원 바둑에서 특정 위치에 결국 같은 색의 돌이 놓일 자리라도 놓는 순서가 중요하다. 상대가 있는 게임이기에 늘 정확한 순서대로만 놓을 순 없지만, 수순(手順)을 무시하면 낭패를 본다.  요즘 바둑 해설엔 AI가 필수다. 반상에 돌이 놓일 때마다 이후 가능한 여러 수를 보여주고, 그 수가 놓일 경우 승률까지 예측한다. 이 중 승률이 가장 높은 점은 파랗게 표시된다. 그래서 ‘블루 스폿’이라고 한다. 끝내기 6연승으로 올해 농심배를 품은 신진서는 블루 스폿을 가장 잘 찾아내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신공지능’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한 해설가는 “신진서는 정확한 수순을 따라가고, 상대는 조금씩 승률이 떨어지는 지점에 돌을 놓다 보면 늘 중반 이후 예상 승률이 75% 정도로 벌어진다”고 평했다. 이번 농심배에서도 최종전 직전까지 다섯 번을 그렇게 뒀다. 최종국에선 중반에 실수해 판세가 갑자기 뒤집히기도 했지만, 상대 역시 수순을 그르치며 결국 2005년 이창호 이후 20년 만에 상하이 대첩을 재현했다. 프로기사 신진서(23) 9단이 2월 23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3라운드 최종 14국에서 중국의 마지막 주자 구쯔하오(25) 9단에게 249수 만에 불계승했다. 이로써 신진서는 농심배 사상 초유의 '끝내기 6연승'을 질주하며 한국의 4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연합뉴스  바둑뿐일까.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도 그렇고, 갈등이 불가피한 정책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다고, 욕심난다고 불쑥 돌을 놓아선 엉뚱한 곳에서 대마가 잡히거나 집을 빼앗겨 패한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정부·의사 간 갈등이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애초 분위기는 정부에 유리했다. 응급실 뺑뺑이, 의사를 찾지 못하는 지방 의료원, 필수 분야 전공의 미달, 3분 진료와 불친절한 진료 태도 등에 화가 난 시민들은 정부 편이었다. 보건의료노조의 설문조사에서 89.6%가 정원 확대에 찬성했다.     ■  「 수가조정·수련환경 개선 생략한 채 불쑥 2000명 증원 발표, 갈등 폭발 의료계 파국 피할 최적의 수 찾아야 」  정부는 의사들을 상대로도 28차례에 걸쳐 협의회를 열면서 설득해 왔다. 그런데 불쑥 2000명 증원을 꺼내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현 정원의 60%가 넘는 규모도 예상을 뛰어넘지만, 왜 2000명인지 설명이 부족했다. 근거가 됐다는 세 가지 보고서의 저자들마저 꼭 한꺼번에 2000명을 늘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 전에 이런 수순을 밟았다면 어땠을까. 우선 전공의 근무시간 한도를 주당 80시간에서 60시간 정도로 줄이고 연속근무 허용을 36시간에서 24시간으로 줄이는 것이다. 상급 종합병원의 전공의 비율을 25% 이하로 제한하고, 나머지 인력을 전문의로 채우도록 의무화한다. 불가능한 일일까? 복지부는 지난주 갑자기 9개 거점 국립대 교수 정원을 1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정원이 1200명가량이니 무려 80%가 넘는다. 그 정도 결기면 병원의 전문의 비율 확대도 쉽게 추진했을 것이다. 지난 1일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가 로비를 지나고 있다. 정부는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이 2월29일까지 복귀할 경우 책임을 묻지 않겠다며 최후 통첩을 보냈지만, 이날까지 복귀한 전공의는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뉴스1  수술이 많고, 24시간 응급 콜 대기 상태며, 사고 위험까지 높은 분야의 수가를 상대적으로 편하고 덜 위험한 곳보다 확 높이는 방안도 있다. 20년 가까이 필수 의료 분야에서 호소해 온 내용이다. 하지만 정부는 의사협회가 스스로 조율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실상 방치해 왔다. 지금 의협과 전공의들을 대하는 정부의 단호함을 이전에도 유지했다면 못할 일일까 싶다.  지역에서 10년쯤 의무 근무하는 조건으로 의대생을 뽑는 전형을 마련할 수도 있다. 지역 출신을 뽑고, 장학금도 주되 어기면 면허를 취소한다고 처음부터 못 박는다. 아직 전공의 임용 계약도 맺지 않은 인턴 수료자에게 근무지 이탈로 면허 취소를 고려하는 마당에 못할 것도 없다.   의사 업무를 일부 대신하는 PA 간호사를 아예 법적으로 보장하고, 일부 미용성형의 문호를 개방할 수도 있다. 이런 걸 일부라도 시행하고, 나머지는 일정표를 제시한 뒤 그래도 부족한 의사 수를 늘리기 위해 의대 정원을 늘리자고 제안했다면 의사들이 정부를 못 믿겠다며 의료 현장을 떠날 명분이 있었을까? 3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 옆 여의대로 인근에서 열린 의대정원 증원 및 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전국의사 총궐기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의료 탄압 중단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블루 스폿은 수가 놓일 때마다 새롭게 제시된다. 2000명 증원과 전공의 집단 사직, 다시 복귀 마지노선 제시와 불응이라는 공방이 오가며 의료계의 판은 위태로워졌다. 다음 수는 대규모 처벌과 교수·전임의 진료 거부로 이어질 수도 있고, 증원 규모까지 포함한 타협점에 돌이 놓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블루 스폿일까. 최현철 논설위원

    2024.03.04 00:34

  • [강주안의 시시각각] 가짜 뉴스보다 겁나는 거짓 뉴스

    강주안 논설위원 지난 1월 27일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17면에 소름 돋는 사진이 실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키스하는 장면이다. 백발의 두 정치인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입술을 포갰다. 기사의 제목은 ‘가짜(Fake)’다. ‘저스틴 메츠 작가가 FT 기고를 위해 창작한 작품’이라는 설명이 없었다면 실제 상황으로 속았을 사진이다. 기사는 푸틴이 등장하는 딥 페이크(인공지능 기반 가짜 영상)를 소개하며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의 혼란을 지적했다. 가짜 뉴스 논란을 다룬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지난 1월 27일 지면.  우리도 가짜 뉴스가 논란이다. 경찰은 윤석열 대통령의 딥 페이크 영상을 수사 중이다. 뻔히 가짜인 줄 알 만한 콘텐트를 단속하는 건 과도하다는 반론도 나온다. 우린 딥 페이크보다 진실성이 떨어지는 뉴스에 늘 노출된다. 처음엔 진짜인 줄 알았으나 시간이 흐르니 거짓으로 드러난 기사가 넘친다. 요즘 ‘비명횡사’ 소식이 잇따르는 더불어민주당을 보자.    ‘이재명 불체포특권 포기’. 지난해 6월 19일 각 언론에 보도된 기사다. 이 대표는 이날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제 발로 출석해 영장실질심사를 받겠다”고 했다. 한데 그날이 임박하자 이 대표는 단식하며 저항했다. 체포동의안은 민주당 일부 의원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가결됐다. 법원 영장 기각으로 해피엔딩인 줄 알았으나, 당시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지목된 인사들이 이번 총선 공천에서 밀려났다. ‘이재명 불체포특권 포기’ 기사를 따랐던 의원들의 참변이다. 기사가 하나 더 생각난다.    ‘이재명 “이낙연 결단에 깊이 감사… 함께 반드시 정상에 오를 것”’. 2021년 10월 13일 뉴스다. 이 대표는 SNS에 ‘국민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문재인 정부 첫 국무총리, 이낙연 후보님’이라며 ‘이제 손을 꽉 맞잡고 함께 산에 오르는 동지가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지난 28일 공천 탈락에 반발하는 친문재인 인사들에게 “탈당은 자유”라고 말하는 이 대표의 모습과 매칭이 되는가. 오죽하면 진보 학자조차 “공천 코미디”(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매일 변하는 남자”(이대근 우석대 교수)라는 평가를 할까.  가짜 뉴스는 잘 들여다보면 금세 실체가 드러나지만, 거짓 기사는 시간이 흐르고 나야 판별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야당에서만 이런 뉴스가 나온 건 아니다.    ‘윤석열 “김대중·노무현처럼 기자실 자주 찾을 것… 김치찌개 같이 먹읍시다”’. 2022년 3월 23일 기사는 2년이 흐른 지금 도무지 실감이 안 간다. ‘尹 “이준석이 뛰라면 뛰겠다”’. 2021년 12월 4일 뉴스는 또 어떤가. 당시 윤 대통령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젊은 당 대표와 함께하는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다는 기사 내용 역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  ‘불체포특권 포기’ 이재명 대표 기사    ━  ‘기자실 자주 찾을 것’이라던 대통령      ━  실제 뉴스였으나 사실과 전혀 달라    우리 국민을 솔깃하게 하는 거짓 뉴스는 선거철에 특히 기승이다. FT는 가짜 뉴스의 해악을 설명하기 위해 희대의 위작 화가인 에릭 헤본의 일화를 꺼냈다. 1996년 로마의 거리에서 둔기로 머리를 맞고 비명횡사한 그는 책과 방송을 통해 거장의 작품 상당수가 자신의 위작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헤본이 촉발한 진짜와 가짜의 혼돈을 소개한 FT는 “여러 민주주의 국가가 2024년에 투표를 한다”며 가짜 뉴스의 폐해를 환기한다.  다음 달 총선을 앞두고 정부는 가짜 뉴스 엄단을 경고한다. 거짓 뉴스는 더 해로운데도 무방비다. 시민이 감시하는 수밖에 없다. 최근 나온 후보군 몇 개만 추려본다.    ‘국회의원 수를 250명으로 줄이겠다.’ ‘국회의원 세비를 국민 중위소득 정도로 하자.’(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선거구 획정 권한을 중앙선관위에 넘기겠다.’(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  ‘증오의 정치, 대결의 정치를 끝내자.’(이재명 대표)  ‘협상과 타협을 통해 정치를 복원하자.’(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  이런 뉴스의 전개를 주시하면 정치권 거짓 뉴스의 계보가 어떻게 이어질지 예측이 가능하다. 관련기사 [강주안의 시시각각] 추미애·최강욱의 반전 [강주안의 시시각각] 읍소 대상이 된 제2부속실 설치 [강주안의 시시각각] 모비딕은 잠시 잊자 너무 높게 지은 아파트 위쪽 싹둑 자른다는데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의 시선] 산업재해에 잇단 옐로카드, 그 뜻은? 강주안 논설위원

    2024.03.01 00:40

  • [김현기의 시시각각] 장제원은 억울할까, 편안할까

      ■  「 권성동도 김기현도 버티니 승리 책임을 묻지도, 지지도 않는 나라 책임지고 나선 쪽이 손해 봐서야 」    김현기 논설위원 #1 다음 달 20일 전후로 추진 중인 한·일 정상회담이 아직 유동적이다. 회담 추진의 시작은 이랬다. 기시다 총리는 당초 3월로 예정했던 미국 국빈방문이 4월로 미뤄지면서 방한을 모색했다. 지난해 3월 '제3자 변제안'이란 결단을 해준 윤 대통령에 대한 마음의 빚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양국이 선보일 미래지향적 메시지도 측근에게 준비토록 했다. 우연히 서울 고척돔 경기장에서 같은 시기 오타니가 있는 LA 다저스와 김하성이 있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미국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한·일 정상이 함께 관람하는 이벤트도 추진하려 했다. 물론 야구는 곁가지일 뿐 핵심은 회담이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5월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한일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그러나 이를 막고 나선 건 양국의 외교 당국. 관료들의 좋게 말하면 신중함, 나쁘게 말하면 책임 회피 때문이다. 한국 외교부는 "4월 10일 총선 전에 일본 총리가 오면 선거에 마이너스 아니냐"며 주저한다. 일본 외무성도 "잘해야 본전"이라고 말린다. 오히려 선거결과에 더 예민해야 할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는 전향적이다. 트럼프 2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라도 더 빨리, 더 많이 한·일 정상이 협력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할 텐데 관료들의 눈과 귀, 코는 그저 "잘 안 되면 누가 책임지나"에 쏠려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3월 강제징용 해결안이 나온 뒤에도 그랬다. 주일대사관은 일본 내 재일교포 기업인과 단체들의 성의를 기부로 연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외교부는 오히려 제동을 걸었다. 섣불리 기부를 받거나 권유할 경우 두고두고 '최순실 사태' 때와 같은 책임 추궁이 올 수 있으니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한심한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4일 오후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에서 문 전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제공]   #2 하지만 요즘 정치권의 총선 공천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공무원들은 조족지혈, 새 발의 피다. 먼저 더불어민주당. 이른바 '친명'은 문재인 대통령 세력, 즉 '친문'에 지난 대선 패배의 책임이 있다며 공천 학살에 나섰다. 다가오는 당권 경쟁, 대선후보 경쟁에서 아예 경쟁자의 싹을 잘라놓으려는 의도가 너무나 속 보인다. 그러면서 정작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 대표 본인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불출마선언 같은 희생도 않는다. 상식적으로 보면 온갖 졸속과 편법이 횡행했던 문재인 정부의 임종석, 추미애, 조국은 물론 사당화에 혈안인 이재명, 정청래, 장경태 같은 이들 모두 깡그리 책임을 물어 '공천 아웃'시키는 게 옳다. 그런데 책임은 안 지고 또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오른쪽부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박형준 부산시장, 한덕수 국무총리,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 장성민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 등 참석한 대표단이 지난해 11월 28일 오후(현지시간) 국제박람회기구(BIE) 제173차 총회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파리 남부 외곽의 ‘르 팔레 데 콩크레 디시'’에서 2030 세계 엑스포 개최지 선정 투표 결과 부산이 탈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뉴스1   국민의힘이라고 다를 게 없다. 장성민 전 대통령실 미래전략기획관의 "국힘 의석수는 150석에서 160석, 민주당은 110석 정도에 불과할 것"이란 발언을 듣고 뜨악했다. 예측이야 자유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대통령실 엑스포 유치 총괄 책임자로 투표 직전 인터뷰에 나와 "당일 초박빙의 승부가 펼쳐질 것"이라고 했던 장본인이다. '119대 29' 참패의 책임을 져야 할 인물에게 책임 추궁은커녕 단수공천을 주니 그런 믿거나 말거나 발언을 또 반복한다. 하기야 당시 한덕수 총리 이하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윤 대통령 이하 아무도 책임지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 '책임지면 손해 본다'는 풍토가 자리 잡고 만 건 아닐까.    지난해 12월 15일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이 부산 사상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작별' 의정보고회에 참석해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그런 점에서 최근 몇달 사이 가장 깔끔하게(혹은 순진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 건 장제원 의원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윤핵관 2선 후퇴론이 불거져도 버티기로 일관했던 권성동 의원, 희대의 'SNS 당 대표 사퇴' 후 잠수를 타다 막판 등장한 김기현 의원 모두 결국 자신의 선거구를 지켜냈다. 나머지 친윤 핵심들도 마찬가지. 책임 안 지고 버티니 살아났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장 의원은 무슨 생각을 할까. 성급한 결단을 후회할까, 아님 맹자의 '불원천 불우인'(不怨天不尤人·군자와 선비는 남 아닌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법이다)의 가르침을 다시 되새기고 있을까. 김현기 논설위원

    2024.02.29 00:40

  • [고정애의 시시각각] ○○조국당, 조국○○당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청와대 민정수석은 격무다. 건치 몇 개를 임플란트로 바꿀 정도가 돼야 나올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개인 책’을 낸 이가 있으니 2018년 8월 조국 당시 수석이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2017년 5월 민정수석으로 임명되면서 연구활동을 전면 중단하게 됐다. 그런데 2006년 미국 민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최초로 제창한 ‘미투운동’이 2017년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되고 2018년 한국에서도 전개되는 양상을 접하면서 전면 개정판을 발간하게 됐다.”(『형사법의 性 편향』)      대통령 발의 개헌안까지 관장하던 시기였다. ‘다행히 주말에 짬’을 냈다? 놀랐다. 260여 쪽을 넘기다 마지막 부분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곤 더 놀랐다.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고 외치며 거리에 나온 여성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  「 기존 팬덤, 기성 정당 공략해 장악 '조국신당'은 팬덤이 아예 창당 나빠진 정치 더 나빠지게 할 수도 」     자신의 제안 수용을 바라며 한 말인데, 정작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1심 무죄 규탄대회의 명칭은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였다. 뜬금없이 ‘조국이 없다’니. 조국(祖國)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던 나라’란 의미가 강하다. 민족주의적이다. 국가는 공권력을 독점한 단체를 칭한다. 여성들이 요구할 대상은 조국 아닌 국가일 수밖에 없다. 오용한 건 그였다. 그의 이름이 조국(曺國)이 아니어도 그랬을까. 놀라운 자기애의 발현이라고 생각했다.    26일 조국신당(가칭) 창당준비위와 중앙선관위 사이에 오간 문답을 보며 당시 기억이 떠올랐다. 창준위가 14개의 당명 후보를 보냈고, 선관위는 하나만 불허했다. 길지만 모두 쓰면 이렇다.     가칭 '조국신당'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25일 오전 서울 동작구의 한 영화관에서 열린 '조국신당 창당준비위원회 인재영입 발표식'에서 1호 영입인사로 선정된 신장식 변호사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국신당, 조국(의)민주개혁(당), 조국(의)민주개혁행동(당), 조국민주행동(당), 조국을 위한 시민행동(당), 조국시민행동(당), 조국민주당, 조국민주당(祖國民主黨), 민주조국당, 민주조국당(民主祖國黨), 조국개혁당, 조국개혁당(祖國改革黨), 조국혁신당, 조국혁신당(祖國革新黨).    이 중 조국신당만 안 됐다. 2020년 ‘안철수 신당’을 금지한 것과 같은 논리일 것이다. 한자어를 병기한 걸 뺀 나머지도 의도적으로 祖國·曺國을 뒤섞은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조국(의)민주개혁(당)’이나 ‘조국(의)민주개혁행동(당)’ 속 조국이 祖國이기만 하겠는가. 선관위가 과거 ‘친박연대’를 허용했기에 이번에도 그리 판단했을 텐데 대단히 아쉽다. 특정인을 위한 정당이란 게 헌법상 허용돼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많은 이가 총선 과정을 보며 ‘최악’이란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위성정당은 더 나빠졌다. 한쪽은 ‘부하 정당’을 만들고, 한쪽은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의 여의도행 배지(培地)가 되고 있다. 단지 “50% 가산점을 주는 것만으론 신인엔 도움이 안 된다”던 직전 공관위원장의 고언을 망각한 무감동의 국민의힘은 안타깝고, 친노·친문이 반대파를 날리기 위해 활용했던 ‘시스템 공천’을 더욱 가공할 무기로 업그레이드해 반대파들을 발본색원하는 반민주적 민주당과 그 대표엔 경악하게 된다.    조국신당의 문제도 못지 않다고 여긴다. 그가 지난 7일 2심에서도 자녀 입시 비리와 감찰 무마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은 내로남불의 ‘범죄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 “감옥 갈 확률 99%”의 창당이라고 표현했던데, 국회를 범죄자 도피소로 만들기 때문만도 아니다. 팬덤 정치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여서다. 그간 팬덤은 기존 정당의 인물을 발견해 리더로 삼곤 했다. 그러고는 기성 정당을 압박하고 대체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10여 년 만에 뿌리를 잊었다.    조국신당은 아예 정당을 차린 경우다. 태생 자체가 팬덤 정당이다. 10석 정도 기대한다는데 여론조사만 보면 불가능해 보이지만도 않는다. 장차 이들이 여의도에서 보일 ‘반정치’가 두렵다. 소수라 괜찮다고? 불타협의 과격한 소수가 때론 가공할 변화를 만들어내곤 했다. 기우였으면 좋겠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2024.02.28 00:39

  • [서승욱의 시시각각] 김종필의 정치, AI의 정치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1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 일이었는데 참으로 못할 짓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를 구한다고 해서 원상회복될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솔직하고 예의 바른 어투에 내 마음이 누그러졌다. 나는 "이것도 도도히 흘러가는 시대의 역사"라고 말해 줬다. 그리고 2인자로서의 처신을 충고했다.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아라. 비굴할 정도는 안 되겠지만 품격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때도 2인자다운 논리가 서야 한다. 조금도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아라.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 진정한 인내는 참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오른쪽)과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청와대에서 회담을 했다. [중앙포토] #2 싸울 땐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인간미 흐르는 정치를 하고 싶었다. 상대방은 나를 자극하는 경쟁자일 뿐 죽기살기로 싸워 없애야 할 적은 아니다. 나는 '양김(金)'씨에게 붓으로 쓴 편지를 보냈다. 전화나 사람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편지를 선택했다. 평소 쓰던 전용 메모지를 세로로 세워 붓으로 정성과 품격을 담았다.      ■  「 JP 증언록에 독자들 다시 열광   절제와 품격 담긴 선 굵은 정치 한동훈·이재명의 현실과 대비 」  더중앙플러스(중앙일보 유료 구독 서비스) 콘텐트 중 '김종필(JP) 증언록'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특히 뜨겁다. #1은 1980년 8월 하순 신군부 2인자 노태우와 마주한 JP다. 46일간의 구금, 부정축재 자백 강요와 공직 사퇴 압박 등 신군부에 큰 고초를 겪은 직후였다. 그런데도 둘의 대화엔 절제와 존중이 흐른다. 가해자에게 전수하는 피해자 JP의 2인자론은 그 백미다. #2는 '1노3김' 4당 체제를 낳은 1988년 4월 13대 총선 직후다. 제4당 총재 JP는 김영삼(YS)·김대중(DJ)에게 회동을 제안하며 야 3당 공조에 나섰다. 예의와 격조를 갖춘 JP의 손편지에 양김이 화답하며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무르익는다.      정치 9단들의 감수성과 상상력 충만한 선 굵은 스토리, 9년 전 연재됐던 고전에 독자들이 다시 열광하는 건 팍팍하고 참담한 현실 정치와의 대비 때문이리라.      JP의 2인자론엔 정말 소름이 돋는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 속에 체득된 삶의 응축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과 함께 자존감까지 지켜야 하는 2인자의 아슬아슬한 숙명이다. 여권의 넘버 1, 2가 맞붙었던 윤석열-한동훈 충돌에선 없었던 무게감과 절제, 품격이 담겼다. 검사 출신 초보 정치인 두 사람의 이번 윤-한 충돌은 전혀 달랐다. 형·아우도 없는 특수부 검사들의 언론 플레이, 뜬금없는 90도 인사와 맥락 없는 봉합 오찬 등 가벼운 처신과 잔기술, '발연기'가 지배했다.      JP가 말한 "싸울 땐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인간미 흐르는 정치" 역시 현실엔 없다. 붓으로 쓴 편지를 주고받기는커녕 존중과 배려의 기본적 마지노선까지 무너진 지 오래다. 대통령은 야당 대표와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 야당은 '기승전-대통령 부인'으로만 재미를 보려 한다. 정치 9단들의 그 시절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총선전의 수준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사석에서 만난 원로 정치인은 "한동훈, 이재명, 이준석 모두 두뇌 회전이 너무 빠른 천재들이라 머리로만 정치를 하는 것 같다. 혼(魂)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AI가 준 정답을 실행하듯 기계적으로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비판에만 올인한다. 인기 없는 대통령의 존재감을 지우고 '한동훈-이재명' 구도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의도는 알겠다. 하지만 그런다고 철학과 비전의 결핍, 감수성과 진정성 부재가 감춰지진 않는다. 한 위원장이 AI라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고장난 AI처럼 폭주하고 있다. '총선 승리보다 이재명당 만들기가 살길'이라는 잘못된 지령에 사로잡혀 '친명횡재, 비명횡사' 기조에 목을 맨다. 왜 이 시점에 JP증언록이 다시 뜨는지, 답은 현실을 헤매는 정치 초단들이 쥐고 있다.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sswook@joongang.co.kr

    2024.02.27 00:36

  • [양성희의 시시각각] 콘텐트 강국의 이상한 풍경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 풍경 1. K팝 종주국에 대형 공연장이 없다? 최근 국내외 대형 가수들의 공연장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4만5000석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이 2026년 말까지 리모델링 중이라서다. 잠실보조경기장(2만5000), 고척돔(2만)도 공사 중이다. 지난해 잼버리 대회 폐막식, K팝 공연을 축구 팬들의 ‘잔디 훼손’ 원성을 사면서까지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연 배경이다. 현재 국내에서 1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곳은 케이에스포돔(구 체조경기장) 1곳. 이달 초 도쿄돔(5만) 4회 공연을 마친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에 대해 ‘코리아 패싱’ 논란이 나오지만 정작 그를 세울 무대가 없는 게 현실이다. 일본은 1만 명 이상 들어가는 공연장이 40개고, 해외에서는 손흥민이 소속된 영국 토트넘 홋스퍼 구장(6만) 등 스포츠 구장을 음악 공연장으로 적극 활용한다.     ■  「 K팝 스타도 공연장 잡기 별 따기 제작사 인수 무리한 수사 논란에 문산법도 시끌…K컬처 강국 맞나 」    번듯한 대중음악 공연장에 대한 요구는 업계의 숙원이었다. 지난해 개관한 인천 영종도의 1호 아레나(1만5000)에 이어 서울 창동, 경기도 고양 등에 1만~2만 석 아레나 건설이 추진 중이지만 시간이 걸린다. 한마디로 K팝 강국이라는 위상에 맞지 않는 인프라 부족이다. 관광 등과 연계하며 날로 커지는 글로벌 공연시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전 세계 라이브 티켓 판매액은 30조3000억원에 달했다.   # 풍경 2. 창작자 보호법이 창작자의 발목을 잡는다? 지난해 만화 ‘검정고무신’ 작가의 비극적 죽음을 계기로 문체부와 국회가 마련한 ‘문화산업공정유통법’(문산법)도 논란이다. 문화산업 전반의 불공정 행위 10개 조항 규제를 골자로 하는데, 중복규제·과잉입법 논란으로 국회 법사위를 넘지 못했다. 취지에는 공감하나 현장과 맞지 않고, 특히 디지털 콘텐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령 ‘작가에게 판촉비 전가 금지’ 조항은 창작자를 보호하는 것 같으나 웹툰·웹소설 초기 일부 회차를 무료로 공개해 독자를 모으는 프로모션 관행이 무명 작가의 등용문이 돼 온 현실과 충돌한다. 플랫폼·출판사가 부담을 지면서 신인에게 기회를 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창작자 단체까지 부정적 입장을 내놓자 문체부는 하위 법령으로 보완하며 업계 의견을 수렴·반영하겠다고 밝혔다.   # 풍경 3. 미래가치를 본 제작사 인수가 범죄다? 최근 법원은 열악한 드라마 제작사(바람픽쳐스)를 고가로 인수해 배임(400억원) 혐의를 받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 김성수 대표와 이준호 투자전략부문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은 김 대표 등이 인수대금을 부풀려 바람픽쳐스에 시세차익을 몰아줬다고 봤으나, 법원은 “범죄의 성립 여부와 손해액 등에서 다툴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간 김 대표 측은 “‘미생’ ‘나의 아저씨’의 김원석 PD, 김은희·박혜련 작가 등 유명 감독·작가들과 다수의 작품을 준비하며 성장 잠재력을 갖춘 유망한 제작사에 대한 투자”라고 항변해 왔다.   물론 하필 바람픽쳐스 대주주인 탤런트 윤정희씨가 이 부문장의 아내라는 점은 여전히 미심쩍지만, 콘텐트 제작사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수사라는 비판이 많다. 작품 라인업, 감독·작가 등 무형의 자산을 보고 미래가치에 투자한 것을 성급하게 배임과 등치시켰다는 얘기다. 회계장부에 나오지는 않지만, IP(지식재산) 보유 여부만으로도 얼마든지 몸값이 올라가는 게 제작사다. 망해 가는 제작사를 왜 비싸게 샀느냐는 의심이지만, 당장 실적은 없어도 잠재력 있는 제작사가 투자를 받아 좋은 작품을 내는 건실한 회사로 기사회생한 모범사례로도 볼 수 있다. 바람픽쳐스는 지난해 tvN ‘무인도의 디바’, OTT 디즈니+ ‘최악의 악’ 등 히트작을 연이어 내놓았고, 400억원의 연매출을 올렸다.   일단 수사에는 제동이 걸렸지만, 콘텐트 산업의 주요 동력의 하나인 M&A 시장에 찬물을 끼얹을 뻔한 사례다. 모두 세계 4대 콘텐트 강국을 지향한다는 나라의 이상한 풍경들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2.26 00:36

  • [김정하의 시시각각] 의사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김정하 논설위원 1. 이번 의사 파업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2024년 의대 입학 정원 3058명은 35년 전인 1989년의 입학 정원과 같은 규모라고 한다. 그사이 한국 인구는 4244만 명에서 5175만 명으로 21.9% 증가했는데 의사 배출은 제자리란 것이다. 의대 정원은 1990년대에 3253명까지 늘었지만 2000년 의약분업 파업 사태를 계기로 다시 줄었다. 김대중 정부가 의사들을 달래기 위해 의대 정원을 축소했다. 그래서 2006년 이후 의대 전체 정원이 18년간 3058명으로 묶여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의료 수요가 급증하는 65세 이상 노인층의 규모다. 89년 당시 65세 이상 인구는 205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는 993만 명이나 된다. 노인 인구가 5배 느는 동안 의사 양성은 동결해 왔으니 앞으로 큰 문제가 안 생길 수 있을까.   전북의사회 회원들과 의대생들이 22일 전주종합경기장 앞에서 '의대정원증원, 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2.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20일 성명서를 통해 “전공의들이 주 80시간 이상 근무하면서 최저임금 수준의 보수를 받고 있음에도 정부는 이제껏 이를 외면했으면서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 의료 마비가 된다고 한다”고 항변했다. 병원들이 전공의를 착취에 가깝게 부려먹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정부가 의대 정원을 대폭 늘려 가련한 전공의들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건데, 전공의들이 그건 왜 반대하는 건가? 힘들어 죽겠다면서도 인력 지원은 마다하는 모순을 이해해 달라니 참으로 난감하다.     ■  「 노인 5배 늘어도 의사배출 제자리 병원 밖 민심은 잘 모르는 의사들 의사파업, 윤 정부에 위기이자 기회 」  3. 의사단체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한국이 2.6명으로 일본(2.6명)이나 미국(2.7명)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한 편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의 2.6명은 한의사까지 포함한 수치고, 한의사를 제외하면 2.18명이 돼 OECD 최하위로 떨어진다. 의사단체가 평소엔 한의사를 자신들과 동렬로 대우하지도 않으면서, 이럴 땐 슬쩍 동료로 끼워 넣는다.   지난 17일 서울 대한의사협회 대강당에서 열린 의료정원 증원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김택우 비대위원장(가운데)은 "단 한명의 의사라도 이번 사태와 연관해 면허와 관련한 불이익이 가해진다면 의사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행동에 돌입할 수 있음을 강하게 경고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4. 의사들은 의대생 시절부터 은퇴까지 줄곧 병원에서만 활동하고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병원에서 형성된다고 한다. 미셸 푸코는 병원은 의사가 권력을 행사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대통령ㆍ재벌도 병원에 가면 의사 말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의사들은 병원 밖 민심에 대해선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다. 최근 의협 전직 간부가 “정부는 의사들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파업에 나선 한 전공의가 “제가 없으면 환자도 없다”는 선언한 것은 국민 여론을 자극하는 오만한 언행이었다. “면허 불이익은 의사에 대한 정면 도전”(김택우 의협 비대위원장)이란 말도 기가 막혔다. 의사가 정부의 상전인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나 ‘낭만닥터 김사부’는 역시 드라마에 불과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정례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5. 2000년 의약분업 반대 투쟁이나 2020년 공공의대 설립 반대 파업은 진보 정권과 의사들의 충돌이었다. 그래서 의사들에겐 보수 진영이 우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수 정권이 의사들을 압박하는 상황이다. 지금 의사들은 고립무원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의사 정원 이슈를 총선에 써먹으려는 윤석열 대통령이 얄밉긴 하지만 그렇다고 의사 파업을 지지할 순 없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평소 의사와 사이가 나빴던 간호사ㆍ한의사ㆍ치과의사ㆍ약사가 이 시점에서 의사를 편들 리 없다. 심지어 불법 파업의 대명사인 민주노총마저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아무런 정당성이 없다”며 파업 철회를 촉구할 정도다. 의사들은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한다.   6. 의사 파업은 윤석열 정부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의사들의 저항을 뚫고 큰 폭의 의사 증원을 관철한다면 정부의 큰 업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파업이 장기화하면 여론의 화살이 정부를 향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가 대책도 없이 일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파업을 조기 종식할 정교한 시나리오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윤석열 정부의 실력이 드러날 진실의 순간이다.   김정하 논설위원

    2024.02.23 00:36

  • [이상렬의 시시각각] ‘건국전쟁’과 4·10 총선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22대 총선을 약 50일 앞두고 영화 ‘건국전쟁’ 열풍이 우리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라 세우고 지키기의 소중함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성사시킨 한·미 동맹, 의무교육과 교육투자, 농지개혁 등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토대가 됐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필사적인 외교와 단호한 개혁을 통해 최약소국이 지구 최강의 동맹, 유능한 인적자원, 국민 화합의 기반과 경제성장의 동력을 갖게 됐다. 그리고 70여 년, 북한은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했고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력의 글로벌 선진국이 됐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대한민국 발전의 양대 축이었다.     ■  「 대내외 상황 70여 년 전과 유사 이재명 대표, 대북관 설명 필요 대한민국 번영 다지는 선거 돼야 」    이승만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쪽은 그의 독재를 이야기한다. 누가 이승만의 장기집권이 문제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나. 그러나 과(過)는 과고, 공(功)은 공이다.   요즘 대내외 상황은 남북 분단이 시작된 70여 년 전과 참 많이도 닮았다. 북한과 러시아, 중국은 그때를 연상시킬 정도로 밀착 중이다. 과거 북·중·러의 밀착은 김일성의 남침 오판을 가능케 했다. 지금도 러시아와 중국의 비호는 국제사회의 북한 제재를 무력화하고 있다. 그 어둠의 결속 아래 북한은 핵·미사일 고도화를 향해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정치는 극도로 양분돼 있다. 해방 공간 이후 사라졌던 정치인 테러까지 다시 등장했다.   그런 가운데 4·10 총선 정국은 심판론의 대결장으로 흐르고 있다. 야당(더불어민주당)은 윤석열 정권 심판을, 여당(국민의힘)은 입법 권력인 거대 야당 심판을 내걸었다. 현 정권에 대한 심판 사유는 여론조사의 윤 대통령에 대한 부정평가에 잘 나타나 있다. 국민은 팍팍해진 경제와 민생, 정권의 독선과 소통 미흡 등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다. 명품백 사건 등 김건희 여사 문제도 주요 요인으로 부상했다. 그렇다면 야당은?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거부 등 입법 파행에 대한 유권자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사법리스크 속에 민주당을 사당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재명 대표의 리더십도 심판대에 오를 것이다.   그렇더라도 총선에서 제대로 다뤄져야 할 중요한 쟁점이 있다. 누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굳건히 하는 데 보다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안보 상황과 북한에 대한 이 대표의 언어와 인식은 짚고 넘어가야 할 대상이다. 이 대표는 1월 19일 당 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미사일 도발을 당장 멈춰야 한다”면서 “선대들, 우리 북한의 김정일, 또 김일성 주석의 노력들이 폄훼되지 않도록, 훼손되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년 기자회견에선 전쟁 위기를 언급하면서 “수백만이 죽고 전 국토가 초토화된 6·25전쟁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38선에서 크고 작은 군사충돌이 누적된 결과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군사 도발을 일삼은 김정일, 그들 부자의 어떤 노력을 평가하자는 것인지 이 대표는 설명해야 한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을 그렇게 규정하면 김일성의 남침에 면죄부를 주는 역사 왜곡이 된다. 그는 지난해 7월엔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는 낫다”고도 했다. 평화로 가장한 전쟁 세력에 이용당하기 딱 좋은 인식이다. 그래서일까. 이 대표가 선택한 비례대표 위성정당 선거연합엔 진보당이 한 축을 이룬다. 민주당이 ‘불평등한 한·미 관계 해체’와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을 주장하는 이들과도 손을 잡은 것이다. 이 제휴로 반미를 외치는 이들이 손쉽게 국회에 입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과연 그것이 철통같은 한·미 동맹을 중시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이뤄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일까.   이제 심판의 계절이다. 대한민국을 지키고 번영을 다져야 한다는 마음속 지향점은 모두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건국전쟁’이 되살려낸 치열했던 건국사의 바람도 그러할 것이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2024.02.22 00:45

  • [이상언의 시시각각] 이강인 공격, 더 해야 합니까

    이상언 논설위원 에릭 칸토나라는 축구 선수가 있었다. 프랑스 국적인데 선수 전성기를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보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서 등 번호 7을 달고 뛰었다. 그 숫자는 맨유의 에이스를 상징한다. 베컴과 호날두가 7번이었다. 칸토나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나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1992년에 맨유에 입단해 두 시즌 연속(92∼93, 93∼94)으로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런데 95년 1월에 경악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크리스털 팰리스와의 경기 중에 상대 선수 엉덩이를 고의로 걷어차 퇴장당해 그라운드 밖으로 걸어나가다가 갑자기 관중석으로 돌진해 한 남성에게 이단옆차기를 날렸다. 거친 경기 스타일로 악명을 떨쳐왔지만 관중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장면이 그대로 중계 카메라에 잡혔고, 다음 날 영국 신문 1면에 점프 발차기 사진이 실렸다. 태권도의 날아차기와 유사한 몸놀림이었는데, 영국 언론은 ‘쿵후 킥’이라고 표현했다. 관중이 칸토나 가족을 모욕하는 야유를 한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  「 모두가 손흥민·임영웅일 수 없어 잘못에 책임 묻는 게 선수 보호 언론도 역적 만들기는 자제해야 」    잉글랜드 축구협회(FA)는 칸토나에게 9개월 출장 정지를 명령했다. 중징계였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여론이 일자 알렉스 퍼거슨 당시 맨유 감독이 “축구 선수도 어머니 들먹이는 욕설에는 화가 나는 보통 사람일 뿐”이라고 감쌌다. 칸토나는 그해 말에 그라운드로 돌아와 맨유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칸토나가 맨유에 있던 5년 동안 팀이 네 차례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이 됐다.   스포츠계에는 ‘악동(brat)’이라 일컬어지는 선수가 많다. 다 큰 어른인데도 그렇게 불린다. 테니스 시합에서는 화를 못 이겨 라켓을 던지거나 부러뜨리는 선수가 자주 나타나는데, 1980년대에 윔블던 대회와 미국오픈에서 자주 우승한 존 매켄로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심판 판정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때로는 욕설을 해 물의를 빚었다. 선수 시절 내내 문제를 일으켰지만 코트 밖으로 내몰리지는 않았다. 나름 팬도 많았다. 그의 이름이 1999년에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스포츠 스타 인성 논란의 선두에는 타이거 우즈가 있었다. 다른 선수들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다. 안하무인이었다. 2009년에 터진 성 스캔들은 엽기에 가까웠다. 그 이후에도 약물중독 문제가 불거졌다. 산전수전을 겪어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에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는 악동이었을 때도 구름처럼 많은 팬을 몰고 다녔다. 그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뛰어난 선수이기 때문이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가 인격까지 훌륭하면 좋겠지만 모두가 손흥민이나 임영웅이 될 수는 없다.   국가대표 축구팀의 아시안컵 준결승 직전 분란에 대한 첫 뉴스가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특종 보도를 한 영국 매체의 기사에는 이강인의 ‘주먹질’은 없었다. 대한축구협회 관계자 말을 인용한 국내의 후속 보도에 주먹이 등장했다. 이강인 선수는 손흥민 선수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축구협회는 진상을 확인하고 알리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럴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선수 사이에 폭력 행위가 있었다면 그에 따른 처분이 필요하다. 이강인 선수를 향해 다른 선수가 욕설에 가까운 험한 말을 한 것이 신체적 마찰을 불렀다는 말도 돈다. 이 역시 사실이라면 징계감이다. 잘못에 대한 책임이 분명해야 앞뒤 분별없는 여론 재판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다. 그게 선수를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언론도 문제다. 포털에 많게는 하루에 1000개 넘는 이강인 선수 관련 기사가 게재됐다. 과거와 가족까지 겨냥했다. 스물세 살 선수가 만고의 역적이 됐다. 칼럼니스트 노정태씨는 최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썼다. ‘배우나 운동선수 모두 엔터테이너다. 그들이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면 되지 그들 자체를 엔터테인먼트로 즐기지는 말자.’ 동의한다.  이상언 논설위원

    2024.02.21 00:44

  • [서경호의 시시각각] 출산 지원, 현금보단 기업문화부터

    서경호 논설위원 설 연휴 전에 부영그룹이 직원 자녀 1인당 1억원의 출산장려금을 발표해 화제가 됐다. 연년생 자녀를 출산한 세 가족과 쌍둥이 자녀를 출산한 두 가족에게 각각 2억원을 주는 등 모두 70억원을 화끈하게 쐈다. 이중근 부영 회장은 예전에도 통 큰 증여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여름에는 전남 순천의 고향 주민과 초·중·고 동창들에게 최대 1억원씩을 증여했다.   출산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인 이 나라에서 기업이 앞장서 출산 지원책을 내놓은 건 박수받을 일이다. 그런데 부영이 출산장려금 면세를 제안한 대목에선 머리가 복잡해졌다. 부영의 출산장려금을 증여로 보면 돈 받은 임직원이 10%인 1000만원의 세금을 내지만, 근로소득으로 보면 소득세 누진세율 구간이 높아져 세금이 늘어난다. 연봉 7000만원 직원이 1억원의 출산장려금을 받으면 3800만원의 세금을 더 낼 수 있다.     ■  「 부영 1억 출산장려금 세금 논란 면세 위한 세법 개정은 신중해야 기업 육아휴직 비율부터 공시를 」    기껏 출산장려금을 줬는데 세금으로 뭉텅이가 빠져나가니 받는 직원이나, 주는 기업이나 속이 쓰릴 거다. 기재부의 첫 반응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일단 실태조사를 해보겠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설 연휴 직후인 13일 부산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기업의 자발적인 출산 지원 활성화를 위해 세제 혜택 등 다양한 지원 방안을 즉각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사흘 뒤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출산지원금에 대해 기업과 근로자에게 추가적인 세금 부담이 없도록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전향적인 입장을 밝혔다.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형평성에 어긋난다. 부영처럼 억대를 나눠줄 수 있는 대기업은 많지 않다. 포스코·금호·유한양행 등 일부 대기업만 출산 축하금을 준다. 중소기업을 포함해 출산장려금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의 박탈감만 커질 수 있다. 이미 있는 비과세 혜택도 제대로 못 누리는 이가 많다. 현재 기업이 근로자와 배우자의 출산이나 6세 이하 자녀 보육을 위해 지급하는 수당은 연간 240만원까지 비과세다. 하지만 2022년 근로소득 중 비과세 출산·보육수당을 신고한 근로자 1인당 평균수당은 67만9000원이었다. 기업의 출산·보육수당을 받는 이조차 비과세 혜택의 4분의 1만 누린다.   둘째, 세제를 이런 식으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즉석에서 고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아무리 대통령 지시가 있었더라도 충분히 검토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래도 늦지 않다. 근로소득으로 보되 분할과세해 직원 세율을 낮춰 주고, 기업도 법인세 감면을 받게 해주거나 출산·보육수당의 비과세 한도를 높여 주는 방안이 흘러나온다. 어떤 식이든 감세는 정부가 할 일을 기업에 넘기는 게 본질이다. 출산지원 정책을 정부보다 기업이 더 잘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시라. 기재부는 1년에 한 번씩 세제개편안(세법개정안)을 모아서 발표해 왔다. 전체적인 세제의 큰 틀에서 세금을 결정하라는 취지라고 생각한다. 요즘 재정이 빠듯해서인지 세금으로 생색내는 정책이 너무 많다. 세수 감소가 크지 않다고 기재부는 주장하지만, 글쎄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지금 여유 부릴 때는 아니다. 발부터 뻗고 누울 자리를 만드느라 고생이 많다.   셋째, 출산 인센티브가 될지 불확실하다. 부영은 2021년 이후 자녀를 출산한 직원에게 줬다. 기존 출산의 축하금 성격이다. 미래의 출산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 투입한 만큼 효과가 있을지는 모른다.   현금 지원도 좋지만 우리 기업이 출산과 육아에 친화적인 기업 문화를 만드는 데 더 신경썼으면 한다. 눈치 안 보고 남성도 육아 휴가를 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출산과 육아 후 복귀하는 직원이 주요 업무에서 소외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육아휴직자 비율을 기업별로 공시해 출산·육아 친화경영을 향한 선의의 경쟁을 하게 하면 어떨까. 2017년 30대 그룹 중 육아휴직자 비율이 가장 낮았던 부영이 지금은 얼마나 개선됐는지도 문득 궁금하다. 서경호 논설위원

    2024.02.20 00:41

  • [최현철의 시시각각] 기억에 오래 남을 졸업식 축사

    최현철 논설위원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모어하우스 칼리지는 흑인운동의 대부 마틴 루서 킹 주니어와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의 모교다. 2019년 5월 이 학교 졸업식에 투자회사 비스타 에쿼티 파트너스의 CEO 로버트 스미스가 나와 축사를 했다. 당대 흑인 중 가장 부자가 흑인 학생이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학교에서 성공 스토리를 전해 주는 구도는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연설은 파격이었다.   2019년 애틀랜타 모어하우스 컬리지 졸업식에서 로버트 F 스미스가 축사를 하고 있다. 그는 연설 도중 졸업생들의 학자금 대출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파격 선언을 해 학생들의 환호를 받았다. 연합뉴스 “여러분 버스에 연료를 조금 넣어드리겠습니다. 우리 가문은 자금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학자금 대출을 없애기 위해서요.” 사전에 아무런 언질도 없이 나온 학자금 상환 깜짝 발표에 졸업식장은 감격과 환호에 휩싸였다. 스미스의 연설은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졸업식 축사로 꼽힌다.   ■  「 이효리 연설, 형식 파괴로 화제 윤 대통령 축사 중 졸업생 항의 ‘입틀막’ 퇴장 장면 오래 기억될 듯 」  매년 미국 대학 졸업식 연단에 선 유명 인사들의 축사가 여론의 주목을 받곤 한다. 2005년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에서 한 연설도 그중 하나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가 대학 자퇴”라고 말했지만 “초심을 잃지 말고 우직하게 나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말로 졸업생들을 격려했다. 『해리포터』를 쓴 작가 조앤 롤링의 2008년 하버드대 축사도 유명하다. 연간 수천억원의 인세를 받는 그가 “실패하는 게 두려워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실패”라며 실패의 미학을 역설했다. “C학점 받은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섰다”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남부감리교대(SMU) 연설이나, 배우 로버트 드니로의 “여러분은 해냈습니다. 그리고 X됐습니다”라고 한 뉴욕 예술대 연설처럼 유머 넘치는 연설도 있다. 한국에서는 좀 다른 역사가 있다. 1970~80년대 국내 대학은 시위가 일상이었다. 졸업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7년 서울대 졸업식에선 교육부(당시 문교부) 장관이 연단에 오르자 졸업생들이 집단 퇴장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서울대는 외부인 초청을 중단하고, 행사 이름도 학위 수여식으로 바꿨다. 학위증서와 상을 받는 몇몇 대표를 제외하곤 교정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졸업식을 대신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울대 졸업식에 가면서 문화는 다시 바뀌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울대에서 연설했고,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나 최재천 교수처럼 유명 동문의 연설도 회자한다. 가수 이효리가 2월 14일 서울 성북구 국민대학교에서 열린 '2023학년도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하던 도중 자신의 히트곡 '치티치티 뱅뱅'을 부르고 있다. 이효리는 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 연극영화전공 98학번으로 지난해 9월 국민대 축제에도 깜짝 방문한 바 있다. 뉴스1 올해 졸업식 시즌의 최대 화제는 가수 이효리의 국민대 연설이었다. 이 학교 98학번인 이효리는 “인생은 독고다이다 하시면서, 쭉~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며 거침없이 속어를 썼다. 또 자신의 노래 ‘치티치티 뱅뱅’을 부르며 춤으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현역 시절부터 연예계 공식을 따르지 않았던 자신의 스타일처럼 투박하고 형식을 깬 연설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지난 16일 또 한 번 화제의 졸업식 축사가 나왔다. 윤석열 대통령의 KAIST 연설이다. 윤 대통령 연설 도중 졸업생 한 명이 일어나 “생색내지 말고 R&D 예산 복원하십시오”라고 외친 것이다. 그러자 순식간에 경호원들이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들어 내쫓았다. 2월 16일 오후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한 졸업생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항의하다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하고 있다. 이 졸업생은 윤 대통령 축사 도중 일어나 삭감한 R&D 예산을 돌려놓으라고 외쳤으며, 곧바로 경호원들이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들어 행사장 밖으로 끌어냈다. 뉴스1 쫓겨난 학생은 녹색정의당 대변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학위를 받고 졸업식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갑작스러운 연구개발(R&D) 예산 14% 삭감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KAIST라는 점도 달라질 바 없다. 멀리 떨어져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대통령 행사에서 이런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경호의 원칙을 체감했다. 학생이 일어서기 직전 대통령이 하던 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십시오.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제가 여러분의 손을 굳게 잡겠습니다”는 것이었다. 과감하게 도전했지만, 손발과 함께 입도 잡혔다. 소란은 10여 초 만에 끝났고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졌다. “과학계의 퀀텀 점프를 위해 예산을 대폭 늘리겠습니다.” 이날 연설은 말과 현실의 부조화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최현철 논설위원

    2024.02.19 00:42

  • [강주안의 시시각각] 추미애·최강욱의 반전

    강주안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에서 여한 없이 권력을 행사한 사람을 꼽으라면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최강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빠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검찰총장이던 윤석열 대통령 때리기에 앞장섰다. 그러나 유효타가 드물어 오히려 윤 대통령을 돋보이게 했다는 평을 들었다. 추 전 장관은 되려 문 전 대통령에게 문책성 경질을 당했고, 최 전 의원은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주도한 수사로 의원직을 잃었다.  ━  '고발사주' 사건서 뜻밖 역할 기여   성과가 의욕에 못 미쳤던 두 사람의 공격은 의외의 지점에서 폭발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기소한 손준성 대구고검 차장검사가 지난달 31일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것이다. 추 전 장관과 최 전 의원이 손 검사장 수사를 이끌진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손 검사장은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이던 2020년 4월 최 전 의원과 유시민 작가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고발장을 검사 출신인 김웅 국민의힘 의원에게 제공한 혐의를 받았다. 이른바 ‘고발 사주’ 사건이다. 이 고발장엔 윤 대통령 부부와 한 위원장이 피해자로 적시됐다. 2020년 7월 국회에서 반갑게 인사하는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최강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연합뉴스] 수사 과정에서 최 전 의원의 생일이 결정적 단서로 떠올랐다. 법원은 최 전 의원의 주민등록상 생일이 5월이지만 일부 법조인 인물정보에 3월로 기재된 사실에 주목했다. 손 검사장이 보낸 고발장에 기재된 ‘피고발인 최강욱’의 생년월일은 5월이 아닌 3월이었다. 고발장 전송 1시간 40분 전쯤 손 검사장의 부하 검사가 해당 인물정보 사이트에 접속한 사실이 드러났다. 생일이 두 개로 혼재한 최 전 의원 인물정보가 손 검사장을 궁지로 몰았다. 추 전 장관은 최 전 의원처럼 사건 당사자는 아니다. 한데 요즘 검찰 안팎에선 2020년 1~2월 추 전 장관이 단행한 검찰 인사가 회자한다. 2019년 12월 조국 전 장관이 전격 기소된 직후 윤 대통령 측근을 일제히 좌천시켰다.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이던 한 위원장은 부산고검 차장으로 갔다. 검찰총장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정보 책임자로 법무부는 손 검사장을 낙점했다. 한 전직 검찰 간부는 “범죄정보 책임자 인사를 할 때는 검찰총장의 의중을 반영하기 위해 법무부 검찰국장과 대검 기획조정부장이 사전에 긴밀히 상의하는 게 관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당시는 문재인 정부에 반기를 든 검찰총장 고립이 인사의 목표였다. 손 검사장은 윤 대통령이 선호하는 특수통이 아닌 데다 근무 인연도 별로 없어 법무부가 안심하고 인선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렇다면 왜 손 검사장은 법무부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을까.   “당시 인사에서 추 전 장관 측이 윤 대통령과의 관계만 집중적으로 살피면서 한 위원장 부분을 간과했다”는 게 또 다른 전직 검찰 간부의 해석이다. 손 검사장은 한 위원장과 같은 시기 대검에 근무했고, 둘 다 대검 정책기획과장을 지낸 인연이 있다. 윤 대통령 무력화에 골몰했던 추 전 장관이 정작 정보 책임자를 놓쳤다는 하마평이 나왔다. 덕분에 윤 대통령은 천군만마를 얻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상황이 반전됐다. 추 전 장관이 결과적으로 묘수를 둔 모양새가 됐다.  ━  검찰 견제 가능성 보여준 공수처    ━  지난 과오 극복할 2대 처장 기대   추 전 장관과 최 전 의원이 뜻밖의 기여를 했지만, 실세 검사 관련 사건이 폭발력 있는 1차 결론에 다다르는 과정에 공수처 역할이 컸다. 검찰이 수사를 맡았다면 핵심 간부를 이 정도로 추궁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 정부 출범한 공수처는 ‘야당수사처’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정권이 바뀌어 야당이 여당이 되고 나니 핵심 권력을 견제한 결과로 이어졌다. 비록 여야 합의를 짓밟고 졸속으로 출범시킨 기구라 해도 살아있는 권력을 견제하면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김진욱 초대 처장 퇴임 후 한 달 가까이 후임자가 없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정부 때 공수처장을 정권 뜻대로 고를 수 있게 만든 민주당 덕분에 현 정부는 부담도 적다. 윤 대통령이 임명할 2대 공수처장의 면모가 궁금해진다.  관련기사 [강주안의 시시각각] 읍소 대상이 된 제2부속실 설치 [강주안의 시시각각] 모비딕은 잠시 잊자 너무 높게 지은 아파트 위쪽 싹둑 자른다는데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의 시선] 양승태·김명수의 실패를 극복하려면 0.0007% 대 100%…숫자로 따져봤다, 장관 문책해야 하는 이유 [강주안의 시선]강주안 논설위원

    2024.02.16 00:55

  • [김현기의 시시각각] '사과'의 세가지 유형

    김현기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KBS와 특별대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설 연휴 기간 장안의 화제는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됐다. 윤석열 대통령-KBS 대담, 그리고 클린스만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이다.  관점과 가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두 화제를 관통하는 공통 배경 키워드는 '사과 없음' '유효슈팅 없음' 아니었을까.  김건희 여사 가방 수수에 대해 이렇다 할 사과 없이 '아쉽다'로 일관한 윤 대통령의 태도에 국민들은 아쉬워했고, 역대급 졸전에도 활짝 웃으며 한마디 사과 없이 미국으로 떠나버린 클린스만의 역대급 멘털에 국민들은 기가 막혀 했다.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을 마친 위르겐 클린스만 축구 대표팀 감독이 지난 8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서 취재진에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국민은 상대방의 사과에 유독 예민하다.  상대방의 잘못된 행위보다 사과하지 않음에 더 화를 낸다. 반대로 무작정 차선에 끼어든 차량이 비상등이라도 한번 켜 주면 마음이 스르르 녹는다. '아임 소리' '스미마셍'을 입에 달고 사는 미국·일본 같은 나라와는 다르다.      그런 현실에서 정치인들의 사과를 분류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일본'형. 해도 한 것 같지 않은 사과다. 마지못해 사과해 놓고 바로 뒤집는다. 그 대표적 인사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다. 그는 지난 8일 항소심에서 자녀 입시 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실형을 받았다. 1심과 같다. 법원은 그 이유에 대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 전 장관은 "이미 15차례 이상 대국민 사과를 했다"고 반박하지만, 범죄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과는 '진지한 반성'이라 보기 어렵다는 게 법원의 결론이었다. 그 와중에 조 전 장관은 지난 13일 검찰 정권을 심판하겠다며 신당을 창당했다. 상식적인 국민은 이런 걸 두고 반성이나 사과라고 하지 않는다. 말로는 죽창가를 외치면서 하는 행태는 사과와 말 뒤집기를 반복하는 일본과 빼닮았다.   지난 13일 신당 창당을 선언한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14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지 민주의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하고 있다. 뉴스1 둘째는 '자판기'형.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생각되면 체면 가리지 않고 몇 번이고 "아무튼 사과한다"고 한다. 준연동제 비례대표제 유지를 밝히면서 무려 네 번이나 고개 숙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대표적이다. 다만 영혼 없는 사과란 지적을 받는다. 예컨대 "'준 위성정당'을 창당하게 된 점을 사과드린다"고 한 부분. 사과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표는 미래의 행동을 미리 사과했다. 사과할 미래라면 지금 안 하면 된다. 그러니 며칠 안 가 "내가 사과한다고 하니까 진짜 사과한다고 생각했느냐?"란 말이 튀어나올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5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준연동제 비례대표제를 유지하기로 했다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마지막은 '트럼프'형. 끝까지 버티고 논점을 흐린다. 그는 4년 재임 중 3만573번의 거짓말을 했지만(워싱턴포스트 조사), 공식 사과는 한 건도 없었다. 부적절한 언행이 들통나도 그걸 인정하는 순간 법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경험칙 때문일 게다. 그러다 보니 지지자는 물론이고 반대론자, 언론들도 트럼프에겐 아예 사과라는 걸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게 됐다. 하지만 당장은 쾌재를 부를지 모르나 결국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되는 사태가 생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77)이 지난 10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콘웨이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자를 가리키는 특유의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아, 드물지만 또 하나의 사과 유형이 있긴 하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제가 잘못했다"고 나선다. 손흥민·이강인·김민재 같은 우리 축구선수들이다. 이런 이들 때문에 그나마 살맛 나는 세상이다.   "승자는 실수했을 때 '내가 잘못했다'고 사과하지만, 패자는 '너 때문이야'라고 탓한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지만,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J 하비스의 말이다. 윤 대통령은 승자일까, 패자일까. 눈을 밟고 있는 걸까, 녹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어떤 보수 원로 언론인은 최근 "치밀하고 계획적인 좌파가 과연 사과로 넘어갈 것 같은가. 2막으로 넘어갈 게 뻔하다"고 주장했다. 맞다. 좌파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 같은 보통 국민 상당수는 적당히 사과했다면 1막으로 수긍했을 것 같다. 어찌 됐건 이제는 윤 대통령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주길 원하기보다, 그저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을 더 원하는 단계까지 왔다고 본다. 강요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나저나 클린스만은 결국 사과를 할까? 김현기 논설위원

    2024.02.15 00:38

  • [고정애의 시시각각] '건국전쟁'이 말하지 않은 것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영화 ‘건국전쟁’을 보며 문득 공로명 전 외교장관이 전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말년이 떠올랐다.   “이 대통령은 4·19 이후 하와이로 간 다음 뇌일혈로 쓰러져 오랫동안 미 육군병원에서 요양했다. 당시 자주 문병했던 이동진 목사에 의하면 말년의 이승만 박사는 영어를 다 잊어버려 한국어로만 통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영어를 잊어버린 이승만 박사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나의 외교노트』)   이 전 대통령의 영어 구사력은 남달랐다. 당시 외무부가 경무대(지금의 대통령실)에 올리는 문서를 영문으로 작성했을 정도라고 한다. 건국과 한국전,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으로 이어진 격랑의 외교 속에서도 이 전 대통령의 영어는 빛났다. 그런데 영어를 잊었다? 하기야 우린 건국(nation building) 과정에서 그의 분투를 잊었다.     ■  「 자학적 사관의 콘텐트 양산되던 중 이승만의 공 크게 부각한 다큐 인기 역사는 선악문제 아냐, 진영화 곤란 」  사실 이 전 대통령의 마지막에 대한 동시대 지식인들의 기억은 썩 좋지 않다. 당시 현장 기자였던 조용중은 ‘이승만 12년 왕조’라고 했다. 1954년 4사5입 개헌부터 59년 조봉암 사형으로 이어진 50년대를, 이승만 독재를 지탱하기 위한 격동의 연속이라고 봤다. 다만 조용중은 4·19 직후 부산 데모대를 지켜보던 야당 의원이 “여보, 조 동지, 저건 난동이야. 지금은 아직 이 대통령이 있어야 돼. 학생들이 저러면 안 되는데…”라고 말했을 때 아무런 이론(異論)을 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건국 과정의 냉철한 관찰자였던 미국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의 시각도 미묘하다. 리더십은 인정했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반면 이승만은 방향감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하든지 간에, 또 민주주의 수행에 그가 과연 진실성을 갖고 있었는지 의심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리고 그의 경제적 지식 결여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지도자였다. 당시 혼란했던 정세 아래서 철수를 단행한 미국으로선 이러한 인물을 발견한 것이 행운이었다.”(『소용돌이의 한국정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예상 밖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개봉 열흘째인 전날까지 누적 관객 수는 18만여명에 달한다. 사진은 12일 서울 시내 영화관 매표기. 연합뉴스   통치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 이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적 개념을 지지하지 않았고 행태도 일본 것 그대로였다고 봤다. 정치적 기능과 정신은 조선시대의 현대판이라고 인식했다. 특히 부정부패를 두곤 “당시 다방가에 유포되던 소문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 때 각료 129명 중 재임 중 재산을 늘리지 않은 건 단 두 명인데, 한 명은 어리석을 정도로 정직하고 금욕적이었던 변영태 외무장관이었고 한 사람은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아서 미처 이권에 손을 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건국전쟁’이 다큐멘터리라, 그 내용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엄밀하게 보면 취사선택한 사실의 나열이다. 상당 부분 맥락이 소거된 채다. 덕분에 이 전 대통령의 공은 크게 증폭됐고 과는 크게 축소됐다. 이승만 정권은 놀라운 성취 못지않게 재난적 말로를 보였다. 다큐는 진실의 일부분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더라도 불편하기보단 반가웠다. “(영화판에) 좌파가 99.9%”란 김덕영 감독의 말이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동안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해 자학하는 내용의 콘텐트만 양산됐기 때문이다. 교과서까지 그러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실관람평에서 ‘어디까지 진실인지 혼돈스럽다. 내가 배운 역사와 너무 달라. 진실이라면 교육 당국 사형시켜야 함’이란 글을 봤다. 이해한다. 지금 현대사는 진영전의 무기다. 이 전 대통령의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정당이 원내 1당이다. 그 당의 원내대표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이란 말도 했다. 이승만 정권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기라도 한 모양이다. 역사는 선 또는 악 사이 택일이 아니다. 그사이 어디쯤이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극장 안 곳곳에선 울음소리가 들리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 정상은 아니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2024.02.14 00:34

  • [최민우의 시시각각]김경수는 왜 복권되지 못했나

    최민우 정치부장 설 명절을 맞아 윤석열 정부가 지난 7일 특별사면을 실시했다. 사면 대상에 김관진 전 청와대 안보실장,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최재원 SK그룹 부회장 등이 포함됐다.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살다가 2022년 말 ‘복권 없는 사면’이 됐던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이번에도 복권되지 못했다. 4·10 총선 등 당분간 출마할 수 없다는 얘기다. 야권 일각에선 “똑같이 댓글 사건에 연루됐는데, 김관진은 풀어주면서 김경수는 복권하지 않는 의도는 뭔가. 사면도 여야 차별인가”라는 반발이 나왔다.   드루킹 댓글 조작 혐의로 2021년 7월 26일 구속된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2022년 12월 28일 경남 창원교도소에서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김 전 지사는 당시 사면으로 잔여 형기 5개월은 면제됐지만, 복권은 되지 않았다. 연합뉴스  여권 핵심 관계자의 설명은 이렇다. “사면에 앞서 각계 의견을 듣는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으니, 이번에 누구 좀 사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청원을 받는 거다. 최소한의 의견 수렴 과정이다. 민주당에도 원하는 대상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김경수 전 지사가 포함될 것이라 여겨 법적·절차적 하자 등을 미리 검토했었다. 그런데 민주당이 김 전 지사 복권을 청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뚱맞게 풀어주나.”     ■  「 민주당 요청 없었다는 게 여권 설명 임종석 겨냥한 친명계 맹공도 거세 '이재명 라이벌 죽이기'로 점철되나 」   대신 민주당이 요청한 심기준·박기춘 전 국회의원, 전갑길 전 광산구청장은 모두 사면·복권됐다. 물론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요청이 없더라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핵심 관계자는 “민주당 요청이 없는데 김 전 지사만 콕 집어 복권하면 민주당 분열을 노린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이니, 갈라치기 전략이니 하며 반발만 커지지 않았겠나”라고 반박했다.    여권의 술책일지 모른다. 다만 이재명 대표가 김 전 지사 복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건 맞는 듯싶다. 복권되면 친문 적자로 꼽히는 김 전 지사는 야권 유력 주자로 부상할 공산이 크다. 반대로 복권되지 못하면 그의 피선거권은 2027년 12월까지 박탈된다. 차기 대선은 2027년 3월이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7일 오후 서울 성동구청에서 열린 서울특별시새마을회 제18~19대 회장 이임식 및 제20대 회장 취임식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선 이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다. 그는 본인의 지역구였던 중·성동갑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자 친명계가 기다렸다는 듯 임 전 실장을 맹공했다. 원외 친명 조직인 ‘민주당혁신행동’은 “임 전 실장은 정권교체의 계기를 제공하고 윤석열 정권 탄생에 기여한 인사”라고 포문을 열었고, 이 대표 최측근들도 “이번 총선 목표가 개인의 권력 유지가 아니라면 물러서는 것이 맞다”(윤용조 전 당대표실 부국장), “정권을 빼앗긴 주역이 출마하려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이연희 민주연구원 부원장)라며 가세했다. 임혁백 공관위원장이 두 차례나 “윤석열 정권 탄생에 기여한 이들의 책임 있는 자세”를 강조한 것도 임 전 실장을 겨냥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민주당에서 중·성동갑 후보로 또 거론되는 이는 조상호 당 법률위원회 부위원장이다. 조 부위원장은 대장동 특혜 의혹 재판에서 이 대표의 변호를 맡았다. 임 전 실장과는 지명도 등에서 격차가 크지만 친명계는 “적합도 조사를 돌리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중·성동갑은 전략공천 지역”이라는 입장이다. 또 다른 친명계 인사는 이렇게 말한다. “문명(文明) 충돌은 과장됐다. 솔직히 당에 친문이 더 많은데 어떻게 다 쫓아내나. 대신 임종석은 다르다. 미리 싹을 잘라야 한다.” 이번 민주당 공천의 큰 줄기가 ‘이재명 라이벌 솎아내기’라는 것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뇌물수수·등 혐의 2심 선고 공판을 마치고 취재진 질의에 답하고 있다. 조 전 장관은 1심과 같이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법정구속은 되지 않았다. 뉴스1  김경수·임종석과 함께 이 대표의 대항마로 꼽히는 이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다. 2심에서도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조 전 장관은 12일 문재인 전 대통령을 찾은 데 이어 13일 총선 출마를 공식화할 예정이다. ‘조국 신당’ 등의 형태로 연합비례정당에 합류할 가능성도 있다. ‘정적 죽이기’ 차원에서 보면 조 전 장관 역시 내치는 것이 순리지만 당내 기류는 묘하다. “조국은 유명세만 있지 민주당 내 세력이 없다. 들어와도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진단이다. 이 대표가 조 전 장관을 간택할지도 이번 총선의 숨은 관전 포인트다. 최민우 정치부장

    2024.02.13 00:42

  • [김정하의 시시각각] DJ가 왜 거기서 나와

    김정하 논설위원 긴 목록이 이어지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말 바꾸기 리스트에 또 하나의 굵직한 사례가 추가됐다. 원내 과반 정당의 대표로서 선거제 개편의 열쇠를 쥔 이 대표는 지난 5일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 선거제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연동제의 취지를 살리는 통합형비례정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통합형비례정당이란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사실상 민주당의 위성정당을 만들겠다는 얘기를 에둘러 한 것뿐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월 5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와 위성정당 창당을 선언했다. [중앙포토]   이 대표는 대선후보 시절이었던 2021년 11월 “개혁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당이 정치적 손익을 계산하며 작은 피해에 연연하여 위성정당 창당 행렬에 가담하여 국민의 다양한 정치 의사 반영을 방해하고, 소수정당의 정치적 기회를 박탈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면서 ‘위성정당 방지법’ 제정까지 약속했다. 그랬던 이 대표가 2년3개월 만에 다시 위성정당을 만들겠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  「 위성정당 깊이 반성한다던 이재명 2년여 만에 말바꾸기 사례 또 추가 DJ 명언이 말바꾸기 알리바이용? 」  정치인이 유불리에 따라 말을 달리하는 것을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다만 문제 삼고 싶은 지점은 이 대표가 결정 배경을 설명하면서 “서생(書生)적 문제의식과 상인(商人)적 현실감각으로,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한 대목이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란 표현은 1960년대 6회 국회 때 김대중(DJ) 당시 민주당 의원이 남긴 유명한 어록이다. 정치인은 철학에 기반한 이상을 추구해야 하지만 현실적인 제반 환경도 늘 함께 고려해 움직여야 한다는 취지다.   2022년 1월 25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경기 남양주 유세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으면 상대가 반칙해도 우리는 정도를 갔어야 했다"며 반성 메시지를 내놨다. 당시 그는 "'상대가 반칙했는데 나도 하면 어떠냐'며 (위성정당 창당을) 해서 우리가 국민의 지탄을 받았고, 약속을 어겨 '말만 하고 실천은 안 한다'고 비난받았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그런데 이번에 이 대표의 말 바꾸기에는 상인의 현실감각이야 넘친다고 쳐도 어떤 서생적 문제의식이 담겼다는 건지는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준연동형을 유지했으니 조금이나마 역사의 진보로 봐달라고? 그러려면 위성정당을 만들지 말아야지, 위성정당을 만드는 순간 준연동형은 제도의 취지 자체가 완전히 상실되는 것 아닌가. 이건 마치 소주 2병을 마신 뒤 음주운전 단속에 걸렸던 사람이 4년 뒤 소주 1병을 마시고 또 붙잡혔는데, 지난번보단 혈중 알코올 농도가 절반으로 줄었으니 많이 좋아졌다고 자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대표는 DJ의 이 어록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는 2022년 8월에도 ‘꼼수 탈당’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민형배 의원의 복당 필요성을 강변하면서 “서생적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상인의 현실감각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말 DJ가 그럴 때 쓰라고 한 말이었을까. 당시 민 의원은 ‘검찰수사권 완전박탈’ 법안 통과를 위해 민주당을 위장 탈당한 것이고, 이는 국회법 정신을 모독하고 법규의 허점을 악용한 몹쓸 행위였다. 여기에서 서생ㆍ상인 운운하는 건 황당한 난센스다. 심지어 그 검수완박법이 지금 좋은 평가나 받고 있나?   이재명 대표가 2023년 9월20일 민주당 의원들에게 체포동의안 부결을 촉구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 그는 불과 석달 전엔 국회 연설에서 불체포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 대표는 예전부터 말이 자주 달라진다. 그는 지난해 6월 국회 연설에서 “저에 대한 정치수사에 대해 불체포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석 달 뒤 자신의 체포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민주당 의원들에게 부결을 호소하는 글을 올려 말 바꾸기란 비판을 받았다. 그는 2021년 12월 경북 칠곡에서 “전두환도 공과가 존재한다”고 말했다가 좌파 진영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그러자 이틀 뒤 “전두환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라며 톤을 확 바꿨다. “존경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라고 했다가 “존경한다고 했더니 정말 존경하는 줄 알더라”고 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상황에 따라 이 대표의 말이 뒤집힌 케이스는 수두룩하다.   정치인의 말 바꾸기는 다 사정이 있을 것이고 결국 국민이 평가할 몫이다. 다만 그럴 경우 “말 바꿔서 정말 죄송합니다”는 사과만 하고 끝냈으면 좋겠다. 공연히 DJ 어록까지 끌어와 말 바꾸기에 철학적 분칠을 하는 건 듣기가 영 거북하다. DJ가 말 바꾸기의 알리바이로 쓰라고 남긴 말은 아니잖은가.   김정하 논설위원

    2024.02.09 00:36

  • [이상렬의 시시각각] 정치에 직무유기 책임을 묻자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지난해 말 뉴욕타임스(NYT)의 ‘한국은 소멸하고 있나’ 칼럼은 0.7명대로 떨어진 한국의 저출생 문제를 ‘중세 흑사병’과 비교해 충격을 줬다. 칼럼에서 가장 섬뜩했던 대목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 경고였다. “한국이 유능한 야전군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합계출산율 1.8명인 북한이 어느 시점에선가 남침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2022년 현재 한국군 병력은 50만여 명, 북한군은 128만여 명이다. 우리 병력은 2014년만 해도 63만여 명이었다. 8년 새 13만 명이 줄었다. 인구 감소는 예정된 미래다. 산업 현장은 외국인 근로자로 채운다고 해도 국방은 어떻게 할 것인가. 군의 핵심 대책은 무기와 장비의 첨단화다. 그러나 전쟁은 결국 군인이 한다. 드론과 인공지능(AI)이 잔뜩 동원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병력이 승패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  「 기업 반대에도 중대재해법 확대   개혁신당 고질병 대책 적극 제시   시대적 과제 해법 찾는 정치 돼야 」    한국 정치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위기가 오는 걸 보면서도 대비하지 않고 정쟁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외환위기도 그래서 맞았다. 한국에 신뢰를 잃은 국제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도 여야는 금융개혁법 처리를 기피했다. 대통령 선거 때 노동계 표를 의식해서였다.   그래서 이준석의 개혁신당 정강정책의 문제의식이 반갑다. 우리 사회의 ‘회색 코뿔소’ 같은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경찰, 소방, 교정 공무원이 되려면 남성과 여성 관계없이 병역을 마칠 것을 의무화하겠다”며 ‘여성 신규 공무원 병역 의무화’를 제안했다. 물론 찬반 논란이 뜨거울 사안이다. 그렇더라도 병력자원 급감은 현실이고, 지금이라도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준석은 “개혁신당은 표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미래를 대비해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다. 맞다. 그것이 정치의 도리다.   개혁신당의 1호 정책은 KBS, MBC 등 공영방송 사장 임명동의제다. ‘10년 이상 방송 경력’의 자격 조항도 있다. 방송의 편파성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송 장악을 위해 ‘내 편’을 사장으로 내리꽂는 구태만큼은 청산해야 한다. 공영방송이 집권의 전리품이 돼선 안 된다. 낙하산 사장이 앉은 그 방송을 상대 진영 다수 국민은 불신하고, 방송사 내부에선 진흙탕 진영 싸움이 벌어진다. 언제까지 이런 악습의 반복을 봐야 하는가.   개혁신당 정책 중에는 정치권 행사에 기업 총수들이 무분별 동원되는 것을 막는 ‘떡볶이 방지 특별법’ 추진,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와 책임 및 지원을 규정하는 ‘대통령 배우자법’ 제정도 있다. 시쳇말로 참 신박한 발상 아닌가. 되기만 하면 나라 모습을 보다 선진국답게 만들 수 있다.   기성 정치의 효용은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 불발로 한계에 달한 느낌이다. 많은 산업현장이 열악하다. 영세 사업장일수록 사업주의 각성과 안전조치가 긴요하다. 2022년에만 재해 사망자가 644명이었는데, 60.2%(388명)가 50인 미만 사업장 소속이었다. 문제는 현장에서 법을 지킬 수 있느냐다. 적용 대상 소규모 사업장은 83만여 개, 근로자가 800만 명이다. 한 조사에선 94%가 준비가 덜 됐다고 답했다. 많은 사업주가 처벌의 공포에 떨고 있다. 사장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게 중소 사업장 현실이다. 안타까운 근로자 죽음을 막자는 것이 법 취지지만, 폐업과 해고의 날벼락으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다. 정부와 여당(국민의힘) 책임이 크다. 법 제정 후 3년간 준비를 제대로 안 했다. 그렇다면 야당(민주당)은 역대 최강의 의회 권력을 쥐고서 무엇을 했나. 대비를 소홀히 해 온 집권세력과 예상되는 부작용을 외면하고 유예를 거부한 야당, 양쪽 모두 직무유기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근로자는 회사에서 쫓겨난다. 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마침 총선이 다가온다. 책임 묻기에 딱 좋은 기회다.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2024.02.08 01:03

  • [이상언의 시시각각]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상언 논설위원 “서버에 저장된 전자정보를 탐색하면서 ‘유관 증거만 선별해 복제·출력하고, 혐의 사실과 관련 없는 전자정보의 임의적 복제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위법하다.” 검찰의 삼성바이오로직스 수사가 불법적으로 이뤄졌다고 판사가 지적했다. 이어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압수수색은 위법하고, 위법한 압수수색으로 취득한 증거들 및 이를 근거로 작성되거나 진술한 증거들도 위법 수집 증거에 터 잡아 획득한 2차 증거여서 모두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  「 삼성 수사에 법원이 “법 절차 위반” 법 어겼다니 감찰이나 수사를 해야 대통령에게도 마땅히 물어볼 사안 」    2019년 5월 검찰은 삼성바이오로직스 공장을 압수수색했다. 바닥에서 서버와 노트북 등을 찾아냈다. 그 모든 것이 수사 자료로 쓰였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영장에 적시한 범죄 혐의 관련 부분만 복제 또는 출력해 선별적으로 압수해야 했다. 하지만 검찰은 ‘범죄 은닉’의 증거라며 모조리 압수했다. 일반 범죄 피의자로 예를 들면, 집에서 발견된 노트북의 모든 내용을 검찰이 샅샅이 들여다본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검찰 수사관이 회사나 집에 들이닥쳐 서류와 컴퓨터를 마구 들고나가지만 그것은 쌍팔년도에나 가능했던(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이다. ‘무차별 압수’로 확보한 자료를 수사에 활용하면 검찰이 재판에서 진다. 법원은 ‘위법 수집 증거’ 문제에 예민하다. 검찰권의 무분별한 사용을 그렇게 통제한다.   5일의 삼성 회계 부정 등에 대한 재판에서 법원은 전 삼성 미래전략실 임원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위법 수집 증거로 판단했다. “압수 대상이 아닌 정보까지 영장 없이 취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장주의와 적법 절차의 원칙을 중대하게 위반한 것”이라고도 했다. 영장이 허락한 범위를 넘는 압수였다는 뜻이다.   그제 재판부는 이재용 회장 등 사건 관련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회계 부정에 대한 판단이 검찰과 달랐다. 그리고 검찰이 위법하게 확보했다고 본 자료들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회계 기준에 대한 견해차는 있을 수 있다. 전문가들 의견도 갈린다. 검찰 논리에 앞뒤가 안 맞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회계 부정으로 볼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에 비해 수사 절차의 문제는 분명하다. 수색영장을 내준 법원이 해당 영장의 범위를 넘는 압수였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여러 차례 ‘위법’이라고 했다. ‘적법 절차 중대 위반’이라고도 했다. 국법이 무시됐다는 의미다. 위법 행위를 확인하고 처벌하는 게 검찰의 책무다. 자신들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수사든, 감찰이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이 재판과 관련해 어제 “기소할 때 내가 관여한 사건이 아니다”고 말했다. 군색하다. 그는 문제의 압수수색이 벌어진 시절에 서울중앙지검 3차장으로 지휘 라인에 있었다. 서양에서 ‘검사’라는 직책이 고안될 때 그들의 주요 임무는 법을 무시한 수사와 기소를 막는 것이었다. 그 정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   5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1심 선고도 있었다. ‘재판 개입’에 대한 혐의는 모두 무죄 판결이 났다. 일부 유죄는 행정적 권한 남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지난달 26일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 검찰 수사에서 1심 판결까지 약 6년이 걸렸다. 무리한 수사라는 여론이 법조계에 비등했는데, 결론이 47개 혐의 전부 무죄다. 그래도 검찰 측에선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재판을 다시 해보자며 항소했을 뿐이다. 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의 시작이다.   삼성 수사의 실무 책임자는 주요 국가기관 수장이 됐다. 수사에 참여했던 검사들도 승승장구해 검찰 요직에 있다. 재판 개입 의혹을 수사했던 검사들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자회견이 있다면 마땅히 물어볼 일인데, ‘녹화 대담’으로 대체됐다. 오늘 방송되는 그 대담에 법원에서 뒤집힌 ‘적폐 수사’에 대한 질문이 있었을까? 지켜볼 일이다.  이상언 논설위원

    2024.02.07 00:37

  • [서경호의 시시각각] 일론 머스크의 사외이사 사용법

    서경호 논설위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공통점 하나는 자기가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는 점이다. 잡스는 애플에서, 머스크는 글로벌 결제 서비스 회사인 페이팔의 공동창업자 겸 CEO였다가 해임됐다. 미국 기업 이사회의 독립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곧잘 인용된다. 창업 오너가 자기 회사에서 쫓겨나는 건 우리 기업 문화에선 상상하기 어렵다.     ■  「 돈·마약 친구로 ‘이사회 참호’ 구축 사외이사들은 그를 ‘왕’처럼 느껴 한국도 이사회 투명성 더 높여야 」    한데 우리가 기업 지배구조의 모범으로 벤치마킹해 왔던 미국의 대표 기업도 항상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이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머스크가 테슬라·스페이스X의 전·현직 사외이사들과 돈과 마약으로 얽혀 있다는 내용이다. CEO와 이사회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이사회는 경영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CEO의 마약 투약에 눈감았고, 이사회 회의록에도 관련 지적을 남기지 않았다. 독립성을 자랑하는 미국 기업의 이사회가 왜 그랬을까. WSJ 기사는 이렇게 전했다. “이사들은 머스크의 지근거리에서 누리는 ‘사회적 자본’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부는 자신이 마치 ‘왕’과 가깝게 지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머스크가 ‘왕’처럼 군림했던 모양이다.   머스크의 이사회 운영 방식은 이랬다. 친구들을 이사회에 포진시켰다. 불법 마약 등으로 문제가 된 벤처투자가 친구도 내치지 않고 챙겼다. 이사 보수는 후하게 줬다. 머스크 소유 회사와의 주식 거래로 오라클 창업자인 래리 엘리슨과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차남 제임스 머독 등 전·현직 이사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줬다. 테슬라 주식은 지난 4년간 300% 넘게 올랐다. 이사회는 머스크에게 최대 558억 달러(약 74조원)에 달하는 보수를 주는 데 2018년 찬성했다. 미국 상장사 CEO 보수의 최고 기록이다. 얼마 전 델라웨어 법원이 제동을 걸긴 했다.   외환위기 직후 도입한 우리나라 사외이사제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사외이사 상당수가 바람막이용으로 영입된 ‘관피아’라는 비판이 많다. 가끔 이사회에 참석해 ‘거수기’ 노릇이나 하면서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억대 보수까지 챙긴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사외이사 연봉이 1억원을 넘는 상장사가 삼성전자(1억8127만원), SK(1억6640만원) 등 13곳이다(2022년). 최근 캐나다 호화 이사회로 비난받은 포스코홀딩스 같은 일부 소유 분산 기업의 사외이사는 CEO 추천권을 틀어쥐고 특권층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회사 이사회는 2022년 열 번 열렸다. 사외이사 평균보수가 1억500만원이니 회의 한 번에 875만원을 받은 셈이다.   사외이사 보수가 과하다는 지적이 있다. 고액 연봉과 회의 참석 때 주는 ‘거마비’에, 일부는 골프 회원권 혜택까지 누린다니 ‘황제 사외이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런저런 혜택이 많으니 그 자리를 한사코 유지하기 위해 CEO 눈치를 본다는 시각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외이사 보수는 기업과 이사회가 정할 문제고, 공시해 시장과 여론의 평가를 받으면 될 일이다. 차라리 사외이사 선임 절차의 투명성을 더 높이는 방식으로 유도하는 게 낫다. 최상목 경제부총리가 야인 시절에 공저자로 펴낸 『경제정책 어젠다 2022』에서 주장한 내용인데, 동감한다. 기업들이 내세운 사외이사의 면면과 활동으로 이사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시장이 판단하도록 하고, 기업은 공시된 지배구조 내용으로 경쟁할 수 있으면 된다. 구린 데가 있고 권력 눈치를 많이 보는 기업일수록 검찰 등 권력기관 출신의 사외이사를 선호할 것이다.   『나는 대우조선의 사외이사였다』를 쓴 신광식 박사의 지적처럼 법과 제도만으로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외이사 스스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분명히 알고 자리에 임해야 한다. 사외이사를 하고 싶은 분들은 5년간의 피 말리는 손배 소송을 기록한 이 책부터 읽으시길 권한다.  서경호 논설위원

    2024.02.06 00:36

  • [최현철의 시시각각] 비상상고는 왜 했을까?

    최현철 논설위원 비상상고(非常上告)라는 제도는 확정된 판결에 법령 위반 사안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 활용된다. 검찰총장만 신청할 수 있고, 대법원이 단심으로 결정하는 점도 특이하다.   말 그대로 비정상적인 상황에 사용되기에 현실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2022년 경찰이 폭행사건을 조사하다 피의자와 이름만 같은 엉뚱한 사람의 주민번호와 주소를 조서에 쓴 일이 있었다. 검찰과 법원도 이를 거르지 못해 벌금 70만원이 선고돼 확정됐는데, 벌금 고지를 하는 단계에 가서야 사실이 드러났지만 다른 구제 방안이 없었다. 이런 때 쓰는 게 비상상고다.   ■  「 형제복지원 사건 재조사했던 검찰 손배소송서 피해자들 이기자 항소 명분·실익 없고 피해자 고통만 가중 」   사실관계 오인을 바로잡는 재심과 달리 비상상고는 법 적용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제기한다. 더구나 원래 판결이 피고인에게 불리할 때만 새 판결이 피고인에게 효력을 미친다(형사소송법 447조). 검찰로서는 비상상고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실수를 인정하는 일인데 무죄가 나온 피고인을 추가로 벌할 수도 없으니, 이런 사건을 다시 비상상고할 일은 거의 없다. 문무일 검찰총장(왼쪽 두번째)이 27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만나 증언을 들으며 눈물을 닦고 있다. 문 총장은 “검찰이 인권침해의 실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해 불행한 상황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마음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임현동 기자  2018년 문무일 검찰총장이 형제복지원 사건 판결에 대해 비상상고를 제기했다. 이 사건은 공권력의 방조 또는 적극적인 부추김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불법감금·강제노역·폭행 등 인권 침해를 당한 사안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과거사 사건과 달리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배상 절차가 재심이 아닌 비상상고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인권 침해가 일상적으로 일어난 것은 부랑아를 강제로 수용하도록 한 내무부 훈령 410호(1975년 발효)에 따른 것이었다. 전국 최대 규모인 부산의 형제복지원은 가혹행위와 강제노역의 정도가 심했다. 600명 이상이 석연치 않게 죽었고, 시신은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팔렸다.   경찰이 넘긴 어린이 등 수용자들이 차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1987년 1월 한 젊은 검사가 우연히 강제노역 현장을 목격하고 수사를 시작하면서 실상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검찰 수뇌부가 박인근 원장에 대한 기소를 막았다. 수사 검사가 사표를 내겠다며 버틴 끝에 살인(치사)은 빼고 횡령액을 대폭 줄이는 선에서 타협해 기소했다.  당시 1심 재판부는 박씨의 불법감금과 횡령 등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는 내무부 훈령에 따른 정당한 업무위임이라는 논리로 낮에 벌어진 불법감금은 무죄라고 판단했다. 문제의 훈령은 수사가 시작되자 정부가 급히 폐지했지만, 소용없었다. 대법원은 이른바 ‘낮합밤죄(밤에 문을 걸어잠근 것만 유죄)’라는 희대의 판결마저 뒤집고 불법감금을 모두 무죄라고 봤다. 박씨는 2년6개월만 복역한 뒤 풀려나와 형제복지원을 이름만 바꿔 다시 운영했다.  잊혀 가던 형제복지원의 진상은 피해자 한종선씨가 2012년부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기나긴 논란 끝에 검찰이 재조사를 시작했고, 결국 비상상고라는 보기 드문 카드를 꺼낸 것이다. 대법원도 비상상고 자체는 기각했지만, 판결문에 “헌법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된 사건”이라고 적시해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국가를 상대로 16건의 소송이 시작됐다. 이 중 지난해 12월과 올 1월 말, 두 건의 1심 판결이 나왔다. 승소한 피해자는 39명, 배상액은 180억원이 조금 넘는다. 그런데 법무부가 지난달 첫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나머지 사건도 항소할 것으로 보인다. 국가소송에서 지면 일단 항소부터 하는 그간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 그래야 공무원들이 면책된다는 믿음 때문일까.  (서울=뉴스1) 박정호 기자 =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 관계자 등이 3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 손해배상 소송 선고 공판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1.31/뉴스1  하지만 이 사건은 검찰이 먼저 뼈저리게 반성한다며 비상상고를 했고, 법원도 재판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지만 다른 소송으로 책임을 묻는 게 좋겠다며 판을 깔아준 사안이다. 소송 결과도 기존 판례를 그대로 따랐다. 불법구금 1년당 8000만원으로 정한 배상액은 이미 다른 과거사 사건에서 확정된 위자료 한도를 넘지 않았고, 소송을 제기할 시효가 지났다는 주장을 기각한 논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항소나 상고를 해도 이대로 확정될 게 뻔하다.  법무부는 무엇을 바라고 항소했는지 궁금하다. 정말 판례를 뒤집을 자신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에 벌인 잘못과 비상상고의 취지를 다시 부인하자는 것일까. 명분도, 실익도 없는 항소에 피해자들만 고통스러울 뿐이다.  최현철 논설위원

    2024.02.05 00:34

  • [강주안의 시시각각] 읍소 대상이 된 제2부속실 설치

    강주안 논설위원 한 유튜브 채널이 목사를 앞세워 김건희 여사를 함정 취재한 영상 중 대북 관련 발언에 놀랐다. “적극적으로 남북문제에 나설 생각”이라는 얘기를 듣고 있으니 평소 이상하게 생각했던 두 가지가 떠올랐다. 하나는 대북 문제. 윤석열 정부는 대북 정책이 진공에 가깝다. “도발하면 강력히 응징하겠다”는 경고만 반복한다. 보수 정부마다 북한과 불편하긴 했다. 그러나 개성공단에서 돌연 철수해 북한 뒤통수를 강타한 박근혜 전 대통령조차 한동안 북한에 공을 들였다. 지금도 우리 모르게 퍼스트레이디 주변에서 남북문제 구상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영상으로 확인됐다. 미국 주간 타임지는 24일(현지시간) 김 여사의 디올 백 수수 의혹을 보도했다. 사진 타임지 캡처  ━  당초 내조에 전념하겠다며 폐지   또 하나는 제2부속실 문제. 영상의 촬영 시점은 정부 출범 100일을 갓 넘긴 2022년 9월이다. 이미 폐지된 제2부속실이 여전히 화두일 때였다. 김 여사가 대선 직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한 기자회견의 후속 조치로 제2부속실은 폐지됐다. 당선되자 반론이 나왔다. 정상적인 대통령 부인 역할을 위해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 무렵 한 여권 관계자는 “김 여사가 제2부속실 설치를 원치 않는다고 한다”는 뜻밖의 얘기를 했다. 자신을 보좌하는 조직을 마다한 이유가 궁금했는데, 대북 관련 발언에 힌트가 있는 듯하다.  대북 정책을 펼치려면 제2부속실 정도로는 어림없다. 남북이 정상 레벨의 대화를 조율할 때 얼마나 방대한 조직이 동원되는지는 노무현 정부 시절 진행된 대북송금 특별검사의 수사를 보면 안다.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한 김대중 정부의 북한 지원을 수사한 특검팀에 소환된 인물은 DJ 최측근 실세를 비롯해 청와대 수석,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를 망라한다. 김 여사가 제2부속실을 꺼린 이유가 내조 전념보다는 역대 대통령 부인보다 큰 역할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다.  퍼스트레이디가 의전 역할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 역대 대통령 부인에 대한 신문기사를 분석한 2008년 국내 연구에선 1987년 민주화 이후 오히려 대통령 부인의 독자성이 줄고 은둔성과 부정적 이미지가 늘었다는 평가가 나왔다(박재영·윤영민). ‘근래로 올수록 위상이 높아지고 역할이 확대된 미국 영부인들과는 대조적’이라는 분석이다.  대통령 부인이 정부 정책에 참여 폭을 넓히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는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이 알려준다. 백악관에 들어간 그는 대통령 부인과 그 보좌진은 ‘이스트 윙’(동관)에서만 근무한다는 관행을 깼다(『살아 있는 역사』). '웨스트 윙'(서관)에 집무실 설치를 요구해 2층 공간을 확보했고, 제2부속실장 격인 매기 윌리엄스를 비롯해 보좌진을 20명으로 늘렸다. 그는 “정책에 참여하려면 이런 물리적·인적 변화는 필수불가결하다"고 역설했다. 초유의 파격은 미디어와 코미디의 단골 비판 소재가 됐지만, 참모들이 점차 언론으로부터 인정받게 됐다고 회상했다. 백악관을 떠난 지 15년 만에 민주당 지지자들이 퍼스트레이디였던 그를 대통령 후보로 선택한 배경에는 투명성으로 확보한 신뢰가 자리했다.  ━  이젠 리스크 관리차 복원 목소리    ━  투명하지 않은 활동이 위험 키워    윤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1년9개월 사이 달라진 것이 있다. 초기의 제2부속실 설치 목소리가 ‘권유’였다면 지금은 ‘요구’에 가깝다. 시계 몰카 동영상이 한 편뿐일까 불안해하는 여권의 절실함은 읍소 수준이다. 제2부속실이 있다고 리스크가 소멸하진 않는다. 그래도 모든 공식 일정에는 제2부속실 직원이 관여하고 배석하니 일관성 있는 위험 관리가 가능하다. 적어도 지난해 7월 리투아니아 순방 중 벌어진 ‘명품 쇼핑’ 논란은 사전에 경고음이 울렸으리란 게 제2부속실 업무에 정통한 인사의 진단이다. 임기 초 대통령실이 발끈해 강력 대응에 나섰던 ‘김 여사가 경호원 4명을 데리고 청담동에서 명품 쇼핑을 했다’는 가짜뉴스를 연상시킨 그 사건 말이다. 제2부속실이 생겨도 바른 방법만 택한다면 김 여사가 남북 교류 시도를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관련기사 [강주안의 시시각각] 모비딕은 잠시 잊자 “언제 어디서 칼부림 나도 이상할 것 없는 현실”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강주안의 시선] 양승태·김명수의 실패를 극복하려면 [강주안의 시선] 산업재해에 잇단 옐로카드, 그 뜻은? 강주안 논설위원

    2024.02.02 00:38

  • [김현기의 시시각각] 우리는 트럼프타워 회동 가능할까

      ■  「 아베-오바마 치열했던 막전막후 일본은 타워 입주자 분석까지 해 '2기' 준비나선 일, 우리는 뭐하나  」     ━  발끈했던 오바마, 냉정했던 아베    김현기 논설위원 #1 "그는 당선인일 뿐이오. 워싱턴에 미국 대통령은 단 한 명이오." 2016년 11월 8일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일본 정부가 '아베-트럼프' 회담을 모색하자 오바마 백악관은 발끈했다. 당시 관계자 A에게 최근 들은 비화다. 백악관은 격노했지만 아베는 오히려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 그해 9월 아베는 뉴욕에서 힐러리를 만났다. 힐러리 당선 가능성이 80% 이상이란 관료들의 보고를 과신했다. 트럼프의마음을 돌려놔야 했다. 둘째, 아베는 과격한 지도자를 다루는 데 자신이 있었다. "트럼프는 푸틴과 비슷하다. 그런 '원맨 플레이어'는 조기에 구워삶는 게 정답"이라고 했다.  미국 뉴욕주 맨해튼 5번가의 트럼프타워. AFP=연합뉴스     아베의 강공에 놀란 오바마 백악관은 네 가지 조건을 걸었다. ▶워싱턴에선 만나지 말라 ▶1시간을 넘기지 말라 ▶식사는 하지 말라 ▶배석자를 두지 말라. 하지만 아베는 두 개(장소, 식사)는 수용하고, 두 개(시간, 배석자)는 거절했다. 이런 아베의 계산된 파격에 뉴욕 트럼프타워 입구에 마중 나온 트럼프의 장녀(이방카)와 사위(쿠슈너)는 극진한 환대로 호응했다. 당시 이방카·쿠슈너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배석자 B의 증언.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베가 이방카에게 '아라벨라(이방카의 딸)'가 피코타로(일본 코미디언)의 노래와 춤을 잘 따라하던데요'라고 말을 건네자 이방카 부부는 너무나 기뻐했다. 그러곤 68층 회담장에 들어서자마자 트럼프에게 '이분(아베)이 제가 그저께 인스타그램에 올린 아라벨라의 피코타로 춤을 보셨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트럼프의 얼굴이 확 펴지더라. 성공을 확신했다." 회동 후 맨해튼 인터콘티넨털호텔 숙소에서 봤던 아베의 의기양양했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지도자의 결단, 관료 조직의 치열하고 촘촘한 서포트가 아베-트럼프 밀월의 시발점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9일만인 2016년 11월17일 뉴욕의 트럼프타워를 찾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트럼프 당시 당선인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그 뒤로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와 사위 쿠슈너가 서 있다. AP=연합뉴스    ━  일본의 '트럼프 2기' 대책은 '이 대신 잇몸'    #2 그런 일본이 '트럼프 2기'를 향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1기 때와 차이가 있다. 전방위 포위 전략이다. 트럼프와 이방카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정보 때문이다. 핵심 참모로 거론되는 오브라이언 전 국가안보보좌관과 친분이 두터운 야마다 전 외무심의관을 석 달 전 주미대사로 보냈다. 원래는 상급자인 사무차관이 가는 자리다. 트럼프가 발탁을 공언한 플린 전 보좌관에겐 40여 차례의 아베-트럼프 회담에 빠짐없이 배석했던 외무성 인사 T가 나섰다. 라이트하이저 전 무역대표부 대표는 기시다 총리의 최측근 인사 K가 맡는다. 다음 달 비공식 접촉에 나선다. 다만 1기 때와 달리 지도자 간 케미는 애매하다. 기시다는 트럼프가 좋아하는 '강한 리더'가 아니다. 트럼프타워를 전격 방문할 스타일도 아니다. 언제까지 총리직을 유지할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일본으로선 이(아베)가 없으니 잇몸(네트워크 총동원)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절박하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국가안보(NSC)보좌관. AP=연합뉴스    ━  우리에겐 아이디어, 파이팅 과연 있나    그런데 정작 일본보다 더 절박한 처지의 우리는 뭘 하고 있을까. 트럼프 측과 끈이 있는 인사들은 전임 정권 사람이란 이유로 내쳐졌다. 하지만 정작 현 외교 라인엔 아이디어와 파이팅은 없고, 복지부동과 엘리트 의식이 넘친다. 발과 머리가 멈춰 서 있는 느낌이다. "트럼프가 돼도 한·미 동맹은 강력할 것"이란 주문만 왼다. 문재인 정부 때도 그런 '희망사고'를 반복하다 국제사회의 외톨이가 됐다. 바이든 정부와 벌써부터 척져선 곤란하지만, 물밑에서라도 2기의 손과 발, 머리가 어디일지 시급히 살피고 준비해야 한다. '이도 잇몸도 없는' 상태에서 넋 놓고 트럼프 2기를 맞았다간 상상을 초월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트럼프 1기 워싱턴에서 매일같이 상상을 초월한 비상식을 겪었기에 하는 고언이다. 다시 돌아가 트럼프타워 회동. 우린 너무 쉽고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그냥 성사된 게 아니었다. 일본은 몇 개월에 걸쳐 뉴욕 트럼프타워에 입주한 고객 명단까지 파악했다. 90%가 변호사였다. 거길 통해 쿠슈너 라인을 개척했다. 샴페인은 저절로 터지지 않는다. 김현기 논설위원

    2024.02.01 00:38

  • [고정애의 시시각각] 윤 대통령 사과할 수밖에 없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대통령의 사과에도 일종의 법칙이 있다. 자신들이 하지 않은 일엔 기꺼이 사과하려고 한다.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선 그 이상으로 사과하길 꺼린다. 대통령하고 가까운 사람과 관련될수록 더욱 그렇다. 마냥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숙여야 한다.    사견 아니냐고? 관련 연구가 제법 있다. 8년 전 ‘위기관리 시 대통령의 사과 유형에 관한 연구’(이정진)란 논문에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대통령은 사태가 심각해도 위기의 본질이 자신과 측근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때는 유사(類似) 사과를 선택하려 하고, 지지도가 높은 때보다는 지지도가 낮고 여론의 비난이 심할 때 책임을 인정하는 경향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의 사과가 사안의 성격과 상황, 지지율의 함수일 수 있다는 얘기다.     ■  「 대통령들, 사과 늦추다 곤란해져 DJ는 아들 건에 세 차례나 사과도 이미 늦어…이제라도 고개 숙여야 」   사례는 많다. 우선 YS(김영삼)와 아들 현철씨 건이다. 정권 초부터 암암리에 제기되던 김씨의 국정개입 논란이 1997년 1월 한보 비리 몸통설과 만나면서 끓어올랐다. 한보 부도 직후 야당에서 “한보의 천문학적인 대출에 민주계의 젊은 부통령이 개입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YS는 “엉뚱하게 현철이 얘기가 왜 나오느냐”고 펄쩍 뛰었다. 국민적 반감은 폭발 국면으로 치달았다. YS는 검찰총장까지 교체해 가며 수사를 지시했고, 결국 검찰이 별건으로 찾아낸 게 YS 대선자금 중 일부가 다른 사람 명의로 예치된 거였다(조세포탈죄). YS는 “아들의 허물이 곧 아버지의 허물”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DJ는 2002년 두 아들(홍업·홍걸)의 금품수수 의혹이 터져나오자 1차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사과했다. 혐의가 짙어지자 2차로 청와대 비서실장이 대독하는 사과문을 냈다.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문구가 있었다. 둘 다 구속된 후엔 직접 카메라 앞에 섰다.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낀다” “국민 여러분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56일간 세 차례 고개를 숙인 셈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30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제2테크노밸리기업지원허브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일곱번째, 상생의 디지털, 국민권익 보호'에서 회의 영상을 보고 있다. 사진기자협회  사과 당시 지지율(리서치앤리서치 기준)은 YS는 10%대, DJ는 38%대였다. 공보처 장관으로 YS와 임기를 같이한 오인환은 “김현철씨가 조세포탈죄로 기소된 건 DJ의 세 아들이 금품수수죄로 기소된 것과 다르다”며 “돈을 밝힌 DJ의 세 아들보다 김씨가 더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국정 개입 문제를 여론이 더 크게 보았기 때문”(『김영삼 재평가』)이라고 말했다. 실제 DJ의 경우 사과 후 아들들 비리 이슈는 수그러들고 대선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MB(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도 용서를 구한 일이 있었다. 사실상 대선을 포기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정도만 임기 말 측근 비리에도 버텼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과의 문턱에 서 있다. 지난해 11월 말 첫 보도 이후 대통령실의 침묵(내지 방치) 속에서 퍼지던 김건희 여사의 디올백 논란이 임계점을 넘어 대통령과 여권 2인자가 충돌하는 사안으로 커졌다. 윤 대통령이 주저하는 사이 김 여사의 처신 문제였던 게 대통령의 국정수행 방식(또는 판단력)에 대한 문제가 됐다. 국민을 가장 앞세워야 할 대통령이 가족을 앞세우느라 국민과 맞서는 모양새가 됐다. 지지율이 내려갔고, ‘설명’이면 됐던 사안이 사과해야 할, 어쩌면 그 이상의 조치가 필요한 사안으로 커졌다. 윤 대통령의 책임이다.      다시 오인환의 글이다. “아들에 대한 수사를 계기로 YS는 가족들과도 편치 않은 입장이 됐다. (중략) 고뇌 속에 YS는 별건 수사 시비에 상관없이 아들을 구속해 법정에 세우는 결단을 내렸다. 냉소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정치 9단의 YS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들까지 희생시키려는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통령은 원래 그런 자리고, 그래야 하는 자리다. 모두 윤 대통령의 입을 주시하고 있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2024.01.31 00:23

  • [서승욱의 시시각각] 윤석열-한동훈 충돌 감상문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여당의 총선 예비 출마자 중에 윤석열 대통령이 아닌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찍은 사진으로 홍보물을 채우는 이가 많다. '검찰총장 윤석열'을 구세주처럼 띄웠던 이들도 "미래는 한동훈"이라며 미련 없이 사진을 바꿨다. 강자 뒤에 줄서기는 여의도, 특히 국민의힘엔 본능 수준의 관성이니 윤 대통령도 "그러려니" 해야 마음이 편하겠다. 어차피 지지율 낮은 윤 대통령 이미지를 씻어내 심판론을 누르는 게 여권의 총선 제1 전략 아닌가. 국민의힘이 목을 맸던 '검사 윤석열'의 자리를 '검사 한동훈'이 전략적으로 메우는가 싶더니 둘 사이에 난데없는 활극이 벌어졌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23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허리숙여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들은 "저게 저렇게 싸울 일인가" 어안이 벙벙했지만, 흥행 요소는 꽤 있었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이란 휘발성 소재, 한 위원장이 캐스팅한 김경율 비대위원의 도발적 대사,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후배… 가장 아끼던 사람에게 바보같이 뒤통수"(채널A 보도)란 선배의 격정적 토로, 전소된 서천특화시장 앞 90도 인사 등이었다. 그러나 흥행 여부나 '약속 대련'의 진위를 떠나 작품성은 실망스러웠다. 정치 거물들의 폼 나는 건곤일척과는 거리가 먼 미숙함과 가벼움, 둔탁함이 곳곳에서 돌출했기 때문이다.      끊어 읽기 랩 방식의 연설 도중 한 위원장이 "우리 국민의힘의 후보로서 김경율이 (정청래 대항마로 마포을에) 나선다"며 손을 함께 드는 첫 장면이 특히 어색했다. 공천 경쟁 와중에 "우리 국민의힘 후보"라니, 민주화 이후 어느 당 대표가 이렇게 담대한 퍼포먼스를 할 수 있었나. 분위기에 들뜬 듯한 초보 대표의 질주는 곧바로 역공을 불렀다.        ■  「 검사 출신 현재-미래권력 간 갈등 서초동식 전술이 정치에서 재연   반정치주의가 낳은 우리의 현실 」  김 비대위원의 명품백 거론이 눈엣가시였던 대통령실은 '사천(私薦)'을 고리로 공격을 개시했다. 이어 대표 사퇴 요구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1일 밤의 '막전막후'를 조선일보는 이렇게 묘사했다. "채널A가 '여권 주류에서 한동훈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대통령도 마음을 굳혔다'고 보도했다. 한 위원장 측은 '용산 핵심 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안'이라고 했다… 한 위원장 측은 사퇴를 요구한 사람이 누구라는 사실을 여러 경로로 언론에 알렸다. 당무 개입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는 사안인 만큼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 측 정면 대응에 격노했다."      그날 밤 양측이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언론에 필사적으로 쏟아냈을 가능성을 거론한 기사다. 특수부 검사들에게 일상화된 언론플레이가 한국 정치의 한복판에서 재연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화재 현장에서의 정치쇼"란 야당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지만 갈등 봉합의 과정 역시 정치 베테랑들이라면 피했을 그림이었다. 검사 출신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갈등은 그곳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29일 오찬을 계기로 일단락됐다.        여권 넘버 1, 2의 격돌뿐 아니라 요즘엔 어디를 가나 검사 얘기가 화제다. 이태원 참사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처리와 관련해 검찰총장을 보는 대통령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도 레퍼토리 중 하나다. 법무부 장·차관 인사를 놓고 "각각 누구는 누구 견제용"이란 해석이 붙는다. 현직 검사가 총선에 뛰어들고, 검사 출신의 출마지가 정치권의 뇌관이다. 방송통신도, 금융감독도 전직 검사가 책임지는 세상이다. 검사들의 약진은 검찰 출신 대통령의 존재와 분리해 생각하긴 어렵다. 하지만 근본적으론 한국 사회 반(反)정치 포퓰리즘의 영향도 있다. 정치가의 기본 소양은 타협과 공존, 갈등관리와 통합인데, 국민 정서는 정치인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무턱대고 새 얼굴과 물갈이에만 열광하는 풍토 속에서 정당은 선거 때마다 하늘의 점지를 받은 누구인가를 찾아내려 한다. 검사 정치의 기회도 열린다.    국민들에게서 신뢰를 잃은 기성 정치인들의 책임이 물론 크다. 하루의 정치 경험도 없는 법무장관의 여당 대표 입성에 속수무책으로 안방을 내준 그들의 무기력함과 무능이 유난히 밉고 야속한 요즘이다.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sswook@joongang.co.kr

    2024.01.30 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