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론] 핵심 광물 전쟁 시대, 한국엔 텅스텐이 있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 핵심 광물 확보 전쟁의 시대에 진입했다. 핵심 광물이란 가격·수급 위기의 발생 가능성이 크고, 위기 때 국내 산업과 경제에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경제안보 차원에서 관리가 필요한 광물을 일컫는 말이다. 탄소 중립형 에너지 체계 수립에 필요한 광물뿐 아니라 반도체, 정보통신(ICT), 우주산업, e모빌리티 등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 첨단산업과 국방 분야의 첨단 무기체계에도 필수적인 자원이다.   미국·유럽연합(EU)·일본 등 주요국이 핵심 광물의 공급망 확보 전쟁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핵심 광물은 다른 광물보다 지역 편중이 심하다. 백금·리튬·희토류·코발트는 상위 3개 생산국의 점유율이 80%를 넘는다.     ■  「 중국산에 밀려 상동광산 폐광 공급망 안정 중요해진 시대에 국내 생산 잘해야 국익에 보탬 」    김지윤 기자 게다가 핵심 광물은 석탄이나 철광석과 달리 제련을 통해 순도를 높인 제품을 교역하는데, 제련 공장이 중국 등 특정 국가에 편중해 있다. 또한 정치 진영 논리와 경제 블록화가 진행되면서 배타적인 경제공동체를 구성하거나 해외 공장의 국내 복귀, 즉 리쇼어링(Reshoring) 움직임이 강하게 나타난 데 따른 글로벌 공급망(GVC) 변화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발달한 제조 기반을 갖춘 주요 국가는 앞다퉈 자원안보 강화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행정명령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만들어 대처했다. EU는 핵심 원자재법(CRMA)으로, 일본은 에너지기본계획에 광물자원을 포함했다. 이들은 세계은행과 함께 탄력적이고 포괄적인 공급망 강화를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한국도 지난해 2월 ‘핵심 광물 확보 전략’을 발표했다. 지난 1월에는 ‘자원안보 특별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공급망 3법’으로 불리는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 개정안, 경제 안보를 위한 공급망 안정화 지원 기본법안, 국가 자원안보에 관한 특별법안이 제정 또는 개정됐다.   핵심 광물 공급망을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방안은 해당 광물을 자국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자원 빈국이라 에너지는 석유·천연가스·유연탄의 경우 전량을 수입에 의존한다. 광물자원의 자급률도 2022년 3.3%에 그쳤다.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자원 중에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자원은 거의 없다.   반도체·항공·방산·자동차·통신·의료 등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산업의 원료로 매우 중요한 전략물자인 텅스텐도 마찬가지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EU·일본과 국제에너지기구(IEA)가 하나같이 텅스텐을 핵심 광물로 분류한다. 그런데 한국은 산화텅스텐의 경우 95%나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원래 텅스텐은 한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다. 1916년 강원도 영월 상동에서 텅스텐 광산이 개발됐다. 1945년 광복 이후 상동광산을 운영한 대한중석은 1950~60년대 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했던 국영기업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막대한 정부 보조금을 받은 중국산 때문에 한국의 텅스텐 수출 경쟁력이 크게 나빠져 1994년 폐광했다. 이후 몇 차례 광업권자가 변경됐으나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하던 중에 2015년 알몬티산업이 상동광산 광업권을 인수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중국 텅스텐이 여전히 국제 광물 시장에서 높은 가격 경쟁력을 갖고 있는데도 한국 텅스텐의 국내 생산 길이 열린 까닭은 무엇일까. 치열한 자원 확보 경쟁, 미래 수요 전망에 기반을 둔 과감한 자본 투자 필요성,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채굴 기술 확보라는 세 박자가 어우러진 결과로 볼 수 있다.   광물 매장량 평가는 가격에 따라 변한다. 상동광산은 단일 광산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되고, 광산 수명도 90년 이상으로 전망된다. 텅스텐을 다시 한국에서 생산하면 자원안보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경제 규모가 세계 13위로 커짐에 따라 텅스텐 개발과 수출 자체로는 국가 핵심 산업이 되기 어렵다. 하지만 텅스텐은 화합물이나 합금 형태로 항공기와 우주선, 전기·전자·통신 장비, 반도체, 첨단 무기, 자동차, 석유화학 공정에 두루 활용된다. 각 산업의 생산 활동이 원활하도록 공급망 안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핵심 광물인 텅스텐 생산이 차질 없이 진행돼 공급망 안보에 기여하길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     

    2024.04.17 00:24

  • [시론] 22대 국회에 ‘선거제도개혁위’ 신설하길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한국정치학회장 향후 20여년간 대한민국 정치의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총선이 끝났다. 승자는 승자대로, 패자는 패자대로 표출된 민의를 좇아 사후 대책 마련에 분주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 정치 제도와 선거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당리당략을 떠나 냉철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가 국민의 손에 남겨졌다.   먼저 과거 몇 차례 선거에서도 나타났지만, 소선거구 제도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로 민의의 왜곡이 심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이번 총선의 지역구 투표에서 민주당의 득표수는 1476만여표(50.5%), 국민의힘은 1318만여표(45.1%)로 불과 5.4% 포인트 차이였다. 그런데 민주당이 적게는 수 백표에서 수 천표 차이로 선거구 의석을 가져가면서 지역구 의석수는 161석 대 90석으로 큰 차이가 났다. 이러한 득표율과 의석수 차이는 승자독식의 소선구제에 기인한다.     ■  「 득표율과 의석수 차이, 민의 왜곡 소선거구제로 정치 양극화 심화 국민적 토론·합의로 해법 찾아야 」    [일러스트=김지윤] 둘째, 한국사회에서 소선거구제는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양당제를 고착시키고, 정치 양극화 경향을 키워왔다. 이번 총선에서도 양당 구조를 바꿔보려던 제3지대 정당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근소한 표심의 차이로도 승리하는 구조에서 선거는 극한 대결로 치닫고 진영 양극화와 갈등이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대결 일변도의 국회가 국민의 의사와 역량을 결집해 미래를 위한 국가 차원의 정책을 추진하길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셋째, 소선구제에서는 지역 이슈가 국가의 핵심 어젠다를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총선에서도 국제정세 변화와 주요 산업의 경쟁력 약화, 북한의 핵무장과 안보 위협, 저출생과 초고령 사회 진입 같은 국가 어젠다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선거판은 내내 상대편을 심판해달라는 읍소에다 특정 동네 상권 부활, 지역 도서관 건립 등 심지어 소선거구 전체도 아닌 읍·면·동 단위의 선심성 정책과 구호로 채워졌다.   한두 동네에서만 몰표가 나와도 선거 결과가 뒤바뀌니 당선이 중요한 후보들은 너나없이 선심성 동네 공약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문제는 이렇게 당선된 정치인들이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해 640조원이나 되는 국가 예산의 향방과 주요 국가 정책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지방선거에나 나올 만한 정책이 총선의 향방을 좌우하고 국회가 제 기능을 하기보다 정쟁과 사적 이익의 장으로 전락하는 것은 큰 문제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도 권력 투쟁에 몰두해 국가 존립이 위협받았던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넷째, 특정 지역에서는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구조여서 각 정당의 공천제도가 무력해지고 특정인의 의지에 따라 공천이 이뤄졌다. 명확한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유력 정치인의 정치 스타일이나 개인의 인기에 의존해 정당이 운영되는 정당의 사인화(私人化)는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   이번 총선 과정을 통해 양대 정당과 국회는 현행 선거법을 제대로 준수할 의지도 없을 뿐 아니라 자기 밥그릇에 해당하는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일에는 무능력함을 재차 입증했다. 선거일 1년 전까지 지역구를 획정해야 한다는 공직선거법 조항은 무시됐고, D-41일에야 선거구가 정해졌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둘러싼 말 바꾸기로 또다시 위성정당이 출현해 비례대표제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이해당사자인 정당과 국회의원이 민의를 충실히 대변할 수 있도록 선거법과 정당법을 개혁할 수 없다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새로운 논의 무대나 외부 기구가 필요하다. 22대 국회가 개원하면 초반에 국회 외부에 가칭 선거제도개혁위원회를 신설해 선거 제도 개혁안에 대한 국민적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행 선거 제도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콘크리트 지지층이 아닌 소수의 부동층을 흡수해 당선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있다. 당선 이후에는 국가 차원의 문제는 뒷전이 된다. 공천권을 쥔 당 대표에 대한 충성을 우선순위에 두는 생계형 정치인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들에게 10년 대계에 해당하는 산업 정책, 백년대계인 민주주의 핵심 제도 설계와 교육 문제를 더는 맡겨둘 수 없는 노릇 아닌가.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화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한국정치학회장    

    2024.04.16 00:24

  • [시론] 저출산과 의대증원 문제, 접근법을 바꿔보자

    좌승희 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출산율 하락과 의대 증원(의사 공급) 문제가 국가적 난제다. 저출산과 전공의 사태를 보면서 필자는 국민소득 2만~3만 달러 수준을 넘나든 지난 20여년간 경제·사회 정책의 맹점들을 새삼 주목한다. 그중에 하나는 소득이 증가할수록 시간의 기회비용이 높아짐에 따라 일상에서 재화나 서비스의 양보다 질을 더 중시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시하는 정부 정책이다. 여기에는 질을 독립적인 수요·공급 대상으로 제대로 개념화하지 못하고 있는 경제학에도 책임이 있다.   저출산 문제를 보면 부모에겐 단순한 자녀 숫자 못지않게 질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부모가 자녀 출산과 양육으로 얻는 행복은 자녀의 수는 물론이고 그 질에서도 나온다. 이 때문에 소득이 증가하고 여성의 경제 활동이 증가해 양육의 기회비용이 높아지면 수와 질에 대한 선택 문제가 생긴다.     ■  「 소득 증가할수록 양보다 질 중요 양 문제에 집착하는 접근은 실패   높아진 국민 욕구에 맞는 정책을 」    [일러스트=김지윤] 경제학 이론과 경험에 따르면 자녀 질(역량)에 대한 수요는 소득증가에 따른 탄력성이 1보다 큰 우등재(소득 증가율보다 수요가 더 크게 증가하는 재화 및 서비스)다. 반면 자녀 수는 대체로 마이너스 소득 탄력성을 갖는 열등재라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그래서 소득 증가에 따라 자녀의 절대 수는 줄어드는 반면, 질에 대한 수요는 소득보다 더 빠르게 증가해 양질의 교육 수요가 늘어난다.   그런데 한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부자로 만든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에 따라 평준화 교육에 치중하고 수월성(秀越性) 교육을 경시해왔다. 질을 중시하는 학부모의 수요 변화에 역행하는 평준화 교육으로 자녀 교육을 하향 평준화시키니 공교육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대학 평준화까지 하고 있으니 하나라도 잘 키워 고소득자 만들겠다는 부모의 자연스러운 욕구가 충족되기 어렵다. 결국 자녀를 과외 등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아 양육비 부담만 더 키운다. 설상가상으로 고질적인 대기업 규제가 넘치고, 성장을 촉진하기는커녕 역설적으로 성장을 제약하는 중소기업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 때문에 고소득 일자리 전망이 안 보이니 양육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아이의 장래마저 불안해져 결혼은 물론 출산 동기를 더 떨어뜨린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아이를 적게 낳되 교육 투자를 많이 해서 최대한 인재로 키워 성공한 우등재로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국가의 경제·사회·교육 정책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아이를 열등재로 만들고, 숫자만 늘리려는 정부의 단선적인 저출산 대책이 효과를 보기 어려운 구조다.   의사 공급 문제도 다르지 않다. 인명을 다루는 의료 서비스는 질적 차이가 크고, 소득 탄력성도 크다. 이 때문에 소득 증가에 따라 고급 의료에 대한 서비스 수요가 빠르게 증가한다. 경제개혁 이론에서는 의사 자격 제도에 따른 진입 규제가 의사의 독점 지대 추구를 조장할 경우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이론은 의사 수가 적어서 생기는 지대와 의사의 실력 차이 때문에 생기는 지대를 구분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이론이다.   고소득 사회일수록 의사의 실력 차이에 따른 지대는 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필요한 인센티브까지 잘못 문제 삼아 의사 수 늘리기에 집착하면, 자칫 의대 평준화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의사 자질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해 과거에 실패한 영국처럼 의료 시장을 더 사회주의화하게 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의대 정원의 합리적 조정과 함께 고도화하는 의료 서비스 수요에 맞춰 다양하게 의과학을 포함한 차별화된 수월성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의료 개혁의 필수 보완과제라 할 수 있다.   의사 공급 문제는 저출산 문제와 연결돼 있다. 미래 직업 전망이 안 좋은 상황에서 부모는 어떻게든 자식을 그 좋다는 의사, 즉 최고의 우등재로 키우려 한다. 사람들이 질적으로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찾아 서울의 ‘빅5 병원’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정부 정책도 이제 의사 수는 물론 최고의 의료 서비스 공급을 균형 있게 살필 때가 됐다.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교육·의료·법률 및 과학·기술 분야 인적자원 시장은 질적 차별화가 심해져 평준화가 독이 된다. 이런 시장에 우등재가 원활히 공급되도록 정책을 펴야 선진국 안착이 그만큼 순조로워질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좌승희 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2024.04.12 00:26

  • [시론] 와지마 아침시장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

    오영환 주니가타 총영사 새해 첫날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노토(能登)반도를 덮친 지진이 10일로 갓 100일을 넘었다. 규모 7.6 강진으로 244명이 숨지고, 주택 7만5000여 채가 피해를 봤다(1일 현재). 화재 소식이 시시각각 전해진 와지마(輪島)시 아사이치(朝市·아침시장)는 폐허로 변했다. 상가 등 약 240채가 소실됐다. 노토반도의 관광 허브인 나나오(七尾)시 와쿠라(和倉) 온천의 22개 여관도 문을 닫았다. 지난달 초 주변을 둘러보니 건물이 기울어지고 벽면에 금이 간 곳이 더러 있었다.     ■  「 일본 노토반도 강진 발생 100일 이시카와현, 창조적 부흥안 발표 ‘과소지역’ 재난극복 새 모델 기대 」    시론 지진의 상흔은 깊다. 아직 피난 주민이 8000명을 넘고, 단수(斷水)된 11만 가구 중 7000여 가구가 여전히 불편을 겪고 있다. 2016년 구마모토(熊本)현 지진 때 44만 가구가 단수돼 3개월여 만에 완전히 복구된 것과는 큰 차이다.   지진은 고령자 중심의 ‘과소(過疎) 지역’에 대한 대규모 자연재난의 파괴력을 보여줬다. 지난 1월 30일 기준, 신원이 공개된 사망자 129명 가운데 65세 이상 고령자가 73%(94명)였다. 피해가 큰 스즈(珠洲)·와지마시, 아나미즈(穴水)·노토정의 4개 지자체 고령화율은 49%로, 전국 평균(29%)을 압도한다. 고령자의 대피 능력은 청장년만 못하다.   이들 지역의 인프라 노후화도 심각하다. 노토정과 와지마시의 수도관 1㎞당 손상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훨씬 웃돈다. 지진에 견디는 주택의 내진화율도 스즈시가 51%, 와지마시가 45%로 전국 평균(87%)의 절반에 그쳤다. 인구 감소로 세수가 줄고 주택 신축·개축 비율이 낮은 것과 연관이 있다. 과소지역을 안고 있는 지자체로서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얘기가 나온다. 2050년 아키타(秋田)·아오모리(靑森)를 비롯한 11개 현의 인구는 2020년 대비 30% 이상 줄어들고, 인구 1만명 미만의 기초단체가 40%를 넘는다(국립사회보장·인구문제연구소).   그래도 지진 피해 지역은 희망을 쏘아 올리고 있다. 와지마시 아사이치의 29개 상점은 가나자와(金澤)시 가나이와(金石)항에 지난달 23일 ‘출장 시장’을 열었다. 빗속에 단골손님 등 1만3000여명이 응원의 발걸음을 했다. 일본 3대 아침시장의 명성이 되살아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듯싶다. 동서고금 가릴 것 없이 시장이 시작이다. 와쿠라 온천에선 공중목욕탕이 다시 문을 열었다. 여관 휴업이 이어지는 와중에 한 줄기 빛이 생겨났다. 나나오시와 아나미즈정을 잇는 노토 철도도 6일 전면 재개됐다. 저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이시카와현은 2032년까지 9개년 계획의 ‘창조적 부흥 플랜’ 중간발표를 했다. 단순 복구가 아니라 인구감소 등에 맞춰 지역을 새로 설계하고, 노토의 매력을 한층 더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선으로 연결된 인프라’에 더해 ‘자립 분산형의 점으로도 꾸려가는 인프라’도 선택지의 하나로 검토하겠다고 한다. “노토의 부흥은 많은 지방이 직면한 과제의 해답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결기가 주목된다. 이시카와현의 부흥 플랜이 과소지역 재해 복구·부흥의 세계적 모델이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지진 발생 직후 기시다 후미오 총리 앞으로 위로 전문을 보냈고, 300만 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했다. 2월에는 주일한국대사관이 주니가타총영사관, 재일 민단(民團) 이시카와 현 지방본부와 함께 나나오시 피난 주민에게 식사 제공 봉사활동을 하고 생필품을 지원했다. 올여름 방학 때는 이시카와현 고교생을 한국에 초청하고, 11월에는 이시카와현에서 문화 공연을 열 계획이다. 지진 피해 지역 주민들의 건투를 뒷받침하는 한국 측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다. 이를 계기로 양국의 지역 교류와 협력이 활짝 피어나길 기대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일 모두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 위기를 겪고 있다. 중층적 교류와 협력 강화, 관광·수학여행 등 상호 방문 확대는 양국 지자체 모두에 활력소가 될 것이다. 지구촌 시대의 주역은 지역이고, 지역 연대와 풀뿌리 교류는 국가 관계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한·일 간 일의대수(一衣帶水)를 가로지르는 가교는 다다익선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영환 주니가타 총영사 

    2024.04.11 02:24

  • [시론] 농산물 고물가 대응, 품목별 매뉴얼 갖춰야

    김상효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동향분석실장 기상 재해와 병충해에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농산물 수급 불안정과 가격 급등으로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농산물 소비자물가지수의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을 보면 지난 2월에는 20.9%, 3월에는 20.5%로 두 달 연속 20%를 넘었다. 1월 대비 2월의 상승률은 5.7%였는데, 2월 대비 3월은 1.3% 상승에 그쳐 다행히 차츰 진정되는 추세다.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농산물 가격 안정 대책들이 점차 효과를 보는 것 같다.   최근 지정학적 리스크, 원자재 가격의 변동성, 기후변화로 인한 농업 생산의 변동성이 확대됨에 따라 우리 농업의 불안정성도 커졌다. 요즘은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다. 지난해 내내 농민들은 냉해·서리·폭염·집중호우·폭설에 시달렸다. 대부분의 농산물 생산은 기후 의존도가 높고, 농산물의 특성상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할 수도 없다.     ■  「 농산물 가격 3월엔 20.5% 상승 복합 위험에 농업 불안정성 커져 인식 바꿔 슬기로운 소비생활을 」    일러스트=김이랑 그래서 농산물 가격이 급등하더라도 생산을 단기간에 급하게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검역 등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외국에서 즉각 수입할 수도 없다. 농산물 공급을 결정하는 기후와 자연조건을 인간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나라에서 농산물 가격 안정은 정부의 최우선 민생과제다.   이번 농산물 고물가 사태는 이달 들어 상당히 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품목을 바꿔가며 고물가 현상은 또 찾아올 것이다. 앞으로 더 빈번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기후 위기 시대에 한국사회는 농산물 고물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첫째, 농산물 물가를 바라보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기후변화와 기상재해로 인해 생산량이 감소하면 가격은 오른다. 생산량이나 공급을 갑자기 늘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격 변동을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농산물은 다른 재화에 비해 구매 빈도가 높고, 가격이 쉽게 확인되기 때문에 물가 체감도가 높다. 하지만, 소비자물가지수 전체에서 농산물이 차지하는 가중치는 1000에 38.4, 즉 3.84% 수준이다. 고물가가 지속하는 기간도 길지 않고 일시적일 때가 많다. 변명 같지만 농업인도 정부도 단기간에 해결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둘째, 구매처를 다양화하고 대체품을 찾는 등 슬기로운 소비생활로 변화를 시도해 볼 수 있다. 인근 전통시장, 하나로마트, 대형할인점, 온라인 쇼핑 등 다양한 구매처의 가격을 일상적으로 비교하면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농산물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전국의 로컬푸드 직매장은 물론 경상북도의 사이소, 전라남도의 남도장터 등 지방자치단체별로 운영하는 쇼핑몰이나 직거래 플랫폼을 이용해 볼 수도 있다. 생산자에게는 유통비 절감, 소비자에게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좋은 품질의 농산물을 구매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정부가 제공하는 농축산물 할인쿠폰도 최대한 활용해 일시적 농산물 고물가 위기를 건너는 소비자의 지혜가 필요하다.   셋째, 불확실성의 시대에 국민과 농업인을 동시에 지킬 수 있도록 관련 연구자들은 미래 농산물 수급에 대한 연구를 선제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제시된 정책 대안이 신속히 실행되도록 정부와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농산물 수급 불안정이 예상되는 품목에 대해 근본적이고 중장기적인 수급 안정 대책을 마련하면 국가 예산 사용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고물가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신속하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품목별 매뉴얼도 준비해야 한다. 품목별로 정교하게 설계된 대응 매뉴얼은 사회적 혼란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고물가 상황에서 대처하기가 가장 어려운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에 집중하는 지원 대책도 철저히 수립해야 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농산물 수급 불안정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각국 정부와 농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농수산물 고물가 상황은 국내산 농산물 소비를 선호하는 국민에게도, 양질의 농산물을 적절한 가격에 판매하기를 원하는 농업인에게도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식량 안보를 지키고 우리의 소중하고 맛있는 농산물을 지키기 위해 일시적 고물가의 고난을 슬기로운 소비 생활로 극복하길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상효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동향분석실장     

    2024.04.10 00:31

  • [시론] 유권자의 확증편향, 결국 대가 치른다

    이호원 경북대 의과대학 신경과 교수 넷플릭스를 통해 2021년 소개된 영화 ‘돈 룩업(Don’t Look Up)’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등 쟁쟁한 스타들이 대거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영화에서 천문학자인 민디 박사는 거대 혜성을 발견하고 이 혜성의 궤도가 지구 궤도와 겹치게 될 것으로 계산한다. 지구와 혜성의 충돌로 발생하게 될 에너지 방출로 지구의 모든 생물이 전멸할 것으로 예측했다. 과학계의 수학적 검증을 모두 끝낸 뒤 이 혜성이 지구와 충돌할 것이라고 공표한다.     ■  「 선거철마다 음모론·양비론 활개 불필요한 사회 분열과 갈등 초래 사실 확인하는 과학적 사고 필요 」    [일러스트=김지윤] 그러나 정치권은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산업계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 언론과 종교계까지 가세하면서 민디 박사를 음모론자로 몰아갔다. 혜성 충돌을 회피할 기회가 두 차례 있었지만, 어이없는 정치적 판단과 산업계의 탐욕으로 황금 같은 기회를 날린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대중은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해도 지구로 다가오는 혜성의 존재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미디어가 만들어낸 혼란스러운 정보로 여론이 분열된다. 결국 지구는 혜성과 충돌해 인류가 멸망한다.   대중은 왜 정보를 왜곡·편취해 받아들이고 싶은 사실만 받아들일까.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원래 가진 생각이나 신념을 강화하려는 경향성을 말한다. 원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모으거나, 어떤 것을 설명·주장할 때 편향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속담에 ‘내 논에 물 대기(我田引水)’ 같은 것이 바로 확증편향이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정보 처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지 편향의 하나로 확증편향을 설명한다. 후방 내측 전두엽 피질은 확증편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뇌는 자신이 믿는 기존 정보에 부합하는 정보의 강도는 강화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강도를 약화해 기존 정보의 강도를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확증편향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 근거 없는 과신을 갖게 한다. 사람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다른 사실을 불신하며, 과학적 사실에 반해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려 하기도 한다. 과학 탐구에서도 확증편향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다.   2002~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의 경우 한국에서 감염자가 발생하지 않자 일각에서는 이것이 한국의 전통음식인 김치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적 인과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과학자들조차 이런 주장에 동참하는 현상을 보였다. 심지어 ‘조류 인플루엔자(AI)’나 신종플루도 막을 수 있다는 무책임한 주장으로 이어졌다. 실험을 통해 김치는 바이러스 감염증의 예방이나 치료에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민족주의에 의한 확증편향이 정상적인 과학 활동을 가로막았다.   선거에서도 확증편향을 관찰할 수 있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유리한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부정하거나 양비론을 펼치고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정치적 양극화가 심각한 상태에서는 이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서로에 대한 의심과 반목의 골이 깊어지고, 정책에 의한 후보자 선택보다는 비방과 흑색선전, 허위사실에 근거한 부정 선거운동이 횡행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사실과 정책을 제시해도 유권자는 올바른 선택을 하기 어렵다.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자가 낙선하면 확증편향적 태도의 영향으로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거 자체가 잘못됐다며 음모론을 제기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선거 관리 절차의 하자나 의혹을 짚어내고 바로잡는 것은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다. 하지만 객관적 근거 없이 불법 가능성이나 막연한 의혹만 제기하는 것은 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하는 선거의 본질적 기능을 훼손하는 행위다. 이 경우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 등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확증편향적 상황일수록 눈으로 보이는 사건이나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적극적으로 자료를 찾거나, 직접 실험으로 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과학적 사고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객관적 사실이 확인되면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오는 10일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다. 총선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유권자들은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어느 때보다 주의하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호원 경북대 의과대학 신경과 교수     

    2024.04.09 00:43

  • [시론] 국회 완전 이전, 선거철 깜짝 공약 안되려면

    하혜수 경북대 행정학과 교수·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 서울 여의도에 있는 국회를 몽땅 세종특별자치시로 이전하자는 공약이 총선 판에 메가톤급 이슈로 떠올랐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국회의 전부 이전과 세종시의 ‘정치·행정 수도’ 완성을 공약하면서다. 민주당은 국회의 세종 이전엔 공감하면서도 선거용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국회의 완전 이전에 기대를 거는 국민도,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갖는 국민도 있을 것이다.   이제 선거 이슈를 떠나 미완에 그친 행정수도 문제를 진지하게 짚어볼 때가 됐다.     ■  「 수도권 과밀과 지방소멸 ‘이중고’   나라 미래 위한 마지막 골든타임 국민투표 등 정치적 부담 각오를 」    [사진 연합뉴스] 우선, 수도권 쏠림의 심각한 양상이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제시할 무렵 수도권 인구는 전체의 47.1%였다. 하지만 지난해엔 과반(50.7%)을 넘겼다. 이대로 방치하면 수도권 과밀과 지방 소멸이라는 이중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지금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골든 타임일 수 있다. 정치·행정 수도의 완성은 그만큼 필요하다.   국정의 비효율도 심각하다. 2019년 국토연구원 용역보고서에 따르면 세종시 행정부처 공무원은 연간 2만회 국회 출장으로 127억원을 길거리에 낭비했다. 출장비는 여비·교통비·시간비용을 합친 금액이다. 더구나 국정 비효율은 경제적 비용에 국한하지 않는다.   국정의 질적 저하도 심각한 수준이다. 코로나19와 복합위기 상황을 겪으며 정부의 대처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창의적 대안을 짜내기 위해서는 얼굴을 맞대고 하는 치열한 집단토론이 필요한데, 고위직 공무원들이 서울 국회 출장으로 한자리에 모이기 어렵다. 이처럼 계량하기 어려운 비용까지 합하면 국정 손실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서울과 지방의 상생이란 측면도 있다. 2002년에는 수도권 집중 억제를 통한 지역균형발전을 강조했다. 자연스럽게 수도권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서울과 세종의 상생을 통한 지역균형발전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서울은 런던·싱가포르·홍콩과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금융·문화 중심지’로 만들고, 세종시는 자족성을 갖춘 정치·행정 수도로 완성해나가는 구상이다. 이렇게 되면 세종의 이득이 서울의 비용이 되는 ‘제로섬 게임’을 면할 수 있게 된다. 도시마다 개성을 살려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자는 전략이다. 물론 세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지는 미지수다.   사실 국회의 전부 이전은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추진했으나 서울과 세종의 상생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20년 11월 민주당은 국회의장실과 본회의장만 남기고 국회를 전부 이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최종 결정된 내용을 보면 국회 상임위원회 18개 중 12개 이전에 그쳤다.   그러는 사이에 세종시는 지역균형발전의 거점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세종시의 전국 비중은 여전히 1%에 미달한다. 세종시의 인구 비중은 0.75%(2023년 말), 국내총생산의 0.67%(2022년 말)에 그쳤다. 입으로는 행정수도 완성을 외쳤으나 실질적인 노력을 쏟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공약의 실현 가능성도 어느 때보다 커 보인다. 이제 세종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다. 민주당도 국회의 전부 이전을 주장해온 만큼 정치적 합의 가능성도 크다. 그래도 과거와 싸워야 한다. 행정수도 이전은 선거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했으나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의구심이 없지 않다.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실과 국회의 이전은 ‘관습 헌법’에 위배된다고 위헌 결정했는데, 이것이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한가지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헌재가 제시한 관습 헌법의 4가지 조건 중에 국민적 합의 부분이다. 국민적 합의가 위헌 여부를 갈랐다는 말이니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 판단을 받아보는 것은 의미 있어 보인다. 총선 이후 국민 여론을 수렴해 개헌 같은 법적 절차도 각오해야 한다. 국민투표를 두려워하면 정치·행정 수도 공약은 물 건너간다. 국회 전부 이전이 진심이라면 정치적 부담은 감수해야 한다. 모든 공약은 신뢰가 기본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혜수 경북대 행정학과 교수·전 한국지방행정연구원장    

    2024.04.04 00:33

  • [시론] ‘기후 유권자’가 투표로 목소리 낼 때다

    김준범 프랑스 트루아공대 교수 인류는 전례 없는 기후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재난도 잦고 피해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기후 위기가 기후 재앙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기후 문제가 더는 미룰 수 없는 중대한 문제인 것은 틀림없다.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보더라도 기후 위기 문제는 이제 후순위로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다.   우리는 ‘기후 유권자’로서 올바른 자세와 방향을 설정하고 이번 총선에서 주요한 의제로 다뤄야 할 것이다. 기후 유권자는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후 변화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는 것이다. 즉, 기후 유권자는 투표 등 정치적 참여에 적극적인 시민들이라 정의할 수 있다.     ■  「 유럽 선거 앞두고 기후이슈 주목 기후 대책 중시하는 후보자 지지 한국도 ‘기후 영향력’ 발휘되길 」    시론 과학적 연구와 데이터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강력한 행동이 없다면 우리는 생태계의 붕괴, 경제적 혼란, 사회적 불안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응해 이제는 기후 정책이 중요한 투표의 기준이 돼야 한다. 또한 정책 입안자들이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실질적인 조처를 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유럽연합(EU)에서도 올해 유달리 선거가 많다. 특히 오는 6월 6~9일에는 유럽의회 선거가 예정돼 있다. 유럽 시민들은 5년마다 유럽의회 의원 720명을 선출하기 위해 투표에 참여한다. 회원국별로 인구에 비례해 의원 수가 할당된다. 지금까지 EU는 국제사회의 기후 위기 대응 과정에서 가장 앞장서서 노력해왔다.   이번 선거에서 기후 관련 정책들은 EU 정치판의 판세를 가르는 주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의 극우 정당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면서 우파 정당들은 기후 대응에 부정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올해 선거 이후 유럽의회의 기후 정책이 퇴보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유럽의 각 정당과 EU 정책 당국자들은 주요 공약과 몇 가지 이슈들에 집중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지난 4년의 녹색 성장 전략에 대한 후속 조치 마련이다. 예컨대 ‘유럽 그린 딜 2.0’은 산업 정책에 더 초점을 맞추고, 앞으로 수십 년간 녹색 및 기후 기술 경쟁에서 EU가 세계에서 주요 자리를 확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근 유럽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 변화는 유럽 유권자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다. 기후 위기에 대해 우려하는 유권자들이 다가오는 유럽의회 선거 결과를 결정할 것이란 점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다. 최근 유럽외교협회(ECFR)는 유럽 11개 국가(유럽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EU 9개 회원국과 영국·스위스 포함)를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했다. 이번 조사는 유럽 유권자들을 기후 변화, 세계 경제 혼란, 이민, 코로나19 대유행,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등 5개 ‘위기 부족(Crisis tribes)’으로 나눠 진행했다.   이 조사에서 지난 10년 동안 큰 위기 중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위기가 기후 변화라는 응답이 나왔다. 기후변화 ‘위기 부족’에 속한 사람들이 다가오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전체 유권자 3억7200만 명 중 7400만 표를 행사할 것으로 예상됐다.   한국의 기후 유권자들도 선거에서 투표를 통해 ‘기후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기후 유권자는 선거에서 기후 정책을 우선순위로 삼는 후보자를 지지함으로써 기후 친화적인 리더십을 선택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재생 가능 에너지의 활용 증가, 탄소 배출 감소, 생태계 보호를 포함한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강력한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 기후 유권자는 SNS, 공공 포럼, 지역사회 모임을 통해 기후 위기 대응의 중요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   기후 유권자로서 우리는 단순히 투표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후 유권자는 기후 위기와 싸우는 글로벌 차원 노력의 중요한 일부다. 기후 유권자의 행동은 단순히 현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나는 기후 유권자다’라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행동을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다. 우리가 모두 기후 유권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면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 더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준범 프랑스 트루아공대 교수     

    2024.04.03 00:42

  • [시론] 헌법 가치에 기반한 ‘새 통일방안’ 제시하길

    조영기 한반도선진화재단 사무총장·전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통일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국민이 주인인 자유로운 통일 한반도’를 주문하자 자유주의 철학을 반영한 새로운 통일 구상을 마련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북한이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한 데 따른 대응 성격이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수정·보완해 자유·민주·인권 등의 헌법적 가치에 기반을 둔 통일 한국을 완성한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의 기념사를 보면 통일 의제를 ‘민족 통일’에서 ‘자유 통일’로 획기적으로 전환하고, 통일의 의미와 방향을 재정의했다. 특히 내년이면 분단 80주년이 되는데 민족의 의미가 크게 훼손되고 오염된 상황에서 윤 대통령의 방향 전환은 다행스럽다. 사실 주권 재민(在民)의 대한민국 한민족과 주권 부재(不在)의 북한 ‘주체 민족’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이는 민족이 통일의 연결 고리 역할을 이미 상실했다는 의미이며, 그에 따라 새로운 통일 방안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  「 북, ‘두 국가론’은 무력 적화 속내 우리에겐 자유 통일의 기회 분명 자유·민주 지속되는 통일로 가야 」    [일러스트=김회룡] 통일은 동일한 이념과 가치를 바탕으로 정치 공동체가 형성돼야 한다. 하지만 이념과 가치가 다른 남북의 경우 체제 선택의 문제가 생긴다. 즉, 어떤 기준에 의해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 기준은 통일이란 단어 속에 해답이 있다. 통일은 분단을 종식한다는 의미에서 ‘분단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통일 이후에도 통일 국가를 계속 영위해 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일 현실의 지속’이다.   여기서 통일은 어떤 체제를 부정하고, 어떤 체제를 지속해 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따라서 통일 한국은 체제 선택의 문제가 명확하다. 통일 한국의 체제는 주체사상에 기반을 둔 북한의 전체주의가 아니라, 자유에 기반을 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그래야 통일이후의 삶이 훨씬 나아진다.     자유가 통일의 기반이 돼야 하는 까닭은 명확하다. 인류 역사를 봐도 어떤 가치나 이념보다 자유야말로 인간 삶의 질을 더 향상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자유의 창의성과 발전성은 이미 입증된 역사다. 위성에서 바라본 한반도 야경 사진이 자유의 위대함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유는 민주와 평화·인권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이 더 위대하다. 그래서 자유 기반의 통일 한국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분단국가는 자기 주도의 통일을 추구한다. 그래서 1994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마련하고, 그 방안을 실행하려고 북한과 대화 및 협상을 해왔다. 하지만 그동안 이념과 가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통일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줄곧 제기돼 왔다.   MZ 세대에서는 그냥 분단 상태로 가자고 주장하지만, 북한이 핵으로 적화 흡수통일을 노리니 영구분단론도 비현실적이다. 연말 연초에 김정은은 ‘적대적 두 국가 체제’를 들고 나왔다. 적대적이라는 단어가 위협적이다. 기존의 기만적 화해 협력에 기반을 둔 평화 통일이 불가능하니 ‘핵무기에 기반을 둔 무력 적화 흡수 통일’로 통일을 완성한다는 뻔한 속내를 드러냈다. 기댈 것은 핵무기밖에 없다는 토로인 셈이다.   자유가 없는 북한 주도의 통일 미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의 두 국가 체제론은 우리에겐 자유 통일의 기회다. 꾸준히 통일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가 오면 잡아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자유 통일을 위해 대내적으로 자유의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풍성하게 해야 한다. 자유가 발전의 동력이고 평화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유로 발전과 평화의 길을 찾으면 김정은은 갈수록 주눅이 들 것이고, 북한 주민들은 자유를 그리워할 것이다. 다음 수순으로 자유를 북한으로 확산해 북한 주민이 자유의 소중함을 자각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유·민주·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전달하는 북한 정보화에 집중해야 한다.   북한 정보화는 자유 통일을 위한 정신적 가치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정신적 지원이라 할 수 있다. 정신적 지원이 누적되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상식이 되고 자유 통일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자유 통일은 분명 우리의 문제이지만, 자유 세계의 협력과 연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영기 한반도선진화재단 사무총장·전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2024.04.02 00:54

  • [시론] 드론 공격 취약한 후방에 민·관·군 협력 필요

    김동제 경운대 총장 역사를 돌아보면 첨단 과학기술이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경우가 많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 등장한 전차와 항공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좌우했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는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F-117 나이트호크 스텔스 폭격기 등이 위력을 과시했다. 이런 ‘스마트 전쟁’은 21세기 강대국들이 어떻게 싸울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드론과 무인 수상정 등 무인 무기가 전쟁의 새로운 ‘게임 체인저’로 등장해 새로운 전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무인기의 엄청난 활약상을 눈여겨본 세력이 바로 북한이다. 북한은 장거리·정밀타격 드론을 대내외에 공개하면서 앞으로 드론을 투입해 대남 무력 도발에 나서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  「 공항·원전 등 북 무인기 공격 노출 후방은 방호 투자 후순위로 밀려 민·관·군 집단지성으로 해법 찾길 」    시론 현대전은 국가 총력전이다. 적의 위협으로부터 국가 중요시설을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실제로 러시아는 미사일과 자폭 무인기 등을 동원해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특히 군집화·스텔스화·초소형화하는 드론의 위협을 막아내려면 민·관·군이 집단지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를 통해 통합방위 작전의 강점에 기반한 ‘대(對) 드론 통합 방어 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정부는 지난 1월 중앙통합방위회의를 열고, 북한의 드론 위협에 대비해 국가 중요시설의 대 드론 통합 방호 체계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군 당국도 ‘국방 혁신 4.0’을 통해 첨단화한 대 드론 체계 전력 도입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후방 지역은 전방과 비교하면 대 드론 체계에 대한 투자가 후순위로 밀리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후방은 공항·원전 등 국가 중요 시설이 산재해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이 드론 도발로 최대의 효과를 노릴 수 있는 타깃이 될 우려가 크다. 군 당국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 지방자치단체, 대학과 민간 연구기관 등의 통합적인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후방 지역은 대도시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방호체계와 작전 수행 방법이 전방과는 달라야 한다. 후방 지역은 대 드론 체계 인프라 구축의 공간 및 재정적 효율성을 중시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도심 지역의 피해 최소화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주요 지역을 묶어 방호하는 ‘권역화’의 관점으로 통합·운용해야 한다. 또한 시험·평가를 통해 지속해서 기술을 개발하고 성능을 개량하는 등 권역화된 대 드론 통합 방호체계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대 드론 통합 방호 체계의 실효성을 검증하면서 관련 체계의 연구·개발·생산 기반을 닦을 수 있게 된다.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연관 산업을 집적화한다면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지난 2월 경북 구미시와 산업통상자원부, 육군 제2작전사령부, 경운대, LIG넥스원과 한화시스템이 ‘구미권역 국가 중요시설 대 드론 통합 방호 체계 시범지구 사업’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이는 국내 최초로 민·관·군이 협력해 국가 중요시설에 대 드론 통합 방호 체계를 만들려는 시범사업이다. 자폭 드론 등 고도화하는 북한 무인기와 비인가 불법 드론으로부터 국가 중요시설을 방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서울이나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먼저 시범사업을 시작한 것은 의미가 크다. 구미시에는 대규모 첨단산업단지가 집적해 있다. LIG넥스원과 한화시스템 등 대표적 방위산업 기업이 있고, 대 드론 방호연구소와 실증 능력을 갖춘 지역대학이 있다. 게다가 낙동강이라는 넓은 실증 공간 등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 구미다. 시범사업은 지역발전에 큰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시범 사업이 성공하고 그 효과를 전국으로 넓히려면 핵심 기술과 인력이 제일 중요하다. 지역 인재들의 수도권 유출 방지와 지역 정주를 늘리기 위해서는 향후 대 드론 관련 특화연구센터와 상용화 지원센터를 지역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대 드론 통합 방호체계 표준화를 통해 지역 안보 및 연관 산업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지방대학의 인재를 지역 방위 산업체로 보내고, 지방에 정주하게 하는 것은 국가 균형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동제 경운대 총장     

    2024.03.29 00:24

  • [시론] 책임감 있는 유권자 한 표가 정치 바로잡는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 정치는 경제 성장에 못지않은 압축 성장을 경험했다. 장점도 뚜렷하지만, 단점도 만만치 않다. 특히 민주화 성공 과정에서 김영삼·김대중 등 큰 족적을 남긴 정치인들의 유산인 ‘보스 정치’의 해체와 새로운 민주적 리더십의 형성은 매우 중대한 과제였다.   지난 30여 년의 노력으로 보스 정치의 해체는 상당히 진척됐다. 하지만 새로운 민주적 리더십의 형성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여야 정당에서 독선적 리더십이 계속 논란이 되고 제왕적 대통령제도 한국 정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  「 여야 독선적 리더십 문제 여전해 정당 내부 불안정성 갈수록 커져 후보와 정당 잘 비교해 투표해야 」    시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를 강화해 민주적 리더십이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헌이나 관련 법 개정을 통해 분권과 협치를 제도화함으로써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극복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 문제를 푸는데 가장 중요한 변수가 선거다. 민심이 선거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에서 보름 남짓 남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매우 중요하다.   28일 선거운동이 공식 시작된 22대 총선은 역대 총선과 다른 특징이 있다. 지난 2020년 21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던 민주당과 지난 2022년 20대 대선에서 박빙의 승리를 거둔 국민의힘이 진검승부를 펼친다는 점, 양대 정당 이외에 두 정당에서 이탈한 인물들 중심의 군소 정당들이 주목받는 점, 제2심까지 유죄판결을 받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의해 창당된 조국혁신당이 선거에 참여하는 점, 비례 위성정당이 연대의 형식으로 구성되면서 급진주의 성향이 매우 강해진 점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특징은 한국 정치가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불안정성을 보임을 의미한다. 양대 정당 모두 내부의 안정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이탈자들이 적지 않았고, 급기야 이들은 별도 정당을 구성하게 됐다. 조국혁신당의 출범이나 더불어민주연합의 내부 구성도 이런 불안정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총선 이후에 더 심각한 불안정성을 야기할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인제 와서 22대 총선의 불안정성을 해소할 방법은 없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유권자인 국민이 중심을 잡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기준이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국민이며, 최종적인 책임자도 국민이다. 선거는 국민이 대표자를 뽑아 일을 시키겠다는 것이지, 대표자를 모셔서 주권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후보자와 그를 추천한 정당을 무조건 추종하고, 신뢰할 것이 아니다. 여러 후보와 정당을 비교하면서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유권자가 이를 소홀히 할 경우 국민이 뽑은 정당 및 후보자의 권력 오·남용으로 인해 “이게 나라냐”는 한탄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 있다.   둘째, 총선으로 모든 국정 과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총선 결과가 국정 전반에 매우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과연 어떤 후보자가, 어떤 정당이 국정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후보자 개개인의 이력을 조사하라는 것도, 정당의 당헌이나 강령을 직접 확인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후보자의 기본적 성향과 능력, 정당의 성격과 성장 가능성을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 각종 불법과 비리로 인해 임기를 채우기 어려운 후보, 급진주의적 행태로 인해 국정의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큰 후보나 정당에 대해선 더더욱 신중한 권리 행사가 필요하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후보의 당선이나 급진주의의 확산은 한국에서 정의에 대한 공감대를 약화하고, 심각한 갈등과 대립을 확산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그 밖에 후보자를 보고 투표할 것인지, 아니면 소속 정당을 보고 투표할 것인지도 고민거리가 될 수 있다. 이런 경우 그 후보자가 국회의원이 되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려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선호하지 않는 정당의 후보자라도 한국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갈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투표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총선이 10여일 남았다. 이제 국민이 한국의 민주정치를 위해 무엇이 바람직한지 심사숙고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일만 남았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4.03.28 00:26

  • [시론] ‘노키즈 존’ 아닌 ‘패밀리 룸’에 해법 보인다

    이윤진 서원대 복지행정학과 교수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은 0.65명이었다. 정부가 저출산 대책을 내놓기 시작한 2004년부터 지금까지 280조원이 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 2018년에 출산율이 1.0명 이하로 떨어지자 정부는 ‘초저출산 사회’가 됐다며 추가로 대책을 냈지만, 출산율은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한국의 저출산 현상을 외신이 주목할 지경이다. 얼마 전에는 국내의 몇몇 기업이 아이를 낳은 직원에게 현금을 지원하거나 대형승합차를 제공한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는 일부 대기업의 파격적 시도일 뿐이다. 저출산 관련 근로소득 세제 개편 논의도 미봉책에 그칠 공산이 있다. 저출산은 난제 중의 난제가 됐으나 아직도 해결책이 안 보인다.     ■  「 초저출산은 사회 문제의 결과물 여전히 척박한 가족중심의 문화 사회 인식과 환경을 함께 바꿔야 」    시론 그렇다면 가장 임신 가능성이 높은 젊은 세대는 왜 출산을 기피할까. 아이를 낳으면 출산에 따른 자기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양육비와 교육비를 포함한 큰 비용, 자신의 취업도 불안한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키우겠느냐는 자조 섞인 책임감 등. 이런 모든 사회 문제가 얽히고 농축된 결과물이 저출산이다.   2004년 ‘저출산·고령사회 기본법’을 시행하면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라는 컨트롤타워를 처음 만들었다. 2009년부터 정부의 보육비용 지원을 시작했고, 2013년 이후 보편적 무상보육을 도입했다. 그 이후에도 일·가정 양립을 목표로 하는 서비스 측면의 정책을 도입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동수당과 영아수당 도입, 육아 휴직 확대, 돌봄 교실 확대 등 현금 지원 및 시간 지원 정책도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게다가 주거와 교통 지원까지 각 부처가 예산을 투입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저출산 대책이라는 명목으로 정책을 확대해 왔다. 그런데도 갈수록 아이를 낳지 않고 있다.   기존 대책을 보면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정책이 많다. 하지만 여전한 사각지대를 보완해야 한다. 따라서 기존 정책들은 수치로 증명할 수 있는 단시간의 출산율 확대에 집착하기보다는 모든 국민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장성을 확대하는 일관성 있는 정책으로 가야 한다. 이에 더해 장기적 효과를 염두에 두고 국민의 인식과 사회문화에서 원천적인 해답을 찾아야 한다. 육아 휴직 지원금 상향 조정, 아동수당 확대, 출산 지원금 확대 등으로 출산율이 잠시 소폭 반등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긍정적인 효과를 보인다는 몇몇 연구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를 낳는 것이 내 삶 속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긍정적 인식이 퍼지고 사회문화로 자리 잡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저출산의 근본적 해법이라 생각한다. 저녁이 있는 삶의 확보, 육아 휴직 의무화, 기업의 승합차 무상지원, 유연 근로제 사용 같은 정책들도 ‘가족에 대한 존중과 아이에 대한 배려’가 있는 사회문화 속에서만 제대로 된 정책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노키즈 존’을 내세운 레스토랑이 유행하는 나라에서 출산율이 높아질 수 있겠나. 레스토랑에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이나 간단한 키즈 메뉴가 준비돼 있으면 어떨까. 이처럼 가족 중심의 사회문화와 환경 조성이 절실하다.   미국 올랜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가면 ‘패밀리 룸’이 마련돼 있다. 아이를 패밀리룸에 안전하게 두고 젊은 부부가 잠시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다. 이처럼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인프라와 분위기가 갖춰져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아이 있는 가족을 존중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처럼 가족존중 문화가 척박한 땅에서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어쩌면 합리적 선택일지도 모른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저출산 극복을 내세우며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 조성을 위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기존 정책에서 이름만 살짝 달리하거나 지원금 액수만 올린 재탕·삼탕이 대부분이다. 차별화된 정책을 찾기 어렵다.   물론 정책 경쟁은 필요하고 정책을 다듬어 나가는 노력도 계속해야 한다. 그렇지만 결과적 출산율 통계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보다는 국민의 인식과 사회문화를 바꾸는데 더 힘써야 한다. 가족 중심의 ‘출산 친화형’으로 사회문화를 바꾸면 출산율 반등의 기회는 있다고 본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윤진 서원대 복지행정학과 교수     

    2024.03.27 00:24

  • 한미일 안보·경제 팀워크도 야구처럼 [시론]

    아미 베라 미국 연방하원 민주당 의원   미국 연방하원 소속 초당파 의원들과 함께 서울을 방문하게 되어 기쁘다. 이번 방한을 통해 외교 교류뿐 아니라 한국의 풍부한 문화와 환대를 느끼며 더 깊은 관계를 맺기를 기대한다.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형식적인 동맹을 넘어 진정한 인적 교류로 깊이 뿌리내린 유대감을 생각한다.  특히 올해 방문은 서울에서 최근 성공적으로 열린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 직후에 성사된 것이어서 더욱 뜻깊다. 북한의 위협에 굳건히 맞서고 있는 대한민국이 주최한 이번 정상회의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강조했다. 본인은 글로벌 무대에서 모범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며 민주주의 이상을 옹호하는 한국의 중추적 역할을 강화한 윤석열 대통령께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  「 북한 도발로 동맹 중요성 더 커져 '워싱턴 선언' 계기 한미관계 정점 한미일 3국의 유대 더욱 강화돼야 」   글로벌 관계의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한·미 동맹은 성공과 회복력의 등대로서 그 가치가 두드러지고 있다. 공유된 가치와 상호 전략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이 관계는 수십 년 동안 크게 성장했다. 지난해 4월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때 체결된 ‘워싱턴 선언’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화상으로 진행된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술, 선거 및 가짜뉴스'를 주제로 진행한 2세션을 직접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  한·미 정상의 중추적 합의는 획기적인 핵 협의체(NCG)를 포함해 대북 핵 억지력에 대한 심도 있는 협력적 의사결정을 약속했고, 한·미 동맹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러한 조치는 북한이 미국 본토를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여러 차례 시험 발사하고, 2022년 초부터 80발 이상의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핵미사일 도발을 확대함에 따라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북한의 위협은 재래식 군사 능력을 넘어 사이버 공간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북한은 정교한 국가 지원 해킹 조직을 개발해 한국과 미국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막대한 자금을 빼돌려 핵 야심 추진에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위협은 전통적인 안보 영역뿐 아니라 사이버 공간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한·미의 다차원적 협력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해준다.  필자는 미국 연방하원 정보위원회 위원이자 '전직연방의원협회(FMC)'의 한국 관련 의회 연구 그룹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1세기를 주도할 인공지능(AI)과 양자 컴퓨터 같은 새로운 기술을 포용하면서 이 중요한 협력을 발전시키는 데 전력을 쏟고 있다.  한·미 파트너십의 중요성은 지난해 8월 조 바이든 대통령, 윤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참석한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을 통해 3국 협력 관계로 강화·확장됐다. 지난해 정상회담은 전략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러시아와 북한에 의해 제기되고 점점 더 복잡해진 도전에 대한 공동의 대응을 강조했다. 한·미·일의 긴밀한 협력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며, 이는 격동의 시기에 안정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협력은 안보와 기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경제·무역·문화적 유대를 포괄한다. 한·일은 공급망, 청정에너지와 같은 중요한 분야에 초점을 맞춘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필수적 참여국이다. 이러한 협력은 기업과 경제가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위험을 분산하며, 경제적 강압에 대한 복원력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미·일 경제 협력은 더 균형 잡히고 번영하는 지역 질서를 촉진한다.  야구에 대한 문화적 열정을 공유하는 것은 3국 국민 사이의 깊은 유대감을 잘 보여준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사랑받는 LA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참가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서울 개막전은 김하성과 오타니 쇼헤이 등 스타들이 총출동한 축제의 장이었다. 세 나라에서 사랑받는 스포츠인 야구는 팀워크와 협력의 정신을 구현하는 스포츠다. 국제 협력의 메타포로서 글로벌 도전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상호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미·일 3국 파트너십의 미래에 대한 필자의 비전은 분명하다. 지금 세계의 복잡성을 헤쳐나가기 위해 서로의 강점을 활용해 지속해서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 야구장에서 선수들이 단결하듯 팀워크와 공동의 결의를 통해 우리가 직면한 국제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3국 협력은 단순한 외교적 필요가 아니다. 모두를 위한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동맹의 단결된 힘과 변함없는 정신을 보여주는 증거다.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아미 베라 미국 연방 하원의원(민주당) 

    2024.03.24 16:26

  • [시론] ‘두 국가론’이 대남 적화 노선 폐기는 아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Two Koreas)론’으로 남북관계의 근본적 전환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는 대남노선 자체의 변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북한의 대남노선은 한반도의 공산화이고, 이를 위한 두 정책적 수단은 북한식 평화통일과 무력통일이다.   북한식 평화통일방안은 고려연방제와 통일전선전략이다. 고려연방제는 ‘1민족·1국가·2체제’를 의미한다. 통일전선전략은 한국사회에 친북세력을 확산시켜 연방제 상황에서 북한으로 흡수 통일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  「 북한, 남북 관계 전환 선언했으나 무력통일 노선의 변화는 아닌듯 언제든지 군사 도발할 우려 커져  」    시론 김 위원장은 대한민국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북한과 극명하게 상반된다며 “언제 가도 통일이 성사될 수 없다”고 단정했다. 통일전선부 등 대남사업부문의 기구들을 정리·개편하고, 투쟁 원칙과 방향의 전환을 주문했다. 고려연방제와 통일전선전략의 폐기를 지시한 셈이다. 하지만 지난 18일 서울을 겨냥한 초대형 방사포 발사 훈련에서 보듯 여전히 무력통일방안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김 위원장은 유사시 핵 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역을 평정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남반부의 전 영토를 평정한다는 표현도 사용했다.   남조선과 남반부는 한반도를 하나로 인식하는 개념이다. 평정은 반란이나 소요를 진압한다는 의미로 완전한 타국 관계에 적용하기 어렵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전쟁 시 대한민국을 ‘점령·평정·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하는 문제’를 언급했는데, 완전한 타국을 편입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불법이다.   북한이 2022년 9월 제정한 ‘핵 무력 정책법’은 핵 무력의 사명 중 하나로 ‘영토 완정’을 규정했다. 완정(完整)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완전히 정리해 통일함’이다. 1949년 당시 김일성 주석도 정권 수립 이후 첫 신년사에서 대한민국을 반동세력으로 규정하고 “멀지 않은 장래에 국토의 완정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1년 반 뒤 북한은 남침을 단행했다. 따라서 두 국가 선언은 대남적화라는 기본노선의 변화는 아니다. 실현 불가능한 북한식 평화통일방안인 고려연방제와 통일전선전략의 폐기를 의미한다. 국제사회는 인정하지 않지만,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점에서 무력통일방안에 대해서는 과거보다 오히려 자신감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김 위원장의 두 국가론이 지니는 위험성이다. 김 위원장의 주장은 평화공존론이 아닌 교전 중인 두 국가론이기 때문이다. 남북이 교전국 관계로 전환될 경우 전시체제에 상응하는 고비용 구조가 형성되고,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커진다. 분단체제가 장기간 지속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에 고정간첩과 북한 동조세력이 잔존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의 교전국 관계 선언으로 이들은 자동적으로 ‘전시 요원’으로 전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에 의한 주체와 원점이 불분명한 회색지대 도발이나 ‘외로운 늑대’를 가장한 테러와 교란 행위가 있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의 남쪽 국경선이 군사분계선(MDL)이라며, 북방한계선(NLL)을 ‘불법무법’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영토·영공·영해를 0.001㎜라도 침범하면 전쟁 도발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했다. 대한민국은 NLL이 확고한 해상 경계선이며, 절대 수호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서로 배치된다.   물론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과 러시아에 대한 대량의 탄약공급 등을 고려할 때 전면적인 무력도발 가능성은 크지 않으며, 4대 세습 의지를 보이는 김 위원장이 전면도발의 위험성을 감수할지도 미지수다. 그러나 남북을 교전국 관계로 전환한 북한의 전략에 따라 무력충돌 가능성이 현저하게 커졌다고 봐야 한다. 특히 북한이 ‘핵 지렛대 전략’을 구사할 우려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전쟁은 평화가 일순간에 깨질 수 있으며, 자주국방과 안보적 대비 태세를 확고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일본은 북한과 물밑 접촉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동맹을 경시하는 ‘트럼피즘’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위협 앞에 대한민국이 외롭게 서 있다. 냉혹한 외교·안보 현실을 직시하고 모든 가능성에 대비할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4.03.21 00:26

  • [시론] 목숨 바쳐 나라 지킨 청년 군인의 명예 존중을

    김오복 국가보훈부 정책자문위원(연평도 포격전 고 서정우 하사 어머니) 오는 22일은 제9회 ‘서해수호의 날’이다. 정부는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전에서 전사한 55 용사를 국민과 함께 추모하고 안보의식을 북돋우며 국토 수호의 결의를 다지려는 취지에서 2016년부터 매년 3월 넷째 금요일을 정부기념일인 ‘서해수호의 날’로 제정해 기념식을 해오고 있다.   나는 이맘때가 되면 국가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희생한 서해 수호 전사자 55명 중 한 명의 엄마로서 가슴이 저린다. 모두가 기억하듯이 북한의 도발은 6·25전쟁 이후에도 끊임없이 계속됐다. 한·일 월드컵 축구의 열기가 뜨거운 2002년 6월에는 북한의 북방한계선(NLL) 침범으로 발생한 서해 전투, 즉 제2연평해전에서 6명이 전사했다.     ■  「 55용사 추모하는 서해수호의 날 보훈 문화 역행하는 행위 잇따라 유족 상처 덧나지 않게 해줘야  」    시론 2010년 3월 26일 북한이 해상 경계 중인 천안함을 폭침시켜 무려 46명의 우리 군인들이 전사했다. 같은 해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에 가한 무차별 포격으로 군인 2명이 전사하고 일반인 2명이 사망한, 전쟁과 다를 바 없었던 연평도 포격 도발도 있었다.   그뿐인가. 2015년 8월 4일에는 북한이 비무장지대(DMZ) 인근에 매설한 목함지뢰가 폭발해 하재헌·김정원 하사가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끔찍한 사건도 발생했다. 지난해 6월 윤석열 정부는 1961년 군사원호청 창설 이래 실로 62년 만에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승격했다.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한 영웅들을 기억하고 예우하는 보훈 문화 확산을 위해서다.   나는 소중한 아들(고 서정우 하사)이 2010년 연평도 포격전 와중에 전사한 이후 지난 14년 동안 북한의 도발을 원망하며 아들 없는 아들 생일을 보내야 했다. 명절에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아들의 묘역을 찾아 아들을 그리워하며 아픔 속에 살아왔다. 국가보훈부로 승격되면서 이제는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친 영웅들을 위해 진영을 떠나 진정한 보훈 문화가 퍼지고 희생된 영웅의 명예가 온전히 지켜지길 기대했다.   하지만 희생된 젊은 군인들의 명예를 지켜주기는커녕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보훈 문화에 역행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광주광역시가 북한과 중국 군가를 작곡한 6·25 전쟁 전범인 공산주의자 정율성 기념 공원을 조성 중이란 소식을 듣고 나는 지금까지 공원 반대 운동에 앞장서서 동참하고 있다.   연초에 북한의 도발과 협박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야당 정치인은 적대행위 중단을 요청한다면서 “선대들, 우리 북한의 김정일, 또 김일성 주석의 노력이 폄훼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고 발언해 충격을 줬다.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핵 개발을 주도한 김정일을 마치 평화 애호자인 것처럼 미화하는 바람에 북한의 도발로 전사한 서해 수호 55용사의 유족과 생존 장병들이 울분을 느끼게 했다.   얼마 전에는 국회의원 출마 후보자가 “DMZ에 들어가서 발목 지뢰 밟는 사람들한테 목발 하나씩 경품을 주자”면서 비웃던 2016년 유튜브 발언과 영상이 재소환됐다. 젊음을 바쳐 나라를 지키다 두 발을 잃은 장병을 조롱하고 모독한 발언이 또다시 분노를 자아냈다. 보훈 행사에서 하재헌 중사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목함지뢰 사건 당시 두 다리를 잃고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힘들게 고통을 극복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트라우마를 어렵게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청년을 위로하기는커녕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 북한 공산 세력에 의해 자식을 잃고 곪아 터진 상처를 싸매가며 살아가는 전사자들의 부모 가슴에 다시 피눈물 나게 하는 정치인들, 아직도 천안함 피격 사건의 희생자를 헐뜯는 사람들, 6·25 전쟁 전사자 자녀의 아픔을 외면하는 정율성 공원 조성 움직임.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젊은 청년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유족의 상처를 덧나게 하는 고약한 행태다.   보훈이 국격이라는데 이처럼 비뚤어진 언행이 과연 대한민국의 국격에 맞는지 되돌아보는 서해수호의 날이 됐으면 한다. 안보와 보훈은 동전의 양면이다. 안보가 소중하듯 국가를 지키려다 산화한 영웅의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 안보의 초석이요, 진정한 보훈 아닐까. 북한의 도발로 아들을 잃고 가슴 아프게 살아가는 한 엄마의 생각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오복 국가보훈부 정책자문위원(연평도 포격전 고 서정우 하사 어머니) 

    2024.03.20 00:24

  • [시론] AI 디지털 교육에 신중한 유럽 경험 참고해야

    채선희 중앙대 교육학과 객원교수 유네스코가 지난해 7월 ‘인공지능(AI)과 교육의 미래 비전’이란 보고서를 발표했다. 많은 국가가 AI 기술을 적절한 검토·논의·규제나 로드맵도 없이 교육 같은 공적 부문에 바로 수용하는 것을 경고했다. 즉, 기술적으로만 빠르게 발전하는 AI로 인해 발생 가능한 위험을 너무 간과하지 말라는 권고였다.     [일러스트=김지윤]   ■  「 유네스코, 규제 없는 AI 교육 경고 디지털 중독과 낮은 문해력 걱정 초등생 디지털 사교육 열풍 우려 」  유네스코의 핵심 권고 내용을 보면 ‘AI 시대의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깊이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AI 기술이 언제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사용돼야 하고, 또한 사용되면 안 되는지에 대한 규범이 먼저 확립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AI 규범은 상업적 목적으로 AI를 개발한 기업이 아니라 교육 전문성을 가진 주체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디지털 교과서나 자료는 반드시 독립기관을 두고 내용의 정확성, 연령 적합성, 교육학적 타당성, 문화적·사회적 적합성 등 최소한의 기준에 적합한지 사전에 점검해서 학교에 도입해야 한다.   올해 3월 미국 수학교사협회(NCTM)는 교육기관 중 최초로 AI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놨다. AI는 학생이 수학을 배우는 데 도움을 주지만, 필요한 경우 학생이 AI가 내놓은 결과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않도록 교사가 설명할 것을 제안했다. 유네스코 권고대로 미국은 교사가 AI 사용지침을 NCTM 같은 교육전문기관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   10여년 전부터 선도적으로 디지털 교육을 추진해 온 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등 유럽의 교육 강국들은 최근 학교에서 탈디지털화와 종이책 읽기, 손글씨 쓰기 등 전통적 교육 방식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5년마다 초등 4학년을 대상으로 ‘국제 문해력 평가(PIRLS)’를 시행하는데 2021년 평가에서 문해력 점수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이들 유럽 국가는 학교에서 디지털 기기를 과도하게 사용해 종이책 읽는 시간이 감소한데서 문해력 하락의 원인을 찾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 초·중학교에서는 종이책·연필·노트를 다시 사용하고, 디지털 교과서는 고교부터 사용하도록 정책을 바꾸는 중이다.   스웨덴은 10세 미만의 글쓰기 수업에서는 태블릿 사용을 금지하고, 6세 미만은 디지털 학습 자체를 중단할 계획이다. 네덜란드도 교실에서 태블릿·인터넷·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 사용을 금지하기로 했다.   이들 유럽 국가는 문해력 형성에 가장 중요한 초·중학교 시기에 문해력 교육에 집중할 수 있도록 디지털 교육을 고교 이상으로 늦추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은 2025년부터 초등 3~4학년과 중학 1학년생에게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할 예정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년마다 만15세 대상으로 ‘국제 학업성취도 비교연구(PISA)’를 시행한다. 한국은 2006년 이후 PISA 읽기 부문에서 하위권 학생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한국도 문해력 하락 문제에서 유럽처럼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따라서 교육부는 초등학교의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이 아이들의 문해력 교육에서 득과 실이 무엇인지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처럼 사교육이 극심한 가운데 초등학교에서 디지털 교과서를 전면 사용할 경우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디지털 사교육 열풍을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도 걱정스럽다.   출생부터 디지털기기에 과다 노출된 디지털 세대는 문해력 저하 외에도 종이책 난독증, 디지털 중독증 등 새로운 문제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에서 디지털 교과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면 지금껏 드러나지 않은 많은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높다. 유럽 국가의 데이터도 참고하고, 예측 가능한 문제에 대한 규제도 마련하면서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도입해 가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교육부는 ‘모두를 위한 맞춤 교육’을 위해 AI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다지만, 진정한 맞춤 교육은 AI 디지털 교과서로만 구현되지 않는다. 학생의 연령, 능력 수준, 학습 동기, 학습 성향, 디지털기기 선호도 등에 따른 교수 및 학습 전략의 세분화가 우선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학생이 종이책 대신 디지털 교과서를 사용할 경우 자칫 또 다른 교육 불평등이 야기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채선희 중앙대 교육학과 객원교수 

    2024.03.19 00:28

  • [시론] 더욱 역할 커지는 경제안보 컨트롤타워

    배영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중 패권 경쟁과 코로나19에 이어 우크라이나전쟁 등으로 경제안보가 중요하고 민감한 이슈가 됐다. 공급망 안정성, 수출입 및 투자 규제, 경제적 강압에 대한 대응, 첨단기술 혁신 역량 강화 등이 경제안보의 주요 현안으로 논의되고 있다. 국가의 외교 목적을 위해 경제적 수단을 사용하는 ‘경제 책략(Economic Statecraft)’은 오래전부터 활용됐다. 최초 사례는 고대 그리스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아테네는 자국이 이끄는 델로스동맹과 경쟁국인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동맹 사이를 오가던 메가라를 응징하기 위해 직접적 군사행동 대신 경제제재를 했던 기록이 있다.     ■  「 공급망 관리 등 현안으로 급부상 국가안보실에 ‘전담 3차장’ 신설 국내정책과 대외정책 융합 필요 」    경제적 수단을 통한 위협이 국가안보에 주는 영향은 군사적 위협이나 공격보다는 덜 가시적이지만, 그 효과는 넓고 깊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나 독가스로 사망하거나 부상한 사람보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제재로 죽거나 피해를 본 사람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21세기 미·중 패권 경쟁 시대의 경제안보는 외교적 목적을 위해 경제적 수단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경제책략과 유사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다. 첫째, 현재의 경제안보 이슈들은 세계 경제의 유례없는 상호의존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전통적인 경제책략의 효과가 일방적이었던 것과 달리 상호의존 관계가 무기화됐을 때 효과가 매우 크고 쌍방적이다.   반도체칩·희토류·천연가스는 물론이고 요소수·마스크 같은 단순한 상품의 공급망 교란도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수출 통제로 인해 상대국에 피해를 줄 수 있지만, 자국에 피해가 되돌아오는 점도 중요한 차이다. 상호의존적인 글로벌 경제에서 경제안보의 핵심 이슈로 공급망 안정 문제가 논의될 수밖에 없고, 각국은 위기관리와 취약성 완화를 위한 정책을 도입하며 공급망 외교를 강화하고 있다.   둘째, 최근 경제안보에서는 첨단기술이 핵심 의제가 되고 있다. 과거에도 첨단기술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과 갈등이 있었지만, 미·중 경쟁으로 첨단기술의 이중용도 특성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군사기술 혁신의 토대가 되는 첨단기술을 둘러싼 경쟁과 견제가 치열하다. 각국은 첨단기술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 확대와 함께 전략적 국제 협력을 경제안보의 주요 어젠다로 설정하고 있다.   셋째, 경제안보는 전통적으로 구분해온 대외정책과 국내정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양자의 융합을 요청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기술 굴기’ 견제를 위해 첨단기술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동맹국들과 협력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국내적으로 첨단 제조 역량 강화를 위해 반도체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을 도입했고 이를 미국 힘의 원천인 중산층을 위한 주요 외교 정책으로 표명했다.   경제안보는 공급망 안전성, 수출입 및 투자 규제, 첨단기술 혁신 역량 강화, 포용적 성장과 혁신, 동맹국과의 협력 등 외교·안보와 경제·정치·기술 영역을 아우른다. 경제안보 정책의 성공적 수행 여부는 다양한 부처의 협력과 조정에 달려 있다. 경제안보의 핵심 어젠다를 힘있게 끌고 갈 구심점을 갖춘 거버넌스 구축과 운영이 중요하다.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안보 거버넌스는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전략 설정과 부처 공동보조로 운영된다. 일본은 내각부에 경제안전보장담당 특명담당대신 직책을 신설했다. 한국은 최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 산하에 있던 경제안보 비서관직을 3차장으로 독립·승격했다. 신설된 3차장 산하에 경제안보뿐 아니라 과학기술과 사이버안보를 포함한 신흥안보를 추가했다.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경제안보를 고려하면 시의적절한 조치로 보인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외교전문 잡지 기고문에서 “인구·영토·자원이 국력의 주요 요소이지만 어떤 국가가 미래를 만들어갈지는 이것들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국가가 어디에 투자하고 누구와 손을 잡을지 선택하며 자신을 내적으로 조직화해 가는 전략적 결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안보실 3차장 신설을 계기로 경제안보가 강화되고 전략적 결정을 이끄는 구심점이 되어 대한민국이 세계정치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배영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4.03.15 00:24

  • [시론] 지나가면 잊어버리는 ‘기후재난 건망증’

    반기성 케이웨더 센터장 ‘80억 번째 태어난 아이, 극한지구에서 어떻게 버텨낼까’. 최근 한 언론의 기사 제목이다. 유엔은 2022년 11월 15일에 세계 인구가 80억 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70억 지구’에서 ‘80억 지구’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11년이다. 10억 명 단위로 따져볼 때 지구촌 인류는 역대 가장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그렇다면 80억 번째 태어난 아이의 삶은 어떨까. 버네사 페레스 시세라 세계자원연구소 글로벌 경제센터장은 “80억 번째 태어난 아이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충분한 자원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 폭염·가뭄·대홍수 등 재난 빈발 기후위기 대비 노력 아직도 부족 다양한 위험 시나리오에 대비를 」    도시 홍수 대비 시스템 대수술하자. [일러스트=김지윤] 이런 예상의 근거는 첫째, 식량부족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에 가장 취약한 것이 농업인데, 식량 생산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과도한 농업과 축산업 등은 온실가스를 쏟아내고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어 기후위기를 부채질한다. 머잖아 가난한 국가에서는 필수 식량조차 얻지 못하게 될 우려가 크다.   둘째는 팬데믹이다. 69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코로나19는 기후변화가 원인이었다는 연구가 있다. 역사상 팬데믹이라 할 수 있는 흑사병·독감·콜레라·발진티푸스 등이 모두 기후변화로 인해 발생했다. 의학 전문가들은 기후변화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바이러스가 나타나 새로운 팬데믹이 지구를 강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식량 부족과 팬데믹만 일으킬까. 폭염·가뭄·대홍수와 수퍼 태풍이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으로 다가오고 있다. 극지방의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빠르게 상승하고 해수 온도가 올라가면서 바다가 죽어가고 있다. 쉴 새 없이 발생하는 대형 산불도 생태계를 파괴한다. 이처럼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파괴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기후변화다.   유엔 ‘재해 위험 감소 사무국(UNDRR)’은 2023년 12월 보고서에서 지구 평균기온이 2.5℃ 상승하는 경우 수퍼 태풍은 현재보다 2배 더 많이 발생한다고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극심한 가뭄을 겪는 사람은 80년 이내에 두 배로 증가할 수 있고, 기온이 1℃ 증가할 때마다 극한적 일일 강수량 현상이 약 7% 증가하면서 대홍수 빈도도 늘어난다.   이뿐만 아니라 이 보고서는 극심한 더위와 습도에 따른 열 스트레스는 2100년까지 연간 12억 명에게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했다. 2050년까지 말라리아와 같은 매개체 질병으로 인해 약 5억 명의 질환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해수면 상승으로 21세기 말까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최대 20%에 해당하는 자산이 사라질 수 있고, 2030년까지 산불에 노출된 지역은 산불 발생 기간이 지금보다 3개월 더 길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담았다.   실제로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한 재난이 속속 발생하고 있다. 한국도 이런 기후 재난의 안전지대가 아니다. 올해는 또 어떤 극한 재난이 닥칠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기후재난에 대비하는 정부의 의지와 실천 노력은 미흡하다.   지난해 홍수 사례를 보자. 지난해 7월 13일부터 나흘간 전국 각지에서 강력한 홍수가 발생했다. 충남 청양이 570㎜, 공주 511㎜, 충북 청주 474㎜, 전북 익산은 500㎜의 강수량을 기록했다. 이로 인해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경북 예천 산사태가 발생해 사망 및 실종자가 50명을 넘었다.   그런데 당시 재난 현장에서 정부의 무기력과 무관심이 드러났다. 도대체 재난과 관련한 거버넌스가 있는 것인지, 재난을 줄이기 위해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고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되풀이되는 기후재난의 피해는 오롯이 국민이 감당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기후위기 시대에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공공재다. 재난에 대비하는 정부의 정책, 계획 및 프로그램은 다양한 위험 시나리오에서 작동하도록 설계해야 한다. 정부는 다양한 기후 재난 시나리오의 체계적 위험, 연쇄 영향과 중장기적 영향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기후 및 재난 위험 분석, 재난 상황 시 대처 방법을 업그레이드하고 실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갖춰야 할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반기성 케이웨더 센터장 

    2024.03.14 00:28

  • [시론] 생존 위기 지방대학들, 공공기여로 활로 열자

    전호환 동명대 총장 지방대학활성화특별위원장 ‘지방대 살리기’가 주요 국정 과제가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질적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방대 살리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이 되고 있다. 정부는 지방대 살리기에 2004년부터 2022년까지 10조원 이상을 투입했다. 이대로 가면 380조원을 퍼붓고도 출산율 0.68명(통계청 올해 전망)대로 뒷걸음친 저출생 대책에 이어 또 하나의 ‘돈 먹는 하마’ 정책이 될 우려가 크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교육발전 특구’와 ‘글로컬대학30’ 등 지방 교육과 지방대 활성화를 겨냥한 정책을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대학 지원 사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글로컬대학30과 함께 교육을 성장 동력으로 육성하는 교육발전 특구도 1차 연도 선정을 마쳤다. 지난해와 올해 갓 시행된 정책이어서 어느 정도 효과가 날지는 아직 미지수다. 2024년도 입시를 치렀더니 정원을 못 채운 미충원 인원의 98%가 지방대에서 나왔고 앞으로 미충원 인원은 갈수록 증가할 것이다.     ■  「 지방대 생존 위한 상상력 절실 대학 역량, 복지 분야 활용해야 ‘교육적 돌봄’으로 대학·지역 윈윈 」    시론 대학 살리기에는 재정 투입이 중요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조차 쉽지 않다. 과거에 대통령 교육비서관으로 일했던 한 학자는 “지방대 살리기에 돈을 투입하면 효과가 언제 얼마나 나오느냐는 기획재정부의 반론에 할 말을 잃었다”고 전했다. 재정을 투입하기 전까지 의사 결정이 넘기 힘든 산임을 새삼 실감하게 했다. 사회간접자본(SOC)에 예산을 투입하면 곧바로 숫자가 나오지만, 교육은 숫자로 쉽게 증명이 안되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돈만큼 중요한 것은 대학의 가치 활용’이라는 생각이 대학 정책의 바탕이 돼야 한다. 대학의 가치 활용은 창의성에서 나온다. 디테일이 곧 창의성이다. ‘대학이 무너지면 지방이 무너진다. 그래서 지방대학을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가 전부인 생각에는 디테일이 없다.   지방대학 살리기에 다양한 디테일이 제시됐지만, 필자는 ‘대학의 공공 기여’를 하나의 디테일로 제안한다. 구체적으로 저출산 및 고령화 관련 복지 확대에 대학의 역량을 활용하자는 취지다. 저출산 현상의 심화로 유치원과 초·중등학교가 속속 폐교되고 있다. 고령화에 따른 실버타운의 수요가 넘치지만, 수도권에서만 활발할 뿐이다. 인구의 3%나 되는 장애인의 돌봄도 문제다. 언급한 분야에 대학은 역량을 갖고 있다. 의예·약학·간호학은 물론이고 유아교육, 특수교육, 사회복지, 작업치료, 물리치료, 반려동물 등이 연관학과다. 이 학과의 교수와 학생은 복지 관련 분야의 핵심 인재들이다.   복지와 관련된 대학 인프라가 공공에 활용될 때 대학과 지역이 상생할 수 있다. 부산 교육발전 특구의 핵심이 돌봄인데, 대학 역량이 복지에 활용되면 ‘교육적 돌봄’이 완성될 수 있다. 유아 교육과 초등학교에 한정된 돌봄을 확대하고 장애인의 돌봄까지 그 영역을 넓힐 수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 개념 완성을 위해 대학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필자가 소속된 동명대는 ‘대학 기반 은퇴자 공동체(UBRC)’ 실험을 추진 중이다. 이 공동체에 들어오는 은퇴자들은 다양한 교육과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학생은 여기서 실무 능력을 배양할 수 있다. 스탠퍼드대 등 미국의 100여개 대학에서 20여 년 전부터 도입해 지역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학생을 채우지 못하는 지방 사립대는 빈 건물과 유휴부지가 많다. 대학이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풀어야 한다. 국립대학재정회계법 개정이 좋은 사례다. 대학이 보유한 유휴부지를 매각해 대학회계로 편입하면 대학 재정 확충에 도움이 된다. 대학에 돈이 있으면 스스로 발전 계획을 짤 수 있다. 이런 대학이 많아져야 정부 예산 부담도 덜 수 있다.   남아도는 대학의 자산이 대학발전의 마중물이 돼야 한다. 학과별 역량을 강화하면서도 그 혜택이 공공과 지역에 퍼지면 정부와 지자체가 부담하는 복지 예산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대학이 지역 주민의 복지에 참여하면 긍정적 효과가 지대할 것으로 기대한다. 생존 위기의 지방대학들이 이런 혁신적 실험을 더 과감하게 시도하길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호환 동명대 총장·지방대학활성화특별위원장

    2024.03.13 00:24

  • [시론] ‘홍해 물류대란’ 디지털 플랫폼으로 뚫어야

    이경배 연세대 미래융합연구원 겸임교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와중에 친이란 예멘 후티 반군의 홍해 선박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 전쟁이 세계 물류 흐름에 동맥경화를 일으키면서 한국 기업의 피해도 커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최근 ‘홍해 예멘 사태의 수출입 영향 및 시사점’ 보고서에서 홍해 사태로 한국의 유럽연합(EU) 해상운임이 4개월 만에 250% 상승했다고 분석했다.   홍해가 가로막히면서 전 세계 해상운송의 30%를 차지하는 아시아-유럽 노선 선박들이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수 없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대부분 선박은 멀리 남아공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로를 이용하고 있다. 이 경우 수송 기간이 평균 열흘 이상 더 걸리기에 그만큼 운임이 늘어난다. 게다가 원자재 수급 불안정으로 인해 생산 차질, 판매 차질, 품질 손상, 수입선 국가 변경, 물가 상승 등 이차적인 피해까지 발생한다.     ■  「 전쟁으로 ‘물류 대동맥’ 홍해 막혀 무협 “한국 해상운임 250% 상승”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활용해야 」    시론 베트남 커피를 수입하던 유럽 국가들이 물류 차질이 벌어지자 수입선을 브라질로 바꾸면서 베트남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한국은 수출입의 80%를 외국 선사에 의존하다 보니 운신의 폭이 좁은데 그 부담이 고스란히 수출입 업체에 가중되고 있다.   기업이 건실한 경영을 위해서는 적기에 원자재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고 생산원가를 줄이기 위해 자동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일정에 맞춰 제때 운송하지 못하면 생산·판매에 큰 차질이 생긴다. 이것이 곧 공급망 불안이고 물류대란이다.   물류비용은 얼마나 될까. 총원가 구성을 원료비 50%, 생산비 25%, 판매비 25%라고 가정해보자. 물류비용은 판매비에 포함되며, 일반적으로 총원가의 2~10% 정도가 물류비용으로 사용된다. 게다가 원료비와 생산비에도 물류비가 스며들어 있다. 관리가 어려운 물류비용을 절감하는 것이야말로 이익을 내는 경영에 직결되는 중요한 관리 항목이다.   국제물류 전문 기업의 ‘글로벌 컨트롤 센터(GCC)’에 가보면 대형 세계 지도 스크린이 벽 한 면을 차지한다. 지도 위에는 230여개 물류 거점, 선박 1500여대와 항공기 250여대, 차량 수천 대, 인력 수천 명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되고 있다. 수많은 선박이나 비행기가 태평양을 건너가거나 아시아 및 유럽으로 가는 모습이 마치 줄을 지어 이동하는 철새 떼처럼 보인다.   배달 앱이나 전자상거래로 물건을 주문할 경우 수신자는 출발 여부와 배달 예상 시간은 물론이고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지, 누가 수취했는지 등등 궁금한 것이 많다. 국제 물류에서 수출입 화주(貨主)의 궁금증도 마찬가지다. 과거엔 “(물건이) 잘 가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지만, 지금은 컨테이너에 선적된 화물 정보가 디지털로 처리돼 언제 어디서 어느 컨테이너에 실려 어느 선박으로 어디쯤 지나가는 지가 일목요연하게 실시간으로 확인된다.   특수화물의 경우 팔레트·컨테이너·차량 등에 손바닥만한 크기의 사물인터넷(IoT) 센서를 부착해 위치·온도·습도·흔들림 등을 감지한다. 인공위성이나 통신 장비를 통해 실시간으로 취합하는 데이터와 물류회사의 상품정보 및 배송정보 등이 합쳐져 종합상황실 현황판이 운영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상황관리 외에도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전쟁·지진·기상이변·파업·국경폐쇄 등 안정적 물류에 장애가 되는 각종 리스크를 실시간으로 파악한다. 이를 통해 리스크를 회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이고 경제적인 경로를 제시하는데 이때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이 활용된다.   국제 물류는 물론 국내 물류도 운영을 잘못하면 마치 길 위에 돈을 뿌리는 것과 다름없다. 효율적인 물류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는 운행 효율과 적재 효율을 극대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장과 창고, 판매점의 위치 및 개수, 이동 경로 및 횟수, 공동 수송과 배송, 최적 운임, 물류업체 아웃소싱 등 다양한 요소가 전사 차원에서 고려된다.   또한 운송사 선정부터 견적·주문·운송·정산까지 아우르는 업무 프로세스를 간소화하고, 정산 신뢰성을 확보하며, 화물의 실시간 가시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자동화 역량을 갖춘 경쟁력 있는 디지털 물류 플랫폼이 필요하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경배 연세대 미래융합연구원 겸임교수

    2024.03.12 00:24

  • [시론] 옛 동독 지역이 출산율 회복한 이유는?

    김상호 광주과학기술원 교수·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합계출산율’ 0.72명이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지난해 4분기 출산율은 0.65명으로 0.7명 선이 처음 무너졌고, 지난해 출생아 수는 23만명으로 급감했다. 2025년 출산율 전망치를 0.65명으로 발표하면서 초저출산 시대가 상수가 되고 있다.   출산은 종합예술처럼 다양한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출산율은 그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 및 경제 상황 등의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기원전 로마에서도 여성이 노예의 도움을 받아 독신 생활을 즐기고 출산하지 않던 풍조가 있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 초대 황제는 출산하지 않는 50세 이상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셋째 아이를 낳을 때까지 ‘독신세’를 부과했다.     ■  「 젊은 세대에 결혼·출산은 사치 출산율 단기 반등할 묘수 없어 가족 행복 정책이 저출산 해법 」    [일러스트=김회룡] 동독의 출산율은 독일이 통일된 1990년에 1.52명에서 1991년에는 0.98로 급락하더니 이후 지속적으로 떨어져 1994년에는 통일 당시의 절반 수준인 0.77명까지 감소했다. 그러나 이후 꾸준히 상승해 지금은 동독 지역이 옛 서독 지역과 비슷한 1.5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동독 주민은 통일 충격에 적응하기 위해 미래를 위한 투자인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했고, 체제 전환 이후 불확실성이 사라지자 이전의 출산 행태로 돌아왔다.   지금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는 개인 행복을 중시하도록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마저 겹치면서 결혼을 늦추거나 포기하는 청년이 늘고 있다. 결혼해도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렵고, 자녀가 행복한 사회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출산을 더 기피한다.   취업과 승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경쟁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은 많은 젊은이에게 ‘꿈 같은 사치품’으로 여겨진다. 희망하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필요한 학력과 ‘스펙’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다 보니 취업 연령이 늦어져 결혼해도 만혼으로 인한 난임 문제에 직면하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노동시장과 주택시장, 교육 환경이 악화한 사실을 고려하면 최근의 초저출산 현상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안타깝지만 출산율 하락을 단기간에 반등시킬 묘수는 사실상 없다. 지방자치단체의 출산 지원금 같은 현금 살포 정책의 효과도 제한적이다. 끝없는 출산율 하락을 반등시키려면 출산 친화적 사회를 구축하고 젊은 세대의 출산에 대한 인식이 변하도록 저출산 대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출산에 직접 영향을 주려는 단기적 정책에서 탈피해 출산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장기적 관점의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 저출산 정책을 가족정책이나 가족행복정책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선진국에서 저출산정책 대신 가족정책을 통해 인구정책 목표를 추구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독일의 가족정책을 보면 4대 목표는 가족의 경제적 안정과 사회 참여, 일·가정 양립, 자녀의 안녕과 지원, 자녀 소망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환경 조성이다. 가족 행복에 중요한 경제적 안정, 주거 안정, 차별 해소 및 자녀 행복 증진을 통해 출산을 간접적으로 유인한다.   최근 한국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일부 기업의 출산장려금 지원 소식에 많은 국민이 환호하지만, 일·가정 양립을 실현하기 위한 기업의 적극적 참여가 출산장려금보다 출산율 회복에 더 중요하다. 육아 휴직 사용을 보편화하고, 다양한 형태의 근로를 확산하며, 장시간 야근 관행을 개선하는 등 기업의 협조가 요청된다.   정부도 출산의 기회비용이 낮아지도록 출산 전후의 휴가 사각지대를 축소하고, 공공보육시설을 확충하며, 육아 휴직 급여 대상과 급여를 인상해야 한다. 사회 이동성 제고를 위해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격차를 축소하고, 주거 문제를 개선하며, 대학 구조조정과 부실한 전공 교육 개선을 통해 취업 연령을 낮춰야 한다.   초저출산을 극복하려면 사회 환경을 출산 친화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출산과 밀접하게 연관된 정부 부처, 기업, 언론 및 시민사회단체 등의 참여와 협력이 필요하다. 총리 또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책임감을 갖고 출산 정책을 총괄·조정하면서 현실성 있는 정책을 발굴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조직을 대폭 개편할 것을 제안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상호 광주과학기술원 교수·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

    2024.03.08 00:28

  • [시론] 제 역할 못하는 사외이사 제도 이대로 좋은가

    이종섭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한국경제의 놀라운 성장과 역동성에 국내외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과거의 양적 성장도 놀랍지만 각 분야에서 감지되는 미래의 가능성도 흥미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통적인 제조와 서비스의 탄탄한 기반 위에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부문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줬고 지금은 디지털과 바이오, 우주·항공까지 최첨단 산업전선에서 수많은 기업과 기업가들이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우려와 비판의 시각도 만만치 않다. 수많은 규제와 반(反)시장적 정서가 결국 성장의 걸림돌이 될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투자의 극단적 쏠림 같은 자본시장의 문제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고급 두뇌 공급의 한계, 산업 인력 부족, 지정학적 리스크와 한계 등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  「 사외이사의 감독 역할 기대 이하 내부자거래 의혹 경영진 추천도 거수기 넘어 실질적 독립성 필요 」    [일러스트=김회룡] 기업 스스로 발목을 묶고 있는 족쇄도 있다. 지배구조 문제다. 취약한 지배구조가 결국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지적이 줄곧 나오는데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오랫동안 비난과 경계의 대상이던 대주주 경영의 부작용은 다양한 제동 장치를 통해 걸러지고 있지만, 기업 지배구조의 핵심인 이사회의 기능은 제대로 작동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사회는 크게 경영진의 경영 행위에 관한 감독과 조언을 담당한다. 전자는 독립성을 지닌 사외이사의 활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다. 2000년대 초 미국에서는 엔론과 월드컴의 회계 부정 사태로 인해 기업 이사회의 내부 감시 기능 실패가 큰 이슈가 됐다. 그 사건을 계기로 자본시장 선진국인 미국에서 2002년 회계 개혁을 위한 ‘사베인스-옥슬리 법(SOX)’을 제정했고, 이를 통해 이사회의 독립성을 기업의 가장 중요한 상장기준으로 지정하는 동기가 됐다.   한국에서는 이사회 기능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이 있었을까. 국내에도 1996년 사외이사 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이 제도는 지금 제대로 숨을 쉬고 있을까. 사외이사 중심으로 운영하는 이사회를 겪어본 전문가들과 투자자들의 대답은 대체로 싸늘하다. 이사회 구성원의 능력이나 열정도 문제이지만, 독립적 감독자로서 이사들의 역할 인식이 주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뼈아프다.   필자는 십 년 전 재무경제학 최고 권위 학술지에 단순하지만 중요한 이사회의 독립성에 관한 논문을 기고했다. 이사회의 구성과 운영에서 눈에 보이는 사전적 독립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이들의 사후적 독립성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Birds of a Feather’. 즉, 초록은 동색이다. 함께 이해관계를 나누는 사이에 이사회의 독립성은 사후적으로 심각하게 훼손되기 쉽다. 경영진과 잦은 내부 교감을 통해 사외이사의 사후적 독립성이 훼손된다면 이는 주주가치 제고에 직접적 걸림돌이 된다.   최근 사령탑 교체가 진행된 포스코홀딩스를 보면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자사주 매입을 앞두고 내부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가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이사회든, 개인이사든 모를 리 없다. 2022년 12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조차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해 관련 법 개정으로 자사주 거래에 관한 이사회의 정보 공시 기준을 강화했다.   그런데 내부자거래 의혹으로 신뢰에 금이 간 경영진을 이들이 선택한 사외이사로 구성된 추천위원회가 또다시 사령탑으로 추천했고, 이사회는 순식간에 추천을 받아들였다. 초일류 기업을 지향하는 기업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금융기관과 달리 감독기관조차 없는 포스코에서 무엇보다 주주의 75% 이상이 소액주주인 기업에서 이사회의 임무는 막중하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독립성의 잣대는 다른 기업보다 더 매서워야 한다. 그런데 포스코에서 그 기능은 지금 정지된 듯싶다.   주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할 마지막 보루인 이사회가 그 역할을 포기하면 그 기업에 더 이상 안전장치는 없다. 이사회가 거수기 수준을 넘어 경영진의 보호막이 되는 상황은 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고, 기업 스스로 선택한 운영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 원인이 어느 쪽이든 형식적인 독립성을 넘어 이사회는 실질적 독립성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소액주주뿐 아니라 대주주 모두에게 더 가치 있는 기업 밸류업(Value-up)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종섭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2024.03.07 00:26

  • [시론] 수능의 ‘심화수학’ 배제, 부정적이기만 할까

    강윤구 이투스에듀 수학 강사 202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수학 영역에서 ‘심화수학(미적분Ⅱ+기하)’이 제외된 여진이 여전하다. 수학 관련 학회와 고교·대학에서 수험생의 수학 역량이 예전보다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들린다. 필자는 직업이 사교육 강사이지만, 심화수학을 수능에 포함하는 것만이 학생들의 수학 역량 향상을 위한 정답인지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다.   고교 교육 과정에서 수학 과목의 교육 목표는 미적분Ⅱ와 기하를 잘하는 수학적 인재를 양성하는 것만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고,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태도를 만드는 것 또한 교육 과정의 중요한 목표다.     ■  「 수능 포함이 곧 역량 향상은 아냐 논리적 사고력 키우는 것이 핵심 천천히 제대로 공부하게 해줘야 」    시론 이는 아무리 수능이라고 해도 단순히 대학에서 학업적 성취만을 생각해서 과목을 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의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할 학생들에게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더 큰 목표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교육 과정과 수능 과목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지금 수학 교육의 상황은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수업 시수는 정해져 있지만 학습해야 하는 수학 지식이 많다 보니 속도가 느린 학생들은 철저하게 배제된 채로 수학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수학 교과목의 특성상 한번 낙오한 학생은 사교육을 받지 않는 이상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는 진도를 따라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교육과정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소수의 학생만을 챙기는 교육보다는 학습이 느린 학생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주고 원리를 이해할 기회를 주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지 않을까.   교육 과정은 상위권 학생들의 더 나은 성취에 집중하는 것만이 아니다. ‘수포자’로 불리는 중하위권 학생들을 위한 학습 기회를 마련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전체적인 학습량을 줄이고 학업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   즉, 심화수학을 수능에서 배제하는 것은 공부하지 말라는 취지가 아니다. 수능이라는 시험에서 벗어나 여유 있게, 수학적 본질에 가깝게, 천천히 제대로 수학을 공부하라는 의도라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학생이 수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고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을 학습한다면, 미적분Ⅱ와 기하라는 수학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교육 효과가 클 것이다.   심화수학의 선택 과목 배제는 단순히 수포자만 배려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위권 학생에게도 긍정적 효과를 줄 수 있다. 사실 상위권 학생들의 수학 실력은 어떤가. 답은 낼 수 있어도, 이유를 서술하라고 하면 제대로 못 낸다. 반복된 문제 풀이로 문제 유형별로 줄줄 암기해 ‘이렇게 풀면 될 것 같다’고 예측할 뿐 진정한 수학적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다.   상위권 학생들도 지식학습의 부담감을 줄이는 대신 더 많이 생각하게 하고, 더 자세하게 학습하도록 유도하자. 이렇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운 이후 대학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수 있다.   단순히 수능 과목으로 지정해야만 학생들이 심화수학을 공부할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일차원적인 사고다. 앞으로 도입될 고교학점제와 연계해 생각해보면 수능에서 심화수학을 배제하는 것이 오히려 미적분Ⅱ와 기하의 이수 기회를 제공하고 학습을 독려하는 측면도 기대할 수 있다.   수능에서 심화수학을 선택 과목으로 도입한다면, 학생들은 수능 준비 부담감이 매우 클 것이다. 이와 달리 수능 부담감을 덜어낸다면, 자신이 원하는 진로에 맞는 수학 공부를 더 성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과 진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고 대학에서 자기 전공을 학습할 기초 능력을 키우는 발판을 마련해 줄 것이다.   미적분Ⅱ와 기하 관련 지식은 수학의 본질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학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대학에서 입학 전 교육 또는 기초 수학 등의 과목으로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 대학의 편의만을 위해 교육 과정과 수능 과목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본질에 집중해 학생의 능력 향상을 위해 교육 과정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 필자는 수학 전공자로서 심화수학 배제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윤구 이투스에듀 수학 강사

    2024.03.06 00:24

  • [시론] 의대 증원 ‘2000명의 늪’ 벗어나 대화로 풀자

    박순우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장 지금 의료계가 의대 증원 ‘2000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전공의와 의과대학생은 병원과 학교 밖을 떠돌고 있다. 수련의들이 새 연차 근무를, 학생들은 새 학년을 시작해야 하는데도 텅 빈 강의실과 허전한 병원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자책감이 든다.   문제의 근원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별 의대 정원 신청 현황이 발표되면 사태는 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대화와 타협의 자리가 시급하다. 그래야만 전공의와 학생이 병원과 학교로 돌아오도록 설득할 명분이 만들어진다. 환자나 교실을 떠나서 마음이 편할 전공의와 학생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일상 복귀를 누구보다 더 원하고 있다.     ■  「 새학기인데 병실·강의실 텅 비어 증원 2000명 논리적 근거 불명확 정부의 포용력, 민주적 접근 기대 」    시론 원만한 타협을 위해 정부는 2000명 증원의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해명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껏 수긍할 정도로 명쾌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세 가지 보고서’에 근거했다고 했으나 해당 연구자들은 매년 1000명을 늘려 10년간 유지하거나, 매년 5~7% 누적 방식으로 늘리자고 제안했다고 공개했다.   그러자 정부는 지난해 대학별로 조사했던 수요 조사(‘증원 희망 인원’)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그 조사 과정에 총장·재단 등 외부 압력이 얼마나 작용했는지, 대학 측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증원 희망 인원’으로 국가 대사인 의사 수 증원의 근거로 삼는 것의 부당함은 보건복지부에서도 잘 알 것이다.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에서 교육 부실 가능성을 제기하니 정부는 1980년대 졸업 정원제 시절의 정원을 거론했다. 당시 의과대학 교육이 얼마나 파행적이었고 ‘흑역사’로 남아있는지 모를 리 없는데 말이다. 논리가 궁색함이 느껴진다.   증원 규모가 결정된 다음에는 구체적인 배분 방안이 있어야 한다. 정부는 배분 원칙에 비수도권, 소규모 의대, 지역 필수의료, 교육 역량 등을 고려한다고 하더니 실제로는 지역, 학교 규모, 국립과 사립 등에 따른 구분 없이 대학 임의로 정원 신청을 하도록 했다.   수요조사를 했으면 이를 바탕으로 특성별·지역별로 안배하고 조정한 다음에 대학별 수용역량을 파악하고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배분 원칙과 관계없이 일단 2000명을 채우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책임을 대학에 미루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의혹이 든다.   앞으로 몇 년 내에 6600병상 이상의 대학병원 분원이 수도권에 신설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의사 증원 계획이 이들 병원에 필요한 인력을 확충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다. 이것이 정부의 의도는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국립대 병원 교수를 3년 이내에 1000명 더 늘리겠다고 한다. 기존 기금교수 등을 정교수로 전환하겠다는데 그 빈자리는 어떻게 메우겠다는 것인가. 결국 사립 의대 교수들이 이동하게 될 텐데 이는 지금도 교수 확보가 어려운 지방 사립대 병원의 진료 역량이나 학생 교육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비수도권 의과대학 27개 중 70%에 가까운 18개가 사립대인데 그 비중과 역할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이 지역의료 강화와 어떻게 부합하는지도 의문이다.   한번 늘린 의사 수를 다시 줄이기는 쉽지 않다. 자칫하면 이공계 붕괴 등 국가 위기로 갈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현행 의과대학 정원(3058명)의 65%를 한꺼번에 증원하면 교육 현장에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의예과 2년의 준비 기간이 있다는데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의예과 폐지와 함께 6년제 교육과정을 준비하고 있고, 이미 적잖은 대학에서 의예과에 의학과(본과)의 필수과목을 개설하고 있다.   2000명이라는 숫자가 왜 이렇게 정부의 금과옥조나 불가침의 성역이 됐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대화의 문을 차단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인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일단 2000명의 늪에서 벗어나 정부와 의사 측 모두 열린 마음으로 양보하고 대화와 타협의 길로 나서자. 학생과 전공의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 그들도 대한민국의 자녀이고 국민의 건강을 짊어질 미래다. 압수수색과 구속, 면허정지·면허취소 등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정부의 담대한 리더십과 포용력, 그리고 합리적·민주적 접근을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순우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장 

    2024.03.05 00:52